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1인자’로 꼽히는 정미순 조향사(57).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향수를 만드는 그녀에게서는 어떤 향이 날지 궁금했다. 인터뷰 당일 뿌린 향수를 묻자 “저는 사실 향수를 잘 안 뿌린다”는 반전의 답이 돌아왔다. 다양한 향을 테스트하고 향수를 개발하는 것이 직업이기 때문. 그래서일까. 그녀에게서는 인간 본연에서 나오는 향이 더 짙게 느껴졌다.
데이트 장소를 향해 두근거리며 걸어가는 여대생이 떠오르는 향, 숲속을 걷는 듯한 착각을 안겨주는 향, 중세 유럽의 쓸쓸한 느낌이 드는 향…. 정미순 조향사의 손끝에서 탄생한 향수에서는 다양한 향이 났다. 그리고 그 향수들의 어머니답게 그녀는 모든 향을 품었다.
향수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처음 느껴지는 향을 톱 노트, 그 다음에 느껴지는 향을 미들 노트, 마지막으로 보통 잔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라스트 노트(베이스 노트)라고 한다. 정미순 조향사는 향수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진짜 자신의 향을 내뿜었다. 그녀의 톱 노트는 수수했고, 이야기를 하면서 편안해지자 밝고 열정적인 미들 노트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의 라스트 노트는 향기를 만드는 예술가답게 통통 튀며 사랑스러웠다.
“향기란 저의 삶, 일생의 동반자 같아요. ‘조향사’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도 향기 덕분이고, 향기를 지금까지 놓지 않고 가져가고 있기 때문이에요. 친구, 연인, 가족… 저에게 향기란 그런 존재 아닐까요?”
척박한 불모지 개척
향수뿐만 아니라 화장품, 디퓨저, 향초 등, ‘향’은 우리의 삶 곳곳에 녹아 있다. 그러면서 향을 업으로 삼는 조향사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전문적인 조향사가 아니더라도 공방을 차릴 수 있고, 취미로 향수 만들기도 가능하다.
조향사는 정확히 무엇을 하는 직업일까. 조향사는 여러 향료를 섞어 새로운 향을 만들거나, 제품에 향을 덧입히는 등의 일을 하는 향료 전문가 또는 향료를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직종을 일컫는다. 화장품 향료나 향수를 다루는 향장품연구자 퍼퓨머(Perfumer), 식품 향료를 다루는 플레이버리스트(Flavorist)로 세분하기도 한다.
그러나 10여 년 전만 해도 향 산업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다. 2002년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정미순 조향사가 1세대라니 말 다하지 않았나. 그전에는 더욱 척박했다. 그녀 또한 조향사가 되기까지 쉽지 않았다. 포기의 순간도 있었다.
그녀는 중학생 때 에스티 로더 여사의 전기를 읽고 조향사의 꿈을 갖게 됐다. 에스티 로더가 조향사로 화장품 업계에 입문했던 것. 정미순 조향사는 대학교 전공도 에스티 로더를 따랐고, 연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공부 잘하는 딸이 미래가 불투명한 직업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를 마주하는 것은 당연했다.
“에스티 로더 여사가 화학 공부를 했다는 것이 책에 한 줄 써 있었나 그랬어요. 화학을 전공해야 조향사가 될 것 같았어요. 당시 부모님은 약대를 가라고 하셨죠. 부모님과 의견 충돌이 좀 컸어요. 부모님은 현실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갖길 바라신 거죠. 조향사는 워낙 잘 알려지지 않은 직업이었기에 ‘밥 먹고 살 수 있냐’고 걱정하셨어요. 저는 밥 먹고 살 수 없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재밌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약대를 가고 약사를 했어도 결국에는 향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어떤 일을 했어도 저는 결국 향으로 넘어왔을 것 같아요. 시기만 늦어졌겠죠.”
정미순 조향사는 대학교 졸업 후 일반 기업체에 입사했다. 회사 생활을 3년 정도 한 그녀는 잊고 있던 조향사라는 꿈을 떠올리고는, 회사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향수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프랑스에 가는 대신 가까운 일본으로 떠났고, 도쿄 미아조향학원을 다녔다. 3년 동안 공부에 매진해 교육을 수료했다.
그러나 조향사가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정미순 조향사는 다시 수입 화장품 회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2002년 출장으로 프랑스의 향수 도시 그라스에 가면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았다. 그라스는 인구 60% 이상이 향수 관련 산업에 종사하며, 프랑스에서도 향수의 본고장으로 통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정미순 조향사는 향수 회사 갈리마드(Galimard)의 대표를 만났다. 갈리마드는 약 270년의 역사를 지녔으며 프랑스 왕실 향수로 유명하다. 갈리마드에는 조향 체험을 할 수 있는 퍼퓸 스튜디오가 있었는데, 그녀는 직접 예약하고 그곳을 찾아갔다. 갈리마드 대표는 향에 대한 그녀의 진심을 알아봤는지 한국에 갈리마드 스튜디오를 열어볼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귀국 후 정미순 조향사는 갈리마드 스튜디오를 오픈했다. 외국에나 있던 퍼퓸 스튜디오 개념을 국내에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다. 그녀는 조향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원으로 발전시켰다. 국내에 마땅한 교육 기관이 없었고, 자신과 같은 꿈을 가진 후배들이 많이 양성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1세대 조향사’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사실 저는 1세대 조향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처음 하셨던 분도 있고, 저의 스승님도 계세요. 섬유 회사를 운영하시던 박재덕 선생님인데 제가 학원을 차린 후 먼저 연락하셨어요. 선생님께서 저희 학원에서 플레이버 수업을 하셨고, 제가 첫 제자가 됐죠. 그래서 대한민국 1호 조향사라고 하면 부담스러워요. 제가 조향사로서 처음 한 것은 조향 교육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한 거죠. 또 프리랜서로서 독립 조향사는 처음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쉽지 않았던 홀로서기
갈리마드는 조향사로 그녀의 이름을 알리게 해줬지만, 현재는 ‘애증’의 존재다. 고마운 은인이 상처를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정미순 조향사는 갈리마드와 퍼퓸 스튜디오 계약을 맺고 활동해왔다. 향수 수입 판매는 안 했다. 그런데 갈리마드가 국내의 다른 회사와 향수 수입과 관련해 이중 계약을 맺었고, 정미순 조향사와는 결별을 원했다.
이에 2013년 갈리마드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지엔(GN) 퍼퓸&플레이버 스쿨’(이하 ‘지엔 퍼퓸’)로 이름을 변경했다. 홀로서기에 나선 그녀에게 갈리마드는 소송을 걸었고,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소송으로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정미순 조향사는 “좋은 관계로 끝낼 수도 있었는데 굳이 소송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저도 그때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막막했는데, 그 업체(다른 파트너사)가 저를 매도한 거예요. 계약 종료 후 저는 바꾼다고 다 바꿨는데, 기존의 기사를 내릴 수는 없잖아요. 정리가 안 된 부분이 있었겠죠. 그런데 그걸 영업 방해 명목으로 세 개 정도 소송을 건 거예요. 그때 만약 합의를 했으면 영업을 방해하고 갈리마드 이름을 고의적으로 도용했다는 불명예스런 결과가 남는 거였죠. 제 명예도 있고 제자들의 명예도 있어서 소송을 했어요. 1년 넘게 소송을 했는데, 저는 정당하고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세 개 다 승소했죠.”
힘들었던 시간은 다행히 전화위복이 됐다. 오히려 단단해졌다. 당시를 회상하며 정미순 조향사는 “소송을 당한 자체로 제가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지인들이나 제자들이 진정성을 알아주고 힘을 실어줘서 잘 극복했다”면서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다”고 짚었다.
과거에는 갈리마드라는 이름을 보고 스튜디오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정미순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보고 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지엔 퍼퓸은 현재 아카데미, 공방, 향수 회사, 향료 회사까지, 크게 네 가지 사업을 한다. 조향사 자격증 취득도 가능하다. 정미순 조향사는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해내면서 점점 발전하는 향수 산업에 큰 기여를 했다.
“조향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안정적인 직업으로 보기는 어려웠어요. 조향사라는 일을 관심 있어 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공방이나 아카데미를 찾아와 배웠으니까요. 이제는 향에 대한 수요가 많이 생겼죠. 브랜드에서도 향수를 만들어달라고 하고, 셀럽 향수 제의도 들어오죠. 셀럽 향수는 연예인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담은 향수를 출시하는 거예요. 그룹 신화와 비가 생각나는데, 비는 공연이 무산돼서 출시는 못 했어요. 언젠가는 가수 박효신 씨의 향수를 만들고 싶어요!”
조향사로 저명해진 그녀는 2021년 2월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도 출연했다. 인기 프로답게 인지도가 더욱 높아졌다. 방송을 보면 정미순 조향사는 유재석, 조세호에게 즉석에서 향수를 만들어준다. 이에 대해 그녀는 “유재석 씨는 시원하고 깔끔한 향을 좋아하고, 조세호 씨는 파워가 있는 향을 좋아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고를 것 같은 향을 예측해서 갔는데 그대로 고르더라”고 설명했다. 또한 배려심 넘치는 유재석을 보면서 ‘괜히 톱 MC가 아니구나’를 느꼈다고 후기를 전했다.
자연과 예술에서 조향의 영감 받아
정미순 조향사는 현재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면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한 달에 2주는 서울에, 2주는 제주도에 있는 격이다. 서울 방배동에 있던 국내 유일의 향수 박물관 ‘뮤제 드 파팡’이 제주도로 이전했고,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다. 그곳에서는 원데이 클래스로 자신만의 향수도 만들 수 있다.
“프랑스 그라스에 향수 국제 박물관이 있는데, 뮤제 드 파팡은 그것의 작은 버전이라고 생각해요. 향료를 추출하는 원재료가 심겨 있고, 향도 맡아볼 수 있고, 향을 추출하는 과정, 조향 과정도 볼 수 있어요. 찾아오시는 분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는데, ‘자연 속에 향수 박물관이 있구나’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 향수의 히스토리도 듣고 소재가 되는 식물들도 보고 하니 재밌고 신기하죠. 정원도 더 가꾸고, 점점 더 확장시킬 계획이에요.”
정미순 조향사는 어릴 때부터 자연의 향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앞집 정원에서 피어나는 장미꽃 향이 좋아서 매일 저녁마다 향을 맡았다고. 자연의 향기들로 이어진 조향사의 삶. 그녀는 제주도에 머물면서 새로운 한국적인 향을 만들 계획이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고 싶어서 제주도에 내려간 것도 있어요. 자연이 저한테 영감을 많이 준 것 같아요. 제주도의 산이나 바다, 바람 부는 것, 해가 뜨고 지는 것…. 이런 자연 속에서 영감을 받아 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무슨 향을 만들지 정한 것은 없어요. 지금은 동백꽃이 많이 피어 있으니 동백꽃을 향으로 표현해볼 생각이에요. 그 계절, 일상이 반영되는 거죠.”
조향사로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역시 자신이 만든 향수가 대중한테 사랑받을 때다. 다른 브랜드와 협업한 것을 제외하고 지엔 퍼퓸에서 만든 향수는 15개, 제자들과 같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든 향수는 10개라고 한다. 그중 정미순 조향사의 마음을 사로잡은 향수는 무엇일까.
“제가 처음 만든 향수가 맥앤로건 화이트예요. 지금은 라이선스가 끝나서 ‘지엔 화이트’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베스트 셀링된 향수예요. 그리고 최근에 마지막으로 만든 향수는 ‘디야’라고 하는데, 류시화 시인님이 지어주셨어요. 인도 관련 시집의 북 퍼퓸이었고, 샌들우드 향수로 만들었죠. 또 하나는 ‘웜홀’이라는 향수가 있어요. 신비로운 느낌을 주기 위해서 ‘먹 향’을 썼어요. 개성 있다고 생각하는데 해외에서는 반응이 좋았던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한테는 생소했죠. 그런데 그 향을 꾸준히 찾는 마니아층이 생겨서 뿌듯하더라고요.”
이처럼 정미순 조향사는 자연이든 어떠한 이야기든 영감을 받아 향으로 표현하고 있다. 향을 표현의 예술로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녀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보고 만든 향수가 있다. 수녀의 이야기인데 오래된 성당에 들어갔을 때의 느낌을 줬다. 향을 맡은 분들이 공감해줘서 보람을 느꼈다”면서 “앞으로도 스토리가 있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향을 만들겠다”는 각오를 덧붙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감 중 후각으로 일하는 조향사에게 코 관리는 생명이다. 그녀는 조향사가 된 이후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코와 건강관리를 하는 것. 조향사로서 향에 대한 진심이 느껴졌다. 20년 동안 향을 맡았고 약 2000개의 향을 구별할 경지에 올랐지만, 그녀는 여전히 향이 지겹지 않고 좋다. 척박한 불모지에 향을 퍼뜨린 정미순 조향사는 앞으로도 향과 함께하는 삶을 걸을 예정이다.
“저는 향을 계속 만들어나갈 거예요. 대중한테 좋은 향을 만들어서 선보여야죠. 또 개인적으로는 제주에서 뮤제 드 파팡을 좀 더 생각하는 그림으로 키우고, 제자들이 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후각은 사실 신체의 노화와 관련 있어서 60대 중반이 최대인 거 같아요. 앞으로 한 5년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에는 경험치로 향을 만들 거예요. 내 머릿속의 냄새를 맡아야죠. 조향사로서의 삶이 언젠가 끝날 거라는 생각은 안 해요.”
인터뷰를 위해 다시 만난 것은 3년 만의 일이었다. 처음 김석중(52) 키퍼스코리아 대표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소개됐을 때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다. 길게 길러 뒤로 묶은 머리와 유품정리 과정에서 허락을 받아 쓰고 있던 작은 캐리어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은 마치 모험을 떠나는 여행가 았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 그는 국내의 대표적인 유품정리사로 손꼽히는 유명인이 되었다. 유재석과 함께 TV에도 얼굴을 비췄고, 대학 강단에도 섰다.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는 이제 그가 양복 차림이 잘 어울리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러나 변치 않은 것도 있다. 유품정리 분야의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전히 도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안부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최근 ‘유품정리사’라는 직업은 우리에게 다소 친숙해진 듯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 투 헤븐 :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와 tvN의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이하 ‘유 퀴즈’) 등을 통해 이 직업이 대중에게 노출되면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그가 이 사업을 국내에 소개했을 때 유품정리 분야는 고독사한 시체 곁의 혈흔을 지우고 사용하던 물건을 처분하는 특수청소라는 인식이 강했다.
특수청소라는 사회적 인식 여전
“‘유 퀴즈’를 통해 소개되긴 했지만, 제 입장에선 많이 아쉬웠어요. 프로그램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감성적인 부분만 부각된 편집이었거든요. 저희가 하는 일에 대한 충분한 소개가 이뤄지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웠죠. 넷플릭스 드라마도 마찬가지예요. 특수청소의 연장선에 있는 직업으로 소개되었으니까요. 갑자기 사망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 살았던 흔적을 지우는 청소로 여기는 인식은 아직 여전한 것 같아요.”
실제로 그의 회사를 포털사이트에 기업 등록하는 과정에서도 유사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키퍼스코리아’를 장례 관련업에 포함시키고 싶었지만, 심사 과정에서 결국 폐기물업으로 등록되었단다. 그로서는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그간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사회의 변화가 조금씩 이뤄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변화의 요인으로 ‘유품에 대한 인식’을 꼽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품은 불길한 것 혹은 쓰레기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죽은 사람의 물건이니 함께 사라져야 한다는 거죠. 그러나 지금은 인식이 달라졌어요. 유품이 추억이 되기도 하고 재산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유품정리업이 한 단계 올라갈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됐어요.”
또 대중의 인식 변화로 ‘사자’(死者)의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본가를 정리한다는 개념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도 유품정리 분야의 의미 있는 변화로 봤다.
“단순히 부동산을 처분하기 위해 물건을 비운다는 개념이 아니라, 부모님을 추모하고 추도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유품정리사의 역할도 커지고 있어요. 무엇을 남길지, 버릴지 돕는 카운슬링 기능이 강화됐으니까요. 비우는 것이 아니라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우리 일이 된 셈이죠.”
우리에게 맞는 ‘한국식’ 추모 도입
그는 11년 전 키퍼스코리아를 창업하고 유품정리라는 생소한 분야를 국내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사업의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누가 내 유품을 정리할까?’라는 저서 발간을 꼽았다. 본지와의 첫 번째 만남의 계기이기도 하다.
“책이 나오고 나서 사회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죠. 학교로 들어가 장례학과에서 강의도 하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큰 변화는 유품정리라는 서비스 시스템을 되돌아보고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고인의 물건을 정리하는 것 이외에 법적인 소유권과 관련된 상속, 고인을 기리는 장례와 관련된 것까지 개념을 확장시키고 체계화한 것이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죠.”
그의 사업은 영감을 받은 NHK 다큐멘터리 ‘천국으로의 이사를 도와드립니다’의 주인공이자 일본 최초의 유품정리 회사 키퍼스 대표 요시다 다이치(吉田太一) 사장을 통해 2010년 시작됐다. 일본의 유품정리 시스템을 그대로 들여오다 보니 당연히 한국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일본 특유의 가타미와케(かたみわけ) 문화를 배경으로 한 일본식 유품정리는 물건의 가치나 본질보다는 고인과 관련된 ‘추억’을 정리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것을 우리만의 시스템으로 변화시켜 한국식 매뉴얼을 만드는 데 10년 걸렸어요. 그 기간 한국에서 노력했던 과정을 일본 키퍼스에서도 오롯이 지켜봤기 때문에, 한국식 유품정리로 변화하고 자리 잡는 것을 응원하고 있죠. 또 일본의 경우 유품정리 업체가 유품의 운송, 폐기처리, 재활용 등 모든 분야에 대한 권한을 허가받고 직접 처리하는 반면, 우리는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연결하고 컨트롤타워 역할만 한다는 것도 차이 나는 부분입니다.”
고인에 대한 추모 방식도 일본과는 다소 다르다. 일본의 경우 유품을 모아 한꺼번에 합동 공양을 드리지만, 김 대표는 집에서 먼저 공양을 드리는 것으로 바꿨다. 한국 정서에 맞게 축문으로 고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유품을 만지는 허락을 구하는 절차를 밟는다. 또 유품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모든 물건에 대한 기록을 만들어 다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변화를 통해 그간 우리에게 안 맞는 것처럼 느껴졌던 옷을 벗어버리고, 우리 몸에 맞는 것을 찾게 되었어요.”
유품정리, 장례지도학과 만나다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고 인지도가 높아지면 회사의 몸집을 키우거나 새로운 사업체를 만드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는 학교로 들어갔다. 기존의 ‘장례지도학’이라는 학문 분야에 유품정리를 접목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10년 전 전국의 장례 관련 학과 교수를 대상으로 요시다 다이치 대표의 특강을 진행한 적이 있어요. 이 순회강연을 계기로 각 대학 교수들과 인연을 이어나갔는데, 학교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학교도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었죠. 장례지도사를 선택해 입학한 학생들이 사회적 편견이나 장례지도사 업무 영역의 한계 때문에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거든요. 지금의 업무 범위는 ‘장례식장’을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더 나은 새로운 사업적 시도나 변신을 꾀하기 힘든 한계가 있었어요.”
그는 대학의 커리큘럼 자체가 전통 장례에 매몰되어 있는 것을 문제점으로 꼽았다. 적어도 상속법이나 유품의 행정처리를 위한 관련법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어야 하고, 사회적인 서비스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가 학교에서 일본의 장례나 죽음 준비에 대한 ‘엔딩 산업’을 한국에 맞게 학문적으로 적용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품정리 사회적 관심 중요
그렇다면 앞으로 유품정리 분야는 어떻게 바뀔까. 김 대표는 급격한 증가가 예상되는 사망자 수와 그로 인한 유품의 증가가 한국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도 매년 30만 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오고 있어요. 베이비붐 세대가 본격적으로 사망하기 시작하면 그 숫자는 50만을 훌쩍 뛰어넘을 겁니다. 이 세대는 갖고 있는 물건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한국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절약이 몸에 밴 세대죠. 이분들이 갖고 있는 물건, 그 물건의 역사적 가치가 동시다발적으로 사라질 겁니다.”
베이비붐 세대 할아버지, 아버지를 통해 일제강점기와 8·15 광복, 한국전쟁 등 우리의 역사와 연관된 수많은 사료가 가보로 전해 내려왔지만, 가치를 제대로 알기 어려운 자녀 세대에 이르러 버려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격동의 시대에 대한 역사적 자료의 보고인데, 아직 그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아요. 일본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단카이(団塊) 세대의 유품정리를 고고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죠. 역사적 증언과 증거물 확보를 위한 생전정리도 이뤄지고 있고요. 우리도 이와 같은 사회적 합의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두는 생전정리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래된 물건의 인기가 올라가고 찾는 이가 많아지고 있어, 고령층이 보유하고 있는 물건의 경제적 가치도 오를 것이란 전망이다. 결국 생전정리가 노년층의 또 다른 자금 확보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환경적으로도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률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생전정리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흔히 생전정리라고 하면 죽기 전에 갖고 있는 물건을 처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후에 어떻게 정리할지 미리 정해놓고 그 우선순위에 맞춰 물건을 정리하는 시기를 결정하는 겁니다.”
생태계 조성 위한 플랫폼 구축 희망
그렇다면 키퍼스코리아의 미래는 무엇일까? 그는 ‘장례·유품정리·상속 플랫폼’이라고 정의하고, 죽음을 준비하고 장례를 치르는 모든 과정에 대한 정보와 서비스를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례·유품정리·상속 분야의 전문가를 한자리에 모을 예정입니다. 한 번의 상담으로 모든 과정에 대한 고민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죠. 일반적인 플랫폼과 다른 점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저희의 검증을 거친다는 점이에요. 고객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고, 불필요한 지출을 방지하도록 담합이나 바가지요금이 불가능한 구조를 만들려고 합니다.”
장례·유품정리·상속 생태계가 조성돼 양성화되고 산업적으로 고도화되기를 그는 희망하고 있다. 죽음과 그 과정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고 소수에 의해 음지에서 진행되는 구조로는 발전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장례·유품정리·상속 분야의 산업화가 국가적으로 큰 기여를 할 거라고 믿어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상속과 증여가 활성화되면 세수 확보에도 유리하죠. 환경 측면에서도 일회용품을 줄일 수 있고요. 또 유산을 둘러싼 상속 분쟁이나 가족관계 악화를 방지하고, 고독사 예방도 가능하죠. 새로운 생태계로 변화한다면 소모적인 부분을 생산적으로 바꿀 수 있고,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나의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에서, 나의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디타에서.(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
-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는 쿠바 체류시절 두 가지 칵테일을 즐겨 마셨는데, 그 술이 ‘모히토’와 ‘다이키리’다. 헤밍웨이는 매일 아침 ‘라 보데기타’에서 모히토를 마시며 아침을 시작하고, ‘엘 플로리디타’에서 한 번에 열 잔 넘게 다이키리를 마셨을 정도로 두 술을 사랑했다고 한다. 헤밍웨이가 저서에서 선보인 뛰어난 영감이 술에서 비롯됐다는 말까지 나온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있는 라 보데기타와 엘 플로리디타에 가면 헤밍웨이의 흔적을 좇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그만큼 헤밍웨이와 책을 사랑하는, 그리고 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다는 얘기가 아닐까.
집중과 사색이 필요한 독서에 몸의 긴장을 푸는 술이라니, 언뜻 책과 술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헤밍웨이의 팬뿐 아니라 한국에도 술과 책을 동시에 즐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시작은 2013년 상암동에 생긴 ‘북바이북’이다.
북바이북은 책과 맥주를 합한 ‘책맥’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곳이다. 칵테일과 커피를 파는 ‘부장고’, 요리책 전문 책방 ‘쿡쿠프’, 일본의 대표적인 책방 ‘츠타야’ 등 김진양 북바이북 대표가 일본 책방들을 발이 부르트도록 찾아다니며 참고한 덕분에 한국에 북바이북이 등장했다. 최근에는 ‘책바’가 주목받고 있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소개되고 김영하 작가의 방문으로 입소문을 탔다. 술의 향기에 젖은 독서의 매력을 알아보기 위해 대표적인 ‘술 마시는 책방’ 두 곳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직접 체험해봤다.
‘책맥’을 처음 선보인 북바이북
상암동에서 시작한 북바이북은 현재는 광화문에서 통합점을 운영하고 있다. 광화문역 1번 출구에서 바로 보이는 건물 1층으로 들어가면 된다. 띄엄띄엄 떨어진 좌석, 서가에 정갈하게 꽂힌 책들을 보면 평범한 동네서점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을 열고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음료와 디저트, 맥주를 판매하는 카운터와 책방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커피와 차, 토스트, 약과까지 메뉴도 다양하다. 카운터를 지나자 포스트잇에 적힌 방문객들의 방명록으로 빼곡히 채워진 벽면이 나타난다.
북바이북은 책을 읽으면서 맥주를 함께 즐기고 싶은 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다양한 메뉴가 있지만 스페인식 레몬 맥주 ‘끌라라’가 북바이북의 대표 메뉴다. 기자는 중고책 서가에서 북바이북 로고가 찍힌 ‘무진기행’을 선택했다. 중고라 정가의 30% 가격에 결제한 다음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투명한 캔에 담겨 나오는 끌라라에는 얇게 썬 레몬 두 조각이 띄워져 있다. 고려의 시조인 태조 왕건이 한 처녀에게 물을 청하자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줬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물을 급히 마시다 체할까 걱정돼 나뭇잎을 띄웠다는 처녀처럼,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다 취해서 책을 읽지 못하는 불상사를 우려한 마음이었을까. 의도야 어쨌든 덕분에 숨을 고르고 천천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양이 줄어들수록 맥주의 레몬 향이 더 강해진다. 적당히 취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든 잔 같은 느낌이다.
김진양 북바이북 대표는 책과 술의 조합에 대해 “북바이북에서 맥주는 책을, 독서를, 책이 있는 공간을 더욱 친근하게 만들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굳이 진지하지 않아도, 심각하지 않아도 책을 가까이할 수 있고, 책이 있어 편안한 공간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맥주”라고 설명했다.
좁지만 다양한 신청곡에 분위기가 바뀌는 책바
연희동에 가면 북적이는 바가 아닌, 책과 술을 즐기고 싶은 이들을 위한 조용한 공간 ‘책바’를 작은 골목에서 찾을 수 있다. 연희동 ‘사러가 쇼핑센터’ 맞은편에서 ‘현대부동산’과 ‘추앤추 한의원’ 사이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구석에 숨은 책바 입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는 처음이시죠? 반갑습니다.” 어렵게 책바에 도착하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책방 주인이 자리로 안내한다. 처음 들어선 책바는 공간이 협소하다. ‘바 안에서는 1~2명만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는 순간 책장이 열리면서 안쪽에 있는 자리가 나타났다. 버튼 하나로 책장이 열리고 닫히는,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경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책을 읽기에 책바는 어두운 분위기다. 하지만 자리마다 녹색 원통형 조명이 배치돼 있어 책을 읽는 데는 불편함이 없다. 자리에 앉으니 책방 주인이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그런데 메뉴판이 범상치 않다. 술의 도수에 따라 ‘시’, ‘에세이’, ‘소설’로 분류된다. 흥미로운 건 다양한 주종의 술과 더불어 술이 소개된 소설의 문구가 메뉴판에 함께 적혀 있다는 것이다. 소설 속 술을 직접 마셔보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마실 술을 골랐다면 이젠 책을 고를 차례다. 책바에서는 책을 판매하기도 하고, 빈손으로 온 고객을 위해 책을 대여하기도 한다.
서가에 꽂혀 있는 김훈 작가의 ‘라면을 끓이며’를 골랐다. 그리고 한때 ‘악마의 술’이라고 불린,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했다는 압생트를 주문했다. 이 술은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를 샀지만 실제 독성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향이 특이했다. 옅은 초록빛에 풀 냄새가 났다. 의외로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50도 이상인 술이기에 책을 읽으며 아주 조금씩 들이켰다.
책을 읽다 보니 금방 마감 시간이 다가왔다. 책바는 마감 시간이 가까워지면 바에 있는 손님들에게 마감 전 듣고 싶은 곡을 신청받는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요란한 음악은 신청하지 않는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신청한 다양한 곡을 들으니 분위기가 새롭게 바뀐다. 다 읽지 못한 책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 마감곡을 들으며 읽던 챕터를 마무리한 다음 자리를 털고 나왔다.
사라지는 책방, 시니어들의 선택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교보생명 창립자인 대산 신용호 전 회장은 반대를 무릅쓰고 광화문 금싸라기 땅에 교보문고를 만들면서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말했다. 종이책 세대인 시니어들은 지금 세대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책을 더 많이 읽고 좋아한다. 하지만 요즘은 시니어들조차 점점 책과 멀어지고 있다. 물론 시니어들의 잘못은 아니다. 책에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워진 환경 탓이다.
이런 상황을 증명이라도 하듯 최근 많은 책방이 사라지고 있다. 책을 사랑하는 배우 박정민이 운영하던 ‘책과 밤낮’, 25년간 은평구민들의 곁을 지켜왔던 ‘불광문고’가 올해 폐업했다. 대형서점도 예외가 아니다. 매출 기준으로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 이어 서점 업계 3위였던 ‘반디앤루니스’도 올해 33년 역사를 마무리했다. 올해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서 발간한 ‘2020 한국서점편람’에 따르면 국내 서점은 2003년 3589개에서 지난해 12월 기준 1976개로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가을이 되니 동네책방만의 개성과 분위기가 더 그리워진다. 책을 좋아하는 시니어라면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 도서관과 대형서점으로 한정되는 걸 아쉬워할 만하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려 해도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가 너무 많다. 손에 쥔 작은 스마트폰으로 누릴 수 있는 콘텐츠가 아주 많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흥미로움을 전한다. 서점이나 카페에서 오래 책을 읽자니 부담스럽다. 코로나19로 운영 시간이 짧아진 탓에 도서관 이용도 여의치 않다.
이런 상황이지만 책에 빠져보고 싶은 시니어가 있다면 술과 함께하기를 추천한다. 술이 긴장을 풀어줘 책에 더 편안히 스며들도록 돕기 때문이다. 독서의 계절 10월이 가기 전에 술이 깃든 책방에서 체험하는 새로운 책방 문화가 신선함을 전할 것이다. 술과 책,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조화를 경험하고 나오는 길에 문득 이런 문구가 떠올랐다. “나의 끌라라는 북바이북에서, 나의 압생트는 책바에서.”
최근 넷플릭스의 웹드라마 ‘무브 투 헤븐 :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와 tvN의 예능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 등을 통해 유품 정리사라는 직업이 재조명되면서, 유품 정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업계 전문가들은 베이비부머 세대의 사망 단계 진입이 본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쏟아지는 유품의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사후 정리만큼이나 생전 정리 역시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지난 2월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출생사망통계 결과를 살펴보면 지난 10년간 국내 사망자 수는 지속해서 늘어났다. 2010년에는 25만여 명이었던 사망자 수는 2020년 30만여 명으로 19.4% 증가했다. 많게는 800만 명 정도로 집계되는 베이비붐 세대의 사망으로 인해 본격적인 인구변동이 이뤄지면, 이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의 사망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유품을 어떻게 정리하느냐는 것. 현재 우리 사회에서 유품은 유족에 의해 정리되지 않으면 청소 업자 등을 통해 치워진다. 업자들은 중고 판매나 재활용이 가능한 제품들을 보물찾기처럼 선별한 후 나머지는 쓰레기와 함께 처리한다.
이런 방식의 경우 판매를 목적으로 선별이 이뤄지다 보니 대형 가전 등 ‘돈 되는’ 물건들 위주로 재활용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고, 판매가 만만치 않은 소형 가전이나 생활용품은 상태와 상관없이 버려지기 마련이다.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자료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냉장고, 세탁기, TV 등 대형 가전제품의 재활용은 관련법이 정한 의무량을 웃돌 정도로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통신사무기기나 소형기기의 경우 달성량이 의무량에 못 미치고 있는 상태다. 생전 정리를 통한 재활용이 아쉬운 이유다.
일본의 경우 고령층이 중고거래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물품을 정리해 나가는 생전 정리가 정착되는 단계에 있다. 이들은 이를 ‘종활’이라고 부르는데, 종활(終活, 슈카쓰)은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기 위한 다양한 준비 활동을 뜻하는 일본 사회의 신조어다.
일본 최대의 중고거래 플랫폼인 메루카리가 지난 3월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이 기업을 통해 중고거래에 참여한 60대 이상 이용자 수는 전년도보다 1.4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1인당 연평균 판매 물품의 수도 20대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이들은 지난 20일 일본의 ‘경로의 날’에 맞춰 고령자들이 중고거래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돕는 물품 세트를 무료로 배포하고, 고령자 대상의 온라인 교육도 진행했다. 늘어나는 고령 사용자의 입맛에 맞추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국내 플랫폼 업체들의 고령자 접근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인다.
국내에 유품 정리 서비스를 소개한 1세대인 키퍼스코리아의 김석중 대표는 “사망자 수가 증가하고 있는 것에 반해, 우리 사회의 생전 정리 혹은 유품 정리에 관한 인식은 아직 걸음마 단계”라며,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유품 정리 업체가 수거한 가전제품이 이재민의 재기를 위해 기부됐던 것을 예로 들었다. 그는 “생전 정리를 통해 물품이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돼 요긴하게 쓰일 수 있도록 제도나 관련 인프라의 개선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예년과 달랐던 지난해 명절 풍경. 아쉽고 서운하지만, 올해 역시 서로의 안위를 위해 거리를 둬야 하는 상황이다. 몸이 멀다고 해서 마음마저 멀어질 수는 없는 법. 온택트로 소통하고 비대면으로 연휴를 즐기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여느 해와는 다른, 코로나 시대의 명절 풍속도를 들여다봤다.
지난 1월 소셜커머스 티몬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가친척이 모여 명절을 보낸다는 이는 단 4%였다(티몬 고객 1043명 대상). 부모님만 뵙고 오겠다는 이들도 16%에 그쳤다. 자녀와 떨어져 사는 부모 세대라면 자식과 손주들을 보지 못해 섭섭한 마음이 클 터. 전화나 스마트폰 영상 통화로 안부를 전해도 좋지만, 좀 더 색다른 비대면 만남도 가능하다.
생방송으로 세배 받고 유튜브도 함께 보고
요즘은 다양한 기능을 접목한 영상 통화 서비스와 앱이 주목받고 있다. 그중 LG유플러스의 ‘U+tv 가족방송’은 IPTV를 통해 생방송 영상 통화가 가능하다. TV를 켜고 가족 채널 970번을 누른 뒤 발신자의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는 등 손쉬운 방법으로 연결이 된다. 스마트폰보다 훨씬 큰 TV 화면을 통해 영상을 제공하는 덕분에 시력이 안 좋은 시니어들도 실감 나고 편안하게 가족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장점을 살려 TV를 마주 보고 세배를 받거나, 차례 지내는 모습을 생중계하는 등 명절 분위기를 공유하면 좋다.
또, KT의 영상 통화 앱 ‘나를’(Narle)은 사용자 얼굴을 기반으로 만든 3D 아바타나 증강현실(AR) 스티커를 적용해 색다른 영상 통화가 가능하다. 최대 8명이 함께 그림 퀴즈, 마피아 게임을 즐기거나 유튜브 콘텐츠도 동시에 시청할 수 있다. KT는 지난해 해당 영상 통화 서비스를 일부 노인요양원에 지원해 아쉬워하는 가족들의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올해 또한 요양원 등 시설의 면회가 쉽지 않아, 이러한 서비스가 대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금 또는 건강·프리미엄 선물이 대세
지난해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의 리서치에 따르면, 부모님 명절 선물 1위는 현금(59.5%)이 가장 많았다(30~50대 남녀 3041명 대상). 같은 시기 60대 1001명에게 ‘자식에게 명절 용돈을 받으면 기분이 어떤가’라고 묻자, ‘자식 마음이라 생각하고 고맙다’(62.6%)는 흡족한 반응을 보인 이가 과반수였다. 자칫 무성의한 선물이라 인식되기도 했던 ‘현금’이, 코로나 시대에는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기 맞춤한 수단이 된 것이다.
현물 역시 비대면 배송이 가능하다. 지난 1월 롯데마트에 따르면, 올해 설 선물 예약판매 항목에서 건강 기능 식품이 78.7%를 차지했고, 그중 홍삼 관련 제품 매출은 349.9%에 달했다. 코로나19로 건강과 면역력에 관심이 높아진 영향일 테다. 또, 이마트가 설 선물 예약 실적을 분석한 결과 20만 원 이상의 프리미엄 선물 세트가 46.8%의 신장세를 보였다. 부모를 뵈러 가지 못하는 송구한 마음을 고가의 선물세트로 대신한다는 이유에서다. 혹여 현금이나 선물만 보냈다고 섭섭해하기보다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부모들도 이 또한 자녀들의 정성임을 헤아려야겠다. 센스 있는 시니어라면 자녀와 손주에게 모바일 선물을 보내 마음을 표현해도 좋겠다.
온라인 성묘 서비스로 접촉 최소화
설날 차례를 지내고 일가친척이 모여 성묘 가던 풍경도 올해는 보기 어려울 듯하다. 최근에는 온라인을 통해 조상에게 인사를 전하기도 한다.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거리 두기를 위해 온라인 성묘 서비스를 권고한다. 대표적인 온라인 성묘 서비스로는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e하늘 장사정보시스템’(www.15774129.go.kr)이 있다. 홈페이지에 접속해 장지를 모신 시설을 선택하고 영정사진을 비롯한 가족사진이나 상차림, 헌화 등 이미지를 넣어 추모관을 꾸미면 된다. 이를 모바일을 통해 가족이나 친지들과 공유해 고인을 기리고 메시지 등을 남길 수 있다.
인천시와 인천시설공단도 이번 설 연휴에 인천가족공원의 전 시설에 대해 ‘잠시 멈춤’(임시 폐쇄)을 시행한다. 대신 지난해 추석 때 반응이 좋았던 온라인 성묘 서비스를 2월 8일부터 21일까지 운영한다. 인천가족공원 온라인 성묘 홈페이지(grave.insiseol.or.kr)에 사전 접수 후 이용 가능하고, 가족들이 원하면 봉안함 사진도 찍어서 제공한다. 아울러 왕래가 어려운 친지간에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유가족 덕담 콘텐츠와 포토 갤러리도 확대할 계획이다.
쏠쏠한 연휴를 위한 소소한 Tip
65세 이상은 전화로 승차권 예매
연휴 기간 장거리 이동이 불가피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최근 KTX, SRT 등은 스마트폰 앱이나 온라인 승차권 예매만 진행한다. 거리 두기로 창가 좌석만 판매해 자칫 비대면 예매 시스템이 익숙지 않은 시니어라면 곤란할 것이다. 이에 코레일과 SR은 만 65세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전화 접수를 하거나 전체 좌석의 10%를 우선 배정하는 등 편의를 돕고 있다.
드라이브스루 전통시장 이용하기
자동차에 탄 채로 쇼핑이 가능한 ‘드라이브스루’(drive-through)는 거리 두기에 효과적인 서비스 중 하나다. 최근 코로나19 여파로 대형마트, 편의점뿐만 아니라 노량진수산시장을 비롯한 군산, 울산 등 전통시장에서 이러한 드라이브스루 시스템을 도입했다. 연휴 전후에 간헐적으로 서비스하는 곳도 있으니, 지역 시장을 찾는다면 관련 정보를 꼭 확인해보자.
VR 콘텐츠로 즐기는 온라인 박물관
손주와 연휴를 보낸다면 유익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외출 대신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내 ‘온라인 전시관’에서 무료 전시를 만나보자. 최근 전시와 더불어 지난 전시 영상이 다양하게 마련됐다. 특히 인기리에 진행됐던 ‘지도예찬’, ‘황금문명 엘도라도’ 전 등을 비롯해 경주, 전주, 부여 등 지역 박물관 전시장을 VR 콘텐츠로 더욱 실감 나게 감상할 수 있다.
55세, 뜻을 세운 지 28년 만에 ‘변호사’의 꿈을 이룬 권진성 씨. 그는 행정고등고시, 사법시험, 로스쿨, 변호사 시험 과정을 모두 거치며 고시의 역사를 온몸으로 경험했다. 고시를 준비하던 청년은 어느새 중년이 되어 당당히 변호사 배지를 받았다. 부산 모처에서 현재 수습 변호사로 활동 중인 그를 만나 그간의 여정을 들으며 꿈에 도전하는 삶의 가치에 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갖자.”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한 말이다. 이상적인 꿈을 갖되, 현실적인 자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우린 이상이 현실을 갉아먹거나, 현실이 이상을 짓눌러버리는 경우를 때때로 목격한다. 어릴 때의 꿈은 그저 호시절의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 쓰는 말이라는 썰렁한 유머도 있지만, 우리에게 포기는 너무나 쉽다. 그렇다면 근 30년간 꿈 하나를 위해 달린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하나의 꿈을 향해 정진한 권진성 변호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올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변화에 신경 쓸 겨를 없이 바빴어요. 합격 발표가 날 때까지 경비원 일을 했어요. 합격하면 6개월짜리 수습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경비원 신분으론 할 수 없었죠. 얼른 인수인계하고 지난 6월부터 수습 변호사로 일하고 있어요. 그사이 인터뷰 제의도 받았고요. 다만 제가 합격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아들이 합격하는 걸 꼭 보고 가시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의 생활이 꿈꾸셨던 변호사의 모습과 비슷한가요?
모든 직업이 다 그렇지만 밖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과 안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저도 사회 정의 실현을 꿈꾸며 변호사란 꿈을 품었죠. 물론 현실의 변호사도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지만, 성직자랑 비슷한 면이 있어요. 사수가 알려준 말인데 참 공감해요. 변호사로서 법리적 검토를 잘해서 소송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뢰인의 고민을 이해하고 마음을 보듬는 것도 변호사의 역할 중 하나예요. 분명 의미 있는 일은 맞지만, 그만큼 정신적인 에너지도 많이 쏟아야 하는 일이라 고단할 때가 있죠.
수험생활을 견디게 해준 원동력으로 어머니를 꼽으셨는데,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끝까지 믿어준 가족들이 다 고맙지만, 그중에서 어머니가 제일 큰 힘이 됐어요.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셨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온갖 궂은일을 다 하셨어요. 저한테 이렇게 책임감이 생긴 건 일정 부분 어머니의 영향도 있어요. 살가운 아들이 아니라 애교 있게 다가가지 못했는데,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저를 믿어주셨어요. 연거푸 낙방해도 일절 그만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말로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저의 또 다른 자아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제 마음을 잘 아시고, 늘 말씀을 아끼셨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항상 감사했죠. 최고의 원동력이라고 할 만큼.
변호사 합격소식을 전했을 때 어머니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어머니께 제일 먼저 소식을 알렸어요. 소식을 들으시고는 딱 한마디만 하셨어요. “그래, 내가 너는 할 줄 알았다!” 하시는데 마음이 너무 먹먹했어요. 눈물이 앞을 가리기보다는 그동안 불효만 한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밖에 없었어요. 그 후 두 달 뒤에 어머니가 소천하셨어요. 합격 소식을 전해 듣고 정신을 놓으시기 전까지 약 20일 동안 어머니와 함께 그간의 여정을 곱씹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어요. 지나고 나니 정말 꿈처럼 느껴져요. 제 인생의 명장면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그 20일의 매 순간이 될 것 같아요.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이후 주위 반응이 어떤가요?
이전보다 인지도는 좀 올라갔어요. 종종 저를 알아보는 분이 있어요. 얼마 전에 길거리에서 모르는 분을 우연히 마주쳤는데, “파이팅!” 하시며 가시더라고요. 확실히 방송이 다르구나 싶었죠. 공부하면서 친구들과 소식도 끊고 살았는데, 방송이 나간 후 연락이 많이 왔어요.
수험생활 중 언제가 가장 힘드셨나요?
법원행정고등고시랑 사법시험 둘 다 1차 시험에 합격한 해가 있었어요. 그간 공부도 많이 했고 자신도 있었어요. 속으로 ‘이번에 2관왕이다!’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나친 자만이었어요. 2차 시험에서 모두 낙방한 후 체력도 고갈되고,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치더라고요. 일종의 번아웃이 왔죠. 그때는 사람도 만나기가 싫어서 종일 골방에 틀어박혀 있었어요. 애들은 크는데 아빠 역할도 제대로 못하고, 주위의 시선은 싸늘하고,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잠도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밖에 못 잤어요. 티를 낼 수는 없어서, 속으로 진짜 많이 울었어요. 낙방 소식보다 떨어진 이후가 더 무서웠어요. 가장 괴로웠던 건 나로 인해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때였어요.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대학교 다니면서 쿵푸를 배운 덕분에 체력은 자신 있었어요. 하지만 정신이 한 번 무너지니까 체력도 따라주지 않더군요. 육체를 단련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매일같이 2시간씩 학교 뒷산에 올랐죠. 비가 와도 눈이 쏟아져도 늘 뛰어올라갔어요. 이 싸움에서 지면 끝난다는 생각으로 임했어요. 확실히 체력이 좋아지니까 정신도 건강해지더라고요. 그 힘으로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때의 경험으로 배운 건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은 하지 말자’였어요. 해결할 수 없는 고민에 매달리면 잡념이 늘고, 잡념이 늘면 저만 괴로울 뿐이에요. 그 후로는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골몰했어요. 나름 도가 튼 거죠.(웃음)
어릴 때부터 법조인을 꿈꾸셨나요?
아뇨. 사실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가정 형편이 안 좋아서 이사를 자주 다녀 초등학교를 6번이나 옮겼죠. 그래서 무리에 잘 속하지 못하고 겉돌았어요. 그때마다 신경을 써주셨던 분들이 선생님들이었어요. 제 마음을 보듬어주셨던 분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를 아껴주셨던 선생님들처럼 교사가 되고 싶었죠. 하지만 원서를 내려고 했던 교대는 성적이 너무 높았고, 갈 만한 교대는 너무 멀어서 포기했어요. 그때 우연히 고시 합격 수기 책을 읽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꿈을 이룬 사람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마침 성적도 맞아서 법대에 진학했는데, 그때까지도 이렇게 오랫동안 고시생활을 할 줄 몰랐어요.
법조인이 되겠다고 결심하신 건 언제인가요?
제가 84학번인데,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던 탓에 온 나라가 혼란스러웠어요. 저도 공부 안 하고 맨날 시위 현장에 있었죠. 책보다 화염병을 더 많이 들던 시대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고시 3관왕 선배가 학교에 와서 강연하는 걸 들었어요. 고시 하나 붙는 것도 어려운데, 무려 3개나 붙었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그분이 살아온 과정과 역경을 극복하는 의지에 크게 감응했어요. 강연장을 나와서 집에 가는데, 이상하게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드는 거예요. 곧장 어머니께 달려가서 “저 고시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일종의 객기였죠.(웃음) 아들로서 어머니께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치기 어린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취직할 생각은 없었나요?
취직할 마음은 없었고 당시에 고민은 많았어요. 현실과 타협을 할까? 아니면 현실의 불의에 계속해서 맞서 싸워야 하나? 이런 고민을 스스로 많이 했어요. 어느 순간에는 회의감이 심하게 왔어요. 현실로부터 도망가고 싶어서 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절에 들어가서 스님이 되려고도 했어요. 그때 주지 스님이 절 보고 딱 한 말씀만 하셨어요. “돌아가거라.” 스님의 눈에 제가 설익어 보였던 거죠. 돌아와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고시였어요. 어머니께 철없이 부린 객기는 이미 일종의 맹세가 됐죠. 이후 본격적인 고시생활을 시작했어요. 어머니는 스님과 다르게 반대를 안 하셨어요. 반대하셨으면 제 인생은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몰라요.
고시 공부가 분량이 방대하고 어려운 시험이잖아요. 처음 공부할 때 어떠셨나요?
공부를 즐겼어요. 형사 사건이 재미있었어요. 형사 사건은 증거를 수집하고 범인을 찾아내야 하잖아요. 이렇게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나가는 작업이 흥미로웠어요. 어려워도 그 재미 하나로 버텼던 것 같아요. 남들은 어떻게 견뎠느냐며 궁금해했지만, 기질적으로 골방에 앉아서 책을 보는 것이 저랑 잘 맞았어요. 또 검찰 수사관이 정말 되고 싶었어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저항심을 직업적으로 잘 풀 수 있는 직업으로 보였거든요. 수사관이 되어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나 부정부패를 없애고 싶었습니다.
가장으로서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공부를 시작할 때는 동아대 고시반에서 생활했던 터라 생계 걱정이 없었어요. 학교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했어요. 심지어 치약이나 칫솔도 살 필요가 없을 정도였죠. 하지만 아내와 결혼하면서부터는 달랐어요. 딸린 식구가 있는 가장이었으니 무엇이든 해야 했죠. 공부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요. 막노동부터 시작해서, 아파트나 학교 경비원도 하고, 심지어 치킨집도 운영한 적이 있어요. 치킨집을 2년만 더 했으면 아파트 한 채는 샀을 거예요. 당시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아 있어 마음이 늘 허전했어요. 그래서 치킨집을 접고 다시 도전했어요.
주위에서 만류하는 분들도 많았을 것 같아요.
그만두라고 한 분들이 많았죠. 하지만 절 믿어주는 가족이 있어서 흔들리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늘 행동으로 보여줬어요. 말은 신뢰하기가 어려워요.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말보다 정확한 행동이 필요하죠. 행동은 행동으로 끝나면 안 돼요. 결과를 만들어야죠. 생계를 위해 궂은일을 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에요.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고 싶었어요. 가장으로서 무책임하지 않다는 걸 보여줬어요.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전 요행을 좋아하지 않아요.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죠. 하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봐요. 최선을 다하는 순간만큼 값진 시간은 없어요. 최선을 다하지 않거나, 과정에서 만족하지 못하면 결과를 떠나서 의미가 없어요.
변호사님께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요?
늘 고맙고 한편으론 미안하죠. 합격하고 나서 딸이 여름방학 때 번 알바비로 구두를 사줬어요. 일종의 합격 선물이죠. 시장에서 산 저렴한 구두를 신다가 처음으로 백화점 가서 구두를 골랐어요. 너무 비싸서 처음에는 엄두가 안 났어요. 좀 싼 곳에서 사자 하고 갔는데, 백화점에서 처음 본 그 구두가 계속 아른거려서 결국 덜컥 사서 돌아왔죠. 딸에게는 늘 미안해요. 못 해준 것이 많아서 마음의 빚이 있어요. 살면서 계속 갚아나가야 할 것 같아요. 한편으론 일찍 철이 든 딸이 대견하고 고마워요. 딸의 바람처럼 이제는 이 구두를 신고 꽃길만 걷고 싶어요.
못 이룬 꿈 때문에 좌절하고 있는 분들에게 한말씀해주세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절망은 대체로 구체적인데, 행복은 피상적일 때가 많아요. 행복을 좇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를 때가 많고요. 중요한 건 결국 하루를 살아내는 자신에게 있어요. 목표를 정하고, 하루를 계획하고, 실제 행동으로 조금씩 옮겨보면서 자신의 행복을 구체적으로 그려야 해요. 삶은 늘 변수에 흔들리고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저도 그랬어요.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니라 포기에 가까워요. 그렇다고 저처럼 끝까지 해보라는 말은 못하겠어요. 다만 삶의 행복을 포기하는 방향이 아니길 바라요. 꿈이 있다는 건 일종의 축복이잖아요.
사람들은 본인보다 일찍 무언가를 성취한 사람을 보고 부러워한다. 난 무궁화호처럼 더디고 느린데, 남들은 KTX처럼 빠르게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바심이 앞서고, 조바심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KTX에서는 무궁화호처럼 오래된 간이역 풍경이 주는 낭만을 즐길 수 없다. 과정이 더디고 느려도 방향이 맞는다면 우리는 충분히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설령 결과가 좋지 못해도 과정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권진성 변호사는 남들과 비교해서 많이 늦었다. 하지만 비관하지 않았고,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 우직하게 달렸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종착역에 내렸다. 그의 여정은 무궁화호처럼 더디고 순탄치 않았지만, 간이역의 낭만을 즐기듯 계속해서 의미를 찾으며 달렸다. 오랜 시련 끝에 결과를 이룬 그는 꽃으로 비유하면 추운 겨울에 화려한 꽃잎을 보여주는 동백이다. 딸이 사준 구두를 신고, 오랫동안 그가 동백꽃 같은 길을 가기를 바라며 그와 어울리는 시 한 구절을 공유하며 마친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 ‘봄길’ 中 >
할 말은 다 하고 센 듯 보이지만 공감이 가니 유쾌하다. 과거는 마음에 두지 않고 현재와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돈과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게 삶의 철학이지만 쓸 때는 통 크게 쓰는 여장부.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시니어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7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한 676억 원을 포함해 2012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총 766억 원을 출연하며 전 국민의 관심을 모은 그녀를 만나 이 시대의 어른, 그리고 시니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936년 서울에서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소녀는 이제 한 기업의 대표이자 막대한 기부금을 사회에 환원해 시니어의 지표를 새롭게 세운 유명인이 되었다. 그 주인공인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화통한 기부금만큼이나 솔직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나는 과거에 매이지 않아. 오직 현재와 미래만 생각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니까. 아무리 돈이 없어도 옷 한 벌은 챙길 수 있지만 시간은 그럴 수 없잖아.”
기부를 하면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된다
이미 팔순을 넘어 85세의 나이지만 오직 현재와 미래만 본다는 이 회장의 말에는 아직도 그녀가 젊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엄청난 기부금을 출연한 것도 현재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기부하면 이제까지 자신이 느끼지 못한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되고 엔도르핀이 돌아.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그녀가 기부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6.25전쟁 시절에 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동네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떡 잘 먹었다” 하고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이 떡을 잘 먹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전쟁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해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떡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 “우리 애기가 떡을 나눠드리라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받을 감사를 딸에게 돌린 것이다. 그때 기부의 선한 영향력,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한 어머니의 부지런하고 알뜰한 모습이 이 회장에게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신문기자로 자리 잡기까지 거듭된 좌절
이 회장에게 다시 기부의 힘이 각인된 것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들은 한 기독교 장로의 말 때문이었다. 온 나라가 구호물자를 얻으러 다니던 시절, 그 장로는 “우리도 가난하지만 주는 자가 되어보자”라고 설파했다. 그 말에 꽂힌 그녀는 자신이 모은 돈으로 세상을 더 선하게 만들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쉬운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그녀는 당연히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녀는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해 “선풍기도 없는 도서관에서 밤낮없이 공부하니 땀띠 범벅에 몸 곳곳이 망가졌고, 처음 맛본 실패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한 번 세상에 도전했다. 그녀가 지원한 곳은 신문사. 기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사내 파벌 싸움, 서울대 나온 여성에 대한 질시 등이 심해 퇴사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서울경제신문의 경제기자로 자리를 잡게 된다. 기자가 안 됐더라면 어땠을까. 기자의 질문에 이 회장은 바로 답을 했다.
“지금은 고시에 떨어진 걸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 고시에 합격했다면 그 검은 옷을 입고 변호사나 판검사가 돼서 살았겠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싹 싸움꾼이야. 남의 싸움을 해결해주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신문기자로 살았으니 행동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할 말 다 하면서 많이 알게 됐지. 슬픈 사람, 잘난 사람, 못된 사람, 바보도 만나고…. 그때도 지금도 정직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라고 생각해. 양심적으로 살려고 했지. 기자생활하면서 인생의 많은 걸 배웠어. 평생 배우면서 살아야지.”
40대 중반에 제2의 인생을 개척하다
이 회장의 기자생활 커리어는 화려했다. 경제기자로서 당시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이병철 삼성 회장과의 인터뷰를 성사시켰고, 그 덕분에 다른 기업 총수들과의 만남도 무난하게 이뤄지면서 격의 없는 관계를 쌓게 됐다.
그러나 권력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1980년 5공화국이 언론통폐합을 하면서 그녀의 기자생활은 해직으로 끝나게 되었다. 40대 중반이었고 배우자 없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근심에 싸일 수밖에 없는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경제부 기자로서 수많은 CEO들을 만나면서 사업 수완을 익힌 덕분일까. 그녀는 제2의 인생을 사업가로서 다시 개척하기로 했다. 사실 그녀는 기자생활을 하던 서른다섯 살 때 아버지의 도움으로 안양 하천부지를 구입해 주말이면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그 농장은 퇴직 후 본격적인 본업이 되었다. 돼지를 키우고 옥수수를 재배했고 젖소까지 들였다. 이후 돼지가 1000마리까지 불어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사업 노하우는 인연의 중요함을 잊지 않는 것
숱한 위기와 고난을 헤쳐 온 그녀에게 다시금 시련이 찾아왔다. 이 회장의 땅이 도로 건설로 인해 수용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안양천에서 모래 채취 사업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서울 여의도 맨하탄 빌딩의 5층을 매입해 깡패들과 싸워가며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다른 층도 계속 사들여 빌딩관리단 회장이 되었고, 미국 LA의 도심 빌딩까지 구입하면서 막대한 성공을 일구었다.
그녀는 사업의 성공은 운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운이 자신 앞을 지나갈 때 누구는 붙잡고, 또 누구는 놓치느냐의 차이로 성패가 갈린다고 보는 것이다. 이 회장은 또 사람과의 인연을 중시한다. 아무리 작더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운명이 바뀌면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의 사업 노하우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지금은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허투루 보지 않고 면밀하게 검토하면 길이 나와. 그걸 안 하니까 문제지.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으면 감이 떨어져?”
이 회장은 땀 흘려서 번 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자신이 기자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부 또한 그런 기준에서 이뤄진다. ‘왜 카이스트에만 기부하고 모교인 서울대에는 기부하지 않느냐’라는 세간의 의문에 대해 그녀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모교라고 다 해줄 생각은 없거든. 그래도 의과대학은 좀 하려고 해. 법대는 인성교육이 안 돼서 안 했어. 내 후배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 연연할 필요도 없고. 내가 하는 기부의 기준은 국가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기부의 가치가 서야 해. 빈민 구제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번 돈인데 함부로 쓸 수는 없지.”
자식에게 무조건 돈을 주는 건 자식 망치는 길
이 회장의 기부금에 대한 단호한 기준은 최근 더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지금까지는 기부한 기관에 맡기고 활용하게 했는데, 부작용이 너무 커. 돈 만지는 사람들 손에서 돈이 다 녹더라고. 그래서 내가 직접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어. 누가 봐도 투명하고 깨끗하게 운영할 생각이야.”
이 말에는, 지금까지의 막대한 기부를 멈추지 않고 되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처럼 기부금에 대한 기준이 확실하고 공정한 운영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그녀가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상속증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자식에게 무조건 다 남기려는 건 틀린 거야. 자식을 무능하게 만들어. 젊은 날에 부모가 뼈빠지게 돈 버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고 그대로 가르치면 돈을 지킬 수 있는데, 그건 안 하고 ‘내가 고생했으니 자식은 고생 안 시키고 돈만 주겠다’면 자식들이 사치하고 탕진하고 마약이나 하게 되는 거지. 부모라면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줘서 값진 삶을 살도록 해야지. 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은 제 돈이 아니야.”
82세의 초혼, 그리고 첫 부부싸움
이 회장이 핫피플이 된 데에는 막대한 기부금도 있지만 82세의 나이에 성사된 초혼도 한몫했다. 상대는 서울대 동기인 김창홍 변호사. 사업을 하면서 친구들끼리 골프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골프가 서툴렀던 그녀의 캐디 역할을 자임했던 사람이 바로 김 변호사였다. 그렇게 쌓인 친분 속에서 마침내 결혼이라는 결실이 맺어졌다.
“동기생 중에 동아일보 기자가 있는데 인터뷰 기사를 쓰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우리 영감이 내가 먼저 프러포즈했다고 하는 거야. 무슨 개똥같은 소리를.(웃음) 결혼은 여자가 아무리 좋아해도 남자가 싫어하면 못하는 거 아냐? 화가 나서 반지랑 시계를 풀어서 쓰레기통에 버렸지. 그랬더니 남편이 ‘내일 결혼식인데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하니?’ 하더라고. 내 마음 달래줄 생각은 안 하고 결혼식이 걱정이었던 거야. 그래서 싸웠지.”
그녀에겐 인생 최초의 기념비적인 사랑싸움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감정을 묻어두는 사람이 아니고 그녀도 똑같은 성격이었다.
“그렇게 티격태격 싸우고 난 뒤에 둘이 웃는 걸로 끝냈지. 칼로 물 베기지. 그래서 결국 결혼식을 했는데, 신부화장하는 데 와서 날 보곤 입을 다물질 못했어. 좋아서.(웃음)”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마리’
이 회장에게는 남편 외에 애정을 주는 가족이 또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애견 마리다. 유기견이었던 마리는 얼마 전까지 그녀의 집 3층을 차지하고 살았다.
“나는 2층에서 지내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파바로티의 노래를 틀어주면 막 뛰어나와. 그러고 같이 산책을 하러 나가는데, 중간쯤 가다가 계속 날 돌아보고, 쓰다듬으면 꼬리가 빠지게 흔들고, 밥을 먹을 때는 식탁에서 나를 바라보곤 했지.”
그러나 지금 마리는 없다. 지난 11월 1일 비 오는 일요일에,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마리는 불쑥 상추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리야!’ 하고 불렀는데 반응이 없어. 없어진 거야. 누구는 발정이 났다고도 하고, 그러다 돌아온다고도 했지. 그런데 끝내 안 들어와서 CCTV를 보니, 들개 세 마리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이 나오는 거야. 급히 골짜기를 다 뒤졌는데도 못 발견했어. 먹힌 모양이야. 지금도 가슴이 아파. 그래서 남은 사진들로 앨범을 만들었어.”
그녀의 핸드폰 대문 사진에는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웃고 있었다.
깊고 풍성한 마음이 닿는 찬란한 가치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마리의 사진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애견인 이 회장. 마치 손주 사랑에 흠뻑 빠진 시니어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녀는 과거에 비해 자신이 유해졌다고 말했다.
“늙으면 서러운 게 많대. 나도 늙으면서 성질이 유해지더라고. 젊을 때는 칼 같았지. 아랫사람들에게도. 그런데 어느 날 ‘저 사람들이 나보다 정말 뛰어났으면 내 밑에서 일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부터 납득하게 됐어.”
나이 들면서 철학적 사유와 희생이 그녀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어느덧 인생의 품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 회사의 직원들은 대부분 10년 이상 일한 장기 근무자들이다. 그녀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무서운 게 없는 사람처럼 철두철미하게 직원들과 회사를 이끌어왔지만 그 강인함 뒤에는 직원들을 향한 애정이 숨어 있다. 이 회장의 형제 가족들에게 유언증서까지 마다하지 않고 측은지심으로 챙겨주는 그녀가 더 담백한 이유는 더 큰 세상을 향한 여정으로 이끄는 용기와 지혜에 있다.
“잘못된 것은 그냥 못 넘어가는 성격이야. 세상 사는 데는 정직이 최고지. 그리고 신용이고. 내가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주려고 해야 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
인터뷰를 진행하며 왜 이 회장을 매스컴에서 앞다퉈 다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어른다운 어른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녀야말로 이 무거운 코로나 블루 상황에서 통 큰 기부로 미담을 준,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온 영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이고 현명하며 나눌 줄 아는 그녀의 선행이 사회적 가치로 거듭나 진짜 선한 영향력을 행하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밝혀주는 등불을 본다. 2021년에도 이 영웅의 스토리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최근 방송가에서 시니어 세대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배우 김수미, 모델 김칠두, 유튜브 스타 박막례, 밀라논나 채널의 장명숙까지. 시니어 세대가 방송 전면에 서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배우 김수미는 특유의 예능감으로 방송가를 휘어잡았다. tvN ‘수미네 반찬’과 SBS플러스 ‘밥은 먹고 다니냐?’ 프로그램 MC로 나서 속 시원한 입담과 유쾌함, 따뜻한 감동까지 시청자에게 전하고 있다.
백발이 돋보이는 강렬한 비주얼과 카리스마로 시니어 모델의 대명사가 된 김칠두는 각종 CF는 물론, 서울패션위크 등 유명 패션쇼에서 활약하고 있다. 여기에 JTBC ‘정산회담’, MBC에브리원 ‘비디오스타’ 등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대중에게 다가서고 있다.
유튜브 스타 박막례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구수하면서도 촌철살인의 입담으로 ‘옆집 할머니’ 같은 매력을 선사하는 박막례는 현재 약 132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셀러브리티다. 최근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리뷰, 그룹 2PM의 ‘우리집’ 뮤직비디오 리액션 영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또 다른 시니어 유튜버 ‘밀라논나’의 장명숙도 인기다. 그는 최초의 한국인 이탈리아 유학생이자, 1990년대 국내에 유명 명품 브랜드를 선보인 화려한 이력으로 패션 아이템 및 스타일링을 제안하는 콘텐츠를 선보인다. 최근엔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인기를 입증했다.
좀 독특한 시니어 스타도 있다. 트로트계 ‘괴물 신인’이자 빠른 1945년생이라는 설정의 김다비는 지난 5월 트로트 ‘주라주라’로 데뷔했다. 이후 그룹 방탄소년단 뷔, 가수 이찬원도 언급하는 등 화제의 중심에 서며 ‘본체’ 김신영에게 새로운 전성기를 선물하고 있다.
여기에 다음달 2일 첫 방송되는 티캐스트 계열 E채널 신규 예능 프로그램 ‘찐어른 미팅: 사랑의 재개발’도 중장년 싱글의 ‘어른 미팅’이라는 신선한 콘텐츠로 주목 받고 있다. 기존 연애 예능 프로그램과 차별화된 모습에 중장년층 출연진의 예측불가 매력이 더해질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