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금융기관에서 줄줄이 대규모 희망퇴직이 발생했다. 비대면 금융이 늘어나면서 필요한 영업점의 인원이 줄어든 탓이다. 은퇴한 전문직 종사자들은 근로 의욕이 상당히 높아서, 퇴직 이후에도 쉬지 않고 재취업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이러한 전문직 출신 은퇴자는 창업이나 창직에 관심이 많다.
참고 한국고용정보원, 신사업창업사관학교
적성을 고려한, 창업
박 씨는 대기업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선박 전문가였다. 선박 기술 서비스 분야에서 임원까지 올랐다. 오랫동안 일한 회사를 떠나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예전부터 사업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실제로 적성검사를 하면 사업가 체질로 나왔다. 그래서 잘할 수 있고 자신 있는 분야인 선박 기술 서비스와 선박 엔지니어링 전문기업을 설립했다. 다른 일도 생각했지만, 이제껏 축적한 경험과 전문성은 포기할 수 없는 큰 자산이었다.
실제로 시니어 창업이 늘고 있다.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3분기 창업 기업은 34만여 개로 2019년과 비교해 13.3% 늘어났다. 특히 연령별로 규모를 파악했을 때 60세 이상의 전체 창업은 2019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15.8% 올랐고, 기술창업은 28% 상승했다.
이들이 창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은퇴 후 재취업이 쉽지 않고, 창업의 진입 장벽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전경련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가 중장년 구직자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6명 이상은 6개월 이상의 장기 실업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100년행복연구센터의 자료에 따르면 퇴직자 3명 중 1명은 자영업을 선택했다. 선호하는 이유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업의 장기화와 손쉬운 접근성이 창업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하지만 창업의 길도 어렵다. 국민의힘 소속 양금희 의원이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제출받은 ‘창업 기업 생존률 현황’ 자료에 따르면, 국내 창업 기업의 5년 차 생존율은 29.2%로 집계됐다. OECD 주요국 창업 기업 5년 생존율 41.7%와 비교하면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한편 코로나19도 창업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중장년 취업 컨설팅 관계자는 “창업 문의는 많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창업을 미루는 사례가 생기고 있다. 만약 창업을 준비한다면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창업을 위해서는 4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창업자, 아이템, 상권, 창업자금이다. 어느 하나도 부족함 없이 유기적으로 작용해야 한다. 창업자의 역량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 아이템을 찾았다면 적합한 상권을 알아보고, 그 상권에 입점하기 위한 창업자금을 비축해야 한다. 다음은 한국고용정보원의 자료를 바탕으로 예비 창업자를 위한 4계명을 살펴보고, 최근 부상 중인 유망 창업 아이템을 소개한다.
예비 창업자를 위한 4계명
#1 적성이 최우선
창업은 만만치 않다. 남들이 한다고 덩달아 휩쓸려 창업을 시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선은 ‘자신이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정하는 것이 좋다. 퇴직한 중장년 세대는 성격이나 장단점 같은 본인의 정확한 특성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중장년 취업 컨설팅 관계자는 “평소에 즐기는 취미나 흥미, 그리고 자신이 쌓아온 역량을 종합적으로 분석해서 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 유망 아이템은 적합성을 고려
유망 아이템을 정하라고 하면 모두 장사가 잘되는 일을 선택한다. 물론 수익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창업자와의 적합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직접 자료 조사도 하고, 발품을 팔면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황윤정 한국열린사이버대학 디지털비즈니스학과 교수는 “시니어인 만큼 동년배의 니즈와 트렌드를 파악하고,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아이템을 정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3 상권의 분위기와 유동 인구
점포 창업에서 상권은 중요하다. A급 상권에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무조건 A급 상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A급 상권의 점포는 임대비용도 비싸고 권리금도 장난이 아니다. 상권이 좋다고 해서 모든 상품이 잘 팔린다는 보장은 없다. 상권 내에서도 입지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입지에 맞는 업종이 다 다르다. 황 교수는 “상권의 분위기가 업종과 어울리고, 유동 인구가 많은지 살펴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4 비용과 매출
이제까지 조금 이상적이었다면 지금은 현실적인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 창업에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창업자금은 총투자비용의 70%를 자기 자본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본이란 그 돈이 없어도 당장 사는 데 문제없는 자산을 말한다. 만약 자금이 부족하면 선택한 업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창업 규모를 줄이는 것이 낫다. 중장년 창업 컨설팅 관계자는 “예상 비용이나 예상 매출액을 꼼꼼히 따져보고, 관련 분야의 비용 지원 제도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2021 뜨는 창업 아이템
맞춤형 향기 서비스 ▶ 최근 향초와 디퓨저 같은 향기 산업이 급성장 중이다. 영국 시장 분석 업체 ‘IAL컨설턴트’에 따르면 글로벌 향기 산업 규모는 2022년까지 약 40조 원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쾌적한 실내 환경 유지 및 스트레스 해소로 향기 제품이 많이 애용된다.
공유 주방 ▶ 공유 경제를 활용한 공유 주방 사업이 뜨고 있다. 점포 창업을 하는 대신 공유형 주방을 이용해 배달음식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점포 창업보다 초기 비용이 저렴하다. 공유 주방은 4평 정도의 공간에 1000만 원 내외의 보증금과 월 160만 원 정도의 이용료만 지불하면 된다. 배달을 이용하는 1인 가구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 더욱 주목받고 있다.
창문농장 ▶ 반려식물이 하나의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창문농장(Windowfarm)이 뜨고 있다. 창문농장은 아파트 거실이나 베란다 창문에 수직으로 설치하는 수경 재배 시스템이다. 계절과 상관없이 친환경 채소를 직접 재배해서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홈가드닝과 플랜테리어에 대한 수요가 많아 앞으로 새로운 먹거리가 될 것이다.
새로운 대안, 창직
A씨는 호텔리어로 20년 동안 일하다 은퇴했다. 은퇴 후 여가를 즐기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 아내의 잔소리와 더불어 계속해서 비는 통장 잔고를 메워야만 했다. 얼떨결에 대리운전을 시작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취객의 난동과 폭언 및 욕설로 괴로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아들의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 이동 서비스에 영감을 받아 결혼식 당일 웨딩카로 신랑 신부를 이동시켜주는 웨딩쇼퍼 사업을 시작했다. 호텔리어와 대리운전 경험을 발휘해서 창직을 시도한 것이다.
위는 대표적인 창직 사례다. 저성장이 계속되면서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탓에 중장년의 재취업도 쉽지 않다. 음식점, 숙박업, 카페 등 이미 포화 상태인 시장에서는 창업으로 살아남기 힘들다. 이러한 현상과 맞물려 고학력 베이비붐 세대가 재취업 시장에 뛰어들면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창직’이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 관계자는 “생계유지와 함께 일로써 보람을 얻기를 원하는 중장년층이 많아지면서 창직을 원하는 수요가 생기고 있다”라고 밝혔다.
실제로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원하는 진로 유형을 파악했는데, 창직 추구형이 64.27%로 가장 높았다. 이 유형은 자신의 경력을 활용해 지속해서 경제적 소득을 얻기를 희망했다. 주로 장기 근속한 도시의 화이트칼라 남성 노동자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다양한 사회관계망을 통해 구직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창업과 자영업 지원 정책을 선호했다.
창직은 쉽게 말해서 새로운 직무를 만드는 일이다. 그 직무를 하기 위한 내용과 지식, 기술 등이 포함된다. 창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주로 제품이나 기술이다. 반면에 창직은 직무를 분석하고 교육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해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창업과 창직을 자주 혼동하는데, 이는 창직을 통해 구현되는 방법이 대부분 창업이기 때문이다.
창직을 위해서는 참신성, 수익성, 실현 가능성, 전문성이 필요하다. 이 일은 새로운 직업을 만드는 것인 만큼 참신해야 하고, 새 직업의 직무 수행은 기존의 일과는 확실히 다른 특성을 가져야 한다. ‘직업’이기에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법적 및 제도적 여건을 살펴야 한다. 창직 관련 전문가는 “창직은 새로운 업을 만드는 일이기에 업으로서 지속할 수 있고, 경제적 소득이 있어야 한다.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도 이상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창직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과 미래에 전망이 밝은 창직 업종을 소개한다.
예비 창직자가 알아두면 좋은 Tip
#1 다방면으로 탐색하자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전반적인 현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웰빙에 대한 관심과 주 5일 근무 확산으로 여가 생활이 늘어나면서 다이어트 프로그래머나 파티 플래너가 생겨났다. 또한 빅데이터의 발달로 빅데이터 분석가도 유망한 직업으로 부상했다. 이처럼 새로운 직업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 변화, 수요자의 욕구, 과학기술의 발전 등 다방면으로 탐색할 필요가 있다.
#2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
해외 직업 중에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해 적용 가능한 직업을 찾을 수 있다면 새로운 직업을 만들 수 있다. 맥주 주조사나 VJ 같은 직업도 해외에 있던 직업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경우다. 다만 각 나라의 문화, 제도, 시장에 따라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직업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다. 적용 가능성을 충분히 검토한 뒤 조정해야 한다.
#3 융합을 고려하자
기존 학문, 직업 간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직업을 만들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음악치료사나 미술치료사가 있다. 기존 노동 시장에 전혀 없던 직무보다 기존 직업 간의 결합 또는 융합으로 발생한 직업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따라서 직업 간의 결합과 융합 가능성을 찾아보자. 특히 반려동물과 관련된 시장을 주의 깊게 보면 좋다.
#4 분화를 검토하자
새로운 수요에 따라 기존 직업에서 분화되거나 전문화하여 직업이 나타나기도 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애견 옷만 전문적으로 만드는 애견 옷 디자이너가 나타났다. 이 직업은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핵가족 및 독신 인구 증가로 애완동물 시장이 성장하면서 패션 디자이너에서 분화된 것이다. 기존의 직업과 사회 전반적인 현상을 살피면서 분화할 수 있는 직업을 눈여겨보자.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창직
로봇 컨설턴트 ▶ 일반 기업의 로봇 사업 도입 및 전환에 대한 컨설팅을 제공하기 위해 콘셉트 디자인, 타당성 연구, 품질 관리 등 다양한 테스트를 실시한다. 고령화와 자동화 추세에 따라 생활 전반에 로봇 사용이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도심 RPG개발자 ▶ 도시를 게임판 삼아 참여자가 직접 역할을 수행하면서 도시의 문화나 역사를 체험하는 일종의 놀이마당을 기획하고 운영한다. 게임을 문화 체험, 도시 체험 등 다양한 영역에 접목하여 사업을 진행할 수도 있다. VR이나 AR 체험이 늘어나면서 유망한 직종으로 뜨고 있다.
스마트팜 전문가 ▶ 시설 원예 및 축산 농가를 대상으로 사물인터넷 등 ICT를 활용해 농가 시설을 현대화하고, 이를 통한 지속적인 성장 및 수익 창출을 지원하기 위해 스마트팜 설계, 구축, 운영 등에 관해 조언한다. 스마트팜은 한국고용정보원이 정한 8대 혁신성장 산업 중 하나다.
‘나는 영토는 잃을지 몰라도 결코 시간은 잃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남긴 명언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정적이며,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특히 나이가 들면 시간은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해진다.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눈앞의 일을 정신없이 처리하다 보면 하루는 물처럼 빠르게 흘러가고 시간의 소중함은 금세 잊히고 만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시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타임 슬립’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어바웃 타임 (About Time, 2013)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팀’(돔놀 글리슨)이 인생에서 바로 잡고 싶은 순간이 생길 때마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팀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메리’(레이첼 맥아담스)와의 어설픈 데이트 날, 동생 ‘킷캣’(리디아 윌슨)의 교통사고 날 등 되돌리고 싶은 순간을 다시 살지만, 달라진 과거로 인해 현재에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주어진 능력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교과서 ‘러브 액츄얼리’, ‘노팅힐’ 등을 연출한 리차드 커티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주인공들의 삶과 사랑을 더욱 로맨틱하고 따뜻하게 그려낸다. 특히 결혼식 날 두 남녀가 웃으며 빗속을 뛰어가는 장면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계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2. 말할 수 없는 비밀 (Secret, 2007)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상륜’(주걸륜)이 새로 전학 온 예술 학교의 낡은 음악실에서 신비로운 소녀 ‘샤오위’(계륜미)를 만나며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철거 예정인 음악실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사랑을 이어나가는 두 사람의 로맨스가 애틋함을 자아낸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로맨스 판타지 영화지만, 동시에 클래식 마니아를 가슴 뛰게 한 음악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는 쇼팽의 에튀드 중 ‘흑건 백건’을 편곡해 만든 곡부터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을 모티브로 한 ‘두금삼’ 등 고난도 연주곡이 등장하는데, 모두 주걸륜이 직접 연주했다고 알려진다. 피아노의 아름다운 선율과 더불어 대만 첫사랑 영화 특유의 청량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3.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Will You Be There?, 2016)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알약을 얻게 된 남자가 과거의 자신과 만나 평생 후회하던 과거의 한 사건을 바꾸려 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는 의료 봉사 활동 중 한 소녀의 생명을 구한 ‘수현’(김윤석)이 소녀의 할아버지로부터 10개의 알약을 답례로 받으며 시작된다. 호기심에 알약을 먹은 수현은 잠에 빠지고 30년 전으로 이동한다. 한편 1985년 오래된 연인 ‘연아’(채서진)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젊은 수현’(변요한)은 길가에 쓰러진 남자를 발견하고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만난다는 독특한 설정이 눈에 띄는 이 영화는 전 세계 30개국 베스트셀러 1위 기욤 뮈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영화의 배경인 1980년대 의상과 음악 등이 시대의 감성을 재현하고 향수를 자극한다.
글 정순옥(제1회 브라보 ‘인생 100세 시니어 공모전’ 대상 수상자)
“여기 이 쇼핑 봉투에 넣으면 될 것 같은데?”
“아니야. 보나마나 작아. 이건 너무 크고, 어쩐다?”
아이가 건네준 서너 개의 쇼핑 봉투는 제 몫을 하지 못하고 차례로 옆으로 놓였다. 내 앞에는 아이가 가져갈 옷들과 잡다한 물건들이 담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양이 어중간해서 쇼핑 봉투로 한 번에 담으려는 손길을 무색하게 한다. 그렇다고 버스에 전철을 갈아타고 가야 하는 길을 양손에 짐을 들고 다니기에는 번거로워 딱 맞는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순간 무언가 떠올라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갑 속에서 두둑한 상자를 꺼내왔다. 그러고는 꺼낸 것이 바로 보자기였다. 크고 작은 색색의 조각보로 만든 보자기들, 그중에서 제법 넉넉한 크기로 골라 짐을 싸니 한 번에 담을 수 있었다.
“어때? 좋다. 손에 들기도 편하고 예뻐서 보기에도 좋고.”
“응? …으응.”
아이의 얼굴에는 마뜩치 않은 웃음이 흘렀다.
“됐어. 어차피 내가 들고 갈 텐데.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이제 짐을 쌌으니
나갈 준비해야겠다.”
하긴 나도 보자기를 서슴없이 손에 들게 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직 공부 중인 아이에게는 영 어색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보자기는 쇼핑 봉투가 나오기 전에는 짐을 옮기는 일을 전담했고 대부분 집에서 만들어 썼다. 내 기억 속에도 생전에 엄마가 볕 좋은 날 툇마루에 앉아 보를 만드는 모습이 있다. 주로 한복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으로 크기에 따라 자르고 이어 붙여가며 만들었는데 특히 한복은 화사함이 좋아 조각보로 이어 붙이며 상보나 베갯잇. 보자기 등으로 탄생하곤 했다.
조각보는 크고 작은 조각들을 손으로 바느질해야 하고, 홑겹이기 때문에 시접을 서로 맞물려 고정시켜 나가는 쌈솔로 해야 한다. 그 과정이 한 번에 ‘뚝딱’이 아닌. 시간 나는 대로 틈틈이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이어 붙여가는 부분은 홑겹이 두 겹으로, 바탕보다 진한 부분으로 드러나고, 그렇게 도드라진 선은 다시 이어지며 완성하고 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무엇보다 조각보를 잇는 바느질은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야 한다. 자칫 설렁설렁 바느질을 했다가는 모양이 엉성해지는 것은 물론 이음 부분이 벌어져 제 기능을 못하고 전체적인 균형도 일그러지고 만다.
삯바느질로 자식 넷을 키워낸 엄마는 시내에서 꽤 이름 있는 한복집에서 일을 맡아 했다. 자그마한 몸집에 무척이나 바지런했던 것처럼 바느질 솜씨도 좋아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손끝이 야물다는 칭찬에 단골손님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 공부가 끝나고 집에 들어서면 엄마는 늘 화사한 한복과 함께하고 계셨다. 그런 엄마 곁에서 어쩌다가 자투리 천으로 바느질이라도 할라치면 엄마는 세모난 눈길로 바늘을 놓게 했다.
“엄마는 한복을 만들지만 너는 한복을 맞춰 입어야 헌다. 암, 그래야지. 그렇고 말고.”
그래도 나는 엄마가 바느질하는 모습이 참 좋았다. 특히 한복을 만들고 남은 옷감으로 무언가를 만들 때는 나도 참여할 수 있어 좋았고 조각보로 이어감으로써 점점 커져가는 시간은 뿌듯함마저 갖게 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보자기에 짐을 싸면 특별함이 더해져 참 좋았다.
손끝으로 전해져오는 부드러운 질감도.
지금 돌아보면 조각보를 이어가는 것이 바로
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탕이 되는 기본 조각보에 덧대어지는 크고 작은 조각들.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로 툭하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했던 서러움으로 채워진 조각보 하나,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덤벼들 기세로 마음의 날을 세웠던 조각보 둘,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에 힘을 얻었던 조각보 셋….
처음에는 조각보를 잇는 바느질 솜씨가 서툴러 이리 삐죽, 저리 툭, 이음 부분이 삐져나오고 시접 부분이 불거져 풀고 다시 바느질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다른 조각으로 대처할 수도 없었으니. 그렇게 힘듦으로 이어진 조각보는 내 삶의 든든함으로 자리 잡았고 은근한 배짱으로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이 많기를 바라는 내 삶은 수많은 조각들로 이어져 왔고 또 다른 조각들로 이어질 것이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날을 보내면서 얻게 되는 일상의 소소함과 그로부터 갖게 되는 마음이 풀어내는 것들로 조각보는 이어져가고,
한 숨 쉬어갈 때쯤이면 상보가 되고, 보자기가 되어
내 삶의 반짝이는 순간이 되어준다.
단발머리 깡충이며 아무 걱정 없던 그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앙증맞은 소반 위에 차려진 밥상 위에 놓인 상보가 전해주던 맛있는 즐거움으로. 자식의 나이에서 벗어나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식을 준비할 때 손수 지어주신 한복을 싸주던 보자기가 품어주던 설렘으로, 엄마의 사랑으로.
“엄마, 이제 나가야 해요. 버스 도착 10분 전이에요.”
“그래. 가자.”
나는 아이의 짐을 싼 보자기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손끝으로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질감이 기분 좋음으로 전해져 왔다. 삶의 너울로 울퉁불퉁한
내 삶을 한 번에 안아주는 든든함으로.
조각보자기를 통해 내 삶을 마주한다. 빳빳한 쇼핑백보다는 조각보자기가 더 좋은 만큼 그 어떤 감정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 듦의 여유로움을, 색도 크기도 다른 조각보 속에 담겨 있는 내 삶이 소중함을, 조각보를 바느질하며 남아 있는 내 삶을 담아가는 주름진 손에 힘을 쥐어본다.
연말은 기부나 모금이 활발하다. 거리에서는 구세군의 자선냄비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전염병으로 뒤숭숭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 지금, 다들 어떻게 기부를 하고 있을까? 실제 사례와 코로나19 이후 달라진 기부문화를 살펴보자
코로나19 이전에도 기부는 늘고 있는 추세였다. 지난 2월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문화연구소가 발표한 ‘2020 기부 트렌드’에 따르면, 국내 기부자 수는 2013년까지 증가하다가, 2014년 잠깐 530만 명 수준에서 정체를 보였다. 하지만 그 뒤로는 꾸준히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보면 30대(26.5%)와 40대(31.8%)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50대(25.6%)는 2013년과 비교했을 때 3% 정도 늘었다.
기부 동기는 세대별로 달랐다. 나눔문화연구소가 국내 기부자 세대별 특성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는 기부를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했고, X세대는 포용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 중 하나로 봤다. 두 세대는 SNS로 모금활동에 참여하거나, 자신이 속해 있는 팬클럽을 통해 기부를 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여유로운 경제력을 갖추고 있고 사회와 집단에 관심이 많아 은퇴 이후에도 꾸준히 기부활동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었다. 세대별로 동기는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기부에 대한 관심은 높아진 상황이다.
높은 관심은 악재에도 여전했다. 코로나19 이후에도 기부가 늘고 있다. 실제로 지난 7월 기준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코로나19 성금으로 모인 금액은 2505억 원이다. 이는 재난 관련 국내 모금액 중 가장 많은 액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관계자는 “다른 재난과 달리 파급 효과가 크고, 장기화하면서 모금액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국가적으로 어려워진 상황 속에서 모두 이웃을 위하여 조금씩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반 시민들은 어떤 방식으로 기부활동을 하고 있을까? 코로나19 이후 기부문화는 달라졌을까? 다음 사례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코로나19로 바뀐 기부 문화
경조사도 기부로 한다
축의금과 조의금을 받는 경조사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지난 4월 방송인 최희 씨는 기부 웨딩을 진행했다. 기부 웨딩이란 결혼식 비용으로 기부를 하는 것이다. 최 씨는 피로연, 신혼여행 등을 생략하고 국제 어린이 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에 3000만 원을 기부했다. 축의금 기부처럼 조의금을 기부하는 경우도 있다. 부산에 사는 전직 경찰공무원 A 씨는 지난 4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써달라며 모친 장례 시 받은 조의금 중 1000만 원을 사회복지법인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했다. A 씨는 평소에도 정기적인 기부와 무료급식 봉사활동에 참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기부 수혜자가 기부자가 된다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이들이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다. 지난 3월 굿네이버스 방화2종합사회복지관에서 관리를 받는 중증 장애인 어르신이 고생하는 복지관 직원들을 위해 일회용 마스크 20장을 전달했다. 한 어르신은 “늘 고마운 마음을 보답하고 싶었다”면서 마스크 전달 소회를 밝혔다. 해당 복지관 관계자는 “건강이 좋지 않아 거동이 불편하신데도 직접 사무실을 방문하셨다. 마스크에 담긴 온기만큼 따뜻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토닥토닥 캠페인
코로나 블루로 인한 무력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토닥토닥 캠페인’이 유행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장기화로 지친 마음을 ‘나비포옹법’ 동작을 통해 위로하는 자기 돌봄 캠페인이다. 나비포옹법은 양팔을 X자로 교차해 가슴 위에 올리고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심리안정화 기법이다. 배우 류수영, 가수 김태우 등 연예인들도 동참했다. 최근에는 이용섭 광주시장과 구제길 광주 아너 소사이어티 회장도 참여했다. 구 회장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하루빨리 종식돼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세월의 속도가 부쩍 빠르다. 도무지 따라잡기 어려울 만치 세상이 뒤바뀌고 있다. 때론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변화에 비틀거리기도 한다. 충북 괴산의 칠성마을 입구 수령 200년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는 이런 시간 속에서도 묵묵히 지켜온 세월만큼 든든하다. 그리고 느티나무와 함께 수호신처럼 그 자리를 지켜온 시골마을의 어르신이 있다.
청인약방(淸仁藥房)
신종철 어르신이 62년 동안 지켜온 약방이다. 푸른색 양철지붕 집 앞으로 다가가면서 마치 오래된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은 풍경에 빠져든다. 추억의 흑백영화처럼 세월의 더께로 가득한 주변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이 예스러움을 더해준다.
약방 문 손잡이 옆에 종이가 붙어 있다. “점심시간, 1시까지 옵니다.” 정확히 1시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셨다. 자전거에서 내리면서 "추운데 어서 들어와요. 아이고, 즘심 먹고 오느라 사람을 기다리게 했네" 하고 문을 열며 불쑥 찾아온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내가 여기서 약방을 62년 했는데 이 약방과 주변 땅을 군(郡)에 기부했어. 내 몸도 해부 실습용으로 충북대 의대에 기증했고. 그래서 지금은 약도 별로 없어. 가끔 동네 사람들이 급히 소화제나 두통약을 사러 오면 주고. 이젠 이렇게 청인약방이 궁금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살아온 얘기나 하고 이 마을이나 지역에 대해 말해주는 게 내가 하는 일이지. 저짝에 땅이 조금 있는데 숲 공원을 만들고 있어. 그것도 기증할 거여. 누구라도 쉬어가면 좋잖어."
다 털어내고도 흐뭇해 보이는 인생이다. 노후에 그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지만 삶의 터전이었던 청인약방은 물론이고 우리네 삶의 변천사가 담긴 시간의 가치를 보존하고 싶었단다. 평생을 이곳에서 무탈하게 살아왔고, 약방은 곧 칠성면의 기록이자 격동의 근대사 일부이니 은퇴 후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32년 괴산의 칠성마을에서 태어났으니 올해 88세, 곧 구순이다. 청인약방은 62년 전인 1958년에 이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어릴 적부터 머리가 좋아 중학교 시험을 봤을 때 군 전체에서 2등을 할 정도로 똘똘했지만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에 등록금 5000원이 있을 리 없었다. 마침 잘사는 친척이 빌려줬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장례비용이 되어버렸다.
“결국 중학교를 못 갔지, 그대로 있을 수 없었어. 서울에 고향 사람이 하는 치과가 있었는데 거기 가서 일을 배워 치기공사가 되었지. 이[齒]도 만들고 치료도 하고 온갖 일을 다 하면서 공부를 해서 숭문중학교에 갔어. 그런데 학교를 한참 다니는데 6․25전쟁이 터져 다시 사흘 밤낮을 걸어 고향인 괴산으로 내려왔어. 그때 서울에서 치과를 하던 이가 청주로 내려와 본동 치과를 열고는 나더러 또 일을 해 달라는 거야. 그래서 열심히 일해 의대에 꼭 가보자 했는데 그 치과 의사 부인이 계를 깨트리고 떠나는 바람에 내 돈을 다 잃었지. 그 뒤 다시 인천에 있는 치과에서 일하게 되었어. 신포동 32번지였는데 사람들이 늘 북적여 그만큼 일도 많이 배웠지. 그런데 동생이 군대를 가는 바람에 부모님 모실 사람이 없어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어. 일해서 먹고살려면 내가 배운 걸 활용해야 하는데 시골마을에 병원이 있을 리 없잖어. 그때 문득 청주의 병원에 있을 때 충북 약종상협회장이 약 허가증 만들어준다고 했는데 의대 가려고 마다했던 게 생각나서 찾아갔지. 그분에게 허가증을 받아 1958년 이 자리에 약점(藥店)을 연 거야.”
청인약점, 청인약포, 청인약방
약방 이름 앞에 넣은 청인(淸仁)이라는 글자에는, 약방을 차리기까지 청주와 인천에서 배우고 익히도록 도움을 준 분들의 은혜를 생각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허름한 듯 소박하지만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평생을 나누고 베풀며 살았다. 의사도 약도 귀하던 시절, 청인약방 주인의 사명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밤낮없이 약을 내어준 어르신은 더러는 십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환자를 찾아가 아픔을 치료해준 이 고장 모든 사람들의 주치의였다. 그뿐 아니라 지역의 큰어른으로서 마을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주민들을 위해 나섰고, 글을 모르는 이가 상을 당했을 때는 수백 장의 부고장도 대신 써줬다. 가난한 이들 보증을 섰다가 떠안은 빚도 수억이었지만 열심히 갚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결혼식 주례도 섰다. 그렇게 조건 없이 베푼 삶 덕에 자손들도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살고 있다.
청인약방은 수령이 200년은 넘어 보이는 집 앞의 느티나무와 함께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다. 나무 그늘 아래 평상은 일 년 내내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된다. 이웃 주민은 웃으며 말한다.
"이곳은 동네 사랑방이었죠. 어릴 적 내 덧니 빼주시느라 고생하셨는데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네요, 하하.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의지하는 어른이십니다."
반질거리는 좁은 마루 둘레에 전시된 약들은 약업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당시의 톱스타 ‘남정임’이 모델이었던 제약광고 포스터가 입구에 붙어 있다. '아름다워지는 약'. 이처럼 꾸밈없이 순수한 카피라니. 정갈하게 정리된 선반의 모든 약들은 시간을 정지시킨 듯했다.
방문을 여니 방 안이 마치 흑백필름 속 박물관 같다. 낡음이 곧 푸근함으로 다가온다. 사는 집이 가까이에 따로 있어 "불을 안 땠더니 춥다"면서 작은 난로를 켜 손을 쬐라며 밀어준다. 한쪽 벽에 '申宗澈'이라는 이름이 박힌 약사 가운이 걸려 있다. 그리고 오래된 책과 약국 초기부터 써온 일기와 외상장부, 누런 갱지에 꼭꼭 눌러쓴 생생한 기록들. 돋보기안경과 흑백 사진 몇 장, 농한기에 동네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했을 화투도 방 귀퉁이에 놓여 있다. 60년이 넘은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아직도 방송 내용이 또렷하게 들린다.
‘늙은이가 되면’이라는 제목이 붙은,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글에 시선이 머문다.
늙은이가 되면 설치지 말고/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릴랑 하지도 말고 조심조심 일러주고/ 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룩하소/ 그렇게 사는 것이 평안하다오// 이기려 하지 마소 져주시구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일어나서 나오려는데 마침 할머니께서 유모차에 의지해 약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신다. 약방 문 앞에 두 분의 자전거와 유모차가 가지런히 놓인다. 어르신은 얼른 할머니 손을 다정히 잡으며 "우리 안사람이야, 우리 같이 찍을까?" 하며 카메라 앞에 서서 웃으신다. 아름다운 부부, 아름다운 인생, 더없이 잘 살아오신 삶을 바라본다.
"다음에 오면 밥 사줄게. 때맞추어 와" 하며 손을 흔드신다. 비타민 음료 건네받으며 송구했는데 다음엔 군것질 보따리 잔뜩 들고 가서 끊이지 않던 이야기보따리 다시 풀어 달라고 할 참이다.
인터넷에서 개그맨 이경규가 후배들을 위해 모교를 찾아 대화한 영상이 있어 찾아봤다. 후배들이 물었다. “선배님은 인맥 관리를 잘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하시는지 비법이 있습니까?” 그는 말했다. “특별한 것 없습니다. 저는 그저 괜찮다 싶은 사람이 보이면 그 사람을 담당 PD에게 추천하거나 할 뿐입니다. 누구를 추천하거나 소개해줘도 그에 대한 대가는 받지 않습니다. 사례비를 받는다는 것은 거래가 되는 거죠. 추천은 좋은 인재를 소개하는 것이니까요. 실제로 강호동이나 김구라, 김용만 등은 제가 추천해준 케이스죠.” 그러면서 농담처럼 한 가지를 더 말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제 스파이를 심어놔요. 그러면 단단한 인맥이 되죠. 하하.” 그 스파이란 결국 자신이 아무런 대가 없이 추천해준 좋은 인재를 말하는 것이리라. 사실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조직을 이끄는 데는 반드시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나쁜 의미로 사용되면 안 좋겠지만, 좋은 의미로는 참 중요한 것이다. 조직은 운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갈 수도 있고, 좌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경규가 연예계에서 꽤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 평가는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다. 재목을 알아보고 그 재목을 키워주는 안목도 중요하지만, 대가를 받고 거래하지 않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아마 그런 거래를 했다면 후배들에게 존경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대스타로 연예계에서 롱런을 하고 있는 강호동은 몇 번의 연예 대상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이경규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을 있게 해준 이경규 선배에게 이 영광을 드립니다. 남들이 다 아니라고 했을 때 이경규 선배님은 ‘강호동이는 제가 책임집니다’ 하며 저를 이끌어주신 분입니다.” 강호동은 자신의 결혼식 주례도 이경규에게 부탁했다. 개그맨들은 그 주례사를 가장 유쾌한 사례로 기억한다. “앞으로 가정에 힘쓰는 일은 걱정할 것 없습니다.” 강호동이 씨름선수로 천하장사였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인연을 맺고 산다. 그것이 쌓이면 인맥이 된다. 인맥이 많으면 외롭지 않다. 또한 살아가는 데도 도움이 된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인맥을 통해 풀 수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발생하거나 뜻하지 않은 장벽에 가로막힐 때가 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절망에 몸부림칠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를 알아주는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해결이 되고 우회하는 방법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사람은 끈으로 이어져 태어났고 끈을 맺으며 산다. 그리고 그 끈이 끊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올 때 ‘탯줄’에 의지한다. 그리고 그 탯줄을 끊고 홀로서기를 하며 가족과 친구와 세상과 끈을 맺으며 독립한다. 사회적인 관계 형성이다. 그러다가 나이 들면 세상을 떠난다. 그 순간을 목숨이 끊어진다고 표현한다.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다.
관계의 끈, 인맥은 어떻게 형성해야 할까? 맺은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오래 지속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좋은 인연이라도 오랫동안 접촉이 없으면 녹슬고 삭는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즉, “안 보면 멀어진다”는 얘기다. 세상을 잘 살았다 함은 좋은 인연의 끈을 많이 맺고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새로 맺는 인연도 중요하지만, 관리되지 않는 인연을 살리는 일도 중요하다.
2020년 한 해도 벌써 끝자락에 와 있다. 재물운이 있다는 경자년(庚子年)이 뜻하지 않은 코로나19 창궐로 어려움이 많았다. 이럴 때일수록 그동안 쌓아놓은 인맥을 잘 관리해야 할 것 같다. 새로운 인연은 쉽지 않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사막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듯 인맥은 서로 길들여져야 형성된다. 그만큼의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렵사리 맺은 그간의 인맥이 녹슬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대화할 상대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도 이제라도 휴대폰 속에서 잠자고 있는 인맥을 하나씩 깨워볼까 싶다. “잘 지내고 있지?”
최근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우마 서먼이 출연한 코미디 영화 ‘워 위드 그랜파’의 개봉 소식이 전해지면서 로버트 드 니로의 필모그래피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1965년 영화 ‘맨해탄의 세 방’으로 데뷔한 후 지금까지 13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한 그는 할리우드 최고참급 배우로서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푸근한 미소가 일품인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 내공을 엿볼 수 있는 영화를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인턴 (The Intern, 2015)
창업 1년 반 만에 큰 성공을 이루고 완벽한 삶을 사는 CEO ‘줄스’(앤 해서웨이)는 어느 날 동료 직원으로부터 시니어 인턴십 공고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인턴십 프로그램은 회의에 올라온 안건 중 하나였지만, 고령의 노인을 직원으로 두고 싶지 않은 줄스는 내심 못마땅해한다. 한편 한 직장에서 40년 동안 근속한 뒤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는 70세 ‘벤’(로버트 드 니로)은 시니어 인턴십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내민다. 이후 당당히 재취업에 성공한 벤은 인턴으로 일을 시작하고, 줄스는 예상치 못한 위기의 순간마다 벤의 도움을 받게 된다.
영화 ‘인턴’은 30대 젊은 CEO 줄스가 70세 노인을 인턴으로 채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는 직원들이 고민에 빠질 때마다 지혜로운 조언으로 더 나은 길로 안내하는 길라잡이 인턴 ‘벤’을 연기한다.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한 앤 해서웨이와 연륜이 묻어나는 로버트 드 니로의 명품 연기가 나이 차를 초월한 ‘특급 캐미’를 선사한다. 소소한 즐거움과 감동, 위로를 모두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2. 오 마이 그랜파 (Dirty Grandpa, 2016)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딕 켈리’(로버트 드 니로)는 40년간 함께한 아내의 장례식을 마치고 손자 ‘제이슨’(잭 에프론)에게 자신을 플로리다로 데려다줄 것을 제안한다. 매년 아내와 플로리다 여행을 가곤 했는데, 면허가 정지되어 운전할 수 없다는 것. 제이슨은 결혼식을 앞두고 바쁜 일정을 소화 중이었지만, 딕의 막무가내 요구에 하는 수 없이 그와 동행한다. 열정 넘치는 할아버지와 앞뒤 꽉 막힌 손자의 여행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고, 제이슨은 계속해서 골치 아픈 상황에 휘말린다. 결국 딕의 거침없는 일탈에 동참하기 시작한 제이슨은 뜻밖의 추억을 하나둘 쌓아가고, 여행 속에 숨겨진 딕의 특별한 의도를 알아챈다.
영화 ‘오 마이 그랜파’는 할아버지 ‘딕’이 앞만 보고 살아가는 손자에게 인생의 즐거움을 알려주기 위해 즉흥 여행을 제안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나이 많은 시니어가 젊은 세대의 인생 멘토가 되어준다는 점은 영화 ‘인턴’과 유사하지만, 이 작품에서 로버트 드 니로는 ‘인턴’의 젠틀한 신사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유쾌하고 화끈한 할아버지로 변신한다. 무게감 있는 역할을 맡았던 그간의 행보와는 달리, ‘19금 농담’을 마구 쏟아내며 거침없이 망가지는 로버트 드 니로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3. 아이리시맨 (The Irishman, 2019)
1950년대 트럭 운전사 ‘프랭크 시런’(로버트 드 니로)은 트럭으로 운반하던 고기를 빼돌리는 일을 하다 경찰에 적발되어 고소를 당한다. 하지만 운 좋게도 필라델피아 일대를 주름잡은 마피아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의 도움을 받아 무죄 판결을 받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셀의 오른팔로 일하기 시작한 프랭크는 뛰어난 일 처리 능력으로 조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고, 러셀은 프랭크에게 트럭 운전사 노조 ‘지미 호파’(알 파치노)를 소개한다. 마피아 보스와 행동대장, 노조위원장까지 세 사람은 세력 확장을 위해 서로를 돕지만, 어느 날의 사건으로 인해 속고 속이는 암살극이 벌어진다.
영화 ‘아이리시맨’은 미국의 대표 장기 미제 사건으로 남은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된 작품이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거장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개봉 당시 화제를 모았다. 로버트 드 니로는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등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초창기 대표작에 출연했던 배우로, 아이리시맨이 두 사람의 9번째 협업작이다. 로버트 드 니로뿐 아니라 알 파치노, 조 페시 등 깊은 내공을 갖춘 노장 배우들 대거 등장해 마피아 영화의 진수를 선보인다.
할 말은 다 하고 센 듯 보이지만 공감이 가니 유쾌하다. 과거는 마음에 두지 않고 현재와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돈과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는 게 삶의 철학이지만 쓸 때는 통 크게 쓰는 여장부. 최근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제가 된 시니어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 7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기부한 676억 원을 포함해 2012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총 766억 원을 출연하며 전 국민의 관심을 모은 그녀를 만나 이 시대의 어른, 그리고 시니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936년 서울에서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6·25전쟁의 포화 속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소녀는 이제 한 기업의 대표이자 막대한 기부금을 사회에 환원해 시니어의 지표를 새롭게 세운 유명인이 되었다. 그 주인공인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화통한 기부금만큼이나 솔직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나는 과거에 매이지 않아. 오직 현재와 미래만 생각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니까. 아무리 돈이 없어도 옷 한 벌은 챙길 수 있지만 시간은 그럴 수 없잖아.”
기부를 하면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된다
이미 팔순을 넘어 85세의 나이지만 오직 현재와 미래만 본다는 이 회장의 말에는 아직도 그녀가 젊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엄청난 기부금을 출연한 것도 현재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기부하면 이제까지 자신이 느끼지 못한 새로운 기쁨을 알게 되고 엔도르핀이 돌아.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도 달라지고.”
그녀가 기부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6.25전쟁 시절에 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동네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떡 잘 먹었다” 하고 인사를 했다는 것이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동네 사람들이 떡을 잘 먹었다고 하던데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전쟁 때문에 동네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해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떡을 나눠야겠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 “우리 애기가 떡을 나눠드리라 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받을 감사를 딸에게 돌린 것이다. 그때 기부의 선한 영향력,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한 어머니의 부지런하고 알뜰한 모습이 이 회장에게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신문기자로 자리 잡기까지 거듭된 좌절
이 회장에게 다시 기부의 힘이 각인된 것은 그 어려웠던 시절에 들은 한 기독교 장로의 말 때문이었다. 온 나라가 구호물자를 얻으러 다니던 시절, 그 장로는 “우리도 가난하지만 주는 자가 되어보자”라고 설파했다. 그 말에 꽂힌 그녀는 자신이 모은 돈으로 세상을 더 선하게 만들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쉬운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대 법대생이었던 그녀는 당연히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녀는 그 시절의 자신에 대해 “선풍기도 없는 도서관에서 밤낮없이 공부하니 땀띠 범벅에 몸 곳곳이 망가졌고, 처음 맛본 실패의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좌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 한 번 세상에 도전했다. 그녀가 지원한 곳은 신문사. 기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사내 파벌 싸움, 서울대 나온 여성에 대한 질시 등이 심해 퇴사를 반복했다. 그러다 마침내 서울경제신문의 경제기자로 자리를 잡게 된다. 기자가 안 됐더라면 어땠을까. 기자의 질문에 이 회장은 바로 답을 했다.
“지금은 고시에 떨어진 걸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 고시에 합격했다면 그 검은 옷을 입고 변호사나 판검사가 돼서 살았겠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싹 싸움꾼이야. 남의 싸움을 해결해주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신문기자로 살았으니 행동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할 말 다 하면서 많이 알게 됐지. 슬픈 사람, 잘난 사람, 못된 사람, 바보도 만나고…. 그때도 지금도 정직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죽이는 거라고 생각해. 양심적으로 살려고 했지. 기자생활하면서 인생의 많은 걸 배웠어. 평생 배우면서 살아야지.”
40대 중반에 제2의 인생을 개척하다
이 회장의 기자생활 커리어는 화려했다. 경제기자로서 당시 아무도 하지 못했던 이병철 삼성 회장과의 인터뷰를 성사시켰고, 그 덕분에 다른 기업 총수들과의 만남도 무난하게 이뤄지면서 격의 없는 관계를 쌓게 됐다.
그러나 권력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1980년 5공화국이 언론통폐합을 하면서 그녀의 기자생활은 해직으로 끝나게 되었다. 40대 중반이었고 배우자 없는 여성이었다.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근심에 싸일 수밖에 없는 악조건이었다.
하지만 경제부 기자로서 수많은 CEO들을 만나면서 사업 수완을 익힌 덕분일까. 그녀는 제2의 인생을 사업가로서 다시 개척하기로 했다. 사실 그녀는 기자생활을 하던 서른다섯 살 때 아버지의 도움으로 안양 하천부지를 구입해 주말이면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그 농장은 퇴직 후 본격적인 본업이 되었다. 돼지를 키우고 옥수수를 재배했고 젖소까지 들였다. 이후 돼지가 1000마리까지 불어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사업 노하우는 인연의 중요함을 잊지 않는 것
숱한 위기와 고난을 헤쳐 온 그녀에게 다시금 시련이 찾아왔다. 이 회장의 땅이 도로 건설로 인해 수용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안양천에서 모래 채취 사업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서울 여의도 맨하탄 빌딩의 5층을 매입해 깡패들과 싸워가며 부동산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다른 층도 계속 사들여 빌딩관리단 회장이 되었고, 미국 LA의 도심 빌딩까지 구입하면서 막대한 성공을 일구었다.
그녀는 사업의 성공은 운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운이 자신 앞을 지나갈 때 누구는 붙잡고, 또 누구는 놓치느냐의 차이로 성패가 갈린다고 보는 것이다. 이 회장은 또 사람과의 인연을 중시한다. 아무리 작더라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운명이 바뀌면 자신의 운명이 바뀌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의 사업 노하우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지금은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에 있는지도 모른다.
“허투루 보지 않고 면밀하게 검토하면 길이 나와. 그걸 안 하니까 문제지.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으면 감이 떨어져?”
이 회장은 땀 흘려서 번 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자신이 기자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녀의 기부 또한 그런 기준에서 이뤄진다. ‘왜 카이스트에만 기부하고 모교인 서울대에는 기부하지 않느냐’라는 세간의 의문에 대해 그녀는 명확하게 대답했다.
“모교라고 다 해줄 생각은 없거든. 그래도 의과대학은 좀 하려고 해. 법대는 인성교육이 안 돼서 안 했어. 내 후배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 연연할 필요도 없고. 내가 하는 기부의 기준은 국가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하는 것이고, 기부의 가치가 서야 해. 빈민 구제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번 돈인데 함부로 쓸 수는 없지.”
자식에게 무조건 돈을 주는 건 자식 망치는 길
이 회장의 기부금에 대한 단호한 기준은 최근 더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지금까지는 기부한 기관에 맡기고 활용하게 했는데, 부작용이 너무 커. 돈 만지는 사람들 손에서 돈이 다 녹더라고. 그래서 내가 직접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을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어. 누가 봐도 투명하고 깨끗하게 운영할 생각이야.”
이 말에는, 지금까지의 막대한 기부를 멈추지 않고 되려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지속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처럼 기부금에 대한 기준이 확실하고 공정한 운영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그녀가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상속증여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자식에게 무조건 다 남기려는 건 틀린 거야. 자식을 무능하게 만들어. 젊은 날에 부모가 뼈빠지게 돈 버는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고 그대로 가르치면 돈을 지킬 수 있는데, 그건 안 하고 ‘내가 고생했으니 자식은 고생 안 시키고 돈만 주겠다’면 자식들이 사치하고 탕진하고 마약이나 하게 되는 거지. 부모라면 아이들에게 인성교육을 하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줘서 값진 삶을 살도록 해야지. 땀 흘리지 않고 번 돈은 제 돈이 아니야.”
82세의 초혼, 그리고 첫 부부싸움
이 회장이 핫피플이 된 데에는 막대한 기부금도 있지만 82세의 나이에 성사된 초혼도 한몫했다. 상대는 서울대 동기인 김창홍 변호사. 사업을 하면서 친구들끼리 골프 모임을 자주 가졌는데, 골프가 서툴렀던 그녀의 캐디 역할을 자임했던 사람이 바로 김 변호사였다. 그렇게 쌓인 친분 속에서 마침내 결혼이라는 결실이 맺어졌다.
“동기생 중에 동아일보 기자가 있는데 인터뷰 기사를 쓰겠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우리 영감이 내가 먼저 프러포즈했다고 하는 거야. 무슨 개똥같은 소리를.(웃음) 결혼은 여자가 아무리 좋아해도 남자가 싫어하면 못하는 거 아냐? 화가 나서 반지랑 시계를 풀어서 쓰레기통에 버렸지. 그랬더니 남편이 ‘내일 결혼식인데 안 한다고 하면 어떡하니?’ 하더라고. 내 마음 달래줄 생각은 안 하고 결혼식이 걱정이었던 거야. 그래서 싸웠지.”
그녀에겐 인생 최초의 기념비적인 사랑싸움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감정을 묻어두는 사람이 아니고 그녀도 똑같은 성격이었다.
“그렇게 티격태격 싸우고 난 뒤에 둘이 웃는 걸로 끝냈지. 칼로 물 베기지. 그래서 결국 결혼식을 했는데, 신부화장하는 데 와서 날 보곤 입을 다물질 못했어. 좋아서.(웃음)”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마리’
이 회장에게는 남편 외에 애정을 주는 가족이 또 있었다. 바로 그녀의 애견 마리다. 유기견이었던 마리는 얼마 전까지 그녀의 집 3층을 차지하고 살았다.
“나는 2층에서 지내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파바로티의 노래를 틀어주면 막 뛰어나와. 그러고 같이 산책을 하러 나가는데, 중간쯤 가다가 계속 날 돌아보고, 쓰다듬으면 꼬리가 빠지게 흔들고, 밥을 먹을 때는 식탁에서 나를 바라보곤 했지.”
그러나 지금 마리는 없다. 지난 11월 1일 비 오는 일요일에,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마리는 불쑥 상추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리야!’ 하고 불렀는데 반응이 없어. 없어진 거야. 누구는 발정이 났다고도 하고, 그러다 돌아온다고도 했지. 그런데 끝내 안 들어와서 CCTV를 보니, 들개 세 마리에게 공격당하는 모습이 나오는 거야. 급히 골짜기를 다 뒤졌는데도 못 발견했어. 먹힌 모양이야. 지금도 가슴이 아파. 그래서 남은 사진들로 앨범을 만들었어.”
그녀의 핸드폰 대문 사진에는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웃고 있었다.
깊고 풍성한 마음이 닿는 찬란한 가치
아직도 잊지 못하는 마리의 사진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애견인 이 회장. 마치 손주 사랑에 흠뻑 빠진 시니어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녀는 과거에 비해 자신이 유해졌다고 말했다.
“늙으면 서러운 게 많대. 나도 늙으면서 성질이 유해지더라고. 젊을 때는 칼 같았지. 아랫사람들에게도. 그런데 어느 날 ‘저 사람들이 나보다 정말 뛰어났으면 내 밑에서 일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때부터 납득하게 됐어.”
나이 들면서 철학적 사유와 희생이 그녀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어 어느덧 인생의 품격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 회사의 직원들은 대부분 10년 이상 일한 장기 근무자들이다. 그녀는 그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 무서운 게 없는 사람처럼 철두철미하게 직원들과 회사를 이끌어왔지만 그 강인함 뒤에는 직원들을 향한 애정이 숨어 있다. 이 회장의 형제 가족들에게 유언증서까지 마다하지 않고 측은지심으로 챙겨주는 그녀가 더 담백한 이유는 더 큰 세상을 향한 여정으로 이끄는 용기와 지혜에 있다.
“잘못된 것은 그냥 못 넘어가는 성격이야. 세상 사는 데는 정직이 최고지. 그리고 신용이고. 내가 받으려고 애쓰지 말고 주려고 해야 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싶어.”
인터뷰를 진행하며 왜 이 회장을 매스컴에서 앞다퉈 다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어른다운 어른이 없어서가 아닐까. 그녀야말로 이 무거운 코로나 블루 상황에서 통 큰 기부로 미담을 준,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온 영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이고 현명하며 나눌 줄 아는 그녀의 선행이 사회적 가치로 거듭나 진짜 선한 영향력을 행하는 모습에서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밝혀주는 등불을 본다. 2021년에도 이 영웅의 스토리는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내일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이다. 사상 초유의 전염병을 버텨낸 해의 마지막 계절이기도 하다. 올 한 해는 유난히 힘들고 지치는 일이 많았지만, 이번 겨울 만큼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포근하게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브라보 독자들의 얼어붙은 마음의 온도를 녹여줄 90년대 로맨스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Sleepless In Seattle, 1993)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건축가 ‘샘’(톰 행크스)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들 ‘조나’(로스 맬링거)와 시애틀로 이사한다. 그러나 샘은 이사한 뒤에도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나는 크리스마스이브 라디오 프로그램에 새엄마가 필요하다는 사연을 보낸다. 한편 미국 반대편에 사는 신문 기자 ‘애니’(맥 라이언)는 약혼자 ‘윌터’(빌 풀만)와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이 사연을 듣게 되고, 샘에게 강한 운명적 이끌림을 느낀다. 약혼자가 있지만 샘이 궁금해진 애니는 그를 만나기 위해 머나먼 시애틀로 향한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미국 서부 끝에 사는 남자와 동부 끝에 사는 여자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보낸 라디오 사연을 계기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셀린 디온과 클라이브 그리핀이 듀엣으로 부른 주제곡 ‘웬 아이 폴 인 러브’(When I Fall In Love) 등 달콤한 OST와 겨울 시애틀의 낭만 가득한 야경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달군다.
2.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5)
비엔나에서 파리로 향하는 유럽횡단 기차 안, 파리로 돌아가는 ‘셀린’(줄리 델피)은 시끄러운 독일 부부를 피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다 미국 남자 ‘제시’(에단 호크)를 만난다. 짧은 인사로 말문을 튼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고 진지한 이야기까지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빠져든다. 이대로 셀린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제시는 비엔나에서 함께 내리자는 돌발 제안을 하고, 두 사람은 늦은 오후부터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짧지만 뜨거운 사랑을 펼친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하루 동안 비엔나를 함께 여행하며 오랜 연인처럼 사랑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속편으로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이 있으며, 9년 간격으로 촬영해 풋풋한 20대 청춘 시절부터 중년이 된 셀린과 제시의 모습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비엔나, 파리, 그리스의 아름다운 풍광이 감동을 더한다.
3.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My Best Friend's Wedding, 1997)
대학 시절 연인이었다 친구 사이가 된 ‘줄리안’(줄리아 로버츠)과 ‘마이클’(더모트 멀로니)은 28세가 될 때까지 짝을 찾지 못하면 함께 결혼하자는 장난스러운 약속을 맺는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기 전 마이클 앞에 아름다운 ‘키미’(카메론 디아즈)가 나타나고, 마이클은 줄리안에게 결혼할 상대가 생겼음을 고백한다. 소식을 들은 줄리안은 그제야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고, 마이클의 결혼식을 망치기 위해 엉뚱한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세 남녀의 엇갈리는 관계를 코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룬다.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 줄리아 로버츠와 카메론 디아즈의 ‘리즈’ 시절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아, 잠시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금지곡’을 먼저 발표합니다. 이 자리를 즐겁고 흥겹게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니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선구자’ 부르지 마십시오. 일송정 푸른 솔이 혼자 늙어가거나 말거나 내비두세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실개천이 옛이야기 지줄대는 ‘향수’도 금지곡입니다. 이걸 눈치코치 없이 끝까지 다 불러 사람들 지겹게 하고 ‘꿈엔들 잊힐리야’ 하게 만드는 건 바보입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딴 디 가서 부르세요. 여기는 칠순, 팔순잔치 하는 곳 아닙니다. 또 엄정행처럼 부르든 다른 사람처럼 부르든 ‘오 내 사랑 목련화야’를 외치는 사람도 환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제발 참아주십시오. 10월만 되면 오나가나 이 노래 땜에 아주 지겹습니다. 이런 거 말고 차라리 ‘땡벌’, ‘아파트’ 이런 걸 부르세요. 요즘 유행하는 ‘테스형’도 좋습니다. 아니면 확 그냥 ‘인천에 성냥공장…’을 부르시거나.
내가 모임 사회를 볼 때 맨 먼저 한 말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말한 것도 있고 그렇게 말하려 한 것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다 말한 건 아니다. 어느 모임 무슨 행사든 여흥 순서가 되면 정말 눈치코치 없이 장황하고 지루하게 지 명곡을 너무도 진지/성실하게 불러 남들을 지겹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국가는 죽어도 4절까지 다 안 부르면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를 다섯 번이나 읊어대는 사람도 봤다.
위에서 발표한 ‘금지곡’ 중에서도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이야기해볼까.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결혼식장에 가지 않고 돈만 부치는 경우가 많지만, 작년만 해도 10월이면 이 노래를 수도 없이 들어야 했다. 하루에 두 번 들은 날도 있다. 클래식계의 ‘잊혀진 계절’이라나 뭐라나 10월만 되면 꼭 듣게 되는 ‘제철 음악’이다. 어떤 피아니스트가 하루 세 곳에서 연주한 적이 있다고 쓴 글도 보았다. 앙코르로 무슨 곡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이 곡을 꼽는다고 한다.
대충 흘려들어서 가사도 외우지 못하지만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라고 시작해서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이렇게 끝나는 노래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난 느끼하고 오글거리고 닭살이 돋는 기분이 든다. 가사 중 ‘바람[願望]’을 ‘바램’이라고 하는 것도 영 귀에 거슬린다(차라리 안 부르고 말지!).
난 왜 이 노래를 싫어할까. 사랑과 행복한 만남을 이야기하는 노래이고 축가인데. 난 왜 이렇게 사람이 못되고 비뚤어졌지? 그래서 어느 날 가만히 이 노래가 싫은 이유를 생각해봤다. 노래에는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가 나오지만, 난 이 노래가 싫은 이유를 알아야겠더라. 결론은 뭔가 박제된 감성, 획일화한 도시락 정서, 상투적인 사랑 표현, 곡의 단조로움과 되풀이, 그리고 강제된 반복 청취, 이런 거 때문인 거 같았다. ‘세상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좋은 게 있을지 없을지 어떻게 알아?’ 가사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
알고 보니 이 노래의 원곡은 1995년 혼성 2인조 시크릿 가든이 발표한 ‘봄의 세레나데’(Serenade to Spring)였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봄노래를 가을노래로 싹 바꾼 건데, 그것 자체는 뭐라 할 수 없겠지만 나라면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하기야 봄보다 가을이 더 좋을 수 있고, 결혼이나 만남에는 수확의 계절이 더 어울리겠지만.
나는 좌우간 인생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이야기, ‘차카게 살자’류의 미담이나 교훈이 되는 에피소드 이런 걸 누가 보내오면 카톡이든 메일이든 대부분 삭제하기 바쁘다. 그중엔 가짜뉴스나 왜곡된 것도 많다. 자기 글이 아니라 만들어진 기성품 인사(명절 때는 물론 입춘, 한로 이런 절기 때나 한 주일의 시작인 월요일에도 보내는 사람이 있다)도 받는 족족 삭제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싫어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기분인 것 같다.
그런데,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같은 노래는 왜 들어도 지겹지 않을까? 그 노래도 가사는 대충 뻔하고 교과서적인데, 나나 무스쿠리의 목소리로 들어서 그런 걸까? 부르는 사람에 따라 노래를 받아들이는 게 다를 수도 있겠다 싶다. 나는 ‘유 레이스 미 업’(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도 싫어했었다. 어떤 여성에게 전화를 걸면 이 노래가 나오곤 했는데, 전화할 때마다 좀 지겨웠다. 그런데 어느 날 네덜란드 가수 마틴 허킨스(67)의 목소리로 듣고부터 이 노래가 좋아졌다. 그의 살아온 이력까지 알게 되니 가사가 더 그럴듯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어느 날 좋아지게 될까? 1년의 가장 좋은 계절, 내 생일이 들어 있는 달, 그중에서도 한복판인 요즘, 이 눈이 부시게 삽상(颯爽)한 날씨와 정밀(靜謐)한 풍경에는 무슨 노래든 다 좋아져야 할 텐데. 그게 정상일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