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은 내 삶과 같이해왔다. 첫 작품 '007 살인번호' 이후 단 한 편의 영화도 놓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본부가 있는 런던은 물론이고 스톡홀름, 코펜하겐 같은 전 세계의 모든 유명 도시들을 돌아다니는 007을 보며, 지도 위에서 지명 찾기에 빠졌던 나는 자연스레 지리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런데 우리 세대의 영원한 007인 숀 코네리가 지난달 31일 91세로 타계했다. 그리고 첫 작품 ‘007 살인번호’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발터 PP’가 2억 원이 넘는 가격으로 경매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원래 007의 주 무기는 소형 권총인 ‘발터 PP’였다. 근사한 영국제 맞춤 양복 속에 품위 있게 총을 소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보도들이 ’숀 코네리 007’에 대한 추억을 상기시켰고 ‘다니엘 크레이그 007(이하, 최근 007)’에 대한 불편한 비교로 이끌었다.
본드와 여인들
영화가 시작되면 007이 임무를 멋지게 완수하는 '맛보기' 액션 신이 끝나고, 관객을 향해 총을 쏜 후 주제가와 함께 여체(반드시 나신의 그림자)를 이용한, 그야말로 예술적인 오프닝이 항상 이어졌다. 현재까지도 가슴이 설레는 장면인데, 그 장면들이 결여된 '최근 007'은 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삭막한 분위기는 영화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원래 007은 악당의 여자들 마음을 얻어 그녀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탈출하는 법이다. 그런데 그런 작업(?)을 할 때 얼굴의 상처는 치명적이다. 아무리 격렬한 격투가 있었을지라도, 늘 말끔한 얼굴의 신사로 카지노에 나타나 여자를 유혹해야 진짜 007이다. ‘007 골드핑거’를 비롯해 그동안 악당의 여인들은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007의 치명적 남성미에 모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007은 남자들의 또 다른 로망이었다. 그런데 ‘최근 007’은 스파이 세계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미명하에 동네 불량배같이 상처 입은 험한 얼굴을 보인다. 그러니 ‘최근 007'에서는 여자가 우리 007을 배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007의 순수한 법칙
그동안 우리는 화면에 얼굴은 안 보인 채 커다란 반지를 끼고 흰 고양이를 쓰다듬던 스펙터를 만나왔다. 007은 핵폭탄이든, 세계전쟁을 일으키든, 전 세계적 조직을 갖춘 조직과 대결해왔다. 그런데 '최근 007'은 겨우 범죄 자금 세탁소 직원이나 개인적 원한을 가진 이들과 대결한다. 그러다 보니 멋진 본드카 같은 비밀병기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국산 애스턴마틴 자동차에, Q가 개발한 로켓을 장착해 뒤를 따라오는 악당들을 처치하던 자동차 추격 신은 그 시대의 청소년들을 실신시켰다. 임무 부여 시 지급되는 비밀병기들을 007이 언제 어떻게 쓸까 하는 궁금증이 영화 내내 관객들을 이끌었다. 오죽하면 그 시대에 유행했던 가방 이름이 ‘007 가방’이었겠는가!
그런데 '최근 007'은 최첨단 비밀병기 없이 시카고 갱단의 기관단총 켈리 수준으로 품위 없게 기관총까지 메고 나와 영화 ‘친구’ 속 고교생들처럼 뛰어다닌다. 그렇게 바쁘게 뛰어다니니 여인과 사랑할 여유가 없다. 본드걸이 털북숭이의 숀 코네리의 가슴에 안긴 베드 신도 안 나온다. 그렇다고 우리의 007은 절대 플레이보이가 아니다! 영화 한 편마다 반드시 한 여자만을 사랑한다. 다만 우리가 여러 편의 시리즈물을 보면서, 여러 명의 본드걸을 대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 뿐이다. 007의 능글맞은 농담에 가볍게 응수하는 머니페니도 노련미 넘치는 여비서였을 뿐이다.
‘최근 007’은 여자들을 막 대한다. 악당이 본드걸을 인질로 잡고 007에게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총을 버리라고 할 때, 모든 007들은 일단 총을 버린 후 후일을 도모해 여자를 구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 수많은 영화의 유사한 장면들을 보며, '남자로서의 답답함'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왜 꼭 영화 속 여자들은 인질로 잡히고 남자 주인공은 항상 목숨을 내놓으며 총을 버려야 하느냐 말이다.
그러나 이게 바로 영화의 법칙 수준을 초월한 '영화의 헌법'이다. 이것이 마음에 안 들면 개헌을 위해 세계인이 투표를 해야 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최근 007'은 여인을 죽게 만들면서까지 그냥 쏴댔다. 그것도 무표정하게 말이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스파이의 임무보다도 사랑하는 여인의 생명이 우선이라는 '007의 그 순수한 법칙'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저건 우리의 007이 아니다!'라는 마음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마치 이 시대가 007을 오염시킨 듯했고, 나도 공범자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당신이 더 007을 보고 싶으면서도 “1등을 해야 007을 보여준다”라고 말씀하셨던, 나보다 더 내 기말시험 점수에 가슴 졸이셨던 돌아가신 아버지를 느끼러 다음 007 영화를 또 보러 갈 것이다.
인터넷 서핑을 하다 우연히 작은 동물들이 꼬물꼬물 움직이는 영상을 보면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 순간만큼은 머리를 아프게 하던 고민거리들이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기분 탓이 아니다. 실제로 귀여운 동물 영상을 보는 것이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한 연구 결과가 있다.
코로나19로 스트레스 가득한 나날들, 귀여운 동물로 ‘힐링’해보는 건 어떨까.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기분 좋아지는 동물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내 어깨 위 고양이, 밥(A Street Cat Named Bob, 2016)
길거리 음악가 ‘제임스’(루크 트레더웨이)는 몸을 누일 집도, 찾아주는 이도 없는 외로운 신세다. 고된 인생을 마약에 의존하며 살아가다 죽을 위기를 넘긴 그는 담당 의사의 도움으로 임대 주택을 얻는다. 어느 날, 제임스의 집에 상처 입은 길고양이 ‘밥’이 찾아오고, 그는 가진 생활비를 모두 쏟아 밥을 치료한다. 그 후 여느 때처럼 공연을 시작한 제임스는 평소와 다른 관객들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끼고, 머지않아 자신의 곁을 따라다니는 밥을 발견한다.
영화 ‘내 어깨 위 고양이, 밥’은 2012년에 출간된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마약 중독자이자 노숙인이었던 제임스 보웬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영화에 출연한 ‘밥’ 또한 대역이 아닌 실제 제임스의 삶을 변화시킨 고양이라는 점이다. 오랜 시간 제임스의 곁을 지킨 밥은 지난 6월 1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오는 12월 개봉 예정인 ‘내 어깨 위 고양이, 밥 2’를 통해 사랑스러운 밥의 모습을 다시 만날 수 있다.
2. 마이펫의 이중생활(The Secret Life Of Pets, 2016)
‘맥스’(루이스 C.K)는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평범한 반려견이다. 어느 날도 다름없이 문 앞에서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맥스는 청천벽력 같은 상황을 마주한다. 케이티가 유기견 보호센터에서 새식구 ‘듀크’(에릭 스톤스트릿)를 데려온 것. 간식부터 침대, 주인의 사랑까지 빼앗겨버린 맥스는 골칫거리 듀크와 원치 않는 동거를 시작하고, 급기야 산책 도중 다른 길로 새어 나간 듀크로 인해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린다.
영화 ‘마이펫의 이중생활’은 주인이 집을 비운 사이 벌어지는 반려동물들의 발칙한 이중생활을 그린 애니메이션으로, 반려동물을 키운다면 공감할 만한 작품이다. 주인공 ‘맥스’와 ‘듀크’를 비롯해 깜찍하지만 성격 있는 강아지 ‘기젯’, 난폭한 토끼 ‘스노우볼’, 식탐 많은 고양이 ‘기젯’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해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애니메이션 영화지만 실제 반려동물들이 자주 하는 행동과 습관을 캐릭터 속에 녹여내 현실감을 높였다는 평을 받는다.
3. 닥터 두리틀(Dolittle, 2020)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닥터 두리틀’(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세상과 단절하고 동물들과 친구가 되어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여왕에게 불치병이 생기고 왕국은 위험에 빠진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 안에 신비의 섬을 찾아야 하는 상황. 자신의 능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두리틀은 동물 친구들을 데리고 세상 밖으로 나와 위험천만한 모험을 떠나기로 한다.
영화 ‘닥터 두리틀’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과 ‘어벤져스’ 시리즈 이후 아이언맨 수트를 벗고 처음 스크린에 복귀한 작품이다. 악과 맞서 싸우는 영웅 대신 고릴라, 개, 여우, 기린, 오리, 타조 등 다양한 동물들과 귀여운 ‘캐미’를 선보여 웃음을 유발한다. 톰 홀랜드, 라미 말렉, 마리옹 꼬띠아르 등 최고의 배우들이 동물 목소리를 연기해 재미를 더한다.
강원도 정선 고한읍에서 인적이 가장 뜸했다는 고한18리 골목에 들렀다. 3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골목의 변화는 놀라웠다. 이곳 주민들은 ‘마을이 호텔’이라는 자부심으로 매일 집 앞 화단을 단장한다. 마을은 나날이 예뻐진다. 이제 시작이라고 하니, 앞으로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지 기대된다.
탄광촌 고한읍의 흥망성쇠
서울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무궁화호는 3시간 20분 뒤 강원도 정선 고한역에 정차했다. 고한역은 고한읍내의 꽤 높은 언덕에 있다. 계단을 내려오니 고한시장 입구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표석이 눈에 띈다. ‘여기가 해발 700m'라 쓰여 있다.
고한읍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산지대다. 1950년대에는 화전민이 모여 살던 산촌이었다. 1960년대 고한읍과 사북읍에 탄광 개발이 시작되자 탄광촌이 되었다. 전국에서 일꾼들이 몰려왔다. 지역 경제는 호황을 맞았다. 1980년대 이후 석유와 도시가스가 보급되면서 석탄 산업은 쇠락했다. 결국 1989년 정부 정책에 따라 강원도의 탄광이 대부분 폐광됐다. 광부들은 마을을 떠났다. 정부가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고한읍에 내국인 카지노 운영 공기업인 강원랜드를 설립했다. 하이원리조트도 건설했다. 경제 부활을 꿈꿨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고한읍에 빈집이 점점 늘었다. 여러 마을 중에서도 고한18리가 가장 열악했다.
주민이 주도하는 도시재생사업
고한시장에서 광고기획사 하늘기획을 운영하던 김진용 씨는 낙후된 고향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2017년 10월 ‘마을 만들기’를 기획하고, 고한18리 골목의 빈집을 고쳐 사무실을 옮겼다. 얼마 뒤 맞은편 폐가에 공유 오피스 공간인 이음플랫폼이 입주했다. 두 빈집이 번듯하게 바뀌자 주민들도 희망을 품었다.
유영자 신임 이장과 김진용 씨가 주축이 되어 ‘마을 만들기 위원회’를 발족했다. 주민들을 설득하고, 함께 모이는 자리를 자주 만들어 공감대를 쌓아갔다. 주민들은 스스로 골목을 가꾸기 시작했다. 담장을 헐고, 골목 안 쓰레기와 폐전선을 치우고, 화단을 가꾸어 집 앞을 단장했다.
나아가 국토교통부와 강원도에서 시행하는 각종 폐·공간 재생사업에 참여해 관의 인적·경제적 지원을 받아냈다. 칙칙한 건물 외벽을 산뜻한 색으로 칠했다. 집주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원색을 좋아하는 할머니 집에는 원색을 칠하고, 1층만 칠하길 원하는 집에는 그렇게 해주었다. 지역 예술가는 담벼락에 소녀, 고양이, 꽃 등 동화 같은 그림을 그렸다. 부녀회에서는 리스, 편지꽂이, 화분대, 벽걸이 등 아기자기한 공예품을 만들어 골목을 장식했다.
마을호텔 18번가 탄생 스토리
골목은 예전보다 밝아졌지만, 지속가능한 경제적 기반이 필요했다. 전문가들과 많이 고민한 끝에 ‘마을호텔’이라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도출해냈다. 호텔은 한 빌딩 안에 객실, 레스토랑, 카페, 리셉션, 라운지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데, 마을 호텔은 골목 상점이 그것을 대체한다는 발상이다. 골목 안에 음식점, 카페, 사진관, 세탁소, 숙박업소 등 다양한 업종이 있는 고한18리의 장점을 살릴 방법이었다.
올해 4월 주민과 골목 상점 11곳이 합심해 ‘고한 18번가 협동조합’을 구성했다. 조합명은 가장 잘하고 좋아한다는 뜻을 지닌 ‘18’과 거리를 뜻하는 ‘번가’를 합쳐 만들었다. 고한 18번가 협동조합은 한우식당을 개조해 5월에 숙박시설 ‘마을호텔 18번가’를 개장했다. 마을호텔 18번가 골목은 호텔 로비, 골목 입구 마을회관은 호텔 세미나룸, 카페 수작은 호텔 라운지, 국일반점·구공탄구이·누리한우촌은 호텔 레스토랑 역할을 한다. 상점 주인은 모두 호텔리어인 셈이다.
고한 18번가 협동조합 총무 김진용 씨는 “18번가는 주민들이 주도한 사업”임을 강조했다.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건물을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기존 골목 상점을 활용해 하나의 호텔처럼 운영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만하다.
마을 이장님이 호텔 지배인
숙박시설 ‘마을호텔 18번가’의 관리자는 유영자 이장이다. 명함에 ‘지배인 유영자’라 씌어 있다. 유 이장은 협동조합 일로 바쁜 중에도 호텔 설립 과정과 소개를 열심히 한다. “호텔 안을 장식한 조화 작품들은 주민들이 공예 작가에게 배워서 만든 LED 야생화예요. 함백산에서 매년 야생화 축제를 해요. 그 행사와 연계해 야생화를 테마로 잡았죠. 이 호텔이 제법 알려져 주말에는 빈 객실이 없어요. 이익은 주민들이 함께 나눠요.
”
마을호텔 18번가는 호텔과 게스트하우스를 절충해놓은 분위기다. 한실과 양실 더블룸(2인실) 각각 1개, 트윈룸(3인실) 1개로 구성돼 있다. 시리얼과 토스트를 조식으로 제공한다. 숙박료는 9만~15만 원이다. 숙박 손님에게는 식당, 카페, 사진관 등의 협력업체 10% 할인 쿠폰을 준다. 삼탄아트마인은 무려 50%를 할인해준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LED 야생화 만들기와 다육아트 등 고한읍의 특색을 살린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바로 옆 카페 수작에 들렀다. 골목은 한산한데 손님이 많다. 주인장이 개발했다는 흑임자라떼를 기다리는 동안 부녀회에서 만든 소소한 공예품을 구경한다. 흑임자와 커피의 조화는 그럴싸하다. 커피 향보다 흑임자의 고소한 맛이 강한 편이다. 차를 마신 뒤 본격적으로 골목 산책에 나섰다.
사계절 꽃 피는 고한 18번가
우선 마을호텔 18번가 앞 꽃마차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골목을 깨알처럼 장식해놓은 벽화, 조형물, 화분을 감상한다. 골목에서 꽃이 가장 많은 곳은 권 씨 할머니 집이다. 담벼락에 꽃이 가득하다.
“몸이 안 좋아서 얼마 전에 장사를 그만뒀어요. 이렇게 꽃을 가꾸니까 시간도 잘 가고, 사람들이 예쁘다고 칭찬해주니까 보람도 있어요. 매일 한두 시간씩 꽃을 돌보는 시간이 아주 소중해요”
소녀 같은 권 씨 할머니다.
겨울이 오면 골목에서 꽃들이 사라진다. 골목이 썰렁해질까봐, 주민들은 한 잎 한 잎 공들여 만든 LED 야생화 화분을 화단에 설치한다. 낮에도 환히 빛나는 야생화 덕분에 이 마을을 지날 때 춥지 않을 것 같다.
18번가 골목을 빠져나오면 고한시장이 코앞이다. 시장 입구와 천장을 갱도처럼 꾸며놨다. 출입구에는 ‘갱도1’, ‘갱도2’라고 써놓았다. 시장 안 기둥에는 석탄을 캐는 광부의 모습을 마네킹으로 재현해놨다.
매월 끝자리 1일과 6일에는 오일장이 서 먹거리 장터가 열린다. 시장 내 ‘피고지고 다시 피고’ 카페에서 장미, 마리골드 꽃물과 꽃가루로 만든 꽃빵(머핀)과 오징어 먹물로 만든 숯빵(파운드케이크)을 판다. 3개 세트가 5000원이다. 지역색을 살린 먹거리라 호감이 간다. 촉촉하고 달달해 커피에 곁들이기 딱 좋다.
주변 명소&맛집
삼탄아트마인 2001년 폐광할 때까지 38년 동안 고한 지역 경제를 떠받쳐왔던 정암광업소를 도시재생한 문화예술 창작공간이다. 폐광 터에 150개국에서 수집한 10만여 점이 넘는 예술품을 접목해 독창적인 전시공간이 되었다. 안내데스크 옆에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카페가 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2016) 촬영 장소 및 배우 송중기가 묵었던 객실을 볼 수 있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45-44, 09:30~17:30 월·화요일 휴관, 033-591-3001 어른 1만3000원
정암사 월정사 말사이며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전해온다.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므로 적멸보궁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적멸보궁 앞 계곡은 천연기념물 제73호인 정암사의 열목어 서식지다. 적멸보궁 뒤쪽 언덕에 있는 수마노탑은 최근 국보 제332호로 지정되었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 1410, 033-591-2469
예촌돌솥밥 고한 주민이 강력 추천한 돌솥밥 전문점이다. 식당 내부가 깔끔해 첫인상이 좋다. 주 메뉴는 영양돌솥밥과 곤드레돌솥밥이다. 정선 곤드레가 듬뿍 올라간 돌솥밥에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를 포함한 스무 가지 반찬이 딸려 나온다. 모두 맛깔나다. 제철 식자재를 사용하므로 반찬 종류는 수시로 바뀐다. 고한시장 갱도1 출입구 맞은편에 있다. 강원 정선군 고한읍 고한6길 8, 10:00~21:00, 033-592-4610, 곤드레돌솥밥 1만2000원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고 있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이곳 동네 책방 한쪽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속 묻어뒀던 작은 행복 하나가 ‘똑똑’ 심장을 두드리며 응답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행복한 삶’이 좋다. 오늘 당장 떠날 것, 가까운 동네 책방으로!!”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에 가입된 독립서점들을 살피다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이름이 있다. 마치 “저를 찾아와주세요…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드는 것처럼 시선을 붙잡아 맨 곳. 바로 ‘날일달월’이다.
일단 인터넷에서 ‘날일달월’ 웹사이트와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찾아봤다. 색다르다. 비건식당? 아니, 책방에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음식을 판다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 속에는 컬러풀한 채소들로 가지런히 상차림한 사진이 올라와 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이번 호에 소개할 동네 책방으로 선택했다.
‘날일달월’은 2호선 강변역 근처에 위치해 있다. 강변역에는 동서울터미널이 있어 늘 사람이 북적이고 어수선한 곳이다. 이런 번잡스런 곳에 독립서점이라니? 의아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동네 책방이 산골에도 생기고 우리 동네 구석탱이에도 있는데 터미널이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건물 3층에 위치한 ‘날일달월’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열심히 채소를 씻던 분이 반겨준다. 먼저 점심 메뉴로 미역콩국수진지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라 불리는 이효재 씨와 언뜻 인상이 비슷하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광목 앞치마를 둘렀다. 한눈에 봐도 대표인 듯 보였다.
창가를 제외한 벽면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찬찬히 살펴보니 출판사별로 칸이 나뉘어 있다. 서가를 살펴보다 음식 준비에 바쁜 주방으로 다가가 물었다. “혹시 이곳 대표님이신가요?” 그러자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제가 이메일로 인터뷰 요청을 드렸는데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궁금해서 와봤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희숙 대표와 날일달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생채식 식당과 작은 책방의 조합
‘날일달월’은 2018년에 문을 열었다. 비영리법인인 한국도서관친구들 대표를 맡고 있는 여희숙 씨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생채식 식당이자 작은 책방이다. 여 대표는 교사 생활과 독서시민운동 등을 하며 평생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저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2017년경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독립을 하고 은퇴한 남편과 덩그러니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큰 공간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즈음 건강이 안 좋아진 남편 덕(?)에 먹거리도 완전히 바꾸게 됐다. 이래저래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할 때 거추장스럽기만 한 대형 아파트를 호기롭게(?) 팔고 두 부부가 살기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로 옮겼다. 그리고 집 앞의 빌딩 3층을 임차해 책방 공사를 시작했다.
나만의 공간인 동네 책방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나니 전국 각지의 ‘도서관친구들’ 회원 성원이 하늘을 뚫을 듯했다. 이왕이면 전국 곳곳에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 네트워크를 활용해, 친환경 농산물이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식재료를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많았다. 사실 전국에서 도서관 서포터즈를 하는 이들의 경우 귀농을 해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거나 여러 가지 먹거리 관련 일을 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공유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여희숙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가장 필요한 생채식 먹거리’가 조합된 ‘날일달월’이 탄생했다. 책방에 식당?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날일달월에 들어서면 오묘한 조합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흔히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확’ 풍기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놀라게 된다. 여 대표는 생채식 먹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채식이라 지지고 볶을 일이 없어요.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아서 책을 읽거나 고를 때 거슬리는 게 전혀 없습니다. 채식동호회나 환우회 카페 등을 통해 알고 방문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오히려 이분들은 ‘채식 전문식당인 줄 알고 왔는데 책방이네?’ 하며 놀라고 가요.”
낭독모임, 희곡 대본 읽기 등 프로그램 다양
여희숙 대표는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꾸리고 진행해왔던 터라 작은 책방을 열고 나서도 꾸준히 모임을 이끌고 있다. 현재 4팀의 독서모임을 이곳에서 하고 있는데 성격도 다채롭다. 주로 시니어들이 함께하는 월요일의 독서모임은 낭독모임이다. 얼마 전 1년간 이어진 ‘열하일기’ 낭독이 끝나고 현재는 ‘돈키호테’를 낭독 중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새롭게 등장한 모임도 있다. ‘연극배우와 함께 희곡 대본 읽기’다. 연극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힘들어진 연기자들을 조금이나마 지원하고 싶어 ‘좋은 희곡 읽기 모임’ 대표인 장용철 연기자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희곡 대본을 함께 읽으며 연기의 맛을 조금 맛봤다. 이후 6주 코스로 ‘햄릿’을 낭독했고 현재는 ‘오이디푸스’를 함께 읽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도 2팀이나 있다. 22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한 여희숙 대표는 어린 시절의 독서 지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사들과의 모임은 아무리 피곤하고 힘이 들어도 이끌어나가고 있다. “어느 날은 오전 오후 꽉 찬 독서모임을 하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때가 많지만 마음만은 너무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이밖에 ‘그림책 따라 그리기 100일 프로젝트’도 있다. 그림책 한 권을 정해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모임이다. 최근에는 안승준, 홍나리 작가의 ‘어느 날 우리는’을 따라 그렸다. 이 책에는 고양이와 사자, 돌고래 등의 동물들이 등장하며 그림책 속 QR코드를 스캔하면 노래와 함께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까지 감상할 수 있다. 젊은 친구들의 호응이 특히 높다.
또 백승우 감독이 진행하는 금요시네마는 2018년 8월부터 꾸준하게 진행해왔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둘째 주 금요일 백 감독이 큐레이션한 작품을 함께 보며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날일달월의 빼놓을 수 없는 대표 프로그램이다.
한편 8월부터 11월까지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금요일, 달이 뜨면 심야책방으로!’ 이벤트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사단법인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함께하는 ‘심야책방 2020’은 서울 지역에서 ‘날일달월’을 포함, 15곳의 동네 책방이 참여한다.
‘날마다 달마다 좋은 책과 음식을 먹으면 밝아진다’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는 ‘날일달월’. 이곳에서 금요일 둥근 달이 뜨면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조용히 책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심야먹방 아닌 심야책방을 꿈꾸며.
Mini Interview ‘날일달월’ 여희숙 대표
여희숙 대표는 출판계와 교육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진주교대를 졸업하고 마산과 하동, 광양, 포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22년을 근무했다. 교사 시절 교실마다 작은 학급 도서관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날 만큼 아이들에게 책 읽기의 생활화를 몸에 익히게 했다.
교사 일을 천직으로 알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왔던 여 대표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포스코를 다니던 남편이 서울로 발령이 나면서였다. 천직을 포기할 수 없어 주말 부부로 살기를 3년. 결국엔 사직서를 쓰고 남편과 합류하면서 서울 광진구에 정착했다. 낯선 서울 생활은 오로지 동네 도서관에서 책 읽는 즐거움으로 버텨냈다.
독서시민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 역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여희숙 씨를 사서가 눈여겨보고 도움을 요청하면서였다고. 이후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서관친구들’ 활동을 시작해 현재 전국 회원 1만2000명에 달하는 비영리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도서관친구들’은 보령, 정읍, 남원, 광주, 진주, 울산, 창녕 우포, 부산, 제주, 부천 등 전국 16개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4년부터 활동했으니 16년의 세월이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독서시민운동가로 활동한 여 대표는 KBS, EBS, 교통방송 등을 통해 아이들의 독서와 토론 지도를 위한 학부모 강좌를 진행하거나 패널로 출연, 독서 토론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펴낸 책으로는 2001년 ‘1년을 쓰고 50년을 간직할 독서노트’를 시작으로 ‘책 읽는 교실’, ‘토론하는 교실’, ‘도서관 친구들 이야기’, ‘아이는 도서관에서 자란다’ 등이 있다.
‘날일달월’ 서울 광진구 구의강변로 57 서림빌딩 3층
코로나19가 가져온 뉴노멀 시대를 맞아 외출이나 여행 방법도 확연히 달라졌다. 자신을 지키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여행으로 가장 쉬운 것은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것, 집콕에서 벗어나 자동차 차창 밖 풍경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는 드라이브 스루 여행지가 멀리 있지 않다. 자동차로 가는 섬으로 떠나보자.
수도권에서 당일치기 섬 여행으로는 이야기를 품은 서해의 대부도 권역이 있다. 시화방조제와 연륙교가 건설된 덕분에 배를 타지 않고도 대부도, 선재도, 영흥도 세 개의 섬을 마치 육지인 양 이어서 오갈 수 있는 편리함이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더구나 자동차로 다니기 때문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핸들을 돌려 귀하고 아름다운 장소를 예기치 않게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한다.
서울을 벗어나 시화방조제 위에 세워진 시화나래휴게소에서 잠깐 쉬면서 바라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바로 근처엔 붐비던 대부 여객터미널과 싱싱한 자연산 생선회를 먹을 수 있는 방아머리 수산물 직판장이 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한산하다. 그 옆의 텅 빈 방아머리 해수욕장도 역시 조용하고 푸르기만 하다. 달라진 세상을 여기서도 확인한다.
섬마을의 평온, 선재도 목섬
대부도와 영흥도를 잇는 징검다리 섬 선재도는 주변 섬과는 달리 작고 한적한 섬이었다. 선재대교를 건너자마자 내려다보면 홀로 떠 있는 동그란 섬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33개 중 하나인 목섬.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빠지면 곡선의 모래 갯벌이 나타난다. 그 길을 향해 걷는 이들에겐 멋진 추억의 길이 되고 목섬은 여전히 푸른 하늘과 갯벌과 해송이 함께한다.
선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선재도. 담벼락마다 동화처럼 아이들이 뛰놀고 봄날 꽃그늘 아래서 설레던 마음들이 피어나듯 고즈넉한 섬마을의 벽화가 정답다. 고양이가 조을고 있는 골목 옆으로 선재리 커피집의 잠자리 날개 같은 커튼이 저 혼자 바람에 날리고 있다. 모든 게 멈춘 듯 적막하다. 한때 인기 있던 마을의 갯벌체험이 잠잠하다. 입장료만 내면 호미와 장화를 빌려주고 1인당 1.5kg까지 바지락·동죽을 캘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정적만 가득하다.
이국적인 감성 카페
그나마 사람들의 발걸음이 있던 곳, 사진작가 김연용 씨가 운영하는 카페 선재도의 명물이었던 뻘 다방, 한때 줄을 서서 차를 주문했던 감성 카페의 앞마당은 해변과 갯벌이다. 갖가지 문화행사를 했던 이곳에 몇 명의 여행자만 오간다. 바다를 향한 풍경이 이국의 정취를 연상케 하고 곳곳이 사진 스폿이었는데 이젠 야외의 빈 의자에 뙤약볕만 내리고 있다. 나오며 돌아본 간판의 큰 글씨가 마음에 들어온다. "Hakuna Matata(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
숨어들 듯 고요한 측도
뻘 다방 옆으로는 측도로 들어서는 좁은 길이 보인다. 밀물 때는 선재도와 분리되고 썰물 때는 잠수 도로를 이용해 도보나 차량 통행이 가능한 아주 작은 섬이다. 물속에 세워졌던 기둥이 바닥까지 드러나고 그 바닷길을 건너 측도에 드니 세상과 아주 뚝 떨어진 느낌이다. 인적 없는 조용한 섬마을 뒤편 산 아래에 서서 바다 건너편 마을을 딴 세상을 보듯 본다. 세상모르게 숨어들어 한적하게 쉬고 싶을 때 딱 좋을 듯하다.
물속 길 따라 박혀 있는 전신주 / 그 기둥에 새겨 넣었던 돌의 말 / 하루에 두 번 물이 길을 낳을 때마다 / 상처를 열어 말리며 / 달을 향해 푸르게 웃었을까 / 밖으로 드러난 불안을 어루만지며 / 흔적을 수장할 물때를 기록 중일까 /
-박선희 시인의 '측도 가는 길' 중에서
배 타지 않고 다시 섬, 영흥도
그곳에 가면 100년이 넘은 꼬불꼬불한 소사나무 숲이 울창하고, 밀물과 썰물의 잔잔한 파도소리를 들려주는 십리포 해수욕장이 기다린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 당시의 거점이므로 해군 영흥도 전적비가 있다. 포구에 정박해 있는 서해교전의 퇴역함인 참수리호를 보며 역사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섬의 거대한 분재전시장 같은 소사나무 군락지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두 구불구불 비틀어지고 뒤틀린 기이한 형상이다. 이런 독특한 생김새를 담기 위해 사진가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몇 년 전에 찾았을 때는 자연스러운 방풍림으로 그 자리를 지켰는데 이번에 가보니 산림유전자원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주변에 울타리가 생겼다. 지금은 소사나무 숲 주변 벤치에 드문드문 떨어져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의 멋진 배경으로 든든하다. 염분이 많고 모래와 자갈의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 100년이 훌쩍 넘는 소사나무가 아름다운 숲이 되어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이 지역의 관광자원이 되어주고 있다.
소사나무 저편으로 펼쳐진 십리포 해변에 더러 사람들이 보인다. 영흥도 선착장에서 10리쯤의 거리에 위치했다고 해서 십리포다. 마치 철 지난 바다처럼 한적하다. 덱의 파라솔 위로 햇살이 쏟아지고 아무 말 없이 무수한 이야기를 품은 그 바다를 마음에 담는다.
시간의 흔적 켜켜이 쌓인 대부광산 퇴적암층
섬을 달리다 보면 바다만 보이는 게 아니다. 세월을 품은 이색적인 숨은 명소를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호수와 퇴적암층이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는 대부광산 퇴적암층을 찾아갈 생각에 핸들을 돌렸다.
입구의 풀숲을 조금 지나면서 범상치 않은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왠지 가슴이 뛴다. 70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퇴적암층은, 짙은 녹색의 수면을 뚫고 공룡이라도 튀어오를 듯 원시적인 풍경이 압도한다. 옛날엔 광산이 있던 자리였는데 1997년 초식 공룡의 발자국과 중생대 식물화석이 발견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다. 서울 근교에서 중생대의 환경과 공룡의 생생한 흔적을 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뒤편의 전망대에 오르니 호수와 퇴적층을 조망하기 좋다. 넓게 탁 트인 잔디밭으로 시원하게 기분 좋은 바람이 분다. 옆길을 돌아 호수 뒤편의 전망대에서는 탄도항과 제부도가 보이고 요트가 떠 있는 전곡항도 볼 수 있다. 세월의 한 지점에 서서 바라보는 기억 속의 하루가 또 한 겹 쌓인다. 공룡은 사라졌지만 켜켜이 쌓인 오랜 시간의 흔적으로 가슴 두근거리는 시간. 이렇게 살아가는 시간도 여기에 또 한 켜 쌓일 테고 우리네 삶은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퇴적암층 주차장 옆으로는 제법 큰 규모의 대부도 365 시티 캠핑장이 있다).
바닷길 달려 섬 너머 제부도
예전 같으면 배를 타고 건넜을 섬 대부도와 선재도를 거쳐 영흥도까지 자동차로 휘익 달리니 시간이 여유롭다. 몇 번쯤 차에서 내려서 잠깐씩 둘러보았던 것 말고는 대부분 자동차로 달렸다. 길가에 바지락 칼국수 가게가 즐비했지만 떠나기 전에 샌드위치와 간식을 준비했다. 자동차 문을 활짝 열어놓고 서해의 바람을 맞으며 소풍처럼 점심을 즐기고 커피 한 잔의 맛을 누렸다.
시간이 제법 남는다. 남아 있는 늦은 오후의 시간에 제부도로 가볼까 즉흥적으로 방향을 바꿔 그 바닷길을 달렸다.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바닷물 갈라짐 현상은 제부도의 매력이다. 2.3㎞의 열린 바닷길 양옆으로 펼쳐진 갯벌 위로 하늘이 끝없이 푸르다.
늦더위를 피해 바다를 찾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거리를 두고 제부도의 바닷바람 속에 있다. 홀로 텐트 그늘에 앉아 바다를 향해 앉아 사색하는 모습이 그림 같다. 섬 남단의 매바위 부근에서 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모래 해변에 멀찍이 거리 두고 텐트가 몇 개 자리 잡고 있다. 물 빠진 너른 갯벌 위에선 진흙투성이의 아이들이 즐겁다. 북적이지 않아도 제법 계절이 느껴진다. 해안 따라 즐비한 그늘 의자가 비어있고 사람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연이 만들어낸 섬은 이럴 때 우리에게 위안이 되어준다.
수도권에서 가까워 이따금 찾아가는 곳이지만 이젠 발길이 닿는 곳들마다 예사롭지 않다. 낯선 듯 감사한 시간이 때때로 필요하다. 눈길 머무는 곳마다 풀숲, 모래밭, 산, 나무, 하늘, 바다, 갯벌, 햇살, 구름, 바람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신의 축복 탄도항 노을
느지막이 돌아가는 길이라면 탄도항의 일몰을 경험해볼 만하다. 일몰시간은 대략 저녁 7시 전후 즈음이다. 하루 두 번 물 빠짐 현상으로 바닷길이 열리면 건너편 누에섬까지 다녀올 수도 있다. 탄도항 제방둑에 미리 자리 잡고 앉으니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바다의 하루가 저물고 노을 속 사람들의 실루엣도 풍경이다. 신의 축복처럼 번져가는 노을만으로도 충분한 하루다.
추천 코스
시화방조제→대부도 방아머리 해수욕장, 방아머리항 선착장→선재도 벽화마을→목섬, 뻘 다방→측도→영흥도 십리포 해수욕장. 소사나무 군락→대부도 대부광산 퇴적암층→제부도 해안→탄도항 노을→서울
● Exhibition
◇퓰리처상 사진전
일정 10월 18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언론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퓰리처상 사진전이 6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1942년부터 2020년 퓰리처상 수상작까지 총 134점의 수상작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사진 부문에서 수상한 로이터통신 김경훈 기자의 작품도 공개된다. 제3전시실에서는 2014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취재 도중 사망한 여성 종군기자 안야 니드링하우스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진행한다. 수상작과 더불어 다큐멘터리 필름과 퓰리처상 주요 수상작을 미디어 아트로 구성한 영상 콘텐츠도 제공한다.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0
일정 9월 30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지난해 진행한 ‘프로젝트 해시태그’ 공모사업의 결과 보고전이다. 전시에 참여한 ‘강남버그’와 ‘SQC’는 디자이너, 건축가, 연구자로 구성된 팀으로 서로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창작자들 간 협업을 지원하는 사업 취지에 따라 선발됐다. 이번 전시에서 강남버그는 ‘천하제일 뎃생대회’, ‘강남버스’ 등 강남의 과거와 현재를 표현한 작품으로 한국 사회의 쟁점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SQC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서 밀려난 종로3가 소수자를 ‘도시퀴어’라 명명하며 이들의 문제에 주목한다.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2017-2019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신규 지정된 국보·보물을 공개한다. 국보 제151-1호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을 비롯해 총 83건 196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를 지키다’, ‘예술을 펼치다’, ‘염원을 담다’ 등 총 3부로 구성돼 각각 기록유산과 예술품, 불교 문화재를 소개한다. 전시실 입구에서 보여주는 국보와 보물에 대한 전문가와 시민들의 인터뷰와 영상은 문화유산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전시장을 찾지 못하는 관람객을 위해서 박물관 누리집을 통해 온라인 전시도 진행한다.
◇명상 Mindfulness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피크닉
‘코로나블루’를 겪는 현대인들을 위한 맞춤형 전시. 명상이 주는 힘과 의미를 회화, 영상, 공간디자인 등 총 8점의 설치미술 작품으로 설명한다.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 대만 작가 차웨이 차이, 미디어 아티스트 미야지마 타츠오 등 실제로 수행을 실천하는 각 분야 예술인들이 전시에 참여한다. 동양적이고 자연적인 느낌을 주는 나선형 구조의 설치작품 ‘느리게 걷기’, 공간 전체를 주황빛으로 연출한 작품 ‘공간’ 등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들을 곳곳에 배치해 관람객들이 작품보다는 내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 Stage
◇캣츠
일정 9월 9일~11월 8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트레버 넌 출연 조아나 암필, 앨리스 배트, 헤이든 바움 등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로 T.S. 엘리엇의 우화집이 원작이다. ‘젤리클 축제’에 모인 고양이들의 다양한 사연을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초연 40주년을 기념해 세계적인 디바 ‘조아나 암필’, 한국인이 사랑하는 월드스타 ‘브래드 리틀’ 등 최고의 기량을 갖춘 배우들이 함께한다. 2017년 한국 뮤지컬 사상 최초 200만 관객을 돌파한 이후 진행되는 첫 공연이다.
◇킹키부츠
일정 11월 1일까지 장소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연출 조광화 출연 이석훈, 박은태, 김지우 등
팝 가수 신디 로퍼가 작사·작곡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폐업 위기에 처한 구두공장을 살리기 위해 여장 남자용 부츠 판매에 뛰어든 두 남자의 도전기를 담았다. 1980년대 영국 W.J. 브룩스 공장의 실제 성공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마리퀴리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김태형 출연 김소향, 옥주현, 김히어라 등
과학자 ‘마리퀴리’의 삶을 각색한 팩션 뮤지컬로 리튬 발견이라는 업적 뒤에 가려진 인간 마리퀴리의 고뇌를 밀도 있게 그렸다. 초연 당시 5인조였던 라이브 밴드를 7인조로 보강해 무대의 완성도를 높였다.
● Movie
◇오! 문희
개봉 9월 2일 장르 코미디, 드라마 감독 정세교 출연 나문희, 이희준, 최원영, 박지영 등
평화로운 농촌마을, 뺑소니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 ‘문희’와 그의 아들 ‘두원’이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서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관록이 빛나는 나문희와 리얼리티 연기의 대가 이희준의 호흡이 작품에 재미를 더한다. 특히 59년 연기 인생 최초로 액션에 도전한 나문희는 나무에 오르고 트랙터로 논두렁을 달리는 등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을 선보여 기대를 모은다. 정세교 감독이 나문희를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쓴 만큼 ‘문희’가 나문희의 ‘인생 캐릭터’로 새롭게 등극할지 주목된다.
◇카일라스 가는 길
개봉 9월 3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정형민 출연 이춘숙
80대 최고령 오지탐험가 이춘숙 씨의 ‘카일라스’ 순례 여정기를 담은 로드무비다. 자연을 거닐며 인생을 돌아보고 다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이 씨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개봉 9월 예정 장르 액션 감독 매튜 본 출연 랄프 파인즈, 해리스 딕킨슨 등
킹스맨 시리즈의 프리퀄 영화로 베일에 싸여 있던 킹스맨의 기원을 밝힌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전쟁을 모의하는 폭군과 범죄자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 Book
◇나는 당신이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주홍 저·비타북스)
대한민국 치매 주치의 박주홍 박사가 치매 예방에 좋은 생활 루틴을 제안한다. 컴퓨터를 배우며 치매를 늦춘 할머니, 꾸준한 산책으로 기억력이 개선된 환자 등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뇌 활성화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8개 지압법과 31가지 부위별 뇌 강화 운동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소설여행 (김유정 저·나무나무)
‘냉정과 열정 사이’의 피렌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발리 등 소설 속 도시를 향해 떠난 작가의 에세이. 17곳의 여행지 소개와 더불어 소설의 의미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코로나가 시장을 바꾼다 (이준영 저·21세기북스)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공저자인 이준영 교수가 코로나19 이후 변화한 소비 트렌드를 7개 키워드로 정리했다. ‘홈코노미’, ‘로컬리즘’ 등 포스트코로나 시대 소비 지형을 조망한다.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빅터 프랭클 저·청아출판사)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1946년 오스트리아의 한 시민대학에서 했던 강연을 책으로 옮겼다. 고난 속에서도 삶에 대한 긍정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책 산업에 종사했던 전문가들이 은퇴를 앞두고 인생 2막을 설계하며 자연스럽게 “책방이나 내볼까?” 했던 말들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말이 씨앗이 되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린 우리 동네 책방들을 찾아 소개한다.
조은희.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해왔다. 출판사에서만 일해온 지 올해로 37년째. 그림책 독자는 오직 유아뿐이던 시절부터 그림책 전문 출판사에서 책을 펴냈다.
2000년대 초반이 되자 국내 그림책 시장은 크게 도약했다. 특히 어른을 위한 그림책 시장까지 성장하면서 그녀는 우리나라 대표 그림책 전문 출판사인 한솔수북 대표가 됐다.
그렇게 출판인으로서 전문성과 경력을 인정받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출판인의 삶을 살아오던 어느 날이었다. 말을 타고 전장에서 싸움을 지휘하는 장군처럼 쉴 틈 없이 달리며 바쁘게 지냈던 그녀는 불현듯 이 매력덩어리 책들과 씨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현타’(현실자각 타임)가 몰아치는 걸 느꼈다.
‘은퇴하면 직업인으로서는 더 이상 책을 접하지 못하는 건가?’ 조은희 씨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출판인으로서의 경력 최대 임계점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고민의 산물이 바로 조은이책이다. 은퇴를 하더라도 여전히 책과 함께하고 싶었던 그녀는 책방 주인이 되기로 했다. 그리고 2017년 2년의 준비 끝에 마포구 성산동 다가구 주택 1층에 책방을 열었다.
마을 골목 입구 1층에 있는 책방을 찾아가봤다. 실내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전면 유리창이 먼저 눈에 띄었다.
개방감을 강조한 공간에는 알록달록한 그림책들과 캐릭터 인형들이 전시돼 있었다. 서점이 아니라 마치 예쁜 문구점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책이 대형 쇼핑몰의 장식품이 되고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기 위한 핫 플레이스 장소가 되고 있지만 그림책은 아이들에게 꿈을 길러주고 미적 감각을 키워주는 훌륭한 촉매제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습니다. 1~2년 후 출판사 일을 그만둘 생각이에요. 은퇴 후 책방 운영에 전념하며 인생 2막을 펼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공간은 전시 코너
조은이책은 크게 2개의 섹션으로 구성돼 있다. 다른 서점과 차별화되는 조은이책만의 섹션은 바로 그림책과 캐릭터 전시 공간이다. 작가와의 대화, 출간기념 사인회도 이 공간에서 열린다. 그림책 보러 왔다가 캐릭터 전시 공간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 이 캐릭터들은 조은희 씨가 20년간 모은 그림책 주인공들이다.
페이지를 넘기면 웅장한 캐슬이 되기도, 광활한 마을이 되기도 하는 다양한 입체 책들은 유럽이나 일본 등지에서는 아동 교육용으로 많이 제작되고 있다. 제작기술이 얼마나 정교한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인 장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책과 캐릭터가 전시된 공간은 그림책 전문 편집을 수십 년 넘게 해온 책방지기의 철학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조은희 대표가 일본, 유럽, 미국 등 유명 그림책 북 페어에 갈 때마다 하나둘씩 구입해 모아온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개인 컬렉션 공간은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아가들’의 방인 셈이다.
“20년 넘게 모아온 캐릭터와 입체 책은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것들입니다. 집에서 저 혼자 감상하기에는 너무 아깝더라고요. 더 많은 사람이 함께 즐기고 감동을 받으면 기쁨이 두 배, 세 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컬렉션 전시 공간 겸 그림책 코너를 가장 넓게 배치했습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 서점이 아닌 동네 책방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이곳만큼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이 있을까? 운영자의 취향과 감성이 듬뿍 담긴 사랑스런 공간이다.
뻔한 책 소개는 싫다
그때그때의 이슈에 따라 꾸려지는 기획도 색다르다. 신예 작가들의 신간을 묶어 소개하는 코너 ‘우리 시대의 빛 젊은 작가들’과 코로나19로 여행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독서 여행을 권하는 코너 ‘책방보다 더 재미있는 여행지는 없다’는 최근 기획했다. 조은희 씨는 책방지기의 안목과 아이디어에 따라 고객들의 눈길이 머무르는 시간이 다르다는 노하우를 슬쩍 귀띔해준다.
바깥쪽으로는 에세이와 문학서, 책방지기가 추천하는 책들이 전시돼 있다. 이들 코너 외에도 ‘두근두근 국내 소설’, ‘고양이, 그 매력의 끝은 없다’ 등의 카피 아래 국내 소설과 고양이와 관련한 단행본 및 그림책을 소개해 냥이 집사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동화 속 주인공이 나무 덩굴을 타고 지하세계로 떨어지면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 온갖 모험을 하게 되는 것처럼 조은이책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예기치 못한 환상의 세계에 빠져 잠시 정신줄을 놓게 된다.
동네 책방 감성 살린 기획
출판사 일을 오래 해온 대표가 운영하는 책방이라서 그런지 작가와의 인연을 활용한 다양한 이벤트가 풍성한 것도 매력이다. 작가와의 대화는 물론 출간기념 북토크와 사인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있다. 전국 동네서점연합과 독립영화 창작자들을 잇는 독립영화 상영회도 개최한다.
얼마 전 상영한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지난해 작고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작품이다. 동네서점연합과 함께한 이 이벤트는 고객들이 영화도 보고 대화도 나누면서 색다른 경험을 공유하도록 해 큰 호응을 얻었다.
조은희 대표가 꾸준히 운영하고 있는 글쓰기 클래스는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가졌던 마음가짐을 잘 녹여낸 프로그램이다. 그녀가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있는 이유를 들어봤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오랫동안 책을 만들어온 사람으로서 작은 공동체를 통해 공유와 나눔을 실천하고 싶었어요. 클래스 참가자들이 글쓰기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받았다는 얘기를 하면 정말 기쁘더라고요.”
코로나19에 지쳐 있거나 해외여행을 떠나지 못할 때 위로와 휴식을 위한 ‘힐링 영화 보기’. 저마다 소중히 품고 있는 해외 핫 플레이스를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 과거의 기분을 되살리고 감동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을 준비해봤다.
유튜브 검색창에 ‘도시이름+ASMR’을 입력한다. ‘런던도서관 ASMR’, ‘로마의 아침 풍경 ASMR’, ‘뉴욕의 밤거리 ASMR’, ‘치앙마이 빗소리 ASMR’, ‘도쿄 카페 ASMR’….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시대에 나의 여행은 대개 이런 식이다. 인적 드문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떠나고 싶은 여행지의 소음을 들으며 잠시 숨을 고르는 것.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백색소음 삼아 커피를 마실 때, 외국에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종류의 여행자다. 누군가에겐 일상일지도 모를 낯선 풍경 속에서의 기분 좋은 위화감이야말로, 여행지에서만 새길 수 있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유난히 더울 거라는 올여름 더위 전망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마스크를 끼고 보내야 할 한 철이 두려워진다. 손님이 거의 없는 동네 카페 구석에 이어폰을 꽂고 앉아 ‘파리 카페 ASMR’을 재생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던 카페 드 플로르(Cafe´ de Flore)의 테라스에 어색하게 앉아 있던 여름날을 떠올린다.
카페 드 플로르는 헤밍웨이를 비롯해 당대의 많은 철학자와 시인, 예술가가 주로 찾았던 문학카페다. 생 제르맹 거리에는 유독 유명한 카페가 많은데, 카페 드 플로르 건너편 카페 레 되 마고(Cafe´ Les Deux Magots)도 그중 하나다. 계약결혼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두 철학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도 이 거리의 카페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하루 8시간을 꼬박 글만 썼다. 레 되 마고에서 집필한 소설이 ‘구토’, 카페 드 플로르에서 탄생한 철학서가 ‘존재와 무’라 하니, 두 카페가 문학과 철학을 사랑하는 여행자들의 성지가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낮의 생 제르맹 거리는 활기로 가득했다. 파리 시민들에게는 일상을 넘어 삶 그 자체인 공간에 내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심지어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가 와인을 마시며 작품에 대해 토론하던 카페라니,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의 주인공 길 팬더처럼 1920년대 파리로 시간여행이라도 떠나온 것 같다.
“정말 끝내준다! 이런 도시는 어디에도 없어.
비 올 땐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1920년대 파리를 상상해봐.
비에 젖은 파리를. 예술가들, 작가들…
여기서 소설이나 쓰며 살 수 있다면 베벌리힐스 집 같은 건 없어도 그만이야.”
영화는 미국의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 길 팬더와 그의 약혼녀 이네즈가 파리로 여행을 오면서 시작된다. 값비싼 앤티크 가구와 보석, 럭셔리 호텔 말고는 관심이 없는 이네즈와 달리 길 팬더의 꿈은 과거 황금시대의 예술가들처럼 파리에서 소설을 쓰며 사는 것이다. 홀로 파리의 밤거리를 배회하던 길 팬더는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홀연히 나타난 차에 올라타, 1920년대의 파리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헤밍웨이가 카페 구석에서 생굴 한 접시에 백포도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낡은 다락방에서 머물며 예술을 논하던 황금시대의 파리로.
카르디날 르무안 거리의 작은 아파트에서 지내던 헤밍웨이는 찬비가 내려 음울하고 서글픈 겨울, 방을 데워줄 장작을 사는 대신 생 제르맹 거리의 카페로 향하거나 플레뤼스 거리 27번지에 있는 거트루드 스타인의 아파트에 들르곤 했다. 헤밍웨이가 스타인의 집으로 가기 위해선 생 테티엔 뒤 몽 교회를 지나쳐야 했는데, 영화 속에서 길 팬더가 클래식 푸조에 올라타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나는 자주 이 교회를 찾았다. 영화 속 길 팬더처럼 돌계단에 앉아 영화의 OST를 듣기도 하고, 헤밍웨이처럼 뤽상부르 공원 벤치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기도 했다. 카페 드 플로르 같은 고급스러운 카페에서 커피라도 마신 날에는 1유로짜리 바게트로 끼니를 때웠다. 허기가 져 일부러 음식 냄새가 나지 않는 길로만 다녔다던 헤밍웨이처럼 배고픔을 교훈으로 삼으며 잘도 걸어 다녔다.
“내 책을 좋아하나보군.”
“좋아해요? 사랑하죠! 선생님 작품 다요!”
“그래요. 좋은 책이죠. 정직한 책이니까…
영 아닌 소재는 없소. 내용만 진실하다면. 또 문장이 간결하고 꾸밈없다면.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용기와 품위를 잃지 않는다면.”
물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적도 있다. 헤밍웨이의 단골집이었다는 폴리도르 레스토랑(Polidor Restaurant)에서였다. 192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길 팬더가 헤밍웨이를 처음 만난 곳이다. 1845년에 문을 연,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중 한 곳이라는 이 레스토랑은 170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다. 적당한 소음이 기분 좋게 들려오고, 익숙한 리듬이 배어 있는 웨이터의 몸짓이 마음을 살랑이게 만드는 곳.
프랑스식 소고기찜인 뵈프 브루기뇽(bœuf bourguignon)과 레드와인을 곁들인 점심식사 후에 넉넉해진 마음으로 향한 곳은 파리의 예술가와 작가, 그리고 낯선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돼준 영문학 전문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1919년 미국인 실비아 비치가 문을 연 이 서점은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제임스 조이스, 헤밍웨이 같은 작가들이 책을 빌리고 모여서 문학 토론도 하고 홍차를 마시던 문학 살롱 같은 곳이다.
물론 지금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1920년대의 ‘그’ 책방이 아니다. 1941년 전쟁으로 실비아 비치가 운영하던 서점이 문을 닫자 친구인 조지 휘트먼이 센 강 옆에 ‘미스트랄’이라는 이름의 서점을 열었고, 1964년 윌리엄 셰익스피어 탄생 400주년을 맞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로 개명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지금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역시 실비아 비치가 그랬던 것처럼 오갈 데 없는 작가들에게 침대를 내어주고, 글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2층으로 이루어진 이 서점은 작지만 성실하게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책들로 빼곡했다.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낯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마라. 변장한 천사일지도 모르니).”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서서 반대편 벽에 새겨진 문장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배고픈 예술가들에게 다락방을 내어주었다던 이곳에 이토록 어울리는 문구가 또 있을까.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파리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영화 ‘비포 선셋’(Before Sunset)에서 두 남녀 주인공인 제시와 셀린이 9년 만에 재회한 장소이기도 하다. 빈에서 보낸 셀린과의 하룻밤을 소설로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제시가 작가와의 대담을 위해 파리의 서점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다.
삐걱거리는 계단 소리를 들으며 2층에 오르니 누구라도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책장 사이사이 여백에는 헤밍웨이의 얼굴이 담긴 낡은 액자가 걸려 있었고 소파 위에선 고양이들이 단잠에 빠져 있었다. 조지 휘트먼은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가리켜 세 단어로 된 한 편의 소설이라고 했는데 내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공간이었다.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현재가 아닌 과거의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며 살던 길 팬더는 1890년대의 벨 에포크로 돌아가서야 깨닫는다. 과거에 대한 동경은 무의미하다는 것. 과거에 머물면 그곳이 또 다른 현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는 “상상 속의 황금시대를 좇을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라”는 메시지를, 파리를 사랑했던 수많은 예술가의 입을 빌려 들려준다.
코로나19 시대에 여행을 간다는 건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인다. 영화를 따라 파리를 걷던 3년 전이 오래된 일처럼 아득하다. 마스크를 낀 채 견뎌내야 할 올여름이 두렵긴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현재가 소중한 건, 평범했던 일상이, 지겹도록 무난했던 보통의 날들이 당연하게 주어진 시간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죽기 전 인터뷰에서,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어딜 가든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나도 언제든 어디서든,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녹음된 소리만으로도 3년 전의 파리를 떠올릴 수 있으니까.
다 마신 커피 잔을 반납하고 카페를 나서며 생각했다. 마스크 낀 채로 꿋꿋이 현재를 살아내고 싶다고. 미래를 두드리면서, 헤밍웨이의 말처럼 가끔은 이렇게 파리를 뒤적이면서.
노후의 동반자로 개나 고양이를 기르는 이가 늘고 있다. 가족처럼 소중한 반려동물과 살다 보면 집 안에서 함께 어울릴 가구도 필요하기 마련. 편리성과 안전성은 물론 유익함까지 더해줄 반려동물 가구를 소개한다.
사진 각 사 제공
반려동물이 심리적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구조로 디자인된 전용 베드. 100% 마이크로화이버 소재의 푹신한 방석으로 편안한 보금자리를 선사한다. 특수 제작한 한 장의 펠트로 손쉽게 조립, 분해 가능해 물 세척이 용이하다. 말론샵, 마롱 13만8000원.
벽에 붙이거나 다리를 설치해 세워둘 수 있는 고양이집. 침대 옆에 두고 작은 협탁으로 사용해도 괜찮다. 고양이가 안정감을 갖도록 입구를 작게 설계했고, 앞면에 스크래처를 부착해 활용도를 높였다. 이케아, 루르비그 7만5900원.
고양이 발톱 갈기 전용 스크래처. 모던한 디자인으로 집 안 어느 곳에 두더라도 무난히 잘 어울린다. 세워두는 모양과 방향에 따라 다면으로 쓸 수 있어 일반 제품에 비해 더 오래 사용 가능하다. 뽀떼, T7 수직 스크래처 3만9000원.
원형 프레임 속 휠이 돌아가며 러닝머신처럼 고양이가 운동할 수 있는 캣휠. 가볍고 안정적인 고급 자작나무 소재로 만들어 관절이 약한 노령 동물도 가볍고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잠금장치 내장). 뽀떼, 캣휠 33만 원.
반려인을 위한 책장과 반려묘를 위한 캣타워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다용도 선반. 고양이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도록 하부에는 숨숨집(고양이가 숨는 공간)도 마련했다. 일룸, 캐스터네츠 책장 캣타워 39만9000원.
삼각 패턴 틈으로 햇빛과 공기가 드나들도록 설계해 쾌적한 펫 하우스 환경을 조성한다. 쿠션에 진드기 침입을 억제하는 항균 시스템이 적용됐다. 말론샵, 오슈 52만 원.
은은한 투 톤 컬러의 원형 소파 테이블. 상판 아래 패브릭 해먹에 반려동물이 머무를 수 있다. 해먹은 생활방수가 가능하고, 교체와 세탁이 용이하다. 일룸, 캐스터네츠 해먹 소파 테이블 19만9000원.
반려동물 전용 데이베드. 등받이와 사이드 쿠션이 장착돼 안락하게 몸을 기댈 수 있다. 쿠션과 원목 바닥은 분리 가능하고, 방수 커버를 씌워 소변이나 이물질 청소가 편리하다. 말론샵, 린덴 오트밀 32만 원.
가격은 각 사 홈페이지 판매 정가 기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부희령 작가가 친구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너와 만나기로 했던 곳은 종로 2가의, 지금은 문을 닫은 어느 서점 앞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종로 2가는 지금의 홍대 입구나 망원동처럼 젊음으로 북적이는 거리였다. 스무 살 안팎의 청년들이 한 번쯤 겪고 넘어가는, 빈둥거림, 반항 혹은 방황, 무엇을 하든지 남보다 도드라지고 싶은 치기, 그런 기색들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나는 이제 막, 대학 입시를 치른 예비 대학생이었다. 딱히 만날 이유가 없어도 실내 장식이 멋진 카페의 통유리창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자 친구와 약속을 잡고 종로로 나가곤 했다. 이제는 없는 종로 2가의 서점 앞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여럿이 늘 서성이고 있었다. 나도 그 앞에서 우연히 아는 얼굴을 만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그런 우연을 기대할 수도 있는 때였다.
문득 네가 떠올랐던 건 왜일까. 너는 중학 시절 단짝이었으나,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오랜 세월 연락이 끊긴 친구였다. 그 시절 나는 숫기 없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친구 사귀는 일이 참 어려워, 학교 다니면서 가장 괴로운 순간은 소풍날 점심시간이었다. 그런 나에게 네가 먼저 다가왔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봄소풍 때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너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너는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 갸름한 얼굴, 외꺼풀 눈이 크고 콧날이 또렷한 아이였다. 가무잡잡하고 윤기가 흐르는 살결이라 너를 볼 때마다 잘 볶은 땅콩을 떠올리곤 했다.
친해지기 전부터 나는 네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처럼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멀리서 훔쳐보곤 했다. 너는 그걸 알지 못했겠지. 함께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지자, 나는 너의 독특한 성격도 좋아하게 되었다.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던 네가 어른스럽고 영리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는 놀라웠다. 공부 같은 건 너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나보다. 그러니까 너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감정의 변화도 거의 없는, 중2 여학생으로서는 보기 드문 성품의 아이였다. 내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너는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있곤 했다.
그런 네가 나를 집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세검정에 있던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종로 2가에 내려 어디론가 한참 걸어갔다. 을지로 3가쯤이었던 것 같다. 유리의 성처럼 휘황찬란한 높은 빌딩이 즐비한 지금의 을지로가 아니라, 아래층에는 철공소와 인쇄소, 허름한 식당 같은 가게들이 있고 그 위로 성냥갑 같은 잿빛 콘크리트 건물이 있는 남루한 거리를 떠올린다. 살림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복잡한 거리, 나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풍경 속을 걸었다. 너는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섰고, 그리고 우리는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무뚝뚝한 철제 책상들이 놓인 사무실을 가로질러서 빗장이 달린 견고한 철문을 열자 비로소 가구가 몇 개 놓인 살림집 비슷한 공간이 나타났다. 너와 네 가족의 거처였다. 그 무렵 읽은 ‘안네의 일기’에 나오는 숨겨진 공간 같았다.
평소처럼 너는 무덤덤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어떻게 그런 집에서 살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조금은 딱한, 그리고 서글픈 사연이었으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위로 두 언니가 있는 막내딸이라 했다. 가족 앨범을 가져와 보여주면서, 둘째 언니가 가장 예쁘다, 어느 날 길에서 둘째 언니를 보고 따라온 남자가 저 철문을 쾅쾅 두드리며 행패를 부렸다…고 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그날 너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그해 겨울, 종로 2가 서점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싶었던 사람은 너였을까? 나는 낡은 수첩을 뒤져 네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었던 걸까? 너는 전화를 받았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서점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어느 대학에 진학했을까? 취직을 한 건 아닐까? 궁금한 게 참 많았다. 그런데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왠지 너를 만나기가 꺼려졌다. 마침 그날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서울 시내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형색이었으나 버스는 다녔으므로, 못 나간 게 아니라 안 나간 것이었다. 너는 약속을 지켰을까. 그 뒤 나는 너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너도 나에게 전화 한 통 없었다. 우리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났다.
쉰 중반을 넘으면서, 이따금 내가 놓친 인연들이 슬그머니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아름다운 인연이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때는 부끄럽기만 해서 빨리 잊고자 했던 기억도 이즈음은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너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그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변명해본다. 미안하다, 여전히 열다섯 소녀인 나의 친구 은숙아.
부희령 작가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글 쓰는 일을 시작했다. 소설과 산문을 쓰면서, 영어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꽃’, ‘고양이 소녀’, ‘무정에세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