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없이 매끈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유독 아프고 쓰라린 기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꺼내기조차 쉽지 않고, 내 책임 같아 품에 안고 살았을 과거의 상처. 어떻게 치유하고, 독립하는 게 좋을까?
동트기 직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다지만, 상처를 품에 안고 사는 사람의 마음속 어둠은 해소될 길 없이 번져만 간다. 이럴 때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일상을 벗어나 고요한 공간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처음에는 마음에 쌓인 불순물이 쏟아지겠지만 어느새 감정 분출이 끝나고 치유가 마무리되는 시점이 올 것이다.
과거를 마주하는 글·그림
과거의 나와 독립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쓰기’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적고, 내면을 마주하면서 스스로 위로를 건넬 수 있다. 두려움을 발설할 계기를 마련하는 셈이다. 박미라 치유하는 글쓰기 연구소장은 우울, 불안, 무기력, 트라우마를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글쓰기를 처방한다. 박 소장이 30여 년간 심리상담자로 활동하며 가장 먼저 쓰게 하는 글감은 ‘죽도록 미운 당신에게’다. 10분이나 20분 정도로 시간을 정해두고 그 안에 글을 쓰도록 한다. 망설임을 줄여 최대한 빨리 내면을 끌어내는 방법이다. 그러면 욕하며 무시했던 사람들만 ‘죽도록 미운 당신’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빠, 집을 나간 엄마, 실은 사무치게 그리웠던 이들을 대상으로 꽁꽁 숨겨뒀던 마음을 털어놓는다. 이외에도 박 소장은 ‘내 인생이 서러운 100가지 이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미처 하지 못한 말’, ‘자기 비난 실컷 하기’ 등의 글제를 제시했다.
그림을 이용한 치유 방법도 있다. 예비사회적기업 카툰캠퍼스가 여러 노인 기관들과 협력해 진행하는 ‘시니어 만화창작학교’에서는 2014년부터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만화 자서전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해당 프로그램에는 사물이나 인물 그리는 법, 소묘 등 그림 그리기 수업 외에도 스토리 전개 수업이 포함된다. 어릴 적 사용했던 소품 그리기, 기억에 남는 추억의 장면 그리기 등 주제를 던져 이야기를 유도하는 식이다. 이 과정은 아픈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소이자 앞으로의 인생 방향을 알려주는 현명한 가이드가 될 수 있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현상규 강사는 “어르신들이 열심히 살아왔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며 정체성을 다지는 것은 물론, 참여자들 간에 격려와 공감을 주고받아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주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몸으로 하는 내면 위로
신비롭고 종교적인 수행법으로 인지되던 명상이 대중화되고 있다. 정신과나 심리상담소에 갈 경제적·물리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간편하게 마음을 가다듬기 위함이다. 유튜브 검색창에 ‘명상’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보면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가 쏟아진다. 고요한 음악을 배경으로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자연 소리 ASMR(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 매일 예뻐지는 주문 등 샤머니즘 요소가 담긴 명상 음악도 있다. 이는 불면증 치료, 생활 습관 교정, 자존감 회복 등 활용 범위가 넓다. 유튜브 명상이 인기를 끌면서 전문 ‘명상 유튜버’가 등장할 정도다. 명상 문화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미국 등 서구 국가에서는 애플·나이키·페이스북·인텔·위워크 같은 많은 기업이 사내 명상센터를 개소하거나 명상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 내 명상 인구는 최근 5년간 3배 정도 늘어났다.
미국을 기점으로 확산된 치유 방법의 하나로 춤 치료, 댄스 테라피(Dance Therapy)가 있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는 댄스 테라피의 신체적·심리적 효과에 대한 연구 사례를 분석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춤이 사람의 보행 속도, 균형성 개선뿐 아니라 심리적으로 효과를 느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유방암을 앓고 있던 60세 최순덕 씨는 “우울감과 상실감으로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던 중 우연히 만난 훌라댄스 덕분에 네 번의 항암 치료와 서른세 번의 방사선 치료를 견딜 수 있었다”며 마음의 병을 이겨낸 사연을 풀어냈다. 남희경 명지대학교 예술심리치료학과 겸임교수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느끼는 불안, 우울, 분노와 같은 감정은 가장 먼저 ‘몸’으로 나타난다. 몸은 마음이 사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불안하면 몸이 경직되고, 우울하면 무기력해진다. 또 화가 나면 압력솥처럼 끓어오르기도 한다. 따라서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말이 필요하다면, 나 자신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몸을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며 몸을 기반으로 마음을 돌보는 것에 대해 조언했다.
백세시대를 맞아 인생 후반기를 ‘제3의 인생’으로 여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은퇴 후에도 새 일거리를 찾아 인턴으로 취직하고,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해 건강한 취미와 새로운 친구를 한꺼번에 사귄다. 노년기를 적극적으로 맞이하고 가족, 회사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시간으로 인식하는 모양새다.
상당수의 중년이 은퇴 후에도 일자리를 찾아 나선다. 생활비 마련이 가장 큰 이유이나 단순히 돈만을 바라고 재취업 시장에 뛰어드는 건 아니다. 서울대학교 소비 트렌드 분석센터에서 5060세대에게 새로운 직업 활동 시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물었다. 50대 56.8%, 60대 74.5%가 “유연성, 성취감, 재미 등 자아실현 부분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자아실현 수단으로 만화를 선택한 시니어들을 위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는 2019년부터 ‘웹툰 시니어멘토링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활동 중인 웹툰 작가가 45세 이상 시니어 작가, 출판 만화를 그렸던 경력단절 작가가 웹툰 작가로 거듭날 수 있게 돕는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방식 외에 화상 미팅, 메일로 작화 파일을 주고받는 온라인 멘토링도 이뤄졌다.
사업에 참여한 시니어들의 만족도도 높고, 가시적 성과도 나타나는 추세다. 지원 사업에 참여한 작품으로 ‘카카오웹툰리그’, ‘네이버 나도만화가’ 등의 플랫폼에서 웹툰을 연재하거나 캐릭터를 활용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 멘토링을 받은 손진효(55) 작가의 경우 웹툰 공모전에 당선돼 연재를 준비하고 있다.
손 작가는 “단순히 학원 강의를 들으며 배우는 것이 아니고 멘토와 대면하여 멘토링을 받으니 디지털작업, 웹툰 연출력, 웹툰PD 크리틱 등에 대한 궁금증을 바로 해결할 수 있어 좋았다”라며 “멘토링 사업 덕분에 직접 그린 작품에 대한 만족도가 90%까지 높아졌다”고 소감을 밝혔다.
70~80대를 위한 프로그램도 있다. 예비사회적기업 카툰캠퍼스가 여러 노인 기관들과 협력해 진행하는 ‘시니어 만화창작학교’다. 시니어 만화창작학교에서는 2014년부터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만화 자서전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해당 프로그램에는 사물이나 인물 그리는 법, 소묘 등 그림 그리기 기술 수업 외에도 스토리 전개 수업이 포함된다. 상대적으로 만화에 익숙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작업을 어려워하는 학생들이 많아서다.
전체 과정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 작업을 위해 그림 그리기 수업에서 어르신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소재를 많이 활용한다. 만화 자서전 프로그램의 강사 현상규 작가는 “어릴 적 사용했던 소품 그리기, 운동회 장면 그리기 등의 주제를 던지고 그림 그리는 걸 도와드리면서 왜 이 소품을 선택했느냐고 물어보는 식으로 이야기를 유도한다”고 설명했다.
적게는 두세 달, 길게는 여섯 달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세상에서 하나 뿐인 만화 자서전이 탄생한다. 5쪽 분량의 동화책에 가까운 자서전에서 10쪽 가량의 만화 자서전까지 가지각색이다.
참여한 어르신들의 만족도도 높다. 현 작가는 “자서전 작성을 위해 본인도 잊고 있었던 과거의 자랑스러운 일들을 떠올리면서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게 된 어르신들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수업 외적으로도 그림 그리기에 집중해 손녀에게 줄 동화책을 완성시킨 어르신도 있다. 무엇보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어르신들끼리 공감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자신의 삶이 담긴 자서전 줄거리를 공유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다만 지난해와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프로그램을 진행하지 못했다. 카툰캠퍼스 측은 “내년에는 방역 지침과 상황에 따라 프로그램 진행을 조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마당에 널어둔 육쪽마늘 씨알이 참 굵다. 주말 내내 마늘을 캤으니 온몸은 쑤시고, 흘린 땀으로 눈은 따가워도 수확의 기쁨이 모든 것을 이겨낸다. 이틀간 내 손같이 쓰던 ‘마늘 창’을 놓으니 가뿐하면서도 무언가 허전하다. ‘마늘 창’이란 모종삽보다 조금 큰 손잡이에 쇠스랑보다는 작은 창살이 두 개 혹은 세 개 달린 농기구다. 꼭 50년 전 이즈음, 마흔이 되기 전의 젊은 부모님과 마늘이며 감자를 캘 때에는 없던 녀석이다. 하얗고 통통한 마늘에 앳된 소년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시골 소년답지 않게 뽀얀 피부의 소년이 삽과 호미로 열심히 마늘을 캐고 있었다. 수업료와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서 조례시간에 담임에게 호명이 되었다. 급우들 형편이야 다들 비슷한 처지였건만, 이번 분기에는 어찌 다들 납부하고 몇 명만 미납이었다. 마늘을 캐서 팔아야 수업료를 낼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소년은 기말고사를 앞둔 시점에도 마늘 캐기에 열심이었다.
상고에 진학해서 농협 직원이 되어 가계에 보탬이 되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맏이는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것은 어머니의 주장이었다. 평소 남편 의견에 무조건 순종하던 어머니는 맏이의 대학 진학과 관련해서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머니가 자기주장을 그토록 강하게 하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지막이자 두 번째는 여동생을 대학에 보낼 때였다. 인근 조선소에서 깡깡이(녹슨 배에 페인트칠을 하기 전에 망치로 녹을 떼어내는 작업)를 하고, 쉬는 날에는 농사를 지으며 손톱이 빠지도록 일한 어머니의 교육열은 아버지도 말릴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망치로 녹을 떼어내는 일을 하고 돌아온 어머니의 덜덜 떨리는 손을 보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한 뒤에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 과외 교사와 학원 강사를 병행해야 했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유학생의 처지는 다 비슷했으리라. 대학생활 내내 과외와 학원 강사를, 그리고 운 좋게도 졸업 전에 취업해서 월급을 받았지만 늘 지난한 삶이었다. 농사로는 가족 건사가 힘들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사고로 몸져누웠고, 어머니는 아버지 병간호와 7남매를 혼자서 건사할 수 없었다. 첫 월급은 23만 원,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버지 병원비와 동생들 학비를 위해 집으로 송금했다.
36개월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서 재학 중 취업하고 1년간 직장생활과 학업을 병행한 뒤에 졸업장을 딸 수 있었다. 입학식에는 와보지 못했던 가족들이 졸업식에는 모두 상경해 함께했다. 거리 사진사에게 2000원인가 2500원인가를 주고 찍었던 가족사진은 아직도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다. 사진 속에서 어머니는 참 환하게 웃으며 학사모를 쓰셨다. 어머니에겐 그게 고된 삶의 보상이었으리라.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게 삶의 우선순위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술독에 빠져 살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사고를 당했던 아버지처럼 되기는 싫었다. 손으로 밤낮없이 바닷물에 녹슨 페인트 덩어리들을 쳐대는 노동으로 남자보다 거친 손을 한 어머니. 어머니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막냇동생이 대학에 입학하던 1986년, 동생 등록금을 납부해주면서 항상 어깨를 짓누르던 장남의 책임에서 조금 가벼워졌다. 동생들도 졸업하고 취업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고, 아버지는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고 어머니도 드디어 깡깡이를 그만둘 수 있었다.
장남 대신, 이제는 한 여자의 남편, 그리고 두 아이의 아빠라는 책임이 더 깊어졌다. 부서 경리로 일하던 아내와 사내 커플로 만나서 결혼했다. 회사 비품 하나도 살뜰히 아끼고, 부서 살림을 맵짜게 운영하던 모습에 반했다. 연애는 짧았어도 이 여자가 내 일생의 반려자다 싶었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면서 결혼 후에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억척스레 일했다. 아내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1986년부터 1988년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아시안게임부터 올림픽까지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 참여했고, 참여 팀의 주요 팀원 중 하나였다. 건국 이래, 아니 단군 이래 가장 큰 행사가 내 손을 거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밤낮없이 일했고, 주말도 잊은 채 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련한 일이었다. 또한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두 아이의 육아를 아내에게 맡긴 채 회사 일에만 몰두했으니, 그래서 지금은 항상 아내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산다.
회사 일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아내의 희생 덕분이긴 했지만, 두 아이가 잘 자라고 있었고, 생애 처음으로 ‘내 집’, 아니 ‘우리 집’이 생겼다. 서울 외곽의 작은 주택이었지만 사글세도 전세도 아닌 ‘우리 집’이었다. 아이들이 벽에 낙서를 해도, 대문을 꽝 닫아도, 마당에 오줌을 싸도 한소리 듣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라면만 먹어도 배부를 것 같다며 아내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침엔 영어학원, 저녁엔 중국어학원에 등록했다. 30대 후반에 접어드는 나이라도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는 없었다. 특히 외국과 일하는 것이 많은 업무 특성상 영어는 기본이고, 점점 발전하고 있는 중국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은 미수교국이지만 조만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1992년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자마자 회사에서는 중국 지사 설립과 중국 공장 설립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팀을 중국에 파견했다. 팀장이 되어서 중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장기출장 가방을 싸주며 근심이 가득하던 아내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공산국가, 적대국의 이미지가 강했던 중국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지사가 설립되고 3년 뒤에 중국에 온 아내는 생각과 달리 많이 발전된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1997년까지 중국에서 발판을 다지고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과에 맞는 승진 자리를 얻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모든 기대를 베어버리는 IMF 구제금융 시대가 닥쳤다. 자고 일어나면 부도 소식이 들렸다. 재무 쪽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달러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 다들 혈안이었다. 달러 부족으로 흑자도산하는 기업들도 부지기수였다. 회사에서의 하루하루가 칼날 위를 걷는 듯했다. 가만히 있어도 불편하고, 무슨 일을 하려 해도 불편한 시기. 자칫 썰려나지 않기 위해 모두가 작두 위에서 위태롭던 시간이었다.
혹독한 시간, 책상은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자리는 지키지 못했다. 핵심 인력이라 생각했던 내가 자르다 남은 인력이 되어버렸다. IMF의 파고는 조금 작아졌지만 개인들에게는 정말로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살얼음을 걷는 하루하루, 눈을 감으면 아내가, 눈을 뜨면 아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톡 하고 건드리기만 해도 끊어질 것 같은 지푸라기를 잡고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어머니, 7남매의 무탈만을 위해 살아온 어머니의 이마에 주름 하나를 더 늘릴 수는 없었다.
엄혹한 시절이 지나고 조금씩 훈풍이 불었다. 훈풍을 따라 IT벤처 열풍이 불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부터 인터넷 기업, 닷컴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고 이내 한국에도 수많은 IT 기업들이 강남 테헤란로를 점령했다. 회사에서도 젊은 직원들을 모아 새롭게 도전해볼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20~30대 젊은 직원들이, 그것도 IT 관련이나 기술 관련 전공자들이 젊은 혈기로 뛰어드는 사업이라는 이미지를 ‘벤처’ 기업은 갖고 있었다. 이미 십수 년간 조직에 몸담아 회사원으로 살아왔던 구태가 몸에 밴 사람들이 섣불리 도전하기 쉬운 게 아니었다. 회사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렵게 IMF를 넘기고 새롭게 투자하는 사업인데 아직 혈기왕성한 젊음만 믿고 도전하는 직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었다. 회사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어차피 남는 인력이었고, 그대로 버티고 있는다고 다시 원하던 자리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꼰대’ 소리 듣는 나이가 되어가는데 더 늦기 전에 도전을 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잘린다고 어디 가서 밥이야 굶겠는가. 아직 초등학생, 중학생인 아이들이 걸렸지만 마지막 도전이다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큰 결심이었다.
사내 벤처팀의 사업계획서를 보았지만 처음엔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십수 년간 해온 일과는 전혀 접점이 없던 사업 계획이었고, IT 분야는 전혀 알지 못했다. 주판을 쓰고 수기로 장부와 기획안을 쓰던 시기에 입사해서 경리가 타자를 쳐주던 시기를 지나왔다. 독수리 타법은 벗어났고 워드프로세서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영어와 중국어를 배웠듯이 이제는 젊은 직원들에게 단어 하나하나, IT 관련 사업 하나하나를 배워가야 할 때였다.
많게는 스무 살, 적게는 띠동갑 정도 되는 직원들은 세대 차이를 넘어서 나에겐 아득한 존재들이었다. 오렌지족, X세대 등으로 불리던 그들은 나와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여동생이 대학에 갈 때, 시대가 바뀌어서 이제는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눈물을 흘리던 우리 어머니가 느끼던 그 감정 같은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 감정보다 더 멀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꼰대짓’을 하는 것만큼이나 보기 흉하다.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20대 때, 30대 때 열심히 일했던 나처럼, 벤처팀들도 자기 선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지켜봐주는 것이 중요했다. 대신 적절한 예산과 범위 내에서 그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되는 것이다. 닷컴 버블과 시작된 사내 벤처는 의외로 성공을 거두었고 젊은 청년들이 성공담에 한 줄을 보탤 수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지만 함께했던 청년들은 지금 여러 곳에서 맹활약 중이다. 가끔씩 들려오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분당에서, 강남에서 밤을 새던 때가 떠올라 미소 짓게 된다.
사업 론칭이 성공하고 나서 다시 본사로 돌아왔고 중국 지사에 다시 갔다. 3년 후에 본사로 돌아오니 지천명을 넘긴 나이가 되어 있었다. 회사에서는 부속품처럼 25년 가까이 일하고 배터리처럼 방전되었다. 정년을 5년 남짓 남긴 그때, 회사 내 권력에서 밀려나 있어서 임원이나 사장단에 도전하기에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도전할 여력이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에 어느새 훌쩍 커버린 두 아이는 스무 살을 넘어 성인이 되었으니 제 앞가림을 할 터였다. 늦은 나이에 방통대에 입학한 아내는 그동안 하고 싶어 했던 상담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이제는 진짜로 잉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출근길도 퇴근길도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건강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술과 폭식으로 인한 고혈압에 고지혈증, 당뇨까지. 쉰을 넘긴 몸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IMF 시절 이후 다시 백척간두에 선 느낌이었다. 시간은 갈수록 빠르게 지나가고 머지않아 환갑을 넘길 텐데 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부모님 세대의 쉰과 우리 세대의 쉰은 다르다. 또 우리 뒷세대, 그리고 지금 20대가 쉰이 되었을 때의 그 ‘쉰’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를 것이다. 나이와 직급에 얽매여 권위를 찾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벤처 일을 할 때 깨달았다.
이 나이쯤엔 이 정도 재산이나 이 정도 사회적 직위를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도 사회적 관습에 의한 고정관념이었다. 20대에 대학을 가고, 30대에 결혼을 하고, 40대에 내 집을 갖고… 이렇게 컨베이어벨트처럼 이루어진 한국인들의 삶을 한 장면으로 나타내며 비판하는 카툰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정해진 대로만 산다면 60대에는 손주들을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하리라.
참으로 평범하게 모나지 않게 살아온 50년이었다면 이제 남은 생은 그 컨베이어벨트에서 이탈해서 다른 곳에는 뭐가 있는지 살펴보며 살아도 좋지 않을까? 은퇴에 대해 처음으로 아내와 이야기했을 때 아내는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당신처럼 꽉 막힌 일벌레가 이런 생각도 하다니 대견하다면서.
정년은 금방이었다. 30년 넘게 일했으니 미련이 없을 만도 한데 사원증을 반납하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들과 술을 마시면서 처음으로 취한 날이기도 했다. 시원함 반, 아쉬움 반, 거기에 임원에 대한 미련 한 꼬집. 눈물이 핑 돌던 밤이었다.
퇴직 후에 딱 1년만 쉬자고 했지만 달리던 자전거는 그리 오래 멈춰서 쉴 수 없었다.
딱 가족이 먹을 것만 소일거리로 농사지으며 1년을 보내던 중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고상하고 우아한 취미생활은 거리가 멀었다. 몸을 쓰고 현장에서 뛰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맥도날드 시니어 알바도 해보고, 편의점 알바도 해봤다. POS를 익히는 것이 제일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때 IT 벤처에서 일했던 가닥에 그 뒤로도 꾸준히 컴퓨터를 다루다 보니 온갖 할인이나 쿠폰을 다루는 데도 익숙했다. ‘아직은 청춘!’ 이런 마인드가 아니었다.
40년 전, 내가 스무 살 때는 없었던 일들을 해보며 우리 아이들과 주변의 청년들이 어떻게 사는지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패스트푸드점 복장과 편의점 조끼를 입은 나를 보며 아내와 아들들은 누구보다 좋아했다. 가족과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가족과 다시 하나가 되는 느낌, 참 오랜만에 받는 느낌이었고 이때부터 다시 나의 제2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퇴사한 동기와 무역업을 시작한 것은 한참 뒤였다. 다 잊어버린 중국어를 떠듬거리며 중국전자제품을 수입했다. 거창한 사업도 아니고 동기와 나 두 사람 소소한 용돈벌이로 시작했다. 그래도 저가 저품질 제품을 다량으로 떼다가 파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적정 가격의 적정한 품질의 제품을 파는 게 목적이었다. 사업을 키울 생각은 없었지만 몇 년 새 규모가 커져갔다. 욕심을 부리지 말자,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하자. 시작할 때의 다짐은 잊지 않고 지켜가고 있다. 주말 농장과 아내, 손주들과 함께할 시간은 빼두고 일하는 것이 가장 먼저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가 지금 내 삶의 목표 중 하나다. 할아버지가 아닌 ‘노땅’이나 ‘꼰대’가 되는 것이 문제 아닐까? 푸근하게 가족과 이웃을 품어줄 수 있는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다운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오늘 하루도 웃으며 시작한다.
이제 마늘을 엮어 공기가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둘 때가 되었다. 장마철을 무사히 보낸 마늘은 농막 처마 밑에서 더욱 단단하게 맵고 달달하고 향긋한 마늘로 익어갈 것이다. 그처럼 내 안의 할아버지가 더 할아버지다워졌으면 좋겠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때는 도처에 있다. 인체를 이야기하자면 몸의 때는 부위마다 다 있다. 손때 발때는 물론 냄새까지 나는 배꼽때, 여간해선 없애기 어려운 팔꿈치때, 잘 보이지 않는 엉덩이때, 사타구니때, 칫솔질할 때 신경 써야 하는 혓바닥때…, 때 없는 곳이 없다.
그러면 눈때라는 말은 왜 없지?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바람에 끼게 되는 때. 중국 서진(西晉) 때의 위개(衛玠, 286~312)는 하도 예쁘게 생겨서 사람들이 옥인(玉人) 또는 벽인(璧人)이라고 했다. 원래 병약했는데, 어느 날 길에 나가자 수많은 여자가 얼굴을 보려고 겹겹이 담처럼 에워싸는 통에 놀라 혼절하고 말았다. 간신히 부축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이 쳐다봐 위개를 죽였다는 간살위개(看殺衛玠)라는 말이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나온다. 얼마나 잘생겼기에 그랬을까? 그게 눈때가 아니고 뭐냐? 눈총을 맞는 것과는 정반대의 피해다.
나는 지난주 글에서 때를 왜 빼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썼는데, 위개가 목욕을 자주 하고 때를 잘 뺐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때를 밀지 않아야 피부가 건강하다는 말도 있다. 씻기 싫어하는 사람들(나 같은)이 자주 하는 말이지만, “세수 잘 안 하는 거지들에게 피부병이 없다”지? 더구나 욕실에는 잘 지워지지 않는 비누때, 물때(물에 섞인 깨끗하지 못한 것이 다른 데 옮아 붙어서 끼는 때)까지 있어 억지로 목욕을 하려다가는 미끄러져 큰일난다.
각종 먼지와 섞여 더럽게 여겨지는 때가 피부 건강을 지켜주는 건 사실인가보다. 각질층에는 세균도 있지만 세균을 막아주는 각종 항생물질이 함께 있다고 한다. 항생물질뿐만 아니라 세균도 피부 건강을 지켜준다는 연구결과가 있다지 않나. 그러니까 때를 원수처럼 생각해서 악착같이 벗기려 하지 말고 적당히 봐주며 데리고 살아야 한다. 때 빼고 광내는 일은 간간이 해도 된다. 집안에 내려오는 손때 묻은 물건들을 아끼면서, 간간이 맛있는 걸 먹어 목구멍 때를 벗기면서.
사람들이 제 몸에 붙기를 원하는 때는 따로 있다. 나는 지난주 내 몸에 글때(글을 읽거나 글씨를 쓰는 일이 몸에 밴 것)가 끼기를 바란다고 썼다. 그러자 독자(첨엔 몰랐는데 알고 보니 여성) 한 분이 “나는 소리때가 많이 끼기를 바란다”고 댓글을 붙였다. 그것도 대충 끼는 게 아니라 오래 빨지 않아서 때와 옷이 한 몸이 돼 반질반질해진 소맷부리처럼 소리때가 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참 진한 표현이구나 했는데, 알고 보니 판소리 등 국악 몇 가지를 배운 지 30년 가까이 된 ‘아마추어 소리꾼’이었다.
반질반질이라면 나도 할 말이 있지. 누런 코가 나오는 시골 아이들이 소매로 쓱쓱 코를 닦아서 생긴 게 ‘반질반질’ 아닌가. 그런 아이들이 마룻바닥에 초로 칠을 하며 교실을 반질반질하게 청소하던 시절이 있었어. 춘추복이라는 게 없던 시대에 남학생 녀석들이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니던 동복 겸 하복도 어지간히 반질반질했지.
이런 말을 다 쓰지는 않았지만, 댓글을 주고받는 가운데 화제는 빨래로 모아졌고, 빨래라는 걸 도맡아 해온 여성의 운명과 어머니들의 고생에 관해 의견을 나누게 됐다. 그걸 다 소개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 생략한다. 다만 세상은 모계사회로 이동 중이니 까불지 말고 큰소리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는 점을 명백히 밝혀둔다.
때에 관해 이야기하다 보니 나에게 불어나는 때 한 가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것은 먹때다. 붓글씨를 쓰기 시작한 지 이제 8년 돼 가는데, 책이건 난닝구(이건 꼭 이렇게 말해야 제맛이 난다)건 온통 먹이 튀어 묻어 있다. 붓글씨를 쓸 때 두르는 서예용 앞치마가 있으나 아무래도 어색해서 사지 않고 그냥 버티고 있다. 그런데 워낙 물건 다루는 솜씨가 없어서 걸핏하면 붓을 놓치거나 먹물을 떨어뜨리곤 한다. 벼루를 옮기다가 먹물을 흘린 것도 여러 번이다. 그래서 창문이나 블라인드 커튼에까지 먹물이 튀어 걸레로 닦아내느라 애를 먹는 일이 많다. 먹 자국은 내버려두면 굳어서 잘 지지도 않는다.
나는 배가 볼록 나온 B라인 몸매여서 원천적으로, 구조적으로 배나 옷에 먹이 묻지 않을 수 없게 돼 있다. 교향악단의 심벌즈(cymbals) 주자를 그린 서양 카툰이 생각난다. 심벌즈는 두 개의 원반을 서로 맞부딪혀 소리를 내는 금속 타악기다. 이 심벌즈 주자를 영어로 뭐라 하지? 첼로=첼리스트, 피아노=피아니스트, 바이올린=바이올리니스트처럼 심벌즈스트라고 하면 되나? 아니면 심벌지스트? 하여간 동료들이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신세계로부터’를 열심히 연주하는 50분 동안 내내 가만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챙!” 하는 게 그의 일이다.
그런 걸 ‘심벌즈 주자의 고독’이라고 하나본데, 사실은 심벌즈 외에 트라이앵글, 탬버린, 캐스터네츠 이런 것도 다 그의 몫이다. 그런데 내가 본 그 카툰의 심벌즈 주자는 코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챙!” 하다가 여러 번 지 코를 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코가 크니까 이런 카툰이 가능한 거겠지. 그 심벌즈 주자처럼 서투르게 나는 지금 먹을 묻히고 산지사방에 먹때를 바르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조금씩 진보하리라고 믿으면서 붓을 계속 잡으려 한다. 물건에 묻은 먹때는 빼야 하지만 내 속으로 들어간 먹때는 잘 삼켜야 할 거 같다. 옛 스승들은 글씨가 늘지 않는 제자에게 먹물을 먹이기도 했다지 않나.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연금 이체 시 검토해야할 사항을 분석한 ‘행복한 은퇴발전소’ 12호를 2일 발간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연금저축이나 개인형퇴직연금(IRP)을 다른 금융회사 상품으로 갈아탄 ‘연금 이체’가 2018년 4만7000여 건, 1조5000억 원에 달했다. 이에 연구소는 커버스토리 ‘연금은 움직이는 거야’에서 최근 늘어나고 있는 연금 이체의 유형을 8가지로 나눠 분석했다.
첫째는 연금저축보험이나 신탁을 연금저축 펀드로 옮기는 것이다. 저금리로 금리형 상품의 수익률이 낮아지고, 온라인·모바일로 연금 이체가 가능해 이런 니즈 많아졌다. 다만 2000년대 초반 가입한 연금저축 보험은 고금리의 확정 수익률을 보장하거나, 위험보장 기능이 있는 경우도 있어 득실을 따져봐야 한다.
둘째는 여러 연금계좌를 하나로 합쳐 관리하려는 경우다. 55세부터는 연금저축과 IRP를 하나의 계좌로 통합하는 것이 가능하다. 본인이 투자하려는 상품의 종류, 위험자산 투자한도, 금융기관 수수료 등을 비교해 어떤 계좌로 통합할지 결정해야 한다. 또한 금융기관은 통일하되, 적합한 상품이 있는 연금저축과 IRP계좌를 각각 유지하는 것도 전략이 될 수 있다.
셋째는 퇴직급여를 연금 계좌에 이체하는 경우다. DC형 퇴직연금 가입자는 금융기관에 따라 기존 가입 상품을 IRP 계좌에 그대로 옮길 수 있다. 환매해 현금을 이체할 때는 기존 가입 상품의 환매 기간과 조건에 유의해야 하며, 연금저축과 IRP중 어느 계좌로 이체할 지도 결정해야 한다.
넷째는 IRP가입자가 예금을 실적배당상품으로 바꾸는 경우다. 연금저축과 달리 IRP는 한 금융회사에서 원리금보장상품부터 실적배당상품까지 다양한 금융상품에 투자할 수 있다. 따라서 거래 중인 금융회사가 제공하는 상품부터 확인하는 것이 먼저다. 실적배당상품에 투자할 때는 주식형 펀드 등 위험자산에 투자할 수 있는 비율이 전체 자산의 70%까지다.
다섯 번째는 연금자산을 ETF나 리츠(REITs)에 투자하려는 경우다. 모두 주식처럼 거래소에서 매매할 수 있는 상품으로 연금투자자 전용 매매시스템을 지원하는 일부 증권사에서만 가입가능하다. 또한 ETF는 연금저축과 IRP에서 모두 투자할 수 있지만, 리츠나 인프라 펀드는 IRP만 가능하다.
이 밖에 (구)개인연금저축을 이체하는 경우 DC형 퇴직연금 금융회사 변경, ISA 가입자가 만기 자금을 연금계좌에 이체하는 경우 등의 유형을 분석했다.
이번 호에는 외국의 은퇴 소식을 담은 ‘글로벌 은퇴이야기’, 김헌경 도쿄건강장수의료센터 연구부장이 말하는 은퇴 후 건강비결 ‘웰에이징’, 만화가 홍승우의 카툰 ‘올드’,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의 정신건강 칼럼 ‘힐링 라이프’ 등이 수록됐다.
‘행복한 은퇴발전소’는 정기구독을 통해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으며, 미래에셋은퇴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전자책 형태로 확인 가능하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는 올해 연금제도 변화를 분석한 ‘행복한 은퇴발전소’ 11호를 발간했다고 7일 밝혔다. 이번 ‘행복한 은퇴발전소’는 키워드 ‘RAISE’에 맞춰 5가지 정책변화에 대한 연금자산 증식 방법을 제안했다. 5가지 정책변화는 △주택연금 가입 완화(R), △노후자금 연금화(A) △수익률·편의성 제고(I) △스스로 연급 적립 지원(S) △은퇴소득 불평등 완화(E) 등이다.
먼저 R은 ‘주택연금 가입 완화’다. 정부는 올해 주택연금 가입연령을 60세에서 55세로 하향 조정하고 주택가격 기준을 시가 9억 원에서 공시가격 9억 원으로 변경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다. 주목할 점은 최소 가입연령 하향이지만 일찍 가입하는 것이 모두에게 유리하지 않아 금융자산 규모와 주택 입지를 살펴 결정해야 한다.
둘째, A는 ‘노후자금 연금화’다. 퇴직연금 가입률은 50% 정도로 그나마 중도인출하거나 일시금으로 받아 소진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퇴직연금 의무화, 퇴직소득세 강화, 퇴직연금 중도인출 요건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될 예정이다. 무엇보다 퇴직급여의 연금 수령 시 11년차부터 연금소득세를 퇴직소득세의 70%에서 60%로 추가 인하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절세효과 극대화를 위해 10년차까지 연금 수령을 최소화하고 11년차 이후 금액을 늘리면 된다.
셋째, I는 ‘수익률·편의성 제고’다. 개인·퇴직연금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는 낮은 수익률로 연금자산 형성을 저해하는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정책이 시행될 예정으로 연금 편입 가능 상품 확대, 금융기관 및 상품 변경 간소화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DC형 퇴직연금에서 상장 리츠 투자가 가능해지고 이달 말경부터 연금계좌의 금융상품 및 관리 금융기관 변경을 온라인을 통해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다.
넷째, S는 ‘스스로 연금 적립 지원’이다. 노후소득을 늘리려면 공적연금뿐만 아니라 연금저축, IRP 등 개인연금저축도 늘어나야 한다. 정부의 지원 방안으로 50세 이상 투자자의 연금계좌 세액공제 한도가 증액되고, ISA 만기자금의 연금계좌 납입 및 세액공제가 허용된다. ISA계좌에 만기까지 3000만 원을 만들어 연금계좌로 넘겨 절세효과를 극대화하고, 50대 이상은 올해부터 3년간 연금계좌에 연 200만 원을 추가로 납입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E는 ‘은퇴소득 불평등 완화’다. 소득 불평등이 노후에는 연금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은퇴소득 격차를 해소하려는 것도 정부 정책의 한 방향으로 고소득자의 사적연금 지원을 제한하고 취약 고령층의 주택연금 지급액을 상향, 기초연금 지급을 확대하는 등의 다양한 정책이 시행될 예정이다.
이외에도 이번 호에는 △외국의 은퇴 소식을 담은 ‘글로벌 은퇴이야기’ △김헌경 도교건강장수의료센터 연구부장이 말하는 은퇴 후 건강비결 ‘웰에이징’ △만화가 홍승우의 카툰 ‘올드’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정신건강 칼럼 ‘힐링 라이프’ 등이 수록됐다.
‘행복한 은퇴발전소’는 정기구독을 통해 우편으로 받아볼 수 있으며 미래에셋은퇴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전자책 형태로 열람할 수 있다.
시대가 변하면서 만화의 모습도 달라졌다. 우둘투둘 잿빛 종이 위에 그려졌던 무채색 주인공들은 매끈한 스마트폰 위에 저마다 형형색색 개성을 입게 됐다. 칸칸이 나뉜 지문을 읽느라 지그재그로 바삐 움직이던 눈동자는 이제 화면 스크롤에 따라 위아래를 훑는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 할 수 없을 만큼 만화는 만화 그 자체로 얻는 재미가 크다. 언제라도 즐거운 만화, 그 새로운 얼굴과 마주해보는 것 어떨까?
도움말 웹툰인사이트 이세인 대표
요일별로 즐기는 한 토막의 즐거움 ‘웹툰’
웹툰은 웹(web)과 카툰(cartoon)의 합성어로, 한마디로 인터넷 만화를 뜻한다. 각종 포털과 사이트를 통해 쉽게 찾을 수 있고, 최근에는 스마트폰 앱으로도 즐길 수 있어 편리하다. 대개 스마트 디바이스를 통해 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만화의 전개가 세로로 흘러가게끔 제작한다. 플랫폼마다 웹툰을 요일별로 연재하고, 한 회당 스토리가 길지 않아 매일 짬짬이 즐길 수 있는 것이 매력. 완결된 웹툰은 종이책으로 출간되기도 하고, 인기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 연극 등으로도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어른을 위한 만화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
최근 책방 또는 인터넷 서점 등을 살펴보면 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인 ‘그래픽 노블’ 장르의 책들을 발견할 수 있다. 소설이 지닌 깊이 있고 탄탄한 스토리라인과 만화가 지닌 시각적 효과를 동시에 즐긴다는 것이 매력이다. 촘촘히 글자가 박힌 소설책보다는 눈의 피로도 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좋다. 혹시 그래픽 노블을 읽는데 누군가 “다 큰 어른이 웬 만화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해주자. “이건 어른을 위한 만화야!”
그녀들은 신인 걸그룹 같았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자기 장기를 펼쳐 보인다. 뭘 그리 보여주고 싶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사하기 바쁘다. 만화 그리기에 푹 빠져 결국 그룹을 결성해버렸다는 시니어 만화 창작단 ‘누나쓰’. 잠깐 동안의 취미거리로 잊혔을지 모를 노인복지관의 프로그램으로 알게 됐다는 만화. 이제는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한 부분으로 만화가 자리 잡았단다. 당돌, 저돌, 돌격 앞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시니어 걸크러시와 한바탕 떠들었다.
요즘 내가 제일 잘나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의 카툰캠퍼스 사무실. 만화를 매개로 한 교육 사업을 하는 이곳은 ‘누나쓰’가 만화를 배우고 창작활동을 하는 공간이다. 최근 ‘누나쓰’ 멤버의 활동상이 인터넷이나 매체를 통해 조금씩 알려지면서 미디어와의 접촉도 많아졌다. 취재가 있었던 8월 중순에도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팀이 다녀갔다. 카메라 앞이 낯설 법도 한데 곧바로 이어지는 인터뷰에 임하는 모습이 전문 만화작가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누나쓰’는 그럼 어떤 시니어가 모여 탄생했을까?
노영자 부천시오정노인복지관에서 ‘시니어 만화창작교실’이라는 수업을 받았어요. 기초반 3개월을 거쳐서 심화반 3개월, 총 6개월이요. 처음에는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너무 재미있었고 선생님들 열의가 대단하셨어요. 수업에 빠진 적도 없어요. 수업이 다 끝나고 나니까 너무 아쉬웠어요. 그림 좀 그릴 만하고 관심이 좀 싹트려 할 때쯤 과정이 끝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와서 사정을 했어요. 우리 버리시지 말라고요. 옷자락 붙잡고 사무실까지 쫓아갈 거라고 했어요(웃음). 만화는 아직 깊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뭐든지 상상만 하면 꿈도 그릴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할 수 있으니까 좋습니다.
2014년 서울문화재단 후원으로 카툰캠퍼스가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진행했던 만화 자서전 교육이 ‘누나쓰’가 생겨난 배경이 됐다. 기초과정과 심화과정으로 나눠 체계적인 만화 그리기 작업을 2년간 진행했다. 만화자서전을 넘어 창작 영역에도 재능을 보이는 시니어를 발굴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후원으로 부천시오정노인복지관에 교육의 장을 옮겨와 6개월 과정의 교육을 이어갔다. 만화 교육을 다 마치고 못내 아쉬웠던 열혈 시니어가 카툰캠퍼스 사무실로 찾아와 만화를 배우고 싶다며 애원을 했다. 새로운 세상에 눈뜬 시니어를 외면할 수 없어 카툰캠퍼스는 자체적으로 만화에 관심 있는 시니어 7명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왁자지껄 개성 강한 시니어 카툰 걸크러시 ‘누나쓰’가 지난해 7월 15일 결성! 카툰캠퍼스도 ‘누나쓰’를 만나면서 시니어 교육에 보다 더 중점을 두고 있단다.
김경자 작년 10월에는 빼꼼공원(경기 부천시 역곡동)에서 ‘누나쓰가 간다’라고 쓰인 현수막을 걸고 주민들 캐리커처를 그려드리기도 했어요. 12월에는 작품집 을 냈고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전시회도 했어요. 아동센터, 복지관, 노동복지관 등에서도 캐리커처 봉사를 했어요. 다문화 가정 엄마들 얼굴을 그려줬는데 제 생각에는 타국에 와서 가족들이랑 떨어져 사니까 외롭잖아요. 일부러 입술도 빨갛게 그려주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그려줬어요. 얼굴을 더 화사하고 밝게요.
‘누나쓰’ 인생에 색깔을 입히다
‘누나쓰’는 7명으로 구성됐다. 7명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추억과 사연과 꿈을 담아 만화 작업을 한다. 퇴직 교사인 김옥순 작가는 만화를 통해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한다. 어머니는 결혼하고 오래오래 보면서 자식으로서 보답을 했지만 아버지께는 받기만 하고 드리지 못한 마음을 만화를 통해 풀어가고 있다. 취재 날 개인 사정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은 이춘자 작가는 천재성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만화작가로 성장했고 한 은행 사외보에 인터뷰도 실렸다. 서영희 작가는 만화를 통해 자신의 병을 알리고 힘든 시간을 꿋꿋하게 이겨나가고 있다.
서영희 파킨슨병을 앓고 있어요. 2010년도에 발병했는데 육십이 좀 넘어서 발견했어요. 어느 날 밥을 먹는데 떨리기 시작했어요. 이런 병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정말 머릿속이 하얗게 되더라고요. 고치지 못하는 병이구나 했어요. 제가 처음 파킨슨병 약을 먹으면서 겪었던 얘기를 만화로 그렸어요. 약을 3개월 먹으니까 얼굴이 커지더라고요. 너무 독해서요. 잠만 자고요. 그 이후 약을 또 먹어야 하는데 약만 받아놓고 먹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다리도 떨리고 가족들이 속상해 난리가 났어요. 우울증도 생겼고요. 그러다 큰 병원으로 옮겨 다시 검사하고 약을 바꿨더니 괜찮은 거예요. 어차피 치료받을 생각이면 마음을 바꾸자! 치료를 받으면서 감사의 씨앗을 찾고, 울고불고하면서 짜증내고 화내는 대신 도화지에 다시 그림을 그리자고 생각했어요.물론 재활을 염두에 두고 하는 활동은 만화 외에도 많아요. 합창, 핸드벨, 우쿨렐레, 난타 등이요.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만화를 그리는 동안 제 손이 떨리지 않아요. 밤 9시면 자던 사람이 새벽 2시고 3시고 책상 앞에 앉아 있기도 해요. 그림을 그릴 때마다 평온이 찾아오는 느낌이거든요. 요즘에는 음식 만화를 그리고 있어요. 제가 요리를 좋아하는데 제 레시피를 모아서 만화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조금 늦게 ‘누나쓰’ 멤버에 들어온 이영희 작가와 차영순 작가 또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차영순 작가의 경우 5년간 다져온 사진 촬영 실력으로 멤버들의 사진을 도맡고 있다. 누나쓰 멤버들은 처음 시작할 때의 작품과 지금 작품을 보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성장한 모습에 놀랍다고 입을 모은다. 앞으로 만화 박람회에도 나가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낸다. 또 박람회에 온 관객들 얼굴도 그려주고 봉사도 많이 하고 무엇보다 남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 ‘누나쓰’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스토리펀딩을 하고 있다. ‘누나들의 밥상’이라는 사연이 있는 이야기를 담아 인터넷에 연재 중이다. 시니어가 살아온 옛 추억이 담긴 이야기도 실리고 있다. 격주로 누나쓰 멤버가 한 작품씩 쓰고 있고 10월에는 이 글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아직은 그저 색을 칠하고 자신의 얘기를 하는 정도라 말하지만 시니어 세대가 관심 가져볼 만한 무한의 장이 만화가 아닐까. 아이가 좋아하는 전래동화는 시니어의 입을 통해야만 그 맛이 나고 한결 담백하다. 아이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만화 영역에는 늘 시니어의 따뜻한 이야기도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다. ‘누나쓰’라는 이름을 걸고 시니어 프로만화가로 제대로 거듭날 그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는 좋았어. 너무 신비스럽고 재밌으니까. 아홉 살 때 봤는데, 지금 봐도 재밌어. 김산호 작가는 나와는 띠동갑인데 대단한 분이야.” 진심에서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슈퍼히어로 만화인 에 대한 거듭된 찬사.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신의 추억에 대한 감탄을 전하는 ‘ 동호회 회장’이자 시사만화계의 전설인 박재동(朴在東·65) 화백의 모습에는 세월을 고스란히 관통해온 천진함이 느껴졌다. 그 자신이 만화가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만화를 많이 읽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만화가 얼마나 재밌어요? 만화에 안 빠지는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어.”
박재동 화백은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부친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만화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원체 책을 좋아하셨죠. 원래는 서점이었는데 만화가 늘어나며 만화가게가 됐어요. 얼마나 행복하겠어. 집이 곧 보물섬이었으니 남들이야 뭐라건, 멋진 상상과 그림으로 가득한 만화책들을 매일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게 무지 행복했어요. 그 만화들에서 받은 영향이라는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전 지금도 그때 열광케 했던 만화가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문화예술이 주는 가치를 이젠 만화가 채워주기 시작한 거죠.”
등록금이 싸서 서울대를 가다
그러나 그가 자랄 당시만 해도 만화에 대한 편견은 강했다. 사실 그때에 비하면 세상이 수십 번은 변한 지금도 만화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고운 편만은 아닐 정도니, 그 편견의 역사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만화를 못 보게 하는 어르신들이 많았지. 하지만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공부도 잘해요. 그 자체가 독서거든.”
만화가 곧 공부가 된다는 말은 그 자신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리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학교면 어디든 좋았지. 그런데 서울대를 가야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등록금이 쌌거든.”
전교 1등과 전교 꼴찌를 넘나들다
서울대를 들어갔을 만큼, 그는 공부를 잘했다. 전교 1등도 해본 적 있다. 그러나 그는 좀 독특한 전교 1등이었다. 전교 꼴찌(꼴등)를 해본 적도 있기 때문이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내가 꼴찌하는 걸 보고 이해를 못했지. 별세계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꼴찌도 기술이야. 천운이 있어야 해.”
그는 심지어 전교 꼴찌를 ‘쟁취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꼴찌가 된 적도 있었다.
“나랑 꼴찌를 다투는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에게 대신 시험을 봐달라고 했더니 너무 좋아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이젠 자기가 꼴찌가 아닐 수 있으니까. 우선 내 책걸상을 없앴어. 누구도 모르는 곳에 숨겨놨지. 그렇게 숨겨놓으면 선생님이 볼 때 결석이 없단 말야. 그리고 그 꼴찌 친구가 ‘선생님, 답지 하나 모자릅니다’라고 하면 선생님이 그랬나 하며 답지 한 장을 더 줘. 그러면 그 친구가 자신의 답안지와 똑같이 내 답안지를 쓴 후에, 자신이 확실히 아는 것도 일부러 틀리게 쓰는 거야. 그렇게 내가 꼴찌를 쟁취했었지(웃음).”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꼴찌를 차지한 ‘괴짜’ 박재동의 일면이다.
“아버지는 내 성적이 어느 정도였는지 몰랐어요. 우리 반에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인 애가 있었거든. 걔한테 통지표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걸 학교에 낸 거야. 그래서 내 성적 통지표가 아버지에게 간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런데 전교 꼴찌가 되니 학교에서 아버지를 호출했어.”
자신이 전교 472명 중 472등이라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었지. 속으로 화를 삭이신다는 걸.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래 ‘꼴찌는 너무 했다, 공부를 해야겠다’ 결심하게 됐어.”
‘진짜’ 꼴찌와의 만남
전교 꼴찌를 경험한 그에게는 나름의 ‘꼴찌 철학’이 있었다. 꼴찌인 아이들을 봐도 그는 자신 또한 꼴찌였기에 다가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꼴찌한 아이에게 ‘저 새끼, 왜 맨날 꼴찌해?’ 하는 마음이 없거든. 되려 친구처럼 친근한 생각이 들지. 그리고 전교 꼴찌였던 나는 그놈한테 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아이들에게는 꼴찌 아닌 사람이 말하면 먹히지 않는 게 있는 것이고.”
그리고 사실, 그는 ‘진짜배기 꼴찌’에 대한 묘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서울민예총에 갔을 때 거기서 전국 꼴찌를 만난 거야. 난 전교 꼴찌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전국 꼴찌였지. 그런데 이 친구가 정말 사람이 좋아. 독특해. 나하고 뭐가 다르냐 하면, 나는 꼴찌를 했지만 진정한 꼴찌는 아니야. 먹물이지. 그래서 가출한 아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사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 아이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거지.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해. 가출한 아이들을 만나면 그냥 친구로 지내. 그게 훌륭한 거야. 진정한 전국 꼴찌야. 하지만 나는 수법을 써서 꼴찌가 됐으니 평범한 사람이지.”
고 김근태 의원은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노동자들과 완전히 일치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로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그 자신이 서울대학교 출신의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 꼴찌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박재동의 고민도 그와 비슷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과 동반자로서의 삶을 추구하기에 안고 갈 수밖에 없는 화두이기도 했다.
시사만화의 전설로 거듭나다
‘시사만화는 박재동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는 그이지만, 막상 그는 만화가가 될 생각이 그리 없었다.
“미대를 나와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민중미술가가 됐지. 그런데 민중미술은 메시지가 강해서, 저렇게 무섭게 하는 것보다는 만화가 낫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만화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교사로서의 삶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하는데 너무 행복한 거야.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면 백 배로 돌아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극치감을 느꼈지.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려서 극치감을 느끼고 그림으로 인생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사람인데, 교육으로 극치감을 느끼면 그림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니까. 그림을 안 그려도 불안하지 않다는 게 불안한 거야. ‘어유, 큰일 나겠다’ 싶어 학교를 그만뒀어.”
그는 학교를 그만둔 후 출판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그림을 ‘죽도록’ 그리고 싶었다.
“한겨레가 창간하면서 시사만화가를 모집했지. 후배가 해보라고 했고 응모를 했는데 된 거야. 그때만 해도 내가 만화가가 된 건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에서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개념이었어. 그러다 보니 8년 동안 했는데, 하다 보니 내가 이 일에 맞다,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덕분에 진짜로 그림을 죽도록 그리게 됐어(웃음).”
시사만화를 그만둔 그는 현재 다시 한 번 교육자로서의 삶을 이루고 있는 중이다. 그에게 이상적인 교육이란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교육은 뻑뻑한 게 있지. 선생이 어떤 수업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지 아이들에게 뭔가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별로 못해. 그건 아이를 정말로 존중하는 게 아닌 거지. 새로운 시대의 교육은 아이들을 믿고 맡겨야 해. 좋은 교육을 하려면 선생들끼리만 모여서 토론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얘기를 해야 한다고. 과거 교육은 어떠했고, 현실적으로 기업에서는 이런 것을 원하고, 4차 산업혁명은 이렇고, 입시는 이런 식으로 되어 있고 등등 이 모든 것을 아이들과 공유하고 얘기를 해야 한다고 봐.”
그는 또한 아이들이 일찌감치 자신의 직업을 확정해 그것에 몰두하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사를 할 사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장사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 거야. 장사 외의 다른 과목들은 교양 삼아서 배우면 되잖아. 장사를 할 게 확실한데 영어가 필요하면 영어를 배우도록 하면 되는 거고. 의사가 되어야겠다면 의사 공부를 어릴 때부터 해야 해. 그리고 그걸로 돈 버는 경험도 해야 해.”
무언가에 푹 빠져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교육과 통일에 자신을 바치고 싶다
예순 중반을 넘었지만 교수 박재동이 아닌 인간 박재동은 여전히 미래를 향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개인적인 꿈은 애니메이션과 영화가 섞인 것을 만들고 싶어. 그쪽에 나같이 ‘산만한 놈’이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이라는 영화를 만든 배용균 감독 때문에 한때는 영화배우가 될 뻔도 했지(웃음).”
그는 일각에 있었던 교육감 제안에 대한 얘기에는 손사래를 쳤다.
“그거 내 절대 안 하지. 그걸 하면 난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거니까. 그래서 ‘난 안 한다, 작품할 거다’라고 대답해줬어. 그런데 그쪽에서 ‘아니, 선생님. 아이들이 행복한 얼굴이야말로 선생님의 작품 아닌가요?’라고 되묻는데 어휴 쒸…(웃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야. 고사했지.”
박재동은 천생 자유인일 수밖에 없다. 장르에 대한 편견 없는 자유와 자신의 활동을 자신이 온전히 다루고자 하는 자유. 그리고 그 자유로 이루고 싶은 큰 꿈이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자기를 찾아서 자립해서 살 수 있는, 당당하게 살 수 있게끔 해주고 싶어. 그리고 남북관계가 잘돼서 막힌 혈이 확 뚫리면서 새로운 꽃이 피게끔 하는 것.”
당장은 특별한 일은 없지만 교육과 통일을 위해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그의 말은, 그의 육십 년 넘는 만화 사랑만큼이나 오랫동안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유로운 문화예술인으로서 묵묵히 자신만의 깊은 우물을 파고 있는 그의 모습이 우회해서 드러내고 있듯이.
“꿈이 많아서 힘들어, 하지만 그래서 행복해요.”
어렸을 때 일입니다. 참 만화가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아무래도 더 부연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를테면 슬픈 이야기인데도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위다(Ouida)의 소설 를 동화책으로 ‘읽었’는데, 얼마 뒤에 만화로 다시 ‘보았’습니다. 감동은 다르지 않았는데 동화를 읽으면서 잔잔하게 스미던 안쓰러움이 만화에서는 거의 ‘쿵!’ 하는 소리를 내는 저린 아픔으로 지녀졌습니다. 지금도 저는 알루아가 넬로를 만나지 못하던 때의 모습이 뚜렷하게 기억됩니다. 다른 칸보다 조금 더 커다란 네모 칸 안에 꽉 차게 그려진 커다란 눈 하나, 그리고 그 눈에서 떨어지는 그만큼 커다란 눈물방울, 그리고 그 옆의 이른바 홈통(만화의 칸과 칸 사이)을 지나 다른 작은 칸에 그려진 ‘흑!’ 하는 말풍선, 그리고 다시 홈통 옆으로 길게 내려진 직사각형 칸에 가득 채워 그려진 알루아의 뒤돌아선 모습에다 그녀의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내딛는 발의 움직임…. 이 그림(이미지) 탓이겠죠. 저는 사춘기 내내 아름다운 소녀란 ‘눈이 큰 아이, 그 큰 눈에서 그 눈만큼 커다란 눈물을 뚝뚝 짓는 계집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재미있었다고 한 표현은 ‘실감나게 즐겼다’고 해야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만화는 이야기책보다 훨씬 저를 마구 흔들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만화를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만화방이 없다거나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만화를 읽는 것은 ‘못된 짓’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대체로 그러셨습니다. 그분들에게 만화란 아이들이 읽는 것, 꽤 자라면 벗어나야 할 잠깐 동안의 과정에서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물며 소설도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못 읽게 하셨던 시절이니 글이 아닌 ‘그림 나부랭이’를 책이라고 들고 있는 모습을 보시면서 진정으로 속이 상하셨을 것이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 세상 또한 그만큼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사람살이를 글(문자, 또는 책)을 통해 만나고 알아야 한다는 당위가 이전처럼 권위를 갖지 못합니다. 그림(이미지라고 통칭할 수 있을 텐데)은 이제 옛날에 책이 지녔던 권위를 넘어서 스스로 홀로이지 않은 채 글도 소리도 색깔도 움직임조차 아우르면서 사람의 삶과 생각과 인식과 경험과 기억과 행동을 결정하여 마침내 삶을 되짓는 절대적인 자리에 올라서 있습니다. 영상문화의 현실을 우리는 생생하게 경험합니다. 그렇다고 문자의 퇴색이나 책의 소멸을 예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제 생각을 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요.
다만 저는 만화라고 일컫는 문화를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만화의 기원론이나 발전사, 의미나 가치를 기술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왜 옛날 어른들께서 만화에 대한 ‘불신’을 지니고 계셨었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른이 되어, 또는 나이 먹은 사람이 되어, 만화문화에 대한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를 다듬어보고 싶을 뿐입니다.
모든 갈등의 처음 모습이 그렇듯이 저는 이 대목에서 ‘익숙함’과 ‘낯섦’ 간의 긴장을 유념하고 싶습니다. ‘글의 문화’에 익숙해 있으면 ‘이미지의 문화’에 대한 낯섦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낯섦에 대한 감추어진 판단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낯선 것은 ‘천박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신이 그것에 적응할 수 없을 때면 그 낯선 것을 아예 ‘못된 것’으로 치부해야 자신의 무능이 정당화된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합니다.
그렇다면 ‘글에서 이미지로의 전환’이라고 할 만화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지닌 낯섦은 어떤 것인지요. 우선 글은 글 안에 담긴 이야기를 독자 스스로 이미지화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미지는 그 몫을 없앱니다. 직접적이니까요. 그래서 소설이 영화화되면 많은 경우 그 소설의 독자는 자신이 지녔던 이미지의 왜곡, 변형, 나아가 파괴를 경험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만화로 그려진 경우는 그런 일이 덜합니다만 이미 있는 이야기를 만화로 다듬으면 이러한 경험이 일고, 그것은 만화를 결과적으로 낯설어 천박하게 여기는 바탕이 되곤 합니다. 물론 시각적 이미지로 재구성한 이야기의 생동성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요.
다음으로 글은 어떤 격한 계기들도 글 안에서 다룹니다. 읽는 사람은 글의 흐름을 따라가며 그 굴곡을 겪습니다. 그런데 만화는 글의 문법과는 다른 만화만의 문법을 가집니다. 칸, 홈통, 말풍선 등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화적 문법은 ‘잔잔’하지 않습니다. 칸과 칸의 단절과 그 단절을 비약하면서 이어지는 연속, 거기에다 충분히 서술적이지 않은 말풍선의 개입 등은 철저하게 ‘소용돌이’입니다. 그러므로 칸의 단절과 연속을 좇기 위해서는 글의 문법과는 다른 의식의 움직임을 내가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용돌이를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은 그 소용돌이가 만화의 만화다움입니다.
게다가 만화는 인물을 포함해 어떤 사물도 만화의 틀 안에 들어서면 그것 자체의 속성을 과장하여 드러냅니다. 일상적으로 내가 사물에 대해 가졌던 이미지가 철저하게 변형됩니다. 캐릭터의 출현은 이러합니다. 때로 그것은 괴기스럽기조차 합니다. 비약하는 상상력이 아니면 따라갈 수 없는 비현실성이 현실성을 지니고 의젓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면서 그 캐릭터는 이야기를 흐르게 하기보다 끊임없이 자기 안에 담습니다. 자기에게 귀착했다 다시 흐르도록 합니다. 그래서 만화는 글에 익숙한 자리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모습으로 ‘읽혀’ 경박하기 그지없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만화는 그렇게 세상을 새롭게 ‘보도록’ 이미지를 재구성하여 다른 세상, 우리가 간과했던 삶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국 만화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칸의 단절과 연속을 빚는 홈통을 메꾸지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 그리고 말풍선의 여운에 메아리치지 못하는 유연하지 못한 경화된 사유 등이 그 까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만화도 여러 장르가 있습니다. 이야기 만화(comic strip)도 있고 한 칸, 또는 네 칸 등의 정형화된 이미지 만화(cartoon)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바야흐로 우리 삶 속에서 이야기와 이미지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문화가 펼쳐지고 있는데 이를 간과한다는 것은 게으른 삶이라고 지탄받기에 꼭 알맞습니다. 그렇다면 ‘만화를 못 읽는 늙은이’가 되기보다 ‘만화도 읽는 노인’으로 살면서 자신이 여전히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유연한 사고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화는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지극히 실용적인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만화도 좋은 만화가 있고 못된 만화가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그러니까요. 그래서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혹 좋은 만화를 추천해주면 어떻겠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제 대답은 분명합니다. 필독도서목록을 만드는 일은 금서목록을 만드는 일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더구나 어른들 앞에선데요.
아무튼 저는 만화를 즐깁니다. 글 읽기보다 ‘재미’있으니까요. 만화적으로 과장한다면 ‘만화를 읽으면 늙지 않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