‘우리 집의 제일 높은 곳 조그만 다락방. 넓고 큰 방도 있지만 난 그곳이 좋아요. 높푸른 하늘 품에 안겨져 있는 뾰족지붕 나의 다락방 나의 보금자리.’ 1970년대 활동했던 혼성 포크 듀오 ‘논두렁밭두렁’의 대표곡 ‘다락방’의 가사다. 이 노래를 알고 있다면 그들이 부부였다는 걸 기억할 테다. 두 사람은 부부의 연으로 가꾼 보금자리에서 더 많은 인연을 보듬어 가족으로 맞았다. 남편 김은광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아내 윤설희는 여전히 그 보금자리에 남아 사랑의 온기를 더하고 있다.
‘다락방’을 비롯해 ‘외할머니댁’, ‘영상’ 등의 곡으로 사랑받았던 논두렁밭두렁. 종종 방송이나 무대에 나오긴 했지만, 이전처럼 활발한 소식을 듣긴 어려웠던 그들이다. 가수로서의 행보는 그러하나, 사실 부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온 터였다. 쉼 없는 지난날을 한눈에 보여주는 건 아내 윤설희 작은도서관 더브릿지 관장의 SNS 프로필이다. 논두렁밭두렁 멤버로 시작해 다리The Bridge청소년사업가지원센터 센터장, 사단법인 땡큐 이사장, 별빛내리는마을과 봄채 아동 그룹홈 설립자, 사랑하는교회 목사 그리고 작은도서관 더브릿지 관장까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음악학원과 24시 어린이집도 운영했다. 그런데 음악학원을 제외하면 가수와 연계된 활동은 찾아보기 어렵다. 가수였던 그들이 이렇듯 의외의(?) 근황을 알리게 된 데에는 아내 윤 관장의 뜻이 컸단다.
“첫딸을 낳고 가수 활동은 그만뒀어요. 어려서부터 꿈이 현모양처나 교사였는데, 그 영향인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보면 어떨까 싶더군요. 작은 기타 학원을 운영하다가 종합적으로 음악 교육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연 방송음악학원이 꽤 인기를 끌었는데, 어느 날 보니 엄마들 사이에서 ‘값비싼 학원’으로 알려져 있더라고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짜느라 스무 명 넘는 강사를 초빙한 데다 건물 임대료까지 냈으니, 교육 원가 대비 수업료가 높지는 않았거든요. 어쨌거나 내가 원했던 결과는 아니었어요. 차라리 어린이집을 운영하면 국가의 보조를 받아 더 부담 없는 환경에서 아이들을 교육하지 않을까 싶었죠. 그렇게 어린이집을 열게 됐습니다.”
갈 곳 없는 아이들, 보금자리를 내어주다
어린이집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다. 가장들은 회사 밖으로 내몰렸고, 집집마다 재정난에 시달렸다.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당시 그런 현실의 아픔을 고스란히 마주했던 윤 관장이다.
“IMF로 해체되는 가정이 늘어가는 걸 실감했어요. 낮뿐 아니라 밤에도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생겨났죠. 그러면서 24시 어린이집을 떠올렸는데, 막상 우리나라에 몇 곳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지방 공연을 다니면서 아이들 맡기는 문제로 고민했던 경험이 있던지라 고충을 해결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24시 어린이집을 개원했습니다. 당시 벼룩시장에 ‘무료탁아상담’이라는 1단짜리 광고도 냈죠. 말 그대로 무료로 탁아 상담을 했는데, 그러면서 정말 많은 가정에 어려움이 있다는 걸 한 번 더 알게 됐습니다.”
그나마 24시 어린이집에라도 오는 아이들은 다행이었다. 그곳마저 다닐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 도망 나온 엄마와 아기, 생활고로 조부모에게 떠맡겨진 손주들, 호적도 없이 버려진 신생아까지. 저마다 딱한 사정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논두렁밭두렁 부부는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에게 자신의 보금자리를 내어주기로 결정했다.
“2000년 6월이었어요. 미혼모의 아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전국 곳곳에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는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러면서 그게 바로 ‘그룹홈’이라는 걸 알게 됐죠. 2003년에 ‘별빛내리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아동 그룹홈을 설립했고, 10년 후인 2013년엔 여자 아동 그룹홈 ‘봄채’를 설립했습니다. 만든 두 개의 그룹홈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어요.”
2000년 초만 해도 그룹홈이란 개념은 생소했다. 국내에 많지 않은 그룹홈을 운영하는 이들은 대체로 종교인이었는데, 법적 근거가 부족해 이렇다 할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다 2010년대에 이르러 아동공동생활가정(그룹홈) 발전 및 지원에 관한 조례 통과, 아동복지법 개정 등을 통해 관련 지원책들이 속속 생겨났다. 아직도 사회적으로 관심과 지원이 더 필요하지만, 과거 불모지 같았던 때를 생각하면 그나마 형편이 나아진 셈이다. 제 가정도 돌보기 어려웠던 시절, 숱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남편 사업이 부도가 나서 정말 먹고살기 힘든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크게 어렵다고 느끼진 못했던 것 같아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어 행복했죠. 나만 헌신한다고 여겼으면 여태껏 오래 해올 수 없었을 거예요. 결국은 나에게도 보탬이 되고 즐거운 일이었던 거죠. 요 며칠도 하루 세 시간 자고 밤을 꼴딱 새고 하면서 일을 했는데, 피곤하긴 했지만 기쁨이 더 컸어요. 막상 제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건 얼마 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아이들을 통해 성장했고, 많은 걸 이뤘죠. 결국 그 원동력은 이타심보다는 자기실현에 가까웠다고 봐요.”
남편의 유작 ‘사랑해봤나’를 완성하며
여러 아이를 돌봐야 하는 고단한 상황에서도 가장 큰 힘이 돼준 건 남편인 가수 故 김은광이었다. 오래오래 그들의 보금자리에 함께 머물렀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는 2010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진단을 받고 1년 만에 이별을 겪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슬퍼할 새도 없이 아이들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던 윤 관장이다. 그러다 한 번씩 불현듯 찾아오는 남편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다.
“부랴부랴 애들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나면 그제야 제정신이 들더라고요. 그러면 한바탕 울고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이들 챙기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한번은 운전하고 가는데 길을 잘 모르겠는 거예요. 이럴 때 남편이 있었으면 당장 전화해서 물어봤을 텐데, 그럼 그이가 이렇게 저렇게 가라고 설명해줬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았어요. 부부는 반쪽이라고 하는데 그 이상이었구나, 적어도 3분의 2쯤은 되겠구나, 다 내가 해온 일이라 생각했는데 우리 남편 몫이 참 컸구나, 부부가 함께한다는 건 되게 좋은 거였구나 깨달은 거죠. 요즘도 그렇게 불쑥불쑥 남편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최근 윤 관장은 남편의 유작을 하나 발견했다. 연필로 적은 악보였다. 논두렁밭두렁의 노래는 남편이 작곡, 아내가 작사하곤 했는데, 남편이 생전 작곡해둔 노트를 찾은 것이다. 함께 노래하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좋은 노래는 듣자마자 좋은 가사가 생각나곤 했다. 남편의 악보를 피아노로 치다 보니 순간 가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사가 지어졌고, ‘사랑해봤나’라는 제목의 곡이 완성됐다.
“‘사랑해봤나’ 가사는 그런 내용이에요. 청춘이 빛났던 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랑의 기억이 있기에 어쩌면 우리는 더 사랑을 원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곡을 지었고, 곧 음원으로도 공개할 예정입니다. 다가오는 4월에는 완성된 곡으로 남편을 위한 추모 공연을 열려고 해요. 근데 한번 불러보니까 음역대가 제가 소화하긴 어렵겠더라고요. 그래서 동생(가수 윤설하)에게 부르라고 했더니 사랑 얘기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고사하더군요. 그래서 결국 제가 부르게 됐어요. 저도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지만, 남편을 생각하면서 최대한 잘 불러보려 합니다.”
아이들아, 언제든 편히 찾아오렴
남편의 추모 공연은 그룹홈이 있는 건물 지하의 소리 소극장에서 열린다. 같은 건물에 더브릿지 작은도서관이 있는데, 이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건 그룹홈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우리 애들이 보면 친구가 없더라고요. 학교 가면 엄마 아빠에 대해 얘기할 경우가 많은데 그런 걸 못 하니까. 그러다 보니 자꾸 위축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마침 여기저기서 후원받은 책도 많겠다, 이걸 잘 모아서 지역사회와 공유하면 어떨까 싶더라고요. 작은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아이들과 주민분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교류하길 바랐죠.”
소극장과 작은도서관, 교회와 그룹홈까지 모두 한 건물에 있다 보니 간혹 윤 관장을 건물주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지원금과 후원금이 있긴 하지만, 공간을 유지하고 식솔들을 챙기려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윤 관장은 또 다른 형태의 그룹홈을 꿈꾸고 있었다. 바로 노인들을 위한 그룹홈이다.
“제가 부모 역할을 하지만 많이 부족했죠. 아이들 하나하나 눈 맞추고 마음을 어루만져줘야 하는데, 지원금이나 행정적인 업무들 처리하느라 서류 만지는 시간이 많았던 것 같아요. 아이들도 누군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다 든 생각이 외롭게 홀로 계시는 어르신들을 위한 그룹홈을 만들고, 아이들과 교류하도록 하면 어떨까 한 거죠. 아이들 수만큼 어르신들이 있다면 저마다 충분히 사랑을 독차지할 테니까요. 가능하다면 언젠가 마당 있는 넓은 집을 마련해 그런 꿈을 이뤄보고 싶습니다.”
‘남들이 다 하는 일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자’라는 포부로 지난 20여 년을 달려왔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 비로소 아름다운 세상이라 믿으며, 그런 아름다운 세상에서 더불어 살기를 희망하며 남은 인생도 지금처럼 살아가리라 다짐해본다. 올해로 칠순, 윤 관장 개인만을 생각한 노후의 꿈은 없을지 궁금했다.
“글쎄요. 지금처럼 계속 일하는 게 곧 노후의 꿈이자 준비 아닐까요. 요즘도 그룹홈 아이들을 대형 승합차에 태우고 여행도 다니고 하거든요. 그런 걸 보면 친구들이 이제 힘들 텐데 일을 그만하라 하죠. 근데 저는 오히려 일을 취미로 한다는 기분이에요. 지금이야 여러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말 늙어서 뭘 못 하겠다 싶은 때가 오더라도 작은도서관 관장은 하려 해요.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도서관 귀퉁이 어딘가에 앉아 책 읽고 있으려고요.(웃음) 한편으론 그룹홈을 떠난 아이들이 종종 찾아오길 바라죠. 이번 설날에도 혹시나 해서 세뱃돈 챙겨 기다렸는데 많이 오지는 않더라고요. 물론 찾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형편도 이해합니다. 다만 살면서 힘들고 외로운 순간, 늘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그녀는 일종의 구원이었다.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여러 모임에 끌려다녔던 시절, 자리에 빈 병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신입생은 순서대로 일어나 노래를 한 곡씩 뽑아야 했다. 흥이 나는 노래는 잘 몰랐지만, 평소 즐기는 노래가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당신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인연은 인생의 주요한 길목에서 계속 힘이 되어줬다. 어려서는 이 노래의 주인이 누구인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가수 이자연을 만나기로 했을 때, 혼란스러웠던 시절 힘이 되어주었던 이 노래에 대한 감사 표시는 하고 싶었다. 그간의 도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이자연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발견한 한 가지 특징은 바로 ‘가족’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그 애틋한 마음을 오래 품고 살아서인지, 그녀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을 가족에 비유하기를 즐겼다.
형제애로 다져진 나훈아와의 인연
일본에서 활동할 때 NHK 한국어 프로그램 출연의 계기가 된 재일교포 민단에서 활동하던 언론인을 ‘일본 아버지’라고 부른다. ‘일본 엄마’는 두 분이나 계신다. 4년간이나 이어졌던 일본 생활에 힘이 됐던 사람들이다. 아직 생존해 계신 일본 엄마는 여전히 안부를 챙길 정도다.
또 다른 가족 중에는 가요계의 거목 ‘나훈아’가 있다. 그녀는 “아마 전생에 형제였을 것”이라 표현한다.
“1982년 길옥윤 선생님 소개로 한일친선협회 일본 공연에 합류하게 됐어요. 거기서 나훈아 선배님을 처음 알게 되었고요. 무명이었던 제가 두 분께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나중엔 선배님과 반반씩 나눠 공연할 정도가 됐으니까요. 나훈아 선배님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많은 빚을 지고 있죠.”
일본 공연이 끝나던 1986년 이자연은 나훈아에게 큰 선물을 받았다. 온 국민이 손뼉 치며 불렀던 그 노래 ‘당신의 의미’다. 애초에 이 곡은 나훈아가 1969년 발표했던 ‘내 당신’이 원곡이다. 개사를 거치고 제목까지 바뀌었으니 ‘감히 나훈아의 곡을 개사했다’는 오해도 받았다.
“처음엔 신곡인 줄 알았어요. 나훈아 선배님이 주신 곡이라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죠. 이 곡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개사된 곡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죠. 선배님이 여자 노래로 가사를 바꿨다고 설명해주시더라고요.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받아서, 나중엔 ‘내가 더 잘 불렀다’고 농을 할 수도 있었어요.”
실제로 나훈아와의 인연은 그녀가 ‘가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사나이 눈물’ 역시 나훈아가 불렀던 곡을 다시 받아 발표한 것이고. ‘서울나그네’는 나훈아가 작곡한 다음 날 이자연에게 곡을 소개했다가 주인이 바뀌었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빼앗다시피 졸라 곡을 얻어왔다”고 표현했다. 이자연의 곡 ‘만남과 이별’, ‘백세시대’, ‘친구야’를 만든 작곡가 박성훈도 나훈아를 통해 알게 된 인연이다.
“남들은 선배님 얼굴 한 번 보려고 티켓 구하느라 분주하고 암표도 사는데 저는 옆에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어 늘 감사해요. 대한가수협회 회장이 되고 나서 인사드리러 갔을 때는 협회 발전기금까지 주셨으니까요. 선배님의 제자로 데뷔 때부터 계속 도움만 받으며 살고 있어요. 선배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살아요.(웃음)”
잊지 못할 인생의 버팀목, 아버지
그 많은 아빠와 엄마, 오빠와 언니 가운데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해주는 기둥이 한 사람 있다. 진짜 가족, 바로 아버지다. 그녀가 중학생 신분으로 1973년과 1974년 지역 MBC와 KBS 노래자랑에서 최고상을 연이어 수상하고, 음반 취입까지 이뤄졌을 때 아버지는 한탄했다. 자신의 딸이 딴따라가 돼서도 아니고, 당신이 희망하는 직업을 갖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저 자식의 재능이 빛나는 분야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맘껏 지원해줄 수도, 맘 편히 응원할 수도 없어서 한스러웠다.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걱정은 어느 날 현실이 됐다. 성인이 된 이자연의 가수 선언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활동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죠. 늘 무대를 꿈꾸던 소녀였으니 제안을 마다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죠. 1년만 하게 해달라고. 그 후에는 진학을 하든 시집을 가든 아버지 뜻에 따르겠다고 설득했어요.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을 얻어 야간업소를 시작으로 무대를 찾아다녔죠.”
하지만 그 1년이라는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딸은 늘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딸이 되겠다’며 고집스럽게 맹세를 이어갔지만,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이 상황을 변화시켰다. 이자연은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됐고, 가수 생활로 동생 네 명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전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았어요. 아버진 소년 시절부터 동네에서 노래 잘하기로 유명했는데, 동네의 열성 팬 중에 외할머니도 있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점찍어놓고 어머니와 결혼시켰어요.(웃음) 아버지는 재능을 펼쳐볼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대신 저를 내보내신 것 같아요. 노래할 때 고음에 다다르면 아버지 목소리가 나와요. 어릴 때 듣던 그 목소리 말이에요.”
꼬마 이자연은 일터에 나가는 아버지를 꼬리처럼 따라다녔다. 그 자리에서 노동요처럼 불렸던 ‘황성옛터’나 ‘번지 없는 주막’을 배웠다. 또 아버지가 좋아하던 ‘새타령’이나 ‘릴리리아’ 같은 민요도 함께 불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들을 사이좋은 부녀는 함께 불렀고, 아버지의 노래가 좋았던 소녀는 가수의 꿈을 키웠다. 이 곡들은 이자연이 자신의 노래가 많지 않던 신인 시절 공연의 레퍼토리로 쓰였다.
“콘서트에서 이 곡들을 부를 때는 기타나 아코디언 하나만 놓고 무대를 꾸며요. 조용한 반주 속에 노래하다 보면 하늘에서 아버지가 들어주실 것 같은 기분이 들죠. 그러다 보면 자꾸 눈물도 나고요. 요즘엔 공연 전에 아버지를 향해 ‘파이팅’을 외치며 무대에 오르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MZ세대와 동기동창이 되다
“나 학교를 다녀볼까?” 언니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동생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라에 연이어 국장이 생기며 설 무대가 사라진 언니가 궁핍해졌나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네 명의 동생은 가수 언니를 후광 삼아 대학도 나오고 출세를 했는데, 정작 본인은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러다 늦은 나이지만 배움을 시작하겠다 선언한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자매는 쉬지 않고 눈물을 훔쳤다.
늦은 나이에 배움의 한을 풀기 위해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학부생부터 차근차근 제대로 절차를 밟아나가는 이는 찾기 힘들다. 이자연은 정공법을 택했다. EBS 교재를 손에 잡고 방송 수업으로 기초부터 공부했다.
“처음엔 당연히 어려웠죠.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고. 기초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냥 무작정 반복해서 수업을 듣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요. 나중엔 선생님 농담까지 외워지더라고요. 쉰 살이 넘자 공부를 제대로 못 한 것이 늘 아버지에게 죄스러웠는데, 학교에 들어가니 맘이 놓이더라고요.”
그렇게 2011년 건국대학교 예술문화대학 예술학부에 합격했다. 이자연의 11학번 동기들은 그 면면이 화려하다. BTS의 진과 배우 이종석이 대표적이다. 선배로는 샤이니의 민호, 배우 고경표가 있다. 이자연은 소속사도 없던 신입생 시절의 모습이 강렬한지 아직도 BTS 진을 ‘석진이’라고 부른다.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 신입생 두 사람이 와서 말을 걸어주었어요. 그때 건네준 한마디가 제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그 친구들은 모를 겁니다. 어딘가에서 제 노래를 실컷 불러놓고는 ‘열창했다’며 너스레를 떨 때는 친동생처럼 귀여워요. 아이들이 제게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제 노래 덕분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렇게 노래가 새로운 인연을 더 깊게 만들어줄 때마다 노래의 힘을 느껴요.”
이후 이자연은 대학원까지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도 그녀답다. ‘TV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대중가요의 특성에 관한 연구 : KBS 를 중심으로’라는 다소 긴 제목의 이 연구는 가요무대에 등장한 곡들을 통해, 시기마다 사랑받은 노래들이 어떤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지 연구했다. KBS의 도움을 받아 30년이 넘는 기간을 모조리 살폈다.
“우리 대중가요는 역사적 큰 사건을 기점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노래가 많아요. 일제강점기에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한국전쟁 때는 가족을 찾는 식이죠. 역사 속에서 우리 가요가 어떻게 사랑받았는지 보면서 대중가요의 사회적 역할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죠.”
가요계 보살피는 어머니로
최초의 여성 대한가수협회장. 그녀를 장식하는 또 다른 수식어다. 2018년 갑자기 공석이 된 회장직을 선출하기 위해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부회장이었던 이자연이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당시 비대위의 좌장 격이었던 협회 명예회장 남진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또다시 소녀 가장 생활을 시작하느냐고. 그 얘기를 들으니까 오히려 용기가 생겼어요. 그냥 집에서 내 살림하듯이 꾸려나가면 되겠구나 하는 용기가 나더라고요. 내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더 쉬워졌어요. 그래서 겁 없이 정부 기관부터 시작해 다양한 분야의 분들을 만나러 다녔죠. 그렇게 움직이다 보니 하나둘씩 결과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살림 실력이 좋았던 덕일까. 대한가수협회는 창립 64년 만에 지정기부단체로 지정받는다. 협회 후원 확보에 날개를 단 셈이다. 코로나19로 설 곳이 없어진 후배들을 위한 예산 마련에도 힘썼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전국민 희망콘서트’, ‘전국 TOP 가요쇼’ 같은 무대를 만들었다. 사라진 무대를 직접 되살린 셈이다.
“‘전국민 희망콘서트’는 드라이브스루 형식으로도 진행됐어요. 코로나19 상황에서 팬과 가수가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었죠. 300여 대의 차량이 제천 활주로를 가득 메운 가운데 신나는 리듬에 차들이 들썩거리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어요.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폭발적이었죠. 무대가 그리웠던 가수만큼이나 팬들 역시 우리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이자연은 지난 9월 대한가수협회 제7대 회장으로 연임이 확정됐다. 그녀의 왕성한 활동이 인정받은 것이다. 이제 그녀의 관심은 협회의 새로운 사업 분야인 역사를 담을 그릇에 집중되어 있다.
“얼마 전 이미자 선생님이 이사하시면서 공간 문제로 개인적인 자료를 한 트럭 가까이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땅을 쳤어요. 이런 경우를 흔히 봐요. 스타 선배님이 돌아가시면 남겨진 유품은 모두 개인이 소장해버리고, 나중에 공익적인 목적으로 확보하려고 해도 큰돈이 들죠. 협회 차원의 ‘박물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료들을 확보해놓을 수 있는 자료실 정도는 만들고 싶어요.”
가요계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걱정은 많은 변화를 이뤄낼 것이다. 이렇듯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간 그녀가 인생의 과정에서 보여준 많은 결과와 성과가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자연이 좋아하는 가족에 빗대 표현하자면, 이제 그녀는 가요계에서 어머니 역할을 해나가는 중이다. 트로트라는 고질적인 명칭 문제에서부터, 협회 회원 자격 기준 정리, 신인 전통가요 가수가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 원곡 가수의 권리 보호에 관한 문제까지, 그녀의 관심사는 넓고 깊다. 가요계 구석구석 어머니의 마음이 미치고 있다.
그저 푹 빠져서 즐기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름의 격한 취미생활일 경우 부부라면 대부분 다른 한쪽에서는 뜯어말리는 걸 본다. 하지만 부부가 함께 한다면 문제가 없을 듯하다. 30년 넘도록 부부가 수집한 2만여 점의 예스러운 부엌세간이 전시된 덕포진 생활사 박물관에서 만난 김홍선 관장은 고개를 내젓는다.
"애초에 우리는 아내가 더 앞장섰지요. 이런 취미로 말년의 재미를 책임진다고 내게 큰소리쳤는데 이제 와서 보니 내가 사기를 당한 것 같다니까요. 하하... 이것 봐, 지금 고생은 나만 하잖아요."
고생이라고 말했지만 젊었던 시절의 취미로 이제는 느긋하게 누리는 부엌 전시관 앞에서 김포 덕포진의 가을 숲을 바라보는 그의 오늘을 들여다보았다.
"안 다녀본 데가 없어요. 장안평, 인사동, 황학동은 물론이고 직장 출장길에서도 찾아갔었고, 소문 따라 지방으로 쫓아가고 미친 듯이 모았거든. 점점 늘어나면서 창고를 임대해서 보관해 왔지요. 그러다가 자꾸 늘어나니까 감당이 안 되어서 말이지. 처음엔 지금의 이 건물을 지을까 말까 망설였어요. 짓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런데 창고에 보관하느라 지출되는 창고비용이 은행 이자와 별다르지 않아서 지었습니다.
사실 이런 박물관을 가지고 있다는 건 머리 아픈 일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모으는 사람들 중엔 부자도 있지만 그저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살면서 돈이 생기면 사러 다닙니다. 나는 그래서 그들에게 하지 말라고 해요. 하지만 못 말려요. 마약은 격리라도 시킬 테지만 이런 취미의 중독성은 마약보다 더합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어제 그거 샀어야 하는데 하면서 꿈에도 나타나는 통에 미친다니까요."
담백하고 따뜻한 언어 외할머니
그렇게 모아지고 쌓인 2만여 점의 생활용품들이 박물관 1층을 빼곡히 채웠다. 우리네 외할머니의 부엌에 있었음직한 무쇠솥부터 채반, 술을 내리던 소주고리, 맷돌, 도무지 용도나 이름조차 알 수도 없는 생활도구들이 방대하다.
"이건 도둑시루라고 하지, 시어머니가 무서우니까 몰래 먹으려고 요렇게 만들어진 떡시루인데... " 설명만으로도 재미있다. 귀중한 식수원이었던 우물통, 김치 양념 가는 돌확이나 자배기,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다는 호미와 가래, 갖가지 모양의 무쇠화로, 디딜방아, 맷돌과 어처구니, 주꾸미랑 문어 잡는 도구, 양푼, 참빗,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던 두레반의 정다움... 도구들과 연결된 이야기가 줄줄이 나온다. 온갖 부엌 살림살이들이 지방 특색이나 용도별 삶의 형태에 따른 이야기들로 흥미진진하다.
"연가라고 아는가" 묻기에 '비바람이 치는 바다 잔잔해져 오면~' 이런 노래를 흥얼댔더니 '연기의 집'이라며 투구처럼 생긴 옹기를 가리킨다. 이름 한 번 이쁘다. 그 틈에서 꽤 큰 장독 옆구리를 한 땀 한 땀 꿰맨 모습이 지금으로선 새로운 디자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일회성이 판치는 세상에 꿰매서 썼던 장독의 세월을 그려본다. 천년 이상 땅 속에 묻혀있었다는 옹관, 물때가 끼지 않는 숨 쉬는 옛 옹기의 현상, 은행잎으로 섬세한 무늬를 놓은 토기 장인들의 섬세함, 옹기장이 이야기를 소설처럼 들었다.
지금은 사라져 흔적조차 만나기 어려운 아주 오래 전의 생활용품 전시장 속에 덕지덕지 외할머니의 일생이 담겨있었다. 정겹다. 조상들의 삶 속에 들어가는 따뜻한 시간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부엌세간들 속에서 속정 깊은 외할머니를 그려보고 내 어머니를 떠올린다.
부엌 세간들이 품어낸 세월의 가치
"이곳에 온지는 5~6년 됐나? 서울 사직동 한옥에서 살았는데 아내는 지금도 서울과 덕포진을 오가고 있어요. 원래 마당의 정원 관리는 아내가 하기 때문에 바삐 오가죠. 올해는 덩굴장미를 많이 심어서 텃밭을 많이 점령했어요. 이쪽에 덕포진 진지가 있고 강도 보이고 풍광이 좋아요. 평화누리길도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오가긴 합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카페로 용도 전환을 하라고, 요리교실로 활성화하라고 갖가지 조언들을 하는데 그 말에 딱히 반박을 하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야기하는 동안 찾아오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볼 수가 없다. 코로나의 영향도 있겠지만 박물관을 지키는 일이 녹록지 않음이 짐작된다. 젊은 시절의 취미가 노후에 소일할 일이 되는 것만큼 이상적인 사례가 있을까만 교류와 관계성의 현실이 배제되면 재미가 덜할 수 있다. 옛사람들의 생활용품의 역사적 가치와 소중함을 알아주어야 할 텐데 무심함에 때론 서운할 만도 하다. 그럼에도 자부심만은 만만찮다.
"차라리 사람들 말대로 이 건물에 카페를 하거나 임대를 주면 더 여유로울 텐데 이건 개인이 할 짓이 아니라니까. 지역이나 국가에서 해야지. 박물관이라고 어디서 지원이 있는 줄 아는데 지가 좋아서 하는 걸 어디서 도와줄 리가 있나. 팔아야 뭐가 나올까 지금은 생기는 것은 별로 없어요. 아무리 좋은 문화 콘텐츠라도 중요한 자료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부유층의 것들을 보여주고 있잖아요. 민속박물관에 가면 전시된 물건은 다 양반 위주지 여기처럼 서민들 용품은 별로 없거든요.
공유 부엌의 사용도 가능
전시관 2층은 음식 체험실이다. 잘 갖추어진 조리대와 넓은 홀은 쿠킹클래스의 현장이란 게 단박에 연상된다. 이곳 체험실은 공유 부엌 개념으로 이용되고 있어서 그동안 강사를 초빙해서 전통 장류나 김치와 같은 발효음식, 김장철엔 김장 담그기, 제철음식으로 감자전이나 호박요리, 샌드위치나 떡볶이, 중국을 비롯 동남아 요리 등 시대와 나라 구별 없이 다양한 종류의 수업을 진행해 왔었다고 한다.
코로나 이후 주춤했으나 경기도 김포시 보조사업으로 희망의 밥상 펼치기 프로그램을 계획하기도 했다. 김포시에 거주하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화상을 통한 쿠킹클래스 프로그램이었다. 어려운 시절에 밥상이 주는 위로와 화합으로 소통의 시간이었다고.
물론 평소에도 함께 한 끼 식사를 하며 쉼을 얻고 마음을 나누는 공간으로 열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전엔 박물관 마당에서 로컬푸드 장마당이 열리곤 했다. 지역주민들이 가꾼 신선한 식재료들을 판매하고 무료 요리교실이 열렸었다. 가족요리대회, 어린이 요리교실 등이 때때로 진행되기도 했는데 이젠 한적하다. 알고 보면 따뜻한 놀이마당이란 걸 아는 사람만 안다.
직접 내린 드립 커피 한 잔 건네며 성큼 다가온 가을의 정취와 이어질 겨울의 멋을 슬그머니 자랑한다. 박물관 주변의 자연이 계절마다 색다른 매력을 보여주어 늘 기대가 된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멋도 공유한다. 누구라도 원한다면 이런 풍경을 내다보면서 각자의 취향대로 시간을 보내는 장소로도 제공된다는 것.
“방역 수칙 강화로 모임들이 편치 않으니까 서울에 사는 우리 친구가 주말이면 놀러 와요. 다른데 가면 오래 앉아있을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여긴 조리실도 있고 마당에 가마솥도 걸려 있고 야외 천막 텐트도 있으니 여기서 마음껏 쉬며 먹고 숲에도 들고 시간 보내기 좋으니까 그런가 봅니다. ”
“가끔씩 때가 되면 오는 젊은 친구들도 있어요. 여행 관련 모임인데 사회적 거리두기를 기본으로 몇 명씩 모여서 먹을 것 사 가지고 와서 요리해 먹고 함께 모여 토론도 하고 와인도 마시며 편히 놀다가 갑니다. 3층엔 카페 공간도 있으니까."
외할머니 부엌의 느릿한 정서에 잠기다
하루쯤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지내고 싶은 사람들에겐 이런 여유로운 공간이 필요하다는 걸 어찌 알았는지. 이곳이 공유 부엌의 개념으로 만들어져서 소액의 이용료만 지불하면 각자 먹을 재료만 사 와서 요리도 하며 느릿한 템포로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옛 마을의 정서를 느끼게 하는 외할머니의 부엌, 방학이면 놀러 갔던 외가댁의 편안한 정취를 맛보고 싶을 때 떠올릴 만하다.
미리 예약한 덕분에 로컬푸드로 체험 프로그램을 직접 경험해 보았다. 부엌 조리대엔 대부분 텃밭에서 조달하는 식재료들이다. 단호박은 박물관 옆 채마밭에서 자란 수확물이다. 앉은뱅이 우리밀로 만든 수제비와 단호박전은 다시 한번 찾아가 맛보고 싶게 한다.
외할머니 부엌의 푸근함 속에서 따뜻한 위로의 소리를 그는 날마다 듣는다. 인적이 드문 박물관 들꽃 정원에 나와 자연의 변화에 흠뻑 빠지고 가끔 찾아오는 친구들에게 도시에서 맛보지 못할 평온한 휴식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게 있을지. 뚝 떨어진 김포의 덕포진 숲길 옆 외할머니 부엌의 김홍선 관장은 자발적 유배와도 같은 잔잔한 사색의 시간에 묻혀 산다.
‘헉! 이거 뭐지? 혹시 그날 아람이가 얘기했던 게 이건가?’
누리는 미술관의 다섯 번째 전시실 모퉁이에 걸린 그림을 보다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마침 까만색 유니폼을 입고 목에는 스태프 라고 쓰인 표를 달고 있는 남자가 느린 걸음으로 5전시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아저씨! 저 그림 좀 이상해요.”
“응? 뭐가?”
“그러니까 저게...”
하면서 누리가 다시 그림을 보니 그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갸름한 얼굴에 눈에는 슬픔이 가득 담긴 채 마치 맞은편에 있는 남자 그림을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 조금 전 누리가 봤던 그 놀라운 모습이 아니었다.
“저- 그게 저 그림이... 아, 아니에요.”
직원은 누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더니 다시 천천히 걸으며 다음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전시실에 상태를 살피는 거 같았다.
누리는 자기가 착각을 한 걸까 생각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전시를 오픈하던 날, 아람이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자기가 본 것이 착각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누리는 다시 그 여자그림 앞으로 가려다가 그만 두었다. 무슨 괴기 영화나 환타지 영화에서 본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으면서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해줄 사람이 그리웠다. 아람이랑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전시 개회식은 일주일전 목요일 오후 5시에 있었다.
할머니는 미술관을 놀이터 드나들 듯 좋아하는 누리 때문에 미술관에 자주 가시게 됐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부터 미술관에서 하는 도슨트 교육을 받으셨다. 도슨트는 미술관에서 관람객에게 전시에 대한 여러 정보와 전시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봉사자라고 한다. 그날 할머니가 누리에게 전시 오픈식에 참석해서 작가들을 만날 거라고 함께 가자고 하셨다. 누리는 미술관엔 자주 가서 그림과 조각들을 보았지만, 작가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더구나 오픈식이 끝나면 맛있는 다과 파티도 있다는 할머니 말씀에 누리는 냉큼 할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렇지만 아람이는 시큰둥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아람이와 누리는 불과 32분 차이로 세상에 나왔다.
아람이는 12월 31일 밤 11시 49분, 누리는 다음 해 1월 1일 0시 21분.
부모님은 출생신고를 하면서 잠깐 같은 날로 올릴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병원에서 기록한 그대로 출생신고를 해서 아람이는 학교도 한해 먼저 들어갔다. 4학년이 된 아람이는 걸핏하면 3학년 보다 4학년이 되니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유세를 부렸다.
쌍둥이지만 둘은 비슷한 것보다 다른 면이 훨씬 많다.
아람이는 책을 좋아하고, 누리보다 덩치는 작지만 야무져서 누나답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누리는 활발하고 덜렁거리는 편이다. 그렇지만 게임이나 그림 그리는 것, 만들기는 아람이보다 선수다.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는 ‘금손 누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픈식 때, 아람이가 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학원에서 수업이 일찍 끝났다며 미술관으로 왔다. 전시 담당 큐레이터가 인사를 하고 전시 기획의도를 알려주는 동안 할머니는 메모장을 들고 제일 앞쪽 자리로 가서 앉으셨고, 누리는 다과가 차려지는 쪽 가까이 앉았는데 아람이는 지루했는지 혼자 전시실로 들어갔다.
문화재단 대표이사가 활짝 웃으며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른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오랫동안 얘기 했다. 그다음엔 그 왕릉 중 8기가 우리 시에 있으니 큰 자랑거리라고 시장이 더 길게 길게 얘기했다. 누리가 보니 가슴에 꽃을 달고 한쪽에 쭈-욱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작가들 같았다. 작가들도 지루한지 얘기하는 시장을 보다가 바닥을 보다가 자기 손을 맞잡았다가 했다. 그때 얼굴빛이 빨갛게 상기된 아람이가 누리 옆으로 오더니,
“누리야, ‘류원’이란 화가는 어디 있어?”
하고 물었다. 행사 식이 끝나면 재빨리 좋아하는 케잌을 먼저 집으려고 음식물들이 있는 상을 보고 있던 누리는
“나도 몰라. 아직 작가들은 인사 안 했어. 저쪽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있을 거야.”
하며 작가들 쪽을 가리켰다.
그때, 드디어 누구에게 감사하고, 또 누구에게 감사하고, 또, 또 누구에게 감사말씀을 전하는 바라고 말하던 시장님 얘기가 끝나고 작가들 인사 차례가 되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인물과 관계된 것인지 어떤 방법과 의도로 제작한 것인지를 짧게 얘기했다. 그런데 여덟 명의 얘기가 다 끝났는데 ‘류원’이란 작가는 없었다.
사회를 보던 큐레이터가 말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총 11명인데 그중 세 분은 개인 사정과 해외 전시에 참여하느라 못 왔으니 양해바랍니다.”
아람이는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는데?”
누리가 이상하다는 듯 묻자,
“글쎄- 내가 잘 못 본 걸 수도 있어서......”
하다가 누리를 빤히 보며 물었다.
“너 다음에 또 올 거니?”
누리는 전시가 열리는 동안 적어도 두세 번은 관람을 하곤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인데다가 시립 미술관이라서 입장료도 저렴하다.
또 미술관 간다고 하면 엄마는 늘 입장료에 1,000원을 더 얹어 준다.
그러니 누리에게 미술관 관람은 그야말로 1석 2조, 아니, 1석 3조도 넘는 거다.
“당연하지. 오늘은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걸.”
“그럼 다음에 올 때 5 전시실에 있는 ‘류원’이란 화가 그림 좀 자세히 봐줘. 정말 이상했거든.”
“뭐가?”
“그건 네가 그림 보고난 다음에 얘기 할 게.”
‘그래. 아람이도 그날, 분명 나랑 같은 걸 봤을 거야.’
마음이 급해진 누리는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그리고 마지막 전시실도 그냥 지나쳐 집으로 내달렸다.
현관문 번호단추를 빠르게 눌렀다. 운동화는 벗겨져 날리듯 흩어졌지만 그건 쳐다볼 생각도 없었다.
“아람아, 아람아 너 그거 봤지?”
급하게 자기를 찾는 누리를 보면서도 아람이는 소파에 앉아 동화책을 읽다가 느긋하게 한 마디 했다.
“저런~ 누나라고 불러야지. 3학년 꼬마야.”
“웃기지마. 너 그거 봤지, 맞지?”
“음- 너, 지금 미술관 갔다 온 거구나?”
“그래. 그 ‘류원’이란 화가가 그린 여자 그림 봤어.”
“어땠는데? 너도 이상했어?”
“있잖아. 꼭 ‘헤리포터’ 영화에서 본 그림들처럼 움직이고 나한테 말을 거는 같았어.”
“그래? 내가 볼 때도 그랬어. 근데 그거 너 혼자 봤어? 무슨 말을 했어?”
“몰라. 무서워서 뒤로 물러섰더니 원래대로 안 움직이는 그림이 됐어. 넌?”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그림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거 같아 얼른 밖으로 도망쳤지.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나는 거기 직원 아저씨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림이 그대로 안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 들을까봐 그냥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너랑 얘기하려고 얼른 온 거야.”
“마법 그림인가? 그런 게 정말 있는가봐. 그치?”
아람이가 일어나며 말했다.
“이상해, 이상해. 우리 지금 가 보자.”
“안 돼. 지금 가도 소용없어. 미술관은 6시까지만 연단 말이야.”
아람이가 다시 소파에 앉으며 무슨 큰 결정이라도 내리는 듯 누리에게 나직이 말했다.
“우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우리끼리 비밀을 풀어 보자.”
“무슨 비밀?”
“그림 속 여자는 왜 우리에게 말을 건 것인지, 정말로 그림이 움직이는 게 우리 눈에만 보인 건지.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왜 있잖아, 동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거. 우리가 그 여자의 원한이나 비밀을 푸는 순수한 아이들로 선택된 걸지도 모르잖아.”
아람이는 야무지게 말했지만, 누리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리야, 우선 이번 전시의도를 알아야 하고 ‘류원’이란 화가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알아야 해.”
“그건 어렵지 않아. 전시가 설명된 리플릿도 있고 10시, 11시, 오후 2시, 3시엔 전시를 설명해 주는 선생님들도 있거든. 아, 이번부터 할머니도 미술관에서 도슨트 하니까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간단하겠다.”
“아냐. 그럼 재미없지. 우리가 선택됐으니까 우리가 해결하는 거야. 어른들에겐 비밀로 하고.”
아람이는 다시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옴찔거리며 생각을 모으느라 애썼다.
“그래. 우선 전시 리플릿부터 보자. 너 갖고 있지?”
“물론이지. 난 여태껏 전시 리플릿은 다 모았다니까.”
누리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뒷주머니에서 리플릿을 꺼내 놓았다.
아람이와 누리는 머리를 나란히 하고 전시 설명이 담긴 네 면으로 된 리플릿을 읽었다.
앞면엔 전시 제목과 대표 작품 사진, 전시 날짜가 적혀있고, 안쪽 두 면에는 전시 내용과 사진 두 개가 있었다.
왕릉의 전설
-조선 왕족들의 미술관 행차-
은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 왔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가장 화려한 삶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권력과 명분 획득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혹독한 고독과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증언자들이기도 하다. 이들 왕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처절한 주인공으로 8인을 선정하고 각 존재들에 대한 시각적 대화를 시도하는 작가 11명의 작품을 소감형식으로 구성한 전시이다.
전시의 소재가 된 왕족은 인수대비, 폐비 윤씨, 인종, 소현세자, 숙종, 희빈 장씨, 의빈 성씨, 그리고 철종이다.
왕릉이라는 신들의 정원에는 그들이 마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전설이 전해온다.
인간의 삶이 언제나 그러하듯 온전하게 충족되지 못한 애절한 마음은 후손인 우리의 심정을 흔들어 생각을 일으킨다.
사실 조선왕조의 역사적 의의가 갖는 무게에 비해 현대인들의 그에 대한 관심은 가벼웠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그 표현 중심에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치열한 꿈의 허상을 새로운 예술적 형식으로 보여줄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자 누리가 투덜거렸다.
“이게 뭔 말이야아~? 난 짜증나.”
“어른들한테 보여주는 거라 그래. 어쨌든 조선시대 왕족들 얘기를 그린 작품이란 말이지 뭐.”
“그럼, 류원이란 화가는 누구 얘길 그린 걸까?”
누리가 마음이 급해져서 뒷장으로 넘겼다.
뒷면에는 참여 작가 11명의 이름과 간단한 작품 내용이 있었다. 문경은, 태인주, 노장현, 박영훈, 류원, 신희경, 백승민, 최원범, 우정석, 김화준, 이민숙. 누리와 아람이는 류원 작가 옆에 있는 글만 소리 내어 읽었다.
“류원은 신비한 전설 속 이야기를 끊임없이 제작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번 전시에는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그동안 작가가 그려오던 기법에서 크게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의빈 성씨 얘기라고?”
아람이는 의빈 성씨를 아는 거 같은 표정이었다.
“그게 누군데? 너 알아?”
“응.”
“어떤 사람인데?”
아람이가 좀 뻐기는 표정으로 누리에게 말했다.
“누나, 아니 '누님 알려 주시옵소서.'하면 가르쳐 주-지.”
“야! 겨우 32분 먼저 태어났다고 그 소릴 듣고 싶냐? 나 같으면 그냥 친구먹자고 하겠다.”
“싫음 말구.”
“어-휴!”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궁금증이 풀릴 열쇠인 것만 같아서 누리는 ‘이번만’하는 맘으로 더 과장되게 아양을 떨었다.
“누님, 저는 의빈 성씨가 누구인지 매우, 매우, 매우 궁금하옵니다. 알려 주시옵소서.”
“좋다! 내 알려주지.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러더니 아람이는 누리에게 의빈 성씨가 누구인지 얘기는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왜? 가르쳐준다면서 왜 가?”
아람이는 책 한 권을 들고 나오며 말했다.
“내가 좀 똑똑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걸 다 외우는 건 아니쥐이. 여기 봐-.”
아람이는 ‘조선왕조실록’이란 만화책권을 펴서 195쪽에 있는 ‘제 22대 정조 가계도’를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거기엔 정조 밑으로 ‘효의왕후 김씨(1753~1821)- 후사 없음’ 이라 적혀 있고, 그 다음 줄엔 ‘의빈 성씨(1753~1786)-1남, 문효세자 일찍 죽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림 속 여자가 이 사람이구나. 그런데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야?”
“이거 봐. 의빈 성씨는 겨우 서른네 살에 죽었어. 그러니까 뭔가 사연이 더 있을 거야. 이 책에서 보면 화빈 윤씨가 미워한 거 같거든.”
아람이는 입을 야무지게 다물더니 말했다.
“그래서 화빈이 의빈 성씨를 죽였대?”
“아니. 그런 건 없어. 그렇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원한이 있어서 우리한테 말을 걸었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내야지. 그림 속 여자가 우리한테 하려고 하는 말도 뭔지 알 수 있고, 영혼을 달래줄 수도 있겠지.”
“하~ 아람아! 내가 보기엔 넌 이상한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거 같아.”
“뭐라구? 너도 그림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거 봤다며? 얼마나 억울하면 그림이 말을 다 하겠니?”
“엄마랑 아빠한테 물어 보자. 아니 이따가 할머니한테 물어 보는 게 낫겠다.”
“안 돼, 안 돼. 하지 마! 이렇게 재밌는 사건이 우리 평생에 얼마나 있겠어? 어쩌면 이건 우리 생애 최고로 짜릿한 비밀을 만들 수 있는 기회란 말이야.”
“치~ 비밀 만들고 싶은 거야?”
“동화를 읽다보면 비밀이나 엄청난 사건이 생겨서 주인공이 재미난 경험을 하는데, 우린 언제 그런 일이 생기겠어? 만날 똑같은 날이니... 그러니까 너랑 나, 둘이서만 이 문제를 풀어보자고. 내가 너한테 슬라임 전부 다 줄게.”
“진짜? 앗~싸~. 그러지 않아도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려고 했는데... 좋아! 어떻게 하면 돼?”
“우선, 의빈 성씨에 대한 자료를 더 찾는 거야. 그리고 미술관에 가는 거야.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알고? 5 전시실에서 사람들이 나가길 기다려야 하나?”
“그렇지! 자, 이제 자료를 어떻게 찾는다? 도서관에 가야 할까?”
“에이 바보! 컴퓨터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게 빠르지.”
아람이는 민망한 듯,
“아하하... 그렇구나. 근데 조금 있으면 엄마랑 아빠 집에 올 시간이야. 그니까 일단 오늘은 숙제 하는 척 하면서 이 책을 보고, 내일 학교 갔다 와서 찾아봐야지.”
“와~ 철저하네. 난 그냥 내일 학교 끝나고 곧장 미술관에 가서 의빈 성씨랑 단판을 내고 싶구만...”
다음 날 오후, 누리는 학교 운동장에 땀을 흘리며 친구와 축구공으로 놀고 있는데 아람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누리야, 누리야아~~ 지금 미술관 가자~~”
“너네 누나도 미술관 좋아하냐? 이상한 남매야. 나도 이제 학원 가야겠다.”
하며 친구가 교문밖으로 나갔다.
“나 입장료도 없단 말이야.”
누리는 아람이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야! 내가 누구냐? 초대권을 할머니한테 두 장 받았어. 그리고 인터넷 검색은 아까 점심시간에 도서실에서 해놨고.”
“역시! 짱인데.”
“학습지 선생님 올 시간 맞추려면 빨리 갔다 와야 해. 뛰자~”
1 전시실에서 4 전시실까지는 건너뛰고 5 전시실로 들어간 아람이와 누리는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의빈 성씨의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아주 잠깐, 그림은 그림인 채로 있었다. 그런데 그림 앞 1m 정도로 바짝 다가가자 그림이 움직이며 말을 걸었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헉! 정말요? 왜요?”
누리가 깜짝 놀라 물었고, 아람이도 서둘러 말했다.
“무슨 사연이 있으신 거죠? 혹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셨나요?”
“아~ 글쎄... 왜 그렇게 생각지?”
“내가 다 찾아봤어요. 이름은 성덕임이고, 정조 임금님이 무척 사랑했고, 아들인 문효세자는 다섯 살에 죽고, 딸도 태어나서 첫돌도 안 돼서 죽었잖아요. 또 세 번째 아기를 낳기 두 달 전에 죽은 것도 알아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닌가요?”
“어머나! 나에 대해서 많은 걸 공부했구나? 고맙다. 그렇지만- ”
그때, 세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5전시실로 들어 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아람이랑 누리네! 책가방도 메고 있는 걸 보니 학교에서 곧장 왔구나?”
“네, 할머니.”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며 그림을 돌아보니 그림은 다시 멈춰 있었다.
아람이와 누리는 눈을 맞추고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그림이 다시 움직이며 말을 시작했다.
“정조 임금님과 나는 금슬 좋은 부부였지요. 정조 임금님은 내가 죽은 후 저를 애도하는 글을 많이 써 주셨지요. 저는 지금도 그분이 그리워 이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누리와 아람이와는 달리 할머니와 다른 두 분은 웃으며 그림을 향해 인사했다.
“수고가 많아요. 박선생님!”
다시 또 놀란 누리가 물었다.
“할머니! 어떻게 된 거에요?”
“이런 작품은 누리도 처음 보지? 이런 작품을 ‘인터렉티브 아트’라고 하는 거야. 테크놀러지가 결합되어 관객을 만나야 완성되는 작품. 관객들이랑 얘기도 나눌 수 있어.”
“그럼 그림 안에 AI라도 들어 있는 거예요?”
이번엔 아람이가 물었다.
할머니가 바닥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여기 이 지점에 사람이 서면 센서가 작동해서 관람객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그림 뒤에 숨어 있는 분이 말을 하는 거지. 그러면 디지털로 된 그림이 움직이는 거야.”
“그림 뒤에 있는 분은 우릴 볼 수 있어요?”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보지는 못 해. 컴퓨터를 앞에 놓고 검색어를 치면서 여러 가지 질문에 답도 해야 하니까. 하하, 내가 비밀로 해도 될 걸 너무 많이 알려준 건가?”
그제야 아람이와 누리는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러면서도 누리는 디지털 그림이 너무나 감쪽같아 놀라웠고, 아람이는 신비한 경험을 놓친 거 같아 크게 서운했다.
나중에 아람이와 누리에게 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얘기 듣고, 할머니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애들아! 할머니는 너희들 덕분에 미술관에서 새로운 걸 많이 배우고 또 그걸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구나. 더구나 그림 하나가 호기심을 자극해서 이렇게 배워나가는 아람이랑 누리를 보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수상소감 - 우수상 동화 배홍숙
“동화나 그림책을 쓸 땐 내 생각이 신기해 기분이 좋아져요”
감사합니다.
블로그에 동화를 몇 편 써 두고 공개는 안했는데,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에 처음 응모해서 이렇게 상을 받으니 많이 기쁩니다.
독서 동아리 회원이 공모전이 있다고 단톡방에 링크를 걸어주셨어요. 그 분도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응모 부문에 동화가 있어 용기를 내봤습니다. 어쩌면 50대 이상이 참가하는 거라면 동화 부문 응모자가 적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글쓰기 관련 책을 보기도 하고, 강의도 가끔 듣습니다. 함께 독서동아리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가족, 제가 하는 모든 활동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글쓰기엔 특별한 동기가 필요한 거 같아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이후에 다른 공모전이 있나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떤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요청이 온다면 글쓰기에 더 큰 동기부여가 될 것 같네요.
내가 쓴 에세이는 항상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화나 그림책을 쓸 땐, 내가 해낸 생각들이 신기해서 기분이 좋아지고요.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동화나 그림책 글을 계속 쓰면서, 감동을 주는 좋은 수필도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공모전 정보를 주셨던 선생님, 잘못된 파일 경로를 수정하라고 알려주신 담당자에게 감사드리며, 독서동아리 친구들과 어린 시절에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던 엄마와 외할머니, 응원해 주는 식구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합니다.
“제덕아 사랑해. 제덕이 파이팅.” 지난 26일 김제덕을 키운 친할머니 신이남 씨(86)가 손자에게 보내는 힘찬 응원의 메시지가 전파를 탔다. 안동MBC와 인터뷰에서 손자에게 어떤 말을 해 주고 싶느냐는 질문에 신 씨는 “제덕아, 개밥 주러 가자”고 말했다. 다섯 살배기 손자와 함께 강아지에게 밥을 줬던 추억 덕분이다.
“코리아 파이팅!” 도쿄 유메노시마 양궁장을 뒤흔든 함성의 주인공, 열일곱살 김제덕은 할머니의 응원에 힘입어 올림픽 2관왕에 올랐다. 지난 1일 귀국한 뒤 JTBC와 인터뷰에서 그는 “올림픽 준비하느라 자주 찾아뵙지 못했는데, 할머니 목에 금메달을 걸어드리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고 싶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6세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란 손자는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2016년 SBS 예능 프로그램 ‘영재발굴단’에 출연한 초등학교 6학년 김제덕은 “올림픽 국가대표가 돼 할머니 목에 금메달을 걸어드리는 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다.
조부모 손에 자라 성공한 아이들로 ‘미스터트롯’ 정동원을 빼놓을 수 없다. 2019년 말 KBS ‘인간극장’에 출연한 정동원은 폐암 진단을 받은 할아버지를 위해 가수로 성공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정동원의 할아버지는 TV조선 ‘내일은 미스터트롯’에 정동원이 참가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노래를 가르쳐 주고 가수의 꿈을 응원해 준 할아버지 덕분에 손자는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 트로트 가수가 됐다.
조부모 육아의 좋은 예는 서양에도 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도맡아 키우다시피 한 빌 게이츠, 복잡한 가정사로 하와이 외갓집에서 자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조부모 손에 자란 아이들 중에 크게 성공한 사례가 많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양육법에 특별한 비법이 있는 걸까.
무한한 사랑과 지지, 손주 정신 건강에는 백신
전문가들은 조부모 육아가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선물한다고 말한다. ‘양육유형이 아동의 문제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작성한 최복경은 결론에서 “부모 중심의 육아보다 조부모가 함께 양육하는 형태가 더욱 유리하다”고 적었다.
어린이집 원장을 지냈던 최복경은 실제로 2~5세 영유아 원생 36명에 대한 ‘행동 관찰일지’를 두 달간 작성했다.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이 조부모의 보살핌 유무에 따라 기본 생활습관, 의사 소통, 사회정서 발달 면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관찰했다.
결과는 조부모 육아의 완승. 생활습관과 의사 소통, 사회정서 발달 모두 조부모 손에서 자란 아이들이 우위를 보였다. 최 원장은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조부모 육아와 맞벌이 부모 육아는 정서적 안정감 때문에 차이가 난다고 설명했다. 그는 “양육 경험이 있는 조부모로부터 아이들이 보살핌을 받으면, 일하는 아이의 부모들을 안정시키는 효과도 있어 아이가 세상에 대해 신뢰감을 쌓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해외 연구 사례도 존재한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글렌 H 엘더 교수 연구진은 조부모와 함께 자란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성인이 된 뒤에도 성취감이 높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진은 조부모와 자주 만나고, 조부모가 자신의 인생에 중요하다고 말한 아이들이 외부 환경과 관계 없이, 자신의 학습능력을 최대로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조부모와 손주가 가까이 살고, 자주 만날수록 아이의 성적과 성취도가 높다는 얘기다.
미국 브리검영대학교 연구진은 10대까지 조부모와 친밀한 아이들이 친사회행동(봉사와 기부 등 보상을 바라지 않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행동) 성향이 높다고 밝혔다. 아이들은 조부모가 손주에게 용돈을 주는 것보다 실용적인 기술을 가르쳐 주거나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로 조부모에게 친밀함을 느꼈다.
조부모 양육이 아이들을 과체중이나 비만으로 만들 확률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과 중국, 영국, 일본 등 8개 국가의 논문 23편을 비교 분석한 중국 상하이 대학교의 안 루오펭 교수는 “조부모에게 지금 세대에게는 오히려 풍요에 따른 과식과 비만이 문제임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이 꼽은 문제점은 조부모의 ‘지나친’ 너그러움이다. 그러나 조부모의 너그러움은 손주들에게 정신적 안정감의 기반이 됐다. 조부모가 너그러움의 정도만 조절한다면 손주의 몸과 마음에 좋은 영향만 미칠 수 있다는 뜻이다.
최근 과도한 스트레스 등으로 정신 건강을 위협받는 일이 잦아지는 점을 생각한다면, 조부모의 무한한 사랑은 손주에게 ‘정신 건강 백신’으로 작용할 것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조부모 육아가 주목받고 있고,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2012년, 50대 중반에 손주를 본 작가 박경희(60) 씨는 금쪽같은 손주가 태어난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덜컥 겁이 났다. 50대에 할머니가 되는 법은 들어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난해 자신과 주변 조부모들의 이야기를 담은 ‘손주는 아무나 보나’를 펴냈다. 나름의 독학인 셈이다. 그 무수한 고민 덕분이었을까, 이제 그녀는 익어가는 자신과 쑥쑥 자라나는 손자를 느긋하게 관망하는 여유가 생겼다. 베테랑 방송 작가에서 ‘오아민 할머니’로 인생 3막을 일궈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모든 것이 남들보다 한걸음 빨리, 숨 가쁘게 찾아왔다. 박경희 씨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스물여섯에 결혼을 하고 곧바로 첫째를 낳았다. 한숨 돌릴까 싶더니 연년생으로 둘째 아들이 세상 밖에 나왔다. 라디오 작가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사이 커버린 첫째는 자신과 견줄 만한 속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이른 나이에 짝을 만나고, 결혼하자마자 첫아이를 본 것까지 빼닮았다. 정신 차려보니 풋보리 같은 손자 아민이가 자신을 ‘할머니’라 부르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미지의 세계에 빠진 듯 혼란스러웠다.
“김혜자 선생님과 라디오 프로그램을 같이할 때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김혜자 선생님도 저처럼 이른 나이에 손주를 보셨거든요.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할머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어디론가 떠밀려가는 느낌이 드셨다고 해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공감은 했지만, 사실 실감은 못 했어요. 그런데 아민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그제야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됐어요. 뭐랄까, 여자로서의 막이 닫힌 느낌? 좋고 나쁨을 넘어 굉장히 미묘한 기분이었어요.”
인생에 갑작스러운 변화의 바람이 불면 누구나 그렇듯 지나온 삶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경희 씨에게는 손주가 태어난 순간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모니터 앞에 앉아 이상적인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소싯적 아주머니라는 호칭조차 거부했던 그녀였기에 훗날 손주가 자신을 떠올릴 때 멋지게 기억되길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손주와 할 일이 하나둘 떠올랐다. 작가 박경희로서의 욕심도 생겼다. 그러자 할머니가 된다는 것이 끝에 다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시니어를 위한 에세이 ‘손주는 아무나 보나’를 펴낸 이유이기도 하다.
“아민이가 태어난 후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됐어요. 휴게소처럼 달리다 잠깐 멈춰서 돌아보고 재정비하는 거죠. 처음에는 인생의 막이 내린 것 같았는데, 사실 세 번째 막이 열리고 있었더라고요.”
손주로 되찾은 청춘
책을 쓰기 위해 주변 조부모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다니던 경희 씨는 한 가지 눈에 띄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수십 년간 몸담은 직장을 떠나고 백수로 돌아갈 생각에 수심 가득하던 남성들의 얼굴이 손주가 태어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피어났다는 것이다. 은행 지점장으로 일하다 은퇴한 경희 씨 남편의 친구는 “마음은 청춘인데 세상이 나를 뒷방 노인네 취급한다”며 한탄하더니, 손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기분”이라며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은퇴하면 가정을 책임진다는 큰 몫이 사라지잖아요. 그런데 바쁜 부모 대신 손주를 봐주면 자식이나 며느리, 사위가 감사해하고 든든하게 느끼니까 ‘아직 여기에 내 역할이 있구나’ 깨달으면서 삶의 낙을 찾는 거죠.”
은퇴하지 않은 남성들도 고독을 느끼기는 매한가지다. 병원장으로 재직 중인 경희 씨 친구의 남편은 과업으로 힘들어하며 매일 기운 빠지는 소리를 입에 달고 지내곤 했는데, 손주를 보고 난 뒤 180도 달라졌다. 그녀가 메신저로 전해받은 동영상 속에는 우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장아장 걷는 손주를 사랑스레 바라보는 인자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경희 씨 남편도 예외는 아니다. 말수도 적고 덤덤한 경희 씨 남편은 표현에 서투르지만,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모양이다.
“남편은 아민이가 태어났을 때도 덤덤했어요. 근데 손주를 본 기쁨은 나보다 더 큰 것 같더라고요.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 무언가를 남기고 간다고 하잖아요. 남자들은 손주를 볼 때 그게 무척 실감나나 봐요. 가끔 아민이 데리고 외식하러 가면 남편이 더 좋아해요. 두 아들을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과 손주에 대한 감사함이 표정에서 보이죠.”
두 사람 사이 웃을 일이 많아지니 부부 사이도 좋아졌다. 원래도 사이가 소원한 건 아니었지만 하는 일도, 관심사도 달라 이야깃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손주는 교집합의 행복이었다. 손주가 똥을 싸도 기특해하는 것까지 똑같다. 때로는 손주와 나들이 간다는 구실로 근교 데이트도 즐기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눈다.
“두 아들 정신없이 키울 때는 남편과의 추억이 많지 않은데, 요즘은 손주 덕분에 그때 누리지 못한 여유를 즐기고 있어요. 노년의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졌죠. 약간의 신혼 분위기랄까요.(웃음)”
워킹맘 며느리와의 특별한 연대
18년간 라디오 프로그램 ‘김혜자와 차 한잔을’ 작가로 활동하며 결혼 후에도 일을 놓지 않았던 경희 씨는 그 당시 흔치 않은 워킹맘이었다. 하지만 방송국이나 잡지사로 동분서주 뛰어다니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면서도 가사에 소홀하지 않았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은 안 된다’던 시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시집살이를 하며 본의 아니게 일과 육아, 가사를 모두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경희 씨는 늘 최선을 다했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나름 잘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한테 못 챙겨주는 부분이 있는지, 놓치는 정보는 없는지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워킹맘도 30여 년 전 경희 씨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충을 겪고 있다. 경희 씨의 며느리도 그렇다. 개발자로 일하는 며느리는 손주가 태어나고부터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라 주변의 손을 빌려야 했다. 경희 씨 역시 아들과 며느리가 부탁하면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황혼 육아에 전념할 생각이었지만, 오랜 논의 끝에 아들네와 가까이 사는 사돈이 돌봐주기로 결론지었다.
“ ‘손주를 아무나 보나’를 처음 보는 분들은 제가 아민이를 맡아 키우며 쓴 책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근데 사실 그러지 못한 미안함으로 쓴 거거든요. 이 땅에 아민이 외할머니 같은 분들이 많을 거란 생각으로요. 단순히 사례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조부모나 시부모로서의 올바른 역할과 책임, 말 못 할 고민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였죠. 이런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요.”
손주를 돌봐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는 경희 씨는 며느리와 손주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그때 워킹맘 며느리의 모습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이 겹쳐 보였다. 이후 분기별로 며느리와 손주에게 필요한 책을 주문해 보내주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10살이 된 손주에게는 초등학교 3학년이 읽을 만한 상상력 가득한 소설을, 며느리에게는 초보 엄마를 위한 에세이를 보내주는 식이다.
“워킹맘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아이 교육에 중요한 시기를 놓치면 굉장히 후회하거든요. 그래서 시어머니로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되, 며느리에게 필요한 부분은 최대한 지원해주고 싶었어요. 딸 같은 마음이라기보다는 같은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연대, 응원 같은 거죠. 특히 조부모는 자식 키우며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잖아요. 그중 실패담은 빼고 효과적인 노하우만 전수해주니 며느리가 싫어할 이유가 없죠.(웃음)”
럼피우스 할머니를 꿈꾸다
손주를 만나는 날이면 경희 씨의 머릿속은 이야기보따리로 가득하다. 첫째 아들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재주를 발견한 순간, 두 아들이 과자 하나를 두고 꼬집으며 싸웠던 일화, 경희 씨 고향인 양평에 얽힌 추억까지 옛이야기를 들려주면 손주의 눈은 흥미롭다는 듯 커다래진다. 그녀는 그런 손주를 보며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내 말이 숭숭 새는 것 같아도 기억에 남는 게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며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전해주신 말씀이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라서다.
“두 아들 키울 때 해주지 못한 것을 손주에게 쏟게 되는 것 같아요. 다행인 건 아민이 아빠도 그 모습을 보고 그동안의 서운함을 조금씩 씻어내는 것 같더라고요. 언젠가 한번은 아들에게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아민이에게 전한 적도 있어요. ‘아민아, 사실 너네 아빠는 혼자서도 뭐든지 참 잘했어’라고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법은 경희 씨가 손주와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대신 손주의 의견을 구한다. 명령보다는 의문문을, 일방적인 가르침보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토론을 선호한다. 영화 한 편을 같이 보고 난 뒤에는 감상평을 나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데려가서는 작품이나 유물에 얽힌 내용을 할머니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아이들에게는 현장 학습이 중요하거든요. 책에서 보는 열목어와 눈으로 보는 열목어는 다르잖아요. 직접 경험하면 나중에 교과서로 배울 때 얼마나 쉽겠어요.”
경희 씨의 바람은 바버러 쿠니의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의 럼피우스 할머니처럼 손주에게 기억되는 것이다. ‘미스 럼피우스’는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란 럼피우스가 먼 훗날 할머니가 되어 자신의 인생담을 또 다른 꼬마들에게 전해주는 내용이다. 할머니이기 전에 이야기하는 직업을 가진 그녀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할머니의 품을 편안한 쉼터라고 여겼으면 좋겠어요. 요새 아이들은 숨 돌릴 틈도 없잖아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본인이 어떤 할머니가 될 것인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평소와 같은 날도 다르게 다가오거든요. 저는 그걸 아민이 덕분에 느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을 찍기 위해 경희 씨와 대학로 방송통신대학교 뒷길을 거닐었다. 그녀는 촬영도 잠시 잊은 듯 길가에 핀 꽃의 이름을 읊으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쏟아냈다. 멋진 할머니를 둔 아민이가 내심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조부모는 손주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역할을 맡는다.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그랬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부모의 역할과 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조부모의 모습을 통해 좋은 조부모로서 갖춰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당신은 어머니의 형상을 한 천사였어요. 내가 넘어질 때면, 당신이 와 날 잡아주겠죠. 날개를 펼친 모습으로 멀어질 테죠. 그리고 신이 당신을 데리고 돌아갈 때,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집에 돌아왔구나.’ 영국 출신의 1991년생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이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Supermarket Flowers’의 가사다.
그는 뛰어난 작곡 실력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2010년대 전 세계 음악 시장을 휩쓸었다. 인지도와 수익 등을 고려했을 때 세계적으로 뛰어난 아티스트로 손꼽힌다. 그는 “좋든 나쁘든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저의 첫 반응은 기타를 잡는 것입니다”라고 할 만큼 일상 속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앞서 소개한 곡은 외할머니 사후에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곡으로, 어머니의 관점에서 쓴 가사다.
가수로서의 명성도 대단하지만 효손으로도 유명하다. 한창 앨범을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하는 와중에도 당시 아프셨던 외할머니의 병동에 매일 찾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에는 ‘Nancy Mulligan’이란 곡이 있다. 곡 제목은 외할머니의 이름에서 따왔고, 이 노래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사랑 얘기를 그리고 있다. 그가 이렇게까지 외할머니를 아꼈던 것은 그의 과거와 무관하지 않다.
학창 시절 그는 빨간 머리 때문에 생강 소년으로 불렸고, 어릴 때 잘못된 수술로 인해 말을 더듬는 증세가 있었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학교 내에서 왕따를 당했다. 무명 시절에는 노숙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SNS를 통해 그의 실력이 입소문 나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가수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노랫말처럼 외할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격대교육과 학조부모
조부모는 사랑을 전해주는 ‘천사’의 역할과 더불어 지혜의 ‘길잡이’ 역할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격대교육’이 있었다. 격대교육이란 조부모가 부모를 대신해 손주를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에 따르면 포손불포자(抱孫不抱子)라 하여, 군자라면 손주는 안아도 아들은 안지 않는다고 했다. 격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굳이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 이유는 ‘맹자’에 나온다. ‘맹자’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아버지가 자식을 직접 가르치면 기대가 지나치기 때문에 오히려 갈등이 생긴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 세대를 건너뛰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퇴계 이황 선생은 맏손주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격대교육을 했다고 전해진다. 시대가 달라도 말하는 주제는 비슷했다. 특히 맏손주가 과거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소식을 듣고 꾸중하는 편지를 보내서 손주를 타일렀다. 퇴계 선생은 과거 공부를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한 가정의 가장이자 사회인으로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장려했기에 과거 공부를 게을리하는 손주를 혼낸 것이다.
또한 원칙과 도리를 지키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할 것을 늘 당부했다. 예를 들어 손주가 조정 대신을 많이 안다고 동네방네 자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손주의 태도를 나무라기도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천하고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은 평소에 출처가 불분명한 물건은 받지 않았고,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손주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퇴계의 마지막 30일을 담은 문집을 쓴 이가 바로 맏손주다.
그렇다면 현재 조부모의 모습은 어떨까? 세월이 지나도 손주에 대한 교육열과 관심은 높다. 이른바 ‘학조부모’란 신조어도 탄생했다. 학부모와 조부모의 합성어로, 육아뿐만 아니라 취학 후에도 조부모가 손주의 교육을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할머니 치맛바람이 거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아동 및 청소년 교육 전문가는 “공개수업이나 상담에 참여하는 학부모님 가운데 조부모님이 많다. 조손 가정이 아니더라도 맞벌이 가정의 경우 조부모님이 학교에 오시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손주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대한 열의는 좋지만, 사랑이라는 이유로 손주를 너무 다그치면 안 된다. 잘되라는 뜻으로 하는 얘기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반복되거나 듣기 싫은 말이 되면 잔소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손주에게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김대성 부산시교육청 학부모교육 강사는 “전달할 내용을 무조건 단호하게 말하기보다는, 따뜻한 태도로 공감하는 표현을 먼저 하고 난 뒤에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지혜의 길잡이로서 지혜 전수도 좋지만, 손주에 대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좋은 조부모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3계명
❶ 마음 상태를 고려 ▶ ‘걱정’이라는 명분 아래 하는 말이지만 손주가 듣기 불편해한다면 그 말은 안 하는 것이 좋다. 잔소리와 조언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말하기 전에 손주의 마음 상태를 고려하자.
❷ 말은 따뜻하게 ▶ ‘개인’을 중요시하는 손주 세대의 특성을 고려하여, 그들의 마음 상태를 공감하고 따뜻한 표현을 써보자. 사실에 기반하는 것보다는 그 사실로 인한 아이의 마음 상태를 생각하자.
❸ 칭찬으로 자신감 UP ▶ 아이들은 칭찬을 받을수록 자신감이 올라간다. 사소한 부분일지라도 반복적으로 칭찬을 해주는 것이 좋다. 칭찬을 많이 받을수록 손주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무얼 믿은 걸까 부족했던 내게서. 나조차 못 믿던 내게 여태 머문 사람. 무얼 봤던 걸까 가진 것도 없던 내게. 무작정 내 손을 잡아 날 이끈 사람. 최고였어. 그대 눈 속에 비친 내 모습. 이제는 내게서 그댈 비춰줄게.’ 트로트계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임영웅이 지난해 경연대회에서 우승 후 발표한 노래 ‘이제 나만 믿어요’의 가사 중 일부다.
이 곡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고마움을 담은 곡인데,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누구였을까? 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성공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외할머니와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다”고 했다. 노랫말처럼 부족한 그를 이끌어주고 손을 잡아준 사람은 바로 오랜 세월 든든한 버팀목이자 응원군을 자처했던 외할머니와 어머니였다.
특히 그는 외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각별하다. 아무리 바빠도 외할머니에게 꼬박꼬박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살뜰하게 외할머니를 챙기는 이유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로부터 보살핌을 받은 경험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어머니는 홀로 미용실을 운영하며 그를 키워야만 했다. 어머니가 일하는 동안 그를 보살폈던 존재가 바로 외할머니였다. 이러한 덕분에 유대가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외할머니는 또 다른 어머니 같은 존재였을지도.
그는 무명 시절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알바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가수의 꿈을 놓지 않았다. 유년 시절의 고난과 무명 가수로서의 생활고와 시련을 극복하고 멋진 가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외할머니로부터 받은 사랑 덕분일지도 모른다.
부디 그가 초심을 잃지 않고, 외할머니의 가르침을 본받아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음악인이기를 바란다. 인기는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인격은 대를 이어 꾸준히 지속되는 것이기에.
성숙한 인간으로 같이 성장
우리가 흔히 말하는 ‘효’의 근본은 부모에게 잘하는 것만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바를 충실히 하고, 도리에 맞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옛 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효가 모든 일의 근본이라 불리는 이유다. 따라서 진정한 효도는 먼저 본인의 건강과 올바른 생활을 잘 지키는 것이다. 자식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부모, 조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조부모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고, 자주 뵙고, 그들의 소소한 바람을 이루어드리는 것은 그다음이다.
지금 자녀나 손주가 효도하고 있다면 잘 살아왔다는 증거다. 반대로 자녀나 손자와 손녀들의 행동이 불효하는 것처럼 여겨져서 서운하다면, 그 이유를 잘 살펴보고 그것을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녀와 소통을 해야 한다. 지난 세월 자녀와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 그들이 원하는 소통 방식으로 접근하는 건 어떨까? 자녀들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면, 그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까.
친밀감의 표현을 모르고 살아왔던 아버지는, 친밀감을 박탈당했던 아들이 손자에게 어떻게 친밀감과 따뜻함을 표현하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무엇을 원했고,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배우게 될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손자를 대해보자.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다.
마찬가지로 화를 잘 내던 어머니 때문에 인내심을 배운 딸이 손녀를 대하는 방식을 보며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손녀의 입장을 헤아려보자.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딸이 어머니에게서 무엇을 원했고, 아직도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서로를 보고 배우며 이해하게 될 때, 부모와 자녀는 진정한 소통과 교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란 손주들도 자연스레 조부모에게 효를 다할 것이다. 그렇게 부모도, 자녀도, 손주도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만 믿어요 - 임영웅
이 곡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불러도 좋다. 현재 임영웅은 트로트계의 대세로 불리지만, 이전까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수로서 무명 시절이 길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카페, 편의점, 식당 등에서 일했고 데뷔 후에도 군밤을 팔아야 했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에서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변함없이 응원해주었던 외할머니와 어머니 덕분이었다. 고단한 시절을 같이 보낸 두 분에 대한 위로와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을 담은 이 곡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지독한 연습벌레로 불리며 무명 시절에도 매일 10시간 이상 노래 연습을 했다. 이 노래의 작곡을 맡은 조영수 작곡가는 ‘가사를 이야기하듯 전달하는 능력’을 그의 장점으로 꼽았다.
영화 ‘미나리’에서 제이콥과 모니카가 건강이 나쁜 손자 데이빗을 위해서 친할머니 대신 외할머니를 부른다. 많은 엄마들도 모니카처럼 친할머니 대신 외할머니의 도움을 받아 자녀를 양육한다. 그런데 이 같은 결정은 과학적으로 보면 매우 현명한 선택이다.
영화 ‘미나리’에서 모니카는 병아리 감별사로 맞벌이를 해야 하는 사정이 발생한다. 이에 심장이 좋지 않은 아들 ‘데이빗’과 여동생 ‘앤’을 돌봐줄 사람으로 한국에 있는 엄마 ‘순자(윤여정)’를 미국으로 부른다.
데이빗은 처음 만난 낯선 할머니가 진짜 할머니 같지 않다고 투덜댄다. 게다가 다른 집 할머니들처럼 맛있는 쿠키를 구워주지도 않는다. 데이빗은 서툰 한국말과 영어로 외할머니가 싫다고 말하지만 순자는 반대로 알아듣고 기뻐한다. 갈수록 나빠지던 둘의 사이는 옷장 사고를 계기로 가까워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순자가 외할머니가 아니고 친할머니였으면 어땠을까? 친할머니였다면 사이가 계속 나쁜 채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과학적으로 보면 손자는 외할머니가 친할머니보다 더 가깝기 때문이다. 유전적으로 외할머니는 손자와 손녀와 비슷하게 가깝고, 친할머니는 손녀와 가장 가깝다.
실제 과학적인 연구에서도 손자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반면 손녀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가장 높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레슬리 냅 교수 연구진은 할머니들의 손주 사랑이 유전자와 관계가 있다고 믿고 관련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2009년까지 일본과 에티오피아, 감비아, 말라위의 농촌지역, 독일과 영국, 캐나다의 도시 지역 인구변화를 분석했다.
연구진은 2009년 10월 28일 국제학술지 ‘왕립학회보 B’에서 7개 국가의 인구변화 자료를 분석해 손자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높고, 손녀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높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XY성염색체를 토대로 조부모와 손주의 관계를 단순하게 분석해보면 손자는 친할아버지로부터 Y염색체를 받고,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로부터 X염색체를 받는다. 반면 손녀는 친할머니로부터 X염색체 하나를 받고, 나머지 X염색체를 외할머니나 외할아버지로부터 받는다.
비율로 따지면 손녀는 친할머니와 X염색체를 50% 공유하고, 외할머니와는 X염색체를 25% 공유한다. 반면 손자는 외할머니와 X염색체를 25% 공유하고, 친할머니와는 관계가 전혀 없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전체 유전자 중에서 X염색체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8%에 얼마되지 않는다. 이처럼 X염색체는 전체 유전자로 볼 때는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손녀와 손자에게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일까? 과학적으로는 할머니가 손주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연구진은 “할머니가 전해준 특정 유전자가 손주의 생존을 더 유리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X염색체에 지능처럼 생존에 아주 중요한 유전자가 있어서 생존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할머니 배우 윤여정이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품으며, 한국 영화사를 새롭게 썼다.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에서 외손주를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간 외할머니를 전형적인 할머니에서 벗어나 유쾌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연기로 호평받았다.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다른 4명의 여우조연상 후보를 제치고 얻은 영예다. '보랏 서브시퀀트 무비필름'의 마리야 바칼로바, '힐빌리의 노래'의 글렌 클로스, '더 파더'의 올리비아 콜먼, '맹크'의 어맨다 사이프리드가 경쟁자였다.
특히 한국 배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연기상을 받은 건 한국 영화 102년 역사에서 처음이다. 아시아계 배우로는 두 번째다. 1958년 제1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일본 우메키 미요시가 영화 '사요나라'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로 63년 만이다.
윤여정은 1947년에 태어나, 한양대 재학시절인 1966년 연극배우와 T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잘 해 어머니에게 의사가 되기를 기대받았다. 하지만 이화여고 재학시절 위염으로 인해 결석이 잦아지면서 성적이 떨어지자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일흔이 넘어 처음으로 재미교포 2세가 찍는 미국 독립영화에 도움을 주겠다는 마음으로 출연해 뜻하지 않은 성과를 낸 셈이다.
이날 시상식에서 윤여정은 재치 있는 수상소감으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는 무대 오른쪽에 서 있던 시상자 브래드 피트를 향해 “드디어 만났군요. 우리가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영화 찍을 때 어디 계셨나요?”라는 농담으로 관객을 웃겼다. 브래드 피트는 영화 ‘미나리’의 공동제작사인 플랜B 대표다. 영화 관계자이지만 촬영 현장에서 만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어 자신을 낯설어할 영미권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한국에서 온 윤여정”이라고 말하며 “유럽 사람들은 제 이름을 ‘여여’라고 하거나 그냥 ‘유정’이라고 부르는데 오늘 밤만은 모두 용서해드리겠다”고 말했다. 또 “아시아에서 자라면서 TV로만 보던 오스카 시상식에 온 게 믿기지 않는다”며 “이제 정신을 좀 가다듬어야겠다”고 덧붙였다. 예상치 못한 윤여정의 농담에 객석에서는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다른 배우들에게도 예우를 표했다. 그는 “내가 어떻게 글렌 클로스 같은 대배우와 경쟁을 하겠느냐. 그의 훌륭한 연기를 너무 많이 봤다”며 ‘힐빌리의 노래’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글렌 클로스에게 찬사를 보냈다. 이어 “다섯 명의 배우들은 다른 작품에서 모두 승자다”며 “내가 운이 더 있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아카데미 관객들을 빵터트린 수상소감 하이라이트는 미국에 살고 있는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두 아들이 자꾸 일하러 나가라고 했다”며 “덕분에 엄마가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랬더니 이런 상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윤여정은 미국으로 이민을 간 딸 모니카(한예리) 부부를 돕고,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건너간 외할머니 순자를 연기했다.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전형적인 한국 할머니의 틀에서 벗어났다. 영화에서 외손자 데이빗이 "할머니는 진짜 할머니 같지 않아요"라고 외칠 정도다.
손주를 사랑하지만 손주가 부리는 응석에 끌려다니지도 않는다. 또 손주들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고약한 말도 서슴없이 던진다. 많은 매체들은 윤여정이 "독특한 할머니 순자를 연기했다"고 평가했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에 대해 한 시니어 독자는 “세계에서 한국 할머니의 좋은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며 “시니어들은 그들에게 맞는 역할이 있다면 잘 수행할 수 있다.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