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때는 있다

기사입력 2020-06-03 09:00 기사수정 2020-06-03 10:18

[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누구나 다 때가 있다. 누구나 기회가 있으니 좌절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누구나 몸에 때가 있다는 말이다. 때가 되면 때가 낀다. 때가 쌓이면 때가 붙는다. 때가 오래 지나면 때가 붓는다. 때가 길면 때가 두껍다. 누구나 다 때가 있다!

앞의 때는 時(때 시), 즉 시간이고, 뒤의 때는 垢(때 구), ‘피부의 분비물과 먼지 따위가 섞여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時垢(시구)라는 말도 있을 법하다. 이슈가 되는 한 시대의 폐해나 고질, 해결해야 할 시대의 적폐,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사람들, 그런 의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말은 없다.

▲수건을 비롯한 때밀이 상품(사진 임철순 언론인)
▲수건을 비롯한 때밀이 상품(사진 임철순 언론인)

시대의 폐해야 반드시 해소해야 하지만 때는 왜 밀어야 하지? 그냥 더러우니까? 밀면 시원해서? 몸무게 줄이려고? 노느니 이 잡는 기분으로(이가 뭔지 모르는 세대는 이해 불가능!)? 가족이나 친지간의 발가벗은 우애나 정을 돈독히 하기 위해? 나는 잘 모르겠다. 속 시원히 설명해주는 자료를 못 찾았다.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제대로 목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동네 대중탕은 거의 다 없어진 지 오래인데, 헬스클럽도 영업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아예 욕탕이 없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샤워야 집에서 할 수 있지만 탕에 들어앉아 쉬거나 때를 밀기가 어렵다. 강남에 사는 어떤 사람이 목간한 지 오래됐다고 하기에 “우리 동네까지 발가벗고 걸어오셔. 사우나 표 드릴 팅게”라고 약 올린 적이 있다.

정말 다행스럽게 우리 동네 스포츠센터는 욕조가 크고 운동시설이 다양하다. 이곳도 정부 시책에 따라 문 닫은 적은 있다. 2주 만엔가 재개장했을 때 반갑고 고마웠다. 아내의 권고에 따라 ‘재입욕 기념’으로 실로 오랜만에 때를 밀었는데, 가락국수 같은 것들(윽, 더러워!)이 물 내려가는 걸 막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그러나 내 때만으로 그리 된 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날 시원하긴 했지만 때를 왜 밀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더라. 목욕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은 원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정도일 뿐 때를 미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 것도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때밀이 관광을 오는 건 이국적인 흥취, 돈 뿌리고 한국인들 부려먹는 쾌감 그런 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때를 왜 밀까 궁금해 하다가 서울 어느 지역 맘 카페에서 ‘감명 깊은’ 글을 읽었다. 아이가 있는 엄마, 임신 중인 엄마들이 회원인 그 카페에 오른 글의 제목은 ‘때 안 밀고 살 수 있는 방법 없나요?(제목부터 더러워서 죄송)’였다. 대충 인용한다. “매주 때를 밀어야 살 수 있는데 정말 할 일이 많아서 때까지 밀 시간이 없음. 바르고 샤워하면 때 안 밀어도 되는 제품 없을까? 샤워하면서 슬쩍 문지르면 되는 거. 왜 요즘같이 좋은 세상에 그런 게 없을까? 내 길지도 않은 인생, 때 미는 시간과 노력을 다른 일에 좀 써보고 싶다.”

그러자 다른 엄마들이 무슨 때밀이 요술장갑, 이집트 수세미, 비누 묻혀 닦으면 끝나는 오션 타월을 추천하고, 바디크림 쓰면 견딜 만하다, 매일 샤워하면 된다, 목욕탕 안 간 지 20년도 넘는데 전엔 며칠 안 가도 하얗게 피부가 일어나더니 지금은 샤워만 해도 아무 문제없다, 우리 아이들 태어나서 한 번도 때 안 밀었다, 때 안 민 지 20년 됐는데 지금은 몸 불려도 때 안 나오고 벌겋게만 된다 등등 백가쟁명 갑론을박 찬반양론 설왕설래가 아주 볼 만했다.

사실 글을 올린 엄마는 때를 안 밀겠다는 게 아니라 때 미는 수고를 덜고 싶다는 취지였다. 나는 그와 달리 때를 왜 미느냐는 원초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천자문’에 骸垢想浴 執熱願凉(해구상욕 집열원량)이라는 말이 있다. “몸에 때가 있으면 목욕 생각나고, 뜨거운 걸 쥐면 서늘한 걸 원하게 된다”는 뜻이다. 더러운 걸 싫어하고 깨끗하기를 바라는 심정은 누구나 같다.

동양의 에티켓 교범 ‘예기(禮記)’ 내칙(內則)에는 부모를 모시면서 “닷새가 지나면 물을 데워놓고 몸을 씻기를 청하고 사흘이 지나면 머리 감을 물을 마련하되, 그 사이 얼굴에 때가 끼었으면 쌀뜨물을 끓여 세수하기를 청하고 발에 때가 끼었으면 물을 데워 씻기를 청하라”(五日則燂湯請浴 三日具沐 其間而垢 燂潘請靧 足垢 燂湯請洗)고 나와 있다.

그러니까 목욕은 사실 매일 하지 않고 닷새 걸러 해도 무방하다. 얼굴과 발만 간간이 잘 씻고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면 된다. 이와 달리 마음의 때, 이른바 심구(心垢), 바꿔 말해 번뇌는 매일 벗기고 씻어내야 한다. 이에 관한 어떤 불자들의 문답. “마음의 때가 벗겨지면 목욕할 때 몸의 때도 더 많이 나올까요?”, “마음이 맑아지면 혈관 속 피도 맑아지고 독소물질 노폐물 같은 탁기(濁氣) 생성 물질이 피부로 배출되기 때문에 각질이나 때가 되어서 조금이라도 더 나올 겁니다.”, “아, 기대되네요. 상상만 해도 개운한 느낌!” 정말 그럴까? 재미있는 말이지만 믿어야 될지 잘 모르겠다.

때 이야기를 하다 보면 1984년 6월 17일자 한국일보 사회면 톱 ‘선데이 스토리’가 생각난다. 열일곱 살에 때밀이를 시작해 15년 만에 1억 원을 번 사람의 성공담이다. 입사 3년 차 기자의 기사를 부장(오인환, 나중에 공보처장관) 지시로 내가 중간 데스크를 보아 넘겼는데, 끝 부분이 확 달라져 있었다. 그의 성공과 성실에 초점을 맞춘 마지막 문장을 부장이 “젊은이들이여 자기 때는 자기가 미는 게 어떤가”로 바꾼 것이다. 때밀이의 성공이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부각시킨 걸 보고 ‘기사란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하고 배웠다. 퇴폐 이발소, 터키탕 등 향락산업이 큰 사회 이슈일 때였다. 말하자면 그게 그때의 ‘時垢’였다.

때를 왜 밀어야 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오히려 때가 더 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게 있다. 나는 한글 아호로 ‘글때’를 쓰려 한다. ‘글을 읽거나 글씨를 쓰는 일이 몸에 밴 것’이 글때다. 남의 글의 꼬리를 가볍게 탁 쳐서 기운생동(氣韻生動)하게 만드는 것, 이런 게 글때의 힘이다. 그러니 글때는 더 올라야 하고 더 몸에 붙어야 한다. 문지르거나 벗기려고 하면 안 되는 때다. 사실 이런 때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래서 누구나 다 때가 있다고 하나보다.

▲1984년 6월 17일자 한국일보   (제공 임철순 언론인)
▲1984년 6월 17일자 한국일보 (제공 임철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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