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년30일부터 8월15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은 올해 열리는 전시 중 손꼽히는 주요 전시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하는 필자의 전시 도슨트를 원고로 옮겨, 현장감을 느끼며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글 옥선희 동년기자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프랑스의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소장전은 서울시립미술관과 끼르티에 현대미술 재단의 공동 기획전입니다. 즉 까르티에 재단 작품을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게 아니라, 까르티에 측 제안을 받고 2015년부터 전 과정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참여하여 기획된 전시입니다.
카르티에 현대 미술재단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은 까르티에라는 명품 기업 후원으로 출발했지만, 100% 독립된 비영리 재단입니다. 프랑스에서 현대 미술을 지원하는 첫 기업 재단으로 출발했습니다. 설립자이자 현재까지 대표를 맡고 있는 알랭 도미니크 패랭이 프랑스 문화부 의뢰로 만든 기업의 미술 후원 보고서 초안 ‘레오타르법’이 현재 프랑스에서 공식적인 예술 후원법 기초가 되었습니다.
기업 메세나의 혁신적 모델인 재단은 1984년 베르사이유 궁 근처 조각공원에서 다양한 전시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10년 간 운영했다. 젊은 작가 발굴 - 지속적 지원 - 세계적 작가로 키우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페이 다웨이, 후 한루 같은 큐레이터와 비평가 배출/ 학제적(學際的) 접근, 즉 다양한 분야 학자와 예술가의 협업을 꾀했는데요. 전시 디자인을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식이 그것입니다. 이번 서울전은 이세영 -논 스탠다드 스튜디오가 전시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재단이 출범한 1984년은 백남준 작가가 3부작 위성 시리즈 첫 작품 을 선보인 기념비적 해입니다. 은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생방송 중계되어, 비서구권 미술, 타자가 서구에서 가시화되는 출발선이 되었습니다. 주목하지 않았던 비 유럽계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고, 전시를 갖지 못했던 젊은 작가가 방향을 설정하도록 도와온 재단 출범 년도가 1984년이란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이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천안문 사태 발생 등으로 젊은 작가의 분출은 가속됩니다.
재단 건물 1994년 몽빠르나스14구 라스파일 대로에 재단 건물을 지어 이전했는데,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 Jean Nouvel이 설계한 재단 건물은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절제미와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나무가 무성한 중정을 품은 강화 유리와 메탈로 지어진 사각형 건물로, 1층은 정원으로 완전히 열려 있으며, 천정 높이가 7미터에 이르는 모듈 형식이라, 프로젝션이나 비디오 설치 작업을 위해서는 공간을 어둡게 조정할 수도 있고, 대작 전시도 가능합니다. 유리로 된 구역을 옆으로 밀어 시야를 트이게 만들면, 건물이 정원 쪽으로 열린 경사로에 놓인 거대한 구조물로 변형됩니다. 건물의 유리 표면을 통해 전시 중인 작품을 볼 수 있게 하였고, 반대로 구름이나 도시 공간을 반사시켜 시간대에 따라 건물이 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밤까지› 전시의 경우 건물 전체가 검게 덮였고, ‹자연으로 존재하기› 전시 기간에는 완벽하게 투명함을 유지했으며, 이세이 미야케는 건물을 거대한 디스플레이 윈도우로 변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인공과 자연과 변환 가능한 건축미를 높이 사 1995년, 이탈리아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에 이어 독일 중견 빔 벤더스가 완성한 옴니버스영화 에서 장 르노의 저택으로 등장했습니다.
1994년 부임한 에르메 샹데스 Herve Chandes 관장이 현재까지 관장 직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긴 재임이 말해주듯 큐레이팅도 직접 하는 문화 권력이자, 외교관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작가나 주제를 선택해 작가에게 시각화해달라고해서 독창적인 커미션 작품을 탄생시키고 전시 기획, 최종 소장 결정까지 하는 것이지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시각화해달라고 주문하는 커미션(commission) 방식은 까르티에현대미술재단의 특징입니다. 작품 의뢰에서 완성품까지 3년 정도 기간을 주고 5억원정도를 지원하는 등, 기간과 제작비 구애를 받지 않도록 자유를 주며, 한 번 관계를 맺으면 가족 개념으로 관계를 유지합니다. 즉 경매를 통한 구입이 아닌, 직접 작가 발굴과 작품 의뢰를 통해 수집품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1년에 다섯 번 정도 큰 전시가 있는데요. 개인전과 기획전을 번갈아 여는 데 디자인, 사진, 회화, 비디오아트, 조각, 설치 , 미디어아트, 패션, 퍼포먼스 등 현대 예술의 창조적 분야와 장르를 아우릅니다.
인문과학, 환경, 생태학, 도시학, 경제, 생태, 이주 등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시 청각화하므로 미술가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대중음악가, 도시학자, 생태음향가, 디자이너, 과학자, 사상가, 철학자, 인류학자, 수학자, 사회학자 등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유지합니다. 1층에서 보게 될 작품 처럼, 도시학자의 아이디어를 디자인 건축가 그룹이 시각화하는 식입니다.
30년 간 200회 전시를 열어 전 세계 350여명 작가의 1,500점을 소장하고 있는데요. 작품 소장 기준은 엄격함과 탁월함의 결합/ 풍부한 독창성과 위험 감수 성향 고려/ 평범하고 예견가능하며 상식적인 가치 대신 전 방위적 개방성을 추구합니다. ‘흥미로운 현대 예술 작품으로 전시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 세계를 향해 질문 던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시 작품을 봐주었으면 한다’는 것이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컬렉션 디렉터 그라치아 콰로니 Grazia Quaroni의 전언입니다.
서울 전시작은 사라 지, 론 뮤익, 뫼비우스 등 재단을 대표하는 작품은 물론 국가, 인종, 젠더를 초월하는 공통 관심사를 반영한 사회 현상을 다룬 100점을 골랐습니다. 한국을 위한 특화된 선택 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장 미셀 알베롤라와 마크 쿠르티에 등이 내한하여 직접 벽면 작업을 했습니다. 아시아 투어 중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게 되었고, 내년 초 상하이, 홍콩을 거쳐 도쿄 올림픽에서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지난 주말 불꽃 같은 뮤지컬 한 편을 보았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 지킬박사와 하이드이다.
불꽃 같았다고 표현한 건 필자 개인적인 의견으로 무대가 새빨간 조명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받은 느낌이다.
블루스퀘어에서의 이번 공연은 월드투어로 브로드웨이 유명 뮤지컬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데 국내 공연계에서는 전례가 없는 한국과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의 공동 제작으로 우리나라 크리에이브 팀이 주축이 되어 브로드웨이 배우들을 캐스팅했고 국내 공연 후 세계진출을 목표로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외국 배우가 다른 언어로 하는 뮤지컬이라 몰입할 수 있을지 좀 걱정이 되었지만, 무대 양옆의 스크린에 번역되는 대사가 있어 문제없이 그들의 열연에 빠질 수 있었다.
필자는 뮤지컬을 매우 좋아한다. 바로 눈앞에서 노래와 연기가 펼쳐지는 생동감이 가슴을 뛰게 하고 때로는 필자 자신이 무대에 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 즐겁다.
오늘은 좌석이 무대에서 다섯 번째 줄이어서 배우들의 표정도 잘 알아볼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잊지 못할 장면으로 한 사람의 배우가 선한 모습의 지킬을 표현하며 연기하다가 갑자기 머리를 풀고 포악한 눈빛으로 변하며 하이드로 노래할 때 전율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어떻게 저리 서로 다른 인격체를 표현하는지 지킬과 하이드를 연기하는 배우의 역량이 정말 놀랍고 감탄스러웠다.
단지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헤쳤을 뿐인데 선과 악이 교차하는 연기가 매우 카리스마 있고 자연스러웠다.
수시로 머리를 묶었다가 풀어헤치는 동작으로 한 사람 안의 두 인격을 훌륭하게 표현해 낸 장면이 가장 멋지고 놀라운 연기로 머리에 남았다.
어렸을 때 처음 이 이야기를 소설로 읽고 정말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착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동시에 가진 남자의 변하는 과정이 재미있으면서도 오싹했었다.
뮤지컬의 첫 장면은 병원 이사회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 지킬박사가 자신의 연구를 실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에서 선과 악을 분리해 악을 없애는 연구가 완성단계라며 실험할 대상을 찾겠다는데 이사회 전원의 반대에 부딪힌다.
유능한 의사이자 과학자인 헨리 지킬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때문에 인간의 정신을 분리하여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에 들어가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나 세인트 주드 병원 이사회 의결에서 전원 반대로 무산된다.
변호사인 친구가 낙담한 그를 위로하려고 웨스트 엔드의 한 클럽으로 데리고 간다.
선한 감성의 지킬은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 학대받는 루시에게 친구가 필요하면 찾아오라며 명함을 준다.
지킬박사는 이사회의 반대로 실험을 할 수 없게 되자 사랑하는 약혼녀 엠마와도 멀리하며 연구를 거듭해 성공단계에 이르고 자신이 직접 실험대상이 되기로 한다.
.
실험을 통해 자신의 성질과는 정반대인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는 하이드로 변신하는 데 성공하고 이사회 의결에서 반대했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이고 만다.
계속되는 실험으로 선한 지킬 본연의 마음이 점점 사라지고 악한 하이드에게 지배당하는 걸 느끼며 괴로워한다.
잠재해 있던 하이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된 그는 친구에게 부탁해 자신이 하이드로 변할 때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결국, 행복해야 할 엠마와의 결혼식에서 하이드가 튀어나와 친구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사람의 마음에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있지만 이렇게 분리되고 통제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면 참으로 무서운 일일 것이다.
천사 같은 엠마와 정열적인 루시와의 비교도 재미있었는데 두 캐릭터가 서로 다른 이미지로 각자의 서로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
맑고 고운 음색의 엠마와 강렬한 느낌의 루시의 열연이 관객을 즐겁게 하고 박수도 많이 받았다.
특히 두 인격의 연기를 멋지게 해낸 지킬박사와 하이드 역의 카일 딘 매시 라는 배우에게 찬사를 보낸다.
뮤지컬이 끝났는데도 지킬이 실험에 대한 결의를 다지며 부르던 유명한 노래 ‘지금 이 순간’ (this is the moment) 멜로디의 여운이 길게 귓가에 남았다.
사진은 죽음의 흔적과 같다고 한다.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은 돌아오지 않고, 다시 그대로 찍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과거를 사진으로 찍는 이가 있다. 전도유망한 과학자에서 어엿한 사진작가로 전향한 김경수(金炅秀·53)씨다. 한때 현미경을 통해 신약(新藥)을 연구하던 그는 이제 뷰파인더를 통해 자신을 탐구하고 있다. 지난 세월의 파편들을 고스란히 담아낸 사진들은 곧 그의 자화상이다.
199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26세 나이로 최연소 이학박사 학위를 딴 그는 한국화학연구원의 촉망받는 연구원이 된다. 이후 ㈜카이로제닉스와 ㈜셀트리온화학연구소 대표이사로 활약하며 ‘21세기의 뛰어난 과학자 2000인’,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성’, ‘21세기 가장 위대한 천재 500인’ 등 세계 인명사전에 20여 차례 등재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과학자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그는 49세라는 이른 나이에 직장과의 안녕을 고한다.
“갑자기 은퇴를 결심한 건 아니에요.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겠다’ 마음먹고 연구원에서 나와 벤처기업을 운영했는데, 온갖 흥망성쇠를 겪으며 심신이 많이 상했어요. 과도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고, 위(胃)에 문제가 생겨 건강이 악화됐죠.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퇴직하면 뭘 해야 할지가 고민되더라고요. 그동안 과학자로 23년을 살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은 30년도 더 남았으니 말이죠.”
어린 시절 그림은 곧잘 그렸지만, 글 쓰는 데는 영 소질이 없던 그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기획안도 작성하고 칼럼도 쓰며 붓보다 펜을 잡는 일이 많아졌다.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2012년에 에 투고한 시가 당선돼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러나 막상 전격적으로 하려니 피를 토해내는 듯한 정신적 고통이 느껴졌다.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퇴직한 거잖아요. 근데 아, 이건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싶었죠. 그러다 사진을 시작했는데 글을 쓰는 것보다는 재미있더라고요. 단국대 사진예술아카데미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사진을 공부했죠.”
2013년 그는 만 50세를 5개월 남겨두고 회사생활을 정리한다. 남들보다 이르게 퇴직한 뒤 일상의 어려움은 없었을까? 또 그의 바람대로 스트레스는 없는지 궁금했다.
“퇴직하고 공허해하는 사람이 많죠. 그건 출근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현재의 삶이 여유롭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쉬는 것은 아니거든요. 작품에 대해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니까요. 즐거운 고민이죠. 나름 스트레스도 받아요. 그러나 과거의 스트레스가 몸에 해로운 것이었다면, 지금의 스트레스는 삶에 탄력을 주고 의미를 주는 활력소 같은 거죠.”
어릴 적 반짝이던 꿈 ‘별이 빛나는 밤에’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슬며시 동심이 피어올랐다. 한때는 그도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소년이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과학을 전공하는 청년이 됐고, 반짝이는 별의 빛깔을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 있을 만큼 영리해졌다. 아쉽게도 어릴 적 느꼈던 별에 대한 환상과 신비는 그렇게 잊혀졌다. 그리고 30여 년 뒤, 중년이 되고 문득 다시 그 별이 보고 싶어졌단다.
“첫 개인 사진전 제목이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2015)’이었는데 어릴 적 밤하늘의 별, 그러니까 유년기의 꿈을 재현한 작품들이었어요. 진짜 밤하늘의 별을 찍은 게 아니라, 그 옛날 환상을 가지고 바라보던 별을 물방울과 빛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거죠. 투명한 유리판에 물방울을 만들고 빛을 입혀 사진을 찍으면 반짝이는 별이 담기거든요.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죠. 다시 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못할 것 같아요. 힘들긴 했지만, 그만큼 다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하는 저만의 방법으로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자부심이 커요.”
아름다운 꽃송이에 번지는 별빛들이 어릴 적 꿈처럼 반짝이는 그의 첫 전시 작품들은 전문가와 관람객들에게 호평을 얻었다. 독특한 표현 기법도 눈길을 끌었지만, 과학자 출신 신진 사진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 감탄을 자아냈다.
“사진을 시작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어요. 2013년부터 그룹 사진전에 참여했는데, 좋은 평가를 들으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또 인정해주는 사람이 많으니 재미있어졌죠. 그렇게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로 전향하게 됐어요. 잘 모르는 사람은 ‘은퇴하고 좋은 취미활동 한다’고 하지만, 나는 ‘사진작가’라고 딱 잘라 말해요. 제2인생의 직업이 된 거죠. 은퇴하고 등산 많이들 하는데, 등산이 제2직업이 될 수는 없잖아요. 수입이 많지는 않더라도 평생 직업으로 삼을 만한 일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내면의 자화상 ‘꼭두각시’
과학자로, 기업가로, 그리고 사진작가로 무엇을 하든 빠르게 좋은 성과를 거두는 그의 삶이 탄탄대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김 작가의 속사정은 달랐다. 모든 것이 절정으로 무르익던 40대, 수차례 천당과 지옥을 오갔을 정도로 절망과 실패로 얼룩진 나날을 보냈던 그다.
“제 이력만 보면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게 순탄하게 살지는 못했어요. 직접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수익에 연연하게 되고, 경기가 안 좋으면 빚을 지고, 그러다 회사가 숨넘어가는 지경에 이르면 정말 악몽 같은 날들을 보내야 했죠.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려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차린 회사인데도 자금 때문에 연구도 제대로 못하고 결국 인간관계도 틀어지더라고요.”
김 작가는 당시의 아픔과 시련을 위로하며 자신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로 했다. 지난 전시에서 별을 표현했지만 진짜 별을 찍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피노키오 마리오네트를 통해 감정을 이입했다.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 받고 마치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살았는데, 현실에 무너지고 상처받으면서 ‘나는 사회라는 쳇바퀴 속에 갇힌 꼭두각시에 불과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두 번째 전시 ‘꼭두각시(Marionette·2017)’는 그런 슬픔과 절망을 담았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을 표현한 거죠.”
아무런 표정이 없고, 생명력도 없는 목각 꼭두각시에 그는 ‘빛’을 이용해 감정을 불어넣었다. 라이트 페인팅(light painting) 작업인데, 푸른빛에서 느껴지는 색의 감정, 붉은빛에서 나타나는 색의 온도 등으로 꼭두각시에 감정을 입힌 것이다.
“그냥 꼭두각시만 찍어서는 그런 감동을 줄 수가 없잖아요. 하나의 꼭두각시라도 빛에 따라 다 감정이 달라 보여요. 무언가를 추구하는 모습, 우울한 표정, 위축된 감정 등 새로운 이미지와 메시지를 담을 수 있는 거죠.”
삶의 경험이 예술이 되다
빛을 이용하다 보니 그는 주로 어두운 곳에서 작업을 한다. 컴컴한 방 안, 조명과 카메라, 그리고 자신을 마주한 피사체와의 고요한 시간 속에 조바심이 나기도 하고 기대감에 들뜨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찍힌 작품들이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 몇몇 사람들은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의 작품이 사진이 아닌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그래픽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작가의 작품은 몽환적이고 이색적인 색감이 두드러져 마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그는 실제로 보이지 않는 것을 찍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무대를 세팅하고 암실에서 카메라 셔터를 열고 빛을 칠하고 셔터를 닫으면 내가 했던 행위예술적 작업이 모여 한 장의 사진으로 담겨요. 분명 사진으로 나오지만 그 비주얼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죠. ‘별이 빛나는 밤’의 별도 실제로는 안 보여요. 촬영했을 때 물방울에 반사된 빛이 결과물로 나오는 거죠. 결국엔 내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들을 만드는 거예요. 마치 연주하는 것처럼.”
김 작가는 아무리 멋있고 좋은 곳이라도 풍경사진은 찍지 않는다. 누구나 가서 찍을 수 있을 뿐더러, 이미 그보다 더 잘 찍어낼 전문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평범한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것에 열정을 보이는 그에겐 과학자로 살아왔던 인생철학이 담겨 있었다.
“화학 분야를 연구하다 보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것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건 내 삶의 논리와도 같고요. 남들이 하는 것은 하지 않아요. 사진도 누구나 찍는 건 안 찍어요. 나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죠. 취미 수준을 넘어 예술을 하려면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과학과 예술이 관통하는 부분이 있죠.”
과학자로서의 경험은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 속에도 숨어 있었다. 물방울로 별을 표현하는 작업에서도 표면을 동그랗게 만들거나, 크기를 크게 만드는 등 화학적 원리를 이용한 방법들이 쓰였다고 한다. 남들에게는 어렵지만, 화학을 전공한 그에게는 별것 아닌 소소한 과정이라고. 그는 자신처럼 지난 경험을 무기로 활동하는 중장년 예술가들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요즘 은퇴하고 평생교육원이나 기관을 통해 글, 그림, 사진 등을 공부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젊어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아 직업으로 삼지 못하다가, 나이 들고 생계의 고충에서 벗어나 예술활동을 하는 거죠. 그중에 잘하는 분들의 작품을 보면, 지난 경험들이 다 녹아 있어요. 문학이든 예술이든 진정성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그동안 축적해놓은 자기 이야기와 감정을 풀어놓으니 엄청난 무기가 되는 거죠.”
‘아바타’,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
과거 어린 시절의 꿈, 그리고 청년기와 중년기의 좌절을 담은 두 번의 전시를 마친 그는 이제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그린 작품들을 준비하고 있다. 세 번째 전시는 ‘아바타’, 네 번째 전시는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라고 이미 제목도 지었고, 작가노트도 작성했다고 한다. 보통 작가들은 작업을 마친 후에 작업노트를 쓰는데, 벌써 마쳤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만큼 뚜렷한 작품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바타’는 장년기의 소회를, ‘나는 나무로 살고 싶다’는 미래에 대한 삶의 고민을 담을 예정이에요. 제 작품들을 보면 비주얼은 특별하지만, 스토리는 소소한 제 삶을 이야기하잖아요. 그 덕분에 주제가 명확해 작품노트도 일찍 쓸 수 있었고요. 이제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지가 관건이에요.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지금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에서 작업을 하는데, 작품 스케일이 점점 커지다 보니 불편한 점이 있어요. 아직은 제 작품을 알고 사가는 분들이 많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거라 생각해요. 그런 부분도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 여기고 현명하게 잘 헤쳐나가야죠.”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상징적으로 하늘을 얘기한다. 사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는 급급한 상황에 치이다 보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 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봐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다. 낮에는 태양이 눈부셔서 올려다보기 힘들고, 밤의 하늘은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별들을 흉내 낸 인조 조명들이 정작 별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살며 그 많은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추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들을 반기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중의 한 곳-별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나는 사진을 하며 알게 되었다.
물론 작정하고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이나,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시골로 가면 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난 의외의 곳에서 그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몽돌들이 쉬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파도와 함께 으르렁 드르렁거리며 굴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같이 간 아내가 바로 곁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다. 버스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나 음향기기의 소리가 조금만 커도 난 볼륨을 조금이라도 줄여 달라 양해를 구한다. 집 안이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든,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난 내 큰 목소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야 겨우 내 목소리가 낮아져 아내의 지적을 많이 받지 않지만 그동안 38년이 걸렸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커다란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조금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 소리도 나지 않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무심히 할 일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수천수만의 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 올라가고, 다시 한꺼번에 굴러 내리며 마냥 부딪치는 소리는 조금도 멈춤 없이 되풀이되며 막힘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 굉장한 소리가 아내의 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막힘 없이 트이는 해방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무조건 큰 소리를 싫어한 게 아니라 내 소리를 포함해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소리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그곳에 갔다. 힘든 일이 생겨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각자 사진기를 챙겨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늘 한산하다. 우리와 우리가 초대한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린 큰 소리 속에서 사진 작업을 했다. 사진기 뷰파인더를 통해 매번 다르기도 하고 크게 보면 같기도 한 바람과 물에 비치는 빛의 모습을 언제나 파도와 몽돌들이 서로 부딪쳐 으스렁거리는 소리 속에서 관찰했다. 사진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맨눈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이미지의 변화를 섬세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기울어 석양의 각도가 낮아지면, 굴러가는 몽돌을 감싼 물에 직접 비친 빛이 수면을 점점 더 넓게 비추며 그늘진 물빛과 대조를 이룬다. 수평선 가까이 태양이 떨어질수록 색 온도도 낮아진다. 주위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갓 잘라낸 짙은 오렌지빛 태양은 수면에 면을 이루며 반짝인다. 때로는 그 빛들이 물과 하늘의 경계선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그때 렌즈 조리개를 가능한 한 닫아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해 파도에 밀린 몽돌이 구르며 사진에 남길 시간의 흔적이 내 머리에 떠오르게 한다. 스틸사진을 오래 되풀이한 사람의 뇌에 미리 그려지는 프레임 중 하나다. 그 이미지가 궤적이 되어 실제 한 장의 스틸에 담긴다.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굴러간 속도도 달라 제각기 다른 흔적이 보인다. 굴러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느린 속도는 짧은 흔적을 남긴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이동거리가 짧아지면 시간은 그만큼 빨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사진 속에 들어온다. 한 천재 과학자가 이미 오래전에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변하지 않는 수(상수-C) 얘기를 우리는 그렇게 겨우 렌즈의 힘을 빌려 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라는 붓이 그려낸 변형된 빛의 흔적이었다. 그처럼 우린 수많은 몽돌에 다녀간 별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별들은 결국 내 사진에 선과 면으로 맺혀졌지만, 나중에 자세히 보니 모두 점이었다. 수많은 별이 다녀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눈에는 흐르는 파도도, 파도에 구르는 몽돌도 모두 빛나는 점이었다. 마치 동트기 전 새벽녘 하늘에 더욱 크고 밝게 드러내는 몇몇의 별처럼!
여기에 한 가지 이미지가 더 보태졌다. 점인 별이 선으로 모였듯이, 그 선이 이어져 구르며 면의 흔적을 만들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사진이 아니면 나눌 수 없는 얘기다. “색은 우주와 인간의 두뇌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란 말을 남긴 폴 세잔이 떠오른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색을 맨눈으로 관찰한 그의 기억력은 절대색감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그의 두뇌와 우주에도 매 순간 서로 다른 새로운 별들이 빛으로 다녀갔을 것이다.
세상이 각박해졌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상징적으로 하늘을 얘기한다. 사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해야 하는 급급한 상황에 치이다 보면 하늘 한 번 올려다볼 틈 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이다. 그런데 요즘은 하늘을 올려다봐도 특별히 보이는 게 없다. 낮에는 태양이 눈부셔서 올려다보기 힘들고, 밤의 하늘은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과 거리를 가득 메우고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그리고 별들을 흉내 낸 인조 조명들이 정작 별들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도시에 모여 살며 그 많은 밤하늘 가득한 별들을 추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마 그들은 자신들을 반기는 곳으로 갔을 것이다. 그중의 한 곳-별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나는 사진을 하며 알게 되었다.
물론 작정하고 도시를 떠나 한적한 산이나,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시골로 가면 별을 만나볼 수 있다. 그런데 난 의외의 곳에서 그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몽돌들이 쉬지 않고 오르고 내리는 파도와 함께 으르렁 드르렁거리며 굴렀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같이 간 아내가 바로 곁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해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내는 소리에 민감하다. 버스나 택시를 탔을 때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나 음향기기의 소리가 조금만 커도 난 볼륨을 조금이라도 줄여 달라 양해를 구한다. 집 안이든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든, 아내와 함께 있을 때면 난 내 큰 목소리에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야 겨우 내 목소리가 낮아져 아내의 지적을 많이 받지 않지만 그동안 38년이 걸렸다. 그런 아내가 이렇게 커다란 소리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조금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다. 마치 아무 소리도 나지 않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무심히 할 일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수천수만의 몽돌이 파도에 밀려 굴러 올라가고, 다시 한꺼번에 굴러 내리며 마냥 부딪치는 소리는 조금도 멈춤 없이 되풀이되며 막힘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도 말이다.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이 굉장한 소리가 아내의 귀를 압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막힘 없이 트이는 해방감을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무조건 큰 소리를 싫어한 게 아니라 내 소리를 포함해 좋아하는 소리와 싫어하는 소리가 구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틈날 때마다 그곳에 갔다. 힘든 일이 생겨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 각자 사진기를 챙겨 그곳으로 갔다. 그곳은 늘 한산하다. 우리와 우리가 초대한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린 큰 소리 속에서 사진 작업을 했다. 사진기 뷰파인더를 통해 매번 다르기도 하고 크게 보면 같기도 한 바람과 물에 비치는 빛의 모습을 언제나 파도와 몽돌들이 서로 부딪쳐 으스렁거리는 소리 속에서 관찰했다. 사진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맨눈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이미지의 변화를 섬세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해가 기울어 석양의 각도가 낮아지면, 굴러가는 몽돌을 감싼 물에 직접 비친 빛이 수면을 점점 더 넓게 비추며 그늘진 물빛과 대조를 이룬다. 수평선 가까이 태양이 떨어질수록 색 온도도 낮아진다. 주위에 깃들기 시작하는 어둠 속에서 갓 잘라낸 짙은 오렌지빛 태양은 수면에 면을 이루며 반짝인다. 때로는 그 빛들이 물과 하늘의 경계선이 되어 흐르기도 한다. 그때 렌즈 조리개를 가능한 한 닫아 셔터 스피드를 길게 해 파도에 밀린 몽돌이 구르며 사진에 남길 시간의 흔적이 내 머리에 떠오르게 한다. 스틸사진을 오래 되풀이한 사람의 뇌에 미리 그려지는 프레임 중 하나다. 그 이미지가 궤적이 되어 실제 한 장의 스틸에 담긴다. 돌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굴러간 속도도 달라 제각기 다른 흔적이 보인다. 굴러가는 속도가 빠를수록 긴 시간의 흔적을 남기고, 느린 속도는 짧은 흔적을 남긴다.
‘속도가 빠를수록 시간은 느려지고 이동거리가 짧아지면 시간은 그만큼 빨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사진 속에 들어온다. 한 천재 과학자가 이미 오래전에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 변하지 않는 수(상수-C) 얘기를 우리는 그렇게 겨우 렌즈의 힘을 빌려 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시간이라는 붓이 그려낸 변형된 빛의 흔적이었다. 그처럼 우린 수많은 몽돌에 다녀간 별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렌즈를 통해 들어온 별들은 결국 내 사진에 선과 면으로 맺혀졌지만, 나중에 자세히 보니 모두 점이었다. 수많은 별이 다녀간 것이다. 사진과 달리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내 눈에는 흐르는 파도도, 파도에 구르는 몽돌도 모두 빛나는 점이었다. 마치 동트기 전 새벽녘 하늘에 더욱 크고 밝게 드러내는 몇몇의 별처럼!
여기에 한 가지 이미지가 더 보태졌다. 점인 별이 선으로 모였듯이, 그 선이 이어져 구르며 면의 흔적을 만들어낸다. 이 이미지들은 사진이 아니면 나눌 수 없는 얘기다. “색은 우주와 인간의 두뇌가 만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란 말을 남긴 폴 세잔(Paul Cézanne)이 떠오른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색을 맨눈으로 관찰한 그의 기억력은 절대색감에 바탕을 두었을 것이다. 그런 능력을 지닌 그의 두뇌와 우주에도 매 순간 서로 다른 새로운 별들이 빛으로 다녀갔을 것이다.
함철훈(咸喆勳) 사진가·몽골국제대학교 교수
1995년 민사협 초청 ‘손1’ 전시를 시작으로,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2012년 이탈리아 밀란시와 총영사관 주최로 전을 FORMA에서 개최. 2006년 인터액션대회(NGO의 유엔총회)서 대상 수상. 저서로 , 등이 있다.
지난해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은 많은 것을 바꿨다. 일명 ‘알파고 쇼크’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 세계 미디어들이 2016년 10대 뉴스로 꼽을 만큼 인류에게 충격을 줬다. 의료계에서도 이런 충격적 현상이 진행 중이다. 암 치료를 돕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왓슨’의 국내 병원 도입이 그것이다. 이세돌을 넘은 알파고처럼 왓슨은 과연 名醫를 넘은 神醫가 될 수 있을까?
인공지능 왓슨(Watson)은 과학자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인사다. 왓슨은 인간을 최초로 꺾은 인공지능 체스 프로그램 ‘딥블루’를 개발한 IBM이 선보인 또 다른 인공지능 프로그램. 이미 2011년 미국 TV 프로그램 제퍼디 퀴즈쇼에 참가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며 우승한 바 있다.
이후 왓슨은 의료용으로 특화돼 학습을 계속해왔는데, 의료용 인공지능을 ‘왓슨 포 온콜로지(Watson for Oncology)’로 부르는 것도 이러한 특징 때문이다. 왓슨은 2012년 처음 미국 메모리얼슬로언케터링암센터(MSKCC)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하며 암 환자의 진료를 터득했으며 현재도 교육을 받고 있다. 선진 의료기관의 자체 제작 문헌과 290종의 의학저널, 200종의 교과서, 1200만 페이지에 달하는 전문자료를 학습한 왓슨의 암 진단 정확도는 지속적으로 높아져 연말이면 전체 암의 약 85%를 분석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왓슨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각종 암에 대한 왓슨의 진단이 전문의와 90% 이상 일치되는 결과를 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미국암학회는 왓슨이 평균적인 전문의에 비해 초기 오진 가능성이 적다는 내용의 조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길병원에서 국내 암 환자 첫 진료
지난해 12월 5일은 국내 의료계에 기념비적인 사건이 기록된 날이다. 가천대 길병원 진료팀은 대장암 진단을 받은 61세(당시) 남성 조태현씨에게 왓슨을 이용한 진료를 진행했다. 조태현씨는 이날 국내에서 인공지능으로부터 진료받은 첫 번째 한국인이 됐다. 왓슨은 의료진을 통해 입력된 조태현씨에 대한 다양한 사항들을 분석해, 불과 몇 초 만에 치료 방법을 제안했다.
길병원의 왓슨 도입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예상외로 컸다. 길병원에서 왓슨에게 진료받고 싶다는 문의가 기대 이상으로 많았고, 소위 빅5로 불리는 서울의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암 환자가 왓슨을 찾아 길병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길병원 의료진은 “왓슨의 기대효과 중 하나는 인천 지역의 암 환자가 불필요하게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타 지역 환자까지 불러들이는 일종의 ‘간판’ 역할까지 하고 있다.
왓슨에 대한 의료계와 환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가운데 부산 지역 암센터인 부산대학교병원도 두 번째로 왓슨을 도입했다. 한국IBM은 부산대학교병원이 ‘왓슨 포 온콜로지’와 ‘왓슨 포 지노믹스(Watson for Genomics)’를 도입한다고 1월 25일 밝혔다. 이어 충남 지역 암센터인 충남대학교병원도 왓슨 도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인공지능 의사의 암 치료 방법
그렇다면 왓슨은 암 치료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암 치료는 일반적으로 암인지를 확인하는 진단 과정과 암 확진 후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는 과정, 그리고 이 계획에 따라 수술과 항암치료 등을 진행하는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왓슨은 여기서 중간 과정인 치료 계획 수립에만 참여한다. 길병원은 암이라고 확진 판정을 받은 환자를 대상으로 왓슨을 활용한 다학제 진료를 진행하고 있다. 길병원에서는 진단을 위해 왓슨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암 환자가 아니면 왓슨을 만날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암 환자의 치료를 어떻게 진행하면 좋을지 암 치료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 왓슨의 역할이다. 물론 그에 따른 치료는 의사의 몫이다.
인간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도 몰랐던 ‘하늘에서 뚝 떨어진’ 비기를 발휘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전문의들이 모두 알고 있는 범위 내의 치료법에서 최적의 것을 골라낼 뿐이다. 치료 가능한 암종도 대장암, 직장암, 유방암, 폐암, 위암, 자궁경부암으로 아직은 제한적이다. 이후 난소암과 전립선암까지의 확대를 계획 중에 있다.
암 치료 계획을 세우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환자의 신체적 특징이나 암종 등을 고려하면서, 미국종합암네트워크(NCCN) 암 치료 가이드와 미국 MSKCC 전문지식 데이터 등 천문학적으로 방대한 문헌들을 참고해 환자의 치료법을 선택한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전문의들은 이미 치료가 많이 진행된 환자보다는 치료 계획을 세워야 하는, 즉 최근 암 진단을 받은 환자 혹은 암이 재발된 환자에게 왓슨의 능력이 효과적으로 발휘될 것이라고 조언한다.
의료진 능률을 높여주는 구심점 돼
길병원 의료진들은 왓슨 도입 후 2개월간 100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면서 얻은 긍정적 효과 중 하나로 효율적인 의료진 간의 협업과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방지하는 효과를 꼽는다.
길병원에서는 여러 과의 의사가 참여하는 ‘다학제 진료’ 과정에서 왓슨을 활용한다. 왓슨 암센터에는 8개 전문과 30여 명의 전문의가 있는데, 왓슨 치료시간에는 이들 전문의가 한데 모여 환자의 치료 계획에 대한 왓슨의 의견을 검토하고 최종적으로 어떤 과정으로 치료를 진행할지 결정한다.
이런 방식은 타 병원의 치료 과정과 다르다. 일반 병원은 담당의가 환자의 치료 방법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필요할 때 타 분야의 전문의에게 조언을 얻는 방식으로 환자를 치료를 한다. 다학제 진료 방식을 도입해 시도하는 병원도 있지만, 의사들 사이에서 이견이 발생할 경우 ‘최선’의 치료 방법이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의사 간 서열이나 이해관계에 의해 치료 방법이 결정될 수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왓슨 치료에 참여하고 있는 길병원 혈액종양내과 김영생 교수는 “왓슨은 원활한 다학제 진료를 위한 훌륭한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어요. 왓슨이 우선순위에 따라 치료 방법을 제시하면 의료진은 별다른 갈등 없이 그 방법을 검토하면 되죠. 왓슨 진료시간은 환자당 10분 남짓에 불과하지만, 왓슨의 의견에 대응하기 위해 의사들은 환자에 대한 사전 검토를 더 충분히 해야 합니다. 일종의 자극제 역할도 해주는 것이죠”라고 설명한다. 왓슨이 수많은 논문을 바탕으로 부작용에 대한 모든 경우의 수를 순식간에 계산해 검토하기 때문에 자칫 의료진이 할 수 있는 실수를 막아주는 것도 장점 중 하나로 꼽힌다.
왓슨 진료비는 아직 ‘무료’
왓슨에게 치료를 받고 싶다면 왓슨이 근무 중인 병원으로 찾아가면 된다. 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라도 가능하다. ‘명의’를 만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기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 길병원은 왓슨에게 치료받고 싶은 환자가 늘면 왓슨의 진료시간도 늘릴 계획이다. 왓슨을 통해 치료 계획을 점검하고 원래 치료받던 병원으로 돌아가도 된다. 병원의 수익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중증 환자가 병원을 자주 옮겨 다니는 것은 의사들이 권하지 않지만, 환자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환자들이 궁금해할 왓슨의 진료 비용은 얼마나 될까? 유명 의사들처럼 특진비라도 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공지능 진료라서 아직 진료비를 청구할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길병원은 기존의 암 치료 비용 외에 왓슨의 특별 진료비를 받고 있지는 않다.
이후 진료비 청구의 근거가 마련되어 비용이 발생해도 왓슨으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유효하다. 가장 먼저 왓슨을 도입했던 미국의 경우 그 효과를 ‘의료 민주화’라고 표현한다. 일부 병원에서만 받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고가 의료 서비스를 일반인들도 받게 됐다는 의미다.
길병원 인공지능기반 정밀의료추진단 이언 단장은 “왓슨 암센터를 이용하면 진단을 위한 검사 남용 예방, 진단의 오류 최소화, 최적의 처방, 진료비용 부담 감소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왓슨을 통해 세계적 수준의 암 진료 문턱을 과감히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전망 밝지만 보완도 필요
앞으로 왓슨의 진료가 암 치료의 표준이 될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왓슨도 아직 갈 길이 남아 있다. 길병원 김영생 교수는 “아직 도입 초기이고 외국에서 개발된 프로그램인 만큼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왓슨이 한국인 환자의 특징이나 생활환경, 소득수준, 국내 건강보험제도까지 고려해주진 않으니까요. 고쳐나가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개발사인 IBM과 의견을 교환하고 있고, 병원 내에서도 독자적인 연구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왓슨 진료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서울대학교병원 교수를 역임한 디지털헬스케어연구소 최윤섭 소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왓슨이 의료계 전체에 주는 긍정적인 영향은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으며, 이는 더 증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왓슨의 도입을 통한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이 중에 아직까지 증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왓슨을 포함한 딥러닝 등 인공지능 기술이 의료 분야로까지 확대 적용된다면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영향을 너무 과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현재의 연구결과들을 보면 변화는 불가피해보입니다.”
어떤 해결해야 할 사안이 생겼으나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할 때가 많다.
사람은 누구나 문제가 생기면 풀기 위하여 매달리게 마련이다. 붙들고 늘어질수록 더 답답해지기만 했던 경험을 한둘은 가지고 있지 싶다.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의 하나로 고스톱 화투를 많이 치던 시절이 있었다. 이때 자주 쓰던 말이 있다. 화투패를 들고 오랫동안 생각을 한 후 패를 내려놓으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와 상대방의 패를 이롭게 했다. 이때 비유로 들던 말이 있다. 바로 “장고 끝에 악수 둔다”가 그것이다. 잘하기 위하여 한참을 궁리한 끝에 내려진 행동의 결과는 오히려 상대방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주었다.
골프 게임에서도 비슷한 국면을 경험했지 싶다. 어드레스를 오래 할 경우 샷은 대체로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우연의 결과였을까? 아니면 일리 있는 일이었을까? 오랜 생각 끝에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오래 생각하면 더 나은 결과나 아이디어를 찾아야 함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신선한 해답을 찾기 위하여 골몰한다. 그 답을 쉽사리 찾은 경우도 있었겠지만,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좋은 해결점을 찾지 못하여 오히려 전전긍긍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을 터이다. 오히려 자유분방했던 다른 사람이 쉽게 해결방안을 제안하여 놀란 적이 있지 않았나?
그렇게 되는 근본적 이유가 있다. 사람의 뇌는 긴장이 풀리면 오히려 “알파(a)”라는 느린 뇌파를 발생하는데, 이 알파는 창조적 뇌 활동을 촉진한다고 한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상태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영감이 떠오른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얘기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연구실에 있을 때보다 샤워할 때 아이디어가 더 샘 솟는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르키메데스도 목욕 중에 유레카, 즉 번득이는 지혜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우리도 종종 그런 경험을 가졌다. 산책하는 중에 또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체험도 있다. 그 이유가 바로 뇌 활동 상태에서 찾을 수 있다. 긴장을 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게 되면 오히려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아르키메데스의 경험처럼 목욕 중에 아이디어를 발견한 것도 따뜻한 목욕물로 몸을 이완시킨 결과에서 얻어진 아이디어라고 볼 수 있다. 화투판에서 오랜 생각으로 뇌를 긴장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더 나쁜 수를 두었음이다.
뇌 과학자들은 이렇게 논술하고 있다. “뇌는 쉬게 할수록 판단력이 좋아지나 지나치게 심사숙고 하면 오히려 판단력을 그르칠 수 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유사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수능시험에서도 그랬다. 판단이 확연하지 않았던 문제에 다다랐을 때 순식간에 스치는 판단으로 한 시험문제의 답을 다시 생각하고 생각하여 고치면 십중팔구는 틀렸던 경험이 있다. 때로는 육감으로 판단하는 것이 유리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음이다. 경험이 많은 사람보다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의 생각이 더 창조적 결정을 내리기도 한다. 타성에 젖어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출퇴근 시간이나 사무실의 구조 등이 자유분방한 구글 직원들의 근무태도가 창조적 아이디어를 끌어내는 데 한몫을 하고 있음이 웅변해주고 있다.
생각이 떠오르지 않거나 주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너무 매달리기보다는 산책이나 목욕, 이발처럼 전혀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쓰던 글이 풀리지 않을 때, 그 자리에서 끙끙대지 말고 박차고 일어나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그냥 길을 걸어도 보자. 아니면 당구장에서 큐로 당구공을 겨냥해보자. 노래방에서 소리도 질러보자. 아이디어가 번개같이 다가오리라.
승승장구, 탄탄대로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다. ‘천운을 타고났나?’, ‘사주팔자가 좋은가?’라며 그들의 성공을 진단해보기도 하지만, 뭐든 타고난 운만 가지고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성공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들의 유형을 살펴봤다.
◇ 운명개척형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손 마사요시)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쳐놓았다.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정의가 20대에 세운 50년 인생계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스스로도 자신을 천재라 여겼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는 상황에서도 “나는 천재다”라고 말했을 정도. 일찍이 그는 자신의 잠재성향과 운을 꿰뚫었고, 그 덕분에 막힘없는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타항공 회장을 지낸 이상직 전 국회의원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텐배거’ 로드맵을 만들어 금수저 반열에 올랐다. 텐배거(Ten bagger)는 10루타라는 뜻으로 야구가 아닌 금융투자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투자자에게 10배, 1000%의 수익률을 안겨주는 대박 종목을 의미하는데, 이상직은 1998년 텐배거에 도전해 2년 만에 투자원금 1300만원으로 그의 15배에 달하는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그는 텐배거 법칙을 사업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본 원리에 적용했다. ‘10루타를 쳐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현대증권에서 10루타 종목을 연이어 터뜨렸고, 이스타항공의 대박 신화를 창조해냈다.
◇ 대기만성형
피카소처럼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명성을 떨친 예술가가 많다. 그러나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경우는 달랐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다녔던 그는 돌연 화가라는 꿈을 꾼다. 이후 세잔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고뇌와 노력의 산물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제 피카소는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4배가량 비싸게 팔렸는데, 세잔의 그림은 60대 중반에 그린 것들이 젊은 시절 작품들보다 최대 15배의 가격에도 팔렸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최고 작품들 역시 모두 인생 말기에 그려진 것이다.
20세기 세잔이 대기만성형 예술가라면, 21세기 대기만성형 과학자를 꿈꾸는 이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 강봉수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도 이과를 택했고, 서울대 원자력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고, 이후 40년간 잘나가는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과학자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퇴직 후 66세에 물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후 7년 만에 머시드 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였다.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매진한 덕분에 이제는 ‘강봉수 물리학 박사’로 불리며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장수형
무병장수를 꿈꾸는 100세 시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무탈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은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다. 영조의 장수비결은 규칙적인 식사습관과 소식(小食)이었다고 한다. 고기와 생선을 멀리하고 보리밥과 채소를 즐겨 먹었던 영조는 감선(減膳: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왕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며 근신하는 것)을 89차례나 했는데, 신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감선을 넘어 단식까지 감행하며 절대권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습관으로 영조는 장수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하는 수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처럼 식습관을 잘 다스린 덕분에 장수한 역대 대통령 중에는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 있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절주를 하며 콩·보리·팥 등이 섞인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49년 상공부장관 시절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윤보선의 일화도 유명하다. 도시락은 부인인 공덕귀 여사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잡곡밥 등 검소한 식단이었다고. 이런 소박한 식습관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의 삶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해주었다.
◇ 인(人)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남다른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에 다니던 시절, 당시 교관으로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학 실력이 뛰어난 박태준을 눈여겨보게 된다.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벗어나 인간적인 정을 쌓게 됐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될 때도 만남을 이어간다. 이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같은 해 박태준은 소장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이듬해 설날 박정희는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관련해 박태준을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보낸다. 특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태준은 철강과 제철 분야에 매진했고, 강철 1000만 톤 시대를 연 주역으로 우뚝 선다. 이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포스코 회장, 포스텍 창립자 등 수많은 직함을 얻었지만, 퇴직금 한 푼, 주식 한 주도 갖지 않았을 정도로 청렴한 철강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별별유형
1) 독서형: 미국의 대부호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책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자신의 성공의 8할은 독서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윤송이 엔씨소프트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등도 잘 알려진 독서광이다.
2) 명상형: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등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명상의 효과를 언급했다. 포드자동차의 빌 포드 회장도 명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 메이저리그의 신화 박찬호 역시 현역 시절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3. 산책형: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생각의 발로는 ‘발’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셰익스피어, 괴테, 칸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은 산책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1년 여름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산을 통해 인재를 모으고 집권했는데, 민주산악회가 대표적인 핵심 조직이다. 김 대통령은 매주 목요일 등산을 즐겼고, 산에 올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참고 도서 , , ,
나이 듦은 원숙일까, 낡음일까. 누군가에겐 연륜으로 작용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고집불통의
외통수를 만들기도 한다. ‘불로초’를 찾아 헤매는 ‘영원한 젊음에 대한 집착’도 안쓰럽다. 또 ‘너희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로 나이를 계급장인 양 밀어붙이며 유세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여기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진정한 ‘어른’이 있다. 바로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명예이사장이다. 영원한 현역으로 산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글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정보화 사회의 키워드인 사이버는 그리스어 ‘키베르니테스(kybernetes)’에서 유래했으며 ‘키’를 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로가 젊은이와 다른 것은 인생에서 ‘가상의’ 키를 잡고 저어갈 줄 아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이길원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장(72)을 이 코너 인터뷰 대상자로 섭외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늘 젊은 친구가 모여들고, 일상을 놓지도 않고 꽉 움켜쥐지도 않은 채 여유롭게 ‘키를 제대로 잡고’ 지덕체의 균형을 이루며 사는 ‘어른’이라 생각해서였다. 처음 인터뷰 섭외를 청했을 때,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90까지는 활동해야 하는데 인생 은퇴가 어디 있느냐”며 “나는 영원한 현역이다. 단지 노는 물이 달라졌을 뿐이다”라고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박수칠 때 새로운 것을 시작하라는 것으로요. 옛날에는 인생을 2막으로 나누었지요. 30세까지의 준비기와 60세까지의 활동기로 양분했습니다. 이제는 90세까지 사는 세상. 저는 인생을 3막으로 구분합니다. 태어나서 20대 후반까지가 준비기, 그 이후부터 60대까지가 활동기 그리고 90대까지가 서드 에이지(third age)입니다. 서드 에이지 시기에도 마음먹기에 따라 하고 싶은 것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이길원 이사장은 장년기에는 성질이 불같아 아내와 티격태격 싸움도 자주 하고 밖으로 나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드니 역시 배우자뿐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서로 등 긁어주는 배우자가 최고란 마음이 절로 들면서 부부금실도 좋아졌다고 털어놓는다. “건강이 최고로 중요하다”는 그는 아내에게 “아프면 범죄다. 무슨 짓을 해도 좋으니 아프지만 말라”며 오후 4시엔 무슨 일이 있어도 손잡고 꼭 헬스클럽엘 간다. 아내 역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라며 행복해한단다. 자녀들도 자립했고, 이제는 스스로의 삶에서 뭔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어 욕망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는 설명이었다.
회장님의 본업 내지 생업은 사업이십니다. 국제PEN클럽 이사장 등 활동을 활발히 하시면서도 시를 500편, 시집은 8권이나 발간하셨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시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만….
“제 본업은 시를 쓰는 일이고 생업이 사업이지요. 그런데 사업가와 시인은 모순된 것이 아닙니다. 사업이 인간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면, 시 쓰기는 인간을 탐구하는 작업입니다. 서로 통합니다. 제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낀답니다. 시를 쓰면 사물이나 사람을 폭넓은 시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사업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국제PEN클럽 회장을 역임하셨지만 본래 특수인쇄업체인 스티커 회사 ‘태평양그랜드’를 창업, 38년간 운영해오셨지요. 오너 경영자들은 한결같이 스스로 현직에서 물러나기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던데요.
“내가 죽고 난 후 회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보았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결론이 간단하더군요. 책상을 빼는 것이 회사 간판을 내리는 것보다 낫다.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성공한 기업이란 나 아니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나 없이도 잘 굴러가는 기업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려봤어요. 저는 단계적으로 후계자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시대 땐 경영자 혼자 장군 멍군 다 일을 했는데, 아들에게 일을 시켜보니 팀워크로, 시스템으로 일을 처리해 나보다 더 잘해낼 것 같더라고요. 내가 며칠 걸려 조사한 일도 반나절에 해내는 걸 보고 물려줘도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경영 승계 수업을 할 경우 아버지의 ‘질문’이 ‘심문’으로 변해 갈등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던데요.
“묻고 기다려준 것이 내 나름의 비결입니다. 일찍부터 ‘너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 상대라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라는 질문을 습관적으로 했어요. 직원들에게나 고객들에게나 경영자로서 얼굴이 서려면 물려받아 얻은 게 아닌 나름의 업적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부담을 준 말의 전부일 겁니다. 실패를 했을 때도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며 못미덥다고 전권회수를 하기보다는 ‘내가 방풍벽으로 있을 때 실수를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실수도 경영 수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들들과는 편하게 술친구도 하지요.”
삼성 이병철 회장―이건희 회장―이재용 부회장은 3대에 걸쳐 사업 교훈으로 ‘경청’을 물려주었다고 하는데요. 자제분들에게 강조하신 것은 무엇인지요.
“한마디로 신뢰입니다. ‘영업이란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파는 것이다, 능력이 야 웬만한 사람들이 다 갖고 있지만 호감을 얻거나 신뢰를 받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사업의 기초는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것이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과 누가 사업 파트너가 되겠느냐, 사업의 핵심은 호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임기응변으로 얼렁뚱땅 넘기려 하지 말고 솔직해져라, 한 가지 거짓말을 덮기 위해서 백 가지 거짓말을 하게 되는 법이다’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지요. 사업을 한 지 10년쯤 되자, 아버지 말이 무슨 말인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알겠다고 하더군요.”
2선으로 후퇴해 이른바 ‘뒷방 노인’이 되면 심리적으로 외롭다고들 하십니다. 한 퇴직 오너분은 실무 경영에 참여하고 싶어도 ‘(현직 사장인) 아들이 부르기 전엔 절대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는다며 피눈물 나는 맹세와 마음수련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허허, 저는 할 일이 많아서인지 더 즐겁던데요. 일주일에 한두 번 회사에 나가면 직원들이 모두 좋아해요. 제가 수전노처럼 굴지 않기 때문이에요. 경영 승계를 한 후 부자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아버지가 손을 놓지 못하고 간섭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은 오히려 아들이 ‘너무 회사에 무관심한 것 아니냐’고 제게 불평할 정도입니다. 저는 문단활동, 국제PEN클럽 활동, 망명 북한작가 돕기, 시창작 강의 등 할 일이 많습니다. 돈 문제도 내가 버는 만큼이 내 돈이 아니라, 내가 쓰는 만큼만이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밥 먹고 술 마실 때 쓸 수 있을 정도면 되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흔히 나이든 분들은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싶은데, 그들이 어렵다며 피한다고 합니다.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시는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나이를 먹으면 남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돼야 합니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방법도 찾아야 하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기도 해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 사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즐거워야 남도 즐겁지요. 안 그러면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거나 피곤하게 만듭니다. 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며 대우나 받으려 하고 폼만 잡으면 꼰대로 소외당하지요.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는 모임에 나가면 대우받으려 하기보다는 사람들과 잘 적응할 방법을 찾습니다. 나이 든 선배로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려고 하면 오히려 ‘식욕, 성욕 다 당신들 못지않다. 당신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더 젊다’고 농담을 하며 벽을 허물곤 한답니다.”
밥 잘 사고 젊은이들과 무람없이 농담을 주고받는다고 해서 그를 ‘세상모르는 팔자 좋은 금수저 출신 어르신’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이길원 이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사업이 잘나갈 때는 있는 약속도 취소하면서 만나던 사람들이 사업이 어려워지자 없는 약속도 만들어 핑계를 대며 피했다. 이런 인간의 온갖 행태를 다 경험하고 목격했기에 그는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며, 조변석개의 인심을 겪으며, ‘사람은 누구나 제 입에 밥알 털어넣기 바쁘다’는 진리를 뼈저리게 터득했단다.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을수록 외로움을 덜 탄다. ‘자립심=사교심’이 그의 지론이다. 역설적이지만,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혼자서 버틸 줄 아는 내(耐) 고독력이 사교력과 모임적응력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플루트를 새로 배우신다고 들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지요.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과학자가 되라고 강권하셔서 화학과로 진로를 정했는데, 막상 가보니 적성에 안 맞지 뭡니까. 또 사업을 할 때는 바빠서 악기를 배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때 풀지 못한 원을 고희가 지난 지금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 나이에 뭘 새로운 걸 배우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날씬한 플루트 몸매는 내 손놀림에 따라 음계를 달리합니다. 낮은 음으로 속삭이다가 높은 비음으로 유혹하면 저절로 감성에 젖게 되지요. 게다가 휴대도 간편해 노후에 배울 악기로 딱 안성맞춤이라 생각합니다.”
이길원 이사장을 만나는 날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댔는데 그날도 플루트 레슨을 받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은 초보 수준이지만 프로 수준에 이를 때까지 꾸준히 연습할 생각”이라며 “손자들 앞에서 데뷔 음악회를 여는 게 향후 목표”라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인생 3막, 서드 에이지에 대해 쓴 시가 있는지 물어보자 그는 노년의 관조와 여유를 다룬 자작시를 나직하게 암송하기 시작했다. 때론 강한 목소리로, 때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를 읽어나가는 그에게서 거친 파도와 싸우는 손마디 굵은 어부와 열정적으로 연기를 펼치는 배우의 모습이 느껴졌다. 낭만가객, 음유시인의 면모를 잃지 않고 고독하게 인생의 파도를 헤쳐 온 그에게 커튼콜의 힘찬 갈채를 보내고 싶어졌다. “브라보! 브라비시모, 유어 라이프!”
마침표 연습 2
이길원
내 연기(演技)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도
아이야
커튼콜하며 무대 비우는
배우에 갈채 보내듯 박수를 쳐라.
최선을 다한 나의 연기다
막이 내린다고 우는 사람 있더냐.
촘촘히 등 돌려 무대 내려오는 나는
박수를 받고 싶다.
내 서던 무대에 누군가 또 열정을 보일 것
이제는 너의 차례
신(神)이 누구에게나 한 번 주는 배역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라
산다는 건
주어진 역할에 따르는
한 편의 연극 같은 것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인터뷰 내내 함익병(咸翼炳·57)은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었다. 성공한 피부과 의사이자 방송인으로서 활발히 활동했던 모습보다는 최근 TV조선의 시사 프로그램 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사 닥터(?)로서의 모습이 더 강하게 드러났다. 인터뷰에서 그는 대통령 탄핵까지 가게 된 현재의 혼란스러운 정국에 대해 이 나라의 한 국민으로서의 분노를 여과 없이 쏟아냈다. 바로 19대 대통령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것. 그렇다, 그는 현실 정치의 참여를 선언한 것이다. 자신을 진보와 보수의 틀을 넘어선 합리주의자라고 강조하는 함익병의 문제적 발언들을 들어보자.
“낙태는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는 게 당연합니다. 임신, 출산, 육아까지 모든 부담을 여성이 져야 하니까요.”
어느 급진적인 진보 성향을 가진 사람의 말일까? 아니다. 과거에 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군대를 마치지 않았던 아들에게 국민의 4대 의무를 모두 마치지 않았으니 내가 지지하는 보수 진영 후보자를 지지하도록 압박했다”, “국민이 행복하고 잘살 수 있으면 무능한 민주정보다 좋은 왕정이 낫다”는 말을 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타칭’ ‘합리적 보수주의자’ 함익병의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모순적인 면들이 많은데 그걸 진보, 보수라는 이분법적인 언어로 규정하고 재단하려드는 건 잘못된 거라고 봐요. 그래서 그런 용어 자체를 아주 싫어합니다.”
진보, 보수라는 틀 속에 갇히기 싫다
그는 자신이 어떤 면은 진보적이지만 어떤 부분은 굉장히 보수적이라고 말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페미니즘 논란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도 그렇다.
“제가 결혼하고 아내와 함께 처음 한 일이 재산 분할에 관한 약속이었어요. 아내 50%, 나 50%로 이혼할 때 재산 분할로 싸울 일 없도록 미리 합의를 해뒀죠. 그걸 30년 전에 했습니다. 아들 딸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데 딸도 아들과 똑같이 키웠고, 만약 재산이 남아서 물려준다면 똑같이 물려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여자가 아침밥 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구닥다리이기도 해요. 이런 나는 페미니스트인가요? 아닌가요?”
그의 주장은 간단하다.
“언어적 규정은 사람을 오해하게 만든다.”
재벌 중심 경제는 1960년대 경제 프레임, 새 판을 짜야 한다
그는 경제관을 얘기하면서 현재의 재벌 중심 경제 구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기본적으로는 자유경제를 선호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재벌 구조가 과연 공정하냐는 반문이다.
“1961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대일청구권 자금이 들어왔을 때, 그 돈을 n분의 1로 나누자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랬으면 아마 다 같이 가난해졌을 겁니다. 그 돈으로 포항제철을 만들었기에 오늘의 한국의 기간산업들이 일어설 수 있었다고 봐요. 당시 한정된 자본을 소수의 경영자들에게 집중 지원하여 우리 산업의 발판을 만들었고 그 과정 중에 재벌이 생긴 거죠.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때 이병철 회장에게 지원한 자금을 자신이 받았을 때, 자신이 오늘날의 삼성 그룹과 같은 기업을 만들 역량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해요.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은 사업이 보국이었어요. 그래서 재벌 1세대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재벌 3세의 경영 승계가 과연 옳은 일일까요? 지금과 같은 방식의 편법적인 경영 승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배경에는 재벌들의 편법적인 경영 승계를 위한 불법적인 로비가 개입됐을 수도 있어요. 이런 편법과 불법을 바로잡자는 것을 두고 진보라느니 계획경제라느니 얘기하면 안 됩니다. 보수는 수선해서 쓰니까 보수예요. 그때그때 흐름에 맞춰 고쳐 쓰는 게 보수입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떤가요? 60년대 경제 프레임에 계속 갇혀 있으면서 그걸 지키는 게 보수이고 애국이라고 하죠. 그건 낡은 수구적 생각이에요.”
이치를 따지려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사실상 이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기도 했다.
“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합리적 사고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것은 진보, 보수를 정치적으로 팔아먹는 것입니다. 그걸 팔아서 정치적 이익을 얻는 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우리나라가 더 발전하려면 이런 사람들이 사라지고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최순실 사태는 내란죄로 다스려야 한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얘기가 자연스럽게 최순실 사태로 옮겨갔다. 할 말이 많은 듯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최순실 사태에서 진보, 보수가 어딨습니까? 합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맞아요. 최순실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 저는 ‘아, 이건 내란죄를 물어도 되겠구나’ 했어요. 최순실은 내란죄로 바로 기소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피부과 의사가 법을 논하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근거도 없이 그렇게 말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나라 형법 제87조를 보면 내란죄의 기준이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라고 되어 있어요. 간단해요. 최순실 사태는 국토 참절은 아니죠. 국헌 문란에 해당되죠. 내란죄는 목적범입니다. 그런데 최순실의 경우 국헌 문란의 목적을 확정하지 못해서 내란죄 기소가 불가능하다는데, 국헌 문란의 목적성을 적용할 수 있는 판례가 있어요. 바로 10·26사태입니다. 김재규가 내란목적 살인죄로 처형됐어요. 그냥 살인죄만 적용해도 사형시키는 데 문제가 없었는데 대법원에서 살인죄가 아닌 내란목적 살인죄로 판결했어요. 6명의 대법관은 소수 의견으로 살인죄라고 했지만. 김재규의 살인 행위가 내란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자연인 박정희가 아니라 대통령 박정희를 죽였기 때문에 내란적 상황이 발생하여 ‘결과적 내란목적’이 성립된다는 거였습니다.”
함익병이 최순실 사태가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계속 주장하는 이유는 이번 국정농단이 대통령 개입 없이는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다.
“형법 제91조 1호에는 국헌 문란을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지금 상황에 딱 맞잖아요. 그리고 다시 제87조로 돌아가면,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라고 되어 있는데, 폭동에 대해 찾아보면 ‘다수가 폭력적 행위나 ‘협박’을 통해 한 지방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면 폭동’이라고 해요. 최순실은 폭력을 동원하지는 않았지만 협박을 했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협박이라 함은 일상적인 협박이 아니라 상대방이 협박이라 받아들이면 협박이 성립되는 광의의 협박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내란죄 처벌 때도 계엄령 전국 확대를 통한 협박을 내란목적 협박으로 적용해 내란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는 최순실 사태가 터졌을 때 처음부터 내란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변호사들에게 물으니 “검사가 당신처럼 치고 나오면 기소는 가능하고 판사 앞에서 다툴 여지는 충분히 있다”는 의견을 줬다고 한다. 그는 지금 국민이 원하는 것은 내란죄 처벌 정도의 수위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현실적인 어젠다를 제시하겠다
이제 대통령에 대한 얘기다. 그는 19대 대통령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시원하게 밝혔다.
“이번 대선에 어떤 형태로든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입니다. 지지하는 사람의 당선도 중요하지만 일반 국민들이 바라는 바를 정치인의 시각이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선거 공약에 반영하려는 목적이에요. 물론 직접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면 제가 생각하는 의제들을 알릴 수는 있겠지만, 실현 가능성이 너무 낮겠죠(웃음)?”
그는 정당들에게서 따로 정치 입문 제안을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런 부담스러운 얘기를 하는데 캠프에 참여하라고 하겠어요(웃음)? 저 같은 사람은 정당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거예요. 제가 정치적 겸손을 싫어하거든요. 물론 정치적 위선은 필요하겠죠. 그런데 위선적이고 싶지도 않아요.”
위선적이지 않아서 그런지 그는 “키 커~ 잘생겼어~ 똑똑해~”라며 자기 자랑을 거침없이 해댄다. 이런 마초성이라면 귀엽고 매력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선거할 때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으로 투표를 해요. 그건 지도자를 뽑을 때 할 행동은 아니죠. 박근혜 대통령도 불쌍해서 뽑았잖아요? 그 아버지, 그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실 분이 아닌데 싶어서 빚진 감정도 있었고.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게 바라봐야 해요. 정말 잘난 사람이라고 흔쾌히 인정해줄 만한 지도자를 본 적이 없어 저는 항상 현실이 불편했죠.”
그는 “이런 네가지(?) 없는 말을 하니 누가 저를 뽑아줄까요?” 하며 웃었다. 하긴 자리 욕심이 없으니 정치적 의사 표현에 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는 뇌에 종양이 생긴 상태, 당장 수술이 필요
“어렸을 적부터 대통령이 꿈이었어요. 공부는 잘했지만 영재는 아녔어요. 머리보다는 손과 엉덩이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지.”
대통령이 꿈이었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 꿈이라는 것이 그 세대의 남자 아이라면 누구나 꿈꾸어봤을, 장군· 과학자· 대통령 같은 그런 희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선택은 문과가 아닌 이과였다.
“아버지 세대는 정치를 목숨 걸고 하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데모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사실 그 시대는 그랬으니까. 장남이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진학해야 했죠. 그래서 의사가 됐어요. 그런데 살아보니 의사라는 직업이 여유롭고 좋더라고요.”
그러나 그는 이제 정치에 참여하려고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번 최순실 사태를 겪기 전에는 정치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정치에 직접 참여해야겠어요. 내가 하는 일 열심히 하고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이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 믿었는데 정말 해괴망측한 일들이 벌어졌잖아요. 그렇다고 꼭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대통령과 같은 무엇이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에 들어가 지속적으로 정책을 챙기고 권력의 올바른 행사를 감시하는 건전한 시민의 목소리라도 내야겠어요. 이번과 같은 일이 다음에는 안 벌어질까요? 끊임없이 감시하고 목소리를 내야만 정치 환경이 달라질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를 인체에 비유하면 뇌에 종양이 생긴 거예요. 서둘러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 수술 팀에서 일조하고 싶어요.”
우리나라가 지킬 것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지켜야 할 보수의 가치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보수는 너무 많은 흠이 생겼다. 그렇다고 보수의 가치를 버릴 수는 없다. 그 지점에서 그는 자신이 할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문제에는 국가가 개입하지 말아야
그는 인생에서 지키고자 하는 특별한 철학은 없지만 마땅히 실천해야 할 생활 철학은 많다고 했다.
“우선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 하루에 한두 시간은 꼭 운동하고 세끼 밥 챙겨 먹고 7~8시간 자요.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걸 지키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어요. 건강을 위해 기본적인 것도 안 지키면서 뭘 먹으면 건강할까 묻는 그런 모순된 사람들을 많이 보죠.”
그는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을 많이 써요. 왜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죠? 나도 나를 잘 모를 때가 많은데 남이 나를 어떻게 보나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해요?”
그는 예전에 네이버 검색어 1위에 올랐던 적이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문제의 인터뷰 건으로 촉발된 논란 때문이었다.
“도덕적이며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면 왕정이어도 좋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들과 대화하면서 그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뛰어난 군주가 세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역사에 없어요. 지속 가능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조금씩 뒤뚱거려도 민주정이 왕정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수해요”라는 아들의 반론에 공감한 것이다. “군대도 그래요. 군대 안 나온 사람은 공직에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신체 건강한 사람이 ‘나이 초과’나 ‘만성 두드러기’ 등으로 병역을 면제받고 공직에 나서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죠. 정부에서 출산을 장려하는 것도 웃겨요. 그건 우수하고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재벌들 논리지 개인의 행복과는 아무 상관없는 논리예요. 직장 수보다 구직 인구가 더 많아서 취업도 안 되는데 인구가 왜 늘어나야 하죠? 젊은이들의 삶이 행복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아기는 말하지 않아도 갖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개인적인 문제까지 국가가 개입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는 합리주의자, 멘탈이 센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인터뷰로 논란이 있었을 때도 마음고생을 전혀 안 했다고 말했다. 멘탈이 센 걸까?
“멘탈이 센 게 아니라 그런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에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내 인터뷰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그 사람 의견일 뿐이에요. 멘탈이 센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죠. 결국 탄핵까지 갈 이런 상황은 못 견뎌하는 게 정상이에요. 그 정도의 멘탈이 되려면 합리성이 결여돼야 해요.”
합리적 엘리트주의를 지지하고 여성의 성 역할론을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그는 보수주의와 통하는 게 있다. 그러나 동성애, 페미니즘, 심지어 마약 문제까지 관용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한국의 전통적 보수주의와 갈릴 수밖에 없다.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만 그 때문에 한국 정치 현실에서는 경계인이 될 수밖에 없는 함익병은 과연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현실 정치에 반영할 수 있을까? 성역을 인정하지 않는 그의 기질이 만들 작은 도전이 우리 정치 현실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흥미롭게 지켜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