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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 봄날, 전주한옥마을에 사람들이 그득하다. 내로라하는 관광 명소답다. 지난 한 해에 찾아온 관광객이 자그마치 1500만여 명이었다니 말 다했다. 한나절의 눈요기와 입요기만으로도 전주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 먼 길 마다 않고 달려오는 이들이 많다. 한때 상혼에 치우쳤다는 핀잔도 들었다. 그러나 문화공간과 체험 프로그램이 늘어 균형이 잡혔다. 바야흐로 문화 요소를 결여한 관광지는 찬밥 신세로 추락하기 쉬운 시대다. 사실 전주한옥마을엔 전주의 역사와 문화가 달걀노른자처럼 박혀 있다. 겉은 상업의 성황으로 요란하지만, 속엔 역사 유산의 광량이 깃들어 찬연하다.
경기전(慶基殿)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을 봉안한 공간이다. 이성계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 1410년에 지었다. 천하를 호령한 절대 권력자를 그린 어진은 단순한 추모의 수단이 아니었다. 임금 그 자체로 간주됐다. 어진이 있는 곳엔 임금이 머문 것과 맞먹는 수준의 위상이 부여됐다. 왕실의 영속을 기원하는 성역이었다. 따라서 경기전의 규모부터 웅장하다. 우람한 나무들과 대밭이 있는 정원은 운동장처럼 널찍하다. 경기전의 핵심은 공간 중앙부에 조성된 정전(正殿) 구역이다. 홍살문으로 들어가 외삼문(外三門)과 내삼문(內三門)을 통과하자 본전인 정전에 닿는다.
경기전은 한마디로 왕실 사당이다. 태조의 넋을 기리는 제례가 거행되었던 곳으로 신성불가침 영역이다. 정전으로 이어지는 외삼문과 내삼문을 혼령이 드나드는 문, 즉 신문(神門)이라 불렀다. 이 문들엔 기둥으로 분할한 세 개의 통로가 있다. 중앙에 있는 통로는 아무나 다닐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혼령이 출입하는 신도(神道)니까. 바깥쪽 두 통로는 인도(人道)로 쓰였다. 예교(禮敎)를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시대의 종묘에 적용된 법식이 이렇게 엄격했다. 통로 끝엔 정전이 있고, 정전 한가운데 감실을 만들어 태조의 어진을 모셨다. 감실 안엔 부용향을 담은 향 주머니를 넣어 냄새와 습기와 해충을 잡았다. 화재를 막아주는 벽사(辟邪) 용도로 설치한 두 가지 장치도 위트가 있어 눈길을 끈다. 하나는 지붕 아래 붉은 풍판에 조각한 상서로운 동물, 거북 두 마리. 다른 하나는 마당에 가지런히 놓인 6개의 무쇠솥인데, 이건 방화수를 담는 용기로 ‘드므’라 부른다. 지붕을 타고 내려온 화마(火魔)가 솥을 채운 물에 비친 자신의 살벌한 모습에 놀라 스스로 달아나게끔 설치한 구조물이라 하니 재미있다.
뭐니 뭐니 해도 관심 가는 건 태조 어진이다. 세조 때의 문신 신숙주가 쓴 ‘영모록’에 따르면 태조 어진은 무려 26점이나 됐다. 말을 탄 초상도 있었단다. 그러나 현존하는 건 경기전에 남은 어진이 유일하다. 이 어진은 원래부터 경기전에 있었던 원본이 오래되어 낡고 해지자 1872년에 원본 그대로 베껴 그린 작품이다. 당대의 우뚝한 화가 8명이 합작해 그렸다. 이렇게 부활한 태조 어진의 진본은 현재 경기전 후원의 어진박물관에 소장됐고, 정전엔 복제본을 봉안했다. 망가진 원본은 항아리에 담아 정전 뒤편에 묻었다지.
조선의 왕들은 하나같이 하늘에 맞먹을 지존으로 섬김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을 세운 태조를 능가할 만한 공경의 대상은 아예 존재할 수 없었다. 태조의 어진 봉안처만 해도 여러 곳이었다. 서울 문소전, 평양 영숭전, 개성 목청전, 경주 집경전, 전주 경기전 등에 각각 어진을 두었다. 그런데 오직 전주의 어진만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전주를 ‘조선의 발원지’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주는 전주 이씨 이성계의 본향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조선의 뿌리가 전주에 박혀 있다는 얘기, 이거 빈말이 아니다.
어진에 드러나는 태조의 모습을 볼까. 그의 실제 키가 180cm에 달했다던가. 초상을 척 봐도 기골이 장대하다. 청색 곤룡포를 입고 바위처럼 묵직하게 앉아 정면을 응시한 틀거지에 포스가 넘친다. 혁명 군주다운 도도한 기상을 테마로 삼아 초상을 그린 것 같다. 곤룡포와 용상엔 용틀임하는 금빛 용들을 연쇄적으로 집어넣어 군왕의 위엄을 돋우었다. 능란하게 휘저은 붓놀림의 자취도 볼 만하다. 색조를 달리한 배색으로 얼굴에 음영을 넣어 살짝 입체감을 살렸다. 오른쪽 눈썹 위에 묘사한 사마귀는 이 어진이 리얼리티에 충실한 그림임을 알게 한다.
풍남문에 걸렸던 순교자들의 머리
경기전 건너편엔 ‘호남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서양식 건물’이라는 전동성당이 있다. 경기전 답사를 마친 사람들의 발길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전동성당으로 이어진다. 저만치서 바라보이는 돔 부위만으로도 아름다워 자력에 끌린 양 성당 정문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렇게 해서 성당과 마주하기에 이르면 이젠 심취하게 마련이다. 전동성당의 완벽한 건축미에 반해서. 성당의 고고한 내면성이 느껴져서. 건축가 김광현에 따르면 전동성당은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롱샹 성당이나 독일 뒤렌에 있는 성 안나 성당보다 ‘훨씬 영성적’이다.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한 나로서는 감히 영성까지 운운하기 어렵지만, 유려한 건축미에 서린 깊고 따뜻하고 순수한 기운에 몸과 마음이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전동성당의 외벽은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배합해 쌓았다. 1908년에 착공, 23년에 걸친 공사로 완성했으니 100여 년 세월이 내려앉은 건물이다. 그러나 세련된 건축 메커니즘과 정교한 디자인이 빼어나 고색을 느끼긴 어렵다. 이 성당이 야기하는 미감은 정면 중앙에 높이 솟은 종탑부와 양쪽 계단 탑의 돔에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성당 내부도 화려하고 장엄하다. 궁륭형 천장의 곡선이 흘러내린 아래편 좌우에 펼쳐진 감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어머니의 체온처럼 따사롭다. 성당을 떠받친 기둥 행렬, 수평 또는 수직으로 펼쳐진 벽돌 벽들, 신비감과 안락감을 풍기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등도 빼어나다.
전동성당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순교의 피와 얼이 배어 있는 터에 세운 성소라는 데 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유박해 때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 전동성당 코앞엔 풍남문이 있다. 전주의 역사성을 웅변하는 성문으로 반월형 옹성(甕城)이다. 원래 전주성엔 동서남북으로 4대문이 있었지만 풍남문만 남았다. 전주성은 고려 말 1389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주도해 지었다. 그는 전주성에서 우거진 축성 솜씨로 숭례문(남대문)을 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전동성당과 풍남문은 불행한 역사를 공유했다. 효수를 당한 윤지충과 권상연의 머리가 풍남문에 걸렸던 게 아닌가. 한편 순교 터에 전동성당을 지을 때엔 풍남문의 허물어진 성벽 돌들이 성당의 주춧돌로 쓰였다. 굳센 신앙은 세상의 잔인함에 패하지 않는 법. 순교자들의 영혼은 성벽 돌에 얹혀 마침내 전동성당을 이루었다. 성당 사방으로 크리스털처럼 투명한 햇살이 쏟아진다. 천지가 유독 환하다.
나종우 전주문화원 원장
일찍부터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인식이 있었다
“전주시는 흔히 말하는 대로 ‘맛과 멋의 고장’이다. 고유한 음식 문화와 예술의 발달로 형성된 멋을 빼놓고 전주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맛과 멋’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과거의 경제적 여유에 그 근원이 있다. 전주는 농산물이 풍성하게 쏟아지는 농업지대였다.”
나종우 전주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먹거리 풍부한 곡창지대였던 데에서 전주의 문화와 정서가 토착화됐다는 뜻이다. 전주는 한국 최초로 유네스코에 의해 ‘음식 창의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전통으로 이어진 문화와 예술의 파워 역시 타 도시를 능가한다. 나 원장의 얘기는 전주 사람들의 ‘포용력’에 관한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쪽으로 이어진다. 그는 원광대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전주 사람들은 외지인을 격의 없이 품는다. 예부터 ‘더불어 함께’라는 의식을 가지고 삶을 영위하는 풍토가 여실했다. 이는 전주만이 아니라 호남권의 보편적 경향이었다. 가령 고창읍성을 축조할 때 전라도 곳곳에서 사람들이 달려와 힘을 보탰다.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너와 나는 하나’라는 인식. 거기에서 나온 포용력. 이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과거 전통사회에선 양반들의 지배 문화가 횡행했다. 호남권의 서민 문화는 어떠했다고 보나?
“전라도에선 서민 문화가 발달했다. 예컨대 호남엔 농부들이 일하다가 모여 쉬는 모정(茅亭)이 매우 흔했다. 이는 사대부들이 즐긴 누각 문화가 발달했던 영남권과 다른 양상이다. 임진왜란에 뛰어들어 나라를 지켜낸 서민 출신 의병이 유독 많은 곳도 호남이다. 일찍이 발동한 서민 문화가 민중의식의 싹을 틔웠고, 그게 동학혁명 같은 민권운동으로, 나아가 민주의식으로 발화했다. 전주 특유의 ‘포용력’엔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세상은 이기적인 경쟁과 과욕이 만연해 삭막하다. 전주라고 예외일까?
“현대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인 힘에 좌우되며 돌아간다. 전주엔 좌절감에 가까운 정치적 소외감이라는 게 있다. 넉넉한 전통적 정서와 자긍심이 흔들릴 정도로. 그래서 문화의 힘, 문화원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우리 문화원은 지역의 뿌리와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쓸모 있는 책자들을 다수 발간했다. 전통문화를 현대적 매력으로 승화할 수 있는 콘텐츠 발굴에도 나서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실로 많다. 한옥마을의 역사에서 놓칠 수 없는 대목이 있다면?
“항일의식의 발현으로 한옥마을이 형성된 배경을 알면 좋겠다. 일제강점기 때 전주엔 일본인이 대거 유입돼 집을 짓고 살았다. 전주가 통째 일본인 땅으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전주의 뜻있는 부자들이 나서서 한옥 다수를 지으며 대응했다. 이렇듯 전주를 지키자는 민의의 힘으로 형성된 게 한옥마을이다.”
경기전 내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4대 사고(史庫)의 하나인 전주사고가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을 모면하고 유일하게 실록을 보존한 사고다. 전주의 선비와 머슴들이 필사적으로 실록을 지켜낸 덕분이었다. 나 원장은 이 역시 전주의 빛나는 역사 대목으로 꼽았다.
●Exhibition
◇유람일지: 유(儒)를 여행하다
일정 4월 21일까지 장소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에서 만나는 충청 유교 문화유산’을 주제로 하는 전시는 조선시대 선비의 삶을 ‘고택’, ‘서원’, ‘구곡’(九曲)으로 나눠 소개한다. 집, 학교, 자연이라는 공간을 통해 나고 자란 선비의 삶의 궤적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닮았다. 1부 ‘고택유람’은 충청도 명문가인 파평 윤씨 가문의 명재고택을 중심으로 한다. 윤증의 초상 초본, 문중의 교육 공간인 종학당의 디오라마(실물 축소 모형) 등을 볼 수 있다. 2부 ‘서원유람’에서는 충청도 유일의 유네스코 등재 서원인 돈암서원을 통해 배움과 실천을 지향한 선비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예학을 정립한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 그리고 송준길, 송시열은 서원의 대표 선비로 꼽힌다. 3부 ‘구곡유람’에서는 율곡 이이의 정신적 이상향이자 선비들이 자연에 은둔하며 학문을 수양했던 공간인 ‘구곡’을 디지털 화폭에 담아낸 수묵 미디어아트 영상을 전시한다. 최병구 서울역사박물관장은 “선비들이 이야기하는 시대정신, 일상의 가치, 타인을 대하는 태도, 자연을 품은 풍류 등을 통해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는 힐링 시간을 갖길 바란다”고 전했다.
◇우제길 : 빛 사이 색
일정 5월 12일까지 장소 전남도립미술관
평생 ‘빛’을 쫓으며 독창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한 우제길(1942~) 작가의 회고전. 총 10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1부 ‘기하학적 추상의 시작’은 ‘빛’을 주제로 하기 전인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그의 과도기적 작품을 살펴본다. 2부 ‘어둠에서 찾은 빛’에서는 절단된 면의 틈 사이로 솟아나는 빛 작품들과 어두운 배경에 작가 특유의 직선이 강조된 대작들을 소개한다. 3부 ‘새로운 조형의 빛으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구도가 다양해지고 밝은 색채가 등장하며 확장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4부 ‘색채의 빛’은 원색의 빛을 다양한 실험적 방식으로 구현한 작품들을 소개하며, 5부 ‘지지 않는 빛’에서는 신작들을 만나볼 수 있다.
●Book
◇어른의 말습관(김진이·다른상상)
같은 말이라도 어떤 사람은 반감을 사고, 어떤 사람은 호감을 얻는다. 그 이유는 바로 ‘말하기’의 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경인방송 아나운서이자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김진이는 책 ‘어른의 말습관’을 통해 성숙하게 말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어른답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분명히 말할 줄 알고, 그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또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고 관계의 중심을 단단하게 지킬 줄 안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는 단순히 말투만 바꾼다고, 기술만 답습한다고 되지 않는다. 내 말 속에 숨어 있는 디테일과 패턴, 즉 말하는 습관을 돌아보고 바꿔야 한다. 노력만이 말습관을 기르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책에서는 서투른 언어를 다듬어 말하는 법, 각각의 상황과 내가 의도하는 바에 따라 말과 태도를 장착하는 법, 사람들과 주파수를 맞춰나가며 내 세계를 확장하는 법, 부정적 말의 패턴을 소거하는 법, 감정을 차분히 다스려 담백한 말로 갈무리하는 법 등 여러 가지 말하기 방법을 소개한다. 자기 말의 주인이 되어 일, 관계, 인생을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 보자.
◇멋진 인생을 위해 오십부터 해야 할 것들(김옥림·미래문화사)
‘가슴이 뛰는 한 영원한 청춘’이라는 시인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나답게 사는 것이 인생 후반기를 행복하게 보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위험하고 매혹적인 제로 이야기(찰스 세이프·DKJS)
제로(0)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자 철학, 종교, 수학, 물리학의 근간이다. 저자는 0의 출현, 억압, 성장 등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
◇시니어를 위한 슬기로운 디지털 생활(조진화·임지윤·포레스트북스)
디지털 전문 강사인 모녀가 합심해 만들었다. 스마트폰·키오스크 사용법 등 부모님이 알았으면 하는 디지털 정보 10가지를 안내한다.
●Stage
◇러브레터
일정 4월 4일 ~ 4월 27일
장소 LG아트센터 서울
연출 김민정
출연 정보석, 박혁권, 하희라, 유선
연극 ‘러브레터’는 30개 언어로 공연된 세계적인 스테디셀러 작품이다. 밀도 높은 2인극이 특징으로, 무대에는 50년 동안 편지를 매개로 서로의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앤디와 멜리사만 존재한다. 글을 사랑하는 모범생 앤디 역은 정보석과 박혁권이 맡아 연기한다. 그림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영혼 멜리사 역에는 초연 당시 몰입도 높은 연기를 보여준 하희라와 함께 유선이 캐스팅됐다. 제작사 측은 “깊은 내공으로 다져진 베테랑 배우들을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사랑과 이별, 그 무수한 사연들도 디지털 기기의 버튼 하나로 정리되는 요즘, 잊고 있었던 우리의 순수성을 깨워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친정엄마
일정 4월 20일 ~ 5월 26일
장소 서울 한전아트센터
연출 김재성
출연 김수미, 이효춘, 신이현, 선예, 김도현, 박장현 등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린 ‘친정엄마’는 2004년 원작소설 출간 이후 연극,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특히 뮤지컬은 주크박스 뮤지컬의 진수로 통하며, 실력파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이번 시즌에는 하루에도 열두 번 넘게 딸을 걱정하는 친정엄마 봉란 역에 김수미와 이효춘이 캐스팅됐다. 김수미는 초연부터 봉란 역을 연기하고 있으며, 이효춘은 뮤지컬에 첫 도전한다. 엄마와 티격태격하다 이내 사랑을 깨닫게 되는 딸 미영 역은 신이현이 지난 시즌에 이어 연기하며, 원더걸스 출신 선예가 새롭게 합류했다.
◇클로저
일정 4월 23일 ~ 7월 14일
장소 플러스씨어터
연출 김지호
출연 이상윤, 진서연, 김다흰, 이진희, 최석진, 유현석, 안소희, 김주연
연극 ‘클로저’는 1997년 초연 이후 50개국 100여 개 도시에서 공연됐으며, 2004년에는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극은 현대 런던을 배경으로 앨리스, 댄, 안나, 래리라는 네 명의 남녀가 만나 서로의 삶에 얽혀드는 과정을 그린다. 국내 공연은 8년 만인 가운데, 원더걸스 출신 안소희가 연극에 첫 도전해 눈길을 끈다. 앨리스 역을 맡은 그는 “연극이라는 무대와 관객들과의 교감에 긴장과 더불어 설레는 마음이 있다”며 좋은 연기를 보여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북 영주시의 최고 특산물은 풍기인삼이다. 매년 풍기인삼축제가 열린다. 그런데 이 축제에선 조선의 문신이자 도학자인 주세붕을 기리는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어떤 연유로? ‘풍기인삼의 아버지’랄까, 풍기인삼 재배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 바로 주세붕이다. 당시 백성들은 나라에 산삼을 캐다 바치느라 고생이 자심했는데, 이를 딱하게 여긴 주세붕이 소백산 산삼 종자를 통한 인공 재배에 성공한 뒤 기술을 보급했다.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재직하던 때의 일이다. 군수 노릇도 이쯤이면 최고봉이다.
주세붕의 명민한 행장은 또 있다. 영주시 순흥면에 조선 서원의 시초인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 백운동서원은 얼마 뒤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준 서원)인 소수서원으로 변신, 마침내 영주라는 작은 고을을 사림 집합소로 띄워 올렸다. 조선 말 고종조에 이르기까지 우후죽순처럼 많은 선비를 배출했다. 그 수가 자그마치 4000여 명. 그래 오늘날까지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 불린다.
백운동서원의 후신인 소수서원은 퇴계 이황이 주도해 설립했다. 주세붕에 이어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1549년 조정에 편액과 더불어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하길 요청했는데, 명종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여 이듬해 친필 편액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사액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이 열렸다. 입학 정원은 30명. 소수서원의 기틀을 잡아나간 건 퇴계였다. 천하의 퇴계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으니 알조다. 그는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 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낸 인물이다. ‘학문을 할수록 길이 멀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자기 검증에 엄격했다. 그러하니 서원 운영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겠는가? 학칙은 엄준해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수신(修身)엔 관심 없고 앉으나 서나 과시(科試)에 붙을 궁리만 하는 유생은 바로 쫓겨났다.
담장 사이로 난 출입문을 들어서자 소수서원의 내경이 좍 펼쳐진다. 평편한 터 곳곳에 다수의 건축물이 있어 조선 최고의 서원다운 위용을 과시한다. 크게 보면 학문을 익히는 강학 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나뉜다. 자연경관에 기대어 머리를 식히며 쉴 수 있는 유식(遊息) 공간은 담장 밖 외부에 조성했다. 강학 공간의 중심 건물은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강학당으로 가장 큰 규모를 지녔다. 여기엔 ‘백운동’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소수서원의 시발이 백운동서원에 있다는 걸 잊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강학당 뒤편엔 교수들의 숙소인 일신재와 직방재, 유생들이 기거한 지락재와 학구재를 배치했다. 유생들의 기숙사는 교수들의 숙소보다 작고 낮게 지어 흥미롭다.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는 게 도리라는 암시를 담은 구조일 터다.
책을 보관한 장서각 앞뜰엔 정료대가 있다. 밤이면 관솔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힌 일종의 가로등이다. 사람들은 일쑤 서원을 따분한 곳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가만히 뜯어보라. 겹겹의 의미와 개성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소수서원의 모습은 여느 서원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 구성을 했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조선 서원들은 통상 중국식 배치법인 전학후묘(前學後廟, 앞쪽에 학당, 뒤쪽에 사당을 둠) 양식을 도입했다.
반면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 우측에 학당, 좌측에 사당을 둠) 형식을 구사했다. 아울러 건물들이 윷판에 윷가락 흩뿌려놓은 듯 헐겁게 널려 있다. 따라서 위엄을 갖춘 학문의 전당이라기보다 사적인 대저택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소수서원의 이 활달한 구조는 사액서원의 효시로 등장, 참고할 만한 어떤 범례나 전형을 전제할 여지가 없었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경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이제 냇물과 야산이 어우러진 유식 공간이다. 물 좋고 산 좋으면 정자가 필수 품목. 서원 정문 코앞에 있는 경렴정은 물소리로 귀를 씻기 좋은 정자다. 다소곳이 아담하고 소박해서 아름답다. 현판은 두 개다. 해서체 현판은 퇴계가 썼고, 초서체 현판은 퇴계의 제자이자 초서의 달인인 황기로의 글씨다. 퇴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현판 글씨를 쓰던 황기로의 붓이 파르르 떨렸다던가. 흠모하는 스승의 눈길만으로도 레이저 맞은 듯 주눅 드는 게 제자다. 냇물 건너편 둔덕엔 퇴계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는 정자 취한대가 있다. 서원 들머리에 조성된 노송 숲도 빼어난 경관 요소다. 수백 년 수령의 노거수들이 끽해야 100년 안짝을 머물다 세상을 지나가는 인간들을 굽어보고 있다. 이 노송들을 일러 학자수(學者樹)라 한다. 사시사철 푸른 솔의 기개 역시 공부감이라는 데서 붙은 별명이다. 소나무들이 서원 쪽으로 갸웃이 고개를 들이밀고 청강하는 품새를 연상해 지은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다. 학문의 바다 소수서원에선 노송도 학동으로 불려간다.
전통건축의 고전, 무량수전
이제 천년고찰 부석사를 찾아간다. 소수서원과 쌍벽을 이루는 영주시의 고품격 문화유산으로, 부석면 봉황산 자락에 있다. 산기슭을 타고 한참 이어지는 소로 끝자락에 닿자 부석사가 문득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막이 오르면서 무대가 펼쳐지듯이. 이렇게 극적으로 느껴지는 건 경사면과 구릉지가 절묘하게 배합된 터에 들어앉은 건축물의 조화미와 세련미가 매우 빼어나기 때문이다. 부석사 전각들을 일컬어 ‘한국 전통건축의 고전’이라 하는데 이게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부석사에서 천상이나 극락, 또는 서방정토를 느낀다. 미학으로 간을 친 건축적 맛과 멋을 음미하는 사이에 불교적 상상력까지 나래를 펴는 셈이다.
부석사의 수려한 전각들 중에서도 뛰어난 건 무량수전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추정되는 법당이다. 고풍스러운 정취가 짙게 묻어난다. 아담하고 단아한 봉정사 극락전의 구조미가 우수하지만, 건물 규모나 법식의 완성도에선 무량수전이 한 수 위다. 무량수전 불단에 모신 소조여래좌상도 걸작이다. 한국의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불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특이한 건 불상이 봉안된 위치다. 통상 법당 중앙 정면에 불상을 두지만 이곳에선 측면인 서쪽에 있다. 이런 배치법을 취한 이유가 명확하진 않지만, 소조여래좌상을 서방정토의 부처로 추정해 서쪽을 바라보게 배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무려나 소조여래좌상의 상호에 기품과 위의가 넘쳐 눈을 뗄 수 없다. 숨소리 새어 나올 듯 입매는 생생하고, 눈은 반쯤 내리떠 그윽하다. 올려다보면 호방한 표정이고, 옆으로 보면 냉엄한데, 물러나며 돌아보자니 연민이 어린 얼굴이다. 이렇게 각도에 따라 기색이 다르지만 하나같이 가슴을 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바라보는 풍광 역시 가슴으로 들이친다. 저 멀리에서 출렁거리는 산군(山群)의 파노라마가 장엄한 화엄 세상의 축약도로 비쳐서.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예로부터 많은 선비가 배출된 고장”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그럴만한 내력이 있다. 우선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한 안향과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의 문신 주세붕이 영주에 백운동서원을, 퇴계가 소수서원을 설립해 학풍을 일으키고 수많은 선비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에 따라 선비 정신이 면면히 이어졌던 것. 김기진 영주문화원 원장 역시 선비 정신을 중심 가치로 삼고 산다.
“조선시대 영주에선 4000여 명에 이르는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그 후손들이 현재까지 영주에 살면서 지역 풍토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나쁜 짓을 삼가고, 조상과 문중에 부끄럽지 않은 처세를 하는 게 좋은 삶이라 여기는 이들에 의해 올바른 지역 정서가 형성된 측면이 여실하다. 다시 말해 영주는 살기 좋은 곳이다. 범죄 발생률도 낮다.”
김 원장은 독서 애호가라고 들었다.
“난 소백산 자락에 산다. 산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좋은 글을 읽는 일보다 더 행복한 게 없더라. 평생 무수히 많은 책을 읽었다. 덕분에 시집을 낼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다. 2023년엔 좋은 글들을 뽑아 엮은 책 ‘산에서 보고 들은 것’을 출간했다.”
어디를 가나 과욕과 과속이 넘치는 세상이다. 영주라고 크게 다를까 싶은데.
“세상은 어지럽지만 올곧은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동네에 옳고 그름을 아는 선비가 한 사람이라도 있을 경우 좋은 풍토가 유지될 수 있다. 영주엔 다행스럽게도 선비 정신을 존중할 줄 아는 이들이 아직 많다. 내가 아는 영주 사람들은 다들 나름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들은 자녀 교육에도 충실하다.”
영주엔 명산 소백산이 있다. 소백산은 어떤 산이라 보나?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 예부터 흉년이 들어 막막할 때 영주 사람들은 된장 한 종지 들고 소백산에 들어가 산나물을 채취해 생계를 해결했다. 소백산은 영주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물심양면으로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산이다.”
좋아하는 명문 하나를 소개한다면?
“‘겸손함은 하늘과 통한다’는 글귀를 가슴에 담고 산다. 젊을 때는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많았다. 그런데 독서를 하며 자신을 꾸준히 다스리면서 사람이 변했다. 책이 곧 스승이었다.”
영주문화원을 통해 성취한 건 어떤 것이 있나?
“‘영주근현대사 아카이브’를 구축했다. 역사는 보통 이름난 사람들 중심으로 쓰인다. 난 이름 없는 사람들의 역사도 중요하다고 봤다. 그게 아카이브 작업에 뛰어든 동기다. 2년여 동안 5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해 일을 완결했다. 큰 상도 받았다.”
문화원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이라 보나?
“첫째는 젊은 피의 수혈이고, 둘째는 열악한 예산 사정을 개선하는 일이다. 둘 다 난제지만.”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이자 정치가였던 송강 정철(1536~1593)의 생애는 극적이었다. 삶 전체가 한 편의 파란만장한 인간극장이자, 장면에 따라서는 야유가 쏟아지는 별점 5개짜리 장편영화였다. 생존 당시는 물론 사후까지 부정적이거나 엇갈린 평가가 따라붙는 송강의 캐릭터는 정말이지 독특하다. 그의 문학은 빼어나 찬사가 쏟아졌지만, 정치 측면에선 잔혹해 지탄을 받았던 게 아닌가. 선조의 입에서 “송강이 조선 선비를 다 죽였다”는 한탄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송강이 태어난 곳은 한양이며, 학문을 닦고 시심을 기른 정신적 고향은 전남 담양이다. 58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곳은 강화도다. 그의 묘소는 충북 진천군 문백면 환희산 기슭에 있다. 원래 경기도 고양에 묻혔으나 1665년 성리학의 거두 우암 송시열의 권유에 따라 현재 자리로 이장하고 사당을 세웠다. 이후 세월 속에서 퇴락한 사당을 현대에 이르러 크게 중건한 게 지금의 정송강사(鄭松江祠)다. 이곳엔 송강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돼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정송강사는 송강의 넋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 분위기는 여느 딱딱한 사당과 달라 포근한 맛을 풍긴다. 산자락을 움켜쥔 입지라 배후 풍치가 밝다.
송강의 묘소는 정송강사 옆으로 난 비탈길 끝자락에 있다. 묏자리는 문외한의 눈에도 명당으로 보일 만큼 아늑하고 훤칠하다. 우암이 잡았다는 터이니 어련하랴. 우암이 송강의 묘지 이장을 주도한 건 송강의 묘소에 물이 차 고민이라는 후손의 하소연을 접하고서였다. 그런데 우암이 하필 진천을 택해 이장 작업을 한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여기에는 일련의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우암은 영남계 서원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충북 지역에 서원 다수를 건립했는데, 서인의 영수 송강의 묘소를 진천으로 이장한 것도 같은 의도에서였다. 정송강사 남쪽엔 ‘송강정철신도비’가 있다. 비의 총 높이는 3m에 달해 웅장하다. 비문을 쓴 이는 우암이다.
송강은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파행이 잦은 질주였다. 당쟁의 이전투구를 조성하거나 휘말려 사실상 안심을 가지고 산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 최고의 정치적 참사로 평가되는 ‘기축옥사’ 때는 송강이 위관(委官, 재판장)을 맡아 동인 세력의 뿌리를 뽑으려는 의도로 참혹한 피바람을 일으켰다. 1000여 명에 달하는 동인 쪽 사람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던 것. 송강 자신 역시 당쟁에 치받혀 부침을 거듭했으며, 수차례 유배지로 쫓겨나기도 했다. 말년의 송강은 강화도에서 가난을 끼고 고독하게 살았다. 친구에게 편지를 써 ‘아무리 둘러봐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다’고, ‘부디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대목에서 송강이 청빈을 버릇으로 삼았던 인물임이 드러난다고 보는 눈도 있다. 아무려나 송강은 강화의 누옥에서 홀로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영양실조였다고.
송강의 성품에 대해 동시대 학자 기대승은 ‘청결한 수석’에 견주었다. 율곡은 ‘강직하지만 속이 좁아 병통’이라 했다. 선조는 송강을 총애했지만 그가 죽자 ‘독기로 사람을 해친 자’라고 깎아내렸다. 무능한 군주답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은 셈이었다. 한편 가사문학으로 조선 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은 송강을 두고서는 찬사가 쏟아졌다. 흔히 조선의 최고 시인으로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송강을 꼽는데, 서포 김만중은 송강의 ‘사미인곡’을 중국 굴원의 명시 ‘이소’(離騷)에 빗대어 ‘동방의 이소’라 극찬했다. 송강의 남다른 개성은 당시 문인들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한글로 시를 썼다는 데에서도 두드러진다.
송강의 시적 절창은 주로 유배지에서 나왔다. 신세가 궁색해질 때마다 송강은 복잡한 심정을 시에 묻어 다독였던 거다. 그가 매달린 것이 시만은 아니었다. 술이 또한 송강을 삼매경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는 음주벽으로도 한가락 했다. 대낮 근무시간에 거나하게 취해 사모를 삐뚜름히 걸치고 임금 앞에 나타나기도 했다지. 이런 송강에게 선조는 작은 은배(銀杯)를 하사했다. “이 잔으로 하루 한 잔만 마시라”고 당부하며. 이에 송강은 은배를 망치로 두들겨 사발만 하게 만들어 술을 마셨다던가? 이럴 때의 송강은 익살스런 꾀보다. 정송강사 경내에 있는 송강기념관엔 송강의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선조가 내린 은배 한 점도 보인다. 진품은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
직접 쳐볼 수 있는 대종도 있다
이제 발길은 진천종박물관에 닿는다. 한국 범종(梵鍾, 절에서 쓰이는 큰 종)의 우수성과 예술성을 알리기 위해 2005년 개관한 국내 유일의 종 전문 박물관이다. 진천엔 고대의 제철 유적인 ‘진천 석장리 유적’이 있다. 따라서 진천에선 일찌감치 금속공예의 싹이 텄을 걸 알 만하다. 이 특유한 역사를 배경 삼아 금속예술의 정수인 범종의 모든 걸 보여주는 종박물관이 건립됐다. 직접적인 설립 계기는 범종 제작의 명인 주철장(鑄鐵匠) 원광식(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이 만들거나 모은 종 150여 점을 기증한 것이었다.
진천종박물관은 크기와 세세함이 조합돼 매우 알차고 흥미진진한 박물관이다. “어, 이런 재미있는 박물관이 있었어?” 감탄이 절로 터진다. 범종의 전시는 물론 범종의 역사, 제작 기술과 과정을 보여주는 다양한 섹션에서부터 세계의 종 전시관, 기획전시실, 타종 체험장 등을 갖추어 관람객을 충족시킨다. 나는 ‘충족’ 정도가 아니라 사로잡혔다. 이 박물관의 핵심 공간은 시대에 따라 변전한 한국 범종의 양상과 실체를 보여주는 1층 전시관이다. 여기에선 범종의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 모형을 비롯해 상원사 동종, 낙산사 종 등 다수의 명품 범종을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종도 전시해 비교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이 모든 종이 원광식이라는 한 개인이 실물 그대로 재현한 복제품이라 하니 경이롭다.
이곳의 종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성덕대왕 신종 앞에서 눈을 뗄 방법이 없다. 예전 이 거대한 보물을 경주박물관으로 옮길 때 경주시민 10만여 명이 몰려들어 운송 광경을 지켜봤다. 그토록 인기 있으며, 그토록 유서 깊으며, 그토록 빼어난 예술이다. 범종은 종소리의 깊음과 신비감으로 아름답다. 중생의 미망을 일깨우는 소리를 내는 신성한 법구다. 이른바 ‘맥놀이’라는 오묘한 과학을 무뚝뚝한 쇳덩어리에 주입해 부처의 음성, 천상의 소리를 뽑아내다니. 종의 피부에 새긴 조각은 또 어떻고? 사람을 압도하는 저 능란한 세공을 보라. 범종의 과학, 미학,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진천종박물관은 기분을 돋워주는 명소다. 야외 광장엔 직접 쳐보라고 만들어놓은 대종 2점이 있다. 종을 치자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다 그윽한 여음을 남기고 꿈처럼 사라진다. 그러자 가슴에 괸 먼지가 가셨나? 쾌감이 엄습한다.
장주식 진천문화원 원장
‘이상설 기념관’은 건축문화 성지
“올해 진천문화원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보재 이상설 기념관’을 차질 없이 개관하는 데 있다. 계획대로 올해 상반기에 개관되면 곧바로 전국적인 명소로 부각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상설 선생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갖가지 자료는 물론이고 건축의 미학까지 겸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진천문화원 장주식 원장의 얘기다. ‘보재 이상설 기념관’은 2023년 10월에 준공식을 마쳤다. 무려 8년여에 걸친 사업으로 결실을 거두었다. 천신만고로 일을 추진한 장 원장의 실력이 마침내 빛을 본 셈이다. 그는 ‘보재 이상설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다.
“이상설 선생은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우뚝한 인물이다. 항일운동의 선구자이며, 인품과 학식도 빼어난 분이다. 그러나 충분히 조명되지는 않았다. 흔히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기억할 뿐이지 않은가. 기념관 개관을 계기로 선생의 업적과 뜻이 널리 선양되길 기대한다.”
건축에 구현된 기법이 특별하다지?
“전통적인 목 구조와 현대적인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융합해 지은 대형 건물이다. 고려 중기에 성행한 주심포 양식도 도입했는데, 이모저모 고도의 기술력이 들어간 건물이다. 이는 사례가 드문 것으로 향후 건축문화의 성지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진천 하면 ‘생거진천’(生居鎭川)부터 떠오른다. 진천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진 연유가 있겠지?
“주로 너른 구릉지로 이루어진 진천은 과거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지형 구조상 자연재해도 드물다. 따라서 농사가 순조롭고, 덩달아 인심도 좋을 수밖에. 진천엔 널리 이름난 효자도 많았다. 이 역시 지역에 만연한 후덕한 인정을 웅변한다.”
글로벌 기업들이 입주한 요즘 진천군은 활력이 넘친다. 문화원이 할 일도 많아졌을 것 같다.
“문화 향유 욕구가 강한 청년층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 문화원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 개발에 나서고 있다. 기존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한편 현대적인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보완할 참이다.”
진천의 역사 가운데 주목할 만한 장면을 소개한다면?
“신라의 영웅 김유신 장군이 진천에서 탄생했다. 장군은 삼국통일 위업을 완수했는데, 그의 화랑도 정신과 통일 열망이 진천 땅에 이어져 남북통일의 기운이 들끓어오를 경우, 마침내 통일 한국을 이룰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
요즘 진천에 떠오른 문화 이슈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
“백원서원 복원 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 서원은 조선 최고의 효자 김덕숭 선생을 비롯한 4인의 선현을 배향한 곳으로 ‘충효의 고장 진천’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현재 재원 마련을 위해 주민들도 성금을 모으고 있다.”
장 원장은 백원서원 복원 이후를 생각하고 있다. 전통 서원을 현대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 중이다.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3세에 이미 ‘천자문’을 떼고 6세부터 본때 있는 글을 썼다. 딱히 스승이 없는 채로 독학을 해 유학의 최고봉으로 부상했다. 평지돌출한 인걸이다. 뉘신가. 이른바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 조선 말기 유학자들이 개화에 반대하면서 내세운 사상)으로 당대의 격변에 대응한 이론가이자 실천가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다. 산 많은 양평군에서도 외진 서종면 노문리에 그의 생가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외진 곳일수록 반색한다. 산수경관이 살아 있어서다. 화서의 생가 마을 일대에도 중구난방으로 들어앉은 전원주택이 흔해 어수선하다. 그러나 시야에서 집들을 거둬내고 풍경을 바라보면 상황이 다르다. 높거나 낮은 산들은 조율한 듯 조화롭고, 산 사이론 벽계천이 흘러 오롯이 수려하다. 산자수명을 본연으로 지닌 곳이다. 낮엔 초목이 초록을 토하고 밤하늘엔 별들이 모여 소곤거린다. 박순, 김창흠, 남언경 등 조선 중후기 거유들이 이곳에서 살았던 이유를 알 만하다. 자연 풍경에 관한 관조를 최고의 공부이자 최상의 낙으로 삼은 게 선비들이지 않던가. 화서가 영위한 웅장한 삶의 원천적 비결은 이곳 산수를 젖으로 삼아 성장한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가를 볼까? 물소리 들려올 듯 벽계천 가까이에 있는 남향집이다. 집의 전체적인 모습은 좌우로 긴 ‘ㅁ’자를 닮았다. 대문을 통해 들어서자 공간을 확연하게 양분한 담장이 보인다. 담장 왼편에 안채가, 오른편에 사랑채가 있다. 담장에 난 중문을 통해 안채와 사랑채를 오갈 수 있다. 흔히 앞쪽에 사랑채를, 뒤쪽에 안채를 두지만, 이 덩실한 고택은 특이하게도 안채와 사랑채를 병렬로 배치했다. 전형에서 벗어난 구성이다. 야산 자락 경사지를 깎아 확보한 대지의 면적이 협소해 사랑채를 앞쪽으로 끌어내기 어려웠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범례보다 합리와 실용성을 중시한 건축이다. 사랑채엔 방이 유난히 많다. 묵어가는 이들이 많았던 걸 알 만한데 ‘청화정사’(靑華精舍)라 쓴 현판이 걸린 이 집에서 화서의 강론이 펼쳐지기도 했다. 공부가 많아 유학의 산정에 올랐으니 흠모하여 따르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론이 다반사였으리라.
화서는 소가 닭 보듯 벼슬에 별 관심이 없었다. 거의 한평생 이곳 향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화서에게 자연과 사교하는 일은 일상의 루틴이었다. 퇴계가 ‘도산구곡’을, 우암이 ‘화양구곡’을 경영하며 만족을 구가했듯이, 화서 역시 이곳의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겼다. ‘노산8경’이 바로 화서가 애호한 경승이다. 풍경에 시를 헌정하고 이름을 부여해 자연을 찬탄했다. 그렇다면 화서는 은자로 살았나? 세사엔 식상해 차라리 눈을 감았나? 정반대다. 그의 DNA에 초야의 생리가 박혀 있었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오감의 플러그를 빼놓고 살 성격은 아니었다. 고종 임금에 따르면 화서는 ‘밝고 슬기로우며, 강직하고 과감하여 뭇 사람을 초월한 인물’이다. 비록 산림에 묻혀 자족했지만 시국과 정세에 관한 지론이 깊어 주창과 직언도 많았다. 모름지기 사대부의 말년이란 산수간으로 물러나 세상일 따위는 흘러가는 뜬구름에 맡기는 게 상책이라고 보는 유가의 전통도 있었지만, 화서의 계보는 다른 쪽에 속해 있었다. 현실참여형 지식인의 본이었다.
산골에 칩거한 재야 지식인이더라도 학식과 덕망이 높으면 바람에 실린 송홧가루가 천리만리를 날아가듯, 결국은 그 이름이 멀리까지 알려진다. 제자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튼튼한 세력을 형성하게 마련이다. 세력으로 힘을 쓴다. 이렇게 되면 조정이 그를 부른다. 화서 역시 임금의 부름을 자주 받았다. 그러나 화서는 벼슬에 초연했다. 별별 임명장이 수시로 내려왔지만 곧바로 사직했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 때는 동부승지에 임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화서는 75세 노구를 이끌고 상경, 조정에 사직서와 함께 상소문을 제출했다. 상소문의 요점은 이렇다. 서양과 화친하지 말고 적극 싸우라는 것. 서양과 손잡는 건 짐승의 삶을 자청하는 꼴이라는 것. 백성을 수탈하지 않으면 백성이 스스로 고무돼 적을 몰아낸다는 것. 간명하고도 격렬한 상소문이었다. ‘위정척사’의 필요성과 실천적 대안을 역설한 글이었다. 매천 황현은 이 상소문을 ‘100년 이래 가장 유명한 상소문’이라 평가했다지.
당대의 격변과 풍랑을 잠재우는 길은 오직 나라의 문을 닫고 저항하는 데에 있다는 게 화서의 솔루션이었다.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 조짐을 통찰하는 한편, 일본의 조선 침탈을 예언했던 그의 광활한 현실 인식은 이른바 ‘화서학파’의 학통으로 전수돼 항일 독립운동의 밑불로 타올랐다. 화서의 사상적 상속자인 최익현, 유인석, 양헌수 등이 한말 국권사수의 전위에 서지 않았던가. 박은식과 김구도 화서의 계보에 든다. 그동안 화서는 반근대적인 골수 보수주의자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외세의 불량한 본질을 간파하고 국권의 자주성 강화를 역설했다. 이런 주장에 박힌 줏대와 혜안을 외면하는 건 불공정하다. 한쪽 날개만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봤다는 허풍처럼 초라하다.
용문사 명물, 1000년을 산 은행나무
이제 발길은 용문사에 닿는다. 용문면 용문산 아래에 있는 천년 고찰이다. 화서 생가가 양평의 정신적 유적이라면 용문사는 불교 문화유산의 대표다. 일주문을 지나 냇가로 난 소로를 따라 30분쯤 오르면 용문사 경내가 환히 드러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지장전, 관음전, 삼성각, 종각 등이 펼쳐진 품새의 위용으로 보면 큰 절이다. 유서도 깊다. 신라 신덕왕 재위 때인 913년에 창건됐다. 일설에 따르면 원효가 초창하고 도선이 중창했다. 내력이야 어쨌든 첫 산문은 초막이나 토굴로 시작됐을 법하다. 그러던 게 천년 세월을 거치면서 대찰의 외양을 갖추어 번듯하다. 용문사에서 득도한 이도 한둘에 그치지 않을 텐데, 이를테면 고려 말의 선승 정지국사가 이곳에서 정진했다. 그는 중국 연경으로 건너가 만행을 하기도 했다. 이미 중국에 들어가 있던 무학대사와 나옹화상을 만나 교유도 했고. 이후 무학과 나옹이 명성을 얻은 반면 정지국사는 자취를 감추고 수도하길 거듭하다 72세에 홀연히 입적했다. 용문사엔 정지국사를 기리는 부도와 비가 있다. 빼어난 조각 기법으로 아름다운 금동관음보살좌상도 이 절의 성보(聖寶)다.
용문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은행나무 노거수다. 수령 1000년 이상으로 국내 은행나무 중 최고령이다. 나무의 건강을 위해 가지치기를 대대적으로 해 현재 높이는 40m 정도지만, 이전엔 60여 m에 달해 유실수로서는 동양권 최대 거목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한 알의 씨앗에서 출발한 나무가 천년을 살다니. 단지 물과 햇빛을 취하는 광합성으로 기적적인 생육을 하다니. 그 도도한 생명력에 인간은 그저 압도될 수밖에 없다. 뭐랄까, 바위라거나 강물이라거나 거목이라거나, 묵연히 유장한 것들은 길을 일러주는 선생에 가깝다. 인간을 감싸주는 고요한 포용력으로 보면 부처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겠지, 오늘도 은행나무 아래 사람들이 모인다. 저 노거수를 보고 무너진 희망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돌아간 이가 한둘이랴.
최영식 양평문화원 원장
“분원(分院)까지 네 곳 만들어”
경기도 양평군은 자연경관이 생동하는 곳이다. 특히 강 풍경이 수려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하는 두물머리에 몰리는 인파를 보라. 사시사철 쉴 만한 물가다. ‘굴뚝 없는 청정지구’ 양평으로 아예 이주한 이들도 많다. 그래 인구가 늘어났다. 곳곳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묶여 문화적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가령 지하에 묻힌 옛 유물을 발굴하기가 어렵다. 최영식 양평문화원 원장의 얘기는 이렇다.
“전통문화의 전승엔 다소 취약점이 있다. 반면 현대 문화가 확장돼 지역민들의 문화 향유 욕구를 채워준다. 이는 현대에 이르러 도드라진 인구 증가를 배경으로 한 긍정적인 현상이다. 양평문화원은 이런 지역적 특성을 토대로 다양한 문화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근래에 있었던 문화원 사업 가운데 큰 성과를 거둔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하나만 꼽기는 어렵지만 무엇보다 ‘추억의 영화 상영’으로 주민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 6년간 300여 편의 영화를 상영했는데, 무려 1만여 명의 주민이 영화를 감상했다. 우리 문화원은 모든 문화 혜택이 주민들에게 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걸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화 상영은 매우 주효한 프로그램이다.”
2024년에 펼칠 새 사업을 소개해달라.
“지방문화원은 지자체의 예산 지원을 받아 사업을 한다. 그런데 지자체들이 대부분 2024년엔 긴축 예산을 편성하고 있으며, 양평군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양평문화원 예산이 대폭 삭감됐다. 신년에 새 사업을 전개하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셈이다. 기존 프로그램들을 점검하며 유지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이는 안타까운 대목이다. 열정은 많지만 예산 문제로 늘 고민하는 게 지방문화원의 현실이다. 양평문화원은 학예사 같은 인적 자원을 갖추고 참신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해 벽에 부닥치는 일이 잦다.”
주민의 문화원 프로그램 참여도는 어떤가?
“양평문화원엔 현재 600여 명의 회원이 있다. 인구 대비 타 지방 문화원보다 많은 인원이다. 관내 4개 지역에 분원(分院)도 설립했다. 이는 사례가 드문 방식이라 판단한다. 문화원에 조경을 해 쾌적한 환경도 갖추었고.”
양평 하면 용문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양평을 불교 문화 융성지로 봐도 될까?
“그렇다. 천년 고찰 용문사 외에 상원사나 사나사 등 유서 깊은 고찰이 더 있다. 용문사에서 유명한 건 1000여 년의 수령을 가진 은행나무다. 양평문화원은 매년 10월, 이 나무의 장생과 군민의 안녕을 비는 ‘영목제’를 거행한다.”
양평엔 여느 군에 드문 군립미술관이 있어 돋보인다.
“양평엔 650여 명의 문화예술인들이 거주한다. 이런 배경으로 군립미술관이 설립됐다. 문화원 원사(院舍)에도 회화와 지역 유물을 볼 수 있는 상설 전시관이 있다.”
문화원 현관엔 직접 발간한 책들이 진열돼 있다. 주민 누구나 무료로 가져갈 수 있는 책이다. 진취적인 서비스 기법이다.
경남 진주시는 예로부터 인재 배출이 잦았던 고장이다. ‘영남 인물의 절반이 진주에서 나왔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다. 특히 충신이 많았다.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구국의 화신이라 일컬을 만한 이들의 비범한 행장이 이 고장에 잇따랐다. 그래 ‘충절의 고장’이다. 오늘날 충의(忠義)의 얼로 빛나는 진주의 각별한 역사성을 웅변하는 명소를 꼽자면? 단연 진주성이 아이콘이다. 임진왜란 때의 전사(戰史)와 의용의 서사를 고이 간직한 진주성을 둘러보지 않고 진주를 얘기한다는 건 어불성설일 수 있다.
진주성은 진주시내 강변에 있다. 성의 남벽 아래로 남강이 굽이쳐 수려한 풍광을 빚어낸다. 강물과 벼랑이 지닌 전략적 가치에 착안해 성을 구축했다. 본래 내성과 외성으로 짜인 이중구조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내성보다 규모가 컸던 외성은 스러지고 내성만 남았다. 성곽의 길이는 1790m, 높이는 5~8m에 달한다. 삼국시대 때 토성(土城)으로 축조됐던 진주성이 석성(石城)으로 거듭난 건 고려 말 우왕 때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몇 차례 고쳐 지었다. 따라서 축성의 변천사와 기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된다.
공북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선다. 널찍하고 훤칠한 성내 공간 곳곳마다 잘 단장돼 생경한 기분을 자아낸다. 천년 고성이되 마치 신축한 것처럼 매우 미끈한 게 아닌가. 근래의 복원작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걸 알 만하다. 한때는 고즈넉한 폐허와 잔해 사이에 간신히 존재했겠지만 고칠 것 고치고, 다듬을 것 다듬고, 보탤 것 보태어 회생했다. 복원사업 이전의 성내엔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걸 다 철거해야 했다. 그러니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필연이었겠다. 작업자들은 진주성의 본연과 본질에 부합하는 복원을 완수하기 위해 실력을 쏟아부었을 것이다.
성내의 지형은 리듬이 있다. 평지와 경사지, 야트막한 언덕과 구릉지,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지며 거대한 타원을 그리는 성곽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었다. 너른 잔디밭과 다양한 수목들이 초록을 뿜어 소풍과 산책을 즐길 만한 공원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진주성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곳집이다. 일쑤 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 곳이다. 수성(守城)과 승전을 꾀하기 위한 갖가지 구조물이 즐비한 곳이다. 전투 지휘소로 쓰인 서장대와 북장대, 포를 쏘았던 포루, 전공을 새긴 사적비와 순절의 넋을 기리는 사당 등이 있다.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까지 성내에 있어 답사객들의 호감을 산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벌어진 곳으로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새겼다. 당시 장수는 진주목사였던 김시민 장군. 1592년 10월 김시민은 전라도와 이어지는 전략 요충이었던 진주를 삼키기 위해 쳐들어온 2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쳤다. 김시민이 거느린 병력은 관군과 의병을 합쳐 3800여 명에 불과했다지. 중과부적 상황이었지만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김시민의 명민한 지략이 작동해서였다. 이를테면 그는 성 밖에 주둔한 의병들에게 왜군을 교란할 수 있는 교묘한 작전을 전개하게 했다. 성내의 부녀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혀 군사가 많아 보이게 했다. 야간엔 악공들의 피리 소리로 왜군의 심리를 교란시켰다.
지략뿐인가, 김시민은 개혁적 성향의 무장이라서 휘하를 다루는 방법에서도 관행을 타파했으니 매사 솔선수범으로 군대의 사기를 북돋웠다. 신식 병기 동원에도 신경을 썼다. 이래저래 승전은 애당초 떼어놓은 당상 같은 것이었을지도. 하지만 김시민은 전투 막판에 왜군의 총탄을 맞고 순절했다. 그때 나이 38세였다. 그가 숨을 거두자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성내 백성들의 곡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던가. 비단 김시민을 애도하는 호곡뿐이었으랴. 대첩이 끝난 자리에선 죽은 자들을 끌어안은 산 자들의 오열이 터져 나왔으리라. ‘조선왕조실록’은 당시의 참혹한 정경을 적치여산(積置如山), 즉 ‘시체가 쌓인 모습이 산과 같다’고 기록했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을 통해 ‘사방 30리 안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고 했다. 진주성은 일종의 성지(聖地)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선인들의 역사가 선연한 게 아닌가. 전쟁에 따르게 마련인 지옥의 묵시록을 술회하는 성이라는 점에서는 반전(反戰) 메타포가 응축된 곳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전쟁이란 야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수시로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슬픈 숙명이지만.
다산 정약용이 극찬한 ‘진주검무’
진주성 남쪽 기슭, 성곽에 인접한 곳엔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크고 당당하고 수려한 누각이다. 한때 국보로 지정됐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지정을 해제했다. 지금의 모습은 1960년의 보수작업을 통해 얻었다. 진주성 아래로 굽이치는 남강과, 저 멀리 산야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진주성 최고의 전망대다. 조선 선비들이 풍류와 사색을 즐겼던 영남 제일의 정자다. 전투 지휘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촉석루 역시 전쟁이라는 부조리극이 낳은 상처의 전시장이기도 하다. 촉석루 아래 강변에선 진주성대첩 즈음 한 여인이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자결, 영원히 남을 충절의 화신이 됐다. 바로 논개다. 진주 관기(官妓)였던 그의 재능은 미색으로 향기를 뿜는 데에만 그치지 않았음인가. 시대를 읽는 냉철한 눈까지 겸비했나? 그는 기꺼이 한 몸 바쳐 한 시대의 참화에 빛을 흩뿌렸다. 촉석루 아래 강변엔 논개가 왜장과 함께 투신한 바위 ‘의암’(義庵)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어느 날 촉석루에 유람을 왔다가 ‘일개 작은 여인이 왜적의 우두머리를 섬멸하다니 이 얼마나 통쾌한가?’로 시작되는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썼다. 논개의 거룩한 행장을 기리는 글이다. 다산이 진주에 와서 탄복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진주에 전승돼 오늘날까지 맥이 이어지고 있는 ‘진주검무’를 보고 찬탄했던 것. 검무는 여성 무용수들이 무사 복장을 하고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이다. 촉석루에 앉아 이 춤을 감상한 다산은 참을 수 없는 흥에 겨웠나? 그는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 검무를 추는 미인에게 드림)이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검무를 추는 여인의 매력적인 자태와 춤사위의 삼엄한 격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명편이다. 무불통지(無不通知)의 석학이었던 다산은 음악과 춤에도 조예가 깊었다. 음악과 악기를 연구해 ‘악서고존’(樂書孤存)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런 다산이 진주검무를 시로 써서 극찬했다. 진주검무는 1967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초대 예능보유자는 ‘진주권번 출신의 마지막 예인’ 고(故) 김수악이다. 김수악이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 목석도 들썩였단다. 춤으로 도가 튼 달인이었다. 진주검무의 맥은 오늘날 예능보유자 유영희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그는 70대에 접어들었지만 예인다운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춤사위는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고.
김길수 진주문화원장
“일제강점기 때 기생 단체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진주의 자연지리 가운데 빼어나기론 단연 남강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며 굽이치는 남강의 폭은 넓고 물살은 유유해 아름답다. 예로부터 진주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온 생명의 젖줄이다. 진주의 보배에 해당하는 진주성이 남강가에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의 역사와 문화는 남강과 함께 흘러왔다. 그렇다면 진주의 문화답사 1번지는? 김길수 문화원장은 진주성과 진주성 안에 있는 촉석루를 꼽는다.
“진주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실로 많다. 그러나 진주성을 찬찬하게 답사하는 이는 드물어 아쉽다. 대체로 촉석루와 논개 유적인 의암만 훑어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진주성을 한 바퀴 도는 온전한 답사 방식을 채택하면 좋겠다. 성 안에 있는 국립진주박물관 관람과 남강변에 조성된 성 밖 산책로를 통해서도 역사의 숨결을 음미할 수 있다.”
‘의기 논개’ 역시 진주의 대표 캐릭터다. 논개의 행장이 지역 정서에 미친 영향엔 어떤 게 있을까?
“일개 기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세계 역사상으로도 논개가 유일무이하다. 나라를 위하는 일엔 신분의 귀천이 따로 없다는 걸 실천한 인물이 논개이자 논개 정신이다. 따라서 지역 정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를테면 3.1만세 운동 때 진주에선 기생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돼 국권 회복에 앞장섰다.”
‘진주검무’는 물론 가무악(歌舞樂)의 대가였던 고 김수악 선생의 예술은 현재 어떤 식으로 전수되고 있는지?
“김수악 선생이 양성한 제자들이 뒤를 잇고 있다. 진주에서 교방예술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는 셈이다. 우리 문화원은 선생의 제자들을 문화학교 강사로 영입해 강의를 맡기고 있다. 향후 ‘김수악 기념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전통 민속이 흔히 현대의 풍속에 밀려 퇴색하고 있다. 반면 진주에선 ‘진주 소싸움’의 명맥이 이어져 흥미롭다.
“농업이 번성했던 과거부터 진주 사람들은 농한기에 소싸움을 즐겼다. 일설엔 진주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역이라 신라와 백제 편으로 나눠 소싸움을 벌였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소싸움 무대로 적격인 남강 백사장이 있어 명맥 유지가 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주요 문화원 사업을 소개해달라.
“외람된 얘기지만 진주문화원은 전국 문화원 중 으뜸이라 자부한다. 지역 문화에 대한 시민들의 식견과 애착을 토대로 인화단결을 꾀해온 결과라고 본다. 중점 사업은 진주의 ‘의로운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콘텐츠 개발이다. 지속적으로 순절 의병들을 발굴, 연구해왔다.”
타지의 문화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사업을 추진한다지? 이는 매우 인상적이다.
“순절 의병들을 찾아내고 조명하기 위해 의병 활동이 많았던 전라도의 여러 문화원들과 손잡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어떻게든 의병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아울러 우리 문화원은 전국 각지의 문화원과 자매결연을 맺어 문화예술 교류사업을 하고 있다. 이건 앞으로 더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비가 내린다. 비는 감정의 농도와 온도를 높여준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억눌렸던 감정을 해방시킨다. 그렇다면 비 내리는 날에 여행을 떠나도 좋으리라.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에 장맛비가 내린다. 그래 사람이 거의 없어 적적하다. 비는 쉼 없이 내려 풍경을 변주한다. 미인은 주렴 사이로 보라 했던가. 그래야 운치가 돋는다 했다. 미인뿐이랴. 주렴처럼 드리워지는 빗발 사이로 보이는 광한루원의 풍경 역시 맑은 날과 달라 오히려 이색 정취를 자아낸다. 비에 흥건히 젖은 누정과 수목의 표정을 주시할 만하다. 육안보다 심안으로 봐야 할 것만 같은 내향성이 서려 있다.
광한루원은 남원시의 자랑거리이자 관광명소다.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렇게 유명해진 건 광한루원이 고전소설 ‘춘향전’의 무대로 등장해서다. 사람들은 흔히 광한루원과 ‘춘향전’을 동격쯤으로 여긴다. 그래 광한루원에 와서 춘향과 이몽룡이 남긴 열애의 행적을 더듬는다. 그러나 광한루원의 본질은 ‘춘향전’과 무관하다. ‘춘향전’의 한 배경 장소로 쓰였을 뿐, 본래 조선 중기에 지어진 원림(園林)의 귀감이라는 데에 광한루원의 정체성이 있다.
사실관계가 그러하지만 흔히 간과한다. 광한루원에 와서 원림에 꾹 방점을 찍고 답사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대부분 춘향의 상열지사를 염두에 두고 풍경을 바라본다. 유심히 살펴보고 감흥을 즐길 만한 조선 원림이 엄연히 이곳에 있으나 ‘춘향전’을 표상하는 구조물들이 혼재해 정작 또렷이 인식하지 못한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다면 관점의 조절이 필요할 텐데, 관광 소재로 들어앉은 시설물들을 시야에서 걷어낸 셈치고 원림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겠다. 그게 광한루원을 담뿍 마음에 담는 방법일 테다.
광한루원은 관아가 주도해 지은 관아 원림이다. 관아 원림이란 고을의 관원이나 시인 묵객들이 연회와 풍류를 즐긴 야외 정원이다. 광한루원은 중심 누각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그 일원에 조영된 원림을 통틀어 지칭하는 이름이다. 광한루의 스케일은 매우 웅장하다. 위엄이 넘친다. 상징과 지향을 담은 사물들의 디테일로 아름답기도 하다. 정원과 연못 역시 호방하고 수려하다.
광한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팔작지붕 형태의 누각이다. 남쪽에서는 간결한 구조로 보이지만, 북쪽에서는 매우 복잡하고 장식적인 외관에 눈길이 쏠린다. 거기에 세 겹의 작은 지붕 아래로 층계를 설치한 회랑이 있어서다. 월랑(月廊)이라 부르는 묘한 구조물이다. 이걸 조성한 이유가 있다. 광한루는 초창 이후 중수를 거듭했다. 그 와중에 정자의 총량이 너무 과중해 북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했는데, 이 난처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계단이 있는 회랑을 덧대어 지지대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여느 정자에서 볼 수 없는 기묘한 형태미와 기능성을 확보하게 됐다. 이와 같은 건축적 개성과 위트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광한루엔 당대 문호들이 쓴 시문 편액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멋들어진 정자가 있으니 드나든 시인이 한둘이었으랴. 여기에서 붓에 먹을 적신 묵객이 한둘이었으랴. 호남을 지나는 선비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렀다고 한다. 지리산 솔바람이 드나드는 정자 마루에선 청담(淸淡)이 자주 오갔으리라. 끽다와 음풍영월이 있는 풍류도 다반사였을 테고. 조선의 문인 임제가 광한루에 올랐을 때엔 매화라도 피었나? 매화 가지에 달이라도 걸렸나?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깬 채 밤이 깊어졌다고, 함께 노닌 사람과 헤어질 땐 꽃이 지더라고, 임제는 그렇게 시로 노래했다.
광한루는 세종의 총예를 받았던 명재상 황희가 남원에서 유배를 살 때 지은 작은 누각 광통루에서 유래했다. 광한루라는 이름은 1444년 전라감사 정인지가 “아하, 여기가 바로 달나라의 미인 항아가 산다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로다!”라고 찬탄한 데에서 비롯됐다. 정인지가 괜히 달나라 운운한 게 아니다. 광한루가 애초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지어졌으니까. 즉 광한루는 천상의 궁궐인 셈이다. 옛사람들은 상상력을 발동해 결국 천상계를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천상에 모래알처럼 무수히 뿌려진 것은 별인데, 광한루 전면의 넓고 유려한 연못이 바로 은하수를 상징한다. 연못 가운데엔 섬 세 개를 만들어 삼신산을 표상했다. 광한루원의 기저엔 이렇게 신선 사상이 깔려 있다. 도교, 유교, 음양론, 풍수지리 등이 추구하는 이상향의 상징 구조들로 어우러져 있다. 안팎이 두루 광활한 세계관으로 상통하는 원림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앞줄에 설 조선 정원이다.
신선을 마음에 들여놓고
다시 빗속을 운전해 정자를 찾아간다. 지리산 기슭,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에 있는 퇴수정(退修亭)이다. 매천 박치기(梅川 朴致箕, 1825~1907)가 1870년에 지은 누정이다. 그는 토목건축을 관장하는 벼슬살이를 하다 은퇴하고 여기 후미진 산골짝에 은거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은 결국 자연으로 흘러가는가? 퇴직 뒤엔 정해진 순서처럼 산림에 여생을 의탁했던 선인들의 유전자가 후세까지 이어지나? 박치기의 고향은 함양군 안의면이다. 그러나 퇴직 후엔 고향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박치기가 지은 퇴수정의 모습이 그의 선조 박명부가 안의면 화림동 계곡에 지은 농월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닮아 흥미롭다. 경치 좋은 냇가에 지은 정자라는 점에서도 퇴수정과 농월정은 유사하다. 경관을 보는 취향과 정자를 짓는 경향에 집안 내림이라는 게 있지 않았나 싶다.
박치기는 널리 이름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근사한 정자를 지어 한몫 단단히 했다. 그의 전공이 건축이었으니 퇴수정에서 구현된 건축 미학의 완성도를 보지 않고도 가늠할 만하지만, 실제 이 정자는 빼어나 인상적이다. 당대 누정 건축의 첨단 기술력으로 빚어낸 작품일 수도 있다. 명품 정자라 추켜세우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정자의 규모는 작아서 소박미가 물씬하고, 흠결 없는 비례로 조화롭다. 은근한 세련미로 우아하기까지 하다.
퇴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주목할 만한 요소가 많은 정자다. 가령 배흘림기둥을 구사해 시각적 안정감을 부여했다. 조선시대에 일반적이었던 막돌 초석 대신 사각 다듬돌을 놓은 것도 당시로선 획기적인 건축 공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뚜렷한 특징을 꼽자면 훤칠한 냇물과 동행하는 정자라는 점이다. 지리산에서 굴러 나온 계류가 정자의 코앞을 흘러가는 게 아닌가. 기기묘묘한 물가의 암반들과 물속의 바위들까지 퇴수정의 동아리로 삼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숲과 물 사이에 들어앉은 정자다. 자연과 긴밀하게 얽힌 집이다. 박치기의 생리는 초야를 닮아 거친 나물밥만으로도 자족했다. 퇴수정 마루에 올라서는 곧잘 객과 더불어 술과 거문고를 즐겼다지. 그는 신선을 닮고 싶어 산수에 묻혀 산 인물이다. 속세의 질서와 규율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 안에 신선을 들여놓고 자연에서 노닐 경우엔 경지가 달라진다. 신선을 흠모한다는 건 이미 도(道)에 밝다는 뜻일 테니까.
김주완 남원문화원장
“남원 문화의 성장 지리산의 영향력 덕분”
예로부터 남원을 일컬어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의 고을’이라 했다. 하늘이 내린 땅이며, 비옥한 들판이 펼쳐지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저 옛날의 농경사회 시절, 땅에서 나오는 생산물이 풍부해 의식주가 넉넉할 경우엔 문화마저 덩달아 융성했다. 남원이 딱 그랬다. 농업이 발달한 덕분에 향토 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현대에까지 상속된 유형・무형의 문화자산이 수두룩한데, 이를 견인차로 삼아 남원은 문화 관광도시로 부상했다. 이에 대한 김주완 남원문화원장의 얘기는 이렇다.
“농업경제의 힘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먹고사는 게 무난해 예술이 발흥한 거다. 삼국시대부터 남원이 교통의 요충이었다는 점도 문화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교통로를 통한 인적・물적 교류는 물론, 외부의 다양한 문화 유입이 활발했으니까.”
남원은 지리산 자락에 있다. 지리산이 남원 문화에 미친 영향도 클 것 같다.
“남원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어머니 산’이다. 삶의 희망과 안식을 지리산을 통해 얻으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원의 문화예술 역시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성장했다고 본다. 남성적인 판소리 동편제를 완성한 가왕 송흥록의 성취는 지리산이 주는 정신적 영향력에 의해 가능하기도 했다. 남원은 문학의 요람이다. 고전소설 ‘춘향전’과 ‘흥부전’의 무대이자 발상지이며,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남원 사람이다. 이 모든 문학적 성장의 뿌리 역시 지리산에 있다고 생각한다.”
6년째 남원문화원을 이끌고 있다. 그간에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큰 성과 하나를 소개하겠다. 과거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베 짜는 소녀가 있었는데, 우리 문화원은 이 소녀의 스토리를 전해 듣고 전말기를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조사단을 꾸려 일본 현지를 찾아가 여러 기록을 뒤지는 등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마침내 영상 다큐에 모든 걸 담을 수 있었다.”
매우 뜻깊은 발굴 사업을 성공시킨 셈이다. 소녀는 포로로 끌려갔으나 좌절하지 않고 굳세게 일어섰던 것 같다. 자신이 지닌 직조(織造) 재능을 일본 지역민들에게 전수해 직조산업 발전에 기여했다는 게 아닌가. 소녀의 사후, 일본인들은 존경하는 마음을 내어 추모비를 세웠다 한다.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소녀의 명민한 자질에 감동할 수밖에.
소녀 관련 발굴 자료들을 향후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가?
“다큐 상영은 물론, 그림책으로 만들어 널리 보급할 계획이다. 연극이나 창극, 혹은 소설로 가공할 수 있는 콘텐츠도 개발할 것이다.”
문화원마다 지역민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문화원의 사업과 프로그램에 동참할 수 있는 방안 개발에 고심하는 것 같다. 이 문제엔 어떤 기법이 필요하다 보나?
“외부에서는 문화원이 주민들의 참여나 관심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이미 가까이에 있다고 본다. 미진한 부분은 지속적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우리는 ‘열린 문화원’을 지향한다.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하기 위해, 문화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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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풍경 푸르러 첫눈에 싱그럽다. 청명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마을이다. 한갓진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택들. 산야의 초록과 고택의 수묵색이 차분하게 어우러져 푸근하다.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군자마을이다. 원래 2km 정도 저 아래 ‘외내’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이 들어설 때 이곳으로 집단 이주했다. 수몰을 피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택과 고택 사람들의 몸살이 자심했을 테다. 억지 춘향으로 밀려났으니까. 군자마을만이 아니라 안동의 많은 전통마을이 불운을 맞이했다. 일부 마을은 그대로 수몰됐으며, 군자마을처럼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의 고택은 이건(移建)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안동의 유림에선 논의가 많았더란다. 결국 ‘문중을 지키는 소리(小利)보다 국가가 도모하는 대의(大義)에 승복하자’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고 한다.
군자마을은 ‘외내’에서 통째 옮겨온 고택 20여 채로 이루어져 있다. 이건 이후 어언 반백 년이 지났다. 상처를 씻어주는 건 언제나 세월이라는 약이다. 이건 과정에서 곁들인 새 단장으로 고택 마을 특유의 고졸한 맛은 덜 익었지만 찾아오는 이들이 흔해 생기가 감돈다. 답사객들, 또는 한옥 스테이 같은 체험 프로그램을 즐기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유구한 세거로 이어진 후손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지금은 소수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을이 지닌 역사성과 고건축이 지닌 미감을 힘으로 삼아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옛 마을의 생존 방식과 풍속이 이렇게 진화한다.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도 우람하게 자라 너른 그늘을 드리운다. 마을을 에워싼 숲과 전면으로 탁 트인 조망도 빼어나다. 풍경의 절반은 청산이요, 나머지 절반은 하늘이거나 구름이다. 군자마을은 이렇게 자연 안에 있다. 쉴 만한 곳이며, 눈요기할 만한 곳이고, 기억에 남길 만한 곳이다.
군자마을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가 조선 초기부터 600여 년 동안 세거한 곳이다. 입향조는 농수 김효로(聾叟 金孝盧, 1454~1534)다. 그는 생원시(生員試)에 붙었으나 출세에 뜻이 없어 매양 초야에 묻혀 살았다. 퇴계가 김효로를 일컬어 ‘결백한 절개를 지켰다’고 한 걸 보면 정치의 탁류에 발 담그기를 싫어한 인물이었음을 알 만하다. 김효로를 사표로 삼아 성장한 덕분인가? 그의 친손과 외손 중에 학덕 높은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이른바 ‘오천 7군자’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렇다.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안동부사로 재임할 때 이곳을 방문했는데, “이 마을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탄복했다지. 이후 군자리라 부르게 됐다.
돌계단을 걸어 올라 후조당(後彫堂) 대종택으로 들어선다. 군자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며, 마을의 깊은 유서를 웅변하는 대표적 건물이다. 입향조 김효로의 장손인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1567년에 초창, 자신을 호를 따 ‘후조당’(後彫堂)이라 이름 붙였다. 후조당은 안채, 사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구성됐다. 대종택답게 규모로나 건축 미학으로나 빼어나다. 특히 후조당 별당의 가구(架構)와 구색이 흥미롭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ㄱ’자형 건물로, 서편엔 6칸 대청을 설치했다. 대청 동편엔 2칸의 온돌방을 배치했고, 잇달아 마루 1칸과 가마 형태의 작은 온돌방 1칸을 덧붙여 위트가 실린 건물 형태를 연출했다. 천장 부위에 설치한 소슬 대공은 매우 희귀한 받침 형식인데, 여말선초의 기법이라 한다. 화각을 한 마루 대공의 화려함도 수작으로 평한다. 6칸 대청의 칸마다 단 사분합문(四分閤門)의 묘미는 또 어떻고? 모조리 들어 올려 걸쇠에 걸면 단박에 외경이 안으로 들이친다. 햇살과 바람이 밀려든다. 사분합문은 이렇게 풍경을 변주한다. 아울러 공간을 확장하는 기능을 해 문중의 제례나 회합 같은 대형 행사를 너끈히 치를 수 있다.
선비가 쓴 요리책 ‘수운잡방’
후조당 별당에 걸린 현판은 퇴계가 썼다. 군자마을 선비들은 다들 퇴계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김부필 역시 제자였다. 후조당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건을 위한 건물 해체 때 지붕 아래 합각에서 고서, 문집, 교지, 토지문서, 노비문서 등 희귀한 문화유산이 다수 발견돼 큰 화제가 되었던 것. 문중 선조들이 600여 년간 은밀하게 소장했던 고문서와 전적들이 천장에서 쏟아지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기상천외한 축제 분위기로 들썩였겠다. 당시 발견된 수천 점의 유물 중 일부는 보물 제1018호와 제1019호로 지정됐다. 사람들은 대개 군자마을의 고택에 관심을 갖지만, 이곳 문중 사람들의 자긍심을 돋우는 건 바로 이 기록유산들이다.
그렇다면 군자마을의 군자들이 지닌 정신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명민해 학문에 밝고 처신에 맑았다. 흔히 탈속한 풍모와 깨끗한 운신을 일삼아 세상의 농간과 꿍꿍이에 초연했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도학자란 세속보다 산림에서의 은거와 공부로 오히려 삶의 진수를 건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지 않았던가. 군자마을 ‘7군자’의 중심인물이었던 김부필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둔했다.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스승 퇴계가 벼슬을 권했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때 퇴계가 읊은 칠언절구가 있다. ‘후조당 주인은 소박하고 절개가 굳어/ 임금의 임명장이 내려와도 기뻐하지 않았다/ 매화와 마주 앉아 빙설 같은 향기를 맡으며/ 그저 도(道) 공부에만 매진하더라.’
이제 탁청정(濯淸亭)을 볼까. 입향조 김효로의 둘째 아들 김유(金綏, 1491~1555)가 1541년에 살림집을 지으면서 바로 옆에 함께 건립한 별당 정자다. 군자마을엔 두 개의 종가가 마을의 기풍과 질서를 주도해왔다. 항렬로 보아 큰집인 후조당 종가와 작은집인 탁청정 종가가 바로 그렇다. 탁청정의 이름은 김유의 호에서 따왔으며,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썼다. 한석봉은 도산서원의 현판을 쓰기도 했는데, 서예가들에 따르면 탁청정 글씨가 도산서원의 것보다 빼어나다고 한다. 탁청정은 정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로 매우 아름답다. 허전한 구석 없이 당당하고 흠결 없이 수려해 당대 최고수 목수가 지은 집임을 짐작케 한다. 영남 지방의 개인 정자치고 탁청정처럼 웅장하고 우아한 정자가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뜰에 있는 연못에선 여름이면 연꽃 향기가 은은하게 피어올라 누각으로 스며든다.
이토록 경탄할 만한 정자를 지어놓고 김유는 무엇으로 소일했나? 그의 뇌에 세팅된 최고의 가치는 유유자적(悠悠自適)이지 않았을까. 그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무과엔 실패, 그 길로 벼슬을 포기하고 향촌에 살며 도학자로서의 영일(寧日)을 구가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유는 ‘어찌 명리(名利)를 좇으랴. 삶이란 즐거워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의 학덕은 드높았고 인격도 고매했다. 즐기는 방식에도 기품이 있었다. 부모 봉양과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함)에 충실함으로써 선비의 본분을 다했다. 특히 접빈객에 공을 들였다. 그는 열 살 연하의 퇴계를 비롯해 당대의 시인 묵객들과 두터운 교유를 했다. 정자 마루에선 청담(淸淡)과 풍류가 화개(花開)처럼 번졌으리라. 이름난 이들만 접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걸인에게도 대접을 했다는 게 아닌가. 그의 집 주방에선 늘 술이 익어가고 음식이 요리됐다. 김유는 요리책 ‘수운잡방’(需雲雜方, 보물 제2134호)을 저술하기도 했다. 남존여비의 비루한 관념이 엄연하던 시대에 선비가 요리책을?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아마도 김유는 삶이라는 여행을 경계 없이 넘나든 게 아니었을까. 수신(修身)이 깊지 않고선 가능치 않은 경지다.
권석환 안동문화원 원장
유교 자체에 무슨 폐단이 있으랴
‘안동학’이라는 게 있다. 안동 지역의 역사·문화·지리·민속 등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지역학이다. 이 흔치 않은 학문 장르의 존재를 통해 안동의 문화적 광량(廣量)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안동 사람들은 흔히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는 물론 민속 문화까지 번성한 곳으로 안동을 능가할 지역이 없는 걸로 본다. 권석환 안동문화원 원장을 통해 안동의 문화와 안동문화원의 일에 대해 들었다.
“‘안동정신’의 핵심은 ‘의’(義)를 중시한다는 데 있다. 여기엔 역사적 맥락이 있다. 일찍이 고려 건국 때 안동의 지도자 김선평·권행·장정필이 정의로운 편에 섰다. 일제강점기 때엔 전국 어느 곳보다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게 왜 그런가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안동 출신으로 성리학의 태두였던 퇴계 선생의 정신에서 영향을 받은 게 그 배경이 됐다. 즉 의리를 본분으로 가르친 퇴계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얘기다.”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표방하고 있다. 이른바 ‘선비정신’이 여전히 살아남은 지역이라는 뜻을 담은 슬로건인가?
“현대의 다양화된 사회에서 올곧은 선비정신을 가지고 살 수야 있겠나. 그러나 유교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이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게 유교니까. 다시 말해 선비정신을 어떻게든 이어가자는 게 안동의 바람이다. 사실 안동은 전통과 예절이 그나마 잘 지켜지고 있는 고장이다.”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요즘 세상에 유교가 가르치는 모럴이 지닌 폐단은 없을까?
“옳은 삶을 가르치는 유교 자체에 무슨 폐단이 있을까? 다만 가르침을 시늉만 낼 뿐 실제로는 이기심을 채우는 얌체들은 이 지역에도 많다. 매사 조상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처신을 하는 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권 원장님은 전통 유가의 후예로 오랫동안 유림활동을 했다. 일상의 처신에서 중시하는 가치들이 있다면?
“기본적인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지키고자 한다. 상경여빈(相敬如), 즉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이 하라는 가르침과, 입장 바꿔 생각하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시 현대사회에서도 요긴한 미덕이라 믿는다.”
얼마 전에 펼쳐진 ‘차전장군 노국공주 축제’는 시민 중심의 참여형 축제로 성황을 이뤄 호평을 받았더라.
“안동문화원이 주관한 축제로 성과가 컸다. 안동문화원이 부각되는 효과를 낳기도 해 보람을 느낀다. 향후 젊은 층을 축제에 적극 끌어들여 질적 성장을 도모할 참이다.”
안동의 문화답사 때 놓치지 않고 찾아보길 바라는 명소를 꼽아달라.
“도산서원을 찾아가 사당에서 절을 하는 걸로 퇴계 선생을 뵙고 그 정신을 담아오면 좋겠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월영교에서는 사랑의 의미를 생각해보길 바라고. 이 둘만으로도 안동이 오래가는 기억으로 남을 게 틀림없다.”
그는 안동만의 먹거리를 추천하기도 했다. 500년 전통의 종가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수운잡방 체험관’을 통해 음식의 낙원을 경험하라는 것.
전염병이 극성이던 지난 설날. 강력한 거리두기 지침에 경북 칠곡군의 한 종가에서는 ‘음복 도시락’을 마련했다. 제사 말미 종친들이 함께하던 음복을 각자 집에서 예를 다하는 방식으로 대체한 것이다. 같은 시기 요양원의 어르신들은 영상통화로 손주들의 세배를 받기도 했다. 코로나19가 바꿔놓은 비대면 명절 문화의 모습이다.
올해로 코로나19 5년 차, 일상의 많은 부분이 비대면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명절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화상회의 플랫폼을 통해 제사를 지냈고, 온라인 성묘, 사이버 차례상 등 언택트 명절 서비스가 생겨났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예상보다 앞당겨졌을 뿐, 이러한 변화는 불가피했으리라 말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명절 스트레스와 가족 갈등 문제를 해결할 긍정적 흐름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럼에도 비대면으로 조상을 모시는 상황을 성의가 부족하다거나 전통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석연찮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민속·사회학 박사는 “옛 풍습 중에 ‘망제’(望祭)라고 있다. 명절이나 기일에 멀리 타향에 있을 때 고향이나 조상의 무덤 쪽을 바라보고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연초에 유학자나 선비들은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세배를 올리기도 했다. 쉽게 말해 조선시대에도 비대면 제사와 세배가 행해졌던 것”이라며 “전통을 따져 비대면을 거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제는 현 시대의 문화로 이해해야 할 비대면 명절. 어떤 방법으로 즐기면 좋을지 상황별로 자세히 알아보자.
STEP 1 모임 ▶ 우리 가족 설날 생중계
자녀 또는 손주와의 영상통화는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특별히 명절에는 일가친척까지 모이는 만큼, 여럿이 함께할수록 즐거운 분위기가 더해질 것이다. 최근 비대면 회의나 강의 용도로 쓰이는 ‘줌’(Zoom)에 익숙한 중장년이라면 이를 가족 모임 수단으로 활용해보자. 한 사람이 회의방을 개설하고 링크를 공유하거나 초대하는 식으로 진행하면 된다. 그밖에 ‘구글 미트’, ‘팀 뷰어’ 등 줌과 같은 방법으로 이용 가능한 플랫폼이 다양하다. 이러한 화상회의 서비스는 각각의 창을 통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다는 게 장점이다. 때를 맞춰 함께 집안 어른께 세배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기에 적절하다.
만약 한 화면으로 제사나 성묘 과정을 보여주는 정도의 서비스를 원한다면 ‘카카오톡 라이브톡’을 추천한다.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에 포함된 이들을 대상으로 주최자가 특정 상황을 라이브로 중계할 수 있다. 라이브톡이 진행되는 동안 대화 주고받기가 가능하고, 서비스 종료 후 카카오톡 채팅방에 기록이 남아 추억을 곱씹기에도 좋다. 김미영 박사는 이러한 서비스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최근 유튜브 영상 애청자의 나이가 50대 이상이라고 한다. 이제는 중장년도 모바일에 익숙해졌고, 비대면 만남에 대한 거부감도 줄었을 것이다. 온라인 제례 문화는 점차 확대될 전망이며, 물리적 한계가 없다는 점에서 가족 참여도를 높일 수단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Tip] 무료 화상회의(다중 영상통화) 앱 & 웹
①줌: 가장 널리 알려진 화상회의 플랫폼으로 100명까지 동시 접속 가능하다. 무료 버전은 40분까지 제공해, 그 이상 사용하려면 유료로 가입해야 한다.
②구글 미트: 무료 버전은 100명까지 참석할 수 있으며, 최대 1시간까지 가능하다. 유료 버전을 쓰면 녹화된 영상을 구글 드라이브(웹 저장소)로 자동 저장해준다.
③마이크로소프트 팀즈: 가정용 무료 버전의 경우 최대 1시간 그룹 통화를 할 수 있다.(비즈니스 무료 버전도 동일) 채팅과 투표 기능을 활용해 가족회의를 진행해도 좋다.
④미더스: SKT가 출시한 고품질 영상회의 서비스로, 통신사와 관계없이 사용 가능하다. 휴대폰 연락처를 기반으로 일반 전화를 걸 듯 회의를 만들고 공유할 수 있다.
STEP 2 제례 ▶ 형식 덜고 정성 담아
김미영 박사는 “명절이든 제사든 형식보다는 정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은 ‘조상에 대한 기억과 감사’다. 그는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근원적인 이유는 바로 조상에 대한 고마움이다. 나를 존재하게 하고, 생명을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담으면 된다. 제례 역시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 지나치게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생겨나고 있는 ‘사이버 추모관’을 적극 추천한다고 덧붙였다. 보건복지부에서 운영하는 ‘e하늘장사정보시스템’(www.15774129.go.kr)의 ‘온라인 성묘·추모 서비스’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홈페이지 가입 후 온라인 추모관을 개설해 가족, 친지 등에게 공유하면 된다. 글, 음성, 영상 등 고인을 추억할 자료를 올리거나 메시지도 남겨 추모관을 꾸며볼 수 있다. 가상의 공간에 차례상 차리기 및 헌화, 분향, 지방 쓰기 등도 가능하다. 서울시설공단에서 운영하는 ‘사이버추모의집’에서도 유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Tip] 비대면 제사라도, 대면한 조상까지
몇 대 조상까지 차례를 모시는 게 좋을까? 이러한 물음에 김미영 박사는 정해진 원칙은 없으나 가급적 ‘대면한 적이 있는 조상’을 기준으로 제례를 지내길 권했다. 앞서 언급한 제사의 정신을 염두에 둘 때, 기억이 존재하고 교감했던 경험이 있는 조상이라야 그 의미가 더해지기 때문이다. 가령 손주는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부모나 조부모가 “돌아가신 증조부께서 살아 계실 적에 너를 참 귀여워하셨지”라며 대신 이야기해줄 정도는 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렇게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고 기리는 과정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행’으로 설 연휴를 보내길 바란다고 전했다.
STEP 3 상차림 ▶ 스트레스 No! 밀키트도 Ok!
명절 스트레스 중 하나는 바로 ‘차례상 차리기’다. 지난해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는 ‘차례 간소화 표준안’을 발표했다. 그동안 의례적으로 행해온 것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내용도 적지 않다. 가령 ‘예법을 다룬 문헌에 홍동백서나 조율이시라는 표현은 없다’, ‘전은 차례상에 꼭 올리지 않아도 된다’ 등이다. 위원회 측은 “유학 경전 ‘예기’에 따르면 큰 예법은 간략해야 한다. 의례를 너무 화려하게 할 필요 없다.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음식 가짓수에 있지 않으니 많이 차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지나친 상차림 문화를 고수할 필요 없다는 얘기다. 자칫 상차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부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오히려 명절의 의미를 저해할 우려가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는 밀키트, 간편식 등을 활용하는 방법도 환영하는 추세다. 형식보다는 형편에 알맞게 마련하고, 상차림은 소박하더라도 충만한 마음으로 조상을 기리면 된다.
[Tip] 조선시대 비대면 상차림 ‘감모여재도’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는 집 안에 사당이 없거나 외지에서 지방(紙榜)으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그림이다. 타지에서 사당을 대신하기 위해 활용한 일종의 제례 도구로, 휴대와 보관이 용이하게끔 족자나 병풍으로 만들곤 했다. 조선시대에 온라인 서비스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감모여재도’는 현재의 사이버 차례상이나 언택트 성묘 등에 비유된다. 선조들 또한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무리하게 형식을 갖추기보다 약식으로나마 예를 다했던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STEP 4 화합 ▶ 형식은 달라도 가족과 함께
전통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무형식으로 명절을 보내라는 뜻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이 논의해 서로가 인정하는 가정의 명절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장은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더라도 너는 너, 나는 나대로 흩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족끼리 가볍게 산소를 둘러보고 한 끼 식사를 하는 것도 좋고, 함께 1박 2일로 여행을 떠나도 괜찮다. 어렵다면 온라인 공간에 모여 덕담이라도 나누자. 바쁜 현대 사회에서 평상시는 잊고 지내더라도, 명절만큼은 가족을 생각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1년 중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기에 ‘설날’만큼 좋은 때가 없다고 했다. 그는 “설에는 가족 모두가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 후손들은 감사의 의미를 담아 세배를 하고, 어른들은 덕담을 전하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 가족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다. 이렇게 가정에서 얻은 긍정적인 기운이 한 해를 나고 일상을 보내는 데 큰 힘으로 작용한다”고 조언했다.
[Tip] 우리만의 명절 ‘가가례’를 만들자
우리 예법 중 ‘가가례’(家家禮)라는 것이 있다.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는 절차와 형식이 다름을 이르는 말이다. 기존에 지켜오던 방식이라도 현재의 형편과 여건에 따라 가능한 부분만 남겨두고, 편의대로 바꾸거나 생략해도 괜찮다. 다만 조상을 기리고 가족이 화합할 수 있는 방법은 간소하게나마 마련해야 한다. 돌아가신 조부모의 사진을 보며 옛이야기를 나눠보는 식이라도 좋다. 으레 내려오던 방식으로 명절을 지냈다면, 한 번쯤 가족의 명절 문화를 점검해보고 함께 논의해 가가례를 만들어보자.
新명절증후군 시집살이 하는 시어머니?
전 부치고 차례상 차리느라 며느리들이 명절증후군을 앓는 시대도 저물어간다. 김숙기 원장은 “최근 명절 모습을 보면, 시어머니들이 큰댁에 모여 제사상을 준비하고 며느리들은 뒤늦게 인사만 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신들이(지금의 시어머니 세대) 한 집안의 며느리로 살며 겪었던 고충을 자식 세대에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또는 눈치가 보여서 스스로 감내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몸도 마음도 상하는 이중고를 겪는 시니어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을 고수하던 과거와 편의를 우선시하는 현재가 오묘하게 섞이면서 과도기를 겪는 최근 명절 풍속도에서 중장년 세대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머리로는 최근의 변화를 이해하면서도 서운하고 야속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김 원장은 “상담을 해보면 부모들은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 채 속상해하지만, 자녀들은 ‘말해주지 않아 몰랐다. 미리 일러줬더라면’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서운한 감정은 ‘바라는 것’이 있는데 이뤄지지 않았을 때 생긴다. 명절에 자녀들이 지켜줬으면 하거나 원하는 부분이 있다면 미리 얘기해주는 게 좋다. 가령 ‘설 당일 점심은 꼭 함께 먹었으면 좋겠다’라든가 ‘떡국은 꼭 차례상에 올리자’ 등 명확하게 공지하면 자녀들도 그에 맞춰 계획성 있게 움직일 수 있다”며 가능한 한 사전에 단체 대화방 등을 활용해 논의하고 합의점을 찾는다면 금상첨화라고 했다.
경기도 안산이냐, 서울 마포냐, 단원 김홍도의 고향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지만 고증이 없어 미지수다. 그런데 단원이 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할 만한 단서가 있다. 안산은 18세기 조선 예원(藝苑)의 총수였던 표암 강세황이 30여 년을 머문 고장이다. 표암의 시문집 ‘표암유고’에 단원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가령 ‘단원은 젖니를 갈 때부터 나의 집을 드나들었다’고 했다. 일찍이 맺어진 표암과 단원의 사제 인연은 길게 이어졌다. 단원을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 일컬은 이도 표암이었다. 정황이 이러니 안산 사람들은 뿌듯하다. 안산의 풍토와 풍정이 표암의 가르침과 함께 단원을 거목으로 길러냈다고 보기에. 안산시가 김홍도미술관을 만든 연유가 완연하다.
김홍도미술관은 안산시 외곽 노적봉 기슭에 있다. 야산 치맛자락을 거머쥔 형국이다. 노적봉 산책과 미술 관람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입지다. 건물은 모두 네 동. 현대미술전이 펼쳐지는 1•2관, 단원콘텐츠관인 3관, 그리고 아동들을 위한 상상미술공장으로 구성했다. 너른 뜰엔 조각 작품도 많다. 전체적으로 독특할 것 없는 구색이지만 미술 작품으로 얼마든지 활갯짓할 수 있는 공간이라 훤칠하다. 뒷산의 수목들은 제법 울창해 조연으로 손색없다. 산기(山氣)를 싣고 스쳐가는 청명한 바람과, 연달아 착륙하는 햇살의 대열도 도회를 벗어난 관람객에겐 반가운 작품이다. 미술관 입구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도 있다.
단원콘텐츠관으로 들어간다. 이렇다 할 꾸밈과 치레 없이 간결한 전시관이다. 김홍도미술관의 핵심 공간이다. 단원의 광활한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기획한 콘텐츠 전시가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년 김홍도, 노적봉에서 세상을 담다’전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 때 안산에 있었던 단원이라는 이름의 숲과 서호(西湖) 바다를 모티브로 한 전람회로, 단원이 어린 시절을 보낸 안산의 옛 풍경을 상상해보게 하는 전시회다. 어물 장수나 고기잡이 풍속을 그린 단원의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단원이 교유한 표암, 심사정, 최북의 작품도 있다. 단원의 예술 정신을 현대적 관점에서 풀어낸 애니메이션과 미디어아트도 등장해 볼거리를 확대했다. 안산의 고지도를 전시한 건 관객을 과거의 안산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일 테다.
흥미롭기론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다. 아집도? 아집은 아회(雅會)와 같은 말로 묵객들이 모여 시와 술을 나누며 노니는 야유회다. 그걸 그린 게 아집도다. 즉 ‘균와’라는 산골짝에 화가 여럿이 모여 소풍을 즐기는 광경을 그린 게 ‘균와아집도’다. 때는 1763년 4월. 봇물처럼 터진 춘색이 영롱해 어지러웠으리라. 봄꽃 필 때 묵객은 유난한 ‘심쿵’으로 설렌다. 산야에서 작당해 꽃과 더불어 한잔 아니 마실 수 없다. 모인 이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그림 상단 오른편에 쓰인 발문에 다 나온다. 보자.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 강세황이다. 그 곁엔 어린 김덕형이 있다. 담뱃대를 물고 앉은 이는 현재 심사정이다. 차건을 쓰고 바둑을 두는 이는 호생관 최북이며, 퉁소를 부는 사람은 단원 김홍도다.’
등장인물 모두 안산과 연이 깊었더란다. 다들 일세를 풍미한 거장이다. ‘균와아집도’는 조선 후기 묵객들의 놀이 스타일을 여실히 보여준다. 단원이 퉁소를 불고, 강세황이 거문고를 탔으니 고급스러운 피크닉이다. 일행이 한자리에 모여 그린 합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이채로워 우뚝하다. 학자이자 서화가인 허필이 쓴 발문의 귀띔에 따르면 그림의 전체 구도를 잡은 건 표암이다. 능란한 필치로 휘늘어진 솔과 옹골찬 바위를 그려 담황색을 입힌 건 심사정과 최북이다. 당시 19세였던 단원은 가는 붓을 날렵한 속필로 휘저어 인물들을 묘사했다. 10대 청년이던 단원이 대가들과 어울려 붓을 적셨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단원의 예술적 기량이 일찍부터 수승한 것이었음을 알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아쉬운 건 전시장에 나온 작품 전부가 영인본이라는 점이다. 애초 단원의 진본 작품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으나 빗나갔다. 단원의 현존하는 그림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파악하기 어려운 개인 소장 작품을 빼더라도 300점이 넘는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이 다수를 소장했다. 삼성미술관 리움은 신선의 무리를 그린 ‘군선도 병풍’(群仙圖 屛風, 국보 제139호)을 소장했다. 안산시도 7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김홍도미술관이 2년마다 펼치는 진본 기획전을 통해 공개된다. 2021년엔 ‘표암과 단원’전을 열어 진본들을 전시했다. 진본 가운데 ‘공원춘효도’는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의 풍속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료(史料)로 평가된다.
신기루처럼 미묘한 매화를 그려
단원 김홍도는 조선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이름을 들날린 화가다. 그의 돛을 밀어준 건 표암이었다. 인생의 눈을 트이게 하고 예술의 길을 열어준 이가 표암이었다. 단원을 궁중 화가로 천거한 이도 표암인데 단원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표암이 괜한 선심을 베풀었으랴. 그는 일찌감치 단원의 됨됨이와 천재성을 발견했다. 단원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용을 보았다. 표암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글을 써 단원을 극찬했다.
‘단원의 화풍은 새로워 개벽을 이룰 정도다.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저마다 부르짖었다. 그림을 구하려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어 단원이 잠을 자고 밥을 먹을 겨를이 없을 지경이다.’
나는 모자라 단원에 대해 아는 게 드물다. 그럼에도 김홍도미술관을 관람하며 그의 아우라가 허공에 감도는 것 같은 환(幻)을 느낀다. 전시작이 많지 않아 단원이 항해한 예술의 바다에 풍덩 빠졌다 나온 기분을 맛보긴 어렵다. 다만 단원의 옷깃에 살랑대는 실바람 한 오라기를 움켜쥔 느낌이다. 생각나는 건 언젠가 화첩에서 본 단원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가 불러일으킨 쓸쓸한 정취다.
주상관매라, 배 위에서 매화를 보다! 단원은 매화 마니아였다. 매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매화를 가슴에 담았으니 생애엔 매향이 난분분? 단원은 부끄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주상관매도’의 매화는 어이 아득한 허공에 떠 우련한가. 백일몽처럼, 신기루처럼 미묘한 매화를 그렸다. 천길 벼랑에 걸린 매화 위로는 하늘이 있고 아래엔 강물이 있지만, 뿌연 안개처럼 경계 없이 흐릿하게 그려 천하가 아득하다. 강기슭에 멈춘 조각배에 비스듬히 앉아 매화를 지켜보고 있는 노인의 모습엔 우수가 실려 있다. 초연하다기보다 쓸쓸한 기색이 여실하다. 노경이란 외로워 매화마저 무상감을 돋운다는 걸까? 이 그림은 단원의 노년기 작품이다. 이상을 좇는 열정보다 허무의 성분이 커진 시절에 그렸다.
말년의 단원은 곤궁했다. 정조가 붕어하면서 끈 떨어진 갓 신세가 됐다. 가세가 기울어 고달프게 살았다. 단원의 종신(終身)은 미스터리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전해오는 게 없다. 작품이야 불멸! 그가 그림 안에 가둔 자연과 인간사의 총량은 장강(長江)과 맞먹는다.
대중 요구에 부응하는 기획전으로 전진
정미영 김홍도미술관 문화예술교육사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와 입체파 창시자 피카소. 둘은 사제지간이었다. 마티스는 일찍이 피카소의 천재성을 읽어 지지와 조언을 했고, 피카소는 마티스를 평생 따랐다. 표암 강세황과 단원 김홍도. 이 조선의 커플 역시 사제지간으로, 예술적 동지로, 지음(知音)으로 평생 교유했다. 정미영 김홍도미술관 문화예술교육사의 얘기는 이렇다.
“복 중의 복은 인연 복이라 하는데, 단원이 표암 강세황을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최고의 스승을 만났으니까. 작품 하나를 완성하면 단원은 흔히 표암에게 먼저 보여줬고, 표암은 강평을 해주었다.”
단원이 표암으로부터 화풍의 영향도 받았나?
“단원이 그 누군가에게 화풍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은 없는 걸로 알려졌다. 표암은 정신적 스승으로서 단원을 북돋았던 셈이다. 단원은 천재였다. 게다가 못 말릴 노력파였다. 부단한 노력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던 거다.”
단원은 풍속화가로 알려졌다. 그의 풍속화에 나타난 사회의식도 호감을 산다.
“안산시가 소장한 단원의 진본 7점 중 하나인 ‘공원춘효도’에도 사회의식이 드러난다. 과거제도에 만연한 부정행위를 풍자한 그림이니까. 단원의 풍속화는 30대 초반에 이미 절정에 도달했다. 그러나 단원의 작품 스펙트럼은 훨씬 드넓다.”
표암과 더불어 정조 임금 역시 막강한 스폰서 역할을 함으로써 단원의 순항을 가능하게 한 것 같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대체로 단원이 표암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됐다고 보더라. 그런데 단원의 출중한 재능을 알아본 정조가 대단한 후원을 했다.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단원이 주장하도록 하라’고 할 정도였다. 궁중 화가로서 단원은 일종의 공공그림을 그렸으나 퇴근 뒤엔 자기 그림을 그렸다. 단원의 집 문간엔 그림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루었다고 한다.”
단원의 성향을 알 만한 일화가 있다면?
“풍류에도 일가견 있는 단원이었다. 특히 매화 사랑이 지극했다. 언젠가 한번은 단원의 그림을 원하는 이가 찾아와 작품값으로 3000전을 내놓고 갔다. 단원은 그중 2000전으로 매화를 사고, 800전으로는 술을 사 친구들과 매화를 즐기며 대작했다. ‘매화음’(梅花飮)이라는 이름의 술자리였다. 결국 남은 돈은 200전뿐이었는데, 이걸로 쌀과 장작을 사 집에 들였으나 하루 땟거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중인(中人, 양반과 평민의 중간 계급) 출신인 단원의 신분 상승 욕구도 정진의 발판이었던 것 같은데.
“선비가 되고 싶은 마음, 선비정신의 정상에 선 삶을 갈망하며 끝없이 노력했다. 말년에 그린 ‘포의풍류도’에 이와 같은 지향이 드러난다. 문방사우와 악기 등 갖가지 기물과 선비의 모습 등을 그린 작품이다.”
‘포의풍류도’에는 이런 화제를 붙였다. ‘종이로 만든 창과 흙벽으로 된 집에 살지만, 평생토록 벼슬하지 않고 시가나 읊조리며 살고자 한다.’ 단원의 유토피아가 구현된 그림이다. 그러나 정작 그의 말년은 고단했다.
“정조가 별세하면서 단원의 고난이 시작됐다. 아들의 월사금도 내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으니까. 그러나 선비다운 태도는 끝까지 지니고 살았다. 이게 단원의 빛나는 정신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