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출신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41)가 지난 16일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출산 소식을 공개했다. 한국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비혼모로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는 외국 정자은행을 통해 임신을 했고 일본에서 아들을 출산했다고 하였다. 사유리가 그동안 한국에서 방송인으로 활동해왔기에 우리 사회에 던진 파문이 적지 않다. 사유리가 던진 질문에 우린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솔직히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그 용기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아니 상상을 했더라도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대 의술의 발달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앞으로 의술의 발달은 얼마나 더 큰 일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현대 의술과 용기가 결합한 결과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동안 사유리는 방송에서도 자유로운 활동을 해왔다. 튀는 듯한 언행은 많은 웃음과 즐거움을 주었다. 그런데 비혼모 출산으로 또 한 번의 화제를 던졌다. 사유리는 그동안의 사정을 이렇게 밝혔다
“한국에서 산부인과를 갔어요. 난소 나이 검사를 했는데 48세라는 거예요. 의사 선생님께서 자연임신이 어렵고 이 수치라면 지금 당장 시험관을 하더라도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고 말씀하셨어요. 지금도 늦었는데 지금 시기를 놓치면 평생 아기를 못 가진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어요. 사랑하지 않는 남자랑 결혼해서 급하게 시험관을 하고 아이를 갖느냐, 아니면 혼자서 아이를 기르느냐,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었어요. 근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급하게 찾아서 결혼하는 건 어려웠어요.”
그는 한국에서 비혼 여성이 정자 기증을 받아 출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는데 신체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연령이 돼가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했다. 개인적인 고민도 고백했다. 사유리TV에서 ″저는 강하고, 남들 눈치 안 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아빠가 없는 아기를 낳는 것인데, 솔직히 무섭다”고 했다.
이제 그가 걱정하듯 많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싱글맘에 대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빠 없는 빈자리가 클 것이다. 아빠 없이 커야 하는 아이한테 갖는 미안함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주위의 편견도 이겨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다부지게 말했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주로 살아왔던 제가 앞으로 아들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엄마로서의 그의 강인한 의지가 보였다.
이미 사유리는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했다. 앞으로 계속 한국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이 사회는 그에게 응답해야 한다. 어떠한 방식으로 태어났건 이 땅에 사는 어머니로부터 탄생한 아이다. 한 여성의 아이이기 이전에 이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는 모든 제도적 뒷받침을 해줘야 한다. 정상적인 사내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아빠의 빈자리도 사회에서, 학교 현장에서 채워줘야 한다.
사유리가 던진 질문에 한 발 더 접근할 필요가 있다. 비혼 출산뿐 아니라 혼외출산으로 사회적 편견과 제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있다면 이제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적극 포용해줘야 한다. 적어도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사회구성원으로 차별받지 않고 소중한 인격체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한다.
참 대단한 선택을 한 사유리가 부디 아이와 함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진정으로 바란다.
40년간 ‘종이학’, ‘날개 잃은 천사’, ‘아모르파티’ 등 1200여 곡의 주옥같은 노래를 탄생시켜온 이건우(60) 작사가. 여러 히트곡을 만든 그는 정작 “내가 쓴 가사는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자신이 만나온 수많은 인연이 들려준 이야기를 녹이고 정리했을 뿐이라고. 개인이 아닌 대중의 언어를 담은 가사가 빛을 발했다는 의미일 테다. 그래서일까? 이건우의 가사는 평범한 일상 언어들의 부딪힘 속에서 공감과 위로의 노랫말로 경이롭게 배열된다. 그렇게 지난날 영감을 줬던 사람들과 가사에 얽힌 에피소드를 담아 그는 첫 작품집 ‘아모르파티’를 펴냈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이건우가 작사하고 김연자가 불러 세대를 넘나들며 대박을 터뜨린 곡이다. 특히 “인생은 지금이야”,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 등의 가사는 중장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작사가 인생 40주년을 기념하는 도서에도 동명의 제목을 달았다.
“인생의 콘셉트랄까? 그게 바로 ‘아모르파티’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그 제목을 썼다면 모호했겠지만, 제 책이다 보니 상징적으로 바로 와 닿는 게 있는 것 같아요. 60이라는 나이나, 40주년을 기념하는 제목으로도 잘 어울리고요.”
작사가 역시 글을 짓는 사람일진대, 40년을 활동하며 이제야 첫 책을 냈다니 좀 의외였다. 그러나 그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권, 그리고 지금이 딱 좋다고 말했다.
“자기 분야에 몰입해도 모자랄 사람이 책을 내거나 다른 일을 하는 게 별로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전부터 내 인생의 책은 단 한 권으로 끝내야겠다고 결심했죠. 왜 특별히 40주년에 출간했느냐 묻는다면, 30주년은 좀 덜 익은 것 같고, 50주년은 솔직히 그때까지 가사를 쓰고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느덧 40주년이 됐고, 이제는 제 노래를 한 번 정리해도 괜찮겠다 싶었죠.”
“나는 천재 작사가가 아니다”
이건우는 최근 한 예능프로그램을 통해 유산슬(유재석)의 ‘합정역 5번 출구’를 작사하며 젊은 세대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작신’(작사의 신)이라는 별명까지 생겼을 정도로 그를 각인시킨 것이다. 식을 줄 모르는 인기 속에서 과거 그가 작사한 곡들이 자연스럽게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옛 노래의 가사를 보면 스스로도 ‘내가 어떻게 이런 가사를 썼지?’ 하며 감탄할 때가 있단다.
“제가 쓴 가사가 좋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이 살아왔어요. 남의 떡이 더 커 보였죠. 그러다 요즘 제삼자의 눈으로 보니 남다르더라고요. 막 훌륭하다기보다는 ‘아, 40년 동안 나도 참 열심히 했구나’ 싶었죠.”
40년을 히트곡 메이커로 달려올 수 있었던 데에는 부단한 노력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우는 최근에서야 그것이 노력의 산물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예술가를 만드는 건 99%가 천재성이라 생각해왔어요. 언젠가 한 학생이 노래 부르는 걸 보고, 가수는 안 되겠다 판단한 적 있죠. 그러고 얼마 전 그 애를 다시 봤는데, 실력이 확 좋아진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아, 노력이 타고난 것을 이길 수 있구나. 돌아보니, 나 역시 타고난 사람이 아닌데 은연중에 천재성이 있다고 착각했던 거죠. 현재 작사가로 활동하는 데 내가 가진 천재성과 노력의 비율이 3대 7 정도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아마 나이가 들수록 노력의 비율이 점점 10에 가까워지겠죠. 아무리 천재라도 노력 없이 평생 창작할 순 없을 테니까요.”
그런 그가 가장 노력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사람과의 만남이다. 그는 평소 주변 사람과의 평범한 대화 속에서 영감을 받기 때문이다. 아무리 타인의 이야기를 쓴다고 하지만, 작사가의 인생철학도 가사에 꽤 투영되지 않았을까? 그는 결과적으로 쉽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가령 패티김 40주년을 기념해 쓴 ‘인연’처럼, 대부분의 곡은 가수가 정해지면 작업을 시작해요. 그러면 그 가수에게 어울리는 얘기가 주로 담기죠. 또, 시나 그림 같은 창작물과 다르게, 대중가요는 작곡가, 프로듀서, 편곡가 등 여러 명의 합작품이잖아요. 자기만족만으로 완성할 수 없죠. 물론 일부분 제 인생을 녹이기도 하지만, 오롯이 그것이 드러나긴 어렵습니다.”
중년의 플로리스트를 꿈꾸며
노래가 주는 힘은 ‘위로’와 ‘공감’일 것이다. 이건우 역시 이에 주안점을 두고 가사를 쓴다. 아울러 그는 여기에 한 가지가 요소가 더해져야 진정 ‘좋은 노래’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노래를 왜 들을까요? 저는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먼저 나를 위로해 달라, 그리고 내게 감동을 달라, 마지막으로 나를 생각하게 해 달라. 그중 앞의 두 가지를 노래에 담는 게 쉽지 않아요. 세 가지를 다 만족시키긴 아주 어렵다는 거죠. 그러나 생각거리까지 줘야 정말 좋은 노래고, 좋은 가사라고 봐요. 메시지가 중요하단 얘긴데, 그렇다고 노랫말이 무겁고 거창하면 안 되거든요. 가수가 부르기 편하게, 대중이 듣기 쉽게, 최대한 가사의 힘은 빼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렇게 잘 만들어진 노래는 대중에게 감동을 주지만, 이를 위해서는 누구보다 작사가가 먼저 감동을 해야 한단다. 그래서인지 임진모 음악평론가가 이건우를 가리켜 ‘먼저 (자신이) 감동하는 인간’이라 표현한 데에 대해 그는 당연한 얘기라며 수긍했다.
“‘신이시여, 정말 제가 쓴 가사가 맞습니까? 정말 나 미친 거 아냐?’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제가 쓴 가사를 보고 감동의 클라이맥스까지 가봐야 비로소 작품을 발표하는 거예요. 그 정도는 돼야 대중이 알아줄까 말까 하겠죠. 그런데 나조차도 흔들어놓지 못하는 가사를 내놓으면 과연 누가 그 노래를 듣고 감동을 할까요?”
이건우는 처음 비행기를 탔던 감격의 순간을 담아 ‘황홀한 고백’을 작사했다. 이후론 아무리 비행기를 타도 더 이상 그만한 가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경험이 선사하는 감동이 대단하다는 걸 알기에 늘 도전을 마다치 않는다.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라고 쓴 ‘아모르파티’의 가사처럼, 그는 가슴을 뛰게 할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꽃꽂이와 수화를 배울 거예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죠. 취미 정도가 아니라 준전문가가 될 정도로 해보려고요. 갑자기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유독 정신없는 한 해를 보냈어요. 알다시피 인기는 한때잖아요. 내년쯤 잘 정리하고, 계획했던 일들을 해나갈 거예요. 예쁜 꽃을 잘 꽂아서 선물도 하고,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수화로 노래를 전달하고 싶어요. 요즘은 그런 의미 있는 일로 누군가가 즐거워할 모습을 상상할 때 가장 설레고 가슴이 뜁니다.”
‘나는 120살까지 살기로 했다’. 책 제목이 도전적이다. 제목만 보니 내용이 궁금해진다. 책을 집어 들면서 기대를 했다. 이 책 속에는 이제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를 열어갈 의학적 비법이나 하다못해 생활비법 같은 것이라도 존재할 줄 알았다. 그런 책이 아니다.
사람이 글자 그대로 천수를 누린다면 과연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근거를 제시하면서 150세를 말한다. 성경에는 몇백 세를 산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오고 동양의 삼천갑자 동박삭이는 무려 18만 년을 도망 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이 책은 오래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건 더더욱 아니다. 저자가 스스로 120세까지 살기로 했다고 고백한 책이다.
저자 이승헌은 세계적인 명상가이자 뇌 교육자, 평화운동가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120세까지 산다고 남들에게 말하니 그 반응이 세 가지로 돌아왔다고 한다.
“백이십 살? 그게 정말로 가능해요? 아직은 꿈에 불과하죠.”
“백이십 살? 아이고! 그건 나에게 지옥이에요!!”
“백이십 살? 맘먹는다고 그게 되나요? 천수를 누리다 가는 거죠.”
현재까지 최고로 오래 산 사람으로 기록된 이는 122세 프랑스인,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122세의 남궁 할머니가 투표권을 행사했다. 120세가 마냥 꿈의 나이는 아니다. 세계적인 IT기업 구글은 생명연장프로젝트에 투자하면서 인간수명 500세에 도전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저자는 첫 번째로 나이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 80세 인생이라고 보면 저자 나이(집필 당시 기준) 67세는 마무리 단계이지만 120세 인생에서 보면 남은 시간이 50년이 넘는다. 긴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긴 시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었을 하고 살 것인가? 질문을 던지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된다.
두 번째로는 120세까지 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더 적극적으로 관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단지 운이 좋아서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선택으로 인생을 스스로 경영하면서 오래 사는 것이니 생각과 행동이 바뀐다. 오래 살려면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틈만 나면 운동을 하고 체중을 관리한다. 자연스럽게 활기찬 생활을 하게 된다.
세 번째로는 계획을 세워 움직이니 뇌가 자극을 받아서 젊었을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 120세를 선택하고 보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다. 노년을 긴 안목으로 설계할 여유가 있다.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 것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싹트게 된다.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 인생 다 살았다고 축 처져 있는 무기력한 삶보다 희망을 품고 노력하며 능동적으로 사는 삶이 훨씬 건강하다.
저자는 호서대학교 설립자인 강석규 박사의 ‘어느 95세 노인의 고백’을 예로 든다. 강 박사는 열심히 살아 실력을 인정받고 존경을 받았지만 65세 은퇴 후 30여 년을 “이제 다 살았다. 남은 인생은 덤이다”라는 생각으로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기다리며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렇게 덧없고 희망 없이 산 3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후회가 됐다는 얘기다. 우리도 120세까지 산다고 가정한다면 생산적인 활동에 종사하면서 밝고 건강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살려면 건강해야 한다. 건강은 섭생과 운동으로부터 온다. 저자는 운동은 습관인데 젊어서부터 운동 습관을 제대로 들이지 않으면 늙어서 더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며 자신의 아버지 예를 들어 설명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94세에 돌아가셨는데 80세를 넘기면서 기력이 부쩍 쇠해지고 운동도 싫어하셔서 고작 좋은 음식 드리고, 팔다리 주물러드리는 것밖에 못해드렸다고 한다. 아버지가 건강할 때 운동법을 알았다면 더 오래 건강하게 사셨을 거라고 후회한다.
노년기에 접어들면 집착을 버려야 평화로워진다고 한다. 부와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집착도 버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에 대한 집착도 버려야 한다. 노년은 고독하다. 고독을 즐기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60대 이후에는 포용과 관용을 베풀고 명상을 생활화하면 좋다고 한다. 무엇보다 스스로 120세까지 살지 않으면 안 될 위대한 꿈을 품으라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100세까지 살기로 결정했다. 누구나 ‘나는 과연 몇 살까지 살게 될까!’ 궁금해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는다. 장수유전인자 뭐 이런 것은 필요 없다. 수명을 100세로 정하고 역동적으로 살다가 하늘의 뜻에 따라 순응하고 저세상으로 가면 된다. 건강관리 의사 유태우 박사는 자신의 수명을 98세로 예상했다. 앞으로 살 수 있는 나이를 스스로 정하고 목표를 정해 실천하면서 살면 이 또한 멋진 일 아닌가.
조동성 산업정책연구원 이사장의 경력은 그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1978년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임명된 이후 은퇴할 때까지 36년간 자리를 지키다 정년퇴직을 하고 베이징 장강경영대학원 교수로 재직한 그는 2016년부터는 인천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어 혁신을 이끌었다. 올해 4년간의 임기를 끝내고 산업정책연구원 이사장으로 위촉된 그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갈 날을 위해 최근 중국어를 배우려고 방송통신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쉼 없이 제2의 인생을 추구하는 그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천대학교 총장으로서 성공적인 4년의 임기를 마친 조동성 산업정책연구원(IPS) 이사장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그는 요즘 행복하다고 했다.
“인천대학교는 서울대학교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둘밖에 없는 국립대 법인으로 지배구조가 같아서 신바람 나게 일했어요. 4년이 짧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해요. 사람에 따라선 4년이 1년 같을 수도 10년 같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인천대를 가기 전 지난 서울대 총장 선거를 10여 년간 치르면서 조직선거가 아닌 정책선거를 추구했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10여 년 동안 마련할 수 있었고 인천대에서 4년 동안 그것들을 마침내 도입했죠.”
50년 만에 다시 대학생, 중국어를 배우는 이유
사실 그는 2014년 서울대학교에서 은퇴한 후 인천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중국 베이징 장강경영대학원 교수로 임용됐다. 15년 계약으로 2029년, 80세까지 임기였지만 인천대학교로 가면서 무급휴직에 들어갔다. 총장 임기를 마친 후 다시 장강경영대학원 교수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상황이어서 못 돌아가고 간접 활동만 하는 중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최근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3학년으로 편입해 2020학번 대학생이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음에 돌아오면 중국어로 강의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2029년까지는 이제 9년 남았으니 중국어로 강의할 수 있도록 실력을 갖추자는 게 목적이에요.”
그는 중국을 이해하면 한국이 보인다고 했다. 중국과 한국을 대비하면 재미있는 감각이 생긴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면 우리나라에서 연줄이라는 말은 중국말로 콴시라고 합니다. 둘의 공통점은 ‘이게 없으면 되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정도가 달라요. 우리나라에서 어떤 일이 이뤄지려면 연줄은 10% 정도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중국에서 어떤 일이 이뤄지려면 콴시가 90% 정도 비중을 차지합니다.”
연줄과 콴시를 비교하면 중국이 보인다
연줄과 콴시(關係, 인맥) 사이에는 더 큰 차이가 있다. 연줄은 과거가 필요하다. 고향이 같든 학교가 같아서 만들어지는 게 연줄이다. 그런데 콴시는 과거가 없다는 게 특징이란다.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 전에는 서로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한 번 맺어지니 계속 갔죠. 그처럼 콴시는 뿌리가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연줄을 보면 후배가 막 대해도 선배가 세 번은 봐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선배가 옹졸하다는 얘기를 듣죠. 콴시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처음 만난 관계니까요. 그래서 콴시는 만들어진 후에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저는 콴시를 살얼음판이라 여겨요. 살얼음판 걷듯이 콴시를 유지해야 하거든요.”
연줄이 혈연·지연·학연으로 맺어진 과거지향적 관계라면 콴시는 미래지향적이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서의 성공을 꿈꾸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연줄 만들듯 콴시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게 조 이사장의 분석이다.
“콴시는 수단입니다. 앞으로 일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에요. ‘삼국지’에서도 콴시가 맺어지니 나라가 만들어졌잖아요? 우리와는 정반대죠. 우리는 활용한다는 개념이 없고, 설혹 그러면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하니까요.”
중국의 ‘콴시’를 한국의 연줄이라 착각하면 큰코다친다는 것이다. 콴시는 몸으로 부딪쳐 직접 습득해야 하며 머리로 깨쳐서는 안 된다고.
조 이사장의 설명을 들으니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를 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최근 중국에 대한 안 좋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중국은 미국과 함께 가장 중요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다.
“미국을 공부하는 수준으로 중국 공부를 해야 하는데 안 하죠. 미국은 잘 모르니까 공부를 하는데 중국은 어느 정도 안다고 대충 생각하니까요. 미국이나 유럽은 모르니까 열심히 공부하거든요.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고 그걸 무시할 수는 없어요. 중국을 모르고 사회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시대가 올 거라고 봅니다.”
책 한 권에서 한 단어만 배워도 된다
1949년생이지만 미래를 위해 다시금 처음부터 공부에 뛰어들 정도로 열정과 학구열이 높아서인지 조 이사장은 나이에 비해 동안으로 보였다. 그는 나이를 잊고 살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청춘을 유지하고 싶어요. 나이를 안 먹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싶은 거죠. 청춘은 나의 미래이자 삶을 긍정적으로 관조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자신만의 영웅론을 갖고 있다. 영웅은 마음은 있고 자질이 없으면 돈키호테가 되고, 마음은 없고 자질만 있으면 햄릿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진정한 영웅은 두 개를 다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영웅의 마음이란 젊은 마음, 즉 청춘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또래가 만나서 하는 얘기의 95%는 옛날 얘기예요. 그래서 제가 나가는 모임에서 ‘절대로 어제 골프 친 얘기 하지 말자, 미래에 뭘 할 건지를 얘기하자’는 원칙을 세웠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몇 달 해보니 한계가 와서, 아예 젊은 강사를 초빙해 강의를 듣기도 했죠.”
그러고 보니 그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독서모임인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의 경영자 독서모임(MBS)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 모임에서는 1년에 책 40권을 읽는데, 올해로 25년을 했으니 1000권을 읽은 셈이다. 그는 독서를 어렵고 무거운 것으로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책을 내 걸로 만들겠다는 아집, 강박관념을 버리는 것이 독서법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독서를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줄 치면서 읽지 않아도 됩니다. 머리말을 보고 이 책이 왜 씌어졌는지 이해한 후에 관심 있는 것부터 읽으면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책 한 권에서 한 단어만 내 것으로 하면 성공적으로 읽은 셈이죠.”
그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경영대학원에서 AI. 크립토 MBA 석사과정도 밟고 있다. 인공지능의 이론과 실제, 경영의사결정 활용 등을 배우고, 블록체인과 디지털금융 메커니즘 및 비즈니스 접목 등도 공부하고 있다.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은 빅데이터, 블록체인, 크립토 등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MBA 과정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최근 모든 석·박사 과정에 AI를 도입하기로 발표해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중 한 사람
25년째 MBS(Management Book Society)를 이끄는 것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조 이사장은 안중근 의사가 중하게 여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을 신봉하며 사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안중근 의사와 남다른 인연이 있기도 하다.
“아버지가 안중근 의사의 오촌 조카였죠. 열 살 무렵에 고아가 되셔서 굉장히 어렵게 살았지만 공부를 잘해 연세대에 입학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연세대 교수를 하셨어요. 현실 정치에도 관심이 있어서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가셨는데 안 되셨죠.”
그런데 그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친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한 아버지였다. 낙마한 날, 아버지가 러시아 책을 읽으며 러시아 공부를 하는 걸 본 것이다.
“당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갔을 때였죠. 낙마한 날, 아버지께서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할 것 같은데 러시아가 어떻게 나올지 알아야겠다며 공부를 하시는 거였어요. 그날의 충격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과거와 단절하고 새 출발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제가 배운 아버지였어요.”
그러나 정치에 참여해 곤욕을 치른 남편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조 이사장의 어머니는 그가 1978년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을 때, 절대로 정치계로는 나가지 말라고 했다. 교수로만 일하다 정년퇴임하라는 ‘명령’이었다.
“제가 몇 번 정치 유혹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죠. 2014년까지 교수로 있겠다고 답하곤 했거든요.(웃음)”
잘하는 거 해야 하나, 좋아하는 거 해야 하나
조 이사장은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지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2013년 9월, 서울대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맞이하면서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제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얘기해왔는데 교수도 사회적 책임이 있지 않나 싶었죠. 그래서 그걸 수행하자고 결심했어요.”
그는 전국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자신을 불러주면 두 시간 무료 강의를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자 15개 학교에서 요청이 왔고, 매주 한 번씩 15주 동안 강의를 진행했다.
“15개 학교에서 똑같이 하는 질문이 있었어요. ‘잘하는 걸 할까요? 아니면 좋아하는 걸 할까요?’”
그는 고민 끝에 그런 질문을 가진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었다. 꿈이 확실히 있고 평생 지키는 독립군 같은 사람은 A형, 꿈은 있는데 바뀐 사람은 B형, 꿈이 있으나 자신이 없는 사람은 C형, 아예 꿈이 없는 사람은 D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름의 답을 찾았다.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은 결과 변수였던 거예요. 원인 변수를 생각해서 원인이 이럴 때는 이런 결과를, 저럴 때는 저런 결과가 나온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던 거죠. 원인을 종속변수로 보지 말아야 했어요. 그래서 자신이 ABCD 카테고리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선택은 달라집니다. A형은 좋아하는 걸 해야 하죠.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총을 잘 쏘든 못 쏘든 독립군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꿈이 없는 D형은? 잘하는 것을 해야 하죠. 그렇다면 가운데 있는 B, C형은? 꿈을 실행할 수 있을 때까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첫날은 오늘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하자, 누군가가 조 이사장에게 ‘발칙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느냐?”라고 물은 것이다.
“그런데 저는 이걸 하면서도 제가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하기 싫더라고요. 이럴 때 빠져나갈 방법이 있습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 타입인가?’라고 물었죠. 그 학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은 D형이었다가 B형으로 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감개무량한 충격을 받았어요. 저를 난생처음 본 학생이 정확하게 말한 거였으니까요.”
그는 자신이 최근까지 꿈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소위 ‘엄친아’로서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산 사람이었죠. 그런데 최근에 꿈이 생겼어요. 제가 박사 학위를 도와준 사람이 400명 가까이 됩니다. 저는 좋아하는 사람을 박사 학위 받도록 해주는 걸 취미로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웃음) 그걸 보며 ‘이게 진짜 행복이구나’ 하는 걸 느껴요.”
그래서 그는 시간이 갈수록 사람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공부하는 기간도 길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부하는 시간을 인생의 3분의 1이라고 보면 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평균수명이 50대였으니 중학교만 나와도 동네에서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었죠. 이승만 대통령 때는 평균수명이 60대였으니까 고등학교를 나와야 했고요. 박정희 대통령 때는 70대였으니 대학을 나와야 했습니다. 최근에는 평균수명이 80대니까 석사까지는 밟아야지요. 그리고 100세 시대에는 박사가 표준이 될 겁니다. 사치가 아닙니다. 즉, 박사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어요. 그러니 60대 시니어는 30년 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교육은 오래 사는 데 필요하기도 하지만,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도 중요하거든요.”
평생교육의 전도사인 조 이사장은 ‘우리 인생의 첫날은 오늘이다’라는 말을 믿고 따라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과거를 회고할 때는 아닌 셈. 우리의 절정기는 오늘부터이니까 과거의 전성기를 회고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그 말처럼, 그의 프라임타임은 거듭나고 있다.
>>> 조동성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67학번,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과정 수료. 1978년 최연소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돼 경영대학장을 지냈고, 36년간 재직하며 한국경영학회장·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장, 15개 해외 대학 초빙·겸임교수로 활동했다. 이명박 정부 때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 2014년 국가브랜드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2016년에는 인천대학교 총장에 취임해 지난 7월 임기를 마쳤다. 8월에 싱크탱크 산업정책연구원(IPS) 제5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내일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이다. 사상 초유의 전염병을 버텨낸 해의 마지막 계절이기도 하다. 올 한 해는 유난히 힘들고 지치는 일이 많았지만, 이번 겨울 만큼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포근하게 보낼 수 있기를 기도해본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브라보 독자들의 얼어붙은 마음의 온도를 녹여줄 90년대 로맨스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Sleepless In Seattle, 1993)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건축가 ‘샘’(톰 행크스)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들 ‘조나’(로스 맬링거)와 시애틀로 이사한다. 그러나 샘은 이사한 뒤에도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조나는 크리스마스이브 라디오 프로그램에 새엄마가 필요하다는 사연을 보낸다. 한편 미국 반대편에 사는 신문 기자 ‘애니’(맥 라이언)는 약혼자 ‘윌터’(빌 풀만)와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이 사연을 듣게 되고, 샘에게 강한 운명적 이끌림을 느낀다. 약혼자가 있지만 샘이 궁금해진 애니는 그를 만나기 위해 머나먼 시애틀로 향한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미국 서부 끝에 사는 남자와 동부 끝에 사는 여자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보낸 라디오 사연을 계기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셀린 디온과 클라이브 그리핀이 듀엣으로 부른 주제곡 ‘웬 아이 폴 인 러브’(When I Fall In Love) 등 달콤한 OST와 겨울 시애틀의 낭만 가득한 야경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달군다.
2.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5)
비엔나에서 파리로 향하는 유럽횡단 기차 안, 파리로 돌아가는 ‘셀린’(줄리 델피)은 시끄러운 독일 부부를 피하기 위해 자리를 옮기다 미국 남자 ‘제시’(에단 호크)를 만난다. 짧은 인사로 말문을 튼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깊고 진지한 이야기까지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빠져든다. 이대로 셀린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제시는 비엔나에서 함께 내리자는 돌발 제안을 하고, 두 사람은 늦은 오후부터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 전까지 짧지만 뜨거운 사랑을 펼친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하루 동안 비엔나를 함께 여행하며 오랜 연인처럼 사랑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속편으로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이 있으며, 9년 간격으로 촬영해 풋풋한 20대 청춘 시절부터 중년이 된 셀린과 제시의 모습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비엔나, 파리, 그리스의 아름다운 풍광이 감동을 더한다.
3.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My Best Friend's Wedding, 1997)
대학 시절 연인이었다 친구 사이가 된 ‘줄리안’(줄리아 로버츠)과 ‘마이클’(더모트 멀로니)은 28세가 될 때까지 짝을 찾지 못하면 함께 결혼하자는 장난스러운 약속을 맺는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기 전 마이클 앞에 아름다운 ‘키미’(카메론 디아즈)가 나타나고, 마이클은 줄리안에게 결혼할 상대가 생겼음을 고백한다. 소식을 들은 줄리안은 그제야 자신이 그를 사랑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닫고, 마이클의 결혼식을 망치기 위해 엉뚱한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은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세 남녀의 엇갈리는 관계를 코믹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룬다.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 줄리아 로버츠와 카메론 디아즈의 ‘리즈’ 시절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영국의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를 소개한다.
2018년 10월,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무려 104만 파운드(약 15억 원)에 낙찰된 그림 ‘풍선과 소녀’가 파쇄기에 잘려나가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액자 틀에 숨겨진 분쇄 장치가 가동되면서 일어난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다.
다음 날 작가는 자신이 의도한 행위였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몇 년 전 이 작품이 경매에 나갈 경우를 대비해 비밀스럽게 파쇄기를 설치했다, 연습할 때는 아무 문제없었는데 경매장에서 기계가 중간에 작동을 멈추는 바람에 절반만 잘려나갔다”며 아쉬워했다.
작품이 손상됐기 때문에 구매 의사를 철회할 수도 있었던 낙찰자는 “충격을 받았지만 예술 역사의 한 조각을 소유하기로 결정했다”며 작품을 그대로 사갔다.
사람들은 이 해괴한 소동이 알려지자 “진짜 예술을 보여줘서 고맙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풍자”라는 반응을 보이며 환호했다.
‘거리의 예술가’로 알려진 이 작가의 이름은 ‘뱅크시’(Banksy).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어 이 이름도 실명인지 가명인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 없고, 어쩌다 인터뷰를 할 때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응했다.
다만 인터뷰 내용들을 종합해볼 때, 1974년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학교를 그만두고 그라피티를 시작했다는 정도만 가늠할 수 있다.
“내 작품의 상업적 독점을 거부한다”
뱅크시는 주로 건물의 벽에 그림을 그린다. 그의 캔버스인 셈이지만 그라피티는 엄연히 불법 행위다. 그는 “얼굴이 알려진 사람은 그라피티를 할 수 없다. 이 둘은 양립 불가능한 요소다”라며 정체를 밝히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화염병 대신 꽃을 던지며 권위와 폭력에 대항하는 모습, 영국의 의회가 침팬지들에 의해 운영되는 모습을 묘사해 사람들을 열광시킨 그의 작품들은 부조리한 사회를 고발하는 데 집중돼 있다. 그의 그림들이 관심을 받기 전까지 그라피티는 그저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세상을 풍자하는 뱅크시의 세련된 표현 기법이 점차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시선은 달라졌다.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수백 명이 몰려왔다. 더러는 그가 그린 벽화들이 도난을 당했고, 건물주들이 아예 벽을 뜯어내 비싼 값에 내다 파는 일도 벌어졌다. 공공시설에 그려진 그림은 서로 자기 거라며 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 얼굴 없는 화가는 기존 제도와 관행과 권력을 비판하기 위한 대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는데, 루브르박물관과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등지에 자신의 그림이 애초부터 전시되어 있는 작품인 양 몰래 설치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놀라운 사실은 며칠 동안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 또 자신의 작품이 경매장에서 팔려나갈 때는 “세상에! 저런 거지같은 것들을 돈을 주고 사다니! 도대체 어떤 자들이야?”라고 빈정대기도 했다. 그림이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에 거래되는 미술계의 허례허식에 대한 조롱이었다.
뱅크시는 자신의 이름과 작품을 돈과 연결하려는 이들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즐거움을 위해, 학술적 연구나 실천을 위해 누구든 내 작품을 복제하고 빌리고 훔쳐가길 바란다. 나는 누군가 내 이름을 독점하는 걸 바라지 않을 뿐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그림을 단돈 60달러에 파는 이벤트를 벌였다. 모두 뱅크시라는 서명이 들어 있는 작품이었지만 사람들이 이를 알 리 없었다.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실행된 이 파격적인 행사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오후가 돼 가판대를 접을 때까지 팔린 그림은 겨우 8점. 갤러리에서 팔았다면 수만 달러 이상을 받았을 그림들이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두고두고 아쉬워했다는 후일담도 들려왔다.
뱅크시는 “상업적 성공은 그라피티 작가에게는 실패의 의미”라며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서는 동네의 벽만 있으면 된다. 당연히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불필요한 입장료를 낼 필요도 없다. 벽이야말로 작품을 발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세계 여러 도시에 벽화를 남기며 전설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그의 명성만큼 작품 값은 점점 치솟아 유명 연예인, 세계 유수 미술관들이 너도나도 그의 작품을 사들이고 있다고 한다. 2019년 영국에서 이뤄진 미술 관련 설문조사에서는 유명 작가들을 제치고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예술가 1위로 뽑혔다.
일각에선 유쾌하면서도 묵직한 메시지로 대중의 마음을 위로하는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여러 도발적인 행위가 결국 작품 가격을 올리기 위한 전략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하고 있다.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면 천 개의 복이 온다’
‘푸른 아시아’ 오기출 사무총장이 펴낸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면 천 개의 복이 온다’라는 책을 얼마 전 읽었다. 저자는 기후 위기 대응 NGO 활동으로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 United Nations Convention to Combat Desertification)에서 수여하는 ‘생명의 토지상’을 받았다.
2017년 5월에 출간됐으니 이미 한참 구간이 된 책이다. 물론 화제의 베스트셀러는 되지 못했다. 이 책은 몽고에서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유목민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초원이 사막으로 변해 황폐화된 후,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초원이 사막으로 황폐화되면서, 몽고 유목민들이 초원 대신 대도시 쓰레기장 근처의 난민촌으로 몰려들며 어떻게 환경 난민이 됐는지, 또한 어떻게 ‘푸른 아시아’와 함께 극복하고 있는지, 생태 회복에 관한 NGO 활동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발간된 지 3년이 지나서야 이 책을 읽었고, 그 후 생각이 많아졌다. 그동안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며 살았구나 하는 질책도 스스로에게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구 온난화와 미세먼지, 황사를 짜증스러워하고 불평만 해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는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세대는 목적지를 향해 돌아가는 사람은 바보취급 당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지름길과 사잇길로 남보다 더 먼저 도착하고 남보다 더 멀리 도달하려고 안달했다. 늘 바쁘고 분주한 삶이었다. 이런 일상 속에서 지구 환경을 염려하고 작은 행동을 실천하는 건 사치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물 절약을 위한 나만의 생활 철칙, 소소한 방법 두 가지
이제 비로소 눈을 위로 치켜뜨지 않고 내 발밑까지 두루두루 훑어볼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이제부터라도 모두가 작은 힘을 보태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내가 보태는 작은 힘을 꼽아보라고 묻는다면 정말 소소하지만 그래도 답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한 가지는 ‘이틀에 한번 머리 감기(?)’, 또 하나는 ‘양치질하면서 세면대 물 안틀어놓기’다. 이런 생활 습관을 갖게 된 것도 불과 5년 전부터다.
물과 기름을 가진 자, 미래 사회 지배자 되리
2015년에 영화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를 보고 난 후, 며칠을 당혹감에 시달렸다. 영화를 보면서 손과 다리가 덜덜 떨릴 만큼 공포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사막으로 변한 미래의 지구에서 물과 기름을 독점한 권력자 임모탄은 그 일가와 자신을 지키는 병사들만 견고하게 구축된 절벽 위 동굴에서 지내게 하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 세상을 지배한다.
가끔 절벽 아래 사막을 떠도는 이들을 모아놓고 하사하듯 물을 절벽 밑으로 방류하면서 마치 조물주가 된 듯 세상을 주무른다.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기 위해 아래 세상은 지옥이 된다. 임모탄의 지배를 거부하는 이들은 물도 없고 기름도 없는 사막을 떠돌다 말라 타들어 죽거나 광폭한 지배자 휘하의 무장병사들에게 사냥감처럼 잡혀와 온갖 인체 실험 대상이 되어 서서히 죽어간다.
황폐한 미래 사회를 그린 너무나 리얼한 영상들에 손과 다리가 떨리고 공포감이 엄습했다. 미래에 내 딸의 아들 혹은 딸(그러니까 내 손자 손녀)이 저런 황폐화된 지구에서 살게 되는 건 아닌지 극도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물론 27세가 된 나의 딸은 결혼 생각도 없고 언제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버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나는 그저 불안하기만 하다.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미국 서부지역, 물 부족 심각
미국 캘리포니아도 가뭄으로 사막화가 진행되는 곳 중 하나다. 사막에 자리 잡고 있는 라스베이거스의 경우 주택 정원을 선인장으로 꾸며놓는 게 일반적인데 요즘엔 거주 구역별로 정해진 시간에 물을 줘야 한다. 집주인 맘대로 정원에 물을 주면 어김없이 벌금 고지서가 날아온다. 인근 주민이 몰래 지켜보다가 신고를 하는 것이다.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캘리포니아는 부족한 물을 콜로라도 주로부터 구매해 끌어 쓰고 있다. 과거에 미국 이민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이었던, 초록색 잔디가 깔린 정원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스위트 드림은 이제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가뭄이 심해지자 주 정부는 각 주택이 정원의 잔디를 걷어내고 돌과 선인장, 물이 많이 필요 없는 플랜트로 디자인해 새롭게 정원 공사를 하면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이 밖에 물 절약을 위한 다양한 홍보와 마케팅도 실시하고 있다. 이때 나온 슬로건이 바로 ‘Brown is New Green!’이다. 사막화를 막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미국 서부지역의 현실이다.
내가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몽고.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고비사막으로 여행이나 가볼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지냈던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책,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면 천 개의 복이 온다’. 20년 전부터 나무를 심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유목민들이 늘고 있고 새롭게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나무 심는 일을 묵묵히 해오고 있는 이 NGO 단체를 한국인들이 운영하고 있다니 자랑스럽기만 하다.
기후 환경 변화에 관심을 갖게 해줄 한 권의 책,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면 천 개의 복이 온다’와 한 편의 영화 ‘분노의 도로’. 깊어져 가는 가을날, 미래 세계의 황폐화를 막기 위해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기를 권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출현도 결국 인간의 난개발과 이로 인한 기후 변화, 생태계 변이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속에서 발생한 게 아닐까? 코로나19로 전 세계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 기후 변화라는 거대한 모래폭풍 속으로 우리 모두 들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됐다.
‘두물머리 명반 감상실’ DJ 정상묵
음악을 들으며 밤을 지새운 후, 새벽 물안개 흐르는 강가를 거닌다.
‘인생은 비장한 것’이라며 창조주가 속삭이는 삶의 메시지를 밤새 들은 듯하다.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고 그 책임은 모두 나의 것이다. 멈출 수 없는 인생의 길이 외롭지 않기를…. 음악을 벗 삼아 평생 힘든 생태농업의 길을 걸어온 정상묵 씨를 만나 그가 사랑한 음악 이야기를 들어봤다.
몇 살인지도 모를 만큼 어린 시절이었다. 꼬마 정상묵은 전쟁이 끝난 후 혼란의 소용돌이 중 창궐하던 홍역에 걸려 앓아누웠다.
어른들이 방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해 몸에서는 불이 나는데 방 안에서 뒹굴뒹굴하기만 했다. 너무 답답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살랑거리는 바람에 코를 킁킁거리고 있을 때였다. 마당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렸다. 몸은 뜨겁고 온몸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던 그때, 들려오는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 안에서 뜨겁게 내뿜던 열기와 간지러움도 잊고 잠시 넋을 잃고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음악 감상은 강렬한 경험으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꼬마의 귀에 환상의 소리로 들려왔던 그 음악을 다시 듣게 된 건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CBS 방송을 틀어놓고 일을 하다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마치 감전된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다. 이 음악을 도대체 언제 들었지? 무슨 음악이었지? 며칠을 고민하다 어느 날 갑자기 어린 시절 창호지에 코를 박고 들었던 기억 속의 선율이 스쳐 지나갔다.
아! 맞다. 그 음악이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음악의 제목을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CBS 방송 주파수를 고정하고 좋은 음악이 나오면 무조건 귀를 쫑긋하며 들었다. 제목을 쓰고 외우길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 그리던 그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정상묵 씨를 음악의 세계로 이끌었던 그 곡은 바로 베토벤의 ‘로망스 제2번 F장조 op. 50’.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협주곡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클래식 음악은 물론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던 미국의 포크, 영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하던 비틀스 노래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선율에 귀를 맡겼다.
당시 즐겨 듣던 미국 포크 음악의 대부인 피트 시거의 대표곡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비틀스의 ‘Ob-La-Di, Ob-La-Da’와 ‘Hey Jude’와 ‘Let it Be’, 사이먼&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 Water’ 등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즐겨 듣는 노래 중 하나다.
“당시 비틀스 음반 한 장 가격이 160원이었어요. 넉넉지 않은 생활이라 음악에 대한 갈증은 라디오로 많이 풀었죠. 그러다 꼭 사고 싶은 음반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카세트테이프나 LP 음반으로 사서 듣곤 했습니다.”
정상묵 씨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악기 연주에 대한 꿈으로 이어졌다.
카세트테이프로 감상했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기타 연주는 너무 많이 틀어 중간중간 끊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겨우 이어 붙여 듣곤 했는데 늘어지고 해져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그의 손을 떠날 수 있었다. 이때 들었던 기타 소리가 너무 좋아 이 곡을 연주하겠다는 목표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단다. 당시 기타를 연습할 때 쓰던 너덜너덜해진 교재는 아직도 갖고 있다. 오랫동안 몸에 익은 곡이라 가끔 연주해보곤 했는데 2년 전, 손가락 세 개의 신경을 다치는 바람에 더 이상 기타를 들지 못하게 됐다.
신의 독백 같았던 베토벤의 ‘합창’과 하이든의 ‘황제’
LP 음반을 사기 시작한 건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당시에는 듣고 싶은 음반을 사는 게 즐거움이었다면, 2000년대부터는 동묘와 신설동 시장 사이에서 열리는 풍물시장, 명동 회현역 지하상가 등 귀한 음반을 판매하는 곳은 어디든 가봐야 직성이 풀렸다.
주말만 되면 LP를 사러 갈 생각에 설레어 잠을 설칠 정도였다. 장당 1000원에 보석 같은 원반을 발견할 때는 온몸에 엔도르핀이 솟구쳤다. 흥분된 마음으로 위대한 음악을 들으며 밤을 지새운 후, 새벽 물안개 낀 두물머리 강가를 거닐곤 했다는 정상묵 씨. 그에게 음악은 인생을 성찰하며 뚝심 있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조언해주던 친구 중의 친구, ‘절친’이었던 셈이다.
동묘 풍물시장에서 찾아낸 가장 값비싼 보석은 유진 오르먼디가 지휘하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9곡 전곡을 7장으로 녹음한 세트 음반이다. 1966년 콜롬비아사에서 발매한 이 음반 세트가 포장도 뜯기지 않은 상태로 눈에 띄었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던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단다.
그날 그는 베토벤 교향곡 9곡 전곡이 담긴 LP 음반 세트를 지갑에 있던 돈 1만2000원과 바꿔 손에 넣고는 부리나케 두물머리로 돌아왔다. 음반을 들을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날 밤은 그렇게 턴테이블에 LP를 올려놓고 홀딱 새웠다. 정상묵 씨가 그동안 모아놓은 음반은 1만여 장. 이 중 80%는 클래식 음반이고 베토벤 작품 LP는 300여 장에 달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이다. 10명의 지휘자들이 연주한 작품들을 수집해 각각의 연주 특색을 체크하면서 감상하고 있다. 연주자의 반음 미스 터치까지 들릴 정도라 하니 득음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상묵 씨는 작곡가의 의도를 재현하는 지휘자들의 다양한 표현을 캐치하는 게 클래식 음악을 듣는 즐거움 중 하나라 했다. 지휘자에 따라 연주시간이 10분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하는데 음악을 감상하는 데 이력이 생기면 지휘자들의 이러한 세밀한 표현법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고.
초보자를 위한 클래식 길라잡이
‘두물머리 명반 감상실’은 지난 2009년 문을 열었다. 매월 셋째 주 수요일, 두물머리에 위치한 문화공간 두머리 2층 음악감상실에서 열리는 명반 감상회는 대구, 마산, 서울 등 각 지역에서 ‘두물머리 정상묵’의 명성을 듣고 올라온 음악 애호가들이 함께 음악을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목 모임이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때는 음악감상실이 꽉 찰 만큼 참가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20여 명의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정도다. 이 만남마저도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에는 힘들어 요즘은 개점휴업 상태다.
자연 속에서 음악을 들으며 사는 삶을 꿈꾸는 은퇴자가 많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음악을 듣는 생활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야 한다. 특히 클래식 음악은 어느 정도 귀가 열려야 감상할 수 있으므로 사전 정지 작업이 필요하다.
정상묵 씨가 추천하는 방법은 클래식 FM 라디오를 무조건 틀어놓고 생활하기다. 제목도, 연주자도, 지휘자도, 오케스트라 이름을 몰라도 그저 듣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클래식 음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한 첫 발자국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음악을 들으면서 내 안에 샘솟는 슬픈 감정 혹은 기쁜 감정을 유추해 그 감정에 깊게 빠져보는 것이다.
정상묵 씨는 음악이 주는 깊은 감정의 세례를 맛봐야 음악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서 음악과 감정을 하나로 만들 것을 조언했다.
정상묵 씨는 누구?
1952년생. 한국 유기농의 모태라 불리는 ‘정농회’(正農會)에서 생명농업의 중요성에 눈을 뜬 후 양평군 양서면 일대, 일명 두물머리 지역에서 1976년부터 유기농업을 시작한 농업인이다. 1975년 대도시 서울의 식수원인 한강 상류에 위치한 양평, 팔당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농약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농업인들과 함께 팔당 일대를 유기농 생태농업의 메카로 만들었다.
이후 ‘정농회’, 사단법인 ‘환경농업단체연합회’, ‘팔당친환경생산자연합회’, 영농조합법인 ‘팔당생명살림’을 이끌며 한국의 생태농업인으로서 결코 쉽지 않은 삶의 길을 걸어왔다. “힘든 길을 지치지 않고 꾸준히 걸을 수 있게 해준 건 순전히 음악의 힘이었다”고 말하는 자기고백 속에 그동안 그가 겪었을 온갖 어려움과 고난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정상묵 씨가 꼽는 내 인생의 음악
베토벤 교향곡 제9번 op.125 ‘합창’ | 베토벤은 자신을 천재로 자각했던 것 같다. 인류에게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 ‘합창’ 1악장을 듣다 보면 마치 하늘의 별들이 지구를 향해 쏟아지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천재적인 작곡가가 자신의 삶을 바쳐 작업한 음악들은 들어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op.73 ‘황제’ |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면 이 음악을 들으며 고민했다. 특히 1악장을 들을 때는 선택 후의 여러 갈래에 대해 고려해본다. 2악장은 비장함에 차 있다. 결국 삶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을 비장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 아닐까? 베토벤이 내게 주는 의미를 멋대로 해석한 셈이다.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가 베토벤에게 읊조리는 것을 선율로 만든 것 같다고나 할까? 어느 날 일몰시간에 이 곡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 아이를 키울 때는 2악장만 따로 녹음해 계속 들었다.
베토벤 현악 4중주 0p.130 ‘카바티나’ | 1977년 태양계 탐사를 위해 쏴 올린 무인우주탐사선 보이저 1, 2호에 실린 지구의 메시지 음악이다. 당시 이 탐사선에는 외계인을 만났을 때 지구를 알릴 수 있도록 54가지 언어로 각종 메시지를 담은 레코드를 실은 바 있는데 외계인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레코드 마지막 트랙에 1시간 30분짜리 분량의 음악을 선곡해 실었다. 그 곡이 바로 베토벤의 ‘카바티나’다. 지구를 대표해 외계인에게 보내는 음악이라니… 지금은 태양계를 벗어나 인터스텔라를 떠돌고 있을 보이저 1, 2호에서 계속 플레이되고 있을 이 음악을 감상해보라. 들어보면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피트 시거 ‘꽃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 피트 시거는 미국 포크계의 전설이다. 밥 딜런, 존 바에즈 등과 함께 반전평화운동을 벌이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았다. 나이가 들면 세상과 타협하며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산다고들 하는데 피트 시거는 미국의 매카시 광풍도 이겨내고 정말 옹골차게 살았다. 92세였던 지난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공연에 참가했다는 뉴스를 보고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월가 점령 시위대들이, 존 바에즈의 노래로 더 유명해진 시거의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함께 부르며 나아가는 걸 뉴스 화면으로 봤는데 전율이 느껴지더라. ‘꽃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는 원작자 시거의 음반뿐 아니라 피터 폴&메리, 존 바에즈, 나나 무스꾸리, 시티(독일 밴드) 등 자신의 색깔을 확실히 갖고 있는 뮤지션들의 다양한 버전을 소장하고 있다. 요즘은 유튜브로도 듣는 나의 ‘최애’ 노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덥고 습한 공기 대신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이 잠을 깨우는 계절. 얇고 까슬까슬한 리넨 소재 셔츠가 아닌 포근하고 부드러운 카디건에 손이 가는 계절. 가을이 왔다. 계절의 변화에 맞춰 옷도 한층 두툼하게 챙겨 입었지만, 특유의 스산한 기운에 이유 모를 쓸쓸함과 공허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가을만 되면 적적한 마음을 달래줄 진한 멜로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가을 타는 브라보 독자를 위해 감성 가득한 한국 멜로영화 세 편을 준비했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내 머리 속의 지우개 (A Moment To Remember, 2004)
유달리 건망증이 심한 '수진'(손예진)은 어느 날도 어김없이 지갑과 편의점에서 산 콜라를 카운터에 두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간다. 그때 편의점 앞에서 콜라를 들고 있는 '철수'(정우성)를 발견한다. 철수가 자신의 콜라를 훔쳤으리라 생각한 수진은 그의 손에 들린 콜라를 뺏어 들이킨다. 강렬한 첫 만남 이후 수진의 회사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려 마침내 결혼까지 골인한다. 하지만 행복한 신혼 생활도 잠시 수진의 깜빡하는 증상은 더욱 심해져 가고, 철수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조기 치매를 앓고 있는 수진과 가난한 목수 철수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손예진과 정우성의 애틋한 감정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정우성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따르며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오랜 시간 지난 지금까지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2. 시월애 (A Love Story, 2000)
1999년, '은주'(전지현)는 자신이 살던 집 '일마레'를 떠나며 새로 들어올 집주인에게 바뀐 주소로 우편물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남긴다. 한편 1997년, 일마레에 이사 온 '성현'(이정재)은 짐 정리를 하다 우편함에서 이상한 편지 한 장을 발견한다. 1999년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이 살 집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놓은 것. 반신반의하던 성현은 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편지는 2년을 뛰어넘어 은주에게 도착한다. 마침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두 사람은 우체통을 매개체로 소통하고, 같은 공간 다른 시간 속에서 서서히 가까워져 간다.
영화 ‘시월애’는 엇갈린 시간을 소재로 한 판타지 로맨스물이다. 한국 영화 최초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다. 작품의 중심 배경이 되는 일마레는 일몰 명소로 유명한 강화 석모도에서 촬영한 것으로, 주인공 두 남녀의 애절한 연기와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3. 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 2001)
소리 채집자 '상우'(유지태)는 어느 겨울 지방 방송국 라디오PD '은수'(이영애)를 만난다. 마침 자연의 소리를 틀어주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은수는 상우와 녹음 여행을 떠나고, 자연스레 눈이 맞은 두 사람은 여름이 올 때까지 뜨겁게 사랑한다. 하지만 두 계절이 지나고, 이혼 경험이 있는 은수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껴 서서히 상우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결국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랑이 변하면서 상우는 예상치 못한 실연을 맞이한다.
영화 '봄날은 간다'는 두 남녀의 만남과 사랑, 이별을 계절에 빗대 그린 작품이다. 흔들리는 보리밭과 대나무숲, 고요한 사찰 등 청아한 풍경이 작품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영화에서 이영애는 "라면 먹고 갈래요?", 유지태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는 명대사를 남겼다.
“바쁘니까 행복한 게 많이 없어졌어요.”
지금 트로트 열풍에 휩싸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가수 진성(61)에게 행복에 관해 묻자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수십 년에 걸친 오랜 무명생활 끝에 ‘태클을 걸지마’, ‘보릿고개’, ‘안동역에서’ 등으로 육십이 넘어 전성기를 맞이한 그는 요즘 방송가의 가장 뜨거운 블루칩이다. 그런 그가 “행복한 게 많이 사라졌다”는 말을 한다. 거친 쇼비즈니스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고민처럼, 혹은 그 누구보다 격렬한 인생 후반전을 치르는 이의 깨달음처럼 들려왔다. 진성의 목소리로 삶과 노래, 그리고 다짐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40년 동안 가수로 지내면서 히트곡 하나 내기 위해서 부단히 달려왔잖아요? 히트곡이 나오는 그 순간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인터뷰를 하며 진성은 세상살이는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해야 한다는 걸 모르고 지내왔다고 고백했다. 개인의 상상을 초월한 곳에서 통제하기 어려운 일들이 발생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에고이스트로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인간관계를 제대로 못했다”는 진성의 고백 뒤에는 그만의 깊은 상처가 자리하고 있었다. 1960년생인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기구함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이 가정불화로 집을 나간 후 고아가 됐다. 겨우 세 살 때였다. 할머니가 계시긴 했지만 중풍으로 얼마 못 살고 돌아가셨기에 그는 친척 집을 전전하며 살아야 했다. 열한 살 때 부모님이 극적으로 다시 만나 함께 살게 됐지만, 차라리 안 만나느니만 못한 관계였다. 결국 가족들은 다시 헤어졌다.
홀로 살아남아야 했던 그는 열일곱 살 때부터 야간업소에서 서빙을 하고 노래도 하는 거친 인생살이를 시작한다. 그러기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삶의 고단함은 이후 30여 년간 계속될 길고 긴 무명가수 생활의 출발이기도 했다. 2012년이 돼서야 ‘안동역에서’가 히트를 치고 안동역에 비석이 세워질 정도로 대성공을 했지만 그의 불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혈액암과 심장판막증 진단을 받았다. 진성은 성공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이 고된 투병 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그의 지나온 삶을 보면, 헤어진 부모에 대해, 그리고 끝없이 이어진 불운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자라지 않으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가 스스로 칭한 ‘에고이스트’란 거친 세상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쌓아야 했던 어떤 보호막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안동역에서’가 히트를 친 후 많은 사람이 그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자 그 보호막이 문제가 되었다.
맨주먹으로 이룬 성공
“체력적으로도 사람 관리가 안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오해를 많이 샀어요. 소개를 받아도 사람들을 관리해본 적이 없어요. 명함을 하나 받고 한두 달 전화 안 하면 상대가 저를 건방지다 생각하겠죠. 그런데 저는 그 사람과 가는 길이 달라요. 그게 제 아집이었지. 앞으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내 체력이 안 되니까. 그래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선생님이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제 생활 자체로도 힘들다’고 말해주죠.”
진성의 ‘아집’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지금의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그는 수십 년 동안 오롯이 혼자서 싸우고 극복했다. 사람들을 동원하거나 지인들을 통해 노래해온 사람이 아니다. 민초처럼, 잡초처럼 질기게 살아남아 성공했다는 자존심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무명생활이 너무 길어서 고생을 해도 ‘이게 고생인가?’ 하며 무심히 살았어요. 그게 제일 큰 장점이죠. 덕분에 트로트 막차를 타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좌절감에 술도 많이 먹던 시절이 있었죠. 그러면서 인생을 허투루 살았다면 종착역에 아름답게 내리지 못했을 거예요. 다른 사람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전한 사고방식도 도움이 됐다고 봐요.”
모든 아름다움은 겸손에서 나온다
인터뷰 중에 진성은 거듭 뒤를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인생의 최전성기인 지금 그가 보이는 이러한 조심스러움은 그 누구보다도 삶의 질곡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더욱 진정성 있게 들렸다.
“모든 아름다움은 겸손에서 나오는 거 같아요. 언제부턴가 저는 돌다리 두드리며 건너듯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살았어요. 즐거움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오래 즐겁게 살기 위해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를 아름답게 잘 끌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스로 뿌린 것들을 잘 가꿔야겠다는 책임감도 생기고요.”
갑작스럽게 성공한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소위 ‘졸부 의식’을 그는 철저히 경계한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성격이 다 다르고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죠. 상대를 먼저 배려하기보다는 내 기준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니 안 맞을 때가 있어요. 대중들과 함께하는 연예인은 이런 태도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다가오는 사람을 파악할 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 하고, 마음도 자주 비워야겠죠.”
부부관계는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이뤄져야
나이가 들어도 인간관계가 여전히 서투르다고 말하는 진성이 가장 아끼는 이는 그의 곁에 있는 아내다. 오십이 돼서야 아내와 공식적인 부부가 됐다. 그는 고마워하면서도 미안해했다.
“아내는 저만 보고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힘든 것들이 있고 그것 때문에 집에 와서 괴로워할 때가 있죠. 그런 모습을 안 보이려고 해도 저도 모르게 내색을 하곤 했죠. 그래도 다 받아주는 아내를 보며 스스로 이겨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제가 아팠을 때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아내가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아내를 생각하면 그냥 고마워요.”
그에게 있어 아내는 이제 믿음의 대상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말하는 부부관계의 해법도 믿음에 있었다.
“요즘은 옛날보다 이혼율이 높잖아요. 사랑이 바탕에 깔려야겠지만, 50대가 넘어가면 정열적인 사랑은 퇴색하죠. 그래서 성공적인 부부관계란 서로에 대한 믿음을 얼마나 쌓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아요. 젊을 때는 함부로 말했어도 나이가 들면 그런 버릇을 지양하고 상대를 아낄 줄 아는 마음도 생겨야 하지 않을까요? 뜨거운 사랑은 아니어도 배려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사랑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