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보문산(寶文山) 사정(沙亭)공원에는 시비(詩碑)들이 있어, 언제 가도 느리고 깊은 산책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의 이란 시가 발길을 붙잡는다. ‘출세의 해탈도 꿈입니다.’ 가슴에 꽂히는 구절을 새기며 추수 김관식(秋水 金冠植·1934~1980)의 를 읽는다. ‘저는 항상 꽃잎처럼 겹겹이 에워싸인 마음의 푸른 창문을 열어 놓고,’ 하늘을 바라본다.
다시는 못 올 눈물의 서정시인 박용래(朴龍來·1925~1980)의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시비를 어루만지며 시혼(詩魂)에 젖어든다. 멧새의 울음 따라 후드득 아침이슬이 떨어진다. 화강석이나 오석(烏石)을 잘 다듬고 깎아 예인(藝人)들의 글씨로 새긴 전아(典雅)한 시비는 눈을 트이게 하고 마음까지 맑게 한다.
“박용래 시인의 시비 위에는 선생님의 브론즈 소녀상이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요?” “워낙 순진무구한 시인인지라, 항상 하늘을 바라보는 순수한 소녀상을 빗돌에 더하고 싶었어요.” 대전시립미술관 찻집에서 최종태(崔鍾泰·1932~ )조각가와 나눈 대화였다. 전에도 전시장에서 여러 번 뵙고 인사는 드렸으나 그날은 선생 부부와 우리 부부가 전화로 약속을 하고 만난 뜻 깊은 자리였다. 마침 그해(2005년) 7월 20일부터 9월 7일까지 그곳에서 전작전(全作展) 형식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초기작부터 나무 돌 브론즈의 조각들은 물론 파스텔화, 드로잉, 매직화(magic pen으로 그린 그림), 조각의 구상 단계의 연필 스케치까지 미술관 전체에서 한 예술가의 모든 숨결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선생의 조각 작품은 수집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현대나 가나화랑에 부탁해도 일이년 기다리기가 다반사였다. 작품이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리고 과작(寡作)일 뿐더러 미술품 경매시장에도 작품이 나오지 않아 몇 년에 한 번 열리는 전시회만 기다려야 비로소 선생의 작품을 소장할 수가 있다. 선생의 작품을 수집하려 돈을 모으다가 다른 미술품을 수집하곤 하였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판화, 드로잉, 매직그림들부터 사 모았다. 지금 생각해도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뜻을 세우고 기다린 끝에 지금은 몇 점의 조각 작품도 수집하게 되었다. 이 파스텔화는 인사동 노화랑에서 을 열 때 오백만원을 주고 바로 구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이 큰 사진으로 일간지에 소개되는 바람에 예서제서 구입하고자 해서 오픈 날 바로 떼어왔다. 선생은 수상집에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아주 깜깜한 지경에, 파스텔로 그림그리기를 하므로 그 어려움을 견디어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1984년에는 파스텔화만으로 전시회를 열어 국내외의 큰 호평을 받았다.
“나는 남자 그림은 네 명만 그렸다. 예수, 아기예수, 요셉, 그리고 내 손자뿐이다.”고 한 걸 보면 이 그림은 아기예수와 성모일 테지만, 성화(聖畵)가 아닌 여느 엄마가 아들을 기꺼워하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애수와 명상에 잠긴 눈망울에서 깊은 고요와 환희를 감지하게 된다.
조치원 인근 야산 기슭, 허름한 작업장에서 유영교(劉永敎·1946~2006) 조각가를 만났다. 잔설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바람이 제법 맵게 불었다. 40kg짜리 LP가스 빈 통으로 만든 난로에서는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여기저기 색을 달리하는 대리석덩이가 흩어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대리석 산지 카라라(Carara)에서 수입했다고 했다. 오전 작업을 끝내고 티 타임이라며 녹차를 따라 주었다. 흙에 뒹구는 저 돌덩이를 보며 얼마나 많은 사색과 명상으로 형상을 끌어낼 수 있단 말인가. 고뇌의 흔적으로 가득 찬 밑그림들이 벽에 빼곡하게 붙어 문풍지처럼 나부꼈다.
유영교 조각가는 1976년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78년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2년간 국립미술아카데미에서 세계적으로 저명한 조각가 에밀리오 그레코(Emillio Greco·1913~1995)와 페리클레 파치니(Pericle Fazzini ·1913~1983)를 사사했으며 그 후는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 지역으로 옮겨 6,7년간 조각 작업을 하며 돌의 성격을 파악하고 국제적 미술 감각을 익혔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의 명작들도 카라라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유서 깊은 그곳에서의 작품 활동이 우리나라 많은 후학들의 카라라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1986년 귀국하고 대학에도 출강하면서 열정적으로 빼어난 대리석 작품을 탄생시켰다. 1996년 개인전에서는 초기의 소박한 여인상, 모자상 가족상에서 합(合)형태의 반추상과 구도자(求道者) 선승(禪僧) 등 심오한 인간 내면의 정신을 표출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의 작품들의 모티브는 자연에서 찾는다. 자연을 볼 때 바쁜 우리 눈으로 보지 말고 매우 느리게 돌아가는 자연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그의 얼굴이 나타나는데, 그 고운 형상은 침잠의 미소를 짓게 한다.”고 작가노트에 쓰고 있다. 50세 이후로는 조각을 환경의 매체라 인식, 건축공간과 하나 되는 움직이는 조각을 시도하여 등의 역작을 남겼다.
이 천재 조각가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먹먹한 가슴으로 하늘만 바라보았다. 아 아 무심한 하늘이시여!
이 은 대리석 작업이 무르익던 1992년 작으로, ‘이 애가 내 아들이에요!’ 엄마의 대견해하는 표정만으로 더없는 기쁨을 준다. 엄마의 풍만한 미소가 잔뜩 찌푸린 아들의 얼굴과 대조되어 웃음을 자아낸다.
여름의 한가운데, 배롱꽃을 바라볼 수 있음은 크나큰 축복이다. 긴 꽃타래에 꽃망울이 다투어 터지며 백 일간 피고 지고 한다 하여 나무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담홍색, 보라, 흰색의 꽃은 그 기품 또한 맑고 깊다. 고창의 선운사나 안동 병산서원에 가시거든 수백 년 한자리에서 꿋꿋이 풍상을 견디어 온 배롱나무 꽃그늘에 서서, 굽은 둥지에 살며시 귀를 대고 영겁의 소리를 들어보시라.
“얘야, 나는 저 나무 백일홍이 활짝 필 때, 저승 가는 등불로 삼았으면 좋겠구나.” 하시던 어머니가 엄동의 눈꽃 속에 저승으로 가셨기에 더욱 안타까운 꽃, 긴긴 여름을 애틋하게 한다.
어머니에게 과연 나는 기껍고 대견한 아들인 적이 있었을까.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이재준(아호 송유재)
봄 바다, 물이랑 위 바람이 너울질 때, 깊이 따라 색의 스펙트럼(spectrum)이 펼쳐진다. 더 깊은 곳의 쪽빛에서 옥빛으로, 얕은 모래톱 연두의 물빛까지 그 환상의 색 띠를 보노라면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아쉽게 잃어버린 사람이 생각나고,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지난 세월이 아프게 떠오른다.
바람 따라 물결은 끝없이 흘러가고 또 밀려오지만, 사념(思念)의 안개는 쉬이 걷히지 않는다. -밤하늘 별빛 바라보는/맑은 눈에 고이는/한 방울 눈물의 깊이에서/바다가 태어나듯- (허만하 시 ‘모래사장에 남는 물결무늬처럼’에서)
전혁림(全爀林 1916~2010) 화백은 남해의 통영에서 태어나 94세로 장서(長逝)할 때까지 바닷가를 떠난 일이 없었다. 통영수산학교 재학 시부터 그림 공부에 관심을 가졌다. 해방 후에는 유치진(희곡, 1905~1974), 유치환(시, 1908~1967), 윤이상(음악, 1917~1995), 김상옥(시조, 1920~2004), 김춘수(시, 1922~2004) 등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과 ‘통영문화협회’ 창립동인으로 활동하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정물’ 입선을 계기로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해 1952년 그 유명한 ‘밀다원(蜜茶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다. 1950년 부산지방 최초로 추상회화를 수용한 주인공이며 1955년까지 해마다 개인전을 열어 미술에 대한 열정을 꽃피웠다.
1956년부터 1962년까지는 부산 대한도자기 공방에서 도자기 그림을 연구하여 훗날 도자화(陶瓷畵), 도조(陶彫), 채색테라코타의 내공을 쌓았다. 1976년대까지 부산에 주로 머물되 통영 일대와 바닷가 갯마을 풍경을 진한 청색조의 활달한 붓놀림으로 그리면서 추상화와 부감(俯瞰)의 구도를 과감히 활용하였다.
1977년 통영으로 귀향, 임종 시까지 통영을 떠나지 않았다. 2003년 5월 ‘전혁림 미술관’을 향리에 세웠으며 2005년에는 ‘구십 아직은 젊다’의 표제로 개인전을 여는 등 오방색의 평면, 입체오브제, 도자기, 목조(木彫) 등 만다라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장르의 미술활동으로 노익장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이 그림 ‘충무항’은 1980년대 통영 귀향 후의 작품으로, 반추상의 부감법이 나타난다. ‘김 과장 전시장 가는 날’이라는 타이틀로 열린, 아트페어 개막 날, 참여한 화랑에서 원로·중진미술가들의 작품을 한두 점씩 저렴하게 판매할 때 구입한 작품이다. 그 화랑 대표는 요즈음 만나도 이 작품의 안부를 묻곤 한다. 산자락은 노을에 설핏 물들고, 조감(鳥瞰)으로 된 구도 속 낮은 산과 바위로 나뉜 바다엔 고깃배 몇 척이 한가하다. 망망대해는 아니지만 어항의 실경이 반추상 기법의 꽉 찬 밀도로 그려져 안정감을 주고 있다. 바다가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와 일상의 리듬을 같이 하고 있다.
이 화가는 정물이나 모판[木板] 위에 올린 채색화, 도자화 여타의 작품 속에서도 푸른 바다 이미지는 빠뜨리는 일이 없다. ‘장롱 깊숙이 보관되었던 한복에 저절로 바랜 색상이나, 건물에 칠한 단청의 미’가 있다고 평자는 말한다. 노상, 바다가 이 화가 의식에 잠재되어 있기에 부지불식간에도 계절 따라 변화무쌍한 바다 이미지가 여러 장르의 미술 작품으로 스며들게 된 것이리라.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국 유학도 하지 않고 ‘고구려 벽화에서 우리나라 미술의 연원을 찾고자 한다.’는 이 화가의 부단한 노력이, 한때는 지방에 묻힌 채 저평가되었던 질곡의 시절을 넘어, 큰 예술인으로 꽃피우게 되었다.
바다를 주제로 미술활동을 하는 예술가가 어찌 한 둘일까마는, 온 생애를 푸른 바다에 넋을 적신 김한(1931~2013) 화백을 우선 꼽지 않을 수 없다. 함경북도 바닷가 명천포구의 ‘솔골마을’에서 태어나 조금 남쪽, 성진항의 외가에서 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졸업 시 발군의 그림 그리기로 특기상을 받으며 화가를 꿈꾸었다. 한 집안의 장손이 ‘환쟁이’가 될 수 없다는 부친의 결사반대로 상급학교에 진학할 때는 의학전문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식만 마치고 가출하여 그림과 문학에 골몰하며 어려운 현실과 부딪쳐 나갔다. 6·25가 터지자 그 와중에도 화가가 되어야 한다는 열망만으로 단신 남하하였다. 네 해 뒤 천신만고 끝에 따로 남하한 부모와 동생들과 부산에서 상봉하였으나 자기를 끔찍이 사랑하던 조부모와 남동생 하나는 고향에 남은 채였다.
한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장남의 사명감과 냉혹한 삶의 괴리 속에서도 홍익대 미대에 입학하였지만 끝내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입선함으로써 비로소 화가의 길에 입문하였다. 간판을 그리고, 무대장치를 돕거나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미군의 후의(厚意)로 베트남 전쟁 시 파월, 3년 여 동안 초상화 등을 그리며 경제적 기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 주제는 두고 온 고향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고깃배 몇 척이 고작인 가난한 포구, 어민의 고단한 삶을 바다와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색으로 그려냈다. 특히 남편의 무사 귀가를 바라며 마음 졸이는 어부 아낙의 아픔을 멍 자국 같은 짙은 청회색으로 표현하였다. 화가 자신이 문학에 심취했던 깊은 소양이 화문집(畵文集)을 출간할 만큼 높은 수준이었기에, 그의 그림은 서사적이며 설화적이다.
이 그림 ‘회(懷)’도 열매 가득 달린 나무 아래 모자의 행복한 순간을 우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좁은 화폭 속에서도 사랑과 풍요로움이 가득 넘친다. 푸른 이마에 어린 우수를 노란 꽃 한 송이가 달래주고 있다. 과장된 눈빛이나 부푼 손가락은 역설적임에 틀림없다. 가난하고 피곤한 아낙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려는 화가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인사동 화랑 경매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낙찰 받을 수 있었다.
1995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하여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 천착(穿鑿)한 공로를 공인 받았다. 이후 왕성한 작업으로 2013년 생애를 마칠 때까지도 줄곧 푸른색 고향바다를 화폭에 남겼다.
“그의 그림은 온통 고향과 추억으로 물들어 있다. 그의 그림은 목젖을 메이게 하는 아릿함이 가득 고여 있는, 그림으로 그리는 애조 띤 서정시이다. 그의 푸른색은 공간을 알리는 색이 아니라 시간을 알리는 색”이라고 어느 평론가는 말한다.
전혁림이나 김한 화가에게 바다는 푸른 넋이었으며, 피돌기와 같은 숙명이었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남편을 잃은 지 7년째 되는 해였다. 두 딸과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살고 있던 그때 집 안에서 그녀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그림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의 빈정거림을 참아가며 모았던 그 그림들. 그리고 자녀들이 모두 출가한 뒤 다시 찾아온 인생의 위기에서 그림은 또다시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판교에서 만난 하효순(河孝順·66)씨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그녀 나이 41세였다. 하늘같이 믿고 의지했던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녀 곁에는 아이 셋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강한 생활력과는 거리가 먼, 전형적인 편안한 삶을 살아왔다. 고향인 진주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여자도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어머니 뜻에 따라 상경해 중앙대학교 보육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에 취직 제의가 들어왔다. 막연히 꿈꿔왔던 큰 회사의 비서 자리였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회사에 다니다 남편을 만났다. 그녀가 일하던 인천제철은 인천시청 근처. 자주 점심을 먹으러 가던 곳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알고 보니 지인의 친구였고, 자연스레 연애가 시작됐다. 그리고 결혼했고 아이 셋을 얻었다.
빈정거림 속에서 수집한 그림들
느닷없는 남편의 죽음. 하늘이 무너졌다.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뭘 해야 할지도 몰랐죠. 남편에게만 의지하고 살았었으니까. 세상 물정을 모르니 돕겠다는 다른 이들의 선의도 악의로 느껴졌어요. 날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죠. 그래도 다행인건 딱 하나 제대로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어요. 아이들은 제대로 공부를 가르쳐, 바르게 키우겠다는 결심이었죠.”
생계는 부동산 사업을 크게 하는 친구를 도우며 유지했다. 오직 아이들의 공부에만 집중하며 지냈다. 그 와중에 유일한 그녀의 버팀목이 된 것은 그림이었다.
“동양화를 좋아하셨던 아버지 영향인지 자연스럽게 그림을 좋아했어요. 남편과 백화점에 가면 늘 들르던 곳이 있는데 맨 위층이었어요. 그곳에 갤러리와 분재 매장이 함께 있었는데, 남편은 분재를, 저는 그림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그때부터 그림을 한 점씩 사모으기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림을 산다는 것은 주변으로부터 쉽게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집이 화랑이냐는 핀잔은 양반이었다. 어떤 친구는 돌았냐고도 했다.
동향 사람이라 더 애착이 갔던 박생광(朴生光·1904~1985) 화백의 작품은 할부로 구입하기도 했다. 그밖에 배정례(裵貞禮·1916~2006),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문봉선(文鳳宣·1961~ ) 화백 등 내로라하는 작가의 그림들로 집안을 채워나갔다. 남편을 보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삶의 낙은 갤러리를 찾는 것이었다. 갤러리 직원들은 그녀를 ‘청담동 지영이 엄마’로 잊지 않고 기억할 정도였다.
“문봉선 화백은 그가 대학원생일 때 처음 만났어요. 작품에 관해 묻자 수줍어하던 문 화백이 아직도 생각이 나요. 그 이후 그분의 작품을 하나 더 살 기회가 있었는데, 사정상 다시 돌려드려야 했어요. 그때도 절 기억해 주시더라고요. 그림을 수집하는 것은 단지 작품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작가와의 관계도 의미가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죠.”
큰딸 한마디에 정신 번쩍, 생계현장 속으로
어느 날 “엄마 우리 괜찮아?”라는 큰딸의 질문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고 했다. 부동산 경기는 꺼져가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을 주변의 지인들에게 그림을 팔아 위기를 겨우 넘기고 있는 상태였다. 남편을 보내고 난 뒤 7년째, 아이의 지적에 생계 전선에 뛰어들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광명의 프랜차이즈 피자 매장이었다. 젊은이들과 계속 만날 수 있고, 일찍 끝날 수 있는 일을 찾다 발견한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기대 이상으로 잘 됐죠. 잘 돼야만 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같이 왕복 34km 거리를 출근했어요. 시장도 직접 다니고, 주방에서 설거지도 도맡아 했죠. 그 매장을 시작하면서, 본사 회장에게 그 지역의 랜드마크로 만들 것이라고 큰소리 쳤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죠. 덕분에 빚도 갚고 세 아이의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있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자식 농사’만큼은 떵떵거릴 수 있게 됐다. 첫째 딸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모 대학 교수로 활동 중이고, 둘째 딸은 국내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로펌에서 11년째 비서로 근무 중이다. 막내아들은 국내 은행을 다니다 뉴욕주립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미국 유명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짧게 보낸 두 번째 결혼과 맞닥뜨린 지옥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어 갈 때쯤 큰 결심을 하게 된다. 재혼이다. 54세가 됐을 때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다가 큰애 결혼시키고, 막내 군대 보내고 나니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아이들은 내 손에서 멀어져 가고, 밥 한 끼 함께할 사람이 없게 되더라고요. 자식도 소용 없다는 생각을 할 때쯤 친구들의 소개가 있었어요.”
차관까지 지낸 관료 출신에 무엇보다 성격이 잘 맞았다. 둘 다 따지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일은 순식간에 진행됐고, 그렇게 두 번째 인생은 순조로운 듯 보였다. 새 남편의 고향에 내려가 살겠다는 결심도 했고, 집도 마련했었다.
하지만 10년이 채 안 돼 남편을 식도암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남편을 두 번이나 떠나보내고 남겨진 여자의 마음이 편안할 리 없었다.
“지옥 같았어요. 세상 사람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칠 수조차 없었어요. 계속해서 숨고만 싶었고, 실제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고 커튼이 드리워진 방에 숨어 있었죠. 건강도 순식간에 악화됐고요.”
그래서 미국 뉴욕에 있던 아들에게로 갔다. 한국에 있는 것만으로도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그때도 힘이 되어 준 것은 그림이었다.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많지만, 센트럴파크 근처에 작은 화랑들이 많아요. 그곳에 출근도장 찍듯 매일 가서 종일 그림만 보고 살았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는 아들이 함께 관광지에 갔다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카메라 뷰파인더 속에 비치는 엄마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인다고. 그럴 수밖에 없었죠.”
그 이후로 2년을 더 그렇게 살았다.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고, 큰 소리도 못내고 그렇게.
고희(古稀)에 개인전 통해 인생 되돌아볼 터
집 안에만 머물다 인생의 활기를 찾은 계기는 두 권의 책이었다. 부산의 친구가 선물한 컬러링북과 며느리가 가져다준 흔한 잡지 한 권.
무채색의 컬러링북에 하나하나 색을 입혀가다 보니 그림은 소유하고,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스스로 색을 입히고,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지금 그림 인생의 원천이 된 갤러리 겸 커뮤니티인 ‘아트담’이다.
“살면서 4B연필 한 번 잡아본 적 없었는데 그림을 어떻게 그릴 수 있겠어요. 그냥 무작정 이곳으로 찾아와 졸랐어요. 유치원 다니는 아이 한 명 가르친다는 기분으로 가르쳐 달라고. 그 이후로 2년 가까이 한 번도 결석 없이 나왔어요.”
그렇게 세 번째로 그녀의 인생에 다시 기둥이 된 그림은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림을 직접 그려서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관계들과 자신감, 재발견한 삶의 목적 때문이었다.
“지금은 전에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것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여요. 이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꽃잎이 어떻게 나고 지는지. 세상이 어떻게 생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유심히 관찰할 수 있게 됐죠.”
무작정 피하려는 삶,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던 삶에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물론 건강도 되찾았다. 이제는 사람들과 어울려 술도 몇 잔 마실 수 있게 됐다.
“이렇게 개인사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이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죠. 회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스케치하러 이곳저곳 다니고, 마음을 나눈 것도 큰 도움이 됐어요. 이제는 손주들한테도 피자 할머니가 아닌 화가 할머니로 설 수 있어 더 좋고. 앞으론 손주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하효순씨의 또 다른 도전은 이제 개인전이다. 개인전은 아마추어에서 대중에게 평가를 받는 위치로 올라선다는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선 단순한 전시 이상의 무엇이다. 그동안 아트담 회원들과 함께했던 두 번의 그룹전과는 성격이 다르다.
“제 나이 일흔 살을 기념해 그간에 그린 작품들이 모여지면 전시회를 하는 것이 꿈이에요. 열심히 노력해서 그리다 보면 그 결과물들을 남에게 보여줄 마음이 생기겠죠. 나이가 많더라도 무언가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증명해내고 싶어요.”
그 이야기와 함께 그녀가 내보인 자신의 작품의 제목은 ‘내 인생의 오후’였다. 그림 속에서는 곧 황혼을 앞둔 슬픔보다는 행복한 오후의 한순간이 느껴졌다. 이미 전해들은 인생의 굴곡이나 어려움이느껴지지 않는 그런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늙는 건 생각보다 그리 나쁜 건 아니에요. 불필요하게 의식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으면 해요. 밝은 면만 보고 지내다 보면 어느새 인생은 아름다워져 있을 겁니다.”
가구 컬렉션계의 대부 혹은 가구 컬렉션계의 1세대. 모두 aA 디자인 뮤지엄 김명한 관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그의 컬렉션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질과 양에서 모두 세계 수준으로 손꼽힐 정도다. 디자인 가구의 컬렉팅은 그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인생을 펼치는 도화선이 됐다. 그 노력의 집약체가 바로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그 곳에서 김명한(金明漢·63) 관장을 만났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홍대’는 단순히 홍익대학교와 그 앞 거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신촌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큰 소비의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디자인과 출판, 건축 등 다양한 창조물이 샘솟는 곳이다. 이제 지역적으로는 마포구 서교동과 동교동을 넘어 합정동, 창전동에 일부는 서대문구 연남동 일대까지로 그 의미가 확대되기도 한다. 수십 년 전 저잣거리를 축으로 확대된 ‘종로’가 있다면, 지금은 그 역할을 홍대가 해내고 있는 셈이다.
그 홍대의 랜드마크 중에는 aA 디자인 뮤지엄이 있다. 휴일에는 문을 닫고, 오후 5시 전에는 나가야 하는, 으레 생각하는 그런 박물관이 아니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밤늦도록 머물 수 있는, 디자인을 손에 쥐고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aA 디자인 뮤지엄이다. 문화를 주도했던 주인공들이 주변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속에서도 aA 디자인 뮤지엄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공간과 영감의 공급처 역할을 하고 있다. 설립자 김 관장은 aA 디자인 뮤지엄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홍대에, 젊은이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을 통해 돈을 벌고 일어설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디자인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다들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콘텐츠를 담을 하드웨어예요. 어린 친구들은 그 하드웨어를 만들 여력이 없으니 그 부분만큼은 기성세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aA 디자인 뮤지엄은 권위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에도 박물관 공간 한쪽에선 학생들의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해외에 소개할 여러 가지 수단을 찾고 있고, aA 디자인 뮤지엄과 유사한 상설 전시공간을 유럽에 마련하는 것도 고민 중이라고 했다. 홍대를 지키는 기둥으로 마포 디자인·출판 진흥 지구협의회의 회장을 맡아 서울시와 함께 중소 출판인들의 인프라 개선을 위한 작업을 올해부터 본격 진행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의 가구 컬렉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조금 많이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91년 유럽식 레스토랑 ‘아지오’를 열면서 그의 수집은 시작됐다. 그의 공간을 장식할 소품과 가구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그가 손대는 레스토랑과 카페들은 연이어 성공했다.
“운이 좋았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순수했고 열정으로 가득한 시기였지요. 똥폼도 잡고 밤새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엔 정원이 있는 레스토랑에 대한 전문가도 없었고, 평론에도 자유로웠던 시절이어서 쉽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마침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여행 자유화를 통해 외국을 경험한 젊은이들이 그 추억을 공유할 장소가 필요했고, 대표적 여행지인 유럽과 유사한 공간은 그들에게 어필하기에 충분했으니까요.”
그의 공간에 대한 감각과 욕심은 유년 시절의 경험과 맥락을 같이한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그가 뛰어놀던 정원은 아버지의 정성으로 가득했고, 그가 자란 안동은 미적으로 뛰어난 한옥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한국전쟁이 막 끝난 시기여서 주택문화라는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독서와 정원 가꾸는 것 말고는 취미가 없었던 아버님 덕분에 정서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죠. 디자인 역시 직접 경험하고 체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그의 배경은 ‘경험’을 중시하고, 나누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aA 디자인 뮤지엄이나 제주도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모두 이 맥락에서 출발했다. 수집이 본격화되면서 시작한 것은 공부다.
“유럽의 각국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주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매소들을 많이 다녔죠. 그곳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눈을 키우고, 거래 기관과의 신용을 쌓았습니다. 관련 전문서적도 갈 때마다 사들여서 매달 번역해서 읽었고요.”
20년 넘게 진행된 그의 컬렉션은 100여평의 창고 8개를 채울 정도가 됐다. 일본의 업계 관계자가 한국시장 진출을 꿈꾸다 그의 컬렉션을 보고 규모에 깜짝 놀라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제 수집 스타일은 일본 사람들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이 중요시하는 학술적 가치 말고도 조형적 가치나, 시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들도 모았으니까요. 전시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활용까지 생각하는 것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덕분에 컬렉션의 형식이나 아이템들이 다양해졌습니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도 그가 세운 원칙은 철저하게 지켰다. 김 관장 스스로가 정한 약속이다.
“그동안 가구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켜왔던 원칙이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경쟁은 피하고, 갖고 있는 능력 안에서만 하자는 것이죠. 기본적으로 수집은 저에겐 사업의 대상이 아니라 취미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절대 무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수집은 3년 전 멈췄다. 그가 아지오나 다른 카페들에서 손을 뗐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 자르듯 그만뒀다.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고, 다른 관심사들도 생겨났기 때문이다. 아지오를 그만둘 때도 주위에서 이런저런 만류가 있었지만, 단칼에 실행했던 그다. 지금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것처럼 행복하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수집은 그의 인생 2막의 시작이었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양하게 확대됐다. 그중 하나가 무크지 ‘캐비닛’과 ‘캐비닛 Jr.’의 출간이다. 캐비닛 창간호는 전 세계 디자이너 20명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업계의 반향을 일으켰다. 외국 기사를 번역한 것이 아닌, 현지에 찾아가 그들과 직접 나눈 이야기와 촬영한 사진을 게재한 잡지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날아가서 만나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향이 반영됐다.
또 다른 사업은 그의 디자인 안목과 경험이 집약된 ‘aA 디자인 퍼니처’다. 2011년 론칭해 주목받았던 그의 가구 브랜드 aA 디자인 퍼니처는 최근 경기도 가평에 공방을 열고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그의 공방은 우리가 생각하는 ‘가구 공장’과는 차이가 크다. 공방이 곧 전시장이 될 수 있는 정갈한 작업환경과 디자이너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까지 갖추고 있다.
“내 직업에 대한 평가를 상대적 가치로 판단하려 들면 자식에게 내 일을 물려줄 생각을 못 하게 됩니다. 하지만 직업과 일터를 물려주겠다고 생각하면 공간이나 도구 등 모든 것이 달라지죠. 춥거나 덥거나 더럽지 않은, 직원들이 폼나게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위치가 가평인 건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이 많이 표현된 것이죠.”
그는 이 공방을 통해 디자인 샘플이 탄생되면 소비자들을 고려한 가격을 정해 시장에 내놓을 생각이다.
최근 제주에 세운 게스트 하우스 ‘Jeju in aA’는 다시 한 번 그가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워낙 제주가 좋았던 그는 지인들과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하나 있었으면 했고, 수집한 가구들로 공간을 근사하게 꾸며놓고 보니 많은 사람과 그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 목적에 맞게 비용도 저렴하게 책정했다. 주말 가격도 없고, 성수기 가격도 따로 없다. 1년 365일 같은 가격이다. 바가지 상혼이 가득했던 크리스마스나 연말에도 평소 가격을 유지했던 ‘아지오 아저씨’ 김 관장의 고집이다.
“게스트 하우스를 사람들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름을 지었는데, 두 채는 제주 방언으로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간세다리’와 영어로 빈둥거린다는 뜻의 ‘아이들(idle)’입니다. 다른 한 채는 제 손녀의 이름이자 순우리말로 바다를 뜻하는 ‘아라’고요. 이름처럼 젊은이들이 여유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미술관을 세울 계획이다. 예기치 않게 제주 제2공항이 근처로 발표되는 바람에 오해도 받고,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한다.
그는 두 번째 인생을 준비하는 또래의 중년들에게 미루지 말고 바로 실행할 것을 주문한다.
“돈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돈은 절대 가치가 될 수 없어요. 대신 자신에 대한 가치, 신념이 있어야 해요. 저는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습니다. 매일을 태어난 날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하루라도 거르거나 미룰 수 없는 것처럼 인생도 똑같다고 봐요. 그렇게 인생을 준비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나의 작은 관심과 노력으로 아픈 아이들의소원이 이뤄질 수 있다면 멋지지 않을까.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부를 하면 그것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바로 ‘기부의 마법’이다.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은 이처럼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찾아 그에 맞는 재능기부자를 연결하는 곳이다. 재단의 도움을 받아 소원을 이룬 아이들의 따뜻한 사연을 모아 봤다.
도움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www.wish.or.kr
◇돌고래를 좋아하는 혜서의 소원은…
“저는 커서 돌고래 사육사가 될 거예요.” 유달리 동물을 좋아하는 여덟살 강혜서양은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껏 힘을 준 목소리로 대답한다. 또래보다 어휘력이 풍부하고 자기표현이 확실한 아이다.
혜서의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유치원 입학 후부터였다. 병원에서는 뇌종양의 일종인 ‘수모세포종’이라고 했다. 100만 명 중에 5명 정도에게 생기는 병인데 원인조차 알 수 없다고 했다. 작년에만 서른 한 번의 방사선 치료를 했고 올해부터는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동물을 직접 보러 가보고 싶지만 밖에 나갈 수 없었다.
TV에서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혜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혜서는 특히 돌고래를 좋아했다. 돌고래를 보면 기분이 밝아졌다. 조련사의 말을 알아듣고 재주를 부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돌고래를 돌보는 사람은 매일 돌고래와 같이 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혜서에게는 돌고래 사육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이뤄 주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에 혜서의 소원이 전해졌다.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비영리단체와 기부 참여자들이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인터넷기업 ‘11번가’가 후원을 약속했고 약 1만1000명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주도에 위치한 한 아쿠아리움에서 혜서를 돕겠다고 나섰다. 소속 사육사가 재능기부에 나섰다.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실내는 웅성거렸다. 다소 낯가림을 하는 혜서는 굳어 있었다. 하지만 돌고래 ‘세나’를 만나자 이내 긴장감이 사라졌다. “돌고래도 충치가 생기나요?”, “돌고래도 감기가 걸려요?” 아프지 않길 바라는 혜서의 아이다운 질문이었다.
혜서는 직접 돌고래를 지휘했다. 많은 이들의 바람이 돌고래 세나에게도 전해진 것일까. 세나를 매일 돌보던 사육사는 평소보다 더 활발한 세나의 모습이 놀랍다고 했다. 그토록 좋아했던 돌고래를 만난 혜서가 까르르 웃었다. 혜서의 웃음소리가 공연장 곳곳을 채웠다. 많은 이들의 따뜻한 ‘관심’이 모여 동물을 좋아하던 한 아이의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퍼레이드
지난 9월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서 진행된 퍼레이드는 아주 특별했다. “예쁜 공주가 돼서 멋진 왕자님과 퍼레이드를 하고 싶다”던 여섯살 김연우양의 소원이 이뤄지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연우가 세살이었던 2012년, 연우의 아랫배에 뭔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병원에서 ‘난소종양’ 진단을 받았다. 활발하지만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6번의 항암치료를 거치며 참 많이도 울었다. 만화 속에 나오는 공주처럼 항상 예쁘고, 항상 행복하게 웃고 싶었다.
삼성전자 부품사업부(DS)가 후원하는 대학 봉사팀 ‘위시 엔젤(Wish Angel)’이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 연우를 만났다. 연우는 금발에 분홍 드레스를 입고 왕자님과 퍼레이드를 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나눠 주는 착한 공주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삼성전자 임직원과 에버랜드가 연우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나섰다. 연우의 소원이 이뤄지는 날의 기억을 사진으로 남겨 주기 위해 황영철 사진작가가 재능기부에 나서기로 했다.
“공주님, 이제 백성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왕자님과 함께 퍼레이드에 오르실 시간입니다.” 원하던 대로 공주가 된 연우가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달리던 차가 잠시 멈추자 연우는 차에서 내려 가방 속에 담아 온 과자와 사탕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연우가 자라는 동안 큰 용기와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모아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낸 어머니 박윤서(가명)씨가 딸의 손을 꼭 잡았다. 박씨는 “이 정도까지 우리 아이의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공주가 되고 싶다던 소원을 이뤘으니 이제 앞으로 연우가 커서 무엇을 하든지 다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드론으로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요
김규현(15)군은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처럼 활발한 소년이었다. 2013년 1월, 스키캠프에서 다리가 부러져 병원을 다닐 때까지도 뼈가 붙기만 하면 다시 두 발로 뛸 거라고 생각했다.
치료 3개월째가 되던 때였다. 갑자기 고열이 생기고 염증수치가 높아졌다. 황급히 찾아간 큰 병원에서 뼈에 악성 종양(골육종)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뒤로 세 번의 큰 수술과 여섯 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전처럼 걷거나 뛸 수 없었지만 규현이는 장애진단을 원치 않았다.
규현이는 차분한 성격에 말수가 적은 성격이지만 ‘레고’ 이야기가 나오면 눈망울을 빛냈다. 자유롭게 날고 싶은 규현이의 방에는 레고로 만든 비행기가 많았다. 규현이는 ‘드론(무인비행기)을 갖고 싶다고 했다. “다리를 다쳐서 산에도 못 올라가고 움직이는 게 불편하니까 저 대신 드론을 높이 띄워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보고 싶어요.”
9월 어느 날, 한 식당에서 규현이를 위한 깜짝 이벤트가 열렸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간 규현이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저거 새야?”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낯선 물체는 규현이에게 선물하기 위해 준비한 드론이었다. 규현이의 사연을 들은 한 드론교육 전문가가 재능기부로 조종법을 알려 주기 위해 경기도에서 청주까지 달려왔다. 드론 조종기를 손에 쥔 규현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소원이요? 이제 이뤘는데요.” 규현이는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드론을 조종하는 동안 자신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기부자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 10가지
기부 문화는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잣대다. 빌 게이츠는 사회로부터 얻은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기부운동에 참여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기부자들은 의미있는 일, 관계하는 일, 확실한 목적에 쓰여지는 일에 기부를 원한다. 기부자들의 동기부터 따져보자.
1. 기부의 종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기부에는 먼저 기부자가 특별한 용도를 지정하지 않는 ‘순수 기부’가 있습니다. 반면 기부자가 특정한 사업을 후원할 목적으로 지정해서 기부하는 ‘조건부 기부’도 있고요. 또 개발사업 등을 진행할 때 시행자들이 국가나 지자체에 제공하는 ‘채납형 기부’,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예술작품을 제공하는 ‘기증형 기부’도 있습니다.
2. 우리나라 기부 현황이 궁금해요
아름다운재단 ‘기빙코리아’의 기부금 집계를 보면 2011년 한국인의 연평균 기부금액은 21만9000원으로 직전 조사년도인 2009년의 18만2000원에 비해 20% 이상 늘었습니다. 기업의 경우 상장기업(1700개사)의 한 해 평균 기부금은 8억3700만원, 비상장기업(1만5651개사)의 평균 기부금은 4500만원 수준입니다.
3. 개인들은 어떤 동기에서 기부를 하나요
아름다운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기부 동기로 ‘동정심’이 62.1%로 가장 높게 나타나 ‘불쌍하다’는 감정이 여전히 기부 동기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감’의 비중이 2009년 54.8%에서 59.4%로 상승하여 기부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우리나라에서 기부액이 많은 기업은 어디인가요
기업의 기부금(2012년 재무제표 기준) 지출 1위는 삼성전자입니다. 삼성전자는 2353억4900만원을 기부했습니다. 2위는 현대중공업(1329억2700만원), 3위는 삼성중공업(1115억2430만원) 등입니다. 이밖에 케이티, SK텔레콤, 포스코, 현대자동차, 삼성디스플레이, CJ제일제당, 한국전력공사 순으로 10위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5. 정부에도 기부할 수 있나요
우리 법률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모금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개인과 기업에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어 이들 기관이 모금활동을 한다면 암묵적인 강요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기부금에 대한 세제혜택은 어느 정도입니까
먼저 기부하고자 하는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기부금대상 민간단체와 지정기부금단체로 지정된 곳에 개인이 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000만원 이하인 경우 소득금액의 30% 이내에서 15%의 세액공제, 3000만원이 넘는 기부금에 대해서는 30%의 세액공제를 합니다. 법정기부금 단체의 경우 기부자의 소득금액 100% 한도에서 15%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7. 기부금 영수증만 있으면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나요
영수증을 발급한 기관이 ‘지정기부단체’나 ‘기부금대상민간단체’로 등록돼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단체를 세제적격단체라고 부릅니다. 당국에 기부금품 모집등록을 한 단체라고 해도 세제적격단체 선정을 받으려면 별개의 자격과 등록이 필요합니다. 모집단체가 세제적격단체가 아니라면 기부금과 후원금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이 없습니다.
8. 현물기부의 경우 기부금액을 어떻게 산정하나요
기부금 단체에서도 현물의 기부금품 가액의 기준을 얼마로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현물의 기부금은 ‘현재 시장에서 유통되는 정당한 매매가격’으로 계산합니다. 아울러 세월호 참사 당시의 진도군과 안산시, 태안기름유출사고 등에서의 태안군처럼 법률상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은 그 곳에서의 자원봉사도 기부금으로 산정될 수 있습니다.
9. 기부금을 받은 단체가 돈을 손에 쥐고 있지는 않나요
기부금은 2년 내에 반드시 사용하도록 법률에 명시돼 있습니다. 만약 정해진 기한 내에 기부금을 사용하지 않으면 모금단체는 기부금을 기부자에게 반환해야 합니다. 등록관청에서도 기부금품을 어떻게 모금하는지, 어디에 사용하는지를 검사할 수 있습니다.
10. 기부금을 받은 단체의 활동을 상세하게 확인하고 싶어요
원칙적으로 기부금을 받은 모든 단체는 기부자에게 기부한 내용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보고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기부자를 일일이 접촉할 수 없어 대부분 ‘연차보고서’를 공개·제공합니다. 또한 모금기관은 모금액의 사용결과 ‘나눔포털’과 단체의 홈페이지 등을 통해 기부금 모집결과 및 사용결과를 게시 공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자료제공 서울시 기부 길라잡이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라는 영화는 필자가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집사람과 대학교에 들어가 다시 데이트를 시작한 후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함께 본 영화이다. 1963년 6월 스카라 극장에서 상영한 이 영화에는 최고의 칸초네가수 도메니코 모두뇨가 주인공으로 출연해 여러 곡의 칸초네를 불렀다.
그리고 미녀가수 미나가 주제가 ‘행복은 가득히(Il Cielo In Una Stanza)’라는 칸초네를 불렀는데, 그 후 C.C.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여배우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주연하는 ‘가방을 든 여인’(1961)이라는 영화의 배경음악으로도 사용될 만큼 인기가 높았다.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의 원제목은 ‘이스키아 섬의 약속’. 이탈리아 남부의 유명한 휴양지 이스키아 섬에서 촬영했다. ‘태양은 가득히’(1960)라는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푸른 파도여 언제까지나’를 통해 칸초네라는 음악을 알게 되었다. 샹송이 특별한 음악이 아니라 프랑스어로 ‘노래’를 뜻하듯 칸초네 역시 이탈리아어로 그냥 노래라는 뜻이다. 그래서 팝송도 샹송도 이탈리아에 가면 다 칸초네가 되지만 우리는 이탈리아의 노래를 칸초네라고 부른다.
칸초네는 초기에는 주로 오 솔레미오, 산타루치아 등 나폴리 민요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나 ‘산레모 가요제’가 시작되면서 레코드회사나 악보출판사 등의 입김이 작용하여 많이 상업화되었다고 한다.
당시 유행하던 칸초네는 이 영화의 주인공 도메니코 모두뇨의 볼라레와 차오 차오 밤비나, 그리고 토니 달라라의 코메 프리마와 라 노비아, 질리올라 칭게티의 노노레타와 비, 마리사 산니아의 카사비앙카, 루치아노 타요리의 알·디·라 등 주로 산레모 가요제의 입상곡들이 많았다. 그 외에 알리다 켓리가 구슬픈 목소리로 부르는 ‘형사’라는 영화의 주제가 죽도록 사랑해서(Sinno Me Moro), 그리고 밀바, 나다 등 여러 가수가 부른 물망초, 로마여 안녕(Arrivederci Roma), 마음은 집시, 검은 고양이 네로 등과 같은 곡들이 상당히 큰 히트를 했다. 베니스에 가서 곤돌라를 타고 곤돌리에(곤돌라의 사공)에게 노래를 청하면 이들 중 몇 곡은 들을 수 있었다.
스페인음악에 대한 사랑은 몇 장의 LP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는 아코디온 연주자 Charles Magnante의 Spanish Spectacular라는 판으로서 안달루시아, 라 쿰파르시타, 질투(Jalousie), 스페인 월츠, 에스파냐 카니 등은 팝송이나 샹송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필자에게 또 한 번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 뒤에 구한 스탠리 블랙 악단의 ‘스페인’이라는 판 역시 듣기가 매우 좋았다. 그래서 좀 더 관심을 가지다 보니 스페인음악의 진수는 기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 세고비아로, 바흐와 같은 작곡가들의 하프시코드 음악을 150곡 이상 기타곡으로 편곡하고, 빌라 로보스 등과 같은 작곡가들에게 기타곡을 작곡하도록 함으로써 레퍼토리를 늘려 기타를 연주회용 악기로 확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타레가의 알함브라궁전의 추억,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 등 수많은 기타 명곡들이 필자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스페인음악 하면 또 플라멩코(Flamenco)를 빼놓을 수 없다. 플라멩코는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심장이라고 하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애수가 담긴 전통 민요와 향토 무용, 그리고 플라멩코 기타 반주 세 가지가 어우러지는 이 지역 특유의 민속예술이다.
그러나 이 지역 사람들이 이를 소홀히 할 때 집시가 대신하여 전승과 발전에 힘썼기 때문에, 그 형식에는 집시적 요소가 다분히 포함되어 있다. 순수한 플라멩코는 캐스터네츠를 쓰지 않고 사파테아드(구두 소리), 팔마(손뼉 치는 소리), 피트(손가락 튕기는 소리)로 구성되며, 할레오(관중이 장단에 맞추어 지르는 소리, 우리의 추임새와 비슷함)도 섞여 열광적인 광경을 전개한다.
필자는 2002년 7월 29일 집사람과 함께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후 약 한 달간 주로 유레일패스를 이용하여 스페인 여행을 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1992년 제25회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마라톤 우승을 했던 몬 주익 언덕의 경기장을 비롯하여 가우디가 설계하고 100년이 지나도록 건설 중인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 등을 관광했다. 다음에 도착한 도시가 그라나다였다. 음악으로만 듣던 알함브라궁전을 직접 방문하여 트레몰로로 연주되는 그 음악을 들으며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바로 황홀, 그 자체였다. 또 저녁때는 식사 후 알함브라궁전 서쪽의 계곡 건너편에 있는 집시촌 싸크로 몬테에 가서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본산지의 플라멩코를 감상할 수 있는 즐거운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뒤이어 코르도바, 세비야를 두루 관광한 후 바다호스에 가서 필자가 주례를 섰고 현지에서 침구(鍼灸)학원을 하는 O씨 집에 묵으며 그들과 함께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다음 톨레도에서 엘 그레코의 집 등을 구경하고 아랑훼스에 가서 아담하지만 매우 아름다운 스페인왕의 여름별궁을 관광할 때에는 ‘아랑훼스협주곡’의 제2악장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마드리드에서 왕궁, 미술관 등을 관람한 후 세계무용대회가 열리는 오렌세와 다음 대회 장소인 카나리아군도의 테네리페에 가서 나흘간에 걸쳐 세계 각국의 민속음악과 무용을 관람한 것도 쉽게 가지기 어려운 즐거운 기회였다. 아직도 활동 중인 그 섬의 화산이 인상적이었고, 나체촌이 있는 해수욕장도 정말 아름다웠다.
글 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joonlee@empas.com
화가 김환기(1913~1974)와 화가 도상봉(1902~1977)은 유난히 달 항아리를 좋아했다. 김환기는 여러 점의 달 항아리를 수집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여기저기 그림의 소재로 삼았고, 종이 오브제로 직접 달 항아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도상봉도 도자기를 좋아해서 아호를 도천(陶泉)으로 삼았다고 한다. 1950년대 많은 정물화에 도자기가 등장한다. 특히 직접 구입한 달 항아리를 그린 그림도 여러 점 전해진다. 시인 김상옥(1920~2004)은 조선백자를 평생 사랑하여 한때 인사동에서 고미술점 ‘아자방(亞字房)’을 직접 운영하며 수많은 조선백자를 수집하였고, 달 항아리도 여러 점 소장하여 백자를 주제로 한 주옥같은 시조를 남겼다.
‘조선백자 대호(大壺)’가 정식 이름인 달 항아리는 두둥실 하늘에 뜬 보름달과 같다 해서 붙여진 별칭이다. 고미술학자나 현대 도예가들의 공통된 견해는 높이 40cm 이상이고 둘레가 120cm 이상의 구형(球形) 순백자에, 제조기법상 아래 위 반구형 두 개 결합해서 소성(燒成)하고 맑은 백자유를 시유해 1250도~1300도에서 구워낸 도자기를 대호라 이른다.
물레를 돌려 빚는다 해도 완성품보다 1.3배 정도 더 커야 하는 고로(번조 과정에서 약 30% 정도는 축소됨) 무게와 부피가 한 아름이 넘는다. 초벌구이 과정에서도 자체 무게 때문에 주저앉거나 파열되기 일쑤다. 이를 그대로 전승하고자 하는 도예가들도 열에 한두 점 완성품을 건지기 고작이다. 또한 전래품들은 술을 담거나 간장을 담는 등 생활용기로 사용했으므로 파손이 심해 남아 있는 수효가 극소수로 그 희소가치가 높다.
리움미술관 호림미술관 국립박물관 등과 지방의 전시회를 쫓아다니기 30여 해, 안복(眼福)은 누렸으나, 수집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백자를 꾸준히 연구하고 만들어 내는 현대 도예가들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여성도예가 김익영(1935~ )은 서울대 공대에서 화공학, 홍익대에서 공예미술을 전공한 뒤, 미국 뉴욕의 알프레드 요업대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원, 국민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길러냈다. 유학 중 영국 공예가 버나드 리치(1887~1979)의 초청 강연에서 ‘한국의 조선백자가 현대인이 추구해야 하는 미의 세계’라는 열강을 듣고 감복, 백자를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순백자의 담백하고 고졸(古拙)한 멋에 젖어 여러 형태의 백자를 빚고 구워보았으나, 1960년대에는 도자 가마가 적어 백자를 시연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1965년 일본 전시를 비롯해 지금까지 30여 회 가까운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도자의 실용성을 강조해서 생활용기의 격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75년부터 국민대 교수로 많은 제자를 길러내면서 태토(胎土)의 선별부터 가마의 과학적 제조, 특히 백자유약 데이터의 체계적 정리와 실행에 이르기까지 백자의 고급화를 이끌었다. 1978년 개인 가마 ‘우일요’를 개설하고 그만의 개성 강한 도자기를 만들어 냈다. 특히 ‘면 깎기’라는 고난도 작업으로 합(盒), 푼주, 제기(祭器)등 전통 조선백자에 근원을 두되 이를 재해석하고 변용한 도자를 빚었다.
몇 년째 창덕궁 담 옆의 ‘우일요’를 드나들며 여러 기물을 보고 만지고 연적, 필통, 벼루 등을 사 모으던 중이었다. 달 항아리를 왜 안 만드시느냐고 여쭙자, “전에 몇 점 만들어 보았는데, 이제 무릎이 안 좋아 힘에 부치고 완성품을 얻기가 어려워 망설인다”는 노도예가의 진솔한 대답이었다. 조카따님을 졸라 2008년 여름에야 김익영의 달 항아리를 만날 수 있었다. 설백(雪白)의 유현(幽玄)한 유약의 흐름과 당당한 자태에 반해 덥석 끌어안고 말았다. 이 달 항아리 앞에선 그 어떤 말도 필요치 않다. 나주 반닫이 위에 앉히고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을 서너 시간 들으며 몰아의 경지에 젖었다.
아키야마 준(秋山 潤·1970~ )은 일본인으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도자에 매료돼 10여 년 공방을 찾아다니며 도자 공부를 한 뒤에 조선백자의 연원을 찾아 2002년에 한국에 왔다. 한국 부인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경남 창원에 스스로 가마를 짓고 조선백자를 잇는 순백자를 굽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도예가들을 찾고,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백자 도예의 길을 정진하였다. 그 첫 결실로 2006년 드디어 인사동에서 백자전을 열었다. 그 이듬해에는 경북 청도로 옮겨 현재까지 백자를 굽고 20여 회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 극도로 절제되고 유약이 너그러운 인사동 전시작품이 눈에 어려, 그의 가마를 찾고 싶어 알아본 끝에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다. 2008년 봄날에 그의 초대로 청도의 공방을 처음 방문하였다. 그의 작품처럼 검소하고 정갈한 작업실을 거쳐 내실로 들어서면서 그의 달 항아리를 만났다.
수십 점을 소성해 보았으나 겨우 두 점만 얻었다며 망설이는 부부를 설득하여 한 점을 입수하기로 하였다. 열차로 운송하기가 어렵다며 며칠 후 서울의 집까지 손수 가져다주었다. 다른 일본 예술인 두 명과 함께 자리한 우리 거실에서 조촐한 다과와 함께 소리꾼 장사익의 절창 ‘허허바다’를 음반으로 듣던 순간이 선연히 떠오른다. 지금은 침실에 두고 밤을 함께하고 있다. 그의 백자유약은 난백(卵白)으로 부드럽기 그지없다. 흰빛이 너무 차가워 색을 바꿔 보았다고 하지만, 고국에 대한 향수가 녹아든 것이리라.
오늘날에도 많은 도예가들이 조선백자를 전승하거나, 모티브로 삼아 달 항아리를 만들고 있다. 그 무슨 마력이 그 힘들고 경제성 없는 고단한 길을 가게 하는 것일까?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진흙을 반죽해서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의 쓰임이 있다’고 하였다.
김익영도 “용(用)이라는 공예의 사회성이 중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쓰임으로 보면 달 항아리는 경제성이 취약하다. 적지 않은 돈(이,삼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주고 사다가 간장 된장을 담고, 술을 담아 사용하겠는가. 귀하게 모셔놓고 완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텅 빈 공간에 애틋한 마음을 가득 채우고 허리를 두 팔로 안아보면, 어느새 휘영청 밝은 달은 심신을 정화해 주거늘, 어찌 세속의 시선이 두려우리요.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바람의 작가로 잘 알려진 고 최상선(1937~2005) 화백의 유작전 ‘바람부는 날’이 5월1일까지 동숭동 혜화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작고한 최상선 화백은 고향의 기억을 바람으로 생생하게 살려내는 독특한 질감의 화풍으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번 전시회는 지난 2006년 밀알미술관에서 열렸던 1주기 기념 유작전 이후 만 8년 만에 열리는 유작전으로 최화백이 소천한 지 햇수로 10년이 되는 해를 추모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번 전시회에는 1980년 대 작품부터 2005년도 작품 중 엄선한 30 점이 관객들을 만난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에는 고향의 정경을 황토빛 색채의 감성으로 그려간 초기 작품과 화사하고 따듯한 색감을 기본으로 봄기운의 에너지가 물씬한 중기 작품, 눈이 흩날리는 듯한 청결한 겨울 감성의 후기 작품들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 특히, 최 화백이 영면에 들어가기 직전인 2005년 작품들 중 일부는 이번 유작전을 통해 일반에 최초로 공개된다.
이번 전시회는 고 최상선 화백의 장남 최세희(강릉원주대학교 겸임 교수)씨가 기획했다. 최씨 역시 아버지 최상선 화백의 뒤를 이어 2대째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최 교수는 고 최상선 화백의 후기 작품에 대해 “이 생에서의 삶이 다해가는 것을 알고 계셨던 때의 작품들로, 생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흠이 있었다면 서로 덮고 용서하자는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을 표현하셨던 건 아닐까 생각한다” 고 소개했다.
고 최상선 화백은 그림 외에도 25 권의 일기를 남겼다. 최 화백의 일기는 아들 최세희 화가에게 예술가의 삶에 대한 지침이자 예술적 영감이 되어주고 있다. 최세희 화가는 고 최상선 화백이 25년 간 묵묵히 써내려 온 일기와 본인의 작품, 아버지인 고 최상선 화백의 작품을 연결해 아들와 아버지가 함께 하는 콜라보레이션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최상선 화백 유작전 문의 전화는 747-6943 이고,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강릉사범학교 본과 졸업, 동국대 교육대학원 미술교육과 졸업
▶1963-2004 개인전 25회
▶국내외 화랑미술관 초대 400여 회
▶한국대표작가 25인 특별초대(프랑스 미로 미술관)
▶광복 50주년 특별 기획전, 새천년 통일 염원 특별전
▶프랑스 르 쌀롱전, 일본 아시아 현대미술제, 일본 다가라스키 아피아홀 초대전
▶중국미술대학 초청 초대전, 러시아 레핀 아카데미 초청 초대전, 독일 베를린 한인 초대전 등
▶대한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신사임당 미술대전 심사위원장, 경기도 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신라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원로화백 박돈(86, 본명 박창돈) 선생의 그림생활 70년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시가 4월 5일부터 가원미술관(과천시 문원동)에서 선보인다.
박수근, 이중섭 화백 등과 함께 대한민국 미술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박돈은 몽금포타령과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으로 빼어난 자연환경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1948년 해주예술학교 미술과를 졸업한 뒤 해주미술학교 교사를 지내다 남하한 작가는 광택이 없는 흙벽에 그려진 벽화와 같은 느낌이 드는 향토색 짙은 화면을 선보여 왔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전형화된 이 작가의 환상적인 향토적 정서와 상상력의 독특한 화면작업에 그 체험적 잠재의식이 깊이 반영돼 있음을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화면마다에 그러한 내면성이 저절로 형상돼 있기 때문이다.
박돈의 유화작업은 그의 철저한 개성적 기법의 취향인 화면의 광택 배제와 지극히 정적(靜的)인 화면구성, 모든 주제요소들의 선, 형태, 색채 및 형상의 단순화, 간결화 내지 장식적 변용, 그러면서 화면 전체가 시원하고 온화한 정감적 분위기를 조성하게 함으로써 특징을 이룬다. 그 구도는 모두 확연하게 수평적이면서 중심적 시점(視點)의 주제 설정은 하나같이 작가의 마음속의 잠재적 향수와 상상으로 선택되곤 했다.
무엇보다도 박돈 화면이 신비감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화면의 밑바탕을 고운 모래밭 같은 질감으로 각별히 세심하게 조성하는 엷은 황갈색 또는 회갈색조의 농담 분위기에서 느끼게 되는 추상공간의 깊이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는 박돈 화백의 대표작 60여 점이 전시된다. 전시는 오는 5월 6일까지 계속된다. 문의 (02)504-3730
[기사 제휴: 경기일보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
문화공장오산(오산시립미술관)은 2014년 봄을 맞아 새로운 기획전 ‘뜻밖의 풍경; Unexpected Scenes 展’을 선보인다.
전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풍경’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9명의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현대예술에서의 풍경의 의미와 그 다양성을 재고해 보고자 마련됐다.
김동기, 김종구, 노주환, 박철호, 송대섭, 심영철, 이성실, 임근우, 한석현 작가는 ‘풍경’이라는 하나의 큰 틀을 공유한 채, 각자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풍경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선보인다.
김동기 작가는 판화의 기법을 이용해 비슷한 구조와 규격화된 외양을 갖춘 채 무한히 증식해 가는 현대의 도시 풍경을 시각화했고, 김종구 작가는 쇳가루를 먹처럼 이용한 ‘쇳가루 회화(Steel Powder Painting)’를 통해 현대산업사회의 상징과도 같은 쇠의 단단하고 거친 물질적 특성을 제거하고, 오히려 잊고 지냈던 흙과 자연에 대한 복귀를 유도한다.
노주환 작가는 도시를 구성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정보들과 관계를 활자라는 독특한 재료를 이용해 재해석한 입체적 도시 풍경을 제시한다. 또한 박철호 작가는 숲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결과 흐름을 포착해 명상적이고 몽환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작업을, 송대섭 작가는 개펄에 내재하는 생명의 힘과 자연의 풍요에 대한 향수를 추상화한 작업을 펼쳐 보인다.
다양한 장르와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심영철 작가는 암흑의 이미지에 관람객이 스스로 불빛을 비추며 새로운 풍경을 창조해 가는 인터랙티브 작업을 통해 풍경이라는 개념의 영역을 확장하고, 문화공장오산 창작스튜디오의 입주 작가이기도 한 이성실 작가는 오산에 거주하며 직접 경험하고 체득한 오산의 풍경 속에서 느낀, 상반된 상황들의 ‘틈새’에 주목해 오산의 풍경을 재구성한 신작을 선보인다.
임근우 작가는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는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위트 있게 표현하고, 한석현 작가는 대량 생산된 녹색 상품들로 인공적인 정원을 만들어, 인공적으로 모방한 생산물 속에서 자연의 안식을 찾으려고 하는 도시인의 심리적 단면까지 파고드는 작업으로 풍경 속 새로운 의미를 찾고자 한다.
한편, 참여작가와의 대화가 오는 4월 5일(토) 오후 3시 예정돼 있으며, 4월 12일 소공연장에선 독립영화 ‘춤추는 숲’, ‘풍경’, 1‘러브 인 아시아’가 상영된다. 영화 관람료 각 3000원. 전시 관람 무료. 문의 (031)379-9930
경기일보 강현숙기자 mom1209@kyeongg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