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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즈 여행
- 말이 씨가 된다고 8년 전에 친구들과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한 크루즈 여행을 친구 3가족과 같이 6월 초에 다녀왔다. 8년 이상 적금을 들어 준비한 것이 중도에 포기하지 않은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처음에는 알래스카로 가기로 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서지중해로 변경되어 10일 동안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비행기로 가서 배로 제노아, 로마, 시칠리아섬, 몰타, 스페인의 팔마 드 마요르카, 발렌시아, 프랑스 마르세이유를 여행했다. 하나 여행사를 통해 갔는데 10명이상이 안 되면 어렵다는 것을 힘들게 부탁해서 6명이 갔다. 돌아와서 만난 지인에 의하면 현지로 가서 크루즈 선박사와 직접 거래하면 좀 저렴할 것이라고 하니 의향이 있는 분은 알아보기 바란다. 승객과 승무원을 합쳐 5,000명이 탑승한 14만톤급 배 프리지오사는 아파트 17층 높이로 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운행되었다. 전날 과제를 처리한다고 밤을 새웠고 6월 초에 있는 많은 약속과 행사를 포기했다. 다른 일정과 겹쳐 많은 대가를 치르며 다녀 온 셈이다. 배에는 숙박시설, 식당, 공연장, 수영장 등 모든 시설이 있어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배에 있을 때는 잠을 줄이고 시간을 최대로 활용하여 춤 배우고 공연 보며 수영하고 헬쓰하며 수시로 식사하고 차 마시는 등 세상일을 잊고 자유롭게 보내는 호사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돌아 올 때가 되니 너무 힘들어 병이 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10일 이상 크루즈 여행은 무리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밤새 배로 가다가 기항지에 도착하면 현지 투어를 다녔다. 크루즈 여행은 배에서 숙식이 가능하고 시간을 경제적으로 활용하여 여행하는 것이 가능하여 미국과 유럽에서는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같이 간 친구들도 일정조정으로 힘들어 했지만 다들 잘 다녀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하며 즐겼다. 어느새 회갑을 맞이한 친구들과 남은 삶은 여유롭고 품위있게 살자는 것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70세까지 5년마다 다른 곳으로 크루즈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 목표를 정하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두고 볼 일이다.
- 2016-08-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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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연극연출가 이윤택 인터뷰-⓸
- 얘기를 하다 보니 '시니어 연극'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이윤택의 작품에서 중요한 중심인물이 바로 어머니다. 와 , 최근작 (오타 쇼고(太田省吾) 작·연출·일본)까지 나이든 여성이 주인공이다. 2014년에는 여든 한 살의 배우 오순택이 열연한 를 연출했다. 노배우가 무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던 이 연극은 이듬해 제4회 대한민국 셰익스피어어워즈 대상과 연출상을 받았다. 7월 7일부터 7월 24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아트홀에서 ‘첫사랑이 돌아온다’는 윤대성이 쓴 희곡으로 치매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사랑이야기다. 지난 6월말 부산 초연 이후 서울에서 처음 하는 공연이다. “내가 연출을 맡았는데 치매 걸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서로 남남인데 할머니는 기억상실증이고 할아버지는 완전히 치매인데 처음 보는 할머니를 보고 자꾸 첫사랑이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할머니는 아니라고 하다 헷갈리다가 아 내가 이 남자의 첫사랑이었구나 그래되는 과정입니다. 웃기면서도 감동적입니다." 이윤택은 실버세대를 위한 연극이 필요하다면서 내년에는 같은 악극을 공연할 계획이라고 한다. 연극을 접해보지 못한 시니어 참여 연극의 가능성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미 시도는 해봤다고. “밀양에서 을 할 때 밀양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밀양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공동체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밀양은 서로 집중 되는 힘이 있거든요. 공연하기 전 저희에게 욕을 하던 할머니도 연극을 하고난 뒤 너무 고마워했어요. 내 인생에 내가 어떻게 배우로서 무대에 설 수 있었겠느냐면서요.” 세계적인 많은 연출가들이 나이가 들면 아동극이나 실버극을 시도하지만 사실 어렵다고 했다. 일본의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타 쇼고(太田省吾)가 극단을 해체하고 실버극을 시도했었으나 실패했다. 타데우스 칸토르(1915~1990·폴란드)의 경우 성공했지만 식자층이었던 자신의 친구들를 모아 을 공연한 것은 성공했었다고. 꾸준히 시니어 배우, 공연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이윤택이기에 시니어세대를 위한 연극을 힘들겠지만 계속해서 시도해주기를 부탁드린다.
- 2016-07-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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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연출가 이윤택 인터뷰-⓵연극, 지역에 뿌리를 내리다
- 1980년대, 이윤택(李潤澤·64·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칼을 갈 듯 날카로운 기운으로 연극계 안을 찢고 등장했다. 부산에서 극단 ‘연희단거리패’와 함께 연극을 시작한 이윤택. 맹렬한 전투력으로 1990년대 서울 연극 중심에 깃발을 깊숙이 꽂더니 ‘이윤택’ 아니면 볼 연극이 있나 싶을 정도로 무섭게 판세를 뒤엎었다. 무대와 객석을 호랑이처럼 맨발로 뛰어다니며 연출하던 모습은 늘 뇌리에 남아 있다. 21세기를 앞두고서는 새로운 연극의 뿌리를 내려 보겠다며 이윤택은 고향 땅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최고로 기 센 사람이라 여겼던 그는 지금,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백발(白髮)의 방랑자로 풀밭 위를 걷고 있다. 이윤택은 6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이 시대를 대표하는 연극 연출가로 살고 있다. 독자에게는 강부자의 (이하 오구)이나 손숙의 가 이윤택이 쓰고 연출한 작품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부산을 기반으로 1990년대 서울 연극계를 점령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만들며 얻게 된 ‘문화게릴라’라는 별명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을 듯싶다. 지역 곳곳에서 거의 매일 정신없이 무대가 올라가기 때문에 좀처럼 인터뷰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6월의 첫날, 그것도 오전 시간이 괜찮다는 말에 새벽같이 일어나 한참을 차로 달려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본거지 도요창착스튜디오(경남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로 이윤택을 만나러 갔다. 한창 서울에서 연극을 하다 작정하고 밀양연극촌(경남 밀양시 부북면 가산리)으로 연희단거리패가 찾아 들어간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17년 전 일이란다. 도요로 옮긴 지도 7년이 됐다. 현재 밀양에는 30여명 도요에는 40여명의 단원이 생활하고 있다고. 한적한 시골에 젊은이들이 많이 있는 것 또한 진풍경이었다. 올해로 제16회를 맞이하는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7·27~8·7) 주제는 바로 ‘연극, 지역에 뿌리를 내리다’. 실제로 지역에 연극이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지 궁금했다. “여름이 되면 한국연극의 장이 밀양으로 넘어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연극이 지역에 뿌리를 내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 근래에 한국 연극계 전체가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있습니다. 첫째는 시대적인 어려움이죠. 즉, 20세기가 인문주의가 중심이었다면 21세기는 ‘엔터테인먼트의 시대’입니다. 두 번째는 서울의 대학로가 예전에는 연극인들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대단한 상업지구로 바뀌어 버렸어요. 마산, 거창. 춘천, 안동, 과천 등의 지역 연극축제가 없어졌습니다. 과천은 경마축제가 됐고요.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밀양시와 협업이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올해 참가팀을 보더라도 오태석, 박정자 같은 원로들부터 박근형, 임형택. 극단으로는 백수광부, 청우, 골목길, 목화 등이 참여합니다. 대학극 수준도 상당히 높아져서 경복대학은 정약용을 주제로 한 창작 역사 뮤지컬 을, 서울예대는 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2016-06-2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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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국남 뉴컬처 키워드] 남자스타 ‘흥행 독식’ 왜?
- 38.8%라는 근래 보기 힘든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한 KBS 드라마 흥행 일등공신은 수많은 여성 시청자의 가슴을 설레게 한 남자 주연 송중기다. 올해 들어 한국영화 중 970만 관객을 동원하며 2016년 상반기 최고 흥행작으로 기록된 주연은 강동원 황정민, 두 남자 배우였다. 10년 넘게 방송되면서 예능 최강자로 군림하는 MBC 은 유재석 박명수 등 6명의 남자 멤버들이 이끌고 있다. 의 조승우와 의 김준수는 출연 작품마다 매회 티켓매진 기록을 수립하는 뮤지컬계의 최고 흥행 파워 스타다. 최근 들어 드라마, 영화, 예능, 뮤지컬에서 남자 스타 주도의 흥행이 대중문화의 강력한 트렌드로 떠올랐다. 최근 원톱 남자 주연 혹은 남-남 투톱 주연의 영화나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했지만, 여성 스타들이 주연으로 전면에 나선 작품들은 시청자와 관객의 외면을 받아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은 남자 스타 전유물로 전락한 지 오래돼 여성 멤버들이 주축이 된 여성 예능 프로그램은 보기조차 힘들어졌다. 남자 스타의 티켓파워가 강력해 조승우나 김준수의 뮤지컬의 회당 출연료는 2000만~3000만원 선으로 여자 스타의 출연료를 압도한다. 영화계에선 근래 들어 남자 원톱 혹은 투톱 주연의 영화들이 흥행을 주도하고 있다. 최근 1~3년 사이에 송강호가 주연으로 나선 을 비롯해 황정민의 , 최민식의 , 류승룡의 , 황정민 유아인의 등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남자 원톱 혹은 투톱 주연의 영화였다. 그리고 600만~9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 역시 마찬가지다. 황정민의 , 이병헌의 , 황정민 강동원의 , 송강호 이정재의 , 유아인 송강호의 , 하정우 한석규의 , 김수현의 등 모두 남자 스타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다. 반면 여자 스타들이 전면에 나선 영화들은 흥행 참패를 면치 못했다. 2014년 상영돼 866만 명이 관람한 손예진 주연의 , 865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심은경 주연의 등 극소수의 작품을 빼놓고는 최근 여자 주연을 내세운 영화들은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올해 들어서도 여자 주연으로 눈길을 끈 영화들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하고 있다. 마지막 기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100억원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 는 한효주와 천우희, 두 명의 여자 스타가 주연으로 전면에 나서 개봉 전 기대를 모았지만 50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흥행 참패를 맛봤다. CGV가 지난 1월 열린 ‘2016 CGV 영화산업 미디어포럼’에서 발표한 관객 101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도 남자 스타 영화 흥행 파워 판도를 잘 보여준다. 흥행 파워를 의미하는 ‘믿고 보는 배우’를 묻는 조사에서 40.1%의 지지를 얻은 황정민이 1위를, 28.2%의 강동원이 2위를 차지했다. 다음은 송강호, 하정우, 최민식 유아인 이병헌 순이었고 10위 안에 포함된 여자 스타는 10위를 차지한 전지현이 유일했다. 전통적으로 여자 스타들의 흥행 파워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드라마에서도 최근 들어 남자 스타들의 시청률 상승 주도력이 크게 상승했다. 시청률은 높지만 화제성에서 떨어지는 홈드라마를 주로 방송하는 일일드라마나 주말극의 경우, 여자 스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지만, 화제성과 신드롬 진원지 역할을 하는 주중 드라마나 미니시리즈, 사극에선 남자 스타들의 흥행 파워가 여자 스타들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해 20%대의 시청률을 돌파하며 화제가 됐던 SBS 는 남자 주연으로 나서 연기대상까지 거머쥔 주원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올해 들어 주중 드라마로 첫 20%를 기록한 SBS 미니시리즈 역시 남자 주연을 맡은 유승호가 흥행 일등공신이었다. 시청률 40%에 육박한 는 남자 주연 송중기가 인기 견인차였다. 시청자의 좋은 평가 속에 12~17%로 월화 드라마 시청률 1위로 지난 3월 22일 막을 내린 도 유아인 김명민 등 남자 주연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대하사극 역시 정통 드라마로 11~14%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기록한 데에는 타이틀롤을 맡은 송일국의 힘이 컸다. 3월 28일 시작된 KBS , MBC , SBS 등 세 방송사의 새 월화 드라마들도 각각 박신양, 강지환, 장근석 등 남자 스타를 전면에 내세워 시청자 눈길 잡기 경쟁을 펼치고 있다. 또한, 4월 20일부터 방송된 SBS 는 지성의 원맨쇼라고 할 만큼 원톱 주연 지성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4월 27일부터 시청자와 만나고 있는 KBS 드라마 역시 천정명 조재현 두 남자 주연의 활약이 눈에 띈다. 물론 주말극이나 일일극에선 여자 주연들의 활약이 여전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여성 주연의 전유물이라는 주말극과 일일극에서도 남자 주연의 흥행 파워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예능 프로그램 역시 남자 스타 천하다. MBC , KBS , tvN , jTBC 등 근래 들어 남자 멤버들이 활약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육아를 비롯한 관찰 예능, 쿡방과 먹방 프로그램들이 홍수를 이루면서 여자 예능 프로그램은 완전히 설 자리를 잃었다. 남자 예능 프로그램의 득세 속에 4월 8일부터 여성 예능을 표방하며 시청자와 만나는 KBS 는 시청률이 3~5%로 기대 이하 성적을 내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MC도 남자 스타들이 독식하고 있다. KBS SBS jTBC 의 유재석, MBC SBS jTBC 의 김구라, KBS SBS jTBC 의 강호동을 비롯해 이경규 이휘재 전현무 김성주 등 남자 예능 스타들이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의 MC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다. 반면 메인 MC로 나선 여자 예능 스타들은 만나기가 어렵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는 음악 예능 프로그램에도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MBC 의 김성주, 의 성시경 유세윤 백지영, KBS 의 신동엽, SBS 의 이휘재 성시경, 의 전현무 등 백지영을 제외한 방송 3사 음악 예능의 MC들이 모두 남자 스타들이다. KBS 등 방송 3사 연예대상 수상자 판도는 남녀 예능 스타의 흥행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2년 1회 신동엽 부터 2015년 14회 이휘재까지 KBS 연예대상에서 여자 대상 수상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MBC는 2000년 1회 박경림 이후 2015년 15회까지 여자 대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SBS는 2009년 3회 연예대상에서 유재석 이효리가 공동 수상한 이후 남자 스타들이 대상을 독차지했다. 최근 들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며 2000억원대(2015년 기준) 시장규모를 보이는 뮤지컬 분야에서도 남자 스타의 흥행 견인 트렌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월 1일부터 6월 5일까지 공연한 은 조승우 조정석 윤도현 변요한 등이 인기를 견인했고 이중 조승우는 전석 매진 기록을 세우며 한국 최고 뮤지컬 흥행 스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등 출연작마다 흥행 대박을 터트린 김준수를 비롯해 홍광호, 한지상, 유준상, 정성화 등 남자 스타들이 강력한 팬덤을 구축하며 뮤지컬 흥행을 이끌고 있다. 이처럼 영화와 예능, 드라마, 뮤지컬 등 대중문화에서 남자 스타들이 대중문화 흥행을 이끄는 트렌드를 구축한 것은 대중문화의 주도적 소비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뮤지컬의 강력한 수용자인 젊은 여성 관객과 시청자가 주로 남자 스타의 작품들을 왕성하게 소비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영화나 예능프로그램, 드라마, 뮤지컬에 출연한 남자 스타들을 왕성하게 소비하고 강력한 팬덤을 보이는 젊은 여성들은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터넷과 SNS 등을 통해 화제와 관심을 촉발하는 ‘홍보전령사’ 역할까지 해 남자 스타의 흥행 파워를 상승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또한, 투자자나 제작자, 방송사들이 여자 스타의 작품이나 프로그램은 외면하는 대신 경쟁적으로 남자 스타 위주의 작품을 쏟아내는 것도 대중문화의 남자 스타 흥행 독식을 부채질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중문화 평론가 정덕현씨는 “남자 스타들의 흥행 주도력이 높아지면서 남자 주연을 내세운 작품들은 장르, 내용, 소재면에서 새로운 것들이 많이 나오고 진화를 거듭해 시청자나 관객들이 선택의 폭이 많다. 이에 비해 여자 스타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은 매우 적어 대중의 선택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을 뿐더러 작품의 스펙트럼도 좁아 대중의 외면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 2016-06-21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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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도서] <댄싱 위드 파파>의 아빠 이규선X딸 이슬기가 이야기하는 꿈같은 여행 이야기
- 7년에 걸쳐 200여 일 동안 15개 나라, 111개 도시를 여행한 부녀의 이야기를 담은 . 아빠와 딸은 낯선 여행지에서 동고동락하며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소소하고 꾸밈없는 그들의 여행기 속에는 진한 가족의 사랑이 담겨 있다. 여행이후 가장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고 말하는 부녀, 이규선ㆍ슬기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딸ㆍ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 (아빠) 딸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아빠, 배낭여행 가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무심히 “인도가 좋다던데”라고 했는데, 옆에서 들은 아내가 “인도 위험하지 않을까? 당신도 같이 갔다 오지”라고 해서 둘의 여행이 시작됐다. 처음 특별한 목표는 없었다. 단지 딸의 보호자로 다녀오자는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떠났다. (딸) 방학 마다 홀로 장기 여행을 다녔다. 인도로 여행지가 선정되자 엄마는 걱정이 되었는지 아빠와 함께 가는 건 어떠냐고 물어보셨고, 은퇴 후의 아빠가 조금은 심심해 보여서 아빠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여행을 하며 힘들었던 점 (아빠) 멋모르고 따라나선 여행이라 특별히 준비단계에서 힘든 점은 없었다. 배낭을 꾸리는데 정말 신기하고 신이 났다. 그러나 인도는 여행초보가 감당하기에는 처음 며칠간은 거의 공포수준이었다. 또한 품안의 자식인 줄로만 알았던 딸이 “이거는 이렇게 해라, 이거는 하지 마라”라는 등 잔소리로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놀라움과 함께 섧기도 했다. 그때만큼 한국에 있는 아내가 보고픈 적은 없었다. 처음엔 여행 끝나고 집에 가서 복수(?)를 단단히 하리라 하고 그냥 참았는데 나중에는 방어 차원에서 가끔 대들기도 했다. (딸) 배낭여행을 처음 떠나는 아빠를 친구와 함께 간다고 착각(?)하고 비행기표 구입 30분, 배낭 꾸리기 한 시간, 그리고 여행 책 한 권을 사서 가방에 넣고는 여행 준비를 끝냈다. 초반에는 하루에 열 번, 아니 그 이상을 싸웠다. 한 번은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는 사태도 벌어졌지만, 믿을 사람은 그 넓은 곳에 아빠와 나뿐이었다. 긴급한 상황에 서로 의지하느라 자연스럽게 동지애로 똘똘 뭉쳐졌다. 싸우는 건 어쩔 수 없다. 싸우면서 친해졌다. 여행을 하며 서로에게서 발견한 점 (아빠) 딸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본 딸의 모습은 거의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얘가 언제 이렇게 커 버렸지, 이런 면도 있었구나, 저런 강단도 있었네, 나의 유전자에 저런 면도 있다니 무척 신기하기도 했다. 훌쩍 커 버린 모습에 대견하면서도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다. (딸) 내가 아는 아빠는 ‘아빠와 가장’이라는 책임의 가방을 메고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 아빠는 내게 ‘이규선’이라는 한 사람으로 다가왔다. ‘이규선’은 꿈과 희망, 열정으로 가득 찬 멋진 남자이자, 내가 아끼는 한 사람이다. 다시 여행하고 싶은 곳 (아빠) 인도다. 처음은 늘 아쉬움과 그리움이 배가된다. 그땐 너무 몰랐기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시 간다면, 보이고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다. 피하지 않고 정말 즐기고 싶다. 물론 그때도 딸이 옆에 있다면 좋겠다. 더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치고, 슬기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딸) 아빠와 함께 한 처음 여행지, 인도다. 아빠와 늘 이야기 한다. 다음에 가면 카메라 하나만 메고 가보자고. 바닥에 깔린 똥도 신나게 즈려 밟아보자고. 여행 후 서로에게 생긴 변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빠) 여행을 갔다 온 후 아빠와 딸이라는 수직적 관계에서 이젠 거의 동지애를 느끼는 친구가 되었다. 대화거리도 풍부해졌고, 딸이 무엇을 하던 “자신의 의지대로 올바른 길로 가고 있구나”라는 보다 확실한 믿음도 가지게 되었다. (딸) 내가 무엇을 하든 믿어줄 든든한 동지가 생겼다. 딸/아빠와 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아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무조건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분신인 자식과의 여행은 부모를 행복한 추억 부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딸)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끼는 사람과 친해질 기회다. 가능하면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은 곳으로 떠나자. 우리에겐 인도의 열차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히말라야 산장이 그런 곳이었다. 부녀가 함께 계획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아빠) 첫 번째 책은 딸아이의 생일에 맞춰서 냈는데, 두 번째는 나의 생일이 있는 올해 6월에 나올 예정이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슬기의 “아빠 여행 같이 갈래?”라는 말이 떨어지면 “내 새끼에게 여행이 필요한 무언가가 생겼구나”라고 단박 눈치채고 “콜”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딸) 6월에는 엄마와 배낭여행을 떠난다. 가능하다면 그다음 여행은 엄마·아빠와 함께 떠나고 싶다. 두 분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을 사진과 글로 담고 싶다. >>>>>>>>>>>>>>>>>>>>>>>>>>>>>>>> 아빠 이규선 30년간 다닌 은행에서 퇴직 후, 시골에서 자연인으로 살고 있는 ‘딸 바보’. 딸 이슬기 삼성맨을 그만두고, 놀이·공연·강연을 기획하는 액션건축가로 활동하는 ‘추억 부자’.
- 2016-05-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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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지금은] 전설의 ‘70가수’들 ‘2016’에 응답하다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 포기가 돋아나오고…’ 길거리 음반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다. 중장년이라면 금세 알지만 10~30대 젊은 층은 거의 모르는 노래다. 1970년대 활동했던 정미조(67)가 부른 ‘개여울’이다. 그 정미조가 37년 만에 대중 곁으로 돌아왔다. 정미조뿐만 아니다. 정미조처럼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다 활동을 중단했던 가수들이 최근 대중음악계에 속속 복귀하고 있다. 지난 3월 14일 서울 그랜드힐튼 호텔 로비에서 꽃다발을 든 50~70대 수십 명이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함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35년 만에 가요계에 복귀하는 포크 1세대 가수 박인희(71)였다. “살아가면서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 못 했다. 잠깐 노래했었고 좋아하던 방송을 하다가 떠났는데 이렇게 많은 분이 기다려 주시고 만나 볼 기회를 주시다니 너무 감격스럽다. 내 음악을 잊지 못하는 팬들을 보고 앨범 하나 만들자는 꿈을 품게 됐다.” 1981년 미국에 이민 가면서 대중음악계를 떠났다가 35년 만에 대중 앞에 다시 나선 박인희는 한창 활동했을 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특유의 단아함은 잃지 않았다. 1970년대 혼성듀엣 ‘뚜아에무아’ 출신인 박인희는 1972년 솔로로 나선 뒤 모닥불’, ‘끝이 없는 길’, ‘그리운 사람끼리’, ‘세월이 가면’, ‘봄이 오는 길’ ‘방랑자’ 등 서정성이 강한 멜로디와 가사의 포크 음악을 직접 만들어 큰 사랑을 받은 1970년대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였다. 또한, 박인희는 맑고 청아한 음성으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등 시를 낭송한 음반으로도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박인희의 트레이드마크인 통기타와 긴 생머리, 그리고 나팔바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박인희는 4월 30일 서울 콘서트를 시작으로 일산, 수원 등 전국 투어에 나섰다. 박인희는 “가을께 새 앨범도 낼 계획이다. 최근 만든 곡이 60곡쯤 된다. 내게 맞는 곡은 내가 부르고 만든 곡에 맞는 가수가 있으면 줄 것이다. 가수 박인희보다 싱어송라이터로서 넓은 의미의 음악 속에 살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박인희…정미조…중장년팬들 가슴 설레 “가수로 복귀해 너무나 기분 좋습니다. 이젠 제 삶을 노래로 들려줄 때인 것 같아요.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뿐만 아니라 저를 새롭게 아는 분들에게도 가수 정미조가 어떤 가수인가를 보여주고 싶어요.” 인기 최정상이던 1979년 전격 은퇴를 한 뒤 37년 만에 대중 앞에 다시 선 정미조다. 차분하고 매력적인 보이스로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으로 1970년대 스타 가수로 명성을 날렸던 정미조가 지난 2월 전격 복귀해 수많은 대중의 시선을 끌었다. 정미조는 1979년 은퇴에서 2016년 복귀까지 기간을 제목으로 한 앨범 ‘37년’을 발표하며 가수로서 대중을 다시 만났다. ‘귀로’ ‘인생은 아름다워’ ‘7번 국도’ 등 재즈, 발라드, 탱고, 보사노바까지 다양한 장르의 세련된 신곡과 중장년층 뇌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등 자신의 히트곡을 함께 담은 새 앨범은 정미조를 기억하는 중장년 팬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인기 절정의 1979년 가요계를 전격적으로 은퇴하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정미조는 이후 교수 생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가요계를 떠난 지 35년이 흐른 2014년 만난 최백호가 앨범 발표를 권유하며 음반 제작자를 소개해 준 게 컴백의 계기가 됐다. 정미조는 수원대 조형학부 서양화과 교수로 정년퇴임(2015년)을 앞둬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노래에 대한 그리움이 터져 복귀 용기를 냈다고 했다. 음반 발매와 함께 가요계로 돌아온 정미조는 지난 4월 10일 콘서트를 갖는 등 가수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이에 앞서 33년간의 공백을 깨며 2014년 6월 새 앨범 ‘It’s Not Too Late’를 들고 복귀한 섹시 디바의 원조 김추자(65)는 무대를 통해 대중을 지속해서 만나고 있다. 1969년 신중현에 의해 발탁돼 가요계에 데뷔한 김추자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도발적 퍼포먼스,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거짓말이야’, ‘꽃잎’, ‘님은 먼 곳에’,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1970년대 한국 최고의 여가수로 우뚝 섰다. 1970년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에서 알 수 있듯 김추자의 인기는 엄청났다. 김추자의 복귀 이후 활동은 그녀를 기억하는 중장년 팬과 그의 노래를 거미, 조관우 등 수많은 후배 가수의 리메이크로 접한 신세대들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가며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 ‘70가수’ 음악, 한국 대중음악 스펙트럼 확장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두 명의 남자 가수도 최근 복귀해 중장년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목회 활동을 하다 2014년 신곡 ‘걱정을 말아요’ 등이 담긴 데뷔 55주년 기념 앨범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복귀한 윤항기(73) 역시 4월 30일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나의 노래, 나의 인생’이라는 타이틀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윤항기는 1959년 대한민국 최초의 록밴드라 할 수 있는 키 보이스(Key Boys)의 멤버로 데뷔, 가수 생활 57년째를 맞았다. 1974년 솔로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이거야 정말’ ‘나는 행복합니다’ 등 숱한 히트곡을 내며 스타 가수로 맹활약했다. 윤항기는 “나는 57년 동안 음악을 떠나 생활한 적이 없다. 그룹과 솔로는 물론 성직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음악을 했다. 나같이 나이 많은 70대 가수들이 설 방송과 무대가 없어 안타까웠다. 나 같은 원로 가수들도 계속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에서는 70대 이상의 훌륭한 가수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존경도 받고 있다”며 여전한 현역 가수임을 강조했다. 윤항기는 가을부터 전국투어에 나설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신드롬을 일으키며 높은 반응 속에 1월 16일 막을 내린 tvN 드라마 에서 라미란이 불러 유명해진 ‘황홀한 고백’의 원곡 가수 윤수일(61)도 1970년대 가수 컴백 대열에 합류한 스타 가수 중 한 사람이다.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데뷔해 ‘아파트’ ‘황홀한 고백’ 등으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윤수일은 4월 24일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열린 ‘윤수일 밴드 40주년 콘서트’를 계기로 무대 공연과 방송활동을 재개했다. 윤수일은 “세월이 화살 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여전히 나는 가수다. 내 노래를 기본적으로 활동하면서 후배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35년 만에 복귀한 박인희를 비롯해 정미조, 김추자, 윤항기, 윤수일 등 1970년대 가수들이 다시 대중 앞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것은 최근 들어 신중년의 문화소비가 증가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장년층이 젊은 날을 함께했던 1970년대 가수들의 음반 구매와 공연 관람을 많이 하면서 신중년 가수들이 속속 대중음악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한, 같은 드라마나 KBS 같은 음악 예능프로그램에서 1970년대 음악을 소개하거나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대중문화 전반에 1970~1980년대 복고바람이 거세지면서 1970년대 가수에 관한 관심이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젊은 층에서도 높아진 것도 1970년대 가수 복귀 붐의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부에선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가수들의 복귀가 새로운 트렌드와 진화, 완성도 높은 음악, 탄탄한 가창력의 담보 없이 복고 바람에 기대어 단순한 추억팔이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한다. 하지만 1970년대 가수들의 복귀 바람은 대중음악계와 대중에 긍정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의 노래와 함께했던 중장년층에게 젊은 날의 추억을 선사할 수 있고 신세대에게는 1970년대 음악의 문양과 특성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요즘 신세대 가수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연륜과 정서가 담긴 60~70대 가수들의 음악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것도 긍정적인 부분이다.
- 2016-05-1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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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공연] 아내,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의 삶을 노래하다 <맘마미아>의 이재은 국내 협력 연출
- 세계적인 팝 그룹 아바(ABBA)의 히트곡 22곡을 엮어 만든 뮤지컬 . 1999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첫 무대를 올린 후 미국, 독일, 프랑스 등 49개 프로덕션, 440개 주요 도시에서 60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만났다. 한국에서는 2004년 초연 이후 1200회 공연, 150만 관객을 돌파하며 중년 여성들의 호응을 얻은 작품이다. 2004년 조연출을 시작으로 12년 동안 해오며, 이번 공연의 국내 협력 연출을 맡은 이재은 연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맘마미아 연출을 맡게 된 계기 2004년부터 조연출을 시작으로 12년 동안 해온 작품이에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엔 연출을 맡게 됐죠. 즐겁고 신나는 무대 연출로 주목받아온 뮤지컬이지만, 이번에는 드라마적인 요소를 더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지금까지의 공연과 비교한다면? 국내 뮤지컬 중에 중·장년 배우들이 주인공을 맡고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작품이 드물죠. 배우 최정원(도나 역)·이경미(로지 역)·성기윤(샘 역)씨 같은 경우에는 2004년 공연에는 30대였지만, 이번 공연에는 실제 맡은 배역과 가까운 연령대가 됐어요. 그러면서 역할에 대한 이해도도 더 높아지고 풍부한 감정을 연기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탄탄하게 작품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배우들과 12년 동안 함께 해온 제작팀의 내공이 더해졌으니 가장 완성도 높은 공연이 되지 않을까요? 그게 이번 공연의 강점이라 생각해요. 중년 배우들의 열정을 확인하는 순간 연륜이 있는 배우일수록 열정이 훨씬 높다고 생각해요. 다른 뮤지컬에 비해 중·장년 배우가 많은 편인데, 젊은 친구들과는 다른 열의를 느낄 수 있어요. 단순히 열심히 하는 젊은이들의 패기 이런 것과는 다른 노련미가 느껴지죠. 실제로도 공연을 위해 준비도 많이 하고요. 중·장년 관객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장면 1막에 타냐와 로지가 도나의 침실에 마주앉아 “우리도 젊었었지. 그때는 그랬었지”하며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어요. 주인공들의 대화처럼 중·장년 관객도 저마다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잖아요. 함께 끄덕끄덕하며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예요. 2막에는 엄마가 시집가는 딸을 위해 드레스를 입혀주는 장면이 있는데 그 부분도 엄마와 딸들에겐 인상 깊죠. 그 외에도 도나(엄마)와 소피(딸)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모녀가 함께 보면 가슴 뭉클한 장면이 많아요. 아바(ABBA)의 음악으로 채우는 작품, 가장 반응이 뜨거운 노래는? 단연 ‘The winner takes it all’이 아닐까 생각해요. 20년 만에 첫사랑을 만난 도나가 “너를 보고 엄청나게 설레었지만, 그동안 난 정말 괜찮았어. 괜찮았어. 괜찮았어…”라고 해가며 참고 참다가 결국 “그런데 있잖아. 나 너무 힘들었어”라며 솔직하게 감정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죠. 애써 감정을 숨기는 도나의 모습이 안타깝고 슬퍼요. 그런 감정선을 따라가다가 도나의 노래를 들으면 감동은 배가되죠. 실제로도 많은 관객이 꼽는 명장면이기도 하고요.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는지 모녀가 와도 좋고, 친구끼리 와도 좋지만 특히 갱년기를 겪는 어머니들이 오셨으면 해요. 도나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지금도 늦지 않았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나이야. 나도 이렇게 나이 들었지만 좀 더 젊게 살아볼까? 새로운 것을 시작할까?”하는 자신감을 얻어갈 수 있을 거예요. 어쩌면 첫사랑이 생각날지도 모르겠어요. 공연 뮤지컬 일정 6월 4일까지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폴 게링턴/국내 협력 연출 이재은 출연 최정원, 신영숙, 전수경, 이경미, 홍지민 등
- 2016-05-0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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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공연] 모성애에 울고 추억의 음악에 웃는 뮤지컬 <친정엄마>
- 공연 뮤지컬 일정 4월 7일~6월 19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연출 손효원 출연 정애리, 박정수, 이재은, 박탐희, 안두호 등 고혜정 작가의 실화가 담긴 소설 를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 가 모녀 관객들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그동안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된 작품으로 이번에는 추억의 음악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무대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까지 한 딸을 늘 어린아이처럼 걱정하는 엄마와 무뚝뚝한 딸의 갈등과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평범한 모녀의 모습에 공감하면서, 그 속에 담긴 모성애에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더불어 남진의 ‘님과 함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등 추억의 가요를 들으며 회상에 젖는 기회를 마련한다. 다가오는 가정의 달에도 이어지는 뮤지컬 는 세대를 넘나드는 감동의 무대를 통해 가슴 훈훈한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 2016-04-2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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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빈의 문화공감] 재즈의 고향 뉴올리언스, '즉흥 음악’의 감동 아직도…
- 앞서 소개한 샹송, 칸초네, 탱고 등은 처음부터 다른 음악들과는 약간은 차별화된 느낌으로 접하게 되었지만 재즈는 어느 틈에 슬그머니 다가온 것 같다. 앞서 영화 이야기에서 소개했던 에는 재즈 코넷 연주자 레드 니콜즈(다니 케이 분), 루이 암스트롱 등이 등장하여 20곡 이상의 재즈 명곡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대학교 때 본 여러 미국영화의 주제가나 배경음악은 물론 뮤직홀에서 듣던 음악 중에도 많은 재즈음악이 있었다. 그러나 재즈라기보다는 다만 듣기 편안하고 감미로운 미국음악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센트루이스 블루스’, ‘테이크 파이브’, ‘테이크 더 에이 트레인’ 유럽의 명곡 ‘고엽’, ‘맥 더 나이프’ 등을 본격적인 재즈로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재즈의 참맛을 알게 되었다. 빌리 할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이나 냇 킹 콜, 프랭크 시나트라, 토니 베넷 등의 보컬재즈도 다른 팝송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재즈는 미국이 독립하기 전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 점령당했으며 독립 후에는 흑인 노예시장의 중심지였던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에서 유럽의 다양한 음악과 흑인노예의 애환이 담긴 아프리카의 복잡한 리듬이 합쳐져 만들어진, 즉흥성이 매우 강한 미국음악이다. 그 시작은 19세기 말 행진곡에서 양식을 빌려온 피아노음악인 래그타임(Ragtime)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첫 번째 재즈 뮤지션으로 기록되고 있는 사람은 코넷 연주자인 흑인 찰스 버디 볼든(Charles Buddy Bolden)이다. 1895년 처음 선보인 그의 6인조 밴드는 래그타임을 즉흥양식으로 연주해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뉴올리언스의 여러 밴드들이 집단적인 즉흥양식의 연주를 했다. 이러한 연주가 인기를 끌자 흑인들을 멸시하는 백인들조차 이를 모방하였으며 1917년에는 이들의 오리지널 딕시랜드(Dixieland, 미국 남부지방을 지칭함) 재즈밴드가 첫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뉴올리언스 시대를 장식한 초기 재즈 뮤지션으로는 1908년부터 활동한 조 킹 올리버(Joe King Oliver)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솔로 대신 집합 즉흥연주 스타일을 창안했고, 루이 암스트롱을 길러냈으며 뮤트(약음기)를 창안해서 연주에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음악의 중심이었던 베이진 스트리트에서 1917년 3명의 해군병사가 살해되어 이 거리가 폐쇄되자 올리버는 1919년 연주 무대를 시카고로 옮겼고, 다른 흑인 뮤지션들도 그 뒤를 따랐다. 무대가 시카고로 옮겨진 뒤 이 음악에 재즈(Jazz)란 이름이 붙었다. 올리버가 이끌던 킹 올리버 크리올(Creole, 유럽인과 현지인 또는 흑인 혼혈) 재즈 밴드의 시카고 시대 절정기는 1920년대 초로, 트럼펫의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하여 다른 연주자들의 즉흥 솔로 연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1927년에는 마피아를 피해 뉴욕으로 옮겨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한 그 유명한 ‘코튼 클럽’에서 활동하면서 재즈의 뉴욕시대를 열었다. 경제공황을 극복한 미국의 사회상을 반영하듯 신나는 댄스음악인 스윙재즈가 1930년대를 휩쓸었다. 밴드의 규모가 커져 소위 빅 밴드(Big Band)시대가 시작되었고 베니 굿맨, 글렌 밀러, 듀크 엘링턴 등이 맹활약을 했다. 2차 대전 중 침체의 길을 걷던 재즈는 전후 기존 재즈의 틀을 완전히 바꾼 비밥(Bebop)이 등장하여 모던재즈의 효시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쿨(Cool) 재즈, 하드 밥(Hard Bop)에 이어 퓨전(Fusion) 재즈에 이르기까지 재즈는 다른 장르의 음악들과는 달리 매우 다양하게 진화하면서 오늘날까지도 많은 재즈 팬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1997년 6월, 명지대에서 공과대학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텍사스 A&M대학과의 자매결연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틈을 내어 평소에 적어도 한 번은 꼭 가고 싶던 재즈의 본고장 뉴올리언스를 방문하였다. 집사람과 함께 오전에 200여 년 전의 프랑스풍 주택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주택가 등 시내관광을 끝내고 오후에는 말로만 듣던 대망의 프렌치 쿼터로 갔다. 먼저 강가로 가서 강변도로(Riverwalk)를 거닐며 말로만 듣던 미시시피 강의 경치를 구경한 후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잭슨 스퀘어와 그 앞에 있는 세인트루이스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프렌치 쿼터의 중심 격인 버본 스트리트로 가보니 길 양쪽에는 크고 작은 재즈 바(Bar)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노상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양쪽 길가에서 들려오는 재즈를 만끽하며 거닐다가 ‘Razzberrie Ragtimers’라는 간판이 붙은 한 바가 마음에 끌려 들어가 보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을 때라 필자가 집사람과 함께 들어가자 약간은 의아한 듯이 맞아주었다.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센트루이스 블루스를 청하자 동양인이 그런 곡도 아느냐는 듯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리가 모자라 합석했던 한 젊은 미국여자는 열심히 일해 돈이 모이면 이곳에 한 번씩 다녀가는 것이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했다. 저녁 8시에는 전통적 뉴올리언스 재즈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프레저베이션 홀에 가서 45분간에 걸쳐 당대 최고 재즈 뮤지션들이 연주하는 ‘성자들의 행진(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 ‘세인트루이스 블루스’ 등 10여 곡의 귀에 익은 금쪽같은 연주를 만끽하였다. 재즈를 이야기하자면 지금은 주로 R&B(리듬 앤 블루스)를 부르지만 본래는 재즈가수로 출발한 고교동창의 딸 서영은 양의 주례를 섰던 일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 2016-02-2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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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8 2막에서 이룬 꿈] 성악가로 제2의 인생을 향해 한 걸음 내딛다
- “대학생일 때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죠. 고등학교 때는 시골에 있었으니 좀 여유 있게 놀 수 있었죠. 노래를 좋아했어요. 주위에서 목성이 좋다고 하고 발음도 명확하다며 성악을 하라고 하더군요.” 한영섭(韓永燮·61)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성악이라는 자신의 오랜 꿈을 더듬어보기 위해 10대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갔다. 그만큼 오래된 꿈을, 그는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이루게 됐다. 지난해 12월 10일 꿈에 그리던 무대에 서서 그간 갈고닦은 자신의 실력을 선보인 그에게 꿈을 이룬 제2의 인생 담론을 들어본다. 운동에 재능이 있고 배짱이 있었던 한영섭 인간개발연구원 원장은 얼떨결에 교련 과목에서 연대장을 맡게 됐다. 당시 교련은 굉장히 비중이 큰 과목이었다. 그래서 방과 후에 교련 연습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구령을 하려면 목소리를 키워야잖아요. 산에 가서 차렷, 열중쉬어를 많이 외쳤어요. 마이크 없이 질러대는 거예요. 그때 목이 많이 개발됐죠.” 대학교를 다니면서는 레코드를 자주 사게 됐는데, 특히 가곡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인생의 노래로 꼽는 곡도 그때 만나게 됐다. 양명문의 시에 변훈이 곡을 붙인 가곡 ‘명태’였다. “다른 가곡들도 좋았지만 ‘명태’를 듣는 순간 이런 노래가 있구나 싶었어요. 엄청나게 따라 부르면서 외우곤 했죠. 학교를 다닐 때도 부르고 버스 안에서도 부르고. 그렇다고 성악의 길을 간 건 아니고 그보다는 좋은 공부를 해서 직장을 가야겠다 싶어 전경련에 들어갔어요.”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그가 전경련에서 맡은 건 CEO 교육이었다. 그래서 연사를 초청하다 보니 당연히 그중에 성악가들도 있었고, 그들과 자연스럽게 친하게 됐다. 그런데 그들의 공연을 보다가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런 무대에 서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혼자서만 불렀지 교육을 받은 건 아니잖아요. 노래는 사사를 받아야 하더라고요. 우연한 기회에 감성CEO 오페라 과정에 들어가서 성악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명태’를 부르는 걸 보고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1막에 나오는 ‘Non piu andrai(더 이상 날지 못하리)’를 부르라는데 다른 사람은 다 2분 내에 끝나는 노래인데 이 노래는 5~6분 되는 거예요. 악보가 일고여덟 장 돼요. 다 이탈리아죠. 처음에는 자신 없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살아온 내공이 있는데 그걸 못하랴 싶었어요.” ‘더 이상 날지 못하리’가 한 원장 손에 쥐어진 건 2015년 5월 중순. 연습 시간은 한 달. 그는 집에서 엄청나게 연습했다. 횟수로 세진 않았지만 천 번은 거뜬히 넘었다고 한다. “재미도 있지만 외우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다행스러운 게 비슷한 패러그래프가 반복된다는 거였는데, 그게 또 헷갈려요. 반복이 정기적으로 되면 되는데 엇박자로 가는 게 있더군요. 그리고 노래가 경쾌하다보니 템포가 굉장히 빨라요.” 안 좋은 기억이 생기면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연습을 하다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지난해 7~8월 휴가 때 제주포럼에 가서 한 번 불러본 후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 달 뒤에 그를 가르치던 분 앞에서 자신 있게 이 노래를 다 불렀다. 그러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그걸 노래라고 불렀어요?’ 그러더라고. 충격 먹었어요. 자신 있게 했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을 할까. 상처가 됐죠. 일주일 정도 지난 다음에 선생님에게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긍정적으로 얘기해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얘기하면 학생에게는 상처가 됩니다’라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아, 그렇게 해야 다시 노력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하더군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질책은 잘못한 거죠.” 그러나 예순 살의 나이에 겪게 된 그런 강렬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 원장은 자신의 노래를 계속 가다듬었다. 혼자 알아서 해야 했던 연습이기에 박자가 안 맞고 숨을 엉뚱한 데서 쉬는 등의 실수를 나중에 가르침 받았다. 감정에 치여 좌절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에 제가 평행봉을 잘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손에 땀이 너무 나니까 평행봉을 하다가 떨어졌어요. 하필 비탈에 떨어지면서 배를 쫙 긁혔죠. 보통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운동을 단념해요. 철봉이 꼴도 보기 싫어지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때 더 열심히 했어요. 안 좋은 기억이 있을 때, 그 지점에서 더 열심히 하면 이겨낼 수 있는데 쇼크를 받아서 안 하면 완전히 멀어지는 것 같아요. 이번 경우에도 그런 쇼크를 받았어도 계속 코치를 받고 발전하려고 노력했죠.” 잠재력을 증명한 열정의 무대 “하고 싶은 노래를 하니 좋은 점이, 내가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했다는 거죠. 그리고 전경련을 나와서 인간개발연구원에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 수 있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나이를 들어서 꿈이 없으면 추하다는 말이 있다. 지금 그가 꾸고 있는 꿈의 모습은 무엇일까? “올해 5, 6월즈음 개인 발표회를 하려고요. 한 곡 한 곡 사사를 받아 날 좋을 때 발표를 해야겠다 싶어요. 제가 바리톤으로 7~8곡은 부르고 소프라노 한 분, 테너 한 분 모셔서 함께 공연하는 식으로 진행하면서 단독으로 개인 발표회를 해보고 싶어요.” 그는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가동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살아 있음을 감지한다. 그 잠재력을 모두 동원해 자신의 꿈을 향해 점점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때 행복해한다. 그는 노래를 할 때 행복감이야말로 사는 이유라는 것을 알았다. 노래는 혼자 있어도 그를 행복하게 해주었고 그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줬다. 이렇게 꿈을 이룬 그에게 꿈에 대한 다른 시선을 물었다. 그는 꾸준한 노력이 함께하지 않는 꿈은 몽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발을 움직여 스스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며 꾸준히 노력하고 직접 몸으로 맞서 꿈을 이룰 것을 조언했다. “간절하지 않으면 꿈꾸지 마세요. 간절히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은 분명하지 않으면 안 돼요. 막연한 간절함이 아닌 ‘반드시 이렇게 하고 싶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지와 다짐이 분명한 간절함이 필요해요. 24시간 먹고 자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간절하게 바라면 어느 순간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일과 즐거움이라는 두 마리 토끼 그는 전경련에서 33년 3개월을 보냈다. 초년기 중년기를 거기서 다 지낸 것이다. “산업사회에 기여하는 조직으로서 훌륭한 직장이었죠. 송충이는 솔잎만 먹는다고 저는 다른 데서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요. 조찬회를 만들어 회사를 좋은 방향으로 가게끔 하는 훌륭한 경영자 스토리를 교육하고 정치, 외교, 통일 안보에서 훌륭한 사람을 데려와 그쪽 교육도 진행했습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이 저에게 그 장을 마련해준 거죠. 혼자 그걸 만들려면 엄청나게 어려워요. CEO지혜산책을 만드는 등 제게 그런 지식과 기회를 만들어준 곳입니다.” 인간개발연구원은 30여명의 기업인이 1975년 조찬 공부 모임으로 창립한 인간개발경영자연구회를 모태로 설립돼 지금까지 사람 중심의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한 세미나 등 각종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그는 인간개발연구원 경영대상 시상식 준비에 바쁜 와중에도 공연에 대한 열정이 샘솟는다. 일과 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하는 그의 인생 2막의 다음 무대가 기대되는 이유다. 한영섭 원장과의 1문1답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어렸을 적부터 성악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취업과 생활을 위해 바쁘게 살아야 했습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성악가들의 공연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부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CEO를 위한 오페라 과정에 참여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게 됐습니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릴 적 꿈은 운동선수였으나 지금은 꿈을 이루고 나니 나만의 개인 공연을 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로맨틱한 서정시를 음악으로 낭송하는 행위가 얼마나 멋집니까. 완전히 몰입된 감정 상태의 시인이 돼 노래하고 싶습니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노래에 빠져 있는 동안 저는 훌륭하게 부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선생님(스승)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서 호된 질책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난 이후부터가 어려움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슨 색? 성악을 색깔별로 표현하면 노래마다 다르긴 한데, 특히 가을에 부르는 성악은 완전히 익은 갈색 같아요. 그런데 모차르트의 노래는 경쾌하고 파릇파릇한 게 초록색 같습니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자신의 한계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 자체가 좋았습니다. 그저 잠재력이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걸 증명해냈다는 거죠. 그리고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취미를 하나 만들었다는 것도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 2016-02-18 1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