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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어머니]“어머니는 평생 외로운 여자였어요”
- ‘총체적 예인.’ 박윤초 명장을 칭하는 문화예술계의 표현이다. 세기의 명창이었던 만정 김소희 선생의 딸로,그녀의 예술적 기질을 모두 가진 듯한 박 명창은 판소리, 가야금 병창, 전통 춤 등 많은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TV 출연과 같은 요란한 활동과는 철저하게 담을 쌓은 채 자신의 예술 세계를 더욱 공고하게 다듬으면서 후학들을 길러내고 있는 박 명창의 열정은 어머니를 향한 사무침을 시대의 소리꾼답게 불사르고 있는 데서 나오는 것일까? 그녀가 말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이야기.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김소희. 본명은 김순옥. 아호는 만정(晩汀). 지난 세기를 살았던 한국 사람이라면 그 이름 익숙할, 5척의 작은 몸에서 나오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소리를 가지고 있던 명창. 고창에서 태어나 6개월간의 배움으로 14살의 나이에 남원명창대회 1등을 거머쥔 김소희 씨는 일제 강점기에 이미 레코드 회사들 사이에서 섭외 1순위였다. 또한 판소리뿐만 아니라 춤, 악기 연주, 서예 등에서도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국악계의 대모로 불리웠고 1964년에는 인간문화재 5호로 지정된 김소희 씨는 세계 속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명창이었다. 1995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후학들의 존경은 그녀의 영향력이 격함을 알려준다. 만정 김소희 씨에겐 딸이 한 명 있다. 바로 박윤초 명창이다. 그녀는 마치 어머니처럼 자연스럽게 명창의 자리에 올라 국악계의 거목이 됐다. “제 어머니는 천부적인 목소리를 지닌 소리꾼입니다. 성음이 청미한 애원성으로 심금을 울렸죠. 여기에 삶과 예술에 대한 자기성찰과 노력이 더해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창이 됐습니다.” 고맙디 고마운 ‘어머니이자 스승’ 1944년생인 박 명창은 20년 전부터 목이 더 좋아졌다고 말한다. 여전히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걸 보면 납득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어머니께서 1995년에 돌아가시면서 제게 미안하니까 목을 주고 가신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선몽을 자주 꿉니다.어머니가 온화하게 웃으시면서 나쁜 일을 암시해 주는 꿈을요. 어머니께서 곱게 화장하고 푸른색 한복을 입고 업어달라는 꿈을 꾸는 날에는 제가 다리가 아파서 일을 그르치게 된다거나 하는 일들이 생겨요.” 초등학교 5학년부터 일기를 써 왔다는 박 명창은 자신의 역사와도 같은 일기장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일기장을 보여줄 수 있겠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게 말이 됩니까”라는 말이 시크하게 돌아왔다. “일기장에 어머니에 대한 글을 투덜투덜 썼었는데, 어느 날 돌아보니 그 글들이 시가 되어 있더군요.” 당연한 일이었지만, 만정 김소희는 박 명창의 어머니인 동시에 스승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그 시절 뉴욕타임스에 보도되었듯이 마리아 칼라스를 능가하는 분이었어요. 어머니는 제게 판소리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발림(춤)을 잘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죠. 다행히 저는 발림의 중요성을 포인트로 하는 편이라 소리는 어머니보다 형편없지만 발림은 제가 더 잘했어요.”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된 어머니의 외로움 그러나 국악인이라는 쉽지 않은 삶. 그녀의 어머니는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평범한 아낙으로 요조숙녀의 길을 가지, 가시밭길 같은 국악인의 길은 반복하고 싶지 않다고 생전에 말했다고 한다. 와 같은 영화에서 봤던 치열하고 기구한 국악인들의 삶을 기억하는가. 그런 삶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박 명창이 기억하고 바라보는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에는 애증의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천상 여자였지만, 사랑을 받는 걸 못했어요. 제가 남편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아보니 알게 됐어요.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으셨던 어머니가 외로운 여자였다는 걸.” 박 명창의 아버지인 박석기는 거문고 산조의 달인으로 부잣집 둘째 아들에 동경제국대학교를 나온 재사였다. 그는 담양에 별당을 하나 만들어서 전국에서 똑똑하고 장래성 있는 사람들을 뽑아 모아서 국악을 가르치기로 했다. 국악을 지켜야만 문화적으로 일제에 지지 않을 수 있다는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거기에 뽑혀서오게 된 어머니 김소희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 게 이 모든 인연의 시작이었다. 재회, 어머니와의 전쟁이 시작되다 그러나 지성과 남성적 매력을 갖춰 인기가 많아 ‘걸물’이었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애정을 많이 주지 않았다. 어머니 또한 그토록 여성스러웠음에도 정작 사랑받는 법은 몰랐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기에 분노한 어머니는 박 명창이 2~3살 되던 때 박 명창을 두고 서울로 올라 갔고 박 명창은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됐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와 더 친할 수밖에 없었죠. 제가 요조숙녀로 예쁘게 크시길 바랐던 아버지였어요. 그분은 노래를 돈 받고 팔지 말라고 가르치셨죠. 하지만 아버지는 6·25 피난길에서 얻은 병으로 제가 열 살 때 돌아가셨어요.” 박 명창은 12살이 됐을 때, 다시 어머니를 만나게 됐다. 육당 최남선 선생의 막내 동생이고 박 명창을 잘 살펴 주던 큰어머니가 박 명창을 이끌어서 어머니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오매불망 저를 보고 싶었나 봐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를 보고 싶으면서도 함께 살고 싶진 않았어요. 나쁜 애였지(웃음). 그래서 만나긴 해도 서먹서먹했죠. 그때부터 어머니와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근본부터 완전히 달랐던 모녀 “저년은 사막에 내놔도 안 죽고 살 거다.” 어머니가 박 명창을 가리켜 했던 말이란다. 거친 표현이지만 그 정도로 박 명창을 믿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런 굳은 믿음이 있었음에도 만나면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건, 원래 서로의 성정부터가 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색깔부터가 달라요. 저는 쥐색이라든지 어두운 색을 선호하는데 어머니는 주황색, 분홍색 같은 밝은 색들을 좋아했어요. 눈썹이 좋은데도 거기에 또 뭔가를 그리려고 하시고. 완전 달랐지. 저는 어머니 속에서 나왔지만 아버지 딸이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대로 박 명창을 키우려고 했다고 한다. 그 근저에는 어머니 나름의 걱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너는 세상에 의해 멍들 거라고 하시며 저를 길들이려고 하셨죠. 하지만 전 절대로 엄마 스타일로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어요.” 완벽한 소리꾼으로 살아간다는 고독 그녀는 어머니가 한 말 중 ‘나는 슬퍼도 기뻐도 그리워도 외로워도 소리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있는 명창으로서의 무게만큼이나 말 그대로 예인으로서의 생활이 인생 그 자체였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제자들이 많았고, 그 제자들이 좀 성장했다 싶으면 어머니를 밟으려고 그러고. 저는 그게 보였어요. 하지만 제가 그걸 지적하며 어머니께 뭐라고 하면 제가 그들을 질투하는 거라고 화를 내시니….” 국가를 대표하는 명창의 딸이라는 입장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부딪치는 혈육이기에 기운이 빠져서, 어머니는 박 명창을 일대일로 못 가르쳐줬다. 그래서 박 명창은 몰래 어머니의 소리를 녹음기에 녹음해서 혼자 집에서 들으며 소리를 배웠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목소리의 키를 높일 필요가 없었는데 그렇게 소리를 높여서 부르곤 하셨습니다. 그거 사람 죽이는 일이에요. 그런데 어머니는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인지라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고달팠던 건지도 몰라요. 그에 비하면 저는 소리를 즐기는 편이었죠. 그렇게 높이지 않아도 하늘에서 내린 목소리라는 평을 받던 분이셨는데.” 하고 말하는 박 명창의 목소리에선 늦은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한의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박 명창은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와의 갈등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고, 대신 그 정이 벌판의 풀처럼 부드럽고 강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뒤늦은 깨달음은 안타까움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멈추어만 준다면 죽음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어머니를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가 지은 죄를 빌 최소한의 시간을 벌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승에서 어머니의 삶이 얼마나 굴곡 졌는지 알고 있는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안식을 바란다면 죽어도 품어서는 안 될 소망입니다.” 78세의 어머니를 보내면서 박 명창은 아무런 준비를 못했다고 자책했다. 할 수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긴 세월 동안 맺히고 맺힌 한의 매듭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될지를 몰라서였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한마디로는 도저히 나타낼 수가 없지만, 사랑과 미움의 뒤엉킴이라고밖에 표현이 안 됩니다. 평생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무슨 천형이라도 되는 양 남이 볼까봐 마음속 깊고 깊은 곳에 꽁꽁 숨겨놓고 거칠고 드센 미움으로 어머니를 대했습니다. 마음 밑바닥에 있던 내 삶의 불행의 근원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나를 위한 후회 없는 20주년을 만들고 싶어 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해독하기 어려운 상형문자라고 표현하는 박 명창은 자신의 부족했던 바를 늦게라도 채우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김소희라는 거목을 둘러싼 주변의 잡음은 그녀를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다. “같은 일을 하는 명창들과의 알력들도 있었죠. 어머니 추모 1주기 때 어머니에 대한 사무침이 워낙 강했어요. 그래서 후원을 받아서 넉넉하게 할 수 있었는데, 그때 그런 제 행동에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허무했죠. 저는 딸로서의 도리를 다하려고 하는 것뿐인데.” 세월이 흘러 어느새 내년 2015년이면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20년이 된다. 박 명창은 이번에는 후회를 남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모로 고민하던 차에 이명희 선생님, 김미숙 씨 등 진정으로 어머니를 사랑하는 분들로부터 도와주시겠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시금석이 되어 내년의 20주년은 부끄러 움 없이 치르고, 그 이후로는 그분들이 이어나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알림. 가슴 한 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리움, 안타까움을 쏟아내고 싶을 때 기자를 부르세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두 스푼, 추억 세 스푼 담아 차 한 잔 대접하겠습니다. 기꺼이 차 한 잔 마주하고서 부모님을 향한 마음을 온전히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불러보세요. 제보 받습니다.
- 2015-01-0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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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홀로 서서 함께 가자”
- 서울 강남구 동부금융센터빌딩,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100세 시대’를 말하는 전 부총리이자 현 SA(Senior Achievement) 대표인 강경식 대표의 눈빛은 노련함과 친절함으로 채워져 있었다. 대화 내 상식을 파괴하고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는 자유로운 사고가 그의 넉넉한 아우라가 되어 빛났다. 그가 제창한 SA는 시니어들의 성공적 노후를 위해 마련된 사회운동으로, 모바일을 기반으로 한 자유롭고도 다양한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다. 100세시대 참여마당, SA를 창립하게 된 배경과 시니어들의 등대로 자리하는 그의 존재감을 확인해본다.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Q. 100세시대를 맞이하는 현재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사실 100세시대 이야기들은 많이 하는데 우리나라의 모든 시스템이나 정책에 대한 발상 자체는 옛날 ‘환갑시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틀에서 100세시대를 생각한다는 점이 문제다. 소위 과거의 환갑시대 시스템은 인생을 초년, 중년, 노년의 삼분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공부할 때가 따로 있고, 일할 때가 따로 있다는 게 아니다. 그런 구별이 없이 일생이 하나로 쭉 연결이 되면서 이 두 가지가 함께 융합된 생활을 해야 한다. 과거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94~95년도에 21세기를 어떻게 만들 것이냐 해서 부문별로 모아 공론사업을 벌였다. 연구하고, 추진해봤지만 그런 것들이 지나고 나니 대개 일회성으로 끝나고 지속성이 없더라. Q. SA의 시작은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1960년대 초반에는 평균수명이 50대 초반이었다. 지금은 80대 초반 정도다. 따지고 보면 30년 정도가 길어진 셈이다. 그렇다면 패러다임이 변화해야 한다. 실제로 과거보다 늘어난 수명 연장의 혜택을 받아 현실을 살아가는 노인들이 있는데 그들에 맞춘 시스템이 필요하다 느꼈다. 그래서 사람들을 한번 모아봐야 겠다 해서 1년 반 전부터 시작하게 됐다. 처음에는 한 만 명 정도 모아서 대대적으로 하려 했으나 도저히 안 되겠어서 일단 시작했다. 차차 1주년, 2주년 행사를 하며 늘려갈 계획이다. 나는 2002년부터 아이들에게 경제교육을 하고 있다. 386들이 집권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에게 어릴 적부터 시장경제교육 을시켜야겠다고 느꼈다. 그러던 중 뉴욕에서 JA(Junior Achievement)를 알게 됐다. 아이들에게 경제 교육을 하는 매뉴얼이 굉장히 좋았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JA 코리아를 만들었다. 당시 그렇게 ‘청소년의 성공이 우리 모두의 성공이다’라고 외쳤던 ‘주니어 어치브먼트(Junior Achievement)’를 응용하여 ‘시니어의 성공이 우리 모두의 성공이다’라는 ‘시니어 어치브먼트(Senior Achievement)’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Q. SA를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슬로건이라면? ‘얼론 투게더’(Alone Together)다. “홀로서기, 그리고 함께 가자.” 각자가 자기 인생을 홀로 선다. 이제는 예전 대가족제 시대처럼 자식들한테 효도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얼마 안 있으면 은퇴 노인 한 명당 일하는 인구는 둘도 안 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결국은 ‘Alone!’ 각자 자기 인생을 홀로서기 해야 한다. 투게더는 혼자 사는 사회가 아니라 함께 사는 사회를 말한다. 오근재 전 홍익대교수가 쓴 이라는 책은 우리나라의 퇴직한 사람들이 마치 효용을 다한 쓰레기처럼 퇴적된 공간에 머문다는 내용을 담았다. 정년퇴직한 시니어는 지식과 경험을 고루 갖춘 우리 사회의 엄청난 리소스다. 그런 리소스를 활용하지 못하고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손해다. 이러한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것은 본인에게도 도움 되고 사회에도 도움이 된다. 자원을 어디에 투입해야 생산성을 발휘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Q. 구체적으로 실행하고자 하는 활동이라면 무엇이 있는가? 앞으로 해보고 싶은 여러 가지 활동 중 하나가 있다. 같은 아파트 사는 시니어하고 같은 아파트 사는 아이하고 함께 베란다에 상자 등을 놓고 농작물을 심는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본인과 아이에게 정서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농작물을 심고 관리하는 것은 시간도 할애해야 하고 손이 많이 간다. 이런 일을 시간이 비는 시니어들이 함께 하면 좋지 않겠나 하는 거다. 지역사회 발전에도 도움 되고, 자원으로서 은퇴 시니어들도 생산성 있는 활동을 하게 되고, 이런 것이 ‘투게더’다. 이 활동을 실행한 날 참여한 사람이 250명 정도 있었는데, 다들 취지는 좋다고 한다. 그리고 이걸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이냐 하는 이야기들이 처음부터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익 단체가 아니다. 나는 SA에 대해서 보통 생각하는 단체의 콘셉트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있다. 사실 SA에 모인 사람들 중 상당수도 무언가를 내걸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는데, 그런생각을 바꾸는 데도 오래 걸렸다. 1968년에 만들어진 해외의 어떤 학교가 있다. 이 학교는 4살부터 19살까지 학년 구분이 없이 다닌다. 교과서, 커리큘럼, 교실도 없다. 전부 앉아서 논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친구에게서도 배울 수 있고 선배나 후배에게서도 배울 수 있다. 하고 싶은 것을 게시판에 적어내면 아이들이 사인을 해서 함께 클래스를 만들고, 아이들 한 표, 선생님도 한 표, 교장도 한 표 이런 식으로 규율도 만들고 한다. 짜여진 틀 대신 자기 하고 싶은 것에 대해 파고들 수 있어 자신이 가고 싶은 대학에도 잘 간다. 그야말로 행복한 생을 사는 아이들이다. 우리 아이들은 살아갈 때 문제가 생기면 엄마부터 찾는데, 그 아이들은 문제해결능력을 스스로 키웠다. 교육이라는 것은 지식을 전수 받는 것인데, 요즘은 지식을 얻기 위해선 웹서핑만 하면 가능한 시대다. 그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자발적으로 찾아 몰입하는 것을 더 중요시 해야 한다. SA도 똑같은 것이다. 회원들 각자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함께 여행도 가고, 국내 탐방도 가고,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 하면 그것도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하고. 나는 성과가 천천히 나오더라도 계속 갈 생각이다. ‘Slow but Steady’. Q. SA에 가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스마트폰 번호와 자기 이름만 있으면 가입이 된다. 이메일 주소는 옵션이다. 전화번호는 있어야 그래도 소통이 되니까. 그 정도의 최소한의 소통 창구만 있으면 된다. 다른 무엇도 필요치 않다. 우리는 주로 문자로 소통한다. NSI(국가경영전략연구원) 사이트를 빌려 쓰는데, 홈페이지는 따로 만들어 갈 예정이다. 나중에 독자적으로 운영될 정도가 되면 사단법인 같은 구조는 복잡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형태로 운영하고자 하는데 현재 고민 중이다. NPO와 같은 형태의 단체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할수 있겠다. Q. SA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은? 미국에는 연령제한금지법이 있다. 우리나라도 연령제한금지법을 만들고자 한다. 활동하고 싶은 사람에게 제도적으로 장애가 되는 것은 없어야 한다. 소위 평생 경력으로 사는 데 방해되는 요소를 차단하자는 의미다. ‘돈 달라고 안 한다. 취직시켜달라고 안 한다. 우리가 알아서 할 텐데 못하게 막지는 말아라’는 것이다. 그게 민주주의 사회이고 시장경제 사회다. 이런 데에 관심이 있고 참여 가능한 사람만 모아서가고자 한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다 설득하고 이끌어 갈 수는 없다. 그러니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 다. 단, 무언가를 숨기거나 패거리를 만들진 않는다. 열려 있다. 전화번호만 있으면. 그래서 ‘참여마당’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강압적으로, 동기 없이 참여만을 강요하는 단체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우리는 오는 사람 안막고, 가는 사람 안 잡는 방식이다. 기존과는 다른 이런 방식에 익숙해지기까지 오래 걸리기 때문에 우선은 익숙해지게 하는 것 자체가 목표다. 그런 방침이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가 내가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다 흥미를 보이고 인연이 되면 이야기를 해서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언론에 공개된 오비들도 일부 소식지에 알리는 정도다. 입소문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SA를 통해서 여러 가지 활동이 있을 수 있다. 함께 북카페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떠한 부조리에 대해 사진을 찍어 신고하는 활동을할 수도 있는 것이고, 동네에 독거노인들이 사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이들을 돌보고 약간의 돈을 줄 수도 있고. 이렇게 하면 공무원을 채용하는 것보다 큰 부담 없이 사회에 필요한 일들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도움이 될 만한 걸 모아서 SA뉴스 이런 식으로 해서 몇 번 발행했다. 아직까지는 정보 위주였지만 앞으로는 활동 위주의 뉴스가 될 것이다. 그들의 활동을 알리고 그걸 보고 관심 있는 분들이 신청을 하는 것이다. 웹진도 활용할 계획이다. 운영 시스템은 준비돼 있으나 무엇이 올라 오느냐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마트폰을 통해 보고, 전달하고 쌍방향식으로 발전할 수 있겠다. Q. 삶의 성공 기준은 무엇인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되는 것 아닐까. 내년이면 고등학교 졸업한 지도 환갑이다. 동창들끼리 고졸 환갑잔치를 하려 한다. 내가 문집을 내면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고등학교 때의 강경식’에게 ‘지금의 강경식’이 편지를 쓰자는 콘셉트였다. 그걸 나중에 아이들에게 주면 좋지 않겠나 했는데, 반대가 심해 채택은 되지 않았다. 이런 것이 어찌 보면 과거로의 복귀다. 인생이라는 것은 한 번 살지 두 번 못 사니까 그렇게라도 복귀해보자 하는 것인데, 다들 복귀하기 싫단다.(웃음) 그 친구들이 봤을 땐 내가 인생을 다 이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있다. 우리 살 때는 가난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생각을 못 했다. 선택의 기준이 좁았다. 요새 아이들도 그런 좁은 선택의 기준을 강요받는 게 안타깝다. Q. 후배 시니어들에게 던지는 화두라면? 내가 골프를 가끔 치는데, 스코어를 안 본다. 잘 치고 기분 좋은 것만 기억한다. 애써 나쁜 것을 뭐 하러 알려고 하나.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을 되풀이하지 않는 선에서 끝내고 그 기억은 털어버린다. 그리고 사람마다 취향도, 롤모델도 다르다. 그러니 자신의 고정관념을 덮어씌우는 것만은 안 했으면 좋겠다. 나도 누군가 조언을 구할 때 그 사람이 아주 잘못된 길로 갔을 때만 지적하는 정도다. 그 사람의 선택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는 말을 해줄 수도 없고, 그 사람 자신도 어떠한 선택을 했다고 후회할 수도 없는 법이다.
- 2015-01-0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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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AVO LIFE INTERVIEW]“중년의 멋은 지성미” 新한국형 마담 오선영 미래갤러리 관장
- 오선영 미래미술관 관장과 인터뷰를 하는 내내 감탄했다. 그녀가 보여주는 나이를 지워버리는 젊은 아우라에. 전업주부였지만 자기계발을 거듭하여 자신의 삶을 완성해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는 예술을 즐기고 배우면서도 내조를 잘하는 한국적 마담의 이상적인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처음 나온 질문이 ‘브라보 라이프 스타일이 무엇이냐’는 건 그러한 모습에 대한 의문이 그대로 나온 결과였다. 스타의식과 끼 넘치는 그녀에게 삶을 즐기는 법에 대해 물어봤다.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것을 통해 시간을 보내면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뭔가 결여된 것이다. 결여는 대개 타인과의 비교로부터 온다. 그러나 오선영 미래갤러리 관장은 주변 사람들이 부러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부러워 한 적 한 번도 없었어요, 굳이 말하자면 어떤 일을 해도 인컴(수입)이 없는 생활을 계속 했기 때문에, 어느 날 나도 인컴(수입)이 있는 일을 해봤으면? 하는 걸 느낌 적은 있어요. 그래서 강남시니어플라자의 CF 모델을 신청하려고요. 10월에 오디션이 있다고 해서 도전해보려고 해요. 그래서 워킹연습도 하고 있고, 워킹은 그 순간도 행복하고 건강에도 좋아요. 나이가 들면 건강해야 해요.” 예술은 인생을 살찌우게 하는 것 그녀가 하고 싶은 분야 또한 지금까지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하고 있는 일이지만, 미술 저변 확대를 위해 그림 자체를 감상을 못하거나 시간이 안되서 못하는 시니어들, 관심 없는 사람들을 위해 홍보해주고 티켓을 지원해주는 활동들을 하고 싶다는 것. 시니어들이 무료하게 보내는 것보다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그 안에서 봉사도 가능하게끔 하고 싶다는 게 오 관장의 생각이었다. “생각이 들게끔 하려면 기회를 통해 두루 두루 감상과 경험을 해야 하는 거죠. 문화적 감성과 식견을 키워주고 싶은 욕심에 시니어들에게 미술관 활동을 접하게 해주고 싶어요.” 자랑하는 것에 익숙치 않은 오 관장은 수줍게 말했다. 아울러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 등 예술 저변의 확대를 추구하고 싶다는 게 그녀의 포부였다고. 혹시 남편이 그녀의 삶에 간섭한 적은 있을까? 배우자의 삶에 관여하는 배우자는 종종 자기계발의 동인이 되기도 하지만 부부 갈등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궁금해서 남편이 권하는 취미가 있는지를 물어봤다. “권유가 전혀 없어요. 같이 살면서 한 번도 제게 뭐를 했으면 하고 말한 적 없어요. 그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스타일이에요.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걸 이해 못하죠. 그런데 우리 가족은 알아요.” 처음부터 금슬 좋은 부부였을까? “제가 사랑할 만한 조건을 갖춘 게 아니라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났다고 생각해요.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짝이 되면 누구나, 누구든지 남편의 옆 자리에 있으면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거죠. 내가 사랑받을 조건을 갖춘 아내여서가 아니라 아, 이 남자는 내가 아니라도 다름 사람에게 동반자라는 이유로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인생 후반전이 돼서 알았어요.”(웃음) 그녀는 남편과 맞선을 통해 결혼해서, 결혼 전에 남편에 대해 아는 부분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을 해보니 남편이 예술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파트와 일치하는 거야, 그게 제게 너무 행운이었어요. 남편은 형편이 안 되지만 능력이 있는 작가들을 알아보는 눈이 있어요. 돈이 될 거다 싶어서 그림을 사는 게 아니에요. 마땅히 도와줘야 할 작가라면 거리낌 없이 구입하죠. 남편은 그러한 예술적 감각을 바탕으로 문화와 철학이 있는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에요.” 오 관장의 말 속에서는 남편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사람을 구분하지 않으며 그 자체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점을 가장 존경스러운 점으로 꼽았다. 이쯤에서 티격 태격하는 중년부부들에게 도움 줄 만한 말을 꺼냈다. “당신은 왜 그래?” 같은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중년 부부는 상처받기 쉽잖아요. 따라서 역지사지 자세로 배우자를 존중하고 격려하며 배우자의 말을 경청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 것 같아요. 특히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자신감에 상처를 주는 일은 금물이죠. 이러다 말겠지, 좀 있으면 괜찮아지겠지하며 배우자의 감정들을 무관심할 게 아니라, 상대가 겪는 증상을 서로 정확히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스스럼없이 그녀는 “부부를 강하게 이어주는 방법 가운데 대화만큼 효과적이고 간단한 것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긍정심이야말로 젊음을 유지시키는 비결 오 관장의 말 속에서는 끊임없는 긍정심이 느껴졌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답지 않은 외모의 비결로도 긍정심을 들었다. “제가 편안하게 사니까 긍정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똑같이 긍정적이에요. 제 친정 오빠도 그렇게 얘기해요. ‘너는 지게꾼 아내가 되었어도 행복하고 흥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당연한 거 같아요. 저는 지금 현실에 만족하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해본 적 없으니까요. 그리고 아름다움과 칭찬하는 말을 원체 좋아하고, 남을 흉 보는 말은 듣는 것조차도 지루하고 괴로워요. 혹시 친구가 대화를 하면서 누군가에 대한 나쁜 말을 해야 스트레스가 풀릴 거 같다면 다른 상대를 찾는 게 낫겠다고 말하곤 해요.” 주위에 친구들은 그래서 좋은 일이 생기면 자랑하러 그녀에게 온다고 한다. 이처럼 아름답고 품위를 좋아하는 습관이 몸에 배여 있는 그녀는 블랙톤으로 옷을 입고 나왔다. 혹시 그러한 패션 감각 또한 그녀의 캐릭터일까? “비가 온다, 그러면 밝은 기분으로 코디를 해요. 장화를 신는다던지. 되도록 밝게, 하지만 때와 장소와 목적에 맞게끔 입는 편이에요. 봄이면 봄과 함께 걷고 가을이면 가을과 함께 걷는 듯한 옷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시니어들이 옷을 입는 것에 있어서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 조언했다. “나이가 들면 체형이 바뀌게 되어 있어요. 다듬어지지 않은 몸체를 그대로 드러나게 입는 것은 시니어가 환영받지 못하는 매너라고 보죠. 저는 옷을 제2의 인격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몸이 안 되는데 억지로 입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몸에 맞지 않는 그런 옷차림은 추하고 천해 보여서 격을 자연스럽게 떨어뜨리거든요. 예쁘다는 옷을 젊게 입는다고만 해서 젊어지진 않습니다.” 그녀는 옷을 입을 때 컬러가 최소 세 가지를 넘으면 안 된다고 밝혔다. 세 가지도 많고 두 가지 선에서 끝내라는 게 패션에 대한 그녀의 철칙. 색을 절제함으로써 기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생각하는 ‘멋진 남자’란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할까? “마음의 넉넉함입니다. 우리 남편은 젊었을 때부터 그랬지만(웃음). 내면의 멋이 있어야 해요. 그 사람이 고스톱을 치는데 혈안이 된 사람이라면 내면이 모두 고스톱일 텐데 멋있을 수가 있나요. 그런데 문화를 겸하지 않으면 지성미는 불가능해요. 중년의 멋은 과거가 만드는 거니까요. 체득화되어야 해요. 아쉽게도 지금까지 그렇게 못했으면, 지금이라도 문화와 예술을 접하려고 많이 노력해야 지성미 있는 얼굴에 남게 됩니다. 지성미 있는 시간을 할애해야 가치가 내재화된다는 말이 있어요.” 만남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진다 오 관장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남’을 선택했다. “만남이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음악과의 만남, 그림과의 만남, 사람과의 만남…. 사람과의 만남을 보면, 가족과의 만남이 있고 인생을 살찌게 만드는 사람과의 만남이 있기 마련이죠. 문화와 예술과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죽을 때까지 문화와 예술을 접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많아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종교의 중요성도 말했다. “살면서 종교가 있어야 할 거 같아요. 종교가 있으면 쉽게 해결 안 되는 고민도 해결되요. 큰일이 닥쳤을 때 작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죠.”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 버킷리스트에 대해 물었다. 지금까지 시원시원하게 단도직입적이었던 그녀의 대답은 마지막까지도 분명했다. “난 성악가가 되고 싶어(웃음).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어렸을 때만 해도 ‘평범하게 살려면 너가 평범해야 한다’는 아버님 말씀이 있어서 그렇게 못했거든요.” 엔터테인먼트 끼가 가득하다. 오 관장의 인상, 그리고 시, 도자기, 꽃꽂이 등 다재다능한 재능에는 그러한 예상을 짐작케 하는 강한 힘이 있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무반주로 부른 그녀의 노래 실력은 깐소네, 샹송을 넘나들고 있었다. 대한민국 중년여성이 멋지게 산다는 것이 무언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었다.
- 2014-08-2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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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AVO LIFE] “농사가 바로 예술입니다”
- 쌈지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하여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예술적 기질을 가진 독자적 토종 패션 브랜드 쌈지. 10년 동안 운영됐던 예술가들의 인큐베이터 쌈지 스페이스,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뮤지션들의 축제의 장 쌈지 사운드 페스티벌, 인사동의 쌈지길 등은 쌈지라는 브랜드가 얼마나 혁신적이고 감각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결과들이었다. 그러나 기업으로서의 쌈지는 2010년에 부도가 났다. 쌈지의 주인장이었던 천호균 대표는 ‘장사’를 버리고 ‘농사’로 인생의 두 번째 시작을 드라이빙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쌈지의 정신을 농업과 연결시킨 (주)쌈지농부를 통해서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bravo-mylife.co.kr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저는 남들 신경 엄청 쓰는데 남들은 제가 신경 안 쓰는 줄 알아요.” 1949년 생 소띠, 올해로 예순여섯 살인 천호균 대표의 첫 모습은 ‘쌈지’라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신적 브랜드의 수장다운(?) 수더분한 외모와 소년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는 10여 년 전, 예술인마을에 먼저 자리를 잡은 지인의 소개로 헤이리 파주에 들어오게 됐다. 그리고 (주)쌈지농부를 세우고, ‘농사가 예술이다’라는 슬로건으로 농사와 예술의 결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쌈지에서의 ‘예술’을 농업으로 이어가다 천 대표는 쌈지농부를 시작하면서 특히 느림의 미학을 조명하는 슬로우 아트(slow art)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어떤 작가는 농사를 짓는데, 밭 이름이 ‘반만 먹자’다. 농사를 지어서 사람은 딱 반만 먹고 반은 동물들과 나눈다. 원래 농사는 같이 먹으라고 하는 것, 그 철학에서 출발한다. 갤러리에서 병아리를 부화시켜 2주 정도 키워 독거노인들에게 기부하는 프로젝트를 하는 작가도 있다. “쌈지를 할 때, 장사를 하면서도 마케팅을 예술로 했죠. 그 아트 마케팅을 농사에서도 융합시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쌈지에서 시도했던 ‘예술’을 계속 이어간다는 의미가 되겠죠.” 그는 예전 인터뷰에서 과거에 패션디자인상 심사위원장을 하면서 ‘아름다움에는 순위가 없다’는 문제적 심사평을 낸 바 있다고 자평한 바 있다. 교육과 사회는 나름의 기준을 세워서 아름다움을 고정시키려 하는데, 그는 모든 생명이 ‘생긴대로’ 저마다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편견 없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굴해서 보여주는 이가 예술가라는 게 그의 지론. 생각해보면 농업은 그런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실현시키는 가장 보편적이고도 익숙한 기술 아니던가. 천 대표는 과거 쌈지 시절의 예술과 지금의 예술이 어떤 점에서 다르냐는 질문에 지금 농업을 통해 하는 예술은 거대담론으로 세상을, 환경을 바꾸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농업의 생산성과 예술의 가치를 합치니 지속가능, 정의, 나눔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히는 천 대표의 지론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농업을 시작하니 가능한 한 농사하는 마음으로 장사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형보다는 내용이나 가치에 충실하게 말이죠. 그 절실함을 담다보면 지속가능한 예술로 이어집니다,” 농부할아버지, 손녀와의 소통 비결… 측은지심을 알게 되다 농업을 하면서 천 대표는 세 명의 손녀들과 더욱 친근하게 지낼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식물이라는 돌보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약자를 돌봐서 길러내야 하는 농업의 특성이 소통의 비결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배경이나 교육이 아이들의 착한 속성을 계속 유지시켜 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약자를 측은하게 생각하잖아요? 그런 마음을 유지시켜주는 교육 말이죠. 농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약한 것들에 대해 측은하게 생각하게 되니까, 그게 아이들의 속성하고 일치하는 거 같아요. 농업이 만들어 준 제 속성이 손녀들의 속성을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거죠.” 인생이모작을 진행하는 시기의 동반자와의 관계도 궁금했다. 사실 많은 시니어들이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동반자와의 관계에 관해 고민한다. 취미나 여가를 찾으려고 애쓰게 되는 건 동반자와의 관계가 불성실해진 것에 대한 반대급부가 아닐까. 그런데 이 부분에서 천 대표는 거의 ‘완성형’이었다. “자랄 때 아버지가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분이었어요. 그러면서도 가정일을 챙기셨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아내를 위하는 문화를 알게 됐어요. 그리고 살다 보니 여자들이 아는 게 참 많더라구요. 그렇게 자라고, 살고 배워 오면서 아내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됐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생각이 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 말 잘 안 듣잖아요? 그런데 저는 습관이 아주 잘 되어 있어요(웃음).” 천 대표는 부인을 ‘감사야’라고 부른다. 늘 배울 부분이 많은 사람이라 감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결혼할 때부터 ‘배우자’는 생각으로 부인을 배우자로 택했는데, 실은 ‘마누라말 잘 듣자’는 습관이 되다보니 얻게 된 것. 생각의 밭, 마음의 논을 가꿉니다 천 대표는 자신이 아직 초보 농부라고 고백한다. 말하자면 이제 막 인생 2막을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중이라는 것. 그래도 먼저 시작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시대의 일가를 이뤘던 사람으로서 인생이모작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말해 줄 수 있을지가 궁금하여 물어봤다. “농부를 하다 보니 생명의 가치를 알게 됐습니다. 그 가치를 소비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돈을 많이 벌 때와 비교하여 행복하냐구요? 돈을 많이 벌면 많이 버는대로 만족스럽죠. 하지만 지금은 가치를 추구하다 보니 행복을 느끼게 되요. 만족보다는 행복을 찾아라,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생긴대로’를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에 가장 멋스러워 보이는 천 대표는 수익이 좀처럼 나지 않을 것 같은 ‘달동네’(천대표가 표현하는 절실하게 살기 위한 공간)에서 그만의 노련한 솜씨로 예술과 농사를 엮어 농부와 소비자의 소통을 꾀하고 있다.
- 2014-07-01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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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 CLASS]①VVIP만의 숨겨진 비밀정원 ‘담담각(淡淡閣)’
- 소위 로얄 패밀리, 연봉 2억원 이상, 기업 오너, 자산가와 전문 경영인, 스포츠 스타와 문학인 들이 와서 쉬는 곳. 그러나 오로지 한 손님, 한 가족만을 위한 공간으로서 존재하는 곳. 강화에 위치한 담담각(淡淡閣)은 조용한 자신만의 프리미엄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20년 동안 준비된 공간이다. 그동안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알려져 왔던 담담각의 특별한 모습을 담백하게 담았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bravo-mylife.co.kr 사진 장세영 기자 photothink@etoday.co.kr 담담각(淡淡閣)의 도우미와 집사들이 바쁘다. 디테일한 취향에 따라 저녁 식사를 위해 더덕구이, 바비큐 숯과 그릴 장비를 준비하고 어디선가 테이블을 가져와 정원에 가지런히 셋팅한다. 바지런히 패 둔 장작을 가져와 벽난로를 피우니 거실이 금방 따뜻하게 데워진다. 손님들을 위해 호박죽, 전복죽으로 건강한 아침이 차려졌다. 게다가 직접 재배한 상추, 딸기, 고구마, 건강한 오골닭이 매일 낳는 담담각표 유정란을 삶아 강화순무김치와 함께 얌전히 차린 아침 테이블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정갈하고 예의 바르게 손님들의 불편함을 해결해 주는 집사ㆍ 도우미들은 다른 어떤 숙소에서도 느껴 보기 힘든 한국식 명품 서비스를 보여줬다. 그들만을 위한 새로운 문화공간, 현대판 아방궁 한국을 방문한 글로벌 기업들이 전통문화를 경험하고자 숙소로 임대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일반에 문을 열게 됐다. 집 전체를 대여하는 조건으로 임대료는 하루 150만원 선. 회의룸과 리셉션 장소도로 적합한 영빈관을 제외한 모든 공간을 한 가족이나 한 팀에게 통째로 빌려준다. 한 번 다녀간 사람들이 재방문하기 때문에 굳이 홍보나 광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현재도 10월까지 예약이 차 있는 상황이다. “짬짬이 시간 내서 조금씩, 계속해서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담담각의 규모가 크다는데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한 저로서는 규모가 큰지 작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3개의 정원과 2채의 한옥(본채, 행랑채), 3개의 침실과 욕실, 2개의 거실, 별도의 쉼채로 구성된 5000평 규모의 담담각은 완공까지 무려 20년이 걸렸다. 소유주인 지동훈 강화한옥문화연구소 소장이 긴 시간만큼이나 공을 들인 건 소수의 그들만을 위한 완벽한 휴식처로서의 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걸 증명하듯 내부 곳곳에서는 진품 골동품과 미술품이 놓여 있어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격조 높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덕망있는 분들은 가족 여행을 이곳으로 오는 경우가 많은데, 어른들은 한옥이 정서에 맞는 편이지만 아이들은 불편해 할 줄 알았는데 너무 좋아하고 즐거워 하더군요.” 지 소장은 “불면증인 분들도 여기 와서는 잠도 푹 주무시고 하루 머물다 가면 생명이 연장된다는 생각이 든다고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실 때 가장 보람이 있다”며 웃는다. VVIP만을 위한 완벽한 휴식처를 만들다 한옥의 공간이라 빛과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볕 몇 조각이 어우러지는 방마다 그의 수집 작품에 터를 잡는다. 저마다 삶과 체취를 품은 작품들은 독특한 예술적 분위기를 뿜어낸다. 왠지 모를 행복감이 밀려온다. 특별한 프라이빗 공간을 나름 재해석하고 연출함으로써 담담각은 럭셔리하게 정취가 물씬 익어가고 있다. 5000평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돌담은 지 소장의 수집 인생의 대표 작품이다. 강화도 자연석으로 돌담을 쌓고 한옥 바깥은 원형을 유지하면서 내부는 현대인이 생활할 때 불편하지 않게 재배치했다, 새 둥지도 지방에 내려가서 입수하는 등 꼭두 소품 하나 하나 애정을 갖고 배치하고 천천히 뜯어 고친 결과 우물이 있던 마당이 부엌으로, 거실로 바뀌며 집이 커졌다. 각 방과 거실, 주방 곳곳에 좋은 컬렉터와 좋은 스토리텔링을 보여주고 있는 지 소장은 추억과 취향을 작품 하나 하나에 깃들게 하고 싶어했다. 계단의 장대석은 서울 상왕십리 공사 현장에서 가져왔다. 연개소문 생가에 가서 소나무를 어렵게 모셔와 정원에 심었다. 고재상을 거치지 않고 20년간 직접 발품 팔며 사 모으니 이제 전국에서 고귀한 물건들이 있다 싶으면 지 소장에게 먼저 연락이 온다. 주한 유럽연합(EU) 상공회의소 산하 유럽·코리아재단의 이사장으로도 있는 지 소장은 “월급 타서 아파트·상가 같은데 투자하지 않고 한옥 가꾸는 일에 돈을 쓰니까 사람들은 저 보고 미쳤다며, 시간이며 노동력까지 버리느냐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왔다”고 말했다. 1인용 침대와 쇼파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북유럽풍 스타일 가구와 뱅앤올룹슨 오디오를 설치한 쉼채는 원래 경기도 용인에 있는 조그만 절의 본당이었다. 도시개발로 철거될 절을 옮겨놓은 것. 지 소장이 담담각에 쏟는 스케일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빈관 앞 입구 마당도 현재는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으나 조만간 박물관을 꾸밀 생각이다. 또한 이미 논밭을 일구고 있는 담담각 마을 입구 터에도 조만간 카페를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 2014-06-26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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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영의 서울 숨은그림 찾기]복원된 안평대군의 별장터 '부암동 무계원'
- 따뜻한 햇살을 맞은 봄꽃들이 환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산책이 더욱 즐거운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서울의 대표적 산책로로 꼽히는 인왕산 자락 종로구 부암동 뒤편에 무계원(武溪園)이라는 한옥 건축물이 2년여 공사 끝에 20일 개원식을 갖고 방문객을 받기 시작했다. 무계원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별장터 바위에 새겨진 무계동(武溪洞)에서 따온 이름이다. 안평대군은 이 자리에서 안견에게 자신이 꿈 속에서 본 신선계의 광경을 전했고, 안견을 이를 3일 만에 몽유도원도로 재현했다. 안평대군은 또한 현 무계원 자리에 무계정사(武溪精舍)를 지어 글을 읊고 활도 쏘면서 심신을 단련했다. 이런 역사가 숨어있는 공간에 서울시와 종로구가 옛 한옥의 아름다움을 더해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으로 새롭게 탈바꿈해 개장한 것이다. 무계원의 개원에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문화적 가치가 높은 대표적인 상업용 도시한옥이며 우리나라 요정 1호인 옛 오진암(梧珍庵)의 대들보와 서까래, 기와 등을 가져와 무계원 복원에 사용했기 때문이다. 소궁궐로 불릴 정도로 건축미가 뛰어났던 오진암은 1953년 서울시에 최초로 등록된 식당이자, 1970~8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서울 3대 요정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조선시대 말기 내관 출신 화가인 이병직이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요정정치가 한창인 1972년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 부수상이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에 대해 논의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고의 요정으로 명성을 떨쳤던 오진암 등 요정집들은 1990년대 들어 강남 등지에 룸살롱 등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오진암은 2010년에 철거돼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필자가 방문한 22일은 주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무계원 주위 등산길로 등산과 산책을 나왔다. 하지만 개원한 지 이틀 밖에 되지 않은 무계원에는 홍보가 덜된 탓인지 방문객이 적어 다소 한적했다. 사주문 형식을 살린 무계원 대문을 지나면 안채와 행랑채 그리고 사랑채 등 세개의 건물과 함께 아담한 앞마당이 나타난다. 마당 한가운데 위치한 목련나무가 3월의 봄바람에 하나둘 꽃봉오리를 맷어 가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바로 마주한 안채는 다른 건물에 비해 오진암의 정취를 더 느낄수 있다. 옛 오진암의 자재들을 가장 많이 활용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들보와 서까래, 기와 등 구석구석 100년 넘은 세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실제로 대들보에는‘오진암 한옥을 옮겨 짓기’라는 글귀가 굵은 궁서체로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끌었다. 사랑채는 경사지를 이용한 루(樓)의 형식을 도입했다. 사랑채에 오르면 아래에 있는 안마당과 부암동 일대의 아름다운 경관을 두루 굽어볼 수 있다. 행랑채는 청진동지역에서 출토된 발굴석으로 조성한 석축 위에 5량가(五樑架) 구조로 구성됐다.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에선 인문학 분야의 원로들이 릴레이 강연을 진행한다. 안휘준·금장태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세종시대’와 관련한 인문학 강의를,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가 전통 영정화 최고위 과정등 문화 강좌를 이끌어 갈 예정이다. 또한 다도 등 전통문화 체험행사도 준비 중이다.
- 2014-03-27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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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영의 서울 숨은그림 찾기]우리나라 첫 정수장 '뚝도 수도박물관'
- 우리나라 최초의 수도정수장을 아시나요? 아마 매우 생소 할 것이다. 수도정수장은 현재 뚝섬 일대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현재 뚝도아리수정수센터 및 수도박물관)으로 서울숲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정수장이 만들어질 당시 뚝섬은 서울 시내의 청계천, 중랑천의 생활하수를 피해 오염이 적고, 유량이 풍부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었기 때문에 맑은 물을 취수하기 적당한 곳이었다.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은 본관과 별관 2개 완속여과지로 이루어진 수도박물관으로 탈바꿈 되어 2008년 수돗물 공급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상수도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물과 환경을 주제로 한 전시관으로 개관 하였다. 쌀쌀한 날씨로 수도 박물관을 찾은 날은 다소 한산했다. 하지만 입구에 커다란 수도꼭지가 환하게 인사를 하며 반기는 듯했고 조선 태조 이성계 때부터 100여년 동안 왕의 사냥터임을 상징하는 깃발인 독기(纛旗, 소의 꼬리나 꿩의 꽁지로 장식한 큰 깃발)도 눈에 들어왔다. 입구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물과 환경에 대한 상설 전시관이다. 생명 유지의 기본요소인 물의 소중함을 자연환경과 인간생활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특히 물과 생명체와의 관계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을 아껴 쓰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각종 시청각 매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2개의 전시관을 보고 나오면 옛 근대식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빨건 벽돌의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이 송수펌프실로 사용되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수도박물관 본관 이다.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은 1908년(융희 2년) 9월 1일부터 수돗물을 생산하여 공급하기 시작했던 곳으로 완속여과지와 함께 서울시 유형문화재 72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100여년전에 사용 되었던 펌프와 기중기 등 많은 볼거리들이 기존의 건물과 자연스럽게 잘 어우러져 전시되어 있다. 본관 오른쪽에는 새들이 노닐고 있는 잔디 밑 지하에 완속여과지가 위치해 있다. 미생물 등의 찌꺼기를 걸러내던 시설물로 준공 당시에는 5지였으나 1932년 확장공사를 통해 현재는 6지가 남아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철근콘크리트 구조물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지형적으로 주변보다 낮은 곳을 파내어 자연적으로 물이 흐르도록 하고, 바닥에 두께 약 25cm의 자갈층과 75cm의 모래층을 두어 한강물을 통과시켜 친환경적 방식으로 물을 걸러내었다. 이렇게 취수-침전-여과-정수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수돗물은 마지막으로 송수펌프실을 통과한 후 1908년 9월 1일부터 하루 12,500톤의 수돗물을 시민 125,000명에게 공급했다 수도박물관을 방문 통해 물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고 100년 전 우리 선조의 친환경적 물 관리에 지혜 또한 엿볼 수 있었다. 사전 예약을 하고 방문을 하면 수도박물관 옆에 위치한 뚝도아리수정수센터 관람도 가능해 과거와 현재의 수돗물의 정수과정을 한눈에 확인 할 수 있다.
- 2014-03-13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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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영의 서울 숨은그림 찾기]독립과 민주정신이 살아 숨쉬는 '서대문 형무소'
- 따스한 봄기운이 완연한 지금, 남도 쪽은 벌써 여기저기 봄 꽃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청마년 시작이 엊그제인데 벌써 3월이다. 식민지배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3월은 특별하다. 최근 일본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군국주의와 우경화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 또한 역사를 세탁하며 미화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어 봄의 불청객 미세먼지처럼 우리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삼일절을 앞둔 22일 근현대 우리민족의 수난과 고통으로 상징되고 있는 서대문 형무소를 찾았다. 식민지지배와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숨결이 살아 흐르는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10월 21일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일본이 국권 침탈을 시작하면서 일제가 만든 시설로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1923년 5월 5일 서대문형무소로 변경된 후 1945년 해방까지 국권을 되찾고자 노력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고, 처형되었다. 이곳이 삼일절을 맞아 더욱 의미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포함한 3,000명의 애국 시민과 학생들이 한꺼번에 이곳에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관순열사는 지하 여자 독방에서 악형에 시달린 끝에 순국했다. 해방 이후에는, 1987년까지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이 수감된 서울구치소로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아픔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역설적으로 ‘독립’과 ‘민주’정신을 가장 잘 상징하고 있는 장소이다. 서대문형무소는 20여개의 건물과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빨간색 벽돌 건물과 담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100여년도 넘은 건물들이지만 오래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상당히 넓었고 억울한 독립운동가들의 한이 서려 있어서 인지 다소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형무소 입구에 들어서면 전시관 (보안과청사)과 중앙사가 나타난다. 서대문 형무소의 전시관 1층은 형무소의 정보검색과 형무소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전시관 2층은 민족 저항실로 독립운동가들의 수감자료와 함께 사형장 지하 시신 수습실이 전시되어 있다. 사형장 한 가운데 전시된 사형수들의 사진중 유관순 열사의 사진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지하 전시실은 일제장점기 보안과청사의 지하 취조실로 생존 독립가의 육성 증언을 통해 폭압적인 식민지 통치의 실상을 보고 경험 할 수 있다. 옥사는 11옥사와 12옥사 그리고 여옥사가 각각의 건물로 되어 있다. 11옥사와 12옥사는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1920년대 감옥건물 원형이다. 11옥사는 관람객들이 직접 감방 안에 들어가 수감 체험을 할 수 있다. 여 옥사는 유관순열사를 비롯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수감한 곳으로 1979년 철거 2011년 복원 되었다. 현장 학습을 나온 초등학생 등을 비롯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형무소를 찾아 관심있게 전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국민유공자유족회 등 50여개 시민단체는 서대문형무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시민모임을 발족하고 적극 추진하고 있다.
- 2014-02-2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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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영의 서울 숨은그림 찾기]식민지 시인이 놓지않은 희망의 끈 '윤동주 문학관'
- 여러분 시를 읽으십니까?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니요 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 한다. 1년에 책 한권 읽기도 힘든 이때 시를 접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그런 우리들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가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정도의 싯구는 충분히 기억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시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 모국어로 쓰여져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일깨우고 있는 윤동주의 ‘서시’ 이다. 최근 반성 없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는 아베 정권이 들어서며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고, 평화헌법을 전쟁헌법으로 고치는 파렴치함을 보이는 등 한일 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자들은 미래를 논할 자격이 없다. 한참 추운 어느 겨울, 28세의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식민지 조국의 현실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노래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관을 찾았다. 윤동주 문학관은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사이 작은 언덕위에 위치해 있다. 2012년 언덕 위 가옥에 물 펌프 역할을 하다 폐쇄된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이소진 건축가가 개조해 만들었다. 문학관은 총 3개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제 1전시실에는 시인의 친필원고, 발간된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고 제 2전시실은 원래 있던 물이 가득 차 있던 물탱크의 천장을 뜯어 우물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성찰의 시간을 가졌던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의미에서 ‘열린 우물’로 만들었다. 약 10m도 되지 않는 그 작은 공간을 걷는 동안 ‘자화상’ 시 처럼 자신이 미워졌다가 다시 가엾어 졌다가 곧이어 추억이 되는 시인의 그 우물을 바라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제 3전시실은 물탱크를 그대로 두어 윤동주 시인에 관련된 영상을 상영하는 작은 극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물이 찼던 자리는 그대로 벽에 남아 있었는데 쓸쓸하고 외로웠던 시인의 생애가 그대로 오버랩되어 하나의 그림처럼 흔적을 남겼다. 윤동주 문학관을 나오면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자주 올랐다는 ‘시인의 언덕’으로 이어진다. ‘시인의 언덕’위에 오르면 앞으로 남산타워가 뾰족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화려한 현대 도심이 들어나 있고 뒤를 돌아 보면 여전히 푸르고 웅장한 북한산이 병풍을 치고 있어 옛 서울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윤동주는 이 언덕을 오르며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그의 생애를 곱씹으며 그가 바라보았던 생전의 서울을 생각해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순간순간 변해가는 지금 높은 건물들로 가득찬 풍경을 바라보며 지금의 이 풍요로움이 과거 많은 이들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길을 걸으며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지식의 책임을 생각했던 윤동주 시인을 비롯하여 말이다. 이번 여행으로 저도 참 오랜만에 시를 다시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읽은 시 ‘자화상’은 나에게 예전에 느끼지 못한 새로움으로 다가왔다. 여러분도 더 늦기 전에 아름다운 시의 풍미에 폭 빠져 봅시다 지금~~ 자화상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 2014-01-2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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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영의 서울 숨은그림 찾기]LP 10만장과 함께하는 아날로그 여행… 압구정동 '게스후'
- 최근 너무나도 빠른 사회 변화와 디지털에 대한 피로감 때문인지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와 복고 열풍을 타고 LP(Long Playing)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검은색 LP 음반 위 가는 선을 따라 뾰족한 바늘이 물 흐르듯 미끄러지면서 만드는 보드랍고 따뜻한 음색이 우리의 귀와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LP 음반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중고 LP의 수요가 늘고 대학가와 도심을 중심으로 소소한 LP 바(BAR)들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그러나 LP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은 서울에서 그리 많지 않다. 한때 성업했던 음반가게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회현지하상가, 홍대앞, 용산전자상가 등에서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음반 가게들은 서로 특화된 전문분야를 내세우며 마니아층 사이에선 이미 명물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직접 청음을 하기 어렵고 청음을 하더라도 여유 있고 쾌적한 공간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다. 이 같은 아쉬움 속에 LP 마니아 사이에서 최근 명소로 꼽히는 LP 중고숍 및 LP 바가 서울 강남에 오픈해 화제다. 시가 10억원에 달하는 10만 장의 중고 LP를 소장,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압구정동에 위치한 ‘게스후’ ’(02-547-9063)다. 게스후는 LP 마니아들의 욕구를 고루 충족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공간이다. 90평에 달하는 바에는 다양한 LP가 도서관처럼 천장까지 빽빽이 들어차 있어 직접 찾아보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게다가 시가 2000만원 상당의 JBL 파라곤 스피커로 본인이 직접 찾은 LP를 들어볼 수도 있다. JBL 파라곤 스피커 혼(Horn)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뮤지션이 직접 라이브로 연주하는 듯한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 게스후를 운영하는 김형신(43) 대표는 1998년부터 LP를 다뤄 왔으며 클래식, 샹송, 재즈, 메탈 등 장르를 불문하고 음악적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곳에선 그가 선곡한 클래식과 재즈를 설명과 함께 듣는 묘미 또한 색다르다. 게스후에는 중고 LP숍 공간과 청음실 공간을 따로 만들었다. 중고 LP숍은 김형신 대표가 홍대앞에서 운영하던 중고 LP숍을 정리해 재오픈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중고 LP숍은 중저가 LP를 판매하는 재팬 레코드와 희귀 레코드를 판매하는 33RPM으로 나뉘어 있으며 33RPM에서는 운이 좋으면 최고 수천만원에 달하는 LP를 구경할 수도 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최고가 앨범은 에르텔만의 바이올린 바흐 무반주(휘어진 활로 켜는 바이올린 연주)와 엔니코 마이나르디의 무반주 첼로 음반으로 둘 다 400만원을 호가한다. 카멜, 비틀즈 등 올드팝부터,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반스 등 스탠다드 재즈 넘버 그리고 수준 높은 클래식 앨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반이 존재하는 게스후는 수준 높은 음악적 문화충전 공간이다.
- 2014-01-10 1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