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나루역 바로 앞에 ‘서울책보고’라는 이름의 초대형 헌책방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형서점과 인터넷 서점에 밀려 설 곳을 잃었던 청계천 헌책방 거리 서점을 비롯 25개의 헌책방이 둥지를 틀었다고 한다. 반가운 마음으로 며칠 전 달려갔다. 그 곳에서 크기와 외관이 시선을 압도하는 콘테이너 박스 스타일의 헌책방 ‘서울책보고’와 마주했다. 유리문 안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치형의 대형서고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13만 여권이나 되는 책이 32개의 아치형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천장까지 이어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멋스럽고 독특한 비주얼 때문에 책을 고르기에 앞서 인증 샷을 찍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개장 후 처음 맞는 주말이어서인지 ‘서울책보고’는 책을 사려는 시민들로 가득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많이 보였다.
책은 서점 별로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주제별 진열에 익숙해서인지 헌책방 별로 책을 진열한 방식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새로운 진열 덕분에 문학, 사회과학, 대학교재 등 헌책방 마다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수집하는 분야가 각각 다른 걸 보는 재미도 있었다. 책값이 싸서 맘에 드는 책을 마음껏 고를 수 있다. 읽고 싶은 책, 선물하고 싶은 책을 고르며 서가를 돌다보면 어느새 책을 한아름 안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원하는 책이 있다면 입구에 있는 도서검색대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검색해 보는 것이 좋다. 본인이 원하는 책이 어떤 책방에 있을 지 알아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웃라이어’를 검색창에 쳤더니 xx서점, xx북스, xx서점 등 여러 책방이 검색됐다. 책값도 1000원에서 6000원 까지 천차만별이었다. 책의 상태나 취향에 따라 책방을 고르면 원하는 책을 살 수 있다. 책이 높은 곳에 꽂혀있다면 직원에게 이야기 하면 된다. 사다리를 놓고 꺼내주니 책을 고르고 찾는데는 큰 불편이 없었다
헌 책방이라고 책만 판매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소규모 독립 출판물도 전시되고 있고, 명사들의 기증도서도 만나볼 수 있다. 독립출판물이나 명사기증도서는 판매는 안되지만 책을 열람할 수 있는 테이블이 마련돼 있어 관심가는 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
개관특별전시도 열리고 있었다. 참여 헌책방에서 위탁받은 문학작품 초판본, 옛날 잡지, 교과서와 헌 책을 주제로 한 북큐레이션 전시 등 흥미있는 전시물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 십상이다.
아이들과 함께 특별히 의미있는 체험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전국 최초로 문을 연 공공헌책방 '서울책보고'로 봄나들이 하기를 권한다. 교통이 편리하다. 지하철 2호선 잠실나루 역에서 나오면 바로 눈 앞에 있고, 유수지 공영주차장과 ‘서울책보고’가 연결되는 입구가 있어 승용차를 타고 와도 주차 걱정이 없다. 다만 보고싶은 책, 사고싶은 책이 넘쳐나니 이 곳에 방문하려면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오는 것이 좋다.
카리스마, 예능 프로그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초, 그리고 아버지 故 박노식으로부터 이어지는 3대째 배우 가족의 가장인 배우 박준규(56)를 만난 것은 박술녀 한복연구소에서였다. 새해를 맞이해 생애 처음 그가 아내 진송아 씨, 장모(정갑숙), 어머니(김용숙)와 함께 한복 나들이를 한 자리였다. 촬영 현장에서 가족들을 대하며 보여줬던 즐거운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이 사람을 만나면 즐거울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게 되는 에너지가 저절로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드라마에서 보는 그의 모습이 무엇이든, 실제의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을 모든 것에 우선해서 두는 사람이다. 그의 남다른 가족 사랑, 그리고 숨겨뒀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박준규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보여준 그의 자연스러운 유쾌함이 계속 궁금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다.
“긍정적 마인드죠. 저는 현장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합니다. 현장에서 연기만 하고 차 안에 있다가 나가고 하는 그런 건 제겐 힘들어요. 어떤 사람은 쉴 때가 되면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거나, 유럽에서 혼자 한 달 동안 지내다 온다는데, 저는 해본 적 없고 그런 생각도 든 적 없어요.”
타고난 기질이 그렇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의 긍정적인 마음은 오롯이 가족을 향해 있었다.
“집안 돌아가는 게 모든 것의 우선이죠. 어디 투자도 못하고 꾸준히 먹고살 정도로만 살고 있어요. 빌딩 하나 사도 될 만큼 번 적도 있지만 집에서 놀고먹다가 까먹고.(웃음) 여행도 항상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요. 혼자 있는 거 싫거든요.”
연예인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고 보니 그의 아들인 박종혁 군과 박종찬 군은 둘 다 배우다. 박준규의 아버지인 액션스타 박노식 씨까지 아우르는 3대 배우 가족이다. 그리고 아내 진송아 씨 또한 배우다. 그야말로 가족 전부가 연기 전문가다.
“아이들 스스로가 택한 길이죠. 쉽지 않은 직업이고 잘 이겨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많지요. 그런데 앞으로는 제가 되도록 아이들과 같이 TV에 안 나가려고 해요.”
어째서일까? 그 이면에는 연예인 가족이라는 입장이 주는 부담이 있었다.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해 쓰는 수많은 ‘악플’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연예인이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받는 근거 없는 조롱과 멸시도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고, 특히 요즘 사회를 경악케 만든 소위 ‘2세들의 갑질’에 대해 민감해하는 대중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진 탓도 있다.
“‘네 아버지가 쌍칼이라 잘되는 거지’, ‘애 연기자 시키려고 저러나보다’라는 말들이 큰 상처가 돼요. 그런데 종혁이, 종찬이는 드라마, 뮤지컬 전부 다 스스로 알아서 오디션을 봐서 통과한 거예요. 지금도 계속 오디션을 보고 있고요. 요즘 세상에 어떤 제작자가 아무나 캐스팅하겠습니까. 대충 지인 꽂아서 만들지 않아요. 사실들을 모르고 하는 얘기죠. 물론 그런 과정은 다 겪어야 하는 거지만… 속상하죠.”
‘3대째 하고 있는 칼국수집은 믿음이 간다’ 하면서 ‘3대째 연기자 집안은 끼리끼리 해먹는다’라고 표현하면 그것은 편견 아닌가, 어쩌면 연기를 전문적인 기술로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정서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늘 함께하는 가족
그러나 같은 일을 함께 공유하는 가족이어서 얻는 보람과 즐거움도 분명히 있다. 연기에 대해 얘기하자 그의 침울했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졌다.
“따로 연기 공부를 시킨다든지 하는 건 없어요. 종찬이가 뮤지컬 공연할 때 포즈나 행동, 액션에 대해 잠깐 보여주면 ‘이게 낫다’ 하는 정도로만 조언해요. 와이프도 배우이다 보니 네 명이 앉아서 연기나 음악에 대한 주제로 대화가 집중되죠. 우리 가족은 대화 자체가 해피해요. 같은 주제를 논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대개 가족과의 대화가 단절되는 이유는 서로의 영역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다. 그러나 박준규의 집에서는 연출이나 연기 등에 대한 다양하고 깊은 대화가 오간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밖에서 따로 도는 일도 없다. 술 마실 일이 있으면 가족 전부가 모여서 같이 마신다.
“저 같은 경우는 금수저로 태어났다가 흙수저가 됐다가 다시 금수저가 되어가는 중이고, 우리 얘들은 금수저죠. 그런데 금수저면 스스로 금수저답게 행동해야지, 누가 가르쳐줘서 되는 게 아니라고 봐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도 맞는 말이지만 좀 늦게 정신 차리는 경우도 있거든요. 1년이 지나 걷는 아이도 있는데 억지로 걷게 해서 더 안 좋아지는 것처럼요.”
박준규의 교육 방침은 기본적으로는 ‘내버려둬’이다. 자기가 살다 보면, 단체 생활을 하게 되면, 때 되면 알게 된다는 게 그의 신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둔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본은 가르치고 버르장머리 없고 이기적인 습관들은 지적해줘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걸 잊지 말자는 것만큼은 지키고 살았죠. 아빠가 일하고 들어왔는데 방에서 공부하느라 인사도 안 한다면, 그런 건 잘못됐다고 봐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와서 인사해야 하죠. 우리가 함께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한 게 있으면, 약속 전날에 밤을 새든 말든 상관 안 하지만 그 약속은 꼭 지켜야 해요.”
그의 교육적 방침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었다. 책임질 부분을 명확하게 하고, 그 외에는 자유롭게 해주는 것. 다행히 아이들은 단체 생활인 드라마 제작 현장을 어렸을 때부터 봤기 때문에, 자기들이 잘못된 게 있으면 스스로 고치려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는 게 고맙다고 말한다.
“일하다 보면 주변에서 제 아이들이 잘한다는 얘기들을 듣게 되는데, 너무 기분 좋죠. 바쁜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지 않아 아들들한테는 친구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아버지 박노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됐지요.”
난데없이 떨어진 7억 빚
그는 사람들에게 “박준규가 나오니 작품이 재미있네”라는 얘기를 듣고 싶다고 말한다. 항상 그렇게 믿음이 가는 배우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그의 소망은 그가 가진 연기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만든다. 실제로 그는 꾸준한 연극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2년 이후부터는 연출도 맡았다. 그러나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공연 쪽에서 큰 문제가 난 적이 있었다고 사실을 밝혔다.
“2016년에 뮤지컬을 제작했어요. 11월 11일 빼빼로데이 때 시작했는데 초반에는 굉장히 잘돼서 ‘음, 역시 박준규는 제작이면 제작, 연출이면 연출 못하는 게 없어’라고 생각했죠.(웃음) 그런데 그해 12월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건이 터졌어요. 그러면서 관객 수가 급감해서 망했어요. 그리고 파트너였던 사람이 개인파산을 신청하면서 제작비 전부가 제 빚이 되더군요. 서류상으로 할 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래서 저 혼자 갚고 있는 중이에요.”
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 일로 그가 갚아야 할 빚은 약 7억 원.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채권자 중에는 지인도 있는 만큼 그들에게 도의를 다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앞으로 1, 2년 더 고생하면 갚을 수 있을 듯해요. 그동안 아이들도 잘되면 좋고. 나도 좋은 작품 한 번 또 열심히 하게 되면 좋고요.”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
인생사에 새겨진 굵직한 상처를 보듬어주는 것이야말로 가족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 배우가 아닌 가장으로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잘한 일은 지금의 가족을 만난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에서 잘한 일이라면 진송아와 결혼한 거죠. 진송아가 아니었으면 벌써 이혼해서 쓰레기 인생을 살았을걸.(웃음) 어머니와 아버지는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하고 지금의 아이들이 있어줘서 고맙고요.”
그가 보는 아내의 장점은 ‘괴롭히지 않고 잔소리를 안 한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부부로서 오래 함께 잘 살아온 비법은 아이들을 ‘내버려둔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을 보면 케미가 좋은 동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부부의 인연을 오래 고스란히 유지하려면 상대가 바뀌길 바라면 안 돼요. 있는 그대로 둬야죠. 대부분의 부부싸움은 상대를 자기화하려고 해서 일어나요. 가르치려고 들고, 서로 몇십 년간 살아온 습관이 있는데 그걸 바꾸라고 강요하다가 다투게 되죠. 와이프와 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유지하니까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솔직한 박준규, 깨달음을 만나다
박준규의 강점은 솔직함이다. 그의 이름이 몇 년 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른 적이 있다. 방송에서 아침은 며느리가 차려주는 걸로 먹어야겠다고 말했던 일 때문이다. 요즘처럼 페미니즘이 커다란 화두로 떠오른 시기에는 더 화제가 될 발언이다.
“맞벌이 부부라면 아침을 남편이 해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가정주부라면 자기 할 일은 해야지. 그런 말 몇 마디 했다가 ‘망언이네, 간 큰 시아버지네’라며 이상하게 몰아가려 하더라고요. 시아버지가 돼서 며느리 밥 먹겠다는 게 이상한가? 전 지금도 그걸 바라고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뭔가를 힘들게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여서 하는 것이 진짜 희생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그 발언을 한 후 동네 약국에서 한 사람이 그의 손을 꼭 잡으면서 “내게도 아들이 있는데, 고맙다”라고 말해주더란다. 아마도 그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들, 그러나 말할 처지가 못 되다 보니 그의 솔직함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의 가족도 그의 솔직함을 약간(?) 걱정하는 눈치다. 솔직함이 때로는 까칠해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와이프는 ‘제발 그런 얘기가 나와도 말 좀 가려라, 여성 비하 발언은 조심하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살다 보면 이해가 안 가는 부부들을 많이 봐요.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 보면 뭐라고 했는데, 이제는 자제하고 있어요. 아내가 ‘그런 얘기를 들어도 뭐 그런 것도 좋겠네 하면서 대꾸하지 마라’ 해서 그럴려고요.(웃음) 정말이지 훌륭한 할아버지가 되고 싶걸랑요.”
I’m the best, so you
2019년의 박준규도 지금까지처럼 바쁘게 움직일 생각이다. 봄이 되면 우선 지난해 방영되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드라마 ‘검법남녀’ 시즌2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역시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혼자가 될지 여럿이 될지는 구상 중에 있다고. 인터뷰 끝에 앞으로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는 그에게 신년 덕담을 주문했다.
“요즘은 자신은 안 돌보고 자식들만 돌보는 사람들이 있고, 반면 자신만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임 더 베스트, 소 유(I’m the best, so you), 내가 최고고 당신도 최고다. 우리는 항상 베스트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도 베스트라는 것도요. 모든 사람은 똑같다는 거죠.”
이렇게 세상 편해 보이는 사람 또 없다. 웃는 인상은 기본이다. 모두를 향한 감사가 담긴 듯 등을 굽혀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인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몸짓, 평생 몸에 밴 버릇 같다. 누군가 말을 건네면 온화하게 웃고, 나직하게 말한다. 속 깊게 생각한 뒤 유쾌한 해답을 찾아주는 사람, 한정수 동년기자를 만났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명품 패널!
한정수 동년기자는 최근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네이버 채널 시니어 패널로 등장했다. 1기부터 쭉 동년기자로 다방면에 참여해왔는데 이번에는 영상 출연에 과감히 도전한 것이다. 전자 체온계 사용후기에서부터 신세대 음료 마시기, 다림질 사용기를 통해 적절한 입담과 친근한 표정으로 프로그램 중심을 잡았다. 촬영을 진행했던 후배 기자도 한정수 동년기자의 준비성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촬영하는 거 재미있었어요. 저는 뭐든 시작하기 전에 봐야 할 자료가 있으면 꼭 여러 번 챙겨보고 숙지합니다. 따로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다리미 촬영 전에는 아내에게 다림질 방법을 물어도 봤습니다. 뭔가 하나 발견했을 때의 희열, 저는 그런 준비단계가 좋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 나서서 강연을 하는 직업이 촬영 현장에서 제대로 먹혔다. 적당한 타이밍에 호응하고 질문하는 것이 베테랑 방송인만큼이나 능수능란했다. 나서지 않으면서도 옆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실력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나를 가만히 보니까 리더는 절대 아니고 뒤에서 누군가를 보듬어주는 역할이 더 맞더라고요. 어디를 가나 리더들은 많이 흘리고 다녀요. 리더가 놓치는 것을 주워 담는 역할, 목적 달성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거나 낙오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힘을 줘서 몰고 가는 역할이 저에게 맞습니다. 그래서 제 별명이 양치기견인 ‘보더콜리’입니다.”
봉사와 우연이 천명이 되다
올해 일흔두 살의 전문 강사 4년 차인 한정수 동년기자. 변화관리와 인간관계에 관한 주제로 주로 강연한다. 강연장에서 한정수 동년기자의 인기는 정말 남부럽지 않다. 강의가 끝나면 박수뿐만 아니라 사진 찍자고 다가오는 이들에, 명함을 요구하는 이도 많다.
“그런데 처음부터 전문 강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사료 사업을 하다가 정년퇴직한 이후 ‘뭘 하면서 살까’를 고민했습니다.”
은퇴자로서의 고민은 봉사활동을 하도록 이끌었고 스피치 학원으로까지 인도했다. 공부를 썩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기에 대중 앞에 서서 방향을 제시하는 선생으로서의 삶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정년퇴직과 함께 ‘경로자 우대카드’를 받아들고 나니 뭘 해야 할지 걱정부터 앞섰다.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앞으로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뭘 배우고 싶어 합니다. 이런 고민으로 대한노인회에 전화를 걸었더니 집에서 가까운 경로당에 가서 봉사를 하라더군요.”
처음에는 성의 없는 답변에 할 말을 잃었다. 화를 누르고 생각해 얻은 결론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모르면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대한노인회의 조언대로 경로당에 가서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봉사하러 가니까 경로당 총무가 ‘할 짓이 없어서 젊은 놈이 경로당에 나오냐’고 언성을 높이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생각한 바가 있어서 경로당에 나간 거잖아요. 한 달 근무를 해보니 너무 열악하더라고요. 정부에서 한 달에 36만 원씩 10개월을 줘요. 그 돈으로 전기요금, 난방비 등을 다 해결해야 하니까요.”
경로당에는 58명의 어른이 계셨다. 이런저런 비용을 따져보니 매일 한 사람당 200원을 지원받는 셈이었다.
“안되겠다 싶어서 그 길로 경로당 근처의 절, 성당, 교회, 기업체를 찾아다녔어요. 한 달에 한끼 식사비만 기부해 달라고 했더니 어르신 인원이 너무 많아서 힘들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줄 수 있는 일정 금액을 통장에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3만 원, 5만 원 조금씩 통장에 쌓이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나들이도 다녔다. 멀리 갈 일이 생기면 간호사도 동행했다.
“다행히 다니면서 사고 한 번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소문이 났어요. 다른 경로당에서도 봉사를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어요. 그런데 문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결국은 돈 달라는 말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걸 많은 사람 앞에서 하려니 말이 잘 안 나오는 거예요. 정식으로 한국언어문화원에 들어가서 스피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6개월 과정 동안 정말 열심히 배웠다. 발성 연습을 할 때는 30분 동안 페트병에 담긴 물을 두 병이나 마셔댔다. 6개월 하고 났더니 물 한 모금 안 마시고도 목소리가 자유자재로 나왔다.
“첫 강의는 한국생산성본부에서 했습니다. 스물아홉 명 앞에서 강의했는데 28장 되는 자료를 정말 달달 외워 갔습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만족도 조사가 아주 높게 나왔습니다. 만점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일을 한다니까 고교 동창들은 희한하게 보더라고요. 어렸을 때 제가 싸움질은 좀 했는데 공부는 못했거든요.(웃음) 처음부터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4년째 하고 있고 지금은 한국언어문화원에서 학생들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이 아닌 강사들을 위한 ‘파워 스피치’ 수업을 진행한다고. 주어진 시간 안에 대중이 알아듣고 또 새길 수 있는 이야기를 펼치는 방법을 전수 중이다.
“리더 성향은 아니지만 내 것이라고 강하게 느끼는 것이 생기면 끝까지 남아서 결국은 뭔가 하더라고요. 강의를 4년째 하다 보니 어디서 강의 들은 누구라고 인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강의안 자료를 모아 공동저서로 2015년과 2017년 책을 냈다. 그리고 올해 단독으로 ‘우연은 천명이다’란 제목의 책을 준비 중이다.
“저는 공부 잘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경로당에 갔다가 말을 못해서 스피치를 배우고 눈에 띄어서 강사로 활동하고… 아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늦게나마 공부를 시작해 참 재미를 느끼며 살고 있어요. 우연히 하나씩 주어진 것을 받아먹은 거죠. 그 결과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길로 들어섰습니다. 제가 태어난 소명은 아마 누구를 가르치고 도우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이 배우고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는 한정수 동년기자. 그런데 꼭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란다. 뭔가 알아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장애인 인권과 관련한 공부를 하고 있다.
“사회적인 편견도 있고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 부족 탓에 약해지고 비굴해지고 스스로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장애인들이 꽤 있습니다. 그냥 놔두면 낙오되거나 자연 도태됩니다. 그들을 잘 추슬러 끝까지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앞으로의 인생은 이 방면에서 펼쳐보려고 해요.”
사랑하는 아내 이야기
인터뷰 중간중간 ‘아내’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우선 3년 전 아내의 친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으로 집을 옮겼다고 했다.
“강남에 살 때 종종 아내의 친구들이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왔습니다. 아내랑 놀려고요. 그런데 어느 날 힘드니까 저희 부부더러 이사 오라고 하더군요. 아내 친구가 민낯에 슬리퍼 끌고 와서 냉장고 열어 집에서 먹을 거 먹고요. 아내도 외롭지 않고요.”
한정수 동년기자뿐 아니라 친구들까지 아내를 극진히 보살피는 듯했다. 물론 이유가 있었다.
“아내가 근무력증을 앓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치매로 오래 편찮으셨어요.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9년 만에 아내에게도 병마가 찾아왔어요. 그때는 집에 가면 다 환자였습니다. 제가 뭘 했겠어요? 재롱부려야죠. 웃고 싱거운 소리 하면서 맨날 즐겁게 웃었어요. 어느 날 아내가 너무 아파 제가 어머니를 일주일 모셔봤어요. 도저히 못 모시겠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서. 그때 되게 울었어.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젊은 시절 만나 6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돈 열심히 벌어야 했던 시절에는 남편 뒷바라지, 어머니 아프실 때는 병수발. 이제는 자신이 몸이 아파서 하고 싶은 것도 못해보고 나이 들어버린 사랑하는 아내다. 연애 때 얘기 좀 들려 달라 하니 바로 어제 얘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진다. 조계사에서 흑석동으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바래다주다 통금에 걸린 일화, 일이 바빠 못 갈 뻔했던 신혼여행을 친구 때문에 다녀왔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많은 것이 부족하던 시절 감내하면서 남편을 믿고 지지해준 멋진 여인이 한정수 동년기자의 아내였다.
“제가 지방으로 강의 다닐 때는 아내와 꼭 같이 다닌다고 했잖아요. 아내가 사실 멀미를 해서 버스를 못 타요. 그런데 남편이 운전하는 차는 참 잘 타요. 타자마자 양말 벗고 발도 올려놓고 등도 뒤로 하고 잠도 푹 잘 자고요. 비 오는 날 차 타는 걸 좋아하는데 차 안에서 비 내리는 걸 보는 모습이 꼭 가을날 코스모스를 감상하는 소녀처럼 예뻐요. 생각만 해도 좋아요. 요즘은 아내의 친구들 덕분에 마음이 편해요. 저녁때는 대신 제가 집에 일찍 들어가죠.”
어머니가 남기신 유산
“살아왔던 모든 게 다…. 제가 어디에 글을 써도 은퇴 전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아요. 너무 힘이 들어서요. 다음에 그 얘기로 책 하나 내려고요.(웃음)”
옛이야기 좀 들려 달라고 하니 눈빛이 흔들렸다. 긴 웃음이 깊은 한숨으로 느껴졌다. 1940년대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GDP 60달러 시대. 없어도 너무 없던 시절이었다고 운을 뗐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뇌출혈로 돌아가셨어요. 제가 다섯 남매의 장남인데 아버지 장례 다 지낼 때까지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어요. 아버지가 굉장히 미웠어요. 갑자기 돌아가셨잖아요. 그때 딱 드는 생각이 ‘어떻게 하면 굶지 않나’였습니다. 가족들 굶기지 않으려고 안 해본 것이 없어요. 얼굴에 웃음기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자꾸 저더러 웃으래요. 싫어도 어머니 때문에 입이라도 웃었어요.”
얼굴을 찡그리면 어머니가 역정을 내셨다. 어머니 앞에서만이라도 웃어보려 노력했다.
“어머니가 슬퍼하는 게 싫었어요. 힘들어도 싫어도 짜증이 나도 무조건 웃었습니다. 그게 지금까지 습관이 됐고 긍정적인 사고로 이어진 겁니다.”
어머니는 한정수 동년기자에게 호 하나를 지어주셨다고 했다. 덕강(㥁姜)이었다.
“어머니가 너는 복이 오는 걸 원하지 말고 덕을 쌓고 살라며 지어주셨습니다. 그분 생각에는 제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지고 있습니다.”
한정수 동년기자랑 마주하고 얘기하다 보니 집중해서 보게 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왼쪽 뺨의 주름이다. 팔자주름이 깊게 패이면 사나워 보인다지만 왼쪽 팔자주름의 의미는 남다르다. 기꺼이 웃을 때 코의 왼쪽 근육을, 인위적으로 웃을 때는 오른쪽 근육을 사용해 웃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유심히 본다. 한정수 동년기자의 왼쪽 팔자주름은 길고 깊다. 오랜 세월 웃음을 잃지 않고 시대를 이겨내며 살아온 우리 세대 아버지의 얼굴이다. 문득 ‘미남 주름’이란 말이 생각났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려 노력했던 한정수 동년기자. 그의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검정고무신, 아이스께끼, 초가지붕, 푸세식 화장실…. 지금은 까마득한 시절의 우리나라 풍경을 오롯이 기억하는 사람.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한국을 방문한 스물한 살 청년은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어른을 공경하며 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나라가 무작정 좋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가서 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40대에 그 소원을 이뤘다. 그가 사는 동네에서는 ‘엉클 밥’으로 불리는,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 로버트 그라프(Robert Graff·70) 교수의 이야기다.
그라프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주말 나들이객들과 벌초 성묘객들이 몰고 나온 차들로 빼곡했다. 4시간여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쪽으로 들어서자 ‘엉클 밥’ 간판이 걸린 카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과 파란색 옷을 입은 2층 건물은 초록 논밭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무더위와 막 헤어지고 온 초가을 바람이 살랑대는 오후였다. 대전에 있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주말에만 강릉에 와 있다는 그는 카페테라스에서 중학생과 마주앉아 있었다.
“우리 동네에 사는 학생인데 제가 올라오는 날 영어를 가르쳐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배운 지 이제 일주일 됐는데 아주 잘하고 있어요. 인터뷰할 때 통역 좀 해보라 할까요?(웃음)”
그가 장난치듯 말하자 학생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안 그래도 평창올림픽 때 외국 관광객을 상대해야 하는 택시 기사들에게 무료로 영어 회화를 가르쳐 신문과 방송에도 소개됐던 그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2007년도에 아내 고향인 강릉으로 이사 왔어요. 평창올림픽 개최를 2년쯤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시청 공무원이 택시 기사분들께 영어 좀 가르쳐줄 수 있겠냐면서 도움을 요청해왔어요. 강릉 시민으로서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흔쾌히 수락했죠. 터미널이나 역에 내린 외국인들이 처음 상대하는 사람들은 택시 기사예요. 그분들이 강릉의 얼굴인 셈이죠. 그래서 영어로 하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회화 교실에서 공부를 시작한 뒤 기사분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동안은 외국인을 만나면 대화가 안 돼 태울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Hello, welcome to 강릉!’ 하면서 인사 몇 마디 나눌 정도는 됐다고들 말해요.”
마을 사랑방이 된 ‘엉클 밥’ 카페
영어 회화 교실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그의 카페에서 열린다. 여러 상황에 대비한 표현들을 배우는 시간이다. 자주 만나 공부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친해져서 이젠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 먹고 술도 한잔씩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카페를 연 지는 3년 정도 되어갑니다. 2층 집을 짓고 나서 1층을 우리 부부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주변에서 그러지 말고 커피도 한번 팔아보라 해서 시작했어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누구든 편하게 와서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커피가 팔리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카페 창문에 페인트마카로 크게 써놓은 글을 보여준다. ‘It’s not the coffee. It’s the people’. 아침에 일어나 카페에 내려올 때마다 한 번씩 쳐다보기 위해 써놨다는 글이란다. 들여다보니 커피보다는 사.람.에 방점이 찍혀 있다. 누구에게나 첫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시절이 있듯 강릉에서의 그의 삶도 그러해 보였다.
‘엉클 밥’은 그의 애칭.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밥 아저씨’라 부른다. 카페 이름도 ‘엉클 밥’으로 지은 걸 보면 자신의 애칭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가 대전에서 강의를 마치고 올라오는 주말에는 카페 주차장이 시끌벅적하다. 영어를 배우는 택시 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엉클 밥 카페는 어느새 동네 사랑방으로 바뀐다.
소가 밭 갈던 풍경이 그립다
젊은 시절, 그의 한국 사랑은 특별했다.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 나라가 마치 오래된 고향처럼 편안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였지만 헐벗고 가난한 모습보다는 아름다운 경치와 순박한 사람들의 얼굴이 더 많이 다가왔다. 특히 마을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한없는 평화를 느꼈다.
“농기계가 없어 소와 함께 밭을 갈던 농부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요. 농부는 힘들었겠지만 제게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른이 차에 오르면 자리를 양보하던 젊은이들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예절을 중시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한국 문화가 좋았어요. 제가 살던 미국에는 그렇게 깊고 오래된 문화가 없거든요.”
1년간 짧은 사병 생활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평화봉사단을 통해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처음에는 정부가 가라 해서 한국에 왔지만 그다음부터는 자발적으로, 제 의지로 왔어요. 더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고, 다시 가고 싶었어요. 방법을 고민하다가 평화봉사단을 생각해냈어요. 제대 후 대학교에 있던 평화봉사단을 찾아가 한국에 갈 기회가 있냐고 물었지요.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3개월 후에 그럴 계획이 있다 하더군요. 당장 단원 가입을 했죠.”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전라도 영광, 광주 지역에서 3년여 봉사활동을 했다. 한국말은 이때 많이 배웠다. 이제 막 일흔을 넘긴 그는 시간여행을 하듯 20대 시절로 돌아가더니 하숙집 이야기, 맥주 마시러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갔던 일, 어니언스·펄 시스터즈·김추자·서유석 등 가수 이름들을 줄줄 꿰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영광읍에서 공무원인 하숙생과 친하게 지냈어요. 가수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을 같이 불렀던 기억도 나네요. 어디서든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족들이 많았어요. 닮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물론 불편한 점도 있기는 했죠. 그때는 한국에 가정용 냉장고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맥주가 마시고 싶으면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가야 했어요. 거기는 제법 큰 냉장고가 있었거든요. 푸세식 화장실도 경험했지요. 냄새도 나고 낯설었지요. 그때 새마을운동도 한창이었는데 초가와 기와집이 없어져서 저는 너무 섭섭했어요.”
결혼, 그리고 귀화
그 후로도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MBA 과정을 마치고 은행에서 일하던 그는 휴가 때마다 자비를 들여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기업을 찾아다니며 한국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운 좋게 1994년 광주은행 IT 보안 업무를 맡아 들어왔다가 삼일회계법인에서 IT 매니지먼트 일을 담당하게 된다. 드디어 그의 바람대로 한국에서 직장을 얻어 살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소개로 아내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최화순(66) 씨는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하게 측은지심이 밀려왔다고 했다. 그 마음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질지는 당시엔 그녀도 몰랐을 터.
“남편 키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어요. 197cm였거든요. 그렇게나 큰 키에 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왠지 쓸쓸해 보였어요. 남편은 화가 나도 내색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주 작은 일에는 엄청 기뻐하고 크게 웃더라고요. 작은 것들을 참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저 사람이 좋았어요.”
이들 부부는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가끔 네 나라, 내 나라 하면서 부부싸움을 하기도 한단다.
“최근 남편이 TV를 보면서 요즘 왜 그렇게 먹는 프로그램이 많은지 모르겠다면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애국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비판하면 은근히 화가 나더군요. ‘하도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다, 그런 당신네 나라는 뭐가 그리 대단하냐’ 하면서 다툽니다. 제가 거의 일방적으로 떠들지만요.(웃음)”
그라프 교수가 한국말이 유창하지 못해 애를 먹은 적도 있다.
“어느 날 몸이 아프다 해서 약국에 가서 소염제를 사 먹으라 했는데 수면제를 받아가지고 온 거예요. 기겁을 했지요. 남편은 분명 소염제라 말했을 거예요.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약사가 잘못 알아들었던 것 같아요. 그 후로 큰일 나겠다 싶어서 꼭 함께 다녔어요. 지금은 혼자 다녀도 문제없지만요.”
그는 현재 대전에 위치한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에서 IT 관련 비즈니스 강의를 하고 있다. 강릉에선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이지만 학교에 가면 학생들에게 “여기 놀러 왔냐, 배수의 진을 치고 공부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한다.
2007년 삼일회계법인에서 퇴직한 후 한국인으로 귀화한 그에게 그동안 향수병은 없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이란 심리적 거리의 문제이지 물리적 거리에서 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는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마치 오래 떠나 있었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던 그 기분을 강릉에서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 사람들은 늘 바쁘고 옷, 백화점, 돈, 물건에 관심이 많은데 강릉 분위기는 좀 다릅니다. 도시에서는 길에서 서로 눈 마주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여기서는 인사도 하고 손도 잡습니다. 오래전 한국의 시골에서 봤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들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면 즐겁게 쉬다 가셔요.” 이웃에 대한 관심과 나눔. 이것이 엉클 밥, 로버트 그라프 교수가 한국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가 이웃과 만들어내는 공명(共鳴)이 더 멀리 울려 퍼질 것 같다.
노후를 어디서 보낼 것인가. 죽기 전까지 어디서 살 것인가는 시니어의 마음 한쪽을 무겁게 만드는, 그러나 외면할 수 없는 주제다. 특히 치매나 중풍 같은 질환으로 몸을 가눌 수 없게 되면 더욱 문제다. 한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인보호)시설은 죽음을 기다리는 시설에 불과하다”고 단정 지을 정도다. 안타깝게도 일반 사회적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후를 맡길, 안심하고 갈 수 있는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은 없는 것일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새 연재는 이 질문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첫 번째 주자가 된 플로렌스 너싱홈의 문을 두드렸다.
자유로를 따라 파주시 탄현면을 찾아 달린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러 두 번이나 왕복한 길이다. 웬만해선 붐비지 않는 그 길을 따라 서울에서 30분 정도 달려가면 ‘대동리’라 쓰인 출구가 나온다. 달랑 대동리라고만 쓰인 표지판이 다소 생경하다. 거기서부터 중앙선도 없는 국도를 5분 정도 달리면 드디어 플로렌스 너싱홈이 나타난다.
집에서 생활하는 것처럼 설계된 구조
요양원을 둘러보니 구조가 독특하다. 병실과 식당, 공용시설 등 용도별로 구분되어 있는 병원과는 다르게 어느 곳을 봐도 거실 모양을 한 공간이 눈에 띈다. 사방이 비슷한 풍경이다. 이예선 원장은 유니트(Unit) 단위로 조성된 설계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외 너싱홈도 이렇게 유니트 개념을 도입한 곳이 많아요. 1개 유니트에 11~12명 정도가 머무는데요, 어르신들의 침실과 함께 거실과 화장실, 목욕탕이 세트로 구성돼 있습니다. 작은 한 집에서 소수의 어르신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며 거주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작은 집 여러 개를 합친 전체 시설을 운영하는 개념이죠.”
단일 유니트에는 전담 요양보호사들이 배치돼 함께 생활하고, 각 유니트는 성별이나 질환 종류, 개인별 성향 등이 고려돼 환자들이 배정된다. 혈관성 치매 환자들은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장기요양보험 4~5등급 정도의 가벼운 치매 환자들은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할 수 있을 만큼 일상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구성된 플로렌스 너싱홈의 정원은 총 49명. 2015년 증축 결과 설치 허가 면적 기준으로만 계산하면 56명까지 인가가 가능했지만, 동선이나 생활의 편의성 등을 위해 정원을 축소했다는 것이 이 원장의 설명이다.
삶의 끝이 아닌 연장으로
플로렌스 너싱홈이 지향하는 환자들의 생활은 ‘그동안 살아온 삶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정의된다. 각자 인생을 살면서 갖게 된 기호나 취향이 최대한 반영되도록 노력한다. 이를 위해 개개인에게 맞는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자녀에게도 숨겨온 ‘까막눈’을 고치고 싶어 하는 환자에게는 글쓰기나 산수 숙제를 내어주기도 하고, 마비된 모습을 남에게 숨기고 싶은 어르신에겐 태블릿 PC를 통해 침실에서 할 수 있는 전래동화 보기 같은 프로그램이 제공된다.
평생 가사를 해온 사람이 많기에 요리 재료를 다듬고 있으면 잔소리하는 어르신도 많다. “예전 기억이 되살아나 손질법을 알려주시기도 한다”고 전담 영양사는 웃으며 얘기한다. 매번 어르신들의 손을 빌리면 노동으로 비춰질 수 있어 계절별로 날짜를 잡아 실컷 만져보게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김장 속을 버무리거나, 잔뜩 받아온 콩을 다 같이 둘러앉아 손질하는 식이다.
이외에 다 같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수시로 운영된다. 실버체조나 레크리에이션이 운영되기도 하고 분기별로는 가까운 관광지에 나들이를 가거나 공연을 관람하기도 한다.
종교 역시 ‘살아온 삶’의 범주에 들어간다. 인근 종교 시설에서 찾아와 어르신들을 위한 예배나 미사를 시설 내에서 진행하기도 한다. 또 주변 공공기관이나 기업에서 찾아오는 봉사활동도 플로렌스 너싱홈의 주요 이벤트 중 하나다. 관계자는 “지나친 포교 목적이 아니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말한다.
환자 건강 위해 농장도 운영
음식은 환자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변화가 많지 않은 생활이다 보니, 식사가 오락 중 하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플로렌스 너싱홈이 자랑하는 부분 중 하나가 여기 있다. 바로 식재료에 관한 것. 플로렌스 너싱홈은 신선한 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인근 지역에 자체 농장을 마련했다. 원하는 농작물을 직접 재배하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다 쓰는 식이다. 지역 주민들과의 교류가 많다 보니, 주변 농가에서 농작물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있다. “필요하면 언제든 뽑아가라”는 농민들도 있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음식을 만들고 나서 대접하는 데도 원칙이 있다. 반드시 어떤 음식을 드시고 있는지 원형을 보여드리고 그 자리에서 먹기 좋게 요양보호사가 잘라주며 식사를 돕는다.
“예전에 어떤 곳에서 아예 음식을 모두 갈아 내오는 경우를 봤어요. 아무리 환자에게 유동식이 좋다지만 섭식이 가능한 어르신들에게는 어떤 음식을 드시고 계시는지, 무슨 맛인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요리한 그대로의 음식을을 식탁에 올립니다.”
환자의 건강을 위해 명지병원과 촉탁계약을 맺고, 물리치료실도 별도로 운영 중이다. 물리치료실 방문을 나들이 삼아 즐기는 어르신들에게는 단골 놀이 장소다. 몸이 불편한 환자에게는 물리치료사가 직접 찾아간다. 이러한 맞춤형 환자 관리는 운영 전반에 적용된다. 이곳에서 요양보호사들과 사회복지사, 물리치료사, 간호사 모두가 매일 아침 환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효과가 좋았던 방법들도 공유한다.
이런 운영 방식에 대해 이 원장은 “1000명의 어르신이 계시면 1000가지의 방법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불편함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일이나 여러 증상에 대한 대응은 환자마다의 특징이나 삶의 배경 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풀 수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배회를 하시거나 용변을 만지거나 소변 냄새가 심한 분은 모두 원인이 있어요. 배회와 용변을 만지는 원인을 찾아내야 해요. 소변 냄새로 수분섭취량을 감지하며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저희의 일입니다.”
이 원장은 환자 가족들을 위한 조언으로 “그래도 가족만 한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가족과 떨어져 살다 보면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가능하면 자주 면회 오시는 것이 좋아요. 건강에도 도움이 되고요. 대부분 가족이 해체될 위기에서 견디다 오시잖아요. 어쩔 수 없이 맡기셨다 해도, 엄마 표정이 편해졌다, 건강해졌다는 말 해주실 때가 가장 보람 있어요.”
요양병원과 요양원 뭐가 다를까?
법적으로 요양병원과 요양원은 완전히 다른 개념의 기관이다. 따르는 법도 다르다. 요양병원은 의료법을, 요양원은 노인복지법을 따른다. 적용보험도 국민건강보험과 노인장기요양보험으로 구분돼 재원도 다르다. 요양병원은 의료인이 설립하고 상주해야 하는 반면, 요양원은 의료인이 아니어도 설립 가능하다. 요양병원에 머물러야 하는 대상은 만성질환자 혹은 회복이 필요한 대상으로, 치매 등 장기요양등급을 받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요양원과 구분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특히 이런 시설의 주요 수요자인 치매 환자의 경우 대부분 만성질환을 갖고 있어 조건을 모두 충족해, 양쪽 중 선택해 갈 수 있다. 현장에서 “결국 가족이 기관을 선택하는 조건은 가격과 입지”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요양병원은 보험으로 식비 지원이 되지만 간병비 부담이 큰 반면, 요양원은 요양비를 80~90% 보험으로 지원받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월 비용은 요양병원이 다소 높다. 요양원마다 가격 차이가 있는 것은 대부분 식비와 비급여 항목 때문이다.
이예선 원장의 요양원 선택법 "부모님 모실 때 두 가지만 기억하세요.”
치매실태조사를 위해 전국의 요양병원, 요양원을 다녀본 이예선 원장의 요양원 선택법은 두 가지.
1 직원의 표정을 살펴라 안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등 직원을 살펴보면 그 기관의 분위기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너무 조용하거나 딱딱하면 사무적으로 대할 가능성이 높다.
2 냄새를 맡아보자 청결 기준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냄새로 확인하는 것이 확실하다. 악취가 나지 않으려면 청소도 자주 해야 하고 환기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역한 냄새 없이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청결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뜻.
이전과 달리 요즘은 소위 적당한 시기라는 게 따로 없는 세상이다. 일 년 사시사철 계절과 상관없이 무엇이든 대부분 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떠날 수 있다. 특히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여건을 가진 사람 중에 시니어가 있다. 은퇴 후의 시간적 여유로움과 공허함을 채워줄 가장 좋은 도구가 여행이다. 그동안 치열하게 사느라 미루어 두었던 세상 나들이를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즈음이 된 것이다.
연휴를 앞둔 언젠가 남편은 틈만 나면 인터넷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는 정년퇴직 후 재취업하여 아직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찾아온 연휴 기회를 유용하게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지금껏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유여행을 제법 즐겼다. 남편은 특유의 치밀한 계획성으로 최대의 유익을 얻을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막상 나는 여행이 그리 내키지 않았다. 유난히 그 무렵 피치 못할 일정이 몇 가지 있어서 고민하던 차였다. 기대에 부풀어 준비하는 그에게 이런 내 사정을 털어놨다. 그리고 요즘 트렌드인 이른바 ‘혼행’(혼자 여행)이란 걸 권해보았다. 그러자 별로 오래 생각하지도 않고 그는 쉽게 혼행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가 혼자서도 여행을 잘 해낼 사람이란 건 익히 알고 있지만 이렇게 흔쾌히 응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혼자 하는 여행으로 바뀌면서 그는 한결 가볍게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부부가 함께했던 여행은 인내심이 부족한 나 때문에 이동의 불편함이나 숙식 문제 등으로 경비가 더 나가게 마련인데, 이젠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숙소나 교통편도 본인만 편하면 되니 부담 없이 일정을 짜고 예약했다. 그렇게 그는 단출하게 꾸린 가방 하나 달랑 들고 떠났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했으면 간단한 연락이라도 할 사람인데 하루 이틀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생존은 알고 지냅시다.’ 참다못해 내가 먼저 문자를 보냈다. 그제야 전화가 왔다. 혼자서 어찌나 신나게 다니는지 연락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날 이후 남편이 숙제처럼 여행지에서 보내오는 멋진 풍광의 사진이 밀려들었고, 현지인들과 섞여 어울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통화할 때면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혼행의 즐거움을 생생히 전해왔다. 아이들과 함께했던 가족여행이나 부부만의 자유여행에 이미 익숙한 그는 혼자 하는 여행 역시 문제없이 잘 즐기고 돌아왔다. 게다가 낭비 없이 보낸 초저가 알뜰 여행이었다. 혼자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층 밝아진 남편의 안색에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동행자와 의견을 조율하거나 인솔해야 하는 부담을 털고 홀가분하게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진즉에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일찍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도록 배려할 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1인 가구와 고령화 사회 영향으로 다양한 1인 문화 콘텐츠가 등장하고 있다. 날마다 진화하는 나 홀로 문화 중에 액티브 시니어들의 활력 넘치는 여행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효과를 높이려면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독립적인 시간 활용을 위해 홀로서기의 자신감을 키워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노년의 문화는 매사 스스로 해결하며 살아나가려는 의지가 변수일 것이다.
2018년 5월 14일, 곤지암에 있는 화담숲으로 그이와 함께 봄나들이를 갔다. 2016년 10월에 블로거협회 벗들과 가을 단풍을 즐긴 곳이다. 그때 단풍이 너무 고와서 봄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었다.
동백꽃은 으레 탐스런 모양의 붉은색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처음 본 쪽동백나무는 꽃송이가 작으며 하얀색이었다. 필자가 좋아하는 은방울꽃은 오월에 피어난다. 혹시나 하고 초록 이파리를 살펴보니 귀여운 얼굴을 살포시 내밀고 있다. 야호! 정말 반가웠다. 타원형의 선명한 초록색 잎에 만든 듯이 예쁜 하얀색 꽃이 얼마나 앙증맞은지 모른다. 무리 져서 피어난 하얀 조팝나무도 환상적이었다. 너무 아름다워 필자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화담숲은 나무 데크로 완만하게 산책길을 만들어놓았다. 어린이나 다리 힘이 부족한 시니어도 안전하고 여유롭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가족, 연인 등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장소가 아닌가 싶다.
오래전 한택식물원에 갔을 때였다 바위틈에 피어 있는 체리 빛 패랭이꽃이 얼마나 예쁘던지 눈물이 다 났다. 그런데 3년 전에 갔을 때는 나무에 벌레들이 많아서 벤치에 앉기가 곤란할 정도였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 느껴져 실망스러웠다.
"살아있는 것들은 늘 관심과 사랑을 주며 보살펴야만 한다."
아마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의 삶에 영원한 것은 없다. 결국은 자금력이다. 다른 곳에 편의성, 볼거리 등 더 좋은 환경의 식물원이 생기니 경쟁력이 떨어져서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졌을 것이다.
화담숲은 자연과 기획한 사람의 작가정신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오밀조밀 만들어진 여러 곳의 폭포와 계곡에서 쉬지 않고 물이 흘렀다. 청아한 물소리가 계속 이어지며 귀와 마음을 씻어줬다.
사람만 이름이 있는 게 아니라 꽃들도 제각각 이름이 있다. 뭉뚱그려 꽃이라고 하지 말고 제 이름을 불러보자.
쪽동백나무, 하늘으아리, 매발톱꽃, 금낭화, 미쓰 김 라일락 등 토종꽃들과 은방울꽃, 조팝나무, 아이리스, 양달개비, 마거리트 등 서양의 다채로운 꽃들이 고유의 빛깔과 향내를 내뿜고 있었다. 나무에 달려 있는 꽃만 꽃이더냐! 떨어져 누운 꽃잎 또한 예술이었다.
화담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의미로 구본무 회장의 아호다. 화담숲의 운영비는 연간 150억 원이나 드는데 입장 수입은 80여 억 원정도라서 매년 적자운영을 하고 있지만 구본무 회장은 사회공헌 차원에서 운영한다고 했다. 화담숲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구 회장의 철학이 녹아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화담숲의 기획력이 돋보인 것은 옛것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풍경 때문이다. 출구 쪽에 조성해놓은 야트막한 기와담장과 장독대가 정겨웠다. 화담숲 중간쯤에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물레방아는 옛이야기를 도란도란 들려주는 듯싶었다.몇십 년이 된 분재에 영양제를 주는 방식도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튼실한 자금력으로 소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 게 눈에 보였다. 걷는 내내 '정말 좋은 곳이다.' '조경을 정말 잘해놓았구나'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 와아! 은방울꽃이다!"
"정말 너무너무 예쁘다!"
꽃들에게 반해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필자에게 그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꼭 유치원 애 같아!"
기꺼이 전속 사진기사가 되어준 자상한 그이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힐링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가족 나들이하기 좋은 5월, 이달의 추천 전시·공연·행사를 소개한다.
제20회 담양대나무축제
일정 5월 2~7일 장소 죽녹원 및 관방제림 일원
대한민국 대나무 주산지로 알려진 전라남도 담양. 가족 나들이를 계획 중이라면 담양을 주목해보자. 이곳에서는 매년 대나무 심는 날(죽취일)의 의미를 되살리고자 축제를 연다. 바로 올해로 20회를 맞이한 담양대나무축제. 6일간 진행되는 이번 축제에서는 대나무를 주제로 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대나무 활쏘기, 대나무 뗏목타기, 대나무 액세서리 만들기, 대나무 부채 만들기 등)이 운영된다.
Weather: 오늘,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일정 5월 3일~10월 28일 장소 디뮤지엄
디뮤지엄이 2018년 첫 전시를 공개한다.
날씨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총 3개의 챕터(‘날씨가 말을 걸다’, ‘날씨와 대화하다’, ‘날씨를 기억하다’)로 구성된다. 25명의 아티스트가 참여해 햇살, 눈, 비, 안개, 뇌우와 같은 날씨에 담긴 이야기를 사진, 영상, 사운드, 설치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으로 재조명했다. ‘오늘,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당신의 날씨에 관한 기억을 새로 추억해보자.
레슬러
개봉 5월 9일 장르 드라마, 코미디 감독 김대웅 출연 유해진, 나문희, 성동일, 김민재 등
포스터에 한 손에는 금메달을, 다른 한 손에는 프라이팬을 든 배우 유해진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보인다. 전직 레슬러에서 프로 살림꾼으로 변신한 살림 9단이자 아들 바보인 유해진은 영화 ‘레슬러’에서 ‘귀보’ 역할을 맡았다. 그가 예기치 않은 사건들과 엮이기 시작하면서 평범했던 일상이 유쾌하게 바뀌는 이야기를 그렸다. 또 나문희, 김민재, 성동일 등 세대를 어우르는 베테랑 연기파 배우들이 만나 호흡을 맞췄다.
얼굴도둑
일정 5월 11일~6월 3일 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출연 성여진, 신안진, 주인영, 황선화 등
연극 ‘얼굴도둑’은 개인의 자아와 내면을 비추는 ‘얼굴’이라는 소재를 사용해 진실한 감정을 놓치며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트립 투 스페인
개봉 5월 17일 장르 드라마, 코미디 감독 마이클 윈터바텀 출연 스티브 쿠건, 롭 브라이든 등
열정의 나라 영화 ‘트립 투 스페인’은 산탄데르에서 말라가까지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며 음식과 인생, 사랑에 대한 수다를 펼치는 미식 여행기다. 영국의 대표 배우 스티브 쿠건과 롭 브라이든이 출연해 유쾌한 입담을 보여준다.
시카고
일정 5월 22일~8월 5일 장소 디큐브아트센터 출연 최정원, 박칼린, 남경주, 아이비 등
한국에서의 공연은 열네 번째. 최정원, 아이비, 남경주, 박칼린 등이 참여해 어느 때보다 강력한 라인업으로 돌아왔다. 섹시하고 뜨거운 뮤지컬을 찾고 있다면 농염한 재즈 선율과 관능적인 춤이 매력적인 ‘시카고’를 추천한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일명 ‘버킷리스트(bucket list)ʼ라고 한다. 한 번쯤은 들어보고, 한 번쯤은 이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천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버킷리스트를 어떻게 작성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실행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해결하기 위해 매달 버킷리스트 항목 한 가지를 골라 실천 방법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그에 앞서 서베이를 통해 시니어가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여행, 취미, 관계·가족, 일·성취, 보람, 도전 등 총 7가지 주제로 나눠 알아봤다.
서베이 대상 브라보 동년기자단,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 수강생, 낭랑18세 시니어 치어리더팀 등 50세 이상 남녀 140명(50대 61명, 60대 53명, 70대 이상 26명)
서베이 방법 주제별 버킷리스트 예시 항목 15가지 중 선택(중복 선택 가능) 및 그 외 항목이 있는 경우 별도로 작성
◇브라보 버킷리스트 상위 20위 목록
7가지 주제 중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여행’이다. 상당수 시니어가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제주 올레길 투어’ 등 제주 여행과 관련한 버킷리스트를 희망하고 있었다. “쉽게 이룰 수 있으니까”, “외국어 부담 없이 여행하고 싶어서” 등이 대표적인 이유다.
그밖에 혼자 여행 떠나기(27),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기(25), 캠핑카/크루즈 여행하기(18), 해외에서 크리스마스 보내기(9) 등
운동이나 레포츠 등 몸을 쓰고 활동적인 취미보다는 배움, 글쓰기, 책 읽기, 전시회 관람 등 문화적, 정서적 활동을 원하는 이가 많았다. 아직 특별한 취미를 찾지 못해 ‘새로운 취미 갖기’(24)를 버킷리스트로 선택한 이도 적지 않았다.
그밖에 텃밭 가꾸기(21), 그림 관련 취미 갖기(19), 수영 배우기(16), 취미 동호회 가입(14), 수화 배우기(6) 등
가족을 향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항목들이 상위권에 올랐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거나 애인 같은 친구를 만드는 등 새로운 관계 확장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휴대전화번호를 정리하거나 불편했던 관계를 해소하는 등 관계 정리에 관한 항목들도 눈에 띈다.
그밖에 외국인 친구 사귀기(21), 7명 용서하기(17), 휴대전화번호부 정리하기(15), 첫사랑에게 편지 쓰기(7) 등
제2직업을 향한 욕구와 더불어 전문 분야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포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펴내고, 강연, 전시회를 여는 등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연륜을 통해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는 경향이다.
그밖에 귀농하기(15), 창업하기(12), 10년 후부터는 일 안 하고 놀기(8), 자격증 10개 따기(8) 등
버킷리스트 서베이 전체 항목 중에서 ‘재능기부’가 1위에 올랐다. 단순히 봉사활동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살린 사회적 활동에 관심을 두는 모습이다.
그밖에 장기기증 신청하기(16), 아프리카 봉사활동 가기(15), 봉사활동 1000시간 채우기(13), 유기견 돌보기(6) 등
건강하고 즐거운 일상을 추구하는 웰빙(well being)을 넘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 등 웰다잉(well dying)에 대한 욕구가 높아졌다. 유언장 작성 등 웰다잉 관련 항목이 상위권에 올랐다.
그밖에 드레스 입고 파티하기(17), 세컨드하우스 짓기(14), 레스토랑에서 고급 코스요리 먹기(13), 주식·펀드 투자하기(12)
아직 버킷리스트가 없는 이들이 가장 빠르게 실행하고 이룰 수 있는 항목 중 하나가 바로 ‘버킷리스트 만들기’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순간 이미 한 가지 항목은 해낸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공모전 참가하기(14), 파격적으로 염색하기(13), 무인도에서 살아보기(7), 타투(문신) 해보기(6)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위한 7가지 방법
도움말 박창수 작가
하나, 원대한 목표를 먼저 정하라 ‘여행’이라는 주제를 가지고도 목표는 유럽 배낭여행부터 서울 나들이까지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도 돈이나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을 먼저 정해두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의 경우 오랜 시간 머물게 되면 그만큼의 비용과 체력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는 하루아침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 여행 자금을 위해 적금을 든다거나 평소 걷기운동을 해서 건강을 유지하는 등의 세부적인 목표들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 귀농이나 창업 등 오래 준비해야 할 목록도 마찬가지다. 장기간 실천할 원대한 목표를 먼저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리스트를 차례로 적어나가자.
둘, 작은 목표는 매년 갱신하라 큰 목표가 담긴 버킷리스트와 작은 목표를 써놓은 버킷리스트를 따로 마련하고, 작은 목표 리스트는 매년 갱신한다. 원대한 목표만 적어놓고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의욕도 저하되고, 실천 의지도 약해진다. 한 해, 한 달 정도 투자해 부담 없이 이룰 수 있는 목표를 작성하자. 작은 목표들을 달성해나가며 얻은 자신감은 큰 목표를 이루는 데 긍정적 에너지로 작용한다.
셋, 유행에 편승하지 마라 버킷리스트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뤄가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너도나도 원하는 목표나 유행에 따라 버킷리스트를 꾸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신이 정말 뭘 원하는지, 어떤 것을 해야 만족도가 높을지 등을 깊이 생각해보고 진정 나만을 위한 목록들을 채워가는 것이 중요하다.
넷, 남의 눈치 보지 마라 돈이 많이 든다거나 스스로 주책없어 보이는 행동이라 여기고 가족이나 친구들 눈치를 보면서 버킷리스트를 고민하는 이들이 있다. 또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남에게 보였을 때 더 그럴싸하고 훌륭해 보이는 일들을 적곤 한다. 이른바 체면치레 때문에 시니어들의 버킷리스트를 보면 여행, 공부, 취미, 봉사 등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물론 좋은 목표이지만, 그중에 한두 가지만이라도 나만의 개성과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것을 적어보면 어떨까?
다섯, 크게 쓰고 소문을 내라 자기 꿈을 소문내는 것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혼자서 마음속에만 담아두고 차일피일 미루는 것보다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기분 좋은 속박(?)을 느끼는 편이 낫다.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게끔 선언을 하거나 큰 종이에 적어 서재나 화장대 등에 붙여 자주 인식하는 것도 효과적이다. 타인은 물론 스스로와의 약속 이행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진다.
여섯, 1+1을 생각하라 나를 위한 버킷리스트이지만, 그것이 사회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예를 들어, ‘외국어 배우기’와 같은 단순한 목표를 뛰어넘어 ‘외국어를 배워 어려운 아이들에게 방과 후 재능기부하기’ 등 이웃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방법까지 생각해본다면 더욱 뜻깊은 버킷리스트가 될 것이다.
일곱, 버킷리스트에는 점수가 없다 목표로 정한 버킷리스트를 꼭 다 이루지 못하더라도 상처받지 말자. 물론 그것을 이뤄내기 위해 노력을 했을 경우에 말이다. 버킷리스트는 숙제나 시험처럼 누군가에게 검사받고 평가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족과 즐거움을 위해 시작한 일인 만큼 부담 갖거나 서두르지 말고 목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길 바란다. 무엇을 이뤘느냐보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발걸음이 더 소중하고 아름답다.
※독자제보 브라보 버킷리스트 랭킹 20위 안에 해당하는 버킷리스트에 도전해 이뤄내신 분들을 찾습니다. 제보할 이야기가 있으신 분은 bravo@etoday.co.kr로 접수 부탁드립니다.
대동강 얼음도 풀린다는 우수 절기도 지나고 개구리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도 흘렀다. 제주도를 비롯한 남녘에서의 봄꽃 소식도 겨우내 얼었던 가슴을 녹이는 듯하다. 한파로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이 어느덧 물러나고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움틈의 계절이 조금씩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 겨우내 추위에 움츠렸던 나무와 풀뿌리는 봄을 알리는 절기에 입김을 쏘이며 세상을 나들이할 준비를 한다. 봄이 오는 길목이다. 겨우내 얼었던 산골짝 얼음 사이로 졸졸 흘러나오는 물줄기 소리에도 봄이 밴다. 꽁꽁 얼었던 농수로가 녹아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물위에 동그라미 그리며 오리 떼가 모여 조찬회를 즐긴다. 눈 녹은 낙엽 덤불을 헤집고 사랑을 부르는 장끼의 정겨운 울음에도 봄은 묻어난다. 알게 모르게 서서히 봄이 다가옴이다. 우리는 대체로 나뭇잎이나 풀의 새싹이 연둣빛으로 고개를 내밀 때 봄을 느낀다. 봄의 상징, 새싹이 그렇게 보인다. 과연 봄은 연둣빛으로 시작될까? 아니면 또 다른 빛깔로 시작을 알릴까? 어떤 빛깔로 다가올까?
얼었던 대지가 녹을 즈음이면 산야의 나무 색깔이 확연하지는 않아도 무언 지 모를 변화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그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변화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아침 산책길로 택한 주변의 나지막한 산을 오르고 내리며 유심히 살펴본다. 앙상한 가지가지마다 색감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움틈을 미리 알려주는 신호가 있음이다. 처럼 어떤 큰 변화는 여럿의 작은 변화의 징조 끝에 다가온다. 계절의 바뀜도 그렇지 않을까? 어느 순간에 확 바뀌지 않는다. 작은 변화들이 서서히 이어져 나타난다. 대체로 초록의 새싹 돋음에서 봄을 느낀다. 봄의 시작은 새싹의 초록 기운일까? 필자는 봄의 시작은 초록이 아닌 검은 기운임을 느낀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느껴지는 빛깔은 분명 검은 빛이다.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보아도 분명 검은 색조를 띈다. 나무 둥치들을 보면 완연히 그렇다.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산 벚꽃 나무 등 대부분이 검은 색조를 보인다.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다시 바라본다. 산불이 났던 산처럼 검게 보이지 않는가? 스카이라인에 선을 긋는 나뭇가지는 불탄 흔적처럼 보인다. 실루엣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나 검은 색감이 바탕을 이룬다. 언제 저곳에 산불이 났었나 하고 여길 정도로 검은색을 드러낸다. 늘 푸르다는 소나무의 침엽도 검은 색에 가깝다. 봄은 한 해의 시작이고 사계절의 출발점이다.
시작은 검은색으로 나타나나 보다. 산 정상에 올라 산 아래 널따란 들녘을 바라본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늑한 대지 또한 검은빛으로 눈에 다가온다. 씨앗을 품은 땅도 잉태의 색깔, 검정으로 변하고 있다. 봄을 맞는 땅의 기운인지 모른다. 지나간 여름, 가을, 겨울을 되돌려 생각해 본다. 여름철과 가을의 대지 그리고 겨울, 해동하는 요즈음의 땅의 색조는 분명 다르다. 그 땅은 그 땅임이 분명한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흙의 색감이 조금씩 다르다. 봄이 오는 길목에는 유난히 검게 보인다. "펄 벅" 여사의 "대지"에도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태동의 색은 분명 검은색인 듯하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꽤 오래전에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이 떠오른다. 큰 형이 장가를 가고 한집에 살게 되었다. 예전의 대가족 제도다. 1년쯤 지났을 때 형수의 얼굴을 유심히 보시던 어머니께서 밝은 표정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 형수의 얼굴이 검은 기가 도는 걸 보니 손주가 생길 모양이다” 어머니 말씀대로 형수는 조카를 가졌었다. 인간에게도 잉태의 알림은 검은빛이다. 임신이 가능한 나이에 이르는 처녀의 피부도 검은 색조를 띈다. 아이를 가진 아내의 얼굴이 다소 검게 변함을 느껴 본 적이 없는가? 유심히 관찰한 경험이 있다면 분명 느꼈지 싶다. 검게 변함은 태동을 알리는 신호다. 귀중한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다. 한밤중보다도 날 새는 새벽녘이 더 어둡다. 같은 이치다. 새로운 날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여서 그렇다.
눈을 들어 다시한번 앞산을 본다. 봄의 기운을 안은 나무들 검게 보인다. 눈을 들어 먼 들판을 바라본다. 검푸른 대지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금세 아지랑이 피어오를 듯하다. 뒷산을 오르며 내려 본 나무 나무들, 검은 기운 터질 듯하니 멀지 않아 연둣빛 새싹이 돋겠네. 봄은 검은빛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