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분의 1초. 찰나(刹那)는 이토록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그 찰나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우리의 삶이 된다. 최백호는 ‘낭만에 대하여’를 작사·작곡하고 노래한 가수다. 일상에서도 낭만을 품고 살았기에 그는 낭만을 노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여 최백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낭만 가객’으로 등극했다.
최백호는 낭만의 시간과 도전의 시간을 함께 살고 있다. 지난해 11월 기획앨범 ‘찰나’를 발매한 그는 젊은 가수들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외적인 변신도 시도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신년호 표지를 장식하며 젊은 스타일을 멋지게 소화한 것. 변화의 준비를 마친 최백호가 수놓을 2023년이 기대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에요! 살아온 세월이 다 없어진 것 같지만 그냥 흘러가지 않아요. 어떤 형태로든 다 쌓여 있어요. 그 많은 것이 내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요. 저는 지난해 73세의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74세의 시간이 기대됩니다.”
후배들과 협업한 ‘찰나’
기획앨범의 타이틀곡 역시 ‘찰나’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낭만에 대하여’를 잇는 포크송으로 누가 들어도 최백호 노래다. ‘찰나’는 빛났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 모두 인생을 수놓은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최백호의 세월을 그대로 담은 목소리가 가사와 맞물리며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제 노래가 원래 좀 그렇기는 해요. 별로 정돈되지 않고 노래가 제 박자에 들어가지 않기도 하고요. ‘찰나’에서는 특히 제 목소리가 가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오죠. 나이가 느껴진다는 반응도 많고요. 기획하고 믹싱한 분들이 노래와 맞다고 판단해서 제 목소리를 그대로 살린 것이라 생각해요.”
앨범 ‘찰나’의 수록곡은 총 8곡이다. 최백호는 마지막 곡 ‘책’만 작사쪾작곡하고, 나머지 7곡은 후배들에게 맡겼다. CJ ENM의 신인 작곡가 육성·발굴 프로젝트인 ‘오펜 뮤직’ 출신 작곡가들이 노래를 만들었다. 최백호는 2018년부터 오펜 뮤직의 멘토로 참여했고, 그 인연이 ‘찰나’로 이어졌다.
최백호는 직접 노래를 쓰고 만들어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하다. 때문에 그에게 ‘찰나’ 앨범 자체는 실험이고 도전이다. 최백호의 새로운 변화에 후배 가수들이 동참해 힘을 실어줬다. 지코, 타이거JK, 정승환, 정미조, 죠지, 콜드 등이 피처링에 참여했다.
노래의 장르가 달라지니 창법 또한 달라졌다. 최백호는 타이거JK와 힙합곡 ‘변화’를 불렀다. 그는 고음을 소화하며 파워풀한 창법을 보여줬다. 죠지와는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 ‘개화’를 함께했다. 최백호의 목소리에 신나는 리듬이 붙으니 가사가 주는 설렘이 더해졌다. 최백호는 후배들과의 작업에 대해 “공부도 많이 했고, 깨우친 것도 많다”고 소감을 밝혔다.
“저는 좋은 노래는 쉽고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꼭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어요. 젊은 세대의 노래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 깨진 거죠. 또 제가 평생 혼자 노래 부르다 보니 하모니를 잘 못 내요. 같이 노래 부른다는 게 어렵기도 했고 공부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실력 있는 작곡가들과 가수들이 있어서 K-팝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죠.”
이번 앨범에는 특히 ‘가요계 3대 코’ 막내 지코가 ‘찰나의 순간’ 내레이션에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최백호는 “사실 지코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지코 측의 요청으로 그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면서 지코라는 존재도 알게 되었고, 협업도 이뤄졌다고 한다.
이와 함께 ‘가요계 3대 코’ 최백호, 개코, 지코가 한자리에 모였다. 최백호는 발음하면 최배코가 되어 가요계 3대 코 맏형이 됐다. 세 사람은 올해 힙합곡을 내기로 약속했다. 최백호는 “진짜 부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힙합을 해보고 싶다. 이번에 타이거JK와 함께 힙합을 처음 해봤는데 재밌었고, 노래가 들을수록 좋다. 개코, 지코와는 어떤 노래가 나올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사실 이번 앨범은 세상에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여름 최백호의 건강이 악화돼 녹음이 힘든 상황이었다. 최백호는 “그때 의사가 ‘노래를 안 부르고 오래 살든지, 노래를 부르고 일찍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하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대답은 “선생님, 저 노래 부를게요”였다.
최백호는 자기 몸보다 후배들의 노력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몸이 안 좋다 보니 녹음할 때 아주 예민했다. 후배들을 잘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면서 “지금은 많이 호전됐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전했다. 최백호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천생 가수라는 사실 또한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나이 듦의 변화
최백호는 화가라는 직업도 갖고 있다. 59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최백호는 ‘나무 그리는 화가’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나무밖에 그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변화할 뿐이지 배신을 하지 않는다”며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를 밝힌 그는 특별한 나무 이야기를 전했다.
“고향이 부산 기장인데 어머니께서 시골 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님이셔서 사택에서 같이 살았어요. 그 사택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고향에 갈 때마다 그 나무를 보고 와요.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나무죠. 그런데 다른 학교가 들어와서 그 나무를 뽑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때마침 거기 문화원장과 식사 자리가 생겨서 나무 얘기를 했더니 보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최백호 나무라고 이름도 생겼다죠. 하하.”
최백호에게 어머니는 매우 큰 존재다.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백호의 어릴 적 꿈은 어머니처럼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미술에 소질이 많았던 터라 미술 교사를 꿈꿨다. 학창 시절 그는 미대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등록금이 부족해서 재수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장 잠잘 데가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그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최백호가 선택한 방법은 생계형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부산 라이브 클럽을 3년, 서울 라이브 클럽을 1년 넘게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1976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만든 곡으로 지금도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라고 한다.
“운 좋게 데뷔 앨범이 잘됐지만, 여전히 가난했어요. 기획사에서 돈을 안 줘서 수입이 없었거든요. 28세까지는 하숙비를 못 낼 정도로 너무너무 가난했어요. 29세가 되어서야 돈을 왕창 받고 그 회사를 나와 다른 회사로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데뷔곡 이후 최백호는 이렇다 할 히트곡을 내지 못했다. 30대의 그는 술집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하루에 술집 일곱 군데에서 일한 적도 있다고. 최백호는 “술도 매일 마시고 정신적으로 망가져 있던 때였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당시 돈은 많이 번 덕분에 최백호는 처음으로 자기 집을 마련했다. 30대 중반에 서울 목동 아파트를 샀다. 최백호는 “그 집이 터가 정말 좋다. 풍수가 좋은 집이다”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집에서 불후의 명곡 ‘낭만에 대하여’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낭만에 대하여’는 1994년에 나왔는데, 1995년 KBS2 ‘목욕탕집 남자들’에 나오면서 역주행 인기를 끌었다. 20년이 넘은 현재도 여전히 사랑받는 곡이다.
“그 집에서 ‘낭만에 대하여’를 만든 덕에 돈을 많이 벌어 다른 집으로 갈 수 있었죠. ‘낭만에 대하여’는 40대에 만든 곡이에요. 20대에는 만들 수 없는 노래죠. 나이가 들면서 노래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예요. 노래가 나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사람들이 항상 새로운 노래처럼 반응해주시고 좋아해주셔서 신기하고 감사해요.”
나이에 따라 새로운 감성이 생기고 노래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그는 70대에 ‘찰나’를 만났다. 최백호는 “80대에는 또 어떤 멋진 노래를 부를지 기대된다. 나이 먹는 것은 절대 슬픈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년기일수록 나이 듦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에 대해 그는 일침을 날렸다.
“행복은 선택이라고 하잖아요. 잠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세요. 99개의 힘든 일이 있었어도 한 가지는 즐거운 일이 있었을 거예요. 오늘 이렇게 즐거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면 하루가 찬란해지죠. 나이 먹는 것도 똑같이 생각하면 돼요.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시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2023년, 70대 중반에 접어드는 최백호. 새해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목표가 없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다 도망가는 사주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는 쪽이다”라고 답했다. 누구에게나 기회의 순간은 오지만, 누구나 그 기회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최백호는 늘 준비되어 있었기에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매 순간, 매일, 매년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낭만에 대하여’에도 탄생 비화가 있어요. ‘낭만에 대하여’를 쓰고 며칠 뒤 조용필 씨의 전 매니저가 앨범을 만들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낭만에 대하여’가 세상 밖에 나올 수 있었죠. 참 신기한 일이에요. 어떤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하는데, 그래서 평소에 바른 자세, 진정성을 갖추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회들을 잡았고 지금의 결과를 얻은 게 아닐까요?”
1985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발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노래가 있다. 그 시절을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그대 먼 곳에’가 바로 그 노래다. 당시 건국대학교를 다니던 임석범(58)과 김복희가 마음과 마음이라는 듀엣으로 부른 이 노래는 752개 팀 중에서 대상을 차지했을 정도로 부드러운 포크 발라드로서 완성도가 단단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도 아내 채유정(57)과 함께 마음과 마음을 이끌며 음악과 라이브 카페, 유튜브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가는 임석범을 만나 노래의 숨결, 그리고 삶에 대한 그의 굳은 의지를 들었다.
마음과 마음의 리더, 중학생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던 임석범의 본격적인 음악 생활은 홍서범이 몸담았던 걸로 유명한 건국대 밴드 옥슨에서부터였다.
“그런데 단체 생활이 저는 도저히 안 맞더라고요. 그리고 ‘불놀이야’를 부르면 홍서범 스타일을 따라 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였죠. 저는 내 스타일로 부르고 싶어서 갈등이 많았어요. 그래서 나왔죠.”
그러나 옥슨을 나온 이후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프로덕션에 가서 오디션을 보고 대학교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 참가하는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에도 도전했다. 그러나 모두 떨어졌다. 훗날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하는 ‘그대 먼 곳에’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하다 하다 안 되니까 군대나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군대 가기 전에 김복희 씨와 강변가요제에 나갔는데 운 좋게 대상을 받은 거예요. 1985년 7월 말 남이섬에서의 일인데, 11월에 영장이 나와서 3일 만에 군대에 가야 했죠. 그때 아내가 강변가요제에 나간다니까 명동에서 써지오바렌테 청바지 사주고 그랬죠.(웃음)”
37년 동안 연인처럼 함께하다
평생을 같이하고 있는 임석범과 채유정의 첫 만남은 1984년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음악으로 인해 만난 게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주요 데이트 코스는 당시 대표적인 포크 가수들이 모이는 라이브 카페로 유명했던 무교동의 코스모스 코러스였지만, 채유정 입장에서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거였지 정작 본인이 가수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군대를 제대한 후 솔로와 듀엣 사이에서 고민하던 임석범은 결국 ‘마음과 마음의 프리미엄을 살리기로 하고, 다른 여자랑 노래를 하는 것보다는 여자친구를 꼬여서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아내에게 가수 훈련을 시키느라 전지훈련도 갔었어요.(웃음) 얼떨결에 가수가 된 거예요. 1987년에 소집 해제되자마자 첫 음반을 서울음반에서 냈죠.”
‘노래를 연습한 날은 울면서 집에 갈 때도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임석범의 혹독한 ‘훈련’을 받아 가수로 거듭난 채유정은 이후 CM 가수 활동도 하고 교육방송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등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잘 따르던 후배가 조갑경이었는데 지금은 학교 선배의 형수님이 됐으니 세상모를 일이다.
유독 좌절이 많았던 음악 활동
분량상 본 기사에 수록하지 못한 이야기들까지 듣다 보니 좌충우돌 즐거운 에피소드가 많은 부부였다. 그러나 음악 활동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합작한 마음과 마음 1집은 활동 시기를 잘못 맞췄다. 하필 88올림픽이 열릴 때 나온 것이다. 아무리 히트곡이 있다지만 이제 막 1집을 완성한 신인이 낄 자리는 없었다. 2집은 1993년에 나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좌절은 끝나지 않았다. 하필 서태지와 아이들이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같은 시기에 데뷔한 것이다. 당시 가요계는 장르가 뭐든 간에 무조건 서태지로 마무리되던 시절. 그 때문에 ‘웃픈’ 일도 있었다.
“제작자 선배님이 가만 보니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팀을 하나 만들면 돈을 빨리 벌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6인조 팀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팀 이름을 잘못 지었어요. 이름이 ‘쇼크’였거든요.(웃음)”
지금이나 그때나 아이돌 그룹치고는 꽤 충격(Shock)적인 이름이긴 했다. 그리고 아이돌 그룹을 처음 만든 제작자에게 닥친 시련도 ‘쇼크’였다. 의상이며 먹는 거며 자동차, 춤 선생까지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갈 줄 몰랐던 것이다.
“매일 세 끼 식사만 해도 그게 얼마예요. 결국 회사가 부도났어요. 일이 그렇게 되니 누구 탓을 하기도 어려웠죠.”
시대를 앞선 스트리밍 사업을 하기도
가요계가 아이돌 그룹 위주로 체질이 변화하면서 포크는 침체되었다. 마음과 마음도 주 무대를 미사리로 옮겼다.
“제가 처음 미사리에서 노래할 때는 라이브하는 데가 두 군데 있었어요. 그러다 점점 늘어난 거죠. 한때는 라이브 카페가 70개였고 가수는 200명에 이를 정도였어요. 미사리에 당구장 하나 차리면 장사가 될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였죠. 그러나 미사리가 점점 호객이 되는 가수들 위주가 되고 싸움이 나다 보니까 잘 안 되게 되었죠.”
그는 인터넷 사업도 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시대를 앞선 사업, 이제는 모두의 일상이 된 음악 스트리밍 사업이었다.
“‘앞으로 음악은 디지털화되어 파일로 노래를 살 것이다’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미사리나 공연장을 다니면서 가수들 동영상을 찍었어요. 그걸 데이터로 만들어 유니텔에 서비스했죠. 그런데 사실 돈이 될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5분짜리 노래를 다운받는 데 15분 걸리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회사가 어떤 길로 갈 것인지 확실하게 방향을 잡을 수 있거든요. 너무 빨리 시작한 거예요.”
유튜브에서 부활한 마음과 마음
그 실패의 경험이 약이 된 것일까. 마음과 마음은 요즘 유튜브와 잘 맞는 편이다. 코로나19가 본격화되면서 가수들의 무대가 사라지자, 아내 채유정이 유튜브에 뛰어들 것을 적극적으로 ‘독촉’한 덕분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편이 시대를 앞선 인터넷 사업 경험도 있는 만큼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내에게 설득된 남편은 7명이 들어오든 8명이 들어오든 유튜브에 마음과 마음의 자리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든 채널 ‘마음과마음7080TV’의 현재 구독자는 3600명 정도. 2시간 넘는 실시간 라이브 공연과 토크를 하고, 공연이 끝나면 영상을 올리고 있다.
마음과 마음은 그 외에도 ‘은혜로운찬송가’라는 찬송가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기독교인인 부부는 요즘 교회에서 그들이 어렸을 적 불렀던 찬송가 대신 매번 새로운 가스펠을 부르는 걸 보고 찬송가를 제대로 불러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곡씩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오로지 사명감으로 시작한 이 실험이 성공한 것이다.
“집에서 컴퓨터로 반주와 코러스를 다 만들어요. 그리고 영상도 만드는 거죠. 한 곡 만드는 데 이틀 정도 걸리더군요. 3월 3일에 구독자가 120명이었는데, 지금은 9200명이에요. 하루에 200명씩 늘어난 거죠. 구독자가 늘어나자 조회 수 30만 회 넘는 영상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이거였구나 싶었죠.”
여백의 음악을 추구하다
그는 현재 강남 도산공원 앞에 자리한 라이브 카페 마음과마음을 운영하고 있다. 벌써 11년째 운영 중인 라이브 카페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명소다. 라이브 카페 운영, 유튜브 채널 운영, 그리고 새롭게 발표할 계획인 싱글 곡까지, 요즘 임석범의 하루하루는 바쁠 수밖에 없다. 어찌되었든 그의 본분은 가수. 음악 얘기를 할 때 그는 가장 활기찬 목소리를 냈다. 그가 하고 싶은 음악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여백이 많은 음악’이다. 그가 말하는 여백의 음악이란 듣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 음악을 뜻한다.
“어떤 가수는 슬픈 노래를 부를 때 본인도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듣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여백이 많은 음악은 듣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놓죠. 그래서 아주 슬픈 노래는 슬프지 않게 불러야 진짜 슬플 수 있는 거라고 봐요. 진짜 슬픈 노래는 마이너가 아니라 메이저 코드라는 거죠. 담담하게 여백을 주며 부르면 가사가 들리고, 그러면 듣는 사람이 자기 감정을 넣어 아픔을 간직할 수 있거든요.”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드는 사람 되고파
임석범의 음악적 롤모델은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라고 불렸던 조동진과 정태춘이다. 조동진의 ‘작은 배’, ‘어떤 날’ 같은 노래는 임석범의 여전한 애창곡이다.
“부끄러운 기억이 있어요. 데뷔하기 전에 방송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MBC 라디오에 정태춘 선배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어요. 사회자가 한 곡을 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질문하더군요. 저는 곡 쓰는 데 오래 걸리지 않고 한 방에 끝내는 타입이어서 하루면 다 만든다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정태춘 선배는 일 년 걸린대요. 써놓고 다시 보고 다시 보고 하다 보니 곡을 쓰는 게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저는 너무 쉬웠거든요. 그게 너무 창피했어요. 그렇게 노래 하나도 정성 들여서 만드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대중적인 인기가 없어도 동료 선후배 가수들이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든다’고 말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게 그가 지금도 뜨겁게 품고 있는 꿈이다. 그의 끈질긴 꿈이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새롭게 나올 노래들을 들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안녕,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당신의 노래가 그렇게 빨리 사라질 줄 몰랐어요. 이제 겨우 그 노래를 배웠는데. 그렇게 빨리 사라지다니. 그렇게 빨리. 당신을 기억할 거예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매일 밤 우린 동틀 때까지 어울렸죠. 그때처럼 그렇게 오래 웃어본 적이 없었어요.’ 이는 1960년대를 주름잡았던 2인조 그룹 ‘사이먼&가펑클’의 마지막 앨범에 실린 ‘So Long, Frank Lloyd Wright’의 가사 일부다.
애달픈 사랑을 노래하는 곡 같은데, 가사 속 프랭크는 누구일까? 건축에 관심 있는 이라면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와 함께 현대 건축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건축가다.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그의 작품이다. 건축학도로서 건축가를 꿈꾸었던 가펑클은 평소에 프랭크를 존경했고, 프랭크를 추모하기 위한 곡으로 사이먼이 가사를 썼다.
훗날 밝혀진 바로는 사이먼은 프랭크가 누군지도 모른 채 작업을 했다고 한다. 사이먼은 오랜 친구인 가펑클이 존경하던 그의 영웅을 존중했고, 그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처럼 곡을 만들었다. 동시에 이 곡은 해체에 대한 암시를 담은 노래였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이 그들의 마지막 앨범이다. 동네 친구였던 둘은 음악적 스타일과 예술적 성향이 달라,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하다가 이 앨범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길을 간다.
닮고 싶은 마음
가펑클이 프랭크를 동경했던 것만큼 나 역시 ‘사이먼&가펑클’을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지막 앨범은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그들의 2집에 큰 감명을 받았던 터라 이 앨범도 명반이라는 걸 알지만 혹여 2집에 못 미칠까 봐 걱정됐다. 듣고 나선 달라졌는데, 특히 위의 곡을 굉장히 좋아했다. 기쁨과 슬픔이 섞여 있어 복잡한 감정이 생기는 이 곡에 이상하게 끌렸다. 메이저 세븐 코드와 디미니시 코드를 잘 섞은, 브라질 보사노바 곡의 코드 진행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보통 장조는 기쁨을, 단조는 슬픔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장조 7번 화음(메이저 세븐)은 장조 같으면서도 단조처럼 들려서 감정적으로 복잡하고 묘한 화음이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꼭 이런 걸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메이저 세븐 화음은 향수와 그리움을 가장 잘 불러일으키는 화음이란다. 향수와 그리움은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갈망과 행복했던 추억이 합쳐져 슬픔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감정이다. 보고 싶지만 만날 수 없어서 슬픈 마음이 드는 동시에 그 시절의 행복이 떠올라 벅찬 기쁨을 맛보게 하는 감정. 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장조와 단조의 중간인 이 화음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이런 복잡 미묘한 화음은 추모의 감정과 비슷하다. 사랑했지만 죽음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했던 누군가를 추모할 때 드는 감정. 그와의 추억은 행복했지만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슬픔. 진정한 사랑과 감사, 후회와 미안함, 안타까움, 그리움, 함께 나눈 기쁨과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 방향성, 그리고 희망을 동시에 느끼는 감정적 경험의 총합이 바로 추모다. 우리는 추모를 통해 누군가를 향한 사랑과 존경은 흑백논리가 아니라 이렇듯 복잡한 감정이라는 걸 깨우친다.
결국 진정한 추모란 그리워하는 누군가를 닮아가려고 부지런히 노력할 때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프랭크는 사라졌지만, 사이먼&가펑클은 그를 기리며 노래를 불렀다. 난 그 노래를 들으며 프랭크 같은 건축가를 꿈꿨지만, 현재는 그 듀오처럼 가수가 됐다. 가수로서는 생명을 다한 사이먼&가펑클을 내 맘속에서 늘 그려왔는지도. 작별은 슬프지만 추억은 달콤한 법이니까. 그들의 듀엣을 무대에서 다시 볼 날을 기대하며, 오늘도 기타를 잡는다. 최고의 듀오 사이먼&가펑클을 닮기 위해.
So Long, Frank Lloyd Wright - Simon & Garfunkel
2인조 그룹의 원래 이름은 톰과 제리였다. 이름의 영향인지 몰라도 그들은 불화가 잦아서, 자주 해체와 재결합을 반복했다. 하지만 포크송 세대의 마지막 음유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로 유명했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10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했고, 6개월 만에 800만 장이나 팔리며 경이로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1970년대 초반 한국에서도 이들의 영향을 받아 남성 2인조 붐이 일어나기도 했다.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그룹 ‘SG워너비’의 첫 두 글자도 이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난 당신의 눈에서 태양을 보았고, 달과 별은 당신이 이 공허하고 어두운 세상에 내린 선물이라 여겨졌죠. 우리의 사랑은 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속할 것임을 알았죠.” 첫눈에 반할 때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이 찰찰 넘치는 노랫말이다. 내게도 이 노랫말과 같은 순간이 있었다.
아내를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짧은 연애 후 실연 9년 차였던 때, 다시는 사랑이란 없을 줄 알았던 내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순간이었다. 지진이나 눈사태같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휩쓸리듯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동시에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희망과 기쁨이 풍성한 거품처럼 ‘펑’ 터지며 하늘 높이 쏘아 올라간 것 같다고 할까?
앞서 소개한 노래는 1950년대 포크송인데, 한국으로 치면 트로트의 여왕 ‘주현미’ 같은 소울의 여왕 ‘로버타 플랙’이 리메이크해서 1969년에 발표한 그녀의 데뷔곡이다. 녹음할 때 편곡자가 좀 더 빠르고 멋지게 편곡을 하자고 했는데, 플랙은 이렇게 느리고 간결하게 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연히 노래는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그런데 1971년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운전을 하고 가다가 우연히 이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었다. 이스트우드는 다음 주유소에서 전화를 걸어, 자기가 준비 중인 영화에 이 노래를 꼭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영화가 바로 유명한 스토커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다. 그 영화 덕분에 노래는 뒤늦게 대 히트곡이 됐다.
어두운 곳을 환히 비추는 사랑
알다시피 도파민에 의한 사랑의 유효 기간은 3년 정도다. 미칠 것처럼 뜨겁던 시간이 지나고 식어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닐까? 본능적 사랑이 끝난 것일 뿐이다. 그 고개를 넘으면 진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서로를 연인으로만 보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수긍하며 감싸고 고마워하며 믿어주는 사랑이 비로소 시작된다. 평소엔 파트너였다가 힘들 때는 서로에게 부모처럼 크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다. 서로를 잘 알기에 서로에게 너그럽고 융통성 있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이.
도파민은 중독성이 있어 갈수록 더 강력한 자극을 원하지만, 인간은 현명해서 파멸로 이끄는 본능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대표적인 능력이 사랑이다.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현실적 사랑, 보호받을 때와 소중한 누군가를 보호해줄 때 몸에 흐르는 ‘옥시토신’을 추구하는 사랑. 그런 따뜻하고, 일관적이고, 민감하고, 관계 개선을 잘하는 진짜 사랑. 그게 오래가는 사랑이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과도한 결핍이나 부정적인 경험은 경험과 반대되는 쪽을 선택하게 만들고,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던 사람은 사랑을 잘 몰라서 과도한 기대를 할 수도 있다. 만일 ‘도파민적’ 사랑이 끝나고 상대방을 도저히 ‘옥시토신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면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헤어지거나, 대안이 없을 땐 적응하도록 더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왜곡된 사랑의 이유와 환상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사랑을 지켜나가기는 힘들다. 사랑을 지키려면 함께 노력해야 하고, 좀 더 강하고 현명한 쪽이 늘 양보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그럴 수 없는 사람을 도와줘야 하니까. 보통의 관계에서 내가 상대방에게 10을 주면 상대방은 3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은 10을 줬다고 하는데 나는 3도 못 받곤 한다. 나머지 7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 7은 상대방이 원치 않는 엉뚱한 곳에 던져 실종된 것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파악해야 더 효과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럼 이런 방법도 있다. 먼저 내가 원하는 사랑을 절반으로 줄여서 기대를 낮추는 건 어떨까? 왜 나만 손해 봐야 하냐고? 그럼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의 절반만 주고, 5를 주면 1.5를 받는 것을 수긍하자. 그러면 조금 덜 억울하고,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을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은 플랙의 노래처럼 ‘공허하고 어두운 곳’이 되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 사랑이 가장 중요하니까.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 Roberta Flack
원곡은 영국 포크송의 아이콘 ‘이완 매콜’이 작곡했다. 싱어송라이터이자 극작가, 배우, 사회운동가였던 그는 미래 자신의 세 번째 부인이 될 페기 시거를 오디션에서 처음 본 후 이 곡을 작곡했다. 막 활동을 시작한 로버타 플랙은 데뷔 앨범 ‘First Take’를 위해 이 곡을 리메이크했다. 처음에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편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곡을 자신의 감독 데뷔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 삽입한다. 이후 이 곡은 1973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해의 음반상을 받았고, 플랙은 R&B 가수로서 성공적인 음악 인생을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이 곡은 최초의 유인 달 탐사선 아폴로 17호가 지구를 떠난 지 9일째 되는 날 우주 비행사를 깨우는 음악으로 사용됐다. 지구를 넘어 우주에서도 울려 퍼지는 영광을 얻은 것이다.
수많은 실력파 가수들을 배출했던 대학가요제에서, 우순실(57)은 1982년 ‘잃어버린 우산’으로 동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가요계에 데뷔했다. 발라드 곡 ‘잃어버린 우산’은 1970년대 포크송에서 1980년대의 발라드로 넘어가는 가요계 조류에서 분명하게 각인된 노래였다. 그녀의 묵직한 목소리는 경험을 통해 체득한 깊은 진심이 묻어난다. 그녀의 삶은 가혹했다. 뇌수종으로 잃은 첫째 아들, 전 남편의 사업 실패로 짊어져야 했던 빚 29억 원. 그러나 막상 만나본 그녀의 모습은 밝고 평온했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남다른 삶의 여정과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들어봤다.
"인생이 순탄하기만 하면 감사함이 없게 돼요. 굽이굽이 좌절도 해봤다가 올라가기도 하고 그래야 참 감사하고 기쁘다는 걸 느끼게 되죠."
인생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가수 우순실만큼 그 주제에 어울리는 이도 없을 것이다. 노래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딸 다섯을 홀로 키워야 했다. 그때에는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동네에 스피커가 있었는데, 거기서 매일 일정한 시간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특히 이미자 등의 트로트 가수들 노래가 자주 나왔는데 어느 순간 그녀는 그 노래들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노래를 해보라고 시키기도 했단다. 그래서 음악적 후원자였던 큰언니는 그녀에게 ‘너는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다’고 말하곤 했다.
타고난 가수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큰언니가 피아노 학원을 보내줘서 음악적 소질을 발견하게 해줬어요. 고등학교 교련시간에는 휴식시간마다 불려나가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수가 되었죠. 대학교를 작곡과로 들어간 것은 노래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습득하기 위해서였어요.”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다니던 그녀는 1학년 때인 어느 어스름한 저녁, 국악과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를 듣고 반해버렸다. 그 무렵 대학가요제 출전으로 자퇴를 해야 했고 이후 그녀는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를 들어가게 된다. 20대까지의 그녀의 삶에는 순수한 음악적 매혹에 의한 선택들이 있었다. 음악적 욕심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말을 안 하고 있으면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는데 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게 노래예요. 예를 들어 화가들이 자기 철학이나 인생관을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저에게 있어 노래는 간절한 표현 도구인 거 같아요. 아프면 아프다, 슬프면 슬프다 하고.”
병간호 속에서도 행복을 마주했다
우순실은 1991년에 결혼하면서 가수로서의 삶을 접는다. 그리고 첫째 아들이 시한부 뇌수종 판정을 받자 이후 13년 동안 함께 투병생활을 한다. 천생 가수였던 그녀가 대중의 시야로부터 멀어졌던 시간이다. 그때 그녀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수가 노래를 놓고 있을 때, 괜찮을 리는 없죠. 아쉬웠죠. 그러나 아이를 순탄하게 키우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있었어요. 어느 날 시댁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오백년’을 부르는데, 감정이 안 살더라고요. 그 순간 행복한 상태에서는 한스러움이 표현되질 않는구나 했어요. 그러니까 그때는 나름 행복하고 만족했던 거예요.”
우리가 보는 그녀의 삶의 굴곡은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그런 삶과 고통을 덤덤하게 받아들인 것 아닐까. 어쩌면 그 마음의 크기야말로 그녀가 가진 천성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있을 자리는 저 자린데 하면서도 옆에 아이가 있는 게 보이면 지금 할일은 이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죠. 늘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었겠다’면서 위로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저는 제 앞에 놓인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죠. 그리고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도 덜해요.”
많이 겪은 자의 성숙함
인터뷰를 하던 도중 그녀가 잠깐 판소리의 한 대목을 가볍게 불렀는데 그 목소리의 맑음에 놀랐다. 동안만큼이나, 노래 실력만큼이나, 그녀는 세월의 변화에 초연한 듯 보였다.
“1982년에 데뷔를 했으니 벌써 37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어찌 보면 그때 노래한 걸 들어봐도 애늙은이 같았죠.(웃음) 감정이 막 요동치는 게 아니라 그냥 평행선이었어요. 어릴 때도 초월해서 살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친구들이 캔디 만화에 열광하고 로맨스에 빠질 때 저는 교정 벤치에 혼자 앉아 상념에 잠기고 고독을 씹는 애늙은이 같은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녀가 대학교 1학년 신입생 환영회 때 부른 노래도 ‘한오백년’이었다. 그녀의 안에 그런 한과 우울이 많았던 때였다.
“지금은 더 밝아지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었죠. 뭔가 많이 겪은 자의 예전과는 다른 성숙함이라고나 할까요.(웃음)”
사소한 달콤함에 감사
‘뭔가 많이 겪은 자’ 우순실이 도달한 깨달음은 나 자신의 소중함이다. 그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노래할 때도 컨디션이 좋은 사람은 장비 탓을 안 해요. 내 상태가 좋으면 생마이크에서도 노래가 잘 나오죠.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밝은 에너지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상대가 뾰족한 사람이라도 품을 수 있는 포용심이 생기니까요.”
그녀가 둘째 딸과 셋째 아들에게 하는 말도 이와 같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게 첫 번째다, 친구관계가 고민될 때는 너 자신을 사랑하면 된다’고 말해줘요. ‘지금 관계가 꼬여 힘들다면, 그런 자신의 힘든 마음을 먼저 알아줘라, 자신을 위로하는 게 우선이다’라고 말이죠. 그런 일은 상대와 나와의 문제 같지만 실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충돌이에요.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면 상대방과의 문제가 별것 아님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람과의 관계는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친구와의 갈등이 빚어지는 것은 대부분 상대에게 기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마음만 충만하다면 상대가 나를 사랑하든 안 사랑하든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사실 나 자신은 생각보다 더 큰 에너지를 갖고 있는데 세상사에 치여서 작아지잖아요? 명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정말 맑고 순수한 모습이 보여요. 그걸 발견할 때 충만함 그 자체를 느끼게 되죠.”
혼자여서 너무 좋다
홀로 지내는 그녀는 남는 시간에는 이것저것 공부하며 음악 연습과 요가를 한다. 꾸준히 하고 있는 요가는 그녀가 심신이 고달팠을 때 선배 가수가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권해서 시작했다. 그녀에게 요가 시간은 곧 에너지가 충전되는 시간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노래의 힘과 호흡 등을 좋아지게도 하고요.”
그녀는 자신이 혼자라서 좋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냐고 묻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아주 자유롭고 좋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 자신을 더 충만하게 채울 수 있으니까요.”
시니어 중에는 유독 고독을 심하게 느끼며 마음을 나눌 친구를 찾는 이가 많다. 그녀가 혼자 잘 지내는 비법은 무엇일까?
“어차피 인생은 외로운 거예요. 같이 살아도 외롭죠. 그러니 인간은 고독하다는 걸 전제하면 그런 감정에 연연하지 않게 돼요.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해야 좋죠. 그리고 나를 위한 선물을 해야 해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걸 하는 게 좋아요. 저에게는 그게 음악, 요가, 힐링, 집안청소 등인 거죠.”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새로운 여정
우순실은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가수를 하겠다며 존 레논처럼 인류가 살아가는 데 메시지를 주는 힐러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마침 그녀는 얼마 전 전영록에게서 곡을 받아 새 앨범을 발표했다. 타이틀 곡은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봄날을 연상케 하는 어쿠스틱함이 강조된 발라드 곡이다.
“원래 받을 곡은 이 노래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전영록 선배님이 우순실에게 곡을 줘야겠다 해서 녹음을 하게 됐는데,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불러봤는데 바로 선배님이 ‘이건 네가 불러야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서 열몇 곡 중 일곱 곡을 추려 앨범을 만들었어요.”
그녀는 오는 4월 26일 여의도 마리나에서의 디너쇼 콘서트를 시작으로 6월까지 공연 스케줄을 잡아 놨다. 그녀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관객과의 만남인 콘서트였던 만큼 그 소망을 이루는 시간이 될 것이다.
“저 사람이 노래하면 내가 뭔가 힐링이 되는 거 같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제 노래를 들으면서 위안이 됐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멋진 왕언니에게서 사랑스런 여성의 모습도 보인다. 당차고 또 열정적이다. 1990년 이후 30년 만에 다시 노래 부르는 신인처럼 그녀는 눈빛을 반짝였다.
2018년 1월 1일. 짝지의 60세 생일이다. 이제는 헤아리기도 버거운 시간을 지내왔다는 사실이 낯설다. 그 많은 시간 무엇을 하며 지냈을까? 어쩌다 보니 같이한 세월도 34년이다. ‘인생 금방’이라는 선배들의 푸념이 실감나는 요즘이다.
그 시절 데이트는 대부분 ‘두 발로 뚜벅뚜벅’이었다. 좋아서 걷고, 작업하려고 걷고, 돈이 없어서 걷고, 사색하느라 걷고. 애꿎은 다리만 중노동하듯 시달렸다. 남자 친구가 학교에서 여자 친구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 주다가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잤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남산, 능동 어린이대공원, 경복궁, 덕수궁, 동숭동, 인사동, 명동, 북한산, 수락산, 소요산 등등 참 많이도 걸었다. 그중 최고는 조국순례대행진! 8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출발한 대학생들이 한곳에 집결해 광복절 기념식을 하는 국가적 행사였다. 학교당 4인 1조로 참여하는 이 걷기순례에서 많은 추억과 인연이 만들어졌다.
필자 팀은 김천에서 출발해 청주까지 꼬박 14박 15일을 걸었다.
8월 한여름 태양을 머리에 이고 걷던 수많은 청춘의 진한 땀 냄새가 가득했다. 필자 인생에서 더 이상 가보지 못한 길들이다. 50대에 시작한 등산에는 그 시절에 대한 로망이 묻어 있음을 본다. 특히 지리산 종주 산행은 그때의 용기를 떠올리게 하는 자조의 시간이기도 했다.
조국순례대행진 때 추억을 만들어준 몇몇 인연이 58년 개띠였다. 아삼삼한 기억을 돌려보면 온통 개판이다. 참가자들의 학번이 대부분 77, 78이었으니 말이다. 두 발 데이트에 딱 어울리는 것은 영화와 연극 관람이다. 국도극장, 대한극장, 명보극장,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동숭동 소극장, 덕수궁 옆 창고극장, 명동 소극장, 장충동 국립극장. 그 이름만으로도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DJ의 에코 멘트와 리퀘스트가 있던 음악다방. 어둠침침했던 레스토랑! 서양 필이 나던 커피 맛! 공강시간이면 내 아지트처럼 달려갔던 구석진 그곳! 학교 주변 호프집과 시장통 선술집 기억은 거의 없다. 그 주님(?)과 친하지 못한 관계로 특별한 에피소드도 없다.
그 시절 인기 있는 장소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있다. 바로 동네마다 들어서 있던 작은 서점과 만화방이다. 서점도 데이트 장소로 인기였다. 필자의 취미이자 특기인 독서는 만화책 읽기와 연애시집 사기에서 시작됐다. 가끔씩 집 정리를 하다가 발견되는, 자식 나이보다 더 오래된 누런 책을 아이에게 권해본다.
레코드판도 서점에서 구입했던 것 같다. 용돈 아껴 한 장씩 사 모았던 LP판. 이제는 골동품이 되었다. 서점 한쪽에 LP판을 매입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추억을 팔 수는 없다! 하고 간직하고 있지만 보관이 어려워 애물단지다. 최근 턴테이블을 찾아 모양을 갖춰봤다. 어느 날 한 번은 꼭 틀어볼 셈이다. 옷과 가방을 구입할 때는 명동이나 이대 앞, 동대문시장이 최고였다. 전자제품은 세운상가나 용산전자상가로 갔다. 그러고 보니 당시 핫 아이템이었던 소니 워크맨을 사러 신촌 미제시장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들어갔던 당구장은 남자들과 담배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금녀의 공간이라기에 분위기가 어떨지 조금 궁금했는데 딱히 충격적이거나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없었다. 40대 초반에 배운 포켓볼. 담배 냄새 없는 집 근처 당구장을 찾아 열공했던 시절도 있다. 주인장은 온종일 당구장에서 큐대를 들고 낑낑대는 필자를 보고 “아줌마! 밥하러 안 가세요?” 했다. 그러면 “밥 미리 해놓고 왔어요~” 했다. 그것도 벌써 20년 전 일이다.
그 시절은 포크송이 대세였다. 송승환과 왕영은이 사회를 보던 1980년대 인기 음악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서 이어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 해변가요제의 등장으로 누구나 한 번쯤은 통기타 메고 가요제 참가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필자도 길거리에서 밴드 보컬 제안을 받은 쑥스러운 기억이 있다. 교내 축제 공연이 있던 날, 술자리에서 급조된 짝지네 팀 밴드는 딕패밀리의 곡 중에서 신중하게 ‘나는 못난이’를 간택(?)해 참가했다. 공연하는데 전기가 나가 비록 앰프와 마이크는 꺼졌지만 젊은 혈기는 청춘의 생목으로 끝까지 완창하는 투지를 발휘했다. 과 동기의 의리로 베이스 담당 짝지에게 꽃다발 들고 응원을 갔건만 노래 제목처럼 되어버린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재미나다. 결과와 무관하게 지난 시간들은 모두 그리운 추억이 된다.
이제 그 청년은 한쪽 어깨에 통기타를 메고 ‘동해 하조대해수욕장’이라는 간판을 배경으로 빛바랜 사진 속에 서 있다. 나팔바지에 청재킷을 걸치고 긴 머리를 쓸어 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혈압을 조심하는 육순의 장년이 되어 있다.
필자는 견공(犬公) 세 분과 산다. 12세 레드 닥스훈트와 2세 믹스 유기견, 그리고 58개띠 짝지 그분이다. 34년을 동고동락한 그분과의 세월보다 선한 눈빛과 따스한 체온, 변함없는 신뢰의 견공 두 마리에게 더 맘이 간다.
‘호모 사피엔스 짝지 vs 거의 호모 멍멍이우스’
필자와 동종이신 그분은 두 마리 견공에게 질투와 부러움을 대놓고 내비친다. 무엇을 해도 ‘개판’이 된다며 툴툴대는 58개띠 짝지님의 씩씩 건재함에 감사를 보낸다.
“저기요~ 앞으로 남은 시간 사이좋게 지내봅시다!”
오카리나를 배우기로 했다. 나이 들면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으나 실행이 쉽지 않았다. 대학 시절 기타는 포크송 정도는 연주할 정도로 배웠으나 부피가 커서 들고 다니기가 불편하다. 오카리나는 부피가 작아 일단 마음에 들었다.
얼마 전 동네에 있는 ‘한국 오카리나 박물관’을 둘러봤다. 그래서인지 오카리나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낙원상가에 갔을 때 오카리나가 눈에 띄어 가격을 물었더니 초급용은 2만 원이라고 했다. 이 역시 구미를 당기게 한 것 같다.
먼저 낙원상가에 가서 초급용 오카리나를 샀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인데 자색으로 모양도 예쁘고 무게도 얼마 안 나가서 좋았다. 업주는 장삿속으로 자꾸 비싼 것을 권했지만, 초보 때는 무난한 것이 좋다고 생각해 2만 원짜리로 샀다. 자동차를 처음 운전할 때는 새 차보다는 중고차로 다뤄보는 것이 요령이듯 수준이 좀 나아지면 더 좋은 것을 사면 될 일이다.
제대로 학원에 가서 배우면 좋겠지만, 따로 시간 내기도 어렵고 모임에서 배우기로 했다. 마침 모임 구성원 중에 오카리나를 해본 사람이 몇 명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만져보는 오카리나가 익숙할 리 없다. 양손에 들어오는 사이즈가 작아서 좋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구멍을 보고 연주를 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작다는 느낌도 있었다. 다행히 운지법이 중형 카메라 쥐는 방식과 비슷했다. 왼손가락은 밑에서 올라와 받치고 오른손가락은 위에서 눌러 잡는 방식이다.
오카리나는 막힌 통 속에 구멍이 여러 개 나 있다. 뒤쪽 큰 구멍 세 개 중 밑의 것은 양손 엄지로 항상 막아야 한단다. 앞쪽 오른손가락과 왼손가락을 다 막으면 ‘도’ 음이 난다. 오른쪽부터 새끼손가락을 떼면 ‘레’, 새끼손가락을 뗀 채 약지를 떼면 ‘미’, 중지까지 떼면 ‘파’, 검지까지 떼면 ‘솔’ 음이 난다. 왼손 새끼손가락은 고정으로 구멍을 막고 약지를 떼면 ‘라’, 중지를 떼면 ‘시’, 검지까지 떼면 ‘도’ 음정을 낼 수 있다.
다른 악기처럼 음을 짚는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떼어줘야 하기 때문에 좀 헷갈렸다. 연습을 많이 해야 익숙해질 것 같다. 특히 왼손 약지는 평소 쓸 일이 별로 없어 떼는 것이 순조롭지 않았다. 손가락을 쥐는 방향으로만 많이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반복하며 연습했고 반대로도 해봤다. ‘도미솔’은 기본 연습에 들어간다. 유치원 때 배우는 노래 '똑같아요'가 연습하기 좋은 곡이라 연주를 해봤다. 요즘엔 ‘오 필승 코리아’도 연습하고 있다.
모임에서 일주일에 한 번 한 달 과정으로 ‘등대지기’와 ‘연가’를 단체로 연습하기로 했다. 초급 오카리나로 연주하기 좋은 곡이란다. 아직 악보를 보고 연주할 정도는 아니다. 일단 기본 음계만이라도 편하게 낼 수 있도록 꾸준히 연습할 작정이다.
문제는 연습 장소다. 집에서 연습하면 소음 때문에 당장 주민들이 항의가 들어올 것이다. 산속에 들어가서 하거나 고수부지에나 가야 연습할 수 있는데 엄동설한에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7080세대’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세대를 말한다. 필자는 71학번이므로 ‘7080 세대’의 선두에 서 있다. 1970년대에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했다. 그 사이에 군 복무를 마치고 취업과 결혼까지 했다. 아이 낳고 열심히 가족을 먹여 살리다가 퇴직하고 이제 환갑을 넘어 칠십고개를 향해 가고 있다. ‘7080 세대’에서 빠르면 60대 중반이고 마지막 세대는 50대 초반이다.
필자가 졸업하던 무렵에는 취업이 잘되던 시기다. 기업들도 한창 사업을 확장하던 시기라서 1980년대 말에는 오히려 구인난에 허덕였다. 직장에서는 승진 바람이 불었고 증권, 부동산 등 모든 것이 순풍에 돛 달고 잘나가던 시기라서 노후 준비도 끄떡없었다. 그래서 퇴직한 시니어도 여유 있게 노후생활을 즐겼다. 퇴직은 했지만 하나의 소비 주체로서 인정도 받았다. 그래서 7080 TV 프로그램이나 7080 노래방 등은 이 세대를 인정하는 대명사처럼 불렸다. 1970년대에 포크송과 기타가 등장해 문화적으로도 독특한 세대가 되었다.
그런데 요즘 ‘7080’ 대신 ‘8090’이라는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세대 대신 199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세대가 주류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간판들은 주로 단란주점 등 라이브 술집에서 사용하는 상호다. 70세대면 현재 60대 중반이다. 필자 주변에는 단란주점에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술 마시는 사람도 찾기 어렵다. 건강상의 이유로 고기도 끊고 술을 끊은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러니 70세대가 자연스럽게 빠지게 된 것 같다.
강남역 등 새로 생긴 번화가의 도로변은 10~20대 차지다. 도로변의 가게들은 온통 이 세대를 상대하는 업종이다. 골목 상권으로 들어가면 나이 차가 10년쯤 나서 고객층이 30~40대다. 또 그다음 안쪽 골목에는 50대 이상 시니어가 좋아하는 메뉴의 음식점들이 있다.
양재역 부근은 그나마 덜 북적대던 곳이다. 그런데 최근에 가 보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양재역 사거리 남쪽 부근 골목에는 70세대가 가기 좋은 만만한 음식점이 모여 있었다. 초입에 큰 막걸리 집이 있어 필자도 자주 갔다. 그런데 그 집이 횟집으로 바뀌어 고객이 젊은 층으로 바뀌었다. 이제 막걸리를 마시려면 양재시장 포장마차 같은 허름한 곳밖에 없다. 최근에 가 보니 골목 안쪽 깊숙이 막걸리 촌이 생겼다. 주요 소비층은 당연히 시니어다. 번화가에서 도로변은 젊은 고객들이 차지하고, 시니어는 안쪽 골목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런 변화가 많다 보니 아예 시니어가 모이는 지역이 따로 있다. 바로 종로3가 일대다. 탑골 공원 안이나 주변으로 주로 70대가 모인다. 음식점도 시니어가 좋아하는 메뉴에 값도 싸다. 도로 건너 국일관 주변도 그렇다. 국일관 건물에는 시니어가 좋아하는 당구장, 활어회 시장, 사우나, 콜라텍 등으로 차 있다. 주변에도 전통 먹거리가 많다. 종로3가는 20대가 몰리는 익선동, 30~40대가 몰리는 종로3가 5번 출구와 3번 출구 사이에는 포장마차들이 많다. 소비 주체에 따라 상권도 바뀌는 것이다.
낙원상가는 서울 종로 3가 탑골공원 뒤에 있다. 종로 3가 사거리에서 안국동으로 가는 남북 도로가 낙원 상가를 통과한다. 질주하는 차 소리가 시끄럽고 컴컴해서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길이다. 그런데 건물 밑으로 난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인사동이다. 나지막한 건물만 있는 인사동에서도 그래도 번듯한 고층 건물들이 있는 동네로 이어진다. 인사동에 자주 다니는 사람들도 이 길을 경계로 탑골공원 쪽은 으슥하고 허름해서 안 간다고 한다. 한옥이 줄지어 있는 익선동도 이 건물을 경계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원래는 이 자리가 낙원 전통시장이 있던 자리이다. 서울시에서는 종로3가 사거리에서 안국동으로 도로를 내고 싶은데 수많은 시장 상인들의 삶터이니 철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도로도 건물 1층으로 통과하게 내고 시장은 낙원상가를 지어 지하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래서 낙원상가 지하는 전통시장에서 파는 생선가게, 정육점, 옷 가게 등 도심 속의 전통시장 모습을 그대로 하고 있다. 지상에 안 보이기 때문에 인근 통인시장처럼 세인의 관심을 못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낙원상가는 나름대로 도시의 명물로 거듭났다. 1960년대에 주상 복합건물로 지어진 건물로 청계천의 세운 상가, 홍제동의 유진상가처럼 그 당시에는 알아주는 대형 건물이었다. 세운 상가처럼 철거 위기까지 처했던 이 건물이 지금은 미래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낙원상가 건물은 15층 건물로 6층부터 15층까지는 낙원 아파트이다. 5층이 사무실이고 4층이 옛 허리우드 극장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젊은 극장’이라 하여 ‘낭만 극장’과 ‘실버 영화관으로 변모했다, 입장료 3천원으로 고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상영하여 마지막 상영이 오후 6시 무렵이다. 그전에는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대형 캬바레도 있었다.
악기상가가 된 것도 흥미롭다. 건립 당시 마침 종로 일대 정비 사업으로 악기 상들을 철거했는데 그때 철거된 가게들이 낙원상가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 경험으로 서울시가 황학동 풍물시장을 신설동 한 건물로 몰아넣은 것이나, 청계천 공구상들을 장지동 가든 파이브로 유도한 것처럼 비슷한 업종은 한 건물로 몰아넣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70년대에는 포크송 시대였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통기타 하나쯤은 만질 줄 알던 시대라서 기타가 잘 팔렸다고 한다. 지금도 초급용 통기타는 10만 원 선이면 살 수 있다. 고가의 기타들은 몇 벡만 원 한다. 그 당시부터 교회 밴드도 급속도로 성장하여 악기 수요가 많았다. 1980년대는 통금이 해제되고 아시안게임, 88올림픽 특수로 흥청망청하던 시대였다. 인근에 요정이 많아 라이브 밴드의 수요가 폭증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악기는 물론 낙원상가는 음악인의 동네로 밴드 공급 역할도 했다고 한다. 90년대에는 노래방이 급속도로 보급되면서 라이브 밴드의 수요가 줄어들고 금융위기까지 덮쳐 낙원상가도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시봉 열풍, 아이돌 인기 등에 힘입어 다시 복고풍이 불면서 안정적인 위치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가게들이 환하게 정비되고 화장실도 깨끗해졌다. 주변 탑골 공원 주변은 허름하고 복잡하지만, 악기 상가는 쾌적한 분위기라서 돌아볼 만 하다.
필자는 가수 김광석을 잘 알지 못했다. 그가 그룹 ‘동물원’으로 데뷔한 시기가 1984년이었는데 그 당시 필자는 서독지사 주재원으로 나가 있었다. 한동안 한국 대중가요를 듣지 못하고 지내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와 노래교실에 다니면서 가수 김광석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노래는 소위 기타 치며 젊음을 구가할 때 한창 부르던 포크송에서 잠시 발라드로 갔다가 걸 그룹, 아이돌 시대로 가면서 발라드가 반짝 했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노래가 칠팔십년대 노래인데 엄격히 얘기하면 1970년대는 포크송이고 1980년대는 발라드 시대였다. 그래서 지금도 1980년대 노래를 부르면 대학 시절을 끝으로 노래를 안 하던 1970년대 세대들은 신곡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필자도 노래교실에 나가기 전에는 그랬다.
김광석은 주옥같은 노래를 많이 불렀다. 정서적으로도 우리 세대와 잘 맞았다. 가수 김광석은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이지만, 따라 부르기 어려운 다른 가수들과 달리 부르는 사람에 따라 맛도 다르고 소화해내기도 무난했다. 사람 생김새나 하는 행동도 텁텁해서 좋았다.
김광석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상영관이 많지 않아 애써 찾아가서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 평점이 10점 만점에 9,2점으로 높다. 이상호 기자가 만든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다. 제2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특별언급상을 수상했고 제12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공식 초청작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답게 김광석 사후 20년 동안 김광석의 노트, 녹취, 공연 장면 등을 세세히 담았다. 김광석의 노래를 제대로 들을 겸, 김광석의 일대기 정도로 생각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정작 김광석 노래는 ‘서른 즈음에’, ‘먼지가 되어’, ‘사랑했지만’ 정도밖에 안 나왔다. 김광석은 자작곡이 많은 싱어송라이터인데 판권을 미망인이 쥐고 있어서 부득이 김광석 작사 작곡이 아닌 노래들만 나왔다고 한다.
김광석은 1996년 1월, 32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영화는 김광석이 자살할 이유도 없고 자살할 정황도 아니라고 말한다. 부모, 친척들도 모두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당시 유일한 목격자는 미망인이었는데 미망인 말만 듣고 경찰이 자살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초동 수사가 미진해 확실한 증거를 못 잡았고 99% 심증은 있는데 1%가 부족해 아직 진실을 못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건들 때문에 최근 공소시효를 없애자는 운동까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마음이 무거웠다. 김광석 사후 20년이 지났는데도 김광석의 노래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얼마 전 대학로에 있는 극장 ‘학전’에 가서 김광석의 흔적을 보고 왔다. 가을에는 대구에 있다는 김광석 거리에도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