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광철 시인, 작가
나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나에게 자유를 주어라. 내 안에는 많은 길과 많은 말과 많은 단어들이 있다. 자유롭게 뛰어놀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목표에 익숙해져 있다. 목표가 없는 삶은 산 게 산 것이 아니라고 한다. 방향을 잃어버린 것을 방황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인생의 방향은 무엇이어야 할까. 무엇이 되기 위해서, 많은 것을 거머쥐기 위해서, 또는 지배하기 위해서일까. 인생에 목표를 두고 달려왔던 것들을 나열해 보면 단순하다. 대부분 돈 권력 명예 그리고 사랑과 성이 중요한 목표였고, 이것들에 ‘더 많이’라는 구체적 목표 외에는 별 것이 없다. 과연 인생 60을 살아온 지금도 그런가. 그렇다면 그 인생은 올바른 삶인가 묻고 싶다.
내 안에 있는 많은 것들 중에서 내가 진정으로 되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이 있을 수 있다. 그걸 꿈이라고 한다. 인생의 방향은 집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종교에서 말하는 꿈이 아니라 바람에도 걸리지 않는 순결한 내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이 진정한 꿈이다. 꿈을 향해 사는 것이 최선이다. 세상에 태어난 진정한 이유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일’
을 하는 것이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이 아닌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그 무엇을 찾아야 한다. 늦은 나이는 없다. 가장 이른 시간은 지금이고 가장 늦은 시간은 다음이다. 더 나쁜 결정이 있다. 포기다. 포기하는 순간 죽은 것이다. 60년 동안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면 인생에 대한 직무유기다.
행복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을 누리는 것이다.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은 영원한 갈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행복은 내 안에 있는 충만함을 누리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 행복이고, 내 안에 있는 따뜻함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긍정의 토대 위에 놓여 있는 온기다. 존재를 존재 그대로 받아들이고, 모자람과 넘침을 받아들이고, 살아 있음을 살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행복이 온다. 젊게 사는 방법은 육체가 젊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일에 도전하는 것이 젊게 사는 방법이다.
내 마음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꿈이라고 한다. 꿈을 나는 등대라고 말한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더라도 다시 바라보면 별처럼 빛나는 꿈, 꿈은 그래서 별이다. 인생의 영원한 등대가 꿈이다. 꿈을 향해 한 발씩 다가가는 것이 행복이다. 꿈은 노력하지 않고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꿈은 땀을 기다리고 있다. 꿈은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만든 것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나 자신에게. 꿈은 이루어서 자신에게 선물하는 것이 인생에 대한 예의라고.
나의 꿈은 글이었다. 글을 쓰고 싶었다. 꿈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버리고 글쓰기에 돌입했다. 글 중에서도 시가 쓰고 싶었다. 시는 굶어야 만날 수 있는 세계다. 산업사회에서 가장 변방에 있는 것이 시다. 산업사회는 인간을 도구로 보는 사회다.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인간을 본다. 생산과 관계되지 않은 것은 도태되는 사회가 산업사회다. 시인이 생산하는 시는 돈이 되지 못한다. 교환경제 속에서 시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없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은 재화를 생산하는 굴뚝과의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외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국인은 빛나는 존재다
그래서 바꾸었다. 시가 돈이 되지 않으니 돈이 되는 글이 필요했다. 내가 하고 싶은 글쓰기를 하면서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 두 접점에서 만난 것이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은 독특하고 희귀한 존재였다. 빛나는 존재였다. 파고들수록 깊고 넓은 세계가 있었다. 놀라운 세상이었다.
내가 한국인이어서 한국인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평균대에서 자랑스러운 것을 말하고 싶다. 한국인은 상상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루어 냈다. 먼저 세상에서 말을 정리한다는 것은 엄두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불특정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말은 만들어진다. 말은 상당 부분 비논리적이고, 비계획적이다. 하지만 한국어는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는 놀라운 언어다.
우리의 말은 중요하고 핵심적인 말은 한 글자로 되어 있다. 얼굴부터 살펴본다. 눈 코 귀 입. 몸으로 들어가 본다. 살 피 뼈 등 배. 자연으로 가면 한도 없다. 강 산 들 물 눈 비 풀 꽃 씨 그리고 땅이 있다. 땅이 한 글자라면 하늘도 한 글자가 되어야 한다. 하늘은 두 글자인 이유가 있다. 의미를 담기 위해서였다. 하늘은 한늘이다. ‘한’은 무한히 큰 공간을 말하는 우리말 한이다. ‘늘’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영원한 시간으로 우리말 늘이다. 무한공간인 ‘한’과 무한시간인 ‘늘’이 만나 ‘한늘’이 되었고 ‘ㄴ’이 탈락하여 하늘이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물 중에서도 우리와 가까운 것들은 한 글자로 되어있다. 호랑이 늑대 승냥이 고양이 같은 동물은 여러 글자로 되어 있지만 우리와 밀접한 가축은 모두 한 글자로 되어있다. 놀랍다. 원칙을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말이다. 가축의 이름을 본다. 소 말 양 닭 개. 모두 한 글자다. 돼지도 가축인데 두 글자다. 돼지는 옛말로는 ‘톳’ 또는 ‘’이라고 했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토시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돼지는 돼지새끼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지’는 동물의 새끼를 말한다. 강아지, 송아지 등이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말이다. 톳과 아지가 만나 톳아지가 도야지로, 도야지가 돼지로 되었다. 곡식도 마찬가지로 우리와 밀접한 곡물들은 보리를 제외한 쌀 벼 밀 콩 깨 등으로 대부분 한 글자다. 다음으로 중요한 말이 두 글자로 만들어져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한국인에게 잠재되어 있고, 또한 숨어 있다. 우리의 능력을 우리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인이다. 세계에서 드문 일이, 한국에서는 일상적인 것들이 예상 외로 많은 것에 놀랍다. 나물도 그러한 예 중 하나다. 어느 나라도 들이나 산에서 나는 야생 나무나 풀을 음식의 재료로 상식하는 민족은 없다. 약초로 사용하는 경우는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전 국민이 산이나 들에서 풀과 나뭇잎을 상시로 뜯어다가 밥상에 올리는 나라는 없다.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프리카나 가난한 나라에서 기아에 허덕이지만 나물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야생하는 나무와 풀들의 약리 성분과 독특한 맛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것을 말한다. 그만큼 한국인은 탐구심이 강하다. 끝까지 파고들려는 기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어이 달성하고 마는 강인함이 있다.
나는 한국인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인생은 우연이 만든다고 하는데, 어떤 우연은 준비되어 있어 인연과 연결고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인연은 우연을 가장해서 온다고 말한다. 내가 한국인을 만난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한국인을 만나면서 인생도 달라졌다. 한국인의 놀라운 세계가 나를 흥분시켰고, 나를 즐겁게 했다. 들어갈수록 오묘한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만 더 들어본다. 세계 어느 나라의 건국이념이 경계를 허물고 인간 모두를 이롭게 하자는 내용을 가진 나라가 있을까. 한마디로 없다. 다 같이 이롭게 잘 살자는 홍익인간은 인류공존의 기틀을 만드는 초석이 될 건국이념이다.
다시 뛴다, 인생은 육십부터
인생에 불을 질러라. 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다. 사람은 독립된 섬이다.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배가 있고, 새가 있지만 인간은 고립되어 있다. 고립을 피하여 배를 만들었지만 외롭다. 사람, 고립된 섬이다. 손을 잡고 있어도 너는 내가 될 수가 없다. 뜨거운 포옹을 하고 있어도 너는 너고, 나는 나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을 키운다.
그래서 나는 ‘삶아 난 너를 사랑한다’고 선언했다. 내 삶을 내가 사랑하지 않고서 남을 사랑하는 것은 기만임을 알았다. 나를 사랑한 후에 남을 사랑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를 사랑하는 일이 쉬운 듯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속성을 알아야 했다.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자기보호본능이 있다. 자기보호본능은 지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초적인 방어기제였다. 자기보호본능의 핵심이 이기심이다. 생명체의 기본 속성이 자기보호본능이고, 자기보호본능의 핵심이 이기심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 기둥처럼 서 있는 것이 이기심이라는 이론이다. 이기심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이기심이다. 경쟁을 통해서 더 많이 가져오는 것이 이기심이다. 경쟁과 싸움이 따른다. 하지만 속을 좀 더 깊이 들여다봤다. 이기심은 적을 만들지만 진정한 이기심은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타인이 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게 만들면 적이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진정한 이기심은 배려와 봉사였다.
또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전이 필요하다. 어떤 길을 가도 내 인생임을 자각하는 순간 두려움은 상당 부분 없어진다. 신에게 기도하는 손보다 실천하는 손이 더 아름답다고 우긴다. 모자라고 어리석은 나 자신을 데리고 사는 것이 힘들지만 인간의 위대함은 모자라고 어리석은 자신을 자각하고 완성을 향하여 한 발씩 나아간다는 데 있다. 욕망이 아름다우면 노래가 될 수가 있다. 꿈이 아름다우면 고난 속에서도 웃을 수 있다.
글쓰기를 인생의 과업으로 설정한 것이 고난으로 안내하고 있지만 즐겁게 가려 한다.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하는 만큼 장애를 도전으로 넘어보려 한다. 글쓰기와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 곤란을 안겨 주겠지만 웃으며 갈 것이다. 아름다운 욕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따뜻한 이기심은 배려와 봉사라고 했다. 우리는 진정한 이기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아름다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오늘도 계속되어야 한다.
>> 신광철 시인, 작가
한국문화콘텐츠 연구소장으로 한국, 한국인, 한민족의 근원과 문화유산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언제나 ‘긍정이’와 ‘웃음이‘를 반려동물처럼 데리고 다니세요”라고 당부하는 문학가이자 한국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다.
임이시어! 홍 경호! 홍 요셉! 형제님 이시어
오늘 이 화창한 초여름에, 따뜻한 체온을 함께 나눌 수 없는 먼 길로 영영 긴 작별을 해야만 하는 섭섭한 안타까움이, 쓰나미 해일처럼 우리 가슴 속을 덮어 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셨지만, 뿜어져 나오는 정기는 누구도 당할 수 없을 정도의 강인함과 올곧은 모습은, 주위 세상을 이끌어 가기에도 충분하시었고, 매사에 정도를 택하시어 빈틈없는 이승의 행로를 거룩하게 마무리하셨습니다.
허스키한 음성에 호탕한 웃음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둘러앉아 식사할 땐 음식을 그리 맛있게 드셨습니다. 밥억고 담소하며, 함께 즐겼던 시간이 서글프게 마음에 쌓여갑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청춘 시절엔 직업군인 가난을 달고 사셨습니다. 누구나 그즈음엔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겠지만 남다른 학구열과 집중력을 발휘해 병사에서 영관장교까지 진급하신 자수성가, 대기만성의 표본이셨습니다.
설악산 뒤편의 깊숙한 골짜기 속에서 30kg 모래 배낭을 메고 산악구보할 땐 전투복 등판에 배어나온 검붉은 핏자국을 개울가에서 같이 앉아 빨아 말리기도 하셨습니다. 한여름 한국전쟁 기념일 전후로 하는 혹서기 천리행군과, 12월 크리스마스를 앞에 두고 강행했던 혹한기 천리행군 때는 잰걸음으로 항상 선두에 나서 팀원을 이끄셨습니다. 고공낙하 훈련 시에는 팀원들의 무사 귀대를 기원하며 부인과 함께 성당에 나가서 기도를 드리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팀원들은 전우애를 알기 전에 이런 훈훈한 인간애를 함께하셨습니다.
주도면밀한 전략과 반복적인 철저한 훈련으로, 맡겨지는 임무수행에서도 탁월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짧게나마 같이했던 힘겹고 즐거웠던 시간, 이제 우리 가슴속 깊이 묻어두고, 끼리끼리 모여 옛일을 얘기할 때마다 한 장씩, 한 켜씩 꺼내 들춰보게 될 것입니다.
전역 후엔 인생의 선배로서뿐만 아니라 혈육으로 맺어진 친형제처럼, 계절마다 만나서 회포도 풀고 정도 쌓으며 이승에서의 여정을 함께했습니다. 퇴촌 산자락에 수십 개의 벌통을 줄 세워 앉혀 놓고 자나 깨나 그물망을 덮어쓰고 따가운 벌침에 쏘여가며, 향긋한 꿀맛을 주위의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셨습니다. 꿀맛보다 더 달콤한 인간의 정을 함께하셨음에 보내 드리는 우리 가슴이 더욱 메워 옵니다.
남들보다 더 투철한 사명감과 국가관을 갖고 조국의 국방에 30여 년 젊음을 받치는 동안, 부인께서는 묵묵히 다정한 손길과, 따뜻한 미소로 서방님의 손발이 되어 빛나지 않는 아름다운 내조자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하셨습지다. 가시는 임의 너무도 잘 어울리는 반쪽이셨습니다.
그 어떤 서방님이고 그 어떤 아버지셨는데, 이렇게 먼저 떠나보내야 하시다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가 신 알아줄 수 있겠으며, 어느 누가 보듬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제 젊고 건실한 두 아들과 함께 못다 이루신 임의 뜻을 받들어 기도드리며, 임이 떠나가신 커다란 공간을 메워 나가셔야 합니다. 속상하고, 처절하고, 불쌍하고, 안타까워 눈앞이 캄캄하시겠지만 앞으로는 저희가 함께할 것입니다. 조금만 힘을 더 내시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함께하는 지금 같은 친근한 모습을, 오늘 먼저 가시는 임은 기대하고 계실 겁니다.
평상시 혈육의 정을 나누시었던 일가친척분들 모두, 하느님의 자식인 성당의 형제ㆍ재매님들 모두, 그리고 임의 떠나시는 먼 길을 배웅하기 위하여 모여 있는 우리 모두가 두 손 모아 빕니다.
하늘나라 주님의 품에 따뜻하게 안기시어, 연년세세 평안하시고 편하신 곳에서 영면하시길 비옵니다.
삼가임의 명복을 빕니다.
언론인 출신 시인 유자효의 시에는 부모님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추석’, ‘가족’ 등의 일상 시에 젖어 있는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유독 눈에 띈다. 거기에는 고난의 시대에 비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아버지 유육출 씨와 어머니 김순금 씨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특히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가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준다. 그의 아버지 유육출 씨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다.
“부위독급래”
대학교 4학년생 유자효에게 어느 날 전보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위독하시니 신속하게 부산으로 내려오라는 내용. 상황을 살펴볼 틈도 없이 부랴부랴 짐을 꾸리던 찰나,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든다.
“모사망급래”
전보를 본 유자효의 가슴이 미어진다. 또 그 미어지는 가슴의 틈새로 피어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그 슬픔의 무게를 더 무겁게 했다. 46세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그의 어머니 김순금 씨. 그 나이에 돌아가신 것조차 오래 버텼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는 어머니에게 큰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고 그저 숨어서 울 뿐이었다.
유자효는 어머니의 죽음을 대속(代贖)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아버지를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일가친척이 모두 우리 집에 모였습니다. 1층에서 아버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어머니가 2층에서 홀로 운명하셨던 것입니다. 친척들은 야단이 났습니다. 당장 초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죠. 당시 아버지도 중태에 빠졌기 때문에 환자를 집에 둔 채 초상을 치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친척들이 아버지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저에게 연락을 했던 겁니다.”
결국 어머니가 돌아가심으로써 아버지가 입원을 하게 돼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뇌혈관이 터졌던 아버지는 조금만 늦었더라도 사망할 수 있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절대 하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가 있었지만, 유자효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병상에서 이미 어머니의 변고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버지의 감은 눈에서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봤기 때문이다. 그가 그토록 강인하고 담대한 아버지의 눈물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아버지의 성공신화
“제가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당시 부산 지역에서 소득세 납부 2위를 했어요. 건축업을 시작으로 청과물 회사까지 승승장구했던 것이죠. 담대하고 남자다운 아버지는 타고난 사업가였습니다.”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가문의 7대손이었던 아버지는 10대에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다. 양반의 집안이었지만, 7세 때 경남 삼천포로 이거한 후 곤궁했던 삶에 뾰족한 해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출을 한 후 유육출이 기회의 땅으로 삼은 장소는 바로 인천이었다. 거기에서 일본인 건설업자에게 일을 배우며 상당한 부를 축적해 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파릇파릇한 20대. 그렇게 건설업으로 승승장구를 할 때 찾아온 광복은 그의 사업에 날개를 달았다.
6·25전쟁도 그는 또 다른 기회로 삼아 청과물 회사를 차렸다. 경남 지역에서 오는 모든 청과물은 그 회사를 거쳐 부산 일대의 소비자들에게 공급됐다. 그렇게 청년 사업가 유육출은 어느새 부산의 소득세 납부 순위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성공해야 한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유육출은 그때 분명 미래가 장밋빛일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첫 번째 시련이 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화마(火魔)가 일으킨 ‘재기’의 광기(狂氣)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청과물 사업장이 모두 잿더미가 됐습니다. 영주동에서 발화한 불은 남포동과 국제시장 일대를 휩쓸었고, 결국 중구 일대가 모두 폐허가 됐죠. 당시 보험 제도라는 게 없었던 터라 어디서 보상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땅을 팔아 납품했던 화주들에게 보상했어요. 아버지 사업에 첫 제동이 걸린 순간이자, ‘재기’를 위한 광기에 사로잡힌 순간이었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유자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재기에 미친 사람’이었다. 광산업, 경마장, 극장, 간척사업 등 재기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던 아버지였다.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결단에 있어서 그것을 제어하기 위한 브레이크는 없었다.
재기의 발판을 찾던 유육출이 경남 지역의 고령토 광산의 채굴권을 사 개발에 착수했다. 그러나 폭력배들의 기습과 협박에 결국 채굴권을 포기하고 만다. 그 고령토 광산의 소유는 결국 지역 연고가 있는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혼란의 시대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손을 댄 것은 경마장 사업. 그러나 이 역시 변변한 경주마가 아닌 조랑말로 운영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극장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지역 최초의 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자랑스럽게 문을 열었지만, 구매한 영사기가 말썽이었다. 음향은 제대로 나오지 않고, 필름은 끊기기 일쑤. 첫 날부터 분노한 관객들의 환불 요구 소동에 휩싸이다 결국 얼마 못 가 문을 닫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업 실패는 다음 이야기를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타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가덕도 간척사업이다. 분명 이 사업은 유육출의 인생에서 가장 큰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인생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말이다.
그가 계획한 가덕도 간척 사업은 당시 국토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장면 정권의 국책과 맞는 일이었다. 제방을 쌓아 농경지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퍼부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는 그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려놓았다. 역사가 뒤바뀌는 순간에 가덕도 간척사업은 그저 조그마한 에피소드로 여겨졌고, 이것에 눈을 돌리는 정부인사는 전무했다. 그도 이 사업에 모든 것을 걸고, 공사를 진행해 왔던 터라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다. ‘Go’할 것이냐 ‘Stop’을 할 것이냐는 기로에서 그는 과감히 ‘Go’를 선택했다. 자신의 모든 사재를 털어 가덕도에 투자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간척지는 메워지지 못했고, 재산은 모두 바닥이 났다.
“그렇게 빚더미에 앉게 됐죠. 소송이 빗발치고, 어머니는 빚쟁이들 앞에서 반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재기를 꿈꾸었어요. 이후에도 부산 산업전시회 개최를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니까요.”
◇ 나를 지탱해 주는 힘, 아버지
시인 유자효가 결혼을 하기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되신 아버지를 두고 결혼을 하기엔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버지의 재혼. 마침 응암동 시장에서 교제를 하고 있던 사람이 있어 혼례를 치렀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이 하늘을 찔렀고, 불화가 가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유자효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저분과 헤어져 주십시오!”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알았다. 일어나거라. 네가 먼저 죽겠구나.”
다음 날 어찌된 영문이지 유자효의 새어머니는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평소에 그렇게 사납던 사람이 조용하게 떠난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버지도 얼마나 헤어지기 괴로웠겠어요. 그런데 몸과 정신이 부실했던 상황에서도 그렇게 결심하고 처리하는 것을 보니 젊은 저보다도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만큼 강인하고, 고통 속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리고 당당했죠. 종교가 없는 제가 살아가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버지의 생애라는 저의 거울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죠.”
유자효는 아버지가 운명하는 날까지 자신을 배려해 돌아가셨다고 얘기한다. 장례를 치르기 좋은 1990년 맑은 가을에 하늘로 떠났으니 말이다.
2번의 암 수술로 장기 9개를 적출하고도 그 누구보다 건강한 인생2막을 살아가는 이가 있다. ‘생존율 1%’라는 암과의 전투에서서 당당히 승리를 거머쥔 ‘암 정벌자’ 황병만씨. 절망을 희망으로 개척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포기암(give up cancer)을 포기함
1985년 그의 나이 서른셋. 직장암 4기를 선고 받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곧 태어날 아이를 향한 염원으로 암을 이겨낸 그였다.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온 그에게 또다시 암이 찾아왔다. 이번엔 위암 4기란다. 만약 암에도 7기가 있다면 그는 7기라고 말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생존율 1%. 매우 희박하다고 느꼈을 1이라는 숫자에 그는 자기 자신을 대입했다. 그리고 1%의 가능성을 100% 현실로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어떤 암이든 다 이겨낼 수 있는데 못 고치는 암이 딱 하나 있다. 바로 ‘포기 암(give up cancer)’이다. 나처럼 4기암에도 포기 암을 안 받아들이면 산다. 그러나 1기암에도 포기 암을 받아들이면 죽는 거다. 포기라는 것은 ‘자포자기(自暴自棄)’ 즉 ‘자(自)’, 나 스스로가 빠진 상태를 말한다. 결국 포기는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다.”
한 차례 암을 경험한 그가 다시 암을 겪게 된 것처럼, 피해가려 노력해도 암에 걸릴 수 있다. 왜 암에 걸리느냐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어떻게 암을 이겨내는가는 확실했다.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포기하지 않는 자세. 그것이 전부였다. 뻔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실제 그것을 매 순간 되새기고 의지를 다지는 것은 어렵다.
이 때문에 구심점 역할이 필요하다. 황병만씨의 구심점은 ‘가족’이다. 두 번째 암으로 고통을 겪던 당시 딸 아이 역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겨울 고3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명석했던 딸아이의 미래를 망칠 수 없었던 황씨는 ‘고3 딸을 두고 죽는 게 아빠인가. 아빠도 아니다. 죽을래도 죽을 수가 없다.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나약해질 때면 딸을 떠올렸다.
그럴 때면 그가 살아야 할 이유가 더욱 또렷해졌다.
“포기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전에 구심점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그 순간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들이 가득 차오른다. 포기를 잊고 희망을 품어야 살 수 있다.”
선장을 만나라. 그리고 그를 따르라
황씨에게는 두 명의 선장이 있다. 그의 아내와 주치의인 국립암센터 김영우 박사다. 암에 걸리면 환자와 가족들은 귀가 얇아지고 안 좋은 생각에 휩싸이게 된다. 때문에 그들을 희망의 길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선장’이 필요한 것이다.
“암 환자와 가족은 낫는다 하면 뭐든 먹이고 좋은 곳이라 하면 쫓아가기 바쁘다. 우리 집 선장(아내)은 내 어머니가 청개구리가 좋다고 잡아와도 돌려보냈다. 내 남편은 죽여도 내가 죽이고 살려도 내가 살린다는 강인함으로 다른 것들에 현혹되지 않은 것이다.”
또 한 명의 선장 김영우 박사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병을 못 고칩니다. 같은 암 환자라도 어떤 이는 초기에도 죽고, 어떤 이는 말기에도 사는데 어떻게 의사가 병을 고친다고해야 합니까. 암이라는 것은 환자 본인이 이겨내는 것이고 그와 가족들이 병과 싸워보겠다고 몸부림 칠때 의사는 그저 도와주는것에 불과합니다. 대신 의학 지식은 내가 더많이 알고 있으니 그런 부분에 대해선 내 말을 들어줘야 합니다.”
황씨는 주치의인 김 박사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고 신뢰한다. 그와는 다르게 보통 암환자들은 의사들도 알지 못하는 인터넷상의허위 정보를 맹신한다. 그는 “인터넷으로 병고치려는 사람은 100% 못 고친다”고 단언한다.
“유익한 것들도 있지만 암 환자를 현혹시키는 정보들이 나돌아 오히려 이게 사람 잡는다. 넘쳐나는 정보 중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있는 이는 주치의뿐이다. 얕은 정보의 홍수에 허덕이지 말고 선장이 이끄는 배에 올라타는 것이 현명하다.”
환자놀이 하지마라, 일반인처럼 살아라
“좋은 공기를 마셔야 한다며 지방으로 요양가는 환자들이 있다. 깨끗한 공기를 달고 사는 것이 치료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진 않는다. 오히려 가족과 떨어져 사니 걱정만 느는셈이다. 그보다는 가족과 함께 일상생활을하며 얼굴도 보고 함께 의지를 다지는 편이낫다.”
황씨는 치료를 위해 특별식을 먹는 것 또한추천하지 않는다. 평소 먹던 음식을 먹되 엄선된 재료로 조금 더 신경을 써서 먹는 정도면 충분하다. 갑작스럽게 상황버섯이니 뭐니 해가며 안 먹던 음식을 먹으면 오히려 탈이 난다는 것이다.
그는 몸을 움직일만 하면 직업을 가지라고말한다. “집에 드러누워 환자놀이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상태만 더 악화될 뿐이다.일을 하면 자연스레 몸을 움직이고 사람들도 만나기 때문에 생활에 활력을 더해 줄 수있어 치료에도 큰 도움이 된다.”
황씨는 부동산 일을 병행하며 2009년부터 꾸준히 마라톤 출전을 해오고 있다. 경기에 임하는 순간만큼은 그도, 지켜보는 이들도 그를 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반인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고 늘 중간 이상의 성적을 거두며 완주에 성공한다. 그 무엇보다 자신과의 경쟁 속에서 지난날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얻게 되는 희열이 대단하다.
“목표 지점을 통과했을 때 느꼈던 쾌감을 잊을 수가 없어 도전을 이어오고 있다. 달릴 때마다 ‘지난번보다는 1분이라도 더 빨리 1m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야지’라는 목표가 생긴다. 기록을 갱신할 때마다 느끼는 벅찬 감동.조금 더 나아가면 어떠한 환희가 기다리고있을까라는 설렘은 아직도 나를 뛰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제2의 황병만’ 누구나 가능하다
자칭 ‘암 정벌자’ 황병만씨는 ‘암퇴치재단’ 설립을 준비 중이다. 각종 강연과 방송활동 등 암 환우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국립암센터 강의 중 극도로 고통스러운 표정의 환자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위암으로 위가 절반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낙담했다.
황씨는 “나는 위는 물론이고 현재 8개의 장기가 없는 상태다. 하지만 난 폐도 있고, 간도 있고,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이렇게 있는 게 훨씬 많다.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웃어보였다.
가끔 “당신이 뭘 알아?”라고 말하는 환자들에게 그는 자신 있게 “누구보다 잘 안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치열했던 암과의 전투에서 이겨냈기에 ‘암은 이길 수 있다’라고 자부한다.
“한 살이라도 적은 역할을 하고 싶은 게 여배우들의 바람이잖아요. 그럼에도 나이가 많은 이 역할을 맡은 이유는 이순재 선생님과 함께 할 수 있어서죠.”(고두심)
“고두심은 젊을 때 정말 예뻤죠. 불행히도 난 TBC 소속이었고 고두심은 MBC여서 같이 (작품에서) 만날 일이 드물었고요. 그래서 나중에 상대역으로 같이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부부로 호흡을 맞추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았는데 이번에 함께 하게 돼 기뻐요.”(이순재)
배우 이순재(79)와 고두심(63)이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개막하는 연극 '사랑별곡'에 노년 부부로 출연한다. 한국 연극의 대중화와 활성화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연극열전' 다섯 번째 시즌의 문을 여는 작품이다.
충남 서산의 한 시골 장터를 배경으로 삶의 고단함을 안고 사는 40대부터 죽음과 마주한 80대까지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한국 특유의 ‘정’(精)과 ‘한’(恨)을 뭉클한 감동으로 그려낸다.
고두심은 ‘순자’ 역을 맡아 강인하면서도 가녀린 우리네 어머니를 연기하고, 이순재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용서를 비는 남편 '박씨'를 연기한다.
이들은 과거 TV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1995)에서 며느리와 시아버지 역으로 함께 출연한 바 있지만, 부부 역으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순재씨는 “꾸미지 않은 소박함, 잊어버리기 쉬운 투박함에 대한 깊은 정을 담은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극은 깊어진 세월과 죽음 앞에서 마주한 미련과 미안함 등을 담는다. '순자'는 는 과거 자신 대신 뱀에 물려 반신불수가 된 첫사랑 ‘김씨’를 평생 마음에 품고 살아왔으며, 남편 ‘박씨’는 그런 ‘순자’가 미워 무던히도 속을 썩였다. 삶의 마지막 길목에 선 이들은 서로에게 줬던 상처와 평생 품었던 죄의식을 모두 씻어내고 두텁게 쌓인 정(情)을 확인한다.
관계자는 “사랑한다고 말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하는 옛날 사람들의 사랑, 그런 감성을 젊은 세대들도 느낄 수 있을 것”고 말했다.
5월 2일부터 8월 3일까지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술홀에서 공연된다. 연극 ‘친정엄마’ 등 완성도 높은 무대미술과 극작으로 2010년 초연 무대를 연출했던 구태환 극단 수대표가 의기투합했다.
“여보, 언제 와 있었어?”
아내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한창 연애를 하던 시절, 서로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던 40년 전 그 시절의 순진하고도 반가운 눈동자를 하고서.
아내는 올해로 예순다섯 살이다. 똑똑한 수학 교사였던 아내를 같은 학교에서 처음 본 영어 교사였던 나는 첫눈에 반해 끈질기게 구애했고,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주변의 축복 속에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았고 아이들은 잘 자라서 그들의 가정을 꾸렸다. 그때만 해도 우리 두 사람의 미래는 안정된 노후로 향해 갈 거라고 믿고 있었다.
불행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노심초사하던 딸이 마침내 아들을 낳았던 해인 5년 전, 아내는 자꾸만 기억력이 감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똑똑하고 주변에 폐를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아내였다. 아내는 스스로 먼저 치매가 아닌지 모르니 검사를 받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단 결과, 알츠하이머병 초기라는 결과가 나왔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
무언가 무너지는 기분이라는 건 그런 것이리라. 치매는 완전 치료가 불가능하고 그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나아가는 병 아니던가. 무엇보다도 주변에서 듣기만 하고 겪지 못한 병이기에, 나는 무엇보다도 먼저 다가올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의연했던 건 되려 아내 쪽이었다. 자신이 그 갑작스러운 불행에 걸려 들었다는 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침착했다. 그리고 치매에 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환자가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책과 지인들을 통해 꾸준하게 알아냈고 그 내용들을 정리해서 나에게 알려줬다. 자신이 어떻게 될는지 알려 줄테니 그럴 때면 이렇게 해달라고. 그리고 매번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말이 있었다. “나에게 말을 거는 걸 멈춰주지 말아달라”고.
치매란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 치매를 막으려는 아내의 노력도 함께 시작됐다. 우선 혈관성 합병증을 막고 소화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식단부터 조절했다. 그리고 치매 치료와 함께 정기적으로 경보와 수영을 하기로 했고 머리를 잠들지 않게 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는 등의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아내는 무척 진지했고 그 모든 일에 열성을 다했다. 그런 활동들에 나 또한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아내에게 힘이 되어주고자 했다. 아내를 위해 함께 경보를 하고 수영과 마사지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마침 영어는 내 전문 분야기도 했으니까. 아내는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런 나를 볼 때마다 “고마워”라고 말했다.
그러한 노력들이 아내에게 치매가 본격적으로 다가오는 걸 최대한 늦췄던 것 같다. 하지만 치매는 조금씩 그 마수를 분명하게 뻗어왔다. 무언가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서서히 잦아졌고, 혼자 옷을 입거나 몸을 씻는 것을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내를 안타깝게 지켜 보면서 어떻게든 그 흐름을 되돌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한계가 찾아왔다. 어느 날엔가 집으로 들어갔을 때, 아내는 조깅복을 입은 채 방 한가운데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겨우 입을 열고 뭘 하느냐고 물어봤다.
“여기 올림픽공원 아냐? 민이 아빠랑 같이 걷는 데. 그런데 이상해. 이상해서 못 뛰겠어.”
말을 끝내고 잠시 멍하니 있던 아내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야?”
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 소중함의 기억
이제부터 마음다짐을 단단히 해야 했다. 나는 모든 바깥 활동을 그만 두기로 했다. 이제부터 아내 하나만을 바라보는 생활이 되어야 했다. 아내가 했던 활동들을 모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는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기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선 안에서만 외부 활동을 하기로 했다. 도우미가 해주던 식단도 내가 손수 맡기로 했다.
아내는 자신이 좀 더 심각한 단계로 들어갔다는 걸 자각했다. 그리고 그걸 자각한 순간부터 아내는 그때까지보다 훨씬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됐다. 나는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거듭 말했지만 막상 자신의 예상보다 빨리 닥치게 되니 아내 본인은 참기가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아내의 혼란은 과거의 아내가 보여줬던 강인하고 똑바른 모습과는 다른, 초라해지고 신경질적인 아내를 불러 들이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은 자식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자식들과 우리들의 연을 가늘게 만들었다. 그런 태도를 보이는 자식들을 보니 아쉽고 화가 났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그 아이들이 자신들도 겪게 될지도 모를 일이란 걸 일찍 깨닫고 아내를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아내는 합병증을 겪지 않았고 치매 환자들에게 닥치는 마비 증세를 보이지 않았다. 육체적으로 아내는 아직 건강한 편이다. 그러나 ‘아직 건강하다’는 사실은 치매라고 결정이 난 이상 아직 초기 단계라는 걸 알려주는 사실일 뿐, 희망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조바심이 떠오를 때마다 아내가 한 말을 한 번도 잊어버린 적이 없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걸 멈춰주지 말라’는 말. 그 말은 언젠가 기억들을 다 잊어버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고, 그걸 막아달라는 간절한 호소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매번 그 말에 담긴 고마움에 대해, 그리고 아내가 그토록 버리지 않으려 애쓰는 과거의 기억들에 대해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더욱 힘을 내서 말한다.
“응, 와 있었지. 괜찮아?”
IWC Schaffhausen은 영원불멸의 클래식하고 지적인 디자인,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최고의 기술력이 빛나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다. 1868년 창립 이래 장인의 완벽함과 혁신적인 기술력을 대변해오고 있다. 멈추지 않는 IWC의 혁신은 140년 이상의 전통과 조화를 이뤄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프로버스 스카프시아(Probus Scafusia; 샤프하우젠의 정교하며 신뢰할 수 있는 장인 제조 기술)’이라는 철학 아래 많은 역사적 시계들을 탄생시켰다. 모든 IWC 시계에 새겨져 있는 ‘프로버스 스카프시아’ 마크는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상징하는 IWC의 약속이다.
◇파일럿 전문 시계에서 출발·최초 손목시계= IWC의 역사는 보스턴 출신의 미국인, 플로렌타인 아리오스토 존스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상주의와 날카로운 사업 통찰력을 적절히 갖춘 워치 메이커였다.
그는 현대적인 미국 제조 기계를 사용해 정확한 포켓 워치 무브먼트 제작에 집중했다. 이는 당시의 저임금 경제인 스위스에 시계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렇게 존스는 1868년 샤프하우젠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IWC라는 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IWC는 1884년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장착된 포켓 시계를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최초로 손목시계를 만드는 작업에 성공하면서 1899년에는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IWC는 세계 최고의 기술과 자부심으로 다양한 타임피스 라인들을 탄생시켜왔다. 1970년대 독일계 회사인 VDO가 IWC를 인수한 뒤에도 전통적인 기계식 시계 제조방식을 고수해 기술적으로 까다로운 남성용 기계식 시계 부문에서 입지를 굳건히 이어갔다.
◇IWC의 장인정신… 높은 완성도와 희소성= IWC의 매력은 역사와 장인정신, 그리고 기술력이다. IWC 무브먼트를 한 번이라도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IWC의 세심하고 정직한 장인정신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IWC의 모토 ‘프로버스 스카프시아’를 그대로 보여주며, IWC의 광고 캠페인 ‘엔지니어드 포 맨(Engineerd For Men)’처럼 기계적 기기에 대한 감성을 자극한다.
하이 컴플리케이션 시계는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얼마나 정교하면서 숙련된 기술로 해내는가가 그 브랜드의 기술과 생산력을 얘기하는 척도가 된다. 뛰어나고 복잡한 기능을 가진 시계를 몇 개월에 걸쳐 단지 몇 개만 생산해내는 일은 많은 시계 브랜드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하이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상용화할 수 있는 수량으로 일정하게 생산하면서 브랜드의 가치관에 따라 수량을 조절할 수 있는 브랜드는 그리 많지 않다.
IWC 테크니션들은 약 1주일도 걸리지 않는 시간에 생산을 완료한다.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희소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산 수량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 이 것이 바로 기술력이며, 이는 IWC의 자부심이다.
◇6가지 시계 콜렉션과 스토리= 또 다른 IWC의 매력은 전혀 다른 디자인의 6가지 시계 콜렉션을 가지고 있고, 그 각각의 콜렉션에는 풍부한 스토리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콜렉션은 △다빈치의 천재성을 시계와 오버랩 시킨 ‘다빈치(Da Vinci)’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세계 최초의 항해 전문시계 ‘포르투기즈(Portuguese)’ △파일럿의 역사와 함께한 진정 파일럿을 위한 ‘파일럿 워치(Pilot's Watch)’ △대지의 강인함에서 기인한 기술력의 표본인 ‘인제니어(Ingenieur)’ △다이버를 위한 최고의 오토매틱 매케니컬 시계의 위치를 지켜나가는 ‘아쿠아타이머(Aquatimer)’ △이탈리아의 휴양지 포르토피노의 여유를 담은 ‘포르토피노(Portofino)’ 등이다.
IWC는 1885년부터 생상된 모든 시계에 대한 데이터 관리를 하고 있다. 모든 시계의 칼리버 무브먼트 번호, 소재, 케이스 번호가 기입된다. 최근 모델의 경우, 시리얼 번호까지 상세하게 기록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IWC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어떤 시기에 제작된 시계이든지 유형에 따른 분해수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존스 칼리버’와 같은 초창기 제품들도 현재도 유지, 보수 관리되고 있다. 기계식 무브먼트는 정기적인 유지보수가 필수다. IWC의 방대한 교체 부품 창고에는 심지어 19세기에 만든 시계의 부품도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