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소원해지는 인간관계에 실망하는 이가 적지 않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안부도 주고받고 종종 식사도 했던 사이인데, 회사를 나오니 연락도 만남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누군가는 ‘내가 명함이 없다고 얕보나’, ‘내가 돈을 안 번다고 무시하나’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자. 혹시 ‘내가’ 스스로에게 그런 편견을 갖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만약 그렇다면 주변은 잠시 제쳐두고 나와의 관계부터 돌아봐야 할 때다.
퇴직 이후의 삶이 길어지며, 노후 대인관계가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다만 원활하고 지속적인 관계 형성을 위해서는 자신과의 관계를 다지는 것이 우선이다. ‘나는 매일 은퇴를 꿈꾼다’, ‘은퇴의 말’, ‘은퇴의 맛’ 등의 저서를 펴내며 수많은 베이비붐 세대 은퇴자들을 만나온 한혜경 전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은퇴 후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는 자신과의 관계에 달렸다”고 언급했다. 그는 “직장 생활로 생겨난 공적 관계망은 보통 퇴직 후 6개월 이내 소멸된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명성을 얻은 분일수록 이러한 변화에 취약하다. ‘그동안 나를 잘 따랐던 부하 직원들이 연락하겠지’ 같은 기대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어 “기대가 클수록 실망이 크고, 실망이 쌓이면 절망하게 된다. 점점 위축되고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작은 일에도 버럭 하고 화를 내는 등 이른바 ‘앵그리 올드’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 모습을 보이면 주변에서는 회피하고 멀리하게 마련인데, 결국 대인관계가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들 좋아할까
한혜경 교수의 경험에 의하면 은퇴 후 화가 많아지고 이를 표출하는 중장년이 적지 않다고. 겉으로는 타인을 향해 화를 내는 것 같지만, 이는 결국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과 같단다. 스스로에게 답답하고 불만스러운 심정을 그러한 방식으로 토로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과의 관계가 평온하고 긍정적인 이들은 타인과의 관계 또한 순조로운 편이다. 한 교수는 “최근 뇌과학 분야 연구 중에 흥미로운 결과가 있었다. 나에 대한 정보처리와 타인에 대한 정보처리가 동일한 뇌 신경망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나를 좋게 보는 사람이 남도 좋게 보고, 나를 존중하는 사람이 남도 존중한다는 얘기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좋아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와의 관계, 자기 내면과의 소통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이 곧 타인과의 관계에도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나와의 관계가 편안하고 능숙한 사람들은 웬만한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회복탄력성 또한 높다. 반대로 자신에게 불만이 많고 소통이 어려운 이들은 사소한 일도 크게 힘들어하고, 회복에 어려움을 호소한다. 한 교수는 “살다 보면 유난히 사람들이 미워지거나 괜히 무시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땐 혹시 내가 나를 미워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봐야 한다. 마치 거울처럼 누군가에게 갖는 나의 마음이 알고 보면 나를 향한 마음은 아닐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인정중독에서 벗어나 ‘셀프 칭찬’ 필요해
경쟁과 성취를 강조해온 한국 사회에서 현재의 중장년 세대는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다. 어떤 이들은 타인에게 인정받아야 잘 사는 삶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가령 어느 대학과 직장을 다닐지, 얼마만큼의 집을 사고 무슨 차를 타야 할지 등 자신보다 타인의 인정이나 평가를 따르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한혜경 교수는 “이러한 삶이 계속되다 보면 인정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거부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타인 때문에 상처받으며 그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았을 때만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라며 “30~40대에는 타인의 관심과 인정이 성장의 디딤돌이 되기도 하지만, 50대 이후까지 이에 얽매이는 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와의 관계를 더 행복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주파수에 나를 맞추지 말아야 한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엔 차이가 존재한다. 그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나아가 잘난 척, 괜찮은 척이 아닌 솔직한 나를 드러낼 수 있을 때 개인적으로도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한편으로는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면서도 실제 자신을 향한 칭찬에는 의구심을 갖거나 거부감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엄격하고, 스스로의 능력과 장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반응이다. 한 교수는 자신의 좋은 점과 강점 등을 발견하는 과정이 매우 가치 있기에, 때때로 스스로를 칭찬해보는 시간도 마련해보길 권했다.
나를 위한 삶, 건강한 자기중심성 갖기
은퇴 후 또는 자녀 출가 후에도 끊임없는 희생을 감수하는 부모들이 있다. 가령 노후자금이 부족한데도 자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준다거나, 몸이 아프고 힘든데도 손주 육아를 돕는 등 자신보다는 자녀를 중심으로 노후를 살아가는 것이다. 타인 중에서도 자녀가 주는 기쁨이 상당하지만, 결국 자녀와의 관계에서도 지속적인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자녀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 정작 자신의 인생을 누리지 못하고, 나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한다면 행복한 노후를 가꿔가기 어렵다.
한혜경 교수는 “초고령사회, 수명은 길어지고 1인 노인 가구가 증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어떻게 혼자 잘 살 수 있을까’, ‘누가 끝까지 나를 돌봐줄까’, ‘누가 내게 삶의 기쁨이 남아 있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꼭 해봐야 한다. 경제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독립돼야만 자신을 스스로 돌보며 잘 지낼 수 있고, 자신을 잘 돌볼 수 있어야 자식이나 가족을 포함한 타인과도 건강한 관계를 오래오래 유지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결국 나를 위하고 사랑해줄 사람, 내게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할 사람은 곧 나 자신이다. 스스로를 위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인본주의 심리학자로 유명한 로저스(C. Rogers)는 말년에 나이가 들수록 자신을 더 많이 돌보게 됐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나는 나를 좋아한다. 나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보았고,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삶을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내가 매우 아프지만 내 삶을 사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한 교수는 “로저스의 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결국 나이 들수록 ‘건강한 자기중심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건강한 자기중심성은 본인의 가치와 독특성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태도다. 스스로를 홀대하고 혹사하는 건 짧고 굵게 살던 시대의 논리다. 100세 넘게 사는 요즘 시대에 필요한 건 자기중심적인 삶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스스로의 고유한 가치와 개성을 존중하고 사랑할 때, 타인도 나를 그렇게 존중하고 사랑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의 역사 쓰기’로 회복하는 나와의 관계
교수 은퇴 후 현장에서 중장년을 대상으로 ‘나의 역사 쓰기’를 운영하고 있는 한혜경 교수는 글쓰기를 통해 과거의 자신과 화해하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나의 역사를 쓴다고 해서 유명인이 자서전을 내듯 거창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글쓰기가 어렵다면 나의 삶을 한 권의 책이라 여기고 목차를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은퇴 후에는 대인관계를 비롯해 여러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내 인생의 해답 또한 내 안에 있는 법. 찬찬히 과거의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스스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발견하게 된다.
한 교수는 “나의 역사 쓰기란 내가 나에게 나에 대해서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다. 현역 시절 이력서에 보기 좋게 썼던 나의 모습과 달리,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적어보는 것이다. 퇴직 이후 인생 2막 또는 3막을 준비하려면 과거와 현재의 나를 잘 이해해야 한다. 나를 헤아리는 과정 속에서 자신과의 갈등 고리를 풀어내기도 하고, 과거의 나와 화해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나의 역사 쓰기도 너무 말년에 했다가는, 과오를 발견하고도 ‘이제 와서 달라질까’, ‘너무 늦었구나’라며 개선할 시간이 없다고 여겨 절망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나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나의 역사를 꼭 한번 써보시길 바란다”고 권했다.
도움말 한혜경 전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기꺼이 오십, 나를 다시 배워야 할 시간' 저 , '나의 역사 쓰기' 운영)
어쩌면 누군가는 ‘복길이’ 이미지에 가둬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그 이미지를 벗기 위해 김지영은 부단히 노력했다. 어느덧 데뷔 30년 차 배우가 됐는데, 이제는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또한 연기학과 교수로서 후배들을 이끌고 있으며, 삶을 관망하는 여유도 생겼다. 유명인과 일반 대중의 관계는 ‘인기’로 증명되는 터. 그는 “인기란 야속한 것 같다.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하다”면서 양면성을 언급했다. 현재는 큰 인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들한테 인기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희귀병을 앓아 부모님 속을 썩였다고 생각하는 딸이기에 자식을 향한 애정이 더욱 특별하다.
‘전원일기’와 가족의 탄생
MBC ‘전원일기’와 복길이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복길이 이미지 때문에 다른 역할을 못 맡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디션도 많이 보고, 사이코패스 악역, 유흥업계 인물 등 갖은 역할에 도전해봤던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는 복길이로 인해 지금의 제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죠. 나이 들고 보니 배우로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라도 있으면 성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마운 작품이죠. 그리고 좋은 선배님들과 호흡하면서 연기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전원일기’는 결국 저의 학교였다고 생각해요.
SBS ‘토마토’에서 악역 연기를 펼쳐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때가 전성기였을까요?
MBC에서 ‘그대 그리고 나’(1997년)로 신인상을 수상한 후라 자신감이 올라와 있었죠. 악역 제안이 들어왔을 때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겠단 생각에 출연했고, 촬영도 재밌게 했죠. 광고도 그때 제일 많이 찍었어요. 그렇다고 그때를 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매번 진심을 다해 연기해서 작품 할 때가 늘 전성기라고 느껴요.
남성진 씨와는 동료에서 남편이 된 케이스인데, 관계의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전원일기’를 8년간 촬영하면서 정말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냈죠. 이후 남편의 고백으로 사귀었는데 연애 기간은 불과 6개월이었어요. 그중 5개월은 제가 중국에서 촬영했죠. 연애다운 연애를 한 적이 없는데 바로 결혼하려니 조금 무섭고 도망가고 싶더라고요. 우정과 사랑을 구분 못 한 것이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사람, 내 가족이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느끼면서 사이가 깊어졌고, 고마워하고 있어요.
부부간 소통은 어떻게 하세요?
저희 부부는 성격이 극과 극이라서 지금도 종종 싸워요. 남편이 화가 많고, 버럭하는 스타일이에요. 불 같은 성격이죠. 그래서 말다툼으로 번지는데, 다행히도 저희 둘 다 금세 잊어 버리곤 해요.
어느 순간부터는 의견 차가 커도 남편한테 ‘고쳐줬으면 좋겠어’, ‘맞춰줘’ 등의 요구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남편의 말에는 짜증이 섞여 있지만, 내용은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요. 그래서 서로 이성적으로 대화가 될 때 의견을 나누고 조율하려고 해요. 특히 아이 문제로 대화할 때는 아이의 생각을 가장 먼저 수렴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정을 내리죠.
얘기를 나눠보니 아드님에 대한 사랑이 크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아이가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할 수 있는 엄마가 되는 게 제 꿈인 것 같아요. ‘그렇게 살면 네 삶이 너무 없지 않아?’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그게 제 삶이라고 생각해요. 일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아이 옆에 많이 있어 주려고 노력했어요. 평소에는 편지나 메모를 남겨서 마음을 표현했고, 촬영이 없는 날에는 즉흥적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죠. 그런데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같이 있는 시간이 줄었어요. 나중에 성인이 되고 여자 친구가 생기면 나와 놀아줄 시간이 있을까 싶어요.(웃음)
과거 방송에서 보니 아드님도 배우가 되고 싶어 하던데요. 3대 배우 가족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더니,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아요. 부모님, 조부모님한테 먹칠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더라고요. 그 부담감은 당연한 것 같아요. 저도 시부모님이 배우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남편은 평생 그 부담을 안고 살았죠. 우리 아이는 그 부담이 배로 커진 거잖아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연기가 정말 하고 싶으면 해라. 너의 색깔을 찾으면 된다’고 조언해주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인 배우 김용림 씨와의 고부 관계가 특히 주목받는데요.
굉장히 순탄한 고부 관계라고 생각해요. 같은 분야에 있으니까 잘 이해해주세요. 제가 종갓집 며느리인데 촬영 때문에 제사를 못 지낼 때도 있고, 촬영이 늦어져 새벽 5시에 집에 들어갈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 어머니께서 이해를 넘어 ‘얼마나 힘드니’라고 위로해주시죠. 그런데 여느 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길 때도 있어요. 어머니께서 섭섭했던 부분을 말씀하시면, 저도 속상한 점을 얘기하기도 하죠. 어느덧 어머니와 함께한 세월이 20년 이나 되다 보니,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어떠신지 알겠더라고요. 전화 목소리에 서운함이 묻어 있는 것 같으면, 바로 달려갑니다.(웃음)
삶과 인연을 소중하게
부모님에게는 어떤 딸이었나요?
어릴 때부터 희귀병으로 몸이 약했으니까 늘 집안의 걱정거리였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부모님의 사랑을 더 느낄 수 있었어요. 배우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께서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몸도 안 좋은 애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겠죠. 그런 마음을 아니까 창피하지 않은 자식이 되고 싶어서 더욱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아요. 사실 어느 순간, 너무 우리 애만 챙기느라 부모님에게 신경을 못 썼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후회가 남지 않게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합니다.
희귀병 투병으로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겠어요.
등에 혈관이 엉겨 붙는 혈종이 있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요. 가족들이 저를 살려보겠다고 별걸 다 해봤는데,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유서를 써놓기도 했어요. 말로 전하지 못한 얘기들을 남겨놓기도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생 때 수술 후 완치돼 지금까지 살 수 있었습니다. 다시 주어진 삶이 감사하고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어찌 보면 배우 활동이 체력이 강해진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제 50대가 되었는데, 중년 배우의 삶은 어떤가요?
20대 때는 작품을 한 번에 2~3개씩 하면서 바쁘게 보냈어요. 결혼 후인 30대, 40대 때 삶도 안정되고, 연기를 진심으로 생각하게 됐죠. 5년 전쯤부터 선배로서 안주하고 싶지 않고, 변화와 발전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출연하려고 했죠. 선배님 또는 감독님이 부르면 예술 영화도 카메오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제예술대학교 연기예술과 학과장을 맡은 지도 7년이 됐네요.
저는 선생님이라기보다 선배라고 생각해요. 먼저 연기한 사람으로서 습득한 기술을 알려주려고 하죠. 오히려 제가 열정을 수혈받고 있어요. 사실 연기 활동을 하면서, 아이도 돌보면서, 학교 일도 하는 게 체력적으로 힘들기는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학생들과의 연계성이라고 생각해요. 함께 성장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김지영에게 ‘관계’란 무엇일까요?
저는 소심하기도 하고, 관계에 예민한 편이에요. 지인들에게 마음 표현도 잘 못 했는데, 이제 용기 내서 먼저 다가가려고 해요. 모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죠. 그런데 중요한 건 관계의 주체가 자신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좋은 관계도 성립되고, 많은 상처를 받지 않을 테니까요. 또 너무 애쓰지 않아야 재밌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Bravo Question
나에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은?
감사한 마음 아닐까요. 저부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그 마음을 간과하느냐, 신경 쓰고 있냐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한데, 그 마음을 품고 지금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제가 그렇게 힘이 큰 사람도 아니고, 능력이 출중한 스타일도 아니에요. 그런 마음이 하나하나 쌓여서 저 자신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고, 제가 하고 싶은 일도 하나하나 이루어온 거죠.
중년이 되면 초조함에 휩싸일 때가 있다. 어영부영하다가 인생이 허무하게 지나가 버리면 어떡하나 싶다. 세상은 그 나이 먹도록 해놓은 게 얼마나 있냐고 다그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괴감에 빠져든다. 그래서일까? 딸이 당연히 알아서 잘살고 있으리라 여기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한성희 원장의 신간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는 그 걱정에서부터 시작됐다.
한성희 원장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 한 살 아기부터 85세 노인까지 마음이 아픈 사람이면 누구든 만났다. 그 과정에서 평생에 걸쳐 맞닥뜨릴 수 있는 여러 정신적 문제를 지켜보고 치료해왔다. 43년간 다양한 사례를 접한 그지만 자식에게는 서툰 엄마였다. 10여 년 전, 딸이 공부를 위해 떠난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한다 했을 때 깨달았다. 더 이상 품 안의 어린아이가 아님을, 이제는 독립할 만큼 자랐다는 사실을 말이다.
진료실을 찾은 환자들에겐 했지만 정작 딸에게는 하지 못한 말이 많았다. 그 마음을 담은 글은 2013년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로 세상에 나왔고, 독자들의 공감을 받으며 21만 부가 판매됐다.
“살면서 작가라고 불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요. 죽기 전에 책을 한번 내보면 좋겠다는 어렴풋한 생각은 있었지만요.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가 이렇게까지 좋은 반응을 얻으리라 상상도 못 했어요. 이제 아이가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고, 서로 떨어져 산 지 15년이 됐네요. 작년에 직접 마흔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 미국에 갔는데, 늘 앳돼 보였던 딸이 나름의 고민도 생긴 것 같고 지쳐 보였어요. 진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거죠.”
중간 지점, 또 한 번의 파도
한 원장도 서른일곱에 떠난 미국 연수 당시 이른 ‘중년의 위기’를 겪었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며 초조한 와중에 일은 홍수처럼 쏟아졌다.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혀도 경력이 쌓이는 만큼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야 했다. 자유로운 시기는 끝났다고 여기며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로 살았다.
딸의 얼굴에서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였다. 만약 마흔 살의 성장통을 겪고 있다면 엄마로서, 정신분석가로서 너무 늦기 전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신간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는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바람 잘 날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전하는 응원을 담았다.
“두 돌이 지나면 말이 시작돼야 하듯, 인생 단계별 발달 과업이 있어요. 40대는 생산성을 다뤄야 할 단계입니다. 삶의 스펙트럼이 폭발적으로 확대되고, 회사와 가정의 일을 모두 신경 써야 하는 시기거든요. 매일매일 전쟁일 거예요. 요즘 40대는 그 어느 세대보다 최선을 다해 버티고 있다고 느껴요. 노고를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고요. SNS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이미 부와 명예를 이룬 사람투성이죠. 그러다 보니 보통의 삶은 부족한 것이 돼버리고, 박탈감이 들 수 있어요. 게다가 오늘 열심히 한 그 일을 내일도 똑같이 반복해야 하는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온전한 ‘나’는 없다며 우울해질 때도 있을 겁니다.”
더불어 바쁜 일상에 지치면 뭐든 새롭지 않다. 벌써 해봤거나, 했던 것의 변주 정도다. 무엇을 먹어도 비슷한 맛이고, 누구를 만나도 비슷한 얘기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면서 지루하다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고, 옛날에 재미있었던 순간만 기억난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과 습관에 갇히게 된다. 다 해봐서 새로울 게 없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현재를 과거의 방식대로 살려고 하니 매사 심드렁해진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까닭이다.
딛고 나아가며 성장하기
마흔 이후 혼란을 겪더라도 한 원장은 “겁먹지 말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간은 유한하고 힘든 시절은 영원하지 않으며, 지나고 보면 가장 풍성한 때였구나 알게 된단다. 지금이야말로 세상의 기준에 맞춰오느라, 세상이 부여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느라 억눌러온 내면의 욕구를 돌아봐야 한다.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었던 모습을 찾다 보면 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게 되고, 어떤 시련이 오든 무너지지 않을 힘이 생길 테다. 남들이 뜯어말려도 강하게 끌리고 포기가 안 되는 길이 있다면 가보는 것도 방법이다. 나이가 몇이든 무슨 상관이랴. 처음엔 의아한 선택처럼 보여도 선택이 쌓이고 쌓여 고유한 스토리가 된다. 대신 방향을 완전히 틀어 새로운 도전을 하기보다, 인생의 여정에서 좀 더 집중할 만한 거리를 찾는 게 먼저다.
“그저 더 나아지고 싶은 건강한 본능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저는 환자 한명 한명을 심도 있게 치료하고 싶어 오십에 뒤늦은 개원을 준비했고, 지금까지 해왔던 정신분석 공부를 좀 더 깊이 있게 해보고자 예순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주변의 시선이 호의적이지 않았고 고민이 깊었지만, 시작도 해보지 않고 그만두기는 싫었어요. 의사로서 걸어온 길이 흔히 말하는 성공 공식과는 거리가 멀었죠. 그래도 자신의 느낌을 믿고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게 행복한 인생이지 않을까요. 스스로 완전한 어른이 됐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제야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구나 짐작해요.”
과거에는 나이가 곧 경험이고 지혜여서 ‘나이 든 사람’이 ‘어른’이었다. 5060세대가 ‘동네 어른’을 추억하는 이유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2024년 우리가 생각하는 어른의 기준은 무엇일까? 어떨 때 어른이 되었다 느낄까? 좋은 어른은 어떤 어른일까? 세 명의 전문가와 함께 이 시대의 어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대담 참여자 강용수 작가·백종화 리더십 코치·최영희 메타연구소 소장 진행 이연지·문혜진 기자
◇강용수 작가(56세,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교수)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한다. 최근 낸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백종화 리더십 코치(45세, 그로플 대표)
18년 직장생활 후 회사 그로플을 설립, 리더십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 대기업 CEO·임원·팀장 등의 리더십 코칭을 한다.
◇최영희 메타연구소 소장(67세,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건강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돕는 전문가다. 약물 치료를 선호하지 않아 인지행동·스키마·마음챙김 치료 등을 하고 있다.
진행자 본지에서 진행한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조사’(2024)에 따르면 ‘어른 하면 떠오르는 단어’로 ‘책임감 있는’이 꼽혔어요. 2014년 조사에서는 ‘윤리’가 중요한 키워드였는데, 2024년에는 ‘책임감’이 중요한 키워드로 떠오른 이유가 뭘까요?
강용수 책임이라는 말이 조금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니체는 타인을 책임져야 한다는 걸 기대기 위한 수단으로 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주권적 개인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어떤 공동체를 아우르는 책임이라기보다,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죠.
백종화 사람마다 책임감에 대한 정의가 다를 것 같아요. 저는 신뢰와 실력 두 가지를 갖춘 사람을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데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하고, 점점 어려운 일을 맡게 될 때 잘해내기 위해 전문성을 끊임없이 확보하는 게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영희 그러니까 책임이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결과를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는 거죠. 과거 결핍의 시대를 살았던 세대가 부모가 되어 내 자식에게 결핍을 물려주려 하지 않다 보니, 젊은 친구들은 의사결정할 일이 별로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부모가 깨워주고 옷 입혀주고 밥 먹여서 정해준 학원에 보내고, 집에 오면 이 닦고 잠자리에 드는 식이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언젠가 스스로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좋든 싫든 올 텐데, 해본 적이 없다 보니 굉장히 불안해하죠. 책임져야 한다는 건 알지만, 어렵고 두려울 수밖에요.
백종화 조직에서도 의사결정 경험이 중요해요. 리더들이 결정해왔기 때문에 결정하지 않은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데에 구성원들은 의문을 가지고, 반대로 리더는 구성원 자신의 일인데 왜 책임지지 않느냐며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게 되거든요.
진행자 일상에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경험을 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의미네요. 그래서인지 설문조사에서도 나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때,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책임질 수 있을 때 어른이 되었다고 보는 듯한 결과가 나왔어요.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는/느낄 것 같은 순간’을 물었을 때 2030은 ‘경제적으로 자립했을 때’를, 5060은 ‘일과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때’를 꼽았거든요.
최영희 나 혼자도 벅찬데 누구를 돌보겠어요. 하버드대학교에서 사회적 관계를 70년 넘게 연구한 것이 있는데요.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가 좋더랍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관계는 어떤 사람이 고통받는다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고,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나누는 관계를 의미하는데요. 개인주의와는 반대라고 볼 수 있죠. 시대에 따라 우리가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의 기본적인 기준, 뭐랄까 도덕의 의미가 변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백종화 우리라는 개념이 희미해진 것도 있어요. 5060세대는 ‘우리’가 익숙해서 ‘우리 안에서 내가 이 정도는 해야 돼’라는 생각이 있거든요. 그런데 2030세대는 우리 가족, 우리 회사가 아니라 나의 가족, 나의 회사라는 개념이라 충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진행자 요즘에는 많은 분들이 책·강연·영상 등으로 정보만 얻는 것이 아니라 고민에 대한 답도 찾고 위로도 받는 것 같아요. 비대면으로 어른을 찾는 셈이랄까요?
강용수 사실 제 나이쯤 되면 주변에서 어른을 찾는 것도, 어른이 되는 것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듣는 사람이 상대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어른이라면 쓴소리도 좀 해야 하죠. 다만 남을 가르치려 하고 “내가 겪어봤는데 말이야”라며 나서는 게 아니라, 타인이 어른으로서 인정해야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종화 요즘 세대는 유튜브로 모든 걸 배우잖아요. 어른한테 고민을 공유할 필요가 없어져버린 거예요. 지식과 경험이 온라인에 다 있으니까요. 세대 이슈가 아니라 이제는 시대 이슈라고 봐야 해요. 모두가 똑똑해진 시대라 오히려 젊은 꼰대가 훨씬 많아요. “내가 아는 게 많으니까 내가 맞는데 왜 엉뚱한 소리 하세요?”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른 건데 말이죠. 그런데 SNS에서 보는 것들은 다 결과거든요. 성공한 모습만 보는 거잖아요.
최영희 옛날에는 사회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우리가 어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자세히 보면 뭐 단점도 있고 그래요. 요즘은 인터넷으로 개인의 사생활이 실시간으로 비치잖아요. 그러니 소위 신화적인 존재가 나오기 어렵죠. 이걸 다시 말한다면, 그렇게 완벽한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는 거예요. 어른을 정의할 때 아주 완벽한 기준을 들이대는 접근 방법은 옳지 않은 것 같아요.
강용수 공감합니다. 완벽한 어른은 없어요. 고통과 실패를 보여주는 게 어른인 것 같아요. 무언가를 성취하려는데 잘 안 되잖아요? 그런 경험이 오히려 성숙해지는 기회 같거든요. 쇼펜하우어 역시 40대에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데요. 외부에서 깨져보면서 남들의 시선과 평가를 벗어나 온전한 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패를 거쳐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과정을 보는 게 중요한데, 요즘은 결과로만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최영희 멀리서 대단한 노력을 하는 사람을 찾아내 따르려고 할 게 아니라, 매일 만나서 부딪히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찾는 게 좋죠. 모방할 수 있는 모델이 가까이 있으면 학습이 쉬워요. 누군가를 흉내 내겠다는 게 내가 변화하겠다는 강력한 동기가 되거든요. 거창하진 않아도 나름의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 인간다움이 있는 사람을 어른으로 삼아야 하는 거죠. 삶은 고통이잖아요. 예상치 못한 좌절들이 올 때 넘어졌다가도 잘 일어나는 것, 즉 회복 탄력성이 좋을수록 건강한 어른이라고 봅니다.
진행자 결과 중심적인 사회이다 보니 주변에 있는 어른들을 미처 보지 못하는 것 같네요. 그럼에도 세대를 불문하고 우리는 어른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설문조사에서도 ‘가까이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83.8%가 그렇다고 했거든요.
백종화 혼자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다만 과정이 중요해요. 어려움도, 고난도, 극복하는 것도 볼 수 있거든요. 어른이라면 그런 걸 보여주는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의 과정을 도와주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어른은 나이와 상관없이 그에게 배울 점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해요. 좋은 어른, 나쁜 어른이 아니라 나와 맞는 어른을 찾아야 하는 거죠.
최영희 그리스 신전에도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적혀 있다고 해요. 세대 차이는 계속됐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거예요. 요즘에는 20대도 10대를 이해 못 해요. 그러니 내가 옳고 내가 항상 중심이라는 생각을 깨야 합니다. 그냥 다른 거거든요.
백종화 맞아요.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려면 먼저 나를 이해해야 해요. 그래서 나다움이 먼저인 거죠. 리더십의 핵심 역시 ‘자기 인식’(Self Awareness)입니다.
강용수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차이를 알고 인정하는 과정인데요.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개성이라고 봅니다. 부·명예와 같은 외부의 나다움이 있고, 건강·성격 같은 내부의 나다움이 있다고 하는데요. 자기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인식하는 게 필요하죠. 그걸 알아가는 노력이 어른이 되는 과정 아닐까 싶습니다.
진행자 어른이 되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네요. 다음으로는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거고요. 그렇다면 어른이 되는 걸 훈련할 수 있을까요?
백종화 조직에서의 어른을 리더라고 본다면 리더는 태어나는 걸까요, 만들어지는 걸까요? 과거에는 태어났습니다. 영향력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교육을 받아 리더로 성장하는 거라, 그 말이 맞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부모, 팀장, 매니저, 선배 어떤 역할이든 리더에 포함됩니다. 태어난 대로 사는 게 아니라 훈련으로 더 다양한 영향력을 키울 필요가 있죠.
강용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면 남과의 차이도 알게 되죠.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은 의식하든 하지 않든 우주에서 가장 개성이 도드라진 존재라고 해요. 내가 개성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의욕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나와 타인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가 고독을 통해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죠. 쇼펜하우어는 시행착오와 실패를 통한 경험과 학습으로 새롭게 획득되는 성격이 있다고 봐요. 물론 유전적인 성격은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기에, 새로운 성격은 아주 어렵게 얻어진다고 합니다.(웃음)그래서 글쓰기, 책읽기 등을 좋은 습관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죠.
최영희 프로이트는 우리 인간의 모든 선택이나 행동의 결정이 무의식 안에 있다고 했어요. 그러니 무의식의 영역을 찾아내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죠. 그런데 깨달았다고 쉽게 변하지는 않아요.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또 다릅니다. 매일 다니는 산책길을 생각해볼까요. 기존에 있는 길을 걸어요. 그런데 지름길을 내려면 풀숲을 헤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하죠.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요즘 효율적인 방법이 많이 개발되어 있으니 얼마든지 훈련할 수 있습니다.
백종화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건 결국 행동이거든요. 행동의 시작은 성격이라고 봅니다. 태어날 때 가지고 있던 기질과 후천적으로 받은 영향으로 생긴 성격인데요.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행동이 있고, 그것에 익숙해져요. 이를테면 평생 오른손으로 젓가락질하는 것과 같아요. 왼손으로 젓가락질하려면 어색하죠. 그런데 평생 하던 행동과 반대되는 어색한 행동을 훈련할 때부터 영향력이 달라집니다.
최영희 정신과 진단에 ‘성격장애’라는 게 있어요. 20여 년 전에는 치료가 안 된다고 했어요. 오늘날 보면 말이 안 되는 거죠. 지금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많습니다. 스키마 치료도 그런 맥락인데요. 스키마는 자극과 반응 세트의 총합입니다. 백 코치님이 말한 익숙한 행동이라는 게 스키마 이론으로 보면 자극이 왔을 때 내가 하는 반응이 자동화된 거예요. 그대로 살아도 되는데, 그게 자신에게 고통을 주거나 타인과의 관계에 문제를 일으킨다면 나를 위해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명상 등으로 내 안에 있는 걸 끌어내는 훈련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훈련할 수 있어요. 내 성격은 나 외엔 절대 바꿀 수 없습니다.
백종화 어른이 된다는 것에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정답을 고민하는 사이에 시대도 상황도 바뀔 거예요. 결국 기존에 하던 익숙한 행동을 그대로 하게 됩니다.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해야 변화가 있잖아요. 어색하고 불편하고 실패하겠지만, 그조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훈련하다 보면 어른이 되어가지 않을까요?
[창간 9주년 기념 특집 기획] 우리 시대, 어른을 찾아서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조사’(2024)
불확실한 미래에 앞날을 의논하고 갈피를 잡아줄 어른은 점점 사라지는 듯하다. 우왕좌왕하던 청년기를 지나 어느덧 한 사회의 어른 위치에 놓인 5060세대. 나는 어떤 어른인지, 왜 어른이 돼야 하는지,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을지… 고민이 뒤따르는 시기다. 이에 본지는 월간지 창간 9주년을 맞아 마크로밀 엠브레인에 의뢰,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조사’(△전국 2030·5060세대 500명 △2024년 2월 29일~3월 4일 △표본 오차 ±4.4% △신뢰수준 95%)를 실시했다. 해당 결과와 2014년 진행된 동명의 조사 데이터를 비교·분석해 현대 사회 어른의 시대상과 세대 간 존경에 대한 인식을 조명해본다.
본지가 진행한 ‘세대 간 존경-존중에 대한 인식조사’(2024)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5060세대의 인식 개선과 노력을 오늘날 2030세대는 잘 알지 못하는 눈치다. ‘존경받는 어른이 되기 위한 노력’을 살피는 항목에서 5060세대는 ‘소통을 위한 젊은 층 이해’(41.6%)를 비롯해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노력’(25.2%), 도덕적 양심적 생활(14%) 등을 한다고 응답했으나, 2030세대는 ‘잘 모르겠다’(31.6%)고 반응했다. 그밖에 항목들에 대해서도 5060세대의 답변 비율보다는 현저히 낮은 수치를 보였다. 그러는 한편 자신들이 5060세대가 됐을 때 현재의 기성세대와는 다를 것이라 말하는 2030세대는 2014년에 이어 70%를 웃돌았다.
박민선 사회복지학 박사(연령통합고령사회연구소)는 “결국 노력의 방식이 잘못됐다고 본다. 요즘 중장년들을 보면 나름 젊은 세대와의 소통이 중요함을 인지하고 그들과 가까워지려 애쓴다. 다만 사적인 이야기를 하려한다거나, 회식 자리를 만드는 등 요즘 2030세대가 부담스러워 하는 방법을 택해 오히려 벽을 쌓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세대갈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다보면, 직장 등에서 상당수 5060세대가 2030세대의 눈치를 보더라. 그런 분들은 역으로 청년들이 불편해하고 싫어할 까봐 아예 대화에 안 끼거나, 회식 자리에서 빠지는 식으로 거리를 둔다. 이렇게 아예 소통이 단절된 상태가 되다 보니 기성세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무슨 노력을 하는지, 2030세대 입장에서는 모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상단 도표에서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노력’은 10년 사이 눈에 띄게 줄었다(43.3%→25.2%). 더불어 ‘존경스러운/존경스럽지 않은’ 5060세대의 모습을 묻는 질문에서도 경제력을 키워드로 한 항목의 비율은 현저히 줄어든 모습이다. 2014년만 해도 5060세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워 보일 때 2030세대가 존경할 것’(24.9%), ‘경제적 능력을 갖지 못할 때 2030세대가 존경하지 않을 것’(31.4%)이라 여겼다. 10년이 흐른 현재, 각각의 항목 수치는 절반 이상 낮아졌다. 역으로 2030세대는 해당 수치가 상대적으로 미미하게 높아졌지만, 전체 중 최하위 항목인 만큼 절대적인 수치는 매우 낮은 상황이다. 2014년 결과에선 ‘경제력’ 관련 항목이 두 세대 간 의견 차가 가장 심했지만, 10년이 뒤 격차가 줄어든 점은 긍정적이다.
박민선 박사는 “과거에는 경제적인 능력도 하나의 권위와 존경의 덕목으로 인식되곤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자식들에게 부담 안 지우면 어른 도리를 한 것이라 여기는 이도 많았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젊은 세대는 경제력만으론 존경심을 표하지는 않는다”며 “최근의 결과를 보면, 2030세대의 생각을 현재의 5060세대가 수용하고, 이해하려 노력해나가는 흐름으로 읽힌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10년 전과 비교한 조사 결과를 볼 때 양 세대 모두 소통의 필요성을 느끼고, 원한다는 측면에서 다행스럽고, 희망적이라고 본다. 다만 세대 간 존중과 소통을 위해서는 상호 노력이 필요하다. 자꾸 5060세대가 회피하는 방식을 취하다 보면 앞선 결과처럼 2030세대가 윗세대의 처지를 모르거나, 소통의 필요성을 못 느낄 수 있다. 너무 거리를 두기보다는 조금은 충돌하면서, 서로 부딪힐 기회를 만들어도 좋겠다. 세대를 나누지 않고 공통 관심사와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기반도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난해 여름이었다. 중장년 사이 파크골프*가 인기라기에 한강변 파크골프장을 찾았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돌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성 장맛비가 예고돼 있었지만 기어이 갔다. ‘이런 날에도 치면 진짜 인기다!’ 하고…!
*1983년 일본 홋카이도 마쿠베쓰 강가에서 시작된 운동. 도심 속 공원이나 유휴부지에서 즐기는 게임이라고 해서 공원 골프(PARK GOLF)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등포 파크골프장’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혹시 아무도 없으면 어쩌지…’하는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야말로 ‘줄 서서’ 파크골프를 치고 있었다.
파크골프는 클럽 한 개와 공 한 개, 그리고 티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몇 천 원이면 플레이할 수 있을 정도로 비용도 저렴하다. 파크골프장 별 재미도 각양각색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전 수집한 정보 그대로 어르신들은 답했다.
“재밌어요.”
“꽤 운동이 돼요.”
“집에서 가까워요.”
“이용료가 저렴해요.”
한 어르신은 파크골프 예찬론자였다. 다른 운동 여러 가지 해봤지만 이보다 좋은 운동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참 듣고 있다가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노인들이 다 집에만 있어 보세요. 자식이고 며느리고 손주고, 누가 좋아하겠어요? 우리도 다 압니다.”
“근데 파크골프장 나오면 운동하고, 여기서 만난 친구들끼리 점심 먹고, 커피 한잔하고, 내내 같이 놀다가 저녁에 집에 가서는 바로 잡니다. 아프다는 소리도 안 합니다.가지 말라고 할까 봐요.
본인 건강하지, 가정의 평화 가져오지, 종국에는 사회적 비용 안 들지. 삼박자를 다 갖춘 운동이라니까요?!”
속사정을 전한 어르신은 빙긋 웃으며 북적이는 필드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파크골프 열풍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노인들이 다 집에만 있어 보세요. 자식이고 며느리고 손주고, 누가 좋아하겠어요?
우리도 다 압니다.”
“서서히 무너져가는 인생을 같이 가는 사람이죠.”
박건우 교수에게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이렇게 말했다. 치매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지혜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들과 함께 늙어가고 있단다.
박건우 교수는 치매·파킨슨병·소뇌위축증 분야의 권위자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신경과 전문의를 모두 취득하고 치매 환자들의 몸과 마음을 모두 돌보고 있다. 치매 예방과 조기 발견, 치매에 대한 인식 개선과 가족 치유에 앞장선 공로로 보건복지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박 교수는 치매 환자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인의 가치’를 보존해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노인의 가치는 무엇인가
박 교수는 2000년대 초반 신경·뇌·심리를 공부하는 의사들과 함께 고려대학교에 지혜과학연구센터를 설립했다. 인지장애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노인의 가치란 무엇일까’를 고민한 결과다.
“2000년대 당시에도 지금처럼 노인 인구가 증가해 고령화사회가 된다, 연금도 건강보험 재정도 고갈된다, 이런 말이 계속 나왔어요. 환갑을 맞아 잔치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 들어가는 자체가 마치 사회에 재앙이 되는 것처럼 묘사돼요. 그러니 나이 들어 뭐하겠느냐는 말이 나오고, 나이 드는 게 부끄러워지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왜 건강하게 살려고 할까요? 나이 들어 건강한 내 자신이 사회에서 재앙이라니 모순 아니에요? 저는 의사인데 환자를 열심히 살려서 건강하게 만들었더니, 사회의 재앙을 양산하는 꼴이 된 거예요.”
과거에 우리는 왜 환갑을 축하했을까. 노인이 된다는 건 축복일까, 재앙일까. 근본적인 고민에 빠졌다. 박 교수는 수많은 인지장애 환자들을 만나면서 나이 듦의 가치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나침반 같은 존재가 노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이 들면서 더 나아지는 능력은 무엇이 있을까요? 요즘은 무슨 일이 생기면 포털 사이트에 묻지만, 예전에는 큰일이 생기면 동네 어른한테 물어봤어요. 어른에게 무언가 묻는다는 건, 그의 경험에 기반해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물어보는 거거든요. 현대에 와서 속도나 효율을 중요시하는데, 아무리 빨라도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결국 삶이 무너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옛 마을 어른의 그 경험을 우리는 ‘지혜’라고 정의하자 했죠.”
사람의 정신·인지 활동이 건강하게 지속되면 그 사람이 건강한 경험을 누적하게 되고, 그가 겪은 시행착오를 기반으로 사회에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지혜를 축적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경험을 존경하는 사회가 된다면, 사회도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려면 건강한 지혜가 필요하니까 건강한 신체, 건강한 정신, 건강한 성숙을 이끄는 여러 방법을 연구했다. 지혜과학연구소의 탄생 이유다.
지혜가 없어지는 병, 치매
박건우 교수는 치매를 ‘지혜가 없어지는 병’이라고 했다. 운동 능력이나 정신 능력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지혜 능력이 사라져 어리석은 상태가 되는 것이 치매라고 봤다. 박 교수는 치매 예방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운동과 관계’라고 했다.
“뇌는 자극이 들어왔을 때 반응하는 기관이에요. 집 안에 멍하게 있는 것보다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운동을 하면 좋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의 한 일원이 되도록 지속시켜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적 결속력과 치매에 대한 내성이 강력해야 사회가 치매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겨요.”
의술의 발달은 심장·폐 등 신체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는 기술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뇌는 바꿀 수 없다. 따라서 박 교수는 뇌를 오래도록 건강하게 보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뇌를 오래 쓰면 치매나 인지장애가 생길 수밖에 없다.
“치매는 자극을 받았을 때 좀 엉뚱한 방향으로 반응하는 거예요. 죽어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내가 알던 반응이 아니라고 해서 치매 노인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리면 치매라는 질병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져요. 85세가 넘으면 3명 중 1명이 치매 환자가 됩니다. 그저 다르다고만 볼 일이 아니에요.”
우리가 치매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치매 환자가 지혜를 유지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기간이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건우 교수는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을 걱정했다. 치매 환자가 카페나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도록 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돕는 일본 사례가 종종 언급되는데, 그는 이마저도 지역이라는 울타리가 없으면 힘들다고 봤다. “가족으로 묶인 관계가 혈연, 지역으로 묶인 관계가 지연인데, 가족은 해체되고 지역도 사라져가고 있다”면서 박 교수는 ‘우리’라는 개념이 희미해지는 것을 걱정했다.
“기댈 수 있는 사람과 오래 함께 사는 게 참 중요합니다. 요즘 혼자 사는 사람이 많은데요. 치매뿐 아니라 어떤 질병이든 혼자 살 때 병의 진행이 더 빨라집니다. 함께 버텨주는 사람이 있고 없고가 엄청난 차이를 가져와요. 뇌세포도 그렇거든요. 여러 가지로 붙어 있어야 떨어지지 않는데 결속력이 약해지면 금방 끊어져요. 우리 동네, 우리 가족이라는 개념이 점차 약해지니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도 점차 줄어들고 있죠.”
박건우 교수는 그래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더욱 집중한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결국 질병을 치료하는 데는 ‘휴먼 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질병이 있더라도 존엄성을 가지고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의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문자로 ‘선생님 약 주세요’라고 하는 게 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그저 약을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에요. 스러져가는 환자의 삶을 함께 가야 하는 의사 입장에서는 환자와 관계를 이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진찰하면서 주고받는 대화가 있어야 하는데, 서로가 반응하지 않으면 치료가 되지 않아요.”
치매 환자는 기억을 점차 잃어가기에 언젠가는 깨어지는 관계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관계는 더 오래 가더라는 걸 오랜 경험으로 깨달았다. 병원을 방문한 보호자들이 “다 못 알아보는데 그래도 선생님은 알아보세요”라고 할 때, 역시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더 이상 병원을 방문하기 어려운 환자들을 직접 찾아가 진료하기도 했다. 그마저도 어렵다면 환자에게 주간보호센터라도 꼭 다니시라 당부한다.
기억이 잘린 사람
치매안심센터가 생기면서 치매에 대한 관심이 많이 높아졌지만, 그럼에도 치매라는 병에 대한 이해는 아직 부족하다. 박건우 교수는 치매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볼게요. 사고로 다리가 잘렸다고 합시다. 그 사람의 걸음걸이는 어떨까요? 많이 다르겠죠. 우리는 다리가 잘린 사람의 걸음을 보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치매 환자는 기억이 잘린 사람이에요. 치매 환자에게는 ‘집이 어디세요?’라고 한마디 물어봐 주는 것이 절뚝거리는 사람을 부축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말 한마디가 치매 환자의 행동을 정말 많이 바꿔요. 기억의 어느 한 부분을 찔러줌으로써 언제 그랬냐는 듯 정신이 돌아오는 분이 많거든요. 그런데 무섭고 이상하다고 치매 환자를 도우려 하지 않아요.”
박 교수는 치매에 걸려도 안심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특히 120세까지 사는 시대가 되면 치매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질병이 된다고 했다. 에이즈가 과거에는 사망하는 병인 줄 알았지만 기술의 발달로 만성병처럼 취급되듯, 치매 역시 이른 시일 내에 만성병이 될 거라고 본다.
“배회하는 치매 환자를 만나면 경찰서에 꼭 인계해주세요. 치매안심센터에서 발부한 배회 인식표(보통 옷깃 안쪽에 붙어 있다)나 지문으로 환자가 누군지 알 수 있습니다. 가족 중에 치매 환자가 있다면 치매안심센터에 꼭 가보세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스스로 혹은 가족의 치매가 의심될 때 이를 숨기려 하지 말고 병원에 꼭 들르시길 당부합니다. 치매의 원인에 따라 치료되는 것도 있고, 오랫동안 관리해야 하는 것이 있고, 계속 나빠지는 것도 있습니다. 원인을 알면 대책을 세울 수 있는데, ‘병원에 가도 해주는 게 없다더라’며 진료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또한 그는 요양 시설에서 생활하는 치매 환자들의 행동장애를 질병 증상 중 하나로 이해해주길 당부했다. 논란이 되는 치매 환자의 성추행이나 성희롱이 병의 증상일 수 있다는 것.
“파킨슨 환자의 경우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증가하는 약물을 복용하는데, 이때 그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요. 이런 경우는 약을 잘 조절하면 됩니다. 치매 환자는 본능을 눌러주는 뇌피질의 능력이 점차 없어집니다. 그러니 아이처럼 자신의 욕망과 본능을 그대로 이야기하게 돼요. 욕을 하기도 하고 바지를 내리기도 하죠. 그런데 이 환자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동인지는 조금 살펴봐야 합니다. 치매 환자의 성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오해가 많은 것 같아요.”
노인을 존중하는 사회
지혜과학연구소가 생긴 지 20년이 넘었지만 안타깝게도 노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분위기는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박 교수는 노인이 설 자리가 더욱 없어졌다며 안타까워했다.
“요즘은 사회의 방향성을 어른이 아니라 AI에게 묻잖아요. 나이 든 사람들의 가치를 생산성으로 판단하는데, 오히려 그런 AI나 로봇이 생산성을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요즘 시대의 노인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성장기를 겪은 사람들이 노인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의 70대는 부모를 부양했던 세대다. 5060세대는 유례없는 부를 쌓았다. 박건우 교수는 노인이 될 세대가 어떤 생활 습관을 가지느냐에 따라 국가 경제가 영향을 받는 시대가 올 거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노인은 은퇴 후에 재산을 물려주고 빈털터리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강조한다. 노인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요즘이기에, 경제력마저 없어지면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 취급할 걸 잘 알기에, 무조건 자식에게 부를 이전하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 거라 본다. 그렇기에 더더욱 노인들이 지혜를 더 오래 유지하고, 그 가치를 존중받는 사회가 되기를 누구보다 바란다.
“우리는 120세를 사는 시대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개척자 입장에서는 참 힘들지만, 언젠가는 라이프사이클이 120년인 것을 받아들이고 사는 시대가 올 거예요. 오래 사는 건 성공했고, 앞으로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관건이죠. 건강한 노인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에요. 젊은 세대라면 앞으로 4명 중 1명이 노인인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겁니다. 남의 이야기 같지만 결국 나의 이야기예요. 그러니 지금부터 노인에 대한 가치관을 잘 갖춰야 해요.”
박건우 교수는 노인들이 가진 지혜를 어떻게 하면 오래도록 전파하며 여생을 마무리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한다. 보통 사람보다 뇌가 빨리 늙어버린 사람들을 만나는 의사, 그들과 함께 늙어가며 서서히 무너져가는 인생을 같이 걷는 의사, 환자와 좋은 관계를 주고받는 의사 생활을 계속하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다.
옷장 깊숙한 곳에 있는 셔츠, 철 지난 바지도 얼마든지 멋지게 입을 수 있다. 10년, 20년 뒤를 꿈꾸게 하는 ‘취향 저격’ 멋쟁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취향 앞에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면, 노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김동현 사진작가의 사진과 감상 일부를 옮겨 싣는다. 열한 번째 주제는 ‘커플 룩’이다.
1 ‘파독 부부’. 나란히 가죽 재킷과 연청 바지를 입고 인사동 거리를 걷고 계셨던 백발의 노부부. 어머님은 1960년대 대한민국 파독 간호사들의 첫 대표로서 그들을 인솔했다. 한국에서 만난 두 분은 같이 독일로 이주했고, 촬영 당시 자식들을 만나러 잠시 한국에 오신 터였다. 촬영이 아니었다면 들을 수 없을 이야기였다.
2 ‘동대문 외국인 부부’. 동대문에서 만난 젊은 바이브가 느껴지는 외국인 부부. 블랙으로 커플 룩을 맞춰 입은 모습이 굉장히 멋스럽다.
3 ‘인사동 단짝’. 멀리서부터 시선을 사로잡은 두 분은 드레스 코드를 ‘노란색’이라고 정하고 인사동 나들이를 나온 듯했다. 두 분의 오랜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4 ‘안국 꽃집 부부’. 한눈에도 금실 좋아 보인 부부. 모자부터 재킷 등 옷을 맞춰 입은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마침 꽃집이 근처에 있어 그 앞에서 촬영했는데, 두 분의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울린다.
5 ‘경복궁 부부’. 경궁을 걷던 중 저 멀리서 어머님을 찍어주려는 아버님을 발견했다. 다가가 “제가 찍어드릴까요?” 라고 하니, 아버님은 가벼운 인사와 함께 어머님 옆에 섰다. 아버님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은 후, 내 카메라에 담고 싶어 촬영을 요청드렸다. 손을 잡아달라고 부탁드리자 아버님은 “내 손이 별로 안 예쁜데”라며 머뭇거리시더니 이내 어머님의 손을 꽉 잡으셨다.
중장년에게 ‘세금’이라는 단어는 늘 따라다니는 피로 같은 존재입니다. 회사의 운영에서 집안의 재산 관리에 이르기까지 늘 따르는 걱정거리이지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박재홍 세무사를 통해 세금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혼인율의 급감과 낮은 출산율은 해결해야 할 우리 사회의 숙제로 떠올랐습니다. 올해부터 결혼과 출산을 준비하는 청년을 지원하기 위해 세금을 감면해주는 증여재산공제 개정안이 시행됩니다. 장성한 자녀가 있으시다면 꼭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혼인 증여재산공제
혼인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는 세법 규정을 신설했습니다. 혼인신고일 전후 2년 이내 직계존속(부모, 조부모, 외조부모)으로부터 재산을 증여받는 경우 혼인 증여재산공제 1억 원이 적용됩니다. 당초 성년은 직계존속으로부터 증여받는 경우 기본 증여재산공제가 10년간 합산 5000만 원이었는데, 이 규정과 별도로 혼인 증여재산공제 1억 원 추가공제가 가능하여 총 1억 5000만 원 증여재산공제를 적용받을 수 있습니다.
혼인신고를 한 신랑•신부는 각각 부모로부터 증여받는 금액 등에 대해 각각 기본 증여재산공제 5000만 원과 혼인 증여재산공제 1억 원을 합친 총 1억 5000만 원을 공제받을 수 있으므로, 각 부모로부터 1억 5000만 원씩 총 3억 원을 증여세 부담 없이 받을 수 있습니다. 초혼•재혼 여부와 상관없이 적용 가능하고, 2024년 1월 1일 이전에 결혼했어도 2024년 1월 1일 이후 증여받은 날이 혼인신고일부터 2년 이내에 해당하면 적용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 번 혼인신고를 한 경우에도 모두 합쳐서 공제금액은 1억 원입니다.
신설된 내용은 2024년 1월 1일 이후 증여받는 분부터 적용됩니다.
혼인 증여재산공제 적용 요건
아래 요건을 모두 충족하면 증여재산공제 1억 원 적용
① 증여자 : 직계존속(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직계존속 그룹 단위로 적용
② 공제한도 : 1억 원
③ 증여일 : 혼인신고일 이전 2년, 혼인신고일 이후 2년 이내(총 4년)
④ 증여추정, 증여의제 등에 해당하는 경우 증여재산공제 적용 제외
결혼정보회사가 최근 2년 이내 결혼한 신혼부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신혼부부가 결혼하는 데 드는 총 비용은 평균 3억 3050만 원(주택 마련 2억 7977만 원)이었습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신혼부부의 평균 결혼 비용이 3억 3000만 원인데, 정부에서 혼인공제 신설로 부모 등으로부터 증여받은 재산에 대하여 각 부부 합산 3억 원까지 과세하지 않겠다고 하니, 정부가 결혼 비용 현실을 반영하여 세법 개정을 잘한 것 같습니다.
또한 양가 부모로부터 3억 원을 증여세 부담 없이 증여받는다면 신혼부부는 동 자금을 주택 전세자금 또는 주택 구입자금에 보탤 수 있는 여력이 커질 것 같습니다.
신혼부부는 상대적으로 소득이 많지 않아 부모로부터 일부 도움을 받아 주택 취득 및 임차하는 경우가 있는데, 추후 주택 취득 및 임차자금을 소명하지 못할 경우 증여세 부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세법 개정으로 이러한 부담도 감소될 것 같습니다.
출산 증여재산공제
자녀의 출생일부터 2년 이내 직계존속으로부터 증여받는 경우에도 출산 증여재산공제 1억 원을 적용받을 수 있습니다. 위의 혼인 증여재산공제와 적용 방법은 같습니다.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출산 증여재산공제가 적용되므로 미혼모들에게 특히 도움이 되는 규정입니다. 여러 번 출생신고를 한 경우에도 모두 합쳐서 공제한도는 1억 원입니다.
출산 증여재산공제 요건
① 증여자 : 직계존속(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직계존속 그룹 단위로 적용
② 공제한도 : 1억 원
③ 증여일 : 자녀의 출생일(입양의 경우 입양신고일)부터 2년 이내
④ 증여추정, 증여의제 등에 해당하는 경우 증여재산공제 적용 제외
혼인 및 출산 증여재산공제 통합한도
혼인 증여재산공제, 출산 증여재산공제 각각 1억 원을 합쳐서 2억 원이 아니며, 혼인 증여재산공제와 출산 증여재산공제는 모두 합쳐서 1억 원을 한도로 공제를 적용합니다.
다른 한편의 생각
자식을 도와줄 재산이 없는 부모와 그 자녀들은 이 규정의 혜택을 받을 수 없으며, 재산이 있는 부모를 둔 자녀들만이 적용 가능한 제도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도와줘야 하는 금액이 1억 5000만 원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부유한 부모의 자녀들만 혜택을 보는 것이므로 또 하나의 사회적 갈등 요인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만약 제 딸이 “세법에서는 1억 5000만 원까지 자식을 도와줄 수 있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왜 저한테 1억 5000만 원을 안 도와주시나요?”라고 이야기한다면, 재산이 없는 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재산 많은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세부담 없이 쉽게 재산을 물려주고 재산 없는 사람들은 물려줄 재산이 없다면, 각기 다른 환경에 놓인 자녀들은 사회에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까요? 이런 생각이 다시 한번 들기도 합니다.
‘나는 솔로’, ‘환승연애’ 등 연애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시기에 실버세대도 사랑한다며 나타난 프로가 바로 HCN 충북방송 ‘홀로탈출’이다. 실버세대의 로맨스가 이렇게 귀엽고 순수하다니! 유튜브 채널 최고 조회수 57만 회를 넘을 정도로 관심이 뜨겁다. “실버 싱글 남녀의 끝 사랑을 찾아드리고 싶다”고 말하는 조미선·이창수 PD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홀로 된 인생, 다시 한번 로맨스를 꿈꾸다.’ ‘홀로탈출’은 60·70대 싱글 남녀 8명이 짝을 찾는 과정을 담은 러브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조미선 PD는 “문득 왜 젊은 사람들의 연애 프로그램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HCN의 주요 시청자층인 실버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다”면서 “처음 기획 때는 지금보다 출연진 연령대가 높았고, 경로당 미팅 콘셉트를 생각했다. 과거 ‘장수퀴즈’라는 프로그램 같은 분위기를 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미선 PD는 든든한 후배 이창수 PD와 ‘홀로탈출’의 시작부터 함께했다. 두 사람 모두 PD 경력 10년이 넘었지만 예능 프로그램 제작은 처음이다. 섭외, 연출, 편집 뭐 하나 쉽지 않았다. 괜한 도전을 한 것인가 싶었는데, 내부 시사회에서 ‘재밌다’는 반응이 나왔다. 다행이구나 하고 마음을 쓸어내렸더니 이내 대중의 뜨거운 반응이 터졌다. TV 최고 시청률은 5.08%(디지털 케이블 플랫폼 전국 유료가구 기준)를 기록했으며, 유튜브 채널은 3월 현재 총 조회수 780만 회를 향해 간다.
나이 먹어도 똑같아
‘홀로탈출’의 기본 형식 자체가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출연진이 실버세대로 달라지니 변화가 확 느껴진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보통 사람들이 짝을 찾는다. 그래서 그들의 로맨스가 친근하게 다가오며 더욱 응원하게 된다. 조미선 PD는 “우리 이웃 같은 사람들을 계속 출연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했다. 일부 연애 프로그램의 출연진은 방송계 진출이라든지 홍보를 목적으로 출연했다는 의혹을 받는데, ‘홀로탈출’은 이 부분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제작진이 출연진 검증에서 철저히 하는 부분이 있다. 면담 후 출연이 결정되면 혼인관계증명서를 무조건 받는다. 싱글임을 검증하는 것. 현재까지 지원자 및 출연자는 이혼 또는 사별을 경험한 돌싱이었으며, 미혼은 없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여성 지원자가 남성에 비해 훨씬 많은 상황이라고 한다.
“남성 싱글들의 성향은 정말 극과 극이라고 하더라고요. 외부 활동을 많이 해서 연인이 있거나, 아니면 외부 활동을 극도로 안 하거나. 그러니까 진짜 싱글은 후자인 경우가 많은데, 주변에서 방송 출연을 권유해도 내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즌1 때도 남성 출연자들을 겨우 섭외해서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죠. 여성들은 방송국 프로그램이라는 안정감 때문인지 많이 지원하세요. 경쟁률도 매 시즌 높아지고 있죠. 시즌1 때는 2:1, 시즌2 때는 8:1 정도였습니다. 현재는 시즌3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는데, 경쟁률이 벌써 10:1을 넘어섰습니다. 시즌3는 꽃피는 따스한 봄날인 4월에 촬영할 예정이에요. 시즌1, 2는 추울 때와 더울 때 촬영이 진행돼 출연진들을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 죄송했거든요. 출연자도 8명 이상 될 수도 있습니다.”
실버세대 싱글들이 원하는 이성상의 기준은 어떻게 될까. 조미선·이창수 PD는 “남성들은 여성을 볼 때 외모와 나이(연하)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성들은 남성을 볼 때 경제력 위주로 보는 것 같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또한 흥미로운 부분은 여성 출연자들이 ‘평범한’ 스타일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패셔너블하거나 잘 꾸미는 남성을 보면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홀로탈출’의 여성 출연자는 대부분 ‘너무 튄다’면서 부담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인다. 실버세대와 MZ세대의 싱글 남녀가 원하는 이성의 모습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홀로 탈출이 필요한 이유
5070 싱글들이 사랑을 찾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하다. 부모님 혹은 조부모님 세대의 어른들은 사랑 앞에 매우 순수하고 솔직한 모습이다. 상대방이 좋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굴에 그대로 표가 난다. 또한 오랜만의 데이트에 설레는 모습을 보이지만, 마음만 앞서 말실수를 하기도 한다. 조미선·이창수 PD는 “실버세대의 로맨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젊은 층과 동일한데 좀 더 솔직한 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 남성 출연자들은 살림을 해줄 여성을 찾는 것 같다’는 시청자 반응이 나오기도 했죠. 그분들은 홀로 식사하고 살림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셨던 것 같아요. 그게 꼭 연애를 해서 이성이 해결해주길 바란다는 뜻은 아니었다고 봐요. 잘 포장해서 말할 수도 있는데, 너무 마음속 생각을 그대로 말하다 보니 여성 출연자와 시청자가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이 생긴 것 같습니다. 표현이 솔직하고 투박해서 벌어진 문제라는 거죠.”
유튜브 채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상은 시즌1의 자기소개 시간이 담긴 부분이다. 3월 현재 조회수 57만 회를 넘어섰다. 조미선 PD는 “연애 예능의 자기소개에서 사별 얘기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나. 우리 유튜브 채널 시청자의 90%는 50대 이상이다. 출연진이 사별과 외로움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에서 시청자들이 많이 공감하셨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실버세대가 사랑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미선·이창수 PD는 결국 ‘외로움’이라고 얘기했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
조미선 PD는 “출연진과 인터뷰를 해보면 그동안은 자식 키우느라 정신없었는데 자식들이 결혼 후 혼자 남으니까 적적함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이제는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 나를 찾고, 로맨스를 나눌 친구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이창수 PD는 시즌1에 출연한 군인 출신 박영수 씨를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자로 뽑았다.
“처음엔 정말 밝은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속사정을 들어보니 밝은 이면에 아픔을 가진 분이셨죠. 자신에 대해 ‘사별했고, 자식도 없고, 진짜 홀로라서 출연했다’고 덤덤하게 말하시는데, 외로움이 느껴지더라고요. 저희 프로그램의 취지와 정말 맞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촬영할 때도 성격이 좋으셔서 인기남에 등극했고, 네티즌한테도 응원을 많이 받으셨죠. 좋은 짝을 만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조미선·이창수 PD는 젊은이들이 사랑하듯이, 실버세대도 똑같이 사랑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두 PD는 앞으로도 이 마음을 잃지 않고 프로그램을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홀로 되신 분들이 다시 설레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프로그램이 되고 싶고, 더 나아가 실버세대가 당당하게 사랑하는 문화가 형성됐으면 좋겠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홀로 탈출하세요!”
‘홀로탈출’ 커플 이충국♥최문숙 인터뷰
“사랑은 남사스러울 게 없다”
‘비주얼 커플’로 통하는 이충국·최문숙 씨는 ‘홀로탈출’ 시즌1에서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다. 이충국 씨는 촬영을 마친 후에도 직진 로맨스를 펼쳤고, 최문숙 씨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벌써 만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는 두 사람은 결혼도 계획하고 있다.
‘홀로탈출’ 촬영 당시 이충국 씨는 최문숙 씨의 어떤 점에 끌리셨나요? 최문숙 씨는 언제부터 마음이 열렸는지 궁금합니다.
이충국 최문숙 씨가 가장 예쁘기도 했고, 시니어 모델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보니 호감이 갔습니다. 사실 저는 여성분들한테 관심을 많이 못 받았어요. 최문숙 씨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내게 호감을 갖도록 많이 노력했죠. 하하.
최문숙 이충국 씨의 첫인상은 날라리 같았고 비호감이었어요.(웃음) 그런데 데이트를 하면서 대화를 나눠보니 생의 아픔이 있는 분이더라고요. 그리고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깊이 있는 사람 같다고 느꼈죠. 그때부터 어떤 사람인지 탐구했어요. 촬영 후 5~6번 정도 만나서 얘기를 많이 나눈 뒤 교제를 결심했습니다.
교제하면서 느낀 연인의 장점에 대해 칭찬 부탁드립니다.
최문숙 이충국 씨는 굉장히 긍정적인 분이에요. 또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고 배려심이 깊다는 것도 장점이죠. 요리도 정말 잘해요. 또 시니어 모델로 통하는 점이 많아서 좋아요. 커플이자 동료로서 HCN 광고 촬영을 같이 할 때 편해서 좋았는데, 또 광고를 찍고 싶습니다!(웃음)
결혼 계획도 세우셨나요?
이충국 앞으로 1~2년 안에 혼인신고도 하고, 전원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최문숙 씨가 대전에 살고 있어서 그곳에서 살 가능성이 제일 큰 것 같아요. 혼인신고를 안 하고 동거만 하려는 사람들도 있고 졸혼도 많이 한다는데, 저는 법적으로 부부가 되어야 신뢰가 밑바탕이 되어 잘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제가 70세를 바라보고 있는데, 앞으로 얼마나 일할지 모르잖아요. 그 안에 빨리 자리를 잡아서 최문숙 씨를 행복하게 해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문숙 씨의 자녀분들도 만나보셨나요? 자녀들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이충국 저는 방송에서 말했듯이 아들이 하늘나라로 떠났고 가족이 없죠. 자식을 먼저 보내면 평생 가슴에 안고 산다고 하잖아요. 최문숙 씨의 자식들을 친자식처럼 생각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최문숙 이충국 씨가 굉장히 사려 깊은 분이라 저희 애들이 잘 따르고, 응원을 많이 해줍니다. 손주들도 참 좋아하고요.
60대에 사랑을 찾은 소감과 함께 ‘홀로탈출’ 출연을 추천해주세요.
이충국 주변을 보면 방송 출연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용기를 내면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홀로탈출’에 출연하면서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최문숙 씨를 만났죠.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 생각하고, HCN 방송국에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여왕님으로 모시고 살겠습니다!
최문숙 어렸을 때는 첫눈에 반해서 사랑할 수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여러 가지를 따지게 되더라고요. 동년배들에게 이제는 조건만 따지지 말고 나와 공통점이 있고 재밌게 잘살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혼자 지내면 외로운데 같이 밥 먹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가고, 세상사도 같이 논하는 사람이 생기면 인생이 참 즐겁답니다. 주변에서 ‘이 나이 먹어 연애하는 게 주책 아닌가, 남사스럽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랑에는 남사스러울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홀로탈출’ 출연도 좋고,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서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