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필씨는 며칠 전, 지인들끼리 공유하는 SNS에 올라온 다급한 메시지를 봤습니다.
“랩탑에서 아침부터 업데이트한다며 전원을 끄지 말라더니 106/155에서 꿈쩍도 안 합니다. AS센터에 전화했더니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기다리라는데, 이거 왜 이러죠? 당장 작업해야 하는데 미치겠다 꾀꼬리. 방법 아는 사람 도와달라 꾀꼬리!”
연세가 좀 있는 선배의 꾀꼬리 절규에 후배들의 답글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도움은 못되면서 그 심정만 이해할 뿐인 경험자들의 답글이 먼저 등장했습니다.
“업데이트 완료될 때까지 기다려보세요. 저도 가끔 그래요.”
“전 그 상태로 다섯 시간 기다린 적도 있습니다.”
방법은 안 가르쳐주면서 야속한 질책만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애당초 자동 업데이트가 안 되게 설정을 해두셨어야 하는데.”
이제 와 어쩌라고. 하지만 해결 후 이성을 찾고 나면 제법 쓸 만한 생활의 지혜일 수도 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라는 듯한 조언도 뒤따랐습니다.
“포맷을 하셔야 할 듯.”
“일단 강제 종료로 전원을 끄세요.”
용필씨도 한마디 보탰습니다.
“인터넷 모뎀을 껐다가 다시 켜보세요.”
기계의 고장은 껐다 켜는 것이 진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제법 도움이 될 듯한 전문용어를 들이밀기도 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디모스를 검색해서 시키는 대로 해보세요.”
한 시간가량 설왕설래의 과정을 거치더니, 결국 대다수의 의견은 이렇게 모아졌습니다.
“그냥 사람 부르세요.”
며칠 후, 또다시 설왕설래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용필씨의 또 다른 지인들끼리 모여 승용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는 중이었습니다.
차 안에는 모두 네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초행길이라 내비게이션에 의존해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같이 운전 좀 한다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같이 남이 운전하는 게 답답한 자들이었고, 하나같이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걸핏하면 반항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각별히 편애하는 내비게이션 앱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앱의 종류는 각기 달랐으나 편애하는 이유만은 같았습니다.
“알아서, 자동으로, 업그레이드를 잘하거든!”
각자의 스마트폰을 열어 자신이 쓰는 앱이 가장 좋다고 우기는 동안 운전자는 안내 음성을 무시한 대가로 길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업그레이드가 되고 나니 도무지 적응이 안 된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용필씨의 생각에 업데이트나 업그레이드나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최신의 것, 새로운 것으로 바뀌는 것, 품격이나 질이 높아지는 것, 끊임없이 결점을 보완하고 개선해나가는 것, 뭐 대충 이런 거 아닌가.
제 맘대로 업데이트가 되는 중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당장에 급한 작업을 못 하게 되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기다리는 수밖에.
기껏 잘 쓰고 있는데 업그레이드가 되는 바람에 낯설고 불편해져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적응하는 수밖에.
그나마 ‘업그레이드하시겠습니까?’라고 의사결정권이라도 주면, 짐짓 거만한 태도로 ‘나중에’를 선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지덕지할 일입니다. 물론 용필씨처럼 반항지수가 낮은 사람들은 머리가 판단하기도 전에 이미 손가락은 ‘지금’이라든가 ‘동의’를 누르고 있긴 합니다.
세상은 점점 용필씨를 이렇게 길들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라고. 가만히 있으라고. 다 알아서 해주겠다고. 그것도 협박이 아닌 친절한 서비스와 미소와 각종 불필요한 혜택을 선물처럼 한아름 안겨주면. 한없는 순응 마인드로 오늘도 용필씨는 ‘지금’을, ‘동의’를, ‘좋아요’를 누르고 또 누릅니다.
이런 용필씨, 과연 이대로 괜찮은 걸까 고민합니다. 용필씨도 이제 새해를 맞이해 반항지수 업그레이드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동 업데이트 기능 따위는 용필씨에게 장착되어 있지 않으니, 용필씨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업그레이드하시겠습니까?”
지금 ‘동의’를 선택한다면 당분간 자신이 낯설고 불편해져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적응하는 수밖에.
△윤봄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작가 및 글쓰기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다.
코트 깃을 세우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조금은 더 빨라졌다.
Y는 카페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은행잎이 너무 많이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저분한 것 같은데 좀 쓸어낼까. 그냥 두는 게 운치 있으려나. 잠깐 갈등했지만 이미 두 손은 빗자루를 챙겨 들고 있었다.
“어? 너? Y 아니야?”
카페 앞 인도를 쓸고 있는 Y를 먼저 알아본 것은 J였다.
“어머! 팀장님!”
“이야, 오랜만이다. 더 예뻐졌네?”
J는 Y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조그만 기획사의 사장이었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던 J는 ‘사장’ 대신 ‘팀장’이라는 직함을 고집했었고, 직원들을 모두 동생이나 조카처럼 친근하게 대하던 사람이었다. 작지만 알찬 회사였고, 젊은 혈기들이 모여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했지만 연쇄부도로 인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카페를 운영한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다만, 여기일 줄이야.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잘 살고 있어서 다행이다.”
Y는 J를 위해 짙은 에스프레소를 한 잔 내려 건넸다. 그러나 J는 뜨거운 물 한 잔을 달라고 하더니 커피를 묽게 마셨다.
“커피 취향이 바뀌셨나 봐요?”
“그걸 아직도 기억하네? 요즘은 부드러운 게 더 좋아서.”
J는 부도 당시 주변의 인맥을 전부 동원해 모든 직원들의 일자리를 찾아주었다. 회사를 정리하면서 유일하게 일자리를 제대로 구해주지 못한 채 헤어지게 된 직원이 바로 Y였다. 회사의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처리했던 Y. 이미 10년도 더 지난 일이건만 J는 그게 늘 마음에 걸려 미안했다.
“괜찮으면 소주나 한잔할래?”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시고도 지나온 세월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고, 마침 카페 손님도 없었고,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가을은, 제법 깊어가는 중이었다. 흔해 빠진 삼류 소설처럼 그렇게 두 사람은 뒤늦은 사랑에 빠졌다. Y에게는 어쩌면 10여 년 전, 차마 고백하지 못했던 사랑이었는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그는 유부남이었으니까. 왜냐하면, 그는 늘 아내 자랑을 했으니까. 왜냐하면, 그는 어마어마한 딸바보였으니까.
“사모님과는 여전히 알콩달콩 잘 지내세요?”
“잘 지내지. 좋은 여자잖아.”
아내의 안부를 물었을 때 Y는 조금 서러웠던가. 부러웠던가. Y는 알싸하게 온몸을 감싸오는 소주의 힘을 빌려 신세한탄을 하고 말았다. 안정을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 직장을 전전했던 지난 세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나곤 했던 몇 번의 짧은 연애, 칙칙한 낯빛과 주름진 얼굴만 남은 마흔의 카페 주인은 J의 아내를 떠올리자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 Y의 쓸쓸함이 J의 다정함을 자극했던가. 그날 밤, J는 소주잔을 비우고 포장마차를 나오면서 Y의 어깨를 오랫동안 안아주었다. Y는 J에게 기댄 채 밤새도록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쓸쓸하고 혼란스러운 가을이 저물도록 그들은 헤어지지 못했다. 겨울은 너무 추웠으니까. 봄은 너무 황홀했으니까. 여름은 너무 뜨거웠으니까. 그리고 다시 가을은 그 서러운 시작보다 더 쓸쓸했으니까. 이별은 엉뚱한 곳에서 벌어졌다. J의 비밀과 거짓말은 아내에게 계절을 헤아릴 틈을 주지 않았다. 분노와 배신에 몸을 떨던 아내는 결국 J를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Y도 J를 떠났다.
이혼의 충격은 아내보다 J를 더 크게 쥐고 흔들었다. 지독한 외로움과 후회를 껴안은 채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J의 고통은 참혹했다. 그건 Y가 위로하거나 대신 채워줄 수 없는 문제였다.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동안 J로부터 우러나오던 모든 매력의 원천은 아내였다. 그가 Y에게 주었던 따뜻한 웃음, 유쾌한 농담, 다정한 손길, 격정적인 몸짓. 그 사랑의 이면에는 그의 아내로부터 비롯된 단단한 안정감이 J에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Y는 몸서리를 쳤다. 떠나는 Y를 J는 잡지 않았다. 아내가 떠나는 순간, 이미 J는 Y를 떠나 있었다.
작년이었다.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될 무렵 나는 오랜만에 이탈리아 여행에 나섰다.
볼로냐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소도시들을 기웃거렸다.
정년퇴직을 하고 연금으로 이냥저냥 살아가는 칠십 노인에게 여행은 더 이상 관광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피렌체에서 샀던 낡은 가죽으로 된 보스턴백 하나를 어깨에 걸치면 그것으로 여행 준비는 끝이 난다.
추억.
이제 나의 여행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이다. 미지의 세계를 만나는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스쳐간 세계를 복기하는 애달픈 확인이다. 사람들은 이런 걸 흔히 추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내가 이 나이에 궁상맞게 혼자서 추억 여행이나 하는 따분함을 즐기는 건 아니다. 과거는 언제나 현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여행은 내게 가장 창조적인 순간들을 제공한다.
피렌체 아르노 강가를 어슬렁거리는데 여행 중 가방 끈이 낡아서 자꾸만 벨트가 늘어나곤 했다. 가죽 공방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두오모를 지나치는 순간, 누군가 내게 말했다.
“너무나 멋져요, 슈테판!”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도 독일어도 능숙하지 못한 그녀가 목을 있는 대로 뒤로 젖히고 두오모를 바라보며 내뱉은 감탄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녀도 다시 이곳에 온 것일까. 나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내가 그렇게 멋져요?”
주어를 생략한 그녀의 감탄에 나는 짓궂게 농담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전히 관광객들로 붐비는 그곳에서 나는 한국에서 온 간호사였던 그녀, 김영희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맸다. 늘어진 가방끈을 손으로 움켜쥔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두오모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김영희는 보이지 않았다. 환청이었을까. 그럴 리가.
그날부터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나는 김영희를 떠올렸다.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걸까. 우연히도 열차 안에서 나는 김영희를 만나고야 말았다.
3주 동안의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볼로냐에서 뮌헨으로 가는 열차를 탔을 때였다.
에세이집을 읽던 나는 살짝 잠이 들었다가, 열차가 멈추는 느낌에 눈을 떴다. 어느새 베로나 역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열차에서 내리고 또 몇몇 사람들이 열차에 올랐다. 내가 앉아 있던 열차 칸의 문이 열리더니 단발머리를 한 젊은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물론 그녀는 김영희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마침 인스브루크에 친구가 있어서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김영희. 놀랍게도 그녀의 이름이 김영희였다. 한국에서는 흔한 이름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고 정중하게 한국어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녀가 놀라거나 말거나 연거푸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신사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어였다.
그녀는 내가 아는 한국어로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커다란 소리로 유쾌하게 웃었다. 한국어를 잘한다고 칭찬했다. 나는 그녀에게 설명했다. 이번에는 영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국어는 이 두 마디가 전부였으니까.
“40년 전이었어요. 한국에서 독일로 온 간호사가 있었어요. 나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어요.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았을 때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노터치, 노터치를 외치며 완강하게 나를 거부했어요. 나는 바로 포기했지요. 나는 신사였으니까요. 그런데 10분쯤 지났을 때 그녀는 내 어깨며 팔을 톡톡 건드리며, 때로는 내 허벅지를 좀 더 세게 두드리며 웃기도 하고 말하기도 했어요. 노터치를 외치던 그녀가 말이죠. 나는 그녀의 터치가 싫지 않았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어요.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녀는 나를 음흉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녀의 이름이 김영희입니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단 두 문장이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신사입니다.”
인스브루크 역에서 내리기 전 김영희는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 터치와 그 터치는 전혀 다른 거예요. 40년 전 독일에 갔던 김영희씨를 만난다면 당신의 한국어 두 문장을 꼭 전해줄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뮌헨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늘어진 가방끈을 땀이 흥건하도록 꼭 쥐고 있었다.
#어느 시골 마을에 가난한 아가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착하고 부지런한 아가씨는 아침이면 일찍 일어나 꽃밭을 돌보고 작은 텃밭도 일구었습니다. 새들과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챙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아 바느질 솜씨가 빼어났기에, 마을 사람들의 낡은 옷도 고쳐 주고 새 옷도 만들어주며 살았습니다.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늘 평화로웠습니다. 무엇보다 저녁이면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해가 다 저물도록 마을을 산책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던 왕자는 아가씨를 발견하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사랑에 빠져버린 왕자는 몇 날 며칠을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아가씨에게 정중하게 청혼을 했고, 두 사람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크고 화려한 궁궐 안에는 온갖 최신 시설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고, 먹을 것은 언제나 풍성했으며, 값비싸고 화려한 옷들과 장신구로 매일 아름답게 치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 안에는 늘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고 향긋한 꽃내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었고, 힘든 일도 하지 않았으며, 화가 나거나 골치 아픈 일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고 풍요로운 가운데, 왕자와 아가씨는 서로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두 사람은 매일매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예쁘고 건강한 아이들도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긴 세월이 지나도록 두 사람의 사랑은 맹세처럼 굳기만 했습니다. 아침이면 나란히 깨어나 하루 종일 행복한 시간을 함께했고, 해가 지면 총총한 별이 보이는 침실에 나란히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가 달콤하게 잠들곤 했습니다. 아가씨는 이런 생활을 당연히 행복하다고 믿었습니다. 화려한 궁궐에서 멋진 왕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으니, 행복한 게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끔씩 어떤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움이 생겨나는 것이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행복을 수상쩍게 여기도록 만들기는 했습니다. 아가씨의 그리움은 궁궐 바깥에 있었고, 가난했던 시간에 있었으며, 초라하지만 자유롭던 자기 자신의 모습에 있었습니다. 허름한 부엌의 퀘퀘한 향이 그리웠고, 누더기 옷을 꿰매던 녹슨 바늘과 낡은 실이 그리웠습니다. 노을이 번지던 고향의 저녁 산책길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그리웠습니다. 바람이 새어들며 덜컹거리던 작은 창도 그리웠습니다. 그 작은 창으로 보이던 별빛과 지금 궁궐의 화려한 창으로 보이는 별빛은 어쩌면 이리도 다를까 생각했습니다. 슬픔 많던 자신의 가여운 모습마저도 그리워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생활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기도 싫었으며, 돌아갈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만 실컷 그리워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가씨는 하녀들조차 쓰지 않는 성 꼭대기의 낡은 다락방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다락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고향이 그리우면 실컷 울기도 했습니다. 다락방에 있는 동안 아가씨는 왕자비가 아니었습니다. 하녀들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먼지도 많고 바닥은 삐걱거리고 초라했지만 아가씨는 그 낡은 공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롭고 반갑고 편안했습니다. 낡은 다락방은 아가씨가 자신의 영혼에게 주는 조건 없는 선물이었습니다. 왕자는 가끔씩 다락방으로 사라지는 아가씨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가씨가 슬프거나 지쳐 보이면 곧바로 다가가서 위로해 주었습니다. 따뜻한 차를 가져오게 해 아가씨를 푹 쉬게 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우며 아가씨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가 혼자 다락방에 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를 다락방에 혼자 있게 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아가씨가 다락방에 있는 동안 왕자는 허전하고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다락방의 아가씨는 너무나 초라하고 낯설어서 싫었습니다. 왕자비가 아닌 것만 같았습니다. 아가씨는 다락방에 있고 싶을 때마다 눈물을 훌쩍거렸습니다. 아가씨를 사랑하는 왕자는 궁리 끝에 아가씨를 위해 다락방을 수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일꾼들을 시켜서 다락방을 넓히고 최고급 카펫도 깔고 화려한 조명을 달았습니다. 왕자와 함께 앉을 커다란 가죽 소파와 각종 장식품들도 들여놓았습니다. 아가씨가 다락방에 오면 언제라도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하녀들도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그러고는 아가씨에게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락방에 있고 싶으면 얼마든지 말해요. 내가 늘 함께 있어 줄게요.” 그러나 다락방이 공사를 다 끝내고 화려한 모습으로 문을 열던 날, 아가씨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다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궁궐에서
멋진 왕자와 결혼하여 살고 있으니,
행복한 게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끔씩 어떤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움이 생겨나는 것이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행복을 수상쩍게 여기도록
만들기는 했습니다.
이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아이가 각자 자취와 유학으로 집을 떠나고 나니 덩치 큰 집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포장이사를 예약해 두었지만 미리 짐 정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말숙씨입니다. 우선 옷장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원피스, 바지, 블라우스, 재킷 등은 물론 모자, 스카프, 가방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옷가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손질해서 입을 옷, 버릴 것, 누군가에게 주면 좋을 것 등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 입지 않아 새것과 다름없지만, 오십이 넘은 말숙씨의 몸에는 이제 맞지 않는 옷들도 여러 벌 있습니다. 옷 정리를 하는 도중 말숙씨는 자주 난감해집니다. 다시 입을 수도, 버릴 수도, 남에게 줄 수도 없는 옷들 때문입니다. 처치곤란. 그것은 바로 여행의 추억이 담긴 옷들입니다.
신혼여행지에서 남편과 똑같이 입고 다녔던 줄무늬 커플 티에는 아직도 오색약수 물비린내가 나는 듯합니다. 동료 교사들과 함께 떠난 유럽에서 입고 다녔던 분홍 원피스에는 파리의 낭만적인 거리가 골목골목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고 동창들과 놀러 간 상하이에서 사 입은 푸른 꽃무늬 블라우스는 와이탄의 야경으로 눈이 부십니다. 이제 너무 낡거나 작아져서 입을 수도 없는데,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몸에 맞는 누군가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추억이란 이렇게도 질긴 인연을 맺고야 마는구나.’
말숙씨의 난감한 짐 정리는 옷가지들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좀처럼 들춰보지 않는 사진첩도 너무 많았고, 1년 내내 바깥 구경 한번 못하고 차곡차곡 쌓인 그릇들, 먼지 앉은 책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사용했던 물건들, 여행지에 다닐 때마다 사 모은 각종 기념품과 장식품들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집을 좁혀 가는 것이니 짐도 줄여야 합니다. 정리를 한다는 것은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말숙씨에게 여행의 추억은 정리되지 않는 견고함으로 꿋꿋이 남아 있습니다. 옷이며 가방이며 기념품마다 함께한 사람들이 있고, 놀라며 감탄하던 아름다운 장소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하나 추억을 사 모은 것이었습니다. 말숙씨는 문득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여행의 추억들이 하나같이 물건에 담겨 있다는 게 쓸쓸하게 여겨졌습니다.
‘나에게 여행은 사람들과 우르르 놀러 가서 구경하고 기념품을 사는 게 고작이었나.’
짐 정리를 대강 마무리하던 날, 말숙씨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제주도 여행을 결심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말숙씨에게 이번 여행만큼은 완전히 새롭고 낯선 경험입니다. 며칠 동안 짐 정리를 하며 들었던 생각을 감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번 여행을 위해 말숙씨는 자신과 몇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첫째,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 둘째, 완벽한 계획을 갖지 않을 것. 셋째, 기념품을 사지 않을 것.
마치 20대 젊은이들이 배낭여행을 떠나듯이 그렇게 여행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남편은 가는 날 아침까지 극구 반대를 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이사도 며칠 안 남았는데, 주말에 나랑 같이 가자”, “진짜 이유가 뭔지 솔직히 말해봐라”, “아줌마라도 여자 혼자는 위험하다”고 하다가 결국은 매일 수시로 안부 전화를 하는 조건으로 내키지 않는 허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주 공항에 내리는 순간, 들떴던 마음은 이내 가라앉고 말숙씨는 막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버스는 어떻게 타야 하나’, ‘호텔을 미리 정해둘 걸 그랬나’ 등 이미 여러 번 왔던 제주도인데도 불구하고 낯설고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의 여행에서는 늘 누군가 리더가 있었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가이드든 누군가가 좋다는 곳, 유명하다는 곳을 추천하고 데려가 주었습니다. 막막한 적도, 불안한 적도 없이 마음 편히 따라다녔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여태껏 일행을 따라다녀놓고 말숙씨는 함께 여행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관광을 다녀놓고 여행을 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올레로 하자! 혼자 하는 여행은 올레길 걷기가 제격일 거야.’
말숙씨는 공항에서 올레길로 가는 버스 가운데 하나를 찾아 타고 창가에 앉았습니다. 습기 가득한 제주의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훅훅 들어왔습니다.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십니다. 혼자 온전히 만끽하는 바람의 냄새도, 소리도 처음입니다. 바람이 이렇게 생생히 살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 바람이 데려다 주겠지.’ 어디서 내리든 길이 시작될 거라는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말숙씨는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