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mcj4627@naver.com
순천 왜성은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을 실감케 하는 곳이다. 바다가 변해 공단이 됐으니, 상전이 바다가 된 것보다 어찌 작은 변화라 하리오! 지금 우리 땅 어디인들 그렇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420년 세월의 두께가 이렇게 두터울 줄 몰랐다. 성안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이고 다리를 놓았다 해서 왜교성(倭橋城)이라 불렸다는 옛 이름과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택시를 타고 성터 앞에서 내리자 제일 먼저 거대한 제철소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옛 격전지에 웬 공장인가 싶었지만 그건 놀라움의 시작이었다. 한겨울 찬바람을 무릅쓰고 허위허위 성터에 올라서 조망한 모습은 너무 놀라웠다.
광양만 물결이 출렁거릴 것이라는 기대와 예상은 산산조각이 났다. 현대제철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 옆으로 무수한 공장 건물이 들어선 드넓은 공단이 시야 가득히 펼쳐졌다. 저 넓은 공단이 얼마 전까지 바다였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뒤에 상세지도를 찾아보니 그곳은 여수반도 동안을 메우다시피 한 율촌 산업단지였다.
역사의 기록에 나오는 격전지 노루섬[獐島]도 뭍으로 변했다. 더 멀리 광양항 크레인이 보이지 않았다면 바닷가라고는 상상도 못할 변화였다. 거대한 기린이 줄지어 선 듯, 오렌지색 크레인 무리 너머로 흰 연기를 내뿜는 광양제철소 공장 건물군, 그 너머로는 여수와 광양을 잇는 이순신 대교 트러스가 희미했다. 아, 이순신 장군이 여기에 살아나셨구나 싶어 겨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근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했다는 성터는 말끔해 보였다. 마른 수풀 너머 나지막한 구릉 자락에 문루 터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 보니 ‘제1문지(門趾)’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제1성문 자리인데 문루는 사라지고 돌로 쌓은 기단만 남았다. 그것도 허물어져 덤불 속에 숨어 있던 것을 근래에 다시 쌓은 것이다. 색깔이 어두운 돌은 옛것이고, 밝은 것은 다시 깎은 것이리라. 옛것과 새것의 부조화가 엇박자 같았다.
얼마 가지 않아 제2문지가 나오고, 거기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한참을 오르니 병사(兵舍)들이 줄지어 있었을 병영 구역이다. 역시 옛 돌과 새 돌이 뒤섞인 복원 성곽 지대다. 거기서 한 구비 더 오르니 지휘부 건물들이 있었을 혼마루[本丸] 구역이 펼쳐졌다. 학교 운동장만 한 공터 저편 끝에 천수대(天守臺) 자리가 우뚝했다.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 옆 안내판에는 ‘천수대 위에 오층망해루(五層望海樓)가 있었다’라고 씌어 있다. 명나라 종군 화수(畵手)가 그렸다는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에 나오는 조감도가 복사돼 있었는데, 그림 속 건물은 교회 첨탑을 닮은 목조 오층 누각이다.
천수각이라고 할 것까지는 못 되어 망해루라 한 것이리라. 바다를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높이 지어 올렸으니, 실은 적정을 살피는 장대 역할을 한 건물이었다. 그 밑은 바로 바다. 가파른 비탈 아래 접안 시설이 길게 늘어서 있고 수많은 왜선이 정박해 있다.
물론 망해루 건물은 지금 없고 기단만 남았다. 이순신 장군의 공격을 받아 급하게 도망치며 불을 질렀다는 기록으로 보아 1598년 11월 하순에 소실됐을 것이다. 천수대 기단의 크기가 옛 모습을 짐작케 해준다. 가로 18m, 세로 14m라니 그리 크지는 않다.
성 돌은 대개가 자연석이다.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엇갈려 쌓은 기법은 옛 축성법 그대로라고 하지만, 모서리는 바윗돌을 깎아 쌓은 흔적이 뚜렷했다. 쐐기질로 깎았다는 설명으로 보아 큰 돌을 쪼아 틈을 내고 쐐기를 박아 쪼갠 것이리라. 그 많은 돌을 깎고 자르고 운반하고 쌓는 데 얼마나 많은 공력이 들었을 것인가!
돌 다루는 기계나 장비가 없었을 시대, 왜병들의 채찍 아래 그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했을 고역이 다 인근에서 포로로 붙잡힌 백성들 몫이었을 것 아닌가. 백성들 피해가 어찌 그 노역뿐이었으랴!
성의 규모는 외성 3첩에 내성 3첩이다. 방대한 구조물이 다 돌과 흙과 목재로 이루어졌으니 노역의 고통이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천수대 주변 땅속에서는 지금도 색깔이 서로 다른 와편이 출토된다고 한다. 왜병들이 근처 절집이나 민가 관공서 건물 기와를 걷어다 천수각 지붕에 올린 것이다. 여러 지붕에서 걷어낸 것이니 재질과 색깔이 제각각일 터다.
엄청난 성의 규모
축성에 3개월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행장(行長) 등이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향해 왜교에 결진, 성을 쌓고 막사를 지었다”는 정유년 9월 기사에 따르면, 축성은 1597년 9월에 시작됐다. 그해 12월 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에게 보낸 축성 보고 서장에 따르면, 그 달에 축성이 끝났다고 돼 있다.
정왜기공도는 1598년 9월 조명연합군의 육상공격전 상황으로 보인다. 왜성 북쪽 검단산성에 주둔했던 조명연합군이 기병을 앞세우고 외성을 향해 들이닥치자 왜병들이 황급히 후퇴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됐다. 성 아래 당도한 보병들이 활을 쏘는 모습도 있다. 성루 안쪽에 점점이 뚫린 총안에 총신을 걸고 길게 늘어선 소총수들이 결사적으로 총을 쏘는 장면이 묘사됐고, 그 아래서는 판벽에 몸을 숨긴 왜병들이 반격하는 모습도 보인다.
성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1만4000명의 병력을 너끈히 품었음직하다. 높이 40m쯤 돼 보이는 혼마루를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이 세 겹으로 배치됐다. 성 한가운데 물길을 내고 두 개의 다리가 놓였는데, 밤이면 다리가 걷혀 내성과 외성이 물길로 갈리었다. 그래서 왜교성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밤에 다리를 끌어당겨 물길을 텄다고 해서 예교성(曳橋城)이라고도 불렸다.
물길은 외부 공격을 막는 해자 역할을 했다. 다리를 끌어들이면 내성 지역은 섬이 됐다. 그 물길은 지금 흔적만 남았다. 성 입구의 주차 구역에서 보면 갈대가 무성한 연못이 보이는데, 이것이 그 흔적이다.
유키나가가 구사일생으로 순천 왜성을 탈출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철병이 얼마나 다급하고 치욕스런 것이었는지를 증언한다. 또 이순신 장군에게까지 뇌물공세를 취한 사실이 얼마나 화급했던 지를 말해준다. 화가 난 이순신은 “우리의 보화는 너희 대장 머리뿐”이라고 말하며 사자를 쫓아 보냈다.
유키나가는 사천시 선진리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명나라 장수에게 쓴 뇌물 덕에 명군이 철수하고, 지원군이 오는 길목인 노량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목숨 바쳐 총력전을 펴는 틈을 타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
퇴로 확보에 혈안
1598년 8월 18일, 침략 전쟁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왜군 전 진영에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곱게 돌아가도록 놓아둘 조선이 아니었다. 성안에 갇혀 농성 중인 왜병들을 수륙 협공으로 섬멸하자는 작전 계획이 수립됐다. 육지에서는 조선군까지 거느린 명군 장수 유정(劉綎)이,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명 수로군 대장 진린(陳璘)이 동시에 협공하는 사로병진(四路竝進) 계획이었다.
그러나 명군은 내 전투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유정은 처음에는 기세를 올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내 속셈을 드러냈다. 조선군을 포함해 2만이 훨씬 넘는 병력을 가지고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군량을 맡았던 호조판서 김수(金睟)가 공격하자고 하면 성만 냈다고 한다.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의 장계를 근거로 한 기사에는 그 위인이 이렇게 적혀 있다.
“유정은 한결같이 교만하고 경솔하며 여자를 좋아할 뿐입니다. 늘 적을 뒤에 두고 진군하기 불편하다고 합니다. 남원에서 거느리던 기생을 진중으로 데려 왔습니다.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도 다투어 여자를 데리고 다녀 진중이 문란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울산 왜성을 포위했던 마귀(麻貴)가 그랬듯이, 그는 싸우는 시늉만 하면서 세월만 보냈다. 아직 병기가 오지 않았다, 공격의 적기가 아니다 등등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군량만 축내다가 유키나가의 강화 제안과 뇌물에 눈이 멀었다. 퇴로 확보에 혈안이 된 유키나가는 “성을 비워줄 때 군량과 약탈 재물을 그대로 넘겨주고 1000수급(首級)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안했다.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유정에게는 바라고 기다리던 떡이었다. 뇌물을 얼마나 받았는지는 기록에 없으나, 적에게 그 정도 조건으로 포위망을 풀어주었겠는가. 뒷날을 기하겠다면서 유정이 순천으로 회군한 길가에 군량 쌀이 허옇게 흘려져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검단산성 주둔 중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수륙 협공 계획에 따라 이순신 장군이 진린 제독의 함대와 함께 강진 고금도 기지를 떠난 것은 1598년 9월 15일이었다. 조명수군연합 함대가 왜교성 공격을 시작한 것은 9월 20일. 광양만은 바다가 얕아 썰물 때는 배가 다니기 불편했다. 밀물 때를 이용해 치고 들어갔다가 빠지는 전법으로 10여 일을 보내는 사이 육지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정은 미적거리기만 하다가 10월 6일 철군하고 없었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이순신은 큰 전과를 올렸다. 왜선 격침 30척, 나포 11척이었다. 노루섬 왜군 군량 창고를 털고 불태우는가 하면, 얕은 수로에 좌초된 진린 함대를 지원해 진 제독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런 은혜를 입고도 진린은 유정의 행로를 답습했다. 퇴로를 얻기에 혈안이 된 유키나가의 뇌물 공세에 넘어간 것이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
일본 작가 기리노 사쿠진(桐野作人)의 에 따르면, 11월 14일 밤 붉은 깃발을 올린 왜선 2척이 명 수군 진영으로 들어갔다. 진린은 통역을 대동하고 나와 배를 맞았다. 왜군은 돼지 두 마리를 그에게 바쳤다. 그날 이후 양 진영에 사자(使者)의 왕래가 있었는데, 16일 진린이 순천에 보낸 사자에게 일본 측은 창칼 등 무기류 3척분을 바쳤다. 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1월 14일 밤 왜 소장이 7명을 데리고 배를 타고 진린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와 술을 바치고 돌아갔다. 15일에도 왜 사자가 또 도독부로 갔고, 16일에는 도독이 부하 장수 진문동(陳文同)을 적 진영으로 보냈다. 조금 있다가 왜적 오도주(五島主)라는 자가 배 3척에 말과 창과 칼 등을 싣고 가서 도독에게 바치고 돌아갔다. 그 뒤로 왜 사자들이 도독부에 끊임없이 왕래하더니, 마침내 도독이 공에게 화친을 허락해주도록 부탁했다.”
이 사실은 이순신의 에도 기록돼 있다. 14일자 일기에 ‘왜선 2척이 강화할 차로 바다 가운데로 나오니 도독이 왜말 통역관을 시켜 조용히 왜선을 마중해 붉은 기와 환도 등을 받았다. 오후 8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 두 마리와 술 두 통을 바치고 갔다’는 게 그것이다.
16일자 일기에는 ‘도독이 진문동을 왜영으로 들여보내니, 왜선 3척이 말 1필과 창칼 등을 도독에게 바쳤다’고 적혀 있다.
진린은 뇌물을 받은 16일 밤 왜교성에서 나온 왜선 1척의 광양만 통과를 허락했다. 그 배는 사천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남해에 주둔한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 후 진린은 왜교성 앞바다에서 철수했다. 남해에서 농성 중인 왜군을 먼저 토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이니 급할 것 없다”는 이순신의 만류에도 “이미 적에 붙었으니 적과 마찬가지”라면서 함대를 인솔해 떠나갔다.
같은 날 저녁, 왜교성에서 한 줄기 봉화가 올랐다. 사천, 곤양, 남해 등에 주둔한 왜군 진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신호였다. 이를 간파한 이순신은 원군이 오기 전에 맞아 싸우지 않으면 다 놓치겠다는 판단으로 왜교성 앞바다를 떠났다. 17일 물목이 좁은 노량 앞바다에 진을 쳤다. 남해에 있던 진린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이 순국한 노량해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 지원군 왜선 500척과, 조명 연합수군 500척의 대회전이었다. 노량 앞바다가 포성과 불길과 피로 물든 틈을 타 왜교성을 탈출한 유키나가는 남해 섬을 멀리 돌아 쥐새끼처럼 도망쳐갔다.
귀로에 ‘소서행장 전승비’를 찾아본 것은 뜻밖의 수확이다. 순천터미널 관광안내소에서 신성리 왜성 가는 길을 물을 때 친절한 안내원은 “성터만 보지 말고 충무사에 복원해놓은 비석도 보고 오시지요” 했다. 1930년 조선군 사령관을 지낸 하야시 센주로(林銑十郞)가 천수대 꼭대기에 세웠다는 비석은 광복 후 지역 주민들 손에 철거되어 논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광복 후에는 면사무소 창고에서 발견돼 2013년 충무사 관리인 숙소 앞마당에 다시 세워졌다. 전면에는 ‘小西行長之城’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고, 다듬어지지 않은 뒷면의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야시 센주로는 중장 시절인 1930년 조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듬해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본국 허가도 없이 휘하 부대를 만주에 파견한 일로 일본 정계에 물의를 일으켰던 자다. 만주국 창설에 세운 공으로 승승장구, 1937년 제33대 일본 총리 자리에까지 올랐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라 하여 이 비석은 소서행장 전승비로 불렸다. 명나라 장수들에게 뇌물을 쓰고 야반도주한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극우주의, 국수주의에 물든 군인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역사에 오점을 남기기 마련이다.
>>문창재(文昌宰) 언론인
1946년 강원 정선 출생. 서울 양정고, 고려대 국문과, 한양대 대학원 졸. 한국일보 도쿄특파원, 사회부장, 논설실장 역임. 저서 , , , 등.
시니어의 두뇌 스포츠라고 하면 대략 화투, 장기, 바둑이 있는데 이중 으뜸이 바둑이라 생각한다. 화투는 실력보다는 운이 많이 작용하고 장기는 차나 포와 같이 멀리가고 힘이 센 놈이 있는가 하면 졸과 같이 한 칸씩만 움직이는 그야말로 졸이 있어서 민주적이지 못하다. 깜박 실수로 차나 포가 떨어지면 급격하게 전세가 기울고 만회하기가 어렵다. 그에 비해 바둑은 가로세로 19줄 361점 어디에도 착수할 수 있는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고 지금 전세가 불리해도 역전시킬 기회가 많다. 바둑의 수 또한 무궁무진하여 지금까지 인류가 두어진 수천만판의 바둑판 중 처음부터 끝까지 똑 같은 판은 한 판도 없다. 그만큼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두뇌스포츠다.
필자의 바둑 역사는 고등학교 때 형님으로부터 배웠으니 이제는 40년이 훌쩍 넘었다. 기력으로 아마 6단이다. 통계수치가 저장되는 인터넷 바둑에서만 총 만 번 이상 대국을 했지만 더 이상 발전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바둑 재능은 없는가 보다. 바둑 대국을 만 번으로 잡아도 한번 대국에 1시간이라고 치면 밤낮 417(10,000/24)일을 바둑으로 보낸 날들이다. 참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둑을 신선놀음이라 하고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른다.’ 라는 말이 있다. 성과물을 내는 노동을 해야지 바둑처럼 아무런 생산성도 없는 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경계의 말이다. 하지만 바둑 두는 시간을 쓸데없이 허비한 시간이라 생각하지 않고 두뇌에게 휴식과 단련의 양면을 준 시간들이라 생각하고 프로 바둑기사가 치매로 고통 받았다는 말도 못 들었지만 일반 바둑 애호가도 두뇌관련 질환환자도 못 봤다.
바둑의 장점은 정신통일이다. 살다보면 잊어버리고 싶은 일들이 생긴다. 그냥 잊으려고 하면 생각은 더욱 뚜렷해진다. 이때 바둑을 두면 바둑의 무아지경에 몰입하고 세상 걱정거리는 잠시 잊어버린다. 세상과 단절된 다른 세계인 바둑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할 때 생각이 멈춰 더 이상 진전이 안 될 때 머리를 싸매고 낑낑대봐야 효과가 없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산책을 하거나 아주 다른 세계인 바둑을 한판 두면 엉켜있던 생각들을 지우개로 지우고 말끔히 생각을 리셋 하는 효과가 있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머리도 쓰지 않으면 녹이 쓴다. 바둑이야말로 노년의 두뇌스포츠로 최고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하면 나와 비슷한 실력의 상대를 만날 수 있다. 늦은 밤도 좋고 일요일도 좋다. 서울서 부산 사람하고도 대국을 하고 멀리 중국 사람하고도 바둑을 둔다. 인터넷으로만 접속하니 복장도 신경 쓸 필요 없고 별도의 비용도 없다. 이런 장점 때문에 동네 기원들이 영업부진으로 대부분을 문을 닫은 것은 안타깝지만 세상의 변화를 받아드려야 한다.
조치훈 프로는 목숨을 걸고 바둑을 둔다고 했다. 승부의 세계에서 승리한다는 것은 개인의 명예와 나라의 명예가 있다. 나아가 상금이 걸려있으니 목숨을 걸 정도로 치열하게 바둑을 두는 것이 맞다. 하지만 생업과 거리가 먼 일반 시니어는 바둑 두는 것을 즐기면 된다. ‘바둑 돌 죽지 사람이 죽나’하고 대마가 죽어도 허허 웃을 여유만 있으면 된다.
바둑은 인생과 달리 복기(復棋)가 가능하다. 바둑판이 끝나면 처음 바둑돌 착수부터 행적을 되돌아보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인생은 수많은 조건들이 겹쳐서 한 과정을 만들기 때문에 나 혼자 잘해서 될 수 없고 악연도 자신도 모르게 맺어진다. 하지만 바둑은 나 혼자 잘하면 된다. 패자는 변명 없이 고개를 숙여야 하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니 정리가 깔끔해서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다.
바둑에도 체력이 중요하다. 프로기사도 나이가 들면 승률이 떨어진다. 우리나라 랭킹1위 박정환9단은 93년생 24세이고 세계랭킹1위 중국의 커제9단은 약관 19세이다. 과거의 일인자가 지금은 랭킹이 한참 뒤에 랭크되어 있어 안타깝지만 늙고 쇄약은 자연의 이치로 어쩔 수 없다. 지금은 타계하셨지만 우리나라 초대국수 조남철 선생의 말에 의하면 나이가 들다보니 30수 이상 수를 세다가 중간에 깜박 놓치거나 잊어버린다고 한다. 승률이 떨어지면 체력을 되돌아보게 되니 건강진단의 또 다른 바로미터로 바둑이 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보면 참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지닌 세계 미술사적 의미를 되새기면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한다.
다양한 문화 예술 장르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상화가 삼국에서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각기 다른 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결과를 비교해보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몽골인이 세운 원(元) 왕조(1271~1368)가 쇠퇴하고 한족(漢族)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원나라 문화와 거리를 두려고 시도한 차별화 정책 중 하나가 초상화다. 초상화는 조상숭배 정신을 함양하는 풍조에서 더욱 큰 힘을 얻어 명나라 문화의 아이콘으로 부각되면서 꽃을 피우게 됐다.
이때 명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의 초상화(사진 1)가 그려지고, 초상화 문화는 조선에까지 전해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초상화(사진 2)가 탄생한다. 또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초상화(사진 3)도 등장한다.
위의 세 사람의 초상화를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비단에다 그렸다는 사실과 함께 제작 방법도 똑같은 족자(簇子) 양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권이었다는 맥을 짚을 수 있다. 다만 중국과 우리나라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 길이가 가로 길이에 비해 훨씬 긴 직사각형인 데 반해, 일본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와 가로 길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다. 이는 일본의 피사체가 중국과 우리나라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닌 방바닥의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의 핵심인 피사체의 안면 부위를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의 경우 후덕하면서도 권위적인 면모가 뚜렷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안면 묘사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측 눈썹 위에 작은 혹, 일명 점(母斑)이 그려져 있다(사진 4). 그런가 하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얼굴은 분(粉)을 바른 듯 하얗다.
소중현대(小中顯大),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본다”는 말이 있다. 중국과 일본, 한국 초상화의 차이는 비록 작지만 문화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보면 참으로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조선시대의 초상화가 지닌 세계 미술사적 의미를 되새기면 가슴이 벅차오르기까지 한다.
다양한 문화 예술 장르가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상화가 삼국에서 시공간을 달리하면서 각기 다른 문화 양식으로 자리 잡은 결과를 비교해보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몽골인이 세운 원(元) 왕조(1271~1368)가 쇠퇴하고 한족(漢族)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원나라 문화와 거리를 두려고 시도한 차별화 정책 중 하나가 초상화다. 초상화는 조상숭배 정신을 함양하는 풍조에서 더욱 큰 힘을 얻어 명나라 문화의 아이콘으로 부각되면서 꽃을 피우게 됐다.
이때 명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의 초상화(사진1)가 그려지고, 초상화 문화는 조선에까지 전해져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초상화(사진2)가 탄생한다. 또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초상화(사진3)도 등장한다.
위의 세 사람의 초상화를 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비단에다 그렸다는 사실과 함께 제작 방법도 똑같은 족자(簇子) 양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같은 문화권이었다는 맥을 짚을 수 있다. 다만 중국과 우리나라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 길이가 가로 길이에 비해 훨씬 긴 직사각형인 데 반해, 일본 초상화의 족자는 세로와 가로 길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다. 이는 일본의 피사체가 중국과 우리나라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닌 방바닥의 방석 위에 앉아 있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초상화의 핵심인 피사체의 안면 부위를 보면, 명 태조 주원장의 경우 후덕하면서도 권위적인 면모가 뚜렷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안면 묘사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측 눈썹 위에 작은 혹, 일명 점(母斑)이 그려져 있다(사진4). 그런가 하면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얼굴은 분(粉)을 바른 듯 하얗다.
소중현대(小中顯大),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본다”는 말이 있다. 중국과 일본, 한국 초상화의 차이는 비록 작지만 문화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김 대리 점심 함께 할까”
과장님 말씀에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의 김 대리. 길 과장님은 누군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언제나 많은 직원들 앞이 아닌 개인 면담식으로 말씀해 주셔 모든 직원들이 믿고 따르는 분이시다
“집에 무슨 일 있나?” “아닙니다.” “일주일 넘게 계속 졸며 컨디션 안 좋아보여 뭐 어려운 일 있으면 이야기 해봐.” “그 웬수같은 매미 때문입니다.” “웬수같은 매미는 또 무슨 얘기야.” “제가 사는 아파트가 4층인데 베란다 앞에 가로등이 있어요 밤에 불이 밝으니 매미가 낯인 줄 알고 밤새우는 것입니다.” “여름이라 문을 닫을 수도 없고 약 20일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어 노이로제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무슨 방법을 생각 해야겠네. 제가 안 해본 것이 없어요. “뭔데.” “운동을 피곤할 정도로 많이 해봤고, 따뜻한 차 마”시기, 벌나무 먹기, 낮잠 안 자기, 술 카페인 안 마시기, 양 숫자 세기, 발끝치기 지칠 때까지 하기 등등을 해 봤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수면제를 먹어보지 그랬어.” “물론 먹어봤죠.” “수면제를 먹으면 일단 잠은 자는데 일시적이고 오히려 부작용으로 낮 동안 피로감, 졸음, 집중력 저하, 맥이 풀리더군요.”
점심 끝나는 시간에 맞춰 들어와 직원들에게 물었지만 김 대리가 했던 여러 방법 중 하나에 불과 했다. 바로 그때 제일 막내인 복사 담당 직원이 그 이야길 듣고 한 마디 한다. “뭘 그까짓 껄 가지고 고민하세요.”
“뭐 특별한 방법 있나.” “제가 알바하고 피곤해 집에 들어가도 눈만 따갑고 잠이 안 왔는데 한 박에 고쳤고 지금도 가끔 써 먹는데 효과 100%입니다.“ “그게 뭔데.” “에이 맨 입으로요.” ‘알었어 내일 점심 살게“
“정말이죠” “성경을 읽으세요. 그런데 어디를 읽느냐가 중요한데 특히 제가 잘 자는 비결은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고 또 누가 태어나고 하는 대목이 가장 효과가 뛰어나요. 세로 성경은 안 되고 가로 성경이 좋더군요. 자다가 중간에 무서운 꿈에서 깨도 바로 성경을 읽으면 한 장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떨어집니다. 잠잘 때는 어두워야 효과적이라는군요. 그래서 눈에 어두운 안대하고 있으면 비록 잠을 못 자는 경우에도 1/2정도의 수면효과가 있데요.“
며칠째 읽고 있고 검은 안대도 하고 자는데 잠 못 이루시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강추, 강추
“우리 모두 위험에 처한 아기들과 이웃을 위해 기도합시다.” 영화가 끝나고 한 관객의 말에 극장은 어느새 예배당이 되었고, 관객들은 한참동안 그곳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낙태를 결심했던 한 여성은 눈물로 참회하며 아기를 낳겠다고 마음먹었고,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는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살 것을 다짐했다. 영화 가 불러온 변화였다. 엄밀히 말하면, 주사랑공동체 이종락(李鐘洛·62) 목사가 만든 ‘베이비박스’가 일으킨 기적과도 같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2007년 12월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새벽, 대문 앞에 정체 모를 굴비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비릿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그 냄새를 맡은 길고양이들이 상자 주변을 서성거렸다. 뚜껑을 열어 본 이종락 목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상자 속에 든 것은 바로 갓난아기였기 때문. 하마터면 추위에 동사하거나 길고양이들의 위협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어쩌면 더 많은 생명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길거리에 방치된 생명을 구하기 위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이 목사는 체코의 ‘베이비박스’ 소식을 들었고, 2009년 12월 가로 70cm, 세로 45cm, 높이 60cm의 베이비박스를 직접 만들어 서울 난곡동 주사랑공동체 교회외벽에 설치했다. 보온효과가 있는 따뜻하고 푹신한 베이비박스에 아기가 들어오는 순간 교회 내부의 벨이 울리도록 설계했다. 막상 그렇게 마련해 놓고도 그 벨이 울리지 않길 바랐던 이 목사다.
“제발 어린 생명이 버려지지 않길, 그러나 버려질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이곳에 넣어 주길 기도했어요. 호기심에 사람들이 박스 문을 열어 벨이 울리곤 했는데 처음 아기가 들어온 것은 3개월 만이었어요.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탯줄을 달고 있었는데… 그 심정은 말로 표현 못 해요. 그래도 길 가에 버려지지 않고 베이비박스 문을 열고 우리에게 와준 것에 감사했죠.”
아이를 낳은 우리 아이들, 손가락질보다는 따뜻한 손길로
한국의 베이비박스 소식을 접한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영화예술학교 학생들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는 2013년 미국에서 먼저 개봉했다. 50개 주 870개 극장에서 500만 관객과 만나며 제9회 샌 안토니오 기독교독립영화제 대상, 제5회 저스티스영화제 영화상을 받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이 영화를 계기로 애틀랜타주에 베이비박스가 만들어졌고, 인디애나주에서는 병원과 경찰서 등 공공기관에 베이비박스를 의무적으로 설치토록 한 법안이 나오기까지 했다. 한국에서는 올해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개막작으로 첫선을 보였고, 최근까지 몇몇 소극장에서 상영하고 있다. 영화를 본 이들은 이종락 목사의 헌신에 감탄하고 대단한 일을 했다며 박수를 치지만, 그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베이비박스 사역은 목사 개인의 계획이나 목적으로 이만큼 온 것이 아니에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가령 물에 빠진 사람을 보면 건져야겠다고 생각하고, 불이 난 것을 보면 신고하는 게 맞잖아요. 길 가에 버려진 아기들을 어떻게 그냥 두고 보겠어요. 당연히 보호하고 구해야죠.”
단 한 명의 아기라도 더 살리기 위해 만든 베이비박스이지만 처음 이 사실이 매스컴을 탔을 때만 해도 곱지 않은 시선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 미혼모들이 무책임하게 아기를 유기하게 조장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100개가 넘는 베이비박스가 있지만 1년에 겨우 한두 명의 아이밖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면 꼭 그렇다고 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2012년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는 입양특례법이 개정된 이후에는 베이비박스를 통해 들어온 아기가 4배 가까이 늘어났다.
“입양특례법이 실행되기 전 2년 7개월 동안은 76명의 아기가 들어왔는데, 그 이후에는 1년 5개월 동안 305명이 베이비박스에 남겨졌어요.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이를 낳고 출생신고를 하는 게 별거 아니지만, 미혼모나 특히 미성년자들에겐 큰 부담이죠. 그래서 산부인과를 가지 못하고 몰래 출산을 하게 되고,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맡길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무엇보다 아기를 두고 가는 미혼모 중 60% 이상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이 가슴 아픈 이 목사다.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어린 미혼모들. 그는 이러한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부모세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성교육을 하는 경우가 드물죠. 자신이 가진 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된다면 아이들도 그러한 행동을 잘 절제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일이 벌어졌다면 그땐 그들을 보호하고 이야기를 들어줘야죠. 우리 아이들이잖아요. 하지만 대부분 어른들은 학생이 임신했다고 하면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며 손가락질하죠. 그게 다 우리 사회의 ‘체면 문화’가 만들어낸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미성년자가 아이를 가지면 주변 사람의 시선 때문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숨어버리게 되죠. 그러다 우울증을 겪거나 자살 등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고요.”
이 목사는 미혼모들이 찾아오면 “열 달 동안 아기를 지키느라 고생 많았다. 훌륭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기와 함께 자살하려고 결심했던 엄마들도 많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마음을 돌려 자신을 찾아와 귀한 두 생명을 살릴 수 있어 감사하다는 이 목사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아기를 키우겠다고 데리고 간 미혼모도 150여 명이다. 그런 미혼모들을 위해 분유, 기저귀,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고 주사랑공동체에서 자격증 공부를 하며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목사는 어린 엄마들을 향한 따뜻한 손길이 그들의 부모세대로부터 뻗어 나왔을 때 진정한 위로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인생 후반전에 행복 더하기 ‘입양’
그동안 베이비박스 문을 통해 세상의 품에 안긴 아기는 올해 900명을 넘어서 이제 1000명에 가까워졌다(2016년 7월 8일 기준 979명). 이 목사는 모든 아기의 베이비박스 일지를 쓰고 당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키울 수는 없지만 애정을 담은 엄마의 손편지도 함께 보관한다. 이는 부모가 다시 아기를 찾고자 할 때 귀중한 자료가 된다. 가정의 품으로 돌아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이 목사도 그중 9명의 아이를 입양해 사랑으로 키우고 있다. 그가 입양한 아이들은 장애가 있거나 전신마비, 다운증후군 등을 앓고 있다. 아이 한 명을 양육하기도 힘들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손길이 많이 필요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어려움을 감수하고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30여 년 전, 심각한 장애를 갖고 태어난 둘째 아들 ‘은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보배 은만이 덕분에 생명의 거룩함, 소중함을 깨닫고 배웠어요. 몸을 움직이거나 말은 못하지만 그 아이는 눈빛으로 이야기하죠. 그 눈을 바라보면 인생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사는 게 아니라는 것, 하루를 만족하고 현재를 감사히 여기고 이웃을 사랑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지금 9명의 아이를 입양했지만, 몇 명 더 입양하고 싶어요. 그만큼 삶의 보람과 행복이 더 커진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입양 절차가 복잡하고 기준이 까다로운 국내에서는 입양 의사가 있던 이들도 그 과정을 견디지 못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이 목사는 자녀들을 장성시킨 중·장년에게 입양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다.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알 것이다.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란 아이들이 삶에 얼마나 큰 보람과 기쁨을 주는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입양은 자신의 무언가를 할애하는 것이 아닌 인생에 행복을 더하는 일이라고 한다.
“어제 다섯 명의 아이를 입양한 70대 중반의 교수님이 다녀가셨어요. 그분 말씀이 입양을 하고 인생이 달라졌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다 크고 출가하면 부모들은 외롭고 쓸쓸해지는데 그럴 틈이 없는 거죠. 나도 우리 첫째 딸이 자랄 땐 모르는 것도 많고 정신없이 지냈어요. 이제는 더 능숙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키울 수 있어 좋더라고요. 특히 갱년기 주부들은 우울증을 앓기도 하는데, 입양을 계기로 다시 사랑으로 아기를 키우다 보면 그 아이가 주는 기쁨으로 삶이 더 행복하고 즐거워질 거예요.”
1000명의 부모, 하나뿐인 부부
를 본 관객이라면 이종락 목사의 아내 정병옥 여사에게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이 목사를 내조하느라 힘들고 고단할 텐데, 영화 속 그녀는 늘 명랑한 목소리로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는 그런 아내가 있었기에 수많은 생명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목사에게 아내는 늘 고맙고도 가장 미안한 존재다.
“밤낮 안 가리고 아이들을 보살피고 키우느라 서로 대화할 정신이 없었어요. 지금은 우리가 해오던 일들에 담당자도 따로 두고 아이들도 많이 커서 조금 여유가 생긴 편이에요. 나는 그전에 참고 인내했던 마음이 많이 다독여졌지만 아내는 오히려 그런 점들을 드러내고 이야기하죠. 가끔 짜증을 부리거나 화를 낼 때도 있는데, 그만큼 내가 이 사람을 고생시켰다는 생각이 들어 측은하기도 해요.”
1000명에 가까운 아이들의 부모이자 수호천사 역할을 해온 부부이지만, 정작 남편과 아내의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했던 시간은 적었다고 한다. 무심하고 소홀했던 지난날은 묻어두고, 매주 목요일을 휴일로 정해 단둘이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낯간지러워 못했던 애정 표현도 이제는 자주 하려고 노력한다는 이 목사다.
“아내는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큰 위로를 받을 거예요. 하지만 그것 외에 지금까지 내가 남편으로서 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노력하고 고마움을 표현해야죠.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라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었는데, 요즘은 달라졌어요. 아내가 안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마지막엔 내가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죠. 처음엔 서투르고 어색했는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버릇이 되면 괜찮더라고요. 물론 서로 잔소리도 하고 툭툭거리기도 하는데 알고 보면 그게 바로 오랜 세월을 함께한 부부의 두터운 사랑이고 정이죠.”
필자 사진 작품이 전시된다. 머니투데이 방송과 (사)은퇴연금협회가 주관하고 서울시와 서울50플러스재단이 후원하는 'The senior 2016'와 함께 열리는 '시니어만남전'에 초대받아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이라는 주제로 필자의 사진 작품 10점이 행사장에 전시된다. 수채화 풍의 사진 10점을 가로 세로 크기 13 x 10, 10 x 10 인치 정도의 사진을 넣어 MDF액자로 만들었다. 이 행사는 2016년 7월 25일 오후 1시 30분부터 4시까지 서울시청 8층 대형 다목적 홀에서 진행되며 사진, 그림, 시니어용품, 재활용품 전시 등의 관람은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 그리고 강연이 끝나는 시각부터 할 수 있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The senior 2016”은 선진국의 시니어 생활의 흐름을 알아보고 시니어 친화산업의 선진화 내용과 서울시 시니어 정책 및 제도를 살펴봄으로써 50+세대 삶의 질 향상을 위하여 개최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축사와 최남수 머니투데이방송 사장의 인시말로 행사를 시작하게 된다. 경희대학교 정기택 교수의 “50+세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시니어 친화산업의 선진화” 발제와 제품 분야와 서비스 분야의 선진 사례발표도 있습니다. 사례발표로는 50플러스코리안의 건강한 삶을 위한 고령친화제품, 서비스 분야에선 성균관 대학교 손정현 교수의에 대한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아울러 서울 50+재단 홍선 실장의 “서울시 시니어 정책 및 제도” 등의 발제로 2시간 동안 열린다.
부대 행사로 시니어만남전이 곁들여지는데 후반생에 자아실현을 통하여 인생이막을 활기차게 보내고 있는 시니어 사진작가 포토스토리텔러 변용도의 사진전, 갤럭시 화가 정병길의 디지털 그림전, 50플러스코리안의 시니어 관련용품과 렛츠의 업싸이클링(재활용) 용품이 전시된다. 현장에서 구매할 수도 있다. 이 행사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당일 오후 1시부터 입장할 수 있다. 지하철 1호선, 2호선 시청역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수채화 같은 사진을 선정하였다.
아파트에 사는 것이 꿈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도시의 집값은 터무니없이 오르고 그나마 있던 매력을 잃은 지도 오래다. 그런 틈새를 노려 생겨난 것이 바로 도심형 전원마을이다. 말로만 듣던 ‘전원마을’에 ‘도심형’이 붙어 멀리 가지 않아도 전원생활을 즐길 수 있다. 말로만 하면 뭐하겠는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직접 가봤다. 도심형 전원마을에 막연한 관심이 있던 독자들에게 살짝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도심형 전원마을 두 곳을 소개한다.
단독주택, 꼭 넒어야 한다는 편견을 없애라
하우개마을
하우개 마을은 파주 황룡산 앞에 세워진 도심형 전원마을이다. 하우개 마을은 작은 땅에 효율적인 집을 짓기 위해 집집마다 지하에 차 2대가 들어갈 주차공간을 확보했다. 차고 위에 정원을 조성하고 2층과 다락방을 올려 이용 공간을 넓혔다.
다락방 천창으로 바라다보이는 하늘이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온함까지 준다. 4년 전만 해도 전원주택은 330m²(100평) 이상 큰 평수대로 지어져왔다. 지금은 젊은 30~40대나 은퇴를 앞둔 50~60대가 살 수 있는 99.2~132m²(30~40평) 형대의 전원주택이 건설되고 있다. 집값이 안 오를 바에는 넓고 편한 집에서 살아보겠다는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다.
남의현(南議鉉·61)씨와 김경주(金庚珠·60)씨는 하우개 마을 첫 입주자로 2014년 9월 문패를 달았다. 점심시간 조금 넘어 방문했을 때는 바깥주인인 남의현씨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작년 말 공기업을 정년퇴직하고 장애인 봉사를 하며 은퇴 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 “우선 공기가 좋다는 게 마을의 최고 매력입니다. 아파트에 살 때는 아침마다 머리가 아팠는데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남씨는 마을에서 최고 연장자고 오랫동안 산 사람이지만 동생 격인 주민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중이다. 현재 남씨 부부를 제외하고 3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게 살고 있다. 다른 주민들 입주가 시작되고 친해지다 보니까 매일 만나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다.
“요즘에는 날씨가 추워서 자주 못 만나는데 날씨 좋을 때는 정말 거의 매일 만났던 것 같아요. 함께 삼겹살 파티를 하면 정말 좋습니다. 맛이 달라요.”
부인 김경주씨는 홀트일산복지타운 원장이다. 사무실이 근처라 주위 아파트를 찾아보다 하우개마을을 알게 됐다.
“그때는 벌건 흙밖에 없었어요. 간이 크다고 하겠지만 조감도만 보고 집을 계약했어요. 누가 여기 들어오나 했는데 그게 바로 우리 부부였습니다.”
입주를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도우미를 자청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결정을 못하고 그럴 때 우리 집을 보여줬어요. 아마 여기 입주민은 우리집 한 번쯤 왔을 겁니다.”
집은 지상 2층에 다락까지 공간이 꽤 되는데 연료비나 전기료 부담이 없다.
“도시가스비가 제일 많이 나왔던 게 14만원이었어요. 전기료도 두 식구밖에 안 되니까 얼마 안 나와요. 아파트에선 관리비를 30만원씩 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창뿐만 아니라 집 구석구석에 쓴 히노키 나무가 마음에 듭니다. 나무집은 습기가 차면 나무가 팽창해서 습기 들어오는 걸 막고 더울 때는 마르면서 통풍이 된다던데 정말 그렇더군요.”
퇴근해서 집에 올 때면 나무 냄새 등자연의 향을 맡을 수 있어서 좋다. 새소리는 도시에서 느낄 수 없었다.
전원생활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도시와도 가깝고 또 공기까지 좋아서 도심형 전원주택으로 오기를 잘 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최소한의 대지에서 최대한의 공간을 활용한다
도시농부 타운하우스
파주 운정 신도시를 지나다 보면 마치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알록달록한 집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도시농부 타운하우스(이하 도시농부) 1, 2차 단지다. 오솔길처럼 낸 길을 따라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다. 곳곳에 도시농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텃밭도 보였다. 현재 5단지까지 분양 완료 됐는데 가격은 3억원 대로 알려져 있다.
도시농부의 특이점은 빌라형이면서 독채로 사용하는 것이다. 도시 대부분이 평면을 넓혀 단층(1층)을 높이 쌓아서 집을 지었다면 도시농부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집을 잘라 구분했다. 박닥은 좁은데 천장이 높고 2층에 다락방까지 있다. 지금까지 봐온 도시 주택과는 확실하게 차별화됐다.
6년 전 지어진 도시농부 1, 2차 단지의 경우, 설계를 담당한 도시농부 최용덕(崔龍德·57) 대표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실내와 실외의 융합을 노린 듯 층마다 텃밭이 있다. 면적은 좁지만 그안에 층을 만들어 공간 활용을 했다. 그런데 최 대표는 그런 실험이 사실상 실패라고 말했다. 실내와 실외의 융합을 위해 준실내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고. 그렇게 보완해 설계한 것이 최근 지어진 도시농부 미니멀하우스다. 이 집도 역시 세로로 집을 구분한 독채 빌라형이다. 1,2차 단지에 비해 옆으로도 꽤 넓고, 높다. 여러 군데 창이 있어 내부가 도시 집에 비해 상당히 밝은 것도 이 집의 장점이다.
조인관(趙寅官·71)씨는 딸의 권유로 당산동에서 파주 도시농부로 이사 왔다. 최근 간 이식수술을 한 부인이 공기 맑은 곳에서 살기를 바랐다. 가격에 비해 집안 환경이 마음에 들었다.
조씨의 집은 1층 응접실과 주방, 2층 부부의 방, 3층을 손님들이 묵고 갈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꾸몄다. 3층 공간을 조금 나눠 드레스룸을 만들었다. 드레스룸 안, 높은 천장 위를 가로로 분리해 창고로 만들었다. 2층은 통째로 부부의 방으로 꾸몄다.
“부부 단 둘이 살기 때문에 공간을 쪼개서 방을 많이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대신 계단 옆에 뭐든 넣을 수 있는 수납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계단 때문에 힘들지 않을까 했는데 살아보니까 적응돼 괜찮습니다.”
인테리어는 조씨가 직접 했다. 조씨가 집안 내부를 인테리어에 직접 개입한 것은 ‘마이너스 옵션제’로 분양 받았기 때문이다. 마이너스 옵션제란 익스테리어(건물외관, 창호, 전기, 보일러, 정원)는 회사측이, 내부공사는 입주자가 하는 방식.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 시행하고 있고 도시농부와 하우개마을도 마이너스 옵션제를 시행하고 있다.
조씨는 집 앞 마당 가꾸는 것이 취미다. 봄을 맞아 마당 주위에 꽃도 심었다. 도시의 아파트 생활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이곳에서 시골 생활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른한 봄볕 아래 어머니를 생각하는 조창화(趙昌化·78) 대한언론인회 고문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그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값진 추억을 생생하게 그렸다. 흡사 계절마다 살아 돌아오는 장미꽃의 슬픈 아름다움처럼,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조 고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1남 2녀 세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그중에서도 아들인 제게 몰두하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어머니는 늘 애틋하고 각별한 존재죠. 이렇게 다시 회고하니 늘 혼자였던 어머니 모습에 목이 멥니다.”
조창화 대한언론인회 고문은 어머니 박신행(朴信行)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며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와 가족의 삶을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보태졌다.
그는 자신이 일곱살이었을 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낳은 아들이었던 그는 1945년 초, 어머니의 손에 끌려 서른 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 끝에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이라는 작은 포구에 닿았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좋은 재산 다 놔두고 몸만 나왔으니 어떻게 하나”라는 어머니의 푸념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천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 치하였던지라 다마고(계란) 잇고(1개), 니고(2개)를 먼저 배워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 학교를 다니다 온 두 누이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곤 했다.
해방이 된 그 해 8월 하순의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조이선(趙利善) 씨와 함께 100여 리 떨어진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는데 연단에서 키 큰 남자 한 명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했다. 마치 불길한 전조 같은 기억이었다.
함경도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소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가족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함경남도 신고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땅과 과수원, 광산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고산 인민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아침마다 소년단 행진곡을 부르며 대열을 갖추어 등교할 때는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이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전갈이 왔다. 죄목은 ‘유산 계급’. 공산당의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소년 조창화는 학급 위원 자리에서 내쫓기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됐다. 부당한 처사들 속에서 학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집에서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아버지 소식을 갖고 왔다는 한 남자가 “어머니, 아버지는 안변 감옥을 탈출해 이미 월남을 했고, 나는 너희 3남매를 남쪽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내밀었다.
3남매는 1948년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월남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고생 끝에 도착한 동두천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공옥소학교라는 사립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남대문시장 근처, 지금의 상동교회 뒤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씩밖에 없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교였다. 고된 경험 끝에 부모님과 함께하게 됐다는 것에서 그는 겨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남짓 지났을 시점인 1950년 7월 13일, 그의 나이 12세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울이 온통 인민군으로 뒤덮인 날, 그는 아버지를 모신 영구차에 탄 채 무악재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인민군을 헤치고 홍제동으로 향했다. 묘지였던 그곳에서 5일장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후 석 달 동안 방공호에서 살아야 했다.
얼마나 지난 다음일까? 어느 날 국군이 서울로 들어왔고, 그해 12월 하순에 그의 가족들은 다시 짐을 꾸려 부산으로 가는 피난 열차를 탔다. 무려 6일 동안의 거북걸음 끝에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12월 26일 즈음, 어머니와 2녀 1남의 3남매는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부산역 한 귀퉁이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홀어머니 슬픔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
“그때 어머니는 겨울 털모자를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런데 뭔가를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은 별로 없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제가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엄청 울 수밖에 없었죠.”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네 아이들과 사귀던 그는 미군 부대에 들어가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는 ‘슈샤인 보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의 우리들은 꽁트에서나 볼 수 있는 ‘기브 미 쪼꼬렛’이라는 어설픈 영어 뒤에 숨어 있는 건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이고 절박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조 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슈샤인 보이’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이대로 뒀다가는 애가 큰일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애지중지 키운 집안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미군 부대 대신 데려간 곳은 문래동 대선소주공장의 한 귀퉁이였다. 그곳은 미국인들에게 학교를 빼앗긴 성남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노천 수업을 받는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인생에서 네 번째 초등학교가 시작된다. 졸업이 예정된 6학년 말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을 뿐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연합고사를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인 가운데 그는 친구들의 노트와 책을 빌려 보기에 바빴다. 비록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달포 뒤에 성남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4개를 거친 그의 남행만리(南行萬里)는 부산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의대에 안 가 죄송합니다”
1953년, 이제 여드름꽃이 피는 나이가 되는 조 고문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대열에 끼여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 그는 당장 다가온 대학 입시 준비로 24시간이 모자랐다.
“제가 있던 3학년 4반 담임인 육인수(故육영수 여사의 오라버니) 선생님을 만난 어머니는 ‘창화는 무조건 서울대학교 의대에 가야 하니까 그리 지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과가 싫어 정치학과에 서류를 제출했고 어머니와 육 선생은 제가 당연히 의대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었죠.”
서울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그는 마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지의 대표 준재들이 모인 형세를 이루는 정치학과 내에 함경도 대표로 자리 잡았다. 1961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한일보 기자로 들어가 국회, 청와대 출입을 시작했다. 1973년, KBS 정치부 차장으로 이직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보다 탄탄해진다.
“제가 KBS 부산방송 총국장이었던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 53세일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이후 35년이란 세월을 우리 남매 세 명을 위해 개가하지 않고 홀로 살다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삶을 같이한 시간보다 홀로 산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로 기억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막일도 거르지 않았고 늘 당당했다. 나이 들어 출석하는 노인회관에서는 화투도 잘 치고 보스 노릇도 곧잘 했다. 그는 어머니를 인정이 많고 시대를 앞서 갔다고 평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유창했던 것도 어머니다운 점이었다.
어머니 묘지에 대동강 모래를 뿌리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언제일까.
“다들 비슷하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려울 때, 힘들 때죠. 어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으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한 제 편이니까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 그는 변변하게 보답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더군요. 그래서 비행기로 못 움직이고, 새마을호를 겨우 타서 6시간 걸려서 집에 도착했죠.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애비는 어디 있냐’고 물으시며 ‘화장실에 좀 가자, 씻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가시면서 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이지만, 그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80세가 다 된 지금까지 ‘정신적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청와대 출입 시절 잊지 못할 일이 한 가지 있지요.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단으로 들어가 대동강을 산보하고 그 강변에서 모래를 채취할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어요. 그래서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고향 대동강의 모래를 뿌려드릴 수 있었죠.”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 묘가 없어진 기억이 나서다.
“사실 아버지 묘지를 잃어버렸어요. 부산 피난살이에서 돌아와보니까 홍제동의 묘지 자리를 불도저로 확 밀어버렸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영정만 가지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어머니 유골을 파서 화장을 했어요. 그리고 용인공원묘지에 가로 60cm, 세로 40cm 사이즈의 와합, 즉 눕히는 비석으로 바꿨어요.”
비석에는 배천(白川) 조 씨 가족묘라고 쓰여 있고 뒤에는 사용 수칙을 적었다. ‘여기는 배천 조씨 묘지다, 화장을 해서 묻는다, 직계비속들은 만약 꽉 차면 맨 위부터 그대로 파서 거기에 다시 사용해라.’ 용인공원묘지가 상당히 큰데 그렇게 한 건 그가 처음이다.
“한 40구는 들어갈 것 같아요. 내가 죽고, 한 5대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그는 어렵게 묘지개혁을 했다며 어머니 같은 여장부라면 좋아하실 일이라고 평했다.
그가 요즘 즐겨 말하는 ‘첫째는 남한테 피해 주지 말자이고, 둘째는 정리정돈’이란 말 또한 어머니에게서 배운 습관이다.
“요즘 이제 일곱살인 우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뭐라 말했냐고 집적대면 ‘남 폐 끼치지 마라, 정리정돈이요’하고 냉큼 대답하죠. 그 재미에 삽니다.”
조 고문은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묵직하게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손녀 얘기가 나오자 금방 함박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향한 추모의 정은 이제 유일한 손녀에 대한 짝사랑이 되어 삶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에게 손녀는 그의 어머니가 주신 축복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직사각형 가로 90mm, 세로 50mm, 하얀 종이 위에 덩그러니 놓인 회사 로고, 나를 말하는 단 몇 글자의 직책, 조선시대라면 없었을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까지. 보통의 명함은 그러했고, 지난날 당신의 명함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평범한 명함은 그야말로 명함도 못 내밀 시대가 왔다. 은퇴 이후, 인사치레할 명함 한 장이 없어 마음이 헛헛하고 어깨가 축 처진 이들이 많다. 그러나 직장 생활이 끝났다 해서 그것이 곧 내 인생이 끝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명함은 ‘직장 증명’의 도구가 아닌 나를 이야기하는 ‘존재 증명’의 매개체로 진화하고 있다. 이제는 그 흔한 직장 명함에 대한 집착은 버리고, 독특하고 세련된 나만의 명함으로 자존심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
글 이지혜 기자
도움말 아날로그엔진
▲ 조립식 명함이 등장했다. 직사각형 명함 위에 비행기의 몸체, 날개, 프로펠러 등을 뜯어 조립할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 자신을 드러내는 이미지만 있다면 테두리를 잘라 세우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명함을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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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즈 여행이나 낚시 동호회 회원들에게 안성맞춤인 디자인이다. 모임에 나가 이런 명함을 건넨다면 대화 소재가 생겨 자연스럽게 친목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 조기축구회 스트라이커의 명함이다. 꼭 직장을 다니고 직업이 있어야만 명함을 만든다는 편견을 깬 사례다.
▲ 오른쪽 이젤은 위의 비행기와 같은 조립식 명함이다. 이젤 위의 미니 명함만 소장하고 다닐 수도 있고 책상이나 테이블 위에 이젤과 함께 세워둘 수 있어 활용도가 높다. 왼쪽 그림 액자 명함처럼 좋아하는 그림을 넣고 다녀도 좋겠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중년 여성에게 가장 인기가 높다는 레이스 명함이다. 파스텔 계열의 펄이 가미된 종이를 사용하면 훨씬 우아한 느낌을 줄 수 있다.
▲ 은퇴이후 자신이 쌓아온 커리어를 살려 강사로 활동하는 이들이 많다. 강연에 사용되는 마이크를 메인 이미지로 활용한 디자인이다.
▲ 중장년의 세컨드라이프에 빠지지 않는 창업. 카페, 음식점, 부동산 등 창업 아이템과 연관된 이미지로 명함을 제작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 오른쪽 명함은 연말 파티 등에서 초대장 대용으로 활용되는 디자인이다. 근사한 파티를 계획하고 있다면 이러한 디자인 명함을 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왼쪽은 책갈피로 활용 가능한 명함이다.
▲ 증명사진이 들어간 명함이 조금 쑥스럽다면 캐리커처를 넣어보는 것도 좋다. 그 어떤 디자인보다 나를 잘 드러내는 명함이 될 수 있다.
▲조기 축구회 회원들이 선호하는 또 다른 디자인 명함이다. 활동하고 있는 팀이 있다면 선수들의 등번호에 맞춰 명함 선물을 해보는 것도 기념이 될 것이다. 자동차 모양을 본 뜬 명함도 눈길을 끈다. 택시기사라 해서 명함이 필요 없을 것이란 생각은 버려라. 택시기사도 고객 관리가 필수인 만큼 독특한 명함으로 서비스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아날로그 엔진 장미지 대표
“명함은 곧 자신감이죠.”
은퇴하고 명함 디자인을 의뢰하시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 자신감이 없어 보여요. 내세울 만한 직장도 없고, 이렇다 할 직책도 없어서일까요? 하지만 그럴수록 명함에 더 힘을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평범한 명함을 받게 되면 ‘이 사람은 어디에 다니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자신을 잘 드러낸 독특한 명함을 건넨다면 그 사람의 스펙보다는 스토리가 더 궁금해지죠. “명함이 정말 근사하네요.” “이런 명함은 처음 보는데요?” 등 명함이 대화 소재가 되고, 자신감을 높여줄 수 있는 존재가 되기도 해요. 오직 나만을 위한 나를 대표하는 명함 한 장은 여느 회사의 대표 명함보다 더 빛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