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치매는 우리에게도 현실이 됐다. 문재인 정부가 ‘치매국가책임제’를 실현하기 위해 2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한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을 예측할 수 있는 좋은 사례를 곁에 두고 있다. 바로 일본이다.
치매 환자인 어머니를 모셨던 A씨는 지난 2012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서울 종로의 상가 건물 소유주였던 어머니에게 A씨의 삼촌 B씨가 접근해, 사후에 재산을 모두 자신이 맡는다는 위임장과 유언장을 받아낸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A씨는 법원의 상속재산처분금지가처분신청을 받아냈지만, B씨는 법원의 결정 직전에 건물을 급히 팔아버렸다.
결국 소송을 벌인 끝에 2015년 법원은 치매로 법률적 의미와 효과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들을 배제하고 동생에게 모든 재산의 관리 처분 권한을 준 위임장은 무효라며, 건물을 산 매수인에게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말소하라고 판결했다.
유언자 의사 정상 여부 판정
이런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 민법에선 금치산 또는 한정치산 선고, 성년후견 심판 등의 제도로 법률 행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모든 성인은 기본적으로 의사능력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속과 같은 법률 행위와 관련해 치매 같은 질환으로 인해 의사능력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주장하는 자가 입증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사람에게도 현실적인 고민이 될 수 있다. 치매가 없거나 사소한 건망증이 나타나는 초기 치매의 경우 일상생활에는 장애가 없지만 병력이 법적 다툼의 소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언을 남겨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이다.
일본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일본의 메디컬리서치라는 회사는 최근 ‘의사능력감정(意思能力鑑定)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유언 작성 전 작성자의 뇌 대사 기능을 아밀로이드 PET-CT 등의 장비를 이용한 진단과 정신과 전문의의 면담을 통해 의사능력의 유무를 감정하는 서비스다.
회사 측은 “일본은 치매환자 1300만 명 시대가 도래했고, 치매로 인한 상속 분쟁이 2014년 1만2577건에 달했다”며 “치매환자라도 유언장을 작성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의사능력감정을 통해 의사능력이 인정되면 분쟁의 소지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직 국내에서는 분쟁이 발생한 이후에야 의사능력에 대한 의학적 견해를 묻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종합병원 신경과 전문의는 “법원에서 법적 분쟁으로 인해 소견서 작성을 요청받는 일이 왕왕 있다”며 “의학적으로 의사능력을 감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법적으로 첨예한 경우 소견서 작성이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정앤파트너스의 의사 출신 성용배 변호사는 “국내에서도 유언장 작성자가 자발적으로 인지능력과 관련한 진료나 감정을 받고, 진료기록, 소견서 등 그 근거를 남기는 것은 고려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이는 의사능력의 존부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문제제기의 소지를 불식시킬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환자 편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치매환자를 위한 일본 최초의 원격진료 서비스도 얼마 전 시작됐다. 준텐도(順天堂)대학교병원은 지난 7월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위한 원격진료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는 IBM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운영되며, 환자나 보호자는 아이패드를 통해 병원과 치료 정보를 주고받게 된다.
병원 측은 “환자의 내원에 필요한 신체적,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가족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환자를 돕는 간병인을 통한 정보도 의사가 참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멀리 떨어져 있는 환자에게 효율적인 진료 서비스 제공과 함께 지역 병원과의 연계도 쉬워진다”고 설명했다. 또 병원 측은 원격진료가 활성화돼 자료가 축적되면 치매환자의 빅데이터 분석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1996년 서울대학교병원이 원격치매센터를 설립해 일찌감치 원격진료 서비스에 대한 시도가 있었다. 이어 정부의 원격진료 시범사업을 통해 수년간 의료 인프라가 부족한 지자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돼왔다. 그러나 원격진료를 ‘정보통신기술 활용의료’로 명칭을 바꾸고 대상도 축소해, 보건복지부가 발의한 의료법 개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과거 족보나 문헌들을 조사해보면 고려시대(918~1392년) 임금 34명의 평균수명은 42.3세, 조선시대(1392~1910년) 임금 27명의 평균수명은 46.1세로 나타난다. 왕들의 수명은 40세 전후에 불과했던 셈이다.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장수했던 임금은 21대 영조로,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을 뛰어넘는 83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의 장수 비결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필자는 시골에서 홀로 생활하시던 외조모가 몇 년 전 향년 92세로 굴곡 많은 생을 마감하시는 모습을 보며 100세 시대가 멀지 않았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 만에 100세 시대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들린다. 일반적으로 100세 시대란 사망 빈도가 가장 높은 연령, 즉 ‘최빈사망연령’이 90세가 넘는 경우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대략 2020년경이면 최빈사망연령이 90세가 넘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최근의 의료기술 발달 속도와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을 고려할 때 5070세대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살 확률이 높다고 봐야 한다.
5070세대는 경제활동을 활발히 하는 동안에도 자산 축적에 관심이 많았다. 즉 은퇴설계를 할 때도 수익률과 재테크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제는 축적된 재산을 유지하고 보전하는 일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동안 열심히 저축하고 모아온 자산 등이 예상하지 못한 일로 한순간에 없어지거나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위험관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미 우리 코앞으로 다가온 100세 시대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위험과 우발적으로 생기는 위험을 관리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앞으로 5070세대가 부딪칠 수 있는 대표적 위험 3가지를 살펴보고 구체적인 대응 방안을 모색해보자.
의료비 리스크
보장자산을 사망에서 노후 의료비로 재편
우리나라의 100세 이상 인구는 몇 명 정도 될까? 2015년 기준 통계청에 따르면 3159명으로 여성이 2731명, 남성이 428명으로 여성이 6배 정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행정자치부 조사에서는 100세 이상 인구를 17만562명으로 집계하고 있다. 1만4000명 정도 차이가 나는 이유는 뭘까? 행정자치부는 주민등록 기준으로 말소 여부로 판단하는 반면 통계청은 인구센서스 전수조사를 통해 파악하는 조사 방법의 차이 때문으로 보인다. 필자는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더 생겼다. 과연 차이가 나는 1만4000여 명의 100세 어르신들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대부분은 거동의 불편과 질병 등을 이유로 병원이나 요양병원에 입원치료 중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해 생명보험협회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건강수명, 즉 전체 평균수명(82.4세)에서 질병이나 부상으로 고통받는 기간을 제외하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기간이 76.4세라고 발표한 바 있다. WHO(세계보건기구)에서는 2014년 기준 우리나라 사람의 건강수명을 73.2세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짧게는 6년, 길게는 10년 정도 병치레를 하다 사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노후에는 질병이라는 달갑지 않은 친구를 맞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노후 질병이 재무적인 측면에서 특히 위험한 이유는 일정 연령이 되면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오래 살수록 그 위험의 정도가 급증하며, 질병의 정도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노후에 발생하는 질병은 자연스런 현상이란 점에서 건강관리만 잘하면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겠지만, 완벽한 예방이 쉽지 않고 한 번 발병하면 치료비가 만만치 않다는 문제가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담처럼 노후에 발생되는 치료비는 가족에게 큰 부담이다. 건강보험공단(2015)의 조사에서처럼 연령이 증가할수록 1인당 연간 의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1인당 생애 총의료비가 65세 이후에 절반 이상 발생하는 것은 노후 질병으로 인한 의료비 부담이 5070 은퇴재무설계 관점에서 가장 큰 위험 요소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의료비 부담을 완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를 위해 먼저 국민건강보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5070세대가 은퇴 후 의료비가 1000만원 발생했다면 본인이 부담하는 금액은 얼마나 될까? 요양기관별로 다소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건강보험공단에서 63.4%(약 630만원)를 부담하고 나머지 36.6%(약 370만원)는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개인부담분을 분해하면 건강보험 급여 대상 의료비의 20.1%와 비급여 의료비 16.5%다.
국민건강보험제도의 구조를 감안할 때 5070세대의 노후의료비 부담은 건강보험 본인 부담금과 비급여 부분을 어떻게 준비했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5070세대가 2040 시절에는 가장의 유고에 대비한 사망보장 중심의 위험관리에 초점을 두었다면, 50대 이후에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노후의료비 보장 중심의 위험관리로 보장 자산을 새롭게 리모델링해야 한다. 2040 시절에 가입해두었던 보험을 노후의료비 보장 중심으로 재검토하고, 행여 중복보장으로 인해 과도한 보험료 지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분석해 웰스(wealth)가 아닌 헬스(health) 시대에 맞도록 재편할 필요가 있다.
자녀부양 리스크
현명한 노후준비는 ‘자녀의 경제적 독립’
대한민국의 5070세대가 늙은 염낭거미를 닮아가고 있다. 염낭거미는 독거미의 일종으로 새끼가 먹을 것이 없으면 새끼를 위해 제 살을 먹이로 주는 습성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 5070세대는 은퇴 후에도 성인이 된 자식 뒷바라지를 걱정하고 있다. 혹자는 자식뒷바라지가 100세 시대에 무슨 위험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았으면 자녀가 경제적으로 독립할 때까지 물심양면 지원하는 것은 인지상정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은퇴 이후 연금 외 변변한 수입원이 없는 상황에서 생물학적 성인자녀가 사회학적 성인자녀로 탈바꿈하지 못하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따른 심리적 고충은 물론 경제적 부담도 만만찮다는 점에서 엄청난 리스크가 아닐 수 없다.
경기침체에다 비혼(非婚)과 만혼(晩婚)이라는 사회적 현상까지 더해져 부모와 불편한 동거를 하는 성인자녀가 늘고 있다. 동거를 하지는 않더라도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성인자녀도 꽤 많다. 이는 선배 세대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고민이란 점에서 5070세대에겐 새로운 리스크라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대학졸업 후 취업을 못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 곁에 머무는 자녀를 ‘낀 세대’라는 의미의 ‘트윅스터(Twixter)’라 부른다. 캐나다에서는 직업을 구하러 이리저리 다니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에서 ‘부메랑키즈’, 영국에서는 부모 퇴직연금을 축낸다는 뜻에서 ‘키퍼스(KIPPERS: Kids in Parents Pockets Eroding Retirement Savings)’, 이탈리아에서는 모친이 해주는 음식에 집착한다는 의미의 맘모네(Mammone)라고 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학교 졸업 후 취업을 못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20~30대 젊은 층을 캥거루족, 취업을 했어도 경제적 독립을 못하고 부모에게 의존하는 30~40대를 신캥거루족이라고 칭한다.
이처럼 5070세대가 은퇴 이후 성인자녀를 부양하는 상황이 연출되면 이들의 노후준비 자산은 급속하게 줄어들게 된다. 자녀의 경제적 독립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노후준비 방법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자녀부양 리스크에 대한 통일된 대처 방법을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생각하면 실천할 수 있는 방안 두 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부양기간과 지원 범위를 자녀와 함께 정하는 것이다. 최근 육아정책연구소에서 20~50대 성인을 대상으로 “언제까지 자녀에게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하나?”라고 물어본 결과 응답자의 40.9%는 적어도 취업 전까지는 자녀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고 응답했다. 2008년에는 이 비중이 26.1%였던 점을 감안할 때 성인자녀의 부모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자녀의 경제적 미독립이 게으름 등 개인적 소양 탓보다는 사회경제적 구조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상황에서 자녀의 경제적 독립을 이끌어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경제적 지원 범위와 기간을 자녀와 합의하는 과정을 거쳐 합리적인 선에서 정하고, 독립을 이루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다 보면 자녀의 경제적 독립이 앞당겨지지 않을까.
둘째 소규모 청년창업이다. 취업이 어렵다 보니 소규모 청년창업이 늘어나고 있다. 청년창업의 경우 어느 정도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결국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능력이 된다면 한없이 지원하고 싶지만, 5070세대 대부분은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수년 전 은행에서 퇴직한 박씨(60)의 경우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땅과 아파트, 그리고 퇴직금이 전 재산이다. 그런데 명문대 졸업 후 몇 년째 취업을 하지 못하고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던 자녀가 어느 날 조심스럽게 창업자금을 요청하더란다. 지원을 해야 하나, 말려야 하나? 많은 고민 끝에 박씨는 구체적인 조건을 내걸고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자녀에게 사업계획서를 요청하고, 자금을 한꺼번에 지원하기보다는 순차적으로 지원하며, 아버지가 아닌 채권자로서 계약서까지 썼던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혀를 찰 수도 있으나, 이런 일일수록 냉정하게 대하는 게 정답에 가까운 차선책인 것 같다.
금융사기 위험
내 돈 지키는 5가지 행동지침
뉴스나 드라마를 통해 은퇴자들이 어이없게 금융사기를 당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드라마의 소재거리로 활용될 정도로 은퇴자들이 쉽게 금융사기 표적이 되는 이유는 뭘까? 주된 직장에서 물러난 은퇴자들은 비록 고정수입은 크게 줄어들었다 해도 퇴직금과 모아둔 유동자산이 다른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여기에다 금융시장의 변화에 둔감한 상황에서 줄어든 고정수입을 보충하고픈 조급한 마음에 고수익 상품에 대한 욕구가 커져 금융사기범의 미끼를 덥석 물 가능성이 높다.
미국 투자자교육재단에서는 금융사기를 당하기 쉬운 사람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다. ① 50대 후반의 기혼자, ② 자신의 판단과 금융 지식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 ③새로운 생각이나 판매 선전에 귀가 솔깃한 사람, ④ 최근에 건강 또는 금융상 어려움을 겪은 사람 등. 이 중에서 두 가지 이상에 해당되는 사람은 금융사기에 당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단 한 번이라도 금융사기를 당하게 되면 힘들게 모아온 자산을 다 잃을 수 있다. 아래에 금융사기 예방을 위한 5가지 행동지침을 소개한다.
첫째, ‘아는 사람인데 잘해주겠지, 전문가이니까 잘해주겠지’라는 생각을 버려라!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울 수 있다. 이들은 오히려 고객의 이익보다 금융기관이나 종사자의 이익을 우선할 수 있다.
둘째, 금융업에 종사하는 개인이 제공하는 보고서가 아닌 금융기관의 보고서를 받아라! 가끔 개인이 작성한, 고수익을 보장하는 보고서를 믿고 투자에 나섰다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고수익을 보장하는 약속 뒤에는 대부분 고객의 자금을 유용할 의도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초저금리 시대에는 고수익을 미끼로 두 자릿수 수익률을 제공하면서 호시탐탐 돈을 노리는 금융사기꾼이 주변에 널려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셋째, 배우자의 사망, 이혼소송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불현듯 다가오는 도움의 손길을 조심하자! 사람의 어려움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돈과 연관된 도움의 손길은 주변 사람과 충분히 상의해 결정해도 늦지 않다. 채근하는 사람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삶의 전환기나 시련기에는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결정해야 한다.
넷째, 장점만 있는 금융투자상품은 없다는 점을 명심하자!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처럼 금융투자상품에 투자할 때는 그 상품의 장단점을 충분히 파악한 후 투자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 마지막으로 금융사기꾼이 노리는 것은 높은 수익률에 쉽게 흔들리는 고객의 마음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고수익을 확정 보장하거나 마감임박이라면서 투자 권유를 종용하는 경우 금융사기를 의심해봐야 한다.
이번 부산 중장년 취업 아카데미 과정에서 ‘인생 2막’ 강의를 하면서 강의안을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지금까지 써 먹었던 강의 내용은 우리은행 고급관리자 용이었기 때문에 이번처럼 블루칼라 수강자들에게는 안 맞는 내용이 많았다. 은행 퇴직자들은 최소한 아파트 한 채는 있고 연금도 나오고 저축액도 꽤 되는 편이지만, 블루칼라들은 모아둔 재산도 변변치 않고 당장 수입을 만들어야할 처지들이었다. 연금도 아직 나이가 덜 되어 못 타거나 자격이 안 되어 연금을 아예 못 타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너무 돈돈 하지 마라”, “여유 있게 여가 생활을 즐기라”는 내용이 먹혀들 리 없었다.
우리은행 퇴직 예정자들도 5년 전에는 당장 수입이 끊긴다는 것에 초조한 눈빛이었으나 그간 사회적 학습효과 덕분인지 이젠 많이 여유로워 보였다. “초조해봤자 별 뾰족한 묘안도 없고 사실 모아둔 재산이면 밥은 굶지 않는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수강자의 대부분인 블루칼라들은 5년 전 은행 퇴직예정자들처럼 당장 수입이 없다는 사실에 초조한 빛이 보였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으니 밖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어렵다고 했다. 맞는 얘기이다. 한두 번 얻어먹었다면 이쪽에서도 한 번은 사야 하는데 마냥 얻어먹을 수만은 없다. 당당히 아내에게 용돈을 달라고 권했다. 평생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다 준 사람이므로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했다. 스스로 기가 죽어 그런 말을 못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했다. 먹는데 들어가는 돈은 사실 돌아가면서 돈을 내거나 나눠서 내면 그리 큰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안주 하나 놓고 소주나 막걸리 먹어봐야 일인당 1만원 꼴이다.
그래도 집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 없는 서러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집은 사둔 것이다. 그렇다면 주택연금을 신청하라고 했다. 집을 담보로 어느 정도의 돈을 매달 받게 되면 용돈 걱정은 크게 덜 수 있는 것이다. 집은 왜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나중에 자식들에게 상속해줘야 한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식들도 장성하면 제 밥벌이는 하게 되고 상속이 없어도 잘 살아간다. 자신이 노력해서 장만한 집이니 당연히 권리가 있다고 했다.
앞으로는 집값도 떨어질 것이고 사회적 연금도 선진국처럼 늘어나면 최소한 밥은 안 굶는다는 위안도 필요한 것 같다.
일단 아침에 집을 나서라고 했다. 구민회관 교양 강좌를 나가든, 자기 계발 프로그램에 나가든 무료 강좌가 많고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정보도 얻는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전문가가 되어 제2의 직업이 되기도 한다.
현역 때 벌던 수입에 비해 퇴직 후 버는 돈이 너무 약소하다며 취업을 꺼리는 사람들도 많다. 1억 원을 은행에 넣으면 일 년 이자가 200만 원 정도인데 한 달로 나누면 20만원이 안된다. 본인이 월 100만원 수입을 원한다면 은행에 5억 원 이상을 둬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퇴직 후 수입에서 한 달에 50만원을 준다고 해도 과거와 같은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현역 때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장래를 위해 저축도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회사에서도 돈을 꽤 준 것이다. 이제 그때와는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업체 임원 출신이지만 음식점 서빙을 하는 사람이나, 경찰 공무원으로 있다가 퇴직하고 건물이나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는 사람들의 예도 필요할 것 같다.
실패담도 중요하다. 강사들은 수강생들 앞에서 제 잘난 자랑이나 늘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면 강의 효과도 떨어지고 거리감만 생긴다.
우선 내가 전세로 살다가 자칫 전세금을 날릴 뻔 했다는 실화를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전세라니까 일단 비슷한 처지로 볼 것이다. 등기 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내가 계약한 집 주인이 소유권 이전 원인 무효 소송에서 져서 세입자들이 전부 쫓겨날 뻔 했던 얘기이다. 승소 요구 금액이 3억 원이라는 것을 알고 세입자들이 전세를 자가로 매입하고 그 차액으로 3억원을 맞춰 줘서 일이 잘 해결된 경우이다.
임원으로 모신다 해서 취업 했더니 인감도장으로 멋대로 장난해서 낭패를 보게 한 사례도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세무서에서 올바른 판단을 해서 해결되기는 했으나 약자는 어디서 어떻게 이용당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신이 실직자가 되었다고 아내가 돌변했다며 원망하는 경우도 많은 모양이다. 물론 원인 중 하나이겠지만, 마침 갱년기 호르몬 변화가 오면서 생기는 현상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겠다.
인생 이모작 강의는 적당히 시간만 때우려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수강생들에게 경험을 전수해주고 정보를 제공해줘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하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강의 내용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잡아 살려 나가게 한다면 큰 보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밤새 안녕하신지요?
오늘날 우후죽순 하늘로 뻗친 중계기가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이동통신사 기지국 중계기 전자파가 사람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24시간, 365일 그 꿈을 펼치며 인체에 해로운 물질을 마구 뿜어낸다. 물질문명의 발달 아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전자파는 발암 물질의 무색무취 유해성으로 서서히 국민 건강에 위협을 주고 있어 각별한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다.
흔히 사용하는 전자레인지도 전자파 노출로 위험하다고 한다. 단지 사용시간이 적고 옆으로 거리를 두고 피해 있으면 어느 정도는 안전하다고 한다. 그러나 중계기 전자파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을 때도 자신의 신체는 서서히 피폭되어 간다고 한다. 한국은 방방곡곡 어느 곳이나 LTE가 잘 터지고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잘 터지는 편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많이 유해 파를 얻어 맞고 있으며, 강력한 중계기 전자파가 온 나라를 뒤덮어 온통 건강을 뒤흔들고 있다.
필자는 올해 1월,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1000여 세대의 대 단지 새 아파트이다. 개인의 사정에 의해 입주시기가 늦어져 6개월간 빈집으로 남겨놓았다. 아파트는 맨 꼭대기 층으로 마지막 한 세대가 남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요즈음은 층간 소음 등의 문제로 선호도가 높은 만큼 꼭대기 층이 인기도 높았다. 처음으로 22층에 살아보니 모든 것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어느 날, 아파트 관리실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 아파트 주민이라는 어떤 부부가 와서 소동이 벌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관심을 가졌다. 다름 아닌 다른 동, 맨 꼭대기에 사는 주민이었다. 그들은 아파트 지붕 위 옥상에 설치되어있는 중계기 안테나를 철거해 달라는 것이다. 그 부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전자파의 위험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보니 남의 일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켜고 이것저것을 눌러댔다. 중계기에 관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다. 필자는 한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것들이 생소하기만 했다. 컴퓨터 안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정보들이 가득했다. 서서히 죽어만 가는 암 환자들을 연상케 했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소리 없이 인간 생명은 무서운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성큼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바로 필자의 아파트 지붕 위로도 2개의 통신사 기지국 안테나가 세 군데나 하늘로 뻗쳐있었다. 필자의 허락도 없이 아파트 전체를 거의 다 커버하고 있었다. 필자 침실 바로 위 천정 바닥에 잠자코 앉아 야무진 날개의 꿈을 활짝 펼치며 떡하고 설치되어 있다. 늦게 입주해 빈집이었던 필자의 집 지붕 위로 한 곳에 몰아 처박혀있었다. 그때부터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필자를 엄습해왔다. 신경이 예민한 탓이었는지 밤잠을 설치기 일수였다. 가족들도 뒤늦게 알고는 난리 법석이 났다.
전자파 피해라는 심각성 논란 속에, 이유 없는 잦은 두통이 찾아와 병원을 드나들었다. 관리실을 찾아가 옮겨달라며 하소연도 하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미 계약을 체결해 소정의 임대료를 받고 있는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관할 시청에 전화를 해 문의를 했다. 이동통신사 기지국에 대한 설치 제한이 사실상 전무하다며 특별한 규제 조치가 없다고 했다. 참으로 공무원들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법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통신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라는 것이다. 필자는 수차례에 걸쳐 양심적으로 옮겨줄 것을 부탁했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결국 책임자를 찾아 나섰다. 소송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강력하게 대응을 했다.
세차게 나가니 통신사가 조금씩 입장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SK, KT 두 통신사 5명의 직원이 친절하게 찾아와 합의를 요구해왔다. 위치를 조금만 바꿔서 옥탑 꼭대기로 옮기도록 해달라고 사정을 해왔다. 무조건 철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어쩔 수없이 조금 양보를 해서 결국 아파트 사이에 있는 옥탑으로 옮기게 됐다. 집안의 전자파 수치 점검도 친절하게 이루어졌다. 결국 6개월 만에 이루어진 거대한 통신사와의 정신적 싸움에서 이뤄낸 대단한 쾌거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필자는 그 후로 병원 문을 덜 찾게 되었다. 그러나 싸워서 이겨야만 했던 욕심만을 탐하는 맹목적 영리 사회가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처음부터 소수의 이익 추구와 악덕기업의 경쟁력으로 국민의 다수가 고통받는 세상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것 무시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사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현명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눈 뜬 장님의 세계는 건강하게 살아 남기가 힘든 현실이라는 것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언론인 출신 시인 유자효의 시에는 부모님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추석’, ‘가족’ 등의 일상 시에 젖어 있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유독 눈에 띈다. 거기에는 고난의 시대에 비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아버지 유육출 씨와 어머니 김순금 씨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특히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그의 아버지 유육출 씨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다.
“부위독급래”
대학교 4학년생 유자효에게 어느 날 전보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신속하게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내용. 상황을 살펴볼 틈도 없이 부랴부랴 짐을 꾸리던 찰나,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든다.
“모사망급래”
전보를 본 유자효의 가슴이 미어진다. 또 그 미어지는 가슴의 틈새로 피어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그 슬픔의 무게를 더 무겁게 했다. 46세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그의 어머니 김순금 씨. 그 나이에 돌아가신 것조차 오래 버텼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는 어머니에게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숨어서 울 뿐이었다.
유자효는 어머니의 죽음을 대속(代贖)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일가친척이 모두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1층에서 아버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어머니가 2층에서 홀로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친척들은 야단이 났습니다. 당장 초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죠. 당시 아버지도 중태에 빠졌기 때문에 환자를 집에 둔 채 초상을 치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척들이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저에게 연락을 했던 겁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아버지가 입원을 하게 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뇌혈관이 터졌던 아버지는 조금만 늦었더라도 사망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유자효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이미 어머니의 변고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감은 눈에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봤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강인하고 담대한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아버지의 성공신화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당시 부산 지역에서 소득세 납부 2위를 했어요. 건축업을 시작으로 청과물 회사까지 승승장구했던 것이죠. 담대하고 남자다운 아버지는 타고난 사업가였습니다.”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가문의 7대손이었던 아버지는 10대에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다. 양반의 집안이었지만, 7세 때 경남 삼천포로 이거한 후 곤궁했던 삶에 뾰족한 해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출을 한 후 유육출이 기회의 땅으로 삼은 장소는 바로 인천이었다. 거기에서 일본인 건설업자에게 일을 배우며 상당한 부를 축적해 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파릇파릇한 20대. 그렇게 건설업으로 승승장구를 할 때 찾아온 광복은 그의 사업에 날개를 달았다.
6·25전쟁도 그는 또 다른 기회로 삼아 청과물 회사를 차렸다. 경남 지역에서 오는 모든 청과물은 그 회사를 거쳐 부산 일대의 소비자들에게 공급됐다. 그렇게 청년 사업가 유육출은 어느새 부산의 소득세 납부 순위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성공해야 한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유육출은 그때 분명 미래가 장밋빛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첫 번째 시련이 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화마(火魔)가 일으킨 ‘재기’의 광기(狂氣)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청과물 사업장이 모두 잿더미가 됐습니다. 영주동에서 발화한 불은 남포동과 국제시장 일대를 휩쓸었고, 결국 중구 일대가 모두 폐허가 됐죠. 당시 보험 제도라는 게 없었던 터라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땅을 팔아 납품했던 화주들에게 보상했어요. 아버지 사업에 첫 제동이 걸린 순간이자, ‘재기’를 위한 광기에 사로잡힌 순간이었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유자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재기에 미친 사람’이었다. 광산업, 경마장, 극장, 간척사업 등 재기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결단에 있어서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브레이크는 없었다.
재기의 발판을 찾던 유육출이 경남 지역의 고령토 광산의 채굴권을 사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폭력배들의 기습과 협박에 결국 채굴권을 포기하고 만다. 그 고령토 광산의 소유는 결국 지역 연고가 있는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혼란의 시대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손을 댄 것은 경마장 사업. 그러나 이 역시 변변한 경주마가 아닌 조랑말로 운영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지역 최초의 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자랑스럽게 문을 열었지만, 구매한 영사기가 말썽이었다. 음향은 제대로 나오지 않고, 필름은 끊기기 일쑤. 첫 날부터 분노한 관객들의 환불 요구 소동에 휩싸이다 결국 얼마 못 가 문을 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타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덕도 간척사업이다. 분명 이 사업은 유육출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말이다.
그가 계획한 가덕도 간척 사업은 당시 국토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장면 정권의 국책과 맞는 일이었다. 제방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는 그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려놓았다.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에 가덕도 간척사업은 그저 조그마한 에피소드로 여겨졌고, 이것에 눈을 돌리는 정부인사는 전무했다. 그도 이 사업에 모든 것을 걸고, 공사를 진행해 왔던 터라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Go’할 것이냐 ‘Stop’을 할 것이냐는 기로에서 그는 과감히 ‘Go’를 선택했다. 자신의 모든 사재를 털어 가덕도에 투자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간척지는 메워지지 못했고, 재산은 모두 바닥이 났다.
“그렇게 빚더미에 앉게 됐죠. 소송이 빗발치고, 어머니는 빚쟁이들 앞에서 반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재기를 꿈꾸었어요. 이후에도 부산 산업전시회 개최를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니까요.”
◇ 나를 지탱해 주는 힘, 아버지
시인 유자효가 결혼을 하기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아버지를 두고 결혼을 하기엔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재혼. 마침 응암동 시장에서 교제를 하고 있던 사람이 있어 혼례를 치렀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이 하늘을 찔렀고, 불화가 가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자효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분과 헤어져 주십시오!”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았다. 일어나거라. 네가 먼저 죽겠구나.”
다음 날 어찌된 영문이지 유자효의 새어머니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평소에 그렇게 사납던 사람이 조용하게 떠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버지도 얼마나 헤어지기 괴로웠겠어요. 그런데 몸과 정신이 부실했던 상황에서도 그렇게 결심하고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젊은 저보다도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강인하고, 고통 속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했죠. 종교가 없는 제가 살아가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버지의 생애라는 저의 거울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죠.”
유자효는 아버지가 운명하는 날까지 자신을 배려해 돌아가셨다고 얘기한다. 장례를 치르기 좋은 1990년 맑은 가을에 하늘로 떠났으니 말이다.
지난 몇 해 동안 노환규(盧煥奎·53) 전 의협회장을 만날 땐 의료제도와 관련해 특종이 될 만한 거침없는 발언을 기대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주문을 던졌다. 오해도 많고 굴곡도 많은 그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듣고 싶다고 했다. 할 말은 다 하는 그이지만, 막상 본인의 속내를 꺼내 놓으려니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사무실 근처에서 가볍게 소주 한잔을 걸치고 가슴에 담아온 이야기를 시작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중학교 때 만난 첫사랑과 결혼해 말다툼 한 번 없이 약 30년의 세월을 지내왔다는 것이 믿기십니까? 제가 바로 산 증인입니다.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어요. 모든 걸 받아줬던 아내 덕분이죠.”
중학교 3학년생 노환규는 과외 그룹에서 한 소녀를 만난다. 원래는 친구가 좋아하던 여학생이어서 그 둘을 이어주려 했는데 결국 친구랑은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이 어느 순간 마음에 쏙 들게 됐다. 고 1때 결혼을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장기적인 구애에 들어갔다. 노환규는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고 그 여학생과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한다. 그리곤 1986년 졸업과 동시에 결혼에 골인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과외를 같이 하던 중학생들이 중년의 나이가 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부 금실이 좋은 것은 온전히 아내의 포용력 덕분입니다. 전 젊은 시절에 모든 결정을 순식간에,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곤 했어요. 교만했던 시절이었죠. 자기중심적인 인간, 그게 저였다고 생각해요. 제 아내가 아니었다면 부부싸움을 해도 수백 번 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결혼 전 계획했던 미국 이민을 갑자기 포기했던 일, 2시간 고민하고 세브란스병원에서 아주대병원으로 이직을 결정해 서울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가야했던 일, 교수직과 미국유학을 포기하고 비즈니스를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던 일. 쉽지 않은 결정이지만, 상의 없이 결정 후 아내에게 통보하곤 했던 그였다. 그런 그를 묵묵히 응원하며 살아온 그녀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 넓었다.
사망판정, 그래도 잘 자란 아들
아내의 임신소식에 깨가 쏟아지던 신혼 초기였는데 문제가 생겼다. 임신 5개월째, 아내의 배가 이상하게 오른쪽만 불러 왔다. 초음파 검사 결과, 자궁이 둘로 나뉜 ‘쌍각자궁’으로 판정됐다. 당시 흉부외과 인턴에 불과했던 노환규는 겁이 났다. 쌍각자궁은 아기에게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질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면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부인과 교수를 찾아갔지만 안정을 취하라는 말만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 화장실에서 양수가 터지고 몸 밖에 탯줄이 나와 있었다. 곧바로 응급실에 찾아갔지만, 결국 아이는 사망 판정을 받게 된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 말로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인턴 신분이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죠. 응급수술이 지체돼 태아가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던 교수는 뱃속에서 아이를 꺼내자마자 수술실을 떠났어요. 하지만 간호사가 사망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해 신생아 중환자실에 옮겼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뇌출혈도 판정받게 됐고 담당 교수는 포기를 권했습니다. 그때 인큐베이터의 산소 공급도 중단했습니다. 부모님은 장례까지 준비하고 계셨죠.”
그러나 사망 판정을 받았던 노환규의 아들은 걱정과는 달리 잘 컸다. 단지 걸음마가 다른 아이들보다 느렸을 뿐 건강하게 자랐다. 행운이었다. 아들은 이제 29세, 멋진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청년으로 자라났다.
의사가운 입은 채 의료사고를 말하다
아들이 사망 판정을 받았던 순간은 그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조금만 더 성실한 진료를 해줬으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의료사고에 대한 생각이 다른 의사들과는 달랐다. 같은 의사라고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숨기기만 한다면, 그게 의료의 신뢰 하락으로 이어질 테고 분명히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무서움을 몸소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의사총연합 대표로 일하던 2011년, 의사 가운을 입고 지방 모 대학병원 앞에서 의료사고 해명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감행한다.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항암제를 바꾸어 주사하는 바람에 사망한 아홉살 백혈병 환아 종현이 사건 때문이었다. 대한의사협회장이었을 때도 이 사건에 대해 당당하게 말했다. “그것은 의료사고입니다”라고.
“의료사고는 지금도 그렇지만, 의료계에서 다들 쉬쉬하는 부분이죠. 100% 막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양심을 저버린 대학병원 교수진의 조직적인 사실 은폐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검찰이 6개 대학병원에 종현이와 관련된 소견서와 의무기록을 달라고 했지만, 모두 거절한 상태였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당신은 문제의 일부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계속 남았죠. 제가 나서야만 했습니다. 의사 가운을 입고 말이죠. 그래서 지금도 저를 싫어하는 의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 방법이 옳다고 믿습니다.”
지난해 말 종현이법으로 불리는 ‘환자안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의사가 의료적 오류를 범했을 때 병원에 마련된 전담인력인 환자안전위원회에 ‘자율’ 보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의무보고와 이를 어길 경우 제재하는 내용은 빠진 상태다. 의료사고를 숨기기만 했던 분위기는 개선은 됐지만, 앞으로 갈 길은 멀다.
의료계의 ‘돈키호테’
의료계에서 노환규는 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선배 중심의 의료계에서, 그것도 의사회, 학회의 지지기반이 없는 인물이 2012년 5월 제37대 의사협회장이 된다. 한동안 의료계 메시아라고 칭해지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 돈키호테가 됐다. 결국 그는 임시 대의원총회에서 탄핵 당하고 만다. 106년 역사의 의사협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심경을 듣고 싶었다.
“불명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고 막을 수도 있었던 임시 대의원총회였습니다. 누구에게도 탄핵을 저지하기 위한 전화 한 통 하지 않았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저는 제가 탄핵됨으로 해서 협회의 대의원제도를 개혁하고 싶었습니다. 회원들이 뽑지 않은 250명의 대의원이 힘을 행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전략적으로 잘못된 부분(탄핵 후 소송을 통한 제기)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저처럼 특이한 케이스가 나타나서 판을 흔들어야 협회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1년 여의 시간이 지났고, 그의 목적이었던 대의원제도가 일부 바뀌었다. 올해 최초로 대의원들이 직선제를 통해서 선출됐기 때문이다. 그가 의협을 떠났어도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할 말을 할 수 있는, 그 뜻
그의 발언은 세다. 쉬쉬하지 말고 아예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자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전문의 평균 연봉은 9200만원인데, 세후로 따지면 600만원이 안 된다. 국민들은 의사 연봉이 3000만원이길 바라지만, 3000만원 받는 의사에게서 심장수술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방식의 차이겠지만, 솔직한 발언을 쏟아내 호불호가 갈리는 그는 그래도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가 할 말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이유는 좋은 아내와 든든한 아들이 버팀목이 돼 주고 있고, 부모님도 여전히 건강하신 상태고, 종합적인 행복지수가 높아서일 수도 있어요. 전 웃지 않으면 화났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 굉장히 행복한 사람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감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남들이 모른 척할 때, 할 말을 해야 하는 게 제 삶의 임무겠죠.(웃음)”
기자가 알아본 바로는 노환규 전 의협회장은 정치권에서 수차례 러브콜을 받은 바 있다. 그래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혹시 정치권으로 들어갈 의향이 있는지 넌지시 물어봤다. 답변은 간단했다. “가슴 뛰는 일, 따듯한 일을 하고 싶은데 정치는 그렇지 않잖아요.”
누구나 해보고 싶은 어렸을 적 장래희망을 다 해보고 있다. 의사, 변호사, 국회의원을 거쳐 최근에는 한국줄넘기총연맹 총재로 변신한 전현희씨. 그녀는 다양한 직함이나 명함에서 나오는 딱딱한 자세보다 소신 있게 길을 걷고 싶다는 소박한 웃음으로 본인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의사 가운을 내려놓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고시원과 독서실로 향했던 발걸음은 생각보다 가벼웠어요. 힘들었지만 즐거웠다고 말할게요. 어린 시절, 동경하던 꿈을 다시 찾기로 결정했으니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컸죠. 전 아무래도 쉽지 않은 도전을 즐기는 타입인 것 같아요.”
지금도 그렇지만, ‘-사’ 자가 붙은 전문직은 그 자체로도 경쟁력이 있다. 의사가 변호사를 준비하는 일,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녀가 사법고시를 본다고 했을 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이미 서른을 넘겼고 아이도 키우고 있었다. 남편 역시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어서 집안 생계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주변의 만류가 엄청났지만, 치과진료실보다 더 큰 세상에서 어렵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그녀를 사로잡는다.
그때마다 임제록(臨濟錄)의 글귀를 계속 되뇌기 시작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쉽게 풀이하면 ‘너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라’라는 뜻이다. 인생을 살면서 살아가는 건지, 아니면 살아지는 건지를 명확히 파악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찾고자 노력했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본인이 절실하게 원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온몸과 마음을 바쳐 최선을 다하는 것. 그 과정을 거치면 좋은 결과는 따라온다고 믿었어요.”
그녀의 도전은 1996년 38회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성과를 얻게 된다. 그래서 얻은 타이틀이 ‘국내 최초 의사 출신 변호사’. 이후에도 그녀의 도전은 계속된다.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들을 지켜라
2002년 가을, 연수원 딱지를 뗀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변호사 전현희에게 울산의 모 의대교수가 상담을 하러 온다. 에이즈 환자의 혈액이 혈우병치료제 제조에 사용됐고, 이 치료제를 투여 받은 혈우병 환자들이 에이즈에 집단으로 감염된 사건이었다. 훗날 전현희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 ‘혈우병 환자 에이즈 감염 무료 소송’의 시작이 됐다.
“에이즈 감염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을 억울하게 당하고 사회에서 소외되어 눈물을 훔치고 있을 환자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피해자 대부분이 어린아이였고, 부모들은 남들에게 소문이 날까 봐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죠. 눈물로 절규하는 10여 명의 환자들과 그 가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사연은 중학생 형이 에이즈에 감염됐고, 감염되지 않은 초등학생 동생이 한방에서 지내는데 이 사실을 알릴 수가 없어 걱정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부모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왜 이러한 고통이 찾아오는 것인지 끝까지 밝혀야겠다고 결심한다. 또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무료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다짐한다. 의학적 지식과 법률지식이 동시에 필요한 이 사건에 대한 사명감은 불타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에이즈는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질병이죠. 잘못된 상식과 오해들이 에이즈 환자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리곤 하니까요. 소송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환자들과 가족의 신상정보가 외부로 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어요. 비밀을 최대한 지키고 재판에 임했죠.”
초짜 변호사 의료소송으로 거물들과 맞서다
상대방 제약회사는 장관 출신 변호사와 유명 전관 출신 변호사들을 선임해 소송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하려고 했다. 당시 법조계 분위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를 이뤘다.
“연수원을 갓 졸업한 초짜 변호사였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내가 아니었죠. 오히려 투지가 생겼습니다. 환자와 가족들 총 63명의 원고들을 대리한 소송의 대장정이 시작됐습니다. 환자와 가족들은 소송 도중 절대로 노출시키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모든 소송과정은 전부 나 혼자의 일이었습니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집단 에이즈 감염 사안에 대한 역학조사와 유전자 검사를 해준다면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질병관리본부를 대상으로 1인시위도 해봤습니다.”
약 3년에 걸친 지루한 법정소송 공방을 통해 2005년 1심 소송이 시작됐고, 2011년 대법원에서 승소하기까지 이 치열한 싸움은 10년이나 계속됐다. 그 긴 시간을 버틴 그녀는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승소 소식을 듣던 날, 지난 10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졌어요. 눈물로 지새운 날들, 감염된 아이의 말똥말똥한 눈망울, 치열한 공방이 진행된 법정에서의 시간들. 감격으로 가슴이 벅차올랐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국회입성
“혈우병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불합리성에 울분을 갖게 됐고, 혼자 싸워나가다가 결국 내가 이러한 문제를 스스로 고쳐보고자 국회의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변호사 시절 제기한 소송이 국회의원이 되어서야 마무리 됐죠.”
10년에 걸친 기나긴 소송 중 그녀는 2008년 18대 국회의원(비례대표)으로 국회에 입성한다. 상임위는 전공을 살린 보건복지위원회.
2011년, 소송에 승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명처럼 적십자사에 대한 국정감사가 열렸다. 혈우병치료제로 인한 감염을 증명하고자 고군분투했던 위치에서 혈액 관리를 위한 제도적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입장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때 복지위 전현희 의원은 혈액제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약사의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위한 쓴소리를 내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회상해보면, 참 복잡한 감정이 들었던 것 같네요. 국감장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죠. 같은 사안을 두고, 너무도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제약회사와 싸우고, 정부와 부딪치던 제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국회의원의 입장에서 국정감사를 하고 있다는 것.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순수하게 정의감에 불타던 초심을 절대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국정감사 우수 국회의원’으로 4년 연속 선정됐고, 18대 국회의원으로서의 임기를 마무리 짓는다.
또 다른 시작, 줄넘기
“인터뷰도 마무리되는 것 같은데, 이제 제가 얼마나 줄넘기를 잘하는지 보여드릴까요?” 사무실 서랍에서 줄넘기를 꺼내든 그녀는 선뜻 밖으로 나가 줄넘기를 해보겠다고 한다. 그녀의 또 다른 직함, 한국줄넘기총연맹 총재. 그녀가 줄넘기 전파에 나섰다. 운동을 못할 것 같다는 기자의 질문에는 쌩쌩이(2단 뛰기) 솜씨로 답변을 대신했다.
2013~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저탄소친환경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때 줄넘기가 ‘탄소배출량’이 가장 적은 스포츠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녀는 줄넘기 예찬론자가 됐다. 그래서 전국에 퍼져 있는 줄넘기 지도자들과 단체를 통합한 한국줄넘기총연맹을 발족시켰다.
“알면 알수록 줄넘기는 정말 매력적인 운동이에요.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친환경 운동이기도 하죠. 줄넘기는 경기장을 따로 지을 필요가 없고, 운동을 하러 가기 위해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죠. 줄 하나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에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줄넘기의 매력에 빠져보시죠.”
사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들이 함께할 수 있는 운동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녀는 줄넘기가 세대의 격차로 벌어지는 소통 부재의 틈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목표를 갖고 움직이고 있었다.
“신중년의 활발한 활동이 기대대는 요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운동이 하나쯤 필요한데 줄넘기가 그런 역할을 해줄 거라고 믿어요. 살도 빼고, 스트레스도 빼는데 이만한 운동은 없다고 봐요.”
다 해본 그녀의 당당한 도전이 아름답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2년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다. 그래서 눈물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를 위해서 그녀는 대학생 딸과 함께 바람을 가르는 줄넘기처럼 오늘을 뛰어넘는다. 내일은 그녀에게 어떤 도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 어떤 도전을 그녀가 찾을지 궁금해진다.
※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하
오늘의 일진은 과로나 과음으로 건강을 해치기 쉬운 날이니 심신을 쉬어줌이 길하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니 혼자서 처리하지 말고 구원의 손실을 요청하라. 백지장도 맞들면 났다.
84년생 : 빨리 피는 꽃이 빨리 지는 것이니 차근차근히 해나가면 좋으리라.
72년생 : 기동성이 있어야 오는 재수를 잡을 수 있으니 속히 움직이라.
60년생 : 복권도 안 사고 당첨을 바라는 것보다 작은 투자를 해야 재수가 온다.
48년생 : 정신이 어지러워 안정이 안되니 어떤 일을 해결하려면 힘이 든다.
◇ 소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잘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 어떤 일이든지 잘 풀릴 것이다. 모든일은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하면된다는 일념으로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매진하라.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을 것이니 용기를 가지라.
85년생 : 올바른 정신만 가지면 안 되는 일이 없으니 잘 헤쳐 나가자.
73년생 : 금전 운도 길하고 좋은 소식도 접하니 마음 내키는 대로하라.
61년생 : 바닥에서 올라오니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힘껏 해보면 끝이 보인다.
49년생 : 명분이 있는 일이라면 이루어지는 운세이니 처리하고도 겸손하라.
◇ 호랑이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윗사람의 잘못이 보여도 험담하지 말고 존경하라. 내가갈 자리이니라. 발 없는 말이 천리에 이르게 되니 갖가지 군더기가 붙어 불리하게 될 괘다. 입을 무겁게하고 심중을 굳건히 할것이니 불만사가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대면하라.
86년생 :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운세라 즐거운 하루가 된다.
74년생 : 성급한 생각과 행동으로 될 일도 그르치는 수가 있으니 심사숙고하라.
62년생 : 앉아서 하는 고민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니 움직여 얻음이 가하리라
50년생 : 다소 활력소가 떨어지나 긴장을 풀지 않으면 헤쳐나갈 수 있다.
◇ 토끼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좋은 인연이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인데 옆에 두고도 못 알아본다. 공기가 항상 우리곁에있어 소중함을 모르듯 가까운 이의 고마움을 망각할우려가있다. 친한이와 가족간에 사랑을 돈독히 할 것이니 복이 안에서 비롯된다.
87년생 :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둘러보면 해결책이 나온다.
75년생 : 좋은 인연이 생기는 운세이니 평소에 멀리했든 사람을 찾아 보라.
63년생 : 이성으로 인한 망신살이 벋쳤으니 멀리함이 체통을 살리리라.
51년생 : 사업상 좋은 인연을 만나 주석을 가지게 되나 과음은 실수를 만든다.
◇ 용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혼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다수의 이익을 쫓는다면 재수가 대길하리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혼자의 힘으로 이루는 것보다 여럿이 힘을 모은 일에 이익이 많을 것이니 백지장도 맞들면 났다는 교훈 삼으라.
76년생 : 재운은 좋고 애정 문제가 풀리지 않으나 기다리면 좋아진다.
64년생 : 아무리 애를 태워도 안 되는 일은 자신의 종교에 공을 들여라.
52년생 : 오늘 하루는 쉬어감이라 집안 식구들과 함께 함이 길하리라.
40년생 : 수렁에 빠진 사람이 손을 내미니 잡아주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
◇ 뱀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세상을 좀더 넓게 보면 지금 어려운 일은 아무 것도 아니게 보인다. 현재의 곤고함이 지속될 것인냥 자책하지 말라. 더 많은 것을 느끼고 행할 것이니 지금보다 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음을 명심하라.
77년생 : 법에 저촉되는 일을 삼가라 관재 구설수가 크게 움직인다.
65년생 : 소송을 일으키는 운세이나 잘못하면 도리어 어려워지니 조심하라.
53년생 : 신수 좋은 운세이니 마음껏 움직여 보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
41년생 : 술밥간에 대접도 잘 받고 구경도 잘하는 운세이니 즐겁다.
◇ 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분주 다망하나 일이 끝나니 외롭고 쓸쓸한 것을 어찌하랴. 공연이 끝난 뒤 텅빈 개석을 보는 것과 같이 허망함이 찾아드니 내실을 기할것이다. 그리하면 공사다망해도 보람됨을 얻게 된다.
78년생 : 확실한 일도 다시 한번 더 챙겨보는 것이 하루를 편하게 한다.
66년생 : 정보망에 구멍이 생기니 집안 단속과 아랫사람 단속을 잘하라.
54년생 : 완벽하게 해둔 일이 보안문제로 기밀이 새나가니 미리 단속하라.
42년생 : 무슨 일이든지 늦추는 것이 좋고 늦게 재수가 보이니 오후에 결정하라.
◇ 양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평온한 마음이 일의 순서를 바로잡는 것이니 안정하면 다 이루어진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자중하여 마음을 가다듬을 것이니 일의 두서를 찾는 이보다 안정된 마음으로 일에 매진하라.
79년생 : 빈 주머니에 재수가 좋으니 쓸 만큼 들어오고 좋은 인연도 맺어진다.
67년생 : 흙에 묻힌 옥이 빛을 발하니 이제서야 나를 알아주니 큰일이 성사된다.
55년생 : 제일 먼저 할 일을 하나만 골라 밀어붙이면 성사되리라.
43년생 : 실물수가 보이니 잃어버리기 전에 중요한 물건을 잘 보관하라.
◇ 원숭이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여유를 가지고 하는일은 조금 잘못되어도 바로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성급하게 행하여 흉함이 있을 괘이니 자중하는 가운데 길이 유한다. 약간의 문제가 발생해도 차분히 실마리를 찾으라.
80년생 : 작은 일도 놓치지 말고 잘 처리해야 구설 수를 면한다.
68년생 : 구하는 자금은 친구가 도와주고 바라는 일은 귀인이 도운다.
56년생 : 관 재수가 보이니 안전운행하고 누구와 시비를 삼가라.
44년생 : 불편한 관계를 잘 정리하면 재수가 살아나 이득이 크다.
◇ 닭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사람들을 모아 모든 일이 풀리는 운세니 모여드는 사람에 신경 써라. 인간관계를 돈독히 할 것이니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상하의 결속이 좋으니 빨리 이루어진다.
81년생 : 주변 상황을 잘 읽으면 득이 되는 일이 많이 생긴다.
69년생 :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많은 것이 생기는 운이니 걷어붙이고 움직여라.
57년생 : 부하의 일로 책임질 상황이 생길 것이니 아랫사람 단속을 잘하라.
45년생 : 바라든 것은 아니라 서운한 생각은 드나 등용문이 열림이니 받아라.
◇ 개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나는 새가 소리를 남김이라 오름은 흉하고 내려오는 것은 길하다. 자만은 금물이니 화가 두렵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대할 것이니 상대로 하여금 나의 인격을 존경받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82년생 : 자세를 낮추면 좋은 소리 듣고 막혔든 일이 풀리는 운이다.
70년생 : 금전 운은 좋으니 겸손을 유지하면 현재의 어려운 일에서 빠져 나온다.
58년생 : 몸이 많이 고단한 운세이니 무리한 일은 다음으로 미루어라.
46년생 : 순간적인 잘못 결정에 상당한 갈등을 부르니 여유를 가지고 결정하라.
◇ 돼지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원만한 대인관계가 재수를 일으키는 것이니 공동 이익에 신경 써라. 독단적인 행보는 금물이니 운기가 좋지 못하다 협력하는 가운데 이가 발생하니 많은이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이다. 자만은 금물이다.
83년생 : 알맹이 없는 일에 힘만 드는 운세이니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라.
71년생 :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쪽으로 일을 열면 열 배의 이득이 있으리라.
59년생 : 오늘의 묘수는 허수이니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힘만 들어간다.
47년생 : 꿩 대신 닭이라 큰 것은 못 얻으나 작은 것은 들어오니 만족하라.
◇ 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하
오늘의 일진은 과로나 과음으로 건강을 해치기 쉬운 날이니 심신을 쉬어줌이 길하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니 혼자서 처리하지 말고 구원의 손실을 요청하라. 백지장도 맞들면 났다.
84년생 : 빨리 피는 꽃이 빨리 지는 것이니 차근차근히 해나가면 좋으리라.
72년생 : 기동성이 있어야 오는 재수를 잡을 수 있으니 속히 움직이라.
60년생 : 복권도 안 사고 당첨을 바라는 것보다 작은 투자를 해야 재수가 온다.
48년생 : 정신이 어지러워 안정이 안되니 어떤 일을 해결하려면 힘이 든다.
◇ 소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잘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면 어떤 일이든지 잘 풀릴 것이다. 모든일은 마음 먹기에 달렸으니 하면된다는 일념으로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매진하라.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을 것이니 용기를 가지라.
85년생 : 올바른 정신만 가지면 안 되는 일이 없으니 잘 헤쳐 나가자.
73년생 : 금전 운도 길하고 좋은 소식도 접하니 마음 내키는 대로하라.
61년생 : 바닥에서 올라오니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힘껏 해보면 끝이 보인다.
49년생 : 명분이 있는 일이라면 이루어지는 운세이니 처리하고도 겸손하라.
◇ 호랑이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윗사람의 잘못이 보여도 험담하지 말고 존경하라. 내가갈 자리이니라. 발 없는 말이 천리에 이르게 되니 갖가지 군더기가 붙어 불리하게 될 괘다. 입을 무겁게하고 심중을 굳건히 할것이니 불만사가 있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대면하라.
86년생 :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운세라 즐거운 하루가 된다.
74년생 : 성급한 생각과 행동으로 될 일도 그르치는 수가 있으니 심사숙고하라.
62년생 : 앉아서 하는 고민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니 움직여 얻음이 가하리라
50년생 : 다소 활력소가 떨어지나 긴장을 풀지 않으면 헤쳐나갈 수 있다.
◇ 토끼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좋은 인연이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인데 옆에 두고도 못 알아본다. 공기가 항상 우리곁에있어 소중함을 모르듯 가까운 이의 고마움을 망각할우려가있다. 친한이와 가족간에 사랑을 돈독히 할 것이니 복이 안에서 비롯된다.
87년생 :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둘러보면 해결책이 나온다.
75년생 : 좋은 인연이 생기는 운세이니 평소에 멀리했든 사람을 찾아 보라.
63년생 : 이성으로 인한 망신살이 벋쳤으니 멀리함이 체통을 살리리라.
51년생 : 사업상 좋은 인연을 만나 주석을 가지게 되나 과음은 실수를 만든다.
◇ 용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혼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다수의 이익을 쫓는다면 재수가 대길하리라.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혼자의 힘으로 이루는 것보다 여럿이 힘을 모은 일에 이익이 많을 것이니 백지장도 맞들면 났다는 교훈 삼으라.
76년생 : 재운은 좋고 애정 문제가 풀리지 않으나 기다리면 좋아진다.
64년생 : 아무리 애를 태워도 안 되는 일은 자신의 종교에 공을 들여라.
52년생 : 오늘 하루는 쉬어감이라 집안 식구들과 함께 함이 길하리라.
40년생 : 수렁에 빠진 사람이 손을 내미니 잡아주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
◇ 뱀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세상을 좀더 넓게 보면 지금 어려운 일은 아무 것도 아니게 보인다. 현재의 곤고함이 지속될 것인냥 자책하지 말라. 더 많은 것을 느끼고 행할 것이니 지금보다 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음을 명심하라.
77년생 : 법에 저촉되는 일을 삼가라 관재 구설수가 크게 움직인다.
65년생 : 소송을 일으키는 운세이나 잘못하면 도리어 어려워지니 조심하라.
53년생 : 신수 좋은 운세이니 마음껏 움직여 보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
41년생 : 술밥간에 대접도 잘 받고 구경도 잘하는 운세이니 즐겁다.
◇ 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분주 다망하나 일이 끝나니 외롭고 쓸쓸한 것을 어찌하랴. 공연이 끝난 뒤 텅빈 개석을 보는 것과 같이 허망함이 찾아드니 내실을 기할것이다. 그리하면 공사다망해도 보람됨을 얻게 된다.
78년생 : 확실한 일도 다시 한번 더 챙겨보는 것이 하루를 편하게 한다.
66년생 : 정보망에 구멍이 생기니 집안 단속과 아랫사람 단속을 잘하라.
54년생 : 완벽하게 해둔 일이 보안문제로 기밀이 새나가니 미리 단속하라.
42년생 : 무슨 일이든지 늦추는 것이 좋고 늦게 재수가 보이니 오후에 결정하라.
◇ 양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평온한 마음이 일의 순서를 바로잡는 것이니 안정하면 다 이루어진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자중하여 마음을 가다듬을 것이니 일의 두서를 찾는 이보다 안정된 마음으로 일에 매진하라.
79년생 : 빈 주머니에 재수가 좋으니 쓸 만큼 들어오고 좋은 인연도 맺어진다.
67년생 : 흙에 묻힌 옥이 빛을 발하니 이제서야 나를 알아주니 큰일이 성사된다.
55년생 : 제일 먼저 할 일을 하나만 골라 밀어붙이면 성사되리라.
43년생 : 실물수가 보이니 잃어버리기 전에 중요한 물건을 잘 보관하라.
◇ 원숭이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여유를 가지고 하는일은 조금 잘못되어도 바로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성급하게 행하여 흉함이 있을 괘이니 자중하는 가운데 길이 유한다. 약간의 문제가 발생해도 차분히 실마리를 찾으라.
80년생 : 작은 일도 놓치지 말고 잘 처리해야 구설 수를 면한다.
68년생 : 구하는 자금은 친구가 도와주고 바라는 일은 귀인이 도운다.
56년생 : 관 재수가 보이니 안전운행하고 누구와 시비를 삼가라.
44년생 : 불편한 관계를 잘 정리하면 재수가 살아나 이득이 크다.
◇ 닭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사람들을 모아 모든 일이 풀리는 운세니 모여드는 사람에 신경 써라. 인간관계를 돈독히 할 것이니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상하의 결속이 좋으니 빨리 이루어진다.
81년생 : 주변 상황을 잘 읽으면 득이 되는 일이 많이 생긴다.
69년생 :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많은 것이 생기는 운이니 걷어붙이고 움직여라.
57년생 : 부하의 일로 책임질 상황이 생길 것이니 아랫사람 단속을 잘하라.
45년생 : 바라든 것은 아니라 서운한 생각은 드나 등용문이 열림이니 받아라.
◇ 개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나는 새가 소리를 남김이라 오름은 흉하고 내려오는 것은 길하다. 자만은 금물이니 화가 두렵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대할 것이니 상대로 하여금 나의 인격을 존경받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82년생 : 자세를 낮추면 좋은 소리 듣고 막혔든 일이 풀리는 운이다.
70년생 : 금전 운은 좋으니 겸손을 유지하면 현재의 어려운 일에서 빠져 나온다.
58년생 : 몸이 많이 고단한 운세이니 무리한 일은 다음으로 미루어라.
46년생 : 순간적인 잘못 결정에 상당한 갈등을 부르니 여유를 가지고 결정하라.
◇ 돼지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원만한 대인관계가 재수를 일으키는 것이니 공동 이익에 신경 써라. 독단적인 행보는 금물이니 운기가 좋지 못하다 협력하는 가운데 이가 발생하니 많은이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이다. 자만은 금물이다.
83년생 : 알맹이 없는 일에 힘만 드는 운세이니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라.
71년생 :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쪽으로 일을 열면 열 배의 이득이 있으리라.
59년생 : 오늘의 묘수는 허수이니 머리를 굴리면 굴릴수록 힘만 들어간다.
47년생 : 꿩 대신 닭이라 큰 것은 못 얻으나 작은 것은 들어오니 만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