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을 위한 동화] 김영희에게 전하고 싶은 두 마디

기사입력 2015-10-19 15:02 기사수정 2021-08-13 14:53

작년이었다.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될 무렵 나는 오랜만에 이탈리아 여행에 나섰다.

볼로냐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이탈리아 중부 지방의 소도시들을 기웃거렸다.

정년퇴직을 하고 연금으로 이냥저냥 살아가는 칠십 노인에게 여행은 더 이상 관광이 되지 않는다. 언젠가 피렌체에서 샀던 낡은 가죽으로 된 보스턴백 하나를 어깨에 걸치면 그것으로 여행 준비는 끝이 난다.

추억.

이제 나의 여행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이다. 미지의 세계를 만나는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스쳐간 세계를 복기하는 애달픈 확인이다. 사람들은 이런 걸 흔히 추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내가 이 나이에 궁상맞게 혼자서 추억 여행이나 하는 따분함을 즐기는 건 아니다. 과거는 언제나 현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여행은 내게 가장 창조적인 순간들을 제공한다.

피렌체 아르노 강가를 어슬렁거리는데 여행 중 가방 끈이 낡아서 자꾸만 벨트가 늘어나곤 했다. 가죽 공방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두오모를 지나치는 순간, 누군가 내게 말했다.

“너무나 멋져요, 슈테판!”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도 독일어도 능숙하지 못한 그녀가 목을 있는 대로 뒤로 젖히고 두오모를 바라보며 내뱉은 감탄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녀도 다시 이곳에 온 것일까. 나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내가 그렇게 멋져요?”

주어를 생략한 그녀의 감탄에 나는 짓궂게 농담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여전히 관광객들로 붐비는 그곳에서 나는 한국에서 온 간호사였던 그녀, 김영희를 찾아 미친 듯이 헤맸다. 늘어진 가방끈을 손으로 움켜쥔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두오모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김영희는 보이지 않았다. 환청이었을까. 그럴 리가.

그날부터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나는 김영희를 떠올렸다.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걸까. 우연히도 열차 안에서 나는 김영희를 만나고야 말았다.

3주 동안의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볼로냐에서 뮌헨으로 가는 열차를 탔을 때였다.

에세이집을 읽던 나는 살짝 잠이 들었다가, 열차가 멈추는 느낌에 눈을 떴다. 어느새 베로나 역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열차에서 내리고 또 몇몇 사람들이 열차에 올랐다. 내가 앉아 있던 열차 칸의 문이 열리더니 단발머리를 한 젊은 여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물론 그녀는 김영희가 아니었다.

그녀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마침 인스브루크에 친구가 있어서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중 나는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김영희. 놀랍게도 그녀의 이름이 김영희였다. 한국에서는 흔한 이름이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고 정중하게 한국어로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녀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녀가 놀라거나 말거나 연거푸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는 신사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어였다.

그녀는 내가 아는 한국어로 농담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커다란 소리로 유쾌하게 웃었다. 한국어를 잘한다고 칭찬했다. 나는 그녀에게 설명했다. 이번에는 영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한국어는 이 두 마디가 전부였으니까.

“40년 전이었어요. 한국에서 독일로 온 간호사가 있었어요. 나는 그녀를 무척 좋아했어요.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았을 때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녀는 노터치, 노터치를 외치며 완강하게 나를 거부했어요. 나는 바로 포기했지요. 나는 신사였으니까요. 그런데 10분쯤 지났을 때 그녀는 내 어깨며 팔을 톡톡 건드리며, 때로는 내 허벅지를 좀 더 세게 두드리며 웃기도 하고 말하기도 했어요. 노터치를 외치던 그녀가 말이죠. 나는 그녀의 터치가 싫지 않았지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어요. 그러나 얼마 후 그녀는 더 이상 나를 만나주지 않았고, 그녀는 나를 음흉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녀의 이름이 김영희입니다. 40년이 지났지만 그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단 두 문장이에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신사입니다.”

인스브루크 역에서 내리기 전 김영희는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 터치와 그 터치는 전혀 다른 거예요. 40년 전 독일에 갔던 김영희씨를 만난다면 당신의 한국어 두 문장을 꼭 전해줄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뮌헨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늘어진 가방끈을 땀이 흥건하도록 꼭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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