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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원은 따분하다고? 흥미로운 소수서원과 부석사
-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북 영주시의 최고 특산물은 풍기인삼이다. 매년 풍기인삼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이 축제에선 조선의 문신이자 도학자인 주세붕을 기리는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어떤 연유로? ‘풍기인삼의 아버지’랄까, 풍기인삼 재배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주세붕이다. 당시 백성들은 나라에 산삼을 캐다 바치느라 고생이 자심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주세붕이 소백산 산삼 종자를 통한 인공 재배에 성공한 뒤 기술을 보급했다.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때의 일이다. 군수 노릇도 이쯤이면 최고봉이다. 주세붕의 명민한 행장은 또 있다. 영주시 순흥면에 조선 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 백운동서원은 얼마 뒤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준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변신, 마침내 영주라는 작은 고을을 사림 집합소로 띄워 올렸다. 조선 말 고종조에 이르기까지 우후죽순처럼 많은 선비를 배출했다. 그 수가 자그마치 4000여 명. 그래 오늘날까지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 불린다. 백운동서원의 후신인 소수서원은 퇴계 이황이 주도해 설립했다.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1549년 조정에 편액과 더불어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하길 요청했는데, 명종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이듬해 친필 편액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사액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이 열렸다. 입학 정원은 30명. 소수서원의 기틀을 잡아나간 건 퇴계였다. 천하의 퇴계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으니 알조다. 그는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 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낸 인물이다. ‘학문을 할수록 길이 멀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자기 검증에 엄격했다. 그러하니 서원 운영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겠는가? 학칙은 엄준해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수신(修身)엔 관심 없고 앉으나 서나 과시(科試)에 붙을 궁리만 하는 유생은 바로 쫓겨났다. 담장 사이로 난 출입문을 들어서자 소수서원의 내경이 좍 펼쳐진다. 평편한 터 곳곳에 다수의 건축물이 있어 조선 최고의 서원다운 위용을 과시한다. 크게 보면 학문을 익히는 강학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나뉜다. 자연경관에 기대어 머리를 식히며 쉴 수 있는 유식(遊息) 공간은 담장 밖 외부에 조성했다.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은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학당으로 가장 큰 규모를 지녔다. 여기엔 ‘백운동’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소수서원의 시발이 백운동서원에 있다는 걸 잊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강학당 뒤편엔 교수들의 숙소인 일신재와 직방재, 유생들이 기거한 지락재와 학구재를 배치했다. 유생들의 기숙사는 교수들의 숙소보다 작고 낮게 지어 흥미롭다.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게 도리라는 암시를 담은 구조일 터다. 책을 보관한 장서각 앞뜰엔 정료대가 있다. 밤이면 관솔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힌 일종의 가로등이다. 사람들은 일쑤 서원을 따분한 곳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가만히 뜯어보라. 겹겹의 의미와 개성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소수서원의 모습은 여느 서원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 구성을 했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조선 서원들은 통상 중국식 배치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쪽에 학당, 뒤쪽에 사당을 둠) 양식을 도입했다. 반면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 우측에 학당, 좌측에 사당을 둠) 형식을 구사했다. 아울러 건물들이 윷판에 윷가락 흩뿌려놓은 듯 헐겁게 널려 있다. 따라서 위엄을 갖춘 학문의 전당이라기보다 사적인 대저택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소수서원의 이 활달한 구조는 사액서원의 효시로 등장, 참고할 만한 어떤 범례나 전형을 전제할 여지가 없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경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이제 냇물과 야산이 어우러진 유식 공간이다. 물 좋고 산 좋으면 정자가 필수 품목. 서원 정문 코앞에 있는 경렴정은 물소리로 귀를 씻기 좋은 정자다. 다소곳이 아담하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현판은 두 개다. 해서체 현판은 퇴계가 썼고, 초서체 현판은 퇴계의 제자이자 초서의 달인인 황기로의 글씨다. 퇴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현판 글씨를 쓰던 황기로의 붓이 파르르 떨렸다던가. 흠모하는 스승의 눈길만으로도 레이저 맞은 듯 주눅 드는 게 제자다. 냇물 건너편 둔덕엔 퇴계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는 정자 취한대가 있다. 서원 들머리에 조성된 노송 숲도 빼어난 경관 요소다. 수백 년 수령의 노거수들이 끽해야 100년 안짝을 머물다 세상을 지나가는 인간들을 굽어보고 있다. 이 노송들을 일러 학자수(學者樹)라 한다. 사시사철 푸른 솔의 기개 역시 공부감이라는 데서 붙은 별명이다. 소나무들이 서원 쪽으로 갸웃이 고개를 들이밀고 청강하는 품새를 연상해 지은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학문의 바다 소수서원에선 노송도 학동으로 불려간다. 전통건축의 고전, 무량수전 이제 천년고찰 부석사를 찾아간다. 소수서원과 쌍벽을 이루는 영주시의 고품격 문화유산으로, 부석면 봉황산 자락에 있다. 산기슭을 타고 한참 이어지는 소로 끝자락에 닿자 부석사가 문득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막이 오르면서 무대가 펼쳐지듯이. 이렇게 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경사면과 구릉지가 절묘하게 배합된 터에 들어앉은 건축물의 조화미와 세련미가 매우 빼어나기 때문이다. 부석사 전각들을 일컬어 ‘한국 전통건축의 고전’이라 하는데 이게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부석사에서 천상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를 느낀다. 미학으로 간을 친 건축적 맛과 멋을 음미하는 사이에 불교적 상상력까지 나래를 펴는 셈이다. 부석사의 수려한 전각들 중에서도 뛰어난 건 무량수전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추정되는 법당이다. 고풍스러운 정취가 짙게 묻어난다. 아담하고 단아한 봉정사 극락전의 구조미가 우수하지만, 건물 규모나 법식의 완성도에선 무량수전이 한 수 위다. 무량수전 불단에 모신 소조여래좌상도 걸작이다. 한국의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불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이한 건 불상이 봉안된 위치다. 통상 법당 중앙 정면에 불상을 두지만 이곳에선 측면인 서쪽에 있다. 이런 배치법을 취한 이유가 명확하진 않지만, 소조여래좌상을 서방정토의 부처로 추정해 서쪽을 바라보게 배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려나 소조여래좌상의 상호에 기품과 위의가 넘쳐 눈을 뗄 수 없다. 숨소리 새어 나올 듯 입매는 생생하고, 눈은 반쯤 내리떠 그윽하다. 올려다보면 호방한 표정이고, 옆으로 보면 냉엄한데, 물러나며 돌아보자니 연민이 어린 얼굴이다. 이렇게 각도에 따라 기색이 다르지만 하나같이 가슴을 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바라보는 풍광 역시 가슴으로 들이친다. 저 멀리에서 출렁거리는 산군(山群)의 파노라마가 장엄한 화엄 세상의 축약도로 비쳐서.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예로부터 많은 선비가 배출된 고장”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럴만한 내력이 있다. 우선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의 문신 주세붕이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퇴계가 소수서원을 설립해 학풍을 일으키고 수많은 선비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선비 정신이 면면히 이어졌던 것.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역시 선비 정신을 중심 가치로 삼고 산다. “조선시대 영주에선 4000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영주에 살면서 지역 풍토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나쁜 짓을 삼가고, 조상과 문중에 부끄럽지 않은 처세를 하는 게 좋은 삶이라 여기는 이들에 의해 올바른 지역 정서가 형성된 측면이 여실하다. 다시 말해 영주는 살기 좋은 곳이다. 범죄 발생률도 낮다.” 김 원장은 독서 애호가라고 들었다. “난 소백산 자락에 산다. 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좋은 글을 읽는 일보다 더 행복한 게 없더라. 평생 무수히 많은 책을 읽었다. 덕분에 시집을 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다. 2023년엔 좋은 글들을 뽑아 엮은 책 ‘산에서 보고 들은 것’을 출간했다.” 어디를 가나 과욕과 과속이 넘치는 세상이다. 영주라고 크게 다를까 싶은데. “세상은 어지럽지만 올곧은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동네에 옳고 그름을 아는 선비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경우 좋은 풍토가 유지될 수 있다. 영주엔 다행스럽게도 선비 정신을 존중할 줄 아는 이들이 아직 많다. 내가 아는 영주 사람들은 다들 나름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녀 교육에도 충실하다.” 영주엔 명산 소백산이 있다. 소백산은 어떤 산이라 보나?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예부터 흉년이 들어 막막할 때 영주 사람들은 된장 한 종지 들고 소백산에 들어가 산나물을 채취해 생계를 해결했다. 소백산은 영주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물심양면으로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산이다.” 좋아하는 명문 하나를 소개한다면? “‘겸손함은 하늘과 통한다’는 글귀를 가슴에 담고 산다. 젊을 때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많았다. 그런데 독서를 하며 자신을 꾸준히 다스리면서 사람이 변했다. 책이 곧 스승이었다.” 영주문화원을 통해 성취한 건 어떤 것이 있나? “‘영주근현대사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역사는 보통 이름난 사람들 중심으로 쓰인다. 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도 중요하다고 봤다. 그게 아카이브 작업에 뛰어든 동기다. 2년여 동안 5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해 일을 완결했다. 큰 상도 받았다.” 문화원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이라 보나? “첫째는 젊은 피의 수혈이고, 둘째는 열악한 예산 사정을 개선하는 일이다. 둘 다 난제지만.”
- 2024-03-1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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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과 만나는 남도 답사 1번지
- 사의재 (四宜齎) 꽃 한 조각 떨어져도 봄빛이 죽거늘 수만 꽃잎 흩날리니 슬픔 어이 견디리... ‘그늘이 되어주시던 주상이 승하하시고 나니 이 한 몸 간수할 곳이 없구나. 주상이야말로 나에겐 꽃이셨네. 꽃 잎인 한 분 형님은 순교하시고, 다른 한 분 형님은 따로 떨어져 다른 곳으로 유배되고...... 견딜 수 없는 것은 더 이상 희망의 창이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정약용은 그의 형들과 함께 신유사옥(1801년) 때 유배를 당한다. 그는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그가 강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를 둘러싼 세상은 온통 절망이었다. 유배가 그렇듯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무의미해 보였다. 그의 나이 40세. 그는 길을 잃었다. 눈에 보이는 길이 아닌 마음의 길, 인생의 길을 잃었다. 길을 잃은 그가 선택한 것은 미친 듯이 걷는 것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헤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패라는 상실감이기도 했고, 끝나버린 인연의 아픔을 곱씹는 것이기도 했다. 어쩌면 치밀하게 준비했던 인생 계획표가 없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진에 온 정약용의 초기 생활을 지켜보던 주막의 나이 든 주모가 어느 날 그에게 한마디 했다. “어찌 그냥 헛되이 살려고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부터 그는 변했다. 스스로 생활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사소한 기대를 통해 우선 현실을 극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은 의미 부여와 노력을 통해 절망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 태도를 바꾼 순간 다산은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때부터 4년 동안 그는 그곳에 머물며 후학을 양성했다. 또한, 삶의 의미를 철저하게 현실 속에서 찾은 다산에게 이 시기는 민초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묵묵하게 성실히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해서 본인이 묵은 방을 ‘생각을 맑게, 용모를 단정히, 말은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라는 의미로 ‘사의재(四宜齋)’로 지었다. 본래 경세제민을 실천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라기도 했지만, 이때의 시간이 그의 명저 ‘목민심서’를 구상하는데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강진군에서는 다산의 뜻을 기리고자 그가 유배를 와서 초기에 머물렀던 사의재를 복원하여 한옥 체험 시설로 운영하고 있다. 단순히 먹고 자는 공간이 아니라 복합 문화공간으로 구성하였다. 다양한 볼거리, 먹거리, 체험거리를 제공한다. 사의재가 있는 위치가 강진읍의 중심지여서 걸어서 ‘영랑 생가’와 ‘세계 모란공원’도 둘러볼 수 있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긋함과 함께 마루 턱에 앉아 고즈넉한 가을밤 달구경 하는 시간을 가져 보자. 가슴 깊숙한 곳에서 다산의 삶의 지혜가 울려오는 밤이 된다. 다산초당 다산 정약용의 외가는 해남 윤씨로, 어머니가 문인인 윤선도의 딸이다. 학문을 중시하는 외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강진으로 유배를 왔지만, 외가인 해남이 가까이에 있는 것이 다산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해남의 외가에는 자체적으로 장서를 수집해 보관해 놓는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유배기간에 학문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는 외가에서 마련해준 이곳 다산초당에서 1808년부터 유배가 끝나는 1818년까지 지냈다. 다산은 유배를 온 신분의 한계 때문에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지내면서 기존 제도의 개정을 논하는 ‘경세유표’, 지방관이 부패하지 않도록 권고하는 ‘목민심서’, 공정한 재판을 논하는 ‘흠흠신서’ 등 실학과 조선 유학, 법의학 등 500여 권의 저서를 썼다. 그의 생애 업적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에게 학문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였다. 기본이 유학자이다 보니 먼저 자기 성찰과 세계 인식의 기준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실학이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공부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변화가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 대해 그토록 많은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생겼던 것이다. 다산의 유배 생활로 인한 세상과의 단절을 메꿔준 이는 벗이자 스승이며 제자인 ‘혜장선사’였다. 그들은 대화하고 공감하며 화합하기 위해 초당 뒤 만덕산 백련사 가는 오솔길을 무수히 걸었다. 제한된 세상과의 통로였지만 소나무 숲길, 동백꽃 길, 차 밭으로 이어진 이 길을 걸으며 그는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터득했다. 가두어진 하루하루는 생의 의미를 사라지게 하는 물리적 장치다. 하지만 다산은 초당 지붕 끝에서 흘러내리는 가을비 소리에 번뇌를 멈추고, 약천(藥泉)에 달인 차로 속기(세속의 기운)를 씻으며 스스로 인생의 격조를 올렸다. 그가 위대한 이유다. 다산초당은 노후화되어 붕괴한 것을 1957년 복원한 것이다. 소나무 뿌리가 뒤엉킨 소나무 숲 ‘뿌리의 길’을 800m 정도 올라가면 고적한 유배 생활의 정취가 서려 있는 초당이 나타난다.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정석 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茶竈 ㆍ 차 달이는 부뚜막)’ 등을 초당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초당으로 가는 숲속 길에서부터 절제되고 제어된 기운이 느껴진다. 다산초당은 단순하다. 그 단순함이 다산 학문의 핵심과 통하는 것이다. 가을이어서 그런지 벌써 겨울이 기다려진다. 아마, 동백꽃 핀 다산초당 숲길을 걷고 싶어서 그런지 모른다. 백운동 원림 10년 동안 시베리아에서의 감옥과 유배 생활을 마친 후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스토옙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Notes from a dead house)”이라는 장편 소설을 썼다. 그는 감옥과 유배 생활을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집’으로 표현했다. 그만큼 유배의 시간은 고통이고 지옥 같은 생활이다.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본인 문학의 화두로 삼았던 도스토옙스키는 유배 생활을 통해 무엇이 모든 죄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을까? 그것은 ‘단절’이었다. 단절은 고립이고 대립이며, 증오와 이기주의의 시작이다. 유배지의 폐쇄적 환경인 단절을 벗어나기 위해 다산이 선택한 길은 ‘사랑’이었다. 사랑은 실천적 사랑과 공상적 사랑으로 나뉜다. 유배지에서 다산의 실천적 사랑은 후학 양성과 학문 탐구다. 공상적 사랑은 초의선사, 이시헌 등과의 교류와 월출산 줄기를 중심으로 한 자연과의 만남이었다. 다산이 제자들과 함께 강진의 자연을 만난 곳이 백운동 원림(園林)이다. 백운동 원림은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동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불린다. 17세기에 이담로가 조성한 이곳은 자연과 인공이 적재적소에 배치된 균형 잡힌 조화를 보이고 있다. 집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여 마당의 상지와 하지를 거쳐 아홉 굽이 휘돌아 나가는 유상구곡(流觴九曲)의 구조를 갖추었다. 화단에는 소나무, 대나무, 국화, 난초 등이 자라고 있다. 다산은 그림을 잘 그리는 초의를 시켜 ‘백운동도’를 그리게 했다. 스스로는 12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칭송하는 시를 읊어 시와 그림을 묶은 ‘백운첩’을 남겼다. 백운첩에 담긴 12곳이 ‘백운동 12 승경’이다. 1경: 옥판봉 (절경의 월출산 산봉우리) 2경: 산다경 (원림입구 동백나무 숲길) 3경: 백매오 (집 주변 언덕의 매화나무) 4경: 홍옥포 (대문 앞 단풍나무와 작은 폭포) 5경: 유상곡수 (마당의 여섯 굽이 물굽이) 6경: 창하벽 (다산이 붉은 먹으로 쓴 푸른빛 석벽) 7경: 정유강 (언덕 위, 용 비늘처럼 생긴 소나무) 8경: 모란체 (본채 아래 3단의 화단) 9경: 취미선방 (고즈넉한 세 칸의 초가 사랑채) 10경: 풍단 (창하벽 위 단풍나무) 11경: 정선대 (창하벽 위 정자) 12경: 운당원 (왕대나무 숲) 강진의 자연을 정원에 담은 이곳에서 다산은 견뎌냈다. 유배지에서의 견뎌냄은 사랑의 힘이었다. 강진 백운동 원림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8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백운동 원림에 가기 위해서는 주차장 옆에 있는 소나무와 동백나무 우거진 숲길을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늘 그렇듯이 숲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신선한 자연의 공기가 온몸을 깨운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하얀 가을 햇살이 눈 부시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대문 앞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에 서려 있는 녹색 이끼는 자연의 시간이다. 낮은 담벽을 타고 올라오는 넝쿨은 수줍은 듯 여행자를 훔쳐본다. 곧게 뻗은 대나무 사이로 청정한 가을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앞마당이 보이는 툇마루에 앉아 한나절을 보내고 싶다. 다산처럼 건너편 차 밭에서 실려 오는 가을내음을 맡으면서 자연과 통(通)하는 시간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 2019-11-04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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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영하 장서각 관장, 조선의 미식가를 통해 현대의 미식을 탐구하다
- 음식인문학자로 알려진 주영하(周永河·57)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관장에겐 ‘언젠가 한반도 음식 역사를 집필하리라’는 포부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최근 그는 저서 ‘조선의 미식가들’을 통해 신작로처럼 펼쳐질 조선시대 음식의 역사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를 놓았다. 여기에 조선의 미식가 15인이 글로 남긴 음식 경험은 훌륭한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단순히 에피소드 나열식의 연대기가 아닌 인물에게서 발견한 시대적 보편성과 특수성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음식 문화를 짚어 가보려 한다. 프랑스 법률가 장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하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개인의 음식 경험과 취향을 통해 그 사람의 삶을 유추할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같은 맥락으로 주영하 관장은 역사적 인물이 글로 남긴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 사람은 물론, 나아가 조선시대 식생활의 실체를 엿보고자 했다. 음식은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부패해버려 유물처럼 실재(實在)를 보고 연구하긴 어렵다. 때문에 주 관장은 조선시대 요리책뿐만 아니라 시집, 문집, 일기, 여행기, 편지를 비롯해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역사 기록까지 두루 살피며 자료를 모았다. “맛에 대한 취향은 시대마다 다릅니다. 한 사람의 음식 경험에는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황과 역사가 담겨 있죠. 그 점에 주목해서 2011년부터 음식에 관한 글을 저자별로 나눠 정리했어요. 처음에 다루려던 인물은 100명이 넘었죠. 그중 맛의 표현을 가장 절묘하고 풍부하게 남긴 이들을 기준으로 계층, 성별, 직업 등을 고려해 인물을 가려냈습니다.” 그렇게 선정한 허균, 영조, 이덕무 등 15명을 일컬어 책의 제목인 ‘조선의 미식가들’로 명명했지만, 그는 현대인들이 떠올리는 미식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더니 “제목만 보고 속지 말라”(?)는 당부를 덧붙였다. “요즘은 ‘미식가’ 하면 음식 맛이 좋은지 나쁜지 등을 잘 품평하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조선시대엔 그런 말이나 의미를 지닌 표현은 없었어요. 대신 ‘맛을 안다’는 의미의 ‘지미(知味)’ 또는 ‘지미자(知味者)’가 있었죠. 어쨌든 요즘 말로 제목을 달았지만, 아마 ‘미식가’라는 말에 현혹돼 재미있는 내용이라 여기는 분들이 있을 거예요. 솔직히 내용이 꽤 어렵습니다. 대중서보단 학술서에 가깝죠. 단순히 맛이나 요리 정보를 주기보다는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그 음식이 지닌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주는 책이었으면 해요.” 실체 없는 전통 한식의 프레임 주 관장은 단편적인 주제로 그때그때 단행본을 내기보다는, 학자로서 기획한 큰 맥락 속에서 체계적인 작업을 해왔다. 그런 점에서 몇 해 전 출간한 ‘식탁 위의 한국사’,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등은 ‘조선의 미식가들’ 시리즈로 봐도 무방해 보인다. ‘한반도의 음식 역사’를 집필하겠다던 그의 계획대로라면 먼 과거부터 순차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법도 한데, 먼저 출간된 두 책의 내용은 ‘오늘날 우리의 음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현재의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이라 답했다. “음식들의 기원이나 역사적 사실을 밝혀 연대순으로 나열한다고 의미가 있을까요? 그보다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먹어왔는가’라는 물음을 갖고 접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역사학이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를 거울로 삼는 학문입니다. 음식이라는 분야도 다르지 않아요. 생물학적인 음식에는 물질이 담겨 있지만, 문화적인 음식에는 생각이 담겨 있죠. 오늘날 한국인의 식사 방식이나 음식 문화의 문제들이 어떤 배경과 과정을 통해 형성됐는지, 현시점에 서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안목과 이해를 통해 미래 100년 먹거리에 대한 해답까지 찾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오늘날 한국 음식 문화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주 관장은 지나친 음식 민족주의와 한식 전통주의를 지적했다. “한식이 건강에 좋다, 우리 음식이 최고다, 그런 인식이 강하죠. 한식 세계화 등을 펼치며 마치 우리 음식만 우월한 것처럼 이야기하고요. 또 한국인이라도 김치 안 먹고 싫어할 수 있는데, 그러면 문제라는 식으로 몰아가죠. 음식 민족주의가 만든 부정적인 결과입니다. 문화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시각이죠. 한식에 대한 전통주의도 너무 강해요. 우리가 먹는 한식의 뿌리는 조선시대가 아닌, 거의 20세기 이후 상업화된 음식에서 온 것들입니다. 흔히 고급 한식당에서 비싸게 먹는 요리들을 전통 한식이라 착각하는 거죠. 그렇게 전통이라 여기는 어떤 프레임이 존재할 뿐 사실 그 실체는 없을지도 몰라요. 오히려 그런 틀을 벗어나려는 이들의 노력도 받아줘야 하는데, 앞서 말한 이유들로 여전히 쉽지가 않습니다.” 괴로움 없이 소통하는 식탁 주 관장은 가족 식사가 사라져가는 현실에도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예로부터 한 지붕 아래 밥을 지어 먹는 가족을 ‘식구(食口)’라 불렀고, 흔히 ‘한솥밥을 먹는다’고 표현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혼밥’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더니 가족 외식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조선시대엔 식재료가 열악하고, 남녀 겸상이 어려웠다지만 요즘엔 맛집이 즐비하고, 가부장적인 문화를 많이 탈피했음에도 식탁 위의 소통은 힘들기만 하다. 주 관장은 자신 역시 실천이 어렵다고 토로하며, 이는 사회의 여건상 개인의 노력만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 진단했다. “저마다 삶에 여유가 없어요. 돈 벌어야지, 남들 가는 여행도 가야지, 자기계발도 해야지, 스마트폰도 봐야지, 일상을 사는 데 해야 할 일과 조건이 과거에 비해 많아지고 복잡해졌잖아요. 이것저것 할 시간도 부족한데, 소통한답시고 가족끼리 때맞춰 밥 먹자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또 매일 모여 밥 먹는다고 다 화목해지는 것도 아니고요. 그보다는 가족끼리 편안한 약속을 만들면 어떨까 해요. 가령 1년에 한 번은 온 식구가 근사하게 정장 차려입고 고급 레스토랑을 가는 거죠. 그때만큼은 즐거운 마음으로, 휴대폰도 딱 꺼두고요. 그렇게 식탁 위가 괴롭지 않아야, 음식을 통한 진정한 소통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 2019-10-29 1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