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글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정유재란 첫 전투 칠천량 해전의 치욕은 예고되어 있었다. 수하 장졸과 백성들이 하늘같이 떠받드는 장수를 내치고, 무능하고 용렬한 장수를 앉히고 어찌 이기기를 바라겠는가.
선조는 정유년(1597년) 1월 28일 이순신을 충청·전라 양도수군통제사로, 원균을 경상수군통제사로 발령했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한 계급 강등되고, 육군으로 전출되었던 원균이 수군에 복귀하여 최전방 수역을 맡게 된 것이다. 한산도 통제영을 거제도로 전진 배치하라는 명령을 수행하지 않은 데 대한 문책이었다.
이 인사에는 조정을 장악한 서인세력의 비호를 받은 원균의 모략이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통제영을 왜군 본진(부산포)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한산도에서 거제도 동쪽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가 이순신의 입지를 더욱 압박하기도 했다.
이순신은 그 논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군은 임진년 이래 경남 동부 해역 요소마다 견고한 성을 쌓고 2만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적진을 코앞에 둔 곳으로 수군총사령부를 옮기는 것은 섶을 지고 불길로 뛰어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이순신의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꼼짝달싹하지 못할 죄를 뒤집어쓴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이 다시 쳐들어오는 길목을 지켜 출동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노한 선조의 명으로 이순신은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압송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앉았다.
옥에 갇혀 국문을 당하다가 가까스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백의종군 길에서, 그는 칠천량 패전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전멸한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경상도와 전라도 포구와 고을을 순회하면서 흩어진 수군병력을 불러 모으고 병기와 군량을 찾아냈다. 그 사이 다급한 불부터 끄려는 듯, 조정은 그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 앉혔다.
불운의 장수가 걸었던 통한의 길
이순신이 한양으로 잡혀간 것은 정유년 2월 26일이었다. 시류에 편승한 조정 중신이 모두 침을 튀기며 이순신을 죽이라고 했지만, 노 재상 정탁의 신구차(伸救箚, 목숨을 걸고 구명하는 상소문)라는 상소 덕에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보전했다.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난 것은 잡혀간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4월 1일이었다. 그날부터 백의종군 길에 나선 그가 복직되어 다시 통제사가 된 8월의 회령포 취임식까지, 불운의 장수가 걸었던 통한의 길을 자동차로 둘러보았다. 이순신이 5개월 넘게 걷고 말달렸던 길을 주마간산처럼 달린 1박 2일 여행이었다.
“합천 초계에 주둔한 도원수 권율 막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은 이순신은 남대문 밖 관노 집에서 아들과 조카의 마중을 받았다. 고문에 시달린 육신을 치유할 여유도 없이 하루를 쉬어 길을 떠난 그는 아산 선영에 들러 눈물의 참배를 한다. 전라 좌수영(여수) 마을에 머물던 어머니의 귀향 소식 덕분에 고향 집에 며칠 유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에게 먼저 당도한 소식은 어머니 부음이었다. 아들의 하옥 소식에 허겁지겁 서해안을 따라 배편으로 올라오다 풍랑으로 와병, 끝내 주검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호송관의 독촉에 못 이겨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그는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을 안고 남행길에 오른다. 공주-여산-전주-남원-하동을 거쳐 초계에 당도한 것이 6월 4일이었다.
초계는 도원수의 진을 둘 만한 곳이 아니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영호남 여러 곳으로 통하는 길목을 통제하면서 육군과 수군 작전을 지휘할 적지로 보기 어려운 곳이었다. 왜적의 내륙 진출을 막으려면 교통의 요지를 차지하는 게 상식인데, 어찌하여 굽이굽이 험한 산길로 이어진 궁벽한 곳에 도원수의 진을 친 것인가.
도원수가 주둔했던 곳이 어딘지는 아직 특정되지 않았다. 한때 초계면사무소 자리가 그곳이었다 해서 표지판까지 있었다지만, 향토사학계가 들고 일어나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 뒤 경남도와 합천군은 마을 앞 농경지를 사들여 역사공원을 꾸미면서, 고증도 없이 호화로운 원수부 건물과 객사까지 세웠다. 많은 예산을 들인 보여주기 식 사적지로 보였다.
백의종군 당시 이순신의 숙소 모여곡이라는 마을에도 이설이 있지만, 합천군 율곡면 낙민마을 설이 유력하다. 그가 묵었던 집 주인 이어해(李漁海)의 13대손이 지금도 살고 있고, 당시의 일화도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마을 앞 정자나무 아래에는 백의종군 길 표지석이 섰고, 그 뒤편 야산 기슭에는 마을이 정겹게 들어앉았다.
칠천량 패전 소식에 낙담한 도원수의 한탄을 듣고 이순신은 “제가 한 번 나가보고 계책을 세움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렇게 길을 나선 것이 7월 18일이었다. 곧바로 남행하여 사천 노량의 해안마을을 둘러보고 진양 수곡면 원계리 손경례(孫景禮) 집에 머물 때인 8월 3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다시 받는다.
에는 이때의 일이 매우 덤덤하게 적혀 있다. “맑음. 이른 아침 뜻밖에 선전관 양호가 교서와 유서를 가져왔다. 분부 내용인즉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명령이었다. 숙배(肅拜)한 뒤에 받자온 서장을 써서 봉해 올렸다.” 며칠을 두고 큰비가 내려 근심과 우울증이 심해진 탓이겠으나, 복직인사에 대한 감상치고는 지나치게 무덤덤한 이 점이 바로 그의 진면목이다.
이순신에게 미안했는지, 선조는 유서에서 “지난번 그대의 직첩을 바꾸고 죄인의 이름으로 백의종군케 한 것은 과인의 지모가 밝지 못하여 생긴 일”이라고 사과했다. 그러고는 “이토록 패전의 욕을 당하게 되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尙何言哉)!” 하면서 ‘상하언재(尙何言哉)’를 반복했다.
사적지 손경례 집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목화 시배지로 유명한 산청군 단성에서 남으로 뻗은 지방도를 한참 달려가니 길가에 백의종군 길 표지석이 서 있고, 그 옆 전주에는 ‘손경례 가(家)’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급히 차를 세우고 찾아들어갔으나 동네에는 인적이 없었다. 한참 찾아 헤맨 끝에 12대손이라는 손도근(孫道根·80) 옹을 만날 수 있었다.
직계자손이냐는 물음에 손 옹은 손사래를 치면서 “직계는 서울에 살고 관리인이 집을 지키고 있는데 꼴이 이렇소” 했다. 그러면서 자기 조상 이름을 함부로 부른 데 대한 불쾌감을 내비추었다. 얼른 사과하고 당시의 일화를 물으니, 이은상의 에 다 나와 있는 이야기라면서도 “비가 많이 와서 충무공께서 우리 조상 집에 닷새를 묵어가셨다”고 자랑했다.
비에 갇혔던 길을 벌충이라도 하려는 듯, 이순신은 발길을 재촉하여 하동-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 땅을 지나 보성에 당도했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이제 사또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그들은 모두 난리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이순신은 말에서 내려 피란민들 손을 부여잡고 부디 몸조심하라고 당부하면서, 안쓰러움을 표했다. 젊은 장정들은 처자에게 “나는 대감을 따라갈 터이니 너희는 천천히 찾아 오거라” 하고 따라나서기도 했다. 노인들은 길가에 늘어서서 술병을 바쳤다. 통제사가 받지 않으니까 울면서 사정했다. 더 이상은 사양할 수 없었다.
아직 12척의 배가 남았다
보성 땅에서 제일 먼저 찾아든 곳은 조양창(兆陽倉)이었다. 다행히 이 국창(國倉)에는 곡식이 봉인된 채로 남아 있었다. 순천 부유창 등 고을마다 창고가 잿더미가 되었는데, 군량으로 쓸 곡식을 구했으니 얼마나 요긴했겠는가. 창고들이 잿더미가 되고 사람 그림자가 끊긴 것은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청야작전을 재촉한 탓이었다. 왜적은 그렇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칠천량 패전으로 남녘 바다와 뭍을 안마당처럼 누비게 된 왜적이 본격적으로 호남 침공에 나선 것이었다.
조양창 자리는 지금 흔적도 없다. 그 사이 간척공사로 바다가 뭍으로 변한 것이다. 통제사가 묵었다는 김안도의 집도 마찬가지다. 400년 넘는 세월의 무게가 짓누른, 보이지 않는 흔적일 것이다.
보성에서 이순신은 흩어진 장수와 병졸을 모으고 군량을 보충하기 위해 아흐레를 머물렀다. 보성읍성 열선루(列仙樓)에 머물던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유지(有旨·편지)를 가져왔다. “약세인 조선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의탁하여 싸우라”는 명령이었다. 통제사는 “공문 작성 때 영의정 유성룡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영의정은 경기지방 순행 중이었다는 선전관 말로 보아 조정 대신들이 유성룡 부재를 틈타 다시 자신을 나락으로 몰아넣으려는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밤 통제사는 대취했다. 임금의 명을 받들지 않으면 다시 함거에 실려 올라가게 될 것이고, 명을 받들면 조선수군 재건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괴로움을 잊고 싶어 그는 군관들을 불러 통음을 하고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순신은 결심한 듯 열선루 누각에 앉아 유명한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장계를 썼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운다면 아직도 할 수 있사옵니다.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 왜적이 바다와 뭍에서 온갖 패악을 부리는 와중에 그런 용기를 가진 인물은 이순신 한 사람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열선루는 지금 없다. 이순신의 뒤를 밟아온 왜적이 보성 땅을 분탕질할 때 불타 없어졌다. 전란이 끝난 뒤 복원되었지만 일제 때 다시 철거되었다. 불공대천지수의 사적이라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 지금은 보성초등학교와 보성군청이 들어서 있다. 몇 해 전 청사 신축공사와 도로공사 때 발굴된 주춧돌 넷과 댓돌들은 지금 군청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보성군에 따르면 곧 있을 열선루 복원공사에 그대로 쓸 계획이라 한다.
보성을 떠난 이순신은 18일 회령포(會寧浦·장흥군 회진면 회진리)에 닿아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갖고 그 유명한 ‘회령포 결의’를 다진다. 에는 그날 “수사 배설(裵楔)이 뱃멀미를 핑계로 보이지 않았다. 포구 관청에서 잤다”고 씌어 있다. 17일자 일기에 “군영구미(軍營仇未·강진군 대구면)에 당도하니 경내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수사 배설이 우리가 타고 갈 배를 보내지 않았다”고 쓴 것으로 보아 이순신이 두려워 피한 것이 분명하다.
20일 일기에는 배설이 임금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교서에 숙배하기를 거부했다면서 “건방진 태도가 말할 수 없기에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고 썼다. 수사의 체면을 봐서 권율처럼 고위 군관을 직접 벌하지 않고 수하에게 벌을 주어 경고한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은 19일이었다. 배설이 가져온 12척의 전선과 120명의 장졸이 참석한 초라한 행사였다. 그러나 구국의 결의만은 드높았다. “우리는 다 같이 임금의 명을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어야 마땅하다.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아까우랴!” 에 적힌 통제사 취임사는 이토록 뜨거웠다. 임금과 조정을 속이고 명을 받들지 않은 죄인의 신분에서 다시 수군 총수로 돌아왔으나, 그에게 주어진 것은 달랑 직첩 하나였다.
회령포는 오늘날의 정남진 바닷가다. 서울에서 정남쪽 끝이라 해서 붙은 이름인데, 해남 땅끝 마을 가기만큼 멀다. 오전에 초계를 떠나 해 안에 당도하기 어려워 장흥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다음 날 눈 뜨자마자 달려간 오월의 아침, 회진포 바다는 쪽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백성이 모두 피란 가고 빈 포구였을 그때와는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선창에는 산뜻하고 날렵한 어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고, 그 안쪽으로는 번듯한 주민복지 시설과 상가가 조성되어 있다. 취임식 행사를 치렀을 회령포 성터는 아름다운 역사공원으로 바뀌었다. 내륙 깊숙이 파고들었던 바다는 1960년대의 개간사업으로 비옥한 들판으로 변했다. 면 소재지가 되었으니 인구도 몇 곱절 늘었으리라.
칠천량 참패의 씨앗
글머리를 되돌려 이순신 삭탈관직과 나국(拿鞠, 잡아다 심문함)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직접 죄목은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 군을 영격하라는 임금과 조정의 명을 어긴 일이었다. 그 까닭에는 아직 정설이 없다. 기록이 서로 달라 연구자마다 추론에 그칠 뿐이다.
정유년 초 경상도우병사 김경서(金景瑞·일명 김응서)의 진에 드나들던 왜인 가나메 도키스라(要時羅)가 김 병사에게 달콤한 정보를 흘렸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수하였던 그는 강화회담 결렬이 기요마사 탓이라고 헐뜯으며 “이번에 기요마사가 다시 건너오게 되었으니 통제사를 시켜 길목을 지켰다가 일제히 공격케 하면 그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기요마사가 건너온다는 날짜까지 말해줬다. 김경서의 보고를 받은 임금과 조정은 그 말을 사실로 믿고 이순신에게 영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초계에서 한산도까지 와 출동 명령을 전한 도원수에게 이순신은 “반드시 왜의 간계가 있을 것이오. 배를 많이 끌고 나갔다가는 도리어 역습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어찌 간첩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했다.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는 틈을 타 대한해협을 건너온 기요마사는 울산 서생포에 진을 쳤다. 이순신의 판단이 어떠했든 가나메의 정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진노한 선조는 “우리나라 장수가 유키나가보다 못하다”고 펄펄 뛰었다. 당장 이순신을 묶어 올리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순신을 그 자리에 천거하고 뒤를 보아준 영의정 유성룡도 어쩔 수 없었다.
이순신을 잡으러 온 의금부 도사 일행 가운데는 얼마 전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원균도 있었다. “내가 통제사라면 당장 부산포로 달려가 왜적을 무찌르겠다”던 그였다. 그 시간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려고 가덕도 앞바다에 나갔던 통제사는 왕명 소식을 듣고 급거 귀항했다. 갖가지 병기와 화약류, 병력과 군량미의 끝 단위까지 세세히 인계하고 함거에 올랐다.
“사또,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다 죽게 되는 겁니까!” 백성들은 함거를 가로막고 울부짖었다. 원균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을 것이다. 씻을 수 없는 치욕 칠천량 참패의 씨앗은 그렇게 잉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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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소통연구소 이종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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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이 항상 헛갈리는 곳! 은평한옥역사박물관이 맞는지 아니면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이 제대로 된 이름인지? 여러분은 어떻게들 알고 계시는지요? 오늘은 작심하고 그를 만나러 왔다. 그러나 그를 만나려면 삼가야 할 순서가 있다는 생각이다. 먼저 싸리문을 열고나 보자.
조선의 3대로를 아시는가? 큰길을 따라 서발, 북발, 남발의 삼발로가 조직되었으니 그중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서로(서발)는 기발(말을 타고 이동)에 해당되는데, 바로 이곳 박물관 인근을 경유했던 것이다(구파발, 지명의 유래). 때문에 입구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조선의 역참제도에 대한 내용은 빼놓을 수 없을 터이다.
유리판 아래로 생생한 발굴 현장을 재현해놓은 김자근동 묘를 스릴 있게 체험하는 잔재미도 느껴보며(현재 유적 발굴 과정에 있는 서울 은평구 이말산에서 발굴됨), 세종의 6남 금성대군(단종 복위에 가담했다가 32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함)을 모신 사당인 금성당(실제는 은평뉴타운 우물골 소재) 코너에선 무속신앙, 즉 샤머니즘에 잠시 빠져보기도 한다. 2층의 한옥 상설전시관으로 오르다 보면 계단길 벽면으로 전국의 한옥촌을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으며, 한복체험 코너에선 끼리끼리 방문 인증샷도 남길 수 있다. 멀리서 온 객을 위한 대접이 이만하면 융숭한 편이다. 자, 이제 헛기침 한번 해볼 차례다. 그가 버선발로 반겨줄지 모를 일이다.
노을빛 치마에 새긴 가족사랑
슬하에 자식 아홉을 두었던 그, 그러나 그중에 여섯이 그만 병사하고 마는데 자식을 먼저 보내는 어버이의 그 마음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디 그뿐인가?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을까.” 유배길에 전남 영암의 월출산을 바라보며 두고 온 집과 가족을 그렸을 그의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 있는 시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는 이 길이 무려 18년간이나 지속되리라고 짐작조차 했을까? 참으로 헛헛한 독백이 아닐 수 없다.
“주인 없는 초당엔 적막만이 가득하고, 처마 끝에 방울방울 낙수지어 반기는가?”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친구와 함께 초당에 들린 적이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길을 더듬어 그를 만나러 갔던 그 길, 한적한 초당 대청에 걸터앉아 낙수에 손 비비며 그가 만들었다는 연못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기억이 오버랩된다.
부부간의 애틋함, 자식을 향한 아비의 마음은 옛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고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뺄셈은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그는 부인이 보내온 치맛자락을 재단하여 두 아들과 그 후손들이 간직하도록 아비의 당부를 글로 표현한 서첩을 만드는데 그중 3첩이 남아 있다(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또 남은 천으로는 시집가는 딸에게 매화나무 가지 위에 두 마리 새가 앉아 있는 '매화병제도'를 그려줌으로써 다복한 가정을 꾸미고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원했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강진에서 수년간 유배 중일 때, 부인 홍씨가 해진 여섯 폭 비단 치마를 보내왔다. 세월이 오래 흘러 붉은색이 퇴색되었다. 네 첩의 글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보내고, 남은 천으로 작게 장정하여 딸아이에게 보낸다.”
짐작하셨겠지만 오늘 필자가 만나러 온 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하피첩, 은평에 오다
은 노을 하, 치마 피, 엮을 첩의 의미로 부인이 시집올 때 입고 온 붉은 치마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색이 바랬음을 은유한 것으로 지어미에 대한 지아비로서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리 넓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좁지도 않은 기획전시실, 그 공간의 범위로는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선생의 마음과 정신은 결국 오랜 유배생활을 이겨내고 고향(남양주시 능내리)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고, 만년에도 저술을 놓지 않았던 선생은 회혼일(결혼 60주년 기념일)에 그만 세상을 떠난다. 생의 마직막엔 곁을 지켜준 부인이 있었으니 선생의 임종은 외롭지 않았으리라. , , 등 다산 사상의 핵심은 사회 현실을 바탕으로 제도와 법을 맞도록 바꾸자는 것이 그 골자로 정치 및 행정체제, 형률제도, 경제제도, 생산기술, 군사제도 등 제반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선생이 저술한 책은 모두 503권이라고 한다. 인고의 세월 동안, 그리고 말년에도 평생 붓을 놓지 않았던 선생!
나는 어떤 남편이고 어떤 아버지인가? 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본 기획전은 6월 11일까지 이어지며 문의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으로 하면 된다.
연극 배우 윤석화가 데뷔한 해는 1975년. 그 이후 42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의 존재가 갖는 힘은 특별하다. 이제 그 이름에는 한국 연극을 상징하는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갈비뼈 골절이라는 큰 부상에도 불구하고 휠체어 투혼으로 9일간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깊은 감명을 선사한 윤석화는 몸이 회복되자마자 올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며 첫 번째 공식 공연 일정을 결정했다. 그것은 그녀가 올해로 일곱 번째로 진행하는 특별한 콘서트, 바로 격년으로 여는 입양 위한 자선콘서트다.
탄자니아 아동들과 결연을 맺는 등 평소 입양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윤석화는 국내 입양기관과 미혼모 자립을 위한 자선콘서트를 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2003년 부터 윤석화는 자선콘서트를 기획해 14년 동안 격년으로 7회째 콘서트를 열게 됐다.
그리고 자선콘서트에서 나오는 모든 수익을 동방사회복지회와 애란원에 기부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는 올해는 ‘만남’을 주제로 자선 바자회와 함께 특별한 친구들과 함께 꾸미는 토크 콘서트로 구성될 예정이다. 이번 공연은 6월 13일부터 18일까지 6일간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개최한다.
나눔의 가치를 위해 최고의 게스트와 스탭들이 뭉치다
이미 지난 여섯 번의 콘서트에서는 이영애, 박정자, 이문세, 황정민, 이병우, 김광민, 한젬마 등 윤석화가 꿈꾸는 따뜻한 내일을 지지하는 많은 대가들과 친구들이 함께 자리하여 공연을 빛냈다. 이번 일곱 번째 공연에서 나올 게스트들 또한 그 면면이 호사롭다. 윤석화의 영원한 무대 동반자이자 선배인 연극계 대모 박정자, 서울예대 연극과 교수이자 배우 박상원, 한국 뮤지컬 1세대의 상징인 디바 최정원과 전수경, 진정성 있는 연기로 사랑 받는 대한민국 대표 배우 송일국, 장르를 초월한 팔방미남 배우 이종혁과 박건형, 강력한 연기 내공의 씬스틸러 배해선,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 겸 뮤지컬 디바 바다, 여심을 녹이는 매력적인 보이스의 뮤지컬 배우 카이와 팜므파탈 뮤지컬 배우 윤공주, 뜨거운 화제를 모은 JTBC 에서 우승을 거머쥔 ‘포르테 디 콰트로’의 멤버인 테너 김현수 등이 출연한다.
이 화려한 게스트들은 올해 테마인 ‘만남’ 타이틀에 걸맞게 각 회 차마다 커플을 지어 등장할 예정이다. 박건형-바다, 박정자-박상원, 배해선-김현수, 최정원-송일국, 전수경-이종혁, 카이-윤공주 등 6일 동안 신선하고 즐거운 ‘만남’을 보여주는 무대를 꾸미고자 계획하고 있다.
또한 이번 공연은 단순히 무대 위의 콘서트뿐만이 아니라 공연이 이뤄지는 설치극장 정미소의 내외부에서 미술 전시와 함께 이뤄진다. 공연과 함께 진행되는 전시는 대한민국 1세대 스타 CF감독이자 연극배우 박정자의 남편인 이지송 감독이 총괄하며, 창작집단 ‘51%’ 소속 신진 작가들이 8일 동안 진행되는 공연과 함께 다양한 장르와 형태의 미술 전시를 선보일 예정이다. 지금까지 나온 자선 콘서트의 틀을 깬, 그야말로 국내 최고 수준의 스탭과 게스트들이 콜라보하는 다층적인 감각의 종합 예술이 펼쳐질 예정이며 이러한 감각적인 기획은 윤석화가 가진 문화적 저변의 너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도 될 것이다.
나눔은 실천을 통해야만 살아날 수 있는 단어다. 윤석화는 자신의 경력이 쌓은 무게감에 걸맞는 실천을 통해 그 단어의 가치에 뜨거운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는 중이다.
문화 예술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는 자선콘서트 의 날짜별 게스트 라인업과 티켓 오픈은 5월 23일 화요일 오후 2시 인터파크를 통해 진행된다.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싶다. 편한 것이 좋고, 느린 것은 싫고. 오랜 것은 쉬이 버려버리는 요즘 세상, 옛 추억을 곱게 간직하고 진정한 사랑으로 그리워하는 문인들의 안식처가 있다.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이 바로 그곳. 문학관을 가득 메운 모든 공기와 기운은 이 세상 모든 문인에게 보내는 연정이다. 컴퓨터 모니터 앞, 최첨단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숨을 깊게 내쉬어보고 싶다면 바람 잔잔히 와 앉은 그곳에 가보시라.
세상 모든 문인을 기억하는 ‘영인문학관’
문학관이라고 하면 한 예술가의 작품세계와 삶, 역사를 풀어놓은 곳이라고 인식하겠지만 영인문학관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 시와 소설 등을 쓰고, 찬란하건 아니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모든 문인이 잊히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장치 같은 곳이라고나 할까?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명예교수이자 문학평론가,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부인인 강인숙 관장은 문학을 향한 남다른 사랑으로 문학관을 건립했다. 그녀는 유실 위기에 처했던 문인들의 원고와 다양한 소품을 오래전부터 수집해왔다. 집 안에 점점 쌓여가는 원고, 한 시대를 살았던 문인의 손때 묻은 물건들이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강 관장의 퇴직금과 3년 치 급료 등으로 기금을 마련해 2001년 영인문학관을 개관했다.
다수의 작가를 두루 살피는 마음으로…
개관 이후 전시의 대부분이 기획전시로 이뤄지고 있다. 다른 문학관이나 개인 박물관이 상설전시로 이뤄지고 있는 반면 이곳은 기획전시로 시공간을 채운다. 전시때마다 작품이 바뀌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리 배치, 전시 운용까지 새로 조직해야 하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인문학관이 한 명이 아닌 다수의 문인을 두루 살피는 문학관이기에 기획 전시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해왔던 전시만 봐도 그렇다. 다양한 작가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게 해준 개관전시 , 등이 그랬고 김상옥과 최인호 등 단독전도 영인문학관에서 기획했다. 취재 차 방문했던 날은 영인문학관 제38회 전시회인 (5월 말까지 전시)이 열려 각계 인사들과 문인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움직이는 벽에 쓴 시-문인병풍전’
이번 문인병풍전은 소설가 김동리, 박두진, 조병화 등 작고한 문인병풍을 비롯해 정진규, 이근배, 이제하 등 원로 문인의 필체와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전시회 행사에 앞서 만난 강인숙 관장은 새로 시작되는 전시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대 병풍과 옛날 병풍을 모아서 전시를 하는 겁니다. 예전 것은 낙관이 병풍의 시작과 끝에만 있었는데 요즘 병풍에는 각 폭마다 낙관이 찍혀 있죠. 예전 병풍은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이 글을 써내려갔는데 요즘 병풍은 들쭉날쭉 흔들흔들한 것이 다 의도된 거죠. 병풍 예술이 바뀐 거예요.”
전시회를 위해 많은 작품을 대여했지만 조병화, 김동리, 박두진의 병풍은 강 관장 소유의 병풍이다. 그런데 전문 소장이 된 것처럼 병풍 상태가 아주 좋았다.
“내가 아주 보관을 잘해요. 예전에 부채를 보내주신 분이 20여 년 만에 와서 보더니 전문화랑보다 보관을 잘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그래서 또 하나 그려주시더라고.”
문인 사랑꾼(?)에 내려진 숙명 ‘사명감’
강인숙 관장은 새 기획전시를 여는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있을 전시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다. 오는 6월 15일에는 2007년 별세한 무용평론가이자 시인 김영태의 10주기를 맞아 ‘김영태 편지전’을 기획하고 있다.
“이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시인 마종기한테 보낸 편지를 100여 통 주고 가셨어요. 그 편지만 해도 전시실 안이 가득 찰 거예요.”
김영태 시인은 암 투병 3년 동안 무용 관련 자료는 무용계로, 사진들은 사진 자료가 필요한 곳으로 보냈다. 그리고 그가 마종기 시인과 나눴던 편지는 강인숙 관장을 찾아갔다.
“내가 좀 신용이 있거든요(웃음). 김 시인도 수소문해서 저에게 보내준 겁니다. 잘 간직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나봐요. 내가 그렇게 받았으니 보답을 해야죠.”
편지 내용을 읽어보니 그냥 편지가 아니었다. 작품을 읽고 감상을 써 보낸 것이었다. 올해부터는 1년에 한 번씩 문인 관련 특별전을 하려고 한다.
“내가 안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해요. 문인들에게 제가 갚아야 해요.”
강 관장은 많은 문인에게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진정한 사랑꾼이었다. 문학을 향한 열정과 사랑을 흠뻑 담아낸 영인문학관은 그저 ‘감동’이었다.
개관시간 10:30 ~17:00
입장료 성인 5000원 학생 3000원
주소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81
나이가 들수록 더 바빠지는 사람이 있다. 백승우(白承雨·59)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루 24시간도 부족할 것 같은 백 상무는 자신만의 시간관리로 호텔리어, 사진가, 교수, 궁궐문화역사 해설가, 작가 등 다양한 활동을 즐겁게 하고 있다. 최근 클래식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고 싶다며 취미로 콘트라베이스를 배우고 있으며 그에 더해 오디오 수집에도 도전 중이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활동이 단순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서 프로의 경지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 그가 취미의 고수로 삶의 활력을 얻고 있는 비결을 들어보자.
백승우 그랜드하얏트 서울 상무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취미’라고 부르자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지난 2016년 7월 파리 ‘La Capital Gallery’ 초청의 사진전 에서 그의 전 작품이 솔드아웃됐다. 뿐만 아니라 2017년 4월에 파리 샹젤리제 ‘The Gallery Boa’ 초청으로 아시아 최초 개인 사진전이, 11월에는 ‘La Capital Gallery’ 특별 초청으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도저히 취미라고 할 수 없는 완전한 프로 작가. 전시할 때마다 작품이 매진될 정도로 그것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원숙한 작가의 모습이다.
파리 ‘The Gallery Boa’ 초청 아시아 최초 개인 사진전
“파리 샹젤리제나 뉴욕에 초대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죠. 지난번 전시에서 18점을 전시했는데 첫날에 모두 솔드아웃됐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탑 갤러리에서 초청 전시가 열리고 있는 중이죠.”
그는 이미 2009년에 ‘The Window 시리즈’를 강남의 일반 상업 갤러리에서 전시한 바 있으며 그때도 대규모로 판매가 이뤄졌다고 한다. 당시 작품은 포스코와 호텔 등지에서 주로 구매가 이뤄졌다고. 그렇다면 사진으로 얻는 수익도 꽤 되겠다 싶어 물었더니 그는 손사래를 쳤다.
“다음 작품 준비하고 카메라 살 정도 들어와요. 제가 기자재비가 많이 들어가는 편이라. 이번 전시는 프랑스 쪽 은행과 정부 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요.”
10여 년에 걸친 사진 프로젝트들 진행 중
프로 작가답게 그는 사진 작품의 제작을 특정한 테마를 잡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하고 있다.
“‘The Window 시리즈’를 10년, ‘My Korea’ 시리즈를 12년 동안에 걸쳐 만들었습니다. The Window 시리즈를 하면서 두세 가지 전시를 준비 중에 있어요. 당장 6월부터는 유럽의 아트 퍼니처(예술과 가구 디자인을 접목한 개념으로 예술적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가미된 일상 속 가구) 작가와 제 작품을 컬래버한 전시가 1년 동안 잡혀 있습니다. 제 작품의 테마는 나무가 될 거예요.”
그의 말에는 유난히 힘과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제대로 한국을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에 12년 동안 진행한 ‘My Korea’ 사진 작업은 같은 제목의 책 로 정리되어 그에게 작가라는 직함을 하나 더 달아줬다. 텍스트가 모두 영어인 이 책은 반응이 좋아 속편을 발행하기로 했다. 책을 쓰는 작가로서의 성과 또한 성실히 거두고 있는 중이라는 얘기다.
일하는 데서 작품의 소재 찾아
사진작가 외 백 상무의 다채로운 취미활동들을 살펴보자. 그는 교수이기도 하다. 본업인 호텔리어로서의 역량은 대학원과 석·박사 과정에서 호텔경영학과 경제학 등을 가르치는 자리를 마련하게 했다. 또 궁궐문화역사 해설가이기도 하다. 문화재에 관한 사진을 찍으려면 알아야 할 지식이기도 했거니와, 가장 큰 문제는 일반인의 신분으로서는 문화재를 마음대로 찍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그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그럼 내가 문화재청 해설가를 하면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1년에 걸친 공부 끝에 그는 해설가 자격증을 땄다. 그의 사진 작품 세계가 더욱 점프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활동은 철저히 호텔리어로서의 본업을 지키면서 진행하고 있다. 그는 일하면서 작품의 소재를 찾는 게 어렵지 않냐는 질문에 전혀 어렵지 않다고 대답했다.
“저는 일하는 데서 사진을 찍을 소재를 찾아요. 그러니까 백 퍼센트 호텔이 배경이죠. 출장 가서 남는 시간에 촬영을 하는 거예요. 주말에 일부러 어딘가를 가서 찍은 적은 없어요. 직장에서 일하는데 시간이 어딨어요?”
60대 이후의 인생은 40대부터 준비하라
마치 물 흐르는 것처럼, 은퇴를 맞이하면서 동시에 제2의 삶을 시작하고 있는 그의 성공에는 거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법. 그는 자신의 성공이 결코 운이 따라줘서 된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투자해야 했던 시간과 노력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은퇴하면 모두 해외여행을 떠나요. 갔다 와서 돈이 떨어지면 자전거 타고 색소폰 불고 산에 가 있어요. 이게 (은퇴 후 삶의) 다예요. 그 세 가지를 하다가 그것들마저 안 되면 근처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죠. 그러다 몸이 아프면 집에 있게 되고 가족들과 싸우게 돼요. 결과적으론 남들이 입어본 옷이 멋있으니까 자신도 입어보는데 자기한테 맞지 않는 거죠. 왜 그런가 하면 준비를 안 해서 그래요.”
그는 60대 이후의 인생은 40대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인 준비를 하면서 자기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자전거도 타보고 교육도 받고 사진도 찍고 등산도 하고…. 다양한 걸 하면서 실패를 겪어야 합니다. 실패하다 보면 그중에 자신이 좋아하는 게 걸리게 돼 있어요. 저도 사진을 좋아한 건 아니에요. 그런데 동료였던 일본인 아다치씨가 나보고 일만 한다고 취미를 가지라면서 저에게 카메라를 줬어요. 그러면서 시작된 거죠. 저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걸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적어도 10년은 투자해야 고수가 된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맞는 게 걸리면 그것에 10년은 투자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래야 은퇴할 때가 되면 남을 가르치면서 즐기는 게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게 안 되면 돈만 많이 쓴다는 게 그의 일침이다.
“40대 넘어가면 앞으로 20년은 짧아요. 저는 2007년에 처음으로 개인전을 했어요. 그게 10년 전이죠. 그때부터 했으니까 이제 파리에서 전시도 하는 거지 갑자기 파리에서 전시회를 연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는 또한 취미를 익히는 노하우로 전문가를 꼽았다. 자신은 뭔가를 한다고 하면 최고의 고수를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가 사진을 배울 때는 진동선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만났다. 두 사람 사이는 나중에 함께 미학 논문을 쓸 정도로 발전하게 됐다.
최고의 전문가에게 배워라
그가 최근에 열중하고 있는 취미 중 하나는 오디오다. 마치 사진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그는 그냥 시작하면 안 될 거 같아 오디오 책으로 유명한 파워 블로거이자 건축가인 박준씨에게 메일을 보내 오디오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고수라고 불리는 오디오 파일(오디오 마니아를 가리키는 말)들과 3년을 함께 다녔다. 또한 클래식을 배우기 위해 음대 교수들에게 3년 동안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 결과 이제는 오디오를 들으면 오디오 너머의 악기 위치가 보인다고 한다. 듣는 게 아니라 음악이 보인다고.
그가 요즘 배우고 있는 콘트라베이스도 전문가를 찾는 그의 취미 철학이 적용된 경우다.
“전주에 사진에 관해 5년간 강의할 일이 있었어요. 그때 그룹 중에 한 명이 정형외과 의사였는데 기타를 칠 줄 알았죠. 그가 제게 콘트라베이스가 잘 어울리고 잘할 것 같다고 추천했어요. 그 얘기를 듣고 2년을 고민하다가 바로 악기를 샀죠. 지금 2년 반째 독일 마인츠 국립교향악단 단원에게 개인지도를 받고 있어요. 어려워요(웃음).”
최고의 고수를 만나 학습하고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는 고수를 만난다고 해도 노하우 전수가 잘 안 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고수를 만나면 무엇보다도 정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에티튜드가 중요해요. 배우는 일에 있어선 학생이 되어야 하는 거죠. 스승이 나보다 어리다고 무시하면 안 됩니다.”
제대로 된 공부로 거듭난 제2의 인생
무엇을 해도 주저하지 않고 정직하게 접근하는 그에게 그렇게 공부하고 배우는 취미의 ‘참맛’이 무엇인지 물어봤다.
“사람은 40대, 50대가 되면 가족, 회사, 미래에 대한 불만이 쌓이죠. 그런데 그것을 작품에 쏟으면 나도 행복해지고 주변도 행복해져요. 저는 평생 카메라를 잡아본 일이 없었어요. 오디오를 들은 일도 없죠. 클래식도 배운 일 없어요. 제가 한 일은 평생 회계학과 호텔경영밖에 없었어요. 그것 외에는 가진 게 없었던 거죠. 그런데 해보니까, 그리고 제대로 공부를 하니까 굉장히 재밌어져요.”
그는 보람이 단순한 감정의 승화를 넘어서 직업 수준으로까지 발전한 몇 안 되는 케이스다. 그래서 그의 도전이 이룬 성과는 그 희귀함에도 불구하고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그 결과, 그의 미래는 어쩌면 지금까지의 삶보다 훨씬 바빠질지도 모르겠다.
“퇴임 후요? 강의는 계속할 거 같고, 펀드 컨설턴트를 하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격주로 궁궐 해설을 하고 사진 작업도 해야죠. 책도 써야 하고 오디오 수집도 해야 하고. 콘트라베이스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정도로는 해야겠고. 바빠요(웃음).”
동네 곳곳 멀티플렉스 상영관이 생겨나면서 영화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 영화가 아닌 작품들은 감상하는 게 쉽지 않다. 한국 고전 영화는 방송이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 정도. 그래서 옛 영화와 다양한 영화 자료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갈 곳을 찾아봤다. 한국영화의 역사를 쌓아가는 한국영상자료원이 그중 한 곳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들어가 봤다.
한국영화의 역사를 보존하고 살리는 현장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 높이 솟은 방송사 건물 사이에 한국영상자료원이 있다. 이곳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의 공간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됐던 모든 영화를 수집·복원하고 일반에 공개하는 것이 주요 업무라고. 유일본이 해외에만 있는 고전 영화는 해외 연구자를 통해 수입한 뒤 훼손되어 상태가 좋지 않은 필름은 수리해서 고화질 영상으로 복원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옛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를 자주 만나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이곳이 매력적인 이유는 대한민국 국민 15세 이상이면 누구나 365일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지하 1층에 2개관으로 운영하는 영화관 ‘시네마테크KOFA’는 한국 고전 영화에서부터 국내외 독립 영화와 예술 영화까지 상영한다. 일반 상업 영화관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영화를 이곳에서만큼은 원 없이 볼 수 있다. 취재 당시 영화 를 상영했는데 영화에 관심이 많은 시니어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시니어층을 겨냥해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고전 영화를 많이 상영해서 그런지 시니어의 발길이 잦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매일 좋은 영화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상영 영화가 궁금한 독자는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koreafilm.or.kr)에서 날짜와 영화를 확인해보길. 특히 3월에는 삼일절 특집으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상영한다.
한국영화의 역사를 한눈에… ‘한국영화박물관’
1층은 ‘한국영화박물관’으로 상설전시관과 기획전시관으로 운영된다. 상설전시관에는 세계 영화 탄생을 시작으로 100년 가까이 이어온 한국영화의 역사가 연대별로 정리돼 있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영화, 인물의 자료와 사진, 영화에 쓰인 장비와 소품도 볼 수 있다. 나운규의 사진첩에서부터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의 격변을 들여다볼 수 있다. 기획전시관에서는 4월 16일까지 한국영화의 거장 유현목 감독을 주제로 ‘유현목: 현실과 영화 사이’라는 전시가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유현목 감독의 7주기를 기념하고 그의 영화 세계와 인생, 한국영화사적 의미를 돌아보기 위해 기획됐다.
1956년 로 데뷔한 유현목 감독은 1994년 에 이르기까지 극영화 43편, 실험영화 및 기록영화 3편 등 총 46편의 영화를 연출했고, 2009년 6월 28일 영면했다. 그는 무엇보다 의 감독으로 기억되는 감독이다. 당시의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출구 없는 현실을 절망적으로 묘사한 것이 압권이다. 전시관에는 유현목 감독이 사용했던 서재가 재현돼 있으며 살아생전의 모습이 담긴 영상 기록을 볼 수 있다. 또한 유현목 감독이 손수 쓴 영화 대본과 세트장 스케치, 트로피 등을 통해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영화의 세계를 느낄 수 있다. 2층에는 영화 도서관이 있다. 국내외 영화 대본, 영화 관련 논문, 영화 도록이 마련돼 있다. 영상물과 영화음악도 감상할 수 있다. 2016년 기준 영상물 2만6000여 점, 도서 7500여 점이 있다. 도서관도 회원가입만 하면 누구든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한국영상자료원에 갈 여유가 없다면 유튜브나 네이버에서도 한국영화를 볼 수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자료들 중 저작권 문제가 해결된 작품 400편가량을 서비스하고 있다.
>>이용 정보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관
한국영화박물관 10:00~19:00(휴일 18:00)
영상도서관 10:00~19:00(휴일 18:00)
시네마테크KOPA 12:30~19:30
홈페이지 koreafilm.or.kr
◇ 전시
YOUTH: 청춘의 열병, 그 못다 한 이야기
일정 5월 28일까지 장소 디뮤지엄
자유, 반항, 순수, 열정 등 유스컬처(Youth Culture)의 다양한 감성을 선보이는 대규모 사진전이다. 래리 클락, 라이언 맥긴리, 고샤 루브킨스키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크리에이티브 아티스트 28명의 사진, 그래픽, 영상, 그라피티 작품 240여 점을 총망라한다. 일탈과 자유, 반항과 열정 등 청춘의 내면에 공존하는 다면적인 감정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유스컬처의 역동적인 작품들을 통해 청춘의 불안이 기쁨과 환희로 승화됐던 순간들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임당, 그녀의 화원: Saimdang, Her Garden
일정 6월 11일까지 장소 서울미술관 제3전시실
최근 TV 프로그램, 드라마, 도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체적인 여성의 시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는 조선시대 여류 예술가 신사임당의 기획 전시다.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자기계발에 매진했던 예술가로서의 신사임당의 면모와 생애를 재조명한다. ‘초충도’를 비롯한 그의 대표 수묵화를 통해 뛰어난 미의식과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개관 이래 처음으로 ‘묵란도’를 소개한다. 화폭에 자연의 이치를 담고자 했던 그녀의 예술정신이 농묵과 담묵의 절묘한 조화로 발휘됐다.
◇ 도서
두 번째 서른 살: 사랑을 이야기할 나이(마리 드 에느젤 저·베가북스)
프랑스 심리학자 마리 드 에느젤이 10여 년간의 상담과 치료를 통해 얻은 성(性)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 저자는 시니어의 성생활에 대한 이상주의를 경계하면서 다양한 연구와 인터뷰, 대담 사례를 통해 사랑과 성을 추구하는 노년의 삶에 대해 피력한다.
어쩌다 보니 50살이네요(히로세 유코 저·인디고)
50세가 되면서 달라진 낯선 환경에 적응해나가는 저자의 산뜻한 시선과 경험이 담긴 에세이다. 몸과 마음의 변화,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는 방법,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등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느낀 점들을 담담하고 편안한 어조로 풀어냈다.
◇ 영화
눈길
일제강점기 말, 전혀 다른 운명을 타고났지만 위안부라는 비극을 함께 겪은 두 소녀의 가슴 시린 우정을 그렸다.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데 이어 제24회 중국 금계백화장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다. 2월 3일 와디즈에서 크라우드펀딩을 오픈해 30분 만에 목표금액(4000만원)을 달성하며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영화 수익금 일부는 위안부 피해자 시민단체에 기부될 예정이다.
개봉 3월 1일 장르 드라마 감독 이나정 출연 김영옥, 김향기, 김새론, 장영남 등
아빠는 나의 여신
가상의 동네 오가와에 있는 작은 술집 ‘사요코’를 배경으로 트랜스젠더 아빠와 딸의 특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트랜스젠더라는 자칫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를 일본 영화 특유의 따스하고 잔잔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착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케이노스케 감독은 낡은 술집에 다녀가는 손님들의 인간미 넘치는 사연을 통해 따스한 위로의 메시지를 건넨다. 유쾌한 에피소드와 더불어 애틋한 가족의 사랑을 감동적으로 담아냈다.
개봉 3월 예정 장르 드라마 감독 하라 케이노스케 출연 스도 리사, 후지모토 이즈미 등
◇ 공연
유도소년
2014년 초연, 2015년 재연 당시 전 회차 매진 기록을 세운 흥행작이다. 유도선수 경찬이 고교전국체전 출전을 위해 서울로 상경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유도·복싱·배드민턴 훈련을 거친 배우들이 실제 경기를 방불케 하는 연기를 펼친다.
장소 수현재씨어터 일정 3월 4일~5월 14일 연출 이재준 출연 허정민, 박정복, 신성민 등
혜은이 콘서트 '열정'
가수 혜은이가 데뷔 45주년을 맞아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콘서트를 연다. 팬들과 더 가까이에서 호흡하기 위해 대학로 소극장에서 한 달간 공연을 이어간다. ‘당신은 모르실 거야’, ‘제3 한강교’, ‘열정’ 등을 마음껏 들어볼 기회다.
장소 대학로 SH아트홀 일정 3월 3일~4월 2일 출연 혜은이
머더 포 투
뉴욕타임스가 주목한 코미디 뮤지컬 의 국내 라이선스 첫 무대다. 두 명의 배우가 13명의 인물을 연기하며, 형사와 용의자 간의 실랑이를 그린 2인극이다. 의문의 총격 살인사건 범인을 찾아가는 추리극으로 빠른 전개가 흡입력을 높인다.
장소 DCF대명문화공장2관 일정 3월 14일~5월 28일 연출 황재헌 출연 김승용, 안창용, 박인배 등
윤동주, 달을 쏘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 기념 창작가무극이다. 일제강점기, 비극의 역사 속에서 자유와 독립을 꿈꾸었던 청년 윤동주와 송몽규의 순수한 애국심을 노래한다. 윤동주의 대표 시 8편이 독백 대사와 노래가사 속에 담겨 있다.
장소 예술의전당 일정 3월 21일~4월 2일 연출 권호성 출연 온주완, 박영수, 김도빈 등
지난 6월호에서 손주의 잉태 소식을 ‘생명은 기계가 아닙니다’라는 제목으로 전해드렸습니다. 이제 그 아기를 만나보고 몽골로 돌아왔습니다. 드디어 세상에 태어난 아기를 만나러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따로 따로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갈아타며 다시 빨리 달린다는 열차와 자동차로 이름도 생소한 독일 에어랑엔(Erlangen)의 헤르초게나우라흐(Herzogenaurach)에 밤늦게 도착했습니다.
제 아내, 즉 아기의 할머니는 나보다 먼저 출발했고 할아버지인 나는 한 달 후에 닿은 것입니다. 세 살과 네 살인 아기 오빠는 아직 동생이 생소합니다. 언제라도 뛰어가 안길 수 있었던 엄마의 품안엔 아직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아기가 있습니다. 자기들과 항상 놀아주던 엄마와 아빠가 새 아기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생소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될 듯도 합니다. 자기들과 비교할 수도 없는 너무나 어리고 여린 생명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예 경쟁을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눈치껏 알아서 노는 데 익숙해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도 어른들이 보기에 착하게만 굴 수 없는 나이라서 어른들이 챙겨줘야 할 일들은 끊이지 않고 터집니다. 두 녀석의 활기찬 에너지는 언제나 생기가 넘쳐 어른 한두 명이 감당하기가 벅차다는 것은 현장에 도착하기 전 이미 아내의 카톡을 통해 내 머리에 입력되었습니다.
밤늦게 도착해 자고 나서 현장에 투입되니, 역시 내 주된 일이 그 두 녀석과 노는 것입니다. 내가 도착하기 전 아내는 어떻게 혼자서 이 일들을 감당하고 있었는지 존경스럽습니다. 나 혼자서도 만만치 않은 개구쟁이 두 녀석을 돌보는 일을 아내는 짬짬이 하는 곁다리 일로 담당했다니!
몸을 추스르고 있는 며느리가 행여 나중에라도 뒤탈이 있을까봐 아내는 모든 빨래와 집안 정리와 청소, 거기에 세끼의 식사를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단독주택이라 지하층부터 3층 다락방까지 오르내리기를 쉬지 않습니다. 두 녀석 유치원엘 자동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옵니다. 장을 봅니다. 그 와중에 아이들과 친분이 있는 가족들을 초대해 칭찬받을 대접도 하였습니다. 한국 아줌마의 놀라운 힘을 곁에서 직접 보니 정말 여러 번 혀를 내둘러야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다 드디어 늦게 일어나도 되는 토요일 새벽입니다. 다 쉬고 있는 새벽입니다. 깊이 자고 있는 저를 깨워 보여줄 게 있다며 아내가 조용히 문을 열고 골목골목을 돌아 데려간 곳은 새벽안개가 피어나고 있는 벌판이었습니다. 삶의 현장을 떠나 갑자기 다른 세상에 온 것입니다. 공간적으로의 이동뿐 아니라 시간의 공백도 느껴졌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헤르만 헤세의 시가 정확히 떠올랐습니다. ‘Im Nebel(안개 속에서)’였습니다. 전혀 내 머릿속에는 이미 없을 거라고 당연히 치부하고 있었던 독일어 수업시간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정말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며 꿈에도 생각 못했던 독일의 안개 속에 오십 년의 시간적 공백을 느끼며 바라보았습니다.
Im Nebel
Seltsam, im Nebel zu wandern!
Einsam ist jeder Busch und Stein,
Kein Baum sieht den andern,
Jeder ist allein.
Voll von Freunden war mir die Welt,
Als noch mein Leben licht war;
Nun, da der Nebel fallt,
Ist keiner mehr sichtbar.
Wahrlich, keiner ist weise,
Der nicht das Dunkel kennt,
Das unentrinnbar und leise
Von allem ihn trennt.
Seltsam, im Nebel zu wandern!
Leben ist Einsamsein.
Kein Mensch kennt den andern,
Jeder ist allein.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과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 보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내 삶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 안개 내려
아무도 보이지 않는구나.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 없다.
안개 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모두가 다 혼자다.
그렇게 그 시를 조금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나이를 헤아려보며 아내의 손을 조금 더 느껴보았습니다. 조금 더 넓게 보기 위해 구릉에도 올라가 보았습니다. 풀에 맺힌 안개 이슬로 신발과 바지 섶이 젖었습니다. 마을로 되돌아와 아들 집에 이를 때 안개 속에 뿌옇게 떠오르는 해를 보며 조금 더 굽어진 나의 등을 실감하였습니다. 아직 오십 년의 시간을 되돌리고 있는 중이었나봅니다. 아내의 한마디에 정신이 확 깨었습니다.
뭐해? 셀라 트림시키지 않고.
셀라: 지금 독일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둘째 아들의 셋째 아이 이름입니다. 성경 시편에 나오는 ‘멈춰서 들으라, 내용을 묵상하라’는 뜻의 후렴구, 추임새. 셀라! 제 입에 넣고 굴릴수록 너무나 마음에 드는 이름입니다. 셀라.
개인적인 생각을 안개로 전하면서, 우리 대한민국이 자꾸 보고 싶어집니다. 이럴 때 이런 기회에 사랑하는 나의 대한민국에 전하고 싶은 믿음이 제게 하나 자라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겪을 수 있었던 우리의 놀라운 힘입니다.
전 한국전쟁의 비참한 문제들 가운데 자랐습니다. 철이 들면서 4·19를 보았고, 돈벌이를 위해 중동과 해외를 다녀야 했습니다. 6·29선언을 거쳐 IMF를 맞을 때, 세계는 우리 대한민국을 비웃으며 놀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놀림이 놀람으로 바뀌는 사건을 현장에서 겪었습니다. 이번에 당면한 놀림거리로도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을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여기 몽골에서는 고려가 몽골의 속국이었다는 징기스칸제국의 지도를 자주 만나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더 큰 사랑과 진정으로 몽골이 잘되도록 도와주고 있음을 서로 간에 알고 있습니다.
역사를 배우며 우리는 세상의 비웃음에 처했을 때마다 언제나 그들의 놀림을 딛고 일어나 그들을 놀라게 해왔던 자랑스러운 민족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국가적 부끄러움을 만났지만 이 안개가 걷히면 우리 대한민국의 저력으로 오히려 세계가 놀라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소용돌이치는 우리의 힘이 드디어 응집되고 있습니다. 고요히 흐르던 물이 지금 바로 깊고 좁은 계곡을 만났습니다. 급변할수록 우린 서로 끌어안는 힘! 대동단결, 두레의 에너지가 분출되는 한민족이기 때문입니다.
>>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사진으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근처에서 약속을 잡아 본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해 본 말이 “상상마당 앞에서 봅시다!”일 것이다. 2007년 문을 연 홍대 KT&G 상상마당(이하 상상마당)은 젊음의 거리를 대표하는 마루지, 그 이상의 공간이다. 젊은이의 무한상상을 응원하기 위해 태어났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상상마당이다. 상상마당은 지하 4층부터 지상 7층까지 극장, 공연장, 갤러리, 다양한 문화강좌를 들을 수 있는 아카데미와 카페 등이 있다. 상상마당은 젊은 예술가에 대한 지원사업과 문화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곳. 시각예술 전시와 영화 상영은 물론 출판, 영화 제작 배급도 활발한 ‘문화발전소’라 칭할 수 있다.
상상갤러리
상상갤러리는 상상마당 2층에 있다. 상상마당 정면 오른쪽으로 난 계단으로 올라가면 갤러리 입구. 이곳은 국내외 유명 작가의 작품 전시는 물론이고 상상마당이 발굴한 젊은 작가의 작품 전시 등 다채로운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10월의 상상갤러리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작업하는 젊은 작가의 교류와 협업 프로그램인 제3회 ‘KT&G 상상마당 다방 프로젝트 [Close Relation]전’이 열리고 있다.
상상시네마
지하 4층의 상상시네마는 대형 극장에서 쉽게 만나볼 수 없는 독립영화와 단편영화 등을 상영한다. 매주 화요일 오후 8시에는 달마다 주제를 정해 ‘단편상상극장’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10월의 단편상상극장은 9월에 있었던 대단한 단편영화제 수상작들로 꾸며진다. 심사를 통해 선발된 금관상의 와 은관상의 , 대단한 감독상을 수상한 이 상영되고 있다. 올해로 10회째를 맞이한 ‘대단한 단편영화제’는 ‘FILM LIVE: KT&G 상상마당 음악영화제’(6월)와 ‘CINE ICON: 배우기획전’(12월) 등과 함께 상상마당을 대표하는 연례행사다.
‘단편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 준다’는 취지로 매년 6월 한 달간 단편영화를 공모해, 예심을 거쳐 최종 25개작품을 선발하고 9월 영화제 기간에 상영한다. 금관상, 은관상, 대단한 배우상, 대단한 감독상 등이 수여된다. 상상시네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바로 로비 구석에 마련된 만화책 코너다. , , 등 유명 만화 시리즈를 비롯해, 마블코믹스와 시중에서 찾기 어려운 외국 일러스트 모음집 등이 꽂혀 있다. 영화를 보지 않아도 이용이 가능하고 편히 쉴 수 있어 상상시네마하면 꼭 떠오르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