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수구다라니, 아주 오래된 비밀의 부적
일정 1월 28일까지 장소 국립경주박물관
‘다라니’는 부처의 가르침 중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주문을 말한다. 이 가운데 ‘수구즉득다라니’라고도 불린 ‘수구다라니’는 말 그대로 외우는 즉시 바라는 바를 모두 얻을 수 있다고 여겨져 삼국시대부터 널리 유행했다. 당시 사람들은 염송 외에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불상이나 탑·무덤에 봉인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특별전 ‘수구다라니, 아주 오래된 비밀의 부적’을 통해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수구다라니와 금동 경합(경전을 넣어두는 상자)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고대 인도어인 범자로 쓰인 것과 한자로 쓰인 것, 총 두 개다. 1919년 조선총독부가 입수한 유물로, 경주 남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는 다라니 두 개가 한 종이에 같이 배접된 직사각 형태였다. 이후 보존 처리를 거치면서 각각 분리 복원해 범자(29.7×30.3cm)와 한자(29.5×30.9cm)가 수구다라니의 원래 형태인 정사각 모양을 찾았다. 국립경주박물관 측은 “다라니에 대한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과 연구가 이어져 고대 불교 문화의 진면목을 좀 더 살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황영성 : 우주 가족 이야기
일정 2월 18일까지 장소 전남도립미술관
황영성 작가의 1950년대 말 초기 구상회화 작품부터 2000년대 입체 작품과 최근 작품까지 총 110여 점을 선보인다. 그의 회화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가족’이다. 소박한 시골집 가족에서 대자연의 뭇 생명들로 확대되고, 세상 만물의 공생을 담은 우주 가족으로 확장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가족에 대한 근원적 그리움에 바탕을 두면서 세상과 화폭을 잇는 그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 관장은 “황영성 화백은 한국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원로 작가로, 국내외 다양한 지역을 오가며 예술에 대한 쉼 없는 도전과 열정을 보였다. 이번 초대전을 통해 만물에 대한 포용과 인류애의 가치를 느끼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Stage
◇노트르담 드 파리
일정 1월 24일 ~ 3월 24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윤금정
출연 정성화, 양준모, 윤형렬, 유리아, 정유지, 솔라, 마이클 리, 이지훈 등
프랑스 3대 뮤지컬로 꼽히는 ‘노트르담 드 파리’는 1998년 프랑스 초연 이후 전 세계 23개국, 9개 언어로 번역되어 1500만 명 이상 관람한 대작이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으며, 15세기 파리의 혼란한 사회상과 부당한 형벌 제도, 이방인들의 소외된 삶을 보여준다. 이번에 6년 만에 한국어 버전이 귀환해 관심을 받고 있다. 그에 걸맞은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데, 주인공인 노트르담 대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 역은 정성화, 양준모, 윤형렬이 연기한다. 추악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에스메랄다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인물이다.
◇스쿨 오브 락
일정 1월 12일 ~ 3월 24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출 로렌스 코너
출연 코너 글룰리, 사미아 로즈 어피파이, 알라나 에스피널, 마키시그 아키우미, 사무엘 빅모어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쿨 오브 락’이 5년 만에 내한 공연을 펼친다.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은 로커답지 않은 외모로 밴드에서 쫓겨나고 집에서도 구박받는 듀이가 친구 대신 명문 사립학교 대리 교사로 위장 취업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듀이 역의 코너 글룰리는 “한국에서 정말 많은 사랑을 줘서 다시 올 수밖에 없었다. 2024년을 함께 즐기자”고 전했다. 평균 연령 11.5세의 아역 배우 17명 또한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다. 서울 공연은 3월 24일까지 열리며, 4월부터는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일정 1월 20일 ~ 3월 10일
장소 국립정동극장
연출 민새롬
출연 손상규, 김신록, 김지현, 윤나무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네 번째 공연으로 돌아와, 지난 시즌 참여했던 손상규, 김신록, 김지현, 윤나무 네 명의 배우가 다시 한번 관객과 만난다. 1인극 형태로, 불의의 사고로 뇌사 판정을 받은 19세 청년 ‘시몽’의 심장이 51세 여성 ‘끌레르’의 몸에 이식되는 24시간의 과정을 그린다. 한 명의 배우가 시몽, 죽음을 선고하는 의사, 남겨진 가족, 장기이식 수혜자 등 총 16개 캐릭터를 연기한다. 장기기증 24시간의 기록을 다양한 인간들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극은 삶과 죽음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Exhibition
◇아시아의 또 다른 바다
일정 7월 16일까지 장소 전남도립미술관
남해를 앞에 둔 지리적·문화적 특성을 가진 전남도립미술관은 ‘아시아’의 예술을 생각하며 ‘아시아의 또 다른 바다’전을 열었다. 과거의 바다가 지역의 경계로서 위치했다면 ‘또 다른 바다’는 시공간을 넘어 각기 다른 아시아의 지역을 공유하는 매체가 될 수 있다고 전시는 말한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와 연계한 전시로, 아시아의 바다를 주제로 16명의 한국과 대만, 일본 작가가 참여했다. 전시는 ‘파(波), 바다의 파동’, ‘몽(夢), 바다와 꿈’, ‘초(超), 바다 너머’, ‘경(境), 바다와 경계’ 총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전남 신안 출신인 한국 추상회화의 거장 김환기(1913~1974)의 작품과 미디어아트 선구자 백남준(1932~2006)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전통 수묵을 현대화한 대만 수묵화의 거장 리이훙(1941~)과 일본을 대표하는 표현주의 현대미술 작가 나카무라 가즈미(1956~)의 신작도 공개된다. 이지호 전남도립미술관장은 “남도의 남해와 이어진 아시아의 동서남으로 향해 서양과 동양, 어제와 오늘의 바다를 돌이켜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데이비드 호크니 & 브리티시 팝아트
일정 7월 2일까지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뮤지엄 전시1관
한국과 영국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진행되는 전시다. ‘살아 있는 현대미술의 역사’로 통하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60여 점을 포함해, 영국의 대표 팝아티스트 14인의 오리지널 작품, 판화, 사진, 포스터, 영상 등 15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전시의 부제인 ‘스윙잉 런던’(Swinging London)은 1960년대 사회적·문화적으로 급변하는 시기의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영국 런던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영국의 젊은 아티스트들은 광고, 영화, 사진 같은 대중문화 요소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의 대담하고 다채로운 작품들은 오늘날의 대중문화와 예술계에도 영감을 준다.
●Stage
◇리어왕
일정 6월 1 ~ 18일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연출 김시번
출연 이순재, 권민중, 서송희, 지주연, 최종률, 박용수, 임대일 등
2021년 첫선을 보인 연극 ‘리어왕 : KING LEAR’(이하 ‘리어왕’)이 2년 만에 돌아온다. 이순재는 초연에 이어 이번에도 ‘리어왕’ 역을 단독으로 맡아 무대를 책임진다. 88세인 그는 한국 연극사상 최고령 배우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리어왕을 연기한 배우 중 최고령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리어왕’ 제작사는 이순재를 최고령 리어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 신청할 예정이다. 이번에 마지막으로 리어왕 연기를 펼치는 이순재는 “나의 필생의 작품”이라며 “일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이기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소감을 전했다.
◇베르나르다 알바
일정 6월 16일 ~ 8월 6일
장소 국립정동극장
연출 변유정
출연 정영주, 한지연, 강애심, 김희정, 홍륜희, 장보람 등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20세기 스페인을 대표하는 시인 겸 극작가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희곡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원작으로 한다. 스페인 남부를 배경으로 권위적인 여성 가장 베르나르다 알바에게 억압받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알바의 다섯 딸이 품은 욕망을 열정적인 플라멩코 춤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국내에서는 2018년 초연, 지난해 재연을 거쳐 이번이 세 번째 시즌이다. 초연부터 출연하고 있는 정영주와 함께 오디션을 통해 새로 합류한 한지연이 주인공 알바 역을 연기한다.
◇모차르트!
일정 6월 15일 ~ 8월 22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권은아
출연 이해준, 수호, 유회승, 김희재, 선민, 허혜진, 황우림, 민영기 등
뮤지컬 ‘모차르트!’는 볼프강 모차르트의 천재 음악가로서의 운명과 그저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은 그의 고뇌를 그린다. 국내에서 2010년 초연됐으며, 이번에 7번째 시즌을 맞는다. 주인공 모차르트 역에 이해준, 수호, 유회승, 김희재를 캐스팅하며 세대교체를 꾀했다.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토드 역으로 주목받은 이해준은 오디션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가장 먼저 캐스팅됐다. 아이돌인 수호와 유회승은 안정적인 가창력을 인정받았으며, TV조선 ‘미스터트롯’ 출신인 김희재는 이번에 처음으로 뮤지컬에 도전한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 Exhibition
◇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
일정 7월 11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자신만의 스타일로 영화, 만화, 음악 등 대중문화의 순간을 재탄생시킨 맥스 달튼의 개인전이 국내 최초로 열린다. 맥스 달튼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 주로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영화를 소재로 해 보는 이들의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대표적으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아트북 일러스트를 작업했으며, ‘스타워즈’, ‘메트로폴리스’ 등 SF영화를 정교한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이번 전시는 맥스 달튼의 영화 일러스트를 중심으로 포스터, 드로잉, 수채화 등 다양한 작품 220여 점을 살펴본다. 특히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한국 영화 ‘기생충’과 판타지 대작 ‘반지의 제왕’ 포스터 및 미공개 연작 8점, 초안 드로잉 등을 최초로 선보인다. 뿐만 아니라 비틀스, 밥 딜런 등 음악 거장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린 LP 표지와 동화책 일러스트 등도 전시해 그의 작품 세계를 다방면으로 조명한다. 특유의 물 빠진 듯한 빈티지 색감과 유머러스한 디테일로 관람객을 매료하는 그의 작품은 영화 속 한 장면을 유영하는 듯 환상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
일정 7월 11일까지 장소 일민미술관
샤머니즘과 우주론적 세계관을 예술적으로 탐구하는 ‘Fortune Telling: 운명상담소’전이 일민미술관에서 열린다. 운명과 상담소, 두 공간으로 이뤄진 이번 전시는 작가 17명의 작품으로 ‘운명’의 의미를 고찰하고, ‘상담’을 통해 내면을 깨닫는 여정을 마련한다. 1전시실 ‘운명’에서는 베토벤이 악상을 떠올린 숲속을 재현해 운명이 인생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공감각적으로 형상화한다. 빛과 어둠, 사계절, 음양오행 등 운명적 의미를 나타내는 신비로운 상징물이 내부를 가득 채운다. 2전시실 ‘상담소’는 사주포차, 본능미용실 등 작가들이 만든 6개의 이색 상담소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곳에서 관람객은 사주, 타로, 연금술 등 운명론적인 방식으로 스스로의 운을 시험하고,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본다. 이를 통해 미신이라 여겨지던 우주관을 예술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 하여금 깊은 내면을 성찰할 수 있게 한다. 이외에도 모바일 앱을 활용한 인터랙티브 게임, 살풀이 굿판, 전자음악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보다 입체적으로 전시를 즐길 수 있다.
● Book
◇그러라 그래 (양희은 저·김영사)
데뷔 51년 차에도 한 그루 느티나무처럼 늘 같은 자리에서 세월만큼 깊어진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 양희은의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지나온 삶과 노래, 일상의 소중한 순간을 마치 오랜 친구의 사연을 낭독하듯 따스하고 정감 있게 담았다.
“그러라 그래”, “그럴 수 있어” 어떤 근심도 툭 털어버리는 양희은의 말처럼, 이 책에는 쉽지 않은 인생이라도 정성껏 살아가고 싶게 만드는 애틋한 응원이 들어 있다. 그런 그녀만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 역시 편안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된다.
늘 여유만만하고 단단해 보이는 그녀도 순간마다 흔들렸던 시절이 있었다.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무대에 섰으나 자신을 향한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줄 사람이 없어 방어기제로 똘똘 뭉쳐 있던 이십대, 난소암으로 석 달 시한부 판정을 받은 서른 살까지, “모진 바람을 맞으며 그냥 서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세월이 많이 지나간” 인생이었다고 담담히 돌아본다.
“무릎이 ‘나 여기 있다’ 하고 위치를 가르쳐주고” 늘 서서 부르던 노래를 앉아서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일부였던 노래를 언젠가 떠나보내야 할 것을 예감한다. 몸은 자꾸 느려지고, 노년을 준비하는 동갑내기 친구들의 말이 마음에 차곡차곡 쌓인다. 또 치매 어머니를 모시며 ‘엄마가 떠나시면 어쩌나’ 마음 졸이다가도 마음과 달리 틱틱 쏘아대고,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후회 없는 헤어짐을 준비한다.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이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내용이다.
몇 십 년을 살아도 어렵고 지난한 것이 인생이지만, 그녀는 그동안의 실패와 어려움에 고마움의 인사를 전한다. 덕분에 “마음의 자리가 넓어졌다”고도 덧붙인다. 인생의 시행착오를 ‘탓’이 아닌 ‘덕’으로 표현하는 그녀의 여유와 넉넉함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파도가 밀려와도 “그러라 그래” 하고 맞설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백년 허리 1 : 진단편 (정선근 저·언탱글링)
스테디셀러 ‘백년 허리’의 개정증보판이다. 초판에서 고쳐야 할 부분을 대거 보충했으며, 허리 통증은 진화의 축복이라는 요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공간의 미래 (유현준 저·을유문화사)
건축가인 저자가 코로나19로 가속화된 각종 공간의 변화를 진단한다. 단순 공간 이야기뿐 아니라 주거 문제부터 국토 균형 발전까지 사회를 위한 거시적인 조망이 담겨 있다.
세계사의 탄생 (데이비드 크리스천 엮·소와당)
케임브리지 세계사 시리즈 한국어판으로, 복잡다단한 세계사의 발전 과정을 한눈에 보여준다. 200여 명의 석학이 저술에 참여해 주제별 다양한 시선으로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 Stage
◇나빌레라
일정 5월 14일~5월 30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출 이지나
출연 조형균, 최인형, 강상준, 강인수 등
최근 tvN 드라마로 방영되며 안방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있는 ‘나빌레라’가 창작가무극으로 관객을 찾는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인생의 끝자락에서 발레리노의 꿈을 품은 70대 ‘덕출’과 현실의 벽 앞에서 방황하는 20대 발레 유망주 ‘채록’이 발레를 매개로 함께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점점 희미해지는 덕출의 기억과 위태로운 채록의 삶을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발레단의 상황과 연결해 가슴 찡하게 풀어낸다. 창작가무극으로 만나는 ‘나빌레라’는 웹툰 한 컷의 감동과 드라마의 세밀한 감정선을 공연만의 매력인 현장성으로 살려낸다. 특히 독보적인 미장센이 돋보이는 이지나 연출가의 합류로 초연보다 안무 비중이 늘어났으며, 힙합, 재즈, 모던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활용돼 풍성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웹툰과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려한 무대가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예정이다.
◇지붕위의 바이올린
일정 4월 28일~5월 16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정태영
출연 박성훈, 권명현, KoN, 이혜란, 정은영, 서유진 등
1905년 러시아 유대인 마을, 중매결혼을 중시하는 아버지 ‘테비예’와 주체적으로 사랑을 찾아 나서는 다섯 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랜 전통 앞에서 구세대와 신세대가 갈등하지만, 마침내 서로를 포용하는 가족의 모습이 감동을 전한다. 결혼을 허락받은 딸의 기쁨과 그런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로 극대화된다.
◇포미니츠
일정 5월 23일까지 장소 정동극장 연출 박소영
출연 김선경, 김선영, 김환희, 김수하 등
2006년 개봉한 실화 바탕의 독일 영화를 뮤지컬만의 매력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살인수로 복역 중인 천재 피아니스트 소녀 ‘제니’와 60년 동안 여성 재소자에게 피아노를 가르친 ‘크뤼거’가 피아노를 매개로 만나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작품의 제목처럼 제니의 처절한 삶과 아픔을 담은 4분간의 피아노 연주가 강한 여운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2018년 초연 당시 전 좌석 매진 신화를 기록한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가 3년 만에 정동극장에 귀환한다. 초연을 함께한 뮤지컬 배우 정영주는 이번 공연에서 출연과 함께 프로듀서를 맡아 무대 안팎을 동시에 책임진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그녀의 연기 인생에 첫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겨준 작품이자, 프로듀서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그녀에게 뜻깊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에 참여한 소감은 어떨까. 배우와 프로듀서를 넘나들며 무대를 뛰어다니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베르나르다 알바’는 어떤 작품인가?
남편을 잃고 집안의 권력자가 된 베르나르다 알바가 자신의 다섯 딸에게 극도로 절제된 삶을 강요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딸들의 참아왔던 본능과 욕망이 움트고 표출되면서 갈등이 시작되죠. 알바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딸들에게 어떤 비수가 되는지 모르는 채 앞만 보고 달려가요. 처절하고, 어리석다면 어리석은 캐릭터죠.
Q. 여배우들만 출연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늘 듣는 질문인데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표현하는 작품에 여배우 열 명이 모인 것뿐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오랜 시간 휴머니즘에 대한 논의가 많이 이뤄지지 않았잖아요. 특히나 한국 공연계는 장르 편식이 심한 경향이 있죠. 그래서 여성 배우들만 출연하는 작품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지는 게 아닐까 해요.
Q. 작품 속 플라멩코의 역할은?
스페인의 정열적인 전통 안무인 플라멩코는 감각적이면서도 영리하게 인물들의 내면을 극대화화하는 역할을 해요. 안무의 한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 같죠. 마치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 살고 있는 여자들 같다고나 할까요. 단순히 몸짓, 춤 등으로 정의할 수 없는 존재예요.
Q. 프로듀서 데뷔인데 소감이 어떤가?
초연을 하고, 한 번으로 끝나서는 안 될 공연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작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다 보니 용기 내주는 회사가 많지 않았죠. 운 좋게도 제가 소속된 ‘브이컴퍼니’의 황주혜·최대성 대표는 이 공연에 대한 제 열정을 알아주었어요. 대단한 설득을 하지 않았는데도 프로듀서라는 직책을 맡겨주었죠. 엄청난 책임감을 안고 있는 상황이지만, 즐기면서 버티고 있어요.
Q. 배우로서 무대에 설 때와 다른 점은?
같은 공연을 다시 올리는 무게감은 배우로서 여러 번 경험해봤지만, 프로듀서로서 참여할 때는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프로듀서는 무대뿐 아니라 무대 바깥까지 모든 것을 살피고 분석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객석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하거든요.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해내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Q. 작품 외에 관심 있는 서사가 있다면?
극작과를 전공해서 습작이 좀 있어요. 각기 다른 분야에서 연기를 하는 4명의 여배우 이야기, 불후의 명작에 등장하는 치열한 5명의 전사들 이야기, 만화 속에 나오는 성공하지 못한 마녀들이 조찬회동에서 벌이는 이야기 등 아이디어가 꽉 차 있죠. 어설프고 완성도도 떨어지지만, 열심히 고쳐보면 덤벼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하나씩 자랑해볼까 해요.
Q. 이루고 싶은 최종 꿈은?
무대를 놓지 않는 것이요. 배우로서든 프로듀서의 위치이든, 왠지 무대를 떠나지 못할 수도 있는 운명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하. 너무 거창하죠? 그냥 예술 노동가로 장수하고 싶어요. 한 239살쯤까지?(웃음) 제 무대로 많은 분이 위로받고 용기도 얻는다면 한없이 감사할 것 같아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일정 1월 22일~3월 14일 장소 정동극장
연출 연태흠 출연 정영주, 이소정, 강애심, 황석정 등
‘난타’의 제작자이자 공연 연출가, 평창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까지 인생의 화려한 2막을 그려온 배우 송승환이 연극 ‘더 드레서’로 돌아왔다. 연극으로 무대에 서는 건 2011년 ‘갈매기’ 이후 9년 만이다. ‘더 드레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전쟁통 속에서 공연을 올려야 하는 한 극단 대표이자 노배우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는 주인공이 걸어온 삶의 길이 자신의 인생을 닮은 것 같아 이 작품을 택했다. 아역배우에서 중견배우로, 이제는 노역배우로 인생 3막을 열어갈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오랜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소감은?
연극은 방송이나 영화처럼 편집이 없어요.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온전히 보여줄 수 있지요. 그래서 더 설레고 기대가 됩니다. 이번 공연을 시작으로 관객과 자주 만나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준비 중입니다.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이제 내가 ‘노역배우’로 활동할 수 있겠다 싶은 순간 만난 작품이에요. 극작가 로날드 하우드는 워낙 훌륭한 작가죠. 여러 작품을 두고 고민했는데, ‘더 드레서’는 일단 제 삶과 가장 많이 닮은 이야기 같았어요. 극중 ‘선생’은 한 극단을 책임지는 대표이자 배우입니다. 저 역시 제작자이자 배우의 삶을 살고 있잖아요. 여러 가지 공감 가는 부분이 많은 작품이어서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노배우’ 역을 연기하며 느낀 점은?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노인 역할을 멋지게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노역을 제대로 연기해보는 게 처음이라 스스로도 기대감이 큽니다.
특별히 와 닿았던 대사가 있다면?
배우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특히 “배우는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거야”라는 대사가 와 닿았어요. 영화나 드라마는 영상 기록이 남지만, 연극은 현장 예술이기 때문에 작품을 목격한 관객의 기억 속에만 남잖아요. 요즘 공연을 영상화하자는 얘기도 많은데, 저는 ‘생선회를 통조림에 넣은 것과 같다’고 비유해요. 연극은 관객과의 호흡과 소통을 통해 완성되는 거니까요.
작품 외에 준비 중인 일은?
최근 이순재 선생님, 오현경 선생님, 김영옥 선생님을 뵈었어요. 요즘 준비 중인 유튜브 방송 ‘송승환의 원더풀 라이프’ 촬영 때문이었죠. 이 방송은 제가 원로 배우 선생님들을 인터뷰하는 내용인데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아카이브로 만들고 싶어서 기획한 채널이에요.
선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점은?
사적인 자리에서 선생님들의 그 시절 방송, 영화, 공연 이야기를 들으면 참 재미있어요. 방송국에서 거의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촬영하던 때의 이야기는 그분들이 아니면 들을 수 없죠. 지금까지 세 분을 뵈었고, 앞으로도 더 많은 배우 선생님들을 만날 예정인데, 언젠간 제 이야기로 끝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앞서 배우의 길을 걸어오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많이 존경스럽고, 배울 점도 많은데요. 저도 그렇게 제 이야기를 남길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지?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오며, 연기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자세가 바뀌진 않았어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상대 배우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태도는 깊어진 것 같아요. 그렇게 쌓여가는 연륜을 받아들이면서 나이 들어가고 싶어요. 앞으로도 제가 할 수 있는 역할로 관객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질 거라 생각해요. 꾸준히 연기하고, 공연 제작하면서 재밌는 일을 할 겁니다.
연극 '더 드레서'
일정 2021년 1월 3일까지 장소 정동극장
연출 장유정 출연 송승환, 안재욱, 오만석, 정재은 등
고금석 연극연출가
허망한 소싯적 꿈~
나의 원래 꿈은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독문학과로 대학 진학을 했던 것이고 1학년 때부터 경제원론이니 법학통론, 정치외교사 등을 두루 청강하였다. 5개 국어를 마스터할 계획도 세우고 첫 방학부터 중국어, 프랑스어 학원을 찾았다. 당시 독일문화원에는 독일 문학이나 시사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대학생 모임이 있었는데, 모든 의사소통을 독일어로 하였다. 그 모임의 성격이 나의 구미를 자극하였다. 그래서 독일어 정복의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2학년이 되자마자 그 모임을 찾았다. 이때가 1971년 4월!
잘못 찾은 방
문을 열고 들어가니 30여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여학생도 많았는데 몇몇은 가슴이 설렐 정도로 예뻤다. 웬 늙수그레한 학생이 발표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소문과 달리 우리말로 발표를 했다. ‘너무 어려운 내용이어서 그러나?’ 기나긴 발표가 끝난 후 웬 책자를 나누어 주더니 윤독을 하자고 했다. 제목을 보니 ‘당통의 죽음’. 연극 대본이었다.
그때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옆 사람에게 물으니 ‘프라이에 뷔네’(Freie Bühne-독일문화원에 소속된 연극단체로 독문학과 학생들이 주축을 이룸)란다.
대본이란 걸 처음 봐서 그런지, 내 차례만 되면 긴장되어 눈앞이 핑핑 돌고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혀는 꼬여 버벅거리기 일쑤였다. 그렇게 천당과 지옥을 오가며 첫 연습을 마쳤고, 시(始)파티 자리까지 가서 막걸리를 진창 얻어 마셨다. 그러나 다시 그 연습장을 찾지는 않았다. 난 원래 연극은 꿈도 꾼 적이 없으니까~.
왜 그랬을까?
그로부터 1주 후. 집으로 낯선 전화가 걸려 왔다. ‘프라이에 뷔네’란다. 왜 그랬을까? 방을 잘못 찾던 날, 자기도 2학년이라고 유난히 친절하게 굴며 집 전화번호를 묻던 그놈, 얼굴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던가? 오늘이 캐스팅하는 날이라고, 연출자가 나를 꼭 보고 싶어 한다고. 왜 나갔을까? 캐스팅 자리에 나가지만 않았어도 난 계속 외교관의 꿈을 꿀 수 있었을 텐데…. 연출자는 꼭 보고 싶다던 나에게 대사 여덟 마디짜리 단역을 주었다. 그러나 여덟 마디도 버거울 정도로 난 연기에 문외한이었다. 읽기는 그럭저럭 견뎌냈는데, 블로킹(동작선 긋기 연습)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영광스럽게도 난 연극의 첫 장면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건 첫 장면 출연자를 빼고 나머지 45명의 배우가 한꺼번에 내 연기를 보는 끔찍한 사태를 의미했다.
여덟 마디였지만, 첫 대사는 엄청나게 길었다. 대본의 반쪽 페이지가 넘게 길게 이어졌다. 창녀들이 골목길에서 교미하는 개들을 보고 깔깔거리는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었는데, 리딩할 때는 그럭저럭 잘나가던 대사가, 90개의 눈알이 주시하는 가운데 갑자기 하려니 맥락도 잡히질 않고, 얼굴 근육이 떨려 도무지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몇 날을 고민하다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아무래도 간덩이가 너무 작아 그러는 거 같으니, 연습 전에 술을 마시자.’ 당시엔 왕대포라고, 막걸리를 큰 대접으로도 팔았다. 이 방법은 기가 막히게 통했다. 그렇게 난 매일 음주연습을 했다. 이 습관은 공연 당일까지 이어졌다. 공연장에서 막걸리를 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공연 당일, 분장하기 전에 구멍가게에서 미리 매실주 한 병을 구입했다. 병이 납작해서 윗저고리 속주머니에 들어가기 딱 좋았다. 그래도 도수도 높고 500㎖는 족히 되는 사이즈였다.
아니나 다를까, 공연 시간이 임박할수록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졌다. 그때마다 몰래 한 모금씩 홀짝이다 결국 공연 직전엔 한 병을 다 마셔 버렸다. 내 데뷔 연기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술자리에서, 선배 한 분이 무대에서 술냄새가 진동하더라며 음주공연한 사람을 색출하려 했다. 난 기겁하여 다음 날 공연 땐 술을 준비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난 예의 창녀촌 장면 도중 대사를 까먹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 대사! 5초가 지나 10초, 15초~ 결국 나는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관객석에서 격려 박수 소리가 터지며 다음 배우가 등장하여 연극을 진행시켰다. 난 하릴없이 무대를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연기 데뷔 무대가 이리 허무하게 끝나다니~.
힘없이 무대를 나오는데 갑자기 눈앞에 불이 번쩍 튀었다. 초장부터 연극을 망쳤다며, 누군가가 내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난 그 사람이 연출자인 줄 알았다. 최근 그 연출자에게 내 뺨을 후려친 사람이 당신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자기 작품을 망친 배우를 응징하지 않는 연출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난 아직도 의문이다. 그렇게 2학년의 1학기를 온통 연극에 허비하는 바람에, 1학년 때 올 A에 평점 4를 넘던 학점이 그만 C·D투성이에 평점도 3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왜 또 그랬을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외교관의 꿈을 이루어줄 책들을 싸 메고 연극과 인연이 닿지 않는 외딴 세계로 기어 들어갔다. 고향에 있는 ‘옥천사’라는 절이었다. 고시생들에게 알려진 명문 절답게 옥천사에는 예닐곱 명의 고시생이 있었다. 나의 꿈 재도전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가져간 책과 참고서적, 문제집 들을 죄다 독파하고 한 달 반 만에 의기양양 하산하였다.
그러나 개학을 열흘도 채 남기지 않은 날, 다시 그놈한테서 운명의 전화가 걸려왔다. 공연이 얼마 안 남았는데 주인공 자리가 비어 있다고, 이번에는 독일어 원어극이라고, 발음은 독일 사람이 봐준다고~. 그래서 생각했다. 독일어로 공연 한 번 하면 회화는 저절로 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원어민이 가르쳐 주면 독일어 발음이 얼마나 정확하고 좋아지겠는가?
왜 또 그랬을까? 난 또 반갑게 독일문화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판단 미스였다. 발음은 좀 나아졌는지 몰라도, 난 지금까지 독일어는 입도 뻥긋하지 못한다. 2학년 말, 극단을 빠져나오려고, 연극을 접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내 동기와 선배들이 모두 군대를 가거나 유학을 떠나 버린 후였다. 극단엔 1학년 신입생과 예쁜 여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이때를 즈음해 외교관의 꿈은 완전히 접혔다.
관객모독
엇나가긴 했지만, 이후 나의 연극인생은 비교적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계속 배우로 활동했으면 내 인생은 더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선배들이 없는 상황에서 난 연출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1977년, 난 독일의 걸출한 작가, 페터 한트케를 만나 연출로서의 역량을 발휘한다. 나중에 기국서라는 연출가가 재공연을 해서 더욱 유명해진 . 관객들은 욕먹고 수모를 당하고 모독당하기 위해 줄지어 세실극장을 찾았다. 모독을 당하다 겁을 집어먹고 실신한 나머지 극장 밖으로 실려나간 관객도 있었다.
공연을 마친 다음 날, 단원들이 예매처를 돌며 수금을 해왔다. 여관방에 모여 결산을 하는데 모두들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꾸역꾸역 기어냈다. 연극을 해서 처음으로 돈 버는 경험을 했다. 연극에 입문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카스파
난 계속 페터 한트케에 매달렸다. 1978년엔 를 선보였다. 16년 동안 갇혀 살다 세상에 나온 소년이 언어를 배우며 겪는 고통을 언어고문극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 역시 충격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는 1983년에 재공연되어 극비평가그룹으로부터 작품상을 받고, 1996년에 앙코르 공연을 가지면서 500회 가까운 공연기록을 남겼다. 다음 해엔 고려대 극예술연구회에서 을 연출하여 전국대학연극축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고, 그해 국립극단에 입단하였다. 엇나간 꿈은 힘을 받아 탄탄대로를 질주했다.
광대학교
나의 대표작으로는, 1987년 ‘우리극장’이 만든 를 들 수 있겠다. 아마추어 극단을 고수하던 프라이에 뷔네는 1979년 전문 직업극단으로 탈바꿈, ‘우리극장’이라는 명패를 내걸었다. 는 배우를 길러내는 학교에서 훈장과 학생들이 벌이는 코미디극인데, 고리타분한 훈장이 자유분방한 학생들한테 백전백패를 당한다.
는 춘천으로 살러 가 만든 극단 ‘춘천앙상블’의 창단공연으로도 제작되었으며, 1992년 재공연된 후 현대백화점, 서울우유 등 기업체와 학교 순회공연을 다녔다. 1994년에는 LA교민 위문공연을 다녀오고, 2000년엔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로 부임하면서 다시 업그레이드되었다. 는 전주 동네 구석구석에 초청 공연된 후 중국 수저우(蘇州)까지 다녀오며, 1000회 이상의 공연 기록을 남겼다.
산너울패
2008년, 아내의 암 투병을 위해 충남 서천에 새 집을 짓고 아예 눌러 앉았다. 아내가 저세상 사람이 되고 바로 ‘산너울패’라는 극단을 만들었다. 2013년의 일이다. 산너울마을 동네 주민들로 이루어진 작은 극단이다. 동네 아이들 7~8명도 따로 모여 연극놀이를 하며 어울린다.
첫 작품으로 어른 팀은 를 공동 창작하였고, 어린이 팀은 고(故) 임길택 시인의 시를 모아 이라는 이름으로 재구성, 공연하였다.
창단 2년째에 산너울패는 의미 있는 행사를 가졌다. 송년공연으로 동네잔치 한마당을 벌인 것이다. 단원들은 낭독공연()을 하고, 초청가수들이 내려와 노래 불러주고, 국립창극단 박성환 배우가 판소리도 들려주고, 서천 토박이 박광배 시인이 자작시 낭송도 했다. 동네 주민들은 막걸리를 사오고 삼겹살을 구웠다. 막판에는 초대가수와 춤꾼 구별 없이 노래 부르고 한데 어우러졌다.
이문재 시인이 옵서버로 이 구경을 하다가 곧장 경향신문 정동칼럼에 이 멋진 광경을 그대로 옮겼다. 시골 극단이 가야 할 길의 모범을 보인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고금석(高金錫)
1951년 광주 출생. 서울 배재고·고려대 독문과 졸. 극회 프라이에 뷔네 단원. 전국대학연극축전 최우수상. 국립극단 단원. 극단 우리극장 창단. 올해의 작품상(연극비평가그룹 제정) 수상. 전주시립극단 상임연출. 전주대 영상학부 강사 역임. 서천극단 산너울패 창단.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 하는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글로 한번 꼭 표현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유년시절
필자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해 왔다. 60년 인생에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고향은 대전이다.
필자 머리가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유년 시절의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와 유성온천 만년장호텔의 개울 위 다리에서 벚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일도 기억나고, 만년장 객실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밖으로 봄날의 벚꽃이 하나 가득 흩날려 쏟아지던 것도 생생하다.
필자는 1952년 아름다운 계절 6월의 첫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큰 포도밭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피아노를 좋아하셨지만 예술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평양이 고향인 이북 사람이셨다. 할아버지는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로 평생 후학을 길러내셨으며 명망이 두텁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아주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였다.
아버지는 대전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이고 진명여고를 다니다 대전으로 피난 가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역시 피아노를 전공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쟁도 있었고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두 시림은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는지 존경스럽다.
필자가 태어난 동네는 대전역 건너편 골목의 정동이라는 동네였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나니 필자 머리가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크면서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부모는 딸 셋을 낳고 더는 아이를 갖지 않으셔서 필자 집은 세 자매가 되었다.
필자 집은 대전역 건너편의 중심가에 있었고 친가는 조금 떨어진 가양동, 외가는 10km쯤 떨어진 문창동에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가를 좋아해서 거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바로 꿈과도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일본 사람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집을 외할아버지가 장만하셨는데 그 집은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팽나무에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기다란 그네가 보였다. 필자는 언젠가는 꼭 이 집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력이 모자라 표현을 어찌해야 할지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마당에는 일본 사람 특유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연못 속에 돌로 만든 거북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꽃도 아름다웠다.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놓인 발 디딤돌 외의 공간에는 빼곡히 알록달록 키 작은 채송화가 융단처럼 깔렸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가꾸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칸 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아래위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고 안방을 지나 돌출된 현관을 가진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져서 그 안에 보석 같은 알맹이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외가에 들어와 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필자는 덕분에 동네의 헤로인이 될 수 있었다. 놀이할 때에도 필자는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필자를 떠받쳐주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항상 집이 부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처절하게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딸 셋에게 풍족하게 해 주려고 부모가 많이 노력하셨다는 걸 알았다.
필자는 어릴 땐 숫기 충만하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대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책 읽기를 잘해서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하는 단상에 올라 동화구연을 하기도 했다. 욕심 많은 어부의 아내 이야기로 어부가 잡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부리다 망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던 것도 생각난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과자를 사 먹으려고 교문 밖 문방구에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너 참 잘하더라” 라고 말씀을 해서 군것질을 못 사고 공연히 연필 한 자루만 사 들고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인이 되면 그렇게 체면치레도 해야 하는가 보다.
필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행가도 잘 불렀다. 또 어머니와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아이들 앞에서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해 보였던지 극장에 갔다 온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어릴 때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살던 필자 맘에 꼭 드는 도시인 대전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이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필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필자는 식구들이 필자만 외가에 두고 떠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며칠 후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현동에 있었고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현동 집은 대문 앞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대추나무 집이라고 불렸으며 아주 예쁘고 깔끔한 한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다녔던 아현초등학교를 한 학기만 마치고 전학을 간 곳은 돈암초등학교였다. 집이 돈암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집 역시 한옥이었다. 그때로써는 더 좋은 동네로 옮긴 거지만 요즘으로 따져보면 아현동은 지금 너무나 발전한 고층빌딩 숲으로 시내 중심가가 되었으니 이사하지 않고 그냥 그 대추나무집에 살았다면 어머니, 아버지는 재테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후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필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중에 들어갔다. 동덕여중은 일제 강점기에 여성교육에 큰 뜻을 품으신 조동식 박사가 설립한 민족 학교라 할 수 있는데 교정이 아름답고 건물이 너무나 멋졌다. 본관 건물의 빨간 벽돌담을 초록 담쟁이가 가득 뒤덮어 고풍스러운 모습은 그림 동화책을 보는 듯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등교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허리를 졸라매는 하얀 블라우스와 군청색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등굣길의 버스 안이 얼마나 만원이었는지 그때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터질 듯한 버스 속으로 안내양이 등으로 밀며 필자를 구겨 넣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차체를 흔들어 뭉쳐 있는 사람들을 고루 뒤섞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주름 잡아 허리를 매어 입은 교복이 구겨지고 삐뚤어져서 한동안은 동소문동 집에서부터 보문동, 신설동을 돌아 창신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도 했다.
혜경, 대학생이 되다
그리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3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꼭 가고 싶었던 이화여대는 아니어도 청파동 언덕의 아름다운 숙명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과도 영문과나 불문과 아니면 국문과가 좋았지만 예비고사 성적에 맞추어 무난하게 경제학과를 지망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과이지만 그 당시 필자가 경제학과 학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청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듯하다. 수많은 미팅도 있었고 친구들과 명동이나 종로 등 좋아하는 거리를 섭렵하며 다녔다. 이렇게 미팅 전성시대를 누렸지만 정작 결혼은 매우 철저한 중매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그런 추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필자는 학교 다니는 동안 교직과목을 듣고 교생실습을 거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친구들은 취직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필자는 그때도 놀기만 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무지였다. 서울에서는 임용고시가 너무나 어려워 통과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가 경기나 지방으로 교사가 되어 떠났다. 지방은 서울보다는 선생님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셋인 아버지는 필자를 지방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필자는 본의 아니게 빈둥빈둥 노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하게 딸들을 사랑한 아버지 덕분에….
20대 후반이 됐는데도 시집을 못 가
나이가 27세가 되자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내 쉬며 걱정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정작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무척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필자가 자타공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만났다. 약대를 나왔고 시아버지는 변호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첫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야 동생들도 그렇게 될 거라며 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선을 봤는데 남자가 너무 못 생겨 보였다. 못 생겨서 싫다고 했더니 제 복을 제가 찬다면서 야단치셨다.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이 남자를 만나보니 인물보다는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더구나 어느 날 자기 집 얘기를 하는데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필자는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에 파란 물이 출렁이는 예쁜 풀장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 가서 보니 뭐, 거짓말은 아니고 정말 집안에 수영장이 있긴 했다. 집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인데 어머니가 손수 지휘하셔서 아주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필자가 상상한 그런 수영장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멋지고 좋은 집이었다.
전면으로 볼 때 3층이었고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분수가 나오는 정원이 있고 왼쪽으로 반지하인 1층이 있는데 그 층에 운전기사 방과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한다는 넓은 부엌이 있고 그 구석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위해 네모난 풀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수영장을 보고 필자가 엉뚱하게 상상했던 게 생각나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결혼했다. 처음엔 결혼하고 바로 분가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첩이 있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집이 너무 큰 데 식구가 없으니 몇 년 만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이혼의 위기에서
그런데 그렇게 시댁은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고 분당이 개발되기 전에 서현동이라는 곳에 정원이 아름다운 크고 근사한 별장도 있었으며 시아버지가 아직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굉장한 부자이긴 했지만 첩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좀 복잡했다.
그렇게 멋진 집에서 5년을 살고 분가했다. 분가는 친정 옆 동네로 했다. 시댁의 가정사가 복잡한 것과 대조해서 친정은 너무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있어 언제나 평화로웠다. 특히 아버지는 손자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혼의 위기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부러움을 받고 살던 필자에게 큰일이 일어났다. 상속받은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있던 5층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건물은 시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알토란같은 건물이었다. 위치가 좋아 건물세도 잘 나오고 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다고 표현하며 좋아했었는데 마음만 착한 남편이 사기에 걸려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이혼도 고려하게 되고 심각해졌는데 필자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해서 온전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필자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 남편을 구박하기도 하고 화풀이도 하지만 이혼 안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재산을 잃었지만 든든한 시댁과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었고 키우는 동안 너무나도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진 큰 재산이 아깝긴 해도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주 예쁜 손녀와 돌 지난 손자, 아들,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큰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큰 병에 걸렸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다. 투병 중인 남편을 보며 한때 재산을 없앴다고 못되게 굴었던 일도 후회돼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유행가 가사가 다 진리로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치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고 누구에게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이 한 세상 잘 살았으며 이별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베이비붐세대의 맏형, 1955년생.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으며 모든 것이 격변하는 2000년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들의 신념과 가치관, 그리고 맏형으로서 지탱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1955년생의 대표주자를 만나 그들의 삶과 미래를 파악해보기 위해, 먼저 그 첫 주자로 진수희 前 보건복지부 장관을 만나봤다. 새누리당의 브레인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으로서 17,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NGO시민단체 선정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6년 연속 자리매김한 그녀는 제48대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거치면서 자신의 길을 탄탄히 쌓은 1955년생 대표주자다. 그녀가 말하는 삶과 미래의 이야기.
사진 최유진 기자 strongman55@etoday.co.kr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된 진수희 전 장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녀가 과거에 공직에 있었을 때, 항상 정장을 반듯하게 입고 어딘가 경직된 모습으로 사안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글라스를 낀 채 캐주얼하게 옷을 입고 정동극장에서 만난 그녀의 모습은 한층 자유롭고 부드러워 보였다. 정치에서 물러난 후 뭔가 달라진 것일까? 영화광이기도 한 그녀는 얼마 전 개봉한 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제 별명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에요”
“요즘은 조용히 지내는 편이에요. 주로 중고등학교 오래된 4인방 단짝 친구들과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있죠. 희한한 게, 이 친구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느낌이에요. 10년 전만 해도 만나면 뭔가 미묘하고 서로에 대해 완전히 열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든 걸 털어놓고 얘기하는 사이가 됐죠. 자연스럽게 그리 되더라구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졌다는 건 그런 생활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말하자 웃으며 대답했다.
“언론을 통해서 절 보면 날카롭고 차갑다고 하지만 직접 만나면 푼수끼도 있다고 하고 그래
요. 제 별명이 알푼수(알면 알수록 푼수)거든요.”(웃음)
어렸을 때부터의 꿈, 기자
1955년 생, 진 전 장관은 대전에서 7남매의 여섯 째, 딸 중에선 막내딸로 태어났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서울을 가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의 형제자매들이 모두 서울로 간 상황이어서, 아버지가 다 보낼 수 없다 하여 대전에서 계속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대학교는 어쨌든 서울로 가야 할 상황이 됐고, 대개 여자들은 이화여자대학교를 가는 걸 목표로 삼았지만 그녀는 연세대학교를 선택했다.
“공부는 반에서 한 5등 내외였어요. 우리 때 대학 진학률은 높지 않아서, 고3 때 부지런히 공부하면 대학 갈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담임 입장에서는 연세대를 간 선배가 없어서 연세대에 나를 지원한다 해도 갈 수 있을지 안 될지 확신이 없어서 안 써주려고 했어요. 그래도
난 바락바락 가겠다 하여 마침내 갈 수 있었죠.”
연세대에서 그녀가 선택한 학과는 사회학과였다. 어렸을 적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자가 되어 사회의 부조리를 없애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연구원, 교수라는 연구직을 거쳐 국회의원, 장관의 길을 걷게 됐다. 그녀의 삶은 자
신이 바라는 걸 못 이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성공한 삶의 기준은 아이들의 눈
“사실 제 삶이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과 비슷한 행보였지 않았나 싶어요. 기자를 꿈꿨던 것과 삶의 커리어가 비슷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걸 하려고 노력했다고 판단해요. 성공이란 표현까지 쓰긴 그렇지만.”
그녀는 삶의 성공 기준을 돈을 많이 벌고 무언가를 물려주려고 하고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기억되느냐’가 성공의 기준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보는 아이들이 판단하는 게 더 옳다는 것이다.
“제가 판단이 흐려질 때면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나를 보며 바르게 살려고 하게 만들고자 하는 걸. 제 자식들이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건 싫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치열하게 살았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순간순간 열심히 산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열심히’라는 것에는 모종의 자기반성적 측면이 꾸준히 따라다니고 있었다. 정치인이라면 수없이 내놓는 도서 커리어에서도, 그녀는 지금껏 단 한 권의 책만을 썼을
뿐이었다. 장관직을 수행한 이후 내놓은 가 그것이다.
“당시에는 복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어요. 그래서 복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책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죠.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을 책은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끄럽거든.”
열심히 살았다는 그녀의 말은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직한 답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 별로 없는데…, 제가 다니던 때는 툭하면 휴강에 휴교에 서슬퍼런 시절이라 대학 4년간 공부를 잘 못했던 거 같아서 돌아간다면 그 시절로 가고 싶어요. 굳이 꼽자면 여행 많이 가고 싶다는 생각 들고.”
74학번 대학생 진수희에 물었다. 그녀는 한달 2만~3만원을 주는 입주과외를 하는 등 과외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가난한 고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입주과외는 대학생이 과외 학생의 집에 상주하면서 학습과 생활 전반을 살펴주는 방식이지요. 1970년대에는 대학생 수가 적었고 마땅한 사교육 인프라도 구축되어 있지 않던 터, 주로 정부의 고위 관료나 기업가들이 이런 식으로 대학생을 고용해 자녀들을 교육시켰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직 자신의 집을 갖지 않은 그녀는 집 외에 소유하고 싶은 것에 대해 묻자 ‘내 일, 내 시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쯤되면 진 전 장관의 삶에 대한 애착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곡절 속에 키워온 어울림과 개척정신 그녀의 삶은 일견 순탄했던 코스로 보인다. 그러나 대
학생 시절엔 아버지가 사업 사기로 인해 집안이 몰락했고 그로 인해 경제적인 고생에 시달려야 했다. 1955년생들이 이후의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겪어야 했던 곡절 또한 그녀에게 어김없이 찾아왔던 것이다.
“1955년생의 특징이라면, 다형제들이 많다는 걸 들 수 있겠네요. 그리고 시골 사람들이라는 것. 장·단점이 있는데,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우선 형제자매들이 많은 가족 안에서 자라는 게 좋아요. 독선적이지 않을 수 있고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고. 그리고 우리 부모 세대가 어려운 세대다보니 각자 알아서 커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율성과 개척정신,절실함을 갖게 됐죠. 뭔가 이뤄야 한다는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어요.”
그녀는 요즘 세대는 부모들이 여유가 있다 보니 절실함과 자율성이 다소 약하다고 지적했다. 잘 살아 보겠다는 치열함과 절박함의 원초적인 힘이 사회에 더 기여한다는 자부심. 그 자부심에서 1955년생답다는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못 이룬 꿈 완성시키고 싶어
진 전 장관은 앞으로 대학교에서의 강의는 3년 정도 더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금 자신의 중심을 여의도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국회의원을 두 번 하면서 정말 하고 싶고 해야 했던 것들 중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너무 큰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정치를 바꾸는 일을 좀 하고 싶어요. 초선 재선일 때는 뭣 모르고 분위기에 휩싸이는 정치를 했었어요. 우리 정치가 욕을 먹을 때 저도 그 일원이었던 게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세 번째 기회가 온다면 뭔가 더욱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그녀는 2012년 총선 때는 공천 과정에서의 불공정함으로 인해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민심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거였다면 억울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 만약 다시 정치의 기회가 온다고 했을 때, 그녀는 다시 복지를 파고들 것이라고 밝혔다.
“정책적으로는 고령화와 저출산 등 복지 쪽에 여전히 관심이 많아요. 특히 보건복지부 장관을 하면서 통계 수치 두 개가 저를 괴롭혔어요. 바로 저출산율과 노인자살률이었죠. 그런 데다 고령화는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니….”
그녀 개인적으로, 다시금 보다 넓은 자리로 가고자 하는 사명감이 확고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 제 아이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다 커 갈 때니까, 제삶 자체가 중요한 때가 온 거 같아요. 제가 오랫동안 있었던 영역에서의 마지막 도전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