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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코디 최, 아무도 모른다? 세상 밖은 안다!
- 경계의 떨림이 느껴지는 눈빛이 입을 열었다. 머리에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한다며 가벼운 질문에도 얼음 위를 걷는 듯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누군가 알아봐 주는 것도, 맞서는 것도 이제는 ‘정신 사납다’고 표현하는 이 사람, 코디 최(최현주 崔玄周·55).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대나무 위 무림고수를 만나고 온 기분이 바로 이런 느낌인가 보다. 코디 최란 이름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 그를 꼭 만나야 하는 이유 세 가지가 생겼다. 어려운 문화이론을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는 강의실력자. 현재 유럽에서 회고전을 열 정도로 유명한 미술 작가. 마지막으로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는 점이다. 문화이론을 가르치는 미술 작가. 이론과 실기를 엄연히 다른 분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에서 그런 게 가능한 능력자가 궁금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대외적으로 직업이 두 가지입니다. 미술 작가 겸 문화이론가 아니면 교수. 학교를 졸업하고 작품 활동과 강의를 거의 동시에 시작했어요. 학교에서는 이론 강의를 주로 하고 밖에서는 미술 작품 활동과 전시회 하면서요. 작가로 한 30년, 강의는 27년째 하고 있어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뉴욕대학교(NYU)에서 강의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줄곧 미술대학 교수였던 코디 최. 한국에서는 문화이론을 가르치다 보니 언론정보대학이나 언론학부, 건축디자인학과, 공대, 국제대학 등에서 강의 요청이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그곳에서 재능을 발견하다 코디 최는 미술 세계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20대 초반까지 한국인이던 코디 최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재학 시절 집안 사정으로 이민 길에 올랐다. “그때 저는 80학번 어린 대학생이었습니다. 모든 게 불안한 시대였죠. 광주민주항쟁, 학교도 오랫동안 휴교하고요. 1학년 내내 서너 달 수업했을까요. 2학년에 올라갔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어요. 한국에 있는 것도, 그렇다고 미국에 가는 것도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가자마자 막노동 같은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코디 최. 그러면서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는 공부하기 싫어서 도망 다녔는데(웃음) 미국에서는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야간대학에 다녔어요. 한 학기 등록금 몇 십만 원만 내면 수업이 거의 무료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학을 계속하겠다는 마음이었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삶. 그때 조금이라도 피곤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일반교양으로 듣게 된 미술 과목이었다. “전공과목 외에 일반교양수업 중에서 미술 과목 하나를 들었어요. 너무 피곤해서 숨 좀 쉬려고요. 수업시간에 들어가서 낭만을 좀 느끼고 싶었나 봐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관심 갖고 바라봐 주는 교수들이 생겨났다. 제대로 된 대학교에 입학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해졌을 때 코디 최를 유심히 봐 왔던 상담 교수가 미술대학을 권유했다. 한국에서 붓 한 번 잡아 보지 않은 사람에게 미술이라니. “미술이요? 저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 버는 전공을 선택하고 싶다고 교수에게 말했더니 요즘 디자인 분야가 돈을 많이 번다고 말해 주더군요. 그러면서 예술대학으로 유명한 LA 아트센터 칼리지(Art Center College of Design, Pasadena)에 추천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으로 디자인과 순수미술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국제무대가 주목하다 입학 초기 디자인을 전공한 코티 최는 점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뭔가 불편했어요. 잘 안 맞고 힘들었어요. 우선 언어가 자유롭지 않았고 이해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리고 또 내 나라가 아니니까. 모르는 곳에 가 있으면 불안하잖아요. 눈치도 보게 되고요.” 그 불편함은 위장병으로 나타났다. 심리적인 불안과 불편함, 한국과 미국의 음식 차이 등 여러 가지가 요인이 합쳐지면서 먹기만 하면 체했다.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먹던 분홍색의 현탁액 소화제 펩토비스몰을 이용해 문화 정체성의 혼동과 불안을 작품으로 표현하게 됐고 그 신선한 충격은 국제무대에 코디 최를 알리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90년대는 초 뉴욕에서 꽤 많이 주목받는 작가였고, 한국에도 이름을 좀 알리던 시기였어요. 한국의 국제화랑 전속 작가로 10년 동안 활동했어요. 2, 3년에 한 번 정도는 한국에서 전시했습니다.” 미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뉴욕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1990년대 초 NYU에서 강의 제의가 왔다. 강의에 대한 학생들 반응도 좋았다. 그러다보니 ‘Adjunct professor’ 즉, 강의만 전문으로 하는 교수로 10년 넘게 있었다. “2002년 이화여대에서 NYU 미술대 학과장한테 한 학기 초빙교수를 보내 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제가 한국 출신이니까 가 보지 않겠냐며 권유하더군요.” 자연스럽게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시작됐다. 뉴욕과 유럽을 돌며 활동하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뭔가 복잡해졌다. 개인사정이 생겼고, 50대를 바라보던 상황에 미국생활이 외롭고 모든 게 지루해진 시점이었다. “2002년에 이화여대에 초빙교수로 와서 한 한기 동안 외국인 교수 기숙사에서 생활하다가 뉴욕으로 돌아갔어요. 그때 내가 더 늙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강의를 하며 사는 것도 내 인생에 큰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004년 한국에 들어온 코디 최는 2년 전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느라 20년여 고생했는데 또 다시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했다. “미국과 한국의 대학 시스템이 달라서 힘들었어요. 저도 어렵고 한국의 대학도 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요. 문화 차이였던 거죠. 제가 한국에 살다가 미국에서 겪었던 문화적 충돌이 한국에 오니까 다시 또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이해가 돼요.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 30대도 아니고 50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학과장이나 주임교수쯤 할 나이에 강의만 하는 교수를 하겠다고 온 거죠. 근데 이제는 괜찮아요. 마음은 자유로워졌는데 최근 몇 년 동안 그 부분이 좀 억울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세상에 바랄 것도 없고 욕심을 버려야 하는 시간이 온 거 같아요.” 코디 최, 유럽 회고전은 순항 중 현재 그의 작품은 유럽 각지를 돌며 ‘코디 최 컬처 컷(CODY CHOI Culture Cuts)’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다. 작년 5월부터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할레(미술관)에서 시작해 프랑스 마르세유현대미술관 전시도 8월에 끝났다. “올해 12월에는 스페인 렉토레이트 대학 미술관과 살라 모레노 빌라 전시관 두 곳에서 동시에 회고전이 있을 거예요. 내년 4월엔 독일 켐니츠 국립 미술관으로 가요. 제가 1986년부터 했던 작품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90점 정도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 얘기를 듣는 동안 변신 안 한 슈퍼맨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문화이론을 가르치고 이런 저런 편견 때문에 피곤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비행기 타고 저 멀리에 가면 화려한 망토 두른 코디 최가 살고 있을 것만 같다. “나이 들어서 조용히 있고 싶었는데 한 3~4년 전 쯤 뒤셀도르프 미술관 관장이 다른 일로 한국에 왔다가 미술계에 수소문했다더군요. 최근 서구 미술 시장에 동양 작가, 특히 중국 작가의 활동이 활발한데 그런 관점에서 쭉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부터 뉴욕에서 활동하던 아시아 작가 코디 최라는 사람이 있었고 재조명해 보고 싶다고 했어요. 고마운 마음으로만 생각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저와 함께 작업하던 마이크 켈리 파운데이션의 평론가 존 워시맨과 프랑스의 퐁피두센터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마리드 부르졸라가 합세했습니다. 그렇게 2,3년 준비해서 유럽 순회 회고전이 기획된 것이죠.” 현재 그의 순회 회고전은 미국과 중국에서도 전시 일정을 조율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100% 안 될 거라 믿었다 코디 최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완이라는 젊은 작가와 함께 대표 작가가 됐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대형이라는 큐레이터가 저에게 차 한 잔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어요. 만나 보니 20년 전쯤 제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라더군요.” 이대형씨는 ‘2017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발탁돼 한창 작가 찾기에 골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대형씨가 나에게 와서 지금 베니스 비엔날레에 원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이완이라는 젊은 작가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함께하면 어떻겠느냐고 묻더군요.” 입으로는 감사하다 말하면서도 100%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국제 행사에 나가기엔 이완씨가 어렸고 무엇보다 한국 미술계에서 코디 최 자신에게 손들어 줄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됐다는 겁니다. 안 될 줄 알고 주위에 알리지도 않았어요.” 최근에 와서 이대형씨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작가 선정 작업을 하면서 젊은 작가와 함께할 연배 있는 작가를 찾아 조언을 구하기 위해 영국까지 날아가 사람을 만났다고 말이다. “본인 생각에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밀려서 한 번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코디 최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10명 중 6명은 말리더라는 거죠. 그럼에도 본인 의지를 믿었다는 말에 정말 많이 고마웠습니다.” 코디 최가 베니스 비엔날레 대표 작가가 됐다는 소식에 유럽 미술계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원래 내년 4월로 잡혀 있던 독일의 한 미술관에서 베니스 비엔날레 딱 끝나기 일주일 전에 전시를 시작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또 다른 독일 화랑에서는 베니스 비엔날레 시작하고 한 달 후인 6월 24일 코디 최의 전시를 열겠다고 날짜까지 못을 박았다. 사실 코디 최의 작은 바람이라면 아내와 함께 평화롭고 조용히 사는 것. 그런데 베니스 비엔날레 덕(?)에 당분간 그 바람은 잠시 묻어두어야 할 것 같다. 미술은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느끼는 예술이다. 그것이 코디 최의 직업 중 큰 영역을 차지한다면 피곤하지만 즐기는 것이 순리 아닐까?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는 이들에게 시원하게 뭔가 보여주시길. 부탁해요, 코디 최! ‘펩토비스몰(소화제)’ 수만 통으로 적신 화장지를 뭉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 세계가 코디 최를 주목하게 된 대표작 중 하나다. >>코디 최(최현주) LA 아트센터 칼리지 학사, 1994~2004년 뉴욕대학교 Adjunct professor (강의전문교수), 2002년 이화여자대학교 초빙교수, 前문화창조아카데미 지식융합 감독, 연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에서 강의, 2017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대표 작가, 저서
- 2016-09-2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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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ULTURE] 9월의 추천 전시ㆍ도서ㆍ영화ㆍ공연
- ◇ 전시(Exhibition) 앤서니 브라운 전-행복한 미술관 (Anthony Browne Exhibition-Happy Museum) 일정 9월 25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림 20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대규모 전시다. ‘행복한 미술관’이라는 부제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6월 개막 첫 주에 1만여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남녀노소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이색적인 그림들과 더불어 앤서니 브라운의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행복한 도서관’ 코너도 마련돼 있다. 전시장에서 관람한 그림들을 책을 통해 다시 감상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좋다. 2016 광주비엔날레 ‘제8기후대(THE EIGHT CLIMATE)’ 일정 9월 2일~11월 6일 장소 광주 비엔날레전시관, 아시아문화전당, 무등현대미술관 등 ‘제8기후대’라는 콘셉트로 열리는 전람회인 만큼 전시 공간마다 온도, 밀도, 분위기, 기압 등 다양한 기후 환경을 연출한다. 절제된 색과 요소들로 표현한 이번 공식 포스터에는 예술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담겨 있다. 방향성, 발전, 흐름, 변화하는 움직임, 목표를 향한 전진 등을 의미하는 화살표를 통해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37개국 97팀(119명)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도서(Book) 세종의 서재(박현모 외 11명 공저ㆍ서해문집) 여주대 ‘세종시대 문헌연구팀’의 심층해제문 중에서 ‘세종시대를 잘 드러내는 문헌’과 ‘세종을 만든 책’을 선별해 담았다. ‘1부-세종시대가 만든 책’, ‘2부-세종을 만든 책’으로 크게 분류해 등 12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헌별로 전문가들의 해제와 더불어 그 책이 세종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방법(오사카대학 쇼세키카 프로젝트ㆍ글항아리)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상식을 의심해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수학, 공학, 미학, 역사학, 법학, 화학, 경제학, 정신의학 등 다양한 학문의 관점에서 ‘도넛의 구멍’이라는 개념에 대해 파헤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문과 탐구라는 영역을 더 흥미롭게 접하고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 영화(Movie) 평범한 50대 주부가 찾은 인생의 행복 개봉 9월 29일 장르 드라마 감독 미아 한센 러브 출연 이자벨 위페르, 로만 콜린카, 에디뜨 스콥 등 2016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프랑스 신예 감독 미아 한센 러브의 신작이다. 한 가정의 아내·엄마이자, 존경받는 교사로 평범하게 살던 50대 여성이 갑작스러운 남편의 고백 이후 불안한 삶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평온했던 일상이 파괴되며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마주하는 주인공 역에 세계 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니스)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던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캐스팅돼 기대를 모았다. 폭탄 달린 경성행 열차에 탄 두 남자 개봉 9월 7일 장르 액션, 드라마 감독 김지운 출연 송강호, 공유, 한지민, 엄태구, 신성록 등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조선인 일본 경찰의 갈등과 우정을 그렸다. 김지운 감독은 과 에 이어 이번 영화로도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김 감독과 네 번째 영화를 작업하는 배우 송강호가 조선인 일본 경찰 역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 의 주인공 공유가 의열단의 리더를 맡아 미묘한 두 남자의 관계를 연기한다. ◇ 공연(Stage) 부를수록 그리운 어머니의 사랑 일정 9월 10일~10월 30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연출 이종훈 출연 고두심, 김영옥, 이홍렬, 이종원 등 1998년 세종문화회관 초연 당시 전회 매진을 기록한 작품으로, 1990년대 대표 악극 중 하나다. 올해는 원작 내용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해석과 세련된 무대 연출로 50일간 공연한다. 이전보다 젊은 배우들을 캐스팅해 그간의 신파형 악극을 탈피하고, 우리 춤과 노래를 보강했다. 아름다운 초상화에 가려진 욕망 일정 9월 3일~10월 29일 장소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연출 이지나 출연 김준수, 박은태, 최재웅, 홍서영 등 오스카 와일드의 장편 소설 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불멸의 아름다움을 얻고자 했던 도리안의 삶과 깨달음을 노래한다. 체코 프라하의 이국적 풍경에 몽환적인 색감이 어우러진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20년 전 사라진 그날의 사건 일정 11월 6일까지 장소 충무아트홀 대극장 연출 장유정 출연 유준상, 지창욱, 오만석, 오종혁 등 고(故) 김광석이 불렀던 노래와 더불어 청와대 경호관이라는 인물을 통해 펼쳐지는 미스터리한 전개가 돋보이는 창작 뮤지컬이다. 2013년 초연부터 참여한 배우 유준상과 지창욱을 비롯해 장유정 연출, 장소영 음악감독, 신선호 안무 감독이 함께해 완성도를 높였다. 음악으로 만나는 서울 일정 9월 8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황준연 출연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서울의 620년 역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관현악 연주회다. 북한산, 청계천 광통교 서화시장, 보신각, 전차 등 서울이 걸어 온 자취와 미래의 모습을 담은 음악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고층빌딩으로 가득한 오늘의 서울, 산과 들, 강이 어우러진 옛 한양의 모습을 담았다.
- 2016-09-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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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 온 명남씨, SNS가 즐거운 이유
- 지난 6월 28일 서울 중구 정동 산다미아노 소회의실에서 (사)다문화교류네트워크에서 진행한 맘마미아 어머니 IT스쿨 수료식이 있었다. 박미라 사무총장은 “어머니 IT 스쿨은 SNS 사용이 서툰 다문화여성들이 블로그나 카페, 페이스북 같은 SNS를 익숙하게 사용하고, 이를 통해 다문화구성원들과 원활한 소통함으로써 행복하고 안정된 다문화사회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 목적이다”고 했다. 2월에 시작해 6월까지 4개월 동안 격주로 진행된 수업 마지막 날, 다문화 여성들과 서포터즈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수료증을 받고, 자신들이 만든 동영상을 감상했다. 지난 수업을 되돌아보며 몰라보게 향상된 실력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번 교육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멋진 사진 찍는 법과 SNS 운영법을 배우고 서울의 명소나 문화공간을 찾아 직접 실습을 한 후, 각자의 SNS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써보는 것까지 함께 했다. SNS가 서툴고 두려운 사람들도 다행봉사단 서포터즈의 1:1 멘토링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이어진 사진 강의 덕분에 다문화여성들은 전보다 훨씬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다문화 여성들은 카페나 블로그에 자연스럽게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줍게 올린 글과 사진에는 “색감이 좋고 예뻐요”, “사진 잘 찍으시네요”, “감각 있으십니다” 등의 댓글이 달렸다. 처음엔 서먹했던 사람들도 교육을 받으면서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고 댓글을 주고받으니 금방 가까워졌다. 실습을 위해 다문화여성과 서포터즈들은 짝을 이루어 서울 명소를 누비며 사진을 찍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을 시작으로 이화동벽화마을, 정동길, 서촌, 남산길, 창덕궁후원 등 서울 곳곳을 다녔다.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던 서울 명소들을 사진으로 찍고 SNS로 공유해 서울 알림이 역할도 해냈다. 교육생들은 수업 후 달라진 점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자신감을 꼽았다. 예전엔 길을 가다 누가 사진 찍어 달라 부탁하면 도망가고 싶었는데, 이젠 자신 있게 찍어줄 수 있는 실력이 생겼다. 또한 멋진 사진을 찍고 나면 SNS에 올리고 싶어진다는 점도 큰 변화다. 문명남(중국) 씨는 “매일 남의 글 보기만 했었는데 이젠 내 사진을 SNS에 올리는 건 물론, 동영상까지 만들 줄 알게 됐어요” 라며 “SNS가 즐거워요”라고 행복감을 드러냈다. 이 프로그램이 다문화여성들에게만 유익했던 건 아니다. 한국인 서포터즈로 참여한 이경희 씨는 “다문화여성들과 이번 교육을 함께 하면서 자신도 많은 것을 배웠다”며 “덕분에 잠자던 블로그를 깨워 매일매일 일기 쓰듯 사진하고 글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한흥옥 씨는 “블로그를 해보지 않은 분과 머리를 맞대고 블로그 만드는 일이 쉽진 않았지만, 아이디와 비밀 번호를 정하고 블로그를 만들어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도록 돕고 나니 보람이 컸다”고 했다. 사진 강의를 맡은 오은미(사진강사) 씨는 “사진 찍는 것에서부터 포스팅까지 한자리에서 가능한 수업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기량이 향상되는 것을 볼 수 있어 프로그램이 잘 기획됐다는 것을 느꼈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이번 수업에서 찍은 사진들과 동영상을 모아 오는 7월 20일 종로구 충신동 가나의 집에서 전시와 발표회를 열 예정이다.
- 2016-07-1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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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의 感] 千年古都의 새벽을 거닐다
- 신라의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 이곳에서 맞는 새벽은 늘 벅차다. 문무대왕의 산골(散骨)이 뿌려진 동녘 끝 감포바다로부터 잘생긴 신라 화랑의 자태를 연상케 하는 감은사지 탑, 너른 황룡사지, 계림의 신비로운 숲과 왕릉들. 어디든 지그시 눈감고 앉아 있으면 그윽한 고도의 기운이 감지되는 곳들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제일 먼저 하는 고민이 ‘과연 어디서 새벽을 맞을 것인가?’ 이다. 어디서 또 신라의 새벽향취를 맡아볼 것인가? 글·사진 남정우 사진가 njkor@naver.com 잠들지 않는 바다 - 감포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지 감포의 새벽은 경건하다. 동이 트기 전, 대부분의 동해안처럼 일출을 보러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어느 누구도 들뜨지 않는다. 해안 곳곳에 켜놓은 촛불과 새벽기도를 나선 만신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예사롭지 않은 이 풍경은 해안에서 200m 떨어진 검고 긴 바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사적 158호로 지정된 이 바위의 이름은 대왕암이다. 668년, 부왕 무열왕시대의 백제 정벌에 이어 고구려마저 정벌한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국토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왜구의 침범까지 빈번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이었다. 유언대로 유해는 대왕암 바위에 뿌려졌다.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은 대왕암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견대 주변에 종종 모습을 나타냈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이곳에서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 대왕암이 있는 해안을 뒤로하고 929번 도로를 따라 500m쯤 가다보면 우측으로 잘생긴 두개의 탑이 모습을 나타낸다. 감은사지다. 문무왕은 대왕암에 자신의 산골처를 정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지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절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완성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이듬해 아들 신문왕에 이르러 마침내 절은 완공되었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의미로 신문왕은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감은사지에서는 두 가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너른 양북면 들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두 개의 탑이다. 두 기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국보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하나는 금당의 바닥구조이다. 특이하게도 불전 밑으로 빈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신문왕의 효심이 만든 독특한 공간이다. 경주 시내유적 답사 - 대릉원, 첨성대, 반월성, 계림 서기 65년 어느 봄밤, 왕은 궁궐 서편의 숲에서 울리는 닭울음 소리를 들었다. 늦은 밤 닭이 우는 까닭이 궁금했으나 밤이 깊었다. 다음 날 아침, 왕은 신하를 시켜 숲으로 가보게 했다. 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데, 흰 닭 한 마리가 그 밑에 앉아 울고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그 안에 아이가 하나 있었다. 범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한 왕은 아이를 거두었고, 알지(閼智)라 이름을 붙였다. 금궤짝에서 태어났다 하여 김(金)씨 성을 붙였으니,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이후 이 숲을 신성히 여겼고, 닭계 자를 붙여 계림(鷄林)이라 불렀다. 경주 시내 유적의 중심은 첨성대를 중심으로 반월성, 계림, 인왕동 고분군, 대릉원으로 이어진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안압지와 국립경주박물관까지 쉬엄쉬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경주의 풍경 중 독특하고 인상적인 것이 왕릉이다. 거대한 고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대릉원과 인왕동 고분군이다. 대릉원은 23기가 모여 능원을 이루는 곳으로 황남대총과 미추왕릉, 천마총 등이 자리하고 있다. 유일하게 내부가 공개된 천마총에서 신라 왕릉의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인왕동고분군은 계림 서편 너른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내물왕릉을 비롯해 5기의 고분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13기 가량이 남아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첨성대와 계림 사이의 공간에서 바라보면 멀리 선도산 자락과 어우러져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산과 능이 마치 한 무리처럼 보인다. 반달처럼 생겨서 반월성이라고 불렀던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자리했던 곳이다. 동양 최대 사찰 황룡사지와 분황사 경주시내 동쪽에 자리한 황룡사지는 총 면적이 2만 여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다.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어 선덕여왕 12년(643)에 완공되었으니 공사 기간만 무려 90년이 걸린 국가의 명운을 건 대공사였다. 애석하게도 1238년 몽고 침략 때 전각들은 모두 불타 없어졌지만, 주춧돌과 초석 등이 남아 절의 규모와 전각의 자리를 유추해볼 수 있다. 황룡사에는 지금 시대로 말하자면 경주의 ‘랜드마크’가 있었다. 높이가 무려 80m에 달했다는 황룡사 구층목탑이다. 경주박물관이나 경주타워에 가보면 옛 경주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디오라마를 볼 수 있는데, 황룡사 구층목탑의 위용을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해볼 수 있다. 황룡사터 초입에는 분황사가 있다.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분황사는 황룡사지에 비하면 아담한 규모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신라 중심의 평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이곳을 거쳐 갔고, 독특한 양식의 분황사 석탑이 남겨져 있다. 분황사 석탑은 보기 드문 모전석탑인데, 모전석탑은 중국의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은 탑을 말한다.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9층탑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국립경주박물관과 안압지 천년고도 경주의 명성에 걸맞게 경주국립박물관은 중앙국립박물관에 이어 최고의 규모와 전시품을 자랑한다. 모두 3개의 전시관에 2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8만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그야말로 신라의 모든 문화가 압축되어 있다. 전시실의 외부에는 경주 인근에서 옮겨온 국보 38호 고선사지 석탑을 비롯 석조유물들이 경내 곳곳에 가득하며 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도 이곳에 보관되어있다. 시주로 바쳐진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에밀레 에밀레하고 들린다 하여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이 종은 경덕왕 시절 부왕인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것으로 그 모습만으로도 유려하며 장중함이 느껴진다. 화려한 비천상과 연꽃 등의 조각이 섬세하다. 경주박물관에서 길을 건너 조금만 북쪽으로 가면 안압지가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직후, 674년에 못을 파고 679년에 궁궐을 만들어 동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신라의 인공 정원이라 불릴 만한데, 삼국사기 문무왕시대를 보면 “궁 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여행 tip 추천 경주 답사일정 감포 대왕암–감은사지-대릉원-첨성대-계림-반월성-국립경주박물관-황룡사지-분황사-안압지-계림일대 야경 경주의 고택에서 숙박 www.gjgotaek.kr 경주의 먹거리 시내 쪽에서 많이 찾는 것이 쌈밥으로, 대릉원과 첨성대 인근에 쌈밥집이 즐비하다. 보통 1인당 1만원 정도로 푸짐하고 먹을 만하다. 보문호 가는 길 북군동의 맷돌순두부도 많이 찾는 경주 먹거리다. >>남정우(南晶祐) 사진가·여행작가. 스튜디오 COREE 대표 광고사진을 시작으로 출판, 잡지 등의 분야에서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19번 국도 도보여행이후 백두대간 종주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를 집필했다. 문화유적에 관심이 많아 관련 모임을 운영했으며, 문화재청과 수자원공사 등 사보에 기고 중이다.
- 2016-06-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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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인상학] 5000원·5만원권 母子이야기
- 박정희 혜담(慧潭) 인상코칭 연구원장 ilise08@naver.com 우리나라 화폐에서 모자(母子)가 함께 지폐의 인물이 되는 영광을 가진 분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1504~1551)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다. 율곡은 5000원권의 주인공이며 현재 발행되는 신권 중 가장 먼저 나온 지폐이다. 1972년에 선보인 5000원권은 경제개발로 인한 거래 규모의 확대와 물가 상승에 따른 고액 화폐의 필요에 따라 발행되었다. 품질 면에서도 은화와 금속선이 삽입되고 자외선 감지 요소가 인쇄되어 있는 첨단 기법이 사용된 화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5000원권은 위폐가 대량으로 나돌아 위조지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000원 구권과 위조방지 장치가 차이가 없고 1000원권보다는 경제적으로 이익도 많다는 점이 위폐가 급증했던 이유라 할 수 있다. 5000원권은 그동안 5번 정도 디자인이 바뀌었지만 앞면에는 늘 율곡의 초상화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지폐를 자세히 보면 1972년에 발행된 최초의 5000원권과 현재의 5000원권의 율곡 얼굴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에 원판 기술이 없어 영국업체에 맡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5000원권과 5만원권의 율곡, 신사임당의 초상은 일랑 이종상 화백의 작품이다. 먼저 5000원권의 율곡에 대해 살펴보면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 신씨의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 별시(別試)에서 천문·기상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해 논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에 실시된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전시(殿試)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삼장장원(三場壯元)으로 불렸다.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를 포함해 응시한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에게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남들에게는 한 번도 어려운 과거에 아홉 번이나 장원을 했으니 타고난 천재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이 가장 사랑하였고 기쁘고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었던 사람은 그의 어머니 사임당 신씨이다. 지금은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고액권인 5만원권의 모델로 가장 갖고 싶은 지폐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5만원권은 2009년 6월 처음 발행되었으며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세로형 디자인이라는 점이 또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다. 실존 인물인 모자가 화페의 인물이 된 최초의 사례이며 세계적으로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 또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인물 선정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고 여성단체의 양성평등 차원에서 여성 초상화를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시대적으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현모양처이면서도 순종적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알리며 역사 속에서 굳건한 위치를 지키고 있는 여성의 힘이 필요하였다는 것이 더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시·그림·서화에도 능했던 예술가인 사임당 신씨의 본명은 신인선, ‘사임당’은 당호이며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요순삼대(堯舜三代)를 태평시대라 하는데 하(夏)나라 우왕(禹王), 은(殷)나라 탕왕(湯王),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의 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주나라의 문왕은 성군(聖君)이며 성인(聖人)으로 추앙 받는데 그 까닭은 그의 어머니 태임의 남다른 태교와 자식 교육 덕분 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태임은 최고의 현모로 추앙 받아왔다. 사임당은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어머니에게 여성으로서의 예의범절과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19세에 덕수 이씨(德水 李氏) 이원수와 결혼하였고 아들 없는 친정의 다섯 딸 중 둘째 딸로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는 여성의 지위가 남자와 동등하였으며 상속권도 차별 없이 균등하였고 일부일처제가 시행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삶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폐 속의 인물을 살펴보면 5000원, 5만원권의 얼굴이 많이 닮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5만원권의 사임당의 얼굴은 이마가 넓고 반듯하며 길고 큰 눈은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잘 나타내 준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조선시대 여인의 얼굴에서 느낄 수 없는 강함과 단아함이 들어 있다. 여성이지만 남성이 가져야 할 기상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5000원권 율곡의 초상은 강함과 부드러움이 내재되어 있으며 긴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특징적으로 그렸다. 우리나라 지폐 속 초상의 특징은 넓은 이마와 반듯한 콧날, 잘 발달된 콧방울을 들 수 있다. 돈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짐작이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돈은 행복의 원천이기도 하고 우리의 삶의 동반자이기도 하다. 내 손에 쥐어진 지폐의 얼굴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면서 소중하게 다루고 아낀다면 좋은 기운과 함께 나에게 더 많은 얼굴들이 다가와서 즐거움을 안겨 줄 것이다. >> 박정희(朴正姬)前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교육원 인상학 교수 혜담 인상코칭연구원 원장으로 기업체와 대학에 특강을 하고 있다. tv조선 인상학자 패널, 관상학 전문가 패널로 밝고 아름다운 인상미학에 대해 전파하고 있다. 등 저서가 있다.
- 2016-06-12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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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의 쉼터] 휴식이 필요한 당신을 위한 서울 ‘도시숲’ 4選
- 숲은 멀리 있었다. 찾아가야만 했고, 늘 ‘언젠가는 가야지’라는 말로 접어두던 곳. 언제부터인가 숲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사람과의 교감을 허락하며 아름드리 서 있는 서울의 대표 숲을 찾아갔다. 글·사진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남녀노소 사랑받는 ‘어린이대공원’ 1973년 5월 5일 개원한 어린이 대공원은 2006년 10월 14일부터 무료 개방됐다. 취재를 하면서 다녔던 숲 중에 가장 녹음이 짙고 울창했던 곳이 바로 어린이 대공원 숲이다. 40여 년 세월, 시간이 만든 작품이라고나 할까? 1973년 개장 당시 영상과 비교하면 얼마나 숲이 커졌는지 가늠할 수 있다. 어린이 대공원 안 양버즘 나무와 벚나무 산책로 사이로 작은 숲길이 나 있는데 지금 가면 꽃들도 군데군데 핀 것을 볼 수 있다. 벤치와 테이블도 많아 도시락을 먹거나 소풍 장소로 이용하기 더할 나위 없는 곳. 놀이시설이 있어 주로 젊은층이 이용할 거라 생각하지만 운동하러 나온 주민, 산책 나온 시니어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띈다. 어린이 대공원의 백미는 우거진 숲도 숲이지만 넓은 잔디밭이다. 초록의 끝없는 잔디 위에 꼭 한번 누워보시길! 시민들을 품어주는 따뜻한 숲 ‘양재 시민의 숲’ 양재천을 끼고 있는 ‘양재 시민의 숲’은 1986년 개장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유치 이후 도시 미관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지금은 온전히 시민들을 품는 숲으로 자리 잡았다. 서울에서 꽤 오래된 숲답게 울창하고 때가 묻지 않은 모습이 매력적이다. 숲 깊숙이 들어서는 순간 프랑스 불로뉴 숲을 느꼈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프랑스의 심장이라 불리는 불로뉴 숲의 규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포근히 사람들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비슷함을 느꼈다. 휴일 낮에도 분주하지 않고 느릿한 걸음으로 걸을 수 있는 것이 이 숲의 매력이다. 서울 둘레길과 연결된 숲 입구에는 둘레길 순례자들이 스탬프를 찍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양재 시민의 숲은 식생(느티나무, 당단풍나무, 감나무, 모과나무 등 43종)이 ‘서울숲’(소나무, 섬잣나무, 계수나무 등 95종)에 비해 다양하지 않지만 교목들이 많은 것이 큰 장점이다. 또한 족구장, 축구장, 테니스장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숲 이외의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다. 서울시민의 사랑을 한몸에... ‘서울숲’ 성수동 뚝섬 일대에 서울숲이 조성될 당시 과연 이 숲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조성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의심할 여지없이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숲이 됐다. 서울의 하이드파크(Hyde Park) 혹은 센트럴 파크(Central park)의 면모를 갖춘 시민들의 공간 서울숲. 짧은 역사임에도 다양한 식생이 자리 잡고 있고 너른 잔디밭인 서울숲 광장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많은 사람이 찾는 숲 또한 단연 서울숲이다. 무엇보다 서울숲이 값진 이유는 시민의 봉사와 참여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점이다. 서울시와 70여 개의 기업, 1만여 명의 시민이 50억원을 모아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 참여 숲이 바로 이곳이다. ‘시민참여텃밭’이 운영되고 있고 시민 봉사자의 활동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눈에 띈다. 어린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대형 미끄럼틀 놀이터, 옛 건축물 주변에 조성해 놓은 꽃밭 등 아기자기한 면 또한 서울숲의 볼거리다. 취재 나갔던 5월 14일, 마침 꽃사슴 먹이주기 행사에도 참여했다. 꽃사슴들이 털갈이 중이라 미모가 조금 떨어지기는 했지만(?) 순한 사슴들이 넓은 우리 안에서 생활하는 모습도 보고 교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6월이 되면 꽃사슴들의 털갈이도 끝나고 한창 예쁘다고 하니 서울숲을 방문해 꽃사슴을 만나 보는 것은 어떨까? 꽃사슴 우리 개방 매주 화, 목, 토, 일 (14:00~13:30 2회), 인터넷, 현장 참여 신청 가능(회당 200명 수용) 시민들의 유유자적 쉼터 ‘평화의 공원’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주위에는 월드컵 공원으로 통칭되는 평화의 공원, 난지천 공원, 하늘공원. 노을공원, 난지한강공원이 있다. 난지도 제2 매립지에 만들어진 하늘공원은 매년 10월 열리는 억새 축제로 인기가 높고, 노을공원은 축제 등 각종 문화 이벤트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그에 비해 평화의 공원은 주민들에게 이벤트보다는 쉼터를 제공하는 유유자적 느긋한 숲 공원이다. 월드컵 공원 중 가장 접근하기 쉬운 평화의 공원은 약 44만㎡ 부지에 습지, 연못, 나무 정원 등을 갖춘 숲으로 조성됐다. 공원 안에는 ‘유니세프 광장’과 ‘난지 연못’을 비롯해 ‘평화의 정원’, ‘피크닉장’, ‘난지도이야기(월드컵공원 전시관)’ 등이 있다. 난지 연못 주변에 데크로 수상 길을 내어 부들, 수련, 속새, 꽃창포 등 수상식물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다. 평화의 공원에 색다른 볼거리는 바로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작은 개울이다. 마치 옛 시골 개울을 옮겨놓은 듯한 실개천에서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아이들은 물장구 치고 헤엄치면서 도시에서 찾을 수 없는 동심을 맛보게 된다. 사실 우리나라의 숲과 외국의 숲은 비교 불가다. 우리는 숲이 없던 땅 위에 숲을 만들었다면 그들은 수백, 수천 년 이어오는 숲을 도시 곳곳에 가지고 있다. 전쟁과 개발 등등에 밀려 잊혔던 숲이 우리 곁에 온 지 이제 50년도 안 됐다. 이제야 비로소 생활 속으로 들어온 우리의 숲을 오래 곁에 두고 싶다면 더 사랑하고 가꾸고 아껴야 할 것이다.
- 2016-06-0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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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세계에서 가장 살고 싶은 도시 1위,오스트리아 빈
- 세계적 경영컨설팅 업체 ‘머서’가 2016년 2월 발표한 도시별 ‘삶의 질’에서 오스트리아 빈(Wien)이 지난해에 이어 1위를 차지했다. 스위스 취리히, 뉴질랜드 오클랜드, 독일 뮌헨, 캐나다 밴쿠버가 2∼5위를 차지했고 서울은 73위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는 합스부르크 왕족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도시에 가면 허리 잘록한 드레스를 입고 모차르트 음악에 맞춰 매일 무도회에서 춤을 추고, 마차를 탄 귀족이 되어 사랑을 만들어 갈 것 같다. 누구나 왕족, 귀족이 되는 도시 합스부르크 왕조를 모르면 빈을 여행할 수 없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궁인 호프부르크(Hofburg)는 물론이고 도시 곳곳 웅장하고 화려한 왕가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그 골목 사이로 영화 속에서 보았던 마차가 ‘따각따각’ 말굽 소리를 내며 다닌다. 골목을 걷고 있으면 가발과 옛 복장을 차려입고 티켓을 파는 사람들이 무수히 다가온다. 100년도 넘는 연륜을 자랑하는 카페에서는 모차르트의 선율을 들으며 왕족, 귀족들처럼 토르테와 멜랑쥐를 우아하게 마신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했던 가문이다. 루돌프 1세(1273년 즉위)를 시작으로 카를 1세(1918년 사퇴)에 이르기까지 무려 645년 동안 유럽의 절반을 지배했던 왕조다. 합스부르크 왕가도 우리나라 조선의 600년 역사처럼 긴 시간동안 사건, 사고가 무수히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부터 그의 자식, 손자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비극(?) 스토리들 국내서도 뮤지컬로 무대에 올랐던 황태자 루돌프(Rudolf Franz Karl Joseph, 1858~1889) 이야기를 이해하면 오스트리아 빈 여행이 수월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황태자 루돌프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카를 6세(Kaiser Karl VI)의 장녀로 왕가의 규정을 깨고 학교에서 만난, 잘생긴 유학생 프란츠 슈테판 로트링겐(1708~1765)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왕(프란츠1세)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능력이 탁월해 전쟁 등, 많은 것에서 업적을 이뤘고 16명(5남 11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애결혼을 해서인지 다행히 합스부르크의 ‘근친혼의 저주’ 인 ‘주걱 턱’은 없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아들 프란츠 요제프(1830~1916)가 18세에 왕위를 계승한다. 프란츠 요제프는 독일인 시시 공주(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1837~1898)와 연애 결혼한다. 프란츠 요제프의 장남이 바로 루돌프다. 루돌프는 어린 시절 늘 부모의 애정결핍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공무를 처리하기 바빴다. 하루 10시간 집무는 기본이었다. 엄마는 일 년 중 대부분 여행을 떠나 있어 얼굴 보기도 힘들었다. 할머니 손에서 길러진 그는 어릴 적부터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게다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루돌프는 벨기에 레오폴드 2세의 딸인 스테파니(Stephanie, 1864~1945)와 정략결혼을 했다. 당시 루돌프는 22세였고 스테파니는 16세였다. 결혼 2년 후, 스테파니는 딸 엘리자베트 마리를 낳았지만 사랑없는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다. 이들은 끝내 별거를 하게 된다. 이 무렵, 30세의 루돌프는 17세밖에 안 된, 어린 마리아 폰 베체라를 소개받아 사랑에 빠진다. 이 사건으로 황태자 자격도 박탈 당하게 된다. 1889년 1월 말, 루돌프는 연인과 함께 황실 사냥용 별장 마이얼링(Mayerling)에서 동반자살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요제프 부인 시시 황후는 스위스 여행 중에 총에 맞아 비명횡사했다. 거기에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1863~1914)는 아내와 함께 사라예보의 육군 훈련에 참관 차 갔다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또 남동생이었던 막시밀리아노 1세(1832~1867)는 멕시코 제국의 황제로 갔다가 총살형 당했다. 요제프는 68년 동안이나 재위를 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볼 꼴 못 볼 꼴’ 다 본 비극의 황제였다.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 빈에는 호프부르크 왕궁과 쇤브룬 궁전(Schoenbrunn)이 있다.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웅장하고 드넓은 겨울 궁전이었다. 왕궁은 크게 16~18세기에 지어진 구 왕궁과 19~20세기에 지어진 신 왕궁으로 나누어진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가 사용하던 방은 공개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살던 레오폴트 관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람이 제한된다. 쇤브룬 궁전에는 여성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각종 용도의 1441개 방이 있다. 이 가운데 40개만 공개하고 있다.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구혼했다는 ‘거울의 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등이 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프랑스 왕가로 시집(15세)가기 전까지 이 궁전에서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 명화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섬세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이 궁전은 199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벨베데레 궁전 빈 시내에서 멀지 않은 남서쪽에 1721년에 지어진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 있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의 주인은 오스만 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 보관해 두었다. 그후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1914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특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비롯해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1907~1908년 작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샵에서는 클림트의 그림을 활용해 기념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클림트를 알려면 BBC가 제작한 나 존 말코비치가 주연한 영화 를 보면 된다. 그 외 클림트 명화의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 도 있다. 빈의 제체시온(Secession)에서는 클림트가 만든 ‘베토벤 프리즈(the Beethoven Frieze)’가 볼거리다. 창의성 넘치는 훈데르트바서의 쿤스트 하우스 빈의 건축물 중 눈에 띄는 것은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작품들이다. 그의 건축물 중 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주택가 사이에 자리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다. 자연 친화적이고 창의성이 넘치는 그의 건축 기법은 차라리 경이롭다. 이 밖에도 훈데르트 바서의 미술품 등을 전시하고 있는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 Wien)에서도 참신하고 자유로운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또 훈데르트바서의 손길이 닿은 쓰레기 소각장도 관광명소가 됐다. 프라터 공원 가는 길목에서 볼 수 있다. 진귀한 작품들의 寶庫 ‘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은 빈 여행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미술관은 합스부르크 가의 방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17세기 중엽 레오폴트 빌헬름이 수집한 방대한 소장품을 모체로 세계 미술사 전반에 걸친 진귀한 작품들이 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16세기 베네치아 화파와, 루벤스, 반 다이크와 같은 플랑드르의 대가, 그리고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뒤러, 브뤼헐로 이어지는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촬영이 가능한 곳으로 무작정 많은 작품을 찍는 것이 좋다. 의 촬영지인 프라터 공원 영화 애호가들은 달달한 로맨스 영화 의 촬영지를 방문할 목적으로 빈을 찾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같은 배우(에단 호크, 줄리 델피)를 출연시켜 비포 시리즈 영화를 완성해 냈다. 영화 속 두 여인이 밤을 새웠던 곳이 프라터 공원(Prater Park)이다. 이 공원은 1560년 막시밀리안 2세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락장으로 개장했으며 1766년부터 일반에게 개방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관람차(61m) 등의 놀이기구가 있다. 그 외에도 빈에는 성 슈테판 대성당 그라벤(게른트너) 거리, 시청사, 빈 대학 보티프 교회, 카를플라츠 역사, 앙커 시계, 암 슈타인 호프 교회 등 볼거리가 많고 모차르트, 베토벤, 요한 슈트라우스, 요제프 라너 등의 음악가는 물론 프로이트 등 무수한 인물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다. ----------------- Travel Tip! 항공편 대한항공이 인천에서 오스트리아 빈까지 일주일에 3번(수, 금, 일) 운항한다. 오스트리아 빈까지는 10시간 30분~11시간이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8시간 늦다. 음식정보 수육 같은 타펠슈피츠, 돈가스나 비프가스와 거의 비슷한 슈니첼이 빈의 대표 요리. 그리스 거리(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griechenbeisl, 1447년에 개업)은 모차르트, 베토벤, 마크 트웨인, 채플린 등 유명인들이 찾은 곳이다. 또 카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란트만(landtman), 젠트랄(gentral), 임페리얼 호텔(imperial), 자허 호텔, 할카(halka)가 유명하다. 데멜(Demel)은 초컬릿이 아주 맛있다. 워크 앤 모어(Wok & More, 칼스플라츠 지하철역 근처)에서는 아시아 음식을 뷔페로 즐길 수 있다. 주류 정보 와인마을로 유명한 그린칭(Grinzing)이 있다. 호이리거 와인(heuriger Wein)의 본 고장이다. 숙박 정보 최고급 호텔부터 아파트먼트 호텔,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등 다양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배낭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저렴한 유스호스텔도 많다. 교통 패스 빈 카드(Die Wien-Karte)로 3일 동안 버스, 지하철,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유람선, 음악회, 쇼핑,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여러 가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단기 체류라도 여러 명소를 돌아보고 싶은 여행자에게 제격이다. 축제 빈은 음악의 도시답게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시니어 포인트 빈은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시니어 층이 여행하기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몸이 불편해도 별로 어렵지 않다. 호프부르크나 쇤브룬 궁전에선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 2016-05-23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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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국남의 뉴컬처 키워드]어른들에게 감성과 행복을…
- 1. 30~50대 중·장년층 아버지들이 자녀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드론(무인 항공기) 제품 코너에선 눈을 떼지 못하고 제품을 보며 좋아 어쩔 줄 몰라 한다. 사람보다 더 큰 피규어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촬영한다. 조립한 레고를 전시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드론을 좋아하고 피규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레고를 조립하는 사람은 어린 자녀가 아니라 바로 30~50대 중·장년들이다. 1월 7일부터 10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6 키덜트&하비 엑스포’의 풍경이다. 2. 이마트는 지난해 6월 킨텍스 이마트타운에 피규어 전문관을 비롯해 드론과 각종 첨단 장난감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드론존, 스마트 토이존을 마련했다. 어린이 손님보다 20~50대 어른 손님이 압도적으로 많다. 롯데마트가 지난해 9월 서울 구로점과 잠실점, 그리고 판교점 등 세 곳의 키덜트 전문점을 열었는데 각종 피규어 제품과 드론, 무선 조종 자동차를 구매하는 손님의 90퍼센트가 20대 이상 성인들이다. 3. 지난해 7월 종이접기 전문가 김영만이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한 이후 서점가에는 때 아닌 종이접기 책 열풍이 불었다. 그 열풍을 일으킨 주역은 유치원생이나 초등생이 아닌 30~40대였다. 그뿐만 아니라 20~30대 여성을 중심으로 ‘색칠놀이’컬러링북 신드롬이 일었다. 정교한 그림을 따라 원하는 색을 칠하는 컬러링북은 2015년 한 해 전년보다 교보문고, 영풍문고 등 대형서점마다 2~4배 판매가 증가했다. 이 세 개의 풍경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키덜트 문화(Kidult Culture)다. 키덜트 문화의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덩달아 키덜트 문화 상품 시장도 급성장하고 있다. “키덜트 시장은 2015년 현재 5000억~7000억원 규모로 매년 20퍼센트 이상 성장해 2~3년 내 1조 원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는 한슬기 NH투자증권 연구원의 설명은 키덜트 문화 열기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키덜트 문화란 무엇일까. 키덜트(Kidult)는 어린이를 뜻하는 키드(Kid)와 어른을 의미하는 어덜트(Adult)의 합성어다. 키덜트는 성인처럼 꾸미는 10대, 혹은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이의 감성을 추구하거나 어린 시절 누렸던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는 어른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서는 후자의 의미로 키덜트가 주로 사용된다. 키덜트 문화는 바로 성인들이 귀엽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처럼 유치한 것을 거부감 없이 즐기는 문화를 통칭한다. 한때 키덜트 문화는 철없고 독립성과 책임감이 결여된 정신적 퇴행을 하는 일부 어른들이 즐기는 미성숙한 문화라는 부정적인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소비층이 급증하면서 긍정적이고 다양한 모습의 키덜트 문화가 등장하고 주류 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키덜트 문화는 광범하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출판, 만화, 게임, 캐릭터 용품, 완구,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등 키덜트 문화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고 다양하다. 키덜트 문화의 막을 연 것은 1980~1990년대 미국 월트 디즈니를 비롯한 할리우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1990년대 어린이 관객만으로 수익을 맞출 수 없었던 월트 디즈니가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등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한편 등 성인들도 즐길 수 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나 판타지물을 제작함으로써 키덜트 문화의 촉발제 역할을 했다. 인기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의 캐릭터물과 피규어가 어린이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인기를 끌면서 하나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용품 수집 마니아인 탤런트 심형탁은 “집에 도라에몽 캐릭터 인형부터 침대, 베개까지 다 있다. 한 때는 도라에몽 피규어 등 관련 상품을 사는 데 1000만원이 든 적이 있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이해를 못한다. 그런데 나는 도라에몽 관련 물품을 구입하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 도라에몽 상품은 나의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준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간한 ‘캐릭터 산업백서’에 따르면 2014년 한 해 키덜트 캐릭터 시장규모는 500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성인 동호회는 수천 개에 달하는 것에서 키덜트 문화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다.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동호회를 동시에 하는 조흥호씨(53)는 “불과 5년 전만 해도 무인 조종 자동차를 갖고 놀면 철이 없다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이 크게 줄었다. 무인 조종 자동차나 드론 동호회는 한 달에 10여 개 넘게 생겨나고 있다. 무선 조종 자동차와 드론 대회가 속속 개최되고 있다”고 말했다. 송지혜씨의 컬러링북 과 시리즈가 2015년 한 해 10만 부가 팔리는 등 출판에서도 키덜트 문화의 부상은 확연하다. 컬러링북을 비롯한 키덜트 문화와 관련된 만화, 종이접기 책, 캘리그래피북 등 키덜트 관련 도서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송지혜 씨는 “제 컬러링북이 어린이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머니나 아버지들이 무척 좋아해서 깜짝 놀랐어요. 알고 보니 최근 일고 있는 컬러링북 신드롬은 20대 이상 성인들이 주도한 거였어요”라고 설명한다. 키덜트 문화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완구점 역시 요즘 손님의 20~30퍼센트는 성인들이라는 것이 상인들의 설명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완구점을 운영하는 강창호씨(40)는 “요즘에는 바비 인형이나 건담 시리즈 캐릭터를 구입하는 20~50대 성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고 전했다. 키덜트 문화를 더욱 확산시키는 곳은 바로 백화점, 할인마트, 편의점 등 유통업계와 화장품 및 의류 업계다. 현대백화점은 판교점에 레플리카 등 키덜트 매장을 운영하고 롯데마트는 구로점을 비롯한 세 곳에 키덜트 전문관을 마련해 ‘어벤져스 마리아 힐 피규어 한정판’ 등 80여 종류의 키덜트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밖에 이마트, 홈플러스 등 대형할인 매장과 서울 용산 아이파크백화점과 신세계 백화점 등 적지 않은 백화점들도 키덜트를 겨냥한 상품코너를 따로 마련해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유니클로를 비롯한 의류업체와 LG생활건강 등 화장품 업체들도 키덜트를 겨냥해 캐릭터 업체와 제휴한 상품을 속속 내놓고 있다. 키덜트 문화가 이처럼 열기를 더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생존경쟁이 치열해지고 구조조정이 횡행하는 팍팍한 현실에서 유년 때 편하게 즐겼던 문화나 상품을 소비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리려는 성인들이 많아진 것을 키덜트 문화의 주원인으로 꼽는다. 오리콤 브랜드 전략연구소는 보고서 ‘키덜트 문화’를 통해 “성인들이 동심이 깃든 상품을 소비하면서 각박한 생활에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한편 정서를 안정시키고 재미와 유쾌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키덜트 문화가 부상했다”고 분석했다. 또한 ‘영포티(Young Forty)’, ‘신중년(Young Old)’, ‘100세 시대’등의 용어에서 알 수 있듯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물리적 나이에 비해 정신적 성장이 느려진 것도 키덜트 문화의 부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들이 있다. 물론 키덜트 문화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일부 전문가들은 키덜트 문화는 정신적 퇴행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문화이고 책임감 없는 철없는 어른들을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도 이제 키덜트 문화는 성인들에게 다양한 감성과 경험을 제공하며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문화로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키덜트 문화는 유통, 캐릭터산업, 의류, 화장품 등 산업 전반에 보다 많은 수요를 창출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 2016-02-0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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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재미 플로럴 아티스트 클레어 원 강, 플라워아트 손끝으로 완성하다
- 꽃과 더불어 사는 삶은 아름답다. 꽃은 피고 지고 나면 그뿐인 듯하다. 그런데 그 꽃은 씨앗을 남기고, 씨앗은 다시 꽃을 피운다. 미국서 활동하고 있는 클레어 원 강(Claire Won Kang AIFD, 한국명 이원영)은 금세 시드는 꽃의 아름다움을 시간의 굴레에서 끌어낸 플로럴 아티스트(Floral Artist)다. 그는 꽃이 가장 아름답게 핀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꽃과 소품을 재창조한 콜라주로 플라워아트의 새 장르를 열었다. 남진우 뉴욕 주재기자 namjin@etoday.co.kr 세계 최고의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Best in Show)’을 여러 차례 수상한 강 작가는 일생의 역작인 화집 를 출간, 플라워아트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꽃 앞에서는 인종 간의 차이도,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플라워아트를 전수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플라워아트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클레어 원 강은 1968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미술아카데미(Pennsylvania Academy of Fine Art)에서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플라워디자인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강 작가는 당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장학생이었던 강성권 박사(현 IBM 중앙연구소 연구과학자)와의 신혼생활 중에도 미술공부를 계속하며 필라델피아의 갤러리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이직으로 뉴저지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남편 직장 동료 부인의 소개로 플라워 숍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이것이 플라워아트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이 단골고객 “플라워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해볼 만한 일이니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술로 다져진 기초 위에 뛰어난 손재주가 더해지면서 플로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빠르게 갖추어 갔다. 1984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뉴욕의 부촌인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채퍼쿼(chappaqua)에 아름다운 집을 마련했고 뛰어난 디자이너만 채용하는 그 지역 플라워 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즐거웠습니다. 꽃에 완전히 빠졌던 거죠.”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객과 교감을 하다 보면 고객에게 어울리는 꽃과 디자인이 순간적으로 떠올려지기도 했고, 꽃들을 바라보면 그 꽃이 말하는 듯한 무아의 경지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의 신들린 듯한 플라워아트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들이 하나둘 단골고객이 되었다. 또 웨딩드레스로 유명한 ‘베라왕’ 매장의 화훼 디자인을 전담하기도 했다. 티파니, 블루밍데일, 노드스트롬 등 미국의 화려한 매장도 활동무대였다.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과 컬래버레이션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 꾸준히 노력하면 창의성과 자기만의 브랜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창의성을 유지하려면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맨해튼의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한 것이 디자인 감각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클레어 원 강은 2001년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AIFD)의 시카고전국대회에서 꽃 콜라주 페인팅을 성공적으로 소개하여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2008년 이화여대 총동창회 창립 100주년 기념 플라워 쇼에서는 100개의 호접란이 단단한 그물을 뚫고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디자인으로 ‘진선미 정신’을 표현하여 기념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미국, 영국 등지의 수많은 플라워 쇼에 초대되었다. 2014년 필라델피아 뮤지엄에서 열린 ‘조선왕조대전’에 전시된 ‘무신년진찬도’를 주제로 한 작품 ‘글로벌 댄스(Global Dance)’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태극과 오륜을 바탕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이 작품으로 그는 지난해 3월 세계 최대 규모, 최고 전통의 실내 플라워아트 경연장인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수상해 더 뜻이 깊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 작품 클레어 원 강은 수많은 초대전에 참여하고 큰 상도 많이 받았지만 정작 가슴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작품은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이었다. 친구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작업한 장례식장의 플라워아트는 오 헨리의 를 연상케 했다. “남편 친구가 평소에 좋아했던 보석 색깔의 꽃으로 꾸민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망자가 천국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플로리스트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에 맞는 디자인을 했을 때 가장 아름답고 큰 감동을 준다”는 강 작가는 “아름다운 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그만 국화와 카네이션도 제자리에 꽂히면 아름답고, 잎의 앞면보다 뒷면이 더 어울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클레어 원 강의 삶은 자연과 예술에 교육이 어우러진 여정이었다. 1991년부터 20여 년간 뉴욕식물원(New York Botanical Garden)에서 플라워아트에 대해 강의해 2000명이 넘는 후배를 배출했다. 2005년에는 재직 교사 200명 가운데 학생들이 꼽은 최고의 강사로 선정돼 ‘올해의 우수 교사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 전역의 가든클럽과 특별강좌에 초빙되어 꽃과 인생을 강의했다. “이파리가 너무 무성하면 꽃이 피지 않는다. 중앙에 먼저 핀 꽃을 잘라내야 주변 꽃들이 잘 자라난다”는 강 작가는 “혼자만 잘 자라면 주변 꽃들이 피지 못해 조화로울 수 없으며, 꽃 자체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다”고도 했다. 꽃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이 강의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화보집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원 지난해 5월 숙명여고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한 강 작가를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구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다. 항상 건강하시고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다. 갑작스런 수술과 별세는 강 작가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어머니는 평소 소망을 이룬 것이었다. 자녀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주무시는 듯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미국의 딸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면서 장례 꽃장식을 해주기를 간절히 빈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못다 이룬 어머니의 소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강 작가가 40여 년간 디자인한 작품을 집대성하여 최고의 화집을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망이자 명령이었다.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탄 작품을 비롯하여,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을 선별해 재현하고 보관해 놓은 콜라주 작품을 하나하나 담았다. “올 6월 말 덴버에서 있었던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 창립 50주년 기념총회에 이 화집을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고, 이는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저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강 작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네요. 어머니와 나의 평생의 소망이었던 화집 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습니다”면서 울먹였다. ‘일체(Oneness)’는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 됨을 뜻한다. 여러 부분이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여 아름다운 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원네스(WONNESS)는 조화와 일체를 이루는 클레어 원 강의 예술세계다. 화려한 꽃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한 꽃의 조화다. 절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제자리에 맞는 아름다움이다. 강 작가는 화집을 발간하면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인생의 순간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모두 연결된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 가족, 동료, 친구, 후배, 제자, 이웃 등 이 모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란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글과 영문으로 제작된 화집 는 이제 클레어 원 강의 화신이 되어 하버드대학, 옥스퍼드대학, 스미소니언 등 각지의 도서관에서 플라워아트를 전파하고 있다.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게 하다 강 작가의 목소리는 30~40대다. 타고난 맑은 목소리로 강의를 계속할 작정이다. 뉴욕식물원과 가든클럽에서 요청하는 강의를 힘닿는 데까지 맡을 생각이다. 봉사활동도 그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미국 내 한인 여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아동기금(Global Children Foundation)’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기증 받거나 구입한 상품을 바자회를 통해 미국과 한국에서 판매하여 수익금 100%를 세계 각지의 굶주린 어린이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 “젊을 때는 나, 내 자식, 내 작품 위주였는데, 이제는 남을 돕는 일이 훨씬 즐겁게 느껴집니다.” 강 작가는 죄수나 소외된 사람에게는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꽃꽂이 기술을 전수해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작정이다. 왕성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몸 관리가 필수다. “화집을 만드느라 중단한 인도 요가인 비크람(Bikram)을 다시 시작할 계획입니다.” 강 작가는 5년 전 무릎이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아팠으나 비크람을 통해 극복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사랑하는 손녀를 보면 저절로 낫는단다. “나이가 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음이 더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그는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활동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한인 모임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 2016-01-0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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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나는 ‘현대판 화전민’, 지금은 내 인생 마지막 도전”
- 김창렬(金昌烈·66) 한국자생식물원장은 식물에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 유명인이다. 토종 야생식물을 재배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사업화했고 토종식물만을 소재로 식물원을 설립해 강원도 평창군의 명소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식물원이 3년째 문을 닫고 있다. 김 원장은 갑자기 전국일주 마라톤을 했다. 어떻게 된 사연일까. 그를 만나 얘기를 들어 봤다.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참 열정적이고 고집스러운 식물원이 있다.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국립공원 입구 산자락에 위치한 한국자생식물원이다. 1999년 6월 국내 1호 사립 식물원으로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야생화와 들풀 약 수천 종이 테마, 계절별로 심겨 있다. 약 5만 평에 달하는 식물원 산책로에서 갖가지 한국 자생식물을 관람하다 보면 우리 식물에 대한 열정이 도처에 묻어난다. 이곳을 만든 김창렬 원장이 일궈온 삶도 식물원처럼 독특한 구석이 있다. 독재에 맞섰던 정치학도 청년은 문득 강원도 산골에 들어와 풀 농사를 지었다. 달리기도 시작했다. 화재로 식물원을 휴관해야 했던 2010년에는 마라톤으로 전국을 일주하기도 했다. 가을이 내리는 평창에서 그를 만나 그의 삶에 대해 들었다. 66세 김 원장의 ‘인생 마라톤’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뜨거웠던 운동권 청년, 옥살이 후 농사를 택하다 한때는 그도 누구 못지않게 가슴 뜨거운 청춘을 보냈다. 1970년대 대학생활을 했던 그는 소위 ‘운동권’이었다. 어수선한 시국 속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당해 3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 이후 뚜렷한 길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를 몇 군데 두드려봤지만 꼬리표가 늘 발목을 잡았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풀 농사를 짓겠다”며 강원도행을 결심했다. 그는 충청도 출신이지만 고향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김 원장은 “떠밀리거나 도망치듯 농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결심한 것”이라고 강조했다.“할아버지도 농부였고 아버지도 농부였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자식은 농사꾼이 되지 않길 바라셨다. 내가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사회에 나왔다면 전혀 다른 길을 갔겠지. 하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결국 농사꾼이 되기로 했고, 이왕 농사를 한다면 배추, 무 같은 평범한 작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했던 농사를 그분들과는 다르게 해보고 싶었다. 김 원장의 고민은 ‘돈 되는’ 농사였다. 마침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유치 분위기로 국토공원화 사업이 한창이던 때였다. 외래종 일색의 원예종 보급에 문제의식도 갖고 있었다. “외국 꽃을 들여와서 꾸며 두면 뭐하나. 한국에 오면 한국의 모습을 보러 오는 것 아니냐. 차제에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꽃과 나무 중에서 예쁘고 관광가치가 있는 식물을 대량으로 재배해보면 돈으로 좀 바꿔볼 수 있겠다 싶더라.”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결심을 밀어붙였다. 설악산 에델바이스로 시작한 소중한 추억 에델바이스(솜다리)의 꽃말은 ‘소중한 추억’이다. 김 원장에게 에델바이스는 특별히 더 소중한 추억이다. 1980년대 설악산에 가면 관광기념품으로 설악산에서 채취한 에델바이스를 액자에 넣어 팔았다. 마침 영화와 대중가요 등에 에델바이스가 소재로 쓰이면서 많은 사랑을 받던 때였다. 장사하는 이들은 설악산의 에델바이스를 캐서 팔고, 당국은 멸종위기종 식물의 훼손을 막으려 하는 숨바꼭질이 계속됐다. 김 원장은 “에델바이스를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산에서 캐오지 말고 대량으로 재배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면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설악산 상인들에게 수요조사를 해봤더니 ‘가져올 수 있는 만큼 가져오면 다 사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델바이스 씨앗을 채취하느라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연 20여만 개를 생산해 한 송이에 120원씩 팔았다. 이후 백리향, 구절초 등 다른 야생화까지 재배품종을 넓혔고 현재의 식물원도 일구게 됐다. 꽃말처럼 김 원장에게도 에델바이스가 ‘소중한 추억’이 된 셈이다. “가장 뿌듯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돈하고 풀하고 바꾼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풀 농사도 하나의 비즈니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먼저 증명한 것이니까. 거창하게 말하면 고부가가치 농업분야를 새로 만들었다고 할까. 그리고 전국적으로 자생식물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수 있게 했다는 것. 한 분야를 먼저 갔다는 것. 이런 부분에서 지난 삶에 보람을 느낀다.” 불타버린 식물원, 문득 떠난 마라톤 전국일주 식물원이 화마를 입었던 2010년 한글날은 김 원장에게 떠올리기 싫은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보니 식물원 전시장 건물이 불에 타고 있었다. 목조로 만든 건물이라 화재에 취약했다. 바로 화재신고를 했지만 건물 전체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됐다. 겨울을 앞두고 있어 공사도 어려웠다. 식물원을 복원하고 보수하려면 긴 시간 문을 닫아야 했다. 망연자실하며 멍해진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것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전국일주 마라톤이었다. 머릿속에 뭔가 새로운 생각을 채워 넣으려면 일단 머릿속을 비워야 했다. 그러기 위해 마라톤이 필요했다. 김 원장은 “강원도에 터를 잡은 후 매일 오대산을 달리며 생각을 정리해 왔다. 식물원 운영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와 용기가 떠오를 것 같았다”고 말했다. 42.195km 풀코스를 정식으로 완주한 경험도 어느덧 100회를 넘긴 때였다.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됐다. 강원도를 향하던 날처럼 뒤돌아 보지 않고 길을 떠났다. 장장 75일간 무려 1500km를 뛰었다. 식물원에서 출발해 동해안을 거쳐 남해안으로,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중부와 임진각을 거쳐 다시 영동지역의 출발점까지 매일 평균 20km 이상을 달렸다. 한겨울의 추위, 눈보라와 싸우는 고단한 길이었다. 점점 피로가 누적됐다. 왜 뛰는 걸까. 그는 “오직 그만두지 않기 위해 뛰었다.” 당시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했다. 새 도전, ‘식물원+숙박시설’ 복합 휴양시설 구상 마라톤 애호가들에게는 ‘상심의 언덕(heartbreak hill)’이라는 지명이 꽤 유명하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 구간의 결승점 전 10km지점에 있는 언덕코스를 일컫는 말이다. 현재 김 원장의 인생도 바로 이 구간을 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생식물원은 2013년부터 현재까지 휴관에 들어간 상태다. 김 원장은 “최근 몇 년간이 강원도를 처음 찾았던 때보다 어렵다”라고 했다. 자생식물원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식물원’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 시작한 뒤부터다. 식물원이 가족들의 가벼운 나들이 장소로 각광을 받자 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여기저기서 많은 예산을 투입해 대형 식물원을 만들었다. 자생식물원의 관람객도 눈에 띄게 줄었다. 김 원장은 “인구에 비해 식물원이 너무 많아졌다. 몇 곳 없던 식물원이 지금은 전국에 200개가 넘는다. 적자운영을 하느니 새로운 변화를 구상해보자는 생각으로 식물원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아직 뾰족한 답은 얻지 못했다. “전국일주 마라톤을 하면 뭔가 멋진 구상이 틀림없이 떠오를 줄 알았는데, 안 나오더라”. 김 원장이 머쓱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깊은 고심이 묻어났다. 최근 그는 식물원 부지 일부에 숙박시설을 조성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기자가 식물원을 찾았던 날에도 그는 숙박용 건물에 쓰일 외장재를 까다롭게 선별하고 있었다. 요즘 취미가 있는지 물었다. 김 원장는 “오로지 식물원”이라고 답했다. “초창기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식물원을 만드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20대 정치학도처럼 빛나는 눈빛은 어느덧 고희(古稀)를 앞둔 그가 또 하나의 ‘에델바이스’를 찾길 기대하게 만들었다. HE IS… 1949년생으로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 1970년대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짧지 않은 기간 옥살이를 한 후 강원도 평창으로 가서 한국 고유 자생식물 재배를 시작했다. 국내 1호 사립식물원인 한국자생식물원을 만들었으며 사단법인 한국자생식물협회 회장, 계간 발행인, 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5-10-12 16: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