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에 관해서는 네 가지 전설이 있다. 첫 번째 전설에 따르면, 인간들에게 신의 비밀을 누설했기 때문에 코카서스 산에 쇠사슬로 단단히 묶였고 신들이 독수리를 보내 자꾸 자라는 그의 간을 쪼아 먹게 했다고 한다.
두 번째 전설에 의하면, 프로메테우스는 쪼아대는 부리 때문에 고통스러워 점점 깊이 자신의 몸을 바위 속 깊이 밀어 넣어 마침내 바위와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세 번째에 따르면, 수천 년이 지나는 사이 그의 배반은 잊혀 신들도 잊었고, 독수리도, 그 자신도 잊어버렸다고 한다.
네 번째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에 대해 지쳤다고 한다. 신들도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고, 그 상처도 지쳐서 저절로 아물었다고 한다. 남은 것은 수수께끼 같은 이상한 바위산이었다.
-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소설 ‘프로메테우스’ 중에서
제우스의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인간의 창조성을 위해 주신(主神) 제우스에게 반항한 프로메테우스가 좋았다. 그가 묶여서 끝내 바위가 되어버린 이상한 바위산이 보고 싶었다. 좀 더 알아보니 노아의 방주가 최종적으로 도착한 아라라트 산도 그 지역에 있었다.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 코카서스 산맥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곳. 고대 신화와 전설의 이야기가 흐르고,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아름다운 초원의 산맥 지대. 그곳으로 떠났다.
문명과 종교의 충돌 지역
코카서스 지역은 인류 문명의 충돌과 종교 간 대립으로 점철되어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팽창하려는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저항과 지배에 늘 시달려왔다. 이런 아픈 역사와 상처 때문에 코카서스 산맥 하늘에는 안식하지 못하고 떠도는 학의 무리가 아직도 날아다니고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OST로 널리 알려진 러시아 대중가수 ‘이오시프 코브존’이 노래한 ‘백학’의 배경도 이 지역이다.
유럽의 지붕이라 불리는 최고봉 엘브루스 산(5642m)과 아라라트 산(5137m) 사이의 평원에 자리한 이곳에서 유럽계 백인들의 조상인 코카서스 인종과 수많은 민족이 지금까지 살아왔다. 다양한 민족이 다국가, 다민족, 다문화 사회를 형성하면서 생존을 위한 이합집산과 투쟁을 벌여온 것이다. 코카서스 산맥은 크게 ‘볼쇼이캅카스(大코카서스, 북코카서스) 산맥’과 ‘말리캅카스(小코카서스, 남코카서스) 산맥으로 구분한다(코카서스는 영어식 표현, 캅카스는 러시아어식 표현).
‘북코카서스 산맥’은 유럽의 동쪽, 아시아의 서북쪽 경계다. 전통적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일부였으나 지금은 전체 산맥이 아시아에 속하는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러시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에 접해 있다.
‘남코카서스 산맥’의 길이는 600km. ‘북코카서스 산맥’과 나란히 뻗어 있으며 남쪽으로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과 접해 있다.
북코카서스 산맥과 남코카서스 산맥을 연결해주는 길은 ‘조지아 군사도로(Georgian Military Highway)’다. 러시아 남진 정책의 일환으로 시작해 1799년 완공되었다. 도로는 해발 3000m 이상의 가파른 낭떠러지로 이어지며 쉽게 접할 수 없는 자연 풍경을 선사한다. 조지아의 수도 티빌리시(Tibilisi)에서 러시아의 블라디카프카츠(Vladikavkaz)로 이어지는 214km의 거리다.
이 길을 통해 러시아는 흑해로 진출했고, 코카서스 지역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반대로 오스만튀르크의 힘이 강해지면 이 도로는 러시아 영토로 쳐들어가는 통로가 됐다.
1990년 구 소련이 붕괴된 후 이 지역에 있는 3개 공화국(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독립한다. 북코카서스 산맥 지역을 중심으로 있던 10여 개 소수민족들도 분리 혹은 독립을 했거나 요구하고 있다(체첸공화국, 다게스탄, 북오세티야, 남오세티야, 잉구셰티야, 압하지야 등으로 전쟁 위험이 있고 치안이 불안하므로 여행을 가지 않는 게 좋다).
코카서스 3국의 역사
요즘 우리나라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자주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코카서스 3국은 남코카서스 산맥에 둘러싸인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다. 남북으로 이란, 터키, 러시아 등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지정학적 위치에서 알 수 있듯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던 아제르바이잔에는 동서양 문명 교류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이들 세 나라는 각각 고유의 문자와 역사, 문화를 가지고 있다. 종교도 다르다.
노아의 후예들이 사는 아르메니아는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301년)해 ‘신이 선택한 나라’로 불리며 ‘아르메니아 사도회’를 믿는다.
조지아는 과거 러시아명으로 ‘그루지야’로 불렸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후에는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 국민의 대다수(85%)가 ‘조지아 정교회’ 신자다.
‘불’을 의미하는 페르시아어 ‘아자르’와 나라의 의미를 지닌 아랍어 ‘바이잔’을 합쳐 국가 이름을 지은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같은 종족으로 국민의 93%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술을 마시는 것’이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세속주의 이슬람 국가로 수니파와 시아파가 공존한다. 서로 접해 있는 이들 사이에 분쟁은 계속 있어왔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적대국이다. 지금도 심심치 않게 무력 충돌이 일어나곤 한다. 또한 신냉전 질서와 석유 자원을 둘러싸고 강대국들의 개입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신이 욕심을 낼 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나라
하지만 대립과 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코카서스 3국은 원초적인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박한 사람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땅이다.
웅장한 코카서스 산맥은 만년설과 때묻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해발 2000m 이상의 고지대는 야생화를 비롯해 6400여 종의 식물이 살아 있는 생태의 보고다. 또 빙하 지역 트레킹과 야생화 천국의 고산지대 트레킹, 하이킹 등을 할 수 있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로망의 땅이다.
산악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척박한 땅 목초지 언덕에 서서 두 팔을 벌리면 BC 4000년경부터 시작된 역사 속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이 바람에 실려와 손가락을 간지럽힌다.
골목길 바닥에 깔린 돌들은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간 세월에 둥그렇게 마모되어 반짝반짝 윤이 난다. 그 위로 하루에 다섯 번, 절대자를 향한 인간들의 애절한 구애의 선율이 울려 퍼진다.
신이 살려고 마지막까지 남겨뒀던 땅을 인간에게 준 곳이라는 이야기가 허투루 전해오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신의 마지막 땅을 받게 된 카르트벨리(Kartveli). 그들이 조지아인들이고, 그 땅이 사카르트벨로(Sakartvelo)라고 불렸던 지금의 조지아 땅이다.
이곳 사람들은 비행기의 무사 착륙에 손뼉을 치며 신에게 감사할 줄 안다. 8000여 년의 와인 역사를 가진, 인류 최초로 와인을 만든 나라답게 방문자에게 최대의 배려를 하고 와인을 함께 나눈다. 그것이 하나의 생활이다. 9월이 되면 포도송이들을 신에게 바치는 하비스트 축제가 곳곳에서 열린다. 중앙선이 없는 도로, 그 길을 점령한 소와 양떼들 앞에서 절대 서두르지 않는 풍경이 그곳에 있다.
맛있는 음식과 와인 그리고 문화가 있는 땅
생소한 곳을 여행할 때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음식을 불평 없이 먹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지역 음식은 한국 음식과 묘하게 통하는 친밀감이 있다.
야채와 고기류를 쇠꼬챙이에 끼워 포도나무 장작에 구운 샤슬릭(Shashlyk) 므츠바디(Mtsvadi), 요구르트의 일종인 마초니(Matsoni), 다진 고기와 야채와 밥을 포도 잎에 싸서 찐 돌마(Dolma), 한국의 왕만두랑 비슷한 힝칼리(Khinkali), 치즈 피자 맛의 하차푸리(Khachapuri) 등 코카서스 3국 여행은 맛있는 음식을 함께할 수 있어서 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러시아의 시인 푸시킨은 ‘조지아의 음식 하나하나는 마치 시와 같다’고 극찬을 한 걸까.
이뿐만이 아니다. 코카서스에는 사랑과 강인함, 낭만적 기질의 예술문화도 있다.
어디에서든 두 사람 이상 모이면 자연스럽게 화음을 맞춰 다성 창법으로 노래를 부른다. 조지아 사람들의 폴리포니(Polyphony)를 듣고 있으면 성(聖)스러움이 느껴진다. 전쟁에서 죽은 연인의 무덤을 찾는 이야기의 조지아 민요 ‘술리코(Suliko)’에서는 연민의 정이 우러나온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 등장했던 아르메니아 관악기 ‘두둑(Duduk)’의 구슬픈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면 눈이 저절로 감긴다. 코사크족 이야기인 ‘대장 부리바’에서 배우 율 브리너가 췄던 춤처럼 격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동작에 혼을 뺐기기도 했다.
안전한 치안, 가성비 높은 매력적인 여행지
이토록 경이로움과 울림이 있는 아름다운 자연, 신과 순박한 사람들에 얽힌 이야기들, 오랜 세월 지탱해온 종교와 문화, 맛있는 음식이 있는 코카서스 3국은 치안도 안전한데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쩌면 잘 몰라야 더 감동적일 수 있다. 가성비 높은 물가도 놀랍다. 달고 향기로운 복숭아가 10개에 800원 수준이다. 이들도 이제 변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자본주의의 때가 덜 묻어 있다.
유럽의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여행의 맛이 분명히 다르다. 화려한 감동은 아니지만 풍미가 더 깊게 느껴지는 곳이다. 누군가는 스위스 알프스 산맥을 배경으로 한 사진에서 포토샵으로 인공적인 요소들만 지우면 코카서스가 된다고 말했다.
여행의 기쁨 중 하나는 여정이 끝난 뒤에도 그곳을 생각하면 설레는 마음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코카서스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오면 가슴이 떨린다. 많은 이야기와 감동들이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설레는 그 기억들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여수엑스포역은 관광지 철도역으로는 만점짜리 자리에 있다. 열차에서 내려 역 구내를 빠져나오자마자 엑스포 전시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그 왼쪽에서는 쪽빛 바닷물이 넘실댄다. 일정이 바쁜 사람들은 열차 도착 시각에 맞춰 역 앞에 긴 줄로 늘어서 있는 택시를 바로 잡아탄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끌리듯 엑스포 전시장으로 직진한다. 높낮이 없이 평평하게 설계된 전시장 길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어도 걸리는 곳이 없다. 시니어들에겐 맞춤 산책길이다. 자기도 모르게 왼쪽에 있는 바다 쪽으로 접근해 걷게 된다.
조금 걷다 보면 왼편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조그만 섬 하나가 눈에 잡힌다. 소문 난 오동도다. 전시장 끝자락에서 이어지는 다리가 있으니 그 섬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만만한 섬! 천천히 걸어도 30분가량이면 다 돌 수 있다. 이 섬이 소문난 건 동백꽃 덕분이다. 동백꽃은 한창 피어나는 겨울보다는 지기 시작하는 초봄에 장관을 이룬다. 바닥에 무리를 이뤄 떨어져 있는 빨간 꽃송이와 꽃잎들은 처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리 인간들에게도 질 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지라고 충고하는 듯하다! 그 교훈을 실감
나게 체득하려면 동백꽃이 떨어지는 3~4월께 오동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
실비로 먹는 ‘시골밥상...’ 식당
오동도 구경을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뱃속에서 신호가 오게 마련이다. 더욱이 이곳이 맛의 고장 여수임에랴! 오동도 앞에서 돌산으로 가는 해상 케이블카 탑승장 바로 밑에 음식점들이 즐비해 있다.
8000원짜리 여수 가정식 백반을 파는 ‘뚱땡이 할머니의 밥상 시골밥상’ 집은 언제나 손님이 차고 넘쳐 끼니때는 이용이 쉽지 않다. 칠순을 넘긴 뚱땡이 할머니와 마흔도 채 안 돼 아이를 넷이나 출산한 ‘애국자’ 따님이 운영한다. 맞은편 엠블 호텔 투숙객들도 이 식당을 많이 찾는단다.
특별한 반찬은 없지만, 하나하나 간을 잘 맞춘 맛깔스러운 반찬들과 매일 바뀌는 국 종류 때문에 밥 한 그릇을 더 시키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식사를 끝낸 자리엔 종업원이 큰 통을 들고 가서 남은 ‘아까운’ 반찬들을 모두 담는다. 음식 재활용을 않는다는 걸 손님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좁은 자리가 꽉 차고 기다리는 사람도 많아 사진도 못 찍고 문전에서 아쉬운 발길을 되돌려야 했다. 아쉽기는 뚱땡이 할머니와 따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문 앞에 서서 손님을 그냥 보내는 눈빛에 미안함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진남관 앞 ‘서울해장국’ 식당
그렇다고 애써 맛집을 다시 찾아야 한다면 여수가 아니지.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진남관. 그 오른쪽 앞과 길 건너편 거리에 여수의 오래된 먹자골목이 있다. 모두 다 소개하고 싶은 맛집들이다. 그중에서도 시민들이 많이 찾는 ‘서울해장국’이 있다.
아니, 맛집 고장 여수에서 엉뚱하게 옥호를 ‘서울~~’로 쓰다니! 그러나 사실 이상할 게 없다. 수십 년 전 여수가 관광지로 채 발돋움하기 전에 개업했으며 그 당시만 해도 서울은 대단한 동경의 대상이었기에. 마치 50, 60년대 서울의 빵집과 양복점 등의 이름으로 뉴욕, 파리, 런던 등을 많이 썼던 것처럼.
이 식당은 새벽 5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영업한다. 바싹 말린 우거지를 장어로 국물 맛 낸 된장국에 넣어 푹 끓여낸 우거지국, 바삭바삭한 식감을 즐길 수 있는 콩나물국, 두툼한 선지국은 모두 한 그릇에 6500원, 돼지고기를 아낌없이 넣은 김치찌개(8천 원) 등이 하나같이 별미다. 이 식당은 특히 밑반찬에 들이는 정성이 남다르다. 그 때 그 때 구워주는 생김을 찍어 먹게 집간장과 양념간장을 함께 내주고 갓 만들어 내오는 숙주나물, 고추멸치볶음, 계란부침 등도 모두 싱싱하고 맛깔스럽다.
주인 할머니와 따님이 조그만 식당을 무려 종업원 10명가량을 쓰며 운영한다. 김 굽는 직원, 식재료 다듬는 직원, 우거짓국 끓이는 직원, 김치찌개 끓이는 직원 등이 제각각이다. 맛집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불친절은 찾아볼 수 없고 직원들이 손님상을 수시로 체크하며 모자란 반찬은 알아서 채워주는 친절함까지 보인다. 손님들이 저마다 이 식당 칭찬하기에 바쁘다. 팔순이 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선짓국을 들고 계신다. 궁금해서 말을 붙여보았다. “40년 단골이지. 맛도 맛이지만 정성이 들어간 건강식이고 배고프던 시절 추억을 떠올려 더 좋지.” 여러모로 완벽한 맛집인 셈이다.
그 밖에도 복춘식당, 조롱박 등 여수의 별미를 즐길 수 있는 맛집들이 이 일대에 많다. 서대회, 아귀찜, 아귀탕, 생선 내장탕, 돌게장, 삼치회 등이 주메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일대의 많은 아귀찜 식당과는 비교도 안 되게 풍부한 아귀를 넣은 아귀탕이 1만 원. 둘이서 다 먹기 부담스러운 양의 아귀찜도 2만 원 미만이다. 마산 일대가 주산지로 알려진 아귀는 여수에서 더 풍족하게 요리된다. 여수 앞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삼치의 선어회는 여수의 특징적인 음식 중 하나다. 처음 접하면 물컹한 식감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지만 익숙해지면 삼치회만 찾을 정도로 중독성이 있다. 구이로 먹는 삼치 머리는 클수록 맛이 좋다.
진남관. 이순신광장. 장군섬
식사를 마치고 여수의 상징인 진남관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우뚝 서 있는 이순신 광장을 ‘참배’ 할 차례다. 여수를 하루만 둘러봐도 곳곳에 있는 이순신의 흔적을 발견하곤 새삼 놀라게 된다. 심지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거처했던 곳까지 여수에 있고, 거북선을 건조하고 수리하던 ‘선소’도 세 곳이나 있다. 어머니 처소는 보존작업이 마쳐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띄엄띄엄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는 그 앞에 새로 이순신 공원 조성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심지어 실재하지 않은 소설 속 인물까지 끄집어내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데 ‘점잖은’ 여수 시민들은 ‘이순신 자원’을 그리 요란하게 활용하지 않는다. 기자도 여수를 몇 번 찾기 전까지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전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부임해 곳곳에 이렇게 많은 흔적을 남긴 줄은 알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은 사후에도 여수민들을 여러모로 ‘살려주고 있는’ 중이다. 거북선 빵집, 이순신 햄버거 등 여수 상가의 옥호 중 이순신과 거북선이 가장 많이 활용된다. 여수민들의 충무공에 대한 애정과 충성도 역시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나라와 국민을 위한 충정이 한없는 불멸의 영웅은 여수에서 그 숨결이 가장 생생하게 느껴진다.
진남관은 2020년 봄까지 보수 일정이 잡혀있어 내부 관람이 금지돼 있다. 광장의 장군 동상 앞에 실물 크기로 지어졌다는 거북선도 기자 일행이 찾았을 때는 수리 중이어서 입장을 할 수 없었다. 관람객이 너무 많아 수시로 보수를 해야 한단다.
진남관 입구와 장군 동상 너머 장군섬에 이르는 곳까지 장군의 위세가 당당하게 뻗쳐져 있는 일대를 보는 것만으로 성웅 충무공에 대한 참배를 대신해야 했다. 참고로 해방 즈음까지는 장군 동상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차 있었단다.
종포공원 거쳐 오동도 가는 길
이순신 광장에서 오동도 방향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다. 하나는 자산공원이 있는 방향으로 나지막한 언덕길을 거쳐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몇 해 전부터 여수의 포장마차 촌으로 유명해진 종포공원을 거쳐 바다를 끼고 가는 길이다. 우선 종포공원부터 걸어보기로 한다.
이 일대는 여수의 오래된 바닷가 놀이터 중 하나다. 지금은 공원으로 명칭이 붙여져 있지만, 낚시꾼이 모여들고 고기잡이배가 들락날락하던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바로 옆에 새벽마다 경매가 열리고 종일 생선 판매가 이뤄지는 선어 시장이 있고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낚시꾼들도 간간이 모습을 보인다.
몇 년 동안 성시를 이루던 포장마차 촌은 인근 하멜기념관 옆으로 옮겨졌다. 정비 차원이었던 모양인데 아직은 포장마차 촌의 모습으로 보기엔 익숙하지 않다. 행정력도 자연스러움에 초점이 맞춰져야 바람직한데...
종포 공원 일대에 펜션 서너 곳이 있고 펜션 부근에 맛집이 꽤 늘어서 있다. 포장마차와는 구분되는 식당들이다. 여수 특산물 중의 하나인 돌문어 식당이 많다. 돌문어삼합, 돌문어라면 등등. 진화한 여수 음식 종류 중 하나는 해산물을 활용한 라면 요리다. 이 돌문어 식당엔 점심때부터 줄이 늘어서 있다. 젊은 층이 많다. 돌문어라면 뿐만 아니라 해물라면, 돌문어삼합 등 새로운 메뉴가 계속 개발되고 있다. 돌문어라면 1만 원, 네 사람이 먹어도 남을 정도의 푸짐한 돌문어삼합은 3만9000원.
기자도 몇 년 전 여수에 와서 라면 요리를 ‘개발’했었다. ‘꼴뚜기 라면’. 시장 아지매한테 1만 원만 주면 한 접시 가득 주는 꼬록(여수에선 꼴뚜기를 꼬록이라고 부른다)을 특별한 레시피 없이 라면과 함께 끓여주면 색다른 국물 맛을 내는 아주 맛깔스러운 라면이 완성된다. 강추!!!
몰포 나비와 나비 반도 여수
자산공원은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공원이다.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걸어 올라가기에 좀 힘이 들기 때문이다. 관광버스들도 코스로 잘 잡지 않는다. 그러나 노인 체력으로도 천천히 걸어 올라갈 만 하다. 아침저녁으로 산이 아름다운 자색으로 물든다 하여 자산으로 이름 붙여진 그 산속 공원엔 여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또 생뚱맞은 이름의 전시관이 하나 있다.
곤충체험관인데 이름하여 ‘빠삐용(나비) 전시관’이란다. 여수에 빠삐용 전시관이라니.. 입구에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 역을 맡았던 미국 배우 ‘스티브 맥퀸’의 사진이 걸려 있다. 여수에 빠삐용? 생각해보고 거듭 생각해 봐도 생뚱맞다!
전시관에 들어가 설명을 들어봤다. 여수시의 전직 공무원 한 분이 현직에 있을 때부터 집념으로 나비를 채집해 개인적으로 만든 전시관이다. 시에 기증해 지금은 시가 운영하고 있다. 수많은 나비 표본 중에서 대표적인 전시물이 저 멀리 중남미 원산의 몰포나비. 푸른 금속성 광택이 나는 아름다운 몰포나비와 그 나비 모양을 빼닮은 여수반도 그림이 나란히 전시돼있다.
아하! 그제야 조금 몰포나비 채집자의 의도가 이해될 듯했다. 그는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폈음 직하다.
“지구 저편에서 몰포나비가 너울너울 날아와 한반도 끝자락에 앉았다. 여수반도다!”
여수의 강남이라는 웅천에서
여수에서는 걷다가 가끔 시내버스도 타볼 만하다. 2층 관광버스도 좋지만 무작정 시내버스를 타고 한가롭게 시내를 돌다 보면 대충 여수 시내의 윤곽이 들어와 다음날 일정에 참고하기에도 좋다.
물어물어 버스 몇 번 갈아타고 여수의 강남이라는 웅천지역으로 갔다. 고급 아파트촌이 있고 인공 해변이 조성돼있으며 입구 상가엔 여수답지 않게 주차난이 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울 사람들에겐 식상한 풍경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구원은 ‘예울마루’다. 전시회와 음악회를 수시로 여는 이 건물은 여수 산단에서 매출을 많이 올리는 어느 대기업이 외국인 건축가에 설계를 맡겨 지어서 시에 기부한 것이다. 건물 외벽 없이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 건축물 문외한이 보기에도 시원하다. 건물 바깥쪽에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돼있는 것도 특이한 모습이다.
예울마루 관람을 마치고 15분가량 옆의 산길을 돌아 걸어가면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짓고 수리했다는 선소가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또 다른 작품 ‘선소’
이 선소는 여수반도를 에워싼 바다의 ‘골목길’ 맨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적군에게 노출되지 않는 장소를 고른 것이다. 실제로 가까운 웅천 쪽에서도 선소는 보이지 않고 웅천의 바다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촌에서도 이곳이 보이지 않는다. 입지 선택이 탁월했던 셈이다. 그러니 여유롭게 안정적으로 거북선을 짓고 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거북선과 수전의 각종 전략 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지모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순신 장군은 영국의 넬슨 제독과 함께 세계 해전사에서 최고의 명장으로 기록된다. 러일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이끈 일본의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 장군에게 존경을 표한 것도 거북선 뿐만 아니라 해전 전술, 주민 친화력, 그리고 선소 운영 능력 등을 보았기 때문이다. 충무공께 새삼스러운 존경의 묵례를 보내고 이번엔 선소 길 건너의 그 유명한 보리굴비 식당으로.
명사들이 찾는 여수의 보리굴비 식당 ‘석정’
굴비 하면 영광 굴비, 법성포 굴비다. 그런데 여수에 명사들도 즐겨 찾는 보리굴비 전문식당이 하나 있다. 옛 여천 지역, 여수 시청 부근에 있는 석정 식당이다.
이 식당도 덕장은 법성포에 두고 있다. 법성포에서 굴비를 말려 여수로 가져와 조리한다. 식당에서 판매하는 굴비 정식엔 굴비와 함께 해물 보쌈김치, 여수산 각종 나물 등 17가지의 반찬을 내놓고 직원이 각 테이블을 돌면서 먹기 좋은 크기로 굴비를 찢어 준다. 기름기 잘잘 흐르는 보리굴비 속살, 군침이 돈다. 보리굴비 정식 2만 원. 여수엑스포 준비위원장을 지낸 전 건설교통부 장관 강동석 씨, 지금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윤정희, 백건우 씨 부부 등 명사들이 오래된 단골이란다.
여수에서 11월에 열렸던 세계한상대회 때의 에피소드 한 토막. 대회기간 중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온 참가자들이 각자 이 식당을 찾았다가 우연히 만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단다. 각국 한인들에게까지 이 식당 소문이 났다는 식당 측의 자화자찬이다.
식당 판매보다는 전국에 보내는 택배 영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선물 포장된 다섯 마리에 택배비 포함하여 6만5,000원, 10마리 세트는 12만5,000원.
구여수와 신여수
여수시청이 있는 구 여천지역과 구 여수를 잇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내륙 쪽 버스들이 다니는 길과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이다. 웅천지역을 지나 구 여수로 가는 길목 왼쪽에 한국화약 소유 대지가, 있으며 그 건너편엔 여수반도에서 가장 탁 트인 넓은 바다가 있다. 트레킹 코스로 개발하든지 아니면 대단위 리조트로 개발할 만한데, 웬일인지 방치되고 있다. 띄엄띄엄 바닷가 길을 둘러 가면 구 여수의 전통 항인 국동항이 나온다. 옛 여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동항엔 항상 낚싯배들이 수백 척 정박해있고 경매장에선 새벽마다 활발하게 경매가 이뤄진다. 바로 앞 경도엔 미래에셋이 경도 리조트 재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경도는 골프장과 함께 여름 한 철 먹거리인 하모(갯장어의 일본말)의 주산지이다. 경도와 고흥 일대의 하모를 최고의 갯장어로 꼽는다. 경도 안엔 하모를 회와 샤부샤부(일본말. 유비끼라고도 함)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들이 있다. 혹자는 일본사람들처럼 갯장어에 기름이 끼는 7월 이후엔 맛이 별로라고도 하고 혹자는 그때의 하모 맛이 일품이라고도 한다. 정답은 없고 각자 취향에 따르면 될 일이다.
자매식당 등 국동항의 맛집들
그러나 여름철이건 겨울철이건 바닷장어 요리를 꾸준히 하는 식당들이 여수에 많다. 특히 국동항 주변엔 갯장어를 통째로 끓여 내놓는 통장어탕 식당이 몇 곳 있다. 그중에서 여수 시민들 사이에서도 소문 난 자매식당을 찾았다.
장어를 잘라서 국 끓이는 게 아니라 통째로 넣어 끓인 후 손님상에 내와서 종업원이 국자로 장어를 으깨서 먹기 좋은 크기로 나눠준다. 된장 국물에 우거지를 넣어 장어 맛과 함께 시원하고 구수한 맛이 잘 어우러진다. 일반적으로는 토막 낸 장어를 숙주나물을 넣어 함께 끓여 내놓는다. 통장어탕 14000원, 장어 소금구이 2만 원을 받는다.
여수에 가장 많은 식당이 장어탕 식당과 돌게 간장게장 식당이다. 장어탕 식당은 수산시장 안, 시청 주변, 시내 곳곳에 있다. 그중 자매식당이 가장 생명력이 있다는 여수 지인들의 전언이다. 이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내놓는 멍게 젓갈이 또 일품이다. 자꾸 더 달라는 손님이 늘어나 포장 판매를 시작했단다. 한 통(3kg)에 3만 5000 원, 택배비 4000원이란다.
여수의 수산시장
여수에는 수산시장이 몇 곳 있다. 수산시장, 특화시장, 교동시장, 선어시장. 그중 수산시장이 중앙시장 격이다. 몇 년 전에 이 시장에 큰불이 나서 시장이 완전히 전소했었다. 주변의 지원과 상인들의 복구 노력에 힘입어 업그레이드된 새 시장 모습으로 태어났다.
시장 내 수십 곳 되는 활어 판매대에서 펄펄 뛰는 생선을 잡는 활발한 모습은 장관이다. 생선 잡는 사람들의 정신 건강이 매우 좋다는 어느 보고서에 전폭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물새횟집 아지매. 수십 년간 온 가족이 이 업에 종사해왔단다. 종포공원 옆에 자그마한 건물도 소유하고 있다. 재빠르고 시원시원하게 생선을 잡고, 손님과 흥정도 시원시원하게 하며, 횟감은 그야말로 맛깔스럽게 썰어낸다. 전문가가 따로 없다. 일본 시장 상인들과 일 합을 겨루게 해봤으면 좋겠다. 여기서 회를 떠 가져갈 수도 있으나,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2층 식당으로 올라가 상차림 값으로 한 사람당 4,000원과 매운탕값 5,000원을 주고 식사를 한다. 서울의 가락시장, 노량진 시장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실비다. 생선 산지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세 명이 싱싱한 돔, 갑오징어, 농어, 삼치 등 각종 회를 남길 정도로 푸짐하게 먹고도 6만 원 미만을 냈다.
시내의 실비식당 ‘와사비’
게장 골목 소개는 생략한다. 여수의 전통적인 먹거리 중의 하나인 간장게장 식당들은 이제 시설과 메뉴에서 한 등급 더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신 시내의 횟집 한 군데를 더 소개하고 여수의 맛집 소개를 마친다. 여서동 네거리 근처의 ‘와사비’식당. 옥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름 때문에 최근 곤욕을 치렀단다. 얼마 전부터 보는 시선들이 좀 누그러지더란다.
옥호를 ‘고추냉이’로 바꿀 생각은? 이제 겨우 정착단계인데요... 이 식당은 문 연 지가 몇 해 되지 않았다. 6년 전께 문을 열자마자 여수에서 오래된 횟집들을 제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유는 초간단. 남자 사장이 새벽에 바다에 나가 직접 생선을 잡아 오고 여수 주변에서 구하기 어려운 건 통영 등지로 달려가 구해와서 오후부터 바쁘게 회를 만든다. 혼자서 몇 사람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게 몇 년을 일해 얼굴이 수척해졌을 정도다. 부인은 서비스 메뉴를 개발하고 상차림을 연구하는 한편 수시로 주방에 들어가 남편과 주방 보조 여인을 돕기도 한다. 이들의 노력은 상차림과 회접시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 식당도 갈치회, 삼치회가 일품이다. 가격도 비싸지 않다. 회 한 접시에 4만 원에서 6만 원이면 세 사람이 푸짐하게 즐길 수 있다.
맛집 몇 곳을 소개했지만, 여수의 장점은 어느 식당에 가든 다른 지방에 비해 만족할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식당마다 자부심이 대단하고 음식에 들이는 정성이 손님들 눈에도 보일 정도다. 전통인지, 요즘의 트렌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특히 엑스포 이후 시설과 함께 식당들의 자세가 확 달라졌다는 평가가 많다. 먹방과 인터넷에서 칭찬은 많이 받고 악평은 덜 받는 곳, 여수가 됐다.
오동도 입구의 일출
여수에서 일출을 보는 장소로는 돌산섬 일대를 많이 꼽는다. 그중에서도 섬 끄트머리의 향일암(向日庵)은 일출로 유명해진 곳이다. 정동진과 함께 일출 사진이 워낙 많이 나돌아다녀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일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여수 현지의 정보로는 요즘 오동도 입구의 일출이 장관이란다.
새벽에 일어나 이틀을 기다렸다. 해는 우리의 애를 태우면서, 햇살만 내려보내 고기잡이배들을 비춰줄 뿐이었다. 붉게 솟아오르는 태양 대신에 빛줄기만 담았다. 일정상 일출 장면 촬영을 포기하고 서울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철수하면서 여수 지인에게 일출 촬영을 간곡히 당부했다. 간곡히 간곡히 거듭 부탁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일출 사진이 메일로 왔다.
쌩큐 오 선생!
쌩큐 여수!
'사람이 곧 하늘이니 마땅히 사람을 하늘처럼 대해야 한다.' 인간 평등을 담고 있는 동학 이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서로 거친 손을 맞잡고 저항했던 민초들, 그들의 이름은 사람이었고 위대한 백성이었다. 전남 장흥의 겨울바람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마주 보았다.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녹두꽃'이 있었다. 동학농민을 다룬 드라마가 여간해서 없었는데 근래에 드물게도 이런 드라마가 나와 세태의 흐름과 함께 생각해 보게 했다. 사람다움 없는 기득권자들의 자리싸움은 물론이고 성장하는 아이들에게도 금수저니 놋수저니 숟가락 타령까지 만들어 냈다. 드라마는 영웅 일대기가 아닌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민초들의 삶과 항쟁에 초점을 맞추었다. “사람처럼 살다가 사람처럼 죽겠다 이 말여” 배우 조정석이 울부짓던 것처럼 인간 존엄을 연결시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었다.
전남 장흥에 가면 이런 이야기를 생생히 느껴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4대 전적지중의 한 곳이 바로 장흥이다. 공주 우금치, 정읍 황토현, 장성 황룡, 장흥 석대들.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석대들에 소나무를 앞세우고 조용히 앉혀져 있다.
1894년 이 땅에서 동학농민운동 사상 가장 치열한 '석대들 전투'가 있었던 곳, 대규모 농민군이 참여한 최후 최대의 격전지였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목숨 바친 항전의 모습을 이곳 전시관에서 찬찬히 돌아볼 수 있다.
그분들의 뜻을 기리는 상징적인 조형물과 깃발 광장, 기획전시실과 체험실, 시간순으로 나뉜 영원의 불, 개벽의 들불, 타오르는 불꽃, 분노의 불씨는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넋을 추모하는 불꽃이었다. 혼란의 시대에 변화를 꿈꾼 백성들의 희생에 전율이 느껴진다.
대나무를 항아리처럼 엮어놓은 것이 있다. 그 안에 볏짚을 가득 넣어 굴리며 방어용 공격용 무기로 사용한 장태를 보며 들불처럼 타오른 농민 항거의 모습이 느껴져 숙연해진다. 그리고 영상실에서는 일본군에 쫓긴 동학농민들을 며칠 밤을 새워 완도와 고흥의 섬으로 피신시킨 열여섯 살 소년 뱃사공 윤성도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절박했던 순간에도 의연하던 소년의 모습 멋짐 폭발이다.
민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뛰어들었던 사람들, 당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이 2004년이다. 그분들의 피의 투쟁이 100년이 넘어서야 인정된 것이다. 늦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전시관 옥상으로 올라가면 드넓은 석대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선 동학농민들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세찬 겨울바람이 분다. 나라가 바르게 서지 않을 때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나선 사람들, 부패한 기득권자들이 득세할 때 짓눌리기만 하던 민중들이 손을 맞잡았던 곳, 석대산 자락에 서서 그분들의 열망과 흔적을 좇으며 생각해 본다.
살면서 가끔은 한 번씩 내 삶의 뿌리에 누군가의 노고가 있었는지, 이제는 녹두꽃이 만개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장흥 석대들에 서면 그분들의 소중한 희생으로 꿈꾸던 세상이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전라남도 장흥군 장흥읍 남외리 16
서울 기준, 서울센트럴시티터미널→장흥시외버스터미널→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관
평일 7번 주말 8번 운행
간 김에 장흥 둘러보기
-소등섬
고기잡이 나간 가족을 기다리며 섬에 소등(小燈), 즉 호롱불을 밝힌 데서 유래된 섬 이름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촬영지로 더 알려진 소등섬의 남포마을, 배우 안성기와 오정해가 거닐었던 영화 속의 포구가 지금은 찬 겨울 속에 있다. 소등섬 너머로 떠오르는 해돋이가 아름다운 곳으로도 유명하다.
*맛집
-내저마을 매생이
매생이는 청정한 갯벌의 내해에서만 자라는 건강한 안심 먹거리다. 장흥의 내저 마을엔 현재 매생이 수확이 한창이다. (11월 말부터 그다음 해인 2월 경까지가 수확시기다)
-굴구이
자연산 굴 채취가 쉬운 이곳에 굴구이집이 많다. 석화가 가득 쌓인 입구부터 푸짐하다. 강당처럼 넓은 실내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덕 앞에 좋은 사람들과 둘러앉아 석화구이를 즐기는 맛과 풍취가 넘친다. 신선한 굴을 살짝만 익혀 껍질을 열면 짭조름한 굴즙이 흐르고 탱글한 굴을 호로록 입에 넣는다.
남포수산 전남 장흥군 용산면 접정남포로 763-96.
-장흥삼합
장흥의 삼합요리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만큼 유명한 메뉴가 낙지삼합이다. 생물로, 익혀서, 볶아서 이렇게 삼 단계의 맛을 즐긴다. 낙지 삼합은 오래전 이 집의 주인이 개발한 메뉴로 이제는 타 지역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맛집이다. 장흥의 맛있는 기억은 끝도 없다.
-이 뿐 아니라, 운치있는 힐링의 숲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 장흥의 랜드마크 정남진 전망대, 용도 폐지된 후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난 장흥교도소, 천연기념물 후박나무, 사라져 가는 재래시장을 현대화해서 편리하게 구경할 토요시장 등 가 볼 곳이 지천인 장흥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육개장은 ‘오래된’ 전통음식일까? 전통음식이지만 ‘오래된’ 음식은 아니다. 육개장의 역사는 불과 100년 남짓이다. 늘려 잡아도 200년이 되지 않는다.
“육개장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다수설이다. 그럴까? 부분적으로는 맞다. “육개장을 외부 공간에서 팔기 시작한 것은, 대구의 식당 혹은 시장통이었다”는 표현이 맞다. 이미 민간에 널리 퍼진 음식이었다. 그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 등지에서 처음으로 상업화됐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육개장은 ‘우육(牛肉, 쇠고기)+개장국[狗醬羹, 구장갱, 개고깃국]’이다. ‘우육개장국’이 육개장이 된 것이다. 원래 된장 등을 푼 물에 개고기를 넣고 국을 끓였다. ‘구장갱’ 혹은 ‘구장’, ‘개장’, ‘개장국’이라 불렸다. 그러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고 마치 개장국처럼 끓였다. 그래서 육개장이라는 게 다수설이다. 개장국 대용품이다. 이 음식이 대구의 시장통으로 나온 것이 바로 지금의 육개장이다.
역사는 100년 남짓
왜 대구일까? 교통 요지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효율적인 한반도 약탈을 위해 경부철도를 건설했다. 만주의 물자를 한반도를 세로로 질러 부산항에 운반해 배로 일본으로 보냈다. 군산, 목포, 여수, 부산이 모두 만주 혹은 한반도의 목재, 쌀, 밀 등을 일본으로 보내기 위해 세운 항구들이다. 대구는 경부철도의 주요 거점 도시다. 철도와 더불어 도시가 커지면서 시장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을 위한 식사 공간이 필요해졌다. 식당이나 허름한 천막 아래서 옹기종기 모여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驛院) 제도와 주막(酒幕)이 있었다. 역원은 초기부터 있었던 공식 숙박 시설이다. 사용자는 공무원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원 제도를 통해 공무원의 이동을 도왔다.
주막은 사설 기관이다. ‘막(幕)’은 집이 아니다. 주막의 시작은 정식 건물이 아니다. 비바람을 가리려고 천막을 쳤다. 임시, 가설 시설이다. 이곳에서 목을 축일 만큼만 술을 팔았다. 사설, 불법 시설물이다. 조선시대 후기, 숙종시대를 거치며 이들 주막이 슬슬 공식화(?)된다. 공무원들은 공식적이고 합법적인 역원을 이용한다. 민간 여행자들은 이용할 공간이 없다. 결국, 주막이다. 주막은 조선시대 후기 ‘탈법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합법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다. ‘눈감아주는’ 정도의 공간이 확대된다.
역원과 주막에서 개장국을 내놓았다. 유교는, 사람이 여섯 가지 가축을 먹도록 허용했다.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 소는 금육(禁肉)이다. 농사의 도구라 식육을 엄하게 금했다. 살아 있는 말의 가격은 도축한 말고기 값보다 비쌌다. 말을 도축할 일은 없었다. 교통, 통신의 수단이지 고기로 먹을 일이 아니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돼지도 마찬가지. 한반도의 춥고 건조한 기후는, 습하고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돼지와 맞지 않는다. 돼지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인간과 ‘먹이’를 두고 다툰다. 사람이 먹는 걸 먹는다. 사람이 먹을 것도 귀했던 시절이다. 돼지 키우기는 쉽지 않았다. 개, 닭이 만만했다. 닭은 개체가 적다. 여러 사람이 몰려드는 역원, 주막에서 닭은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개다. 개고기, 개장국은 보양식이 아니라 늘 먹는 상식(常食)이었다.
육개장의 전신 개장국
조선시대 후기. 역원과 주막에서 널리 사용했던 개고기에 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다. 중국 청나라 때문이다. 청나라는 개고기 식용을 피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개의 지위(?) 때문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수렵, 기마민족이다. 개는 사냥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인간은 동반자, 동료를 먹지 않는다. 유목, 기마민족의 청나라가 개고기 식용을 피한 이유다.
또 다른 이유는 청나라를 세운 태조와 개의 인연 때문이다. 청나라(후금)를 세운 이는 누르하치(Nurh achi, 努爾哈赤, 1559~1626)다. 개가 누르하치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줬다고 전해진다. 청나라의 통치자는 만주족이다. 이들이 개를 먹지 않자 피지배자인 중국 한족들도 따른다. 중국인들이 개고기를 피한 이유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1637)을 겪으며 조선은 견디지 못할 치욕과 약탈을 당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를 그리워하고 ‘오랑캐 청나라’를 증오, 멸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강희제, 건륭제, 옹정제 등 명군들은 청나라를 세계 최강의 나라로 바꿨다. 서양 문물들이 급격히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청나라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된다. 사절단으로 중국에 간 조선 사신단은 발전한 중국과 서양의 문물을 중국, 북경에서 본다. 북학파도 생긴다. 명나라에 대한 막연한 호감,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엷어지고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 흠모가 생긴다.
‘문명 개화된 중국, 청나라’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의 짓이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이유원(1814~1888)은 조선시대 말기의 문신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남겼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은 19세기 후반, 고급 관리의 시각으로 본 조선시대 후기의 사회상이다. ‘임하필기’에 조선시대 후기,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재미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연경(북경)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 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 버렸다. (황해도) 장단의 이종성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두 사람이 등장한다. 심상규와 이종성이다. 심상규는 개고기 식용론자이고, 이종성은 식용 반대론자다. 두 사람 모두 이유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이종성은 심상규보다 더 앞선 시대 사람이다. 그는 개고기가 먹을 음식이 아니라 하고 심상규는 복날에 삶아 올리라 했다. 영조, 정조시대를 지나며 조선시대의 사회는 개고기 식용과 반대가 뒤섞여 있었다. 민간도 마찬가지. 문제는 봉제사(奉祭祀) 접빈객의 음식이다.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맞이에 음식은 필수다.
혼례와 제사에도 국수가 필수적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었다. “언제 결혼하느냐?” 대신 “언제 국수 먹여주느냐?”라고 묻는 이유다. 일반 인들은 결혼식에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상(喪)’을 당했을 때는 음식을 미리 준비할 수 없다. 급작스럽게 닥치지만, 손님맞이 음식은 필요하다. 지금도 상가에서 늘 육개장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시작은 개장국인데 피하는 이들이 늘어나 어느 날부터인가 육개장으로 바뀐 것이다.
대구 시장통에 등장한 ‘육개장’
‘대구가 육개장의 시작’은 아니다. 조선시대 후기, 민간에서 꾸준히 육개장을 먹었다. 이 음식이 처음 식당에 등장한 것이 ‘대구 육개장’이다.
사족 하나. “왜 육개장은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쓰고 붉을까?”에 대한 엉터리 대답 둘. 귀신을 쫓기 위해 붉은색 음식을 만들었다! 엉터리다. 상가는 돌아가신 조상을 모셔서 먼 길 떠나기 전에 대접하는 자리다. 붉은색으로 귀신을 쫓는다? ‘벽사(辟邪)’의 붉은색이다? 도대체 상가에서 혼령을 모시자는 건가, 아니면 혼령을 쫓자는 건가?
또 하나 엉터리. “대구는 분지라서 춥다. 그래서 매운 고춧가루를 많이 쓴다?” 틀린 말이다. 대구보다 추운 지방은 훨씬 많다. 남쪽치고는 추운 편이지만 서울 이북보다는 춥지 않다. 분지? 대구만 분지도 아니다. 다른 지역에도 추운 분지 많다.
육개장의 붉은 고춧가루는 개장국의 영향이다. 개장국은 누린내가 심해 매운맛으로 감춘다. 향신료 사용량도 많다. 개장국이 육개장으로 발전하면서 고춧가루, 붉은색을 본뜬 것이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트레킹과 맛집 순례가 대세다, 방송과 각종 매체들이 국내는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 등 해외 코스까지 샅샅이 소개하고 있다. 과장되고 억지스런 스토리가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경쟁적으로 취재에 나섰으니 뭔가 성과를 보여줘야겠고, 그러다 보니 무리한 소개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시니어 세대를 위한 길과 맛 소개는 소홀하다. 시청률이나 구매력 면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동년기자들을 통해 편하게 걸으면서 그 지역의 특별한 맛도 즐길 수 있는 ‘Road & Food’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탐라의 속살’을 들여다봤다.
‘오 솔레 미오’
제주의 풍광은 역시 항상 ‘정답’이다. 더욱이 지금은 가을철임에랴.
먹거리 취재만 아니라면 오늘은 햇빛을 받으며 해안길 따라 하염없이 걷고 싶다. ‘오 솔레 미오(O Sole Mio)’라도 멋들어지게 부르면서. 그러나 우선 먹거리 취재부터 해야 한다. 하긴 걸으려면 뱃속을 채우는 게 우선이기도 하겠다.
먹방 프로그램에 많이 소개됐다는 우진해장국(제주시 서사로 11)에서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사진기자가 9시에 식당에 가서 대기번호표를 받았다. 대기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1만9000원의 고사리해장국이 별미다. 그러나 소중한 아침 시간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선택할 사항이겠다.
모슬포에 사는 친지의 권유로 사계리 해안을 돌기로 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오늘은 숙소가 있는 곳에 차를 놔두고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를 타고 아주 멀리까지 갔다(꽤 빙빙 돈다). 같은 제주 섬인데도 북쪽 제주시 해안과 느낌이 확연히 다른 남서쪽 해안의 풍광이 보인다. 제주에 올 때마다 이런 느낌이 계속 드는 건 아마도 도시화 진척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교통량도, 바닷가 풍경도 차이가 난다. 실제로 가파도 선착장 근처에서는 몇 명의 해녀가 바닷속으로 들어가 소라, 전복 등을 캐고 있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자연산!
“이거 모두 3만 원에 사서 듭소!”
해녀 한 분이 권하는 대로 꽤 많은 양의 소라를 사서 먹기로 했다. 해녀가 근처 탈의실에 가서 초고추장을 가져오더니 그 자리에서 소라를 까서 바닷물에 씻어준다. 오도독오도독 씹히는 식감과 함께 상큼하게 올라오는 바다 맛이 별미다. 이번 제주 취재 여행의 먹거리 중 으뜸!
간식은 간식이고 점심은 또 해야겠기에 일대에서 밀면 맛있다고 소문난 산방식당(서귀포시 대정읍 하모이삼로 62)을 찾았다. 부산에서 많이 먹는 밀면은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냉면이 그리울 때 메밀 대신 밀로 만들어 먹은 음식이다. 이 식당은 밀면 맛도 좋지만 돼지 수육이 별미로 꼽힌단다. 특이하게도 제육을 찍어먹는 양념으로 고추장을 내온다. 새우젓과 된장을 찾으니 단호하게 없단다.
점심식사 후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추사 김정호 유배지를 돌아보고 서귀포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이중섭 기념관도 찾았다.
9년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한 조선의 대표적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추사는 유배지에서도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구석구석 그의 흔적을 느껴본다. 유배 중에 그린 ‘세한도(歲寒圖)’의 발문에는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는 공자의 글이 들어 있다.
이중섭이 전쟁통에 헤어진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그린 그림들도 감상했다. 제주여행 중 이들의 흔적을 살펴보며 한 번쯤 깊은 사색에 잠기는 것도 좋겠다.
수월봉 - 자구내 포구길은 걷기 좋은 올레길 코스로 많이 소개됐다. 이 길을 걸으며 전망 좋은 카페를 만났다. 1시간여 계속된 취재를 잠시 쉬면서 넋을 잃고 차귀도와 바다를 감상했다.
친지의 차를 얻어 타고 제주시 쪽으로 향했다. 신창-용수 해안도로를 타고 올라가다 사진 찍기 좋은 곳이라며 내려준 곳. 월령 선인장마을에는 바닷속에 일렬로 박혀 있는 수십 대의 풍력발전기가 있다.
일몰과 함께 찍은 사진이 대박!!! 해가 질 때 꼭 이곳을 찾아 석양과 ‘바람개비’를 감상해보기를 권한다.
“황 기자, 저쪽으로 좀 더 가서 찍어보지!”
“더 가면 바닷속인데요. 후훗!”
풍력발전기 풍광 사진이 너무 탐나서 동료기자를 바다에 밀어 넣을 뻔했다. 저녁에는 대정읍 하모항구로에 위치한 덕승식당을 찾았다. 우럭매운탕이 일품. 국물이 칼칼하면서도 특이한 맛이다.
몸국 한 사발에 담긴 제주의 맛
몸국은 돼지고기를 삶은 국물에 해초인 모자반과 돼지고기를 넣어 끓인 국이다. 취재기자들은 몸국을 제주 이외 지역에선 먹어보지 못했다. 제주의 특별 음식 중 하나인 ‘김희선제주몸국’(제주시 어영길 19)이 소문이 자자하다기에 찾아갔다.
식당은 자그마했다. 6000원짜리 몸국, 1만 원짜리 성게미역국에 대한 평가점수를 모두 후하게 줬다. 김희선제주몸국은 다른 식당보다 몸(모자반의 제주도 사투리)을 풍성하게 쓰고 약간 매콤하게 맛을 냈으며 성게의 양도 풍부하고 싱싱했다. 한마디로 둘 다 진국이었다. 이 집 몸국은 전국으로 소문이 나서 서울에서도 택배 신청을 한단다.
맛있게 아침을 먹고 자동차로 5·16도로를 달려 서귀포로 넘어갔다. 5·16도로는 한라산을 관통하는 제주도의 남북 연결 도로 중 가장 경관이 좋다. 특히 서귀포에 거의 다다르면 도로 양쪽의 우거진 나무들이 만든 숲 터널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그재그로 굴곡이 심해 상업용 차량 이용률은 높지 않다고 한다.
올레길에서 가장 인기 높다는 7코스의 바다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가 있다. 바로 외돌개. 중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어 이 길을 걸으면 행인들 속에서 중국말이 자주 들려온다. 해안 중간에 위치한 널찍한 바위 좌우에서 스카프를 휘날리며 사진을 찍는 여인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외돌개 바위 좌측에는 호수처럼 보이는 자그마한 천연 바다수영장이 있다.
여름이 되면 이곳에서 스노클링을 한단다. 스노클링을? 다시 보니 최적의 장소다. 해변에 붙어 있고 앞으로는 큰 바위들이 막아주고 있어 안전할뿐더러 아늑하기까지 하다.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그물을 쳐놓고 하는 스노클링보다 규모 면에서는 작지만 안전성은 높다. 어린이 스노클링 장소로도 제격이겠다. 제주에 자주 오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장소란다.
점심식사 장소로 택한 식당은 시내 의 오분자기 뚝배기의 원조격 식당. 그러나 이번 제주 맛 취재를 위해 방문한 곳 중 가장 실망스러운 식당이었다. 죽은 미리 끓여놨는지 시키자마자 곧바로 나왔고 뚝배기 맛은 겉돌았다. 그런데도 가격은 높았다. 점심시간이 한창인데도 손님이 많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저녁때는 더 맛 좋은 흑돼지 구이 식당을 찾기 위해 기자들이 각자 흩어졌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의견을 취합해본 결과 흑돼지 구이 맛은 대동소이! 다시 한 번 제주의 흑돼지고기 맛은 대부분 괜찮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전날 흑돼지 안주로 과음들을 한 탓일까. 갈칫국으로 해장을 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부둣가에 있는 물항식당(제주시 임항로 37-4)을 찾아갔다. 수산물은 역시 부둣가 식당이 최고다. 재료가 신선하고 양도 푸짐하다. 전복뚝배기 1만5000원, 갈칫국 1만3000원, 갈치구이백반 1만3000원, 성게국 1만3000원. 아침식사비로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맛이 훌륭했다.
내친김에 자리물회와 한치물회 맛까지 보려 했으나 제철이 아니란다. 돌이켜보니 이번에는 제주에 와서 회다운 회를 먹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취재를 마치고 물항식당에서 저녁식사까지 해결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도시에는 대표 빵집이 있게 마련이다. 전주의 풍년제과, 여수의 거북선빵집 등이 잘 알려진 빵집이다. 제주에는 보리빵을 파는 신촌덕인당(본점, 제주시 조천읍 신북로 36)이 있다. 매장에는 대기하는 손님을 위한 테이블이 딱 하나만 놓여 있다. 순수한 보리빵과 팥보리빵, 통팥보리빵 등을 판매한다. 건강한 빵이라는 느낌이 든다.
함덕해수욕장은 제주에서 보기 드문 고운 모래의 넓은 백사장이 조성돼 있다. 왼쪽은 해변에서 10여m 나갈 때까지 바닷물이 허리 정도의 깊이밖에 안 돼 가족 놀이터로 제격이다. 제주 시내에서 가까워 이용객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영산강을 끼고 도는 도시 나주의 대표 음식은 두말할 필요 없이 곰탕과 홍어다. 나주 곰탕은 담백하고 영산포 홍어는 입맛을 톡 쏘는 자극적인 맛이다.
나주곰탕이 생겨난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20여 년 전 오일장에서 상인과 서민이 즐겨 찾던 곰탕에서 유래됐다는 것과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시작됐다는 것이다.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온 조선, 임진왜란으로 농토가 망가진 후 생활이 궁핍해진 백성들은 집에 있는 세간살이를 가지고 나와 팔기 시작하면서 장시(오일장)가 시작되었다. 장시가 최초로 열린 곳이 나주다.
5일마다 돌아오는 장날에 전국 각지에서 나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소의 머리고기, 내장 등을 푹 우려낸 나주곰탕 한 그릇이면 속이 꽉 차기도 하거니와 장날의 북새통 속에서 국밥을 후루룩 들이켜면 먹는 시간을 줄일 수도 있었다. 전통식 나주곰탕이 토렴한 이유를 알만하다. 토렴 과정을 거치면 보통 75℃로 맞춰진다. 허기에 갑자기 들이키는 국물에 입천장을 델 염려가 없는 음식 온도다. 장터 풍경에 국밥을 먹는 이들의 모습이 겹쳐져 나주곰탕에 담긴 지혜를 깨닫는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곰탕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다소 의외다. 먹을거리가 없어 배를 곯았을 그 당시에 나주곰탕이라니? 나주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군납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다. 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내장 등, 소의 부산물을 몽땅 넣고 푹 끓여낸 것이 나주곰탕이라는 얘기다. 곰국을 끓이면 국물 위로 노랗게 기름기가 뜬다. 기름기를 일일이 걷어내고, 식혀서 하얗게 굳어지면 다시 또 걷어낸다. 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재료를 넣고 끓였으니 누린내와 기름기가 심하여 그 과정은 배의 시간이 필요 했다. 결과적으로 말간 나주곰탕이 만들어졌다.
나주 곰탕집 거리에서 만나는 나주곰탕은 소의 살코기를 넣어 6시간 이상 푹 끓여 국물이 말갛다. 주로 사태, 목심, 양지를 사용한다. 고기는 건져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두었다 밥을 말아 뜨거운 국물로 수차례 토렴한 위에 얹어 손님에게 나간다.
내륙으로 둘러싸인 나주에 홍어라니? 나주는 분명히 육지 한가운데에 있는데도 홍어가 유명하다. 홍어는 흑산도가 본산지인데 영산포까지 오게 된 유래를 따라가 본다.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탈을 보다 못한 조정에서 섬 사람들을 육지로 이주시켰다. 흑산도 사람들이 이주한 곳이 나주다. 흑산도는 섬이라는 특성에 맞게 어업이 발달하였고 홍어가 많이 잡혔다. 나주에 이주하였으나 어장인 흑산도로 가서 생선을 잡아서 나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데는 보름이 걸렸고 이 과정에서 다른 생선들은 썩어서 버려야 했는데 홍어는 썩은 듯하나 먹어도 탈이 나지 않았다. 암모니아에 의한 발효로 삭힌 홍어가 음식이 되는 순간이다. 삭힌 홍어는 흑산도 뱃사람들이 별미로 먹기 시작하면서 조선시대에는 나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정약전이 쓴 에는 ‘나주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다. 탁주 안주로 곁들여 먹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홍어를 제대로 삭히려면 4단계 공정이 필요하다. 실온 숙성, 냉장 숙성, 냉동 숙성 다시 냉장 숙성 과정을 거쳐야 홍어 특유의 맛과 육질이 살아난다. 영산포 홍어의 대부분은 해외 원정 산이다. 칠레나 알래스카산 홍어다. 가끔 흑산도 홍어가 공수되는데 한 마리에 50만 원을 호가할 정도로 가격이 높다. 홍어는 보통 돼지고기, 김치와 함께 삼합으로 즐긴다. 홍어 정식을 주문하면 삭힌 홍어 외에도 찜과 튀김요리, 애 등을 함께 맛볼 수 있다. 처음 접하면 코끝을 콱 찌르는 냄새에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다가 한 번 두 번 먹다가 푹 빠져드는 음식이 홍어다.
영산포 홍어(나주시 영산3길 6번지)
홍어 초보자부터 즐겨 먹는 이들까지 두루 만족하게 할만한 맛집이다. 1인 2만 원(칠레산)이라는 착한 가격에 홍어삼함, 애, 찜, 튀김, 전, 탕까지 다양한 홍어음식을 맛볼 수 있다. 흑산도산 홍어정식은 4만 원이다.
나주곰탕
국밥의 형태가 전통식이지만 최근에는 밥과 탕을 따로 내는 곳도 많아졌다. 고기 맛과 육질은 집집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얀 집과 노안이 널리 알려져 있고 사매기나주곰탕, 탯자리나주곰탕도 추천한다. 곰탕은 9천 원이다.
중앙아시아의 나라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카자흐스탄 역시 먼 듯하면서도 가깝고, 낯선 것 같으면서도 친근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인천공항에서 카자흐스탄 국영 항공 에어아스타나를 타고 6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알마티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큰 나라인 카자흐스탄의 경제문화관광 중심지다. 오랜 기간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던 탓에 카자흐스탄어 외에 러시아어도 사용한다. 130여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슬람교와 러시아정교를 믿지만 종교적 색채는 비교적 옅다. 음식과 풍경, 종교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주변국의 장점을 관대하게 품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북적이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모든 것이 있는 곳. 한국인에겐 의병 홍범도 장군이 생애를 마친 곳이자 10만 고려인이 살고 있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땅이다.
대자연과 유럽풍 시티라이프 체험
이륙한 지 얼마나 된 걸까. 창밖을 보니 하얗게 이어진 선이 보인다. 구름인 줄 알았더니 길이가 무려 2000km에 달한다는 톈산 산맥이다. 중국,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4개국에 걸쳐 있을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비행기가 사뿐히 내려앉자, 병풍처럼 둘러싸인 만년설산 아래 녹색의 나무들과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포근히 안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알마티에서의 시간은 차분하면서도 평화롭게 흘러갈 것 같은 느낌이다.
알마티(Almaty)라는 지명은 사과를 뜻하는 ‘알마’와 할아버지를 의미하는 ‘아타’가 합쳐진 알마아타(Alma-Ata)에서 유래됐다. 그만큼 사과가 유명하다. 알마티의 가로수길이라 할 수 있는 아르바트 거리는 세련된 노천 카페들과 ‘스타벅스’, ‘망고’ 같은 글로벌 체인점들로 가득하다. 벤치와 분수대 주변에는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현지인들이 모습이 보인다. 이밖에 대통령공원, 판필로프의 28인 기념비, 젠코프 러시아 정교회, 젤료니 바자르 재래시장, 알마티의 남산타워 콕토베 케이블카도 있다. 이들 구시가지에 있는 건물들은 역사에 비해 너무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다. 그 이유는 1887년과 1911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손되어 재건축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차린 협곡’과 위구르족 마을
이튿날, 3시간여 차를 달려 차린 협곡으로 갔다. 도심을 벗어나자 차도 건물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길 양쪽으로는 끝없는 옥수수 밭이 펼쳐져 있었다. 양떼와 말들만 가끔 보이는 황량한 거리였다. 살짝 지루해질 무렵 점심을 먹을 겸 위구르족 마을에서 내렸다. 언젠가 가봤던 중국의 신장 위구르족 마을 모습과 닮아 있다. 세계는 이토록 신기하다. 어느 국경이든 그곳에는 교집합의 삶이 있고 그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여행자는 마치 깨달음의 퍼즐을 푸는 듯한 신기함을 느낀다. 길가에 늘어선 가게에서는 하미과(노란색 껍질의 멜론)를 비롯한 과일과 빵을 팔고 있다. 골목 안은 양꼬치 샤슬릭 굽는 연기로 가득했다. 샤슬릭은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해 중국 신장 등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으로, ‘꼬챙이’를 뜻하는 투르크어 ‘쉬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두툼하게 썬 양고기에 소금과 후추, 각종 향신료로 간을 한 후, 꼬치에 꽂아 숯불로 훈연한다. 특유의 풍미와 함께 씹을 때 느껴지는 풍부한 육즙이 일품이다. 다른 음식들도 대부분 맛있다. 우리나라 만두국과 비슷한 ‘펠메니’와 카자흐스탄의 대표 면 요리인 ‘라그만’으로 행복한 식사를 하고 난 뒤 보니 그제야 식당 안의 독특한 분위기가 눈에 들어온다. 혼자 식사를 하는 촌로와 막걸리처럼 보이는 차를 마시는 호탕한 두 여인의 모습이 인상 깊어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 어떤 풍경보다 아름다운 건 사람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낀다. 현지인의 얼굴엔 그 나라의 역사와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방불케 하는 차린 협곡. 1500만 년 전, 지각변동으로 인해 생겨난 계곡이다. 지질학적·생태학적 보호를 위해 2004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입구에 도착하니 몸을 날려버릴 듯한 세찬 바람이 격한 환영을 한다. 협곡 아래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 약 2km 트레킹을 했다. 황톳빛 기암괴석들과 ‘낙타가시’로 불리는 수풀 사이를 지났다. 닳고 닳은 관광지였다면 바위마다 이름을 붙이고도 남았을 터. 웨딩사진을 찍는 커플들과 핸드폰으로 추억을 담느라 바쁜 젊은이들의 모습이 풍경과 어우러지며 싱그럽게 다가왔다. 작심한 듯 트레킹 복장을 갖춘 유러피언들도 눈에 띄었다.
절벽 아랫길은 물론 윗길로도 트레킹이 가능하다니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에게 매력적인 장소임에 틀림없다. 트레킹이 끝나는 지점엔 방갈로와 유르트(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쓰는 이동 가능한 주거 형태)가 갖춰진 에코파크리조트(Eco Park Resort)가 있어 숙식이 가능하다.
유르트에 머물면서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도 보고 동틀 무렵의 협곡도 산책하며 하루쯤 문명과 동떨어져 쉬어가고픈 곳이다.
침블락 스키리조트와 빅알마티 호수
알마티 시내에서 차량으로 30분 정도만 가면 닿을 수 있는 침블락 스키리조트에서는 사시사철 만년설을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메데우 아이스링크를 지나 3단계에 걸쳐 케이블카를 나눠 타고 해발 3200m에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구간 사이의 휴게소에는 간단한 먹을거리와 커피가 마련돼 있다. 전통 의상을 입고 독수리와 함께 사진을 찍는 등 다양한 즐거움도 체험할 수 있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곧 맞이할 겨울 시즌을 준비하느라 바빠 보였다. 정상에 올라 바에서 마신 맥주 한 잔의 맛이 잊히지 않는다. 문득 스키를 좋아해서 세계의 스키장을 찾아다니는 친구가 떠올랐다. 사진을 찍어 보내주니 당장 올겨울 스키 여행지로 찜했다는 답신이 온다. 11월에부터 4월까지 스키를 탈 수 있어 겨울이 짧은 스키 마니아들에게 좋은 선택지가 될 것 같다. 2011년 동계 아시안게임과 201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지로 선정될 만큼 자연설이 좋고, 별장부터 유르트까지 다양한 숙박 시설도 갖춰져 있다. 스키나 보드 장비 대여도 가능하다. 스키를 즐긴 후 근처 온천에서 몸을 녹인다면 이보다 좋은 휴식이 없을 것 같다.
침블락 스키리조트에서 내려와 한 시간 정도 이동해 도착한 곳은 빅알마티 호수. 가는 길은 대관령 고갯길처럼 꼬불꼬불했지만 눈부신 에메랄드 호수를 설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모습은 달력 속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아무데나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즐기는 가족과 연인들의 모습도 정겹다.
탐험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탐험이 시작된다고 했던가. 알마티 외 다른 도시들도 탐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추어탕 마니아’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주변에 있다. 늘 물어본다. “진짜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이 맛있나요?” 대부분 맛있다고 대답한다. 어떤 맛이냐고 다시 묻는다. 대부분 우물쭈물한다. 자꾸 캐물으면 그제야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어릴 적 먹었던 맛, 적당히 흙냄새가 나는 맛, 민물생선의 비린 맛, 미꾸라지의 고소한 맛.
민물생선의 비린내나 흙냄새는 이해가 된다. 글쎄, 고소한 맛은 모르겠다. 대부분 생선, 고기는 오래 씹으면 고운 입자로 변해 단맛을 느낄 수도 있다. 물론 가열처리하거나 삶거나 구운 것이 그렇다. 날것은 고소한 맛을 느끼기 힘들다. 끓인 것이라지만, 미꾸라지의 고소한 맛? 이건 알 수 없다.
어릴 적 먹었던 추억 속의 맛은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맛은 그저 추억의 맛일 뿐이다. 어릴 적 ‘엄마’가 끓여주던 닭죽, 된장찌개, 그리고 학교 졸업식 날 아버지가 사준 자장면. 대략 이런 음식들이 추억의 맛이다. 비교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절대 객관적이지 않다.
중국산 미꾸라지 사용에 대해 늘 논란이 있다. 이유가 있다. 살아 있는 모습을 비교해도 일반인들이 그 차이를 알기 힘들다. 하물며 싹 갈아서 이른바 ‘갈추(추어를 갈아 요리한 추어탕)’로 만들면 더 구별하기 어렵다. 더하여 산초가루까지 넣으면 사실상 구별이 불가능하다. 산초는 매운맛까지 덮을 정도로 강한 맛이다. 추어탕은 끓여놓으면 국산이든 중국산이든 맛과 모양이 비슷하다. 중국산, 국산을 두고 늘 추어탕 논란이 생기는 이유다. 알아차리기 힘드니까 중국산으로 끓이고 국산이라고 내놓는 가게들이 있다.
한때 논란이 되었던 ‘고등어 추어탕’도 마찬가지다. 고등어 살을 갈아 넣으면 맛은 더 좋아진다. 아무려면 민물고기인 미꾸라지가 등 푸른 바다생선 고등어의 맛을 따를 수 있을까? ‘맛’으로 따지자면 고등어 추어탕을 비난할 수는 없다. 고등어를 갈아 넣고 미꾸라지라고 우기고, 속이는 주인의 ‘도덕성’이 문제 있을 뿐이다. 원재료를 속이는 것은, 현행법상 불법이다. 자, 다시 묻는다. 추어탕을 두고 맛있는 것, 맛없는 것을 구분할 자신이 있는가? ‘없다’가 정답이다.
미꾸라지는 서민들의 음식이었다
우리는 미꾸라지를 오랫동안 먹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우리가 미꾸라지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책의 발간은 1123년, 고려시대다.
고려 풍속에 (중략)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미꾸라지[鰌], 전복[鰒], 조개[蚌], 진주조개[珠母], 왕새우[蝦王], 문합(文蛤), 붉은게[紫蟹], 굴[蠣房], 거북이다리[龜脚], 해조(海藻), 다시마[昆布]는 귀천 없이 잘 먹는데, 구미는 돋워주나 냄새가 나고 비리고 맛이 짜 오래 먹으면 싫어진다.
‘鰌(추, 미꾸라지)’는 ‘鰍(추, 미꾸라지)’다. 고려·조선시대 기록에는 이 둘을 혼용했다. 서긍이, 왜 ‘鰌’로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은 대부분 ‘鰍’로 표기한다. ‘미꾸라지는 가을 물고기’라고 설명한다.
이 무렵부터 미꾸라지를 먹은 건 아니다. 그 이전, 더 오래전부터 먹었다. 그물, 선박, 항해기술 등 어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다. 배는 이른바 무동력선.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작은 배에 낡고 비루한 그물을 싣고 물고기를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바닷가에 사람이 사는 것을 금했다. 왜구들의 노략질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도 마찬가지. 바닷가에 살지 못했으므로 바다생선을 잡는 기회도 드물었다. 무동력선으로는 가까운 바다가 고작이다. 일반 서민들이 바다생선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미꾸라지는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서민들의 단백질이었다. 바닷물고기가 훨씬 크고 맛있지만 가난한 서민들은 가까운 바다의 새우, 거북손, 조개 등을 구하는 게 한계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미꾸라지는 먹고 싶어서 먹었던 음식, 맛이 있어서 먹었던 식재료가 아니었다. ‘먹고 싶어’가 아니라 ‘이거라도 먹고’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마땅히 취할 생선, 단백질이 없었던 세민(細民, 서민)들 음식이다. 별다른 레시피가 있을 리 없다. 가장 편한 방법으로, 비린내와 흙냄새를 감추면서 먹었던 식재료일 뿐이다.
오래전부터 미꾸라지를 먹었지만, 추어탕을 파는 집은 1920~30년대에 처음 나타난다. 지금도 남아 있는 ‘형제추어탕’이나 ‘용금옥’, 사라진 ‘희망의집’이나 ‘곰보추탕’ 등이다.
서울식과 시골식 추어탕의 차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미꾸라지가 기록된 시기와 추어탕 파는 식당의 등장은 약 800년 차이가 난다. 그 사이에 추어탕을 정확하게 언급한 책은 두 종류가 있다. 실학자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와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다.
풍석의 ‘난호어목지’는 1820년쯤 발간되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도 19세기 중반 정도에 펴낸 거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았다. 미꾸라지 먹는 방법을 보면 두 사람은 다른 곳의, 다른 미꾸라지탕을 보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비슷하지만 세부 내용은 전혀 다르다. 풍석은 시골식, 오주는 서울식이다.
‘난호어목지’의 ‘밋구리탕’은 시골, 농촌의 미꾸라지탕, 추어탕이다. 이름도 한글로 ‘밋구리’라 했다. 내용도 상당히 정확하다. “(밋구리, 미꾸라지는) 기름이 많고 살찌고 맛이 있으며 시골 사람은 이를 잡아 맑은 물에 넣어두고 진흙을 다 토하기를 기다려 죽을 끓이는데 별미”라고 이야기한다.
미꾸라지가 음식으로 표현된다. 다만 탕이 아니라 죽이다. 미꾸라지와 함께 여러 가지 채소, 양념 등을 넣고 흥건하게 끓인 게 죽이다. 오늘날 추어탕에 밥을 말면, 풍석 서유구가 말한 ‘밋구리죽’이 될 것이다. 풍석의 밋구리죽은 오늘날 시골식 미꾸라지탕, 즉 영남의 추어탕이다.
영남의 추어탕은 ‘갈추’다. 미꾸라지를 삶아서 으깬다. 고운 체로 거르면 살이 아래로 떨어진다. 거친 뼈나 대가리 등은 제거하고, 부스러진 살과 부드러운 채소 등을 넣고 끓인다.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국물은 간장 혹은 된장 푼 물이다.
오주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장황하게 추두부탕(鰍豆腐湯)을 설명한다. 오늘날 추어탕과는 거리가 있다. 두부를 사용한 추어탕이다.
추두부탕(鰍豆腐湯). (전략) 솥에 물을 붓고 크게 썬 두부 몇 덩어리를 넣는다. (중략) 솥 아래에 불을 때면 솥은 점점 뜨거워진다. 미꾸라지 무리는 열을 피해 두부 속으로 들어간다. 계속 불을 때면 솥이 끓으면서 미꾸라지도 익는다. 끄집어내서 썬다. 미꾸라지는 개개의 두부 속에 콕 박혀 있다. 참기름으로 지진다. 두부 전을 먼저 끓이고 메밀가루를 섞는다. 달걀 전(지단)을 얹는다. 이렇게 탕을 끓인다. 기름기가 넉넉하고 맛이 좋다. (후략)
서울식 추어탕은 풍석 서유구의 밋구리탕과는 다르다. 쇠고기 내장이나 살코기, 버섯, 달걀 등 화려한 고명이 들어간다. 오주가 말한 추두부탕은 정확한 서울식 추어탕과는 거리가 있다. ‘화려한 고명’은 닮았다.
요즘 서울 추어탕의 특징은, 붉고 매운 국물 맛이다. 아마도 산초를 널리 사용하지 않으면서 붉은 고춧가루로 매운맛을 더했을 것이다. 원형 서울 추어탕은 산초가루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오주의 추두부탕도 산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풍석 서유구의 추어탕도 산초를 언급하지 않지만, 오늘날 농촌의 추어탕들은 대부분 산초를 사용한다. ‘곱게 간 미꾸라지 살+얼갈이배추나 청방배추, 배추속대+간장 혹은 된장 국물’에 산초가루를 조금 더한다. 국물에 산초가루를 더해서 내오는 경우도 있다. 서울 추어탕의 매운맛은 결국 산초를 대신한 맛이다.
모든 게 뒤섞이면서 뒤죽박죽이긴 하다. 매운 서울식 추어탕을 내놓으면서 산초가루를 별도로 내오기도 한다. 시골식 추어탕에는 산초가루, 마늘 다진 것, 매운 풋고추 다진 것이 함께 나온다.
그까짓 미꾸라지탕이라며 천대할 일은 없다. 서민들의 음식이며 식재료 부족한 시절에 귀하게 먹었던 음식이다. 추어탕의 계절이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아, 이 추어탕은 서울식이네, 시골식이네” 하며 한 번쯤 되새겨보자고 이 글을 쓴다. 알고 먹으면 더 맛있다. 적어도 내가 먹는 게 어떤 음식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캠핑카 혹은 카라반을 직접 끌면서 여행하는 것이 당장 어렵다면 편안하게 카라반 캠핑을 체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캠핑의 참맛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훌쩍 떠난 곳은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여주 카라반’. 그런데 하필 비올 확률이 100%. 제13호 태풍 링링의 영향권에 접어들기 직전이었다. 망설였으나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카라반에 들어가 체험하는 것도 신나는 일이기에. 때론 100% 비 소식에도 맑은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의 진미. 하늘의 이치인 듯 상황에 적응하며 즐겨봤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카라반이나 캠핑카 등 바퀴 달린 것을 가지고 하는 캠핑을 알빙(RVing)이라고 부른다.‘카라반’은 주거시설을 갖춘 컨테이너를 차에 견인해서 끌고 다니는 것이고, ‘캠핑카’는 자동차 안에 캠핑을 할 수 있게 꾸민 것. 정식 명칭은 모터홈(Motorhome)이다.
카라반 파크와 카라반 체험장
외국의 경우 사막 혹은 너른 대지를 관통하는 도로 구간에 카라반 파크가 있다. 카라반, 캠핑카를 몰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여장을 푸는 곳 말이다. 카라반에서 장기투숙하면서 인근에서 일하는 사람, 그곳에 생활 터전을 잡고 대가족을 이뤄 사는 이들도 있다. 카라반에 관한 통상적인 경험은 할리우드 영화를 보며 많이 한다. 그것도 사막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총격 신 배경에 자주 카라반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30대 초반 3~4개월 정도 카라반에서 생활을 한 경험이 있다. 호주 퀸즐랜드 주의 농장이 많은 칠더스라는 곳에서 워킹홀리데이로 일하던 때 ‘슈가볼’이라는 카라반 파크에서 살았다. 구식이었지만 카라반에는 화장실 시설을 제외하고 소파와 주방, 개별적으로 분리된 침실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인데 한국에서는 카라반 구경이 쉽지 않았다. 살면서 접해보지 않았을뿐더러 즐겨 보던 영화의 배경이기도 했으니 늘 궁금증은 하늘을 찔렀다. 상상해보지 않았던 생활이었기에 그때의 카라반 생활은 낭만적인 풍경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 한국에서도 카라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여주 카라반은 외국의 사례처럼 오토캠핑족(차를 가지고 다니는 캠핑족)을 위한 장소는 아니고 말 그대로 카라반이 궁금한 이들에게 호기심을 해소해주고 이색적인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해주는 체험 장소다. 4000여 평 규모의 대지에 평수와 형태가 다른 다양한 종류의 카라반이 초록빛 잔디와 나무가 둘러싸인 곳에 줄지어 서 있다. 나름 카라반 파크 현장을 우리 실정에 맞게 재현해놓았으며 각각의 카라반에 개별적으로 데크와 어닝도 장착했다.
카라반을 이용해보고 마음에 들면 구매도 가능하다고. 어쨌거나 카라반 여행을 꼭 해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니 마음 편하게 분위기를 즐기면 그만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체험을 떠나 일생일대의 결정을 할 수도 있는 중요 장소인 셈. 카라반을 엇비슷하게 본떠서 만든 카라반형 숙소 ‘아크하우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도로 위를 달릴 수 있는 카라반이다.
여주 카라반은 미국의 포레스트리버 사의 카라반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들여왔다. 가장 큰 평수로 알려진 12평 규모의 ‘체로키 39KR’과 두 번째 규모인 ‘체로키 Q2’는 이곳이 아니면 체험하기 어렵다.
기자와 지인들이 묵었던 ‘체로키 Q2’에는 샤워장이 딸린 화장실이 앞뒤로 두 개나 있다. 일단 이곳에서는 이동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카라반 내에서 설거지나 샤워를 할 때 불편함은 없다. 뒤쪽 샤워장은 작게나마 욕실도 꾸며져 있지만 사우나를 즐길 만큼의 규모는 아니다. 퀸 사이즈 침대는 물론 대형 TV, 냉장고, 소파와 주방까지 알차게 들어차 있다.
간이 주거시설이라는 느낌을 넘어 가정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 4인 이상의 가족이 함께 와도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카라반 안에는 곳곳에 수납장이 마련돼 있어 요긴하게 쓰인다. 특히 도로를 달릴 때 흔들림을 생각해 수납장 안에 꼼꼼하게 물건들을 챙겨 넣으면 떨어져 깨지거나 흩어질 일이 없다. 이곳 카라반의 수납장은 여닫이문을 달았지만 호주에서 이용했던 카라반 수납장 문은 미닫이였다. 차량 이동 시 충격에 의해 문이 열릴 수 있어 미닫이문으로 돼 있는 거라고 영국 친구가 설명해줬다. 체험장에 있는 시설은 불편함을 덜기 위해 여닫이문을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비와 바비큐가 제법 잘 어울린 밤
주룩주룩 한없이 비가 내리던 그날, 카라반에 비치된 밥솥에 밥을 짓고 캠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바비큐는 실외에서 준비했다. 실내에서 연기를 피우면 경보장치가 울리기 때문에 내부에서는 굽는 요리를 할 수 없다고. 다행히 카라반 입구 앞 너른 공간을 어닝으로 가려줘 비를 피하면서 바비큐를 할 수 있었다.
카라반 체험을 함께한 지인이 숯불에 구워 먹을 고기와 쌈 채소 등을 알뜰하게 준비해와 고마웠다. 곧 갖가지 채소와 구운 고기가 상 위에 올랐고, 우리는 못다 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듣고, 각자의 새로운 관심사에 귀 기울였다. 공기 맑은 장소에서 좋은 사람과 빗소리를 들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잔잔히 흘러갔다.
10년 전에 캠핑카로 미국 여행을 한 적이 있다는 지인은 “화장실 변기통을 비우고 물관, 전기 연결 등등 캠핑장에 도착하면 귀찮은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 불편함을 없애고 시설을 업그레이드해서 한국형 캠핑카로 변환한 점이 좋은 아이디어 같고 생각 이상으로 편하고 깔끔해서 놀랐다”고 덧붙였다.
피하지 않고 즐겼을 뿐인데 더 따뜻하고 아늑한 저녁시간이었다고나 할까. 비에 옷과 신발이 많이 젖었지만 카라반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운치마저 느껴졌다. 태풍 걱정은 어느새 잊고 비의 낙차가 카라반 외벽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특별한 화음을 밤새 즐겼다.
카라반 생활 경험자가 본 여주 카라반
개인적으로 카라반은 내부 공간이 좁아도 괜찮을 듯싶다. 좀 더 캠핑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나 할까? 집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편안함을 기대한다면 집 밖을 나와 여행할 이유가 없다. 여행자는 자연이라는 더 넓은 공간에 눈을 빼앗겨야 한다. 그래야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여주에서 경험한 카라반은 호주에서 이용했던 것에 비하면 호화로웠다. 카라반 내부를 돌아다니는 작은 도마뱀과 독거미, 운동화 속에 숨어 자는 생쥐가 없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외국의 카라반 파크처럼 넓게 쓰지 못한 점이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카라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특별했다. 돌아오던 날 아침, 100%의 비올 확률을 뚫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인 것을!
42년 전통 ‘대전갈비집’
가족 외식 단골 메뉴인 돼지갈비가 ‘대전갈비집’ 주인장 이점순(63) 씨에겐 가족의 생계수단이었다. 40여 년 전 삼 남매를 키우기 위해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서 연탄불 두 개를 놓고 시작했던 가게는 어느덧 200석이 넘는 규모에 이르렀다. 격세지감을 느낄 법도 한데 주인장은 오히려 별다를 것이 없고, 세월도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단다. 그건 아마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살아왔기 때문일 테고, 초심을 잃지 않았기에 그러할 것이다.
“특별히 돼지갈비가 자신 있어서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제 식대로 양념을 해서 내놓았다가 손님이 짜다고 하면 간을 적게 하고, 달다고 하면 설탕 좀 덜 넣고 해가면서 맛을 맞춰간 거죠. 그렇게 수십 년에 걸쳐 손님들에게 배워가며 현재의 레시피가 완성된 셈이에요. 대신 정직하고 좋은 재료 쓰자는 건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수많은 손님의 입맛으로 만들어낸 돼지갈비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 겉모습이 다소 낯설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우리가 익히 떠올리는 돼지갈비는 짙은 갈색을 띠지만, 이곳은 거의 생고기 빛깔에 가깝다. 자칫 싱겁지 않을까 싶지만, 주인장은 “일단 구워 드셔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우리 집 고기가 겉보기엔 희멀거니까(?) 맛이 없겠거니 여기는 분들도 있죠. 근데 한입 드시면 그런 생각이 싹 바뀌나봐요.(웃음) 짭짤하고 달달하고 돼지갈비 특유의 맛도 나는데 마치 생고기 먹는 것처럼 깔끔하다고 좋아들 하시죠. 대부분 판매하는 돼지갈비 양념은 색소가 들어간 경우가 많아요. 또, 고기의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진한 색으로 감추려는 의도도 있죠. 저희는 양념에 색소를 절대 쓰지 않고, 고기도 매일 신선하고 품질 좋은 것으로 골라와 직접 손질해 사용해요. 속이고 감추지 않는 건 손님과의 의리이고 약속입니다.”
주인장이 이토록 신뢰를 중시하는 건, 어렵던 시절 생계의 버팀목이 되어준 고마운 발길들에 대한 보답과도 같다. 재료의 품질이나 들이는 정성에 비해 음식 가격이 높지 않은 것도 그러한 마음에서 비롯됐다.
“큰애가 중학생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났어요. 애들 먹여 살리느라 고생한다고 찾아와주신 분들이 지금도 갈비 드시러 오세요. 우리 삼 남매가 한의사, 양의사, 검사로 다들 훌륭하게 잘 자라줬는데, 그건 나 혼자가 아니라 대전갈비집을 다녀가신 손님들이 함께 키워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어떻게 가격을 올리고 음식을 허투루 만들겠어요. 은혜를 갚는 심정으로 건강이 닿는 한 오래오래 좋은 갈비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대전1호선 중앙로역 1번 출구 도보 9분
주소 대전시 중구 대전천서로 419-8
영업시간 11:00~22:30
대표메뉴 돼지갈비, 콩나물돌솥밥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