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폐교였다. 마을 아이들이 재잘거리던 초등학교였으나, 시간의 물살이 굽이쳐 교사(校舍)와 운동장만 남기고 다 쓸어갔다. 적막과 먼지 속에서 낡아가다가 철거되는 게 폐교의 운명. 그러나 다행스레 회생했다. 미술관으로. 시골 외진 곳에 자리한 미술관이지만 1000명 이상이 관람하는 날도 많다 하니 이게 웬일? 이곳에서 관람할 게 미술 작품만은 아니다. 오래된 건물 안팎에 내려앉은 시간의 더께. 사계의 문양을 저마다 자동기술법으로 표현하는 정원수들의 동향. 야트막한 뒷산 위에 얹힌 하늘의 표정. 보란 듯이 있는 볼 것들이 많다. 충남 당진시 순성면에 있는 아미미술관이다.
화가 부부가 운영하는 미술관이다. 남편 박기호(65, 회화)가 관장으로, 아내 구현숙(58, 설치미술)이 큐레이터로 손발을 맞춘다. 애초 미술관을 만들 생각은 없었단다. 지난 1995년, 그저 작업 하나만 마음껏 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폐교를 빌려(나중엔 아예 사들였다) 둥지를 틀었다. 폐교의 환경은 이상적이었다. 공간은 헐겁도록 널찍하고, 어지러운 잡사는 침범 못할 시골 산자락이니 창작을 능사로 삼을 만한 환경이지 않은가.
이후 부부는 작업에 매달려 살았다. 미술만 작업은 아니었다. 퇴락한 교사를 단장하는 일에도 공을 들였다. 원형을 살려둔 채, 가필처럼 조심스레 부분적인 보수만을 한 건, 학교 건물에 서린 유서(由緖)를 존중해서였다. 시간이 머물다 간 흔적을, 시간 속에서 쌓여 이제는 숨결로만 남은 수많은 옛이야기들을, 그 애틋한 가치들을 또한.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폐교
외부 조경에도 정성을 쏟았다. 바지런히 수백 종의 나무와 화초를 심어 가꾼 건 식물을 좋아하는 부부의 취향 탓이기도 하겠지만, 자칫 건조한 느낌을 줄 수 있는 폐교 공간에 미감을 부여하려는 뜻도 컸다. 교장 관사로 쓰였던 한옥의 보일러 시설을 뜯어내고 구들장을 들이는 작업도 부부가 손수 해치웠다. 먼 데서 주워온 돌들로 쌓은 담장엔 한 드럼 이상의 땀방울이 흘러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온갖 단장에 몸이 닳도록 힘을 쓰고 시간을 썼다. 어느 한 구석, 어느 한 모롱이도 부부의 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도록.
그렇게 보낸 15년. 어느덧 알아주는 눈들이 많아지고, 멀리까지 소문이 나면서 일부러 찾아드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신역(身役)을 마다않고 공간을 꾸민 건 오직 부부 자신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미술관이라는 이름의 공유공간으로 개방할 경우엔 더 가치 있는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지역의 복합문화공간으로 키우고 싶은 생각, 역량 있는 청년작가들을 밀어줘야겠다는 포부도 옹골찼다.
그렇게 아미미술관이 태동했다. 이후 10년이 지난 지금, 당진과 충남 지역을 넘어 전국적 명소로 부상했다. 부침이 없는 안정적인 성장을 거듭한 결과로. 근래 5년여 사이에 다녀간 유료 관람객 누적 인원은 자그마치 30여 만 명. 지역 미술관이, 그것도 시골의 폐교 미술관이 거둔 성과가 놀랍다. 자본력을 펀치로 약자를 링에 눕히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미술관들의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다. 재력으로 무장한 전문화랑, 공적자금이 투입된 공공미술관, 대기업 문화재단이 설립한 대형 미술관이 결국은 독주한다. 화가 부부가 맨몸을 우직하게 던져 가꾼 아미미술관이 그 틈새에서 기세를 돋우고 있으니 이 무슨 야무진 진격인가.
청춘들에겐 ‘취향 저격 핫플’
아미미술관이 지닌 힘과 매력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은 산기슭 자연 속에 자리해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띠고 있다는 점을 꼽아야 한다. 부부가 공들여 가꾼 정원마저 아름다워 한결 순수한 휴식을 누릴 수 있게 한다. 도시의 화려하지만 딱딱한 느낌을 주는 미술관에서 맛보기 어려운 자연미. 그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이상의 만족감을 선사한다. 자연 속에서 얻는 담백한 쾌감보다 개운한 게 다시 있던가.
원형을 해치지 않은 지성적인 개량으로 근대 건축의 고태(古態)를 고스란히 유지한 교사, 즉 전시관의 멋과 맛은 아마도 이 미술관이 보유한 최대 자산이다. 쓸모를 잃고 폐기될 운명에 처한 사물이 인간의 혜안을 만나 부활, 다시금 쓸모를 되찾은 특유의 사례에 속할 건물이지 아니한가. 이 명물에 우련히 뒤엉긴 건 시간이다. 죽어라 내빼기만 하는 게 시간이지만(시간은 허무주의자?), 여기에선 아쉬워 차마 다 훌쩍 떠나지 못했나. 잔영으로 남은 시간의 형적인가, 무늬인가. 노랑 병아리처럼 동동거리며 복도 마루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어룽거린다. 그립고 애잔하다, 아, 옛날이여!
우수 절반, 향수 절반으로 짜인 그리움이 가슴을 친다. 학동 시절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과거로 돌아가는 의식이란 허망한 것이지만 그 옛날의 교실에 왔거들랑, 그대여 맘껏 추억에 잠기라! 교실이 두런거리는 소리의 뜻이 그렇다. 중장년 관람객의 거의 대부분은 어쩌면 추억을 움켜쥐기 위해 아미미술관을 찾아올 게다. 젊은 관람객에겐 근사한 빈티지 컬렉션처럼 느껴질지도. 근대와 모던이 결합된 이채를 오래 남기기 위해 그들은 인증샷을 찍는다. 자랑할 인생샷을 건지기 위해 연신 셔터를 누른다. 다음에 만나 아미! 그러고선 다시 오기도 한다.
화가 부부에 따르면, 아미미술관이 단박에 부상한 건 순전히 젊은 디지털 유목민들 덕분이다. 그들은 미술관의 거의 모든 공간에 매력을 느낀다고 한다. 건물의 내·외벽은 물론, 외부 정원 공간의 다양한 사물들에, 하다못해 나뭇가지에조차 모빌이나 조각 소품, 에스키스 등으로 데커레이션을 해둔 효과가 그렇게 크다. 어디건 포토 존이 되는 것이다. 그러자 청춘 군상들이 환호하며 사진을 찍어 블로그, 유튜브, 페이스북 등에 올렸고, 이게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단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홍보대사들이 대거 출현한 셈이다. 고즈넉한 운치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좀 과한 데커레이션으로 느껴질 테다. 청춘들에겐 ‘취향저격 핫플’로 많이 알려졌지만.
기획전시전이 열렸다. 부부는 어떤 작가를 선정하느냐에 따라 미술관의 품질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신중을 다해 매번 참여 작가를 엄선한다. 아내가 큐레이터이지만 또 한 명의 큐레이터를 고용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첨단 트렌드의 작품을 하는 유망한 젊은 작가를 주로 고른다. 현재 진행되는 4인전의 타이틀은 ‘Selfie시대의 자화상展’이다. 셀피족(스스로 자신의 사진을 찍길 즐기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이 넘쳐나는 이 사회를 작가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걸 보여주는 전시회다.
작가 김태헌의 가벼운 소품 한 점이 재미있다. 꽃 속에 들어간 행복한 사내를 그려놓고, ‘나는 거짓말쟁이 화가’라 화폭 안에 써넣었다. “알고 보면, 나 나쁜 놈이야! 근데 넌?” 작가는 그리 묻고 있다. “나? 나라고 별수 있음?” 관람객은 그리 답하기 십상이지 않을까. 우리가 외면하고 사는, 심지어 믿을 수 없는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보신책이라 여기는 내 안의 위선, 가식, 내로남불! 작가는 그걸 까발리고, 관람자는 뭔가 켕기면서 ‘나’를 모처럼 들여다본다. 속된, 너무도 속된 외부로만 편재된 눈을, 두뇌를, 욕망을 내부로 돌린다. 잠시 잠깐이나마. 미술관 그림들은 이렇게 우리에게 삶을 환기시킨다. 족쇄를 풀고 자유롭게 살 생각을 해보게 한다. 너무 가르치려 드는 그림은 따분하지만.
아미미술관장 박기호
바닷가 소금창고, 통째 예술로 바꾸겠다
지난 1983년, 박기호 관장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구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부상으로는 프랑스 여행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게 계기가 돼 파리국립미술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아내 구현숙 역시 영국에서 공부한 뒤 프랑스 디종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이들은 파리에서 우연한 인연으로 만나 사귀다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과 동시에 귀국,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 여기 당진으로 내려온 것이다. 당진은 박 관장의 고향이다.
널찍하고 천장 높고. 그는 그런 작업 공간을 찾다 폐교에 자리를 잡았다. 원하는 공간을 얻었으니 작업에의 몰두가 깊었을 게다. 폐교를 다듬는 데에도 비지땀을 쏟았다. 4600평 부지 안에서 폐허의 표정을 짓고 있었을 교사와 부속건물, 그리고 운동장. 이 모든 걸 쓸 만하게 바꿔놓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보냐. 청소를 하는 데만 반년이 걸렸단다. 방독면을 쓰고 천장을 털어냈을 때 쏟아진 쓰레기가 트럭으로 열 대 분량이었다. 쥐들의 낙원이기도 했다. 교실 한 칸에 꾸민 침실의 커튼을 타고 부산히 오르내리는 쥐들로 잠을 설친 밤도 많았다. 쥐보다 더 바삐 움직인 건 박 관장이었다. 다듬고 고치고 칠하느라고. 그러니까 청소부이자 수리공, 목수이자 페인트공으로도 살았던 셈이다. 어디서 이런 뚝심과 요령이 나왔을까.
“파리로 유학을 갈 때 1원 한 장 지닌 게 없었다. 생활이 어려울 수밖에. 고암 이응로 화백께서 쓰던 작업실을 한동안 얻어 쓰는 행운이 있었지만, 숙식 문제부터 늘 곤란했다. 부지런히 그림을 그려 팔았다. 그리고, 알바 삼아 집 고치는 업자들을 따라다니며 돈을 벌었다. 그때 공사판에서 익힌 기술을 폐교 수리에 활용했다.”
“당신은 화가다. 폐교 단장에, 그리고 미술관 운영에 힘을 너무 소모하는 건 아닌가? 그림밖엔 난 몰라! 화가들은 흔히 그런 말을 하는데.”
“캔버스 안의 그림만 예술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긴 세월 동안 실로 많은 작업을 해왔다. 공간 곳곳을 디자인하고, 손수 가구를 만들고, 돌담을 쌓고, 심혈을 기울여 조경을 했다. 사람들은 이것들을 단순한 인테리어라 규정할지 모르지만, 최상의 디자인이 가미된 작품으로 보길 바란다. 관점을 넓히면, 세상의 모든 사물과 일상에 이미 예술이 들어가 있는 걸 알 수 있다.”
소변기에다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장에 내놓았던 마르셀 뒤샹. 그는 공장에서 나온 기성품도 예술일 수 있다고 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게 예술이라 했다. 박 관장이 뒤샹과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관점을 확장하고 틀을 깨는 거. 그게 자유로운 삶이자 예술이라는 얘기이겠지. 그는 요즘 오브제로 사들인 해변 마을의 소금창고를 통째 작품화하기 위해 구상 중이다. 폐어선 한 척도 같은 용도로 이미 접수해뒀다.
먹고살 만한 일을, 그리고 한 잔의 커피와 낭만적인 음악을 즐길 여유만 있다면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바라랴. 마음이 지극히 평온할 땐 그런 가상한 생각이 찾아든다. 그러나 ‘평온’은 흔전만전하기는커녕 희귀종에 가깝다. 위태로운 곡예를 연상시키는 게 생활이지 않던가. 광장시장의 빈대떡처럼 수시로 뒤집어지는 게 일상이다. 이 난리법석을 피해 흔히 주점을 찾아 소주병을 쓰러뜨린다. 그게 용한 대책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미술관으로 피난을 간다. ‘피난’이라 썼지만 정확하게는 충전을 위한 행차, 또는 옹골찬 감성여행이다.
미술관은 창고에서 태동했다. 과거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들은 진귀한 물건들을 수집해 창고에 쟁이길 즐겼다. 이 저장공간은 개인전시실로 진화했으며 뮤지엄(museum)이라 불렀다. 그러니까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 자체가 뮤지엄이었다. 이후 절대왕정의 붕괴와 산업혁명으로 상층부가 몰락하면서 뮤지엄은 시민사회의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근엄한 권위를 칭칭 두른 왕궁 루브르가 대중적인 뮤지엄으로 전환된 게 또렷한 사례다. 뮤지엄은 원래 박물관을 의미하는 단어였지만 미술관의 유전자도 뮤지엄에서 유래했다.
정신 일깨우는 감각의 제국
미술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봤는가. 미술관이 없는 공공사회를 생각해봤는가. 그런 게 없더라도 지구는 돌고 인간의 삶은 무사히 흘러가겠지만, 미감을 누릴 성좌 하나가 사라진 허전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술관이란 우리의 둔한 정신을 일깨우는 ‘감각의 제국’이지 않던가.
삶은 일쑤 속되고 진부하지만, 미술관의 작품들은 사람의 감성을 슬쩍 흔들어 잠시나마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게 한다. 그렇기에 카오스로 미만한 세상에서도 미술관을 찾는 발길은 더욱 늘고 있다.
미술작품이 봄날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고 믿는 애호가들의 향유 욕구. 이에 부응한 미술관의 진화와 변신은 이미 하나의 추세가 됐다.
이제 미술관은 미술품을 소장하고서 그저 작품 감상의 기회만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듯 바지런히 새로운 콘텐츠를 개발하고 시스템을 보완하고 있으니 말이다. 야외공간을 확보하거나 다양한 부대시설을 만들어 복합문화공간의 기능은 물론, 자못 우아한 휴식공간의 역할까지 도맡고자 하는 것 같다. 듣자 하니 예전 미술관의 전시공간과 부대공간의 비율은 9대 1이었지만 요즘은 1대 2로 역전됐다는 게 아닌가. 도서관, 체험관, 교육장, 카페, 식당, 아트숍 등을 설치해 덩치를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 건축 자체를 예술적으로 기발하게 디자인하고 있으며, 정원 조성에도 공을 들인다. 도시의 안통을 벗어나 자연 속으로 스며드는 미술관도 많다. 이른바 전원형 미술관이다. 자연이라는 모티브만큼 매력적인 호객 매체가 다시 있겠는가.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
나는 지금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시 엑스포공원 안에 있는 솔거미술관에 와 있다. 경주시에 열린 첫 공립미술관이다. 한국화의 거장 소산(小山) 박대성 화백(76)이 평생토록 그린 작품 830점을 기증하면서 건립에 착수, 2015년에 개관했다.
기부문화의 토양이 척박한 한국 사회에서 소산의 화통한 쾌척은 의표를 찌른다. 어차피 작품들을 등에 짊어지고 내생으로 떠날 방법은 없는 법. 그간에 신세진 세상에게 돌려주는 게 순리라 여겼으리라.
솔거미술관은 전형적인 전원형 미술관이다. 야트막한 야산이 푸근하게 늘어뜨린 치맛자락을 거머쥔 미술관이다. 토함산 슬하의 막내둥이에 속할 야산의 이름은 대덕산. 1921년, 당시 남한 땅에 생존했던 마지막 호랑이가 이 산 갈피에서 사람들에게 잡혔다고 하니 애석하다. 그것이 생명이건 무생명이건, 세상에 존재했던 것들의 모든 ‘마지막’은 애잔한 기분을 일으킨다.
미술관 뒤편 산 아래엔 자그마한 자연호수 아평지(阿平池)가 있다. 옷을 훌훌 벗고 늘어선 호숫가의 겨울나무들이 물에 드리워진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 역시 그림이라 눈길이 한참 거기에 머문다.
초록빛 수면을 노니는 물오리들은 오늘도 기쁜가. 생동하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이쯤이면 미술관에 입장하기 전에, 또는 미술관 관람을 마친 뒤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라고 미술관을 산자락 호숫가에 들어앉힌 게 아니겠는가.
‘빈자의 미학’ 스민 건축
“어눌한 게 달변보다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나를 광야로 추방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비판자로 살겠다”고도 했다. 건축가 승효상이다. ‘빈자의 미학’으로 삶과 건축을 구현하는 사람으로 알려진 그는 인간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존재로 봐 모두가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 같다. 집다운 집은 어떤 것인가. 그가 말하는 요점은 ‘가짐보다 쓰임을, 더함보다 나눔을, 채움보다 비움을 중시해 지은 집’을 짓고 사는 게 척박한 삶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데 있다.
승효상의 설계로 지어진 솔거미술관을 보면 그의 건축적 지향이 실감으로 다가온다.
산자락 초목들을 곁에 둔 미술관의 외관은 들썩이는 구석 없이 수굿하다. 건축과 자연이 서로 눈짓을 하며 말없는 말을 두런거리나? 숲은 묵연하고 미술관은 겸손해 불화 없이 조응한다.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세운 벽과 벽 사이엔 나무쪽을 켜켜이 채워 콘크리트의 투박한 본성을 자연스럽게 누그러뜨렸다. 나무도 콘크리트도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비와 바람과 햇볕에 마모되고, 색이 바래고, 티끌과 이끼가 틈서리마다 배어 세월이 흐를수록 음영이 짙어지겠지. 마침내 잘 늙은 집으로 변모할 게다. 깊은 운치를 풍기며 미술관의 역사를 웅변할 게다.
미술관 내부 역시 승효상의 철학을 느끼게 한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회랑엔 계단과 함께 슬그머니 휘어지는 경사로를 조성해 물 흐름처럼 자연스러운 리듬을 부여했다. 미로에 들어선 것 같은 흥미마저 자아낸다. 계단을 이용하기 어려운 노년층 관람객을 위한 섬세한 배려일 수도 있겠다.
전시공간마다 적절히 배분된 자연광과 인공광. 싱그럽게 자란 대나무와 열린 허공으로 흐르는 구름이 보이는 중정(中庭). 차경(借景, 외부 자연풍경을 안으로 끌어들이기)을 위해 제3전시관의 벽을 뚫어낸 통유리 프레임의 이채. 전시작품이라는 주체를 효과적으로 북돋우는 객체들의 조합과 질서가 정교하다. 전시관의 천장이 매우 높은 건 미술관의 방장에 해당할 소산 선생의 어마어마한 대작들을 고려한 방책이다.
관람 인원 해마다 급증
경주의 핫 플레이스로 이미 두둥실 떠올랐다. 인기 작렬! 솔거미술관 말이다. 개관 5년 차 신생 미술관이지만 관람 인원이 해마다 급증했다. 어느 하루는 자그마치 2000여 명이 관람했단다. 서울에 있는 유명 미술관들이 긴장하는 분위기라니 통쾌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솔거미술관의 매력은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자연 경관과 동거하는 미덕, 그리고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이라는 강점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매혹은 소산 선생의 작품이 뿜는 아우라. 전시관 벽에 걸린 선생의 수묵화 앞에 선 심취한 표정들을 보라. 거무튀튀한 건 먹빛이요, 허연 건 화선지 맨살이구나, 그저 그리 여겨 심드렁히 스쳐 지날 것만 같은 젊은 관람자들이 눈을 끔벅이며 골똘히 그림을 들여다본다. 와우! 그런 찬탄을 터뜨리며.
전시장에 가득한 소산의 수묵화들은 실로 압권이다. 자유자재한 작풍으로 먹의 향연을 펼쳤다. 바위를 후벼낼 듯 거침없는 운필로 산수를 그리고 화조(花鳥)를 찍어냈다. 10m 너비의 대작을 예사롭게 그려내는 괴력으로 예술혼을 불사르는 거장의 진면목을 알아보게 하는 작품들이다. 서양화에 밀려 푸대접을 받는 게 한국화다. 수묵화단의 체면이 이거 말이 아니다. 서양화의 진격에 맥을 놓고 있다. 이 와중에 소산이라는 거목이 떠억 버티어 현실을 일갈하고도 남을 수작들을 그려냈다.
미술관을 나서자 저녁 어스름이 내린다. 장쾌한 수묵 세례를 받아서겠지, 마음 기슭에 밝은 달덩이 하나 떠오르는 이 기분은.
솔거미술관 탄생시킨 소산 박대성 화백
“나에게 작업실은 유배지와 마찬가지요!”
소산 선생 말하길, 예닐곱 살 때부터 붓을 노리개 삼았더란다. 집안 제사 때면 펼쳐지는 사군자 병풍, 그걸 보고 그림이라는 걸 끼적이기 시작한 게 외골수 화업(畫業) 인생의 싹눈이었다. 마냥 붓질을 놀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배를 곯지 않기 위해 들일을 해야 했으니까. 뒷산에 뛰어올라 땔감을 져 나르거나, 똥장군 짊어지는 일도 소싯적의 다반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는 일찌감치 양친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어머니는 병으로, 아버지는 끔찍한 변고로 타계했다. 산에서 내려온 빨치산들이 아버지를 반동 지주로 몰아 낫으로 살해했다니 참혹하다. 당시 겨우 네 살배기 어린애였던 그의 몸에도 낫날이 들어와 팔 하나를 앗아갔다. 현재 소산의 왼팔은 의수다.
어린아이 때부터 겪었을 시련과 캄캄한 고독을 짐작할 만하다. 그럼에도 붓을 내던지지 않았다. 외팔로 삶에 가담해 밥을 벌기엔 그나마 지필묵이 상책이라 본 친척 어른들의 독려 덕이기도 했다.
“몸에 핸디캡이 있으니 어느 한 가지 쉬운 게 없었지. 그러나 불편한 조건들이 결과적으로 내겐 복이었어요. 부족함과 불편함이 오히려 행운이었던 거요. 나를 무쇠처럼 담금질할 수 있었으니까.”
그의 예전 작업실엔 ‘불편당’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었다. 불편이 차라리 길이라는 걸,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가치들은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는 걸, 불편을 통해야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는 걸, 수묵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높이도 불편과의 동행으로 얻을 수 있다는 걸 당호로 다짐했던 셈이다. 이 ‘불편의 사제’의 붓놀림은 성정처럼 쾌활해 일필휘지에 능란하다. 깊고 아득한 먹색이 내려앉으면 그윽한 산경이 화폭에 아롱진다. 분출하는 화산의 기세로 묵을 써 화선지를 한바탕 희롱하고 나면, 거기에 웅장한 대자연이 꿈틀거린다. 정밀한 필선의 운용에 물이 올라 극사실화로도 이미 극치에 이르렀다. 서예는 또 어떻고? 김생과 추사를 진즉에 섭렵한 소산의 서(書)는 빼어나, 듣느니 늘 명필 소리다. 이렇게 그의 예술 생태계는 다중변주로 비옥하다.
“동양의 필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완벽한가. 소필, 중필, 대필로 구분되는 필(筆)을 좌우사방, 맘대로 돌려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서양화 붓은 이게 안 되거든. 우리의 필은 자유로워 걸림이 없지. 대 그림자가 물에 스치듯 평화롭단 말여.”
830점의 작품을 기증한 이후 소산은 고향의 외진 산속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이전보다 작품량은 더 늘어났고, 대작을 그리는 습(習)도 깊어졌다.
“내게 작업실은 유배지와 마찬가지요. 산고(産苦)와 다르지 않은 창작 하나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외로움 속으로 나를 밀어 넣을 수밖에 없으니.”
“전에 이런 얘기를 했지요. 추사를 때려잡겠다!”
“하하핫! 선문(禪門)에 전해오길,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추사는 성인 반열에 오른 분인데 감히 넘볼 수 있을까. 그러나 추사는 했는데, 나는 못한다? 그럴 리가. 내가 필묵을 닦기를 추사 못지않을 만큼은 하고 있소.”
소산에게 추사는 서화의 이상적 아이콘을 상회하는 존재다. 그는 선지식으로서의 추사를 타넘고 싶은 것이다.
당신의 아지트는 어디인가? 물론 특정한 한 곳만을 아지트로 삼은 사람도 있겠지만 날씨, 기분, 개인 욕구에 따라 가고 싶은 장소가 달라지기도 한다. ‘2019 시니어 아지트’ 설문조사에서 ‘시니어를 위해 생겨났으면 하는 아지트 유형은?’이라는 질문에 대다수가 문화공간, 학습터, 쉼터를 꼽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즐기고,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쉬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공간을 소개한다.
연재 순서 ① 樂(즐기다), ② 學(배우다), ③ 休(쉬다)
學(배우다)
떠나자 북캉스!
서울책보고
최근 문을 연 서울책보고는 서울시가 1465㎡ 규모의 신천유수지 창고를 개조해 만든 공간으로,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공공 헌책방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책벌레를 형상화한 비정형 나선 구조의 거대한 헌책 장서가 눈을 사로잡는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있던 25개의 헌책방을 모집해 10만여 권의 책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북카페에서는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독창성과 희소성 있는 독립출판물 2000여 종과 명사의 기증 도서 1만여 권도 전시되어 있다. 독립출판물과 기증 도서는 구매가 불가하고 서울책보고 내에서 읽는 것만 가능하다. 또 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절판된 서적도 구매할 수 있으니 추억의 헌책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서울책보고로 GO!
위치 서울 송파구 오금로1 (잠실나루역 1번 출구 도보 3분)
운영시간 평일 10:30~20:30, 주말 10:00~21:00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 휴무)
청운문학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은 자연 속에 위치한 한옥형 문학특화도서관이다. 시·소설·수필 위주의 문학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국내 문학 작품 및 작가 중심의 기획 전시와 인문학 강연, 시 창작 교실 등도 운영한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조망을 자랑하고 대중교통 이용도 편리하다. 독서와 사색,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이 도서관의 또 다른 매력은 ‘문학둘레길’과의 연계다. 문학 둘레길은 인사동, 만해당(한용운 가옥), 보안여관(시인부락), 이상의 집, 윤동주 하숙집 터, 세종대왕 생가 터, 정철 생가 터,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문학과 자연의 향기에 취하고 도심 속 힐링 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위치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36길 40 (경복궁역 3번 출구, 광화문역 2번 출구 → 버스 환승)
운영시간 매일 10:00~19:00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 휴무)
아크앤북
책과 라이프스타일 숍이 결합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입구에서부터 세련되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복합문화공간답게 다양한 장르의 도서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용품 및 잡화도 판매하고 있으며 카페와 음식점도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점 ‘태극당’도 입점해 있어 출출할 때 간식을 즐기기에도 좋다. 편히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아크앤북에 방문했다면 ‘타센 아트북 스트리트’로 불리는 아치형 책 터널은 꼭 보고 가야 한다. 독일의 예술서적 전문출판사인 타센의 도서 8000권 속에 자석을 넣어 천장을 덮은 특별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위치 서울 중구 을지로 29 (을지로입구역 1-1번 출구 도보 1분)
운영시간 매일 10:00~22:00 (연중무휴)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술가 전시회가 네 개나 열리고 있다. 1980년대 뉴욕의 힙합 문화에서 발아한 그라피티 아트(Graffiti, Art 낙서화)와 자유와 저항을 상징하는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 거리 미술) 작가 작품을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단체전으로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 서울숲 아트센터의 ‘반항의 거리, 뉴욕’이 있고, 개인전으로는 DDP의 ‘키스 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 잠실 롯데뮤지엄의 ‘케니 샤프, 수퍼 팝 유니버스’가 있다.
1980년대부터 활동한 이 전시회 작가들이 1950년대에 태어났으니 같은 세대인 시니어가 관심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나와 같은 연대에 태어난 미술가들은 젊은 시절 어떻게 예술혼을 싹 틔웠을까. 이런 호기심만으로도 전시장을 찾을 이유는 충분하다.
“새로운 세대 미술이 이스트 빌리지에서 시작되었다”, “진짜 모마(MoMA, 뉴욕현대미술관)는 여기다”라고 외치게 했던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를 2019년에 돌아보는 감회가 새롭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공부도 해보니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안도현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예술가들 중에는 끔찍한 환경을 극복하고 열심히 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작가가 적지 않다. 그들이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 간 이유는 뭘까? 나는 젊은 시절 무엇을 꿈꾸고 행동했던가. 부끄러웠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감상안이라도 있다는 걸 감사하자고 스스로를 위로해야만 했다.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 전은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 미술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스트 빌리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작가 26명의 75점 작품, 73권의 ‘이스트 빌리지 아이’ 잡지 아카이브를 선보인다.
뉴욕 맨해튼 동남쪽에 위치한 이스트 빌리지에는 1960년대 후반부터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 학생, 히피족이 모여 살았다. 자연스럽게 뉴욕의 반체제 문화 중심지, 예술운동 발생지가 되었고 항의와 폭동의 장소이기도 했다. 1980년대의 뉴욕 이스트 빌리지는 무분별한 재개발과 그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슬럼화되었다. 버려진 거리와 건물이 많았지만 가난한 젊은 작가들이 들어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회화, 조각, 사진, 비디오, 영화, 퍼포먼스, 비평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자유와 패기로 ‘쿨’하고 ‘힙’한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 뒷모습에는 고단한 삶과 그늘이 있었다. 이스트 빌리지 예술가들은 계급·성별·인종 차별과 마약, 빈곤, 범죄, 동성애, AIDS 등의 사회적 문제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정치적 목소리를 냈다. 레이건 정부의 보수 정책과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 확립에 발맞춘 예술의 상업화와 보수화에 자신들의 예술작품으로 저항했다는 것이 현재의 평가다.
‘19세 이하 관람 불가’라는 과격하고 논쟁적인 작품이 포함되었지만, 어느 전시장이든 그러하듯 흰 벽면에 질서 정연하게 전시된 작품으로, 198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의 자유분방한 예술적 분위기를 읽어내기는 힘들다. 또 하나, 한 작가의 대표작을 망라하는 회고전이 아니기에 시대와 작가의 일면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인상주의’ ‘야수파’식으로 특징지을 수 없는 작가들의 다양한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라 생각하면 좋겠다. 이 글에서는 일찍 세상 떠난 작가 7명의 삶과 예술을 재조명해본다.
1)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년)
어린 시절 아버지가 그려준 만화를 따라 그리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춘기에는 기독교에 심취했고, 15세 이후에는 록 음악과 마약, 섹스에 빠졌다. 뉴욕 시각예술학교에서 케니 샤프, 장 미셸 바스키아 등 이스트 빌리지 낙서 화가들을 만나면서 낙서화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당시 주류 미술계에 편입되지 않은 젊은 예술가들은 이스트 빌리지에 모여 퍼포먼스와 전시회 등을 열면서 커뮤니티를 형성했는데, 이러한 이벤트는 주로 클럽에서 일어났다. 키스 해링은 그중 대표적 클럽인 ‘클럽 57’의 큐레이터로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32세에 에이즈로 사망할 때까지, 매해 개인전과 기획전은 물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공공미술, 기업과의 협업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키스 해링은 간결한 표현으로 드러내는 무거운 메시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는데,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고급 예술이라 고집하는 건 자기 과시를 위한 허튼수작”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다른 그라피티 아티스트와 마찬가지로 고유 표식인 ‘태그(tag)’를 적극 활용했다. 기어 다니는 아기, 비행접시, 하트 등이 그것이다. 단순하고 밝고 가벼운 만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기성 미술계와 보수 정권 비판, 퀴어, 에이즈, 마약, 인종 차별, 반핵·반전에 이르기까지 작품 주제가 광범위하다. 말풍선이나 그림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제목을 달지 않아 관객들이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 했다.
2) 아치 코넬리(Arch Connelly, 1950~1993년)
도예를 전공했고, 10년 남짓 작가 생활 후 미국 전역을 덮친 에이즈로 43세에 사망했다. 에이즈로 사망한 수많은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그는 2012년 회고전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코넬리는 화려하지만 싼 재료(가짜 보석, 작은 꽃다발, 장식 조각, 반짝이, 동전)를 이용해 작업했다. 그러나 당시 이런 재료는 사내답지 못한 ‘호모’의 것으로 여겨졌다. 잡지에서 잘라낸 벌거벗은 남성 모델 사진과 게이 섹스 사진을 싸구려 보석으로 장식하는 콜라주 작품 등 ‘남성적’으로 간주된 몸을 대상화하는 동시에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남성성을 격하시키는 작업도 하며 규범적인 성 역할에 의문을 제기했다. 키스 해링, 데이비드 워나로비치, 마틴 웡 등과 함께 이스트 빌리지 게이 예술가 그룹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제도권 예술의 주류였던 미니멀리즘, 개념미술과 대비되는 코넬리의 작품은 과열된 미술시장에서 부풀려진 예술의 상업적 가치를 조롱하고 비판한다. 이러한 전략은 20세기 중반 미국 모더니즘 예술 이후 등장한 팝 아트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그가 1981~1989년에 만든 7점의 ‘자화상’ 연작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 형상을 그리는 대신 직사각형, 타원형 캔버스에 가짜 진주, 반짝이는 장식 조각 혼합물을 가득 채운 자화상은 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을 드러낸다.
3) 마틴 웡(Martin Wong, 1946~1999년)
중국계 미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자랐다. 부모는 중국인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멕시코인 피도 흐르고 있어, 자신을 ‘중국-라틴계’라고 소개했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보여 어머니의 지지를 받으며 13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도예를 전공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할 때는 히피운동에도 참여했다.
1978년 뉴욕에 왔을 때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호텔 야간 짐꾼으로도 일했다. “내가 그리는 모든 것은 내가 보고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다”라고 말한 그는 푸에르토리코 출신 시인 미겔 피네로와 함께 살며 작업을 했는데, 둘의 활동은 뉴욕에서 일어난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예술운동 ‘뉴요리칸(Nuyorican)’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스트 빌리지 그라피티와 아시아 고미술품을 수집했고, 이스트 빌리지에 아메리칸 그라피티 뮤지엄을 설립하기도 했다.
마틴 웡은 1994년에 에이즈 진단을 받고 53세에 숨을 거뒀다. 그의 작품은 PPOW 갤러리에서 관리하고 있고, 어머니가 마틴 웡 장학재단을 만들어 미술가를 후원하고 있다.
작가 4명의 이야기는 후속 기사에서 계속됩니다.
우아하다는 건 무엇일까. 직장이 우아할까? 가정이 우아할까? 부대끼는 현실 속에서 ‘우아’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건 좀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이 스스로 우아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일까? 이에 ‘나이 든 채로 산다는 것’의 저자 박홍순(朴弘淳·55)은 “무언가를 창작하거나, 창작된 것을 접할 때”라고 답한다. 즉 예술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삶이 우아해진다는 것. 더불어 인생에서 가장 우아할 수 있는 시기는 내면의 가치가 풍부해지는 노년이라 말한다. 나이 들수록 체력은 고갈되지만, 시간에 비례해 쌓이는 지혜가 바로 우아한 노후의 밑거름이다.
‘미술관 옆 인문학’, ‘생각의 미술관’ 등으로 미술을 통한 성찰과 인문을 이야기해온 박홍순 작가. 그는 새 책 ‘나이 든 채로 산다는 것’에서도 그림과 문학, 예술 작품 등을 매개로 노년의 삶을 그렸다. 아직 노인이라고 하기엔 이른(?) 50대 중반인 그가 황혼의 인문학에 성큼 다가선 까닭은 무엇일까?
“노년이 꼭 생물학적 나이를 의미하는 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삶의 방식과 관련 있다고 생각해요. 동년배를 보면 공무원이나 자영업자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퇴직했어요. 그들의 일상은 노년의 삶과 다름없더라고요. 집에서 TV 보며 시간을 때우고 할 일 없이 공원에 가거나 산에 올라요. 그때 느끼는 상실감, 박탈감, 당황스러움 등이 노인들이 갖는 정신적 공황과 비슷하더군요. 나이는 멀었다고 하지만, 그렇게 노년은 제게 바짝 다가와 있는 셈이죠.”
노년기 내면의 거울 ‘예술’
박 작가는 박수근의 ‘노인’, 김대섭의 ‘삶(生)-회(回)’, 고야의 ‘노파의 시간’ 등 작품 속 노인의 모습을 통해 노년의 삶과 죽음, 성(性)에 이르는 다양한 주제를 아우른다. 그림이란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오기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사회가 수치화한 노인의 삶보다 더욱 정확하게 현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시중 노년 주제 도서 대부분 수치, 통계, 정책 등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론적 접근은 개인의 상황 고려 없이 한데 뭉뚱그려 일반화하고 분류하는 과정을 거치죠. 그 결과 값이 유용하긴 하지만 현실을 나타내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누군가의 인생이 수치로 표현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한 개인의 삶으로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노인 문제는 계속 피상적으로 겉돌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책에서 다룬 작품들은 주로 작가가 직접 노년을 겪으며 부딪히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에는 저마다 한 인간이 노인이 되기까지 그동안 쌓아온 삶의 내력이 녹아 있다. 박 작가는 여러 수단 중에서도 이러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노년의 삶을 성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권한다.
“그림은 생각의 여지를 가장 많이 준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무협 만화는 재미있는데 같은 내용의 영화는 유치할 때가 있죠. 만화는 칸과 칸 사이 상상의 여지를 주잖아요. ‘얍!’ 하고 다음 장면에 죽어 있는데, 독자가 그 과정을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는 모든 걸 다 보여줘버리니 재미가 떨어지는 경우가 있죠. 그런 점에서 그림은 정지된 화면 속에 수많은 메시지를 압축하기 때문에 상상력이 폭넓게 발휘됩니다. 그만큼 생각도 깊어지고요.”
여가도 훈련이 필요하다
책에서 언급한 우탁의 시조 속 ‘늙는 길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로 치려 했더니 백발이 제가 먼저 알고서 지름길로 오는구나’라는 글귀에 공감한다는 박 작가. 그는 막을 수 없는 늙음을 거부하며 젊음에 집착하는 이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언제부턴가 안티에이징이 트렌드잖아요. 우리 사회는 젊음을 추구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늙어버린 것 같아요. 요즘 학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공무원이라고 답합니다. 생활의 안정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린 거죠. 청년, 노년 할 것 없이 변화를 두려워하고 안주하는 경향이에요. 젊음의 상징은 도전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신체적 노화보다 정신적, 심리적 노화가 심각하다고 봐요.”
그는 외면의 노화는 막을 수 없지만, 내면의 젊음은 유지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앞서 언급한 젊음의 상징 ‘도전’을 통해서 말이다.
“공자는 논어에 30대를 ‘입지(立志)’라 했어요. 단순한 한자 풀이로는 ‘뜻을 세운다’이지만, 유가적 덕목으로 봤을 때는 ‘뜻을 세워 세상에 나아가 실현한다’는 의미죠. ‘실현’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입지는 곧 도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공자 시대는 차치하고 조선시대만 해도 평균 수명이 50세도 안 됐을 거예요. 이제는 100세 시대잖아요. 당시 30대와 비교해 현재는 입지가 몇 살일까요? 60대겠죠. 그런데 40대부터 변화를 두려워해요. 한창 입지일 때 이미 불혹(不惑)에 도달해버린 거죠. 내면의 젊음은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 유지된다고 봅니다.”
박 작가는 다음 10년을 위한 준비가 안 된 노후는 한마디로 ‘꽝’이라 말한다. 특히 ‘여가를 즐길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그다.
“여가 없는 노년은 시간 때우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다고 여가활동을 잘하는 건 아니에요. 오랜 훈련이 뒷받침돼야죠. 한국 사람이 미식축구를 보면 재미없잖아요. 살면서 본 적도 없고 룰도 모르니까요. 즐기는 방법이 훈련돼 있지 않은 거죠. 그렇듯 다른 여가활동도 마찬가지예요. 하루아침에 재미가 붙지는 않아요. 습관이 되어 쌓이고, 쌓인 것 위에 또 다른 게 더해질 때 점점 즐거워지죠.”
보는 만큼 알게 된다
미술에 관한 여가를 꿈꾸지만 자칫 어렵게 여기고 실천하지 못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미술에 일가견이 있는 박 작가에게 미술을 여가에 접목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봤다.
“한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유행했는데,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현실에서는 일종의 엘리트주의적인 장벽으로 작용하거든요. 앎이 전제되고 행위가 뒤따른다는 거니까요. 예술은 그 반대라고 생각해요. 보는 행위가 먼저이고, 봄으로써 감동하잖아요. 수영을 배우려 할 때, 수영 관련 책 10권을 읽는다고 잘하게 될까요? 재미가 있을까요? 수영을 하려면 일단 물에 들어가야죠. 몸으로 먼저 익히고 지식이 결합됐을 때 묘미가 생기는 거지, 처음부터 지식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수영도, 예술도 아는 게 아니라, 하는 거거든요.”
그는 여가로 미술을 즐기려면 자주 보고, 경험해야 하는데 아직 사회적 여건이 뒤따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한국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일상에서 미술을 접하는 공간이 부족해요. 개인 소장 예술품이 많다는 것도 문제이고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이 원래부터 국가 소유였을까요? 처음엔 개인 소유였죠. 예술품은 저마다 역사를 지니고 있어요. 100년, 200년 지나면 그 작품은 어느덧 나라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죠. 한때는 개인의 재산일 수 있지만, 그쯤 되면 공공의 성격을 띠는 거예요. 그럴 때 소유자들은 작품을 기증하는데, 우리는 개인이 쥐고 있는 작품이 너무나 많습니다.”
박 작가는 공적인 의미에서 사회 구성원들과 예술의 가치를 나누듯 노년에는 개인보다 사회를 위한 활동을 시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후엔 사적인 이익보다 공적인 가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해요. 대표적인 활동이 정치입니다. 개인의 신념과 소신에 의한 정당활동이나 시민활동 등 자기 정신을 객관화하는 일들이 좋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가치 있는 노후를 위한 새로운 도전을 통해 내면의 젊음을 유지하길 바랍니다.”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히는 러시아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소장품 전시인 ‘예르미타시박물관展, 겨울 궁전에서 온 프랑스 미술’(이하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4월 25일까지 전시된다. 러시아 박물관에서 왔다고 해서 러시아 작품을 생각했다가는 오산이다. 17,18세기 러시아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프랑스에서 수집한 회화와 더불어 20세기 초 러시아 기업가들이 사서 모은 인상주의 회화, 조각, 소묘 작품 등 80여개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1991년 이후 26년 만에 성사됐다. 당시 예르미타시박물관의 ‘스키타이 황금’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고 2010년 교환전시로 ‘솔숲에 부는 바람, 한국미술 오천년’ 특별전이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은 두 곳 간의 두 번째 협력전시다. 2016년 예르미타시박물관에서 열린 ‘불꽃에서 피어나다-한국도자명품전’에 대한 교환전시로 추진됐기 때문이다.
니콜라 푸생에서 앙리 루소까지, 프랑스 미술의 거장들이 한 자리에
예르미타시박물관은 300만 여점의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는 세계 규모의 박물관이며, 유럽미술 전시가 특히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17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의 프랑스 미술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예르미타시박물관의 기초를 세운 예카테리나 2세와 로마노프 왕조 시대의 황제들과 귀족, 러시아 기업가들이 열정적으로 프랑스 미술품을 수집한 결과다. 예르미타시박물관은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은 프랑스 미술을 보유한 박물관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예르미타시박물관 본관의 일부이자 로마노프 왕조시대의 황궁이던 겨울궁전에전시돼있는 프랑스 미술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총 4부로 구성 됐는데 제1부인 ‘고전주의, 위대한 세기의 미술’은 니콜라 푸생, 클로드 로랭 등 프랑스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프랑스 미술이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고 유럽미술의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한 17세기의 프랑스 미술을 소개한다. 제2부인‘로코코와 계몽의 시대’에서는 18세기로 접어들어 남녀 간의 사랑과 유희 장면을 즐겨 그렸던 로코코 화가들의 작품과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에 따라 새로운 감각으로 제작된 풍속화, 풍경화를 만날 수 있다.
프랑스 미술은 19세기로 접어들어 큰 변화를 맞이한다.
전시의 3부인 ‘혁명과 낭만주의 시대의 미술’은 나폴레옹의 통치와 일련의 혁명을 겪으며 프랑스 미술계에 일어났던 여러 변화를 소개한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의 영웅적 초상화를 비롯하여 문학이나 신화, 동방의 문물에서 영감을 얻었던 낭만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선보이며, 사실주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와 카미유 코로, 외젠 부댕과 같이 야외 사생으로 인상주의를 예고했던 화가들도 눈길을 끈다.
전시의 마지막인 ‘인상주의와 그 이후’는 고전적인 예술 양식과 결별한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조명한다. 클로드 모네, 폴 세잔, 모리스 드니, 앙리 마티스, 앙리 루소 등 인상주의 이후 근대 거장들의 작품은 20세기 미술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소장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계몽 군주가 되고자 노력했던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 철학자 드니 디드로를 비롯한 동시대 저명인사들과 친분을 유지하며 유럽 각지에서 미술품을 사 모았다. 그녀의 미술품 수집에 대한 열정은 동시대 귀족들에게도 이어졌다. 18세기 말 이후 많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들이 러시아의 공공건물과 상류층 저택을 장식했다. 이러한 개인 소장품들이 20세기 초에 국유화되면서, 오늘날 예르미타시박물관은 다채로운 프랑스 미술 소장품을 보유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예카테리나 2세를 비롯하여 프랑스 미술을 사랑했던 수집가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예르미타시박물관展을 통해 러시아와 프랑스의 문화적 맥락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관람정보
기간 ∼4월15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관람료 성인 6천원 / 중, 고등, 대학생 5500원
전시문의 1688-0361
위치 지하철 4호선, 경의중앙선 이촌역 2번 출구에서 버스 400번·502번 타고 국립중앙박물관 하차
바야흐로 봄이다. 산으로 들로 봄꽃 나들이도 좋지만, 풍성하게 마련된 전시도 즐길 겸 갤러리 나들이를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올 한 해 눈여겨봐야 할 5가지 미술전시와 더불어 연간 일정을 함께 정리해봤다.
◇ 빔 델보예 개인전
장소 갤러리현대 일정 2월 27일~4월 8일
신개념주의(neo-conceptual) 예술작품들로 주목받는 벨기에 작가 빔 델보예의 국내 첫 전시다. 돼지 몸에 문신을 새긴 작품들을 선보이며 ‘돼지 문신’ 작가로도 불리는 그는 드로잉, 조각, 사진 등 폭넓은 장르를 아우르며 독특한 소재로 구현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문양의 미학적 요소를 사물에 응용한 작품들과 일반적인 형태와 개념의 맥락을 비트는 작품 30여 점을 보여준다. 고딕 양식으로 레이저 커팅한 스틸, 손으로 조각한 타이어, 살라미 햄으로 구성한 대리석 문양의 바닥 사진 등 작가만의 유머러스한 작품세계와 전통적 요소가 맞물리는 기이한 경험을 선사한다.
>>빔 델보예 (Wim Delvoye, 1965~)
박제된 돼지의 몸에 명품 브랜드의 로고를 그려 넣으며 경악과 흥미로움의 영역을 넘나드는 작품세계로 유명해진 빔 델보예는 스위스 팅겔리 미술관(2017), 룩셈부르크 현대미술관 무담(2016),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2016), 파리 루브르 박물관(2012), 로댕 박물관(2012), 베니스 구겐하임 컬렉션(2009), 리옹 현대 미술관(2003), 파리 퐁피두 센터(2000)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베니스비엔날레, 시드니비엔날레, 상해비엔날레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날레에 참여하며 독창적인 예술관을 펼치고 있다.
◇ 정강자: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
장소 천안 아라리오갤러리 일정 5월 6일까지
한국 아방가르드 작가계의 선두주자이자 1970년대 대표 여성 작가인 정강자의 회고전이다. 정 작가는 개인전을 위해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쳤지만, 지난해 7월 위암으로 갑작스럽게 타계하며 이번 전시는 그의 유고전이자 최초의 회고전이 됐다. 올해 1월 31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2월 25일까지)과 천안(5월 6일까지)에서 동시에 개최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생을 기리고 그의 50여 년 화업을 미술사적, 사회적으로 균형 있게 재조명하는 데 주력한다. 작가의 최근작과 더불어 아카이브 자료를 배치해 자신의 삶을 여성상과 자연물, 기하학적 형태에 투영한 작품들을 아울러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정강자 (鄭江子, 1942~2017)
홍익대학교 서양학과 졸업 후 ‘키스미’(1967)처럼 파격적인 조형작업을 비롯해 ‘투명풍선과 누드’·‘한강변의 타살’(1968), ‘기성 문화예술의 장례식’(1970)과 같은 퍼포먼스에도 참여했다. 1960~70년대 당시 젊은 예술인들의 도전이 응집된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신전(新展)’의 일원으로 한국 미술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여러 경계와 틀로부터 해방되고자 했으나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는 작업에 대한 선정적인 시선을 감내해야만 했다.
◇ 니키 드 생팔 개인전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일정 6월 30일~9월 25일
프랑스 여류 작가 니키 드 생팔의 작품 120여 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특별 전시다. 프랑스 파리 스트라빈스키 분수의 공공미술로 잘 알려진 그의 대담성과 순수함을 드러내는 입체조형물 및 회화, 판화 등으로 구성된다. 화려한 컬러와 독특한 구조가 돋보이는 그의 후기 입체작품들을 폭넓게 전시할 계획이다.
>>니키 드 생팔 (Niki de Saint Phalle, 1930~2002)
여성지 ‘보그’와 ‘엘르’, 사진 주간지 ‘라이프’의 사진 모델로도 등장했을 만큼 매혹적인 외모를 지닌 니키 드 생팔은 유년 시절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며 겪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미술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슈팅 페인팅’(1961) 등 그의 작품은 페미니즘 성향이 두드러지며 여성을 주제로 한 조형물이 많은 편이다. 그가 만들어낸 뚱뚱한 여성 조각인 ‘니나’ 시리즈를 비롯해 여성의 몸을 과장해 표현한 작품에는 여성으로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분노와 고발 의식이 담겨 있다.
◇ 윤석남 개인전
장소 학고재갤러리 일정 9월 예정
2013년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I’m Not a Pine Tree)’ 이후 5년 만에 열리는 윤석남의 개인전이다. 홍콩 아트바젤(세계적인 미술품 아트페어) VIP 책자 전면에 소개되는 등 국내외적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그의 독창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큐레이터들의 극찬을 받은 설치미술 ‘핑크룸’(1998)이 갤러리 한 층을 가득 채울 예정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민화 기법을 통해 제작한 그의 신작 발표가 예고돼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있다.
>>윤석남 (尹錫男, 1939~)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세’(1919)의 극작가 겸 영화감독인 윤백남의 셋째 딸로 태어나 해방 이전까지 만주에서 살았다. 1954년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6남매를 홀로 키우며 인고의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는 줄곧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로 불리고 있다. 40대에 늦깎이 화가로 데뷔했지만 ‘어머니의 이야기’(1995), ‘부엌’(1996), ‘허난설헌’(2005) 등 꾸준히 작품을 내놓으며 여든의 나이에도 여전히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 마르셀 뒤샹 전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일정 2018년 12월~2019년 4월 예정
국내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리는 마르셀 뒤샹의 전시다.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작가의 주요 작품 및 아카이브는 물론, 마르셀 뒤샹을 소재로 한 사진, 드로잉,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Man Ray, 1890~1976)를 비롯한 당대 작가들의 관련 작품까지 총 110여 점을 소개한다. 특히 변기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뒤샹의 대표작 ‘샘’(1917)을 이번 국내 전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도쿄국립박물관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이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립미술관으로 이어지는 순회전이다.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 1887~1968)
프랑스 화가 자크 비용(Jacques Villon, 1875~1963)과 조각가 레이몽 뒤샹 비용(Raymond Duchamp-Villon, 1876~1918)의 동생으로 인상주의, 포비즘, 큐비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다. 입체파의 균열된 형태, 사진과 영화의 스톱 모션 등 자연의 시공간에 관한 지배적 관념을 뒤엎는 아방가르드 회화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 2’(1912)는 당시 예술평론가들 사이에 논란을 일으켰을 만큼 독특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여성으로 분장하고 찍은 사진 ‘로즈 세라비’(1921), ‘심지어,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1923) 등 파격적인 예술세계를 보였으며, 다다이즘의 대표 작가로 손꼽힌다.
◇ 2018 상반기 전시 일정
3월 '이정진: 에코-바람으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3월 8일~7월 1일
'예술가 (없는) 초상'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미술관 3월 20일~5월 20일
김용익 개인전 ‘Endless Drawing’ 국제갤러리 3월 20일~4월 22일
'한국서예사특별전: 명재 윤증'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3월 29일~5월 20일
4월 이반 나바로 개인전 'THE MOON IN THE WATER’ 갤러리현대 4월 19일~5월 27일
5월 '내가 사랑한 미술관: 근대의 걸작'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5월 3일~10월 14일
'강요배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5~6월 예정
6월 육근병 개인전 ‘생존은 역사다’(가제) 아트선재센터 6월 15일~8월 5일
◇ 2018 하반기 전시 일정
7월 '박이소: 기록과 기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7~12월 예정
'조선민화걸작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7월 5일~8월 26일
'이창수 개인전' 학고재갤러리 7월 예정
8월 '프란시스 알리스 개인전' 아트선재센터 8월 31일~11월 4일
9월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2018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9월 6일~11월 18일
11월 아키 사사모토 ‘항복점(Yield Point)’ 아트선재센터 11월 23일~2019년 1월 13일
'제국의 황혼, 근대의 여명: 근대전환기 궁중회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1월~2019년 2월 예정
12월 '한국현대미술대가: 한묵'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2월 4일~2019년 3월 10일
접하는 순간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곧 칠순을 앞두고 있는 최백호(崔白虎·68) 가 부르는 노래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 소리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수만 가지 감각들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예술품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그렇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만들어낸 흔치 않은 예술가의 자리를 갖게 된 그가 이제 영화감독이라는 오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고 종합적인 예술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해가고 있는 최백호를 만나 미래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확인해봤다.
청년 최백호는 친구 매형의 라이브 카페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에 첫 앨범을 낸 이후 어언 40년,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두터운 세월의 결이 느껴진다. 그러나 1950년에 태어나서 전후 베이비붐 세대와 함께 살아오면서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그는 지금 ‘은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가수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적, 아이유, 박주원 등 젊은 실력파 후배들과의 협업과 월드 뮤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도전 등 최백호는 새로운 피로 자신의 감수성을 뜨겁게 채우고 있는 중이다.
계획하며 살지 않는 사람
그뿐만이 아니다. 최백호의 예술적 취향은 일찌감치 화가 쪽으로도 뻗어서 다수의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2018년 4월에 열릴 다섯 번째 전시회도 준비 중이다.
“스무 점 정도 올릴 예정이에요. 테마는 나무고요. 제가 나무밖에 못 그리기도 하고.(웃음)”
그는 자신이 계획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의 ‘그때그때 대충대충 살아왔다’는 말은 ‘먼 계획을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그때그때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주변 사람만 피곤하죠.(웃음) 41주년이 되는 올해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영화감독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갑작스런 일이 아니고 사실 오래 준비해왔어요. 시나리오를 썼고 홍보 계획도 세웠고.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없어서 못 만들고 있었죠. 마음에 딱 맞는 사람이 없었어요.”
영화 제목은 ‘미사리’. 그는 남자 주인공으로 가수를 생각하고 있다 했다. 영상과 음악 위주의 영화가 될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선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영화감독으로의 새로운 도전
기왕 미사리 얘기가 나왔으니 미사리와 음악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시니어에게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미사리에서는 4~5년 정도 공연을 한 적 있어요. 지금은 미사리 카페가 두세 군데 남았나.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조금 있어야 했는데, 우리나라는 뭐든 잘된다고 하면 다 달려들어서 하려다가 힘이 더 드는 지경이 되고 말아요.”
미사리가 쇠퇴한 이유는 가수 출연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기를 끌자 라이브 카페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출연 가수들 출연료가 치솟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가수 출연료가 오르면 음식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해도 음식 맛이 없으면 누가 찾겠는가.
“그래서 가수들이 모여서 출연료를 올리지 말자고 얘기했어요. 출연료 기준은 송창식 선배에게 두자고 했죠. 그런데 그게 안 지켜지더군요. 그래서 시장이 흐려졌고…. 우리나라는 참 낭떠러지가 있는데도 밀려가요.”
혹시 미사리 같은 음악의 대안공간을 다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러한 궁금증에 선유도가 좋은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선유도 안에 공연장이나 레코딩 스튜디오를 만들고, 코너마다 버스킹을 할 수 있게 한 다음 입장료는 3000~5000원 정도 받으면 좋은 이벤트 공간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홍대와도 연결돼서 다리에서 버스킹도 가능할 테고, 좋은 관광코스로도 활용할 수 있죠.”
과거에는 자연주의적인 느낌이 있었지만 요즘은 도로가 나고 식당이 난립해서 이제 변해버린 미사리의 운명에 대하여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배어나왔다. 그러한 느낌이 그가 만들 영화에도 담기게 될까 궁금했다.
“영화감독은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어요. 원래는 미대를 가고 싶어 그림 공부를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를 갔죠. 그런데 군대에서 몸이 안 좋아서 나오게 됐고, 생활 때문에 노래를 시작했죠. 영화는 머릿속에 계속 갖고 있던 생각인데, 아마 이번 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예요.(웃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요.”
최백호의 고민
사단법인 한국음악발전소 대표, 그리고 문화관광부와 마포구가 협약해 만든 음악 창작공간인 뮤지스땅스 대장으로도 일하고 있는 최백호는 어찌 생각하면 가수 일 이상으로 행정적인 영역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런 입장에서 나오는 목소리에는 현장에서 부딪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현실감이 있었다.
그가 이끄는 한국음악발전소는 무소속 프로젝트라 하여 소속사 없는 실력 있는 뮤지션들을 모아서 경연대회를 하고 있다. 413개 팀들 중 8팀을 뽑아서 앨범을 만들었고 지난 연말 12월 15일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공연을 했다. 연령, 장르 제한은 없다. 덕분에 힙합부터 국악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독립음악가들을 발굴하는 콘테스트로 참여율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올해가 4회째인데, 예산이 없어서 문제가 되고 있단다. 지원해주던 단체에서 지원을 끊은 것이다. 다행히 3회는 CJ에서 지원해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그에게 행정가로서 겪어야 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음악창작소 프로젝트가 있는데 정부에서 전체 운영자금으로 10억 원 규모를 책정했어요. 원래 시작은 전국 세 군데에서 했어요. 그래서 세 곳으로 자금이 나뉘어 지원됐죠. 그런데 지방에서도 참여하기 시작해서 지원해야 할 곳이 여덟 군데로 늘어난 거예요. 문제는 인디밴드가 없을 것 같은 지역에도 지원금이 들어간다는 거죠. 인디밴드를 한다는 사람들은 다 서울로 오는 게 현실인데, 여덟 곳으로 늘어났어도 세 군데일 때의 예산으로 계속 쓰고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면 말도 안 되잖아요? 그래서 15억 원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죠.”
뮤지스땅스 대장으로서 속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도 자체 운영이 잘되고 있으며 후배들이 좋아한다는 게 보람이다.
한마디 잘못하면 삶이 무효가 되는 세상
단체의 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 만나는 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음악 작업 차원에서도 인디밴드부터 아이돌 등 10대부터 노년까지 남녀노소를 다 만나며 사는 것이 최백호의 요즘 삶이다. 그렇게 많이 만나다 보면 사람 보는 눈이 생기지 않을까.
“특별히 사람을 평가해서 만나는 건 아니에요. 거리를 어떻게 두느냐의 차이죠. 그런데 오랜 경험으로 처음 보고 대화를 한 번 해보면 대충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나이 들면서 더 멋있어 보인다고 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날렸다.
“젊었을 적에 워낙 별로여서 나이 드니 조금 나아진 거지.(웃음) 나이 들수록 조심해야 될 게 많아요. 사람을 사귈 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래요. 가장 중요한 게 말이죠.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해요. 우리말이 거칠고 극단적이어서 잘 써야 하거든요. 아주 품위 있는 말도 가능하고 정말 천박한 말도 가능하고. 외국어에 비해 그 폭이 훨씬 크니 상처를 주게 되는 게 우리 말이죠.”
그러고 보니 그는 SBS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 진행을 맡고 있다. 대중과 소통하는 중심에 있으니 당연히 말에 대해 더욱 민감한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올해 10년이 되죠. 라디오를 하고 있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요즘은 한마디 잘못하면 삶이 리셋되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말을 조심하려면 되도록 사람 만나는 걸 줄여야 해요.(웃음)”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처럼, 그도 사람들이 SNS를 하는 것을 이해 못한다고 말했다.
“특히 연예인들이 SNS에서 서로 모여 왜 자기 생각을 그리 밝혀야 하는가 싶죠. 책임을 지려면 사회적 활동을 하든지…. 저는 모르겠어요. 자기 일만 열심히 해도 될 텐데.”
최백호의 희로애락
최백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라고 회고했다.
“재수할 때였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노래를 한다고 3~4년 고생했죠. 결핵을 앓았어요. 생활은 안 되고. 그 시절 너무 심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어지간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의 아버지는 고 최원봉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이었으며 스물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당선됐지만 최백호가 태어난 지 5개월 되던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아버지에 대해선 무한한 존경심이 있어요.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 존재는 계속 제 곁에 있었고, 제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딸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그녀가 시집갔을 때를 꼽았다.
“딸아이는 사정 때문에 다섯 살 때 미국으로 갔어요. 처가가 미국에 있거든요. 그때부터 딸을 일 년에 두 번 정도 보면서 살았죠. 딸이 사춘기를 겪었을 때 아내는 옆에 있었지만 나는 없었어요. 그 아이가 스무 살에 한국으로 잠시 왔는데, 그때만 해도 저와 거리가 있었고 자주 싸웠죠.”
그 시기 이후 딸은 다시 공부를 하러 외국을 가게 됐고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왜 자신을 그렇게 멀리했나를 이해하면서 굉장히 친해졌어요. 이젠 뭐 친구처럼 모든 걸 알고 지내요. 결혼식도 예식장에서 하지 말고 바닷가에서 하라고 했더니 정말 바닷가에서 했고. 저도 딸을 이해하게 됐죠. 딸아이도 저에 대해선 이제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구나 싶어요. 정말 큰 행복이죠.”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능력에 비해 많이 성공했다 싶죠.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림도, 음악도 따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어요.”
시간은 그를 성장시켰고 변화하게 만들었다. 그는 옛날에는 곡을 써도 남을 안 줬다고 한다. 자신이 불러야 하는 노래다 싶어서 욕심이 나서 계속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탐이 나는 곡이라도 주변 후배들에게 준다. 히트곡을 더 만들고 싶은 욕심은 없기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긴 또 다른 변화, 그는 좀 더 세심해졌다. 그가 현재 부산에서 진행하고 있는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도 과거 같으면 벌써 끝났어야 할 일이다.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는 과거 조선소가 있었던 마을을 문화마을로 키우려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다. 이 작업에 그는 두 달간 매달려 있는 상태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져도 그만큼 결과물이 좋아지니까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젊을 때 성격이 급했고 지금도 급한 편이라고 말하는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변화된 모습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있다.
“새해 소망은 올가을부터 만들기 시작할 영화를 잘 완성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큰일이 되겠죠.”
원로임에도 고고하지 않고 일가를 이뤘음에도 계속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가 가진 그러한 소탈함이 단단한 철학으로 다듬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그는 영원히 예술가이며 계속 우리 곁에 있으리라는 안정감을 주는 것 아닐까. 최백호의 새로운 도전인 영화가 어떤 미학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이유다.
얼마 전 필자는 창신·숭인 지구 도시재생을 알아보기 위해 이 동네를 찾았다. 창신동은 필자에게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동네다. 선머슴처럼 천방지축이던 중학생 시절과 꿈 많던 여고 시절을 창신동에 있는 학교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돈암동에서 보문동 신설동을 지나 숭인동까지 버스를 타고 통학했는데 학교 앞에서 내리면 잘 다려 허리 잘록하게 맵시 있게 입었던 흰색 교복이 마구 구겨져서 한동안 돈암동 집에서 창신동 언덕을 걸어 통학하기도 했다.
이 동네는 그렇게 세월이 흘렀는데도 골목마다 아직 친근함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다니던 학교는 너무 많이 바뀌어 안타까웠다. 담쟁이가 멋졌던 유서 깊은 빨간 벽돌의 아름답던 교정도 없어지고 학교는 강남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유명 브랜드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버린 듯 슬펐다.
이렇게 재개발로 큰 아파트 단지가 생겼지만, 근처 동네 분위기는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50여 년 전에 있던 한의원 간판도 그 자리에 있었다. 꽤 높은 언덕 위에는 필자 친구 집이 있었는데 그 시절의 분위기가 여전히 느껴졌다. 무허가 집이 많았던 허름한 이 동네는 2000년대에 서울시 뉴타운으로 지정되었는데, 2013년 7개 구역 주민들의 강력한 반대 속에 뉴타운이 해제되는 역사적인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재개발되면 깨끗하고 비싼 집에서 살게 될 텐데 왜 반대를 한 것일까? 거기에는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주민 비율이 많은 이 동네에는 자기 집에서 세를 주어 경제적 효과를 보는 주민이 많았다. 그러나 재개발을 하게 되면 살던 집도 없어지고 새 집에 들어갈 부담금도 내야 하고 세를 받던 경제적 효과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몇십 년 동안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하게 지내던 주민들과의 이별도 두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뉴타운을 반대했고 이후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되어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도시재생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마을 공동체의 활성화와 지속적 관리를 통해 도시환경을 개선하고 지역경쟁력을 확보해 삶의 질을 높이는 사업이다. 창신·숭인 지역 도시재생 사업은 노후주택 개량과 기반시설 정비, 공동시설 확충을 진행하며 이 지역의 특징인 봉제산업 활성화와 지역 명소를 발굴해 관광자원을 조성하고 있다. 아울러 성곽과 같은 역사적 자원과 공공미술, 예술·문화활동 장려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창신·숭인 지역에서 예술활동을 했던 분으로는 박수근 화백, 가수 김광석, 아티스트 백남준 외에도 훌륭한 예술가가 많다.
지역 주민 모두를 위한 문화, 소통, 창작의 공간으로 예술가와 전문가, 지역 활동가가 함께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창신소통공작소도 있고 봉제박물관도 건립 중이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봉제사업을 해온 분들의 이름과 회사명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명판도 눈길을 끌었다.좁은 골목길을 바쁘게 오가는 오토바이를 보며 활발한 생명력을 느끼기도 했다. 이들의 노고로 우리나라 봉제산업이 한층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남준 기념관은 그가 살았던 집터를 매입해 그의 삶을 소개하고 있는 곳이다. 옆에 작은 카페도 있어 들러보면 좋다. 기념관으로 가는 골목 바닥에는 '내일,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씌어 있다. 창신·숭인 지구 사람들의 내일도 더 행복하고 아름답기를 바란다.
'아티스트 다시 태어나다 (The Artist: Reborn)' 영화는 김경원 감독 작품으로 독립영화제에서 매진될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주연에 화가 지젤 역으로 류현경, 갤러리 대표 재범 역으로 박정민이 출연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라는 게 미남 미녀 배우가 나와야 하고 엄청난 물량을 투자해야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류현경이나 박정민이나 그리 잘 알려진 배우도 아니다. 그리고 크게 돈 드는 세트를 만든 것도 아닌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지젤은 덴마크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귀국했다. 무명 화가인 그녀에게 국내 화단이 싸늘한 대우를 할 것은 빤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 유명 갤러리 대표 재범을 만나고 그녀는 하루아침에 재범의 수완으로 한국 화단의 신데렐라가 된다. 그녀의 그림 값은 천정부지로 뛴다. 그녀는 물론 갤러리도 돈 방석에 앉는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유명인이 되었다 듯이 이제 잘 나가는 화가로 날아갈 일만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지젤이 심장마비로 죽는다. 그녀의 그림은 유작이 되어 희소성 때문에 더 뛴다. 재미있는 것은 죽었던 그녀가 영안실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의학적으로는 죽었는데 심폐 소생 시술 후 자동 소생한다는 ‘라자루스 증후군(Lazarus syndrome)’ 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성경에서 예수가 되살린 라자로 (Lazarus)에서 이름을 따 왔다고 한다. 작가들은 이런 의학지식을 잘도 찾아낸다.
무명화가이므로 알려진 것도 별로 없다. 그리고 갑자기 죽었다. 재범은 특유의 마케팅 기법으로 그녀의 작품 값을 높여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살아났다.
그대로 죽어 있으면 그녀의 작품은 날이 갈수록 고가로 팔리게 되는데 그녀가 살아났으니 그간의 마케팅 수법은 더 이상 안 통하게 생겼다. 신비주의는 벗겨지고 희소성이라는 가치도 소멸될 판이다. 재범은 지젤에게 세상에 나타나지 말고 몰래 한 해에 5편 정도만 그리라고 제안한다. 재범은 지젤이 마치 생전에 그렸던 것처럼 화랑에 내걸어 고가에 팔 전략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제안을 거부한다. 작가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마케팅에 의해 거짓 지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한다. 재범은 결국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녀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를 목 졸라 살해하려 한다. 죽은 줄 알았던 지젤은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난다. 두 번 째 살아 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은 고가의 작품만 거는 화랑이 아니라 공공 기관에 희사하거나 거리에서 전시회를 한다.
이 영화는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계의 허구적 마케팅과 작품의 가치 등을 되돌아보게 한다. 예술 작품의 가치는 누가 정하는가, 진정한 예술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명제를 되짚어보게 한다. 요즘 예술은 과거보다 많이 가깝게 다가 와 있지만, 예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볼만한 영화로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