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한 달 살기나 일 년 살기가 유행처럼 퍼졌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주를 여행해도 일주일 살기라 하듯 하루이틀을 지내도 그 지역에 스며든 여행을 선호한다. 목포에 머물면서 요즘 새로운 여행 패턴인 짧게 살아보기를 경험했다.
목포의 골목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쪽문 옆을 지나고 작은 텃밭을 지나 그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2박 3일을 살았다.
1897년 목포항 개항 이후 ‘목포는 항구다’라는 말은 지금껏 불변이다. 목포 유달산 중턱엔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그 거리를 걷다 보면 지금도 구슬픈 가락이 어디선가 들려오기도 한다. 잔잔한 바다 옆으로 갓바위가 전설을 품었고, 바닷가 마을의 저녁노을에 전율했다.
목포해상케이블카는 고하도 전망대를 거쳐 발밑으로 목포 원도심과 다도해를 짜릿하게 선사했고, 평화의 광장으로 몰려든 커플들은 밤바다에 넋을 잃는다. 목포 주변 섬 여행도 손쉽고, 해산물 노포 맛집도 지천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목포의 변화 역시 만만찮지만 빛바랜 듯 옛 발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는 목포다.
북교동 예술인 골목과 옥단이길의 레트로 정서
도시의 매력은 그곳을 지키고 있는 유형무형의 것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목포는 예부터 예향이었다. 유달산을 중심으로 몇 갈래로 뻗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우리 근현대사를 이어나갔던 예인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문학의 향기가 좁은 길마다 연결되어 있고, 화가의 집도 가수 이난영 일가의 전시관도 함께한다.
목포를 대표할 만한 인물로는 대통령도 있고 유명 연예인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초반부터 해방 무렵까지 목포에 살았던 옥단이를 빠뜨릴 수 없다. 옥단이는 이 지역 출신 차범석 작가의 작품 속 실존 인물이다. 옥단이길에 들어서면 물지게를 진 여성 캐릭터 안내판이 맞이한다. 척박했던 시절의 순박한 물지게꾼 옥단이. 목포 사람들의 허드레 물장수를 하며 좁다란 골목길 일대를 누볐던 밝고 당찬 여성이었다. 목포역에서부터 유달산 부근까지 오래된 옛집들 사이로 4.6km에 걸쳐 11개 골목의 옥단이길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처음엔 탐험하듯 걷던 길이 옥단이라는 이름의 정겨움으로 그저 푸근하다.
옥단이라는 인물을 문학 캐릭터로 세상에 내놓은 차범석 작가의 ‘작은 도서관’은 말 그대로 자그마하다. 작가의 오래된 잡지와 대본집, 희곡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도슨트가 없어도 누구나 들러서 조용히 책을 보고, QR 코드로 관광 해설과 목포 시민들의 목소리로 낭독한 오디오북을 들어볼 수 있다. 차범석 작은 도서관이 자리한 골목은 차범석길 27이다. 이 길 곳곳에서 수필가 김진섭, 문학평론가 김현, 극작가 김우진, 여성 문학을 대표하던 작가 박화성 등 문인들의 자취를 보여준다. 현재 예술인 골목이 있는 북교동은 지금의 목원동 일대지만 목포 사람들은 여전히 북교동이라 부른다.
골목 안에는 1970년대 감성을 소환하는 흑백사진 속의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도 여전히 건재하다. 개항과 함께 하루 품팔이를 하던 사람들의 계 모임으로 한때 성황을 이루었던 마인계터 골목, 그 옛날 노라노 패션학원으로 유명했던 건물이 미술관으로 재생된 모습도 보인다.
유달산 자락의 노적봉과 근대역사문화공간
북교동 예술인 골목 옆으로 조금 넓게 트인 길을 따라가 보자. 법정 스님과 고은 시인이 만났던 ‘목포 정광정혜원’을 지나게 된다. 김환기, 남농 허건, 박수근, 천경자 등 남도 출신 예술인들이 그려진 벽화가 쭉 이어지는 오르막을 오르면 곧바로 우뚝 솟은 유달산이다. 유달산을 빼고 목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지략이 떠오르는 노적봉이 언덕 위에서 맞아준다. 저편으로 목포 앞바다가 시원하다.
유달산을 내려가기 전에 들러볼 곳이 있다. 바로 옆 숲을 이룬 산 아래 1982년에 조성된 국내 최초의 야외 조각공원이다. 자연, 문화, 조각이라는 주제로 설치된 조각 작품들로, 국내 작가는 물론이고 예술성 높은 외국 조각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의외로 찾는 사람이 적어 호젓하다.
노적봉과 조각공원을 뒤로하고 유달산 저쪽 아래로는 근대역사문화공간을 비롯한 옛이야기들이 기다린다. 근대역사관 1, 2관과 일본영사관,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은옛 모습 그대로다. 또한 전시관마다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비인간적 야욕 및 잔인함을 증언하고 있다.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남긴 적산가옥과 일제 잔재들이 있고, 골목마다 아픈 역사의 상흔을 만나게 된다. 목포는 호남 곡창으로 일본인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발걸음하는 골목마다 일본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묻어 있다. 지금은 타임머신을 탄 듯 옛날이야기를 돌아보며 거니는 역사의 거리가 되었다. 알고 걸으면 더 재미있는 목포의 골목길은 역사와 함께하기에 더 의미 있다.
하늘이 가까운 보리마당로의 골목 이야기
유난히 낡은 풍경의 골목이 많은 목포다. 유달산에 기대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마을 골목길이 감성을 품었다. 한때 넓은 보리밭이었고 보리타작을 주로 했다던 보리마당로는 현재의 서산동으로 지대가 높은 윗자락이다. 영화 ‘1987’에서 연희네 슈퍼로 알려진 서산동 골목은 좁기도 하지만 가파른 오르막이다. 영화 속에서는 연희(김태리)와 이한열(강동원)이 무심한 척 속 깊은 시국을 주고받고, 삼촌(유해진)은 조카에게 보안상 위험한 부탁을 하던 곳이다. 우리 모두에게 뜨거웠던 1987년의 이야기가 촬영된 골목이다.
이제는 인문도시 서산동 시화골목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스러운 사진관이나 작은 미술관, 벽화가 그려진 오밀조밀한 골목 안의 자잘한 정서가 그곳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 다닥다닥 붙은 골목 양옆의 담벼락 사이로 주민들이 지나가며 살짝 옆으로 비켜주기도 하는 게 자연스럽다. 좁은 골목을 오르내리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 인사하며 안부를 주고받으니 정겹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골목은 좁은 계단이었다가 누군가의 대문 앞이기도 하다. 가끔 고양이가 까무룩 졸다가 인기척에 놀라 도망간다. 비탈진 마을을 오르다 보면 시선 끝엔 늘 하늘이다. 하늘이 가까운 동네다.
공간의 전환, 누스테이에서 살아본 2박 3일
유달산 자락에 앉힌 보리마당로의 너른 공터에서 골목에 이르니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구던 마을 사람이 반겨준다. “여기는 내비게이션에 번지수보다는 한빛교회로 치는 게 가차워요. 거기가 주차하기도 좋으니께 글루 오믄 더 편치.” 뭐라도 도움이 되려는 마음이 진심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트렌드로 떠오른 말 중 하나가 ‘워케이션’이다. 워크(Work)와 휴가(Vacation)의 합성어로, 원하는 곳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근무하는 것을 말한다. 머무름으로 업무와 그 지역을 충분히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의 라이프스타일이다. 목포 ‘누스테이’는 인구 소멸이 심화되는 지역에서 재생 건축을 통해 거주와 일이 가능토록 했다.
새벽 잠결에 나지막한 뱃고동 소리에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도심 재생 건축으로 생겨난 목포의 숙소 ‘누스테이’는 자신만의 시간을 담은 여유로운 워케이션이 가능하다. 골목 안 서늘하도록 정갈한 2층집에 모든 게 갖추어졌다. 쉼과 일이 진행되는 공간 1층, 계단참을 밟으며 올라간 2층에선 테라스의 푸른 식물들과 함께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바다가 보이는 발코니에선 차를 마셔도 좋고, 캠프파이어가 가능한 루프톱에선 불멍의 시간이다. 동네의 따스함이 남아 있는 공간에서 나만의 속도대로 살며 크리에이티브한 효과를 기대해볼 만하다.
2022년 11월 공개된 ‘ChatGPT’(챗GPT)는 출시 일주일 만에 사용자 100만 명을 넘으며 광풍을 일으켰다. 현재 글로벌 검색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구글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영국 언론 인디펜던트는 ‘Google is done’(구글은 끝났다)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챗GPT로 대표되는 대화형 인공지능이 구글을 대체할 수 있다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다. 스마트폰의 등장처럼 챗GPT도 우리 일상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오픈 에이아이(OpenAI)가 개발한 GPT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고, 문장과 글을 생성할 수 있게 만들어진 인공지능(AI)이다. 2018년 GPT-1 출시 이후 GPT-2, GPT-3로 꾸준히 버전을 높여왔다. 지난해 11월 GPT-3.5에 해당하는 챗GPT를 공개했으며, 이후 4개월 만에 성능을 개선한 GPT-4 버전의 차세대 모델까지 선보였다.
챗GPT는 로봇과 대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서비스다. 언어 능력에 특화돼 있어 사용자가 대화창에 질문을 입력하면 그에 맞춰 로봇이 다양한 답변을 내놓는다. 기존 대화형 AI는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문법과 맞춤법을 완벽하게 구사하거나 언어의 특성과 해석의 차이를 구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동문서답을 하거나 아예 답변을 도출하지 못해 활용 범위가 제한적이었던 반면, 챗GPT는 대화의 숨은 맥락을 이해하고 이전 대화를 기억하며 답변해 마치 사람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졸업 논문, 회사 시말서, 제안서도 OK
챗GPT는 미국 대학 입학 자격시험인 SAT 읽기 및 쓰기와 수학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의사·변호사 시험을 가뿐히 통과했다. 뛰어난 지능 덕인지 수행할 수 있는 업무도 다양하다. 기사, 논문, 법원의 판결문뿐 아니라 의회에 제출할 법안 초안도 작성한다. 국내에서는 챗GPT가 쓴 책들이 잇달아 출간됐다. 책 ‘삶의 목적을 찾는 45가지 방법’은 기획안과 목차를 제외한 모든 내용을 챗GPT가 직접 쓰고, 편집과 교열 작업까지 완료하는 데 단 30시간이 걸렸다.
챗GPT의 출시 이후 실생활에 활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최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챗GPT로 시말서를 작성했다는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됐다. 자세한 내용을 보면 챗GPT는 “저는 이번 일로 인해 회사의 정책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라며 “무심코 생각 없이 행동을 하게 된 것이지만,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고 서술했다. 또 “이번 일을 계기로 회사 내부의 정책과 규정을 충분히 숙지하고 그에 맞게 행동할 것을 다짐한다”며 “앞으로 회사의 이익과 안전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경각심을 갖고 업무를 수행하겠다. 회사와 동료들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라고 마무리했다. 누리꾼들은 사람이 작성한 결과물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챗GPT 똑똑하게 활용하자
챗GPT의 문장은 깔끔하고 정갈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존재한다. 이용자가 입력한 질문에 대해 학습된 데이터가 없을 경우, 그 내용 자체가 틀렸을지라도 해당 정보를 기반으로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기 때문이다. GPT-3.5 버전에서는 ‘신사임당이 이순신의 아내’라든가, ‘티타늄 전차가 조선 중기에 사용됐다’는 등의 황당한 이야기를 성의 있게 답변한다. “이순신 장군이 고종의 옷에 커피를 쏟은 사건에 대해 알려줘”라는 질문을 하면 “이순신 장군이 고종의 옷에 커피를 쏟은 사건은 유명한 역사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대한제국 말기인 1896년에 일어난 일로, 당시 고종은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국사조사를 하던 중 이순신 장군이 실수로 고종의 옷에 커피를 쏟았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했으며, 이후 둘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습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결국 AI 답변의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건 사용자의 몫이다.
즉 챗GPT는 잘 아는 정보를 요약하거나 정리하는 용도에는 적합할 수 있지만, 잘 모르는 주제에 대한 사실을 묻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사용자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에 따라 답변의 수준도 현저히 달라진다. 얻고자 하는 부분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요구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50대 배우자와 갈 만한, 물가가 비싸지 않고 골프장이 많은 여행지는 어디야?”와 같이 명확한 지시와 완결된 문장으로 정확히 설명해야 한다. 질문을 거듭해도 뾰족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때는 한글보다 영어로 지시하면 더 깔끔한 답변을 얻을 수 있다. 챗GPT는 영어에 조금 더 최적화돼 있다.
유명세에 따른 사칭 사이트 증가
챗GPT에 관심이 생긴다면 한 번쯤 사용해보는 것도 좋지만, 사칭하는 사이트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스마트폰으로 앱을 다운받기 위해 플레이 스토어에 들어가 ‘챗GPT’를 검색하면 유사한 명칭의 앱이 존재한다. 하지만 오픈 에이아이가 개발한 공식 앱은 아직 출시되지 않은 상태다.
실제로 챗GPT와 같은 해외 유명 사이트와 비슷한 이름의 사이트 혹은 앱으로 유도해 카드 정보를 요구하는 사례가 늘었다. 금융감독원은 카드 정보 유출 피해를 막기 위해 주민등록번호 전체 숫자, 카드 비밀번호 네 자리 등의 개인정보 입력을 요구하면 무조건 의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카드 정보 유출이 의심되면 불편하더라도 카드 사용을 정지하고, 재발급받아 부정 사용을 차단하는 것이 안전하다.
오픈 에이아이에서 개발한 챗GPT를 체험해보고 싶다면 ‘openai.com/blog/chatgpt’로 이동해야 한다. 우선 회원가입을 통해 계정을 등록하고, 화면 하단에 있는 입력 칸에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입력하면 된다. 또는 ‘에지 브라우저’를 통해 검색 엔진 ‘www.bing.com’에 접속한 뒤 왼쪽 상단의 ‘채팅’ 버튼을 누른다. 계정을 생성하고 로그인하면 채팅을 시작할 수 있다. 검색창에 궁금한 점을 입력하면 해당 내용과 관련한 AI의 답변이 검색 페이지 오른쪽에 나타난다. 답변을 보고 온라인 출처를 자세히 검증하거나, 더 구체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다.
“저를 믿으세요.” 배우 이한위(61)가 인터뷰 도중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다. 그는 답이 정해져 있거나 유도하는 질문을 날카롭게 알아봤다. 특히 이한위가 지양한 것은 어떠한 단어 혹은 수식어에 갇히고 규정되는 것이었다. 가령 예를 들면 ‘명품 조연’, ‘잉꼬 부부’ 같은. 그는 꾸며지고 포장되는 것을 싫어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한위의 인생 자체가 그랬다. 1983년 KBS 공채 탤런트 10기로 데뷔, 연기자로 산 지 약 40년. 그의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이한위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했고, 사람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서 배우의 길이 계속 이어졌고,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그는 중후하고 단단한 사람이 됐다.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은 삶을 살아온 이한위. 그가 털어놓은 인생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쓰려고 노력했다. 그게 배우 이한위가 원하는 모습이고,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삶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성격 개조하다, 어느새 배우
학창 시절 이한위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떤가? 조잘조잘 떠들면서 반 친구들을 이끄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의 과거는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이한위는 중학생 때까지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4남 4녀 중 일곱째인 이한위. 그의 어머니조차 “가장 통제가 쉬웠던 자식”이라고 표현했다. 하라는 대로만 하는, 속 썩이지 않는 아들이었던 것.
“별거 아닌 일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두근두근거렸죠. 크면서 이런 내성적인 성격을 갖고 살아가기 어렵겠다고 스스로 인식했어요. 그래서 점점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용기 내는 일을 많이 했고, 고등학생 때는 전혀 성격에 맞지 않는 반장까지 해봤어요. 응원 같은 것도 하고, 노래도 부를 기회가 있으면 하고요.”
그렇게 성격을 개조해나간 이한위는 조선대학교 정밀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당시 인기였던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었으나 쉽지 않은 현실을 깨달았고, 때마침 기적적으로 연극반 공고를 보게 됐다. 성격 개조의 방점을 찍고 싶어 동아리에 들어간 이한위. 그와 함께 ‘성실 한위’의 서막이 올랐다.
“연극을 하면 성격이 많이 고쳐지겠구나 싶어서 연극반에 들어가서 매달리다시피 한 거죠. 절대 잘할 수 없었고 잘하지 못했지만 진짜 열심히 했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한테 기회가 많이 주어지더라고요. 주연의 기회도 찾아오고, 연출도 하고, 선배들이 만장일치로 회장도 시켜주셨죠.”
그러느라 공부는 등한시했다는 이한위.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할 때가 되어서는 때마침 KBS 공채 탤런트 공고를 보게 됐다. ‘저게 나한테 취업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한위는 시험에 응시했고, 단번에 1983년 KBS 10기 공채 탤런트에 합격했다. 그렇게 연기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 우연이 이어지면서 필연이 됐다.
“처음부터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에 이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때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이제 평생 배우로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나는 KBS가 공인한, KBS에 의해 발탁된, 직업이 배우구나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철부지 생각이죠. 배우는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으로는 배우를 지속할 수 없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부족한 게 많았던 때죠.”
39년 차 배우로 사는 법
이한위는 1985년 방영된 KBS 드라마 ‘별을 쫓는 야생마’를 통해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첫 영화는 1998년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다. 이후 그는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학교’ 시리즈, ‘태조 왕건’, ‘가을동화’, ‘왕꽃선녀님’, ‘불멸의 이순신’, ‘쾌걸춘향’, ‘베토벤 바이러스’, ‘추노’, ‘제빵왕 김탁구’ 등과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 ‘미녀는 괴로워’, ‘울학교 이티’, ‘국가대표’ 등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캐릭터도 다양했다. 이한위는 맡는 역할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됐다. 깡패, 사채업자 같은 특색 있는 캐릭터를 맡을 때도 있고, 직업이 의사, 교사, 시장이어도 어딘가 허술한 경우가 많았다. 나이 들면서는 점점 누군가의 아빠가 됐고, 서민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악역을 해도 사람들이 웃는다. 장점이자 단점이다”라고 스스로 진단했다.
이한위는 오랜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로 ‘성실함’을 꼽는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갖고 “잘하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했다”고 자평했다. KBS 공채 탤런트가 된 후 매일 KBS로 출근하면서 감독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열심히 하고 한결같고 건강하게 하니까 감독들이 저를 많이 써줬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우리 때는 오디션을 본 것이 아니라 공채 탤런트가 되면 기용해주려는 마음이 있었어요. 트레이닝해주려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요즘 시대에 배우가 됐다면, 40년 가까이 배우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의구심이 들어요. 오디션 제도가 있었다면 배우 생활이 녹록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도 적응이 된 거지, 내성적이에요. 근본적인 성격은 바뀌지 않았죠.”
이한위의 말대로 그와 작업해본 감독들은 계속해서 그를 찾았다. 이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한위는 계절드라마 시리즈 ‘윤석호 감독의 페르소나’로 통하고 있고, ‘또 오해영’의 송현욱 감독하고도 각별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한위는 이를 두고 자신은 ‘운이 좋은 배우’라고 표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요. 배우는 운이 좋아야 해요. 감독이 봤을 때 이 배우가 살아남을지 어떨지 모르듯이, 배우가 봤을 때도 이 감독이 어떤 감독이 될지 모르잖아요. 저도 열심히 했지만, 저를 써주신 분들도 꾸준하게 감독일 하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 감독들이 저를 꾸준히 기용해주고, 낯선 감독들이 저를 또 캐스팅해줘서 계속 일하고…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거죠.”
이한위는 사실 무명 시절이 길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해진 작품은 2006년 개봉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다. 엽기 성형외과 의사 역을 맛깔나게 소화해내며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그는 “무명 시절은 누구나 다 힘들다”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저는 무명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배우로 생존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세계에 적응하는 맷집이 길러졌다고 생각해요. 맷집과 실력이 없으면 스스로 안심이 안 되고, 시켜주는 사람도 불안하죠. 저는 인생의 여러 가지 비극 중에 소년출세도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대동소이하게 유약하기 때문에 어려서 출세하면 그만큼 위험한 거예요. 제가 무명 기간이 길어서 합리화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단계를 잘 밟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런가 하면 이한위는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 인생작을 뽑지 못한다고 했다. 그저 열심히 연기를 해왔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답. 그는 지난해 KBS 2TV 드라마스페셜 ‘그곳에 두고 온 라일락’을 통해 첫 드라마 주연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그 작품이 그의 인생작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주인공을 해야 인생작인가? 스코어가 좋다고 인생작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 드라마가 트로트 모창 가수 이야기예요. 작년에 ‘보이스트롯’에 출연했는데, 그 방송을 할 즈음 감독님이 단막극 주인공을 누구로 할까 고민하다 불현듯 저를 방송에서 보고 ‘저분이다’ 생각해서 캐스팅한 거죠. 그동안 했던 서민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인데 그것이 길게 나온 단막극이었을 뿐이에요. 어쨌든 주어진 대로 열심히 하고, 1인 2역 연기도 하고, 단막극상 수상도 하고. 좋은 경험이었고 고마운 기억인 거죠.”
기세를 몰아 가수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묻자 “어휴~ 없어요”라면서 손사래를 친다. 다만, 광주 출신으로 기아 타이거즈의 응원곡을 부를 기회가 오면 부르고 싶단다. 즉 좋은 기회라면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가수가 될 생각은 없는 것.
예능감이 뛰어난 그는 예능 출연에 대한 생각도 이와 비슷했다. 예능도 전략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기회가 생겨 나가면 열심히 할 뿐이라고. “저는 연극, 영화, TV 다 해요.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데, 넘나드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예능 출연이 곤욕스러운데 나갈 필요는 없죠. 할 수 있으면 나가고, 나갔으면 뭔가 하고. 나가기만 할 거면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결혼, 그리고 끝까지 배우
이한위는 배우로서 연기 말고도 화제가 된 부분이 있다. 바로 인생의 중대사인 ‘결혼’이다. 그는 2008년 49세의 나이에 19세 연하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불멸의 이순신’에서 배우와 스타일리스트로 만났다. 당시에는 우려의 반응도 많았지만, 현재 부부는 누구보다 알콩달콩 잘 살고 있다. 이한위는 모두 아내 덕분이라고 고마움을 표했다.
“몇 번 얘기했지만, 아내는 저를 따진다든지, 뒤진다든지, 캐묻는다든지 그런 것 없이 순종적이에요. 제가 뭔가를 번복하더라도 아내는 이해하는 편이 아니고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면 참 좋지만 이해가 안 될 때는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그러면 오해가 없고 갈등도 없다고 생각해요. 저희 일이라는 게 정해진 루틴이 없잖아요. 기본적으로 불규칙한 것이 루틴이잖아요. 제 연기 생활 근 40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규칙적으로 불규칙했다.’ 그런데 아내는 이런 생활을 이해할 필요 없이 잘 받아준다는 거죠. 제 아내는 방송인의 아내로 베스트예요. 항상 고맙죠.”
올해는 배우 생활을 한 이후 가장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는 이한위. 대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다둥이 아빠이기도 하다. 슬하에 열네 살 딸, 열두 살 딸, 열 살 아들이 있다. 한 방송에서 이한위는 2년마다 애를 낳았다면서 ‘비엔날레 스타일’이라고 농을 쳤다.
“제게 두 살 어린 남동생이 있는데, 남동생 애가 서른 살이 넘었어요. 그런 것에 비하면 저는 늙은 아버지에 속하죠. 아이들하고 잘 살려면 일도 하고, 운동도 하고, 건강하게 살아야죠. 가족과 시간을 잘 보내는 것도 중요한데, 그런대로 재밌더라고요. 올해는 식구들하고 여행도 몇 번 했는데 의미 있고 재밌었어요. 우리 애들은, 특히 열 살짜리 막내는 지나치게 건강해서 가끔 등산을 같이 가죠. 제가 부암동 쪽에 사니까 가까이 북한산도 있고, 인왕산도 있으니까 능력껏, 형편껏 가죠. ‘무조건 정상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데까지 가고 맛있는 거 먹고 그러면 아주 좋아해요. 늙은 아버지로서 노력하는 거죠. 고맙게도 애들은 아빠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배우는 루틴이 없다’는 어록을 남긴 이한위. 그래서 그는 당장 2022년 자신의 모습을 예측할 수 없다. 현재 정해져 있는 스케줄은 이달부터 광주방송 라디오 ‘이한위의 그리운가요’의 DJ를 맡게 됐다는 점이다. 이한위는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 외에는 정해진 것이 없다며,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해온 것처럼 뭔가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한위는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날 길어지는 촬영에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사소한 부분도 디테일을 놓치지 않았다.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약속을 잘 지키려고 한다. 배우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가 지난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였다.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하지만, 이한위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새삼 4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저는 그냥 수식어가 없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수식어를 굳이 단다고 하면, ‘재밌는 배우’, ‘신뢰받는 배우’ 정도가 좋지 않을까 싶어요. 명품 조연 배우,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명품한테 실례되는 말이에요. 명품인지 아닌지는 보는 사람이 정하는 거예요. 만약 저를 그렇게 봐주신다면 감사하죠. 저는 단지 배우로서 끝까지 소용되는 것, 그것이 제 바람이죠.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제가 정할 수 없지만, 배우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제 꿈이에요. 이순재 선생님이 ‘무대 위에서 쓰러져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 같다’고 하신 것처럼요.”
“요트는 살 때 한 번, 팔 때 한 번, 총 두 번의 즐거움을 준다”라는 말이 있다. 무턱대고 매물을 사는 것보다 체험을 통해 요트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국내에서 저가로 요트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를 꼽아봤다. 한강, 김포를 제외하고는 카타마란 요트 체험 프로그램 위주다. 운항 시간과 코스에 따라 가격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서울 현대요트 더리버마리나
위치 - 한강 반포지구
특징 - 한강대교, 세빛섬, 노들섬 등 도심 속에서 느끼는 휴양지 기분
가격 - 2만 원
김포 아라마리나 해양아카데미
위치 - 경기 김포 현대아울렛
특징 - 해양 레저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교육·체험 프로그램
가격 - 3만 원
부산 요트홀릭
위치 - 부산 해운대구 수영만 마리나
특징 - 해운대와 광안리 랜드마크를 둘러보는 코스. 맥주와 주스 무료 제공
가격 - 3만 원
여수 푸른마리나 요트투어
위치 - 전남 여수 이순신마리나
특징 - 드라마 ‘사랑의 온도’ 촬영장. 다과와 선상 낚시를 체험할 수 있는 여수 투어
가격 - 4만 원
제주 그랑블루요트
위치 - 제주 서귀포시 JM 그랑블루요트
특징 - 낚시 체험을 포함한 대포항 관람 코스. 돌고래를 만날 수 있는 기회
가격 - 6만 원
색다른 여가를 즐기고 싶은 시니어에게 요트는 매우 낭만적이다. 하지만 초보자가 바로 입문하기에는 비용을 비롯해 제한점이 많다. 요트를 구입할 경우 각종 세금과 요트 관리비, 계류장 이용료 등 부대비용도 만만치 않다. “요트는 살 때 한 번, 팔 때 한 번, 총 두 번의 즐거움을 준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이런 특성을 고려해 무턱대고 구입을 고려하기보다는 요트 체험하며 요트를 제대로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국내에서 합리적인 비용으로 요트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를 꼽아봤다.
서울 현대요트 더리버
한강에 있는 더리버 마리나에서는 도심 속에서 휴양지에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파티보트,카타마란 요트, 세일요트 등 요트 라인업이 다양하다. 종류가 다양한만큼 디너파티와 기념일 이벤트, 기업행사같이 다양한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특히 가장 저렴한 파티보트는 주간에는 2만 원, 야간에는 3만 원에 즐길 수 있다. 주간 운행은 30분, 야간 운행은 45분이다. 운영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다. 오후 9시에 마지막으로 출항한다.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무일이니 월요일은 피해야 한다.
더리버는 한강반포지구에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동작역 1번 출구로 나와 구름카페 엘리베이터를 타서 한강산책로로 가야 한다. 한강산책로에서 10~15분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다. 구반포역에 내렸다면 2번 출구로 나와 지하도를 이용한다. 차량을 가지고 간다면 한강 유료주차장에 주차한다.
김포 아라마리나 해양아카데미
김포에 위치한 아라마리나는 요트 체험뿐 아니라 이론 교육, 실전 심화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공마리나다. 해양레저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교육기관이자 체험장이다.
체험 프로그램은 매주 수,목,금요일에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운영한다. 수상안전교육, 카약, 수상자전거, 모터보트, 세일요트까지 배울 수 있다. 가격은 1인당 3만 원이다.
김포 아라마리나는 현대프리미엄아울렛과 인접해 있다. 지하철 9호선 개화역 1번 출구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현대프리미엄아울렛에 내리면 된다. 김포골드라인을 이용한다면 고촌역 1번 출구 정류장에서도 버스를 타고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옆에 내린다.
자가용 이용자들은 아라마리나도 주차장에 주차한다. 주차장은 유료지만 요트조종면허면제교육, 수상레저, 요트스쿨 이용객에게는 50% 감면해 준다.
부산 요트홀릭
부산 요트홀릭에서 요트를 체험하면 부산 바다 한가운데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대형 카타마란 요트를 타고 부산 수영만 마리나에서 출발한다. 마린시티 마천루, 동백섬, 해운대와 광안리까지 도는 코스를 체험할 수 있다. 요트 탑승자에게는 맥주와 주스가 무료로 제공된다.
대인 3만 원, 소인 2만 원에 탑승할 수 있고, 영유아는 무료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영하며, 마지막 출항은 오후 9시다. 체험은 1시간 동안 진행된다.
요트홀릭을 체험하고 싶다면 부산 해운대구 수영만 요트경기장을 방문한다. 지하철 이용 시 2호선 동백역에서 하차해 3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정도 이동하면 된다. 버스 이용 시 307, 38, 115-1번 등 버스를 타고 부산문화여고 앞에서 내린 뒤 대우마리나 아파트 사이로 직진한다. 주차장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여수 푸른마리나 요트투어
여수 이순신 마리나에 위치한 푸른마리나 요트투어 프로그램은 드라마 ‘사랑의 온도’ 촬영으로도 유명하다. 1시간 코스 주간 운행, 2시간 30분 야간 운행 프로그램이 있다. 12인승 요트 탑승 시 주간은 4만 원, 야간은 5만 원이다. 45인승 카타마란 요트 주간 운행은 8만 원, 야간 운행은 10만 원이다.
특히 야간 세일링은 이순신 마리나에서 출발해 돌산대교, 종포해양공원, 하멜등대 등을 지나며 여수 밤바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프로그램에 선상 낚시 체험도 포함돼 있다. 럭셔리한 여행을 위해 다과와 와인도 제공한다.
여수 푸른마리나 요트투어는 여수시 웅천동 이순신 마리나에서 즐길 수 있다. 여수종합터미널에서 31,89,21번 등 버스를 이용해 시전삼거리에 하차한 다음 82,83번 버스를 타고 웅천지웰1차 아파트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웅천지웰1차 아파트에서 도보로 10분이면 도착한다. 주차장은 무료다.
제주 그랑블루 요트
제주 그랑블루 요트에서 체험할 수 있는 요트는 국내 최초로 알루미늄으로 만든 요트다. 와인바, 샤워실, 침실이 갖춰진 카타마린 요트를 대인 6만 원, 소인 4만 원에 탈 수 있다.
대포항에서 출발해 주상절리를 관람한 다음 낚시 체험을 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돌고래를 만날 수도 있다. 세일링 체험과 식사까지 한 다음 다시 대포항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낚시 체험, 세일링 체험은 기상 악화 시 생략될 수 있다.
운항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보통 일출 전 30분에서 일몰 전 30분까지 운항한다. 현지 날씨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전화로 문의하고 예약하는 것이 좋다.
그랑블루 요트투어를 하기 위해선 제주 서귀포시 대포동 제이엠그랑블루요트를 방문한다. 제주국제공항에서 600번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정도 이동해 대포항 정류장에 내린 다음 5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수 있다. 주차는 무료다.
허니문 트렌드가 레트로를 맞이했다.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면서 국내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혼주인 시니어들은 젊은 시절 울릉도와 제주도, 지리산 등 내륙과 섬을 가리지 않고 국내로 신혼여행을 많이 떠났다.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국내 허니문의 변천사를 돌아보고, 자녀에게 추천할 수 있는 이색 허니문과 여행지를 소개한다.
20세기 초반까지 혼인은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지 발전을 위한 공동의 행사였다. 당시 신혼부부를 ‘가문’이란 공동체로부터 일시적으로 분리하는 신혼여행은 상당히 낯선 개념이었다. 일부 상류층이나 개화한 지식인들이 하는 낯선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기록에 따르면 1920년에 결혼식을 올린 신여성 화가 나혜석이 신혼여행 도중 자신의 첫사랑 무덤 앞에 가서 비석을 함께 세워주었다고 전해진다.
본격적인 신혼여행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1960~70년대에는 결혼식을 마친 후 승용차를 타고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호텔에서 1박을 하는 신혼여행 형태가 등장했다. 이 무렵부터 서울의 남산은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사진을 찍는 대표적 명소였다. 당시 인기 있던 신혼여행은 아산 온양, 대전 유성 등의 온천에서 휴양을 즐기거나 지리산 같은 산에 머물다 오는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제주도 신혼여행의 항공료와 호텔 숙박비는 일반적인 신혼부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가였다.
1980~90년대는 신혼여행의 르네상스였다. 1983년 제주공항이 지금의 모습을 갖췄고, 당시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제주도 왕복 항공료 및 호텔 가격 인하 등 혜택이 많아서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많이 갔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작되면서 1990년대부터 해외로 신혼여행을 많이 갔다. 초기에는 우리나라와 근접한 대표적 휴양지인 태국, 필리핀, 괌, 사이판 등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이 인기 지역이었다. IMF 이후 환율이 급등하면서 한동안은 국내로 신혼여행을 많이 갔다. 이후 경기가 좋아지면서 다시 해외로 많이 나갔다. 박부진 명지대학교 아동학과 명예교수는 “신혼여행 문화는 각 시대의 결혼관과 남녀에 대한 인식 등 관념적 차원의 조건과 삶의 물리적 환경을 형성하는 사회경제적 조건 등이 반영된다”라고 말했다.
국내 관광지로 회귀…이색 허니문 등장
코로나19 이후 국내 여행지가 허니문 장소로 떠오르고 있다. 울릉도와 제주도 등 전국의 관광 명소가 신혼여행지 후보로 부상했다. 특히 제주도 신혼여행이 많았다. 호텔신라에 따르면 제주신라호텔의 경우 지난해 6월 스위트 허니문 패키지 예약 건은 같은 해 3월 판매량의 5배에 달했다. 이 중 3박 이상의 투숙객이 전체의 45%를 차지했다. 호텔신라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해외여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예비 신혼부부들이 제주도로 본격적인 허니문을 떠나며 3박 이상의 장기 숙박 고객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허니문과 웨딩을 함께 하는 곳도 생겨났다. 올해 3월 파라다이스시티는 ‘트립 투 웨딩’(Trip to Wedding) 프로모션을 선보였다. 파라다이스시티는 웨딩 스냅 장소와 예식 당일 숙박이 가능한 객실을 함께 제공했다. 지난 3월 예약 고객 선착순 일곱 커플을 대상으로 2박 3일간 이용 가능한 130만 원 상당의 ‘마이 스위트 허니문’ 패키지를 선보였다. 결혼식을 마친 커플은 디럭스 스위트 객실에서 최상의 휴식을 누리며 호텔 셰프가 준비한 스페셜 메뉴와 필리조 앤 필스(Philizot&Fils) 샴페인 파라다이스 에디션을 ‘인 룸 다이닝’ 서비스로 즐기는 패키지였다.
이색 허니문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캠핑카 허니문이다. 야놀자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1, 2월 기준 야놀자의 글램핑 및 카라반 거래액은 지난해 동기와 비교해 300% 신장세를 보였다. 캠핑카가 워낙 고가라서 구매보다는 대여가 낫다. 실제로 캠핑카 공유업체 ‘캠핑쉐어’는 허니문 캠핑카를 선보였다. 대여료는 4박 5일간 120만 원이며, 집 앞으로 차를 보내준다. 추가 요금을 내면 웨딩카 장식을 해준다. 다른 도시에서 반납해도 된다.
코로나 시대의 이색 허니문으로 무착륙 관광 비행도 괜찮다. 최근 아시아나항공은 새로운 형태의 ‘A380 무착륙 관광 비행’을 선보였다. 해외로 떠난다는 여행 느낌을 살리기 위해 각국 관광청과 협력해 스페인, 호주 등 국제 여행 콘셉트를 살린 관광 비행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국제선 운항인 만큼 탑승객은 여권을 지참해야 하며, 아시아나항공 기내 면세점을 비롯해 인천공항 면세점과 시내 면세점 이용이 가능하다. 아시나아항공 관계자는 “땅을 밟을 수는 없지만 잠깐의 비행을 통해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기를 바라며 만든 프로젝트다”라고 설명했다.
허니문 추천 국내 여행지
거제도 ▶ 드넓은 남해를 끼고 잘 정비된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그리스 산토리니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학동에서 와현 해안도로까지 이어지는 17.3km 구간은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외도 보타니아는 이국적인 모습을 한 해상식물공원으로 둘만의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 좋다.
삼척 ▶ 바닷가 언덕에 자리한 ‘나릿골’ 마을은 낡고 허름한 옛날 건물에 알록달록한 색을 입히고, 전망대, 미술관 등을 마련해 작은 테마파크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서핑을 좋아하는 신혼부부라면 서프키키해변을 추천한다. 맑은 바닷물은 물론이고 샤워장, 강습 프로그램 등이 잘 갖춰져 있어 서핑족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수 ▶ 가볍게 산책하며 야경을 감상하는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할 경험이다. 이순신광장부터 종포해양공원, 하멜등대까지 이어진 코스는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와 바다가 연출하는 낭만적인 야경을 선사한다. 낮에는 돌산공원과 돌산대교에서 해상 케이블카를 타고 여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통영은 혼자 가면 안 된다. 파도만 넘실대는 곳이 아니라 역사와 장인의 솜씨마저 희망처럼 요동치는 곳이다. 혼자서는 통영의 맛을 제대로 느끼기에 제한이 있고 고독한 나그네의 가슴도 울렁대기 마련이어서 시인처럼 낮술을 마시고 시를 짓거나 우체국 창을 바라보며 연애편지를 하염없이 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혼자 여행을 하게 된다면 통영은 온 발바닥을 땅에 대고 걸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를 지키려는 열망으로 가득했고 사랑의 기억으로 응축된 항구도시의 역사를 제대로 맛볼 수 있다. 시인 백석의 표현대로 “자다가도 일어나 가고 싶은 바다”가 있으며, 유치환처럼 행복론을 시로 쓸 수 있는 곳이요, 윤이상의 창작의 근원이었던 한려수도의 해조음을 들을 수 있는 도시다. 환경이 인간을 만든다지만 축복받은 자연에서 이곳 사람들은 본능적 감각을 쪽빛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에게서 배운 듯하다.
이순신과 통영의 예술
충무공의 통제영이 있었던 도시이며,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한산대첩의 배후 항구였고, 전국적으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모이던 인재와 문화의 집합소였다. 통영이란 도시는 이순신과 불가분의 관계다.
통영의 시작은 조선 수군의 통제영 설치와 연관된다. 3도수군 통제영(統制營)의 설치로 12공방을 비롯한 전국적인 장인집단이 대량 유입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시를 짓고 문장을 쓰던 예술가였다. 초대 수군통제사로 이곳에 와 혼합의 문화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통영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군사도시 통영에서 예술가들이 많이 나온 건 이순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했다.
통영은 그리하여 다양한 예술과 음식문화를 꽃피웠다. 통제영이 있던 세병관 뒤쪽에 가면 통제영의 물적 기반을 제조하던 12공방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통영의 거리를 걷노라면 통영 출신 예술인들의 거리명을 통해 그들이 남긴 흔적을 훑게된다. 보도블록 사이로 유치환의 ‘행복’을 비롯해 통영을 빛낸 시들이 새겨져 있고, 건물의 벽이나 창에는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통영의 처자를 찾아 이 도시를 찾았던 백석 시인의 시도 있다. 시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의 작품도 보인다. 유치환 작사 윤이상 작곡의 각 학교 교가 악보도 눈에 띈다. 물론 이곳 출신의 전혁림 화백의 그림이나 통영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이중섭 화가의 그림이 새겨진 동판도 볼 수 있다.
통영은 홀로 다니는 여행자에게 음식 쪽에서는 불친절하다. 1인분짜리 음식도 있기는 하지만 현지인이 아닌 외부인은 다찌나 정식으로 통영의 다양한 맛을 보고 싶다. 다찌란 일본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통영 지방 특유의 음식 문화다. 부산과 여수 사이의 주요한 항구에는 스쳐지나가는 나그네가 많아서 서서 먹었나보다. 다찌는 항구에서 ‘서서 마시는’(立ち飮み) 항만 노동자들의 음식문화였다. 충무김밥이라 불리던 음식도 항구를 찾아온 손님들에게 상하지 않게 밥과 음식을 따로 제공하던 전통 풍습에서 만들어졌다. 서서 음식을 먹던 다찌 문화는 그 후 다소 변화되어 테이블에 비닐을 깔고 다양한 통영의 음식을 곁들인 정찬 요리, 잔치 음식으로 바뀌었다. 가격은 보통 1인분에 3만 원 정도 하는데 대부분 2인분부터 주문한다.
요즘에는 2인분도 꺼려하는 분위기다. 항만 노동자들의 선술집에서 많은 변화를 거친 것이다. 대신 반다찌가 있는데 온다찌의 화려한 비주얼을 상상하던 사람은 실망하고 만다. 술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비스로 나오며, 음식은 손님이 먹는 속도에 따라 맞춰 나온다. 혼자 하는 여행도 좋지만 밥을 먹을 때는 아쉽다. 특히 통영은 그렇다. 요즘 같은 겨울에 가장 어울리는 음식은 서호시장의 시락국이 최고다. 특히 아침 식사로 일품이다. 중앙시장의 물메기탕은 별미다.
물메기, 꼼치, 잠뱅이
명품은 심플하다. 통영의 음식은 바다의 밭이라는 천혜의 환경 덕분에 재료가 탁월하여 요리법이 심플하다. 기교를 거부한다. 겨울에만 한정 판매되는 물메기는 명품 해장국의 주인공이다. 명품에는 유사품이 존재한다. 그리고 한정판도 나온다. 물메기는 동해에 가면 꼼치, 서해로 가면 잠뱅이라고 불린다. 겨울에만 나오기 때문에 한철 음식에 쓰인다. 식도락가와 주당의 목이 타는 이유다. 그만큼 사랑도 듬뿍 받는다.
음식 기행을 한다면 단연 통영이다. 사시사철 먹거리가 넘친다. 남해의 건강한 바다에서 때맞춰 해산물이 올라오고 남풍을 맞고 자란 싱싱한 채소가 어우러져 통영은 미식가들이 들락거리는 한국 최고의 ‘미항’(味港)이다. 역사적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어서 중인계급이 발달하였고 이들에 의해 문화와 예술이 진작된 도시이며 음식 맛도 여수에서 통제영이 이전하면서 전국의 맛이 집합했다. 또 지리적으로도 음식 맛이 좋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있다. 우스갯소리로 맛의 고장으로 대표적인 전주 사람들이 왔다가 기죽어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새만금 갯벌이 사라져가면서부터는 통영이 맛의 수도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도다리, 갯장어, 물메기, 굴, 미역, 전복, 졸복 등이 차례로 밥상에 오르는 통영은 단 한 번의 여행으로는 그 맛을 다 볼 수 없는 곳이다. 미항에서 미도(味都)로 발돋움하고 있다.
무한하지 않아서 인생이 애틋하듯 단 한철이라 애지중지 각광받는 물메기는 겨울에만 등장하는 미식계의 겨울 진객이다. “인생의 으뜸은 만취”라는 바이런의 시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통영의 제철 안주 상차림 명물 다찌집에서는 취하기 마련이다. 통영에서는 취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른 새벽 서호시장으로 가서 시락국으로 해장을 하거나 강구안 쪽 중앙시장으로 들어가 복국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이라면 더 취해도 좋다. 바로 물메기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겨울 한철 통영은 물메기로 뒤덮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메기가 대형 공장의 빨래처럼 걸리는 섬이다. 조그만 포구마다 이 천하에 못생긴 물고기를 다듬는 데 여념이 없다. 겨울 물메기철 어부는 밤새 물메기를 퍼 올리고 날이 밝으면 아낙들과 퇴역 어부들이 포구에 나와 물메기 등을 따서 내장을 꺼내 손질하고 세척한 뒤 건조한다.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물메기는 표준어가 꼼치라고 한다. 서해안 보령에서는 잠뱅이라고 부르고 강원도에서는 곰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영의 꽃인 동백꽃도 수백 가지 종류가 있듯 비슷하면서 다른 이 물고기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요즘은 국립수산과학원에서 꼼치와 물메기를 같은 어종으로 표기한다고 한다.
해장국의 명품을 맛보려면 통영으로
물메기탕은 물메기국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무를 푹 고아서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물메기를 넣고 살짝 데칠 정도만 끓인다. 모자기와 다진 마늘을 넣으면 맑은 국물이 나온다. 맑은 국물을 낼 때 대파를 얹고 고기와 함께 마시듯 먹는다. 물메기는 지방이 적고 아미노산이 풍부해 감칠맛이 두드러진다. 그래서 육질이 부드럽다. 멸치젓을 곁들이기도 한다. 통영의 겨울 새벽의 맛은 맑은 국물 맛이다. 물메기는 탕을 만들 때는 주로 생물을 쓰고 건메기는 찜을 해서 먹는다. 육질이 매우 부드러워 해장국으로 끓여 먹으면 입에서 살살 녹는다.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면서 한입 떠 넣어 삼키면 간밤의 숙취가 그 뜨거움과 부드러움에 도망을 친다.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 술병을 잘 고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예로부터 해장에는 빠질 수 없는 물고기였다. “고기 살은 매우 연하다. 뼈도 무르다.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라고 쓰여 있다.
11월 마지막 주 정도가 되면 주당들은 물메기탕을 먹으러 몰려든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통과의례이자 어민들에게는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즐거운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최근에는 새로운 맛을 찾으려는 소비자들의 심리가 더해져 대구에 육박하는 인기를 끌고 있다. 가격도 대구 값에 가깝다.
통영에서 물메기 경매는 서호시장 옆 통영수협 도천위판장에서 열린다. 새벽 4시부터 물량에 따라 한두 시간 경매가 이루어진다. 시장은 새벽 5시경부터 활력이 넘치기 시작한다. 인근의 500원짜리 커피가 불티나게 팔리고 시장 내의 시락국집에는 한 그릇을 해치우는 시장 상인들로 북적거린다. 건메기는 12시에 경매를 한다.
대구나 복국도 물메기로 만든 시원 담백한 해장국 맛을 따라오지 못한다. 겨울철 통영에 가서 술 마시고 새벽에도 깨어나지 못한 여행자는 뜨거운 위로를 받는 듯한 물메기 해장국 맛을 경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겨울철만 놓고 봐서는 최고의 해장국이다. 봄날 도다리쑥국이 나오기 전까지는 겨울 통영에서 해장국 명품의 호사를 누려보시라!
파도가 멈추는 해안선이 기다란 통영은 오목하게 들어간 포구가 발달해 있다. 한려수도의 바다와 섬 전망은 미륵산 정상이 최고이고 통영항 전망은 세병관 둥근 기둥에 기대어서 봐도 좋지만 20여 분 땀을 흘리고 올라 북포루에서 보면 완벽하다. 백석의 시 ‘통영2’처럼 충렬사 계단에 앉아 동백꽃 필 무렵 한산도 뱃사공이 되어도 좋으리라.
최치현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로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어린이 여러분, 우리나라 위인 알아맞혀 보세요. ㅇㅅㅅ은? 이순신, ㄱㅈㅎ은? 김정희, ㅈㅇㅇ은? 정약용…, 한글 자음 초성만으로 의사소통을 하거나 퀴즈를 주고받으면 재미있어. 초성놀이는 활용빈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지. 애정을 담아 건네는 농담이나 군색한 처지의 변명에도 효과적이잖아.
어떤 남자가 짝사랑하는 여자한티서 이런 문자를 받았대. “ㅊㄲㅃㅇㅇㅅㅅㄱㄱㅍㅌㄷㅈㅌㅂㅎㅅㅅㅇㅅㅊㅊㅈㅍㅋㅇㅍㄲㅈ.” 드디어 내 맘을 받아들였구나 싶은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뜻을 알 수 있어야지.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니 “참깨빵 위에 순 쇠고기 패티 두 장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 피클 양파까지”였대. 한동안 유행하던 패스트푸드사의 CM송 가사였다는군. ㅋㅋㅋ. 이걸 죽여, 살려?
2020년을 보내면서 나도 그 여자 본받아 초성 위인열전을 만들려 함. 근데 뛰어나고 훌륭한 위인(偉人)이 아니라 일 저지른 위인(爲人), 즉 장본인들이여. 선정기준은 많아. 아시타비(我是他非) 금시작시(今是昨是)라고 난 항상 옳고 넌 틀렸다는 자, 손 뒤집어 구름 만들고 손 엎어 비를 만드는 번운복우(飜雲覆雨, 두보의 시에 나오는 말)의 사기꾼,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한(이건 정경심 교수 재판부가 한 말) 위인, 공개념도 없이 공직을 맡고 있거나 탐내는 가짜, 불량품 재고 창고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녀석, 다리를 뻗으면 누울 자리가 생긴다는 신념과 지조로 세상을 사는 얌체, 품위는 개뿔, 뭐든 마구 써대거나 내뱉는 막말 양아치, 아무리 뜯어봐도 한마디로 왕싸가지…. 이렇게 기준이 많지만 사실은 내 맘대로여. 내가 경멸·타기하는 자들. 남녀 불문, 여야 불문에 안주 불문이여.
이 글을 쓰면서 발견한 건디, 매국노 이완용은 ㅇㅇㅇ이더군. 그러니까 “응응응” 하다가 나라를 팔아먹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듦. 아무리 초성만이라도 사람은 이름을 닮는 게 아닐까. 아니야. 나는 알다시피 ㅇㅊㅅ인디 그러면 내가 서울시장 나온다는 안철수여, 축구선수 이천수여? 다 안 맞잖아. 하여간 가나다의 역순, 다나가 순으로 한번 위인들 열병(閱兵)을 해볼까. 여기 실명이 등장하는 분들께는 한사코 죄송·미안하지만 대의를 위해 한번 눈감아주셨으면 함.
△ㅎㅇㅎ=현재 국회의원이여. 똑같은 ㅎㅇㅎ 초성자에 개그맨 황연희가 있지. 요즘은 활동이 뜸하지만 잘 웃기고 재치가 좋아. 근데 이 의원님은 다른 방식으로 웃기고 있음.
△ㅎㅈㅍ=빨간색을 디게 좋아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주특기. “이 사람과 한 번 틀어지면 너무 피곤하고 힘들다. 기억력도 좋고 집요해. 누가 이 사람과 맞서면 ‘안 싸우는 게 상책’이라고 말린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더라.
△ㅊㅁㅇ=단연 2020년의 대스타. 정호승의 시처럼 ‘산산조각’이 난 꼴이 되긴 했지만, 이 사람 사는 동네에서는 인기가 대단해. 앞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가 뭘 칭칭 감아댈 덩굴인지 알 수 없어.
△ㅊㄱㅇ=없는 일을 있게 만드는 달인. 재판 받다가 다른 일정 있다고 조퇴를 시도할 만큼 국사에 충실한 사람, 최경원 전 법무부장관, 최기영 전 과기부장관도 ㅊㄱㅇ인디, 이 사람도 나중에 장관 되는 거 아녀?
△ㅈㄱ=이름이 외자인 사람은 노출되기 쉽지.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용주(龍洲) 조경(趙絅, 1586~1669) 선생도 ㅈㄱ이긴 하지만 내가 뽑은 위선자와 달리 이분들은 학문 연구와 직언으로 유명했어.
△ㅇㅎㅊ=50년 집권론을 부르짖은 사람이야. ㅇㅎㅊ 중에 유명한 사람은 이환천이라는 시인인데, 시가 재미있고 촌철살인이여. 다음은 그의 작품 ‘문제’.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다음이/뭔지아니?/답은‘하야’” 이건 원래 박근혜 전 대통령 때 쓴 거지만 지금도 착용감이 좋아.
△ㅇㅈㅁ=싸움닭같이 전후사방 안 싸우는 사람이 없어. 참 바빠. 신경림의 시에 ‘목계장터’라는 게 있는디, 이곳은 牧溪(목계)지만 나는 木鷄(목계)라는 장터에 보내주고 싶어. 이 목계가 뭔지 궁금하면 찾아보셔. 아니 검색하지 말고 사색부터 해보셔.
△ㅇㅇㄱ=불량품 창고가 우리나라 도처에 있다는 걸 잘 알려준 사람. 이걸 다 빨리빨리 처분해야 하는디 참 걱정이야, 그치? ㅇㅇㄱ ㅇㄴ, 이게 뭐어게? “어이가 없네”야. 하는 짓이 정말 어이가 없어.
△ㅇㅁㅎ=와인의 아름다운 향기를 잘 아는 국회의원. 할머니들한테 참 유명한 사람. 이름을 일본어로 읽으면 미카인데, 원래 일본에서 온 이름인지 우리 고유의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어. 프로골퍼에도 ㅇㅁㅎ이 있지.
△ㅇㅅㅁ=이세민? 당 태종의 이름도 아니고 영세민과도 무관해. 검찰의 은행계좌 추적 정보에 일가견이 있고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해박, 아니 각박한 사람이여. 나는 해박(該博)을 각박(刻薄)으로 읽곤 하거든. 아는 게 많으니 곡학아세, 사기 치기도 유리하겠지.
△ㅅㅎㅇ=목포는 항구라는 걸 잘 아는 전직 국회의원. 남동생이 죽었을 때 어디까지나 침착 냉정을 잃지 않는 차분함이 참 인상적이었어. 내 한국일보 입사 동기에 손홍익(孫鴻翼)이 있었는디,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해지네.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도 잘 있겠지?
△ㅂㅊㅎ=국토는 좀 아는디 교통은 몰라. 모르는 거 또 있어. 너무 바빠서 자동차 압류되는 것도 모르고 세금도 못 냈지. 야당 반대로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았는데도 임명된 스물여섯 번째 장관님. 못사는 사람이 미쳤다고 장관하려 하겠어? 혼자 다 해요.
△ㄱㅇㅁ=초성만 같을 뿐 사실은 두 사람이여. 한 사람은 국회의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국회의원 되려다 실패했어. 내가 보기엔 오십보백보. 개그맨 강유미는 인터뷰 잘하던데, 이 두 사람은 입만 열면 시끄러워져.
△ㄱㅇㅈ=머리는 감고 사나? 난 화가 수필가 미술사학자였던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의 글을 좋아하고 한문학자인 김언종 고려대 명예교수를 잘 알지만, ㄱㅇㅈ이라는 초성이 참 아까워. 왜곡과 억지로 언론인 행세를 하니, 에구 쯧쯧.
△ㄱㄴㄱ=ㅈㄱ, ㅊㅁㅇ의 똘마니라지? 똘마니는 서럽지만 더 빛을 볼 날이 있을 거야. 똘마니니까 짧게 쓰자.
이 밖에 ㄱㅌㄴ, ㅈㅊㄹ, ㄱㄷㄱ, ㄴㅇㅁ, ㅇㅇㅈ, 이런 정계 인사들과 ㅇㅅㅇ, ㅅㅈㅊ, ㅈㅎㅇ, ㅈㅈㅇ, ㅂㅇㅈ, 이렇게 장래가 촉망되는 검사들이 제제다사(濟濟多士)야. 인물이 너무 많아 다 못 쓰겠음. 천자문에 나오는 대로 ‘준예밀물 다사식녕(俊乂密勿 多士寔寧)’, 재주와 덕이 뛰어난 사람들이 힘써 일하고 많은 인재가 있어 나라가 편안한 상황 아니겠어?
근데 어떤 기자가 쓰기를 “내 평생 검사(檢事) 이름을 이렇게 많이 알게 될 줄 몰랐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지? 장·차관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데 평생 검사랑 맞닥뜨릴 일 없는 사람들이 검사장, 차장검사, 부장검사 여러 명의 이름을 알게 되다니.
초성만 써놓고 봉게 나도 누가 누군지 정말 헷갈린다. 그나저나 이놈의 컴퓨터는 왜 한글 자음만 치면 무조건 영어 알파벳으로 돌아가지? 한글이 알파벳의 종속 문자냐? 글쓰기 불편해서라도 내년엔 이런 거 좀 안 썼으면 정말 좋겠구나야.
강과 산과 하회마을이 맞물려 자아내는 파노라마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서애와 겸암의 행장을 더듬어보는 재미도 짭짤하다. 부용대 주차장에 당도한 뒤 부용대-겸암정사-옥연정사 순으로 탐승한다. 하회마을 나루터에서 도선을 타고 강을 건너 부용대에 오르는 방법도 있다.
그저 봉긋할 뿐, 야트막한 야산이다. 산길은 밋밋한 데다 펑퍼짐해 풍경이 맺힐 리 없다. 꼭대기에 오른들 뭐 볼 게 있으랴 싶었으나, 웬걸, 부용대(芙蓉臺) 산마루에 닿자 급격한 반전이다. 별안간 확 트이는 시야 가득히, 수직벼랑 저 아래로 사행(蛇行)하는 낙동강이 엄습해오는 게 아닌가. 강의 젖을 물고 들어앉은 물동이동(洞) 하회마을도 한눈에 들어온다. 강변 모래밭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몽당연필처럼 작달막하게 짜부라져 코믹하다.
부용대는 강물과 하회마을을 한꺼번에 부감할 수 있는 전망대다. ‘부용’은 연꽃을 상징한다. 이곳 아찔한 벼랑 위에서 옛사람들은 하회마을을 통째 연꽃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의 길지라고 일렀다. 긴 말이 필요 없겠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를 통해 물가의 마을 중 살기 좋은 곳으로 하회를 제일로 쳤다.
살기에 좋아 출세한 이들이 속출했나. 풍산 유 씨 씨족촌인 하회마을은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 1539~1601),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형제 대(代)부터 번창해 위력을 떨쳤다. 현대에 이르러선 인파가 몰리는 관광명소로 거듭난 마을이다. 고택과 초가로 연출한 관광 재료들에 힘입어 상업이 기차게 발달했다. 그러나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면 그저 땅에 납작 엎드려 포복하는 마을일 따름이다. 거뭇한 기와지붕과 누런 초가지붕이 어우러진 자못 이상적인 색감 조합으로 평화롭다.
하회마을을 에두른 솔숲과 강물은 또 얼마나 평온한가. 마을 안에선 지금 열띤 호객 경쟁이 벌어지고, 여행자들이 왁자하게 떠들어대고, 연인들은 혹간 초가집 뒤란에 숨어 숨 막힐 키스를 할지도 모르지만 높은 곳에서 보면 일체가 은자처럼 마냥 고즈넉하다. 티 없이 조화롭다. 삶이란 이렇게 멀리서 보면 모든 게 상통이자 상생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게 작아 애잔하다. 가장 드높은 곳에 상주하는 신이나 하늘에게 우리가 사랑을 갈구하는 건, 미미한 존재에 불과해 슬픈 나를 자각할 때다.
부용대 서편 오솔길을 따르자니 숲이 제법 깊어진다. 솔향기 감돌아 청신하다. 아무리 작은 야산이라도 향이 있고 깊이가 있고 기품이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에서 멈춰 산에 산다. 청산을 건너던 나비가 들꽃에 꽂혀 갈 길을 잊듯이. 강물에 밀리는 모래알처럼 덧없는 인생, 굳이 꿍꿍이와 아귀다툼이 난무하는 비정성시(悲情城市)에 살 일이 뭐람. 그쯤의 생각이었을까. 겸암은 문득 벼슬을 버리고 낙향, 이 야산 자락에 공부방을 두고 지냈다. 겸암정사(謙菴精舍)가 바로 그곳이다.
부용대 동쪽 산자락 아래편엔 서애 유성룡이 벼슬을 마치고 머문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있다. 야산 양편에 형제가 나란히 정사를 짓고 자연 속에 은거했던 셈이다. 벼슬살이로 보낸 세월이 길었으나 둘 다 퇴계를 사사한 도학자로서도 쌓은 게 많았다. 못 말릴 산야 기질도 스승을 닮아 자연을 경전으로 읽었고, 흐르는 강물과 솔의 푸름을 바라보기를 유락(遊樂)으로 삼았다. 그래 격물치지의 혜안이 환하게 열렸을 테다. 특히나 사람 보는 눈에 있어서 서애를 따를 이가 누구랴. 서애는 임진왜란이 터지자 이순신과 권율을 임금에게 천거했다. 실로 신의 한 수였다.
지척에 살아 형제간 만남도 잦았던가보다. 심심파적으로 산꽃 보러 나갔다가 우연히 맞닥뜨린 일도 흔했으리라. ‘층길’이라는 이름을 달고 야산의 3부 능선쯤에 아직도 온전히 남아 있는 옛길 하나. 형제는 이 ‘층길’에서 상면하길 즐겼다고 전해진다. 옹색해서 위험한 층층 벼랑길이라 요즘은 아예 출입을 금지했다.
옥연정사는 강변의 높직한 둔덕에 있다. 고가의 관용과 운치로 아름답다. 서애는 여기에서 임진왜란의 전말을 담은 ‘징비록’을 집필했다. 전쟁의 사령탑 역할을 한 서애였으니 리얼리티로 생동하는 책이다. 그의 성품은 맑고 온유했다지. 그러나 실록엔 곱지 않은 평도 간간이 나타난다. 줏대가 약해 폐단을 당차게 간하는 일이 드물었다고 기록했다. 만년의 서애는 “평생 부끄러운 일이 많아 한스럽다”고 탄식했다. 세상의 갈채에도 불구하고 묵은 빚을 느꼈다? 그렇더라도 그 겸허한 풍모가 오히려 출중하다.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른다. 설령 비바람의 광란에 수면을 찢기더라도 유유히 흐를 뿐이다. 먼지구덩이 세상이라도 아랑곳없이 나아간다. 눈앞이 캄캄한 삶이라면 저 강물에게 물을 일이다.
420여 년 전 버려졌던 그 섬들은 지금도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초여름 남해의 햇볕은 뜨겁다. 그래도 6월의 녹음이 있어 섬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퍼진 길을 걸을 수 있다. 생명력 넘치는 섬의 신록은 바다와 함께 아스라한 정감에 젖어드는 남해의 풍경을 보여준다. 숲속에서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덩굴이 고개를 살짝 내밀고, 물 댄 논에서는 개구리밥 물풀이 햇살에 반짝인다. 언제 이 섬으로 왔는지 모르지만, 담벼락 옆 텃밭에는 늘씬한 보라색 코끼리마늘꽃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다.
섬이 버려졌을 당시 적들이 지나간 마을에서 살아남은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적군의 말 똥에 섞여 나온 곡식의 낟알을 찾아 먹었다고 한다. 가난한 이 땅의 백성이 가여워서, 참혹하게 유린당한 산하와 백성의 눈물을 잊을 수 없어서, 단 한 놈의 왜적도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그는 섬 앞바다에서 죽을 때까지 싸웠다.
6년 동안 이 땅에 치욕의 상처와 큰 아픔을 주었던 일본은 명량에서 그에게 대패당한 후 겨울 대비를 위해 남해안 일대에 머물러 있었다.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군을 원했다.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는 싸우지 않고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였다. 일본과 명나라 사이에 뇌물과 타협이 오간 사실을 안 그는 결전을 벌일 준비와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일본군의 정예병 1만2000여 명을 태운 500여 척이 배가 순천을 향해 광양만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명나라 300여 척, 조선 80여 척, 총 380여 척의 배가 노량해협으로 갔다. 명나라 도독 진린은 하동의 죽도 부근을 지키고, 그의 전함들은 맞은편 남해 관음포에서 일본 전선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어둠을 타고 노량해협으로 들어오는 일본 배들은 그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앞다퉈 다가왔다. 컴컴한 어둠이 깔린 검은 바다에 갑자기 날아드는 불화살이 포물선을 그리자 조용했던 바다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전투는 그날 새벽 2시부터 시작됐다. 포탄과 조총 탄환, 화살이 수없이 오가고, 불길 속에서 일본군의 비명은 밤바다로 퍼져나갔다. 전투는 새벽 일출처럼 일본군의 피로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낮까지 이어졌다. 그와 조선의 수군은 한 명의 침략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했다. 흔히 지휘선은 최전선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 있는데 이날 전투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일본 전선에 포위된 명나라 도독 진린을 구출하기 위해 그의 배가 앞장서 전선을 돌파하기도 했고, 적선을 추격할 때 선두로 나서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아들 면의 죽음에 대한 복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 전선 200여 척이 침몰하고 100여 척을 포획하는 승리로 전투가 마무리되어갈 무렵, 마지막 저항을 하며 도망가던 일본군의 탄환이 그의 왼쪽 가슴을 뚫었다.
“이 사람의 죽음을 삼가고 삼가 말하지 말고 군사들을 놀라게 하지 마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그의 시신은 관음포로 옮겨져 이락사에 안치되었다. 그 후 아산으로 운구하기 전까지 3개월 정도 ‘남해 충렬사’의 가묘에 안치됐다.
보물섬 남해군에는 ‘바래길’이 있다. ‘걷기 여행길’이다. 바래길 중 2012년에 개통한 13코스는 ‘이순신 호국길’로 불린다. 특별한 의미를 되새기며 걷는 길이다. 노량해협을 따라 걷다 보면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던 충렬사 사당과 만난다. 길은 관음포 해안을 따라 ‘이순신 순국공원’까지 이어진다. 격전지였던 관음포만 외해가 보이는 해안 공원은 ‘호국 광장’과 ‘관음포 광장’으로 나뉜다.
호국 광장에는 장군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노량해전에서 전몰한 조․명 연합수군의 위령탑, 도자기 벽화로 만들어진 순국의 벽 등이 있다. 순국의 벽은 50X50cm 크기의 도자기 벽화 3797장을 이어 만들었다. 세계 최대 규모다. 광장 주변은 공원과 공연장이 둘러싸고 있다. 호국 광장에서 관음포 광장 쪽으로 가다 보면 돔형으로 만들어진 영상관이 있다. 118석 규모의 입체 영상관인 이곳에서는 노량해전 영상을 3D 영상으로 보여준다.
관음포 광장은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테마별 체험과 리더십 체험관이 있어 체험과 교육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노량해전이 벌어진 11월이면 ‘이순신 순국공원’에서 호국정신을 기리는 ‘이순신 순국제전’이 격년제로 열린다.
그는 노량해전에서 왜 무모할 정도로 싸웠을까?
노량해전이 있기 1년 전 선조는 일본 계책에 말려 그에게 수군을 이끌고 부산포로 출정할 것을 명했다(정유재란). 하지만 일본의 계략임을 알고 있었던 그는 큰 피해를 우려해 출정을 늦췄다. 이에 선조는 그를 파직하고 한양으로 압송한다. 사실 선조가 명분으로 삼은, ‘임금을 능멸한 죄’는 핑계였다. 조선이 어떤 나라인가. 쿠데타로 건국한 나라다. 더구나 선조는 아들에게 섭정을 시키고, 이 땅과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가려 했던 군주다. 민심이 그에게 향해 있다는 걸 선조는 알고 있었다.
한양으로 압송된 그는 혹독한 문초를 당한다. 선조는 “짐은 다시는 그대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소“라고 말한다. 그 후 그는 백의종군한다. 처참한 심정으로 수군 진영으로 내려가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친의 임종 소식을 듣는다. 그때의 심정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썼다. ”하늘이 캄캄했다.“
그해 8월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그는 9월에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13척의 기적’ 명량대첩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꾼다. 그리고 10월에 애지중지하던 아들 면이 왜적 손에 죽었다는 비보를 받는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승패와 상관없이 더는 이 나라에서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결연히 싸웠다. 그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나 명예 때문이 아니었다. 생을 연장하고 싶은 몸부림은 더더욱 아니었다. 자신의 뿌리인 이 산하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개인적인 복수와 일본의 만행에 대한 응징도 포함돼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그는 노량해전을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전쟁으로 생각한 것이다.
6월이다. 남해군 바래길 13코스 ‘이순신 호국길’에서 우리 역사에 드문 위대한 장군이자 휴머니스트였던 그를 만나고 우리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새벽 5시 23분, 첫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는 고요했다. 노량 앞바다에서 다시는 분노의 파도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와 이야기 나누며 ‘이순신 호국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