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사진 보다 보면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나도 맨눈으로 별을 보고 싶다', '나도 별똥별을 보고 싶다'… 별이 뜬 밤을 보다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돕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소개한다.
1 스텔라리움 모바일
앱 실행 후 휴대폰을 들고 있는 방향에 따라 행성과 별자리 등의 이름을 알 수 있다. 임의로 위치를 바꿔 남반구의 밤하늘도 확인할 수 있고, 아랍과 중국, 이집트, 일본 등 다양한 별자리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구글 플레이스토어와 애플 앱스토어에서 다운로드 가능.
2 스카이 라이브
현재 별이 보이는 정도, 별 관측 가능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달의 모양, 행성의 출몰, 관측 가능한 별자리, 일출과 일몰 시간 등의 정보까지 무료로 확인 가능하니, 별을 볼 수 있는 날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싶다면 이 앱을 활용해보자. 애플 앱스토어에서 다운로드 가능.
3 스타 트래커
VR 기능이 탑재돼 있어 앱을 켠 채로 휴대폰을 움직이면 바라보는 방향에 위치한 별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 위치를 대한민국으로 설정한 뒤 사용하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구글 플레이스토어와 애플 앱스토어에서 다운로드 가능.
4 나이트 스카이
증강현실(AR) 별자리 앱. 밤하늘을 향해 기기를 들어 올리면 행성, 별자리, 위성을 빠르게 알아낼 수 있다. 원하는 별자리를 3D로 볼 수 있고 그 별 뒤에 있는 별과의 거리도 확인 가능하다. 미국 모리슨 플래닛테리움 등 해외 주요 천문대도 방문할 수 있다. 애플 앱스토어에서 다운로드 가능.
서울에서 레코드숍을 운영하는 그녀는 작은 체구지만 단단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푸른 자연 속을 뛰놀면서 자란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간직한 꿈이 있다. 바로 ‘지구별 여행자’가 되는 것. 그녀는 오늘도 레코드숍에서 세계 각국의 음악들을 들으며 음악의 본고장을 여행하는 꿈을 꾼다.
이는 어떤 영화의 스토리가 아닌, 도서 ‘여행을 수놓다’의 저자 신명숙 작가(68)의 이야기다. 신 작가는 ‘늦었다 싶을 때가 이르다’는 생각으로 60대의 나이에도 여행과 모험을 즐기고 있다.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신명숙 작가에게 받은 에너지를 시니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신명숙 작가는 2007년 50대에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해 67개국을 다녀왔지만, 아직도 갈 곳이 많이 남았고 힘닿는 데까지 여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누군가는 편하게 크루즈, 패키지 여행을 즐겨야 할 나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왜?’라고 반문한다.
신 작가가 문학계에 이름을 올린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녀는 2016년 미래에셋 수필부문 공모에 당선됐고, 2018년 계간지 ‘주변인과 문학’ 수필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2018년 나온 여행 에세이 ‘지구본 위를 거닐다’, 2020년 나온 시집 ‘웅이와 라넌큘러스’가 있다. ‘여행을 수놓다’는 지난 8월 출간됐다. 담백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레코드숍, 그리고 여행
섬세한 글을 쓴 그녀가 여행 작가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실제 만난 신명숙 작가는 예상보다 더 호탕하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 평범한 삶은 아니었다. 신 작가는 무려 23년간이나 레코드숍을 운영했고, 그러면서 늘 여행 준비를 해왔다고 밝혔다.
“생각해보면 분명한 것은 레코드숍을 하면서 늘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었고,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의 본고장에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꾼 것 같아요. 힘들기도 했죠.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많이 쌓이고, 서울에서 분당을 왔다 갔다 하느라 매일 밤 12시에 집에 들어오곤 했어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고 호황도 겪었지만, MP3가 나오고는 사양 산업이 되어 결국 가게를 정리했지요.”
2004년 레코드숍 문을 닫았다. 매일 바쁘게 일하던 사람이었기에 쉼표는 어색했다. 일상이 무료했고, 우울증 비슷한 것도 겪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가 되는 법. 신 작가는 기분 전환을 위해 성남문학원에 다녔고, 여행자의 삶도 시작됐다. 오랫동안 품었던 꿈에 가까워졌다.
첫 여행은 딸과 함께한 중국 패키지 여행이었다. 이후 몇 차례 패키지 여행을 경험한 뒤 신 작가는 여행의 참맛을 맛보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이에 2007년 패키지가 아닌 배낭여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혼자 타국을 여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배낭여행 동아리에 가입했고, 사람들과 함께 인도 여행을 떠났다. 책 소개에도 적혀 있듯이, 이 인도 여행은 신명숙 작가가 여행자의 삶을 사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두 명씩 현지 가정에서 숙박 체험을 했어요. 저는 한 총각과 아잔타 석굴 뒤편에 있는 집에 가게 됐어요. 거기가 정말로 더러워요. 화장실 하나 없는 곳이더라고요. 제가 간 집은 애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곳 사람들 주식이 짜파티라고 부침개처럼 생긴 것에 달밧이라는 것을 앙금처럼 부어서 먹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그거를 한 일곱 식구가 7~8장을 놓고 먹는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모자란 양인데, 거기서 또 한 장을 제게 주는 거예요. 사람이 이렇게도 사는구나, 충격을 많이 받았죠. 그리고 18세 아기 엄마가 있었는데, 내가 아이섀도 바르는 걸 그 큰 눈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쓰던 것을 줬더니 좋아하더라고요. 그때 저를 보던 눈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사람들이 인도에 갔다 오면 인생관이 바뀐다고 하던데 저도 그랬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애들이 반찬을 남기면 ‘너네들은 인도 한 번씩 갔다 와야 해’라고 말했어요.”
이후 2008년부터는 남편과 함께 여행했다. 여행 동반자가 된 부부는 서로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여전히 금슬 좋은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과거 펜팔로 만난 사이라고. 신명숙 작가는 예전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그 기본에 연애편지와 일기가 있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한다. 일기는 지금도 매일 쓴다고.
“제가 남편한테 같이 여행 다니자고 꼬셨죠.(웃음) 여행하면서 좋은 것들을 많이 보고 오는데 남편과 공감이 안 되는 거예요. 얼마나 서글퍼요. 그래서 제가 나이 들어 공감하면서 얘기할 수 있게 같이 여행 가자고 했죠. 2008년에 중국 장자제에 갔는데, 남편이 반한 거예요. 2009년에는 북인도에 갔고, 그렇게 주기적으로 1년에 두 번은 여행을 갔어요. 지금은 제가 우리를 ‘2인조 시니어 여행단’이라고 불러요. 저는 바람잡이, 남편은 행동대장이에요. 처음에는 제가 다 리드했거든요. 지금은 역전되어 남편이 어디 가자고 예약도 다 하기 때문에 전 신경도 안 써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웃음)”
발칸, 중동, 시베리아 여행을 수놓다
‘여행을 수놓다’는 2017~2018년의 여행기다. 신명숙 작가는 책에 나온 순서와 반대로 발칸, 중동, 시베리아 순으로 여행을 했다. 책에 실린 여행지는 러시아, 발칸 지역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중동 지역의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 포르투갈이다.
책을 읽으면 신명숙 작가와 함께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설명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이는 신 작가가 태블릿 PC에 여행의 순간순간을 기록했기에 가능했다. 그 메모들이 쌓여서 여행기가 됐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책으로까지 나왔다. 신명숙 작가는 ‘여행을 수놓다’가 천편일률적인 여행책과는 다르기를 바랐다.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느낀 것까지 쓰자면 아마 책 몇 권은 되겠지만, 그런 책들은 시중에 이미 많죠. 저는 그것들을 전부 배제하고 진솔하게 긴장된 부분을 이겨낸 후 제 자신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부각하려고 했고, 의도한 부분을 함께 여행하는 분위기로 공유했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문학을 가까이하다 보니 말장난을 하기 싫었어요.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 아닌 산문식으로 썼고, 차별화하려고 했어요.”
신명숙 작가는 여행지 중에 “발칸 지역의 알바니아, 마케도니아가 좋았다”고 회고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계획을 바꿔서 다른 곳을 가게 될 때가 있는데, 두 국가가 그랬다. 사전지식 없이 갔지만 좋았고 인상에 남는다”고 이유를 덧붙였다.
특히 여행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책을 보면 신 작가도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도움도 받았다. 그 수많은 인연 중에서 신 작가는 알바니아에서 ‘저주받은 산’으로 통하는 세스산을 같이 트레킹한 사람이 제일 생각난다고 말했다.
“스물네 살의 프랑스 아가씨인데, 처음에는 배낭 큰 거 메고 당당했거든요. 그런데 한산한 산장에 내리니까 기가 확 죽는 거예요. 혼자 무서우니 계속 우리한테 따라붙는 거죠. 그래서 트레킹을 같이 했는데, 그녀의 가방이 너무 크고 무거우니까 계속 가다 쉬고 가다 쉬고를 반복했죠. 겨울 산행은 빨리 올라가고 빨리 내려와야 위험하지 않아요. 그런데 놓고 갈 수도 없고, 정말 책에 표현한 대로 내버리고 싶더라고요. 그 아가씨 부모님이 의사예요. 우리나라 정서를 생각하면 돈이 많겠다 싶은데, 두 분이 공공기관 의사라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자립심을 키우고자 혼자 6개월 동안 여행을 하는 건데, 1달러에도 벌벌 떨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책에서 ‘깍쟁이’라고 표현했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배운 게 많아요.”
반대로 시베리아 여행은 예상보다 잔잔했다고 기억되는 듯하다. 시베리아 여행 후기는 횡단 열차 탑승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바이칼호를 보기 위해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72시간을 내리 기차 안에 있어야 한다. 때문에 책 내용 또한 기차 안과 밖의 풍경,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신명숙 작가는 기차처럼 달리고 싶었나 보다. 역시 에너지가 넘치는 신 작가다.
코로나19, 다시 열린 여행길
“1년에 두 번은 여행을 나가야 견딜 수 있었다”는 신명숙 작가.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막혀 답답했을 터. 그래도 남편과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캠핑을 즐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단다. 또한 언젠가 다시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으로, 건강 유지를 위해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매일 등산을 포함한 운동을 1시간 이상 한 지도 30년이 됐다고 한다. 외국에서도 등산을 많이 해본 신 작가는 안나푸르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여행을 다녀온 67개국 중에서 가장 좋았던 나라를 묻자 어떻게 한 나라만 꼽을 수 있겠냐고 고심하더니 칠레라고 답한다. “칠레를 바람의 땅이라고 하는데, 호수가 정말 많다. 그런데 호수 빛이 다 다르고, 라마들이 능선에서 돌아다니는데 정말 아름답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제 해외여행길이 다시 열리고 있기에, 그녀는 다음 목적지로 중앙아시아를 생각하고 있다.
“내년에는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상반기에 안 되면 또 6개월을 기다려야겠죠. 중앙아시아, 그러니까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을 가보고 싶어요. 아직 안 가보기도 했고요. 비행기로 5시간 내로 갈 수 있는 곳은 다 남겨뒀어요. 일부러 먼 곳만 갔죠. 중남미 쪽은 비행기만 20시간 넘게 걸려요. 하루라도 어릴 때 멀리 다녀온 거죠. 아, 유럽도 나중에 가도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남겨뒀어요. 노후에도 심심하면 여행을 가야 하잖아요. 지금까지 늘 해왔던 것처럼 건강 관리하고 여행을 가야죠.”
신명숙 작가는 여행 외에 글쟁이, 그리고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목표도 있다. 그것은 신 작가에게 ‘제2의 인생’ 희열을 느끼게 해준 손주들과 관련 있다. 손주들, 그러니까 두 딸의 자녀들은 각각 열 살, 일곱 살, 다섯 살이다. 신명숙 작가는 손주들이 태어날 때부터 기억에 남는 순간을 모두 기록해뒀다. 나중에 손주들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책을 만들어서 선물해줄 계획이다. 과거 바쁘게 사느라 엄마로서는 부족했을 수도 있지만, 할머니로서는 다르고 싶은 마음이다.
“저는 손주들을 정말 사랑하고, 그애들을 잘 데리고 다녀요. 이번 여름에도 제가 자진해서 수영장, 해수욕장에 데리고 다녔어요. 요즘 애들은 정서적으로 시골 이런 것에 너무 고갈되어 있어요. 우리 애들도 호텔이나 가려고 하니까, 그거를 제가 대신 해주는 거죠. 내가 시골에서 자라서 심성도 악하지 않고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손주들에 대해 쓰고 있는 것도 나중에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할머니의 흔적을 볼 수 있으니까요. 우리 애들이 안 하니까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리고 두 딸에게 속죄하는 마음도 있어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내 빈자리를 매정하게 다그치는 것이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 믿었고, 엄마의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곁에 없어 어릴 적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비가 온다’고 전화하면 ‘조금 더 기다렸다가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뛰어서 가라’고 했던 말이 그렇게나 서운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지요. 그래도 그런 흔들리는 날들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음을 두 딸에게 고백하는 마음도 전하고 싶어요.”
신명숙 작가 인생의 좌우명은 ‘리드하는 삶을 살자’다. 누군가한테 끌려가거나,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내 삶은 내가 키를 잡고 살자는 생각이다. 평생 활기차게 진취적으로 살아온 신 작가는 늦은 나이에 꿈 또한 실현하고 있다. 그녀는 인생에서 늦은 것은 없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자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도 배낭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많은 시니어분들이 배낭여행을 못 떠나는 이유는 안정적인 현시점에서 탈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굳이 배낭 메고 힘들게 가야 여행이냐, 패키지로 얼마든지 편하게 갈 수 있는데…. 그거에 갇혀서 못 나가는 거예요. 내 주위 사람들만 봐도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오히려 패키지만 열심히 찾아다니더라고요. 제가 만든 말이 있어요. ‘삼잘’이라고.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고라는 뜻이에요. 너무 ‘삼잘’에 연연하지 말고, 여행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많은 시니어분들이 내 책을 보고 도전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지난 7월, 우주여행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7월 11일 오전 7시 40분에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7월 20일 오전 6시 12분에는 아마존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가 달과 화성 탐사용 우주선 ‘스타십’을 개발해 그 뒤를 쫓고 있다. 앞다투어 우주로 떠나는 나이 든 ‘회장님’들은 로망으로 존재하던 우주여행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 달에 발을 딛는 우주인을 보며 상상만 했던 우주여행, 국내에서도 정말 가능한 걸까?
시니어가 우주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제각기 다양하다. 정달호 전 이집트 대사는 “기후 변화나 코로나19 사태를 보면 지구에 한계가 온 것 같다. 인류의 미래가 우주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주가 어떤지 직접 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양승국 법무법인 로고스 대표변호사는 “영화처럼 몸이 둥둥 뜨는 무중력 상태에서 파란 지구를 내려다볼 걸 상상하면 짜릿하고 흥분된다”며 “실현 가능성이 낮을 것 같아 꿈만 꾸고 있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첫 번째로 신청하고 싶다”라고 말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아직까지 한국인이 우주여행을 다녀온 사례는 없지만, 비슷한 사건은 있었다. 2008년 4월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다녀온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의 이야기다. 2006년 진행된 우주인 선발 프로젝트는 당시 큰 이슈였다. “인생의 마지막 열정을 우주에서 태우고 싶습니다. 우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손자 손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당시 예순일곱의 나이로 최고령 도전자인 정재은 신세계그룹 명예회장이 남긴 메시지는 사회에 울림을 주었다. 이외에도 산악인 고(故) 박영석 대장, 카레이서 황진우 등의 명사가 도전해 더욱 화제를 모았지만, 우주행 티켓을 거머쥔 주인공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소속의 이소연 박사였다.
이 씨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9박 10일간 머무르고 무사히 귀환했다. 이 씨는 전문적인 훈련 과정을 거친 직업 우주인으로, 그녀의 여정은 현재 이뤄지고 있는 민간 우주여행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그러나 당시 국민들은 ‘1호 우주인 탄생’이라는 경사를 지켜보며 머지않은 미래에 누구나 우주를 여행할 수 있기를 꿈꿨다.
실제로 이소연 씨의 귀환 직후 인터뷰는 시청률 조사회사 TNS미디어코리아 기준 17.2%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높은 관심을 받았다. 당시 국민적 관심을 인식한 듯 국내 한 관광사는 유사 우주관광 상품을 내놓았다. 2008년 판매된 ‘우주에서 살아남기-우주항공 체험과 러시아 일주 6일’이 그것이다. 관광객들은 직접 우주로 떠나는 대신, 러시아 여행 중에 모스크바의 가가린 우주훈련센터를 방문했다.
로켓보다 열기구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실제로 우주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지만, 오히려 국내 분위기는 예전만 못하다. 바다 건너 미국에선 우주여행 티켓을 팔며 분위기가 달아오른 모양새지만 우리나라에선 13년 전의 유사 우주 관광상품마저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 기술로는 짧게 보면 10년, 길게는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어릴 적 상상하던 ‘달나라로 떠나는 수학여행’은 정말로 요원하기만 한 걸까.
안형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술력을 갖춘 어떠한 기업이 나타나 우주여행만을 목표로 기술 개발에 나서지 않는 한 10년 안으로는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우주여행 산업 진출을 꿈꾸는 국내 기업이 있냐고 묻자 “현재로서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한화그룹의 방산·항공 계열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측도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며, 아직 우주 산업 전반에 투자하는 단계라서 우주여행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을 논의하기는 이른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휴성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미래스마트건설연구본부 본부장은 “기술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돈”이라고 콕 집어 지적했다. 우주여행에 필요한 발사체를 제작하고, 우주정거장처럼 궤도를 도는 우주호텔을 건설하는 일에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다. 우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비용도 수백억 원 수준이다 보니 일상화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로켓 대신 열기구를 도입할 경우 시니어에게도 희망이 있다. 열기구를 이용하면 우주복을 입지 않고, 우주에서 적응하기 위한 훈련이나 체력 단련을 거치지 않아도 우주와 비슷한 환경에서 푸른 별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다. 실제로 스타트업 ‘스페이스퍼스펙티브’(Space Perspective)는 특수 제작될 열기구 ‘스페이스십넵튠’(Spaceship Neptune)을 이용한 관광상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열기구의 강점은 로켓보다 천천히 상승해 탑승자가 버텨야 하는 중력가속도로 인한 압력이 비교적 낮다는 데 있다. 즉 탑승자의 신체 조건이 완화된다. 현재 우주행 티켓을 판매 중인 블루오리진·버진갤럭틱의 우주여행용 로켓에 탑승하려면 2~3G를 버텨야 한다. 2~3G는 급회전을 하거나 추락하는 롤러코스터에서 느낄 수 있는 수준으로, 안형준 연구위원은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는 건강한 분이라면 탑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시니어들이 ‘열기구 우주여행’을 노려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엔 국내에서도 우주여행을 성공해본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맺는 기업이 등장할 수 있다. 허환일 충남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수요가 있다면, 외국 기업이 제작한 발사체를 타고 국내 기업이 우주관광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가 가능할 수 있다”며 “아주 빠르면 10년 후에도 일반인의 우주여행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니 우주여행을 꿈꾼다면 지금부터 체크리스트를 챙겨 준비해보자. 꿈꾸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없고,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가 올 테니까.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정달호 前 대사의 외교관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해외여행이 통제됐을 때는 여권을 받아 해외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웠으므로 자유로이 출국하는 외교관이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다양한 나라를 상대하면서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외교관의 특권이자 긍지다. 외교관은 빛나는 일도 하지만 궂은일도 많이 한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대학에서 정치외교 분야를 전공한 것이 직업의 특성과 맞았고, 여기저기 해외를 다니며 다방면의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되었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외교관의 기본 무기이기도 하다. 해외 근무지로는 잘할 수 있는 언어 사용국을 선호하지만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노르웨이, 이라크로 시작해 세 번째 임지는 미국 뉴욕이었다. 뉴욕에서 ‘뉴욕타임스’를 매일 읽고 현지 방송을 듣고 현지인들과 영어로 대화하면서 영어에는 자신이 붙었다.
그다음에는 오래 마음속에 그리던 파리로 발령을 받았는데 프랑스어를 꾸준히 공부한 덕도 있지만 시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서양 외교관들은 일생의 꿈으로 여길 만큼 파리 근무를 희망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에 비해 출세 길이 멀다고 프랑스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대유럽 외교의 중요성에 비해 아쉬운 일이다.
첫 임지인 노르웨이에서 어느 날 한국 여성의 울먹이는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왔다. 사정을 들어보니 멋모르고 국제결혼을 해서 왔는데 몇 달 되지 않아 남편에게 구타와 구박을 당해 공포에 떨고 있으니 무조건 노르웨이를 떠나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들어보니 사정이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법적인 조치를 취할 경황도 없이 오슬로 밖 멀리 은신처에서 피해자를 데려와 하루이틀 보호하다가 귀국하도록 도와준 일이 있다. 쉽고 편한 일은 아니었다.
이라크에서는 당시 이란과 전쟁 중인 터라 핵심 전투 지역인 바스라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우리 근로자들의 보호가 초미의 과제였다. 이라크 쪽 전세가 불리해져 근로자들이 마지막 철수할 때까지 이들과 함께 지냈는데, 상대측의 포탄이 터지는 굉음으로 방 벽에 걸린 그림이 떨어지고 물건들이 쓰러지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해외 어디서 근무할 때가 제일 좋았냐고 누가 물으면 서슴없이 파리라고 대답한다. 프랑스는 참으로 복 받은 나라다. 3면이 바다(대서양, 지중해, 북해)이면서 평야가 많고 동쪽에 알프스라는 웅장한 산이 있어 지리적 이점이 뛰어나다. 그런 만큼 먹을거리도 풍부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켜왔다. 파리 바깥 프랑스 어디를 가더라도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유명한 포도주 생산지를 방문해 양조 공정에 대한 설명도 듣고 시음도 해본 추억이 생생하다.
프랑스는 또한 파업이 빈번한 나라다. 한번은 한말숙 소설가가 이끄는 우리 시인·작가 그룹이 파리에 와서 프랑스 문인들과 문학 행사를 벌이는데, 쌀쌀한 겨울인 그날 대중교통이 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몇 킬로미터인지도 모를 그 먼 행사장까지 마라톤을 해서 간 적이 있다. 도로는 차와 사람들로 뒤범벅돼 있었다. 선진국의 역설을 경험한 셈이다. 아무튼 추운 겨울날 땀 흘리며 파리의 밤거리를 뛰었던 것이 하나의 추억이자 보람으로 남아 있다.
그다음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 근무를 마치고 파나마 대사로 나가면서 생각지도 않던 스페인어를 배워 그 문화권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던 것 또한 적지 않은 성과다. 파나마에 부임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우리 예술인 방문단이 왔는데 국립오페라극장 로비에서 이들을 위한 리셉션이 열렸다. 그때 양국 인사들 앞에서 대사가 연설을 했는데 일천하지만 스페인어로 했다. 물론 원고를 보면서 했지만 파나마 외무차관으로부터 연설이 아주 좋았다는 평가를 들었다.
파나마에서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대규모 갈라 디너가 열렸는데 대사들은 장관급 텐트에, 국가원수들은 별도의 텐트에서 디너를 하기로 돼 있었다. 원수급 텐트에 낯익은 모습의 신사가 앉아 있기에 다가가서 보니 영화배우 숀 코너리였다. 그는 파나마 대통령의 친구 자격으로 왔다는데 디너 자리에서 원수급 대우를 받는 것을 모두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인간적 매력과 품격이 몸에 밴 노배우가 존경스러웠다. 이집트 대사 시절에는 한 유력 가문의 혼사에서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오마 샤리프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많이 쇠락한 모습임에도 명배우의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교관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일 하나는 우리 원양어선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최초로 나포되었을 때 일이다. 선원들의 석방을 위해 인접국 케냐에 두 번이나 가서 현지 교섭을 지휘한 끝에 서너 달 만에 이들의 석방을 이루어냈다. 석방하는 순간까지 해적들이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해서 참 고생을 많이 한 기억이 난다. 몸바사 해안의 비밀스런 장소에서 몰골이 초췌한 우리 선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하며 맞이할 때 그들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마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누구나 다 때가 있다. 누구나 기회가 있으니 좌절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누구나 몸에 때가 있다는 말이다. 때가 되면 때가 낀다. 때가 쌓이면 때가 붙는다. 때가 오래 지나면 때가 붓는다. 때가 길면 때가 두껍다. 누구나 다 때가 있다!
앞의 때는 時(때 시), 즉 시간이고, 뒤의 때는 垢(때 구), ‘피부의 분비물과 먼지 따위가 섞여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時垢(시구)라는 말도 있을 법하다. 이슈가 되는 한 시대의 폐해나 고질, 해결해야 할 시대의 적폐,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사람들, 그런 의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말은 없다.
시대의 폐해야 반드시 해소해야 하지만 때는 왜 밀어야 하지? 그냥 더러우니까? 밀면 시원해서? 몸무게 줄이려고? 노느니 이 잡는 기분으로(이가 뭔지 모르는 세대는 이해 불가능!)? 가족이나 친지간의 발가벗은 우애나 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나는 잘 모르겠다. 속 시원히 설명해주는 자료를 못 찾았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제대로 목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동네 대중탕은 거의 다 없어진 지 오래인데, 헬스클럽도 영업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아예 욕탕이 없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샤워야 집에서 할 수 있지만 탕에 들어앉아 쉬거나 때를 밀기가 어렵다. 강남에 사는 어떤 사람이 목간한 지 오래됐다고 하기에 “우리 동네까지 발가벗고 걸어오셔. 사우나 표 드릴 팅게”라고 약 올린 적이 있다.
정말 다행스럽게 우리 동네 스포츠센터는 욕조가 크고 운동시설이 다양하다. 이곳도 정부 시책에 따라 문 닫은 적은 있다. 2주 만엔가 재개장했을 때 반갑고 고마웠다. 아내의 권고에 따라 ‘재입욕 기념’으로 실로 오랜만에 때를 밀었는데, 가락국수 같은 것들(윽, 더러워!)이 물 내려가는 걸 막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그러나 내 때만으로 그리 된 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날 시원하긴 했지만 때를 왜 밀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더라. 목욕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은 원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정도일 뿐 때를 미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 것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때밀이 관광을 오는 건 이국적인 흥취, 돈 뿌리고 한국인들 부려먹는 쾌감 그런 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때를 왜 밀까 궁금해 하다가 서울 어느 지역 맘 카페에서 ‘감명 깊은’ 글을 읽었다. 아이가 있는 엄마, 임신 중인 엄마들이 회원인 그 카페에 오른 글의 제목은 ‘때 안 밀고 살 수 있는 방법 없나요?(제목부터 더러워서 죄송)’였다. 대충 인용한다. “매주 때를 밀어야 살 수 있는데 정말 할 일이 많아서 때까지 밀 시간이 없음. 바르고 샤워하면 때 안 밀어도 되는 제품 없을까? 샤워하면서 슬쩍 문지르면 되는 거. 왜 요즘같이 좋은 세상에 그런 게 없을까? 내 길지도 않은 인생, 때 미는 시간과 노력을 다른 일에 좀 써보고 싶다.”
그러자 다른 엄마들이 무슨 때밀이 요술장갑, 이집트 수세미, 비누 묻혀 닦으면 끝나는 오션 타월을 추천하고, 바디크림 쓰면 견딜 만하다, 매일 샤워하면 된다, 목욕탕 안 간 지 20년도 넘는데 전엔 며칠 안 가도 하얗게 피부가 일어나더니 지금은 샤워만 해도 아무 문제없다, 우리 아이들 태어나서 한 번도 때 안 밀었다, 때 안 민 지 20년 됐는데 지금은 몸 불려도 때 안 나오고 벌겋게만 된다 등등 백가쟁명 갑론을박 찬반양론 설왕설래가 아주 볼 만했다.
사실 글을 올린 엄마는 때를 안 밀겠다는 게 아니라 때 미는 수고를 덜고 싶다는 취지였다. 나는 그와 달리 때를 왜 미느냐는 원초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천자문’에 骸垢想浴 執熱願凉(해구상욕 집열원량)이라는 말이 있다. “몸에 때가 있으면 목욕 생각나고, 뜨거운 걸 쥐면 서늘한 걸 원하게 된다”는 뜻이다. 더러운 걸 싫어하고 깨끗하기를 바라는 심정은 누구나 같다.
동양의 에티켓 교범 ‘예기(禮記)’ 내칙(內則)에는 부모를 모시면서 “닷새가 지나면 물을 데워놓고 몸을 씻기를 청하고 사흘이 지나면 머리 감을 물을 마련하되, 그 사이 얼굴에 때가 끼었으면 쌀뜨물을 끓여 세수하기를 청하고 발에 때가 끼었으면 물을 데워 씻기를 청하라”(五日則燂湯請浴 三日具沐 其間而垢 燂潘請靧 足垢 燂湯請洗)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목욕은 사실 매일 하지 않고 닷새 걸러 해도 무방하다. 얼굴과 발만 간간이 잘 씻고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면 된다. 이와 달리 마음의 때, 이른바 심구(心垢), 바꿔 말해 번뇌는 매일 벗기고 씻어내야 한다. 이에 관한 어떤 불자들의 문답. “마음의 때가 벗겨지면 목욕할 때 몸의 때도 더 많이 나올까요?”, “마음이 맑아지면 혈관 속 피도 맑아지고 독소물질 노폐물 같은 탁기(濁氣) 생성 물질이 피부로 배출되기 때문에 각질이나 때가 되어서 조금이라도 더 나올 겁니다.”, “아, 기대되네요. 상상만 해도 개운한 느낌!” 정말 그럴까? 재미있는 말이지만 믿어야 될지 잘 모르겠다.
때 이야기를 하다 보면 1984년 6월 17일자 한국일보 사회면 톱 ‘선데이 스토리’가 생각난다. 열일곱 살에 때밀이를 시작해 15년 만에 1억 원을 번 사람의 성공담이다. 입사 3년 차 기자의 기사를 부장(오인환, 나중에 공보처장관) 지시로 내가 중간 데스크를 보아 넘겼는데, 끝 부분이 확 달라져 있었다. 그의 성공과 성실에 초점을 맞춘 마지막 문장을 부장이 “젊은이들이여 자기 때는 자기가 미는 게 어떤가”로 바꾼 것이다. 때밀이의 성공이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부각시킨 걸 보고 ‘기사란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하고 배웠다. 퇴폐 이발소, 터키탕 등 향락산업이 큰 사회 이슈일 때였다. 말하자면 그게 그때의 ‘時垢’였다.
때를 왜 밀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오히려 때가 더 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있다. 나는 한글 아호로 ‘글때’를 쓰려 한다. ‘글을 읽거나 글씨를 쓰는 일이 몸에 밴 것’이 글때다. 남의 글의 꼬리를 가볍게 탁 쳐서 기운생동(氣韻生動)하게 만드는 것, 이런 게 글때의 힘이다. 그러니 글때는 더 올라야 하고 더 몸에 붙어야 한다. 문지르거나 벗기려고 하면 안 되는 때다. 사실 이런 때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누구나 다 때가 있다고 하나보다.
내비게이션을 따르다 보니 차가 산으로 들어간다. 자연을 한 자락 슬쩍 걸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연 속에 있는 미술관이라 들었다. 그러나 이토록 깊은 산중일 줄이야. 씨억씨억 초록을 뿜는 숲 사이 언덕을 올라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예 산꼭대기이지 않은가. 기발하게도 산정(山亭) 미술관이다. 그래서 뮤지엄 산(山)? 그러나 ‘山’이 아니라 ‘SAN’이다. 공간(space), 예술(art), 자연(nature)을 합성한 약자다.
산정이라 사방에 보이느니 산이다. 세상을 분할한 하늘 절반, 산봉우리들 절반. 하늘과 산 사이에 뮤지엄이 슬쩍 끼어든 형국이다. 간신히 자연에 가담한 약세(弱勢)가 아니다. 부지는 넓고 건물은 우람해 훤칠하다. 우람하나 이물감이 없다. 건물의 태와 됨됨이에 뾰족하게 튀는 게 없어 자연과 불화 없이 조응한다. ‘건축의 철학자’로 불리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79)의 작품이다. 그는 자연과 건축, 그리고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본때 있게 구현하는 건축가로 유명하다.
이 뮤지엄의 설립자는 어떻게 산꼭대기에다 일을 벌일 발상을 했을까? 자연을 애호하는 못 말릴 취향과 세상의 추세를 읽는 시퍼런 촉이 아니고선 감행하기 어려운 역사(役事)다. 삼성가 이병철 회장의 장녀로 한솔그룹을 이끌었던 이인희 고문(2019년 작고)이 세웠다. 그는 열렬한 아트컬렉터. 평생 모은 소장품을 자연으로 끌어들여 건립한 산상 미술관으로 허를 찌르듯 관습을 흔들었다. 뮤지엄 산의 태동부터가 이렇게 전위적이다.
판석을 깐 진입로를 따라 ‘플라워 가든’으로 들어선다. 뮤지엄의 초입일 뿐이지만 완상할 게 많아 벌써 다른 세상이다. 패랭이꽃 군락과 하얀 자작나무들, 조각정원이 어울려 뮤지엄의 서장을 열어준다. 산정의 적막한 허공엔 흩날리는 꽃잎들. 피어나는 봄꽃들 지천이라 몸에 묻을 듯 농밀한 건 꽃향기. 길은 곧게 나아가다 휘어지거나 급하게 꺾인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콘크리트 담장이 보도의 흐름에 편승해 시야를 슬쩍 가려주거나 별안간 확 트이게 한다. 인위적으로 풍경의 변주를 꾀한 설치다. 정교한 의도에 따른 구성이다.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여실해 명쾌하지만, 보일 듯 말 듯, 보였다 안 보였다 변전하는 풍경은 삶을 은유한다. 노골적이어서 온전한 게 있던가. 보이면 있고 안 보이면 없는가. 높낮이와 커브의 각도를 세밀하게 재단해 조성한 담장의 효과로 풍경에 철학이 실린다. 이건 뮤지엄의 절정을 보러 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희? 애피타이저? 풍경을 요리하는 수완에 즐겁다.
시각적 충격에 걸음 멎어
이제 ‘워터 가든’이다. 뮤지엄 산의 예술적인 외부 공간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별한 곳이다. 여기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풍경이 존재한다. 산상 대지에 물을 가득 채워 꾸민 ‘물의 소국’(小國)이 있으니 말이다. 널따란 사각형 수조들에 담긴 물과 물빛으로 찬연한 공간이다. 갑작스런 물의 등장, 그 급속한 풍경의 변이라니. 시각적 충격에 걸음이 멎는다. 나는 지금, 물을 분할하며 본관으로 관입하는 보도 위에 서 있지만 수면을 밟고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보도와 수면이 수평을 이루어서다.
워터 가든의 물 경치에 흥취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수변 테라스엔 커피를 마시며 물과 산과 하늘을 바라보기에 적격인 벤치가 놓여 있다. 거기에 앉고 싶지만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다. 도시라는 욕망의 경기장을 벗어나 고요한 수변에서 차를 마시며 모처럼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의 행복이여! 행복이 아니라 고독이면 어떤가. 물가에선 ‘나’를 바라보기 좋다. 저 투명한 물빛처럼 나도 한때 순수했다고, 내 안에도 물이 있어 눈물도 많아 슬프다고, 저 무심한 수면에 물살을 일으키는 실바람은 어디로 가며 나는 흘러 어디로 가는가, 라고 요모조모 쓸모 있는 상념을 굴려볼 만한 물가이지 않은가. 그러라고 안도 다다오가 워터 가든을 설계했다.
그의 건축적 오브제는 물, 햇빛, 바람 등 자연의 질료들이다. 그의 정신적 테마는 관조(觀照) 혹은 명상이다. 자연을 불러들인 건축으로 사람의 오감과 내면을 일깨우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일컬어 노상 하는 말들의 요점이 그렇다. ‘뮤지엄 산’이 완성됐을 때 그는 “그저 조용한 상자 같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사람들 모두가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져,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도 썼다.
본관 복도로 들어서자 조명부터 침침해 구미에 맞다. 미술관들의 과한 조명에 나는 일쑤 김새더라. 인공조명은 안도 다다오의 자연주의에 위배된다. 가급적 자제! 그는 집요하게 자연의 빛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였다. 복도 벽면의 상부와 하부에 낸 창으로 빛이 들이치게 했다. 천장을 뻥 뚫어 빛과 함께 하늘을 수용한 전시실도 있다. 노출 콘크리트 벽과 기둥, 기하학적 선형, 번뜩이는 예각 구조물, 텅 빈 중정(中庭)…. 그의 건축적 키워드를 이루는 형태와 기법이 거대한 미술관의 세부에서 깨알처럼 구현돼 요동친다.
거장들의 작품 번갈아 전시
아이들은 천진해 이 웅장하고 복잡한 미술관에서 ‘비밀의 성’(城)을 본다. 상상을 펼쳐서다. 어른들은 압도될 테다. 상상을 잃어서다. 예술이 위대한 건 상상력의 거친 날개로 신과 맞먹으려 비상한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상상력 외에 자유정신의 높이, 자연을 읽는 섬려한 안목,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존중. 그런 게 안도 다다오의 건축세계를 가능케 했을 터인데, 햐, 그는 말하길 ‘창의적 체력’이야말로 개중에 관건이라 했다. 창의적 체력이란 건강한 몸뚱이의 에너지를 말한다. 79세 노인인 그는 오늘 아침에도 들입다 뛰었을 게 틀림없다. 흥미로운 유형의 인간이지 싶다. 그에겐 세상을 달관한 시늉이 없어 미덥다. ‘목숨을 건 강인한 도전 정신’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건축을 추구하는 리얼리즘과 적당한 금욕 추구도 멋있다. 뮤지엄 산의 건축미를 즐기기 위해선 안도 다다오의 이러한 성향들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뮤지엄의 많은 전시실 가운데 인기를 누리는 공간을 볼까? 페이퍼 갤러리. 이곳은 종이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는 국내 최초의 종이 전문 박물관이다. 종이 관련 국보와 보물, 진귀한 유물과 공예품을 전시한다. 약하디약한 게 종이이지만 강하디강한 게 또한 종이. 인류의 역사는 종이의 발명과 함께 진보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이기심으로 살고 종이는 이타심으로 존재한다. 아낌없이 나를 내주길 운명으로 삼은 종이이니 이미 득도했다. 페이퍼 갤러리에 머문 시간은 ‘종이부처’와 만난 추억을 안겨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종이 재료로 쓴 파피루스도 여기에 있다. 유리온실 안에서 억새와 비슷한 파피루스가 푸르게 자란다. 순전히 파피루스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는 관람객도 있다. 청조갤러리는 뮤지엄 산이 소장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이쾌대 등 거장들의 작품을 번갈아 상설 전시한다. 매년 두 차례 기획전도 열린다. 현재 ‘회화와 서사’ 전이 진행 중이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위해서는 특별히 독립공간을 마련했다. ‘백남준 홀’로 작품 ‘커뮤니케이션 타워’를 전시했다. 전깃줄을 뭉쳐 만든 타워 형태의 기반에 TV와 민속탈을 주렁주렁 매단 작품. 이게 뭔가? 현대와 전통의 통섭? 문명 굿판? 자화상? 어떻게 봐도 답일 게다. 엿장수 맘대로! 그냥 그렇게 내가 느끼는 대로 보고 즐기면 일단 그만이지 않을까. 현미경을 들이대고 종일 초파리의 겨드랑이 털 개수를 세는 곤충 학자처럼 골똘히 미술작품을 파고들 일 아니다. 궁리를 너무 하면 왜곡이 쉽고, 생각을 너무 조이면 좁아진다. 백남준이 금언을 설했다. “옷도 헐렁하고, 생각도 헐렁하고, 행동도 헐렁헐렁, 헐렁이가 일을 낸다구. 진짜 예술가는 헐렁이야!” 삶도 예술도 틀을 만들면 갇힌다는 얘기이겠다. 예술의 헐거운 정신을 보는 게 작품 감상법이라 들어도 무방하다. 백남준은 노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때 더듬더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뜻밖에도 쓸쓸한 것이었다. “신은 참 불공평해. 내가 왜 쓰러져야 하나?”
아주 특별한 두 곳
마침내 자문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마음이란 물결처럼 요동치기 쉬운 것. 이걸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뮤지엄 산에선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뮤지엄 내·외부 공간에 있는 미술작품 감상 자체가 명상적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명상 체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 두 곳이 있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빛의 예술가’로 세계에 알려진 작가다. 화가라면 당연히 ‘빛’과 무관할 수 없다. 빛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게 화가의 본분이니까. 그러나 제임스 터렐의 작업은 많이 다르다. 그는 빛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빛을 ‘사용해’ 작품을 만든다. 일정한 공간에 빛을 집어넣으면, 즉 빛과 공간이 조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오랜 실험 끝에 그는 놀랄 만한 ‘빛의 아트’를 정립했다.
터렐의 작품은 빛과 공간, 그리고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프로그램에 의해 세밀하게 조정된 자연광이나 인공광을 공간에 투입, 작품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 공간이라는 캔버스에 빛이라는 물감을 투사, 다양한 테마를 신비스럽게 풀어낸다. 터렐 전시관에서 관객은 네 가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가장 기이한(?) 작품은 간츠펠트(Ganzfeld, ‘완전한 영역’이라는 뜻)로 동굴 형태의 공간에 50여 종의 LED 빛을 순차적으로 살포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이 작업의 목적은 관객에게 착시를 경험하도록 하는 데 있다. 동굴 속에 들어간 관객은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와 환영에 즉각적으로 빠져들고 만다. 예컨대 공간 가득 짙은 안개가 끼고, 좁았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된다. 이 돌연한 환각에 관객은 신비감과 황홀감 또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작업 종료 뒤, 빛이 보여준 강렬한 환상의 의미를 자문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명상이다. 내가 빛을 보고 살았다, 하지만 빛이 보여준 게 참일까? 삶과 세상은 허상이지 않을까? 남에게 나는 허상으로 비치지 않을까? 이 일련의 의식 흐름을 통해 마침내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
명상관
지난해, 뮤지엄 산 개관 5주년 기념으로 개설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만든 돔 형태의 건물이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길게 이어지며 초승달 모양으로 뚫린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빛이 들이친다. 쉼 명상, 여유 명상, 싱잉볼 명상 등을 전문가가 도와준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입소문이 나 참가자가 많다. 안도 다다오는 다음처럼 명상관의 의도를 피력했다.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공간에서의 명상으로, 자연과 우주를 만나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과 마찬가지로 명상관을 이용하려면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한다.
‘논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가. 빈둥빈둥하는 것도 노는 것이지만 바쁘게 노는 건 방향이 있고 의미가 있는 놀이일 것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처럼 인간은 먹고살기 위한 일 외에는 놀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놀이에서 예술 활동이나 스포츠 활동이 생겼다는 사실을 보면 논다는 게 단순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혼자서 놀아도 그 방식은 각자 다를 수밖에 없다. 내 경우 직장이 없어 노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하는 거야 누구나 할 테고 그런 일을 빼고 나면 취미생활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을 노는 것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의 ‘집에서 혼자 놀기’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얼마 전 ‘힘들지만 즐거운 여름나기’라는 제목으로 전원생활의 빛과 어둠을 비교해 글을 썼다. 즐거운 것 중 하나로 매실주 담그는 얘기를 했는데 늦가을인 요즘, 애주가로서 그때 담근 매실주를 조금씩 마셔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열심히 골프를 치러 다녔다면 이런 맛을 즐기는 호사를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 친구가 은퇴 후 10년이 된 나이인데도 테니스를 열심히 치러 다닌다 해서 좀 부러웠다. 나는 젊은 시절 치다 이마를 다친 후 손에서 놨다. 하지만 코트 위의 검투사처럼 사각 틀 속에서 온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테니스의 매력은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친구는 체력은 문제없는데 같이 칠 파트너를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어찌할 것인가. 골프나 테니스에 대한 나의 희미한 갈망은 텔레비전 중계로 풀곤 한다.
재미 들린 작은 농사
스포츠도 에너지를 소모하는 운동이지만 꽃과 나무들을 돌보는 데도 에너지를 많이 쓴다. 꽃나무들은 사올 때처럼 예쁘게 가만 있지 않는다. 보기 흉하게 자라지 않도록 가꿔줘야 한다. 그냥 놔두면 야생의 숲처럼 돼버린다. 하루 작정하고 나가 일하면 겉옷 속옷 할 것 없이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린다. 일을 끝내고 샤워 후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면 그 즐거움이 스포츠 활동과 진배없다. 무언가를 생산했다는 보람까지 느끼면 쾌감이 더 오래간다.
꽃나무뿐만 아니라 40~50그루 규모의 블루베리 농사도 짓고 있다. 열매를 1년 내내 생으로 또는 가공해서 먹을 수 있어 좋다. 블루베리는 면역력 향상은 물론 건강에 좋은 식품으로 소문이 나 있는데 눈을 좋게 해주는 효능도 크다. 실제로 연전에 돋보기를 맞춰 뭘 읽을 때마다 써보니 영 거추장스러워서 아예 빼닫이에 넣어놓고 있었는데 블루베리 농사를 짓고부터는 지금까지 돋보기 찾을 일이 없다. 한번은 쓰고 다니는 근시 안경이 맞지 않아 안경점엘 갔는데 시력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현상 아닌가.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다.
7년 전 블루베리 2년생, 그 어린것을 심어놓고 밤낮으로 물 주며 돌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키가 2m를 넘는다. 커갈수록 일은 더 많다. 잡초 뽑고 오래된 가지 베어내고 더 이상 크지 않도록 긴 가지는 잘라주고, 누운 가지는 지지목을 대주기도 한다. 품종별로 익는 시기가 달라 열매 따기는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또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집어서 따야 한다. 수확 시기가 되면 우리 부부의 블루베리 열매 따기 걱정이 시작된다. 내가 “좀 덜 따고 놔두면 어때? 떨어져서 개미가 먹으면 안 될 일이 있나?”하며 늑장을 부리면, 아내는 “1년 내내 먹을 블루베리잼은 어떻게 만들죠? 그렇게 좋아하는 작은애한테는 뭘 보내주죠?” 한다. 블루베리 농사는 벌써 9년째에 접어들었다. 돈 생기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다. 가족들과 나누고 지인들에게도 한 번씩 맛보게 하려면 고생스러워도 해야 한다. 사는 게 그런 것 아닌가. 작은 농사를 지어도 이렇게 배우는 게 많다.
스포츠와 농사를 비교한다는 건 좀 웃기는 일이다. 그렇지만 여럿이 하는 스포츠에 비해 농사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집중을 하다 보면 나름대로 지혜도 는다.
명품 매실주 담그기
매실주 담그는 재미에도 푹 빠졌다. 애주가로서 담금 매실주를 조금씩 마시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은 매실로 주로 우메보시를 만들어 먹는데, 우리처럼 청매를 쓰는 게 아니라 다 익은 황매를 이용한다. 익은 열매는 나무 밑에 보자기를 낮게 매달아놓고 가지를 털면 잘 떨어진다. 우리 부부는 그런 준비까지 할 여유가 없어서 그냥 긴 대나무 장대로 털어낸 뒤 주워서 모으는 방식으로 수확을 한다. 그렇게 두어 시간 몰입해 작업을 하고 나면 만족감이 든다. 큰 플라스틱 용기에 쌓이는 굵고 누런 매실이 얼마나 듬직해보이던지. 수확 후에는 세척하고 말리는 데 하루를 다 써야 한다. 다음 날에는 큰 유리 용기에 담금용 소주를 붓고 매실주를 담근다. 매실을 저울에 재서 일정량을 쏟아 넣고 거기에 맞춰 소주를 부으면 된다. 자그마치 큰 용기 두개, 작은 용기 한 개. 세 용기에 채워놓고 나면 뿌듯하다. 이런 상태로 5년은 숙성해야 마실 만한 명품 매실주가 된다. 좋다. 5년을 기다려보자 하면서 작업을 마쳤다. 흐뭇한 마음으로.
독서와 음악 감상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지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항간의 말은 맞다. 알면서도 못하는 건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 또한 맞다. 학교 다닐 때 취미를 기록해 써낼 때가 있었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들은 쉽게 피아노, 바이올린, 축구, 노래하기 등을 써넣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독서, 음악 감상 같은 걸 취미라고 기록했다. 커가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별한 취미가 없으면 그때마다 독서 아니면 음악 감상이 등장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독서를 취미로 할 만큼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음악을 즐기는 사람도 흔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까지 음악을 좋아하는 걸 큰 다행으로 여긴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노래방을 찾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우리 생활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은 실로 엄청나다. 전국노래자랑, 복면가왕, 히든싱어, 나는 가수다,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케이팝스타, 위대한 탄생, 미스트롯, 미트터트롯 등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노래와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요즘 프로그램만 꼽아봐서 그 정도이지 노래와 함께하는 것들을 다 열거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클래식 듣기를 좋아해 지금도 집에 들어오면 일단 오디오나 텔레비전 음악 채널을 틀어놓는다. 이 글을 쓰면서도 음악을 듣고 있다. 고교 시절, 서울에 올라와 지내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선율을 듣게 됐고 푹 빠져버렸다. 그렇게 ‘대단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 나는 클래식 음악만 들려오면 귀를 기울이곤 했다. 좋은 오디오와 LP 음반을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어 종종 그 집에 가서 감상을 하거나 빌려와 들어보기도 하면서 음악 감상 취미를 길러왔다.
매혹적인 나만의 ‘소리’에 취하다
20여 년 전 비엔나에서 근무할 때 덴마크 산 뱅앤올룹슨(Bang&Olufsen, B&O)을 제법 비싸게 사서 듣고 다녔다. 그 후 여기저기 옮겨 다닐 때도 늘 잊지 않고 챙겼다. 지금도 제주 집에 놓고 수시로 음악을 듣는다. 나는 한 번씩 서울에 가면 교보문고에 들러 음악 시디를 아낌없이 사온다. 아내는 이 기기에 ‘남편 장난감 1호’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생일 때 선물로 받은 노트북, 소니 카메라는 2호쯤 될 것이다. 어쨌든 이 음향기기는 딱 한 번 고장이 나서 회로를 교체하는 등 수리를 한 적 있지만 아직까지 처음의 성능을 잃지 않고 있다. 무얼 더 바랄까.
내가 듣는 음악, 우리가 듣는 음악은 정말 다양하다. 나는 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고 각국의 대중음악을 다 좋아한다. 샹송, 팝송, 칸초네, 칸시온, 컨트리, 탱고, 파두 등등. 라디오 방송 중 클래식 다음으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KBS클래식FM의 ‘세상의 모든 음악’이다. 세상의 모든 음악 속에는 세상의 모든 삶이 녹아들어 있다. 감상하다 보면 그 사람들과 교류하는 느낌이다. 적어도 그런 감성으로 모든 음악을 듣고 즐기고 이해한다. 스페인 음악을 듣다 보면 ‘코라존(Corazon)’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번역하면 Heart, 즉 마음, 사랑, 애인이다. 노래를 듣다가 이 가사가 나오면 시공을 초월해 사랑에 빠진 남녀가 상상된다.
클래식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니 이렇다 저렇다 하기는 좀 그렇지만 고전음악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삶의 기본을 생각하게 해주는 느낌이 든다. 대중음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의 감정을 고양된 형태로 표현해주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많은 천재 작곡가들이 온 정열을 바쳐 만든 음악을, 최고의 기예를 뽐내는 천재 연주가들이 빚어내니, 그 소리는 바꿔 말하면 천상의 소리에 지상의 양식이요 품격인 것이다. 그러니 음악에 빠졌다는 건 엄청난 경험이자 행복이라 할 수 있다.
하우스 콘서트를 열다
아마추어일 뿐인 음악 애호가로서 크게 한 번 객기(客氣)를 부린 일이 있다. 부모님을 통해 알게 된 재영 바이올리니스트 줄리아 황이 한국에 요양차 한두 달 머무르는 기회에 남산 언저리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하우스 콘서트를 연 것이다. 런던에서 연주활동을 하는 그는 7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바이올린을 배웠고 9세 때 신동으로 등장한 젊은 음악가다. 고교 시절에는 공부를 너무 잘해 케임브리지대학교와 왕립음악원에서 입학 허가를 받고 전자를 선택했다. 1688년에 제작된 과르네리우스의 악기로 연주하는데 그 소리가 형용할 수 없이 좋았다. 그는 나흐트무지크(Nachtmusik)란 이름으로 그날 여섯 곡을 선사했다. 좁은 집이었지만 여남은 명이 참가해 나름 성황을 이뤘다. 처음 해본 하우스 콘서트치고 성공이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제주와 서울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어보고 싶다. 음악 애호가가 많을수록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클래식 음악의 본질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주 가는 이태원에 루체(LUCE)라는 시니어 아마추어 성악가 모임이 있어 이따금 그들의 연주를 듣는다. 모두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음악의 힘이다.
글 쓰면서 혼자 놀기
집에서 혼자 놀기 중 내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건 글쓰기다. 이젠 취미가 됐다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글을 써서 어디 기고를 하면 원고료도 나오니 돈 써가며 하는 취미가 아니라 시간도 잘 보내면서 돈도 생기는 취미다. 글 써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은 일이라서 어떨 때는 지겹다고 한다. 나는 다르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 정기 필진으로 참가하고 있는데 한 달에 한두 번꼴로 글을 쓴다. 주제와 형식이 자유롭다. 단, 원고료는 없어 일종의 재능 봉사라 할 수 있겠다.
글이라는 건 아무 때나 써지지 않는다. 글 한 편 쓰기 위해 평소에 늘 글감을 생각하면서 지낸다. 이게 또한 재미다. 이번 행사에 참여하면 어떤 글이 나올까, 그 공연은 어떤 글감이 될까, 저 활동을 하면 어떤 글로 이어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내니 심심치 않다. 글을 발표하면 주변 친구들과 지인, 동창, 각종 단체에도 보내는데 갖가지 독후감을 보고 듣는 재미도 있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자유를 느낀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쓰지는 않는다. 잘 쓰고 싶은 욕심에 나름의 원칙을 갖고 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은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한다. 첫째, 읽는 사람이 재미를 느껴야 한다. 둘째, 많은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나는 일로서든 취미로서든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겠지만 이 두 가지 기준에 충실할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한순간 한순간이 좋은 글을 만들기 위한 생각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도 잘 놀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규제로 건설경기 침체가 지속되지만 증권가에선 건설업종 투자에 대해 여전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올해 건설사들이 비교적 선방한 실적을 거둔 것을 고려하면 주가 하락 폭이 과도하다는 것. 오히려 낮아진 기대치를 활용하면 충분히 투자가치가 있다는 얘기다.
건설주는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 도입 영향과 부진한 해외 수주 등으로 지난 7월 초부터 가라앉았다. 하지만 한국 설계조달시공(EPC)기업의 해외 수주 파이프라인이 올해 말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집중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풍부한 입찰 파이프라인은 수주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통상 해외 수주는 통상 하반기에 집중되는 ‘상저하고’의 흐름일 보이지만 내년에는 ‘상고하저’의 흐름이 나타날 전망이다. 장문준 KB증권 연구원은 “내년 상반기까지 집중된 해외 수주 파이프라인뿐만 아니라 수주 확정 여부가 이연된 프로젝트도 여럿 존재한다”며 내년 해외 수주 측면에서 현대건설과 삼성엔지니어링에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고 제시했다.
◇기대되는 내년 해외 수주 ‘청신호’
현대건설은 내년 별도기준 7조8000억 원의 해외수주를 달성하면서 수주 증가세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건설은 강점을 지닌 업스트림(상류부) 분야의 입찰이 활발히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미 다수의 프로젝트 입찰을 끝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제한경쟁이 일반화된 이라크 시장 입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상황이다. 아울러 내년 상반기 중 카타르 North Field LNG PKG 1&2(회사분 80억 달러) 입찰이 마무리되는 만큼 내년에도 양호한 수주성과가 점쳐진다.
올해 다소 주춤했던 삼성엔지니어링의 해외 수주도 내년에 6조8000억 원으로 늘어 다시 수주잔고 성장을 이끌 전망이다.
삼성엔지니어링은 말레이시아 Methanol(10억 달러), 미국 PTTGC ECC(12억 달러), 멕시코 PEMEX 정유(35억 달러), 우즈벡 비료공장(8억 달러) 등 EPC 선행작업을 이미 수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다수 존재한다. 또 이집트 EPPC Portsaid PDH/PP(8억 달러), 이집트 Sidpec PDH/PP(15억 달러), 이라크 Zubair DGS(5억 달러) 등이 입찰을 이미 완료한 상태인 만큼 내년에는 큰 폭의 수주 증가가 예상된다.
특히 당분간 삼성엔지니어링의 차별적인 주가 퍼포먼스가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KTB투자증권에 따르면 12월 현재 중동 내 입찰안건은 현재삼성엔지니어링, 현대건설, GS건설, 대우건설, 대림산업 순으로 많다.
김선미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비중동지역까지 고려하면 입찰규모는 더 확대되겠지만 업체별 순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며 “이를 기반으로 내년 해외 수주 가이던스가 올해 실적 대비 높을 것으로 기대되는 곳은 삼성엔지니어링이 유일하다”고 분석했다.
한편 KB증권은 현대건설과 삼성엔지니어링을 업종 내 ‘최선호주’로 추천하고 각각 5만9000원, 2만3000원의 목표주가를 제시했다. KTB투자증권도 투자의견 ‘매수’와 각각 6만2000원, 2만4000원의 목표주가를 내놨다. 현대건설과 삼성엔지니어링 주가는 지난 16일 각각 4만3150원, 1만9500원으로 장을 마쳤다.
느닷없이 맥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좀 싱거운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군요. 술꾼치고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나 싶어서죠. 애주가 중에서도 위스키나 소주 같은 독주나 와인 등 다른 술은 좋아하면서 딱히 맥주는 즐기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술의 청탁을 그리 가리지 않는 저도 한때 맥주를 멀리했는데 해외에서는 와인에 빠져 있을 때 그랬고 국내에서는 맥주가 맛이 없을 때 그랬었죠.
조직문화의 일환으로 회식자리에서 폭탄주(밤 칵테일, 코리안 칵테일)나 소맥(소주 칵테일, 심플, 오로라, 레인보, 선라이즈 등등)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맥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맥주가 좋아서 마시는 것과는 다른 거죠. 맛나게 잘 만든 칵테일이라면 몰라도 소주 칵테일은 되도록 멀리합니다. 짧은 시간에 분위기를 올리는 장점은 있지만 술맛으로는 이 맛도 저 맛도 아니기 때문이죠.
무더위에 시달리는 여름철이나 운동 또는 일로 땀을 많이 흘린 후, 마실거리로 맥주만큼 당기는 술은 없을 거예요. 전통주인 막걸리도 좋지만 아무 때고 막걸리를 마시자고 할 수는 없죠. 빈대떡 등 부침류나, 도토리묵 같은 무침류, 그도 아니면 김치 몇 조각이라도 앞에 놓여 있어야 막걸리를 마실 기분이 납니다. 매콤하거나 걸쭉한 전통 먹거리와 어울리는 게 시큼털털한 막걸리가 아닐까요? 그렇다고 외래주인 맥주가 걸쭉한 안주나 한식차림에 맞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안주에 어떤 술이 ‘맞다’, ‘안 맞다’를 잘라서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선택할 안주가 많다면 술 먼저 정하고 안주를 고르는 것이 애주가들에게는 더 익숙하겠지요.
음식과의 어울림을 따지는 데는 와인이 맥주보다 훨씬 까다롭다고 하겠습니다. 술과 음식의 조화(매칭, matching)를 진지하게 따지는 프랑스인들이 그런 매칭(Vins et Mets)의 전통을 만들어왔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맥주 종류도 많고 브랜드도 많아 어떤 맥주에 어떤 안주가 어울린다는 설명이 더 많이 눈에 띕니다. 미식가나 애주가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만 고객의 눈을 끌기 위한 판매 전략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건 제가 아직 진정한 맥주 마니아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술과 안주의 매칭은 많이 마셔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 아닐까요(술꾼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리오!).
지금, 맥주전쟁이 한창입니다. 대형마트에 가보면 새로운 우리 맥주 브랜드에 온갖 수입 맥주들이 가세해 진열대가 현란할 정도입니다. 눈이 즐거울 소비자들에게 맥주의 매력을 한껏 높이는 동시에 맥주시장의 치열한 경쟁을 볼 수 있게도 해줍니다. 근래 ‘테라(Terra)’라는 국산 브랜드가 나와 엄청난 속도로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데 7월 기준으로 출시 3개월 만에 1억 병이 나갔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는 클라우드(Kloud)가 나와 한동안 맥주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기도 했지요. 이런 판에 수입 맥주들이 자유롭게 들어오고 있으니 가히 ‘맥주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라 하겠습니다.
다른 전쟁과 마찬가지로 맥주전쟁도 이따금 정치·외교의 바람을 타게 돼 있죠. 전장(戰場)을 들여다보면, 현해탄의 파고가 이처럼 높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지금의 맥주시장이 일깨워주고 있는 셈이지요. 수입 맥주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왔던 일본 맥주가 전달에 비해 45%나 떨어진 것입니다. 그새 맥주 강국 벨기에가 1위를 차지하고 미국 맥주가 2위를 가져갔다고 합니다. 아사히, 기린, 삿포로 등 일본 맥주 애호가들이 다른 브랜드로 옮겨갔다지만 열혈팬들은 여전히 27%의 점유율을 지켜주고 있다네요. 현해탄의 파고가 다시 낮아지면 옛 팬들이 되돌아올지는 아직 알 수가 없는 상황이죠. 맥주 브랜드의 다양한 입맛에 길들여지면 다시 바꾸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군요.
벨기에 맥주가 1위를 차지한 것은 라거(lager)와는 다른 에일(ale) 맥주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데도 그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맥주 기호가 바뀌고 있음을 의미하는 거죠. 에일을 주로 하는 수제맥주(craft beer)에 대한 기호도도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는데 점유율은 아직 전체 5조 원 시장의 1.3%에 불과하다지요. 연평균 40%의 그 상승세가 어디까지 갈지 궁금합니다. 오래전 영국에 체류할 때 펍(pub)에 가서 맥주 달라고 하면 그냥 에일을 가져왔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 캠퍼스에도 맥주 카운터 같은 게 있는데 머그나 파인트에 받아와 잔디에 비스듬히 누워서 즐겨 마시던 불그스름한 에일의 추억이 생생하네요. 그래서 지금도 에일 맥주를 더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수제맥주는 브루어리(brewery), 즉 양조장과 판매장이 한곳에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대형 양조장이 거느리는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도 늘고 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웬만한 큰 도시에는 길에 수제맥주 간판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니까요. 길에 나가서 수제맥주집이 안 보이면 큰 식당이나 골프클럽 같은 데로 들어가 신선한 생맥주(draft beer)를 시켜 마실 수도 있지요. 생맥주는 병이나 캔이 아닌 캐스크(cask)에서 직접 받아내므로 양조 과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사치(?)가 있지요. 게다가 “맥주는 글라스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Bier muss im Glas wachsen)”는 말도 있으니 기포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생맥주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세계 맥주시장이 워낙 커서 우리나라 맥주의 점유율을 따져본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빠르게 질이 향상되고 있다지만 대동강 맥주보다 못하다는 평을 듣던 우리 맥주를 생각하면 수출이 되기나 할까 싶군요. 그런데 실상은 그게 아니랍니다. 우리나라 맥주 수출은 2010년부터 소주를 제치고 주류 수출 1위를 지키고 있으며 지난해 처음으로 20만 톤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판매액에서도 1위를 차지한다는데 해외에서 우리나라 맥주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주로 향수에 젖은 동포들과 케이 컬처를 업고 늘어나는 한식당들이 아닐까 싶네요. 맥아(麥芽)나 홉(hop) 등 맥주 원재료에서 취약하긴 해도 머지않아 우리의 제조기술이 올라 훨씬 맛 좋은 맥주를 생산할 것으로 기대해야겠죠.
맥주는 거의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습니다. 기원전 2500여 년쯤 이집트 피라미드 공사 인부들이 맥주를 마시던 당시의 유적이 발견된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렇다고 이집트가 맥주 제조의 시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곡물이 비에 젖어 자연발효가 이루어지는 순간 맥주가 탄생했다고 본다면 농경시대에 들어 세계 곳곳에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소설을 통해 보면 중세 유럽에서는 물 대신 에일 맥주를 늘 비치해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일은 발효 온도가 높은 효모를 사용함으로써 윗부분[上面]에서 발효가 되도록 한 것이고 라거는 발효 온도가 낮은 효모를 사용해 아랫부분[下面]에서 발효가 되도록 한 차이가 있지요. 바로 그런 이유로 에일과 라거는 향미나 목넘김이 상당히 다르다 하겠습니다.
1561년에 독일 바이에른의 빌헬름 4세는 ‘맥주순수령(German Beer Purity Law, 麥酒純粹令)’을 공포했는데 맥주는 물, 홉, 보리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다른 원료가 들어간 맥주에는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바람에 밀맥주 제조는 면세 지역인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지요. 빌헬름 4세를 취향 면에서 맥주 정통파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법령으로 인해 독일이 유럽 내 맥주 제조의 주도권을 쥐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지금도 어떤 독일 맥주 브랜드는 이 영(令)에 따라 주조했음을 밝히고 있죠).
독일과 경쟁이 될 만한 체코의 맥주가 뜨기 시작한 것은, 1842년 플젠(Plzen)에서 제조된 황금색의 필스너 라거가 나오면서입니다. 당시 새로이 등장한 투명 유리잔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시장을 휩쓸다가 독일로 역수출된 것이 필스너인데 대표 브랜드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은 원조 필스너란 뜻으로 체코의 자존심을 지키는 한 축이죠. 맥주의 본방을 독일로 치더라도 맥주 강국이 의외로 체코라는 사실이 흥미롭군요. 체코의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은 143ℓ로 24년째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고 하네요. 체코 다음은 오스트리아(106ℓ), 독일(104.2ℓ), 미국(74.8ℓ)의 순이고요.
스텔라 아르투아, 벨기에産
맥주에 대한 취향은 계속 변하는 걸까요? 사람마다 기본적인 취향이 있다고 해도 여러 가지 브랜드를 접하다 보면 기왕의 취향과 다른 맥주들을 찾게 되지요. 언젠가 브뤼셀에 들렀을 때 미술관 옆 큰 광장에서 친구와 함께 마시던 스텔라 아르투아(Stella Artois) 생맥주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 양조장이 1366년에 세워졌다 하니 연도만으로도 애호가들의 갈망을 채워주기에 족하다고 하겠죠.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스텔라 아르투아를 멀리할 수 없답니다. 10여 년 전 이탈리아 남부 포지타노(Positano)에서 옥빛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마시던 페로니(Peroni)의 완벽한 블론드 빛깔과 가뿐한 그 맛에 매혹되어 요즘도 이태원의 유명 피자집에 가면 찾아서 마신답니다. 마드리드에서 관광객이 몰리는 어느 광장에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맥줏집(Cervezaria)이 있는데 굳이 그 집을 찾아 헤밍웨이가 와서 앉곤 했다는, 창가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에스트레야(Estrella) 생맥주를 주문해 마셔보기도 했죠.
에스트레야, 스페인 바르셀로나産
지금까지 유럽 맥주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유럽 밖의 맥주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수입량 2위를 자랑하는 미국산 맥주 브랜드도 다양합니다. 버드와이저를 비롯해 밀러, 쿠어스 등. 미국 하면 무엇보다 야구장에서 맥주를 마시는 풍경이 떠오르죠. 오래전 뉴욕의 시(Shea) 스타디움에서 메츠와 양키스 게임을 보러 갔을 때 남들 하는 대로 종이컵에 든 버드와이저 생맥주를 사 마셨는데 솔직히 맛있다는 인상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후 미국 맥주 하면 도매금으로 ‘별로’라는 판정을 내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르는 광고 노래가 좋아서 한동안 미켈롭(Michelob)이란 브랜드를 즐겨 마신 적도 있습니다. 100만 달러짜리 목소리를 타고 멋진 블론드의 여인이 춤추듯 걸어가는 장면이라 아마도 거기에 정신을 빼앗겼던 것 같기도 합니다.
라거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보리와 홉의 사용량을 줄이고 옥수수나 쌀 등을 섞어 단가를 낮추면서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간 것도 미국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겠죠. 저는 맥주의 ‘아메리칸 스탠다드’는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지만 위스키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보리가 아닌 다른 재료들을 써서 버본이나 테네시 위스키 등으로 변화를 이뤄낸 것은 매우 긍정적인 발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국 중의 대국인 중국의 칭따오(Tsingtao, 청도) 맥주를 잠시 언급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불공정한 일이겠죠. 사실 중국 식당에서는 칭따오 외에 다른 맥주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죠. 칭따오가 언제부터 유명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이나 영국의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 요릿집에서 드러나게 눈에 띄는 맥주가 칭따오 아니겠습니까. 칭따오 맥주는 세계 어느 곳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중화요리에 얹혀서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칭따오 맥주는 19세기 말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 산둥반도에서 독일 기술자들이 맥주공장을 지어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높은 기술 전승 혜택으로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누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맥주 원료는 물, 맥아, 홉 그리고 효모인데 무엇보다 우선 물이 좋아야 좋은 맥주가 나오겠지요. 아무리 물이 좋아도 좋은 맥아가 없고 좋은 홉이 나지 않는다면 훌륭한 맥주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홉은 덩굴식물의 꽃인데 종류에 따라 레몬이나 포도, 솔잎, 재스민 같은 다양한 아로마를 가미해주죠. 말하자면 맥주의 향신료라고 할 수 있는데 홉이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좋은 물은 정제해서 만들 수도 있다지만 좋은 맥아나 홉은 수입해 와야 합니다. 그러니 제조 원가가 비쌀 수밖에 없는데 원가절감을 하다 보면 맛 좋은 맥주를 생산하기 어렵다는 사정은 이해할 만하죠. 아무튼 우리 스스로 근사한 맥주를 만들 때까지 다양한 수입 맥주가 들어와 맥주 애호가들의 입맛을 채워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요.
정달호 전 이집트 대사관 대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 대사를 지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저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다. 현재 제주도 국제교류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라산 자락의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는 등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
후배들에게 넓은 길을 터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인생 전반부의 정열을 바쳤던 첫 직장과 후회 없는 이별이었다. 인생 전반전을 마치고 시니어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던 찰나. 이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역전의 용사는 다시금 회사로부터 부름을 받고야 말았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다른 곳으로의 항해 대신 회귀를 선택한 최찬식(59) 씨를 만났다.
“정년 3년을 남겨두고 명예퇴직했습니다. 조건도 상당히 괜찮았어요. 그땐 기분 좋았죠. 얽매이는 생활 안 해도 되니까요. 인문학 강의도 듣고 요가와 요리도 배우고 알차게 살았습니다. 바빴죠. 사회적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지엠 부평공장 옆 카페에서 만난 최찬식(59) 씨는 지난 5월 마침표를 찍었던 옛 일터로 다시 돌아왔다. 명예퇴직하고 또다시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직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흔하지 않다. 1986년, 한국지엠의 전신인 대우그룹에 입사한 최찬식 씨는 대구에 있던 대우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을 시작해 1990년 말 대우국민차 공장이 있던 창원으로 사간전보를 갔다. 1996년 4월 부평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해외 자동차 공장 건설사업 분야에서 일했다.
“인도, 이란, 이집트, 베트남, 태국 등 세계 각 나라에 자동차 공장을 많이 지었어요.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를 다 만들어야 했어요. 그 차들을 생산할 수 있는 있는 설비를 현지에 가서 설치해야 했어요. 1998년까지는 참 좋았죠.”
1990년대 후반 대우자동차의 인기는 꽤 높았다. 부동의 1위였던 현대자동차의 아성을 대우차가 흔들었다. 이렇듯 대우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지으며 사업의 규모를 키웠다. 이쯤 되면 나오는 얘기가 바로 IMF 금융경제위기. 해외 사업을 통 크게 벌였던 대우그룹은 계열사 전체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우그룹의 몰락 중에서 자동차 사업의 인수 합병은 국가적 충격이었다.
“그때 인생이 조금 힘들었어요. 월급이 3개월 정도 안 나오기도 했습니다. 지엠(General Motors) 사가 대우자동차를 흡수하면서부터 월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엠 공장에 자동차 설비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어요. 해외 현지에 나가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자동차 양산할 때까지 관리했습니다.”
자동차 양산 시점이 되면 철수하고 또 다른 나라로 향했다. 2010년까지 해외 지사에서 일한 이후 팀의 수장으로서 한국에서 해외 사업을 지원했다.
“물론 중요한 시점에는 공장을 짓고 있는 현지로 날아갔죠. 외국은 20~30군데 다녀온 것 같아요. 작년 3월 부장까지 달고 회사생활을 마쳤어요. 끝낼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인으로 1년 살기
회사를 관두고 한 달 남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좀 쉬었는지 몸이 근질거려 작년 5월부터 듣고 싶었던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휴식을 하겠다며 회사를 박차고 나왔는데 생각지도 않게 수료증이 쌓였다.
“5월부터 바삐 지냈습니다. 수료증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닌데 연속으로 듣는 것도 있지만 두세 번만 들어도 수료증을 주는 데가 있다 보니 스무 개나 되더라고요. 중국어 공부도 하고, 재테크 관련 수업도 들었습니다.”
한국지엠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잠깐 사회적기업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지혜의 밭’이라는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한 달 정도 기획과 관리를 도맡아 일했다. 설립한 지 1~2년 된 기업이었고 공연 예술 쪽 일을 하는 사업체였다.
“제 입장에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공장에만 있던 사람이었고 대표는 예술만 아는 분이었죠. 회사를 이끌어가는 기본이 안 되어 있었어요. 제가 한글이나 파워포인트 같은 팁을 조금만 줘도 무척 감사해하더라고요.”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면서 안타까운 현실을 느꼈다고. 대표와 최찬식 씨가 맨땅에 헤딩하듯 일을 하고 열정을 쏟아 부어도 끝이 없었다. 회사에 3~4명만 있어도 상황은 좀 나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 ‘이게 뭐지? 지금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업의 수익 모델이 좋아서 성장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주말에도 일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측면에서 고민이 좀 있었습니다.”
퇴역 베테랑에게 날아온 SOS
사회적기업에 대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 때 한국지엠에서 연락이 왔다. 공장건설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해 달라는 전 직장 상사의 부름이었다. 함께 일할 조직은 이미 구성돼 있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이렇게 또다시 회사에 들어와도 될까 싶더군요. 회사 측에서는 그런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들어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기존 기업에 대한 의리가 있잖아요. 다시 회사로 돌아갔더니 먼저 온 사람 몇몇이 있었어요.”
한국지엠 입장에서 봤을 때 인재를 육성해야 하는 시간과 물리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신규채용보다는 기존에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 쉬는 사람 혹은 다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게 이득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직장 상사는 제가 퇴직하는 것을 말렸습니다. 저는 후배들의 성장을 위해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일을 잘했다고 말하면 너무 건방진 것 같습니다. 회사를 나가기 전에 관계가 좋았고 일도 깔끔하게 처리했으니까 저를 불렀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있었다면 부르지 않았겠죠. 회사가 시대의 풍파 속에 쓸리고 깎이기는 했지만 32년을 한결같이 다닌 오랜 일터였습니다.”
스스로도 인복은 타고 났다고 생각한단다. 어딘가로 움직일 때마다 항상 은인을 만났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팀워크가 좋았고 헤어질 때도 인상 찌푸리는 일은 없었다.
아빠는 워커홀릭! 좀 쉬셔요
“명예퇴직을 결심했을 때 조건이 좋았긴 했지만,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30년 이상 하니 쉬고 싶었습니다. 또 들어올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내의 불만도 제가 너무 쉬지 않고 일하는 거예요. 그래요. 워커홀릭(일 중독자)이 맞는 거 같아요.(웃음)”
최찬식 씨가 일을 끊임없이 하는 것에 대해 제일 반대하는 사람은 딸이다.
“쉬려고 나왔는데 왜 계속 일을 하느냐고 그러더군요. 사회적기업에 다닐 때도 출근시간만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족히 걸렸어요. 딸이 일 그만두라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현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서, 언젠가는 사회적기업에서 제대로 일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제가 직장생활에서 했던 경험을 조금이라도 알려주면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도와주면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쉬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너무 달려만 온 것 같다고.
“이런 얘기하면 우리 딸이 뭐라고 하냐면 ‘아빠는 못 쉬어, 두세 달 쉬면 또 뭔가를 할걸!’ 하고 말합니다.”
야심차게 은퇴했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제2인생을 시작한 최찬식 씨. 시니어 전문가로서 다시 돌아간 새(?) 직장에서 또 다른 가능성과 멋진 삶을 찾아가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