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년30일부터 8월15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은 올해 열리는 전시 중 손꼽히는 주요 전시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하는 필자의 전시 도슨트를 원고로 옮겨, 현장감을 느끼며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글 옥선희 동년기자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프랑스의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소장전은 서울시립미술관과 끼르티에 현대미술 재단의 공동 기획전입니다. 즉 까르티에 재단 작품을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게 아니라, 까르티에 측 제안을 받고 2015년부터 전 과정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참여하여 기획된 전시입니다.
카르티에 현대 미술재단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은 까르티에라는 명품 기업 후원으로 출발했지만, 100% 독립된 비영리 재단입니다. 프랑스에서 현대 미술을 지원하는 첫 기업 재단으로 출발했습니다. 설립자이자 현재까지 대표를 맡고 있는 알랭 도미니크 패랭이 프랑스 문화부 의뢰로 만든 기업의 미술 후원 보고서 초안 ‘레오타르법’이 현재 프랑스에서 공식적인 예술 후원법 기초가 되었습니다.
기업 메세나의 혁신적 모델인 재단은 1984년 베르사이유 궁 근처 조각공원에서 다양한 전시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10년 간 운영했다. 젊은 작가 발굴 - 지속적 지원 - 세계적 작가로 키우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페이 다웨이, 후 한루 같은 큐레이터와 비평가 배출/ 학제적(學際的) 접근, 즉 다양한 분야 학자와 예술가의 협업을 꾀했는데요. 전시 디자인을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식이 그것입니다. 이번 서울전은 이세영 -논 스탠다드 스튜디오가 전시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재단이 출범한 1984년은 백남준 작가가 3부작 위성 시리즈 첫 작품 을 선보인 기념비적 해입니다. 은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생방송 중계되어, 비서구권 미술, 타자가 서구에서 가시화되는 출발선이 되었습니다. 주목하지 않았던 비 유럽계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고, 전시를 갖지 못했던 젊은 작가가 방향을 설정하도록 도와온 재단 출범 년도가 1984년이란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이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천안문 사태 발생 등으로 젊은 작가의 분출은 가속됩니다.
재단 건물 1994년 몽빠르나스14구 라스파일 대로에 재단 건물을 지어 이전했는데,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 Jean Nouvel이 설계한 재단 건물은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절제미와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나무가 무성한 중정을 품은 강화 유리와 메탈로 지어진 사각형 건물로, 1층은 정원으로 완전히 열려 있으며, 천정 높이가 7미터에 이르는 모듈 형식이라, 프로젝션이나 비디오 설치 작업을 위해서는 공간을 어둡게 조정할 수도 있고, 대작 전시도 가능합니다. 유리로 된 구역을 옆으로 밀어 시야를 트이게 만들면, 건물이 정원 쪽으로 열린 경사로에 놓인 거대한 구조물로 변형됩니다. 건물의 유리 표면을 통해 전시 중인 작품을 볼 수 있게 하였고, 반대로 구름이나 도시 공간을 반사시켜 시간대에 따라 건물이 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밤까지› 전시의 경우 건물 전체가 검게 덮였고, ‹자연으로 존재하기› 전시 기간에는 완벽하게 투명함을 유지했으며, 이세이 미야케는 건물을 거대한 디스플레이 윈도우로 변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인공과 자연과 변환 가능한 건축미를 높이 사 1995년, 이탈리아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에 이어 독일 중견 빔 벤더스가 완성한 옴니버스영화 에서 장 르노의 저택으로 등장했습니다.
1994년 부임한 에르메 샹데스 Herve Chandes 관장이 현재까지 관장 직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긴 재임이 말해주듯 큐레이팅도 직접 하는 문화 권력이자, 외교관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작가나 주제를 선택해 작가에게 시각화해달라고해서 독창적인 커미션 작품을 탄생시키고 전시 기획, 최종 소장 결정까지 하는 것이지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시각화해달라고 주문하는 커미션(commission) 방식은 까르티에현대미술재단의 특징입니다. 작품 의뢰에서 완성품까지 3년 정도 기간을 주고 5억원정도를 지원하는 등, 기간과 제작비 구애를 받지 않도록 자유를 주며, 한 번 관계를 맺으면 가족 개념으로 관계를 유지합니다. 즉 경매를 통한 구입이 아닌, 직접 작가 발굴과 작품 의뢰를 통해 수집품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1년에 다섯 번 정도 큰 전시가 있는데요. 개인전과 기획전을 번갈아 여는 데 디자인, 사진, 회화, 비디오아트, 조각, 설치 , 미디어아트, 패션, 퍼포먼스 등 현대 예술의 창조적 분야와 장르를 아우릅니다.
인문과학, 환경, 생태학, 도시학, 경제, 생태, 이주 등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시 청각화하므로 미술가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대중음악가, 도시학자, 생태음향가, 디자이너, 과학자, 사상가, 철학자, 인류학자, 수학자, 사회학자 등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유지합니다. 1층에서 보게 될 작품 처럼, 도시학자의 아이디어를 디자인 건축가 그룹이 시각화하는 식입니다.
30년 간 200회 전시를 열어 전 세계 350여명 작가의 1,500점을 소장하고 있는데요. 작품 소장 기준은 엄격함과 탁월함의 결합/ 풍부한 독창성과 위험 감수 성향 고려/ 평범하고 예견가능하며 상식적인 가치 대신 전 방위적 개방성을 추구합니다. ‘흥미로운 현대 예술 작품으로 전시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 세계를 향해 질문 던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시 작품을 봐주었으면 한다’는 것이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컬렉션 디렉터 그라치아 콰로니 Grazia Quaroni의 전언입니다.
서울 전시작은 사라 지, 론 뮤익, 뫼비우스 등 재단을 대표하는 작품은 물론 국가, 인종, 젠더를 초월하는 공통 관심사를 반영한 사회 현상을 다룬 100점을 골랐습니다. 한국을 위한 특화된 선택 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장 미셀 알베롤라와 마크 쿠르티에 등이 내한하여 직접 벽면 작업을 했습니다. 아시아 투어 중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게 되었고, 내년 초 상하이, 홍콩을 거쳐 도쿄 올림픽에서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TV뉴스를 보던 중 그래피티(graffiti)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어떤 호주인이 우리 지하철에 들어가 전동차에 낙서를 하고는 사라졌다는 소식이다.
그래피티는 건물 벽이나 교각에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서 그리는 그림과 낙서를 말한다.
우리 동네 산책길의 다리 밑 한쪽 벽면에도 알록달록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필자는 몰랐는데 손녀와의 산책길에서 아기가 그 벽면의 그림을 보더니 “할머니 원더 볼즈에요!” 라고 해서 그 그림이 어린이용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라는 걸 알았다.
그림이 있기 전보다 화사해진 다리 밑은 보기에 좋아서 이런 벽화라면 많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의 미대 시절,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 회사 담장에 그림을 그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며 보여준 사진이 그래피티의 한 종류였을 것이다.
필자 눈에도 수준 높아 보이고 멋져서 그래피티를 예술의 한 장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래피티는 함부로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
밋밋한 담장에 예쁜 그림을 그리면 보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아무 곳에나 그려놓으면 일종의 범죄라는 말이다.
그래피티를 하는 사람들은 번개처럼 스프레이로 그림이나 메시지를 쓰고는 재빨리 도망을 간다고 한다.
담장이나 평범한 벽면이 아닌 공공장소인 지하철이나 기차역 건물 벽에 낙서해 놓으니 범죄율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과거 뉴욕 지하철은 탈 게 못됐다고 한다. 강력 범죄가 발생하는 대표적인 우범지대로 역무원들이 부스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는데 1980년대 뉴욕시 교통국장이 지하철을 가득 채운 낙서에 주목하고 계속 청소를 했더니 지하철 범죄가 75%나 줄었다고 한다.
아마 낙서가 그렇게 아름답거나 깨끗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피티는 60년대 뉴욕 빈민가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져나갔고 갱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표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는데 그 후로 차츰 사회, 정치적 비판메시지를 담기 시작했다.
낙서 예술가도 생겼다. 스물여덟 살에 타계한 뉴욕 바스키야의 작품은 경매에서 164억 원이나 호가했다니 그냥 낙서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피티는 원래 그리는 장면을 들키면 안 되는 작업이어서 그 세계에서는 무엇을 그리는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어디에 낙서를 하는지도 중요하고 접근하기 힘든 곳일수록 가치를 높게 쳐준다고 하니 재미있다.
낙서꾼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지하철이라는데 한밤중에 몰래 숨어 들어가 객차 전체를 통째 낙서로 채운다는 영화도 나왔단다.
외국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서울에서도 그래피티로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습격 받은 지하철이 17군데나 되었고 전담 수사관까지 생겼다고 하니 좀 걱정이다.
언젠가는 지하철역 세 군데에 그래피티 습격이 있었는데 이들은 힙합 모자와 후드 티셔츠 차림의 백인 4인조였다고 한다.
쇠톱과 절단기로 환풍구를 잘라내고 차고지에 들어가 낙서를 하고는 경찰이 손쓰기도 전에 유유히 호주로 돌아갔다는데 아마 우리나라 지하철이 깨끗하다는 소문이 나서 원정낙서까지 왔을 거라는 분석이 나왔다니 좋아해야 할 일인지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낙서를 하고 갔는지는 보도되지 않았으나 전담 수사관까지 동원되었다면 좋은 내용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그래피티가 우리 눈에 멋지고 예쁘게 보인다면 굳이 막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다.
낙서한 내용이 반사회적이거나 공포를 조장한다면 당연히 막아야 하겠지만 우리 동네 산책길의 벽화처럼 즐겁게 바라볼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
언젠가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던 중 들어오는 객차에 예쁜 그림이 그려있어 보기에 즐거웠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그래피티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나 아름다운 그림으로 승화시킨다면 범죄라 하지 않고 예술의 한 장르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동네 곳곳에 나쁜 그래피티가 아닌, 보면서 즐길 수 있는 벽 그림이 많아지면 좋겠다.
시니어 기관 워크숍에 참여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시니어들 모임은 물론 어떤 단체이든 오래 활발한 활동을 하려면 기금이 마련되어 진행비가 있을 때 좀 더 모임이 활성화된다. 그래서 예상되는 지출 비용보다 회비를 더 많이 걷어 모아뒀다가 1년에 한두 번 큰 행사를 할 때 사용하곤 한다. 어떤 모임에서는 일일찻집을 하거나 경매 행사 등을 통해 기본 진행비를 마련하기도 한다. 야유회 때 기부금을 받는 경우도 많다. 오랜 기간 회비를 모으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에 제안서를 넣어 비용을 제공받아 단체 성격에 맞게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커뮤니티를 만들면 활동비를 적게는 50만원에서 몇천만원까지 제공받기도 하다. 구성원에 대한 정보와 단체 운영 내용을 제대로 작성해 보고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이 같은 방법으로 기금을 제공받아 활동하는 곳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창업과 창직에 관해서는 청년은 물론 시니어 대상으로 기금까지는 아니더라도 회의나 모임 장소를 제공받을 수 있고 간식이나 식사비용, 그리고 강의가 이어질 경우 강사비도 제공받을 수 있다.
시니어 모임에서 만원의 행복으로 참여하신 분은 매번 본인의 식사와 차 한 잔 비용밖에 안 되기 때문에 입회비 명목으로 혹은 회비 명목으로 미리 1년 회비를 한꺼번에 받기도 한다. 어떤 모임에서는 자신이 아끼는 물건 중에 덜 필요한 물건을 경매 물건으로 내놓도록 해서 워크숍 행사 중이나 연말 송년회나 신년회 때 경매 행사를 열어 기금 마련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만원의 행복에서 이런 모임으로 이어지는 것은 친목 모임이든 배우는 모임이든 많아지면 부담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 4월 22일, 워크숍 참여기간 중에 기금을 모으기 위해 경매시간을 갖게 되었다. 단체기금을 마련해보는 시간이었는데 놀라운 결과가 있었다. 전체 인원 39명에 여성 참여자들이 17명, 남성 참여자들이 22명이었는데 놀랍게 여성 참여자들이 더 고가의 경매가를 불렀고 남성 참여자들은 훨씬 여성 시니어 참여자들에 비해 경매가가 약했다. 이번 경매 행사를 통해 여성 시니어들의 경제적 결정권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특히 연세가 많아 보이는 한 여성분께서 마치 지름신이 강림한 듯 높은 경매가를 불러 참여자들이 모두 놀랐다. 행사가 끝난 뒤 비용을 많이 쓰게 되셨는데 괜찮으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가격을 부르셨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문에 현답을 하셨다. “어디를 가도 자신이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데 한쪽 구석에 쭈그러져 있는 것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분위기도 고조시키고 뭔가 모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며 그렇게 나잇값을 하고 산다”고 말씀하셨다. 그 깊은 뜻에 모두가 옷깃을 여미며 숙연해졌다.
나이 들어가면서 형님이 되고, 왕언니가 된다는 것은 대접만 바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책임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날이었다.
전남 진도의 고군면 회동리에서 의신면 모도리까지 2.8km의 바다가 해마다 두 번씩 3월에 사흘, 4월에 나흘간 조수간만의 차(差)와 인력(引力)의 영향으로, 수심이 낮아지고 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한 시간 동안 폭 40여 미터의 길을 연다. ‘모세의 기적’에 비견되기도 하는데, 열리는 바닷길을 걸으며 갯벌을 체험하는 ‘바닷길 축제’가 올해는 4월 26일부터 29일까지 열린다.
아득한 옛날부터 그랬듯이, 어부는 이때를 놓칠세라 등짐을 잔뜩 지고, 어부의 딸은 봇짐을 머리에 이고 그 길을 가고 있다. 한쪽 바다는 격랑의 물결이 사납다. 두려운 이 길을 건너고 있는 부녀는 불편한 돌길에 두 발을 묻고 있다. 옥주산인 김옥진(沃州山人 金玉振, 1928~2017)의 한국화 은 고향의 어느 봄날의 실경(實景)이다. 진도군 임회면에서 출생, 진도의 옛 이름인 옥주(沃州)에서 옥주산인(沃州山人), 옥산(沃山)을 아호로 취했다. 조선 남종화의 시대를 연 운림산방 소치 허련(小痴 許鍊, 1809~1893)의 아들 미산 허형(米山 許瀅, 1862~1938)에게서 방손(傍孫)의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 1891~1977)이 묵화를 배우고 그를 사사한 옥주산인이 같은 남종화의 길을 걸었다. 또 일제에 의해 타율적으로 만들어진 동양화(東洋畵)라는 명칭을 한국화(韓國畵)로 바꿔야 한다고 주창하고 실천했다.
옥주산인 김옥진
1979년 제28회 국전에서 영예의 초대작가상을 받은 은 전통적인 문인화에서 벗어난 작품으로 진도 앞바다 울돌목(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격전지)의 소용돌이치는 실경을 파격적으로 표현했다. 옥주는 처음 의재를 뵈올 때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임화(臨畵)를 그려와 펼쳐 보였을 정도로 남달랐다. ‘진도농업실기학교’를 다닌 바 있는 그는 의재를 사사하며 의재 선생이 1947년 광주에 세운 ‘농업고등기술학교’ 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10여 년간 시서화(詩書畵)뿐 아니라 춘설헌(春雪軒, 의재 허백련 선생이 1956년 차밭 아래에 화실로 사용했던 곳)의 차 재배와 생산 및 다도(茶道)의 보급 등 명실공히 의재의 고고한 선비정신까지 계승했다. 주위의 예술인들은 “큰 바위와 같이 굵직한 인품을 지니고, 다정다감하면서도 안목이 굉장히 예리하다”고 칭한다.
오래전 한 도예가의 작업실에서 코발트와 철화(鐵畵), 진사(辰砂)의 안료를 붓에 찍어 도자화를 그리던 옥주 화백을 만나 뵈었는데, 두어 시간 차를 마시며 안광(眼光)을 빛내 열강하던 ‘개결한 예술인의 품성’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수선화를 그린 소품도 받았는데, 그 순간 1972년 무등산자락 ‘춘설헌’으로 의재 선생을 찾아가 큰 절로 뵈었을 때 따라주셨던 ‘춘설차’의 깊은 향이 맴도는 듯했다.
을 통해 옥주 화백은 ‘스스로 걷고 있는 예도(藝道)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지고(至高)하되 그러나 신산한 그 길이 이 어부가 식솔과 가고 있는 두렵고 불안한 천형(天刑)의 바닷길과 같을 것이다. 발을 삐끗하면 격랑의 물결 속에 매몰될 것이고, 빨리 지나가지 않으면 이 길은 바닷물에 덮일 것이기 때문이다. 친한 수집가에게서 빼앗다시피 해서 갖고 온 이 그림을 펼쳐놓을 때마다 ‘나는 과연 내 길을 바르게 걷고 있나?’ 하고 자성(自省)하게 된다.
우현 송영방
봄기운이 슬며시 산자락 밑 개울의 얼음을 녹이더니, 어느새 낮은 산 양쪽 계곡으로 물이 모여 제법 넓은 내를 이루었다. 개울 위 한쪽에는 좁은 섶다리도 놓였고 두 개울이 만나는 얕은 둔덕에 마른 잡초도 촉촉한 생기로 일어서고, 물가의 버들개지일까 잎끝이 연두의 점을 찍었다. 소나무들이 곧게 자라서 무리를 짓거나 작은 길 둔덕에 즐비하다. 개울 건너 경사가 완만한 조그만 산밭에서는 늙은 촌부가 누런 소에 쟁기 매어 밭갈이 한창이고, 노처는 고개 숙여 씨앗을 묻기에 여념 없다. 쟁기를 지고 왔던 지게와 씨앗을 담아온 종다래끼가 빈 밭의 허전한 구도를 깨고 있다. 한 해의 첫 봄갈이가 시작된 것이다. 먹의 농담만으로 그려진 산봉우리는 가로 그은 옅은 붓질이 겹쳐 유현한 빛을 발하고, 담박(淡泊)한 선으로 단숨에 그려진 개울이며 산밭이며 소나무들까지 소박한 실경을 그대로 표현했다. 여느 풍경화보다 고향의 산자락을 생각나게 해, 온라인 경매에서 낙찰받았다.
를 그린 우현 송영방(牛玄 宋榮邦, 1936~)은 경기 화성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국전에서 특선을 하며 화업의 길로 들어선 분이다. 대학 3학년 중반까지 서양화를 그리다 “물감의 느끼한 기름기가 싫어서 한지에 먹으로 그리는 붓을 잡았다”고 술회했다. 대학 스승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과 산정 서세옥(山丁 徐世鈺, 1929~)에게서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사사한 그는 유년기에 한학을 하던 선친에게서 붓 잡기를 익혔고 고향집 벽장, 두껍닫이에 붙은 민화(民畵)를 따라 그려보곤 했다고 회고했다. 신문이나 잡지에 삽화(揷畵)를 그려 용돈을 마련했던 대학 시절에는 하찮게 여기던 삽화의 경지를 심의(心意)의 그림으로 고양(高揚)시켰다는 출판인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삽화를 삽도(揷圖)라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법정(法頂, 1932~2010) 스님 수상집 표지화 등은 지금도 ‘격조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5년 3월 31일부터 6월 2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은 그의 화업을 정리하는 회고전이었다. 오채라 함은 먹의 농(濃), 담(淡), 건(乾), 습(濕), 초(焦)나 흑(黑)을 가리키며 먹색의 풍부한 변화를 의미한다. 그는 불교 재단인 동국대학교에서 교수와 예술대학장으로 정년퇴임을 한 뒤에도 불가의 오묘한 세계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아호는 12세기 북송 말엽 곽암사원(廓庵師遠, 생몰년대 미상) 선사(禪師)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에서 ‘우(牛)’를 취하고, 노자(老子)의 제1장에 나오는 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 멀고 또 그윽하도다! 뭇 묘함이 그 문에서 나오는도다!)에서 ‘현(玄)’을 취했다고 한다.
그는 먹을 풀어 담담한 문인화풍의, 그러나 실경을 농축된 심경으로 진솔하게 나타내고자 노력했다. 그의 많은 그림의 특징은 채색 물감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다는 데 있다. 먹만으로 완성했음에도 결코 어둡거나 무겁지 않다. 또 먹의 선이 간결하고 날씬하되 요체(要諦)를 응집시켜 군더더기나 부족함이 없다. “그림을 그릴 때 채색을 피하고 먹을 위주로 그리는데 그 이유는 먹의 오묘함이 어떤 화려한 색보다 그 전달력에 있어 능란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바람은 나의 개성 표현에 있습니다. 자기다운 것을 하기 위해 예술을 덩어리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려한 색채의 화초보다는 길섶의 질경이꽃같이 살고 싶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우현이 한 말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뮤지컬 하면 관객들은 기본적으로 신나는 음악에 짜릿한 사랑이야기, 그리고 완벽한 해피엔딩을 생각한다. 창작 뮤지컬 은 뮤지컬 상식을 깨고 실질적으로 관객의 의식 속으로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길에 버려지고, 이용당하고 또 주인이 잃어버린 유기견의 처절한 생활, 뮤지컬 속 노래와 대사를 통해 그들의 피할 수 없는 슬픈 삶의 끝을 조명해본다.
잔뜩 녹이 슬은 철창 안으로 꾸며진 무대. 이곳은 유기견 보호소다. 버려진 개의 종류도 다양하다. 여행가방 속에 버려졌던 푸들, 투견장 진돗개 ‘진’, 폐기 처분된 군견 셰퍼드 ‘중사’, 그리고 강아지공장 모견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던 말티즈 ‘마티’까지. 다양한 학대와 이유로 들어온 유기견의 일상과 아픔이 공연 속에 펼쳐진다. 어두운 밤. 한 마리의 새 유기견이 들어오면 보호소에 있던 유기견 중 한 마리는 입양 보내진다. 유기견들은 보호소에 후원된 다양한 사료를 먹고 더욱더 예쁘게 돼 새 주인 만날 날을 기다린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그 문이 도대체 어디로 통하는지는 오직 셰퍼드‘중사’만 알고 있다.
뮤지컬 은 SBS 프로그램 속 코너 ‘더 언더독: 개를 버리는 사람들’을 모티브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반향이 컸던 인기 프로그램이 소재였기에 계획 단계에서부터 큰 관심을 받았던 작품이다. 유기견의 안락사라는 충격적인 소재로 흥행 양극화가 분명한 뮤지컬 무대에 오르는 것은 말 그대로 모험. 절대 즐겁게 웃고 손뼉 칠 뮤지컬이 아니다. 극 초반 멋진 군무와 주연 배우의 솔로곡 열창으로 박수가 터지지만 극에 몰입하면서 손보다는 눈이 무대에 집중하게 된다. 모견으로 강아지공장에서 숱한 학대를 받아온 강아지가 노래를 부르는데 박수 치기가 미안할 정도. 뮤지컬이라는 매개로 극을 만들었지만 떠들썩하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게 사실에 근접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새끼 잃은 만신창이 엄마 말티즈 ‘마티’
말티즈의 실제 끔직한 모습은 TV 프로그램과 각종 포털사이트에 보도된 사진을 통해서 접했을 것이다. 동그란 슬픈 눈의 말티즈 배는 수십 번의 강제 임신·출산으로 해지고 뜯겨 있었다. 에서 하얀색 털 가운을 입고 힘없이 등장한 말티즈 ‘마티’가 바로 강아지공장에서 구조된 모견이다. 무대 뒤 영상은 강제적인 임신과 출산으로 최악의 삶을 사는 모견 ‘마티’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티는 살아갈 힘을 잃은 생명처럼 죽기를 바라고 아파하고 힘들어 신음한다. 실제로 불법 유통되는 강아지공장의 새끼는 어미와 35~40일도 같이 못 있고 경매장으로 팔려 나간다고. 공연 속 모견 ‘마티’는 강아지로 보이는 인형을 안고 다니며 애착을 보이고 분리불안증에 시달린다. 맹인견 늙은 골든리트리버는 눈이 멀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극 후반에 안락사되는 골든리트리버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도 주인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주인을 위해 평생을 바친 맹인견은 다시 하늘로 가 주인과 만날 날을 꿈꾼다.
사설 보호소가 아니면 차갑고 딱딱한 그곳에 누워야 한다
유기견이 보호센터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은 10일에서 많게는 20일 전후다. 이들이 그곳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입양 혹은 안락사다. 극 초반, 신이 나서 한 유기견이 사람을 따라 보호소 밖으로 달려나간다. 다다르게 되는 곳은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차가운 스테인리스 탁자 위. 너무 기쁘게 유기견 보호소를 뛰어나왔지만 주인이 아닌 주삿 바늘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5분 뒤 신나게 달리던 몸은 생명을 잃는다. 몸이 늘어진 채 커다래진 동공 속으로 자신이 살았던 세상의 마지막 장면을 담아낼 뿐이다.
뮤지컬 은 유기견과 학대 받는 동물들의 이야기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처럼 박수갈채를 연발하고 신나서 소리 지르는 공연을 생각하고 공연장에 들어간다면 적잖이 당황할 수 있다. 대형 뮤지컬에 현실 상황을 적극 반영했다는 것만으로도 은 신선한 도전이다. 무엇보다 은 착한 공연으로 불리며 공연 외 유기견을 위한 다양한 봉사와 사회 계몽운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공연장 로비에는 반려견을 맡겨놓고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반려견 돌봄 서비스를 운영한다. 또한, 유료 티켓 1매당 사료 100g이 자동으로 기부되는 ‘유기견 후원 프로젝트’ 등 다채로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웃고 즐기는 뮤지컬을 넘어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볼 수 있는 공연의 등장이 반가울 따름이다. 물론 시니어에게도 뮤지컬 을 권할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유기견이 되는 순간 벌어질 끔찍한 일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공연은 2월 26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에서 한다.
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장리석(張利錫, 1916~ ) 화백은 2016년 4월 백세(百歲)를 넘긴, 그러나 아직 화필을 잡는 당당한 현역이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상수보통학교 졸업, 1937~1939년 일본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 수학, 귀국해 1940~1945년 평양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미술부장, 이때 조수로 있다 숨진 화가 최지원(崔志元, ?~1940)을 추모하여 그의 아호를 딴 ‘주호(珠壺)회’를 구성,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최영림(崔榮林, 1916~1985), 황유엽(黃瑜燁, 1916~2010),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박영선(朴泳善, 1910~1994), 윤중식(尹仲植, 1913~2012) 등과 5년간 동인전을 열어 평양 미술인의 자긍심을 높였다.
1950년 7월 북한 노동성에서 건립 중이던 금강산호텔 벽화 작업에 동원되어 평양을 떠난 뒤, 북진(北進)한 국군 원산 해군기지 사령부에 입대, 종군하게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1951년 1·4후퇴 때 제주도까지 내려가 4년 여 체류한 인연으로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1955년 제4회 국전에 이 특선되고, 1958년 제7회 국전에 이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화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81년까지 서라벌예대, 수도여자사범대학, 중앙대학교에서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 구상회화의 산증인이 되었다. 주로 제주에 머무르며 서민들의 일상,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해녀 등을 독특한 색감으로 그리고 있다. 2005년에는 제주도에 그림 110여 점을 기증하여 2009년 개관한 제주도립미술관 내의 ‘장리석 기념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2014년에는 전을 열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두고 온 고향풍 경도 많이 있는데, 내가 보았던 겨울 풍경은 , , 세 작품이었다. 눈 내린 시골마을, 옹기종기 초가집도 보이고 밤나무 옆길로 엄마와 아기, 소년과 강아지 등이 눈길을 걸어가는 시정어린 그림으로 화가의 유년시절 외가 마을의 설경을 그린 것이다.
바람에 눈발이 날리듯, 노화백의 가슴에 묻혀 있던 아슴푸레한 기억들이 연작으로 화폭에 옮겨져, 보는 이들을 묻혔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적이 따뜻하게 해 준다. 이 작품 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낙찰받은 작품이다. 창밖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 그림 아래 아내와 차를 끓이고, 가야금 산조를 들으며 깊은 감상에 젖곤 한다.
은 박용인(朴容仁, 1944~ ) 화가의 유럽 여행 중의 한 작품이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 1981~1983년 프랑스 몽파르나스의 아카데미 드 라그랑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Chaumière)에서 유학하고 국내 여러 미술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북한산, 제주도 등 곳곳의 풍경이나 와인, 과일, 꽃의 정물도 많이 그렸다. “남극과 북극을 빼고 전 세계를 여행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유럽에 자주 머물며 알프스의 마터호른,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같은 세계적 명산은 물론 고성(古城)들을 그렸다.
이 화가는 회화의 기법상 캔버스에 나이프를 주로 써서 유화물감을 바른다. 나이프를 쓰면 그림의 두께를 더하여 마티에르(matiere, 물감의 질감)가 무겁고 깊이 있게 보이고, 평면의 화면도 시각적으로 입체적인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미술시장에서, 외국 풍경을 그린 작품은 우리나라의 풍경을 그린 작품보다 다소 가격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경매에서 이 그림을 살 때에는 그 시작가가 높아 의외였다. “이 작가나 권옥연(權玉淵, 1923~2011) 화백 같은 경우, 외국 풍경이나 인물을 워낙 심도 있게 작품화하기 때문”이라는 경매 회사의 설명이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교외, 한적한 도로를 건너 왼편으로, 고색창연한 성당의 옆모습이 보인다. 후원에 나뭇잎을 채 떨어뜨리지 못한 나무에도 눈이 덮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성당의 첨탑도 잿빛 하늘에 묻혀 희미하다. 지붕은 흰 눈으로 적요하다. 고목의 가로수 위에도, 풀밭에도 깊게 눈이 내려 사위가 고요에 휩싸였다. 그림을 보는 찰나, 아늑함과 경건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속세의 혼탁함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이 화폭에 질펀히 흐르고 있다. ‘잘 된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으나, 이 작품은 아주 잘 된 그림이며, 동시에 좋은 그림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예술세계는 소재에 대한 친근감과 따뜻한 눈길이 와 닿는다. 거기에는 격정의 향수와 서정성 짙은 은유의 시어(詩語)로 잔잔한 감동이 다가온다. 정직, 성실한 자태와 순수함을 잃지 않는 작가적 심성이 화면 깊숙이 투영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화가는 “내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럽풍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유럽에서는 동양적이라고 한다.”고 미소 짓는다.
사실 화가들은 설경(雪景) 그리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흰색이 다른 색에 묻히고 그 밋밋함이 화폭을 평이하게 이끌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도 화선지의 흰 여백을 그대로 두어 눈[雪]의 형상화가 어려움을 나타내곤 하였다.
눈 내리는 날은 마음이 설렌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노라면 마음도 경건해진다. 입속으로 가만히 어떤 바람이라도 읊조리고 싶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작은 오두막, 무쇠난로에 장작불을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한때를 회상해본다. 눈설레 속에서 정겨운 얼굴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가고,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 작곡가, 1935~ )의 몇 곡을 듣다 보면 정화(淨化)된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드는 적멸감(寂滅感), 시공을 넘어 유년의 뜰로 이어진다.
‘외가’라는 낱말은 단순히 ‘어머니의 친정’ 이라는 뜻만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함축된 말이다. 외가는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곳이며, 내 모든 투정이나 허물도 기꺼이 품어 주는 따뜻한 풀솜 속 같은 곳이다.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에게선 느껴볼 수 없는 자글자글한 정이, 외할머니 치마폭에서 피어난다. 김칫국물 얼룩진 저고리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아릿하다. 어머니의 어머니로 농축된 모정이 “아이고, 내 강아지” 한마디 속에 묻어난다. 진종일 눈사람을 만들다, 강아지와 뛰놀다, 눈이 그치면, 보랏빛 하늘 위에 연을 띄워 날리며 얼레에 대고 ‘우우우’ 입김을 뿜던, 그 아름답던 시절이여!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산에 들어가 살아야지.” 중년이라면 한 번쯤 무심코 내뱉어봤음직한 말이다. 산속에서 사는 것을 상상해보면 멋진 영화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새벽의 신선한 찬 공기와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볕. 통나무집 식탁 위에 차려진 신선한 음식. 상상만 해도 뿌듯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럴까? 현장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귀산촌은 냉정한 현실이라고. 영화 같은 낭만과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귀산촌이 갖는 매력은 분명히 있다. 제대로 알고 도전한다면 귀농보다 더 다양한 재미를 느끼며 살 수 있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귀산촌을 알기 위해서는 개념부터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귀산촌은 다른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이 사유림을 구매하거나, 갖고 있던 사유림을 활용해 임업에 종사하며 새로운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귀산촌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사유, 즉 내 산(山)이다. 기존에 임업을 하고 있지 않는 이상 귀산촌과 관련한 다양한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한 현실적인 방법은 산주가 되는 것뿐이다. 산에 들어가서 사는 것을 생각해보자. 산 깊숙한 곳에 들어가 움막이나 텐트를 짓고, 수렵이나 채집을 하며 원시인에 가까운 생활을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산에서 생활하며 올릴 수 있는 소득과 내가 살 집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다행히 이런 고민, 특히 소득과 관련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 있다. 바로 산림조합이다. 농촌에 농협이 있고, 어촌에 수협이 있는 것처럼 산에는 산림조합이 있다. 한때는 임업협동조합, 임협으로 불렸던 기관이다.
산림경영계획과 정부의 다양한 지원책
임업 분야에선 산을 활용해 수익을 내는 행위를 ‘산림경영’이라고 말한다. 내 땅을 어떻게 가꾸고, 어떤 사업을 통해 수익을 내고, 어떤 시설을 지을지는 자유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땅의 종류에 따라 건축물을 지을 수 없는 경우도 있고, 비닐하우스와 같은 생산 시설도 허가가 필요한 경우가 있다. 또 국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지원을 받으려면 산림경영계획이 필요하다. 또 전문가도 아니면서 계획 없이 무턱대고 덤비다가는 수익은커녕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전문가들이 귀산촌을 위해 땅을 사기 전에 미리 임업 전문가와 산을 둘러보고, 가치가 있는지, 어떤 사업이 적합한지 조언을 받으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산림조합중앙회 선도산림경영지도 팀의 민도홍 팀장은 귀산촌에 필요한 준비 과정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산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그것을 산림경영계획이라고 불러요. 10년 단위로 수립한 산림경영계획을 산림청에서 인가받게 되면 산립사업비 보조나 융자를 지원받고 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재산세 등을 감면받을 수 있어요. 숲을 사업적으로 가치있게 만드려면 솎아베기와 같은 준비 작업이 필요한데, 산림경영계획을 인가받으면 정부와 지자체 지원만으로 할 수 있게 돼요. 이 밖에도 다양한 지원책들이 있는데, 결국 혜택을 받아 사업을 진행하려면 산림경영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좋습니다.”
임업을 통해 수익을 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나무를 심은 뒤 목재가 될 만큼 자라면 벌목해 판매하는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관련 법규상 벌목할 수 있는 시기는 수종에 따라 30년에서 40년이 걸린다. 게다가 수익도 그리 크지 않아, 1ha당 200만~300만원 수준이다. 전문가들이 ‘부수익’이라 말하는 이유다. 두 번째는 버섯이나 나물 등 단기 소득 작물을 키워 판매하는 것이다. 산지축산이나 양계도 수익 방법이 될 수 있다.
최근 정부와 산림조합에서는 농·임업인들의 소득 확대를 위해 6차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임산물이 생산되면 이것을 단순히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가 생겨날 수 있도록 가공하고, 그 과정을 체험관광 형태로 관광객들에게 공개하는 방식이다. 체험형 농장이나 숲해설 프로그램, 숙박을 결합한 레저 프로그램 등 다양한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땅을 살 때 고민해야 하는 것들
내게 어떤 임산업이 맞는지,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를 충분히 고민했다면 땅을 알아볼 차례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임지를 구매할 때 ‘경매’를 통한다. 경매 물건을 둘러보다가 괜찮은 땅이 나오면 누가 먼저 가져갈까봐 급한 마음에 덜컥 구매 결정을 내려버리기도 한다. 파주시 산림조합의 백철종 팀장은 가격만 보고 땅을 결정하는 것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간혹 어떤 땅인지, 거기서 무엇을 할지 구체적인 고민도 없이 땅을 사시는 분들이 있어요. 평당 몇 만원이라면 공짜나 다름없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런 기준으로 땅을 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맹지(길이 없는 땅), 골짜기 같은 땅이었다며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죠. 반대로 잘 알아보고 산다면 지적도 상에는 길이 없지만 실제로는 이전할 일이 없는 군부대가 사용하는 길이 있어 사실상 활용에 문제가 없는 경우도 있죠. 결국 본인이 현장을 충분히 확인하고, 그 땅을 사서 무엇을 할 것인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그는 귀산촌을 위해 땅을 알아보고 있다면 여러 후보지를 놓고, 그 지역 산림조합을 찾아 전문가의 조언을 듣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예를 들어 도시에서 내려오는 경우는 농가주택과 주차장 부지도 함께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평균 경사도 18° 미만의 준보전임지가 좋고, 그렇지 않다면 약간의 농지가 붙어 있는 임지가 적절하다고 말했다.
도시생활 방식 답습하면 실패
정착도 문제가 된다. 귀산촌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산속에 나 홀로 사는 삶이 아니다. 결국 기존의 거주민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사느냐가 귀산촌의 성패를 가름한다. 거주민과의 불화는 전문가들이 꼽는 귀산촌 첫 번째 실패 이유다. 백철종 팀장은 거주민과의 조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기본적으로 마을과 붙어 있는 산은 그 마을의 공동 소유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해요. 그런데 어느 날 산을 샀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가장 먼저 하는 게 측량이에요. 여기까지가 내 땅임을 확실히 구분하고 싶으니까요. 그러고는 울타리를 세우고 CCTV까지 달아요. 그러니 곱게 보기 어렵죠.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잘 지내면 그들이 울타리가 되고, CCTV가 되어줍니다. 임산물로 소득을 올리는 과정도 마찬가지예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 조합 작목반에서 공동으로 활동하면 국가의 생산지원 예산배정 순위가 빨라지고 판로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서 활동하면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해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죠.”
표고버섯 농사를 예로 들면 경작을 위한 원목부터, 비닐하우스 시설, 포장디자인 지원, 차량 구매, 건조시설과 저장창고까지 국고 지원과 융자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배정된 예산이 한정되어 있고 우선순위가 있어 지역 내에서의 활동이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수익은 어떨까? 민도홍 팀장은 산으로 얻는 수익은 유·무형의 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떼돈을 벌 목적이라면 귀산촌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리를 잡고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이면 일정 수준 이상의 수익도 가능하고 실제로 고소득을 올리는 분들도 적지 않아요. 은퇴자들 입장에선 등산이나 휴양을 즐길 수 있는 환경적 요인, 나무와 같은 후대에 산을 활용할 수 있는 가치, 산림을 개발해나가는 보람 등을 고려하는 것이 좋습니다.”
“치과의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세요?” 조윤선 문화체육부장관이 그를 보고 던진 첫 질문이었다. 장영준(張永俊·58) 회장은 대한바이애슬론연맹을 대표해 나간 자리에서 받은 그 질문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조 장관이 아니라 누구라도 비슷한 질문을 했을 것이다. 바이애슬론이라는 비인기 동계스포츠를 대표하는 자리에 치과의사라니. 더군다나 지금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중요한 시기. 그는 어떻게 동계스포츠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일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영준 회장은 사실 치과의사들 사이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올해 1월까지만 해도 그는 선거에서 당선된 대한치과의사협회의 부회장이었고, 그 전부터 협회 기획이사와 홍보이사 등을 경험한 회무에 밝은 사람으로 평가받아왔다. 때문에 치과계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장영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를 리 없다. 그를 치과계에서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의 직함이 있다. 바로 연세대학교 치과대학동문회장이라는 자리. 현재 국내에는 의대보다 훨씬 숫자가 적은 11개의 치과대학이 있고, 그만큼 의과대학에 비해 결속력이 강하다. 한때는 어떤 대학 동문회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에 따라 협회 회장이 바뀐다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이렇게 그는 뼛속까지 치과의사 그 자체다.
벽안의 한국인 서안나와의 인연
다시 그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조윤선 장관의 질문에 장영준 회장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론 스포츠도 하나의 전문적인 분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격이 필요한 분야는 아니잖아요. 단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운동과는 별개의 이야기니까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합니다. 치과의사들에 대한 인식이나 위상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영준 회장의 바이애슬론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올해 4월이 그 시작이었다. 바이애슬론 연맹은 곧 있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성적 향상을 통해 외국인 선수의 귀화를 야심차게 추진했는데, 그중 한 선수인 러시아 출신의 프롤리나 안나(한국이름 서안나·32)의 후원 요청을 받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바이애슬론의 주 무대가 유럽인 만큼, 활발한 활동을 위해서는 스폰서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바이애슬론은 제게 낯선 스포츠였죠. 그러나 제가 운영하는 의료법인 메디피움 이름으로 후원을 해달라는 선수 에이전시 측의 요청이 있었어요.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태극 마크를 달고 뛸 선수를 돕는 일이라 기분 좋게 동의를 했죠.”
후원이 결정된 프롤리나 안나는 2009년 평창 세계선수권대회 스프린트 4위, 계주경기 1위를 차지하고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는 여자 스프린트 7.5km 경기에서 4위를 기록한 세계 정상급 선수다.
이런 그의 응원이 힘이 됐는지, 안나는 한국 바이애슬론 역사상 첫 세계선수권 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8월 27일 에스토니아 오테페에서 열린 2016 바이애슬론 하계세계선수권대회 여자 스프린트 종목에서 22분 29초 01의 기록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다음 날 열린 여자 추발 종목에선 3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동메달을 하나 더 따냈다. 평창에서의 금메달을 바라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린 셈이다.
“안나는 결혼과 함께 잠시 은퇴했던 선수였어요. 그러다 2년 만에 복귀했는데 지난여름의 성과로 주변의 우려를 한 번에 불식시켰어요. 여성 운동선수들은 나이가 들면 남성호르몬 분비가 늘면서 오히려 성적이 더 좋아지는 경우가 있어요. 아마 안나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후원자에서 진두지휘하는 수장으로
일각에서는 마치 용병을 사 모으듯 외국인 선수를 귀화까지 시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가대표를 출전시켜야 하는 바이애슬론연맹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한다.
바이애슬론의 올림픽 출전권은 국가 순위가 기준이 되는데, 이 순위는 9번의 월드컵과 1번의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결정된다. 그런데 한국의 2015~2016 국가 순위는 25위로 22위까지만 주어지는 자동출전권을 얻기는 어려운 상황. 게다가 남자 대표의 경우 성적이 나빠 세계선수권 출전권조차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2016~2017 시즌에서 출전권을 확보하려면 성적을 낼 선수가 필요했다.
장 회장은 “귀화 선수를 더 확보하려고 추진하고 있는데 쉽진 않다고 들었어요. 여자 선수는 선수층이 얇아 보강이 필요하다고 하고. 이런 좋은 기량을 가진 선수들은 단기적인 성과만 내주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어린 선수들이 기량을 갖추는 데 마중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 안현수 선수가 쇼트트랙 종목의 수준이 낮은 러시아에 가서 금메달도 따고, 러시아 선수들의 기량 향상에 기여한 것처럼, 안나도 바이애슬론 수준이 낮은 한국에서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셈이죠”라고 말했다.
장 회장은 안나의 후원식이 열리던 날 안나의 성적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후원이 결정되고 얼마 되지 않아 바이애슬론연맹 회장직에 도전하게 됐고 지난 7월 29일 열린 투표에서 제5대 대한바이애슬론연맹 회장에 당선됐다.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된 셈이다. 그 과정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해 3월에 국민체육진흥법이 바뀌고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통합되면서 새누리당 염동렬 의원이 맡고 있었던 전임 회장자리가 자동으로 공석이 됐어요. 국회의원의 체육단체장 겸직 불가 의견도 있어 새 회장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들었는데 문득 욕심이 나더라고요. 아마 안나를 후원하면서 바이애슬론 매력에 빠진 모양이에요(웃음).”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이렇게 평창올림픽을 위해 애쓰고 있는 입장에서 일련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올림픽이 마치 범죄의 온상이라도 된 듯한 지금의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말이다. 장 회장은 당연히 성공적 개최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연맹과 조직위원회가 맡은 역할이 달라 세세하게 알긴 어렵습니다만, 지금의 상황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평창올림픽은 국가적인 사업이라는 점이에요. 실제로 이번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많은 사람이 애쓰고 있고요. 이미 IOC에서도 실사를 다녀갔고, 경기 준비 진행에 문제가 없다는 의견을 받았어요. 한 차례 세계대회를 치러본 경험도 있고, 경기장도 12월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제 국민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일만 남았어요. 연맹 예산이 적어 홍보활동에 많은 한계가 있지만 좋은 성적을 내고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응원도 열심히 해주시고, 많이 보러 와주시면 좋겠어요.”
이종결합으로 대중화 앞당길 것
바이애슬론은 국내에선 어쩔 수 없는 비인기 스포츠이지만 유럽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국내의 프로야구나 프로농구에 비견될 만큼의 인기 스포츠 중 하나. 유럽 일부 국가에선 하루 24시간 바이애슬론 경기만 방영하는 방송국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 역대 올림픽 성적을 보면 독일이 가장 강국이고, 그 뒤를 노르웨이와 러시아가 뒤쫓고 있다.
장 회장은 “바이애슬론은 크로스컨트리 스키와 사격이 결합된 경기예요. 선수들은 총을 등에 맨 채로 스키를 타고 일정 거리를 달리다가, 사격장에선 사격을 겨뤄요. 바이애슬론이 인기가 있는 이유로는 두 가지 경기, 그러니까 스키와 사격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과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페널티가 주어지는 역동성이 꼽히죠. 이 밖에도 꽤 흥미로운 요소가 많아요. 한 가지 경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주도 있고, 앞 주자를 앞질러야 하는 추적 경기도 있어요. 올림픽에서는 11개의 메달이 걸려 있는 종목이니까 비중도 꽤 높다고 봐야 합니다. 남자 5개, 여자 5개, 혼성 1개의 경기가 진행돼요”라고 설명한다.
장 회장이 바이애슬론연맹을 맡으면서 관심 갖는 것 중 하나는 바이애슬론의 대중화다. 결국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되지 않고서는 인지도와 성적 모두 다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바이애슬론은 생각보다 즐길 수 있는 여지가 많아요. 꼭 스키가 아니더라도 자전거와 같은 다른 종목과 결합할 수도 있고, 사격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죠. 요즘엔 레이저를 이용한 장비들도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대중화를 위한 연맹 차원의 행사가 있었는데, 어린아이들의 반응이 대단했어요.”
치과의사들의 다양한 목소리 듣고 싶어
그가 속한 의료법인 메디피아는 치과뿐만 아니라 의료검진센터 등 다양한 과목이 결합된 의료법인이다.
“메디피아를 시작한 시기는 1990년이었어요. 다른 과목 의사들과 의기투합해서 만들었는데, 어려움이 생겨 경매에 넘어가게 된 상황까지 처해 할 수 없이 모든 지분을 제가 인수하게 됐죠. 2000년 1월 1일에 이사장이 됐어요. 경영 정상화가 되면서 2013년에는 판교에 분점도 냈죠. 치과의사가 다른 메디컬 분야의 경영에까지 참여한다는 것이 한계도 있고 공부도 필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직의 힘과 팀워크 그리고 소통의 중요성을 알게 됐어요.”
그가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바로 치과의사를 위한 일종의 사회운동, ‘행복한치과만들기 준비위원회’다. 그는 이 위원회를 통해 철학자 강신주를 초청, 대담을 진행한 적도 있고, 청년이나 여성 치과의사들과의 모임도 진행했다.
“치과의사들에게 ‘우리는 행복한가’라는 화두를 던져보고 싶었죠. 치과의사들이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다양한 계층의 치과의사들과 터놓고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젊은 치과의사들이나 여성 치과의사들의 생각은 어떤지, 동료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다양한 시도들을 했습니다.”
이런 모임에서 여러 직함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그가 놓지 않는 것은 치과의사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이다. 이제는 직원이 300명인 의료법인의 대표라면 진료를 쉴 법도 한데, 아직도 매주 환자를 대면하고 직접 진료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이유에 대해 묻자 간단하게 대답한다.
“배운 것이 이것이고, 치과의사니까요.”
이내가 가득 고인 시골길을 걷노라면, 산비둘기 소리도 베이스로 가라앉는다. 늦사리가 한창인 밭머리에, 부룩소 한 마리 잠자리 따라 뛰놀고, 건듯 바람이 지나가면 잠시 마른 풀 먼지가 일어난다. 소루쟁이 금빛 씨알도 후루루 흩어져 발등을 덮는다. 미루나무 잎에 어느새 가을빛이 스며들어 가지 끝은 설핏 채색이 시작되었다.
이제 산과 들에 가을을 거역하는 것은 그 아무것도 없다.
이내가 걷히고 달이 떠오르면, 풍경은 점멸되고 보랏빛 침잠의 장막 속에 작은 시냇물 소리만 밤을 지새우리. 그래도 소소한 풍경들은 그 잔영(殘影)이 머릿속에 남아 여러 공간에 자국을 남긴다.
화가들은 그 한순간의 풍경을 화폭에 옮기려 한다. 시인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생각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듯, 화가들은 색칠로, 응축된 감성을 풀어낸다. 우리들은 비록 좁은 그들의 화폭에서도 눈 가득 넘실대던 풍경을 떠올리며 기꺼이 그림과 하나가 된다.
이동훈(李東勳, 1903~1984) 화백의 그림 속에서 우리들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의 맑고 그윽한 풍경을 만난다. 그는 평북 태천에서 태어나 의주농업학교를 졸업, ‘평북사범학교 강습과’ 수료 후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미술 공부는 이미 훨씬 전부터 이루어져, 1928년에 선전(鮮展)에 입선함으로써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1935년에 서울로 이사, 교직에 있으면서 4년간 도다 시게오(遠田運雄, 1891~1955)라는 유명한 일본 화가를 사사(師事)하여 그림 그리기의 확고한 틀을 구축하였다. 1945년에 대전으로 이사해 대전공업학교, 1947년부터 1963년까지 16년간 대전 사범학교, 학교 이름은 충남고등학교로 바뀌었지만 정년퇴임까지 6년간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미술문화의 불모지였던 대전지방에 빛나는 미술중흥을 이룩하였다.
1969년부터는 다시 서울의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에서 12년간 강의하며 활발한 동인전, 개인전을 통해 진솔한 화업을 이어갔다. 1984년 잔설이 깔린 새벽 산책길에서 낙상, 골절상의 후유증으로 그해 5월 서거하였다. 이듬해 유족들은 유작 171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하여 그의 작품을 수집하기가 어려웠다.
이 그림 는 대구의 동원화랑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작가의 풍경화 두 점이 있었는데, 돈이 모자라 이 그림만 수집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다른 한 점은 유명한 도예가가 얼른 가져가버려,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아직도 그 그림 이 눈에 어린다. 한순간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 작품을 수집할 기회가 닿지 않는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동구 밖으로 걷던 가을날이 아련하다. 이동훈의 그림은 풍경화가 주류이지만 그는 키우던 꽃을 소재로 한 정물 소품도 많이 그렸다. 어쩌면 이 화가의 그림 속에는 숭고한 신앙의 성스러움까지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역사의 격랑을 겪어오면서도 성실하고 벗어남이 없는 자기 수양이 그대로 화폭에 녹아들었기 때문일 터이다.
대전사범학교 시절의 제자 최종태(崔鍾泰, 1932~ )조각가는 인생 진로의 사표(師表)였다며 늘 존경의 념(念)을 말하였다. “이동훈 선생의 생애야말로 큰 수도자의 삶이었으며, 그림이 깨끗하고 즐겁고, 밝고 튼튼하여 1세대 화가 중 가장 큰 예술가였다.”고 ‘탄생 100주년 기념 이동훈 회고전’ 도록에 쓰고 있다. 많은 제자들이 ‘이동훈 미술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후배 미술가들을 격려하고 있다.
늘봄 전영택(田榮澤, 1894~1968)은 소설가이며 목사로 소설 등으로, 김동인(金東仁, 1900~1951 소설가) 주요한(朱耀翰, 1900~1979 시인)과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동인지 를 만들어 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분이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장남 전상범(田相範, 1926~1999)은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유명한 조각가로, 차남 전상수(田相秀, 1929~ )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서양화가로 예술인 가족이 되었다.
전상수 화백은 1968년 첫 개인전 이래 22회의 전시회와 구순(九旬)에 가까운 현재도 꾸준히 과슈(gouache 불투명 수채화) 작업을 하고 있는 분이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프랑스 몽파르나스(Montparnasse)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Academie de la Grande-Chaumiere)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유럽 풍경을 화폭 가득 담았다.
후배 화가 김정(金正, 1940~ )은 “전상수 화백은 보헤미안처럼 항구와 부두와, 강변의 물결과, 구름과, 숲의 바람과, 산 너머로 한없이 뻗는, 포물선 같은 그리움의 정을 화폭에 담는다”고 평한다. 또한 그는 성악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 모임을 격조 높고 즐겁게 한다고 일컫는다. 스페인 여행 중 어느 카페에서 ‘베사메 무초(besame mucho; kiss me much)’를 무대에 나가 열창하자 전속 여가수가 아예 자리를 내주어 열화와 같은 박수세례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요즈음 인사동 화가들 모임에서도 오페라 아리아 곡들을 열창한다니 그 자리 끝에 앉아볼 궁량을 해본다.
이 그림 는 4호(33.4cm×24.2cm)의 작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가을 풍경인데, 여느 작가의 대작에 견주어도 될, 깊은 밀도로 가슴 벅차오르게 한다. 경매회사의 온라인 경매에서 17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낙찰 받은 작품이다.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 아래 둔덕 위에 시골집 두 채가 있고 그 앞으로는 논밭 같은 농지와 작은 개울과 물가를 따라 수초들이 듬성하다. 노을을 앞둔 저녁 무렵의 구름이 산의 능선을 빗기고 둑길에 선 서너 그루 나무는 잎이 바람에 날려 일순간 긴장감이 풀리며 스산하다. 산등성이 바위에도 가을빛이 번져 있다. 원숙한 붓 터치 사이에서 풍경에 실린 마음을 읽는다.
초등학교 1학년 늦가을, 황토의 좁은 운동장 둘레로, 미루나무 긴 그림자가 붉은 노을빛에 스밀 때, 초가의 교실에서 울려오는 풍금소리, 어느새 다가가 창틈으로 들여다본 우리 교실, 흰 저고리 검정치마의 담임선생님이 건반 위에 엎드려 있던 그 처연한 뒷모습, 육십 년이 흐른 지금도 선연히 떠오르는데, 북녘에서 부모를 잃고 두 동생과 남하했다는 가족사가 짓누르던, 그 야윈 어깨 들먹이던 정경을, 어떻게 그릴 수는 없을까?
어느덧 그림자도 사라진 빈 길 위, 발자국마다 애달픔만 쌓이는데....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미술품 구입하기
문체부는 1995년을 ‘미술의 해’로 정하고, 미술 관계 문화 단체를 통해 ‘한 집 한 그림 걸기’ 운동을 전개했다. 국민의 보편적 경제 능력은 향상되었는데 문화의 수준은 거기 못 미쳐서, 우선 여러 장르의 미술품 중 그림을 사다 걸자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다. 그 후 해마다 5월이면 이 행사를 민간화랑 주도로 면면이 이어오고 있다.
당시 국민총생산이 1만 달러를 넘으며 문화의 욕구도 상승되고 있어 중산층 국민들에게 미술품을 소장하고 싶은 동기 부여가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자가용 승용차 구입하기, 레저 스포츠 즐기기와 더불어 비싸기만 한 줄 알았던 미술품도 잘 선택하면 한두 점 소장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작가나 화랑들도 거품을 빼고 통상 거래 가격에 30%정도를 할인하여 특수층이 아닌 일반 중산층 소비자를 적극 공략하였다.
미술품 유통은 화랑이 독점하다시피 했으나, 1996년 , 1998년 , 2005년 이 설립되어 미술품 판매에 새 시대를 열어왔다. 이후 , , , , 등의 경매회사가 미술품 판매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화랑을 통해 은밀히(?) 거래되던 미술품들이 도록과 전시를 통해 모두에게 공개되고 가격도 떳떳하게 노출되었다.
경매회사별로 미술품 감정단을 두어 작품의 진위와 적정 가격을 산정하여 미술품 가치의 객관화에 기여하였다. 미술품 가격이란 것이 작가와 화랑 사이에서 내밀하게 형성되었고 같은 작가의 작품도 화랑별, 지역별로 각기 그 편차가 심해 쉽게 접근하기 어려웠다. 전시장이나 화랑에서도 가격을 표시하지 않아 도대체 작품을 팔기는 하는 것인지, 가격은 얼마인지를 몰라 묻기도 겸연쩍어 돌아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나 경매회사에 회원 가입(연 회비 10만~20만원)하면 연간 경매도록도 받아보고, 인터넷으로 경매 미술품을 검색하여 작가와 가격이 합당하면, 전시 기간에 직접 실물을 확인하고 큐레이터에게 세세히 자문하며 경매에 참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매회사는 온라인으로도 경매를 진행하고 있어 집에 앉아서도 다양하게(회비 납부 안 하는 준회원 가입으로) 미술품을 구입할 수 있다.
경매는 항상 최고가를 입찰한 사람에게 낙찰되며, 실수로 낙찰을 받더라도 취소가 안 되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야 한다. 낙찰이 되면 수수료로 작품가와 16.5%의 수수료(부가세 포함)를 지불하고 작품을 인수하면 경매 과정은 종료된다.
그러나 초보자에겐 작품을 선택하기가 어렵기만 할 것이다. 우선, 주변의 화랑이나 전시장을 찾아 미술품을 자주 보며 안목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 미술품은 시각예술이므로 긴 시간 바라보다 보면 마음의 감흥이 오고 그 작품을 소장하고 싶은 욕구도 생긴다. 그래도 미술품은 금전적 가치가 수반되는 동산(動産)이므로 장르별, 작가별 가격 추이도 잘 살펴보고 수집하길 권한다.
미술품 보관하기
경매에서 낙찰받거나 화랑에서 구입할 때에는 반드시 영수증과 관련 도록(해당 미술품의 도록이 없으면 작가의 다른 도록이나 전시 인쇄물) 그리고 작품보증서를 꼭 받아서 함께 보관한다. 그림의 경우 대부분 유리 액자에 표구되어 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화나 서예 등은 굵게 말아서 신문지로 싸둬도 무난하나 유화나 드로잉 판화 등은 반드시 유리액자에 표구하고 뒷면이 통풍되게 걸어두면 된다.
미술품 팔기
최근 미술품 경매회사들의 소위 블루칩(blue chip) 작가(지명도 있고 수집가들에게 인기 있는)들의 작품 가격은 연평균 23% 이상의 수익률을 가져온다고 분석한 자료도 있다. 영구히 작품을 소장한다면 모르나, 여윳돈으로 한두 점 수집했다가 경매시장이나 화랑을 통해 판매할 때에는 계산을 꼼꼼히 해야 한다. 100만원이 작품가일 때는(낙찰가) 연회비, 수수료 등 부대비용이 37만원 가까이 되므로 그 작품가 137만원과 판매위탁 수수료 11%(부가세 포함)를 더하여 150만원 이상을 받아야만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특별한 계기가 아니면 단기매매는 금해야 한다.
이제는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어, 미술품 시장도 꾸준히 성장할 뿐 아니라 경매회사의 낙찰률도 70%를 상회해 금년 상반기 경매시장에서 960억원이나 유입되었다. 여유자금만 있다면 노후를 대비, 긴 안목의 투자도 가능하다고 본다.
미술품에 대한 양도소득세는 작고(作故)작가이고 작품가가 6000만원 이상일 때 발생하게 되는데(세율 20%) 작품 소장자에게 80%의 기본 공제가 허용되어 우려할 바는 아니다. 6000만원에 구입, 1억원에 양도하면 차익 4000만원 중 3200만원이 공제, 800만원의 20%인 160만원만 세금이 발생하므로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
사석원(史奭源, 1960~ )화가는 촉망 받는 인기 화가로 여기 소개한 작품 는 삼베 천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고 액자까지 손수 짠 멋진 그림이다. 인사동에서 ‘한 집 한 그림 걸기’ 행사할 때 아주 싸게 구입한 작품이다. 1984년 ‘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그는 수집가들이 손꼽는 이 시대 걸출한 화가다.
유년기 포천의 외가에서 지내며, 숱한 동물들(염소, 당나귀, 올빼미 등)과 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깔끔한 외모와 달리 두주불사(斗酒不辭)의 호방한 성품과, 두 권의 수상집(隨想集), 두 권의 기행록(紀行錄)을 펴낸 뛰어난 문장력은 만날 때마다 경외심(敬畏心)을 갖게 한다. 대작할 수 없는 나의 주량(酒量)이 야속할 따름이다.
이종구(李鍾九, 1955~ ) 화가는 정부미 쌀 포대에 농민의 실경(實景)을 그리기로 유명한 화가다. 모교인 중앙대학교에서 후학을 열정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도 이 화가의 작품이다. 위의 그림 는 평소 이 화가의 소재인 농민, 소, 농기구(낫 삽 곡괭이)가 아닌, 북두칠성 아래 한 사발의 물을 그린 깊은 명상의 산물이다. 화랑 주인은 쌀 포대에 그린 시퍼렇게 날이 선 낫 그림을 권유했으나, 망설이다 이 그림을 택했다. 서재에 놓고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심상(心象)이 결곡해지기를 기원한다.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