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세상이 험하고 정의롭지 못할수록 잘못을 질타하며 옳은 걸 부르짖는 글보다 읽어서 기분 좋고 들어서 흐뭇한 이야기가 더 호응을 얻습니다. 한평생 글을 쓰다(50년이 다 돼가니 한평생이지 뭐!) 나이 들고 보니 그런 걸 더 자주 느낍니다. 즐겁고 흐뭇한 이야기를 모아보겠습니다.
먼저 내 이야기부터. 7월 30일 말목회(매달 마지막 목요일에 만나는 모임) 점심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왜 말목회, 이화회, 삼수회, 초월회 그런 거 많잖아요? 장소는 서울 중부경찰서 인근의 한식집이었는데, 찾기가 나빠 택시를 탔습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갈 곳을 말해줘도 대답 없이 뚱한 표정이었고, 내비게이터 사용도 익숙지 않아 보였습니다. 잘못 걸렸구나 싶었지만 내릴 수도 없어 참고 갔는데 걱정과 달리 바로 식당 앞에 내려주더군요.
요금을 내고 들어가 보니 내가 1등이었습니다. 10분가량 혼자서 휴대폰 들여다보고 카톡질하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했을 때 그 인상 별로 좋지 않은 기사가 들어왔습니다. 문간에 앉아 있는 나에게 대뜸 “아까 택시에서 내린 분인가요?” 하고 묻기에 잘못도 없는데 괜히 졸아서 그렇다고 조그맣게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이거…” 그러면서 신용카드를 주었습니다. 날 내려주고 가다가 보니 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차를 돌려 다시 왔다더군요.
그러고서 휙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고맙다고 인사는 해놓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쫓아 나갔더니 막 출발하려는 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지?’ 하다가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3만 원을 주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상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닌 덤덤한 표정으로 받고는 가버렸습니다. 차번호라도 사진 찍어두어야겠다 싶었지만 휴대폰도 놓고 나와서 32아 4151을 외워 나중에 종이에 적었습니다. 앞은 ‘서울’로 돼 있었겠지요. 회사 택시인지 개인택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때 고마운 마음으로는 어떻게든 찾아서 더 보답을 하려 했는데, 시일이 지나고 보니 대충 그냥 넘어가게 됐습니다. 어쨌든 이 일로 나는 사람을 외모나 인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인사는커녕 대답도 잘 하지 않는 택시기사들에 대한 이미지도 좀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다음은 인터넷에 떠 있는 이야기. ‘따뜻하고 흐뭇한 이야기’로 검색하면 나오는데, 우리나라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어느 날 커피가게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내 앞에 남루한 옷을 입은 비쩍 마른 여인이 커피 한 잔 값을 내려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 세자 계산대의 남자 직원이 ‘저기 있는 빵도 하나 가져가세요’ 했다. 여인이 잠시 머뭇거리자 직원은 큰 소리로 ‘제가 사는 거예요.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했다. 그 여인은 연신 고맙다면서 빵 하나를 들고 나갔다.”
글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내 차례가 되어 그 직원에게 말했다. ‘생일에 남을 위해 빵을 사주다니 멋집니다. 생일 축하해요.’ 그가 고맙다는 시늉으로 어깨를 으쓱하자,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이 말했다. ‘가난한 사람이 오는 날은 언제든 이 친구 생일이에요. 하하하.’ 계산대의 직원이 말했다. ‘전 그저 그분이 돈이 모자란 게 안타까워서….’ 나는 커피를 들고 나오면서 잔돈은 필요 없다며 ‘그건 당신 거예요’라고 했다. ‘손님, 너무 많은데요.’ 그때 나는 ‘괜찮아요, 오늘 제 생일이에요’라고 말했다.”
결국 두 사람은 생일이 같아졌는데, 앞으로도 생일이 같은 날이 종종 오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어떤 24시점(?) 알바생의 이야기. 올해 2월 중순 인터넷에 올라온 글입니다. “자주 오는 중학생의 졸업식에 다녀옴. 아빠하고만 사는데 졸업식 날 아빠가 일이 있어 못 온다고 속상하다고 얘기함. 아침에 퇴근하고 학교 앞에서 꽃 사서 꽃다발 주고 친구들하고 놀다 오라고 용돈 2만 원 주고 옴.” 그러면서 그는 졸업장과 꽃을 든 패딩 차림의 학생 사진까지 올렸던데, 얼굴을 숙인 데다 가려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생판 남인 학생을 축하해주고 용돈까지 주고 오다니. 그 알바생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궁금했습니다.
이번엔 평소에 인사 잘해서 목숨을 구한 이야기입니다. 냉동식품 가공 공장의 한 여직원은 어느 날 퇴근하기 전 냉동 창고에 들어가 점검을 하던 중 쾅 하고 문이 저절로 닫히는 바람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목이 터지도록 소리치며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대요. 3시간이나 지나 감각이 없을 정도로 몸이 얼었을 때 냉동 창고 문틈으로 빛이 들어오더니 누군가 문을 열었습니다. 경비원 아저씨였습니다. 그는 이 공장에 온 지 35년이 됐지만 그 여직원 말고는 아무도 인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퇴근시간이 됐는데도 그녀가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공장 안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냉동 창고까지 확인하게 됐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날 없는 사람 취급했지만 매일 인사를 해주는 아가씨가 기다려졌어요. 내가 그래도 사람대접을 받고 있구나 하고 느꼈거든요.”
다섯 번째는 이름 이야기. “예전에 친구가 자기 이름은 너무 흔한 것 같다고 하길래 ‘흔하다는 건 그만큼 많은 부모들이 그 이름이 예쁘다고 생각했다는 거고, 니 부모님도 너한테 가장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서 그만큼 노력하셨다는 뜻 아닐까?’ 하고 말했더니 예쁘게 말하기대회 우승자 같다며 좋아하더라.”
마지막은 중3 여학생의 글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욕 빼면 말을 하지 못할 정도라서 이런 일도 생기나봅니다. “제 친구가 입이 좀 많이 험한테 볼 때마다 입에 걸레를 문 것처럼 정말 보기 싫어요. 근데 저도 가끔 욕을 해서 남들 눈에 그렇게 보일까봐 욕을 줄이려고 하는데요. 욕을 대신해서 할 수 있는 단어나 문장을 알고 싶어요. 예를 들면 ‘양치하고 귤이나 먹어라!’ 이렇게 좀 귀여운? 장난 같은? 그런 거 위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그 또래의 여학생이 다음과 같이 죽 읊어댔습니다. “자기 전에 침대 모서리에 발 찍혀라, 맨발로 있다가 레고나 밟아라, 우유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 유통기한 두 달 지난 거여라, 너구리 뜯었는데 분말 스프 없고 다시마만 두 개 나와라, 하루 종일 굶었다가 컵라면 첫 끼로 맛있게 먹으려는데 따뜻한 국물이 아니라 찬물이어라, 빵 맛있게 먹다가 안을 들여다보니 바퀴벌레 반만 남아 있어라, 길 가는데 비 와서 다이소에서 우산 사서 나왔는데 바람에 철사만 남기고 다 날아가버려라, 탕수육에 소스 부었는데 알고 보니 짬뽕을 부은 거여라.” 그러더니 “이만할게요” 그러고는 상큼하게 나가버렸습니다. 나도 이만하겠습니다. 세상은 넓고 흐뭇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아파트 경비원이 주민과 갈등을 겪다가 억울하다며 스스로 자살을 택했다. 경찰이 수사를 해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겠지만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의하면 구타도 있었고 주민이 경비원을 향해 ‘너는 내 머슴이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또 ‘머슴한테 맞아 무슨 망신인지 모르겠다.’ 라는 말까지 했다는 것으로 봐서 주민은 경비원을 머슴처럼 생각하고 무시한 것이라고 여론이 들끓고 있다.
우리는 머슴이라는 말에 상당한 거부감이 있다. 과거 한보그룹의 정태수 회장이 국회청문회장에서 답변하길 ‘오너인 자기가 알지 머슴인 전문경영인이 알지 못한다.’라는 말을 했다. 전문경영인까지 머슴취급을 하는 이런 오너의 기업이 부도를 당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며 국민의 지탄을 받을 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국어사전에서 머슴이라는 단어를 정의하길 ‘머슴이란 부농이나 지주에게 고용되어 그 집의 농사일이나 잡일을 해 주고 품삯을 받는 사내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강제 징용되거나 노예처럼 팔려간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돈 받고 남의 집일을 해주는 사람이란 뜻이다. 돈 받고 일 해주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봉급쟁이ㆍ 일당쟁이 같은 저속한 말은 그래도 참는다. 머슴이란 말이 사전적 의미로 보면 그다지 나쁜 말은 아닌 직업의 한 종류지만 우리 머리 속에 들어있는 머슴이라는 호칭은 아주 부정적이어서 그런 말을 듣고는 누구도 못 참는다,
지금도 돈 받고 남의 집 일 해주는 사람이 엄청 많지만 아무도 ‘머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예전에도 직접 면전에서 고용한 사람이 머슴을 향해 머슴이라고 부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김 서방, 이 서방’이라고 호칭하고 그 집 자녀들은 ‘아저씨’라고 불렀다.
사전에서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머슴이란 말속에는 못 배우고 배고픈 가난한 사람이라는 멸시 어감이 있다. ‘머슴밥’이라고 하면 큰 밥그릇 위에 밥 한 그릇이 또 올라갈 정도로 수북이 담는 고봉(高捧)밥을 이른다. 고봉밥을 처음부터 머슴이 먹는 것이 아니라 위에 부분을 양반이 먹고 밑에 남은 밥을 머슴이 먹어서 머슴 밥이라고 한다는 유래다. 이렇게 주인이 먹다 남은 밥을 먹었다는 것은 사실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고기를 제대로 못 먹던 시절에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은 밥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었다. 머슴은 항시 고봉밥을 먹었다.
시골 출신인 나는 실제 머슴을 많이 보고 자랐다. 머슴의 일하는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 년 봉급에 해당하는 사경(私耕)으로는 옷 한 벌 받고 명절날과 눈이나 비 오는 날은 쉬고 쌀로서 10가마니를 받았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노동 착취에 해당하겠지만, 워낙 가난하던 시절에 숙식 제공되는 직업이니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땡전 한 푼 없던 총각이 성실히 몇 년 머슴을 살면 받은 사경으로 농토도 사고 결혼도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머슴은 먼동이 트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져야 일이 끝나니 노름판에 기웃거리거나 술판에도 얼씬하지 않았다. 돈을 쓸 틈이 없으니 돈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난해서 남의 농토를 대리 경작해주고 일정 비율을 나누어 갖는 소작농은 해도 머슴살이는 피했다. 그만큼 괄시받는 직업이었다. 자신의 의사는 전연 반영되지 않고 오직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머슴살이는 요즘 말로 자유가 없는 로봇 같은 노동 기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에 주위의 신분적 멸시를 참아내기가 어려웠다. ‘머슴의 자식’이라거나 아버지가 머슴살이 한 사실이 알려지는 걸 수치로 알고 꺼렸다.
‘경비를 머슴 취급하는 모습을 보면 매우 화가 난다.’든가 ‘머슴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인격 문제다.’는 말에는 듣기 싫다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굳이 듣기 싫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듣기 좋은 말도 많다.
# 펭수, 디 오리지널 (EBS · 한국교육방송공사)
‘자이언트 펭TV’ 제작진과의 협력으로, 3개월에 걸쳐 제작한 펭수 화보 매거진. 지난 1년 간 펭수의 활동 하이라이트와 인터뷰를 비롯해 펭클럽 인증 모의고사, 팬아트 모음, 펭수의 은밀한 사생활 화보, 미발표 자작시 등이 담겨 있다.
# 서울 아파트 지도 (이재범 저 · 리더스북)
저자가 서울 25개구 전역에서 발품을 팔아가며 직접 분석하고 엄선한 ‘돈 되는 구축 아파트’ 272곳을 소개한다. 교통부터 학군, 실거주 환경, 가격 변동, 재건축 이슈, 향후 전망 등 구축 아파트의 단지별 정보를 상세히 수록했다.
# 임계장 이야기 (조정진 저 · 후마니타스)
공기업 사무직으로 38년간 일했던 60세 퇴직자가 생계를 위해 시급 노동의 세계에 뛰어들면서 쓰기 시작한 노동일지. 아파트, 빌딩, 버스터미널을 전전하며 경비원, 주차관리원, 청소부, 배차원으로 살아 온 3년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 (알베르토 사보이아 저 · 인플루엔셜(주))
구글 최초 엔지니어링 디렉터이자 혁신 전문가인 저자가 탁월한 아이디어를 설계하는 최적의 방법론을 제안한다. 저렴하고 쉽고 빠르게 아이디어의 성공 가능성을 가늠하는 8가지 프리토타입 기법과 이를 통한 활용 전략 등을 아우른다.
# 오늘, 나를 위한 꽃을 (오유미 저 · 위즈덤하우스)
유명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는 물론 드라마, 전시 등에서 독보적인 꽃 장식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플로리스트 오유미의 꽃 에세이. 다채로운 꽃 사진과 서정적인 글을 통해 독자들에게 가슴 따뜻한 위로와 위안을 선사한다.
# 소설 보다: 봄 2020 (김혜진 외 공저 · 문학과지성사)
‘소설 보다’는 문학과지성사가 분기마다 ‘이 계절의 소설’을 선정, 이를 계절마다 엮어 출간하는 단행본 프로젝트다. 이번 봄에는 김혜진의 ‘3구역, 1구역’, 장류진의 ‘펀펀 페스티벌’, 한정현의 ‘오늘의 일기예보’와 작가 인터뷰가 실렸다.
# 팬데믹 (홍윤철 저 · 포르체)
세계보건기구 WHO는 날로 심각해지는 코로나19 사태에 따라 ‘팬데믹’을 선언했다. WHO 정책자문위원이자 서울대 의과대학 예방의학 교수인 저자가 그동안의 경험과 연구를 통해 정리한 팬데믹 시대의 생존 해법을 제시한다.
서울시의 각 구청은 연말마다 일자리 박람회를 개최한다. 지난 11월 28일 오후 2시부터 17시까지 신도림 테크노마트 11층 그랜드볼룸에서는 구로구에서 주관하는 중장년 일자리 박람회가 열렸다. 행사장은 취업을 희망하는 중장년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행사장에서는 44개 업체별로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50명까지 총 250여 명의 직원을 현장에서 면접 하고 바로 채용했다. 구직자들이 박람회 현장에서 구직신청서를 작성해 주최 측에 제출한 다음 44개 참여 업체의 자료와 현황판을 보고 원하는 직종과 채용하는 인원 등을 검토한 후에 본인이 원하는 기업체의 부스에 가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한 후 현장에서 바로 면접을 하는 순서로 진행됐다.
모집하는 직종은 경비원, 운전기사, 제빵기술사, 건물관리직, 분양상담사, 산모도우미, 간호사, 조리사, 영업직, 생산직 등으로 분류가 됐다. 사무직은 거의 없었다. 구직자들은 남성은 50대에서 60대, 여성은 40대에서 50대가 대부분이었다. 70대 이상도 몇 명 보였다. 현장에 나와 있던 구로구청 담당자는, 갈수록 참여하는 기업이나 구직자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참여한 인원은 1200명 정도로 추정했다. 이중에 250여 명을 채용할 예정이니 경쟁률은 5대1.
박람회 현장에서는 취업 준비를 위한 서비스나 부대행사도 알차게 진행됐다. 사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직접 사진을 촬영해 반명함판 컬러사진 8장을 무료로 지원해 주고 있었으며 여성들의 면접을 돕기 위해서 얼굴화장도 해줬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정년 후에 재취업을 하려면 적당한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을 취득해야 재취업이 쉽다는 점을 절감케 하는 박람회였다.
6월 13일, 강신영, 김종억 동년기자와 내가 백두산 트레킹 팀(총 33명)에 합류했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발상지.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온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어떤 결의에 찬 출발이라기보다 막연히 뿌리를 보고 싶었다. 또 더 나이를 먹으면 백두산에 오르기 힘들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일찌감치 4박 5일의 여행 일정표를 받았지만 비용과 둘러볼 장소만 보고 무심히 있다가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세히 보니 ‘오전 6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3층 집합’이라 씌어 있었다. 난감했다. 다른 사람들은 4시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경기도에 사는 나는 그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인천공항 근처의 호텔을 알아봤다. 아침에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까지 포함해 숙박료가 4만5000~5만5000원 정도였다. 인천 운서역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한 뒤 4만5000원을 지불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40분까지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받았다. 집에서 왔으면 잠도 설쳤을 텐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비용으로 쓴 4만5000원은 그 가치가 충분했다.
짐을 꾸리면서 트레킹과 등산, 어디에 맞춰야 할지 좀 헷갈렸다. 그래서 트레킹 준비를 했고, 내 상태를 고려해 스틱까지 준비했다. 우산과 비옷, 따뜻한 옷도 집어넣었다.
허전한 코리아타운
드디어 1시간 30분 만에 심양국제공항에 도착,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에서 내려 코리아타운 ‘서탑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중국어와 한국어로 된 간판이 이어져 있었지만 한국어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사지, 노래방, 술집, 음식점, 찻집, 미용외과, 횟집, 족도관, 한국당구장….
뭔가 허전했다. 거리에서 돈을 쫓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느껴져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선의 문화가 배어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문화를 팔아야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잘 보존된 고려의 옛 거리, 결기 있는 독립투사 후예들이 자신들의 혼을 녹여 만든 거리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유적지, 민족 성지 만주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곧 이런 생각들을 후회했다. 먹고살기 팍팍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면 문화도 역사도 예절도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많은 고난 속에서도 조선족으로 남아 우리의 말과 풍습을 지켜오지 않았는가.
산 자와 죽은 자의 도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통화시에서 집안시로 두 시간에 걸쳐 이동했다.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관광하기 위해서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의 논, 밭, 산과 너무도 흡사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00여 년 이상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도 땅을 파면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시다. 1570년간 땅속에 묻혔던 광개토대왕비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장수왕은 높이 6.9m, 무게 37t의 비석에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훼손되었고 일제가 기록 일부를 변조하는 일까지 벌였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수모의 공간, 빼앗긴 국토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공안 복장의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사진촬영을 금했다. 인형처럼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에 박제가 된 채 서 있는 비석. 우리 조상의 업적을 다른 나라 사람이 지키면서 우리에게 입장료를 받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 광개토대왕릉으로 향했다. 마치 조그만 동산처럼 느껴지는 흙더미. 그 위에 초라한 나무 한 그루가 능임을 알게 해줬다. 내부 석실에는 한국 관광객이 던져놓은 듯한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먹먹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더 걸어가니 413~490년에 축조된 장군총이 나왔다.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올리고 그 옆에 밀리지 않도록 지지석을 세운 피라미드식 축석묘다. 높이 12.4m, 길이 31.6m의 7단 계단식 동방의 피라미드는 아직도 탄탄해 보였다.
침묵, 그리고 안타까움
장수왕 무덤가에 머물며 안타까운 질문을 하고 싶었다. ‘거대한 만주 벌판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 그랬다면 아직도 만주는 우리 영토일 텐데요.’ 모두의 가슴으로 젖어드는 안타까움. 그것이 비가 되었는지 그칠 줄 모르고 따라다녔다. 아니면 아비를 박제화한 것을 통곡하는 장수왕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웅장하고 거대한 무엇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뿌리에 존재하는 의식을 일깨워준 여행이었다. 순간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잘 키운 딸을 강탈당한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가이드는 천지에 올라 태극기를 꽂았다가 벌금 물고 감옥까지 갈 뻔했던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해줬다.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괜히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세상이 시끄러워지는 뉴스가 있다. 아파트 주민과 경비원 이야기다. 젊은 주민이 나이 많은 경비원을 폭행하지를 않나, 경비원을 마치 머슴쯤으로 생각하고 자기 집 허드렛일을 시키지 않나, 주민이 잘못하고도 경비원에게 뒤집어씌우지를 않나.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면 보기도 좋고, 편안하련만. 군대에서 부하가 상관에게 바짝 긴장해서 거수경례를 강요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일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경비원이 사는 모습도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말이다. 세상이 왜 이럴까. 경비원의 삶은 어떤지 얘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서 지인이 사는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경비원 A 씨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50대 중반에 시작한 게 벌써 60대 중반이 됐습니다. 10년이 조금 넘었군요. 처음엔 잠깐 하면서 다른 더 좋은 일을 찾아보려던 것이 이렇게 오랫동안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는 부인과 슬하에 1남 1녀를 둔 올해 나이 66세 가장이다. 딸은 결혼했고, 아들과 세 식구가 함께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다. 고향은 충북 청주라고 했다.
“시골에서 살았는데 어릴 때는 잘 살았습니다. 양반집에 형편도 좋고요. 외가댁이 마을 유지였어요. 제가 마흔 살 때쯤까지만 해도 어머니를 ‘아기씨’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그 시대에도 대학 나온 엘리트였고 농협 임원으로 사택에서 살았다고 했다. 아버지 나이 서른아홉 되던 해에 병을 얻는 바람에 더는 직장에 다닐 수 없어 사표를 냈다. 당연히 사택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병명을 몰라 용하다는 병원이 있다면 전국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했다. 그 많던 땅도 하나둘씩 팔다 보니 가세는 점점 기울어만 갔다. 나중에는 하나도 안 남더란다. 얘기하다가 깊은 한숨을 쉬고는 이야기를 멈춘다. 경비원 A 씨 눈에 눈물이 살짝 고인다. A 씨는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아버지 일만 생각하면 지금 일처럼 가슴이 미어진다고 한다. 그 옛날이야기가 바로 눈앞에 닥친 현실처럼 아픈 상처로 남아있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삶이 순조롭게 흘러갔다면 A 씨도 의사가 됐을 것이다. 아버지 병은 고치지도 못했고 20년간 병석에 누워 계시다 추석날 임종했다. 그때 A 씨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남은 건 작은 전셋집 하나에 여섯 식구뿐이었다. 5남매 장남인 A 씨는 졸지에 가장이 됐다. 어머니는 양반집 귀한 막내딸로 태어나 아무것도 할 줄 모르셨다. 자존심이 강해서, 양반 체면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누나는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입이라도 하나 덜려고 일찍 시집을 보냈다. A 씨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학 진학은커녕 고등학교도 담임 선생님 도움으로 겨우 졸업했다. 그해 봄, 온 식구가 서울 강북구 삼양동 산동네로 이사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양복쟁이가 돼 새로운 삶을 꿈꾸다
서울에서 얻은 첫 직장은 이모부가 경영하는 소공동의 유명 양복점이었다. 이모부 밑에서 잔심부름과 허드렛일부터 하기 시작했다. 어깨너머로 조금씩 익혀 나중에는 디자인, 재단, 재봉까지 정식으로 배우면서 일했다.
“월급이라야 그땐 쥐꼬리만큼도 안 됐어요. 그래도 일 다 배우고 나면 기술자로 대우받을 수 있잖아요. 그 희망 하나로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 낼 수 있었어요. 삼십 대 후반에 양복점을 열었어요. 초반에 꽤 괜찮았는데 기성복이 아주 잘 나오다 보니 맞춤 양복이 점점 사양길에 접어들었습니다. IMF 때문에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니 양복을 맞춰 입던 사람들도 발길을 멈췄어요.”
적자가 불어나기 시작했고 나이가 들어 눈도 점점 침침해졌다. 양복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A 씨 나이 50대 중반이었다.
“평생을 양복쟁이로 살아온 내가 다른 걸 할 줄 아는 게 있어야지요.”
아파트 경비원 제2 직업이 되었다
양복점 문을 닫고 한 달쯤 쉬고 나니까 마음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평생 쉬어 보지 못했던 삶이었다.
“일만 하다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니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나중에는 밥도 잘 안 넘어가더라고요. 뭐라도 해야 마음 편할 것 같아서 구인·구직신문을 가져다 열심히 살펴봤습니다.”
아내와 진지하게 의논했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하면 어떻겠냐고.
“집사람이 ‘지금까지 사장님 소리 듣던 사람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힘들 텐데 자존심 상하는 일이 얼마나 많겠냐’고 그러더군요. 그런 걸 견뎌낼 수 있을까. 다른 일을 좀 더 찾아보다가 안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하더군요.”
아내의 말도 일리는 있었지만, 시간 낭비라는 생각에 자존심 꾹꾹 눌러 접어 두고 이력서를 들고 가서 경비원 면접을 봤다.
“대기실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니 나보다 훨씬 돈 많고, 형편 좋은 사람도 많더군요. 자기 소유 건물이 있어서 임대수입만으로도 생활을 충분한데 집에서 놀면 뭐하냐는 생각이 지원한 사람이 있더군요. 고등학교 교감, 공무원 국장, 육군 장교 출신도 있고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다행히 그때 만난 사람들과 함께 합격해 경비원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경비원을 초기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억울하고 자존심도 상했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가면 달리할 것도 없으니 그러지도 못했다. 죽을 맛이었다. 경비원 생활하면서 힘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용역회사 횡포 심해요. 간혹 나쁜 주민이 와서 억지 부리고 몰상식하게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할 때 주민들과 마찰이 잦아요. 재활용 안 되는 쓰레기를 잔뜩 담아 와서 억지 부리기도 합니다.”
자신이 경비원이 된 이후 낙엽과 하얀 눈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아내가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낙엽이건 눈이건 제가 다 치워야 하잖아요. 그래서 맘 놓고 좋아할 수가 없대요. 그런 집사람을 보면, 내 맘도 짠합니다. 저도 물론 낙엽이나 눈을 쓸 때 여간 힘든 게 아니거든요. 온몸이 쑤시고 아프죠.”
나의 직업은 경비원, 그리고 한 가정의 아버지
올봄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취직을 못 해 걱정이라는 A 씨. 아들에게 미안해 취직 얘기는 물어보지도 못한다. 그래도 마음은 어서 빨리 아들이 취업했으면 한다고. 서로 눈치 보지 않았으면 좋겠고 여유 있는 삶을 꿈꾼다고 했다.
“이제 점점 나이도 먹고 힘도 달리고요. 사실 그만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집사람과 같이 여행 다니고 느긋하게 살고 싶어요. 맛집도 다니고요.(웃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인생살이는 그 안을 들여다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다를 게 없다고 말이다. 주민이 경비원에게 ‘갑’질을 해대는 뉴스가 가끔 들린다. 주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급료를 지급하면 ‘갑’이 될 수 있을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마다 아파트 단지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낯선 자의 방문 제한, 주차문제, 택배 보관, 이사 들고 날 때, 이웃 간의 소음문제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일을 주민 대신하는 이가 경비원이다. 주민 편의를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 인사’ 한마디 건네는 하루가 됐으면 좋겠다.
문재인 정부가 지난 대선에서 발표한 노인 관련 공약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선 지난 4월 발표된 ‘어르신을 위한 문재인의 9가지 약속’이라는 공약을 보면 기초연금 매월 30만원으로 인상, 치매 환자 국가 관리, 틀니 임플란트 본인 부담금 절반으로 절감, 찾아가는 건강 서비스, 보청기 비용 보험 확대, 경로당을 생활복지관으로 리모델링, 농산어촌에 100원 택시 도입, 어르신 일자리 확대 및 수당 인상, 독거노인 맞춤형 공공임대주택 제공 등 9가지다.
일단 개인적으로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기초연금은 하위 소득 70%여야 하는데 거기에 못 낀다. 치매는 아직 염려할 나이가 아니다. 틀니보다는 임플란트가 더 효과적이니 틀니는 아예 해당 없고 임플란트는 아직 대상 치아가 없다. 찾아가는 건강 서비스는 스스로 정기검진을 받고 있고 온다고 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집을 비울 때가 대부분이라 역시 해당 사항이 없다. 보청기도 아직 해당이 안 된다. 경로당에 갈 나이도 아니다. 농산어촌 100원 택시는 도시민이므로 해당되지 않는다. 어르신 일자리 확대 및 수당 인상은 해당이 되지만 아직 변화가 없고 두고 볼 일이다. 독거노인 맞춤형 공공임대주택 제공도 아직은 이르다. 그러므로 필자에게는 대부분 해당이 안 되는 정책들이다.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예산을 확보해야 하고 실제 적용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다 돈이 들어가야 해결되는 문제인데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도 숙제다. 이렇게 노인복지를 확대하자는 데 한편으로는 지하철 노선이 적자라고 애꿎게 노인 무임승차가 그 원인이라며 경로우대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선,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호스피스 재택 방문 서비스, 독거노인 피부양자 제도 등의 개선이다. 빠르게 진전되는 것 같다. 노인일자리는 현재 지킴이, 도우미, 돌봄이 범주에서 벗어나 직무 중심의 민간 일자리 확보가 바람직하다. 방향도 복지와 함께 직무 중심의 시장형 노인 일자리 창출이 필요하다. 국회 예산정책처 발표로 작년 노인 일자리 사업의 67.7%가 공익활동인데 보수가 12년째 월 20만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민간 분야 일거리 비중은 10%대에 불과하다고 한다. 한 포털 사이트 회사에서 노인들을 고용해서 운영하는 하는 인터넷 회사는 매출이 급증했다는 등의 좋은 사례를 참고로 할 필요가 있다. 급격히 인상된 최저 임금제의 역습으로 일하는 시간을 줄이거나 아파트 경비원 감원 등도 문제로 보인다.
새 정부가 100대 국정과제로 ‘인생 3모작’을 들고 나온 것은 귀 기울일 만하다. 인생 2모작은 이미 광범위하게 퇴직 후의 인생으로 인식되어 있으나, 인생 3모작은 새로 나온 용어로 65세 이상의 노인도 생산 가능 인구의 범주로 보고 지원하겠다는 정책이다. 50~60대를 ‘신중년’으로 보고 취업성공 패키지의 사각지대에 있던 중위소득 초과 ‘신중년’을 대상으로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신중년 인생 3모작 패키지’를 내년부터 신설한다고 한다. 노인도 실업수당의 대상이 되며 노인을 고용할 경우 장려금도 지급한다고 한다.
사회공헌에서 재능기부도 자원봉사의 영역으로 포함하는 등 관련법을 개정하고, 정부로부터 받는 소액의 활동수당도 사회공헌형 일자리와 공익형 노인일자리를 확대하기로 했다. 공익형 노인일자리 수당은 올해 22만원에서 2020년 최대 40만원까지 높인다고 한다.
서울이라는 ‘황야’를 누벼 먹이를 물어 나르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새벽 침상에서 와다닥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실려 가는 출근길부터가 고역이다. 직장에선 너구리 같은 상사와 노새처럼 영악한 후배들 사이에 끼어 종일토록 끙끙댄다. 퇴근길에 주점을 들러 소주병 두어 개를 쓰러뜨리며 피로를 씻어보지만, 쓰린 속을 움켜쥐고 깨어난 이튿날 새벽이면, 황급히 넥타이를 목에 동여매고 다시 일터로 달려가야 한다.
이 치열하고도 고단한 양상은 일과처럼 반복되기 십상이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이라는 도둑은 사람의 청춘은 물론, 꿈과 희망, 체력과 정력까지를 앗아가고, 급기야 생의 강 하류에 우리를 내동댕이친다. 정년(停年)이라는 일종의 날벼락이 도래하는 건 이즈음이다. 올해로 13년째 시골생활을 하는 차기설(62)씨의 귀농 계기도 정년을 앞둔 시점에서의 고민에서 주어졌다.
“쉰 살에 가까워질 때였어요. 정년 뒤엔 뭘 할까? 뭘 해서 먹고 살까? 어떻게 살아야 노년의 안정을 구가할 수 있을까? 별안간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아파트 경비원을 하기는 그렇고, 날마다 기름내에 절어 살아야 하는 통닭집을 하기도 싫고, 대체 무얼 하면 좋을지 궁리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문득 어! 농사? 옳지, 농사가 괜찮지 않을까? 그건 정년이라는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착상을 하게 됐어요.”
“세상에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 과히 권장할 일이 아니라고 홍보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게다가 선생은 농사 경험조차 전무했다죠?”
“섬세하게 재거나 따지지 않았어요. 일단 농사에 필이 꽂히자 자못 매력적인 직업일 거라는, 가망성 있을 거라는 결론에 곧장 닿았어요. 일테면, 상당히 무모하게 귀농한 것이죠. 그러나 무작정 귀농을 하면 실패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 알고 있었기에 준비랄까, 공부랄까, 그런 건 미리 좀 해뒀죠.”
“흔히 아내들은 귀농을 꺼려합니다. 고생길이 뻔히 보여서. 부인께선 아마도 반대했겠죠? 당신 혼자 잘해보소서! 그러며….”
“어, 잘 아시네? 제 아내(정현숙·56) 역시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처음 딱 한 번 내려와 보고 나서는 발걸음을 끊어버립디다. 3년 정도가 지난 뒤에야 합류를 했죠. 농사를 한답시고 혼자 먹고 자는 저의 몰골이 형편없어서였죠(웃음).”
차기설씨는 건축 관련 잡지사 편집장을 끝으로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검게 그은 피부, 소탈한 매무새, 거칠어진 손…. 농사꾼으로 변신한 지 오래인 그의 외형은 날렵한 도시인의 그것과 다르다. 억실억실 전신에 무르녹은 농부다운 풍색을 통해 그가 이미 머리 대신 몸을 쓰는 근로와 근면을 숭상하는 사람으로 변한 걸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과거에 지녔던 인생에 대한 관점과 사유도 새로운 지평을 굽이치고 있을 법한 일. 여하튼, 유한한 인생에 흥미와 생기를 부여하기 위해선 반전과 반동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차기설씨는 귀농으로써 방향타를 휘익 돌려 미지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연꽃에 심은 꿈
차기설씨의 농장엔 ‘우리 맘 연애(蓮愛) 이야기’라는 달달한 이름이 붙어 있다. 연꽃을 테마로 한 농원이다. 연(蓮)을 길러 거두어 연잎밥, 연잎차, 연근차, 연근환 같은 가공식품을 생산한다. 요새는 전국 도처에 연꽃농원이 산재하지만, 그가 연 농사에 뛰어들었던 당시엔 미답의 영역이었다지. 어떤 내력으로 연 농사를 시작했지?
“귀농을 준비하며 가장 고심한 건 작목 선택이라는 문제였어요. 저의 성향과 실력에 부합하는 작목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죠. 흠. 나름대로 파악을 하고 보니, 쌈채류는 돈은 되는 대신 매우 부지런해야 하는 작목입디다. 날마다 꼬박꼬박 상품을 출하해야 하니까. 그러나 저는 몹시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라 적합하지 않다 봤어요. 과수는 어떤가? 이건 노련한 전지(剪枝) 등 갖가지 노하우가 필요하고, 벼농사의 경우는 장비 구입에 비용이 너무 많이 먹힌다는 걸 알았어요. 포기해야 할 작목들이었죠. 그럼 뭘 하나? 별다른 장비 없이 최소의 농토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작목, 1차 농업이 아닌 가공 농업, 그게 뭘까, 오래 고심했는데, 어느 날 문득 연꽃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 연이다, 연꽃에 꿈을 심자, 그런 작심에 이르렀던 겁니다.”
“시인의 영감처럼, 별안간 연꽃 농사를 발상한 거예요?”
“아닙니다. 제가 40대 중반 즈음, 공주 시골에 사는 친척 형님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 형님을 찾아 내려갔는데 아, 글쎄 1만 평에 달하는 연밭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 양반의 요점이 뭐냐 하면, 앞으로 연 농사가 유망할 것이다, 연을 활용한 각종 가공식품이 각광받을 것이다, 뭐 그런 얘기였어요. 심드렁히, 건성으로 들어 넘기고 말았죠. 당시엔 귀농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거니와 시골살이에 동경 같은 것도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몇 년 뒤, 그 형님의 연 농사 권장에 썩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일이 시작됐어요.”
은인을 만난 셈이다.
“초기 한동안은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너무도 힘들었거든요. 온통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들이라서 말이죠. 게다가 연 재배나 가공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었어요. 비용도 생각보다는 많이 들었죠. 연 방죽에 드디어 연꽃이 만개했을 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뭐 변변히 팔 게 없었어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만 잔뜩 쌓이더라고.”
“부인의 불평불만도 쌓였고?”
“남편으로서 스타일 구겨지는 상황이었죠. 당시에 팔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수련뿐이었어요. 그래 간간이 수련을 팔며 활로를 모색했는데, 사람들이 요구하길 수련을 아예 자배기에 심어달라고들 하는 게 아니겠어요? 당장에 자배기를 들여오고, 덩달아 갖가지 항아리며 질그릇을 왕창 떼다가 전시 판매하게 됐어요. 뜻밖에도 그게 먹혀들었어요. 연꽃 농원이지만 그릇 장사로 재미를 봤고, 그게 정착의 기반이 됐습니다. 이후, 연 가공식품의 생산과 판매에 탄력이 붙었죠.”
차기설씨의 농원은 목 좋은 곳에 있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광평리, 휴일이면 나들이 인파가 바글거리는 궁평항이나 제부도를 지척에 둔 곳이다. 자연스럽게, 수월하게 구매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입지인 셈. 애당초 나들이객들이 오가는 길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터를 잡았더란다.
몸을 주로 쓰는 게 농사라지만, 머리라는 건 녹슬도록 마냥 놀려 먹이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다. 차기설씨는 농원의 성장을 위해서는 일단 완전한 자연산 고품질 연 가공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철칙을 세우는 한편, 홍보에 주력했다. 연꽃축제를 매년 거하게 개최해 사람들을 유인했으며,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개설해 농원을 열심히 소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마음의 평온과 안락에 두었지만, 차기설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농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일을 1차적 목표로 삼았다. 이는 지당한 실사구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바야흐로, 그의 농사는 성장세를 타고 있다.
‘느림의 미학’을 배우는 삶
“무슨 일이건 10년은 한 우물을 파야 빛을 본다죠? 농사도 마찬가집니다. 저희는 5년 만에 흑자를 보기 시작했지만 10여 년이 흐르고 나서야 안정궤도에 접어들었어요. 그러나 통장을 보면 지금도 마이너스예요. 왜냐, 재투자가 계속되기 때문이죠.”
“귀촌이나 귀농을 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건 뭐죠?”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 맺기일 겁니다. 교류에 실패하고 소외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일단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도시의 아파트식 사고를 빨리 버려야 해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도시와, 거의 완전히 오픈된 시골의 풍습은 매우 다르니까. 가령, 시골 노인네들은 이웃 사람이 외출을 할 때 꼬치꼬치 물어오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딜 가느냐, 언제 돌아오느냐. 이걸 기분 나빠할 일이 아녜요. 노인네들은 이웃이 언제 돌아올지를 미리 알아두었다가 그 집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가장 좋은 건 동네잔치를 가끔 하는 거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녜요. 국수를 삶아 함께 나눠 먹으면 되니까.”
“농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향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단연, 매우 게으른 성향의 소유자죠. 그런 분들은 아예 안 내려오는 게 정답이에요.”
“다소 게으른 건 미덕일 수도 있죠. 노력이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니라, 일테면 유유한 태도 같은 거, 매사에 너무 악착 떨기를 스스로 자제하는 거….”
“그걸 ‘느림의 미학’이라 해도 되겠죠. 제가 원래 매우 성미 급한 사람이었어요. 시골에 살면서부터는 많이 변하더라고요. 마음이 편해졌어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좀 생긴 것 같아요. 때가 되면 되겠지 하는 태도랄까. 천천히 자라나는 작물들을 바라보면서 배운 덕이죠. 농작물만이 아니라 시골의 묵묵한 자연 순환이나 풍경들에서도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도시에서 사람의 삶이 초침(秒針) 단위로 돌아간다면, 시골에선 분침도 아닌 시침(時針) 단위로 돌아간다고 비유하고 싶어요.”
“연꽃의 매력은 뭐라 보시는지?”
“연꽃만이 아니라, 모든 꽃들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죠. 막말로 성격 나쁜 사람도 꽃 앞에선 꽤나 순해지지 않던가? 저처럼 말이죠(웃음).”
시골의 산천 안에 살다 보면 유심히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슬쩍 열린다. 가만히 소소한 들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는 중에 굳었던 감관이 깨어난다. 이윽고 사는 일의 본연에 생각이 닿게 마련이다. 귀농으로 한결 느긋해지고 순해졌다는 차기설씨의 토설에 솔깃해진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본인 동의 없는 개인정보의 수집과 활용은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금지됐다. 그런데도 얼마 전 경기 오산의 한 고등학교가 부모의 직업과 월 소득은 물론 월세 보증금 액수까지 적으라는 학생생활기초조사서를 배포했다가 학부모들의 몰매를 맞고 이를 회수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전쟁 정전 후 어려운 시기에 초등학생이 된 우리 세대에게 ‘가정환경조사’에 대한 아픈 기억이 많다. 성인이 된 후에야 전기가 들어온 산간벽지 내 고향은 문화시설이라곤 어느 집에도 없었다. 따라서 모두가 빈칸으로 조사서를 제출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선생님도 모든 형편을 다 알고 있어서 손을 들라는 말씀이 없었다. 조사서에 기재된 항목들을 보면서 도시에서는 신문도 보고 라디오도 듣는가 보다 나름 짐작만 하였다.
하지만 읍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시골 동네와 문화차이가 많은 것을 느꼈다. 학교에서 지식이 아니라 수치심을 배웠다. 우리 집엔 단 하나도 없는 시계ㆍ라디오ㆍ전축 따위들이 친구들의 집에는 번듯하게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환경조사는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내 집과 내 가족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매번 신학기를 맞았다. 해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가난을 확인해야 하는 굴욕을 맛본 것이다.
그게 부끄러우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부모의 직업을 차마 쓰지 못하고 그냥 회사원으로 기재한 일, 국졸인 부모의 학력을 고졸이나 대졸로 쓴 일 등은 신학기 언론의 독자투고란에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매 학기를 맞이해야 했다. 그럼에도 가정환경조사서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학생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너무도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학생의 능력과 별 관계가 없는 허망한 일이었다.
이제는 뿌리 깊게 내려온 가정환경조사 관행이 사라지고 자기능력을 검증하는 시대가 되었다. 취업현장에는 성별ㆍ나이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남자 경비원을 모집하면서도 남자라는 표시를 하지 못하여 여자 지원자가 접수를 하고, 나이제한 공고를 하지 못하여 힘든 작업에 고령자가 찾아오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다. 이를 어기면 엄격한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입사지원서에 학력기재 금지가 제도화할 예정이다. 입시 때 자기소개서에 부모 언급도 금지하며, 이를 어길 경우 아예 탈락시키는 방향이다.
대선정국이 열렸다. 각 진영의 선수들이 앞 다투어 내달리고 있다. 주자들의 자기능력 검증이 절실한 시점이다. 과거의 검증은 사돈네 8촌의 뜬소문까지 쫓다가 세월 다 보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부동산 투기나 위장전입까지 문제 삼을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 선수의 배우자와 직계 존ㆍ비속만 검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대선주자 자기능력 검증을 철저히 하여 허깨비가 등장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또 다시 국정농단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대형사건이 터질 때마다 전관 변호사의 몸값은 하늘로 치솟는다.
사법수요자는 호화군단 변호인을 선임하고 이를 널리 알린다. 이들 소개에는 업무능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나이와 함께, 판ㆍ검사 전관경력까지 합산한 ‘연수원 기수‘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여기에 들지 못한 무관 변호사는 생존이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판ㆍ검사의 임용ㆍ보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법정의 실현을 위하여 전관예우 철폐를 부르짖은 지 이미 오래다.
사회 취업현장에는 성별ㆍ나이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남자 경비원을 모집하면서도 남자라는 표시를 하지 못하여 여자 지원자가 접수를 하고, 나이제한 공고를 하지 못하여 힘든 작업에 고령자가 찾아오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다. 이를 어기면 엄격한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입사지원서에 학력기재 금지가 제도화할 예정이다. 입시 때 자기소개서에 부모 언급도 금지하며, 이를 어길 경우 아예 탈락시키는 방향이다.
하지만 판ㆍ검사와 변호사 법조계는 다른 곳보다 기수문화가 기승을 부린다. 변호사 소개를 보면 사법연수원 기수가 제일 먼저다. 판ㆍ검사와 기수동기 등 친분관계까지 자세하게 소개하는 경우도 많다. 판ㆍ검사를 퇴임하고 갓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업무능력과 아무런 관계없는 이런 행태는 비정상적인 전관예우만 부추길 뿐이다. 사법시험이 폐지되고, 세월이 흘러 로스쿨 출신이 법조계를 채우면 어떻게 할 것인가.
법조보다 임용이 다양한 행정 분야 등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고시 기수문화를 타파하기 위하여 민간경력자ㆍ개방직ㆍ계약직 채용과 내부승진 등 다양한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경제계처럼 공직사회에서도 성과제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능력과 상관없이 줄 세우는 기수문화를 하루 속히 철폐하여야 할 이유다.
먼저 서둘러야 할 것은 깊은 생각 없이 관행적으로 행하고 있는 ‘기수소개’부터 과감히 없애야 한다. 변호사는 개업 후 순 변호사 경력만을, 판ㆍ검사는 휴직이나 정직기간을 제외한 순 경력만을 소개하여도 수요자의 정보욕구에 부응할 수 있다. 판ㆍ검사 장기근무자가 변호사 업무를 잘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회에서는 현직 능력을 중시하지 전직경력은 묻지도 않는다.
국제화 시대에 업무능력과 아무런 상관없는 출생지나 부모의 고향까지 물어야 할 필요가 없고 출신학교를 소개하여 편 가르기 할 이유도 없다. 사회적 합의가 시급한 대목이다. 어려우면 차선책으로 법제화를 서둘러야 한다. 단순한 ‘기수’ 말고, 판사의 명판결문과 검사의 귀감이 되는 기소실적, 변호사의 전문분야 변호실적 등 특허나 저작권처럼 ‘빛난 업적’ 하나라도 내세우는 것이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는 덕목이다.
‘그들만의 리그’는 지속되기 어렵다. 세상은 과거의 경력보다 현재의 능력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한지 이미 오래되었다. 기수문화를 철폐하고 능력을 기르는 것만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