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넉한 정취로 포근한 골목길, 시간의 퇴적으로 빛바랜 집들, 저 너머가 궁금해지는 언덕…. 서울에서 이제는 쉬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다. 딱딱한 고층 건물은 찾아보기 어려우니 희한하다. 그래 부암동은 매혹적이다. 음미할 만한 옛날 맛이 남은 동네다. 아파트촌보다 한결 따사로웠던 옛날 동네에 관한 추억이 금빛을 머금고 살아난다. 향수겠지. 이럴 때 마음은 물살처럼 번져 과거의 기슭으로 흘러간다. 자하미술관은 길의 끄트머리에 있다. 길의 이름은 무계정사길.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인왕산 서북부 자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자하미술관은 높고 외진 산기슭에 있다. 서울에 있는 미술관들 중 가장 고지대에 자리 잡은 미술관이다. 인근엔 석파정 서울미술관과 환기미술관이 있다. 둘 다 내로라하는 미술관이다. 저만치엔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이상적인 도시란 어떤 걸까. 내 생각엔 크고 작은 문화공간들이 우후죽순처럼 즐비한 도시다.
싱싱하고 유쾌한 콘텐츠를 장전한 문화시설이 편의점처럼 숱하다면? 아마도 풍속은 덜 야박해 매정한 도시를 견디기가 용이하리라. 삶의 비루함과 지루함을 잠깐이나마 날려버릴 수 있는 문화예술의 폭약이 생필품 목록에 오르는 세상. 나는 그런 도시가 그립다. 이 점에서도 부암동은 사람을 매혹한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많으니까.
레트로 바람일까. 해묵어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처럼, 곰삭은 시간의 흔적이 서린 이 동네를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색다른 운치를 돋운 카페들도 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또는 갈피 없이 마음이 들썩일 때 커피 한잔 즐기기에 좋은. 자하미술관에 이르는 무계정사길 풍경이 이렇게 다채롭다. 서정과 시정을 누릴 만하다. 그렇다면 이건 미술관에 차려진 예술의 성찬을 예감케 하는 애피타이저?
좁은 길을 따라 차를 몰면 잠깐 사이에 자하미술관에 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일 아니다. 두 발로 뚜벅뚜벅 거닐며 풍경을 즐기라. 그러라고 골목길들이 무언의 환영사를 읊조리는 게 아닌가? 삶의 과속과 과욕은, 직진을 관습으로 삼은 넓고 개방적인 큰길들이 암암리에 인간들에게 퍼뜨린 병증일지도 모른다. 넥타이처럼 좁고 골방처럼 안온한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길의 주류를 이루었던 시절은 이미 사라졌으나, 부암동에 듬성듬성 남아 있다. 도시개발의 캐터필러에 깔려 이마저 머잖아 시들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다면 간신히 생존한 저 골목의 일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그저 고만고만한 골목길이지만 애틋하다. 옛 친구를 만난 양 반갑다. “그래, 또 만나!” 기약 없는 석별을 하고 몇 십 년 전에 헤어진 친구가 문득 골목 모롱이에서 전설처럼 등장할 듯 괜히 설렌다.
과거에는 많은 일들이 골목길에서 벌어졌다. 일상의 인간관계가 맺어졌다. 벌게진 얼굴로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수줍은 연애편지를 전해주고 냅다 달아나기 좋은 곳도 골목길이었다. 정든 주점 하나쯤 골목에 있게 마련이었다. 피로가 극에 달할 때, 숨듯이 대피할 수 있는 곳이 골목이었다. 세사의 긴장과 소음에서 놓여날 수 있는 곳이 골목길이었다. 그러니 못내 그리운 게 골목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자하미술관에 가려거든 골목을 걸어 예열할 일이다. 자글자글 들끓는 향수에 취해볼 일이다.
산경(山景)도 영락없는 예술
자하미술관으로 가는 길엔 웅숭깊은 역사 한 자락이 깔려 있어 상상력을 자극한다. 세종의 아들로 서예의 달인이었던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무계정사 옛터에 지금은 한옥 문화공간 무계원이 들어섰지만, 고명한 옛사람의 별장이 있었던 자리니 깃든 뜻이 예사로우랴. 안평대군은 어느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봤다. 당최 잊히지 않는 꿈을 붙잡아두기 위해서였을까.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에게 꿈속의 지상낙원을 들려주고 그림으로 그려주길 청했다. 그렇게 태어난 그림이 천하 걸작 ‘몽유도원도’다. 안평대군은 더 나아가 몽유도원의 현실적 지형을 찾아냈다. 여기 부암동 산간을. 그러곤 무계정사를 지었다. 무계란 무릉계곡이다. 즉 이곳은 안평대군의 무릉계곡이자 무릉도원이었다. 무계정사 일원이 통째 옛사람의 원림이었다. 자하미술관 역시 원림 구역이었다. 순전히 안평대군의 행장에 이끌려 부암동 길을 거닐다가 자하미술관에 이르는 이도 드물지 않을 테다.
자하미술관은 언덕길이 끝나는 고샅에 있다. 인왕산이 늘어뜨린 치마 한 자락을 부여잡은 미술관이다. 그저 살포시, 산 그림자 드리워진 미술관의 형상도 담박하다. 꾸밈과 치레를 자제해 얼룩이 없는 둘레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린다. 건물은 노출콘크리트 벽체로 골격을 삼았다. 개성을 돋우기보다 기능성을 살려 지은 집이다. 전시실은 1층과 2층에 있다. 외부의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해 천장 한쪽엔 유리판을 설치했다.
미술관 외부에 가득한 건 초록을 내뿜는 산이다.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이다. 인간사의 광기와 탐욕은 인간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양 무심히 흐르는 구름이다. 상상력을 광폭으로 키울 경우 모든 게 미술이다. ‘본디부터 그냥 그런’ 저 자연을 모방하는 게 예술이지 않던가. 이런 자연을 예술로 관조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게 자하미술관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라 했으나, 미술관에서 바라보이는 산경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락없는 예술이다. 조물주의 붓질이 스친 자리다. 신이 구현한 설치 작품이다.
산중 고요에 폭 파묻힌 자하미술관은 작은 미술관이다. 하나 허투루 봤다간 큰코다친다. 수준 높은 기획전을 빈번히 펼치는 미술관으로 나름 이름났다. “어쩌면 그렇게 좋은 전시회들을 기획해요?” 그런 얘기 매번 들었다며, 설립자 강종권 관장이 홍소를 터뜨린다. 그는 미술관 건물을 손수 구상해 지었다. 2008년 개관 이래 독특한 기획전들을 펼쳐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오랫동안 안평대군에 꽂혀 헤어나지 못했다. 6년을 내리 안평대군을 테마로 한 갖가지 전시회들을 열었다. 몰입도 이런 뜨거운 몰입이 없다. 그럼에도 양에 차지 않았던가. 2017년엔 ‘안평대군의 비밀정원’이라는 타이틀의 대형 전시회를 펼쳐 갈 데까지 가봤다. 이 전시회에 한창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 22명이 참여해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2018년 주재환과 성능경의 2인전 ‘도르래미타불’전 역시 성황리에 펼쳐졌다. 방문 당시에는 김상표의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감을 손가락으로 찍어 화폭에 난사한 액션 페인팅으로 아나키즘을 표출했다.
자하미술관에서 시선이 머무는 건 그림만이 아니다. 외려 산 풍경에 쏠린다. 북한산 비봉능선에, 북악산의 옹골찬 품새에 넋을 잃는다. 후미져 제 발로 찾아오기 쉽지 않은 미술관이지만 웬걸, 와서 보고선 흥취에 반색한다. 그림과 풍광, 둘을 잡았으니 남은 허기가 없다. 종내 마음으로 들이치는 건 안평대군의 꿈이다. 그의 몽유도원 한 자락을 훔쳐본 기분이라니.
며칠 전, 송파 문인협회에서 시 낭송을 난생 처음 해봤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을 4명이 4부분으로 나눠서 낭송했다. 몇 번 연습을 하고 보면서 낭송했는데 기억에 남는 구절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올 연말 행사에는 보고 읽는 것이 아니라 안 보고 암송하기로 했다. 박인환문학관을 다녀왔던 기억을 떠올려 ‘목마와 숙녀’를 선정했다. 그 동안 암기능력은 개발해본 적이 없다. 줄줄이 기억하던 은행 계좌 번호도 매번 통장을 꺼내 봐야 한다. 노래방에 가도 노래 가사를 몰라 모니터 자막 없이 못 부르는 지경이다. 술을 좋아하다 보니 알코올에 뇌세포가 많이 죽은 모양이다. 우선 문제는 아예 생각나지 않는 현상이다. 머릿속이 하얘진다. 우리 가족력에 치매는 없었는데 필자에게 가능성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손바닥에 커닝페이퍼처럼 사인펜으로 첫 머리만 메모해두는 방법, 맨 앞좌석에 앉은 사람에게 큰 글씨로 시를 출력해서 들고 있게 하여 안 보는 척 보는 방법 등, 여러 가지 편법이 생각났으나 그냥 암송하기로 했다.
두 번째 문제는 단어가 생소하다 보니 내가 쓰기 편한 단어를 만드는 버릇이다. ‘숙녀’라는 단어는 요즘 잘 쓰지 않는 단어이다 보니 ‘여인’, ‘그녀’등이 대신 튀어 나왔다.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가 ‘목마를 탄 여인‘으로 둔갑했다. ’술을 마시고‘는 ’술을 마시며‘로 ’방울 소리 울리며‘는 ’방울소리 울리고‘로 마구 뒤섞였다.
암송을 방해하는 요소로 각각의 연이 끊어질 때 마다 3초씩 멈췄다가 이어가는 것이 문제였다. 천천히 분위기를 잡다 보면 다음 단어가 막혔다. 문장을 몽땅 외워 좀 빠르게 숨 쉬지 않고 끝내는 방법으로 바꿨다. 끝없이 말이 이어지는 여자들의 수다에서 배운 요령이다. 그냥 멈추는 것과 숨을 쉬기 위해 멈추는 것은 다르다. 나중에 속도만 조정하면 되는 것이다. (/br)
1차 테스트를 받아봤다. 그런대로 암송에 성공했다. 아직 건재하다는 얘기이다. 기억을 살려 빨리 끝내려는 마음에 빨라지는 톤만 고치면 된단다. 연말 행사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더욱 세련되어 질 것이다. 암송 연습을 해보니 좋은 점도 있었다. 뇌의 기억 세포를 살려 놓는 것이다. 고난의 연속이지만, 그 과정에서 잠자던 세포를 살려내는 작업이다. 치매 예방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br)
거리를 걷거나 계단을 오르면서 암송을 하면 힘든 줄 모른다. 발은 저절로 걸어가지만, 머리 속에서는 기억 세포를 계속 굴리는 것이다. 혼자 중얼거리고 다니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보지만 개의치 않는다. 시를 그냥 읽었을 때와 다른 것은 단어 하나하나가 깊이 박힌다. 책을 읽을 때 시 암송 습관이 도움 되기도 한다. 그냥 스쳐지나가던 단어가 속속들이 드러난다. ‘~한다’ 등 마치는 끝말도 시처럼 또렷하게 남는다.
이번 시 낭송이 끝나도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음에 드는 시 하나를 뽑아 암송할 생각이다. 무미건조하게 생각 없이 길을 걷거나, 힘들게 계단을 올라갈 때 써먹자는 의도이다. 얼마 후 있을 히말라야 트레킹 때 하루 20km나 걸어야 한다. 지친 다리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도 시 암송이 도움 될 것만 같다.
직장을 퇴직한 시니어 중 하는 일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남달리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바로 액티브 시니어다.
바쁘든 바쁘지 않든 그동안 살아온 인생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왕성한 에너지로 책을 쓰고 글을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목적을 위해 내가 10년 전에 시작한 것이 ‘책과 글쓰기 학교’다. 2년 전까지는 ‘에세이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전문 수필가를 모시고 수필 쓰기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책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현재 밴드 회원이 불과 1년 만에 30명에서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글을 잘 쓰려면 전문성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뭐든 쓰는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오프라인에서 매월 두 번째 화요일 모임을 갖고 있다. 현재 네이버 밴드에 가입한 회원 중 70여 명은 연회비(30만 원)를 내고 있다.
월례회 모임은 1, 2부로 진행된다. 1부에서는 책을 많이 낸 전문 작가 선생님이 한 시간 특강을 하고, 2부에서는 회원들이 써온 글을 작가 선생님이 하나하나 교정해준다. 자신이 써온 글을 직접 교정받는 과정을 통해 제대로 글쓰는 방법도 배우고 자신감도 키운다. 실력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되는 시간이다.
책·글쓰기 학교는 단지 글쓰기 공부에 그치지 않고 책쓰기에 대한 특강도 하고 문학기행도 한다. 책쓰기는 책을 한 번도 내보지 않은 왕초보 회원들에게 책쓰기에 대한 기본은 물론, 기획서 작성 등 전체 프로세스를 알려주고 출판사까지 연계해주어 결과물이 조기에 나오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은 한 달에 2~3명이 책을 출간하고 있다. 금년 말에는 회원들이 쓴 글들을 모아 10주년 기념 문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문학기행은 1년에 한두 번 하고 있는데 작년 하반기에는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문학관을 다녀왔고, 금년 상반기에는 중국 길림성에 있는 용정의 윤동주 문학관을 다녀왔다.
이제는‘2060’시대라 한다. 20대부터 80세까지 60년 동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로 60세도 20년은 현역으로 움직여야 한다. 책쓰기와 글쓰기는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해고가 없다. 누구든 나이에 관계없이 용기를 내어 평생학교에 입학하라. 책쓰기, 글쓰기 학교라면 더욱 좋다.
1883년 개항을 계기로 외래의 근대문화를 받아들인 인천은 근대도시로 성장했다. 이에 의미를 둔 인천광역시와 인천문화재단은 개항장에 한국근대문학관을 세워 한국 근대문학을 수집, 보존하고 있다. 근대계몽기(1894~1910)에서 해방기(1945~1948)까지의 문학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한국근대문학관을 소개한다.
근대문학관으로 변신한 창고
인천역에서 나와 중구청 방향으로 약 10분간 걷다 보면 붉은 빛을 띠는 건물이 하나 있다. 옛날 건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투박한 모습을 간직한 이곳은 2013년 새롭게 문을 연 한국근대문학관이다. 개항기 시절 물류창고로 쓰던 건물을 인천광역시와 인천문화재단이 리모델링하여 한국 근대문학과 인문학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한국근대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면 아직도 창고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은 전시되어 있는 근대문학 작품을 더 실감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우는 한국근대문학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점과 마주하게 된다. 1908년 발행된 최남선의 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소설인 이인직의 , 1910년대 소설을 대표하는 이광수의 등 시대별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누렇게 변한 표지는 100여 년의 세월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박목월의 초판, 윤동주의 초판, 박태원의 초판 등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희귀본을 만날 수 있다. 시대의 순서대로 문학작품을 배치한 전시관은 우리 근대문학의 흐름을 한눈에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자칫 지루하게 다가올 수 있는 ‘문학’이라는 주제를 한국근대문학관은 다양한 체험시설을 마련해 즐길 수 있는 전시로 만들었다. 현진건의 속의 한 장면과 문인들이 자주 찾던 다방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벽화 앞에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작품 중간중간 설치된 오디오 시설은 작품을 노래로 들려준다. 또 전시장 중앙 벽에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주요 문인들 얼굴이 새겨져 있다. 이 벽화에 휴대폰을 가까이 대면 작가에 대한 간단한 정보와 작품설명이 전송된다. 다채로운 체험시설에선 관객을 향한 배려가 돋보인다.
2층에는 인천의 근대문학과 근대 대중문학의 흐름을 보여주는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우리나라 근대문학에 인천이라는 도시가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인천에서 태어난 문인들은 누구인지를 소개하며 인천의 근대문학을 소재로 한 영상물을 상영한다.
문학관을 나서기 전 전시를 통해 만나본 작가의 모습이 담긴 스탬프와 간단한 OX퀴즈도 놓치지 말자. 캐리커처로 표현된 염상섭, 최남선, 현진건 등 총 11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과정이 궁금하다면
상설전시관 옆에 마련된 기획전시관 ‘소설, 애니메이션이 되다’에서는 9월 10일까지 , , , , 등 총 다섯 편의 한국 단편문학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실제로 사용된 대본, 원화 등을 관람하고 2층에 마련된 공간에서 직접 콘티 완성, 애니메이터 체험, 캐릭터 그리기, 일러스트 색칠 등을 즐길 수 있다.
관람 정보
주소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 15번길 76
전화 032-455-7165
관람시간 10:00~18:00 (입장은 관람시간 종료 30분 전까지 가능)
휴관일 매주 월요일과 법정공휴일 다음 날, 1월 1일, 설날 및 추석 당일
입장료 무료
광화문에 갈 일이 생겼다. 우리 집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나가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미아리고개를 넘어 혜화동을 거쳐 창경궁과 창덕궁을 지나며 가는 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반대의 방향으로 국민대학교 앞을 지나 북악터널을 통과해 평창동과 고즈넉한 부암동 길을 거쳐 효자동 쪽으로 가는 방법이다.
버스 창밖으로 복잡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시내를 통과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어느 드라이브길 못지않게 아름다운 길인 평창동으로 해서 부암동을 지나는 것도 즐거운 나들이가 된다.
부암동 길은 오롯한 오솔길 같은 창의문 길에 윤동주문학관도 있고 청와대가 가까워서인지 엄숙하고 조용한 느낌이 든다.
이날은 버스를 타고 북악터널 쪽으로 해서 광화문에 가기로 했다.
이쪽은 북한산에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여서 인지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린다.
종점 근처에서 탄 필자는 밖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창문 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국민대학교 정류장에서 등산복 차림의 한 아저씨가 버스에 올라 내 앞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아저씨는 메고 있던 배낭에서 무언가 꺼내 종이 가방에 옮겨 담았다.
슬쩍 건너다보니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김치였고 증명이라도 하듯이 익은 김치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필자는 어릴 때 김치를 좋아하지 않았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었을까? 김치는 없어도 그만인 반찬이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김치의 참맛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김치 없으면 밥을 못 먹을 정도로 김치 마니아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김치를 좋아하지만, 공공장소에서 김치 냄새가 진동을 하니 그 냄새가 매우 좋지 않았다.
좀 차려입은 옷에 김치 냄새가 밸 것 같은 걱정도 되고 어쨌든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왜 저 아저씨는 그대로 배낭에 넣어둘 것이지 꺼내어 옮기며 이렇게 안 좋은 냄새를 나게 한 걸까. 필자만 기분 나쁜 건 아니었나 보다. 버스 승객 몇몇은 뒷자리로 자리를 옮기기도 했다.
필자는 창문을 조금 열까? 생각했지만 혹시 그 아저씨가 자기 때문인 줄 알면 무안해 할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아마 등산길에 음식점이나 친구에게서 건네받았을 김치일 것이다. 아저씨에게는 저녁 한 끼 반찬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해 줄 수도 있다.
모임에서 한 친구가 들은 이야기라며 털어놓는 말은 참으로 우리를 우울하게 했다.
젊은 아이들이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자리가 있어도 노인들 옆엔 앉기 싫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제 명실공히 노인, 아니 시니어의 반열에 들어선 우리는 너무나 서글프다고 푸념을 했다.
필자 옆자리가 비었는데 어린 사람들이 노인이라며 피한다면 어찌할지 걱정이 된다.
‘너희는 안 늙을 줄 아느냐?’고 나무라기 전에 우리 시니어도 반성할 점은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몸에서 냄새가 난다든지 말이 너무 시끄럽다든지 어른으로서 조심해야 할 일도 있다는 점이다.
오늘 필자 앞에 앉았던 아저씨도 공공장소에서 그런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면 남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피해가거나 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치 냄새를 퍼뜨린 아저씨 덕분에 한 번 더 시니어가 된 필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한양도성길 구간 중에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인근 혜화문과 창의문(자하문) 사이를 를 백악구간이라고 한다. 이 구간이 도성길 7개 구간 중에 가장 힘든 코스다. 북악산 능선을 타고 넘는 성곽 길을 따라 걸으면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일품이다. 그런데 북악을 넘어 창의문방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가파른데다가 다리도 풀린 상황이라 매우 위험하다. 내려오면 긴장이 풀리고 온몸에 땀범벅이 된다. 다음 코스 인왕산 구간으로 접어드는 초입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다.
땀도 식히고 잠시 쉬어갈 겸 가볍게 들른 윤동주 문학관. 그러나 그의 육필 원고를 읽어나가면서 가벼운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과거 물탱크로 사용했던 구조물을 개조한 영상관에서 시인의 삶과 시를 만날 수 있다. 육면체 콘크리트 구조물의 검고 거친 표면이 암울했던 그 시기와 잘 어울린다. 천장에서 들어오는 한 조각 빛의 의미도 새롭게 느껴진다.
그 영상관에 시인이 다녔던 북간도 소학교에서 가져온 아주 작고 투박한 나무의자가 몇 개 놓여있다. 초등학생의 기분으로 그 곳에 앉으니 시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어둡고 서늘한 육면체 방, 거칠고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낡은 흑백사진들이 파르르 떨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시인은 여리고 부드러우면서도 우수가 어린 표정이다. 아주 익숙한 시가 조금씩 위로 움직여 사라지면서 약간의 울림과 함께 숙연하게 낭독된다.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에서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환등기 영상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래토록 여운이 남는다.
교과서에서 자주 만났던 익숙한 시가 그 날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때로는 코미디프로에서 희화화되기도 했던 ‘별 하나에...’가 갑자기 애잔함과 슬픔, 그리움, 절망 등으로 감정이입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전율을 느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북간도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서 별을 세고 있는 시인과 함께 서 있는 것처럼... 학창시절 이후 수십 년 만에 다시 만나는 윤동주. 그의 육필원고를 숨죽이고 읽어 내려가면서 육십이 가까워진 필자가 비로소 시인의 애절함을 절절히 느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던 청년은 광복을 6개월 앞두고 고통 속에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기억되는 그의 숨결을 찾아갔다.
윤동주는 1941년 24세가 되던 해, 연희전문학교 후배 정병욱과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약 4개월간 하숙을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 시기에 윤 시인을 기억하게 하는 대표 시 ‘십자가’,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가 쓰였다. 이 인연으로 설립된 것이 인왕산 자락에 있는 ‘윤동주 문학관’이다. 더는 쓰이지 않는 수도 가압장 물탱크 두 개를 이용해 만들었다. 좁은 공간 안. 깊은 내적 의미를 이해하고 바라보면 문학관 자체가 윤동주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윤동주 문학관은 윤 시인의 생애를 따라가 보는 스토리텔링형 문학관이다. 유물 등을 나열해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간 안에 의미를 부여했다.
제1 전시실에는 윤 시인의 사진과 시(영인본) 등 각종 문서와 만주 북간도 명동촌 생가에서 가지고 온 우물 목판이 전시돼 있다. ‘창씨개명’을 하기 전 윤 시인이 쓴 ‘참회록’ 영인본 원고지에서는 일제 강점기 시인으로서 갈등이 고스란히 적힌 낙서도 찾을 수 있다.
제2 전시실과 제3 전시실은 공간 자체가 윤 시인이다. 열린 우물로 불리는 제2 전시실은 윤 시인의 ‘자화상’을 표현한 곳이다. 마치 우물 안에서 사내의 얼굴을 대하듯 하늘을 마주하면 윤 시인의 서글픈 얼굴이 그려진다.
부대시설로 문학관 위에 작은 카페가 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카페 길과 이어져 있다. 개관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고 매주 월요일 휴관한다. 관람은 무료.
매화꽃은 가장 먼저 봄을 알려온다. 겨울에 피는 꽃이라 하여 ‘설중매’라고 부르기도 한다. 회색빛 도시, 겨울옷이 무겁게만 느껴질 때 오아시스처럼 섬진강변에 매화꽃이 피어나기 시작한다.
긴 겨울에 숨이 막힐 듯 답답한 사람들은 도심을 벗어나 매화꽃을 찾아 장거리 여행 채비를 서두른다. 타 지역은 아직도 썰렁한 산하지만 섬진강 주변으로는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청매실 농원엔 눈이 내린 듯 흐드러지게 매화꽃이 만발하고
일기에 따라 조금 차이는 나겠지만 3월 중순쯤 섬진강가의 온 마을에는 매화꽃이 만발한다. 길거리에도, 집 뒤뜰에도, 그리고 강변 옆으로도 꽃 천지다. 허허로운 산야에 핀 흰 꽃은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야 제멋이 난다. 꽃잎 하나하나 뜯어보면 예쁘지만 꽃이 작고 나무줄기가 있어서 한 그루만 모여 있으면 제빛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매화마을로 알려진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삼벅재 골짜기로도 부르는 이 마을 농가들은 산과 밭에 곡식 대신 모두 매화나무를 심었다. 봄이면 하얗게 만개한 매화꽃이 눈꽃처럼 휘날리고 하얀 꽃구름이 골짜기에 내려앉은 듯 장관을 이룬다.
꽃이 만개하면 으레 매화 축제가 열린다. 매화꽃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청매실 농원이 가장 유명하다. 수십년 묵은 매화나무 아래, 청보리가 바람을 타는 농원 중턱에 서면 굽이져 흐르는 섬진강 너머 하동 쪽 마을이 동양화처럼 내려다보인다. 매화꽃 군락을 감상하기에는 이곳만큼 좋은 곳도 없지만 해마다 몰려드는 인파 탓에 교통체증과 사람들에게 치인다. 초보 여행객들이 아니라면 이 북적거림을 피해 섬진강 하류를 기점으로 강변 드라이브 길로 나설 것이다. 그곳 또한 아름다운 여정의 풍광을 보여준다. 진월에서 신아리, 신구리, 월길리 등 낯선 이름의 마을을 지나친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꽃이 도로 옆을 화사하게 장식해 인적 드문 산간지역에 아름다운 전경을 만들어냈다.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농민들은 소를 이용한 밭갈이에 여념 없고 산등성이에도 무심하게 하얗게 봄꽃을 피워내고 있다. 잠시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기 위해 열어놓은 차창 밖으로 진하면서도 달콤한 매화향이 코끝을 감싸온다.
윤동주 시인의 애련한 흔적이 남은 망덕포구엔 벚굴이 한창
이어 발길을 멈추는 곳은 섬진강 물줄기가 바닷물과 조우하는 망덕포구다. 배알도라는 자그마한 섬 앞으로 띄엄띄엄 배들이 정박해 있고 횟집이 길게 이어진다. 섬진강 끝자락에 남은 포구라는 것 빼고는 딱히 볼거리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곳엔 윤동주(1917~1945) 시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포구는 매력적이다. 그저 시인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 한편이 싸하다. 측은지심에 가슴이 저려 온다. 일제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 일제강점기에서 피어보지도 못한 채 사그라진 시인의 인생을 어찌 몇 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시리디시린 삶의 자그마한 흔적이 이 망덕포구에 있는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보관했던 낡은 정병욱 가옥(근대문화유산 제341호, 1925년 건립)과 시비가 있다. 횟집 즐비한 포구 앞에, 인기척 없는 가옥 한 채가 썰렁하게 있다. 굳게 닫힌 유리창 너머로 윤동주 시인과 친구의 학창 시절 얼굴이 해맑게 미소 지으며 반긴다. 마루 한쪽이 열려 있고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이라는 안내 글자가 있다.
어떤 연유로 이곳에 윤동주 시인의 원고가 숨겨져 있었을까? 시인이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 3부의 원고를 만들었다. 1부는 자신이, 1부씩은 은사 이양하 교수와 절친한 친구이자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맡겼다. 정병욱이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광양의 어머니에게 원고를 맡긴다. 어머니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집 마룻바닥 밑에 원고를 숨기고 보관해왔다. 무사히 돌아온 정병욱은 1948년 유고시집 를 발간하게 된 것이다. 주옥 같은 윤동주 시인의 시가 이렇게 알려지게 된 데 큰 기여를 한 집인 게다. 광양시에서는 윤동주, 정병욱 작은 기념관, 도서관, 문학관으로 리모델링하고 소공원을 만들 계획이다. 또 윤동주 백일장, 문학상을 추진하는 등 윤동주 시인의 제2의 고향으로 자리매김할 생각이다.
또 이 봄, 망덕포구를 찾아볼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벚굴이다. 1~4월이 제철인 벚굴은 이곳이 아니고서는 먹을 수가 없다. 벚굴은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짜지 않고 굴의 비릿한 맛이 적다. 거기에 일반 굴에 비해 보통 10배 정도나 크다. 서너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다.
동백꽃 흐드러지게 핀 옥룡사지에서 즐기는 봄날의 오수
광양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백계산(505m) 자락의 옥룡사지다. 주차장에서부터 걸어가야 한다. 도로 옆, 길목(해발 403m)에는 대규모(약 2100평) 동백군락지(도지정 기념물 12호)가 있다. 온 산을 동백나무가 에둘러 감싸고 있다. 신라 경문왕 4년(864), 도선국사가 옥룡사를 창건하고 풍수지리설에 따라 보호수를 심었다는 전설이 흐른다. 절을 세울 때 땅의 기운이 약한 것을 보충하려고 꾸몄으며, 제자들의 심신수련을 위해 차밭을 일궜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 동백군락지는 ‘아름다운 숲’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찾는 이 많지 않은 그곳에 피어난 동백꽃은 따사로운 봄날과 잘도 어울린다. 동백숲길에 폭 빠져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금 오르면 옥룡사지(사적 제407호)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터는 큰 연못이었는데 9마리의 용이 살면서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에 도선국사가 용을 몰아냈는데 유독 백룡만이 말을 듣지 않자, 지팡이로 용의 눈을 멀게 하고 연못의 물을 끓게 하여 쫓아낸 뒤 숯으로 절터를 닦아 세웠다고 한다. 도선국사는 이 옥룡사에서 30여년 동안 홀로 앉아 말을 잊고[宴坐忘言] 지내다 입적했다. 조선 후기에 화재로 타 버려 폐사된 후 긴 세월 절터만 남아 있다. 대신 우측 언덕을 넘으면 도선국사비와 부도탑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에 비석이 유실되었으나 2003년 본래 자리에 복원되었다. 또 이곳에서 산 길로 거슬러 오르면 동양 최대의 청동약사여래불이 서 있는 운암사를 만나게 된다.
도선국사와 고로쇠 이야기
도선국사(827~898) 하면 고로쇠 수액의 전설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참선하다 몸을 일으키려던 도선국사. 무릎이 금세 펴질 리 만무하다. 도선은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는데 나무가 부러졌고, 부러진 나무에서 수액이 흘러나왔다. 그 물을 마신 도선의 다리가 펴져 ‘뼈에 이로운 물’이라 하여 ‘골리수(骨利水)’로 불렀는데, 나중에 고로쇠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해마다 경칩이면 백운산에서 고로쇠 약수제(3월 5일)와 축제를 연다. 어쨌든 옥룡사지에는 도선국사가 심었다는 동백나무, 녹차나무가 남아 옛터를 지키고 있다. 또 옥룡사지 가는 길목에서 중흥사(061-763-6655)를 찾아도 좋다. 중흥산성 3층석탑(보물 112호)과 중흥사 석조지장보살반가상(전남도 유형문화재 142호)이 있다. 근처 도선국사마을(061-762-6716, dosun.go2vil.org)도 재미가 있다. 다도, 도자기, 염색, 전통 손두부 만들기 등 계절별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전통농촌테마마을. 특히 물 맛이 좋아 원님 전용 식수로 애용되었다는 사또약수터가 있다. 이 약수를 이용해 만든 손두부를 농가에서 판다.
Travel Tip!
가는 길 서울 출발 → 호남고속도로 → 익산JC → 완주JC에서 순천 광양 방향 간 고속도로 이용 → 광양IC → 광양읍에서 매천 유적지를 보고 10여분 가면 옥룡면 소재지다. 옥룡면에서 광양읍내로 다시 나와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진월IC로 나오면 망덕포구를 만나기 쉽다. 그리고 하동 쪽으로 가면 섬진강변을 만나고 근처에 청매실 농원이 있다. 청매실 농원부터 여행을 하려면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구례를 거쳐 들어오는 것이 편하다.
숙박정보 백운산 자연휴양림(061-763-8615, www.gwangyang.go.kr)은 울창하고 소나무 숲이 가히 장관이다. 특히 휴양림의 황톳길은 흙에 들어 있는 원적외선이 뿜어져 나와 맨발로 걸으면 혈액순환에 큰 도움이 된다. 읍내 덕계리(순천, 보성 가는 방면)는 모텔촌이다.
주변 연계 여행지 광양 시내에는 매천생가와 유적공원, 장도박물관(061-762-4853, www.jangdo.org)이 있다. 어치계곡, 동곡계곡, 금천계곡, 성불계곡 등은 빼어난 계곡미를 자랑한다.
별미집 광양읍내엔 불고기 특화거리가 있다. 매실한우(061-762-9178), 3대광양불고기(061-762-9250), 조선옥숯불갈비(061-792-8559), 금목서(061-761-3300) 등을 꼽는다. 봉강면의 지곡산장(061-761-3335, 닭숯불구이)이 아주 괜찮다. 고로쇠 수액이 나오는 철에는 미리 예약하면 음용이 가능하다. 그 외 이 계절에는 광양의 계곡 주변 민가 식당에서 고로쇠와 함께 닭숯불구이를 먹을 수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여러분 시를 읽으십니까?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니요 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 한다. 1년에 책 한권 읽기도 힘든 이때 시를 접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그런 우리들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가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정도의 싯구는 충분히 기억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시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 모국어로 쓰여져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일깨우고 있는 윤동주의 ‘서시’ 이다.
최근 반성 없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아베 정권이 들어서며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고, 평화헌법을 전쟁헌법으로 고치는 파렴치함을 보이는 등 한일 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자들은 미래를 논할 자격이 없다. 한참 추운 어느 겨울, 28세의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 조국의 현실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노래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관을 찾았다.
윤동주 문학관은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사이 작은 언덕위에 위치해 있다. 2012년 언덕 위 가옥에 물 펌프 역할을 하다 폐쇄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이소진 건축가가 개조해 만들었다. 문학관은 총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제 1전시실에는 시인의 친필원고, 발간된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고 제 2전시실은 원래 있던 물이 가득 차 있던 물탱크의 천장을 뜯어 우물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성찰의 시간을 가졌던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의미에서 ‘열린 우물’로 만들었다. 약 10m도 되지 않는 그 작은 공간을 걷는 동안 ‘자화상’ 시 처럼 자신이 미워졌다가 다시 가엾어 졌다가 곧이어 추억이 되는 시인의 그 우물을 바라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제 3전시실은 물탱크를 그대로 두어 윤동주 시인에 관련된 영상을 상영하는 작은 극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물이 찼던 자리는 그대로 벽에 남아 있었는데 쓸쓸하고 외로웠던 시인의 생애가 그대로 오버랩되어 하나의 그림처럼 흔적을 남겼다.
윤동주 문학관을 나오면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자주 올랐다는 ‘시인의 언덕’으로 이어진다. ‘시인의 언덕’위에 오르면 앞으로 남산타워가 뾰족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화려한 현대 도심이 들어나 있고 뒤를 돌아 보면 여전히 푸르고 웅장한 북한산이 병풍을 치고 있어 옛 서울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윤동주는 이 언덕을 오르며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그의 생애를 곱씹으며 그가 바라보았던 생전의 서울을 생각해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순간순간 변해가는 지금 높은 건물들로 가득찬 풍경을 바라보며 지금의 이 풍요로움이 과거 많은 이들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길을 걸으며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지식의 책임을 생각했던 윤동주 시인을 비롯하여 말이다.
이번 여행으로 저도 참 오랜만에 시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읽은 시 ‘자화상’은 나에게 예전에 느끼지 못한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여러분도 더 늦기 전에 아름다운 시의 풍미에 폭 빠져 봅시다 지금~~
자화상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