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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6월에 생각하는 어느 소녀의 기억 1. 2. 3
-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하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일이 큰일 중 큰일이었던 기억,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대청마루를 지나칠 때 발바닥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마루 촉감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또 겨울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서 그리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당의 뾰족지붕이 겨울밤 투명한 마루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던 기억도 뚜렸하다. 뾰족지붕에 돌려져 있는 색등 때문에 선명한 삼각형이 된 성당 지붕은 심지어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어린 소녀의 눈에 요지경처럼 들어왔다. 소녀의 집과 성당 사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던 시절 반짝이는 삼각형 지붕은 소녀에게는 까만 밤하늘의 디즈니월드 이상이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서서 바라본 반짝이던 성당 지붕 크리스마스 불빛의 황홀했던 환상도 뇌리에 깊이 박힌 추억이다. 싸인지라고 불렀던 파스텔톤 빛의 색 도화지를 두 살 위 언니를 졸라 겨우 얻어냈을 때의 기억. 아마 소녀는 죽을 때까지 이 보잘 것없는 기억들의 불씨를 마음속 깊이 살려 둘 예정이다.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서울로 옮기면서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1년 이상의 원조 주말 부부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인솔 하에 대식구 모두가 소녀가 4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왔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소녀는 나중에야 해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셨던 어느 여름날 삼덕동 시절. 소녀는 할머니, 고모, 어머니가 대청마루에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지나간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소녀가 우연히 들은 그 얘기는 이랬다. 엄마가 소녀의 언니를 막 뱃속에 가질 때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당시 군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여서 전쟁터로 나가는데 면제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인민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전황이 매우 급해졌다. 장소 불문하고 아무 준비 안 된 사람이라도 눈에 띄는 민간인 남자는 군복도 없이 삼엄한 감시하에 무조건 전쟁터로 차출됐다는 것. 그런데 그즈음 외출 중이던 소녀의 아버지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민간인 행렬은 전쟁터로 향하는 첫발을 떼면서 삼덕동 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을 지나가다 소녀의 아버지는 윗옷 호주머니에 단단히 꽂아뒀던 ‘보물 1호’ 파카 만년필을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담장 밑에 던져진 소녀 아버지의 만년필을 발견하고 사태를 짐작한 남은 식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낮에 붙들려 걷기 시작한 행렬은 만 하루 이상을 걷다가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이름 모를 곳에서 잠시 쉬게 된다. 잠시 후 곧장 전쟁터로 가서 군복도 없이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든, 잘못되면 국군에게 총살당하더라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이 둘뿐인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을 소녀의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한다. 칠흑 같던 밤 행군을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밤 마침내 불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퉁이마다 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나게 된다. 아무 결정권이 없는 처음 만난 군인은 소녀의 아버지를 미군에게 데리고 간다. 모든 각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게 된다. 당시 영어가 신통치 않았을 아버지와 미국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민간인 신분과 산달이 가까운 아내 얘기를 미군에게 하였다. 아버지와 뜻이 통한 미군은 아버지를 통과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곳에서 만나게 될 보초를 통과할 수 있는 메모까지 써준다. 군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외국 군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소녀의 가족은 건재할 수 있었으며, 소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갓 여고를 졸업했던 20세 남짓 된 소녀의 고모는 어느 날 외출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으로 들어와 식구들을 기겁시켰던 얘기도 소녀는 곁들여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2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 ‘국제극장’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을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환란. 초등학교 시절 ‘상기하자 한국전쟁'의 달을 맞아 글짓기, 포스트 그리기 시간이 돌아오면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소녀 가족 환란의 이야기는 소녀에게 혼자만의 비밀이 되어 시시때때로 그 비밀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회의 규칙에 조금씩 눈 떠가며 민간인이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이해된 소녀는 비로소 혼자의 비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지금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쓴 장편 소설 ‘25시’를 생각해낸다. 소녀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명동성당 앞 중앙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읽어본 소설 ‘25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게르만도, 유대인도 아니고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와 그의 가족이 역사 속의 희생물로 바쳐져 버린 슬픈 비극의 운명이 떠오른다. 요한 모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유대인, 연합군, 다시 미ㆍ소의 소용돌이 속에 끝없이 갇혀버린 어이없이 허무한 인생의 이야기지만 요한 모리츠, 그의 이름은 온갖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난의 운명에 처하는 약소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또다시 돌아온 6월에 이제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 소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철없이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와 식구를 놀래게 했던 고모, 그들이 60년도 훨씬 전에 걸어왔던 그 길과 혼자 간직했던 비밀들이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 나 아무도 몰래 그 시절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본다.
- 2016-06-15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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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행복추구 모든 것 <번영학>에 담았죠” -3년 걸쳐 인생 역작 펴낸 이형구 전 노동부 장관
- 1964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경제기획관, 경제기획국장, 재무부 차관보, 재무부 차관, 한국산업은행 총재 등을 거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위해 살아온 이형구(李炯九·76) 전 노동부 장관. 대개 한 분야에서 탄탄대로 삶을 산 이들은 자기계발서나 자서전을 쓰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방법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일생의 사명감을 가지고 쓴 을 통해서 말이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8년 이 전 장관이 출간한 에서 그가 제시했던 문제들에 대한 결론이 담긴 책이 바로 이다. 단순 명료한 책 제목만 보아도 이전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경제 관련 일을 해왔기 때문에 책을 낸 것은 아니다. 은 그의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자 사명감, 후세대를 위한 바람이 담긴 ‘인생작’과 같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며 시원스럽게 이야기하는 그다. “2005년에 세종대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면서 준비했던 책이 입니다. 번영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건을 역사, 정책, 문화적 상황에 따라 설명했어요. 그 책을 쓰면서 꼭 그에 대한 결론을 내는 책을 쓰고 죽겠다고 결심했었죠. 한 10년쯤 후에 쓸까 했는데 여러 가지 상황으로 그보다 훨씬 앞당겨 쓰게 됐어요.” 그가 예상보다 책을 일찍 쓰게 된 이유 중 하나가 2008년 리먼브라더스 파산 사태다. 번영학은 신자유주의의 경쟁을 바탕으로 한 시장 논리와 ‘경제하려는 의지(will of economize)’를 바탕으로 한다. 리먼브라더스 사건은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시장이 왜곡되면서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를 무너뜨렸다. 갑작스러운 경제 상황의 변화로 그는 하루라도 일찍 펜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인위적인 통화 공급으로 인해 신자유주의가 무너져버렸죠. 여러 가지 발전 전략이나 가치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신자유주의의 가장 기본이 경쟁이거든요. 발전하려는 의지가 중요한데, 우리나라로 치면 1970년대 새마을운동을 예로 들 수 있죠. 신자유주의의 경쟁체제를 가지고 개발도상국 시대의 발전의 의지를 접목하자. 거기에 정부의 역할이 조금 확대돼야 한다는 게 번영학의 기본이자 의 결론과 같아요.” 모두 다 한번 잘살아 보세~ 번영(繁榮)이란 번성(繁盛)과 영화(榮華)를 이른다. 번성은 객관적으로 번창하고 풍성한 상황, 즉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한 경제적 풍요를 의미한다. 영화는 주관적으로 느끼는 호화로움과 영예를 뜻하는데, 객관적인 경제적 의미보다는 사회적 의미의 주관적 상황과 개인의 행복을 뜻한다. 따라서 번영이란 경제적으로 풍족한 조건과 더불어 개인의 영예, 행복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할 수 있겠다. 거기에 현재의 번영이 미래에도 지속 가능할 것이냐에 대한 확신이 뒤따라야 한다. “만약 내가 현재 연간 소득이 1억원이라 하면, 10년 후에도 1억원이면 되겠어요? 현재보다 발전한 소득수준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돈이 많다고 행복한가? 그 돈이 영예로워야 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도둑이 훔친 돈으로 잘 먹고 잘산다고 하면 소득 수준에는 문제없겠지만 내 가족이나 이웃에는 떳떳하지 못하잖아요. 나를 번창하게 하는 그 돈이 영예로워야죠.” 그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관용을 베푸는 것 또한 중요한 덕목이라고 했다. 그래야 개인의 삶의 질 향상은 물론, 공동체의 행복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 “과거에 우리는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았잖아요. 하루 한 끼 먹기도 힘들었는데, 그런 내가 삼시 세 끼 챙겨 먹으면 행복하지 않겠어요? 소위 절대빈곤 타파라 하는데, 그저 세 끼 먹는다고 만족할까요? 매일 채소만 먹는 것보단 고기반찬도 먹고 해야 좋을 거 아녜요. 그게 생활의 질이에요. 그러면 내가 좋은 반찬을 배불리 먹는다고 행복할까요? 이웃도 잘 먹고 잘살게끔 관용을 베풀 줄 알아야죠. 그래야 ‘저 사람 참 훌륭하다’는 인정도 받고 개인이 자랑스러워질 수 있는 거예요. 상대에 대한 관용과 인정이 행복 조건의 중요한 가치입니다.” 현재 삶의 행복 점수, 70점 행복 가치 추구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는 그에게 자신은 얼마나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70점 정도”라고 대답했다. 이 전 장관은 현실적으로 채우지 못하는 30에 연연하기보다는 소소하게 채워진 70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글을 쓰는 일도 행복하고, 손주를 보는 것도 즐겁죠. 다들 그런 재미로 사는 거 아니겠어요? 집 근처에 서재를 마련했으니 글을 쓰고 싶거나 책을 읽고 싶을 때는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런 것도 행복해요. 이번에 책을 내고 동료들이 의견을 내서, 실제 관련 일을 했던 이들 중심으로 한국번영학회를 설립하기로 했어요. 6월에 시작하는데, 내가 일을 벌였으니 학회장을 맡았죠. 근데 뭐 그게 일인가요. 이제 나이 들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일종의 놀이인 셈이죠. 아주 즐거워요.” 아쉬운 30점에 대해서도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돈을 좀 더 잘 모아둘 걸 하는 마음은 있어요. 그랬다면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해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봉사나 기부도 그렇고요. 그런데 내가 재벌이나 기업가도 아닌데 돈이 그렇게 많으면 되겠어요? 그리고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괜찮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아주 주관적인 평가거든요. 본인이 기준을 잘 설정해서 만족하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도 얼마나 많겠어요. 아쉬운 점은 있지만 고맙게 생각해야죠. 나름의 기준은 있어 점수를 매길지는 모르지만, 사실 지금 나이에 그것에 좌지우지되거나 큰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현재의 삶이 행복하고 고맙다고 말하던 그는 인터뷰 중 올해 1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떠올렸다. 인터뷰 전 날이 바로 어버이날이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잘해주는 것도 좋지만, 자신이 챙겨드릴 부모님이 이제는 안 계시다는 것이 못내 허전하다고 했다. 해마다 어버이날이면 부모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드리려고 노력했던 그다. 그렇지만 마음은 편안하다고.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부모님 덕분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5년 전에, 어머니는 100세를 사시고 금년 1월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1990년대에 고향집을 떠나 서울로 오셨어요. 그때부터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사는 여의도에 집을 마련하시고 생활을 하셨죠. 아마 두 분이 계속 시골에 사셨더라면 부모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적었을 것 같아요. 근처에 사시니 매일 보고 이야기도 하고 무엇이라도 해드릴 수 있었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분들이 나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지금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고마운 일이죠.” 진정한 은퇴 라이프의 시작 3년을 투자한 끝에 출간한 . 자기만족만을 위해 썼다면 그만큼 책임감을 느끼며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 후손들을 위한 지침서 역할을 하리라는 바람을 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로 대학교 4학년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그때도 참 보람 있고 좋았어요.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큰 보람은 사무관부터 시작해 최고위직에 이르기까지 나라 경제계획에 참여했다는 거예요. 힘든 점도 많았지만 가슴 뿌듯한 일이 더 많았죠. 다른 점에서 볼 때 난 그다지 특별한 사람은 안 되지만, 그만큼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서는 특별한 사명감을 느껴요. 개인적으로 나를 위해 했던 일도 아니니 후세대를 위한 무언가를 남겨야죠. 그들이 보고 ‘과거의 경제 계획은 이랬구나. 이러한 이론이 있고 상황은 어떠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말이죠.” 그는 자신은 잠시도 가만있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다. 실제 일을 할 때도 해외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일했고, 테니스와 골프 등을 즐겼으며, 요즘도 중국어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원에 다닌다. 하지만 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3년간은 해외 일정이나 모임 등을 자제하고 원고 작성에만 몰두했다. “책 출간하느라 바빠서 운동도 잘 못 다니고 해외도 거의 못 나갔어요. 대학교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흔히들 말하는 은퇴 라이프가 다소 건조하긴 했죠.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오히려 나를 더 충만하게 하고 즐거움을 줬는지도 모르겠어요. 최근까지는 원고를 쓸 때가 가장 즐거웠으니까요. 정말 죽기 전에 꼭 하자 하는 것을 이뤘으니, 이제 죽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며 지내려고 해요.” 노인이 되지 말고, 어르신이 되라 그가 지금까지 낸 책은 모두 경제와 관련된 전문서적들이다. 그 스스로 이야기할 정도로 남들이 선망할 만한 일을 많이 해왔는데도 자서전을 낼 생각은 없다고 한다. 자신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노년기 삶에서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 그런 데에는 아내의 조언이 한몫했다. “아내에게 매일 듣는 말이 ‘노인네가 되면 안 돼요. 어르신이 돼야 해요’입니다. 상당히 좋은 충고라고 생각해요. 노인네가 된다는 게 뭐겠어요. 목소리 높이고 잔소리하고 대접받으려 하고 그런 거잖아요.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저 사람 참 잘 늙었구나’해야 어르신이 되는 거죠. 전에는 경제정책 운용과 관련해서 정부가 뭐를 한다 그러면 언론에 글도 쓰고 그랬어요. 근데 요새는 그런 것도 안 하고 있어요. 그렇게 떠들어봐야 늙은이 잔소리니까요.” 그는 최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에 관한 글을 읽고 본받아야겠다고 느낀 점이 있다고 한다. 김 교수의 사위가 쓴 글이었는데, ‘장인어른은 가족 문제나 자식 일에 대해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자식이나 손주의 일에 가능한 한 나서지 않고 간섭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외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밥 먹고 생각하는 게 늘 나라 경제 운용에 대한 것이니까, 물론 얘기야 하고 싶죠. 내가 볼 때 잘못됐다고 느낀 것이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나 왜 없겠어요. 그렇지만 내가 현재의 장관이며 총리며 하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고 내 생각처럼 바뀌겠어요? 아니거든요. 결국 잔소리거든요.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에 담았어요. 거기에 그동안 살면서 쌓은 경험, 지식, 조언 등이 담겨 있으니 자서전과 다름없지요.”
- 2016-06-1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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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영화] 6월에 다시 만나는 <세 가지 색: 블루>
- 최근 로베르토 베니니(Roberto Benigni)가 연출·주연을 맡은 영화 가 17년 만에 국내 박스오피스에 이름을 올렸다. 재개봉(4월 13일) 9일 만에 5만 관객을 돌파한 데 이어 18일 차에 10만 관객을 모으는 등 기분 좋은 흥행성적을 냈다. 이 외에도 , , 등을 다시 스크린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영화는 상영 기간이 끝나고 나면 과거에는 비디오, 요즘은 DVD나 TV 영화 채널, 인터넷 동영상 다운로드 등을 통해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작은 화면으로 보는 것은 커다란 영화관 스크린으로 웅장한 사운드를 곁들여 보는 것보다 감동이 덜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한 번, 또는 여러 번 봤던 작품이라도 재개봉 소식이 들리면 영화관을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 1994년 국내 첫 개봉 이후 2009년 재개봉했던 영화 를 2016년 6월 다시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게 됐다. 프랑스혁명 이념을 바탕으로 파란색(자유), 하얀색(평등), 빨간색(박애)을 주제로 만든 세 가지 색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이다(두 번째 , 세 번째 ). 어두운 푸른 빛 물결 배경과 대조되는 흰 피부의 여성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을 응시하는 모습이 담긴 포스터는 영화를 보지 않은 이들도 한 번쯤은 봤을 정도로 다양한 패러디나 디자인에 활용됐다. 포스터 속 여인인 프랑스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Juliette Binoche)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게 되며 절망에 빠지는 주인공 줄리역을 연기했다. , 등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그녀는 같은 해 개봉한 세 가지 색 시리즈 영화에 모두 출연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0세였다. 이제는 50대 중년이 된 줄리엣 비노쉬의 젊은 시절 모습과 순수한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재개봉 영화만의 매력이다. 영화는 ‘자유’를 주제로 했지만 다소 음울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오히려 그런 점이 작품의 무게감을 더하고, 관객에게 진정한 내면의 자유에 대해 곱씹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외에도 장 자크 아노 감독의 ,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 오우삼 감독의 등도 6월 극장가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개봉 1994년 4월 재개봉 2009년 1월, 2016년 6월 장르 드라마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출연 줄리엣 비노쉬, 베누아 레전트, 플로렌스 퍼넬, 샤롯 베리 등
- 2016-06-0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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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세계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 1위,오스트리아 빈
-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 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6-05-2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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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국남 뉴컬처 키워드] OTT에 푹~ TV 시대 막내리다
- ‘제로 TV’ ‘코드 커팅’ ‘N 스크린’…전통적 TV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용어들이다. 1995년 1~2월 시청률 60%대를 돌파한 방송 시간에는 거리가 텅텅 비었다. 를 보기 위해 TV가 있는 집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는 ‘귀가시계’”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2016년 4월. 한국과 중국 동시에 방송돼 양국에서 신드롬을 일으키며 4월 14일 막을 내린 KBS 수목 미니시리즈 를 보기 위해 집으로 뛰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지하철 등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을 통해 드라마를 시청했다. 본방송을 보지 못한 사람은 편한 시간에 인터넷의 다시보기를 통해 를 봤다. 또한, 상당수는 날을 잡아 방송 콘텐츠 서비스 사이트 푹(pooq) 등을 이용해 16회 모두를 한꺼번에 몰아보기(binge-watching)를 했다. 중국에서는 TV가 아닌 동영상 사이트 아이치이를 통해 방송돼 중국 네티즌들은 웹과 스마트폰을 통해 를 시청했다. 방송 시간에 맞춰 안방 TV를 통해 를 보던 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의 시청 양태에서 드러나듯 유무선 인터넷 통신 기술의 비약적 발전, 스마트 기기의 엄청난 진화, 방송과 통신의 왕성한 융합은 영상 콘텐츠의 소비 형태와 시청 패턴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TV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 전통적 TV 시대 퇴장의 이면에는 유료 케이블 TV, 지상파 TV 등 셋톱박스를 이용한 TV 중심의 영상 콘텐츠 소비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동영상 콘텐츠 시청으로의 전환이 자리한다. 즉 OTT(Over The Top)의 강력한 부상이 전통적 TV 시대 종언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TV 콘텐츠를 인터넷을 통해 소비하고 이 새로운 서비스는 TV 방송의 죽음을 가져온다”는 ‘인터넷의 아버지’ 빈트 서프(Vint Cerf)박사가 2007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한 말이 현실화하고 있다. TV 수상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가구, TV가 있지만 사실상 TV 수상기를 통해 방송을 보지 않고 스마트폰이나 노트북, 태블릿PC 등을 이용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제로 TV’ 가구가 급증하고 있다. 최근 들어 1인 가구가 늘어나면서 제로 TV 가구가 가파른 증가세를 보인다. 한국미디어패널에 따르면 2014년 현재 국내 제로 TV 가구는 전체 가구의 4.4%에 달한다. 지난해 발표한 KT경제경영연구소의 보고서 ‘영상시청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르면 10, 20대의 TV 외 기기를 통한 영상 시청 비율은 각각 58.8%, 53.8%로 절반을 넘어섰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영상 서비스의 이용이 급증하면서 케이블 방송 및 위성방송, IPTV 등 오프라인을 기반으로 한 기존 유료방송 이용자들의 가입해지 즉 ‘코드 커팅(cord cutting)’을 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 케이블 TV 등 미국의 유료 TV 가입자 수는 2015년 현재 9500만 명인데 2014년 한해 미국 상위 13개 유료 TV 사업자의 가입해지자는 12만5000명에 달했다. 미국처럼 코드 커팅 가구가 급증한 것은 아니지만, 국내에서도 점차 유료방송 가입을 해지하고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하나의 콘텐츠를 TV, 스마트폰, PC, 태플릿PC 등 다양한 기기를 통해 이용할 수 있는 ‘N 스크린’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도 급증하고 있다. 스마트 기기의 등장과 진화로 인해 N 스크린 시대가 본격화하면서 방송사와 이동통신사들이 경쟁적으로 N 스크린 서비스를 시작하고 있다. KBS, MBC, SBS, EBS 등 지상파 방송사는 푹(pooq)을, 종합케이블방송사업자인 CJ 헬로비전은 티빙(Tving)을 각각 운영하고 있다. SK텔레콤의 호핀(hoppin) 등 이동통신사들도 N 스크린 서비스를 하고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2014년 서울·경기 및 6대 광역시 거주자 1만28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N스크린 서비스 이용률은 20.3%에 달했다. ‘제로 TV’, ‘코드 커팅’, ‘N 스크린’ 등 전통적인 TV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인터넷 기반의 동영상 콘텐츠 소비 시대를 이끄는 것은 바로 OTT다. OTT는 디지털망을 통해 비디오 서버로부터 전송된 압축 신호를 가정에 있는 TV에서 볼 수 있도록 원래의 영상과 음성신호로 복원해주는 Top(Set Top Box)을 넘어서는 서비스를 뜻하는 것으로 인터넷 기반의 동영상 서비스를 총칭하는 용어다. 미국의 경우 OTT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다. 2015년 현재 4200만 명의 가입자를 보유한 넷플릭스를 비롯해 훌루 플러스, 아마존 프라임 인스턴트 비디오 등 OTT 서비스를 이용하는 미국 가입자는 5030만 명에 달한다. 국제 컨설팅업체인 PWC에 따르면 미국 OTT 시장 규모는 2015년 64억 달러에서 2019년 126억 달러로 두 배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전망됐다. 국내 OTT 시장 역시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인다. OTT 서비스 사업자인 CJ의 티빙 가입자는 2015년 현재 700만 명으로 지난 2010년 30만 명에서 23배 증가한 것을 비롯해 SK의 호핀 가입자는 450만 명, KBS 등 지상파 TV가 운영하는 푹 가입자는 300만 명에 달한다. 시장조사업체 스트라베이스에 따르면 국내 OTT시장 규모는 2013년 1490억원에서 2016년 3069억원, 2019년 6345억원, 2020년 7801억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KBS 등 지상파 TV 콘텐츠연합 플랫폼의 푹, CJ 헬로비전의 티빙, 현대 HCN의 에브리온 TV, SK텔레콤의 Btv 모바일, KT의 올레 TV 모바일, LG의 U+HDTV 등 실시간 방송 중심의 6개 OTT 업체가 주도하는 국내 OTT 시장에 최근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1월 세계 최대 OTT 업체인 미국 넷플릭스가 한국 시장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막강한 콘텐츠, 개인 소비자 취향과 라이프 사이클을 고려한 콘텐츠 추천, 신작 드라마 전편 동시 공개를 비롯한 다양한 동영상 서비스 마케팅 전략 등으로 국내 이용자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면서 국내 사업자들도 긴장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저가의 한국 유료 TV 방송과 넷플릭스의 한국 서비스 콘텐츠 부족을 들어 넷플릭스의 영향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서비스 콘텐츠를 늘리고 봉준호 감독의 신작영화 를 넷플릭스에만 공개하는 등 본격적인 마케팅이 시작되면 넷플릭스의 영향력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에 따라 ‘한국판 넷플릭스’를 표방하는 플랫폼 사업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SK브로드밴드의 ‘옥수수’, 왓챠 프로그램스의 ‘왓챠 플레이’ 등 월정액만 내면 영화와 드라마를 무제한으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넷플릭스처럼 개인이 선호하는 콘텐츠도 알아서 골라주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국내에 OTT 서비스가 본격화하고 이용자가 급증하면서 OTT 서비스 중심으로 방송시장이 재편될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무선 통신과 인터넷, 스마트 기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주문형 비디오와 시간, 장소와 관계없이 콘텐츠 이용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또한, 2015년 6월 현재 유선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 1947만 명, 이동전화 가입자 5787만 명, 와이브로 가입자 83만 명으로 네트워크 측면에서 OTT 서비스가 대중화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조성된 것도 OTT 시장 부상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물론 콘텐츠 한계, OTT 이용 비용, 저가의 유료방송 등의 이유로 OTT 서비스의 성장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도 제기되고 있지만, 이용자의 동영상 콘텐츠의 소비패턴이 TV 중심에서 인터넷 기반으로 옮겨가면서 OTT의 대세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OTT 서비스는 기존의 TV 콘텐츠 이용에서의 시공간적 제약을 해체하며 채널 선택권이 아니라 개별 프로그램 선택권을 보장한다. 편성권이 개개인 소비자에게 있는 셈이다. OTT 서비스는 개인화된 시청 소비습관을 가진 현대인에게 적절한 맞춤 서비스다”는 배기형 KBS PD의 말은 OTT가 왜 부상하는지의 근본적인 원인을 설명해준다.
- 2016-05-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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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슬픈 가족사
- 나에게는 슬픈 가족사가 있다. 아버지는 뭇매를 맞았다. 아버지는 오봉산 꼭대기에 숨어 있었으며, 거기는 증조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어서 의지가 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고, 북으로 도망치는 인민군에게 발각돼 아버지는 혼쭐이 났다. 우리 집은 인민군의 숙소가 됐고 주인인 아버지는 눈치를 보느라 산 속에서 지냈다. 그 와중에 우리 큰 고모는 겁탈하려는 미군을 피해 달아나다, 그 충격으로 정신병자가 됐다. 논까지 부쳐 시집을 보냈지만 고모의 시아버지 장례를 마치고는 하얀 소복을 입은 채로 친정 마루 끝을 올랐다. 집안은 날마다 한약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하얗고 예뻤던 고모는 아주 슬프게 객사를 했다. 이런 쓰라림을 간직한 채 나는 지난 6월 1일, 복지관에 강의를 하러 갔다. 어르신의 글쓰기 제목으로 '6월이 오면'을 지정했다. 6.25전쟁을 겪은 사람은 그 기억을 적도록 했고, 사변 후 태어난 사람은 6월이면 생각나거나 들은 이야기를 쓰도록 했다. 영화 속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어르신들은 또박또박 적어 발표했다. 그 중에서 한 어르신은 백병원 앞에 살았는데 아버지가 유지인 관계로 아버지를 찾아내라고 어머니를 거꾸로 매달아 막대기로 때렸다. 치마가 엄마의 얼굴을 덮었다. 엄청 울었던 꼬맹이, 그 때가 여섯 살 이었다. 한강을 건너려고 하니 얼음이 얼었었다. 강을 건너던 미군이 머리를 쏙 내밀고 그대로 얼어가고 있던 광경보다 어머니의 고문이 더 슬프게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겪지 않았다는, 어르신은 연속극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써서 발표했다. 아버지는 군의무대에 근무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쫓기고 있었다. 그 당시 처녀들을 마구 잡아갔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군인들 속에 숨겨주었다. 간호사라고 말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 때 어머니는 따로 사랑하던 남자가 있었다.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그 남자를 떨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가셨고, 어머니는 87세다. 나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이 났다. 어르신들은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마음속에는 커다란 상처가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어릴 적 트라우마는 우울증과 연관이 있다고 하며, 그 아릿한 모습이 잊혀 지지 않는단다. 6월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유전자가 되어 흐르는 이런 아픔이 희미해지는 날이 올까.
- 2016-05-12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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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 6월엔 늘 가벼워저야
- 6월이면 으레 옷장을 정리한다. 겨울옷과 여름옷을 바꿔 넣고 내친김에 잡동사니들도 버리느라 대청소로 접어들곤 한다. 올해도 손쉬운 서랍장부터 열어 본다. 재킷 속에 받쳐 입었던 목 긴 스웨터와 짧은 소매 스웨터가 엉켜 있다. 원래 계절이 바뀔 즈음엔 서랍 속 내용물이 엉키기 마련이다. 가끔은 계절을 거스르는 날씨 탓이다. 중년을 넘어서면 점점 어울리는 옷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배에 군살이 늘어나서 티셔츠 밖으로 살이 툭툭 튀어나와 더워 보이기 일쑤다. ‘유행은 지났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색이라, 어울리지 않아 몇 번 못 입었지만 비싸게 산 것이라’ 등 버릴 수 없는 이유가 달라붙은 채로 몇 번의 계절을 왔다 갔다 했다. 그래도 모진 맘 먹고 대부분 포기하기로 했다. 서랍장의 판결이 끝나면 키 큰 옷장에서 코트와 트렌치 코트, 원피스, 긴 바지, 긴 치마를 꺼내 한쪽 횃대에 뭉텅뭉텅 건다. 이번엔 크기가 큰 옷이니 좀 더 신중히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나중에 다시 찾으며 버린 걸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 대목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일단 찻물부터 끓인다. 향긋한 커피를 내리고 신선한 우유를 부으며 커피를 만든 뒤 최대한 천천히 마시며 눈으로는 횃대에 널린 덩치 큰 옷들을 관찰한다. 그 옷이 적절한 용도인가, 내가 입은 모양새는 어떤가, 유행을 너무 타서 흔해지지 않았나, 너무 낡지는 않았는가 등을 살펴본다. 이제 변호사와 검사는 실용과 추억과 감성에 호소하는 변설을 늘어놓는다. 흰색과 진회색이 섞인 플레어 코트. 수입매장에서 언니는 검은색 슈트를 샀고 나는 이 코트를 입고 아주 기뻐했다. 나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 안에 앵두색 재킷을 입고 거래처를 많이 돌아다녔었다. 실적이 좋은 호시절을 함께 보냈던 옷이다. 지금도 그 옷을 입으면 능력 있는 여성의 표정으로 변한다. 복고풍 코트라고 아이들은 무성영화 보는 것 같다고 장난도 친다. 그래도 다시 옷장으로 넣는다. 이제 긴 치마가 나온다. 옆이 터져서 우아하고 관능적인 모양새다. 조끼와 한 벌인데 조끼는 종종 입어도 치마는 손 놓은 지 3년은 됐다. 허리가 굵어져 살 빼고 입는다며 다시 넣곤 했지만 그 살은 영영 안 빠지고 있다. 마지막은 스카프 서랍 차례다. 서랍엔 붉은색과 검은색, 흰색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부드러운 사각 스카프가 있다. 신혼 시절 철없던 우리는 별것 아닌 거로 서로 잘 삐치고 화해하고 요구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 웃을 때 마주 보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고, 돌아누워 잔다고 섭섭해 하고…. 행복과 불행이 같은 공간에서 숨 가쁘게 출렁거렸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은 출장에서 나의 삐침에 대한 보상으로 이 고급스러운 스카프를 예쁘게 포장해서 들고 왔다. 난 너무 기뻐서 그의 목에 매달리며 감사를 10번도 더 했다. 그리고 귀한 자리마다 보물 목록 1호로 함께했었다. 이제 남편은 가고 없다. 그의 빈자리에서 스카프가 미소를 보낸다. 안녕! 하지만 이 스카프, 유행을 놓쳐도 한참 놓쳤다. 그래서 수 놓듯 깃든 추억을 털어내며 과감히 바구니에 던진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돌아보며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울컥한다. 젊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얼마나 예쁜 것인지, 얼마나 무한한 가능성인지 몰랐다.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가늠해 본다. 이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돌아보게 하는 시간이다. 옷을 정리하면서 문득 든 생각. 그것은 바로 ‘가볍게’다. 가벼운 것은 부양할 수 있다. 천사는 가벼워 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 2016-05-09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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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 북이 미사일 쏜 날의 작은 단상
- “야! 여긴 아무렇지도 않다. 거리엔 젊은 연인들 넘쳐나는데 맥주 마시고 난리가 아니다! 비상은 거기만 걸린 거지, 여긴 관심도 없다! 잘 있다 와라!” 늦은 퇴근길 전철 안. 얼마 전 전역한 듯한 젊은이와 아직 복무 중인 현역병의 통화인 듯했다. TV 뉴스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소식이 뉴스 앵커의 낭랑한 음성으로 들리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한참 소란을 떨고 라면이나 비상식량도 준비했을 법한데, 이제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용하다. 둔감해진 것일까? 아니면 자신감에서 오는 여유일까? 젊은이들의 통화 내용처럼 전방과 후방의 분위기는 정말 달랐다. 그렇다고 살면서 늘 긴장해야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조금은 걱정도 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졌던 산기슭에는 아직도 이름 모를 병사들의 영혼이 떠돌고 있다. 6월 6일 현충원에서는 호국 영령들을 위로하는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다. 더구나 북에서는 지금도 전쟁놀음이 한창이다. 휴전 이후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남한은 부와 자유를 누리나 북은 전쟁 준비에 혈안이 돼 여전히 인민들을 동원해 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이 자유스러움을 마냥 만끽해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이어서 더욱 그렇다. 필자가 군 복무를 한 지가 어언 40년이 되었다. 그런데 그 시절엔 국기 게양식이 있고 하강식이 있었다. 국기가 올라가고 내려가면 모두가 일손을 멈추고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에 맞추어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조리며 경례를 했다. 심지어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볼 때도 국민의례를 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통해 조금은 국가의 소중함이나 애국에 대해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찾아볼 수도 없다. 추억 속에서만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어느 날 태어나 보니 부와 자유가 넘쳐나는 부자나라였던 것은 아닐까? 힘겹게 목숨 바쳐 이 나라를 지켜낸 분들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군복을 벗은 지 40년이 돼 필자는 군부대를 찾는 기회를 얻게 됐다. 요즘 젊은 군인 중에 힘들어하는 병사들이 있어 선배들에게 한 수 배우고 싶다고 교육 요청을 해와 이에 응한 것이다. 특히 사건 사고가 많은 데다 지휘관은 부하들을 대하는 리더십이, 부하들은 상관, 동료와 함께하는 인성이 부족해 이 부분에 대해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오랜만에 부대 안에 들어서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을 보니 오래전 군 복무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교육이 끝나고 군인들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내가 청소년기에 감명 받았던 모윤숙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는 죽었노라. 스물다섯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아들로 숨을 마치었노라. 질식하는 구름과 원수가 밀어오는 조국의 산맥을 지키다가 드디어 드디어 숨지었노라.' 그러면서 나는 젊은이들의 통화 속에 그 말이 귀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여긴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쪼록 그래야지. 그런데 그것은 오래도록 굳건한 국군이 지키고 있기에 가능한 거 아닌가 하네.’
- 2016-05-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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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 공연] 모성애에 울고 추억의 음악에 웃는 뮤지컬 <친정엄마>
- 공연 뮤지컬 일정 4월 7일~6월 19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연출 손효원 출연 정애리, 박정수, 이재은, 박탐희, 안두호 등 고혜정 작가의 실화가 담긴 소설 를 바탕으로 만든 뮤지컬 가 모녀 관객들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그동안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된 작품으로 이번에는 추억의 음악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무대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까지 한 딸을 늘 어린아이처럼 걱정하는 엄마와 무뚝뚝한 딸의 갈등과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평범한 모녀의 모습에 공감하면서, 그 속에 담긴 모성애에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더불어 남진의 ‘님과 함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등 추억의 가요를 들으며 회상에 젖는 기회를 마련한다. 다가오는 가정의 달에도 이어지는 뮤지컬 는 세대를 넘나드는 감동의 무대를 통해 가슴 훈훈한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 2016-04-21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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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버킷 리스트를 만드세요
-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영어사전에서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검색하면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라고 나온다. 버킷은 얼마 전까지 바께쓰라고 부르던 양동이나 들통을 말하는 것이고, 리스트는 명단이나 목록을 뜻한다. 그런데 두 단어의 조합에서 왜 이 같은 풀이가 나오는 걸까? 해서 좀 더 찾아보니 버킷 리스트라는 단어가 원래 ‘죽다’라는 뜻을 가진 영어 속어 ‘kick the bucket’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중세 유럽에서 교수형에 처하거나 자살할 때 목에 밧줄을 걸어 놓고 발밑에 놓인 양동이를 걷어찬 데서 나온 것이다. 영화 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대인수용소장 아민 괴트를 교수형에 처할 때 발밑의 나무로 된 받침대를 걷어차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갈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 필자의 두 번째 의문은 다음과 같다. 왜 이처럼 끔찍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단어를 많은 사람이 챙기고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아마도 누구나 양동이를 걷어차기 전에, 즉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또는 하고 싶은 일들이 있기 때문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버킷리스트라는 단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영화 제목이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7년에 나온 영화 는 6개월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두 사나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실행해 가는 이야기이다. 평생을 자동차 수리공으로 살아온 카터 챔버스(모건 프리먼)와 재벌 사업가인 에드워드 콜(잭 니콜슨)은 우연히 중환자실에서 만난다. 카터의 어릴 적 꿈은 역사학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장(家長)으로서의 책임감과 흑인이란 이유로 포기하고 TV쇼를 보면서 위안을 삼으며 살았다. 반면 에드워드는 자수성가해 전용 비행기까지 갖게 됐지만 세 번의 결혼 실패로 딸에게조차 잊힌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 이른바 성공한 만큼 외로움의 빈자리도 큰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중환자실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면서 의기투합한다. 급기야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적은 버킷 리스트를 들고 병원을 뛰쳐나간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 ‘스카이다이빙하기, 문신하기,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냥하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과 키스하기, 모르는 사람 도와주기, 눈물이 날 때까지 웃어보기’ 등을 하면서 흥미진진한 나날을 보낸다. 영화에서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해서, 혹은 건강을 잃고 나서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미리 하지 않은 사실에 후회하고 그것들이 너무나 쉽고 간단한 일이라는 데 또 한 번 절망한다. 영화는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살면서 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유명인사들이 갑자기 현직에서 사임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3월 애플의 재무최고책임자(CFO) 피터 오펜하이머는 무려 430억원 규모의 주식을 포기하고 그 해 9월에 은퇴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유는 단순명쾌하다. 1996년 애플에 입사해 2004년부터 만 10년째 CFO로 근무하고 있는데 이제 ‘자유인’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이는 51세로 아직 한창이지만 회사는 세계 최고가 되었고 돈은 벌 만큼 벌었으니 ‘앞으로는 회사와 일이 아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결국 430억원과 내가 하고 싶은 일, 즉 버킷 리스트와 맞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구글의 CFO 패트릭 피체트 역시 52세때 ‘아내와 여행을 다니기 위해서’라면서 2015년 3월 회사를 미련 없이 떠났다. 짐 로저스와 피터 린치 등 펀드매니저 중에도 억만장자가 된 다음 유유자적하며 지내겠다고 40~50대에 은퇴한 이들이 수두룩하다. 그럼 이렇게 유명하고 돈 많은 사람들만 버킷 리스트를 작성할까? 아니다. 평범한 사람 누구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2014년 6월 EBS의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권식씨(당시 86세). 경기도 평택에 사는 평범한 농부인 그는 환갑이 되던 해에 농사를 접고 땅도 거의 다 팔아치웠다. 아버지가 평생 일만 하다가 77세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을 실행한 것이었다. 그 때부터 배운 서예가 늘어 가르칠 정도가 됐고 동네 향교(鄕校)에서 하는 행사에는 제관(祭官)으로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다. 처음에는 땅을 파는 것을 반대했던 부인이 남편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마음을 내려놓은 것도 큰 힘이 됐다. 그래서 그런지 여든이 넘은 두 분 다 건강하다. 조용한 시골에서, 그것도 평생 농사지은 곳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부러울 게 뭐 있으며 스트레스가 어디 있겠는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아직 은퇴하지 않았다면 오지 않은 은퇴를 걱정하느라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오늘을 놓치지 말고 지금 당장 나만의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버킷 리스트를 작성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은 꺼내지도 말자. 영화 속 이야기이기는 해도 6개월 시한부 인생도 얼마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는가? 미국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포수 중 하나인 요기 베라는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니까!(It ain’t over till it’s over)” 그의 말처럼 설사 은퇴했다고 하더라도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은퇴(retire)’란 말 그대로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우는 것(re-tire)일 뿐이다. 9회 말을 지나 잠시 배트를 놓고 글러브를 벗었지만 다음 게임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정식 리그가 아니라 동네 야구일 수도 있지만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골프에서의 성패 역시 18홀을 끝내고 장갑을 벗을 때까지 모른다고 하지 않는가?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나만의 버킷 리스트는 살아 있고 거기다 뭔가를 적어 넣을 여백과 그 리스트를 실행할 용기 또한 충분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가 박경리 선생(1926~2008)을 떠올려보자. 선생은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잃고 아들을 먼저 보내는 큰 슬픔을 당했다. 참으로 모진 세월이었다. 누구보다도 불행했지만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뒤에 숨지 않았다. 불행에 이은 고독과 병마를 와 같은 불후(不朽)의 작품들로 바꾸어 우리에게 남겼다. 말년에는 원주로 내려가 소박한 농부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돌아가기 얼마 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모진 세월 가고, 아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선생의 버킷 리스트에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버리고 갈 것만 남은 홀가분한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 2016-03-11 0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