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547돌 한글날이다. 쏟아지는 은어와 신조어를 공부해가며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에도 급급한 요즘이지만, 오늘만큼은 한글의 소중함에 감사하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되새겨보는 하루를 보내보는 것도 좋겠다.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한글날에 볼만한 영화 세 편을 추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말모이 (MAL·MO·E: The Secret Mission, 2018)
1940년대 우리말이 금지된 경성, 극장에서 해고된 '판수'(유해진)는 아들 학비를 대기 위해 가방을 훔치려다 실패한다. 이후 면접을 보러 간 그는 가방 주인이자 조선어학회 대표인 '정환'(윤계상)을 만나고, 얼떨결에 조선어학회에 들어간다. 까막눈이던 판수는 그곳에서 난생처음 글을 읽고 우리말 사전을 만들면서 한글의 소중함에 눈을 뜬다.
영화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학술단체인 조선어학회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한글 사전을 만들어나가는 내용으로, 실화를 각색한 작품이다. 영화 제목의 의미는 사전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며 극 중 조선어학회가 시행한 비밀작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잊고 있던 한글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2. 동주 (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2015)
조국의 언어로 시를 짓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은 일제강점기, 한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주’(강하늘)와 ‘몽규’(박정민)는 일본식 이름을 쓰길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신념을 위해서라면 거침없이 행동하는 몽규는 일본으로 떠난 뒤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하고, 우리 말과 글을 사랑한 동주는 시대에 대항하는 마음을 조용히 시로 써나간다.
영화 ‘동주’는 조국 독립을 간절히 바라던 시인 윤동주와 그의 사촌 송몽규의 삶과 청춘을 담은 영화다. 현존하는 자료가 모두 흑백인 것을 감안해 현실감을 높이고자 흑백 영화로 제작됐다. ‘서시’와 ‘별헤는 밤’ 등 모두에게 익숙한 시는 배우 강하늘의 목소리로 흘러나와 잃어버린 나라를 그리워하는 영화 속 동주의 심리를 대변한다.
3. 천문: 하늘에 묻는다 (Forbidden Dream, 2018)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히는 '세종'(한석규). 그는 관노로 태어나 종3품 대호군이 된 천재 과학자 '장영실'(최민식)과 큰 꿈을 함께하며 여러 위대한 업적을 이뤄낸다. 20년간 돈독한 관계를 이어온 두 사람이지만 어느 날 임금의 가마인 안여가 부서지는 사건으로 세종은 장영실을 문책하며 하루아침에 궁 밖으로 내치고, 장영실은 자취를 감춘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세종과 장영실의 업적과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이 결합된 ‘팩션 사극’이다. 천문 관측기구인 간의와 간의대, 물시계인 자격루 등 장영실의 발명품을 실제에 가깝게 재현해 작품의 몰입도를 높였으며 영화 ‘넘버3’, ‘쉬리’ 이후 20년 만에 호흡을 맞춘 배우 최민식과 한석규의 환상적인 ‘캐미’가 완성도를 더했다.
● Exhibition
◇퓰리처상 사진전
일정 10월 18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
언론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퓰리처상 사진전이 6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1942년부터 2020년 퓰리처상 수상작까지 총 134점의 수상작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해 한국인 최초로 사진 부문에서 수상한 로이터통신 김경훈 기자의 작품도 공개된다. 제3전시실에서는 2014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취재 도중 사망한 여성 종군기자 안야 니드링하우스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진행한다. 수상작과 더불어 다큐멘터리 필름과 퓰리처상 주요 수상작을 미디어 아트로 구성한 영상 콘텐츠도 제공한다.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0
일정 9월 30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과 현대자동차가 지난해 진행한 ‘프로젝트 해시태그’ 공모사업의 결과 보고전이다. 전시에 참여한 ‘강남버그’와 ‘SQC’는 디자이너, 건축가, 연구자로 구성된 팀으로 서로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창작자들 간 협업을 지원하는 사업 취지에 따라 선발됐다. 이번 전시에서 강남버그는 ‘천하제일 뎃생대회’, ‘강남버스’ 등 강남의 과거와 현재를 표현한 작품으로 한국 사회의 쟁점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SQC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에서 밀려난 종로3가 소수자를 ‘도시퀴어’라 명명하며 이들의 문제에 주목한다.
◇새 보물 납시었네, 신국보보물전 2017-2019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신규 지정된 국보·보물을 공개한다. 국보 제151-1호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을 비롯해 총 83건 196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를 지키다’, ‘예술을 펼치다’, ‘염원을 담다’ 등 총 3부로 구성돼 각각 기록유산과 예술품, 불교 문화재를 소개한다. 전시실 입구에서 보여주는 국보와 보물에 대한 전문가와 시민들의 인터뷰와 영상은 문화유산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전시장을 찾지 못하는 관람객을 위해서 박물관 누리집을 통해 온라인 전시도 진행한다.
◇명상 Mindfulness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피크닉
‘코로나블루’를 겪는 현대인들을 위한 맞춤형 전시. 명상이 주는 힘과 의미를 회화, 영상, 공간디자인 등 총 8점의 설치미술 작품으로 설명한다.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치, 대만 작가 차웨이 차이, 미디어 아티스트 미야지마 타츠오 등 실제로 수행을 실천하는 각 분야 예술인들이 전시에 참여한다. 동양적이고 자연적인 느낌을 주는 나선형 구조의 설치작품 ‘느리게 걷기’, 공간 전체를 주황빛으로 연출한 작품 ‘공간’ 등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들을 곳곳에 배치해 관람객들이 작품보다는 내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 Stage
◇캣츠
일정 9월 9일~11월 8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트레버 넌 출연 조아나 암필, 앨리스 배트, 헤이든 바움 등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로 T.S. 엘리엇의 우화집이 원작이다. ‘젤리클 축제’에 모인 고양이들의 다양한 사연을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표현한다. 초연 40주년을 기념해 세계적인 디바 ‘조아나 암필’, 한국인이 사랑하는 월드스타 ‘브래드 리틀’ 등 최고의 기량을 갖춘 배우들이 함께한다. 2017년 한국 뮤지컬 사상 최초 200만 관객을 돌파한 이후 진행되는 첫 공연이다.
◇킹키부츠
일정 11월 1일까지 장소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연출 조광화 출연 이석훈, 박은태, 김지우 등
팝 가수 신디 로퍼가 작사·작곡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폐업 위기에 처한 구두공장을 살리기 위해 여장 남자용 부츠 판매에 뛰어든 두 남자의 도전기를 담았다. 1980년대 영국 W.J. 브룩스 공장의 실제 성공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마리퀴리
일정 9월 27일까지 장소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김태형 출연 김소향, 옥주현, 김히어라 등
과학자 ‘마리퀴리’의 삶을 각색한 팩션 뮤지컬로 리튬 발견이라는 업적 뒤에 가려진 인간 마리퀴리의 고뇌를 밀도 있게 그렸다. 초연 당시 5인조였던 라이브 밴드를 7인조로 보강해 무대의 완성도를 높였다.
● Movie
◇오! 문희
개봉 9월 2일 장르 코미디, 드라마 감독 정세교 출연 나문희, 이희준, 최원영, 박지영 등
평화로운 농촌마을, 뺑소니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 ‘문희’와 그의 아들 ‘두원’이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서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관록이 빛나는 나문희와 리얼리티 연기의 대가 이희준의 호흡이 작품에 재미를 더한다. 특히 59년 연기 인생 최초로 액션에 도전한 나문희는 나무에 오르고 트랙터로 논두렁을 달리는 등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을 선보여 기대를 모은다. 정세교 감독이 나문희를 상상하며 시나리오를 쓴 만큼 ‘문희’가 나문희의 ‘인생 캐릭터’로 새롭게 등극할지 주목된다.
◇카일라스 가는 길
개봉 9월 3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정형민 출연 이춘숙
80대 최고령 오지탐험가 이춘숙 씨의 ‘카일라스’ 순례 여정기를 담은 로드무비다. 자연을 거닐며 인생을 돌아보고 다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이 씨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개봉 9월 예정 장르 액션 감독 매튜 본 출연 랄프 파인즈, 해리스 딕킨슨 등
킹스맨 시리즈의 프리퀄 영화로 베일에 싸여 있던 킹스맨의 기원을 밝힌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전쟁을 모의하는 폭군과 범죄자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 Book
◇나는 당신이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주홍 저·비타북스)
대한민국 치매 주치의 박주홍 박사가 치매 예방에 좋은 생활 루틴을 제안한다. 컴퓨터를 배우며 치매를 늦춘 할머니, 꾸준한 산책으로 기억력이 개선된 환자 등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뇌 활성화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8개 지압법과 31가지 부위별 뇌 강화 운동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소설여행 (김유정 저·나무나무)
‘냉정과 열정 사이’의 피렌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발리 등 소설 속 도시를 향해 떠난 작가의 에세이. 17곳의 여행지 소개와 더불어 소설의 의미를 작가만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코로나가 시장을 바꾼다 (이준영 저·21세기북스)
‘트렌드 코리아’ 시리즈 공저자인 이준영 교수가 코로나19 이후 변화한 소비 트렌드를 7개 키워드로 정리했다. ‘홈코노미’, ‘로컬리즘’ 등 포스트코로나 시대 소비 지형을 조망한다.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할 때 (빅터 프랭클 저·청아출판사)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이 1946년 오스트리아의 한 시민대학에서 했던 강연을 책으로 옮겼다. 고난 속에서도 삶에 대한 긍정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35년간 암을 연구해온 암 과학자 김규원(金奎源·68) 서울대학교 약대 명예교수. 그는 2006년부터 투병해온 암 환자이기도 하다. 김 교수에게 암은 한때 동료처럼 친근했지만, 하루아침에 어둠 같은 존재로 돌변했다. 그러나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자 몸과 마음이 공명하기 시작했고, 육체적 상실은 정신적 자유로 승화했다. 아직 암은 완치되지 않았지만 그는 ‘미로 속에서 암과 만나다’를 통해 어둠 속 암에 작은 희망의 등불을 비춰보고자 한다
단순 비염으로 여기고 이비인후과를 찾았던 김 교수. 얼마 뒤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강상악동 미분화암종’이라는 희귀 암 진단을 받은 것. 암 연구자답게 그는 관련 문헌부터 찾아봤다. 자료에 따르면 극히 희귀한 암으로, 증식 속도가 매우 빨라 판정 후 생존기간이 수개월에 불과하며 뚜렷한 치료법도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암들은 치료 방식이 확립돼 있어 대부분 생존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제 경우엔 워낙 희귀 암인 데다가 몇 개월 안에 사망한다니 무척 막막하더라고요. 그동안 쌓아온 암에 관한 지식도 그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더군요. 관념적으로만 대해왔던 암과 실제는 천지차이였죠.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휩싸였고 모든 게 다 멈춰버린 듯했어요.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딸과 아내에게 유서도 미리 써둘 정도로 불안했었죠. 당시 딸아이가 고1이었는데, 대학 갈 때까지만 살았으면 소원이 없겠더라고요.”
몸과 마음의 공명으로 찾은 평안
다행히 그는 투병생활을 잘 견뎌냈고, 간절했던 소원도 이뤘다. 또 그동안의 경험을 담은 저서 ‘미로 속에서 암과 만나다’도 펴냈다. 같은 처지의 암 환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희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더 빨리 선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간 두 번이나 재발이 됐고 후유증 치료를 하느라 시간이 부족했어요. 중간에 전공 관련 서적을 출간하긴 했지만, 이번 책은 암 환자와 그 가족들을 염두에 두고 쓴 거라 의미가 다르죠. 전반부에는 당시 수기로 적어뒀던 투병일지를 실었고, 후반부에서는 항암제와 암의 역사를 짚어봤어요. 제 경험을 통해 공감과 위로의 말씀도 드리고자 했지만 암 연구가 나아갈 길을 논함으로써 보다 실질적인 희망을 제안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누군가에게 위안을 줄 만큼 의연해진 모습이지만, 김 교수 역시 처음엔 고통스러웠다.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사라질 수 있게 하는 죽음이 눈앞에 와 있다는 공포가 가장 컸다. 주변에서 건네는 위로의 말에 힘을 얻기도 했지만, 충격의 나날들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동료나 제자들이 와서 긍정적인 말을 해주면 잠시 기운이 나요. 그러다 혼자일 땐 피할 수 없는 두려움과 마주하곤 했죠.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어느 누구도, 가족조차도 내 앞에서는 죽음을 언급하지 않았어요. 저 혼자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였던 거죠. 초반엔 죽음만 떠올리면 마음이 확 얼어붙었어요. 굳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진 건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면서부터였죠.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다 죽는다, 누구도 자신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생성된 모든 것은 변화와 소멸을 겪는다, 나도 마찬가지, 암도 마찬가지…. 명상을 통해 그런 생각들에 집중하다 보니 차차 덤덤해지고 편해지더군요. 그렇게 얼어 있던 마음이 녹아 흘러가고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평안을 되찾으려 애쓰고, 명상으로 마음이 아물어갔지만, 몸 곳곳엔 암이 휩쓸고 간 흔적이 뚜렷했다. 후각과 미각, 그리고 청각 대부분을 상실했고, 괴사가 일어난 얼굴엔 눈에 띄는 구멍까지 생기고 말았다. 2년 5개월에 걸친 11차례의 성형수술 끝에 구멍은 다행히 메웠다지만,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을 터. 혹시 외적인 변화로 인한 상실감에 우울하지는 않았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당연히 상실감이 컸죠. 암이 제일 큰 원인이지만 노화로 인한 변화도 있었어요.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생성된 모든 것들은 변화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겪습니다. 나이가 들고 병이 생기니 당연히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잖아요. 건강하던 젊은 시절에 매여 있는 건 집착이죠. 몸의 흐름에 마음이 따라가면 되는 거예요. 달라져가는 모습에 상실을 느끼기도 하겠지만, 내면의 소리에 따라 몸과 마음이 공명하면 금방 적응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야로 바라보는 암과 약
김 교수는 몸소 암을 겪으며 외부 대상에만 비췄던 연구의 관점이 자연스레 스스로를 향하기 시작했다.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그에 따른 감각, 감정의 흐름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더불어 고통을 겪는 환자 등 주위 사람을 헤아리는 마음의 폭도 넓어졌다. 무엇보다 그는 투병 과정을 통해 암을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보고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현재까지의 암 연구는 세분화에 집중해왔어요. 크고 넓은 시야로 바라보지 않고, 암 세포나 유전자 등 세밀한 영역으로만 파고들었던 거죠. 가령 암 분야에서 가장 해결이 안 되는 게 ‘전이’입니다. 암이 전이되려면 림프계나 면역계, 순환계 등을 거쳐야 하는데, 어떤 이유로 우리 몸의 시스템이 전이가 가능하게 놔두는 것인지, 몸속 미생물과 박테리아가 어떻게 암세포와 상리 공생을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드는데, 그 해답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려면 암을 조금 멀찍이 두고 봐야 한다는 거죠.”
김 교수는 2017년 정년퇴임 후에도 서울대학교 약대 명예교수 겸 석좌교수로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제2인생에 대한 계획을 묻자 그는 별다른 재능이 없어 전공의 연장선에서 일궈나갈 생각이라고 답했다. 스스로 지은 아호 ‘약산’(藥山)처럼 그야말로 약학 분야의 외길을 걸어가는 셈이었다. 그런 그가 향하는 약산의 정상은 어떤 모습일까.
“약학 분야에서 큰 공적을 쌓아 산을 이루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산처럼 높은 곳에 올라서서 보면 약학 분야를 좀 더 넓고 깊게 조망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아호도 그리 지은 거죠. 의약품으로 사용되는 항생제는 10~20%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농축산물이나 어류 양식장 등에 쓰이죠. 그런 항생제의 남발로 지구상의 수많은 미생물과 생태계에도 문제가 생길 텐데, 우리는 인간 중심적으로만 약을 대해온 것 같아요. 이제 약의 용도가 뭔가를 죽이고 박멸하는 기능에만 머무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약의 지평을 넓혀가야만 현재 인류가 겪는 지구온난화나 환경오염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생명과의 상호 관계를 깨닫게 해주는 도서 by 김규원
혼자가 아니야 (마르크 앙드레 슬로스 저)
무궁무진한 미생물의 세계 속 생명체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인간의 건강과 현대의학의 미래가 미생물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며 그들과 공존하는 삶을 모색한다.
장내세균 혁명 (데이비드 펄머터 저)
수십 년간 잘못 알려지고 외면당해온 장내세균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그 중요성을 일깨운다. ‘뇌-위장-장내세균’의 삼각관계를 밝히며, 장내세균의 영향력을 조명하고 올바른 유산균 섭취법 등을 소개한다.
공생, 생명은 서로 돕는다 (요제프 라이히홀프 저)
치열한 생존경쟁 속 원만한 삶을 위한 생명체 간의 노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까지 내다본다. 경쟁만으로는 살 수 없음을 언급하며, 성공적인 공생으로 나아가기 위한 인간의 역할을 제시한다.
인간 없는 세상 (앨런 와이즈먼 저)
저자는 ‘지구상 인류가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나선다. 한국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만나 인간이 사라진 이후의 세상을 생생히 그려나간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집에서도 실감 나게 즐길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윤범모)은 2020 아시아 기획전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 특화전 '보존과학자 C의 하루' 두 전시의 가상현실(VR) 영상을 제공한다고 10일 밝혔다.
전시 VR 영상은 전시 공간을 상하좌우 360도 회전하며 볼 수 있는 실감 영상이다. 사용자가 원하는 위치와 작품을 클릭해 공간을 이동하면서 전시장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실제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영상, 텍스트, 오디오 가이드 등도 제공한다.
'또 다른 가족을 찾아서'는 한국, 인도네시아, 대만, 일본, 필리핀, 홍콩, 말레이시아, 중국 등 8개국 출신 작가 15팀이 사회적 연대의 의미로서 ‘가족’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전시 VR 영상에서는 참여 작가인 듀킴의 뮤직비디오, 정유경의 '이등병의 편지', 아이작 충 와이의 '미래를 향한 하나의 목소리', 아츠시 와타나베 '7일간의 죽음' 등 영상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보존과학자 C의 하루'는 수집, 전시, 보존 및 복원이라는 미술품의 생애주기 중 '보존과 복원'을 소개하는 전시로 보존과학자의 업무를 보여준다. VR 영상으로는 전시를 기획한 학예사의 전시소개를 비롯해 니키 드 생팔의 '검은 나나(라라)', 권진규의 '여인좌상', 이갑경의 '격자무늬의 옷을 입은 여인', 전상범의 '새-B', 이서지의 '풍속도' 각각의 보존처리 영상, 보존과학자 3인(강정식, 김겸, 차병갑) 인터뷰 영상 등을 제공한다.
VR 영상은 미술관 누리집 내 '온라인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전시를 기획한 박주원, 김유진 학예연구사의 설명과 전시 전경을 담은 영상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코로나19로 인해 미술관을 방문하지 못하거나 전시를 다시 보고 싶은 관람객들에게 VR 영상이 생동감 있는 전시 경험을 제공하길 바란다”라며, “포스트코로나 시대 실감형 비대면 서비스 강화로 디지털 미술관의 새로운 기능과 역할을 모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이따금 옛 생각에 잠기곤 한다.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자니 흘러간 추억이 떠오르면서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었던 아날로그 감성을 되찾고 싶어진다. 그럴 땐 우울해 말고, 푹신한 이불 위에서 노트북 전원을 켜보자.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머신은 없어도 추억여행을 떠날 수 있는 명작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이번 주는 ‘클래식 이즈 더 베스트’(Classic is the best)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추억의 고전영화를 소개한다. 브라보 안방극장에서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사랑과 영혼 (Ghost, 1990)
#멜로 #감상적인 #배우자와_함께
세상을 떠난 연인이 나를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머물러 있다면 어떨까? 로맨틱한 설정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영화 ‘사랑과 영혼’은 개봉 당해 흥행수익 2위를 기록한 명작이다.
영화는 '몰리'(데미 무어)의 연인 '샘'(패트릭 스웨이지)이 괴한에게 살해를 당하며 시작된다. 샘은 쓰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져 시간 내 천국의 문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승에 남는다. 그러던 중 괴한이 몰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를 지켜주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육신 없이 영혼만 남은 샘은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고, 결국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연결해주는 ‘오다 매’(우피 골드버그)의 도움을 받기로 한다. 죽은 연인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몰리와 그녀를 지켜주려는 샘, 생사의 벽에 부딪힌 두 사람은 교감할 수 있을까.
적적한 밤, 진한 로맨스 영화 한 편이 생각난다면 ‘사랑과 영혼’을 추천한다. 도자기를 빚으며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두 남녀의 모습은 3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당신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2. 죽은 시인의 사회 (Dead Poets Society, 1989)
#드라마 #교육적인 #자녀와_함께
진정한 스승의 역할은 무엇일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전통과 규율을 중시하는 명문 고등학교에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 선생이 새로 부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키팅은 출세와 성공보다 삶의 의미와 문학의 가치를 중시하는 교육자다. 그는 첫 수업부터 시인들의 시에 점수를 매기는 교과서를 찢어버리는 대신 학생들을 책상 위로 올라가게 해 색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준다. 키팅의 파격적인 수업에 자신도 몰랐던 인문학적 호기심을 발견한 학생들은 서클 ‘죽은 시인의 사회’를 결성해 매일 밤 시와 문학을 노래하며 낭만을 키워나가지만, 학교 측은 서클의 존재를 알아버리고 키팅까지도 위기에 처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교육 방식에 대한 키팅과 학교의 입장차를 번갈아 보여줌으로써 가르침 의미를 묻는다. 자식과 손주를 둔 입장이라면, 언제나 키팅처럼 행동하기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카르페디엠’, 현재를 살아야 하는 것. 한 번뿐인 인생, 삶의 아름다움을 가르치고 하고 싶은 일에 과감히 뛰어드는 용기를 심어주는 것 또한 어른의 몫 아닐까.
3. 백 투 더 퓨처 (Back To The Future, 1985)
#공상과학 #유쾌한 #온가족이_함께
눈앞에 타임머신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 ‘백 투 더 퓨처’는 이런 발칙하고 유쾌한 상상력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타임슬립’을 주제로 한 영화의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소심한 아버지와 쾌활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주인공 ‘마티’(마이클 J. 폭스)는 로큰롤을 즐겨 듣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던 마티는 괴짜 과학자 '에메트 브라운 박사'(크리스토퍼 로이드)가 만든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가는 실수를 저지른다. 50년대로 도착한 마티는 젊은 시절의 부모님을 만나지만, 마티의 어머니는 제 아들인 줄도 모른 채 마티에게 첫눈에 반하고 아버지는 그녀를 향한 말 못 할 짝사랑을 이어간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휘말린 마티는 두 사람을 이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마티의 아버지는 용기를 내기로 결심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고 때로는 작은 선택이 모든 것을 뒤바꾸기도 한다. 보다 멋진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오늘을 살아야 하는 법. 과거를 통해 현재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영화 ‘백 투 더 퓨처’가 주는 메시지다.
박종서(74) 관장은 우리나라 자동차 디자인 1세대로 이 분야의 선구자이자 산증인이다. 예술 관련 잡지와 도록들이 꽂혀 있는 책장, 박 관장이 직접 만든 모자이크 작품과 다양한 소품들, 도자기들이 정갈하게 진열된 공간에서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옆자리에는 세 살짜리 고양이 금이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먼저 2019 디자인코리아 ‘디자이너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에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대상자로 선정됐을 때 쑥스러웠다. 후배들이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추천을 못하게 했는데 일방적으로 받게 됐다. 나는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정도로 인품이 있지도 않다. 옛날에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은사님이 계신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승낙했다.
코로나19로 미술관이 휴관 중인데 어떻게 지내시나요?
생활은 식칼과 똑같다. 한쪽에는 날카로운 면이 있고 한쪽에는 무딘 면도 있다. 삶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나는 혼자 있을 때 제일 행복하다. 어려서 구석진 곳에 있으면 너무 편안했다. 그래서 책상 밑, 어머니의 재봉틀 발판 속, 장롱과 벽 사이로 들어가 있곤 했다. 어른이 되어 등산할 때도 바위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지금도 그렇다. 이 미술관을 지을 때 건축가에게 “유리로 만들어서 한눈에 다 보이면 안 된다. 내가 숨을 공간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런 공간을 확보했다. 저녁 식사 후에는 혼자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날 일을 기록한다. 어제는 잎이 삐죽삐죽한 씀바귀를 스케치한 다음 마시던 커피를 이용해 잎사귀를 채색했다. 이런 시간들이 가장 행복하다.
관장님에게 디자인은 어떤 의미인가요?
음악은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준다.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한다. 그런데 디자인은 절대 사람을 울게 하지는 못한다. 감정적으로 음악만 못하다. 다만, 소유한 사람이 오래 소장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채워줘야 한다. 디자인은 항상 보편적인 개념을 존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비행기는 비행기다워야 하고, 자동차는 자동차다워야 한다. 자동차 디자이너는 자동차가 갖는 보편적 개념과 질서를 존중해야 한다. 무조건 새로운 게 디자인은 아니라는 뜻이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요?
안목이다. 공부를 잘한다고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다. 스킬은 배울 수 있지만, 창의력은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안목을 키우려면 흙, 나무, 종이 등 기본 물질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이것은 학습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대학에서 디자인 공부를 한다는 것은 10년 후나 20년 후에는 못 쓰는 지식을 배우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지식의 반감기라고 하는데, 디자인은 90%가 없어진다. 지식이 반감되지 않으려면 내 손으로 만든 기억이 있어야 한다. 나는 무언가를 만들 때 어린 시절 진흙을 가지고 놀던 기억을 떠올린다. 진흙이 얼마나 미끄러운지, 어떻게 해야 갈라지지 않는지, 머리가 아니라 손이 기억하는 것들을 디자인에 적용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다르신데요. 자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자연은 인간보다 먼저 존재했고, 먼저 진화했다. 우리가 오늘날 겪는 시행착오는 이미 생태계가 오래전에 겪은 시행착오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연을 못 따라간다. 황금분할 1:1.61803은 암기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연에서 뛰어놀았던 아이들 머릿속에 이미 다 들어가 있다. 유명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그렇다. 그냥 척척 했는데, 재보면 황금분할이다. 특별한 툴이나 연장이 필요 없다. 무엇을 만들고자 할 때는 주변에 있는 것들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도구를 구하러 다니는 동안, 초기의 생각이 변질되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하면 거짓일기처럼 된다.
자동차 디자인의 장인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디자이너는 월급이 아니라 명예와 사명감으로 살아간다. 윗사람이나 상대 부서 등 타인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모델이 있어야 하고, 논리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공부하지 않으면 논리는 빈약해진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도둑맞은 내 생각을 찾아오기 위해서다. 독서를 하다 보면 내가 생각한 것들이 이미 글과 디자인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는 바로 움직여야 한다.
아들 박찬휘 씨도 현재 아우디 디자인 파트에서 일하고 있지요?
아들은 페라리, 벤츠를 거쳐 현재 아우디에서 일하고 있다. 2022년에 나올 자동차 프로젝트명이 아들 이름을 딴 ‘CHAN22’라고 한다.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명예롭게 근무한다. 이곳을 마지막 직장으로 생각하고 싶다”고 말한다. 아들을 키울 때 자연을 많이 접하게 했다. 내가 커다란 종이에 그림을 그릴 때 같이 그렸다. 그런데 아들은 자기가 그린 그림들을 모두 버렸다. 내가 그것을 모아 유학 준비를 하는 아들에게 “이게 네 진짜 그림”이라며 건네줬다. 덕분에 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아들은 이제 진실한 그림이 무엇인지 알고, 내게 많이 감사해한다. 자동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많이 부딪친다. 언젠가 내가 티뷰론을 실험적으로 다시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니, “은퇴 후 졸작들을 만들더라, 아빠도 그 꼴이 되고 싶으시냐, 하지 말라”고 했다.(웃음)
자동차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요?
자동차는 비행기가 될 수 없다. 비행기처럼 날아가는 자동차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자동차는 그럴 수 없다. 미래에는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 나와야 한다. 쓸데없는 것,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떼어내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는 디자인 명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강조한다. 경제가 어려울 때 장식이 많아지고 허세가 넘친다. 지금 우리나라 차들이 그렇다. 대기업은 이제 소비자에게 판매만 할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인식에 대한 계몽적 마케팅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전기자동차부터 수소자동차, 자율주행자동차까지 자동차의 미래 트렌드가 많이 바뀔 것으로 예측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차의 형태가 지금과 같은 이유는 앞쪽에 엔진과 미션이 들어가고 뒤쪽에 트렁크가 있기 때문이다. 전기자동차라면 앞쪽이 텅 비어도 되니, 현재의 자동차 모습일 필요가 없다. 앞으로 고밀도 사회(high density society)가 도래하면 크기도 지금처럼 클 필요가 없다. 현재 패키지 레이아웃(package layout)은 가솔린 자동차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모양과 디자인이 모두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테슬라도 그대로 하고 있다. 이게 급선무인데 관념에 묶여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다. 그게 제일 안타깝다. 소재도 철판으로만 한정하고 있는데 달라져야 한다. 카본 파이버는 철판보다 30배나 더 가볍다. 현재 쏘나타의 무게는 1톤에 가깝다. 카본 파이버로 바꾸면 200㎏ 정도밖에 안 된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나는 평생 메모를 습관화했다. 신입사원 시절 일본 출장을 갔다. 비행기 옆자리에 한 할아버지가 앉았다. 나는 멍하니 앉아서 가는데 그분은 뭔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기록할 게 많은 일을 하시나보다” 했다. 나에 관해 물어봐서 신입사원이라고 했더니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해라. 윗사람이 지시하면 그것을 적어라. 상사가 묻기 전에 보고해라. 윗사람이 물어보는데 내가 ‘아차’ 한다면 이미 회사생활은 끝난 것”이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 어르신은 일본 스미토모상사 그룹의 회장이었다. 그때부터 메모를 생활화했고 그 내용을 모아 책도 출간했다. 요즘 세대는 휴대전화나 컴퓨터에 기록한다지만, 우리 세대는 바로바로 손으로 쓰면서 생각도 정리하니까 더 좋은 것 같다.
좌우명이 있으신가요?
취미로 1990년대 초부터 스케이트를 탔다. 빙상 500m 쇼트트랙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취미이지만 하나를 하더라도 기초만큼은 제일 탄탄한 사람이 돼야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정확한 자세와 아름다운 폼은 기본이 튼튼해야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치에게 지도를 받았다. 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지는 건 자세가 흔들렸거나 승부욕이 넘쳤다는 의미다. 뭐든지 기본을 먼저 갖춰야 한다. 기본 원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테크닉부터 터득하려고 하니까 무너지는 거다.
아직도 열정적으로 일하고 계신데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뭔가 일을 벌이면 사람들은 “당신 나이가 몇 살인데 그래?” 한다. 대부분 그 말을 들으면 포기한다. 만약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생각날 때 바로 시작해야 한다. ‘포니정’으로 불렸던 정세영 회장은 “결론은 빠를수록 좋다”고 말했다. 나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한다. 단점일 수도 있지만, 생각을 오래하면 하지 않을 구실을 찾게 된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노년을 준비하는 노하우가 있다면요?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산에 가면 작은 꽃, 작은 버섯, 이름 없는 가랑잎을 보면서 재미를 느낀다. 벌레 먹어 썩은 나무가 있으면 가져와서 그 흔적을 입체적으로 만들곤 하는데, 벌레가 그린 그림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남들이 보면 정신 나갔다고 할 수도 있다. 자연은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누구에게나 다 보이는 건 아니다. 보고자 하는 사람, 뜻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여주고 길을 열어준다. 즐거운 일, 사랑할 일이 구석구석에 많다.
우리 연배 사람들은 우리나라 경제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는 화물차처럼 중요한 존재다. 그런데 노인들을 홀대한다. 이런 풍토는 바뀌면 좋겠다. 나이 들면 하찮고 소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길 바란다. 남을 배려할 줄도 알아야 한다.
버킷리스트가 있으신가요?
첫 번째로 이탈리아 스승을 기념하는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페라리 자동차를 만든 명인 스칼리에티는 나의 스승이다. 14세 때 기름 1ℓ를 넣은 오토바이를 타고 모데나에서 베로나까지 100㎞ 구간을 갔다고 한다. 집에 돌아올 때는 적정 속도와 연료 소모량을 계산해, 오토바이를 개조한 다음 소량의 연료만으로 오는 데 성공했다. 지난달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1950년대 벨로솔렉스 오토바이를 주문했다. 미술관 아래 밭 근처에 있던 밤나무가 죽었다. 지름이 1m 정도 되는 큰 나무였다. 그 나무와 오토바이를 결합한 작품으로 스승에게 보답하는 오마주 작업을 준비 중이다.
두번째는 책을 출간하려고 한다. 10년 전 ‘꼴, 좋다! 자연에서 배우는 디자인’이라는 책을 펴냈다. 강의 교재로 썼던 내용을 쉽게 풀어쓴 것으로, 모든 형태는 자연을 따른다는 생각을 담고 있다. 지금 두 가지 책을 구상 중이다. ‘꼴, 좋다’와 같은 내용의 글을 새로 써서 큰 사이즈로 낼 계획이다.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스승에게 들은 자동차와 카로체리아(carrozzeria)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소개할 생각이다. 카로체리아는 디자인 능력을 갖춘 소량 주문제작 방식의 자동차 회사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집 뒤에 있는 500평(1652㎡) 규모의 정원을 영국의 채리티 가든(Charity Garden)처럼 만들고 싶다. 자선 정원으로 운영해 입장료를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하고 싶다. 이 사업은 아내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미술관을 통해 이미 사회에 기여하고 계신데요. 사재를 들여 지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미술관을 통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꼭 자동차와 관련된 꿈이 아니어도 좋다. 과학자가 될 수도 있고 미술가가 될 수도 있다. 그 꿈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현재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교수로 있는 김상배 박사의 경우가 그렇다. 그가 연세대 공대를 졸업하고 뭘 할지 몰라 고민할 때 내가 “천장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도마뱀을 가지고 연구해봐라” 했다. 이후 스탠퍼드대학에 들어가더니 졸업작품으로 유리벽을 타고 오르는 로봇을 만들어 미국에서 올해의 과학자에 선정되었다. 많은 분이 여기를 자유롭게 방문하시길 바란다. 예약하면 전문가가 해주는 설명도 들을 수 있다. 다이아몬드는 장식품에 불과하지만 동일한 탄소 성분으로 이루어진 흑연 연필은 꿈을 그릴 수 있다. 연필로 꿈을 그리듯 이곳이 모두의 꿈을 그릴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소망도 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노년 건강을 위해 읽어볼 만한 도서 by 김광일
100세인 이야기 (박상철 저)
세계적인 장수과학자 박상철 서울대학교 교수가 2001년부터 전국을 돌며 만난 우리나라 백세인들의 인터뷰를 담았다. 장수의 비결은 특별한 것이 아닌, 가족 간의 사랑과 인간 본연의 감정에 충실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100세 건강 영양 가이드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분당서울대병원 각 분야 전문 의료진이 엮은 품격 있는 노후를 위한 건강지침서. 노화로 인해 나타날 수 있는 신체 변화 및 생활 습관, 만성질환의 원인과 치료, 식사요법, 사회복지 등 건강한 노후를 위한 정보를 소개한다.
새로 만든 내몸 사용설명서 (마이클 로이젠 외 공저)
9년 연속 미국 최고 명의로 선정된 의사들의 안내로 몸속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노화하는지 알 수 있다. 의학계가 주목하는 간과 췌장 분야는 물론, 젊음과 건강을 위한 운동 챕터도 마련돼 있다.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길을 찾다 (김웅철 저)
한국과 일본의 고령화가 비슷하게 진행되는 점에 착안해 6년간 취재해온 일본 고령화 트렌드와 정부, 기업의 대응을 정리했다. 노화를 혐오하고 부정하기보다는 늙음과 죽음을 존엄하게 받아들이는 시기로서의 노년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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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함께 읽고 싶은 도서들 - by 한성희
나는 젊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찰스 핸디 저)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지닌 각계각층 60대 여성 29명의 이야기. ‘요즘 60대의 초상’을 콘셉트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경영철학자인 찰스 핸디가 글을 엮고,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 핸디가 사진을 찍었다.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저)
인간의 고독을 바라보며 얻은 통찰을 글로 담아낸 시대의 지성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사람과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 성 정체성에 대한 고뇌 등을 비롯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가, 과학자들과의 우정 등을 들려준다.
호밀밭의 파수꾼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저)
20세기 청춘들을 열광하게 한 성장소설. 사립학교의 문제아인 주인공이 퇴학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며칠간의 일화를 그린다. 10대들의 언어를 고스란히 살린 문장과 기성세대를 향한 예리한 성찰이 돋보인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호모 사피엔스부터 인공지능까지, 방대한 역사를 한 권에 담았다. 생물학, 경제학, 종교학 등 다양한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의 시원부터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 등 인간의 끊임없는 진화를 조명한다.
환절기에 한두 번씩 찾아오는 가벼운 감기부터 결막염, 장염 그리고 요즘 전 세계의 시계를 멈출 듯 확산하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바이러스와의 전쟁 속에서 삽니다. 2002년의 사스(SARS), 2009년의 신종 인플루엔자, 2012년의 메르스(MERS,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에 유행) 사태 이후 한동안 빈번한 국지전에 그치며 소강상태를 보인 바이러스가 코로나19로 이번에는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코로나19에 고전하는 이유
오랜 시간에 걸쳐 정교해진 인간의 면역체계는 바이러스가 침입해도 여러 단계에 걸친 방어체계로 대비를 합니다. 인체는 바이러스가 세포에 접근하는 낌새를 감지하는 순간 표피세포에서 산성물질을 분비하며 방어막을 치기 시작합니다. 만약 바이러스가 이를 통과해 세포를 감염시키면 인체는 바이러스와의 1차 전투, 즉 비특이적인 1차 면역반응을 시작하고 이로 인해 발열이 일어납니다. 열에 약한 바이러스는 발열반응에 무력해집니다. 따라서 감기 등에 걸렸을 때 무조건 해열제를 먹는 것보다는 체온 측정을 생활화해 열이 날 때만 복용하는 게 면역체계 유지에 도움이 됩니다. 또한 염증반응을 통해 모세혈관을 확장해 인터페론 같은 항바이러스성 단백질과 백혈구를 감염된 조직에 대량 투입합니다. 면역세포인 자연살해세포(NK세포)는 감염된 세포를 파괴하면서 바이러스도 함께 죽입니다.
1차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바이러스를 무찌르지 못하면 2차 전투, 즉 특이적인 2차 면역반응이 시작됩니다. 1차 면역반응에서 무차별적으로 바이러스 주변을 공격했다면 2차 면역반응에서는 바이러스만 콕 찍어 공격하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가진 항원을 인식하고 항체를 생성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항체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찾아내고, 강력한 면역세포인 T세포가 이들을 처리합니다. 면역에 관여하는 세포나 분자는 외부에서 침입한 이물질이나 세균, 바이러스 등에는 반응하지만 원래 살고 있던 세균이나 자신의 세포는 공격하지 않습니다. 목표한 바이러스만 선별적으로 파괴하는 만큼 2차 면역반응은 강력합니다. 특히 2차 면역반응은 이전에 감염됐던 바이러스가 다시 침입했을 때 일어나는 만큼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인간이 고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이전에 감염된 적이 없어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갖고 있지 못함)에 있습니다. 따라서 비특이적인 1차 면역반응을 통해 성공적으로 방어하지 못할 경우 마땅한 무기(항체)가 없어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고전하고 일부는 치명상을 입거나 심지어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건강한 성인이라면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면역체계가 작동해 짧게는 10일, 길게는 3주 안에 항체가 생겨 병이 낫고 바이러스도 없어져 심한 증상 없이 완치가 됩니다.
우리 몸에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항할 수 있는 항체를 인위적으로 넣어줄 수 있는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면역력을 높이는 노력을 열심히 하는 것만이 최선의 대비이자 치료입니다. 평소 자신에게 맞는 생활 방식을 꾸준히 유지하며 어떤 바이러스도 이겨낼 수 있는 몸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면역력은 서른 살을 기점으로 떨어지기 시작해 마흔 살이 지나면 급격히 하락합니다. 이유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지만, 일부 과학자는 면역세포인 T세포 감소와 관련이 있다고 추측합니다. 나이 들수록 몸속에 침투한 바이러스를 퇴치하는 T세포가 적게 생성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령층일수록 감염증에 취약하고, 암도 더 많이 걸립니다.
고령 당뇨 환자, 면역력 키우는 식습관
면역력을 키우려면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까요. 과학자들은 부족한 무기질을 보충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합니다. 실제 아연, 셀레늄, 철, 구리, 엽산, 비타민 A, B6, C, E 등과 같은 무기질이 부족하면, 면역체계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몇몇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면역력을 향상하려면 특히 비타민 C(오렌지, 귤, 딸기, 브로콜리 등에 풍부), 비타민 B6(닭고기, 연여, 참치, 녹색 채소, 병아리콩 등에 풍부), 비타민 E(견과류, 시금치에 풍부)를 충분히 섭취해야 합니다.
이러한 비타민들은 보충제(비타민제 등) 등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제철 과일과 채소 등의 섭취를 통해 공급받는 게 가장 좋습니다. 비타민 E 등의 일부 비타민이나 무기질을 보충제로 과도하게 섭취하면 오히려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다만 당뇨 관리 중인 고령자는 적절한 혈당 수치를 위해 과일 섭취량 등을 의료진과 상담하는 게 좋습니다.
수분 섭취도 꾸준히 해야 면역력이 증진됩니다. 물은 몸이 백혈구와 다른 면역체계 세포를 운반하는 림프액을 생산하도록 돕습니다. 커피나 탄산음료 같은 오히려 탈수를 유발하는 음료수는 피하셔야 합니다. 오이, 샐러리, 멜론 등 수분이 풍부한 식품을 많이 먹기 위해 노력하면 됩니다.
꾸준히 면역력을 유지하고 나아가 증진하려면 스트레스 관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평소에 화를 잘 내거나 작은 일에도 노심초사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은 면역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격을 지닌 사람은 하루 30분 이상 규칙적인 운동, 하루 7시간 이상 숙면, 소식하되 거르지 않는 식사 등을 통해 면역력을 관리해줘야 합니다. 특히 하루 1~2개비의 흡연도 면역력을 감소시키니 의사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이번 기회에 반드시 금연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