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에 패이고 풍파를 이겨내며 살아온 세월. 아팠던 일은 아프지 않게 마음 속에 저장한다. 잊고 싶은 순간은… 담담하게 그 자리에 내려놓는다. 과거는 낭만으로 포장돼 기억되기 마련. 그게 나이 듦의 특권일 수도 있다. 평양식 맛집으로 소문 자자한 봉화전 주인장 김봉화(金鳳華) 씨를 만났다. 고운 얼굴 수줍은 미소가 기억하는 옛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해봤다.
서울 지하철 9호선 봉은사역에 내려 멀지 않은 거리에 봉화전이 있다. 강남이라고 해서 멋들어진 건물 자태 운운하면 곤란하다. 건물만 똑 떼어 어느 시골 마을 장터에 갖다 놔도 어색함이 없을 만큼 정감 가는 분위기를 뽐내는 곳이 봉화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온 사진작가를 앞에 두고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김봉화 씨. 주제는 전쟁이었다.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는 6·25전쟁 때 가족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상황과 드라마보다 더 무거운 옛일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열심히 들려줬다. 직장인들이 시끌벅적 점심을 먹고 돌아간 후, 피곤할 만도 할 텐데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이제 좀 끝내는가 싶더니 음식 솜씨에 대한 수다가 이어진다.
“저희 집안이 경주 김 씨 왕손 집안입니다. 평양에서 피란 내려왔어도 음식은 고급스럽게 먹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잡아두고 요리를 가르친 건 아닌데 결혼하고 나서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 가져다 먹고 또 나이가 들다 보니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요리나 하면서 지금까지 살았어요. 정말 우연하게 봉화전을 열었습니다.”
평양식 온반과 어복쟁반, 특히 부침 전이 맛있기로 소문난 봉화전. 이곳에 처음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봉화전이 ‘경북 봉화 지역의 전’을 말하나보다 하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김봉화(봉화)가 전하는 이야기[傳]’란 의미다. 광고기획사 다니던 큰아들이 가르치던 학생들과 고민해서 만들었다.
“한 학생이 그러더래. ‘봉화전’ 어떠냐고요. 처음에는 싫다고 했어.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나는 싫었거든요. 어쨌든 봉화전이 식당 이름이 된 거예요.”
평양 양반댁 요리의 정갈함을 고수하면서도 현대인의 취향과 입맛에 맞췄기에 그녀 스스로도 전통이라는 말로 봉화전의 요리를 표현하지 않는다.
“요즘 스타일이에요. 옛날 잔칫집에서는 고기를 꼬치에 크게 꼽고 전을 부쳐냈는데 그렇게 안 합니다. 음식은 그저 먹기 좋게 내놓습니다. 그리고 이북식 배추김치는 여기처럼 배추 전체에 양념을 치대지 않아요. 이파리 속에다 단정하게 넣어요. 그 상태로 자르면 정말 꽃 같아요. 예쁠 뿐만 아니라 아삭아삭하고 맛있어요. 그런데 싱겁죠. 평안도 사람 입맛에는 맞겠지만 여기 사람들에게는 아닐 수도 있잖아요? 초창기에는 전 부칠 때 전통식대로 돼지기름도 써봤지만 제가 직접 기른 돼지도 아니고 못 믿죠. 지금은 콩기름에 부쳐요. 최대한 평양 맛을 고수하되 요즘 사람들의 입맛과 취향을 많이 고려합니다.”
요즘은 봄철이라 두릅전을 계절 음식으로 내놓는데 인기가 좋아서 금방 동날 정도란다. 그녀는 매일 시장에 가고, 전과 함께 먹을 반찬도 그날그날 바꾼다.
“젊은 사람들 입맛에 맞아야 하잖아요. 촌 음식 그대로 해주면 안 먹어. 내가 여기에 오면 이것저것 신경 쓰고 고민하게 돼요. 젊은 사람들이 나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거 같아요. 고맙죠. 잘해주고 싶고 과일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요. 이 나이에 돈만 벌겠다고 나와 있는 건 아니에요.”
어느 날 찾아온 인생 일탈 ‘봉화전’
봉화전을 열기 전까지는 가족들 뒷바라지하며 사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어머니였다. 생업 전선(?)에 뛰어든 것은 막내아들 때문이었다며 또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이 자리가 원래는 곰장어 집 자리였대요. 2011년에 막내아들이 ‘엄마 나 조그마한 가게 두 개 계약해놨는데 한번 봐주실래요?’ 그러는 거야. 여기 와서 보니까 엉터리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아들한테는 표시 안 했어요. 그런 얘기하면 실망하잖아요. 이미 돈도 다 줬더라고요. 여기서 식당했던 사람마다 망했다는 얘기도 들렸어요. 일단 다른 가게는 계약금을 돌려받지 못했지만 포기했어요. 이것만 남겼죠. 아무 경험도 없는데 자신감이 있었겠어요?”
자리만 봐주고 발을 빼도 되나 싶었는데 아들이 다시 부탁을 해왔다.
“아들이 ‘엄마, 3일만 봐주세요. 여기 일하시는 분들한테 요리하는 방법 좀 가르쳐주셔요’ 그러는 거야. 내가 속으로 3일 가르쳐서 되면 뭐든지 잘되게?(웃음) 그랬어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아들이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투자했는데 잘못되면 큰일이었다. 약속한 3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장사할 준비도 제대로 못했는데 손님들이 문 두드리고 들어오는 거예요. 잠깐 동안 80만 원어치 팔았어. 막 음식을 해 달라는데 어쩌겠어.”
정작 일을 벌인 아들은 개업 한 달 만에 사업하겠다며 중국으로 가버렸다. 첫날부터 대박식당으로 소문이 나더니 문 연 지 얼마 안 돼 방송사에서 촬영까지 해갔다. 맛집 프로그램으로 정평이 난 ‘수요미식회’(tvN)에 소개되면서 대한민국 맛집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어느 날 가수 이현우가 왔다는 거야. 누군가 하고 봤더니 여기서 먹고 가곤 했대요. 그 사람이 ‘수요미식회’에 소개한 거예요. MC인 신동엽 씨랑 전현무 씨도 와서 우리 음식 먹어보더니 정말 맛있다는 거야. ‘우리 아들 망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내가 이 집을 떠나면 안 되겠구나’ 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을 요리하다
봉화전을 열 때 아들이 그녀에게 알려 달라는 요리는 단 한 가지였다.
“내가 집에서 노상 해주던 음식이었어요. 그게 가장 맛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제가 요리에 관심이 좀 있었어요. 젊었을 때는 남편을 위해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음식연구원을 다녔어요. 남편이 방산사업을 했는데 외국 바이어들을 저희 집에 자주 데리고 왔습니다. 호텔에 가봤자 별 볼일 없잖아요. 그때마다 남편 생각해서 정성을 다해 우리나라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사업도 잘 풀렸습니다. 방부제 들어가지 않은 빵을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어서 오븐을 사서 빵도 구웠습니다. 제빵사 자격 이런 건 없었는데 정말 잘 만들었어요. 몇 년 전 오랜만에 아들 친구를 만났는데 제가 만든 빵을 기억하더라고요.”
좋은 집안에 태어나 피란 통에도 좋은 것 먹고 곱게 자란 그녀였지만 과감한 면이 있었다. 좋은 선 자리 마다하고 연애결혼을 한 것이다.
“어머니는 제가 잘사는 집안으로 시집가기를 바랐어요. 서너 군데서 선도 들어왔고요. 그때는 스무 살만 넘어도 빨리 시집가라는 분위기였잖아요. 근데 제가 꿈에서 어떤 키 큰 남자를 봤는데 누군가가 ‘저 사람이 네 신랑감’이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그 꿈을 꾸고 나서 한 일주일 됐나? 키 큰 공군사병이 저를 따라오는 거예요. 그리고 3년 동안 저를 쫓아다녔어요. 제 남편이요.”
열두대문집 손자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경제적으로 내세울 것 없었던 남편을 어느 날 어머니에게 보여드렸다. 내심 걱정했지만 어머니의 한마디는 “사람 괜찮구나”였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큰 회사의 커리어우먼이었던 김봉화 씨는 남자 친구이던 남편이 군 제대를 하고 취업하기 전까지 데이트 비용에 용돈까지 줘가며 연애에 푹 빠져 살았다. 결혼식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엄앵란, 신성일 부부가 생각날 정도.
“결혼식은 워커힐에서 했어요. 앙드레 김 웨딩드레스를 입었어요. 오드리 헵번이 입었던 짧은 드레스였습니다. 훗날 남편에게 들었는데 돈 엄청 썼더라고요. 다 늙어가지고 얘기하더군요.”
사실 그녀는 돈에 대해 신경 쓰고 살아온 적이 없었다. 남편도 가족들이 부족한 것 없이 살 수 있게 해주려 늘 최선을 다하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남편은 살아 계신가요?”
기자의 질문에 김봉화 씨는 순간 멈칫했다. 왼쪽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다 포물선을 그리며 손을 내렸다. 눈가가 촉촉해지기에 어떤 의미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외국에 가 있어요.(웃음) LA에 몸 관리하느라고요, 늙어빠져가지고서는. 거기 사촌들이 다 있어요. 나는 어딜 가도 남편하고 같이 갔어요. 여자는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해서 친정에서도 못 자봤고요.”
어디든 함께 다녔던 남편은 환갑을 넘기고 몇 년 뒤 지병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LA는 남편 살아생전 함께 다녀온 마지막 여행지.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상상하며 사는 것이 그녀가 선택한 속 편한 방법이리라.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준 존재가 봉화전이다. 홀로 남아 방황하는 그녀를 위해 아들딸들도 발 벗고 나선다. 매일 추억을 다듬고 고향 음식과 벗하며 하루하루 예쁜 모습 유지하며 살아가길 자식들은 바란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일이 있는지 물었다.
“나? 죽고 싶지 않아요.(웃음) 시장에 갔을때 새로 나온 봄나물 보면 손님들에게 해주고 싶어요. 매일 여기에 나와서 메뉴 개발하고요.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제 인생이 아까워서 될 수 있으면 오래 살아야겠어요. 젊은 마음으로 살면서 아들딸하고 같이 지내고 싶습니다.”
연세를 물으니 “아직 백 살 되려면 한참은 남았다”며 한사코 나이 공개를 하지 않는 그녀. 과거를 추억하기보다 이제는 미래를 꿈꾸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 마음 변하지 않기를 응원한다.
봉화전이 자랑하는 메뉴
깻잎전, 육전, 돼지고기전, 고추전
봉화전 인기 메뉴. 깻잎전과 고추전에는 소고기가 들어간다. 비결은 두껍지 않게 부치는 것. 평안도식 돼기고기전도 인기가 좋다. 삶은 돼기고기를 알맞은 크기로 잘라 사용한다. 원래 평안도 잔칫상에는 더 크게 꼬치에 꽂아서 내놓던 요리다.
평양식 온반
이북에서 잔칫날 먹는 대표 음식으로 원래는 꿩고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구하기 쉽지 않아 소고기를 쓴다. 육수는 삶은 양지머리와 꼬리뼈를 우려서 낸다. 삶은 소고기를 손으로 찢은 후 소금, 참기름, 파, 마늘, 깨소금, 후춧가루로 간을 한다. 대접에 밥을 퍼 담고 그 위에 소고기와 알맞은 크기로 부쳐낸 녹두전, 지단을 순서대로 올린다. 여기에 맑게 끓인 뜨끈한 온반육수를 부어 먹는다.
청첩장을 많이 받는 계절이다. 모처럼 정장을 차려입고 예식장을 찾으면 혼주가 상기된 얼굴로 하객들을 맞는다. 결혼식 풍경은 거의 예외없이 들뜨고 즐겁다. 하객과 혼주 간에 격식을 탈피, 농담 섞인 유쾌한 인사도 많이 오간다.
“빚 갚으러 왔네!(우리집 혼사에 와줬으니)“ ”저축하러 왔어! 우리집도 곧 혼사가 있을 모양이여...” 하객들의 이런 농 섞인 축하인사말이 예식장 분위기를 띄워주기 시작한다.
주례사도 많이 바뀌고 있다. 우선 시간이 길면 감점이다. 7~8분이 대세다, 젊은이들이 희망하는 주례사 시간은 5분 안쪽이라고 한다. 내용도 예전의 “아들 딸 많이 낳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자 되고...”라는 식은 없어진 지 오래다. 신랑.신부에게 맞춘 이른바 맞춤형 주례사를 매우 짧게 하는 추세다.
정작 신혼부부에 대한 덕담은 신랑,신부와 양가 부모들이 하객 테이블올 돌며 인사 드리는 피로연장에서 쏟아진다. 한 잔 걸치고 불콰해진 얼굴로 양쪽 부모와 신혼부부에게 건네는 나이 지긋한 하객들의 덕담이 ‘진짜’다.
덕담 중 ‘명작’ 하나를 소개한다.
신랑을 바라보며 “자네가 여자 보는 눈이 높군. 아빠 닮았어!” 이어 신부에게는 “남자 보는 눈이 높아. 엄마를 닮았나봐!”
빵 터지는 웃음 속에서 그 두 마디가 몇 사람이나 띄워줬는지 저마다 계산하기 바쁘다.
‘어라! 나 어느새 이렇게 나이 들었어? 이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도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영탄한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흘러 흩어진 세월을 아쉬워한다. 그러고서도 정작 무한정한 시간을 움켜쥔 것처럼 하루하루를 허비한다. 시간이야말로 고귀한 재산이라는 걸 까먹는다. 이 양반을 보시라. 시간 누수 없이 은퇴 이후를 산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시간을 야무지게 쓴다. 귀촌이 그걸 가능케 했다. 삼십육계 뺑소니를 치는 시간에 아랑곳없이, 한결 만족할 만한 시골살이를 누리고 있으니.
영월미디어기자박물관 고명진(69) 관장. 그는 사진기자 출신이다. 이곳 영월의 시골로 귀촌한 건 8년 전. 애초엔 단양에 발을 들였었다. 농사를 짓고 자연사진이나 찍으며 한가하게 살자는 생각이었다지. 그러나 여의치 않아 길을 바꿨다. 스치듯 잠깐 단양에 머물다 영월로 이주, 계획에 없었던 미디어기자박물관이라는 색다른 박물관을 만들었다.
귀촌은 왜 했을까? 이보다 더 좋은 건 다시없다고 널리 소문난 ‘지존’, 바로 돈 때문이었단다. 서울에서 잘나가던 사진기자였던 그는 60줄에 접어든 자신의 정경을 바라보며 윽! 하고 놀랐던 것 같다.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였다. 정신만 빼고는 없는 게 없는 서울, 재화를 중심에 두고 강호의 협객들이 밤낮없이 각축하는 서울. 이 격렬하고도 머리 아픈 도시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재산이나 노후자금이라는 게 필요하다. 그에겐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은퇴한 그가 굴릴 수 있는 자금이라야 연금으로 나오는 월 108만 원이 전부였다지.
“제가 재혼으로 맞이한 아내와 함께 귀촌을 했어요. 전처와는 사별을 했는데, 암 투병을 오래하다 떠났지요. 긴 투병 와중에 전 재산이 날아갑디다. 남은 건 연금뿐. 그 소소한 돈, 월 108만 원으로 서울에서 버틸 자신이 도대체 서질 않더라고. 그럼 어쩌나? 고민 좀 하다가 돈 덜 드는 시골로 내려가자, 귀촌해서 그저 밥 먹는 정도에 만족하며 자연사진이나 찍자, 그런 결론을 내렸어요.”
가진 것 없이도 깡이나 무욕으로 버티며 사는 귀재가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우리네 필부에겐 어림없다. 쥔 게 없는 사람에게 서울은 무정하고 비정하고 매정하다. 삶도 사회도 역사도 일쑤 진흙탕처럼 뒤엉킨 모순과 부조리를 축으로 윤회한다는 걸 고 관장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일 게다. 한평생 사진기자로 살며 이 요상한 세상의 명암과 요철을 깊숙이 들여다봤을 테니까. 남모를 소명감도 가슴에 품었을 테지. 정세의 격랑 속에서 그가 포착했던 ‘기록사진’들은 시대의 증빙으로 남아 있다. 6·10민주항쟁 때 한국일보 기자였던 그가 찍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라는 타이틀의 사진은 사람들의 심장을 흔들었다. 미국 AP통신사는 이 통절한 컷을 ‘20세기 최고 사진 100선’에 선정했고.
돈 한 푼 안 들인 ‘사진박물관’
나는 찍는다, 고로 존재한다! 아마도 고 관장의 슬로건은 그런 것이었을 터. 결국 천분이자 천직이었던 사진과의 인연은 은퇴 뒤에도 이어져 사진박물관을 꾸리게 되었다. 박물관엔 그가 현역 때 썼거나 기증받은 온갖 사진 장비와 희귀한 자료가 잔뜩 전시돼 있다. 원래 사진박물관을 차릴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지. 귀촌을 했으니 뭔가 사진과 관련한 일로 여생을 보내야겠는데 그게 뭐지? 그렇게 다분히 막연한 궁리를 하던 차에 그의 명민한 아내가 쓰윽 귀띔을 하더란다. 오우, 저 빈 건물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보소서!
“영월엔 다양한 사립 박물관들이 있어요. 근데 말이죠, 동네 구경삼아 돌아다니다 우연히 빈 박물관 하나를 보게 됐어요. 원래 폐교였던 건물에 설립한 책박물관이 있었는데 그게 폐관됐던 거라. 그걸 본 집식구가 대뜸 아이디어를 낸 거죠.”
“그 즉시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한 거예요?”
“아내의 반짝이는 권유를 듣고 바로 착수했어요.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군청으로 달려가 기자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제안서를 제출하라 합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됐고, 결국엔 성사가 됐어요. 순항을 거듭했다 할까, 매우 좋은 조건으로 협약한 뒤 무난한 운영을 해왔어요.”
“매우 좋은 조건이란?”
“군에서 건물을 통째로 무상임대해줬거든요. 살림할 사택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학예사도 배치해줬고. 아무튼, 자리 잡기까지 부지런히 공을 들였어요. 명심한 게 뭐냐면, 박물관이되 원래 이 터가 학교자리였다는 걸 잊지 말자는 거였어요. 시골에서 학교란 마을 문화공동체의 중심이니까. 해서, 박물관을 거점으로 많은 마을 사업을 전개했어요. 음악회 같은 문화행사도 적극 유치해 주민들과 함께 즐겼고.”
“관의 지원 승인 자체가 쉽지도 않지만, 사업 진행 과정에도 괴로운 일들이 많다고들 해요. 오라 가라, 이래라저래라, 요구가 많아서. 그래서 어떤 이들은 절대 관공서와 손잡지 말고 독립적으로 일을 추진하라 합니다.”
“우여곡절을 피할 길은 없죠. 그러나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내 돈 한 푼 안 들이고 일을 벌일 수 있다는 건 절호의 기회이지 않겠어요?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문화사업이나 마을사업을 열렬히 하되 절대 돈벌이 목적으로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에요. 그건 실패의 첩경이니까. 반드시 욕먹고 망가지니까. 나랏돈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무슨 예산 집행의 결재 라인엔 아예 서질 않는 게 좋아요. 그저 밥 먹을 정도의 형편만 만들어지면 이게 복이거니, 하고 만족해야 하는 겁니다.”
흔히들 관청을 공감의 파트너라기보다 요령으로 구워삶을 대상으로 여긴다. 슬기와 소신에 찬 처세가 아니고선 기분 좋게 넘기 어려운 철벽일 수 있다. 고 관장은 아마도 민첩한 머리와 저돌적인 근성의 소유자. 설령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돈 1원도 부당하게 취하지 않겠다는 결기 역시 그의 것. 진정 그렇다면, 이 난잡한 세속에서 사례가 드물 이 인물은 이미 청정(淸正)거사. 어쩌면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긍정적인 자질과 양심과 패기를 전량 두레박으로 퍼 올려 귀촌의 나날들에다 쏟아 붓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생판 모를 타관에 내려왔으나, 고 관장은 내 집 마당인 양 양양히 활개 쳤던 것 같다. 많은 일들을 펼치거나 만들거나 띄워 올려 흐뭇한 성과를 거두었다. 어떤 일들? 그는 영월에 오자마자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결혼식이나 고희연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마을 농산물 마케팅 사진도 척척 찍었다. 물론 무료봉사로. 사회적 협동조합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도 만들었다. 요즘은 귀농·귀촌 교육장에 가서 강의도 한다. 은퇴 귀촌을 바라는 이들에게 득이 될 얘길 들어볼까?
“요즘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느낌이 듭디다. 특히 우리 또래들, 너무 일찍 퇴사하고서 삶의 낙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 오늘은 지하철 몇 호선을 탈까, 겨우 그런 생각이나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 그래요. 섣불리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처갓집 돈까지 까먹는 경우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러지들 말고 귀촌이건 귀어이건 귀산을 하시라 권하고 싶어요. 잴 것 없이, 따질 것 없이 과감하게.”
“흔히들 도시 탈출을 꿈꾸지만 도시생활의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질 못하죠. 게다가 실패하거나 괴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게 귀촌·귀농이라는 소식도 자주 들려오니 두려워질 수밖에.”
“시골에서 불편한 건 딱 한 가지예요.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거. 그 외엔 도시보다 나쁠 게 없다는 거. 뭐가 문제될꼬. 게다가 시골엔 할 일이 참 많아요. 캐리어와 재능을 가진 도시인들이 시골에 내려와 피폐해진 시골문화를 북돋울 수 있는 기회도 많아요.”
“원주민들과의 융화 문제도 난제라고들 하죠. 뭐 도시에서라고 심통 사나운 삐딱이들이 없으랴마는.”
“아, 텃세 문제엔 귀촌자의 잘못이 더 많아요. 시골의 독특한 문화와 풍습을 재까닥 인정해버리지 못한 잘못!”
“숲속의 자연 생태에도 폭력이 있고 상극이 있죠.”
“단적으로 말해볼까요? 마을에 정말 고약한 사람이 하나 있다 가정합시다. 그럼 그 인간이 죽으면 조용할까? 아니죠. 비슷한 사람이 또 나타납니다. 그게 시골문화예요. 제가 이곳에서 근본을 지키며 살고 있지만 다들 저를 좋아하는 건 아녜요. 열 중 셋은 딴죽을 걸어요. 그게 이상할 게 없는 현상이라 보면 끝! 귀촌자들이 몰려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선의가 시골문화를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부디 좋아하는 일을 즐기시라
시골에도 우뚝한 철부(哲夫)가 있다. 보수적이고 토속적인 마을의 불문율을 존중하며 맘 통하는 토박이들과 어울리는 건 쓸쓸한 일상을 보완해준다. 귀촌인들과의 친선도모도 촌 생활의 불편과 권태를 면제해준다. 고 관장은 귀촌 직후 영월군 농업기술센터 희망농업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유치원 과정에 입문했다. 이게 무슨 얘기? 귀촌·귀농 초기엔 유치원생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이후 초등 6년까지를 마쳐야만 비로소 시골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 관장의 논평이 그렇다. 귀촌 8년째인 이즈음에서야 그는 비로소 안전한 정착에 이르렀다는 거다.
“바람직한 건 농업대학에 들어가는 겁니다. 시골을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촌인 그룹을 형성할 수 있으니까. 저의 농업대학 동기 34명 중에 90%가 귀촌·귀농을 한 사람들이에요. 이들이 현재 영월군의 문화를 이끌고 있어요. 다들 한가락씩 했던 사람들이지만, 대부분 도시에서 사업하다 망해 시골로 내려들 왔어요. 실패 경험, 그 자체가 큰 배움이겠지. 인생을 크게 배운 사람은 좋은 노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의 눈은 영리한 노루처럼 반짝인다. 목청은 탕탕 우렁차 시원한 맛을 준다. 그의 뇌에 세팅된 최상의 가치는 ‘생동하는 노년’에 있지 않나 싶다.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있는 나이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으니 이제 성난 수말처럼 내달리자는 것. 그런 그가 늘 홍보하는 소리가 있다.
“사람이여, 부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죽는 날까지 즐기시라!”
그거야말로 신바람 나는 인생이며, 그렇게 사는 표본이 바로 자신이라는 투로 의기양양하다. 그렇다고 고난이 없었으랴. 황소의 뿔을 잡아 패대기치는 것과 같은 분투가 없었으랴. 비바람이야 피할 길 없더라도 내 방향대로, 내 지향대로 살고 있다는 긍지의 표명. 그의 언동엔 그런 게 비친다.
“6학년 5반쯤 되면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는 게 현명하다는 생각이에요. 과욕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거. 생활비 크게 들 것 없는 시골에 내려와,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여건 정도만 만들고,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몰두한다면 그보다 나은 삶이 다시 있을까? 돈벌이는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해버리고, 돈을 벌 경우엔 번 만큼의 가치 있는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일로써 마을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그렇게 일과 놀이가 함께 붙은 삶이라면, 늘 타인을 고려하는 인생이라면 아무런 결함이 없을 거 아니겠어요?”
나만 좋으면 무슨 소용? 그는 그리 외치고 싶은 게다. 이웃에게 귀 기울이기, 선의의 관심 갖기, 그런 걸 박애(博愛)라 하나?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공자 할배님도 뜻이 같을 게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그가 한마디한다.
“인생관을 들어보려오? ‘오늘 이 순간을 재미있게 살자!’ 그런데 요샌 바뀌었구만. ‘마누라를 위해 살자!’로. 하하핫!”
고명진 관장이 들려주는 귀촌준비 Tip
•귀촌해서 돈 벌 생각하지 말자. 도시의 비즈니스 마인드와 시골의 그것은 사뭇 다르다. 특히 돈벌이를 위한 시니어 귀농은 100% 실패한다. 저비용 고효율의 시골생활을 모색하자.
•자신이 평생 해왔던 일과 기능을 썩히지 말자. 일테면, 전기기술자였다면 마을을 돌며 고장 난 가전제품을 수리해주면 된다. 봉사란 행복의 원천이지 않던가.
•마을일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자. 비판을 하더라도 참여하고서 비판하자. 그런 태도가 마을의 건강한 토양을 만든다.
•인터넷은 시골생활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무한한 정보를 제공한다. 인터넷을 모르면 귀촌하지 말라. 페이스북으로 온 세계와 소통하는 세상이지 않은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동호회 모임에서 50대 후반의 여성 회원인 K가 한 말씀 올리겠다고 일어섰다. 자녀의 결혼 소식을 전하거나 축하받을 일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평소의 말이나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그녀의 최종 학력이 중졸이었다는 것에 우선 놀랐고 진학하려는 동기가 궁금했다.
K는 가난한 농사꾼의 딸로 태어나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그런데 관내 중학교까지는 다닐 수 있었지만 외지로 나가야 하는 고등학교는 무리였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해서 뭐하느냐며 단칼에 잘랐다. 가정 형편상 오빠들의 공부 지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K는 면 소재지 중학교를 수석 졸업하고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그 뒤 결혼을 했고 시아버지가 운영하던 아파트 보수 업체를 남편과 함께 물려받았다. 도배, 난방시설 수리, 싱크대 교체 등 크고 작은 노동일을 했다. K는 두뇌가 명석한 데다 미적 감각까지 있어 물량 파악이나 재료 선정은 물론 독특한 디자인으로 고객의 주목을 받았다. 꼼꼼한 일의 마무리와 완벽한 하자보수 등 소비자 구미에 맞게 성실히 일을 잘해 입소문이 났고 일감이 몰려들면서 인근의 작은 건물까지 사들였다. 그다음에는 옷가게까지 인수해 돈을 제법 많이 벌었다.
그렇게 자식들을 외국 유학 보내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건물에서 나오는 월세만 해도 꽤 큰 금액이어서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사업을 접고 해외에 놀러 다니면서 골프도 친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아쉬움이 늘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 여고생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기에 야간 여고가 아닌 주간 여고에 꼭 입학하고 싶어 했다. 남편도 적극 지지해줬다. 하지만 과연 이 나이에 잘하는 행동인지, 머리도 녹이 슬어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도 걱정되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문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자체도 대단한 용기였다. 많은 사람이 조언하길, “그 나이에 정규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 검정고시를 보고 방송통신대학에 진학하라”고 했다.
그러나 K가 원하는 것은 졸업장이 아니었다. 가슴속에서 한이 된 학교를 꼭 다녀보고 싶었다. 가난으로 결혼식을 못 올린 사람은 드레스를 입은 결혼식을 해보고 싶어 한다. 결혼식을 정식으로 올린 사람은 그 마음을 잘 모른다. 그 나이에 주책이라고 말하기 쉽다. K가 쉽게 또는 빨리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쥔다 해도 그 졸업장은 그녀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그녀는 17세 소녀로 돌아가 책상 앞에서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예”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거고, 빵집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어보고 싶은 것이다. 나이 먹은 사람이 손녀 같은 아이들과 빵집에 앉아 수다를 떨어보고 싶은 마음이 철이 없는 것일까? 하고 싶으면 해야 한다.
나는 그녀에게 조언을 했다.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른 때라고. 수업을 못 따라간다고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빨리 대학을 마치고 졸업장을 흔들고 자랑해봐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고. K는 내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도전해보겠다고 한다. 시작이 반이다. 이제 그녀에게는 나머지 반이 남았을 뿐이다.
2018년 말에 시작해 올 3월 3일까지 논현동 메르디앙호텔 갤러리에서 러빙 빈센트 전이 열리고 있다. 갤러리 이름이 생소해 찾아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는데 검색한 대로 전철 9호선 강남 신논현역에서 내려 4번 출구로 나가니 바로 호텔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친구 자녀들 결혼식 때 몇 번 와보기도 했던 곳이다.
유명한 화가 중에서도 유독 빈센트 고흐는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멋진 작품을 남겼음에도 외롭고 가난에 시달리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전시회는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지만 이번 전시회는 조금 특별하다. 러빙 빈센트 전은 고흐의 삶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했을 때 전 세계에서 선발된 125명의 화가가 투입됐는데, 영화 제작에 사용하기 위해 그들이 그려낸 고흐의 작품 125점을 직접 만나볼 수 있는 전시회다.
아들도 이 전시회에 간다고 해서 나는 영화 러빙 빈센트를 먼저 보라고 일러줬다. 이 영화는 제작기간만 9년이 걸렸고 세계 각국에서 무려 125명의 작가가 선발되어 고흐의 작품을 따라 그렸다고 한다.
고흐는 살아생전 그 많은 작품 중 단 한 점의 그림만 팔렸던 작가다. 그가 죽은 1년 후 친구이자 우체국장인 ‘조셉 룰랭’은 아들인 ‘아르망 룰랭’에게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러나 고흐의 동생 역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르망은 고흐가 마지막 머물렀던 마을로 가서 그의 삶을 더듬어본다. 영화는 그 여정을 담았다.
1890년 7월 27일 한 남자가 황혼이 지는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 오베르에서 쓰러진다. 수척한 모습의 남자는 총상을 입은 채 피를 흘리며 배를 움켜쥐고 있다. 그는 바로 빈센트 반 고흐.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왜 총상을 입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 영화는 그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5만6000장에 달하는 수려한 유화를 사용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메르디앙호텔 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회는 고흐의 작품전이라기보다는 그의 작품을 모작해 영화를 만든 작가들의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회라 할 수 있겠다. 2017년 고흐 열풍을 일으킨 영화 ‘러빙 빈센트’가 탄생하기까지 두 명의 감독과 제작자, 107명의 아티스트들이 간직한 10년간의 특별 스토리도 함께 공개되었다. 전시된 작품은 모두 아마추어 작가들이 그린 모작이지만 고흐의 화풍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특별 전시실에는 11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고흐의 진품 ‘꽃이 있는 정물화’가 전시되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다른 전시실에서는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지만, 진품 유화는 촬영이 불가했다.
총 9개의 섹션과 에필로그로 구성된 전시회를 보면서 빈곤에 시달리며 어두운 시간을 살아야 했던 그의 삶이 안타까워 울컥했다. 전시 룸을 나와 그림 앞에서 인증사진을 찍는데 사진을 찍어주던 아들이 갑자기 “땡큐~” 했다. 뒤를 돌아보니 그림을 그리고 있던 화가 한 분이 나를 향해 브이를 그리며 웃고 있었다.
전시장에는 영화 제작에 참여했던 화가가 직접 그림을 그리며 자리를 지킨다고 한다. 3월 3일까지 전시회 일정이 잡혀 있으니 많은 분이 찾아가 나와 같은 감동을 느껴보면 좋겠다.
아들딸과 식사를 했다. 식사 도중 국민연금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나는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국민연금에 가입한 것이라 했다. 1988년 국민연금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강제로 가입해야 했다. 재직 시에는 회사가 절반의 금액을 내줬으므로 큰 부담이 안 되었다. 그러나 퇴직 후에도 연금보험료는 계속 내야 했다. 나도 힘들었지만 계속 부었다. 그렇게 냈던 보험료가 이제 매달 연금으로 나오니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연금 때문에 자녀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다. 월 100여 만 원이 물가상승률에 맞춰 꼬박꼬박 죽을 때까지 나오는 것이다. 국민연금 평균수령액은 50만 원 수준이다. 나는 월 100여 만 원을 수령한다. 공무원 연금 월 200만 원에 비하면 절반의 액수이지만, 국민연금 수령자로서 상위급이다. 아들은 그런 내가 부러운 모양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국민연금이 고갈될 가능성이 많아 울며 겨자 먹기로 보험료를 낸다고 한다. 고갈되지 않는다 해도 연금 수령까지는 너무 많은 세월이 남아 있어 연금을 탄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도 했다.
“월 100만 원이나 받으시면 저축도 가능하겠네요?” 아들이 물었다. 나는 가계부를 작성하지 않아 한 달에 얼마를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른다. 내 답변에 따라 아들에게 보태줘야 할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비 30만 원, 보험료 30만 원, 식대 30만 원….” 대충 따져본 금액만 보면 100만 원이 안 되었다. 서울시에서 제시하는 생활임금은 월 200만 원 수준이다. 내 한 달 지출액도 비슷해 보인다. 지출액 중 술값이 가장 큰 금액을 차지한다. 카드결제액이 월 100만 원 정도 되고 한 달에 서너 번 30만~40만 원씩 인출해서 쓰는 금액이 100만 원쯤 되니 대략 그렇다. 물론 해외여행 갈 때 드는 돈은 별도다. 그렇다고 그런 얘기 다 하면 일도 안 하고 수입도 없는데 너무 흥청망청 쓰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죽자사자 일해도 월급을 얼마 못 받는 아들 입장에서 보면 당연했다. 사실은 점심과 저녁도 다 사 먹어 하루 1만5000원 정도를 쓴다. 식대로만 한 달에 45만 원이나 지출이 되는 것이다. 아들은 하루 두 끼를 매식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찾아낸 답변이 경조사비다. 아들이 장가갈 때 와준 사람을 300명으로 잡으면 그 사람들 부모, 장인 장모, 아들딸 결혼식 때 갚아야 한다. 부모나 장인장모가 돌아가신 분도 많지만 그래도 이론적으로는 와준 사람 곱하기 6을 해야 한다. 단순 계산을 해도 가야 할 경조사가 1800건이나 되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다 가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내가 받은 축의금은 물가상승률에 따라 최하 10만 원으로 되갚아야 할지도 모른다. 경조사는 평균 한 달에 세 건 정도 되지만 많을 때는 대여섯 건이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개선해야 할 점이기는 하지만, 일단 신세를 졌으니 갚아야 한다.
아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알지 못했기에 몇 년 전에 발표된 줄도 몰랐는데 요즘 내 마음 속으로 쏙 들어온 노래가 있다. 나는 음악이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젊을 때는 트로트를 듣지 않았다. 아니,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트로트를 들으면 무식해 보일 것 같은 편견까지 있었다.
당시 어른들이 말했다. 나이 들면 음악 성향도 다 바뀐다고, 그러나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큰소리쳤다. 그런데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는 말처럼 나이가 드니 내게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 그렇게 무시했던 가수 남진, 나훈아가 지금은 너무 섹시해 보이고 노래도 멋지게 들리는 것이다.
최근 유튜브를 보다가 한 영상에 눈길이 꽂혔다. 선남선녀의 결혼식에서 우아한 한복 차림의 친정어머니가 축가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신나는 반주에 맞춰 열창하는 노래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들려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노래 제목은 바로 ‘아모르파티(amor fati)’. 아모르파티에서 파티는 우리가 흔히 아는 ‘party’가 아니라 ‘fati’로 운명이라는 라틴어라고 한다. '아모르파티'는 '운명을 사랑하라'라는 뜻이어서 축가로서도 손색이 없는 노래다.
역주행이라는 말이 있다. 오래전에 발표되었지만 당시에는 인기를 얻지 못하다가 다시 유행이 되는 역주행 노래가 있다. 가수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파티’도 그렇다. 리듬이 경쾌해 들으면 이토록 신이 나는데 왜 이제야 듣게 되었는지 의아하다. 가사도 의미 있다. “쏜 화살처럼 사랑도 지나갔지만 그 추억들 눈이 부시면서도 슬펐던 행복이여”라는 구절이 내 가슴을 울린다. 생각해보니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내용 같다. 나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옛 추억이 가슴 아파 슬프게 느껴지는 행복이 있다. 유행가 가사는 어찌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지 놀랍다.
유튜브 동영상에 나오는 매력적인 친정어머니는 무대 위에 나란히 선 딸과 사위를 향해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가슴 뛰는 대로 살라”고 노래했다. 신혼부부에게 할 얘기는 아닌 듯하지만 장면이 재미있어 웃으며 감상했다. 그 영상을 본 후 나도 아모르파티를 배워 멋지게 불러보고 싶어졌다. 한때 가수가 되려 한 적도 있으므로 금방 배워 잘 부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휴대폰을 켜놓고 따라 불러보니 만만치 않은 노래였다. 몇 시간을 연습해도 가수 김연자처럼 감칠맛 나게 부르기가 힘들었다. 리듬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잘 불러보려고 열심히 연습 중이다.
누구나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와서 소설 같은 이야기를 써가며 산다. 자신에게 실망하지 말자.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면 되고 인생은 지금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트로트 가사에 다 녹아 있다.
아모르파티! 우리 모두 운명을 사랑하고 지금을 멋지게 살아보자.
사람들은 유튜브를 통해 반가운 얼굴을 만나게 됐다. 그 주인공은 코미디언 이홍렬. 대한민국 대표 코미디언 중 한 명인 그는 유튜브에 자신의 채널인 이홍렬TV를 직접 만들어 개인 방송을 시작했다. 평생 입으로 살아온 노장 이홍렬(64)은 커피를 마시면서부터 인터뷰, 메이크업, 그리고 표지 촬영을 할 때까지 시종일관 떠들었다. 정말 누구 말처럼 입을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쉬지 않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의 올드보이 이홍렬에게 입이 살아 있는 그날까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들어봤다.
방송가에서 쌓은 그의 업적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이 필요할까. 나이나 경력에서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소위 ‘올드보이’인 그는 새로운 무대로 가장 젊은 매체를 선택했고 이 도전은 많은 화제를 일으켰다. 어느새 구독자가 1만 명에 육박하는 ‘이홍렬TV’의 작가이자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이홍렬을 만나자마자 물 만난 탈출구 유튜브 얘기부터 꺼냈다.
“이제 SNS를 거부하면 대화가 단절되는 세상이 됐어요. 부부도 마주앉은 상태에서 사진을 보내고 공유하기도 하죠. 유튜브를 시작한 것도 제가 기계에 능해서라기보다는 이건 반드시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거예요. 너무 즐겁고 재밌어요.”
이제 이홍렬TV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과거 브라운관을 주름잡았던 코미디언 이홍렬은 자신이 유튜브 방송을 시작한 걸 SNS 시대에 맞춘 당연한 일이라고 밝혔다. 그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설게 다가올지도 모르겠지만, 디지털을 잘 받아들여서 쓰면 삶의 윤활유가 된다며 디지털 예찬론을 폈다.
“예를 들어 부자지간, 모자지간, 모녀지간, 부녀지간이 싸웠다고 해봐요. 예전 같으면 아침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둘이 화해하려면 다시 보게 되는 시간까지 일단 기다려야 했죠. 그때까지 두 사람 다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그런데 문자로 ‘아빠가 미안했다’고 하면서 이모티콘을 사용해보세요. 딸도 같이 답해줄 거예요. 디지털을 잘 받아들이면 이렇게 금방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낼 수 있어요.”
사실 SNS는 젊은 세대의 주된 소통 수단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그 자체로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
“내가 사기엔 아까운데 남에게 선물 주기엔 좋은 게 이모티콘이에요. 그래서 이모티콘은 조금 친해지려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쏴요. 상대가 그걸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 덕분에 전 이모티콘 부자예요’ 하는 말도 듣고.”
이홍렬은 시니어 세대가 디지털을 받아들이면 가질 수 있는 장점으로 디지털만 아는 주니어들에게 디지털로 접근해 아날로그 감성을 전해줄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제기차기를 모르고 물수제비도 몰라요. 그걸 알려주면 너무 신나합니다. 디지털로 공유하고 아날로그적 공감으로 이끌어내면 더 큰 울림이 있거든요.”
‘고양이가 일인칭이 된다면?’
현재 이홍렬TV는 반려묘인 러시안 블루 고양이 풀벌이와의 추억과 강화에서의 일상을 다룬 두 개의 콘텐츠로 만들어지고 있다.
“2013년에 처음 계정을 만들어두고 그냥 놔뒀어요. 그런데 2년 전에 우리 고양이를 보는데, 털이 하얗게 쌓인 거예요. 털이 왜 저렇게 쌓였지? 하고 생각해보니 얘가 열다섯 살이에요.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쟤가 만약 일인칭이 된다면 할 얘기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평소 일상을 영상으로 남기는 게 취미였던 터라 그동안 얘에 대한 동영상을 많이 찍었어요. 그래서 그 자료들을 갖고 제주도에 가서 2박 3일 동안 유튜브에 올릴 에피소드 40편을 정리했어요.”
이홍렬은 툭하면 동영상을 찍는다. 재미있어서다. 그는 고양이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온 30년 동안의 모습을 담은 아날로그 사진과 VHS를 모두 디지털화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자료들은 이홍렬TV의 자원이 되고 있다.
“유튜브가 올 시대를 준비했느냐? 아니에요. 다만 이것들이 다 짐이었거든. 보관이 힘들었어요. 사실 기록물을 정리하면 보물이고, 정리 안 하면 쓰레기죠. 그래서 다 정리한 거죠. 1테라바이트짜리 하드디스크에 두 아들 기록, 사진, 동영상을 다 넣었어요.”
재미와 감동을 풀어주자
고양이 풀벌이는 올해 4월에 눈물이 나고 붓고 해서 진단을 하니 구강암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람으로 치면 여든네 살의 나이. 세 가지 선택이 있었다. 첫 번째는 턱을 잘라내는 것, 두 번째는 방사선 치료, 세 번째는 가족이 호스피스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홍렬은 세 번째를 선택했다. 고양이가 아프면 마취주사를 놔주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마시게끔 도와줬다. 얼른 안락사를 시키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그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도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리는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나. 그리고 마침내 갈 때가 되었고, 풀벌이는 그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이 기록한 풀벌이와의 추억들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만의 추모 방식이었다.
“풀벌이를 키운 것과 아이들 키운 것을 맞물려서 보여주는 형식이에요. 저 말고 다른 누가 편집을 못해요. 찾는 걸 저밖에 모르니. 죽을 지경이죠. 5분짜리 동영상 만들려면 대여섯 시간이 걸려요. 심하게 본 건 백 번도 봤고.”
이홍렬TV의 목표는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가 없으면 감동이라도 보여주자, 안 찾아오면 어떠냐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아무도 안 봐도 괜찮다, 풀벌이와의 추억만 함께 나눌 수 있는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했어요.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얘기하고 싶었어요. 사실 유튜브는 독하거든. 타이틀 독한 거 쓰지 말자고 다짐했어요. 솔직히 그런 걸 쓰라면 자신 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 말고, 따뜻하고 재미있고 의미 있는 걸 하자. 늘 그럴 순 없어도, 재미가 없다 해도 메시지는 갖자는 게 제 생각이에요.”
입담 좋은 노장 개그맨이 유튜버로
유튜브가 독하다는 건 본 사람들은 다 안다. 수많은 자극적인 제목과 캡처 사진이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려고 그야말로 ‘난리를 치는’ 느낌이다. 실제 상당수의 인기 채널을 보면 먹방이라며 산더미 같은 음식을 억지로 먹는다든지, 시시때때로 괴성을 지른다든지, 자극적인 춤과 억측과 욕설들을 쏟아내는 등 종종 기괴하고 무의미한 서커스를 보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날것’을 찾는 사람들의 욕구 때문이다.
그런데 ‘날것’을 찾는 것은 유튜브뿐만이 아니다. 요즘 공중파 방송들도 비슷하다. 소위 말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연예인의 가족을 구경하는 관찰형 예능이 그 증거다.
“요즘은 방송국에서 관찰 예능 기안을 올리지 않으면 통과가 안 된다고 해요. 그런데 그걸 하면 당사자들은 힘들어져요. 집에 설치한 카메라 50대는 언젠가는 떠나게 되거든요. 그런 예능을 하게 되면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짚어주게 되는데, 그러면서 출연자들은 집 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경험을 하게 돼요. 재밌게 하려면 여자는 잔소리하게 만들고 남자는 무식해 보여야 하니까요. 그게 페이크(Fake) 다큐거든요. 진실 반 거짓 반으로 된.”
그래서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유튜브에는 가족에게 허락받은 자료만 올린다. 요즘 올리는 자료는 아이들은 열 살까지, 아내는 옛날 모습을 살짝 보여주는 정도다.
얼마 안 남은 시간, 사랑하자
이홍렬에게 디지털은 가족을 기억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우리 어머니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제가 스물여섯 살 때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란 존재를 알게 된 때를 기준으로 하면 고작 20여 년밖에 같이 못 지낸 거예요. 그렇게 일찍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래서 아내와 함께할 날도 그렇게 주구장창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의 나이로 보면 앞으로 15년만 살아도 여든 살이다. 그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다.
“내일이라도 제가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이 다 나와요. 정말 사랑 많이 베풀어야 하고 집사람에게 잘해야 하죠. 누굴 위해서? 바로 나를 위해서예요.”
디지털로 남게 된 어머니 목소리
이홍렬은 군대 있을 때 받은 어머니의 편지 다섯 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서 철자법도 안 맞고 글자도 삐뚤빼뚤 썼다. 그러나 그 편지에선 소리가 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를 기억에 남기고 싶어서 카세트테이프로 대화를 녹음했어요. 어머니는 대화 중에 ‘꿋꿋하게 살아야 해. 내가 너희들에게 빚 남긴 건 없으니까’라고 말해요. 지금은 그걸 CD로 구워서 내 동생 하나, 누나 하나, 나 하나 갖고 있어요.”
그는 대학교에서 이벤트 연출학과 겸임교수로 지낸 적이 있다. 그때 학생들에게 어머니와 인터뷰를 하라는 과제를 내줬다. 너무나 반응이 좋았다. 그의 과제가 없었으면 어머니와의 추억이 없었을 뻔했다며 정말 고맙다는 말도 들었다. 그게 다큐멘터리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강의를 할 때면 어머니와의 인터뷰를 하라고 조언한다. 마침 디지털이 그것을 도울 수 있다. 다들 카메라는 의식해도 핸드폰은 의식하지 않으니, 살짝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어머니와 대화를 하면 된다. 자연스럽게.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쉬워요”
“유튜브가 너무 재밌어요. 저에게 딱 맞아요. 아이디어 발산할 데가 없었거든요.”
사실 이홍렬 나이가 되면 방송에서의 자리가 달라진다. 골든아워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 으레 ‘요새 왜 안 나오세요?’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 말은 그의 표현에 따르면 ‘연예인이라면 백 퍼센트 듣게 되는 말’이라고 한다. 특히 나이 든 연예인은 ‘송해 선생님도 아직 저렇게 하시는데 왜 안 보이느냐’라는 말도 듣는다.
“그렇게 묻는 분들은 제가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죠. 좋아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에겐 가슴 아픈 말이에요. 처음에는 견뎌요, 뭘 좀 해요, 어쩌구저쩌구하죠.(웃음)”
사실 그의 요즘 스케줄을 보면 놀랄 정도로 바쁘다. CJ헬로TV에서 일주일에 다섯 번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강의와 공연, 기부 행사까지 빼곡하게 잡혀 있다. 한 달 평균 10회 정도 강의를 한다.
“나눔이란 것이 처음이 어렵지, 시작하면 멈추는 게 어려워져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서 1998년부터 홍보대사를 해왔는데 20년째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거기 일을 많이 하게 되었죠. 갈 길은 아직 멀지만 제가 도달하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이곳에서 활동한 제 기록을 아무도 깨지 못하게 해놓고 가고 싶은 꿈.(웃음)”
2005년부터 나눔 콘서트 ‘이홍렬의 락락(樂樂) 페스티벌’은 올해로 14회. 2007년부터는 기부 강의 프로그램 ‘이홍렬의 펀펀 도네이션’을 펼치고 있다. 특히 강의는 이홍렬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 현재 128회, 모두 기부 강의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대사인 그는 2012년 부산 해운대에서 서울까지 걸어가는 국토종단을 통해 모은 모금액으로 자전거를 마련해 남수단공화국에 전달했다. 자전거를 받은 남수단공화국의 한 아이가 “자전거를 줄 정도면 키가 클 줄 알았어요. 당신은 키가 작지만 마음이 크군요. 당신을 잊지 않을 테니 당신도 저를 잊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 아이의 말은 이홍렬을 에티오피아로 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제가 강의를 하니까 후배들이 결혼할 때 주례를 서 달라고 찾아와요. 에티오피아 아동 한 명을 후원해주면 답례 없이 주례를 봐주겠노라고 했죠.”
그렇게 해서 결혼한 부부가 28쌍이나 된다. 이홍렬은 에티오피아가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6307명을 파병했는데 그중 121명이 전사했으며 536명이 부상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목표가 또 추가됐다.
“인생을 마칠 때까지 121쌍의 결혼식 주례를 보고 536명의 후원자를 발굴하는 거예요.”
그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는 어느새 9300명에 달했다. ‘열심히 하면 뒤에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그의 지론을 뒷받침해주는 숫자다.
“이제 만 명 넘으면 감사인사를 올려야지. 유튜버 선배들이 2년은 되어야 뭐 하나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구력을 쌓다 보면 댓글에 감동하고, 사람을 웃기고 울리거든요. 그런 걸 보면 힘들어도 그렇게 가자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점점 거칠어지는 인터넷 방송 조류를 역행하는 ‘따뜻한’ 실험을 하는 중이다. 이홍렬이어서 가능한 이 실험을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세상이 독하고 무시무시한 것만이 아닌, 따뜻한 희망이 서려 있다는 걸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희소하고 과감한 도전을 응원하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가 디지털로 만들어내는 아날로그의 따뜻한 세계가 독한 세상의 대안으로 자리 잡는 날을 상상해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S예요. 선생님 저 곧 결혼할 거예요. 고마웠어요, 선생님"
"S야 정말 오랜만이구나. 참으로 축하한다. 이제는 힘든 일은 다 잊어버리고 좋은 사람과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S를 만난 것은 그녀가 평택여고 2학년인 1998년도 봄학기였다. 어느날 컴퓨터실에 갔던 나는 작은 소동을 목격했다. 보육원에서 살고 있던 S가 같은 보육원의 다른 친구와 둘이서 소풍비 청구서를 그곳에서 인쇄하다가 그만 그들의 담임 선생님께 들켜버린 것이었다. 혼나고 있는 아이들의 사연을 알고 나니 가슴 아팠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온순한 성격의 학생들이 얼마나 용돈이 쓰고 싶으면 가짜 청구서까지 만들었을까. 그달부터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두 학생에게 한 달에 각각 만 원씩 용돈을 줬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비밀로 하고 쓰고 싶은 곳에 쓰라고 했다. 이일은 그들이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여름 어느 날
2층에서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던 나를 본 S가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뒤로 감췄다. 때마침 S는 아래층에서 2층으로 올라오던 중이었다. 다달이 자신에게 용돈을 주던 내 눈치가 보여 맛있게 먹던 아이스크림을 숨기는 행동에 다시 마음이 내려앉았다.
"S야 괜찮아 그 돈은 뭐든지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쓰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쓰라고 준 것이거든."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내 눈치를 보며 주눅 들어있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며 긴장한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S는 졸업 무렵, 나에게 주석으로 된 연주하는 소녀 인테리어 소품을 선물했다. 자신이 쓰고 싶은 곳에 쓰라고 줬는데 나한테 쓰다니.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허나 내 선물을 산 것도 그녀가 쓰고 싶은 곳에 돈을 사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고맙게 받기로 했다.
그녀가 전화로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린 것은 고등학교 졸업 후 3년 정도의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학교를 나가서도 나를 잊지 않고 소식을 알려준 S가 고마웠다. 먼 지방에서 결혼하는 그녀의 결혼식을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행복을 마음껏 빌어주었다. 외롭게 자랐던 그녀가 사랑하는 이와 서로 믿고 존경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참으로 간절했다.
8월의 무덥던 어느 날 마르크 샤갈의 작품을 볼 기회가 생겼다. 흔히 그림 전시회는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감상했는데 이번에는 강남의 M컨템포러리 아트센터이다. 생소한 곳이라 찾아가기가 어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작품전이 끝나는 날이 다가오고 있어 부리나케 그림을 보러 갔다.
유명 작가와 작품에 관한 얄팍한 지식을 가진 나는 샤갈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었는데 실은 샤갈의 작품에 이러한 제목은 없다. 김춘수 시인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과 혼동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김 시인도 샤갈의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어 쓴 시라 한다. 실제로는 샤갈의 ‘비텝스크 위에서’가 눈 내리는 마을을 그린 작품이라 한다.
언젠가 ‘비텝스크 위에서’를 보았을 때 느꼈던 우울과 슬픔이 생각난다. 비텝스크는 샤갈의 고향으로 그가 늘 그리워하던 곳이라 한다. 비텝스크는 아픈 사연을 지닌 지역으로 유대인의 탄압이 심했다. 짐 보따리를 진 검은 남자가 공중에 떠 있는 이 그림에서 문외한인 나도 어떤 어두운 슬픔을 공감할 수 있었다.
어쨌든 샤갈을 떠올리면 환상적인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사람들이 거꾸로 서 있거나 동물들도 날아다니듯 표현되었다. 신랑신부도 꼭 안은 채 하늘로 길게 떠 있고 새가 거꾸로 날아가는 모습 등은 중력의 법칙을 벗어난 샤갈 작품의 특징 중 하나이다.
전시회는 보통 사진 촬영이 금지인데 이번 샤갈 전은 3, 4부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4부로 나뉜 전시회는 1부 꿈, 우화, 종교, 2부는 전쟁과 피난, 3부는 시의 여정, 4부 사랑이다. 중력을 거스르는 사랑 표현 작품이 많은데 샤갈은 사랑꾼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랑이 주제인 4부에서 샤갈은 부인 벨라와의 결혼식 그림을 비롯해 남녀가 함께 등장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그러나 대부분 밝은 색채와 대비해 얼굴은 아무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아 의아한 느낌을 받는다.
샤갈과 부인 벨라가 등장하는 그림에선 사랑하는 연인들이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듯하다. 샤갈의 그림은 사랑에 빠질 때 느끼는 강렬한 감정을 생생하게 환기시킨다. 샤갈과 벨라는 서로 사랑했고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인생관을 공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벨라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버지니아와 바바 그들의 아이들까지도 사랑했고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동물을, 태양을, 자연과 꽃들을, 그리고 서커스와 시 그리고 신을 사랑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나는 그대만을 바라보고 그대는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할 뿐”이라 했는데 그림 속 주인공은 부인인 ‘벨라’가 아닌 ‘바바’라는 여성이었다고 하니, 사랑꾼인 그를 이해해 주어야 할지 배신감을 느껴야 할지 조금 혼란스럽다. ‘진정한 예술은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는 M컨템포러리 마르크 샤갈의 ‘영혼의 정원展’을 멋지게 감상했다.
1, 2부는 좀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받았지만 사랑을 주제로 한 4부는 화려한 색감의 환상적인 표현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부인만이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했다 한들 어찌하겠는가? 샤갈의 작품을 보고 따뜻한 위로를 받았으니, 이로써 다 용서하고 이해해주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