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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철훈의 사진 이야기] 색도 언어입니다
-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학교 뒷산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진달래와 산수유가 몽우리를 터트렸습니다. 주위 동산뿐 아니라 무겁고 건조한 시멘트 건물마저도 환하게 밝혀줍니다. 무게 없는 분홍색이 땅 위를 떠다니며 곳곳에 봄의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물론 자세히 보면 뿌리에 연이은 가지가 있고 다시 더 가는 가지에 꽃이 피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멀리 떨어져 보면 색만 보입니다. 이것을 사진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사진은 다른 시각예술처럼 사람의 손으로 이미지를 일일이 그려나가지 않고, 카메라라는 어둠상자에 빛으로 상을 맺히게 하고 그것을 화학적이나 전자적 방법으로 정착시켜 서로 나누는 예술입니다. 그 빛을 인정하고 나눌 준비만 되어 있다면 사진의 좋은 점을 많이 알게 됩니다. 우리 맨눈에 잘 보이지도, 드러나지도 않는 것을 사진기에 담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 과정을 통해 미묘하게 숨어 있는 빛과 다양한 색의 변화를 나름 이해하게 됩니다. 빛의 반응에 따라 사진 속 이야기와 색의 변화는 얼마든지 바뀌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에는 그중 조리개 값의 변형으로 색의 공중부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만물의 겉모양만 보게 됩니다. 물론 사물을 뚫고 적절한 두께를 선택해 볼 수 있는 엑스레이(x-ray) 같은 사진기구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에는 색이기도 하고 질감인 그 겉모양만으로 사물의 진위와 그 속을 유추해 냅니다. 질감과 색은 엄밀히 구분하면 일종의 포장입니다. 아주 섬세하고 얇은 겉껍질입니다. 글을 쓰면서도 수채화를 많이 그린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색은 사물에 입혀진 얇고 아름다운 포장이다, 그것은 가장 감각적인 피부이다. 그것은 섬세하고 완벽하기까지 하다. 사물들은 색채 가운데서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그림만 그린 폴 세잔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색은 인간의 두뇌와 우주가 만나는 구체적인 공간이다.” 그런데 빛은 모든 색을 만나고 전달해 줄 수 있는 대단한 그 무엇임이 20세기 21세기를 거치며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과학이 이젠 빛으로 모이고 있습니다. 빛을 연구하는 많은 과학자들이 빛을 응용하는 많은 첨단 결과물들을 하루가 다르게 세상에 내놓고 있지만, 정작 빛의 본질로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색도 그렇습니다. 우선 빛이 물질인지 아닌지 그 경계를 정하기가 쉽지 않은가 봅니다. 내가 만난 많은 빛은 그 색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자신이 보고자 하는 빛이 무슨 색인지 그려보면 알게 됩니다. 빛은 자신의 색을 보여 달라는 세상에게 조건을 붙입니다. 너그러운 사랑의 시선으로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늘에도 색은 존재합니다. 보지 못할 뿐입니다. 이런 빛을 경험한 사람은 그늘 어느 곳에서든 색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사진을 하며, 수많은 곳에서 그늘을 보았고, 담았지만, 나의 사진 어디에도 늘 빛이 그늘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빛의 색은 작은 불꽃이 되어 이곳저곳에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긴 겨울을 지나며 피어나는 봄꽃들이 그렇습니다. 빛은 에너지 레벨에 따라 다른 색으로 바뀌는 감정이 없는 물리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진 작업에서의 빛에 따른 색의 변화는 문법이 있는 감정의 교감에 논리가 함께한다는 것을 감지하기도 합니다. 봄의 들판과 겨우내 빛은 얼마나 오랜 시간 색들을 기다렸을까요? 많은 기다림으로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진달래의 원형을 보기 위해 나뭇가지도, 꽃잎의 디테일도 조리개를 열어 지웠습니다. 더구나 초점을 의도적으로 뒤에 있는 흰 꽃에 맞췄습니다. 드디어 무게도 부피도 없는 핑크빛이 디테일 없이 하늘에 떴습니다. 색도 언어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는 따짐보다 제가 사진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연한 분홍색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축복된 봄입니다.
- 2016-04-1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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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퇴라이프] 행복한 실버 필수조건은 ‘아내’
-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헨리 포드(Henry Ford)가 80세 생일을 맞아 열린 축하연에서 “당신이 일생 동안 이루어 놓은 훌륭한 일들 가운데, 가장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야 물론 나의 가정입니다.” 인류의 과학사에 남긴 공적으로 노벨 물리학상과 노벨 화학상을 연이어 수상한 폴란드 태생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퀴리 부인)는 “가족들이 서로 맺어져서 하나가 되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어떤 부나 명예보다도 가정, 가족관계가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특히 실버 라이프를 살아가는 남성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가정, 특히 아내보다 더 소중한 존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노후에 아내 없이 혼자 살아가는 남성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근래에 들어 결혼 생활 20년이 지난 뒤에 하는 ‘황혼이혼’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결혼해서 30년이 넘은 부부의 이혼건수가 2004년에 4600여 건, 2009년에 7200여 건이었던 것이 2014년에는 1만300여 건으로 10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러한 헌상은 ‘남은 인생은 남편이 없어도, 아니 남편이 없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실버 세대 여성들의 독립선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남편들은 월급을 가져다 주는 것, 즉 확실한 ‘현금출납기’의 역할만으로 집안에서 왕 노릇을 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가사노동에서부터 자녀의 육아, 진학, 결혼에 이르기까지 가정에서의 모든 일들은 아내에게 떠맡기고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오랜 유교적 전통과 남성 중심 교육의 결과로 대다수의 아내들은 그것을 당연히, 혹은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면서 대다수 부부들은 어쩌면 돈보다 더 중요한, 부부간의 대화와 소통 없이 같은 울타리 안에서 동거인 비슷한 생활을 지속해 온 것입니다. 그러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졸지에 ‘현금인출기’ 기능이 사라진 상태에서, 부부가 집안에서 얼굴을 맞대며 지내야 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늘어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위상 역전, 혹은 갈등 증폭 현상을 불러오게 됩니다. 평생을 가장으로 군림해 온 남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견디기 힘든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나면 누구나 외롭고 허전하고, 때로는 상당 기간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런 공허함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내인데, 정작 가장 필요하고 가장 의지하고 싶은 순간에 아내는 그런 남편들의 언덕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그 아내들을 나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며,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월급봉투를 무기로 삼고, 가정의 문제를 등한시해온 긴 세월동안, 아내는 가정 내에서 자기만의 성벽을 굳건하게 쌓아 왔습니다. 그러니 현금인출기라는 유일한 무기마저 잃어버린 남편이 그 두터운 벽을 뚫고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의 상태가 돼버린 것이지요. 아내 역시 이성적으로는 남편이 안됐다거나, 잘 대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남편과의 사이에 세워진 심리적 장벽은 그 자신조차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높고 튼튼한 것이 돼버렸으니까요. 오히려 은퇴하여 집에 박혀 있는 남편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는 여성들의 수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은퇴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s’ Syndroms)’이라는 생소한 정신질환까지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부부간의 갈등이 발전하여 급기야 황혼이혼의 폭발적 증가라는 사회문제로까지 비화하게 된 것입니다. 황혼이혼을 당한 남편들의 그 이후의 삶은 거의 오아시스조차 말라 버린 사막에서의 생활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맙니다. 노후에 벌어지는 부부갈등의 경우 자식조차도 아버지를 이해하거나 아버지의 편에 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아내들이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식들 역시 성장기에 아버지는 ‘돈 버는 기계’였을 뿐, 아버지와 따스한 인간적 교감을 나눠 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남편이 없어도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지만, 남성의 경우는 배우자 없는 혼자만의 삶을 제대로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남편들은 평생 동안 직장생활 말고는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 거의 모든 일을 아내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비극적인 상황을 막고 행복한 노후의 필수 조건인 ‘배우자와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제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리자면, 은퇴하기 훨씬 이전부터 남편들이 스스로 현금지급기 역할을 넘어서는, 아내가, 그리고 가정이 필요로 하는 다기능설비(multi-functional equipment)가 되기 위해 노력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편들의 발상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하면 밥해 먹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소위 3D 업종에 해당하는 가사노동에서부터, 자녀 교육, 진학, 결혼 등의 일들이 결코 아내만의 일이 아닌,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데서 발생하는 ‘공동의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함께하는 것을 생활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아내도 노후에 남편을 위해 밥 짓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을 즐거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저는 은퇴한 이후로도 상대적으로 아내와의 원만한 관계를 향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것은 제가 그런 일들을 잘해서가 아니라, 아내가 평소의 저의 그런 자세와 노력을 인정하고 평가해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평상시부터 아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평상시 아내와 함께 외식을 하거나 영화를 보거나 차를 마시는 생활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만약 주말의 취미생활을 아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요. 평상시 주말에 골프 치는 노력과 시간의 절반만이라도 아내를 위해 할애한다면, 노후에 아내가 남편을 배려하는 노력과 시간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입니다. 요컨대, 갑자기 늘어난, 두 사람이 함께 보내야 하는 시간을 어색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 함께 시간 보내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건인 아내를 곁에 잡아 두고, 변함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해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아내가 자신만의 성을 높이 쌓아 올리지 않도록 하는 관심과 배려를 잊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못한 상태로 노후를 보내게 된다면, 무엇보다 아내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아내의 독자적 영역에 간섭하거나 허물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아내는 남편의 뜻에 따라서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면, 조만간 황혼이혼 통보서를 받아 들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버 세대 남성들이여! “형! 남자가 나이 들면 필요한 세 가지가 뭔지 알아? 마누라, 집사람, 와이프래!”라는 실버 보험광고에 등장하는 배우 송재호의 너스레는 결코 너스레가 아닌, 100% 진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삽시다. >> 조용경(趙庸耿)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해서 한국은행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비서부장과 홍보부장과 회장 보좌역으로 일했다. 포스코건설 인천 송도신도시사업본부장과 지난 2009년부터 2012년 3월까지 포스코엔지니어링(전 대우엔지니어링)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현재 포스코엔지니어링 상임고문, 한국트라이애슬론연맹 부회장, (사)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3-2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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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61년生, 방황하던 청춘, 문학서 길 찾고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든다
- 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 예순도 안 된 나이에 자신의 삶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분들이 가득 계신 이러한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교사로서 보낸 지난 30여 년을 돌이켜 보는 것은 지금의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가늠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의미를 둘 만하리라. 더구나 최근과 같이 교사라는 직업을 단지 안정성의 측면에서만 평가하는 세태에서는 교직의 진정한 의미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의의도 있으리라 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러고 보면 아주 희한하게도 교육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나름대로 최선의 길을 찾다 보니 어느새 교사가 되었고 교사로서 30여 년을 자연스럽게 살아왔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유명인이 되었더라 식과는 달리, 어느 순간 문득 돌아보니 교육자가 되어 있더라가 정확한 말이라 하겠다. 원래의 내 꿈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조국을 지키다가 하늘에서 장렬히 산화하겠다는 꿈은 유치한 꼬맹이 시절부터 품어온 오랜 소망이었다. 38선 이남의 경기도 개성이 친가와 외가의 고향이었던 터라 그 꿈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쁜 시력 때문에 비록 그 꿈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그 대신에 국가를 수호하는 항공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수학을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항공공학 관련 대학 교재들도 어렵게 구해 공부하며 고교 시절을 보냈다. 고3 늦가을에 놀랍게도 대통령이 부하에 의해 죽었다. 국가가 위기에 빠진 것 같아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은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국민을 향해 으르렁대며 총칼을 들이댔고 멀리 남쪽에서는 이미 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했다는 말까지 들려 왔다. 그때까지 품고 있던 의식과 사고가 모두 붕괴되는 시기였다. 국가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애써 공부해서 항공공학자가 되어 봐야 불의를 도울 뿐이었다. 결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과감히 포기하고 이 땅을 빨리 뜨고 싶었다. 유학을 빙자해서 도피하고 싶었고, 외국에 눌러 앉아서 결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하며 서강대학교가 가장 유학가기 좋다는 친구 아버님(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은 갑자기 어려워졌다. 유학 가기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것 같아 너무나 화가 났다.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완강한 폭력 앞에서 돌멩이 몇 개쯤 던져 봐야 무기력하고 초라하기만 했다. 견딜 수 없었다. 현실을 슬그머니 외면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고, 세상에 용감하게 직면하려 해도 그 또한 도대체 쉽지 않았다. 가장 희망에 차 있어야 할 대학 시절은 끝나지 않을 악몽의 시대에 불과했다. 우연히 시작한 야학교사, 국문학 품에서 행복 느껴 우연히 서강대 교내에 있던 이냐시오 야학에서 교사를 찾는다는 공고를 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하고 어설픈 청춘에게 안성맞춤의 일이었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다가 와서 꾸벅거리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 못 배운 설움을 뒤늦게 풀겠다고 나선 개인택시 할아버지 등, 살아 숨쉬는 생생한 삶의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 최루탄이 자욱한 밤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얇은 널빤지 가건물에서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하였다. 야학 수업을 끝내고 신촌으로 가는 길목의 허름한 떡볶이 집에서 늦은 저녁을 함께 먹던 추억들은 아직도 즐겁다. “산다는 것은 싼다는 것이다!” 같은 조악한 낙서가 가득한 야외 화장실의 모습도 너무나 또렷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마다 빙그레 웃게 된다. 엉망진창 같았던 대학 시절에 국문학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시간이 남아 여유 과목으로 선택했던 국문학개론이었지만 강의를 들을수록 새로운 진경을 보여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닥치는 대로 많이 읽었고 이과 학생이면서도 국어 과목에 관한 한 전교는 물론 전국에서 손꼽히던 성적을 받았기에 나름대로 품었던 오만함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창피함보다 즐거움이 훨씬 컸다.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기분까지 들었다. 불의의 시대에 절망하는 청춘에게 문학은 영원한 저항, 아름다운 힘으로서 다가왔다. 참여 문학과 순수 문학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문학의 바람직한 길을 끝까지 추구해 보고 싶었다. 현대시에 대한 관심은 특별히 더 컸다. 어느새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고 대학 신문의 현상공모에 당선이 되었다. 동인 활동을 하며 시화전도 열었다. 우리 문학의 웅숭깊은 품은 상처투성이의 젊은 영혼을 부드럽고도 따뜻하고 넉넉하게 품어주었다. 너무나 감사한 축복이었다. 외국 유학을 가겠다던 마음은 어느새 수그러들었다. 나중에 비교문학을 공부하면 된다는 수준까지 잦아졌다. 대학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부조교를 하며 교양영어조교, 심지어 배구부 학업 조교까지 하면서도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 힘들었던 대학 시절이었다. 어느새 교사가 되고 모교로 왔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한 학기를 지낸 뒤에 군복무를 마쳤다. 여전히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같이 교직이 인기 있던 때가 아니라 교사 지원서를 내고 이내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는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많이 있었고 꼼꼼하게 학생들을 챙기면서 정신없이 생활을 보냈다. 대학원 공부도 병행하고 마침 결혼까지 하였기에 너무나 힘들어 집에만 오면 푹 고꾸라져서 식은땀을 흘리며 자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사립학교도 공채 시험을 보던 때라 수험 준비 또한 열심히 해야 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우습게도 그 다음 해에 이 시험은 없어졌다. 3년 차가 되자, 학교에서 담임을 맡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생들의 이름을 즉시 외웠다. 하지만 첫날 일방적으로 부여된 지시는 학부모 10명에게서 학교 발전 기금을 걷으라는 부당한 명령이었다.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더없이 마음이 편했다. 신혼 2년 차였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진짜 이 나라를 뜰 때가 된 거야” 되뇌었을 뿐이다. 어딘들 살지 못하랴. 조금이지만 모아 놓았던 봉급도 있었다. 사표를 내고 인계 준비를 하는데 모교인 숭문고에서 연락이 왔다.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사표를 낸 것은 어찌 아셨냐고 묻자, 당신은 몰랐으며 그저 오라는 말씀만 되풀이 하셨다. 운명 같았다. 모교에 가서 다시 한 번 교사의 길을 걸어 보자, 그때 유학을 가도 되지 뭐,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기는 이미 사라진 때였다. 막상 모교에 부임하자 모든 것이 힘들었다. 친정에서 시집살이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 앞에 끌려 온 것 같았고 동문 선배교사들은 무서운 손윗 동서나 억센 시누이 같았다. 교무실 밖을 겉돌다가 창고처럼 방치된 학교도서관 서고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학교도서관을 운영하니까 정말 정신이 없었다. 먼지를 닦고 책을 털며 시작한 도서관 일은 이후 18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 푼의 수당이나 보수가 없는 자원봉사 형식이었다. 직접 도서반을 만들고 도서반원으로 학생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훌륭한 동반자다. 학교도서관에 푹 빠져들며 학교를 떠나겠다는 생각, 이 땅을 등지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잊게 되었다. 학교도서관은 환상적인 공간이었고 학생들과 나는 성장하였다.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지만 시는 몇 편 쓰지 않았고, 대신에 당장 학생들에게 필요한 ,, 같은 책들을 썼다. 지금까지 쓴 , , , , 등등의 저서들은 모두 학교도서관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들이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하라고요? 어느날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문민정부 시절이라 교육개혁위원회의 위상은 대단했다. 교육개혁위원회가 정책을 입안하면 교육부는 그대로 수행해야 했다. 고민한 끝에 수락하였다. 나는 전체 위원들 가운데 두 번째 막내였고, 교원은 그나마 달랑 4명에 불과했다. 한국교육을 움직여온, 또한 이후에 움직이는 중요한 분들을 이때 많이 만났다. 무수히 많은 회의에 참석하면서 교육에 대해 좀더 장기적이고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각 시·도 교육청을 평가하는 활동까지 맡으면서 교육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었다. 나는 학교도서관의 멀티미디어화 정책을 입안했고 이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학교도서관에 3천억 원의 예산이 투자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제 학교도서관이 없는 학교들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다. 2년간의 교육개혁위원 활동을 마쳤지만 그 후에도 여러가지 역할을 많이도 맡았다. 교육부 쪽으로는 교육정보화위원, 독서교육발전자문위원, 과외교습대책위원 등, 문화부 쪽으로는 독서진흥위원, 공유저작물활성화포럼위원 등, 서울시교육청으로는 독서교육활성화 위원 등등...헤아리기 쉽지 않다. 현재도 교육부 학교도서관진흥위원을 맡고 있으며 마포구청의 마포중앙도서관 건립에 힘을 보태고 있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났지만 이후에도 교사로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제자, 그리고 쉽게 변하지 못하는 학교 현장과 맞닥뜨리며 어떻게 해서든지 올곧고 가치 있는 변화를 시도하고자 노력해 왔다. 교육에서 미래란 곧 학생들에게 다가올 현재였기에 이러한 노력은 너무도 당연했다. 학교도서관을 교실 규모 8개 크기에 인터넷 PC 30여 대가 있는 학교도서관 멀티미디어 센터로 키우고 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정식 사서를 초빙하였다. 모교로 돌아와 꼬박 18년이 넘어 거둔 성과였다. 이어서 2010년도부터는 국가와 지자체, 시민단체와 동네 청년 등 학교밖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학교로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봉사활동학습을 고안했다. 일명 ‘따봉(따뜻한 봉사활동)’이라 부른다. 이를 ‘숭문 따봉’에만 그치지 않고 어느 학교든지 ‘따봉’을 붙여서 쓸 수 있도록 모델화하고 관련 자료 일체 또한 아무 대가 없이 제공하고 있다. 유니세프 같은 세계적 구호기관도 처음부터 꾸준히 참여해 오고 있는데 이렇듯 모든 자료를 공유하겠다는 약속과 실천 덕분이다. 2015년 현재에는 31개 따봉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이 가운데 11개는 학생 스스로 리더가 되어 활동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경문고와 풍문여고가 따봉 모델을 받아들여 각각 ‘경문 따봉’과 ‘풍문 따봉’을 펼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몇몇 학교가 받아들이려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다. 교직은 안정된 직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은 과거와 미래를 제대로 이어달라고 보장하는 사회적 뒷받침이다. 그래서 교육은 전통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미래를 현재로 만들어야 하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중요한 가치들은 모두 존중해야 하기에 언제나 든든하게 과거를 이어야 하고, 쉽게 파악하기 힘든 잠재적 인재들을 빠짐없이 챙겨야 하기에 언제나 미래를 새롭게 헤아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전력투구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교사이어야 한다. ‘책따세’ 눈부신 성장 가장 보람 교사로서 지난날을 돌아볼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바로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이하, 책따세로 줄임)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난 1998년에 만든 ‘책따세’는 2007년에 청소년을 위한 비영리 독서문화 시민단체로서 확대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독서의 자율성과 다양성, 공익성을 가장 기본으로 추구하는 대표적인 청소년 독서문화 단체로 훌쩍 성장했다. 2013년에는 영국문화원에서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대한민국의 청소년 독서교육을 ‘책따세’ 중심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책따세’ 활동은 다양하다. 청소년 대상 추천도서목록 작업과 발표,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 독서교육 교사연수, 독서방송, 월례 기부강좌, 청소년봉사학교, 독서교육서 출판, 독서문화 관련행사 개최 등등. 나는 ‘책따세’ 대표로서 꾸준히 ‘책따세’의 최전선을 지켜 왔다. 이제는 ‘책따세’ 이사장으로서 법인 업무를 맡으면서도 특히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을 우리나라 공교육에서 시작한 세계적 교육문화 운동으로 자리 잡게 하고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감사하게도 ‘책따세’는 2015년에 청소년을 위한 바람직한 활동을 했다고 인정받아 제11회 청소년성장대상(여성가족부)을 수상하였다. 상금 1천만 원은 오로지 청소년을 위한 독서문화 구축을 위하여 사용할 예정이다. ‘책따세’의 전통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준다!”에 맞춰져 있다. 이사장인 나를 포함해서 이사진과 운영진 누구도 일절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않는다. 오직 실무 간사만이 유급 활동을 한다. ‘책따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시간을 쏟으며 청소년 푸른도서관 건립을 위하여 기금을 출연하면서 활동해 왔다는 점에서 언제나 스스로 자부한다. 요즘 새롭게 추진하는 중요 프로젝트도 소개하겠다. 책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 공모전이다. 이는 책을 읽으며 가상의 여행기를 쓰는 활동이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과 해냄출판사와 신촌 홍익문고 서점 등이 함께 힘을 모으며 진행하는 행사다. 이 공모전에는 푸짐한 상품들이 걸려 있는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읽기 쓰기 문화를 시도라 할 만하다. 특히, 이 공모전에 참여하는 글들의 대부분을 모아서 공유저작물 형태의 전자책으로 묶고 선정된 참가자들은 전자책의 저자 대우를 받게 한다. 이는 이야기를 들은 수용자가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창조자가 되는 구비문학의 본질과 맞닿으면서 디지털 차원에서 문학의 본질을 새롭게 새기고 지평을 넓히는 활동이다. 교사들은 푸른 영혼들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이러한 활동은 특별히 의미 깊다. 그저 책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려고 전전긍긍대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지 책을 사는 소비자에서 벗어나 자신이 읽고 쓰는 모든 것들이 남을 위해 더하고 나누는 의미 있는 활동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순간, 교육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순간, 누구든지 교사가 된다. 진정한 교사란 나눠주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지만, 선생은 제자로 말한다. 제자들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교사로서 내 삶이 한없이 보람 가득하고, 반대로 부끄러운 일을 한다면 무한히 부끄러워진다. 물론 제자의 재물이 많고 적음이나 지위가 높고 낮다는 점이 교사의 자랑과 부끄러움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코 아니다. 그저 자신이 배운 것을 아낌 없이 누군가에 나눠주는 제자라면 충분히 자랑스럽다. 최근에는 우리들의 제자들이 ‘책따세’ 모임에 속속 가세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신촌 전철역 근처의 공익 카페 ‘더나더나’에 모인다. 더함과 나눔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을 만든 이 카페에 가면 남을 돕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가 깨닫게 하고, 다시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자 머리를 맞대는 청춘들이 있다.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제자가 며칠 전 오랜만에 연락해 왔다. 제자가 곧 나다.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오랜 꿈을 비로소 이루었다. 항공공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 제자도 기억난다. 그렇다. 나는 조국을 수호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진정한 과학자다. 피아노는 물론 모든 악기를 잘 다루는 제자도 있다. 그렇다. 이제 나는 언제나 즐거운 악기 연주자다. 제자들은 나의 분신인 듯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아간다. 그리고 어느새 벌써 수많은 분신이 되어 이 세상 곳곳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교사다. 앞으로 교단을 떠나도 나와 내 제자들은 이미 교사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남에게 나눠주는 사람, 우리가 바로 교사다. 그래야 이 세상을 비로소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 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책따세 이사장) 서강대 국문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처음 교단에 섰고, 1989년 모교인 숭문고로 돌아왔다. ‘학생과 함께하는 읽기 쓰기 문화’를 지향하며 지금까지 학교도서관 살리기 운동과 NIE(신문활용교육) 전개, 책쓰기교육과 저작권기부운동 창안 등으로 교육과 현실, 삶을 아울러 왔다. 1998년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책따세(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를 만들고 비영리 청소년 독서문화 시민단체로 확장하여 현재까지 이사장을 맡고 있다.
- 2016-02-1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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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재미 플로럴 아티스트 클레어 원 강, 플라워아트 손끝으로 완성하다
- 꽃과 더불어 사는 삶은 아름답다. 꽃은 피고 지고 나면 그뿐인 듯하다. 그런데 그 꽃은 씨앗을 남기고, 씨앗은 다시 꽃을 피운다. 미국서 활동하고 있는 클레어 원 강(Claire Won Kang AIFD, 한국명 이원영)은 금세 시드는 꽃의 아름다움을 시간의 굴레에서 끌어낸 플로럴 아티스트(Floral Artist)다. 그는 꽃이 가장 아름답게 핀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꽃과 소품을 재창조한 콜라주로 플라워아트의 새 장르를 열었다. 남진우 뉴욕 주재기자 namjin@etoday.co.kr 세계 최고의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Best in Show)’을 여러 차례 수상한 강 작가는 일생의 역작인 화집 를 출간, 플라워아트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 “꽃 앞에서는 인종 간의 차이도, 빈부의 차이도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플라워아트를 전수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플라워아트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클레어 원 강은 1968년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미술아카데미(Pennsylvania Academy of Fine Art)에서 공부할 때까지만 해도 플라워디자인과는 별 인연이 없었다. 강 작가는 당시 펜실베이니아대학의 장학생이었던 강성권 박사(현 IBM 중앙연구소 연구과학자)와의 신혼생활 중에도 미술공부를 계속하며 필라델피아의 갤러리에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이직으로 뉴저지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남편 직장 동료 부인의 소개로 플라워 숍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이것이 플라워아트와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이 단골고객 “플라워디자인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해볼 만한 일이니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술로 다져진 기초 위에 뛰어난 손재주가 더해지면서 플로리스트로서의 면모를 빠르게 갖추어 갔다. 1984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뉴욕의 부촌인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채퍼쿼(chappaqua)에 아름다운 집을 마련했고 뛰어난 디자이너만 채용하는 그 지역 플라워 숍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즐거웠습니다. 꽃에 완전히 빠졌던 거죠.”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고객과 교감을 하다 보면 고객에게 어울리는 꽃과 디자인이 순간적으로 떠올려지기도 했고, 꽃들을 바라보면 그 꽃이 말하는 듯한 무아의 경지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의 신들린 듯한 플라워아트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클린턴, 록펠러 등 유명 가문들이 하나둘 단골고객이 되었다. 또 웨딩드레스로 유명한 ‘베라왕’ 매장의 화훼 디자인을 전담하기도 했다. 티파니, 블루밍데일, 노드스트롬 등 미국의 화려한 매장도 활동무대였다.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과 컬래버레이션 모방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면서 꾸준히 노력하면 창의성과 자기만의 브랜드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다. “창의성을 유지하려면 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맨해튼의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들러 다른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한 것이 디자인 감각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클레어 원 강은 2001년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AIFD)의 시카고전국대회에서 꽃 콜라주 페인팅을 성공적으로 소개하여 플라워아트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2008년 이화여대 총동창회 창립 100주년 기념 플라워 쇼에서는 100개의 호접란이 단단한 그물을 뚫고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디자인으로 ‘진선미 정신’을 표현하여 기념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는 미국, 영국 등지의 수많은 플라워 쇼에 초대되었다. 2014년 필라델피아 뮤지엄에서 열린 ‘조선왕조대전’에 전시된 ‘무신년진찬도’를 주제로 한 작품 ‘글로벌 댄스(Global Dance)’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태극과 오륜을 바탕으로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이 작품으로 그는 지난해 3월 세계 최대 규모, 최고 전통의 실내 플라워아트 경연장인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수상해 더 뜻이 깊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 작품 클레어 원 강은 수많은 초대전에 참여하고 큰 상도 많이 받았지만 정작 가슴에 가장 깊이 남아 있는 작품은 죽음을 애도한 꽃장식이었다. 친구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작업한 장례식장의 플라워아트는 오 헨리의 를 연상케 했다. “남편 친구가 평소에 좋아했던 보석 색깔의 꽃으로 꾸민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들은 망자가 천국으로 가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플로리스트에게는 최고의 찬사였다. “그 사람을 알고 그 사람에 맞는 디자인을 했을 때 가장 아름답고 큰 감동을 준다”는 강 작가는 “아름다운 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조그만 국화와 카네이션도 제자리에 꽂히면 아름답고, 잎의 앞면보다 뒷면이 더 어울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클레어 원 강의 삶은 자연과 예술에 교육이 어우러진 여정이었다. 1991년부터 20여 년간 뉴욕식물원(New York Botanical Garden)에서 플라워아트에 대해 강의해 2000명이 넘는 후배를 배출했다. 2005년에는 재직 교사 200명 가운데 학생들이 꼽은 최고의 강사로 선정돼 ‘올해의 우수 교사상’을 받기도 했다. 미국 전역의 가든클럽과 특별강좌에 초빙되어 꽃과 인생을 강의했다. “이파리가 너무 무성하면 꽃이 피지 않는다. 중앙에 먼저 핀 꽃을 잘라내야 주변 꽃들이 잘 자라난다”는 강 작가는 “혼자만 잘 자라면 주변 꽃들이 피지 못해 조화로울 수 없으며, 꽃 자체로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다”고도 했다. 꽃을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이 강의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화보집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원 지난해 5월 숙명여고 졸업 5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귀국한 강 작가를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구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었다. 항상 건강하시고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다. 갑작스런 수술과 별세는 강 작가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어머니는 평소 소망을 이룬 것이었다. 자녀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고 주무시는 듯 세상을 떠날 수 있기를, 미국의 딸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면서 장례 꽃장식을 해주기를 간절히 빈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못다 이룬 어머니의 소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강 작가가 40여 년간 디자인한 작품을 집대성하여 최고의 화집을 발간하라는 어머니의 소망이자 명령이었다. 필라델피아 국제플라워쇼에서 대상을 탄 작품을 비롯하여,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을 선별해 재현하고 보관해 놓은 콜라주 작품을 하나하나 담았다. “올 6월 말 덴버에서 있었던 미국플라워디자이너협회 창립 50주년 기념총회에 이 화집을 출품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고, 이는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저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강 작가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이제야 지켰네요. 어머니와 나의 평생의 소망이었던 화집 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습니다”면서 울먹였다. ‘일체(Oneness)’는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 됨을 뜻한다. 여러 부분이 서로 보완하고 협력하여 아름다운 전체를 만드는 것이다. 원네스(WONNESS)는 조화와 일체를 이루는 클레어 원 강의 예술세계다. 화려한 꽃과 눈에 잘 띄지 않는 수수한 꽃의 조화다. 절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제자리에 맞는 아름다움이다. 강 작가는 화집을 발간하면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였던 인생의 순간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모두 연결된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 가족, 동료, 친구, 후배, 제자, 이웃 등 이 모두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이란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한글과 영문으로 제작된 화집 는 이제 클레어 원 강의 화신이 되어 하버드대학, 옥스퍼드대학, 스미소니언 등 각지의 도서관에서 플라워아트를 전파하고 있다.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게 하다 강 작가의 목소리는 30~40대다. 타고난 맑은 목소리로 강의를 계속할 작정이다. 뉴욕식물원과 가든클럽에서 요청하는 강의를 힘닿는 데까지 맡을 생각이다. 봉사활동도 그의 일상생활이 되었다. 미국 내 한인 여성을 중심으로 구성된 ‘세계아동기금(Global Children Foundation)’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기증 받거나 구입한 상품을 바자회를 통해 미국과 한국에서 판매하여 수익금 100%를 세계 각지의 굶주린 어린이를 위해 지원하고 있다. “젊을 때는 나, 내 자식, 내 작품 위주였는데, 이제는 남을 돕는 일이 훨씬 즐겁게 느껴집니다.” 강 작가는 죄수나 소외된 사람에게는 꽃 이야기로 마음을 치유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에게 꽃꽂이 기술을 전수해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작정이다. 왕성한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몸 관리가 필수다. “화집을 만드느라 중단한 인도 요가인 비크람(Bikram)을 다시 시작할 계획입니다.” 강 작가는 5년 전 무릎이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아팠으나 비크람을 통해 극복했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사랑하는 손녀를 보면 저절로 낫는단다. “나이가 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간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음이 더 즐거워지는 느낌입니다.” 그는 미국의 주류사회에서 활동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한인 모임에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 2016-01-0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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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을 노크하다 PART3] 남자와 여자, 여자의 적은 남자인가?
- 자료를 고르려 단골 서점에 들렀다가 교양서적 코너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분석하고 설명한 책들이 너무 많아서다. 어떤 책은 남자는 머물고 싶은데 여자는 떠나고 싶다고 하고, 어떤 책은 남자는 화성에서 왔는데 여자는 금성에서 왔다고 한다. 남자는 착각하고 여자는 고민한다는 책도 있고, 놀랍게도 남자는 발레하는데 여자는 권투한다는 책마저 꽂혀 있다. 심지어 그런 종류의 책들 숫자가 갈 때마다 늘어난다. 남자와 여자가 그렇게나 다른 존재였던가, 새삼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김유준 프리랜서 기자 dongbackproject@gmail.com 아닌 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은 많이 다르다. 그리고 그 대목에 관해서는 연구가 왕성하다. 인문학자들이 공을 들여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어디 학자들뿐이겠는가. 일반 사람들의 시선 또한 종종 그 지점을 향한다. 최근 술자리에서 제법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남성과 달리 여성들이 왜 그토록 손톱 치장에 공을 들이는지에 관한 주장들이었다. 누군가 “요즘 손톱이 유난히 거칠어졌다”고 한마디 툭 던지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다른 누군가가 “이집트 파라오의 미라에서도 발견됐을 만큼 역사적으로 본디 손톱 치장은 남녀 통틀어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다”는 어쩐지 젠체하는 설명으로 그 말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옛날이라면 손톱 치장과 유지에 비용이 수월찮게 들었을 테니 지체 높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용도로 쓰였을 게 분명하다. 토론의 초점이 ‘근현대에 이르러 그러한 전통이 여성들에게만 전해진 이유’로 모여든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 늦은 밤의 술자리에서 때 아닌 심리학, 인류학 토론이 벌어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어느 사회심리학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성이 화장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이성(異性)에게 잘 보이기보다 스스로 만족하려는 원인이 더 크다’는 게 정설. 손톱 치장은 그 화장 가운데에서도 해당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효율적이다. 거울 없이도 원할 때면 곧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은 누군가로부터 칭찬 듣기를 소망하는 존재. 아무도 자신을 칭찬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라도 해야 한다. 손톱이야말로 그때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부위다. 그것이 그가 주장하는 ‘여자만 손톱 치장에 열을 올리는 이유’였다. 홍보 전문가인 친구가 덧붙인 말도 그럴 듯했다. 한창때는 화장하지 않은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상황이 달라진다. 꾸미지 않으면 스스로의 모습에 스스로가 실망하기 일쑤. 때문에 슬슬 화장이 진해지기 시작하고, 세월이 훌쩍 더 지나 화장만으로 목적 달성이 여의치 않아지면 반사적으로 손톱을 비롯해 팔이나 다리처럼 얼굴 아닌 부위에 집중하게 된다. 그가 내린 결론은 그러므로 보석이나 장신구, 사치품 따위를 선물해서 여성을 공략하려는 방법은 젊은 여성보다 나이 든 여성에게 더 효과적이라는 것. 보석은 손톱 치장과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란다. 남자는 파악과 대응의 파트너 중년 여성들은 이성을 꼭 끌어안고 가야 할 동반자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떻게 해야 더 잘 정복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해와 상생’보다는 ‘파악과 대응’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상대가 오른쪽 주먹을 내지르면 왼쪽으로 피하고 왼손으로 옆구리를 쳐서 굴복시켜라’ 하는 식의 책들이 과연 행복한 만남의 카운슬링으로 알맞을까. 그들에게 이성은 오랏줄을 던져 포박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뉴욕 타임스가 베스트셀러로 꼽았다는 같은 책들은 대표적인 예. 저자인 칼럼니스트 세린 야곱은 ‘남자는 어차피 특정적 인성의 여성을 좋아하게 돼 있는 존재’이므로 ‘엄마가 되기보다는 연인이 돼야’ 사랑받을 수 있으며 ‘슈퍼우먼은 강하지만 외롭다’고 못 박는다. 급기야는 ‘여자들이 매달릴 때 나타나는 열 가지 징후’까지 거론하며 결코 그처럼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그가 주창하는 바는 곰보다는 여우가 돼야 한다는 것. 여우가 뭐가 나쁘냐면서. 물론 여우 같은 여자가 지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남자들에게 두루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여자들이 비난 받을 이유 또한 없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듣고 나면 그만 숨이 턱 막힌다. 삶을 군인이 작전 수행하듯 살아서 과연 행복할까 싶다. 먼저, 모든 여성이 여우처럼 살아야 남성을 쟁취할 수 있으며 그래야 행복해진다는 주장이 가당키나 한가? 예를 들어보자. 심리학적으로 남성은 ‘목표가 명확한 여성’일수록 더 호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배우자를 고르는 조건으로 막연히 ‘마음이 맞다’거나 ‘그저 끌린다’는 식보다는 ‘연봉이 바라는 수준이며 학벌도 커트라인 안에 든다’ 하는 식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여성인 당신은 세상 모든 남자를 숫자로 평가할 것인가? 천성적으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여성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불행하지도 않다.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세상 남자들이 모두 그런 것도 아니다. 경마 정보지 못지않은 책들을 참고서 삼아서 타고난 성품까지 바꿔가며 획일적으로 살아야 남성의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면 남자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열이면 열 똑같은 상대만을 선호하는 천편일률, 초지일관의 고집불통인가? 남성은 여성의 적이 아니다 남성은 여성의 적이 아니다. 여성 역시 남성의 적이 아니다.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올 법한 말이라 다소 객쩍기는 하지만, 어쨌든 둘은 서로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 관계다. 서로 적대하지 않고 잘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이성만큼 사랑스러운 존재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연구해야 할 문제는 바로 그 ‘어떻게 해야 서로 잘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우가 돼야 한다거나 하는 식은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적 해결책은 무엇인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아이큐를 높이는 방법’을 연구했다는 일본의 뇌 과학자 사와구치 도시유키(澤口俊之) 무사시노 가쿠인 대학 국제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지난해 한 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남자와 여자는 많이 다릅니다. 굳이 수치로 말하자면 약 80퍼센트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차이점이 많으니 이를 극복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제시돼 있습니다. 그러나 살면서 그 방법들을 모두 수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차이를 인정하고 내버려두는 편이 더 수월하고 또 바람직합니다. 일일이 대응하기보다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덮어두는 것입니다. 찜찜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실은 대단히 유용합니다. ‘너는 그렇게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살겠다’고 하는 태도가 오히려 둘의 사이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표현대로라면 ‘쿨’하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상대를 선택했을 때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무작정 끌려서일 수도 있고, 명확한 장점들이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상대를 믿고 인정해야 한다. 처세서에 기술된 자잘한 잔머리는 한때의 위기상황을 모면하거나 일시적으로 상대의 관심을 끄는 데 쓸모 있을지 몰라도 머나먼 여정을 함께 가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공산이 더 크다. 윤용인이 쓴 에는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소개돼 있다. 아끼던 술을 아내가 버린 데 격분한 저자가 아내의 천연비누를 모조리 버렸더니 아내가 화들짝 놀라 금방 술을 사왔을 뿐 아니라 다시는 버리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물론 그 뒤로 저자 역시 비누를 되찾아주었다고 한다. 난데없이 웬 부부싸움 이야기를 늘어놓았는지 의아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전문가의 의견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시인이며 심리학자인 김경미는 저서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심리학에 능통한 분들도 때론 자기 마음을 어쩌지 못하죠.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기 싸움을 벌이고 상대를 내 식대로 고치려 일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심리 전문가들이 부부 문제에 관해 이구동성으로 조언하는 제1항목은 ‘상대를 내 식으로 고치려 하지 마라, 상대를 인정하라’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남자나 만나서 ‘그대로 인정’하기만 하면 행복해진다는 뜻은 아니다. 남자도 남자 나름. 좋은 남자도 있고 나쁜 남자도 있다. 어느 개그우먼이 배우자의 파탄적 혐의 탓에 두 번째 결혼 생활까지 위기에 몰렸다는 뉴스를 접하면서, 새삼 남성이든 여성이든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리서치 결과를 지면 관계상 두 가지만 살펴보자. 모두 어떤 남자가 나쁜 남자인가를 가려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연구들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음에 기술되는 내용은 ‘그런 경향이 있다’는 정도일 뿐이라는 사실. 먼저 영국 신문 메트로 지(紙)의 기사 내용을 참고해보자. 영국 굴지의 만남 사이트에서 어떤 면에서는 흥미롭고, 어떤 면에서는 유별난 조사를 실시했다. 남자의 발 크기와 바람기와의 상관관계에 관한 리서치다. 언뜻 무슨 생각에서 그런 작업을 했을지 의아하기조차 한데 어쨌든 상당히 엉뚱한 결과가 도출됐다. 발 크기가 클수록 바람기가 많다는 것이다. 발 크기가 285밀리미터인 남성들은 260밀리미터인 남성들보다 세 배 더 바람을 피우며, 295밀리미터인 남성들은 250밀리미터인 남성들보다 다섯 배 더 바람을 많이 피운다는 결과다. 이 조사 결과를 두고 학자들은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관계있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체격이 좋고 목소리가 낮을수록, 다시 말해 남성 호르몬이 많을수록 바람기가 한눈을 더 잘 판다는 리서치 결과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 역시 그와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아직까지 정확한 원인은 찾지 못했다. 두 번째는 오하이오 주립대학 심리학과의 연구 결과다. 18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성 800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했는데, SNS에 직접 찍은 자신의 사진을 많이 올려놓은 남성일수록 겉과 속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고, 거짓말을 자주 하며, 자기중심적인 남성일수록 SNS에 직접 찍은 자신의 사진을 많이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특히 자신의 사진을 좀 더 좋게 보이도록 손질하는 사람에게서 그런 경향이 짙었으며, 심한 경우 사이코패스까지 있었다고 한다. 다시금 강조하건대, 발과 페이스북만 확인하고는 상대를 완전히 다 알아냈다고 속단해서는 곤란하다. 남성은 여성의 적인가. 여성은 남성의 적인가. 어느 쪽도 아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상생하며 조화를 이뤄야 할 존재들이다. 그런 면에서 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 빚어지는 남과 여의 대결 양상은 심히 우려스럽다. 이성은 당신의 적이 아니다. 평생 함께 가야 할 말 그대로의 동반자다. 채복기 목사는 이라는 책에서 배우자는 ‘또 하나의 반쪽’이며 ‘또 하나의 심장’이라고 말했다. 그런 상대를 적으로 돌려서야 행복이라는 파랑새는 쉽게 잡히지 않을 것이다.
- 2015-11-27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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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건의 사회사] 시계라는 물건의 영향력과 가치
- 시계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시계는 자연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생기는 자연의 순행에서 인간은 시간이라는 개념과 함께 이를 물리적으로 표시하는 시계라는 도구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글 장세훈(張世訓)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학계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해시계를 시계의 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영국의 전설적인 거석기념물인 스톤헨지 또한 실제 용도는 해시계였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한편 고대 그리스인들은 날씨가 흐리거나 야간에도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클렙시드라라는 물시계를 발명했고, 1434년 장영실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완성한 자격루 또한 물시계의 작동 원리를 응용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밖에도 모래로 시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모래시계와 기름의 연소량을 시간 계측에 활용한 램프시계도 중세시대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시계의 역사는 이토록 오래되었지만, 근대적인 개념의 기계식 시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7세기 중반부터다. 물리학 및 관측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기계식 시계의 이론적 토대인 진자의 등시성 원리를 16세기 말에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 네덜란드 태생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는 이를 최초로 시계에 적용해 시계 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그가 1675년 개발한 진자시계는 후대의 과학자들과 시계 제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들의 손을 거치며 점차 다양한 종류의 시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탁상시계와 휴대가 간편한 회중시계가 유럽의 귀족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는 시계가 인류의 생활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의미했다. 물론 그 시절만 하더라도 휴대용 시계는 일반 서민들은 쉽게 볼 수조차 없는 사치품이었다. 유명 시계 제작자들은 주로 왕가나 귀족들을 위해서만 소량씩 주문제작방식으로 시계를 제작했고, 긴 체인을 연결해 양복 포켓 안에서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는 회중시계는 특권층의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면서 귀금속 케이스로 제작한 시계들이 각광을 받았다. 한편 회중시계는 기술적으로도 당대 시계제작자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크기가 큰 추시계류와 달리 회중시계는 부품들의 사이즈부터 매우 작고 더욱 정밀한 가공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마이크론 단위까지 정확하게 측정, 절삭할 수 있는 기계들이 앙트완 르쿨트르 등 몇몇 선구적인 인물들에 의해 19세기 초반에 개발되었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스위스 태생의 시계 제작자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18세기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시계 제작자이자 시계 역사상 어쩌면 가장 영향력 있는 발명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최초의 셀프와인딩(로터의 회전에 의해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형태의) 시계였던 퍼페추엘(1780년)을 비롯해, 훗날 브레게의 상징이 된 정교한 패턴의 기요셰 다이얼(1786년)과 파랗게 열처리를 한 브레게 핸즈(1783년), 충격 흡수장치인 파라슈트(1790년), 브레게 헤어스프링으로 불리는 탄성과 내부식성이 탁월한 밸런스 스프링(1795년), 그리고 지지대 역할을 하는 케이지 안에 끊임없이 밸런스 휠을 회전시켜 중력을 상쇄하는 혁신적인 설계의 투르비용(1801년)에 이르기까지 현대 기계식 시계 제조의 기틀이 되는 여러 중요한 발명들이 브레게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브레게는 회중시계 시대를 앞당긴 인물이면서 훗날 손목시계의 등장까지 예견한 진정한 의미의 천재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시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가시화된다. 바로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의 세대교체가 그것이다. 최초의 손목시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1904년 루이 까르띠에가 친구인 조종사 산토스 뒤몽을 위해 제작한 까르띠에의 ‘산토스’를 최초의 현대적인 손목시계로 꼽는다. 케이스 모서리를 둥글린 사각에 가까운 케이스, 두툼한 러그, 착용감을 고려한 아담한 사이즈는 산토스를 당시의 어떠한 시계와도 차별화시켰다. 까르띠에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프랑스의 전투 장갑차에서 착안한 아이코닉한 사각시계 ‘탱크’를 1917년 탄생시켜 일찍이 손목시계 제조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IWC, 론진, 호이어(태그호이어의 전신) 등 여러 제조사들이 손목시계 제조에 발 빠르게 합류했다. 특히 롤렉스는 세계 최초의 방수 케이스인 오이스터(1926년)를 비롯해, 오토매틱 무브먼트인 퍼페추얼(1931년), 자정 무렵 날짜창이 자동으로 변경되는 시계 데이트저스트(1945년), 최초의 다이버 시계 서브마리너(1953년) 등 몇몇 선구적인 발명으로 손목시계 시대를 앞당긴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손목시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시계로 인기를 모으면서 대중적으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됐다. 종전 직후인 1950년대에는 이미 스위스 시계업계가 주류로 군림했다. 1960년대 말까지 스위스 시계 산업은 전례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고 시계는 더 이상 사회 고위층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도 향유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세이코를 필두로 한 쿼츠시계의 광풍에 밀려 스위스 시계 산업은 1990년대 초까지 기나긴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기계식 시계와 달리 수정자와 배터리로 작동하는 쿼츠시계는 적은 제조비용으로 훨씬 더 많은 시계를 생산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특유의 정확함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쿼츠시계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기계식 시계를 찾기 시작했고 2000년대 접어들면서 기계식은 쿼츠와 사이좋게 시장을 양분할 만큼 다시 예전의 선호도를 되찾는다. 각종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의 주축이 된 요즘 수백 년 방식 그대로 제작되는 기계식 시계가 다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현상은 어찌 보면 난센스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계식 시계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쿼츠시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계식 시계만의 예스러운 감성과 장인정신, 그리고 예술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시계란 무엇인가? 명품 시계에도 트렌드가 존재하는가? 좋은 시계의 기준이란 어찌 보면 상대적이고 자의적인 개념이다. 기술적으로나 미적으로 그리 훌륭하지 않은 시계일지라도 한 개인의 관점에선 충분히 최고의 시계로 비칠 수 있다. 또한 소중한 추억이 담긴 시계라면 가격대를 떠나서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를 갖게 마련이다. 특정 시계에 ‘명품’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주저 없이 명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시계들이 분명 존재한다. 단지 고가라서,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을 해서,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브랜드라서 꼭 명품이 아니라, 정제된 디자인과 오래 봐도 질리지 않을 클래식한 다이얼, 우수한 설계의 무브먼트와 같은 요소들이 명품 시계를 규정하게 한다. 세상 돌아가는 순리가 그렇듯 명품 시계 시장에도 소위 말하는 트렌드라는 게 있다. 가령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사이즈가 크고 대담한 디자인의 시계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만 해도 신생 브랜드였던 위블로, 벨앤로스 등이 이러한 트렌드에 힘입어 시계 업계에 완전히 자리를 잡는가 하면, 전통적으로 빅사이즈 시계를 브랜드의 개성처럼 강조해온 IWC, 파네라이 같은 제조사들도 엄청난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명품 시계 업계의 트렌드는 과거로의 회귀로 규정지을 수 있다. 빅사이즈 트렌드에 대한 반발로 시계 사이즈를 다시 줄이기 시작한 제조사들이 늘어났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스포티한 디자인 대신 단순하면서 고전적인 디자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수십 년 전의 헤리티지 모델을 현대적으로 복각하는 것도 업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블랙, 화이트 다이얼 일색인 고급 시계 업계에 최근 들어서는 블루, 그레이, 브라운, 옐로 등 다양한 컬러가 도입되고 있으며, 단순히 색만 입히는 차원이 아니라 기요셰, 그랑푸 에나멜링, 핸드 페인팅 등 다양한 전통 다이얼 제작 기법까지 적용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바쉐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예거 르쿨트르, 율리스 나르당, 샤넬 같은 제조사들은 자체적으로 양성한 전문 에나멜러와 인그레이빙 장인, 주얼리 세팅 장인들을 활용해 다이얼에 예술성을 가미하는 ‘메티에 다르(Metiers d'Art)’ 시계들로 고급 시계 제조의 또 다른 예술적인 경향을 선도하고 있다. 시계와 사회성 시계를 순수하게 취미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소위 명품으로 분류되는 고급 시계 소비자들 중에는 해당 시계에 담긴 진정한 가치나 스토리텔링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해당 브랜드가 사회적으로 환기하는 아우라와 이름값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고급 시계가 사회 통념상 일반 소비재가 아닌 사치재로 통하기 때문에, 종종 신문의 사회면이나 방송에서는 부정부패한 방식으로 돈을 축적한 이들이 가진 재산을 은닉하기 위해 혹은 불법 로비를 위해 고급 시계를 구입하고 선물했다는 식의 가십성 기사도 종종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시계가 어찌 수천, 수억 원에 달할 정도로 고가일 수 있는지에 관해 묻기에 앞서 우리는 해당 시계가 지닌 본연의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계 칼럼니스트로서 스위스 주요 시계 브랜드들의 시계가 제작되는 매뉴팩처(공장)를 방문할 기회가 있는데, 매뉴팩처 투어를 거치는 동안 가장 먼저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시계가 비싸지 않을 이유를 발견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고급 시계에 지불하는 금액 속에는 해당 브랜드의 오랜 역사와 전통, 제조 노하우가 담겨 있는 데다, 기계식 시계의 경우 수백 개의 작은 부품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되어 조립되고 나아가 각각의 부품들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다듬고 장식을 하기 때문에 주변의 흔한 대량생산형 저가 시계들과는 확연히 다른 프로세스로 완성됨을 알 수 있다. 오랜 경력과 출중한 실력을 가진 시계제작자를 가리켜 ‘마스터(장인)’라고 칭하는 것도 고급 시계 제조의 배경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계는 분명 재화만 있다면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지만, 때로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시계들도 있다. 하이엔드 시계 제조사들 중에는 시계를 단지 판매 목적이 아닌 브랜드가 지닌 기술력과 추구하는 가치를 최대치로 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실험적인 시계를 제작하는 곳도 있다. 까르띠에가 2009년에 선보인 유니크 피스 ‘아이디 원(ID One)’과 2012년에 발표한 ‘아이디 투(ID Two)’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시계 제조 방식에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더욱 완벽에 가까운 시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까르띠에처럼 시계 제조 기술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예가 있는가 하면, 바쉐론 콘스탄틴이나 반클리프 아펠처럼 최상의 예술적인 시계를 완성하기 위해 전통 공예 장인이 최소 2주에서 길게는 몇 달간에 걸친 수작업으로 완성한 유니크 피스들도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시계애호가 및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열렬한 지지를 받는 MB&F, 그뤼벨 포시, 로랑 페리에 등의 독립 시계브랜드들과 필립 듀포, 카리 보틸라이넨과 같은 존경받는 독립 시계 제작자들의 시계도 매우 한정된 수량만 제작되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시계로 손꼽힌다. 이러한 귀한 시계들은 차후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세계 시계 경매에 출품돼 애초의 금액대를 훨씬 상회하는 경매가에 낙찰돼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겠지만, 흔히 볼 수 없어 희소하고 기술력과 예술적 표현의 한계에 도전한 마스터피스급 작품들은 반드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마련이다. 고급 기계식 시계가 세계 주요 경매에 단골손님이 된 것도 하나의 완성도 높은 시계는 예술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귀한 시계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부류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부(富)도 따라야겠지만, 단지 부유해서만은 가질 수 없는 탁월한 감식안과 시계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열정, 그리고 좋은 시계를 가치에 맞게 즐길 수 있는 애티튜드(자세)를 지닌 자야말로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 싶다. >>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타임포럼 주 필진으로서 시계 각 분야의 뉴스 및 심층 리뷰와 칼럼을 담당하고 있으며, 매년 바젤월드, SIHH, 워치스 앤 원더스 등 주요 시계 박람회를 취재해 기사화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시계 전문지 스페셜을 번역 보완 출간한 를 감수 및 추가 저술했으며, 주요 시계 제조사와 대표작을 선별한 e-북 를 저술했다. >> 타임포럼 소개 2006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시계에 관한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10만 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직접 시계 구입 후기와 착용 소감, 다양한 질문과 답변 등을 주고받음으로써 시계에 관한 국내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방대한 정보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timeforum.co.kr
- 2015-11-05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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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산다는 것 PART2] 혼자 노는 남자,이시형 박사의 둔하게 살기
- 팔순이 넘은 지금에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정신과 의사이자 뇌과학자 이시형(李時炯·81) 박사는 최근 새로운 도서 를 발표하여 또 한 번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또한 문인화 화가로서, 그리고 세로토닌 문화원장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의 레이스는 멈출 줄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대의 멘토로서 여유있게 좀 느슨하게 사는 그가 품고 있는 삶의 철학과 지혜를 엿본다. 이시형 박사는 처음 라는 책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을 출판사로부터 들었을 때를 속된 말로 ‘느낌이 확 왔다’고 표현했다. 1982년, 첫 번째 저서인 로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그에게 있어 라는 제목은 자신의 첫 번째 책에 대한 33년 만의 대답처럼 보였다. 잘 산다는 것의 의미 새로 정의해야 “우리나라 사람들은 낯선 사람과의 교류 경험이 적습니다. 그런 데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살고 있는 도시라는 공간 자체가 사람을 위축시키는 힘이 있어요. 지독한 무한경쟁 속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표지향적이고 밤낮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과 조건들 때문에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격렬하고 거친 사람이 자연스럽게 될 수밖에 없는 거죠. 속전속결에 한탕주의까지 익숙해지니 원칙을 지킬 수 없는 사회가 만들어진 겁니다. 세월호 사고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정신과의사로서, 이 박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과민하게 살다 보니 피해의식이 굉장히 많아졌다고 진단했다. 단지 우연히 쳐다봤을 뿐인데 시비를 걸어 폭행 사고를 일으키는 젊은이, 사방에 깔린 CCTV, 은행을 못 믿어서 옷장 안에 돈을 숨기는 노인들. 이 박사가 바라보는 한국 현실은 이미 병적인 사회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절대로 건전한 사회가 아닙니다. 이렇게 사람을 과민하게 만드는 사회인 걸요. 그래서 저는 좀 순하게 살자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지는 건 용납이 안 된다,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생걱은 기본도 지키지 않고 정도를 걸을 수 없게 만듭니다. 요즘 사람들은 손해를 좀 보더라도 정도를 걸으며 원칙대로 살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뜨겁고 폼나게 사는 법 어느 샌가 원칙이 사라진 사회. 1934년생으로 올해로 81세를 맞이한 그의 원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저녁이 되면 (운전)기사는 집에 보내고 저는 지하철을 타며 다니고 있어요. 기사가 내 스케줄을 못 따라오거든요. 하루에 17시간을 일해야 하니까. 그래도 감기 몸살 앓아본 적 없습니다. 4시 30분에서 5시면 기상합니다. 일어나서 운동은 한 20분 정도 간단하게 하고 그게 부족하다 싶으면 건물 10층까지를 계단으로 올라가죠.” 요즘 이 박사의 일상 중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힐리언스 선마을이다. 강원도 홍천군에 위치한 힐리언스 선마을은 자연을 닮은 공간을 만들고자 한 이 박사의 의지가 이뤄진 결실이며 다양한 힐링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힐리언스 선마을을 인터뷰 전날에도 다녀왔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 박사의 일상을 점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는 문인화다. 문인화란 먹을 이용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시와 그림의 조화를 추구하는 그림으로 조선시대 선비와 사대부층에서 즐겨 그려졌다. 그가 문인화를 하게 된 사연은 삶의 어떤 돌발과도 같은 일 때문이었다. “대전에 갔을 때 노숙자를 한 명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예전에 제가 치료했던 환자였어요. 그는 열 번의 사업을 다 실패하고 가족과도 헤어져 노숙자로 사는 중이었죠. 정말 진실하고 착했는데도 불구하고. 대전에서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은 모두 그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결국 되긴 되더라고요. 그런 내가 열 번을 실패한 사람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 아픈 심경을 공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제일 못하는 걸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배우게 됐어요.” 80 평생 처음 들은 칭찬 이 박사는 미술 시간이면 선생님이 ‘밖으로 나가 공이나 차라’고 할 정도로 그림 실력이 형편없었다. 미술을 하면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라는 자괴감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함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교실 뒷벽에 한 번도 그림을 못 붙여본 사람을 20여 명 모았다. 그리고 김양수 화백을 그림 선생으로 모시고 문인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군자를 그렸어요. 그런데 아무리 재도전해도 난 도저히 못 그려서 포기했습니다. 그래도 그림 모임을 그만두진 못했어요. 내가 하자고 했는데 내가 관둔다고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좀 더 그림을 배웠는데, 그러나 그릴 만한 게 산이었어요. 문인화는 글이 필요해요. 그래도 내가 글은 좀 쓰니까 그건 괜찮았고.” 그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나면 만족하지 못해서 쓰레기통에 버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림 선생님이 쓰레기통에 버린 그의 그림을 가져가 방 안에 전시해놓고 있는 걸 봤다. “그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잘 그린 그림과 좋은 그림이죠. 이 박사님의 그림은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좋은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면 어머니 생각, 친구 생각, 과일 생각 등 생각을 많이 나게 만드니까요.” 80여 년 동안 그림을 못 그리던 사람이 자신이 그린 그림을 통해 들은 최초의 칭찬이었다. 그 이후 이 박사의 삶에는 화가로서의 업이 추가됐다. 경인 미술관, 대웅 아트 스페이스 등에서 5번의 전시회를 가졌고, 요즘은 해외에서도 전시 러브콜을 받는 중이라고 한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집니다. 사물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되고요. 그림에 들어갈 글을 생각하다 보면 시인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이 아름다워지고 더 창조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아요. 마음까지 편해지는 둔감력을 키우며 세로토닌적 삶을 사는 데 문인화가 도움이 됐어요.” 멋지게 살고 싶다고? 고독력을 키워라 많은 독자들이 이 박사에게 한 질문을 던졌다. ‘둔하게 살면서 폼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다들 멋지게 사는 방법을 찾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싱글들이 많은데 혼자서 멋지게 살 수 있는 법이 중요하죠. 우선 봉사활동을 들고 싶습니다. 봉사활동하는 사람들은 정말 착합니다. 월급이 고작 차비 정도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은 남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어요. 거기에 즐거움과 보람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고독력을 길러야 합니다.” 고독감과 고독력은 다르다. 고독감은 추레하고 권태로운 기분이다. 그러나 이 박사가 말하는 고독력이란 솔리튜드(Solitude)를 의미한다. 바로 ‘혼자 있을 수 있는 힘’을 말한다. 이 박사는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운명은 고독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사색을 해야죠. 예전에 KBS 방송사 사람에게 퀴즈 프로그램 좀 만들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건 사색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건 디지털적인 것이에요. 우리에겐 사색을 위한 아날로그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아날로그적 사고 위에 디지털이 있어야 완벽해지거든요.” 연애를 하며 사는 행복 레이스 이 박사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혼자 잘 살려면 연애를 하라.” 그러나 이 박사가 말하는 연애란 일반적인 좁은 의미의 연애가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넓은 저변의 연애였다. “손을 잡고 호텔 가고 하는 차원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지적인 거죠. 멋진 아가씨와 대화하면서 커피 한 잔 하면 얼마나 멋있어요? 그게 저에게는 연애예요.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서로 베푸는 것이야말로 연애라고 봅니다.” 이 박사는 돈은 있지만 베풀 데가 없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베푸는 것 자체가 즐거운 것이며 베푸는 게 곧 연애라는 지론은 신선했다. 그렇다면 이 박사에게 있어 연애의 정의는 소통이 아닐까? 베푸는 것도 상대의 진심을 알아야 베풀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베풀기 위해선 가르치는 게 있어야 해요. 가르친다는 게 별 건 아니에요. 내가 하는 걸 보고 그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만드는 거죠. 젊을 때는 인색해야 한다고 봐요. 하지만 나이가 들면 있는 대로 다 베풀어야 해요.”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진지하게 보게 되다 “다 고맙고 항상 감사하는 기분입니다. 난 항상 사회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문인화를 시작하고 나니 삶을 더욱 진지하게 보게 됐어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자세히 보게 되거든요.” 이 박사의 베풂은 사회에 대한 애정에 근거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에게 있어 삶의 자극제는 더 나아지는 우리나라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제가 경제하고는 거리가 먼데, 신문 경제면을 잘 봅니다. 그걸 보면 어딘가를 지원하고 무언가를 해내는 우리나라 모습이 보여서 자부심에 기분이 좋아요. ‘삼성이 자기 특허를 나눠줬다’, ‘현대는 협력업체들에게 공평하게 이익을 배분했다’, 등 이런 소식들을 볼 때마다 정말로 기분이 좋습니다.” 그 나이에도 여전히 삶의 기쁨을 누리면서 산다는 축복. 이 박사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베이비부머들을 위해 사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경치 좋고 물 좋은 땅을 잡고 집을 짓고서, 베이비부머들에게 직능별로 채용공고를 내는 거예요. 일정한 전세금을 내면 집에 들어올 수 있게 하고, 들어오면 능력에 맞는 일감을 주는 겁니다. 살 집과 월급, 그리고 비슷한 나이의 동료들과 단체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할 겁니다. 그들의 건강을 위해 가이드북도 마련하고요.” 베이비부머를 위해 집, 건강, 경제 활동을 한 번에 해결해준다는 솔루션. 어떤 야심마저 느껴지는 계획이다. 나이도 한계도 잊은 듯한 뜨거운 삶의 태도. 그것이야말로 혼자 잘 노는 이 박사가 견지하는 원칙이자 삶 그 자체가 아닐까.
- 2015-07-1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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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한뇌, 섹시한뇌-PART2] 뇌 사용량이 높다고 천재가 될까?
- 뇌 사용량이 많으면 천재가 된다는 말이 사실일까? 결론부터 내리자면 인간은 뇌 전 영역을 골고루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사용량과 천재의 상관관계는 없다는 것이 21세기 학계의 정설이다. 그렇다면 천재라 불리는 이들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참고 뇌과학여행자(김종성 저), 공부의 기쁨이란 무엇인가(김병환 저), 천재들의 뇌(로베르 클라르크 저)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생각해왔다. 아인슈타인쯤 되는 사람이 뇌의 10% 정도를 사용했고, 보통 사람은 10% 미만의 뇌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천재는 뇌를 쓰는 영역이 뭔가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것은 속설에 불과하다고 한다.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는 “뇌를 구성하는 신경 세포는 늘 작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나 그렇다고 쉬고 있는 것도 아니다.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정 부위가 특별히 활성화되는데 그 신경 세포의 비율이 5% 정도다. 다음 순간에는 다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다른 부위가 활성화되며 이는 순간마다 바뀌므로 뇌는 전체적으로 늘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유튜브에 에이셉사이언스(ASAPScience)를 연재 중인 미첼 모피트(Mitchell Moffit) 역시 “대부분의 영화와 SF소설은 인간이 뇌 기능의 단 10% 정도만 사용한다고 우리를 믿게 만들죠. 완전히 거짓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뇌 10% 사용설은 근거가 부족했던 과거의 이야기 정도로만 파악하면 될 듯싶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뇌를 잘 쓰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시 아인슈타인으로 돌아가 보자. 어린 시절 아인슈타인은 발육이 더디고 말도 늦었다. 그의 부모는 지진아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아인슈타인증후군’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지능이 일찍 발달한 아이들의 말하는 능력이 늦게 발달하는 것. 아인슈타인의 뇌를 연구한 신경과학자들은 그가 말하는 것이 늦었던 것은 뇌의 비정상적인 발달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해부 결과 밝혀냈다. 분석적 사고 기능이 집중된 아인슈타인의 뇌 부위가 정상적인 영역을 크게 벗어나 있었는데, 이 같은 침범을 받은 영역 가운데 하나가 일반적으로 언어기능을 통제하는 부위였다. 하지만 주목할 부분은 아인슈타인의 뇌 속에서 평범한 사람의 머리 안에는 없는 특별한 조직이 발견되지 않았을 뿐더러 천재나 보통 사람 모두 문제를 해결할 때 동일한 과정을 밟는다는 것이다. 결핍과 질환으로 파생된 천재들 탁월한 창작활동 덕택에 후세에도 여전히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이들에게는 유독 정신 질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일련의 연구들을 살펴보면 천재와 정신병 환자의 뇌는 비슷하다고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천재는 수많은 정보를 자유롭게 엮어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 수 있지만, 정신병 환자는 그 정보를 소화하지 못하고 혼돈 속에 산다는 점이다. 서울아산병원 김종성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결핍과 질환으로 탄생된 천재의 이야기. 글쓰기에 미친 측두엽 간질환자 ‘셰익스피어, 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와 셰익스피어는 글쓰기에 집착하는 형태를 보이는 측두엽 간질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작품을 통해 본인의 간질과 비슷한 증상을 써내려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 ‘악령’ 속에서 간질을 앓고 있는 인물을 묘사했고, 셰익스피어는 ‘오셀로’, ‘맥베드’ 등의 작품 속에서 간질을 표현하고 있다. 측두엽 간질을 앓는 사람들은 몇 가지 성격적인 특징이 있다.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관심이 높고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갖지만 간혹 안절부절못하거나 공격적으로 변하며, 지나치게 글을 많이 쓴다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많이 쓰는 현상을 ‘하이퍼그라피아’라고 하는데 측두엽 간질환자가 왜 글쓰기에 집착하는지는 명확한 규명이 되지 않은 상태다. 다만 기억력이 저하돼 이를 보충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본다. 전두엽이 덜 떨어진 낙제생 ‘피카소’ 피카소는 아주 어릴 적부터 타고난 그림의 천재였다. 말도 배우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렸다. 이미 숙달된 어른 솜씨로 말이다. 그가 맨 처음 한 말은 ‘피’였는데 연필을 뜻하는 ‘라피즈(lapiz)’를 그렇게 발음한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는 미술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과목이 낙제 수준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하나도 없다”고 자랑스레 말하고 다닌 그는 미술이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던 학생으로 기록된다. 왜 그랬을까? 전두엽의 기능이 다소 떨어져 공부는 못했지만, 오히려 후두엽의 시각중추가 발달돼 탁월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피카소는 사실화로부터 추상화로 그림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는 시각 중추는 물론 뇌의 광범위한 영역을 사용해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열등감과 청력손실 그러나 들끓는 열정 ‘베토벤’ 베토벤의 청력손실 문제도 의학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다. 두개골의 두께가 평균 0.5인치로 기록됐다는 부검 소견에 따라 파젯병의 가능성, 대뇌매독 등의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밖에도 결핵과 장티푸스, 피부병, 간경화, 위장병 등 수많은 질환을 가지고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 베토벤은 가난했다. 게다가 외모조차 별로였다. 심한 곱슬머리에 얼굴은 천연두를 앓아 곰보였다. 당시 음악가들은 귀족들의 경제적 후원으로 살아가야 했기에 그들의 취향을 포기한 채 궁정음악을 작곡해야만 했다. 그의 들끓는 열정은 자신의 개인적인 목소리를 내기를 원했다. 베토벤은 수많은 병과 열등감을 토대로 천재 음악가로 성장하게 됐다. 후천적 천재, 노력의 산물을 쏟아낸다 프랑스 과학저술가 로베르 클라르크(Robert Clarke)의 ‘천재들의 뇌’에 따르면 차이코프스키는 25세에 첫 작품을 내놨고, 고흐는 27세에 처음 그림을 배웠다. 고갱은 39세에 화가로 입문했으며, 프로이트는 40세가 돼서야 심리학을 접했다.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그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이들은 굉장히 늦은 나이에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말년에 본인의 대표작을 완성한 인물들도 주목해볼만하다. 하이든은 66세에 ‘천지창조’를 작곡했고, 소포클레스는 75세에 ‘오이디푸스 왕’을 집필했다. 괴테는 81세에 ‘파우스트’를 탈고했으며, 앵그르는 82세가 돼서야 ‘터키탕’을 그렸다. 미국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Anders Ericksen)이 펴낸 ‘케임브리지 편람’을 보면,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천재가 만들어지는 비법은 ‘70%의 땀과 29%의 좋은 환경과 가르침, 그리고 나머지 1%는 영감’이라고 말한다. 과학이나 예술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인물들의 지능지수는 보통 사람보다 약간 높은 115~130 정도라고 한다.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4%에 해당하지만 실제 천재들은 이 수치에 비해 훨씬 적다. 대략 열 명중에 한두 명은 지능지수로 봤을 때 천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지만 실상은 못 미친다는 것이다. 천재들의 특성은 지능지수와 무관하게 누구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결론이다. 천재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머리를 갖고 태어나야 하는 게 아니라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 천재는 없다. 이 말에 의문이 생긴다면 마지막으로 음악신동으로 불리는 모차르트를 생각해보자. 모차르트가 과연 태어날 때부터 영재였을까?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일반 사람들보다 지독히 매달렸던 노력파였다. 35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600여 편이라는 걸작을 썼다. 천재라서 단숨에 성공적으로 작곡을 했을 거라는 소문과는 달리 그 역시 초작에는 고친 흔적이 많이 있다. 수많은 연습과 노력의 시간을 쏟아 부어 천재로 재탄생한 인물이었던 것. “일은 나의 주된 즐거움이다”라는 그의 고백에는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2015-04-06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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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cond life]제 2의 황수관 박사를 꿈꾼다
- 제2 서해안고속도로 사장 류영창(柳塋昌·60)씨는 공학자(서울대 토목공학 박사)이자 과학자이며, 자타가 공인하는 ‘물박사’다. 류 사장은 공무원 시절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수자원개발과장을 비롯해 수자원정책과장, 공보관, 기술안전국장, 한강홍수통제소장 등을 역임하면서 오랫동안 물과 관련된 업무를 했다. 그런 류 사장이 물 관련이 아닌 건강(의학)정보 책(생활건강 사용설명서)을 발간한 것이다. 최근에는 건강 관련 강연과 칼럼쓰기에도 여념이 없다. 과연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의 얘기를 들어봤다. “국토부 국장 시절 국책 사업을 기획할 때 고혈압이 왔어요. 의사를 찾아 아무리 생활요법을 가르쳐달라고 해도 혈압약 먹으란 얘기만 하더라고요. 병원문 나서면서 오기로 약 안 먹고 고혈압 고치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3년 만에 약 한 알 안 먹고 다 고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의사들에게 맞아죽을 각오로 책 한 권을 썼습니다. 건강과 의료 패러다임도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죽지 않기 위해 시작한 건강·의학 공부 그는 자신의 집안을 ‘뇌졸중 집안’이라고 소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어머니는 물론 이모, 외삼촌까지 전부 뇌졸중 등 심혈관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특히 어머니는 신경성 위장병을 비롯해 고혈압으로 사실상 50여년간 병원 신세를 지다가 세상을 등졌다. 결국 친가에도 뇌졸중이 발병한다. 류 사장의 아버지였다. 그는 1992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16년 동안 반신불수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다음엔 내 차례가 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인 2008년 그도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 것. 그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부해야겠다’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몸이 허약했어요. 특히 심장이 약했어요. 조금만 뛰면 숨이 차고, 밤 늦게까지 공부하면 코피를 쏟는 약골이었지요. 성인이 돼서는 집안 어른들이 대부분 뇌졸중으로 돌아가시고 나자 ‘머지않아 내 차례가 오겠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병원에 가니 무조건 약을 먹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민간요법을 알려 달라고 간청했더니 ‘나도 (혈압약) 먹어요’라며 버럭 화까지 내는 거예요.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무조건 스스로 이겨내겠다고 결심했지요. 그때부터 시간 쪼개가며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약 위주의 치료방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게 됐어요. 깨달음이 커지면서 점점 다양한 측면에서 깊이 있는 연구를 하게 된 셈이지요.” 의학·건강 상식을 깨다 그의 집무실에는 건강 관련 서적이 가득하다. 물론 시간을 쪼개가며 건강·의학공부를 지속하기 위함이다. 특이한 점은 그 책들마다 포스트잇 메모가 빼곡하다는 것. 그는 틀린 이론이나 틀린 이론을 지적한 연구자들의 중요 문구에 대해 4색 볼펜으로 중요도를 가려내 메모한다고 했다. 특히 파란색 볼펜으로 밑줄 쳤거나 메모한 텍스트는 반드시 이론을 수정해야 하는 틀린 이론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언론 기고 칼럼이나 생활건강 사용설명서 개정판에 반영하기 위함이다. 현재 의료계와 날을 세우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일단 의료업계에서 말하는 ‘성인병’이라는 용어부터 고쳐 써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성인병이라는 명칭은 1957년 일본의 후생성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 암이나 뇌졸중, 심장병 등이 40~60세 정도의 나이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요즘엔 중·장년층뿐 아니라 젊은이나 어린이들도 이런 질병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성인병이 아닌 ‘생활습관병’이라는 명칭이 더 적절하고 정확한 표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일본에선 1997년부터 성인병을 ‘생활습관병’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다고 그는 소개했다. “성인병과 생활습관병은 차이가 크지요. 성인병은 나이 들면 어쩔 수 없이 병이 난다는 것이고, 생활습관병은 습관을 잘 고치면 병을 예방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요. 병원에 가면 대부분 무조건 약을 복용하라고 처방하고, 환자도 약을 처방해 주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양약(洋藥)은 화학물질이기 때문에 오래 복용하면 부작용이 생겨 다른 장기(臟器)에 병을 유발해요. 어떤 약은 몇 년 후에 부작용이 발견되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진단은 의사에게, 치료는 자연치유로 류 사장이 서양의학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외상(外傷)을 비롯해 응급 처치, 증세의 판단 등은 서양의학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그는 말한다. 다만 치료에 있어서는 몸의 면역력을 높여 스스로를 치료하는 자연치유력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최소한 병원에 가기 전에 본인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예컨대 당뇨병을 앓는 미국 환자들은 스스로 당뇨병에 대해 약의 부작용 자연요법 등을 스스로 공부하고 병원을 찾는다고. 하지만 우리나라는 반대사례가 많다. 의사들이 주는 대로 처방약을 그대로 받아 먹는 등 의사들의 지시를 신처럼 복종한다는 것. 심지어 일부 의 사들은 약의 부작용 등은 알려주지 않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환자를 주눅들게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를테면 혈압약은 성기능장애라는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는데도 이에 대한 소상한 설명 없이 처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이런 공급자(의료계) 위주의 시장이 바뀌어야 함은 물론이고, 의사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도 개선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말 못하던 공무원, 제2의 황수관 박사로 “제가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어요. 이 동네 사람들이 대개 말을 잘 못하거든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요새 건강 강의를 많이 하다 보니 말주변도 많이 늘었어요. (의사들과 대립각을 세우더라도) 이제 꼭 해야 할 말은 하려고 합니다. 지금껏 국가나 사회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았으니 이제 봉사를 해야 하는 시기인 거 같아요. 사람 살리는 일에 매진해야지요.” 그는 자신이 국가나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학창시절부터 모두 국·공립학교를 다녔고 30년 국토부 공무원으로 나라의 녹을 받았다. 때문에 이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며 눈빛을 빛냈다. 건강 관련 강연을 다니며 건강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 그래서 강연료를 미리 얘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봉사한다는 기분으로 강연에 임한다는 의미다.
- 2015-01-26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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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 자문단 칼럼]소고기를 소화시키는 효소로 화장품과 디스크수술까지
- 글 서울여대 노봉수 교수 우리가 먹는 음식 중에서 가장 소화가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이 고기류이다. 이러한 이유로 입안에서 부드러운 식감을 느끼기 위하여 생고기, 일명 스테이크 등에는 효소를 뿌려 잠시 재워 놓았다가 조리하곤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먹게 되면 고기의 일부 단백질이 분해돼 육질이 한결 연해져 맛이 좋아지기 때문에 연육소를 사용하고 있다. 단백질 가수분해 효소로 구성되어 연육소로 사용되는 것 중에는 파파야에 많은 파파인, 파인애플에 존재하는 브로멜레인, 무화과 열매에서 발견되는 피신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효소가 함유된 연육소는 마트나 백화점 식품코너 등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불고기 조리 시 양파, 마늘, 파 등에 재웠다가 구워 먹었는데 양파 속에는 단백질 가수분해 효소가 많이 들어 있어 질긴 고기도 비교적 부드럽게 숙성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또 한편으로 소화제를 구성하는 효소로도 많이 이용해 왔다. 식품산업에서는 맥주 공정 중에 파파인 효소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단백질은 맥주의 거품을 내는 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단백질이 함유되어 있지 않으면 맥주 거품을 생성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단백질들이 맥주를 얼렸다 녹였다 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병 안에는 이물질처럼 보이는 부유물질이 생성된다. 이는 단백질들이 엉키는 일종의 단백질 변성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단백질을 어느 정도 분해시키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런 목적(chill proofing)으로도 단백질 가수 분해 효소인 파파인을 활용한다. 파파야 열매가 열리는 줄기나무에 상처를 가하면 하얀 즙액이 나온다. 이 즙액을 손바닥으로 비빈 후 얼굴에 살짝 발라주면 피부가 한결 깨끗해지는 현상을 발견한다. 이것은 하얀 즙액 속에 함유된 파파인 효소가 피부 표면의 각질을 제거시켜 주는 효과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얼굴을 비롯한 피부는 끊임없이 세포분열이 일어나 새로운 피부가 만들어진다. 이 과정에서 생성된 지 오래된 세포로 각피 부분을 바로 제거해 줘야 하는데, 이 역할을 파파인 효소가 대신해 준다. 많은 화장품 속에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파파인 효소 첨가 화장품을 제조 판매하고 있다. 이처럼 단백질 분해 효소 파파인은 화장품 산업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운동량이 부족하고 앉아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은 현대인에게 많이 생기는 질병 중에 하나가 디스크다. 허리 주변의 근육을 발달시켜야 하는데 운동이 부족한 것은 물론 지나치게 쌓인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디스크가 생겨 고생하는 이들이 많다. 심한 경우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의 경우 척추부분은 매우 위험한 부위로 많은 사람이 꺼려하는 수술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칼로 째는 수술보다는 내시경을 이용해 일정 부분만을 제거하면서도 병원에 입원하여 며칠씩 머무르는 형태가 아닌 수술한 그 날 바로 직장에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비수술적 치료법으로, 이는 내시경을 통해 주입된 파파인과 유사한 단백질 분해효소인 카이모파파인이 단백질을 분해시켜 녹이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단백질과 수분으로 이루어진 디스크 수핵에 바늘을 찔러 넣고 카이모파파인을 주사하면 수핵이 녹아 디스크 내 압력이 감소하면서 튀어나왔던 디스크가 줄어들어 신경을 압박하던 증상이 사라지는 원리이다. 단백질만을 선택적으로 분해시키는 효소를 이용하면 다른 부위에 대해선 아무런 반응이 없을 뿐 아니라 신경을 누르는 단백질 부분만을 가수분해하여 통증을 완화시키므로 매우 간편하면서도 부작용 없이 해결할 수 있다. 소화에만 사용되는 것으로 알아 왔던 단백질 가수 분해 효소가 화장품은 물론 의술 분야까지 이처럼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또 어떤 분야에 효소들이 응용될 수 있을 것인지는 많은 과학자의 손에 달려 있다.
- 2014-07-13 0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