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가 가득 고인 시골길을 걷노라면, 산비둘기 소리도 베이스로 가라앉는다. 늦사리가 한창인 밭머리에, 부룩소 한 마리 잠자리 따라 뛰놀고, 건듯 바람이 지나가면 잠시 마른 풀 먼지가 일어난다. 소루쟁이 금빛 씨알도 후루루 흩어져 발등을 덮는다. 미루나무 잎에 어느새 가을빛이 스며들어 가지 끝은 설핏 채색이 시작되었다.
이제 산과 들에 가을을 거역하는 것은 그 아무것도 없다.
이내가 걷히고 달이 떠오르면, 풍경은 점멸되고 보랏빛 침잠의 장막 속에 작은 시냇물 소리만 밤을 지새우리. 그래도 소소한 풍경들은 그 잔영(殘影)이 머릿속에 남아 여러 공간에 자국을 남긴다.
화가들은 그 한순간의 풍경을 화폭에 옮기려 한다. 시인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생각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듯, 화가들은 색칠로, 응축된 감성을 풀어낸다. 우리들은 비록 좁은 그들의 화폭에서도 눈 가득 넘실대던 풍경을 떠올리며 기꺼이 그림과 하나가 된다.
이동훈(李東勳, 1903~1984) 화백의 그림 속에서 우리들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의 맑고 그윽한 풍경을 만난다. 그는 평북 태천에서 태어나 의주농업학교를 졸업, ‘평북사범학교 강습과’ 수료 후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미술 공부는 이미 훨씬 전부터 이루어져, 1928년에 선전(鮮展)에 입선함으로써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1935년에 서울로 이사, 교직에 있으면서 4년간 도다 시게오(遠田運雄, 1891~1955)라는 유명한 일본 화가를 사사(師事)하여 그림 그리기의 확고한 틀을 구축하였다. 1945년에 대전으로 이사해 대전공업학교, 1947년부터 1963년까지 16년간 대전 사범학교, 학교 이름은 충남고등학교로 바뀌었지만 정년퇴임까지 6년간 더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미술문화의 불모지였던 대전지방에 빛나는 미술중흥을 이룩하였다.
1969년부터는 다시 서울의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에서 12년간 강의하며 활발한 동인전, 개인전을 통해 진솔한 화업을 이어갔다. 1984년 잔설이 깔린 새벽 산책길에서 낙상, 골절상의 후유증으로 그해 5월 서거하였다. 이듬해 유족들은 유작 171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하여 그의 작품을 수집하기가 어려웠다.
이 그림 <농가(農家)의 만추(晩秋)>는 대구의 동원화랑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작가의 풍경화 두 점이 있었는데, 돈이 모자라 이 그림만 수집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다른 한 점은 유명한 도예가가 얼른 가져가버려,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아직도 그 그림 <갑사(甲寺)의 설경(雪景)>이 눈에 어린다. 한순간의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 작품을 수집할 기회가 닿지 않는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동구 밖으로 걷던 가을날이 아련하다. 이동훈의 그림은 풍경화가 주류이지만 그는 키우던 꽃을 소재로 한 정물 소품도 많이 그렸다. 어쩌면 이 화가의 그림 속에는 숭고한 신앙의 성스러움까지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역사의 격랑을 겪어오면서도 성실하고 벗어남이 없는 자기 수양이 그대로 화폭에 녹아들었기 때문일 터이다.
대전사범학교 시절의 제자 최종태(崔鍾泰, 1932~ )조각가는 인생 진로의 사표(師表)였다며 늘 존경의 념(念)을 말하였다. “이동훈 선생의 생애야말로 큰 수도자의 삶이었으며, 그림이 깨끗하고 즐겁고, 밝고 튼튼하여 1세대 화가 중 가장 큰 예술가였다.”고 ‘탄생 100주년 기념 이동훈 회고전’ 도록에 쓰고 있다. 많은 제자들이 ‘이동훈 미술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후배 미술가들을 격려하고 있다.
늘봄 전영택(田榮澤, 1894~1968)은 소설가이며 목사로 소설 <화수분>등으로, 김동인(金東仁, 1900~1951 소설가) 주요한(朱耀翰, 1900~1979 시인)과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創造)>를 만들어 문학사에 큰 자취를 남긴 분이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장남 전상범(田相範, 1926~1999)은 서울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유명한 조각가로, 차남 전상수(田相秀, 1929~ )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한 서양화가로 예술인 가족이 되었다.
전상수 화백은 1968년 첫 개인전 이래 22회의 전시회와 구순(九旬)에 가까운 현재도 꾸준히 과슈(gouache 불투명 수채화) 작업을 하고 있는 분이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프랑스 몽파르나스(Montparnasse)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Academie de la Grande-Chaumiere)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유럽 풍경을 화폭 가득 담았다.
후배 화가 김정(金正, 1940~ )은 “전상수 화백은 보헤미안처럼 항구와 부두와, 강변의 물결과, 구름과, 숲의 바람과, 산 너머로 한없이 뻗는, 포물선 같은 그리움의 정을 화폭에 담는다”고 평한다. 또한 그는 성악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 모임을 격조 높고 즐겁게 한다고 일컫는다. 스페인 여행 중 어느 카페에서 ‘베사메 무초(besame mucho; kiss me much)’를 무대에 나가 열창하자 전속 여가수가 아예 자리를 내주어 열화와 같은 박수세례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요즈음 인사동 화가들 모임에서도 오페라 아리아 곡들을 열창한다니 그 자리 끝에 앉아볼 궁량을 해본다.
이 그림 <대구교외(大邱郊外)>는 4호(33.4cm×24.2cm)의 작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린 가을 풍경인데, 여느 작가의 대작에 견주어도 될, 깊은 밀도로 가슴 벅차오르게 한다. 경매회사의 온라인 경매에서 17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낙찰 받은 작품이다.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 아래 둔덕 위에 시골집 두 채가 있고 그 앞으로는 논밭 같은 농지와 작은 개울과 물가를 따라 수초들이 듬성하다. 노을을 앞둔 저녁 무렵의 구름이 산의 능선을 빗기고 둑길에 선 서너 그루 나무는 잎이 바람에 날려 일순간 긴장감이 풀리며 스산하다. 산등성이 바위에도 가을빛이 번져 있다. 원숙한 붓 터치 사이에서 풍경에 실린 마음을 읽는다.
초등학교 1학년 늦가을, 황토의 좁은 운동장 둘레로, 미루나무 긴 그림자가 붉은 노을빛에 스밀 때, 초가의 교실에서 울려오는 풍금소리, 어느새 다가가 창틈으로 들여다본 우리 교실, 흰 저고리 검정치마의 담임선생님이 건반 위에 엎드려 있던 그 처연한 뒷모습, 육십 년이 흐른 지금도 선연히 떠오르는데, 북녘에서 부모를 잃고 두 동생과 남하했다는 가족사가 짓누르던, 그 야윈 어깨 들먹이던 정경을, 어떻게 그릴 수는 없을까?
어느덧 그림자도 사라진 빈 길 위, 발자국마다 애달픔만 쌓이는데....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