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패럴림픽 개회식, 손을 흔들며 입장하는 우리 선수단 모습에서 한국의 자부심과 아름다움이 뿜어 나왔다. 은은한 분홍빛의 훈색 저고리 자켓과 대님바지, 호랑이 문양과 금빛 동정까지, 유니폼 곳곳에 우리 전통의 멋스러움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수단 단복은 전통적인 기존 스타일에 편안함을 더했다.
최근 한복은 전통한복과 개량한복으로 단순하게 나뉘던 과거와 달리, 신(新) 한복, 패션 한복, 모던 한복 등 다양한 이름과 디자인으로 세분화되고 있다. 이 중 시니어들을 사로잡는 키워드는 바로 ‘생활한복’이다.
생활한복은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 한복을 재해석했다. 한복이 대중화하고 생활화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비단저고리 대신 한복셔츠와 한복자켓을, 긴 속치마 대신 허리치마와 원피스로 부담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최근 생활한복이 패션계와 의류산업에서 관심을 받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생활한복? 개량한복과 뭐가 달라?
‘생활한복’은 이전부터 ‘개량한복’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하게 알려져 있다.
생활한복과 개량한복은 전통한복을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맞춰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바꿔 입는 한복이라는 점에서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용어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근대화를 맞이해 한복의 실용성과 변화를 강조하면서 ‘개량한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개량’이라는 용어는 ‘나쁜 점을 보완해서 고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개량한복이라는 단어는 ‘뭔가가 나빠서 고친 한복’이라는 의미를 담게 된다. 개량한복의 출발점인 전통한복은 불편함이 있을 뿐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량한복’은 지양해야 하는 용어로 인식됐다.
‘생활한복’이라는 용어는 1990년대 중반부터 여러 사람들이 쓰기 시작하다가 1996년 12월 문화체육부가 ‘한복입기’를 추진하면서 공식용어로 지정했다. 생활 속에서 편하게 입도록 한 한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상복으로 생활화하는 '생활한복'
최근 생활한복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끈 대표적인 대중스타는 총 23개의 기네스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세계적인 그룹 ‘방탄소년단’(BTS)이다. 이 그룹은 지난 2018년 발표한 ‘아이돌’(IDOL) 뮤직비디오에서 전통 기와 무늬를 새겨 넣은 퓨전한복을 의상으로 선택했다. 이후에도 멤버 슈가의 솔로곡 ‘대취타’의 뮤직비디오, 2020년 9월 출연한 미국 NBC 인기 프로그램 ‘지미 팰런쇼’에서도 한복을 선보이며 한국의 멋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화려한 무대의상으로 쓴 한복 외에도 일상에서 생활한복을 입으면서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 2019년 멤버 정국은 일본 오사카 공연을 위해 출국 시 생활한복을 입고 공항에 나타났다. 수많은 취재진들 앞에서 ‘사복패션’으로 생활한복을 선보이며, 한국 전통의상의 편리함과 멋을 전 세계에 홍보한 셈이다.
지난 8월 24일 2020 도쿄패럴림픽 개막식에서는 우리 선수단이 한복 유니폼을 입고 등장하면서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올림픽 역사에서 처음 선보인 한복 유니폼이다. 한복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면서도 편안해 보이는 단복은 우리 선수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한복은 특별한 사람이 특별한 날에만 입는 ‘행사복’의 특성이 강하다. 그런데 최근 생활한복은 이런 개념을 넘어 실제 일상에 가까워지며 친숙해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와 교육부는 지난 2019년 2월부터 업무협약(MOU) 체결해 ‘한국교복 보급 사업’을 진행했다. 이를 통해 2020년에는 강진 작천중학교와 예천 대창중학교 등 16개 학교 2300여 명이 한복교복을 입었다.
또 문체부와 한복진흥센터는 한복의 생활화와 시장성을 넓히기 위해 지난 2020년부터 한복근무복을 개발했다. 문체부는 지난 5~6월에 문화역서울284 아르티오에서 한복근무복 전시회를 개최하고, 한복근무복으로 한복 생활화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한복근무복은 일반 국민 또는 관광객과 만날 기회가 많은 문화예술기관에 시범적으로 먼저 보급하고 있다. 이후 여행업·숙박업 등 근무복을 통해 한국적 이미지를 알릴 수 있는 기관과 단체 등과 협업해 순차적으로 보급 대상을 확대할 계획이다.
떠오르는 생활한복, 인기 비결은?
생활한복 대표 브랜드 ‘돌실나이’의 김남희 대표는 최근 나타나고 있는 생활한복에 대한 뜨거운 인기 이유로 ‘K-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꼽았다.
K-팝을 중심으로 우리 문화가 세계로 확산하며 K-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자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에 한국인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드러내고, 한국 문화를 세계적으로 더 알리려는 바람에서 우리의 전통의상인 한복을 더 찾고 있다는 설명이다.
영향력이 큰 한류스타들의 한복착용은 더 큰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글로벌 인터넷 검색 추이를 나타내는 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지난 2020년 6월 말 기준 전 세계 ‘한복(Hanbok)’을 키워드로 검색한 횟수가 최근 1년 중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유명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가 뮤직비디오에서 한복을 선보인 ‘How You Like That’이 발매된 직후다. 블랙핑크의 한복 착용이 평균적으로 45점에 불과했던 검색 점수를 100점까지 급증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정국의 생활한복 패션 역시 파격적인 연쇄효과를 일으켰다. 정국이 입은 생활한복 브랜드 ‘지장사’는 정국의 공항패션이 공개된 이후 공식 온라인 쇼핑몰 서버가 다운됐으며, 한 달 이상 배송이 지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최근 연이은 ‘동북공정’ 논란도 생활한복 열풍에 영향을 미쳤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자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2002년부터 추진한 역사, 문화 왜곡 연구 프로젝트다. 중국 정부는 한국 고대사와 한국 고유 문화를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편입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하며, 지속적인 논란을 만들고 있다.
지난 2020년 중국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한 인플루언서가 “한복이 중국 한족의 전통의상인 ‘한푸’를 베꼈다”는 주장을 펼쳐 공분을 일으켰다. 이어 중국 누리꾼들은 “한국 전통 문화에는 명나라 양식의 유물이 남아 있으며, 의류 문화 유물은 중국과 같다”며 “이것이 한복의 역사적 진실”이라고 주장하며 한복을 중국 문화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 논리를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20년 방영된 중국 명나라 배경의 한 중국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갓과 망건을 쓰고 나왔다. 같은 해 중국에서 제작한 모바일 게임에서는 한복을 중국 전통 의복이라 소개하면서 역사를 왜곡하기도 했다.
이러한 동북공정은 국내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에 더 큰 불을 지폈다.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은 지난 6월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있는 대형 전광판에 김영진(차이킴) 한복 디자이너가 제작한 한복이 담긴 광고를 띄웠다.
이 같은 중국의 부당한 논리로부터 ‘K-컬처’를 지키고 한복 알리기에 대중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내 누리꾼들은 SNS에 한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공개하는 ‘#한복챌린지’를 잇따라 올리며, 한복이 한국 고유 문화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렸다.
대중의 이러한 관심은 국내 SPA(제조·유통 일괄) 브랜드 최초로 생활한복을 출시한 ‘스파오’의 신제품으로 이어졌다. 지난 6월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인 와디즈에 따르면 스파오의 생활한복은 펀딩 목표치의 1만7000%에 달하는 펀딩액을 받을 정도로 대중으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처럼 생활한복은 업계와 대중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돌실나이의 김 대표는 “국가 경쟁력은 우리 문화에 대한 정체성과 애정이 뚜렷할 때 생긴다”고 말했다. 생활한복이 대중의 관심이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뛰어 넘어, 우리 문화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과 정체성을 담아 세계로 퍼져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 Exhibition
◇앨리스 달튼 브라운 : 빛이 머무는 자리
일정 10월 24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지난 50년간 건물의 외부와 실내의 경계, 그리고 실내에 빛이 머무는 자리를 그려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해외 최대 규모 회고전이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 ‘미스티’, ‘비밀의 숲’ 등에 아트 프린트가 소개돼 인기몰이를 한 ‘황혼에 물든 날’(Long golden day)의 오리지널 유화 작품과 마이아트뮤지엄 의뢰로 제작한 신작 3점을 포함해 2~3m 크기의 대형 유화와 파스텔화도 소개한다. 이외에도 작가의 작품 활동을 총망라하는 작품 8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자연 소재와 인공 소재의 대비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작품은 빛과 물, 바람이 어우러진 청량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오디오 가이드와 도슨트를 운영해 작품의 이해를 높일 수 있으며, 어린이 대상 키즈 아틀리에와 시즌 이벤트 프로모션 등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아트 오브 뱅크시
월드투어 인 서울
일정 2022년 2월 6일까지 장소 갤러리아포레 더 서울라이티움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 ‘거리의 아트 테러리스트’ 등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행동하는 예술 세계를 관객들과 공유할 체험형 전시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다. 뱅크시는 사회·정치적인 문제와 예술의 허례허식, 미술계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로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도둑 전시와 길거리 그림 판매, 아트 테러, 다큐멘터리 연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잠식된 예술계를 조롱했다. ‘뱅크시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 그가 누군지 안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로 뱅크시의 정체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이러한 익명성 덕분에 불평등하고 억압된 세상에서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자유롭게 담아 표현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 칭해온 뱅크시는 디스토피아 같은 장소에 그래피티 예술을 그려 넣음으로써 우리가 처한 현실을 풍자한다.
● Book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노부토모 나오코·시공사)
늙어가는 부모가 가장 두려워하는 병은 ‘치매’다. 자식에게 끝을 알 수 없는 부담을 지게 하는 건 어떤 부모든 피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 노부토모 나오코의 어머니도 그랬다. 완벽한 주부이자 자랑스러운 어머니였던 그녀는 딸에게 뜻밖의 새해 인사를 전한다. “올해는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영상감독인 노부토모 나오코가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아버지의 애틋한 나날을 기록한 에세이다. 치매 전후로 질병 당사자, 가족,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생활이 어떻게 바뀌는지 여과 없이 보여준다.
책은 치매를 슬프고 비참한 것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치매 진단을 받은 85세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돌보는 아버지. 딸은 카메라를 통해 부모님을 바라보며 비참했던 일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치매 할머니와 귀먹은 할아버지의 맞물리지 않는 어긋난 대화는 훈훈하고 사랑스럽게도 느껴진다.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고, 아버지가 간병에 뛰어들며 외부의 도움을 거부하던 노부부는 사회와 다시 연결된다. 이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전개하는 이 에세이는 우리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화와 질병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편, 가족과 돌봄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준다.
저자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인간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저자의 간병 경험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의 인생이 질병으로 정의되거나 기억될 수 없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 늙고 약해지며, 결국 서로에게 의존해야 하는 연결된 존재라는 걸, 간병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상호 돌봄이라는 걸 알려준다.
◇보험, 인문학에 빠지다 (이경재 저·바른북스)
보험은 이제 필수품이 됐지만 아직 보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다. 30여 년 동안 보험을 연구하고 강의한 저자가 보험을 인문학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보험의 새로운 가치를 알려준다.
◇데카메론 프로젝트 -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마거리 애트우드 외 28인·인플루엔셜)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던 14세기, 액자 소설 ‘데카메론’이 사람들을 위로했다. 700여 년 전 ‘데카메론’을 재현하기 위해 ‘뉴욕타임스’가 세계 각지 작가들의 단편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장명숙·김영사)
한국인 최초 밀라노 패션 유학생, 이탈리아 정부 명예기사 작위 수여자, 구독자 87만 유튜버 밀라논나의 인생 내공을 담은 에세이.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에게 위안과 희망의 언어를 전한다.
● Stage
◇하데스타운
일정 9월 7일~2022년 2월 27일
장소 LG아트센터
연출 박소영
출연 조형균, 박강현, 시우민, 최재림, 강홍석, 김선영 등
제73회 토니어워즈 최우수 작품상, 제62회 그래미어워즈 최고 뮤지컬 앨범상에 빛나는 최고의 무대가 한국에서 최초로 펼쳐진다. 극작과 작곡·작사를 맡은 아나이스 미첼의 동명 앨범을 극으로 만든 ‘하데스타운’은 2016년 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인 후 뮤지컬 애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작품이 됐다. ‘하데스타운’은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지하 세계로 향하는 오르페우스, 사계절 중 봄과 여름은 지상에서, 가을과 겨울은 지하에서 남편인 하데스와 보내는 페르세포네의 이야기가 지상과 지하 세계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사랑했어요
일정 10월 31일까지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임영근
출연 조장혁, 정세훈, 성기윤, 고유진, 홍경인, 김용진 등
독보적인 음악 세계로 대중을 사로잡은 故김현식 주크박스 뮤지컬 ‘사랑했어요’가 광림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故김현식은 한국적 언더그라운드 스타일을 제시했다는 평가받는 싱어송라이터다.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같은 명곡들을 편곡을 통해 되살린 그의 음악이 다시 한번 세대를 뛰어넘는 감동을 선사한다.
◇카포네 트릴로지
일정 9월 14일~11월 21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연출 오루피나
출연 이건명, 고영빈, 박은석, 송유택, 장지후, 강승호 등
독보적인 갱스터 누아르 장르의 작품 ‘카포네 트릴로지’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3년 만에 관객을 만난다.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마피아 ‘알 카포네’가 주름잡던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렉싱턴 호텔 661호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선과 정의가 위태롭게 흔들리던 시대의 ‘안티 히어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탁월한 시대상 반영과 풍자, 위트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역사는 엄격하고 바르게 해석돼야 한다. 현대사의 격랑을 겪었던 시니어라면 더더욱 이렇게 느낄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멀리 있는 역사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다면 한층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역사의 빈 부분에 상상을 채워, 역사보다 더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영화를 소개한다. 이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다.
관상(The Face Reader, 2013)
양반가 자제였으나 역모의 혐의를 쓴 채 산속에 칩거하며 살던 천재 관상가 내경(송강호). 그는 관상 보는 기생 천홍(김혜수)의 제안으로 한양에서 관상을 보게 되고, 용한 관상쟁이로 이름을 날린다. 내경의 소문은 김종서(백윤식)의 귀에 닿고, 김종서로부터 사헌부를 도우라는 명을 받아 궁에 들어간 내경은 수양대군(이정재)이 역모를 꾀하고 있음을 알고 김종서를 도와 단종을 지키려고 한다.
영화 ‘관상’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다. 수양대군의 역모 세력과 단종을 지키려는 세력 사이에 어느 관상가가 개입했다는 설정을 담은 영화다. 조선의 운명을 바꾸려는 관상가 내경과 ‘이리의 상’을 하고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가 수양대군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과연 내경은 관상을 통해 사람의 운명을 넘어 시대를 읽어낼 수 있을까.
왕의 남자(King and the Clown, 2005)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은 연산(정진영)과 그의 애첩인 녹수(강성연)를 풍자하는 놀이판을 벌여 한양의 명물이 된다. 하지만 왕을 희롱한 죄로 의금부로 끌려들어 간다.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잖소! 우리가 왕을 웃겨 보이겠소!” 공길과 장생의 놀이패가 보인 공연이 흡족했던 연산은 광대들을 궁 안에 둔다. 궁에 들어온 광대들은 탐관오리를 풍자하는 공연을 해 중신들의 미움을 사고, 그들을 쫓아내려는 계략에 휘둘리고 만다.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는 미천한 광대 신분으로 왕에게 간언했다가 참형 당한 ‘공길’이라는 인물에 관한 짧은 기록이 있다. 이 한 줄 기록으로 영화 ‘왕의 남자’가 탄생했다. 공연과 관료들에 대한 일갈의 경계선에 서 있는 광대들, 폭군으로 알려졌지만 생모를 잃어 슬픔에 잠긴 왕. 연출, 각본, 연기, 음악까지 모든 면에서 수작으로 꼽히는 ‘왕의 남자’는 저마다의 슬픔을 지닌 인물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광해, 왕이 된 남자(Masquerade, 2012)
광해군 8년, 2월 28일.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는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라는 글귀가 남아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 광해군 15일간의 행적은 영원히 사라졌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불안함으로 난폭해지던 광해(이병헌)는 도승지 허균(류승룡)에게 자신을 대신해 위협에 노출될 대역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는 광해가 쓰러진 15일간 왕과 똑 닮은 저잣거리의 만담꾼 ‘하선’이 왕의 역할을 대신했다는 상상에서 출발한 영화다. 광해군과 하선을 동시에 연기하며 눈빛과 말투가 순간순간 달라지는 이병헌의 연기가 압권이다. 영화는 가짜지만 진실하게 백성을 위했던 하선과 사대주의에 빠져 잇속만 챙기려는 관료들의 대비를 통해 누가 진짜로 ‘가짜’인가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2004년 2월 28일 난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유는 40년간 몸담아 온 직장을 하루 아침에 쫓겨나다시피 잃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부터 교육계에 퍼진 정년 단축이 내게 먼저 닥친 것이다. 그렇다고 난 미리 준비한 계획은 전연 없었다. 만 61살 일손을 놓기에는 빠른 나이다. 당장 내일부터 할일이 없다. 가진 기능이나 특기도 없고 남과 같이 기운이 세거나 막노동을 할 정도의 힘도 없다. 또 바둑이나 장기, 화투 등 오락도 취미도 없고 내놀만한 운동기능도 전연 없다. 오직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샛님같은 아주 여린 봄꽃같은 난 모든 일에 쓸모가 없었다.
퇴직 후 생활은 기상하여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전철을 타고 종점에 도착해 값싼 점심과 목욕이 전부며 할 일이 없이 멍하니 약장사 구경만 종일토록 관람하며 흘러간 유행가에 젖어 마실 줄 모르는 막걸리 한 두잔에 취하거나 해져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러길 몇달째 참다참다 폭발한 아내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살바에는 다 죽자고” 짜증을 낸다. 이러길 수차례 어느날 울분과 흥분을 참지 못한채 길거리를 방황하는 난 가슴이 답답하여 길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지나가는 고등학생의 신고로 119가 몇분만에 도착하여 난 분당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평생 처음타본 응급 앰뷸런스에 계속 말을 시키는 간호원 구급대원의 봉사에 처음으로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수분 후에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기본 검사와 링겔 등 응급처치를 받고 병실 구석 후미진 코너 침대에 눕혀졌다. 사방을 살펴보니 별별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방 목숨을 거둘 것 같은 나이든 할머니, 뼈만 앙상하여 마치 해골같은 머리가 흰 할아버지, 한쪽 발이 없는 중년의 남자, 울다지쳐 버린 갖난애, 거기다가 지독한 소독약 냄새.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온전한 것이 없었다. 아비규환 속 분위기에 젖기도 전에 난 담당 간호원에게 이제 멀쩡하니 퇴원하겠다고 말하니 반기는 기색을 하며 뒤늦게 찾아온 아내가 퇴원 수속을 해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집에 돌아와 시원한 내방에 누워 명상에 잠겼다. 병원에서 본 환자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내 나이 61세,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기는 너무 젊은 나이임을 실감했다. 뭔가 해봐야하고 한번 죽이되든 밥이되든 시도해 보고 후회해도 늦지않을 것 같아, 난 큰 결심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벼룩시장’, ‘교차로’ 등 길가에 비치된 정보지를 봤다. 내게 맞는 일감은 없었다.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친구와 만나 울분을 풀 셈으로 과천 서울대공원을 찾았다. 친구와 어울려 동물원을 걷는데 눈에 뜨인 광고판에 ‘한국에서 처음 시도하는 동물해설사’ 양성기사가 확 눈에 들어왔다. 난 친구에게 컨디션이 안좋아 먼저 간다는 핑계로 일찍 돌아와 동물원에 확인 전화를 했다.
나는 동물해설사이자 한 마리의 영리한 원숭이
“여보셔요. 거기 서울동물원 기획과죠. 동물해설사를 뽑는다는데, 나이 제한은 없나요?”
“어떤 서류를 갖추어야 하나요?”
난 급한 마음에 여러 가지 궁금한 문제를 애원하다시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다양한 서류를 갖추어 인터넷 접수를 했다. 다행히 서류전형엔 합격했다. 그뒤는 몇 주간 강습이었다. 강의 내용은 수많은 동물과 멸종위기의 동물 종보전, 자연생태계 복원, 인간의 탐욕으로 남획을 막고 인간과 공존하는 법 등 다양한 전문적인 교육이었다. 교육이 끝나면 필기시험과 면접 실연을 통해 실제 동물 앞에서 뭇관중이 보는 가운데 동물해설을 하며 최종선발을 거쳐 43명을 뽑는데 난 당당히 합격했다. 난 기뻐 날뛰면서 방안을 빙돌며 괴성을 질렀다. 아내가 놀라 날 쳐다보았다. 마치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 같았다.
이렇게 환희의 순간을 만끽한채 동물원의 출근은 계속되었다. 동물원의 일과는 날 새로운 변신을 꾀하게 했다. 이유는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그날 체험학습을 올 아동 수 대로 당근, 배추잎(케일), 사료 등을 손질하는 것인데 당근은 하나하나 씻어 크기가 알맞게 자른 뒤 바구니에 준비하며 물기를 닦는 것이다. 그리고 코스별로 해설을 하며 체험교육을 시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최고의 광대처럼 재미있고 교육적인 산 교육이어야 인기가 있어 환영받는다. 즉 해설 방법 및 내용은 이러하다.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셔요. 저는 동물해설사 xxx입니다. 제 별명은 영리한 원숭이구요. 오늘은 여러분을 남미 페루에서 많이 사는 기니피그 먹이주기, 다음엔 말, 나귀 다른 점 관찰, 다음에 사막에 사는 미어캣은 무엇을 즐겨먹나요? 여러분이 만약 이 침에 쏘인다면 생명이 위험하지만 이 동물은 즐겨먹는 전갈을 맛있게 먹지요. 다음엔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토끼 먹이주기, 꼭 장갑을 끼고 먹이를 줘야해요 하며, 케일잎과 배추잎을 잡는 법을 알려주고 다음엔 원숭이, 그리고 염소, 양 등의 특징을 설명하고 먹이를 주면 돼요. 먹이를 던지거나 동물을 귀찮게 하면 안돼요.”
머리를 흔들며 재롱을 떨고 나이 많은 노인답지 않게 귀여운 표정, 손짓으로 윙크를 날리며 분위기를 잡고 해설이 끝나면 지도일지를 깨알만한 글씨로 가득 채운 뒤 일과를 반성하고 정리한 뒤 귀가하는 것인데 이 생활이 어찌나 즐거운지 나의 즐거운 변신은 대만족이며 거기다가 듬직한 해설사 월급을 받는다. 도랑치고 가재 잡고 하듯이 건강챙기고 시간보내고 급료 받는 나이든 늙은이로는 최대한 대우며, 피복, 모자, 소지품, 간행물 등 다양한 혜택을 받아 최고의 나날을 보낸다. 정말 교직에 버금가는 변신이다. 나의 변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 변신을 준비하고 실천했다.
실패의 나날에서 난 성공의 열쇠를 찾았다
-모형항공(글라이더, 고무동력 입상 및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동물원 해설이 없는 쉬는 날의 무료함을 달래고 내 취미생활 건강을 위해 고심하던 어느날 난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 블랙이글 축하비행과 공군참모총장배 스페이스 첼린져 모형항공기 대회를 참관했다. 아주 멋진 행사며 이 늙은 나이에도 나도 참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다. 내 자신도 할 것 같아서 서울과학사를 찾아가 모형항공기 셋트를 구입했다. 설명서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만들었다. 밤을 새우면서 거의 완벽하게 조립하여 인근학교 운동장에서 시험 비행을 해봤다. 처음 만든 모형비행기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날고 체공 시간은 1분대였다. 몇 번을 날려봐도 아주 잘 날라서 기분이 아주 좋았고 자신이 생겼다. 이렇게 몇 번을 연습했다.
그리고 예선대회 즉 경기, 인천 예선대회가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에서 있었는데 그 대회에 참가했다. 내 차례가 되어 공군 보조원이 50m 후방에서 글라이더를 날려 주는데 왠지 몹시 서툴러서 믿음이 가지 않아 몇 번을 뒤돌아 보면서 뛰는데 글라이더가 영 상승을 하지 않고 왼쪽으로 “휙” 곤두박질하며 앞날개가 활주로 바닥에 부딪쳐 두동강이로 갈라져 1차 비행은 0점이었다. 난 당황해서 날개 조각을 회수하고 2차 비행 순서만 기다리고 있는데 남은 한 대 글라이더도 날개가 튼튼하지 못해 날개 중앙에 금이 가있었다. 급히 강력 접착제를 바르고 순서를 기다렸다.
두 번째 마지막 시합에서는 옛학교 과학주임이 와서 보조역할로 글라이더를 뒤에서 잡아주어 사수, 조수, 보조가 맞아 멋지게 바람을 가르며 높은 창공에서 선회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앞날개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망가진 채 공중에서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에 꼴아 박았다. 더 이상 기회도 없고 글라이더도 없어 퍽 아쉬웠지만 난 대강 비행기 잔해를 끈으로 묶어 보루지 박스에 쳐넣고 승용차편으로 귀가했다. 1년간 공들인 노력이 허사였고 그 공역과 재료비 등이 너무 아까워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무참하게 실패한 나는 집에 돌아와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노트에 기록하며 내년을 기약했다.
실패의 원인분석
◎ 모형 항공기가 튼튼하지 못해 쉽게 부서졌다.
→ 다른 참가자들은 낚싯대 카본으로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 재료 문제
◎ 견인자(사수)와 보조자(조수)의 싸인이 전연 안 맞음
→ 혼자만의 힘으로는 글라이더를 띄울 수 없음. 보조자 대동해야 함. : 보조자 양성
◎ 바람의 강약에 맞는 견인 연구
→ 견인 기술 부족. 연습이 필요함.
또 실패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또 재료 및 여러 가지 계측장비 등을 준비해야 함을 알았다. 또 기록이 좋은 모형항공기는 스마트폰에 사진을 찍어 살펴봤다.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한국 최고의 장인에게 사사 받았다. 그러니까 한국 모형항공의 대부 격인 경복궁 옆 동학과학 심xx 사장의 50년 이상의 노하우를 하나씩 익혀가며 모형항공기 킷트 공장제품을 이용하지 않고 수제품을 하나씩 만들었다. 즉 앞날개, 동체 수평, 수직꼬리날개 종이는 외제를 사서 가볍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음해에 대한 준비를 하나씩 진행했다. 제작 기술도 늘고 요령이 생겨 견인방법도 바람의 세기를 큰 연을 만들어 날리면서 익혔고 이탈 및 체공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을 습득했다. 두 번 다시 실패는 없다는 나의 각오는 연습으로 더욱 자신을 얻어갔다.
실패 후 1년이 지나 난 또 제 10 전투비행단 활주로에 시합을 위해 섰다. 조수는 우리집 차남이다. 평소에 같이 호흡하며 연습을 한 터라 손발이 “착착” 맞았다. 내 차례가 되어 계측하는 심사위원 대위의 신호가 떨어졌다. 난 무수히 연습을 한 터라 자신있게 센바람을 줄의 길이와 느슷함과 당김의 조화를 섞어 요리조리 걷다 뛰다하며 글라이더를 마치 살아있는 황새처럼 어루고 달래며 하늘 높이 띄우며, 그러니까 상승기류를 찾아 마치 강태공의 잉어낚시인양 뛰면서 글라이더 상태를 보며 살펴시 이탈시켰다. 많은 참가자와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무한대∞”를 연호했다. 아니나 다를까 난 일반부에서 3분(1차), 2차 3분 도합 6분으로 1위, 금상을 받았다. 60이 훨씬 넘은 노인이 상을 받는다고 축하박수가 유난히 컸다. 이렇게 예선은 작년의 패배를 설욕하고 회심의 미소를 먹음은 채 기쁜 마음으로 본선 대회를 준비했다. 대회는 9월이라 시간적 여유도 있지만 난 마음을 다시 잡고 제작 및 견인을 더욱 열심히 했다. 글라이더는 완전히 터득했다.
새파란 멍이 온 몸에 퍼져 기력이 쇠약해도 고무동력기는 내려야 했다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본선, 공군참모총장대회, 고무동력기 이야기. 더 강하게 변신한 나의 모습
글라이더는 전국을 제패하고 몇 년간 노력 끝에 제 1인자로 자리메김 다. 이제는 고무동력부문이다. 처음부터 이 영역에는 값비싼 외국제품 및 부속으로 무장한 전국의 과학사의 문하생들이 주름잡고 있어 난공불락이었다. 거기다가 최신장비, 풍향풍속 계측기, 강력한 드릴로 신축성이 뛰어난 고무줄을 사용하는 그들을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끈기와 변신의 귀재인 나는 하나씩 착착 계획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외제 고무동력기의 설계도를 수소문 끝에 구입하여 하나하나씩 내 기술로 개조했다. 고무동력기 동체, 외제는 값비싼 두랄루민·티타늄 등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난 이점을 가벼운 플라스틱을 말아 가늘게 쪼갠 대나무 껍질을 이용하여 트러스 공법으로 동체를 만들었는데 단단함은 물론 가볍기가 기본동체의 1/3 무게도 안되었다. 대성공이었다. 또 프로펠라의 크기가 기성품은 작기에 대추나무로 세밀하게 깎았고 고무줄은 미제를 구입했다. 또 프로펠라를 돌려 고무줄을 감는데 조수가 꼭 있어야 하는 번거러움을 덜기위해 혼자서도 고무줄을 감을 수 있는 장치를 발명했다. 즉 강력드릴에 강철고리를 부착시킨 뒤 프로펠라 걸이를 세워있는 기둥이나 나무에 감고 프로펠라를 회전시켜 감는 방법인데 어른이 잡아주는 힘보다 서너배 많이 감고 아주 편했다. 이렇게 만전을 기한 나의 변신 기술은 공군참모총장배 본선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가슴쓰린 추억이었다. 그러니까 본선대회 1차 시기에서 연병장의 축구 꼴대에 고무줄 감기와 드릴을 이용해 두서너배 많이 감은 고무동력기를 날렸는데 연병장 주위 아주 높은 반절쯤 죽어가는 소나무에 걸려 프로펠라는 허공을 향해 “빙빙”돌면서 ‘퍼덕’ 거렸다. 급히 달려가 행사 보조위원에게 내려 줄 것을 이야기했다. 보조요원은 철제 사다리를 펴서 준비한 장대로 내리려고 애썼지만 고무동력기에 닿지 않고 위험하다는 핑계로 포기하라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난 보조원의 만류도 뿌리치고 사다리를 올라 소나무에 다람쥐처럼 올라가 장대에 갈쿠리를 달아서 힘껏 끌어당겼다.
하지만 고무줄이 가지에 감겨 풀리지 않아 한참만에 겨우 비행기를 내려서 떨어트리고 사다리가 걸쳐진 나무둥지를 디디는 순간 사다리가 넘어가 함께 떨어져 풀숲에 내동댕이쳐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회수한 비행기를 손보고 날개를 바로잡고 고무줄을 바꿔 꿰어 다시 드릴로 감아 마지막 2차시기에 임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2차시기 비행 체공 기록은 만점 3분 무한대였다.
내가 속한 조에서는 1등인데 다른 조의 기록이 궁금해서 각조의 기록을 조마다 쫓아 다니며 살펴봤다. 만점은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전체 시합이 끝나고 시상식만 남았는데 난 기록이 좋아 늦게까지 대기했다. 몇 시간 뒤 시상식이 열렸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는 마지막이었다. “일반부 고무동력 금상, xxx” 내 이름이 호명됐다. 별이 4개이신 공군참모총장님이 직접 금메달을 목에 걸어 주시며 빙그레 웃으시며 “노익장을 과시하니 보기 좋습니다”하시며 부상과 상장을 주셨다. 그리고 기념촬영. 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전국을 제패한 벅찬 변신이었다.
영광뒤에 따른 무서운 변화에 난 몇 달을 고생하며 치료에 온 정신을 쏟았다
-고무동력기를 내릴 때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아픈 이야기 (낙상사고 후유증에 헤멤)
하지만 시상식이 끝나고 귀가하는 승용차 안에서 엉덩이와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엉치뼈 그 다음엔 허리, 다음엔 목 등 차가 흔들릴 때마다 통증은 더 심했다. 난 천안 휴게소에서 내려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팬티를 내리고 아랫도리를 살펴봤다. 멍 비슷하게 푸르슴한 색이 하체에 내려앉았다. 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차를 타고 귀가했다. 금메달을 딴 기분이 가시지 않았기에 약간의 통증은 견딜만했다.
하루가 지났다. 통증은 온몸에 퍼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온몸을 살핀 뒤, 멍을 보고 주사와 처방전을 간호원에게 시키며 한달 가량 쉬면, 멍이 가실거니 걱정 말라며 진료를 마쳤다. 약국에서 복용약을 받아서 복용한지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온몸에 번진 시퍼런 멍, 거기다가 성기며 고환까지 자주빛 멍이 소변을 볼 때마다 공포가 더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난 아내 몰래 한방병원을 방문했다. 한의사가 내 온몸을 보는 순간 혀를 차며 “빨리 왔어야지요. 이지경이 될 때까지 참고 있어요. 피가 굳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데”하며 날 나무랬다. 그리고 온몸에 수없이 많은 침과 뜸을 뜨고 1시간 쯤 후엔 부항을 뜬다며 엉덩이 부분을 내리고 부항을 수십차례 색이 진한 부분마다 검붉은 피를 뽑았다. 참 신기하고 시원했다. 이러길 하루 건너 두달 치료 끝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난 처음으로 한의학에 경이를 표했다.
멍이 가시자 마자 나의 변신은 계속되었다. 각종 모형항공대회와 더 나아가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여 대표자격을 땄다. 그러니까 모형항공의 귀재로 변신한 나는 고등학교, 중학교 심지어는 경기도 과학연구원 위촉 강사로 뽑혀 모형항공 지도를 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드론이 대세라 막이 내렸지만 퍽 아쉽다. 그렇지만 난 드론에 도전하기엔 너무 손놀림이 늦어 포기했다. 내가 할 일이 아니기에.
낙방의 고배를 마시며 다져지는 나의 글쓰기 실력은 마침내 빛을 보았다
-백일장에 도전한 나의 이야기
나는 모형항공기 기능 섭렵을 끝내고 또 다른 변신을 꾀하던 어느 날 문득 백일장대회 현수막을 지나가던 길에서 눈여겨봤다. 또 변신의 기회를 잡으려고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먼저 서울 ‘교보문고’를 방문해서 백일장 입상문집을 사서 탐독했다. 그리고 입상작품의 특징과 글의 짜임, 쓰는 요령을 습득 뒤 나도 백일장대회에 참가했다. 내 딴에는 정성껏 바른 글씨와 내용을 그럴싸하게 써서 제출했다.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입상자 발표가 있는데 내 이름은 없고 정성을 쏟은 보람도 없이 낙방이었다. 영문을 몰랐다. 떨어진 이유를.
돌아오는 전철에서 난 글쓰기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닐까 반문해봤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은 수수께끼였다. 그 뒤 계속 백일장대회에서 낙방을 연거푸 서너차례한 뒤 난 그 어떤 1% 부족한 내 자신을 찾았다. 그러니까 난 겉만 번지르한 실속 없고 알맹이 없는 미사여구만 늘어놓고 감동이 없는 허황된 글을 쓴 것이다.
내 결점을 찾은 뒤 백일장 대회를 기다린 어느 날 대전 동구에서 ‘우암송시열’ 백일장이 있었다. KTX를 타고 원거리 대회를 참가했다. 전국에서 수많은 문사가 참여한 전통 있는 대회라 난 기가 팍 죽었다. 축하공연이 끝나고 글제가 발표됐다. 주제는 ‘어머니’였다. 난 어머니와 같이 산 50년을 눈물을 흘리면서 회상하는 글을 써내려갔다. 내 어머니는 70여리가 넘는 먼길을 걸어서 쌀을 머리에 이고 자취하는 전주의 언덕빼기 집까지 부식을 마련하여 난 배고픔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어려운 시절에. 그리고 내가 교사로 발령을 받아 전등불도 안 들어오는 산간 벽지 오지 학교에 부임했을 때 삼시세끼를 따뜻한 밥을 해주시며 허름한 관사에서 동고동락하시며 내 뒷배를 후원하셨는데 끝내는 영화를 못 누리신 채 돌아가셨는데 눈물겨운 사연을 하나하나씩 깨알같은 글씨로 써냈다.
그뒤 서너 시간 뒤에 입상자 명단이 벽에 붙고 호명이 되었다. “수필부 금상, xxx 나오셔요” 처음으로 받은 상 그것도 장원이었다. 돌아오는 KTX열차가 왜 그리 느린지 난 처음으로 느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영광은 서울 한강 ‘구상백일장’, 고양 ‘어르신 백일장’, 수원 ‘정조대왕승모백일장’, 평택 ‘사랑사랑백일장’ 등 무수한 영광을 안은 채 난 제 2의 변신을 계속했다. 늙은 나이에 그 기쁨은 날 흥분케 했고 생에 대한 그 어떤 자신이 생기는 나날이었다. 난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변신을 꾀하고 싶어 도전을 계속했다.
젊은이와 경쟁에서 스피드를 요하는 시합은 무리인가
-KBS1 ‘우리말 겨루기’에서 변신은 요원한 길인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40분 KBS1 TV의 ‘우리말 겨루기’는 날 들뜨게 한다. 그러니까 방영되는 월요일에는 모든 약속과 내 생활은 비상이다. 몇 년째 노트와 동영상을 캠코더를 찍어보고 여기에 수반되는 문제집, 국어사전, 속담, 사자성어, 크로스워드 책. 필요한 서적은 모두 구입해서 보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도 모두 구입하여 보고 준비는 매일 밥 먹듯이 한다. 하지만 달인을 향한 내 꿈은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다. 석두일까? 자책도 해봤다. 치매증상이 있나? 치매 검사도 했지만 치매는 아니었다.
‘우리말 겨루기’ 예심이 인터넷에 뜨면 내 마음은 왠지 급해진다. 그러니까 예심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KBS홀에서 수많은 경쟁자와 한판 겨루기를 한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지필고사 20문제를 크로스워드, 십자말 칸을 인쇄한 용지와 대형 스크린을 비추면서 두 번 읽어주고 단 20분만에 답안지를 회수하여 30분쯤 채점이 완료되면 참가자의 10% 정도 합격자를 불러 2차 면접 및 실기 그리고 방송에 하자가 없고 유모어, 또는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재미있고 재치있는 참가자를 선별하는 테스트 과정이다. 난 예심에는 언제나 수월하게 통과하며 본방에 출연까지는 항상 무난하게 뽑힌다.
그 이유는 다 까닭이 있다. 40년간 교직에서 다져진 말솜씨, 동물해설사로 활동하면서 익힌 유모어, 평소 내 나이에 걸맞지 않는 가곡 레파토리가 있다. 예전 유럽 현지 이탈리아에서 외국 여행객 이탈리아 가곡 부르기에서 상을 탄 저력이 있기에 말이다. 예심을 합격한 나는 마지막 단계 면접에서 뜻밖에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는 면접심사위원의 청에 망설이다 정색을 하며 무대에서 그 당시 뜨는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열창했다. 면접대기자와 심사위원 전원이 앵콜을 연호했다. 난 주저하지 않고 ‘슈벨트의 세레나데’를 더 열정적으로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모두들 “늙은이가 웬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르지”하며 혀를 찼다.
며칠 후 인터넷에 합격자의 이름이 떴다. xxx 상위에 랭크된 내 이름 석자. 본방송 출연을 연락받고 밤새워 깨알같은 국어사전 글자를 돋보기도 쓰지않고 보던 어느 날 더 이상 눈이 침침하고 흐려 안과에서 백내장 수술을 했다. 보름 후엔 글씨가 똑똑하게 보였다. 그런 어느 날 ‘우리말 겨루기’ 녹화가 있으니 10시까지 KBS 녹화장이 있는 본관으로 오라는 연락을 담당 PD에게 받고 새옷을 입고 이발을 하고 달려갔다. 내가 제일 먼저 온 것이다. 이윽고 출연자 전원이 당도하여 분장실에서 마치 장가가는 새신랑마냥 아주 정성이 담긴 분장을 받았다. 기분이 황홀했다.
한 시간 뒤 녹화방송으로 ‘우리말 겨루기’가 엄지인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첫 단계부터 중간까지는 최상위 점수로 정상이었다. 우승이 눈앞에 보이며 젊은이들도 별것 아니구나 하며 자신이 생겼다. 마악 누름단추 벨을 누르며 우승을 확정짓고 싶은 감정이 앞섰다. 지나친 과욕이었다. 기다리면 결승단계에 진출하는데 감점이 시작됐다. 오답이 연속된 나의 경거망동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한 채 끝났다. 멋진 변신, 변태는 지나친 욕심과 만용 때문에 끝났다.
하지만 한 번 출연한 사람은 2년을 기다리기에 매미는 땅속에서 수년을 기다리는데 난 다시 변신의 칼을 간다. 2년간 그리고 화려한 날개를 펴며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다닐 그날의 변신을 꿈꾸며 오늘도 내 길을 간다.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나의 변신은 계속될 것이며, 이 길을 기꺼이 간다. 오늘따라 하늘이 더 높게 보인다. 이제 내 나이 80.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가며 끝없는 변신을 꾀하며 더 행복한 나날을 영위해야 하지 않을까? 무한한 변신. 이제 무엇을 찾아 또 화려한 변신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변신은 날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 만병통치약인가 보다. 나의 변신은 오늘도 계속된다.
•수상소감 - 우수상 미니자서전 은정남
“죽는 순간 숨이 멎는 순간까지 도전하고파”
응모하신 사람 중에서 나이가 좀 많습니다. 팔순이니까요. 그래서 저의 하찮은 글을 건져 올려주셔서 너무 고맙고요. 용기를 주신 선생님들과 캐나다에 이민을 간 아들한테 축하 인사 받았는데 정말 뿌듯합니다.
큰 용기와 힘을 얻었어요. 그래서 이제 앞으로 이제 세상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쓰고 또 갈고 닦아야겠죠. 죽는 순간까지 숨이 멎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해보고 싶어 공모전에 출품하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노인들이 많잖아요. 노인들은 지하철 공짜로 타며 놀러 다니고 또는 복지관이나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이제 그런 걸 탈피하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해봤는데 이번에 글을 한 번 써봤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 신석정 시인이 저희 은사였습니다. 그래서 글을 좀 잘 쓰려고 나름대로 좋은 책 많이 읽고 또 문학 활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 항상 친구들이나 동호회 회원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했어요. 그러면 그분들이 모니터링해 주면 수정하며 첨삭하면서 배웠습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 장원은 떼놓은 당상일 정도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자신감 가지고 소설을 써보려고 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동물해설사, 모형항공기, 우리말 나들이 도전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이나 사건을 소재로 삼아서 소설을 써보고 싶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어 행복합니다. 일감이 있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는데 이번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준비한 주최 측에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다시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쓸 만한 어른들과 아까운 시니어들이 많거든요. 사실 어르신들은 좋은 자원과 자산을 갖고 있고 재능과 경험이 다양한데 쓸모없이 이렇게 소멸해 가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이번 공모전이 뜻 깊은 일을 하고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시니어들에게 힘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보다 더 저를 믿어준 가족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박정자와 윤석화, 두 사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극배우다. 두 여배우가 하나의 연극을 만들기 위해 뭉쳤다. 박정자가 주연을 맡고 윤석화가 연출을 맡는 ‘해롤드와 모드’가 그것이다. 선후배 사이이자 연극계를 대표하는 고참으로서 팬데믹 코로나에 도전하듯 무대에 올리는 연극이 인생의 의미를 숙고하며 풀어내는 ‘해롤드와 모드’라서 더 의미심장하다. 삶의 지혜를 말하는 ‘모드’ 역을 맡은 배우와 그 모드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연출이라는 교차적 입장에 서서 서로 배려하며 내어주는 두 사람.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삶과 연극을 들여다봤다.
삶을 연극과 함께하다 보니 어느새 연극 속 인물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1962년에 연극 ‘페드라’로 데뷔해 팔순인 2021년에도 여전한 현역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는 배우 박정자의 얘기다. 5월 1일부터 무대에 올라가는 ‘해롤드와 모드’에서 맡은 모드는 그녀와 나이가 같은 팔순이다. 그녀가 모드 역을 맡은 건 이번이 일곱 번째. 드디어 현실의 인물이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의 나이를 따라잡은 것이다. 그녀는 이번이 자신에게 마지막 모드 역이 될 거라고 이미 밝혔다.
“이제 좀 내려놓고 싶어서, 가벼워지고 싶어서요. 뱀은 때가 되면 허물을 벗기도 하고 애벌레도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것처럼 그런 기분이에요. 이 허물을 내가 옳게 벗을 수 있을까, 그런 염려가 있긴 하죠.”
박정자, 80세의 모드가 되다
‘해롤드와 모드’는 규범을 거부하며 자살 시도를 벌이는 게 유일한 취미인 부잣집 아들 해롤드가 장례식장에서 만난 자유분방하고 귀여운 80세 할머니 모드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깨닫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미 오랜 시간 무대에 오른 검증된 작품이고 박정자 개인으로서도 큰 애착을 느끼는 만큼, 그녀가 생각하는 이 작품이 말하고 싶어 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결국은 소통을 말하고자 하는 거죠. 부모와 친구, 사회, 국가, 세계… 이미 우리는 소통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소통이란 게 좋은 의미여야 하지만 지금은…. 그래서 인물과 작품을 통한 선한 소통으로 사람들이 조금 더 성숙해지길 바라는 거죠.”
그녀가 보는 모드는 무공해 그 자체인 인물이다. 소유하지 않지만 모험적이라 매일 새로운 걸 해보자는 마인드다. 그렇다고 현자인 체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인생을 먼저 산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이 연극을 보고 모드를 롤모델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그러면 사회가 더 아름다워질 거예요.”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다
박정자는 모드가 ‘나이를 먹어도 구질구질하지 않아서 좋다’고도 했다. 그런 모드의 모습은 그녀 자신의 삶의 철학과도 일치하는 듯 보였다.
“차를 버린 지 3년 됐어요.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정 가기 어려운 덴 카카오택시를 타고 가고. 거기에 굉장한 기쁨이 있어요. 바로 내가 소유했던 걸 내려놓는 것이죠.”
그녀는 그러한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정화’라고 표현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가정에 대한, 사회에 대한 정화다.
“자동차는 내가 늘 혼자 타고 다니는데 공해 문제, 기름 문제 때문에 나라도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 나 애국자야.’ 그런 생각도 해요.(웃음) 쓰레기 분리수거처럼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죠. 작은 것부터 출발하면 삶이 정화될 수 있어요.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정화이기도 하지만 그 영향을 주변에 줄 수도 있죠.”
관객을 만나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
주변 생활을 자신의 법칙으로 정화하고 있는 박정자는 사람들이 자신을 그저 ‘연극배우 박정자’로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간결함으로 이어졌다. 간결함은 어느 정도는 의도적인 잊어버림과도 같다.
“너무 오래 갖고 있으면 병이 돼요. 연연해하면 발목 잡히는 거니까. 늘 아침이면 해가 떠오르는데, 마음도 새로워야 되겠죠. 그래서 되도록 그런 걸 없애려고 해요.”
새로운 해와 새로운 마음으로 가다듬지만, 코로나19는 아직 암중모색 중인 상태다. 그래서 그녀는 당장은 행복하지 않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 관객을 만나면 행복해질 거예요. 작년에는 그래도 ‘노래처럼 말해줘’라는 배우의 모노드라마를 했어요. 작년 2월 코로나가 막 터질 때였죠. 나는 그 작품으로 숙제를 다 했다고 생각하거든. 좋았어요. 많은 관객들이 울기도 하고, ‘저 배우처럼 나이 먹어야지’ 하는 생각도 했다고 해요. 내가 참 좋은 일을 했구나 싶죠. ‘해롤드와 모드’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이번 ‘해롤드와 모드’가 특별한 것은 연출을 후배이자 그녀만큼이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극배우 윤석화가 맡았다는 점이다.
“(윤석화에게) 내가 팔십에 연극을 하게 되면 그때는 네가 연출하라고 말했었죠. 그 약속을 지키게 됐어요. 사실 우리는 계속 티격태격해요. 티격태격 정도가 아니지.(웃음)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만족이 있을 수 없어요. 서로 부딪칠 때는 심하게 부닥치기도 하죠. 그런데 그건 우리가 바라는 목표가 하나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정이란 참아주는 거죠. 참고 기다리고…. 그건 상대를 위해서라기보단 나 자신을 위해서일 거예요.”
윤석화, 극 속에 담긴 시적 메타포를 찾다
그렇다면 이제 연출을 맡은 윤석화의 말을 직접 들어볼 차례다.
“선생님과 저하고 굉장히 친하기 때문에, 친한 사람과의 작업은 힘들 수 있죠. 함께 산전수전 다 겪었고요. 내 연출작에 처음 출연하시는 것도 아니고. 친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라면 제가 연출로서 배우로서 애매한 것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도 선생님께 빛나는 정점이 되기 위해 감사하며 행복하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렵지만.(웃음)”
박정자가 모드 역을 이번으로 끝내겠다고 공언한 만큼, 두 사람이 함께하는 ‘해롤드와 모드’ 무대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예정이다. 그렇다면 연출가로서 윤석화가 이번 ‘해롤드와 모드’에서 주안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일까? 그녀는 이 작품의 스토리 자체가 완벽하다는 점을 전제로 설명했다.
“지금까지의 ‘해롤드와 모드’가 스토리텔링이 강했다면, 저는 그 행간에 시적 메타포를 좀 더 그려 넣고 싶어요. 무대를 미니멀하게 만든 것도 그런 정서, 즉 누구나 보면 그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걸 은연중에 느낄 수 있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둔 거죠.”
혼자서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연출의 고통
박정자에게 이번 모드가 일곱 번째 모드인 것처럼, 공교롭게도 윤석화에게도 이번 ‘해롤드와 모드’는 일곱 번째 연출 작품이란 의미가 있다.
“어떤 면으론 연기보다 연출이 낫지 않나?(웃음) 제가 원하는 모험심이란 게 창의력과 연관되어 있어요. 그래서 스태프들에게 ‘내가 또 이상한 거 주문하지?’ 하고 자주 물어요. 그러나 예술은 새롭기 때문에 이상한 거죠. 우리에게 답습이란 교육이에요. 그런데 교육도 어떤 면에선 교육을 뛰어넘어 창의로 가야 하죠. 답습은 기본 과정이고 창의와 창조는 그것을 뛰어넘는 건데, 그걸 위해선 모험도 필요하고 새로운 발상이 필요해요. 그런 게 저에게 좀 맞지 않나 싶어요.”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CEO로서, 복지재단 이사장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녀에게 답습을 넘어서야 한다는 방법론은 체질화된 요소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러나 연출가로서의 어려움은 그녀를 스쳐 지나가기만 하지 않았다.
“연출은 혼자서 모든 걸 책임지는 일이죠. 배우도 외로운 작업이지만 뭔가 표현해냄으로써 자기만족, 관객의 박수라는 보상이 있어요. 그러나 연출은 그런 게 없죠. 배를 몰고 가는 선장이 배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면 나머지는 기계가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도 그렇고 다 자기 생각이 다르고 성격도 달라요. 그걸 합심해서 최선을 이루게 해야 배가 제대로 가잖아요. 큰 배를 지휘하는 선장도 외로울 텐데(웃음) 망망대해에서 사람과 계속 부딪치며 조율해야 하니까 어려운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를 낮추지 않으면 포용할 수 없어
늘 밝고 활기찬 그녀 특유의 에너지가 넘쳤다. 어떻게 저렇게 에너지가 유지될 수 있을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과정을 거치든 고난 없는, 절망 없는 삶은 없죠. 그 화두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거죠.”
참다운 인간이 되는 방법은 스스로 낮추고 포용하는 것밖에 없다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를 비우지 못한다. 욕심 때문이다.
“낮추지 않으면 포용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보면 해롤드가 보는 모드가 그런 사람이죠.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거든요.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이든 800년 전이든 그 역사 속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아냈는지 그 철학은 우리에게 남아 있지만, 그 사람이 누렸던 것은 다 모래알보다 못하게 사라졌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죽기 전에는 결코 미리 죽지 않는 사람
윤석화의 요즘 삶은 본인 스스로가 표현하길 ‘거꾸로 가는 시계’ 같은 생활이다. 예순이 넘은 나이지만 엄마로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고, 남편 뒷바라지도 하고 여러 가지로 아직까지 무척 분주하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다운 한결같은 면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저에게 쉼을 주려고 노력해요. 마음에 쉼을 주는 방법은 딱 하나더라고요.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하는 삶. 저는 크리스천이에요. 사실 교회 다닌다고 모두가 믿음을 갖지는 않죠. 그러나 저는 믿음이 생기니 정말 편안해졌어요. 물론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가는 길은 정말 어려운 거 같아요. 그런데 제 삶의 마디마디에 고난이 많았기에, 고난이 저에게 믿음을 준 거죠. 혹여나 이상한 몸부림을 쳤을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너무도 감사하게 믿음을 허락해주셔서 자신을 비우고 다시 회복할 수 있고 다시 새로운 소망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그녀가 자신을 유지하는 해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감사하기에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 그녀는 웃으면서 “내가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어요”라고도 말했다.
“ ‘죽기 전에는 결코 미리 죽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한 치 앞도 모르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생각해요. 그러지 않으면 ‘미리 죽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거 같거든요.”
한 편의 긴 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공연을 앞두고 맨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지낼 수 있는 연출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윤석화 또한 마찬가지다.
“요즘은 거의 잠을 못 자요. 제 머릿속에 그림이 있지만 공연은 배우 예술이기 때문에 구상한 게 얼마나 나와줄 것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죠. 가끔 공연한다는 게 도박 같다는 생각을 해요. 엄청난 모험심이 필요하니. 내가 생각했던 그림만큼 나오고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지… 살 떨리죠.”
어느새 46년간 연극을 한 그녀가 생각하는 연극의 의미란 ‘좋은 질문을 찾아서 관객들에게 내어놓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 각자가 자신의 답을 갖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해롤드와 모드’는 어떤 연극일지 물어봤다.
“ ‘해롤드와 모드’는 죽음을 통해 삶을 얘기하는 작품이에요. 모드의 대사 중 아름답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들이 참 많거든요. 한 편의 긴 시를 읽는다는 느낌으로 보시고 극장 문을 나서면 가장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사람은 하나, 어떤 사람은 일곱 개, 어떤 사람은 여러 개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것들이 여러분 삶을 응원하고 회복할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랍니다.”
● Exhibition
◇유에민쥔(岳敏君) 한 시대를 웃다!
일정 5월 9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장샤오강, 왕광이, 팡리쥔과 더불어 중국 현대미술 4대 천왕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유에민쥔의 국내 최초 대규모 개인전이 열린다. 1989년 발생한 천안문 사태에 혐오를 느낀 유에민쥔은 다음 해 베이징에서 화가로 등단해 특유의 시니컬한 웃음으로 그가 겪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활짝 웃는 얼굴이 등장하지만, 이는 사회주의 붕괴를 목격한 국민으로서의 절망을 역설적이고 자조적인 웃음으로 나타낸 것이다. 국내외를 통틀어 최대 규모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유화부터 대규모 조형 작품, 최근 선보이는 꽃 형상의 얼굴 작업까지 1990년부터 이어지는 유에민쥔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다. 총 6개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되며, 각 섹션은 유에민쥔의 트레이드마크인 웃음 속 감춰진 의미를 삶과 죽음, 인간 사회 등 다각도로 바라본다. 전시 기간 코로나19로 인해 도슨트의 대면 해설 대신 앱 ‘도슨트’로 오디오 가이드를 제공하며, 아이돌 그룹 샤이니 온유가 따뜻한 음성으로 읽어낸다.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일정 5월 30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1934년 시인 이상은 서울 종로에 다방 ‘제비’를 열었다. 벽에는 그의 절친 구본웅의 그림과 쥘 르나르의 경구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이곳에서 예술가들은 미샤 엘만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르네 클레르의 영화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1930~50년대 격동의 시기, 장르는 다르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시대의 전위를 꿈꿨던 문예인들의 뜨거운 연대를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개막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전은 정지용·이상 등 문학인과 구본웅·황술조 등의 화가를 통해 일제강점기 및 해방기 문학과 미술의 밀월 관계를 조명한다. 총 4부로 나누어 구성된 이번 전시는 다방 ‘제비’를 배경으로 한 공간을 시작으로 신문·잡지 등 인쇄 미술, 대표적인 문학·미술인 커플의 관계도, 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던 작가의 글까지 총 300여 점의 다양한 시각 자료로 두 장르의 지적 연대를 살핀다. 가난과 모순으로 가득 찬 시대 속에서도 정신적 풍요를 잃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숭고한 세계를 엿볼 수 있다.
● Book
◇조금 알고 적당히 모르는 오십이 되었다 (이주희 저·청림출판)
50대에 들어선 저자가 여유롭고 건강한 인생 후반기를 위해 필요한 어른의 태도를 책에 담았다. 유쾌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시각으로 오늘날 중년들의 걱정 근심을 속 시원하게 풀어낸다.
◇인생이라는 멋진, 거짓말 (이나미 저·쌤앤파커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나미 박사가 황혼으로 접어든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통해 노년의 삶을 성찰한다. 죽음과 이별 등 무거운 주제를 담담하고 소탈하게 풀어내 공감과 울림을 선사한다.
◇내가 백년식당에서 배운 것들 (박찬일 저·인플루엔셜)
셰프 박찬일이 평균 업력 64년 노포의 장사 철학을 한데 모았다. 우래옥부터 할매국밥, 청진옥까지 화려한 장사 기술과 손익 계산 없이 ‘자기다움’으로 승부하는 노포의 성공 비결을 소개한다.
● Stage
◇팬텀
일정 3월 17일~6월 27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로버트 요한슨
출연 박은태, 카이, 전동석, 규현, 김소현, 임선혜, 이지혜, 김수 등
“세상이 무너진 이 순간, 너의 음악이 되리라.” 뮤지컬, 오페라, 발레 등 다양한 장르로 진한 감동을 전하는 뮤지컬 ‘팬텀’이 3월 네 번째 시즌의 막을 올린다. 팬텀은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흉측한 얼굴 탓에 오페라 극장 지하에 숨어 살아야만 했던 ‘에릭’의 인간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다. 1991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으며, 국내에서는 2015년 관객과 처음 만나 예상 밖의 흥행을 거두며 ‘뮤지컬의 결정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번 공연에서는 ‘이렇게 그대 품에’, ‘그대를 찾아내리라’, ‘그의 얼굴을’ 등 캐릭터 간 서사를 강화하는 곡을 새로 추가하고, 작품의 백미인 발레 장면의 비중을 높여 몰입도를 더했다. 어둠 속에 사는 에릭에게 빛 같은 존재인 크리스틴이 있듯이, 뮤지컬 ‘팬텀’이 힘든 시기를 보내는 관객을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위로할 예정이다.
◇검은 사제들
일정 2월 25일~5월 30일 장소 유니플렉스 1관
연출 오루피나 출연 김경수, 이건명, 박가은, 지혜근 등
5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검은 사제들’이 창작 뮤지컬로 재탄생한다. 올해 초연 무대를 올리는 뮤지컬 ‘검은 사제들’은 신학생 ‘최부제’와 교단의 눈 밖에 난 ‘김신부’가 악령에 시달리는 소녀 ‘영신’을 구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원작의 서사를 유지하면서도 무대와 연출, 음악 등으로 오컬트 분위기를 극대화해 숨 막히는 긴장감과 으스스함을 선사할 예정이다.
◇마지막 사건
일정 2월 15일~5월 9일 장소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
연출 성재준 출연 김종구, 홍승안, 김찬종, 정민, 조풍래, 백기범 등
최고의 추리 소설 작가 아서 코난 도일과 그의 손에서 태어난 ‘셜록 홈스’의 이야기를 다룬 창작 뮤지컬이다. 의사였던 도일이 탐정물에 관심을 보이고 세기의 작가로 데뷔하기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40여 년 동안 셜록 홈스를 주인공으로 4편의 장편과 56편의 단편 소설을 쓴 도일의 강렬한 열망과 내면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1976년 연극 ‘하멸태자’로 데뷔 후 46년째 연기의 길을 걷고 있는 배우 남경읍. 그는 배우이기도 하지만 조승우, 황정민, 소유진, 오나라 등 40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한 뮤지컬계 대스승이다. 그런 그가 공교롭게도 뮤지컬 ‘올드 위키드 송’에서 슬럼프에 빠진 천재 피아니스트를 가르치는 ‘요제프 마쉬칸’ 교수 역을 맡았다. 후배들이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빛을 함께 찾아주며 멘토가 되어주었던 그에게 이번 작품은 어떻게 다가올까. 또 이 자리에 서기까지의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인생을 하나의 ‘슬럼프’라고 비유한 배우 남경읍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요제프 마쉬칸’은 어떤 인물인가?
마쉬칸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를 감추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특유의 유쾌함과 웃음으로 그 아픔을 가리며 살아가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더욱 괴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죠. 하지만 ‘스티븐 호프만’을 만나고 사제 간 음악으로 하나가 되면서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기 시작합니다.
Q. 스승으로서 작품이 주는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제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다양한 학생을 만나게 되는데요. 보이는 것이 전부인 학생이 있고, 지금은 재능이 보이지 않지만 숨겨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학생도 있어요. 좋은 선생은 그런 재능을 가진 학생을 찾아내고, 키워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중요하죠. 많은 제자의 재능을 끌어내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경험이 도움되었습니다.
Q. 사제 간 교감을 극대화하는 넘버가 있다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슈만의 ‘시인의 사랑’은 숨은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메시지가 강한 곡이에요. 그중 마음이 가는 노래는 제1곡 ‘이 아름다운 5월에’입니다. 마쉬칸이 이 곡을 가르치면서 스티븐의 열정을 끌어내기 위해 하는 말이 있어요. “인생이란 건 언제나 그렇게 명확할 수만은 없는 거야. 이 안에 마음이라는 게 있어. 그걸 움직이라고!”
Q. 연기하며 와 닿았던 대사는?
마쉬칸의 대사 중 이런 말이 있어요. “비탄 속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비탄을 모르니 커다란 기쁨에 대해서 이해하지도 못하는 거야.” 그의 말처럼 항상 행복한 사람도, 슬럼프를 겪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든 슬럼프가 오지만, 그것을 극복할 때 행복하고 기쁘죠. 좋고 나쁜 일을 번갈아 겪다 보면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슬럼프이며 터널이지 않을까요?
Q. 슬럼프를 극복한 일화가 있다면?
힘든 시기에 겨울 산을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찬바람과 싸우는 나목의 황량한 모습이 그 당시 저와 참 비슷하다고 느꼈죠. 한참을 바라보다 문득 ’아! 다른 계절에는 나뭇잎 때문에 햇빛이 땅까지 비추지 못하지만, 잎이 다 떨어진 겨울 산은 햇빛이 오롯이 땅을 비추고, 그 덕에 땅속에서 수많은 광합성이 일어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제 현실이 겨울이라도 춥지만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죠.
Q. 관객에게 전하는 위로의 한 말씀
코로나19 또한 인생의 우여곡절, 리듬이라고 생각해요. 영원한 어둠은 없습니다. “기쁨과 슬픔의 결합. 이게 바로 핵심이야!“라는 마쉬칸의 대사처럼 지금은 큰 비탄을 겪고 있지만, 두 주인공처럼 커다란 기쁨을 이해할 날이 곧 오겠지요. 그 시간을 견디는 가운데 이 작품이 희망의 메시지가 되어주리라 생각해요.
뮤지컬 '올드 위키드 송'
일정 3월 1일까지
장소 예스24스테이지 3관 연출 우진하
출연 남경읍, 남명렬, 이재균, 정휘, 최우혁 등
● Exhibition
◇신의 예술가, 미켈란젤로 특별전
일정 5월 2일까지 장소 M컨템포러리
16세기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의 걸작을 미디어 아트를 통해 한자리에서 조망한다. 드로잉, 유화, 프레스코, 조각, 시 등 5가지 장르를 통해 그림을 시작했을 때부터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미켈란젤로의 전 생애 작품을 살펴보고, 그의 예술세계를 탐구한다.
전시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연대기와 작업 방식을 살펴보는 공간으로 시작한다. 이어 그가 남긴 드로잉으로 작품을 위해 수없이 그어야 했던 선을 확인한다. 회화 부문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유화 작품과 시스티나 예배당 프레스코 등을 조명한다. 이곳에서는 ‘아담의 창조’를 비롯한 유명 프레스코화를 미디어로 재해석해 환상적인 볼거리를 선사한다. 이 외에도 3D 영상, 홀로그램 등 다양한 미디어 기술과 접목한 조각품으로 몰입도를 높이며, 미켈란젤로의 시를 함께 전시해 그의 생각을 엿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미켈란제로의 작품을 색칠하는 컬러링 존을 통해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환기가 필요한 일상에 영감을 제공하는 이번 전시는 실제 작품을 감상하기 어려워진 관객들에게 색다른 방식으로 위로를 전하고, 지성을 불어넣는다.
◇마티스 특별전 : 재즈와 연극
일정 4월 4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앙리 마티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진행하는 국내 최초 마티스 단독 전시회가 마이아트뮤지엄에서 진행되고 있다. 앙리 마티스는 강렬한 색채가 특징인 프랑스 야수파 화가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예술가로 손꼽힌다. 50년간 유화, 드로잉, 조각, 판화, 컷아웃, 책 삽화 등 방대한 작품을 제작했으며, 주요 작품은 ‘모자를 쓴 여인’, ‘춤’, ‘붉은 화실’, ‘폴리네시아 하늘’ 등이 있다. 그중 마티스의 컷아웃(종이 오리기) 기법은 20~21세기 추상미술, 미니멀리즘 디자인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번 전시는 컷아웃 기법으로 제작된 ‘재즈’ 시리즈와 드로잉, 석판화, 발레 공연을 위해 디자인한 무대 의상, 로사리오 성당 건축 등 작품 120여 점을 다채롭게 소개한다. 특히 대표작 ‘재즈’를 통해 마티스 특유의 생생한 색채와 선을 조명하고 작품과 어울리는 재즈 음악을 큐레이션해 그림과 음악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 도슨트의 풍부한 해설로 작품의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시간도 마련한다. 전시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마티스의 예술적 순수함과 열정은 코로나19로 메마른 감성에 단비가 되어준다.
● Book
◇노인을 위한 치료백과 (분당서울대병원 노인의료센터 저·알에이치코리아)
시니어에게 자주 나타나는 여러 질환을 한 권에 모아 소개한다. 질환뿐 아니라 간병, 요양병원 등 복지서비스까지 총망라했다. 시니어라면 집에 한 권 두고 틈날 때마다 찾아볼 만하다.
◇억척의 기원 (최현숙 저·글항아리)
중장년 여성의 구술 생애 작업을 이어온 최현숙 작가가 이번엔 60대 나주 농민의 이야기를 실었다. 두 여자의 굴곡진 삶을 통해 그들이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풀어낸다.
◇어른의 말공부 (사이토 다카시 저·비즈니스북스)
나이가 들수록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품격 있는 언어 습관을 소개한다. 필요한 말만 하는 분별력, 진심을 담는 전달력 등 말의 내공을 갖추는 방법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 Stage
◇얼음
일정 3월 21일까지 장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연출 장진
출연 정웅인, 이철민, 박호산, 이창용, 신성민, 김선호 등
‘충무로의 이야기꾼’ 장진 감독의 화제작 연극 ‘얼음’이 초연 후 5년 만에 돌아왔다. ‘얼음’은 독특한 구성의 2인극으로, 2016년 초연 당시 장진 감독 특유의 작가적 상상력과 뛰어난 이야기 구성, 긴장감 넘치는 연출로 화제를 모았다. 작품은 잔인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18세 소년과 그 소년을 범인으로 만들어야 하는 두 형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무대에 등장하진 않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소년과 살인 사건이 일어난 날의 정황을 짚어가는 두 형사 사이 팽팽하게 펼쳐지는 심리전이 극에 긴장감을 더한다. 이번 공연에는 내로라하는 실력파 배우들이 대거 캐스팅되었다. 배우 이철민과 박호산이 작품에 대한 애정으로 초연에 이어 이번 무대에 다시 오르고, 배우 정웅인, 이창용, 신성민, 김선호가 새롭게 합류해 작품에 힘과 활력을 불어넣으며 짜릿한 연기 앙상블을 펼칠 예정이다.
◇위키드
일정 2월 16일~5월 1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조 만텔로 출연 옥주현, 손승연, 정선아, 나하나, 서경수, 진태화 등
초록 마녀 열풍을 일으켰던 뮤지컬 ‘위키드’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를 유쾌하게 뒤집은 그레고리 맥과이어의 소설을 뮤지컬화한 작품으로, 두 마녀 ‘엘파바’와 ‘글린다’의 우정과 사랑, 용기 등을 다룬다. 거대한 타임 드래곤, 날아다니는 원숭이, 350여 벌의 의상 등 화려한 무대와 마녀들의 매혹적인 노래가 마법에 걸린 듯 시선을 사로잡는다.
◇붉은 정원
일정 2월 5일~3월 28일 장소 유니플렉스 2관 연출 성재준
출연 박은석, 이정화, 조현우 등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3대 문호로 꼽히는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을 각색한 창작 뮤지컬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18세 소년 ‘이반’과 치명적인 매력의 ‘지나’, 이반의 아버지이자 유명 작가인 ‘빅토르’의 위험한 삼각관계를 그린다.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대사들과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음악들로 원작의 감동을 구현했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20년간 국내외 문화재를 펜화로 그려낸 김영택 화백이 전시회 1주일 전인 1월 13일 76세로 타계했다. 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1월 20일 시작된 ‘김영택 펜화전’은 주인공 없이 2월 15일까지 열린다. 전시에는 고인의 펜화 작품 40여 점과 함께 펜촉 등의 유품이 출품됐다.
나는 개막 다음 날 찾아가 펜촉을 사포로 갈아서 0.03㎜ 굵기로 수십만 번 세밀한 점과 선을 그어온 열정과 섬세함을 잘 감상했다. 대장암으로 투병하면서도 화업 30년을 결산하는 전시에 공을 들인 고인은 한 인터뷰에서 “펜화와 함께한 삶 자체가 축복이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전시에는 ‘질사모’ 회원들과 함께 갔다. 질사모는 불세출의 테너 베냐미노 질리(Beniamino Gigli, 1890~1957)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질리를 사랑하는…”이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이 발음만 듣고 철학도 모임인 줄 아는 경우가 많다. ‘질사모’는 음악으로 시작됐지만 문학 미술 등 문예 전반에 대한 애호와 감상,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동호인 단체다.
하여간 질사모 단톡방에 그의 죽음을 알리자 여러 반응이 올라왔다. “화가들은 자기 전시회 기간에 영면하는 걸 큰 복으로 알았다지요?”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서예가는 붓 잡고 선종하시고요.” 이건 서예가는 아니지만 붓 잡고 끼적거리는 나 들으라고 한 말이다. “저는 임종처를 벌써 정해두긴 했는데 어떻게 될는지….” 죽는 장소까지 정해두었다니 어딘지 자못 궁금했다. “불교에서는 강의 도중 쓰러지는 걸 학문열반(學問涅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런가?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지 뭐.
내가 “그러면 언론인은 어떻게 해야 된대유?” 하고 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신문을 읽다가 가라고 했다. 실제로 “나는 신문 읽다가 신문을 쥐고 가고 싶다”고 한 분이 있다는 것이다. 신문기자(교열)이면서 소설가 수필가였던 민기(閔幾, 1925~2018) 씨의 말이라고 한다.
듣고 보니 그럴 법하긴 했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가수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공연 중 무대에서 쓰러지고, 미술가가 화폭에 마지막 붓질을 하다 숨을 거두고, 시인이 독자들 앞에서 시 낭송을 하다 떠나가는 건 그런대로 폼 나고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신문 읽다가 가는 건 신문기자 아니라도 누구나 그럴 수 있지 않나? 아무래도 좀 없어 보인다. 방송기자가 방송 중 마이크 앞에서 죽는 것과는 질과 결이 다른 것 같다.
그러면 의사가 수술 중 죽는 건 어때? 안 좋지. 환자한테 큰일 나지. 판사가 재판 중에 죽는 건? 장사꾼이 흥정 중에 죽는 건? 목사가 침 튀기며 설교하다가 죽는 건? 수사관이 피의자 심문 중에 죽는 건? 선생님이 화가 나 학생을 훈계하다가 죽는 건? 요리사가 신나게 칼질을 하다가 죽는 건? 이탈리아 폼페이의 유적 중에는 자위하던 중 화산재가 덮쳐 죽은 남자도 있던데 그런 건?
아무래도 신문기자는 책상에 앉아 뭔가 쓰다가 죽는 게 좋을 것 같다. 근데 무슨 글을 쓰지? 자신의 삶에 대해 쓰는 게 좋겠지. 선비들 중에는 묘비나 묘표(墓表), 묘지명(墓誌銘)을 미리 써놓은 사람이 많다. 생전에 만든 자기 무덤을 수장(壽藏) 또는 생분(生墳)이라 하고, 무덤에 묻을 묘지명을 살아 있을 때 쓴 것을 생지(生誌)라고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문집에 실을 ‘집중본’(集中本)과 무덤에 묻을 ‘광중본’(壙中本) 등 두 가지 자찬(自撰) 묘지명을 남겼다. 광중본은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기세를 폈지만/하늘은 그로써 너를 곱게 다듬었으니/잘 거두어 속에 갖추어 두면/장차 아득하게 멀리까지 들려 올리리라”로 끝난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주자학을 비판하며 경전과 노자 장자를 재해석했던 분답게 자신의 묘표를 이렇게 썼다. “차라리 외로이 살면서 세상에 구차하게 부합하지 않을지언정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 세상 사람답게 살면서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지면 그걸로 옳다’고 하는 자에겐 끝내 머리 숙이지 않겠으며 마음으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여겼다.”
우리나라 언론인 중에도 자신의 사망기사를 써놓은 사람이 있긴 하다. 그런데, 공개된 기사를 읽어보니 산에 가서 실종되는 내용인 데다 너무 소설적이어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사망기사가 나온 지 벌써 10년이 더 지났으니 새로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모범 사례는 미국 칼럼니스트 아트 버크월드(Art Buchwald, 1925~2007)다. 2007년 1월 18일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는 “안녕하세요? 아트 버크월드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사망했습니다”라는 동영상이 올라왔다. 1982년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칼럼(주로 정치풍자)은 전 세계 500여 개 신문에 실릴 정도로 평가가 좋았다. ‘워싱턴의 휴머니스트’로도 불려온 그는 40년 넘게 미국 대통령을 포함해 워싱턴 정가의 엘리트 계층을 풍자한 칼럼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의 글을 실으면 신문의 품격이 높아진다는 말까지 있었다.
그는 당뇨병이 악화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도 신장투석을 거부한 채 워싱턴의 호스피스 시설에서 죽음을 맞는 과정을 특유의 유머러스한 필체로 소개했다. 그런 칼럼니스트가 마지막 순간까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본인의 사망 소식을 알린 것이다.
글은 해학과 풍자가 넘쳤지만 그는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만큼 불우했고 어머니는 평생을 정신병원에서 살았다. 우울증이 심해 자살충동을 느낀 적도 있었지만 스스로 잘 이겨냈다. 한 인터뷰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잘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다른 사람을 웃게 만들기 위해 태어난 것 아닐까요?”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고 유머의 힘을 잘 아는 게 언론인 아닐까. 가만있어도 나이 한 살 더 먹는 설날을 앞두고 이렇게 죽는 이야기를 한 건 좀 거시기하지만, 아트 버크월드 같은 해학과 여유를 갖게 되기를 나도 바라고 있다.
● Exhibition
◇Hullo Hullo Following on: 로즈 와일리
일정 3월 28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934년생 80대 할머니 화가 로즈 와일리의 세계 최초 대규모 개인전이 한국에서 열린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를 꿈꾼 로즈 와일리는 결혼을 하며 꿈을 접고 40대에 들어서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그녀는 당시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매일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76세의 나이에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주목을 받으며 신예 작가로 떠올랐다. 현재는 세계 3대 갤러리 중 하나인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 전속 작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로즈 와일리의 열정적인 미술 인생을 엿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회화, 드로잉, 설치미술을 포함한 원화 150여 점을 단독으로 선보인다.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 VIP룸에서 전시했던 희귀작뿐 아니라, 영국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활약 중인 손흥민 선수를 그린 작품까지 국내 최초로 공개한다. 로즈 와일리의 작품은 일상 속 순간이나 영화의 한 장면같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을 소재로 한다. 어느덧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이지만, 그녀의 천진난만한 예술세계는 회색빛으로 물든 우리네 일상에 긍정의 힘을 전파한다.
● Book
◇클로리스 (라이 커티스 저·시공사)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아 산속에서 길을 잃은 70대 노인 클로리스와 그녀를 찾는 구조대원 루이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인물과 삶에 대한 독창적인 통찰로 출간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미국 주식으로 은퇴하기 (최철 저·황금부엉이)
유튜브 채널 ‘미주은’이 알려주는 미국 주식 투자 노하우. 시니어들의 풍요로운 은퇴를 위해 실전 용어부터 유망 종목 분석 등 미국 주식을 시작할 때 알아야 할 정보를 총망라한다.
◇채우지 않아도 삶에 스며드는 축복 (정애리 저·다산북스)
수십 편의 작품으로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연기 활동을 해온 배우 정애리의 세 번째 에세이. 화면에서는 볼 수 없는 그녀만의 소소한 일상과 진솔하고 따뜻한 내면을 기록했다.
● Stage
◇명성황후
일정 1월 19일~2월 26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연출 안재승 출연 김소현, 신영숙, 강필석, 손준호 등
한국 창작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여준 ‘명성황후’가 25주년 기념 공연을 올린다. 조선조 말 고종의 비로서 격변의 시대 열강에 맞서 나라를 지켜야 했던 명성황후의 삶을 그린다. 이번 공연은 노래로만 진행되는 ‘송스루’ 형식에서 벗어나 대사를 추가하고, 의상과 소품을 시대에 맞춰 새로 디자인하는 등 대대적인 변화를 통해 한층 완성도 높아진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앙리할아버지와 나
일정 2월 14일까지 장소 예스24스테이지 1관 연출 이해제
출연 이순재, 신구, 유리, 박소담, 채수빈 등
프랑스 극작가 이방 칼베락의 작품으로, 홀로 사는 고집불통 할아버지 ‘앙리’의 집에 대학생 ‘콘스탄스’가 룸메이트로 들어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꿈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콘스탄스를 위해 그녀의 ‘인생 멘토’가 되어주는 앙리의 모습이 훈훈한 감동을 자아낸다. 국민 배우 이순재, 신구와 상큼 발랄한 여배우들의 귀여운 ‘케미’를 확인할 수 있는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