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구 오금로에 위치한 책 복합문화공간 ‘서울책보고’에서 특별전시 ‘절판 시집의 추억전(展)’이 열린다.
10월 16일까지 이어지는 ‘절판 시집의 추억전(展)’은 문학과지성사, 창비, 민음사 등 출판사들이 펴낸 시집 가운데 서울책보고가 보유한 200여 권의 절판 시집을 전시·판매한다. 교육시집과 영화시집, 대학교 시 동아리에서 내놓은 동인지 등도 만날 수 있다.
서울책보고 참여 헌책방이 선별한 초판 시집과 시인 사인본 모음 코너도 마련된다. ‘문학과 지성 시인선’, ‘창비 시선’, ‘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세계사 시인선’ 등에서 출간한 1970~2000년대 초판본이 전시·판매될 예정이다. 김광규, 나희덕 등 시인의 사인본도 접할 수 있다.
절판 시집 구매자에게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시인 김명순·윤동주·랭보·에밀리 디킨슨 등의 띠지와 레트로 종이봉투를 증정한다. 자세한 내용은 서울책보고 홈페이지나 공식 SNS(페이스북·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거나, 전화로 문의하면 된다.
한편, 서울책보고는 유휴공간이었던 신천유수지 내 물류창고를 서울시 도시 재생 프로젝트로 새롭게 조성한 책 문화공간이다. 2019년 3월 27일 개관 이후 3년 동안 400회 이상의 다양한 책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교과서전(展):슬기로운 생활’, ‘잡지전(展):지나간 시간을 엿보다’, ‘7080 추억의 만화전(展)’, ‘근현대 여성 작가전(展)’ 등 공공 헌책방이 할 수 있는 특별전시를 선보인 바 있다. 서울책보고가 헌책과 헌책 문화를 통해 시대의 흔적과 추억을 시민과 공유하는 특별기획전시는 계속 이어진다.
이명현은 별과 시, 소설을 사랑하는 전파 천문학자다. 전파 망원경을 이용해 천체를 관측한다. 현재 외계 생명체를 찾는 과학 프로젝트 ‘세티’의 한국 책임자(SETI KOREA 대표)와 메티 인터내셔널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더불어 어릴 적 자랐던 삼청동 옛집에 과학책방 ‘갈다’를 열고 과학 소통가로서 우주과학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과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이명현 천문학자가 별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70년대 서울의 변두리, 답십리 골목길에서 딱지치기나 소꿉장난을 하며 놀았던 어린 시절이다. 해 질 무렵, 함께 놀던 친구들이 하나둘 엄마의 부름에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혼자 남아 밤하늘을 바라봤다. 맞벌이 부부였던 부모님이 퇴근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다 별에 매료돼 ‘별을 헤는 사람’이 됐다.
상반된 단어들의 별난 집합
“초등학교 때부터 아마추어 천문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했어요. 최연소 회원이었죠. 그때만 해도 서울 밤하늘이 제법 어두웠어요. 인공 불빛이 덜했으니 어지간한 것은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겨울 은하수는 가끔, 안드로메다 은하는 맨눈으로 보고 망원경으로도 다시 만나던 단골손님이었어요. 성운과 성단의 이름을 적은 노트를 가지고 옥상에 올라가 눈으로 찾고, 망원경으로 자세히 본 후 그림을 그리던 추억이 생각나네요. 고등학교 때는 유리알을 직접 갈아 망원경을 만들기도 했어요.”
그의 세월은 문학과도 깊게 맞닿아 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 여자친구(지금의 아내)로부터 이별을 알리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인생 첫 실연이었다. 편지에는 김소월의 ‘초혼’과 윤동주의 ‘서시’ 두 편이 적혀 있었다. 서럽게 울다가 두 시인의 시를 보았다. 그리움을 곱씹으며 구할 수 있는 모든 시집은 다 구해서 읽고 외웠다. 이별이 또 다른 시작을 만들어준 셈이다. 윤동주가 공부했던 숭실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그가 참여했던 평양 숭실고 교지 ‘숭실활천’의 정신을 잇는 문학 동인회 ‘활천’을 만들었다. 그 이름으로 동인지도 발행했다. 대학교도 윤동주의 흔적이 남은 연세대학교로 갔다. 마침 같은 학교에 입학한 아내를 1학년 가을, 윤동주 시비 앞에서 다시 만났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별을 관측하는 천문학자가 된 후 전파 망원경을 통한 은하 연구의 중심지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교에서 유학하며 연구원 생활을 마쳤다. 귀국해서는 연세대학교 연구교수와 천문대 책임연구원을 지냈다. 이명현 인생의 화두인 별과 윤동주의 문학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됐다.
“2010년 11월 말, 일요일 밤이었어요. 김장철이라 배추를 나른 뒤였죠. 약간 숨이 찼지만 힘들진 않았는데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쓰러졌어요. 응급처치 덕에 살았지만 지금은 심장 근육의 일부만 뛰는 상태에요. 그때 현장 과학자로서는 은퇴했어요. 당시 연재 중이던 온라인 매체 ‘프레시안 북스’의 서평 연재 코너 빼고요. 격주로 진행했는데, 책을 한 권 읽고 글 쓰는 게 다였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 재활 훈련으로 여겼죠.”
‘과학의 문학’을 위한 책방
2018년에는 삼청동 뒷골목에 과학책방 ‘갈다’를 열었다. 원래 이 공간은 아버지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저자)가 1979년에 지은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조선총독부 관리가 살던 단층 적산 가옥이 있었다. 이 명예교수가 2002년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집을 새로 지어 옮겨간 후 삼청동 집은 지인이 오랫동안 비폭력대화센터로 운영해왔다. 그러다 센터가 이사하며 집이 비자 이 명예교수는 장남 이명현 천문학자에게 공간을 내줬다.
“갈다는 갈릴레오(Galileo)와 다윈(Darwin)의 앞글자를 합친 단어예요. ‘세상을 바꾼 과학을 만나는 곳’이란 뜻부터 ‘문화의 터전을 갈다’, ‘지식의 칼날을 갈다’, ‘딱딱한 과학을 부드럽게 갈다’, ‘지식의 판을 갈다’ 등 5가지 의미를 담았어요. 장대익 서울대 교수,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김상욱 경희대 교수 같은 친한 학자 10여 명과 아이디어를 모았죠. 이름을 지은 다음 뭘 할까 고민했어요. 다들 과학자이면서 책을 쓰는 사람이고, 책방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터라 교양과학 책방을 열기로 했죠. 2층에는 저자의 방, 지하엔 북 콘서트를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어요.”
이명현 천문학자는 과학을 통한 대중과의 소통을 소중히 여긴다. 출발은 대학원생 때다. 연구실로 초등학생 꼬마 한 명이 들어와 다짜고짜 지구가 둥글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이론에 입거한 증거를 나열해 친절히 얘기해줬지만 아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자신을 납득시켜달라고 보챘다. 아무리 설명해도 고개를 갸우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천문학을 매개로 비전공자와 교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일인지 새삼 느꼈던 순간이다. 이후 다양한 강연을 통해 과학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사람들에게 꾸준히 전한다.
왜 과학, 책일까?
“대부분 과학책이 어렵다는 편견 때문에 거리를 둬요. 과학책을 쉽게 읽고 싶다면 ‘느슨한 독서’를 추천합니다. 과거에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가 적어 책이 갖는 절대적인 힘이 있었어요. 그만큼 정독, 완독, 반복 등이 중요했죠. 지금은 다양한 매체에서 좋은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와요. 첫 장부터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강박은 버리고, 모르는 부분은 과감히 넘기세요. 다큐멘터리나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는 등 비독서 행위를 활용하면 효율적입니다. 다른 사람이 흘려놓은 정보에 올라타는 거죠. 장으로 챕터가 나누어져 있는 책은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는 것도 느슨한 독서 방법이에요.”
물론 영상, 팟캐스트 등의 미디어를 통해 과학을 접한다 해도 진입장벽은 높다. 그럼에도 느슨하게나마 과학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상 매체가 익숙한 시대에 살다 보니 현대인은 즉각적인 반응을 도출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현대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해 신중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복잡한 상황도 마주한다. 이명현 박사는 이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선 독서가 최적의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정보 습득의 목적도 있지만, 생각할 시간을 확보하는 데 의미가 있어요. 사고력을 기르는 거예요. 많은 분야 중에서도 왜 하필 과학책일까요? 중세에는 신학, 천문, 지리, 음악이 핵심 교양이었죠. 그걸 알아야 사람들과 호흡하고, 시대를 풍성하게 누릴 권리를 얻을 수 있었어요. 지금은 과학이 핵심 교양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봐요. 심리학이나 행동과학 등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과학으로 이해한 다음,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현대 인문학이에요. 인문학과 과학은 뗄 수 없는 관계죠. 핵심 교양으로서의 과학을 익혀 우리 함께 인문학을 향유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장옥 수필가의 호는 효재(效在)다. 효재란 ‘누군가 본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보자’라는 뜻이다. 자신은 아직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해서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녀는 교사였다. 그러나 마흔여덟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교직을 내려놓아야 했던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그 아픔을 딛고 수필가로 새로운 인생을 연 그녀의 삶을 한 편의 담담한 수필을 읽듯 들어보았다.
문장옥 수필가가 마흔여덟 살에 교직을 내려놓게 된 것은 그즈음 두 아들이 사춘기를 맞아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가정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탓이 아닐까 싶어 지난 삶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독립해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상 그만두고 나니 교직에 대한 아쉬움이 컸고, 내 인생의 후반기를 어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엄습했습니다.”
고민 끝에 시작한 것이 수필 쓰기였다.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살아온 20여 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작가라는 호칭을 갖고 보니, 독자에게 감동을 줄 만한 작품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내게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자신을 설득한 다음부터는 수필가로서의 생활에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제2의 인생이 마침내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다.
몸짓으로 써내려가는 새로운 인생
수필가로서 문장옥은 두 권의 수필집을 냈다. 첫 번째가 ‘행복정원에 들다’, 두 번째가 ‘내 안에 불꽃’이다. 그녀는 지난 8월에 낸 ‘내 안에 불꽃’을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진심 어리게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에세이란 문학의 특징은 다른 문학 장르와 달리 작가의 진솔한 삶이 그대로 녹아내려 인품의 향기를 뿜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저의 아픔과 회한, 그리고 부끄러운 모습까지 솔직히 드러내어 독자에게 공감을 주고자 했고, 작은 위안과 교훈이라도 함께 나누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독자에게 죽음과 맞닿게 되더라도 삶의 열정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그 열정을 잃어버리는 순간, 삶의 이유도 보람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잘것없는 작품일지 모르지만 제가 작가로 살아가도록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삶의 열정을 잃지 않고 온몸으로 쓰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진솔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문 작가의 말처럼 ‘내 안에 불꽃’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본인의 암 수술 경험까지, 그녀의 삶에서 죽음은 잔인하게 왔다 사라졌다 다시금 나타나는 실제적 위협이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죽음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을 보내면서, 저 자신이 네 번의 큰 수술을 하면서 삶의 옆에는 죽음이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웰다잉이란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을 때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가까운 체험은 자연스레 인생에 대한 담담한 관조를 갖게 했다. 그럼에도 인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나이가 칠십이나 되었는데도 인생이란 단어를 논하는 것은 자신이 없어요. 아직도 어린애 같은 천진함과 호기심이 남아 있어, 남편에게 가끔 핀잔을 듣곤 합니다. 저는 ‘이 나이에 뭘 한다고?’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열정을 잃지 않고 무엇이든 도전해보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는 신세는 면하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참다운 나
자신의 말처럼 문 작가는 지금의 삶을 하나의 도전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죽음에 대한 담담한 수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도전으로서의 작가 인생은 생활적인 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자신의 서재에 이름을 붙였다. ‘진아당’으로 ‘참 내가 있는 집’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참다운 나’란 어떤 사람일까.
“자신에게 정직하고 거짓이 없으며, 진실하고 참되며, 타고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삶의 근원이자 행복의 근원이 아닐까요? 윤동주 시인이 자신의 인생관을 보여준 ‘서시’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처럼 저 역시 그런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삶이 좋은 수필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날이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도움이 되고, 작으나마 행복을 줄 수 있을 때, 소박하지만 감동 있는 삶이 될 때, 그것이 글이 되었을 때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삶은 어떤 사람들의 삶에 남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녀가 교사 생활을 하던 시절의 두 제자가 바로 그들이다.
“한 사람은 제가 초등학교 교사 시절 1학년 학생으로 만난 제자인데, 지금은 서울의 모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있습니다. 제가 은퇴한 후 20년 넘도록 스승의 날은 물론 가끔씩 저를 찾아와 식사도 하고 수다도 떠는 친구 같은 제자예요. 또 한 사람은 제가 중등교사 시절에 만난 문제 학생이었는데, 이젠 어엿하고 반듯한 건축회사 중견 간부가 되었습니다. 헤어진 후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렵게 나를 찾아내 보은하는 고맙고도 잊을 수 없는 제자들이랍니다. 정말 제 인생에서 ‘삶의 보람과 의미’를 알게 해준 귀하고 귀한 사람들입니다.”
남편은 행복을 공유하는 소중한 존재
그녀는 나이가 들어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것으로 ‘자유로운 삶’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작가로서 엄격한 법칙에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속박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주부로서 가족에게 봉사해야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고 사랑을 품은 가운데 능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는 오래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지만 누구보다 잉꼬부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해요. 가급적 서로 간섭을 줄이고, 한밤중 잠이 깨면 언제든지 일어나 독서와 글쓰기, 사색을 즐기며 살아가니,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처럼 그녀에게 남편은 행복을 공유하는 소중한 상대다. 노후의 행복을 꼽을 때 그녀는 무엇보다 먼저 남편을 떠올릴 정도였다.
“자녀들이 독립해 집을 떠난 지금은 남편과 한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희는 동네 공원을 매일 저녁 한두 시간씩 산책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매월 한 번씩 함께 여행을 갑니다. 젊은 시절에 누렸던 낭만적인 느낌은 약해지긴 했지만, 이젠 서로가 익숙한 처지라 같이하는 시간이 편안해요.”
남은 여생 동안 더 많이 사랑하고 베풀 것
문 작가는 회갑이 된 기념으로 첫 번째 수필집 ‘행복정원에 들다’를 냈고, 칠순 기념으로 두 번째 수필집 ‘내 안에 불꽃’을 냈다. 두 권의 책을 냈지만 쓰면 쓸수록 걷고 있는 이 길이 결코 쉽지 않은 여로임을 절감한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 독자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아쉬움이며 동시에 다시 펜을 잡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하다.
“만약 세 번째 책을 낸다면, 남은 여생 동안 더 많이 사랑을 나누고, 베풀며, 도전하고, 독서와 글쓰기에도 게으르지 않음으로써 푸근한 감동으로 다가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문장옥이라는 수필가 안에 숨길 수 없는 벅찬 감흥이 밀려 왔다. 그녀의 진솔한 민낯이 사랑스럽다.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어린 왕자’로 불리는 ‘연어’부터 연탄재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해준 ‘너에게 묻는다’까지 동심과 자연을 오가며 아름다운 언어의 세계를 보여줬던 안도현 시인(61). 올해 그는 환갑을 맞이했고, 1981년 시 ‘낙동강’으로 등단하여 시인으로 산 세월은 어언 40년이다. 여전히 시를 쓸 때면 떨린다는 시인은 지난 40년간의 세월을 정리하며 신간 ‘고백’으로 돌아왔다.
신간 ‘고백’의 서두에서 그는 이 책은 스무 살의 안도현에게 건네는 책이라고 말한다. 그는 스무 살의 자신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40년의 세월을 정리하며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는지 그에게 물었다.
“책을 통해 위로와 고백을 전하고 싶었다. 일단 스무 살의 나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젊을 때는 떨림과 설렘, 불안과 두려움이 공존하지 않나? 나 역시도 그랬다. 특히 시인의 꿈이 쉽지 않은 길임에도 묵묵히 정진했던 스무 살의 안도현을 늦게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나이를 먹으면 설렘과 같은 감정에 무뎌지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렇지만, 오직 시 앞에선 여전히 떨리고 설렌다. 이 책을 통해 스무 살의 내게 건네는 위로와 동시에 여전히 시 앞에서 떨리는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이번 책은 산문집이지만 시가 연상될 만큼 짧고 강렬하다. 특이한 건 자연의 멋스러운 풍광을 담은 사진 위에 얹어진 글에 모두 제목이 없었다.
“이번 책은 독자들에게 ‘숨구멍’이 됐으면 좋겠다. 코로나19가 2년 차로 접어들면서 모두 심신이 지친 상태다. 그래서 진지하거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책은 쓰고 싶지 않았다. 읽으면서 숨을 한번 크게 내쉴 수 있도록 가볍고 짧은 글과 더불어 사진을 시원하게 배치했다. 제목을 달지 않은 건, 독자들이 스스로 제목을 붙여보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다.”
안식년과 같은 해직과 절필
40년의 세월을 정리하면서 묶은 이 책처럼, 그는 오랫동안 터전을 잡았던 전주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현재는 고향인 예천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와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 년 좀 넘었는데 정말 좋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새소리를 듣는 재미가 있다. 마당의 풀을 뽑거나, 비닐하우스의 채소에 물을 주고, 때때로 동네 산책을 다닌다. 지금이 삶에서 제일 행복하다.”
그는 고향에 터전을 잡는 동시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계간지 ‘예천산천’을 만들고 있었다.
“예천산천은 현재 5호까지 나왔다. 잡지를 통해 예천의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의 현재와 과거, 예천의 역사적 인물,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거쳤던 할머니의 얘기 등과 같이 숨겨진 얘기를 통해 예천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고 싶다. 다양한 행사를 해보고 싶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요새는 우편 발송만 열심히 하고 있다.(웃음)”
떨리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소박한 시골 생활을 즐기는 그에게도 매번 좋은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사 시절 해직과 복직을 반복했고, 최근에는 약 4년 동안 절필을 하기도 했다.
“내가 쓰는 시는 책상 위에서 시작해 광장으로 나갔다. 개인의 정서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향해 있었다. 개인적으로 문학은 개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높은 곳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을 바라보고, 공동체를 위한 일은 무엇일까 늘 고민했다. 해직과 절필도 나의 이러한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일이다.”
덧붙여 그는 이 시간을 “시련이 아니라 헤치고 나갈 과제였다”라고 정의했다.
“돌이켜 보면 해직과 절필은 일종의 안식년이자 성찰의 시간이었다. 많은 이로부터 사랑받았던 ‘연어’도 교사 해직 시절에 쓴 것이다. 아이들과 소통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아쉬워서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은 것이 바로 ‘연어’였다. 절필하면서 쓰는 대신 부지런히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또한 지나간 삶과 써온 시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다. 영영 시를 쓰지 못할까 봐 불안하기도 했지만, 감사하게도 또 쓰니까 써지더라. 그 결과가 절필을 마친 후 처음으로 지난해에 출간한 시집인지도 모르겠다.”
삶의 원동력
40년간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시를 써온 시인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시는 무엇일까? 더불어 시인의 삶에서 시는 어떤 의미인지 물어봤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시를 아직 쓰지 못했다. 내 시를 아껴주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써온 시를 다시 보면 부끄럽다. 다만 시를 쓰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시를 쓰면서 삶을 반성했고,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볼 줄 알게 됐으며, ‘나는 나다’가 아닌 ‘나는 너다’와 같은 역지사지 자세로 살려고 노력했다. 아마 내 삶의 원동력은 ‘시’인지도 모른다.”
끝으로 시인으로서의 목표와 좋은 시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밝혔다.
“돌이 쌓여 있네. 돌탑이구나. 이게 시가 아니다. 저 돌탑 안에서 바깥을 보면 어떨까? 저 돌은 어떤 할머니가 어떤 상황에서 지나다 올려놓은 걸까? 이렇게 다른 관점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영감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관찰하고, 그 너머를 상상할 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남다른 생각, 자기만의 언어, 새로운 발견. 이 삼박자가 골고루 갖춰진 게 좋은 시다. 앞으로 살면서 그런 시를 한번 써보고 싶다.”
이날 우리는 바람 부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 아래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얘기를 나눴다. 코로나19가 끝나면 제자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는 바람을 말할 때의 그는 정겨운 선생님이었지만, 시 앞에서 떨림을 고백할 때는 스무 살의 안도현이었고, 자신의 시를 말할 때는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시인이었다. 다만 그 부끄러움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라,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사랑의 고백이 미완의 관계를 완성하듯, 시를 향한 떨리고 부끄러운 마음은 부끄럽지 않은 시를 완성시킬지도 모른다. 삶의 부끄러움을 고백했으나 시는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윤동주 시인처럼. 앞으로 그가 쓸 시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오늘은 제547돌 한글날이다. 쏟아지는 은어와 신조어를 공부해가며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에도 급급한 요즘이지만, 오늘만큼은 한글의 소중함에 감사하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되새겨보는 하루를 보내보는 것도 좋겠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한글날에 볼만한 영화 세 편을 추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말모이 (MAL·MO·E: The Secret Mission, 2018)
1940년대 우리말이 금지된 경성, 극장에서 해고된 '판수'(유해진)는 아들 학비를 대기 위해 가방을 훔치려다 실패한다. 이후 면접을 보러 간 그는 가방 주인이자 조선어학회 대표인 '정환'(윤계상)을 만나고, 얼떨결에 조선어학회에 들어간다. 까막눈이던 판수는 그곳에서 난생처음 글을 읽고 우리말 사전을 만들면서 한글의 소중함에 눈을 뜬다.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한글 사전을 만들어나가는 내용으로, 실화를 각색한 작품이다. 영화 제목의 의미는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며 극 중 조선어학회가 시행한 비밀작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잊고 있던 한글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2. 동주 (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2015)
조국의 언어로 시를 짓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은 일제강점기, 한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주’(강하늘)와 ‘몽규’(박정민)는 일본식 이름을 쓰길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신념을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행동하는 몽규는 일본으로 떠난 뒤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하고,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한 동주는 시대에 대항하는 마음을 조용히 시로 써나간다.
영화 ‘동주’는 조국 독립을 간절히 바라던 시인윤동주와 그의 사촌 송몽규의 삶과 청춘을 담은 영화다. 현존하는 자료가 모두 흑백인 것을 감안해 현실감을 높이고자 흑백 영화로 제작됐다. ‘서시’와 ‘별헤는 밤’ 등 모두에게 익숙한 시는 배우 강하늘의 목소리로 흘러나와 잃어버린 나라를 그리워하는 영화 속 동주의 심리를 대변한다.
3. 천문: 하늘에 묻는다 (Forbidden Dream, 2018)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세종'(한석규). 그는 관노로 태어나 종3품 대호군이 된 천재 과학자 '장영실'(최민식)과 큰 꿈을 함께하며 여러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다. 20년간 돈독한 관계를 이어온 두 사람이지만 어느 날 임금의 가마인 안여가 부서지는 사건으로 세종은 장영실을 문책하며 하루아침에 궁 밖으로 내치고, 장영실은 자취를 감춘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세종과 장영실의 업적과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이 결합된 ‘팩션 사극’이다.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와 간의대, 물시계인 자격루 등 장영실의 발명품을 실제에 가깝게 재현해 작품의 몰입도를 높였으며 영화 ‘넘버3’, ‘쉬리’ 이후 20년 만에 호흡을 맞춘 배우 최민식과 한석규의 환상적인 ‘캐미’가 완성도를 더했다.
여름이 아무리 비바람과 태풍을 몰고 와 몸부림을 쳐도 가을은 온다. 처서(處暑), 백로(白露)가 지났으니 틀림없다. 뜰 앞 감나무의 감이 그렇고 대추와 밤송이만 봐도 가을이 다가옴을 알 수 있다. 조만간 벼는 누렇게 익어 황금물결로 출렁일 것이다. 푸른 산과 들도 붉고 노랗게 물들어가리라. 가을은 이렇게 변화 속에 설렘으로 다가온다. 나는 가을을 특히 좋아한다. 하지만 사계절이 있다는 건 더욱 감사한 일이다. 언젠가 더운 나라에서 온 총각들이 함박눈을 보며 놀라워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생전 처음 보는 하얀 눈이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니 얼마나 신기했을까? 우린 사계절을 통해 온갖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으니 이만저만 축복이 아니다.
가을이 오면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 하늘은 푸르고 높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하늘거리고 고추잠자리는 높게 떠서 난다. 시원한 대청마루에 다리 쭉 뻗고 책을 읽으면 좋을 계절이다. 밤이면 풀벌레 소리가 크게 들린다. 그러다 나뭇잎이 하나둘 뚝뚝 떨어지면 왠지 모를 쓸쓸함과 우수가 밀려오기도 한다. 그래서 가을에는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인생을 논하고, 삶을 논하고,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요 사색의 계절이다.
오랜만에 책꽂이에서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를 꺼내 봤다. ‘가을은’이란 제목이 눈에 띈다. 스님은 가을을 어떻게 느꼈을까?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잡힐 듯하면서도 막막한 물음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태어난 것은 언젠가 한 번은 죽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사필멸(生死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그런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 노상 아쉽고 서운하게 들리는 말이다. 내 차례는 언제 어디서일까 하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을 아무렇게나 허투루 살고 싶지 않다. 만나는 사람마다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얼굴을 익혀두고 싶다. 이다음 세상 어느 길목에선가 우연히 마주칠 때, 오 아무개 아닌가 하고 정답게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익혀두고 싶다.
이 가을에 나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해주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가을은 정말 이상한 계절이다.”
스님 말씀대로 정말 가을은 이상한 계절인가보다. 평소보다 뭔가를 더 생각하게 되고 느낌도 풍부해진다. UN 세계인구전망 자료에 의하면, 2020년 세계 인구는 총 77억9500만 명이다. 그중 한국인은 5178만 명이라 한다. 지구촌을 하나의 가족으로 본다면 누군가와의 만남은 78억 명 중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이 중 몇 사람이 나와 인연을 맺고 살까? 얼마 전 전라도 지리산으로 며칠 여행을 했다. 내가 아는 사람도 없지만,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도 없었다. 육십 평생을 이 좁은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았는데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한 번이라도 눈웃음을 건넨 사람이라면 참 대단한 인연인 셈이다. 스님 말씀이 무리는 아닌 듯싶다. 이 가을엔 가까운 사람들에게라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소중히 생각해야겠다.
법정 스님의 글이 따뜻하게 다가왔다면, 윤동주 시인의 시 ‘가을이 오면’은 살아가는 데 이정표로 삼고 싶을 만큼 큰 울림을 준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인생의 가을이 오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자문자답하듯 말한다. 그러고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법정 스님이나 윤동주 시인의 마음이 하나의 물줄기가 되어 가슴으로 다가온다. 가을은 이렇게 마음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살아 숨 쉬는 이 공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함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깊은 인연인지 알게 한다. 이 가을에는 풀벌레 소리도 더 귀 기울여 듣고, 모든 이웃에게 따뜻한 눈길을 나눠야겠다.
2020년 한 해 두고두고 읽을 만한 책 - by 유성호
단순한 진심 (조해진 저)
프랑스로 입양된 주인공이 임신 후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을 찾으며 벌어지는 일화를 그린다. 소설 속 인물들은 시공간을 넘어 우연히 마주치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 몰두하며 차츰 타인과 소통하고 서로의 삶에 스며든다.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이은규 저)
2012년 첫 시집 ‘다정한 호칭’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했던 이은규 시인이 7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이다. 이번 책에 담긴 49편의 작품들에서도 시인의 섬세한 시선과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을 읽고 책과 만나다 (정민 저)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가 30여 년 학문의 길을 걷는 동안 삶의 길잡이가 되어준 사람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무수한 시절이 빚어낸 삶의 단면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필자 특유의 필치가 녹아든 산문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윤동주 평전 (송우혜 저)
민족시인윤동주의 삶과 시를 되새길 수 있다.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 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한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숭고한 시인의 삶을 재조명한다.
Best in New Zealand
영화 속 자연 ‘커시드럴 코브’의 ‘코로만델 반도’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를 영화로 만들 때 촬영 장소 중 한 곳이 북섬의 ‘코로만델 반도(Coromandel Peninsula)’에 있는 ‘커시드럴 코브(Cathedral Cove)’다. ‘오클랜드’에서 출발하면 삼림공원과 바다를 끼고 가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를 즐기면서 초록색 자연에 풍덩 빠지게 된다. 다만, 반도의 북쪽은 도로가 좁고 굴곡이 심해 캠퍼밴 운행을 제한하고 있다. ‘커시드럴 코브’로 가는 여정은 푸른색 바다를 옆에 끼고 사암으로 형성된 절벽 위 숲길을 걷는 산책이다.
유리 호수 ‘타우포’와 북섬의 제왕 ‘통가리로 국립공원’
뉴질랜드에는 총 3800개의 호수가 있다. 이 중 가장 큰 호수는 북섬에서 제일 아름다운 ‘타우포(Taupo)’ 호수다.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 언덕에 올라서면 파란 호수가 보인다.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동시에 여행자들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유리보다 맑은 호수 건너편으로는 설산이 점잖은 선비처럼 앉아 있다. 초록빛 언덕에는 키 작은 야생화들이 바다 같은 호수를 넘어온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춘다. 호수를 옆에 끼고 1번 도로를 타고 가면 ‘통가리로 국립공원’을 만난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마운트 둠으로 나오는 나우루호에(Ngauruhoe) 산과 북섬의 최고봉 루아페후(Ruapehu)와 통가리로(Tongariro) 산이 포함된 지역이다. 마오리족의 영산으로 아직도 5~6년에 한 번씩 폭발하는 활화산이다. 호수, 초원, 용암대 등 화산지역에 나타나는 자연의 특징을 공부하면서 여행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고래와 물개의 서식지 ‘카이코우라’
뉴질랜드는 사람이 살기 전까지 토종 포유동물이 박쥐, 고래, 물개 세 종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중 고래와 물개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 남섬의 ‘카이코우라(Kaikoura)’다.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으로 동물의 먹잇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마을 앞바다로 나가면 고래를 비롯해 돌고래와 바닷새를 볼 수 있다. 매년 1월은 물개 산란기여서 해변으로 어미 물개와 새끼들이 모여든다. 이 마을 인구는 약 2000명인 데 물개는 5만~6만 마리나 된다고 한다.
빙하의 눈물 ‘데카포’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물이 흘러와 만들어진 옥색의 호수가 ‘데카포(Tekapo)’다. 호수 뒤편으로는 ‘마운트 쿡’과 ‘서던 알프스 산맥’의 흰 봉우리들이 보인다. 이 풍경에 취해 호숫가에 앉아 한참 동안 멍때리기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아름다운 교회의 좁은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은 잠깐 동안 숨을 멈추게 한다. 호숫가 돌 사이 루핀의 보라색은 호수의 푸른빛과 어우러지면서 고고하고 이국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옆의 산꼭대기에 있는 ‘마운트 존 천문대’로 가는 길 곳곳에서는 루핀의 군락지가 색과 향기로 여행자를 유혹한다. ‘아스트로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파란 하늘과 호수와 흰 산봉우리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지나온 시간의 상념들이 씻겨 내린다. 그래서 이곳을 ‘영혼의 세탁소’라 부르나보다.
별 헤는 밤, 대자연의 ‘마운트 쿡’
남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 ‘마운트 쿡(Mt. Cook)’이다. 본래 이름인 ‘아오라키(Aoraki)’는 마오리족 언어로 ‘구름을 뚫는 산’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마운트 쿡으로 가는 길목에서 서울시 크기만 한 빙하호 푸카키(Pukaki) 호수를 만난다. 여기서부터 가는 길 곳곳에 전망대가 있다. 절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화이트 호스 힐 캠프 사이트’에 도착하면 두 개의 빙하 호수를 감상할 수 있는 ‘후커밸리 트랙(Hooker Valley Track)’이 반겨준다. 만년설에 덮인 산들과 빙하, 호수를 떠도는 유빙들을 볼 수 있는 가벼운 트레킹 코스다.
이곳은 밤이 되면 수많은 별이 쏟아진다. 어린 왕자의 고향 별인 생텍쥐페리의 별, 별이 되어버린 시인윤동주의 별, 창문을 통해 본 기억 속 고흐의 별, 순수한 감성을 지닌 양치기 목동의 별인 알퐁스 도데의 별들이 말을 건다.
태고의 신비 피오르드 랜드 국립공원 밀퍼드 사운드
피오르드(Fiord) 지형을 대표하는 남섬의 밀퍼드 사운드(Milford sound)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여행지다. 빙하에 의해 수직으로 깎인, 1200m가 넘는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뉴질랜드 최대 국립공원이다. 빙하와 온대우림이 만나 비경이 탄생했다. 우림의 3분의 2는 ‘너도밤나무’와 ‘포도 카프 상록수’의 울창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테 아나우’에서 ‘밀퍼드 사운드’로 가는 94번 도로 곳곳에서는 기가 막힐 만큼 웅장한 지형과 폭포 등 대자연을 만난다. 크루즈 관광으로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가슴에 담는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단애와 폭포를 바라보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한다. 뉴질랜드가 자랑하는 3대 걷기 명소인 ‘케플러 트랙’·‘루트번 트랙’·‘밀퍼드 사운드 트랙’은 모두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 안에 있다.
‘아서스 패스’에서 찍는 로드 무비
남섬 서부에서 최대 도시인 크라이스트 처치(Christchurch)로 가는 73번 도로는 ‘아서스 패스 국립공원’을 통과한다. 캠퍼밴을 비롯한 자동차 여행을 한다면 꼭 가봐야 할 곳이다. 가끔 지나가는 화물차에게 길을 양보하면서 천천히 이동한다. ‘아서스 패스(Arthur′s Pass)’에서 만나는 하나하나의 풍광을 음미하다 보면 뉴질랜드 여행의 백미를 맛보게 된다. 잭슨스(Jacksons)에서 다필드(Darfiels)까지의 거리는 140km. 길 위에서 나만의 로드 무비를 찍는다. 이곳에서 만나는 ‘오티라 밸리(Otira Valley)’의 멋진 풍경들과 폭포, 와이마카리리(Waimakariri) 강 주변의 황량함, ‘피어슨 호수(Lake Pearson)’, ‘케이브 스트림 시닉 리저브(Cave Stream Scenic Reserve)’, ‘캐슬 힐(Castle hill)’ 등이 내 로드 무비에 기록된다. 이 길을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비용과 효율 등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할 때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의 가장 적합한 시기는 봄과 가을이다. 힐링과 자유로움,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뉴질랜드 캠퍼밴 여행을 해보자. 최고의 선택임을 알게 될 것이다.
알면 도움이 되는 정보
•뉴질랜드로 여행할 때 이용하는 항공편이 경유할 경우 가능한 한 상하이 푸둥 공항은 피하는 게 좋다. ‘수화물 자동 연결’이 되지 않아 짐을 찾은 후 다시 부쳐야 할 뿐만 아니라 입국, 출국 신고와 검사를 또 받아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뉴질랜드는 농업 국가라서 입국할 때 식품에 대한 검사가 매우 엄격하다. 통관할 수 없는 식품류는 아예 가져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통과되는 식품들은 겉면에 라벨을 일일이 붙이고 리스트를 준비해 세관 검사를 받을 때 제출하면 좀 더 편리하다.
•여행 중 뉴질랜드 내 북섬과 남섬을 오가는 ‘인터아일랜더(Interislander) 페리 크루즈선’을 이용할 때 ‘톱10 홀리데이 파크’ 회원은 15% 할인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인터아일랜더 크루즈선 홈페이지: www.interislander.co.nz
㈜INL 메일주소: inltours@campervan.co.kr
톱10 홀리데이 파크 홈페이지: top10.co.nz
키위 홀리데이 파크 홈페이지: www.kiwiholidayparks.com
톨로드 비용 납부 사이트: www.tollroad.govt.nz
당신의 아지트는 어디인가? 물론 특정한 한 곳만을 아지트로 삼은 사람도 있겠지만 날씨, 기분, 개인 욕구에 따라 가고 싶은 장소가 달라지기도 한다. ‘2019 시니어 아지트’ 설문조사에서 ‘시니어를 위해 생겨났으면 하는 아지트 유형은?’이라는 질문에 대다수가 문화공간, 학습터, 쉼터를 꼽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즐기고,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쉬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공간을 소개한다.
연재 순서 ① 樂(즐기다), ② 學(배우다), ③ 休(쉬다)
學(배우다)
떠나자 북캉스!
서울책보고
최근 문을 연 서울책보고는 서울시가 1465㎡ 규모의 신천유수지 창고를 개조해 만든 공간으로,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공공 헌책방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책벌레를 형상화한 비정형 나선 구조의 거대한 헌책 장서가 눈을 사로잡는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있던 25개의 헌책방을 모집해 10만여 권의 책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북카페에서는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독창성과 희소성 있는 독립출판물 2000여 종과 명사의 기증 도서 1만여 권도 전시되어 있다. 독립출판물과 기증 도서는 구매가 불가하고 서울책보고 내에서 읽는 것만 가능하다. 또 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절판된 서적도 구매할 수 있으니 추억의 헌책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서울책보고로 GO!
위치 서울 송파구 오금로1 (잠실나루역 1번 출구 도보 3분)
운영시간 평일 10:30~20:30, 주말 10:00~21:00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 휴무)
청운문학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은 자연 속에 위치한 한옥형 문학특화도서관이다. 시·소설·수필 위주의 문학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국내 문학 작품 및 작가 중심의 기획 전시와 인문학 강연, 시 창작 교실 등도 운영한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조망을 자랑하고 대중교통 이용도 편리하다. 독서와 사색,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이 도서관의 또 다른 매력은 ‘문학둘레길’과의 연계다. 문학 둘레길은 인사동, 만해당(한용운 가옥), 보안여관(시인부락), 이상의 집, 윤동주 하숙집 터, 세종대왕 생가 터, 정철 생가 터,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문학과 자연의 향기에 취하고 도심 속 힐링 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위치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36길 40 (경복궁역 3번 출구, 광화문역 2번 출구 → 버스 환승)
운영시간 매일 10:00~19:00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 휴무)
아크앤북
책과 라이프스타일 숍이 결합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입구에서부터 세련되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복합문화공간답게 다양한 장르의 도서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용품 및 잡화도 판매하고 있으며 카페와 음식점도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점 ‘태극당’도 입점해 있어 출출할 때 간식을 즐기기에도 좋다. 편히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아크앤북에 방문했다면 ‘타센 아트북 스트리트’로 불리는 아치형 책 터널은 꼭 보고 가야 한다. 독일의 예술서적 전문출판사인 타센의 도서 8000권 속에 자석을 넣어 천장을 덮은 특별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위치 서울 중구 을지로 29 (을지로입구역 1-1번 출구 도보 1분)
운영시간 매일 10:00~22:00 (연중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