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우리나라의 고령자 교육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국회도서관은 지난 16일 발간한 ‘최신외국입법정보’ 200호에서 ‘주요국의 고령자 교육 입법례’를 소개했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미국 등 해외의 고령자 교육 관련 입법례를 검토‧비교해보고 우리 법률의 입법 개선 방향을 모색했다.
우리나라의 고령자 교육은 헌법 및 교육기본법, 평생교육법에 근거할 때 ‘평생교육’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저출산‧고령사회기본법, 노인복지법, 국민 평생 직업능력 개발법, 고령자고용법 등이 있다. 그러나 고령자 교육에 대해 명시적으로 규정된 법률이 없고, 교육 대상인 고령자의 연령 역시 명확하지 않은 실정이다.
해외의 경우는 어떨까. 먼저 독일은 각 주(州)의 ‘평생교육법’을 기반으로 한다. 평생교육법은 대학 및 직업훈련교육기관의 협력과 주 정부의 예산지원을 규정하고 있다. 특히 1979년 프랑크푸르트대학교를 시작으로 50여 개의 독일 대학이 ‘노인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독일의 노인대학은 저렴한 학비로 노인들도 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대학강의의 정규과정은 물론 청강도 가능하며, 은퇴한 명예교수가 강의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하고 있다. 한 학기에 보통 50유로부터 최대 1000유로의 학비를 부과한다.
프랑스의 고령자 교육 기반인 평생교육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원칙에 따라 모든 연령대의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프랑스는 25세를 기준으로 이전은 정규교육(의무교육 포함), 이후는 직업교육으로 구분한다. 여기에 직업교육과는 별개로 진행되는 고령자 교육이 있다.
프랑스는 고령자 및 은퇴자 등이 연령 및 학습수준과 무관하게 무료로 등록할 수 있는 ‘제3세대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자유 시간대학’, ‘모두를 위한 대학’, ‘모든 연령을 위한 대학’ 등으로 불린다. 지리, 지정학, 철학, 문학, 역사, 미술사, 음악학, 문명, 언어학, 예술, 정보과학 등 다양한 주제의 강좌를 제공한다.
스위스의 노인대학은 다양한 학위 외 과정과 더불어 정식 학위 과정을 개설하고 있어 고령자들도 학사, 석사, 박사의 학위 과정에 입학할 수 있다. 더불어 스위스는 연방 차원에서 노인대학 운영에 관한 ‘노인대학령’을 두고 있다.
노인대학은 60세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하며 저렴한 학비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있다. 이는 스위스 교육정책에서의 기회의 개방성과 접근성에 근거한다. 스위스 정부는 지방자치단체, 칸톤(Kanton) 또는 도시의 예산에서 노인대학을 지원하고 협력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은 교육에 대해 주로 연방법이 아닌 각 주의 주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고령자 교육 또한 주법에서 규정하고 있으며, ‘학비 감면 규정’을 별도 조항으로 규정한다. 학비 감면 규정은 고령자가 해당 주의 주립대학(교) 등에서 교육을 받을 때 학비를 감면받는 혜택을 명시하고 있다.
국회도서관은 결론에 대해 “향후 고령인구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기존의 직업훈련이나 취미 학습프로그램 수준을 넘어선 더욱 전문적인 교육 수요 역시 증대될 것이다. 따라서 평생교육법에 기반을 둔 ‘고령자 평생교육 프로그램’의 전문성 강화뿐만 아니라 정식 학위를 수여하는 ‘고령자 전용 교육기관’으로서의 노인대학 설치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령자 교육의 지원 방안으로 고령자 교육을 지역 대학과 연계하여, 해당 지역 고령자가 거주 지역 내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경우 교육비를 감면받을 수 있도록 하고, 대학(교)에는 교육비를 지원해주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어 “지방 대학(교)을 고령자 교육과 연계하는 이 방안은 기존 대학(교)의 시설과 프로그램을 그대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노인대학 등 고령자 전용 교육기관을 설치하는 방법보다 경제적일 수 있고, 거주지역 대학의 교육 프로그램에 고령자들이 직접 참여함으로써 지역 참여 활동의 기회가 증대될 수 있으며, 재학생 수가 감소하는 우리나라 지방 대학 활성화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이명우 국회도서관장은 “지금은 초고령사회에 대비해 고령자들이 원하는 다양하고 전문적인 고령자 교육 제공과 고령자 교육 지원 방안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입법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면서 “이번 최신외국입법정보가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자생의료재단은 지난 23일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 호텔에서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과와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한 한의사들의 삶’을 주제로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고 24일 밝혔다.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과가 주최하고 자생의료재단, 대한학술원이 후원한 이번 행사에는 50여 명의 역사학 전문가들이 참여했으며 한의사의 독립운동사를 다각적으로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학술 세미나는 인하대학교 남창희 교수의 환영사와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대한한의사협회 홍주의 회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박경목 관장을 비롯한 각계 주요인사들의 축사로 시작됐다.
방송인 김범수가 세미나의 사회를 보는 가운데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자생 윈드림 관악단과 성악가들의 축하공연이 진행돼 분위기를 돋웠다. 자생 윈드림 관악단은 자생의료재단의 문화예술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저소득층 청소년들의 안정적인 연주활동을 돕기 위해 창단됐다.
먼저 1부는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박사와 자생의료재단 신민식 사회공헌위원장(잠실자생한방병원 병원장)의 숙조부 신홍균 선생과 선친 신광렬 선생의 독립운동사를 주제로 발표가 진행했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국민대학교 이계형 교수는 ‘월남유서를 통해 본 신광렬의 생애와 독립운동’ 논문을 중심으로 신광렬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했다.
신광렬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한의사로 간도에서 3·1절 11주년을 앞두고 일어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당시 그는 시위운동의 주동자로 지목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신광렬 선생은 정부로부터 업적을 인정받아 지난 15일 대통령표창이 서훈되기도 했다.
신광렬 선생의 숙부 신홍균 선생에 대한 논문도 소개됐다. 인하대학교 융합고고학과 한태일 연구원은 ‘신홍균 한의사의 항일 독립운동 사상적 배경 연구’를 통해 독립군 군의관 신홍균 선생의 독립운동사와 그 배경을 설명했다. 신홍균 선생은 경술국치 직후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을 떠나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하고 항일무력투쟁에 일생을 바쳤다. 이를 기려 신홍균 선생에게도 2020년 11월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됐다.
이어 한국 영토사 주요 주제 중 하나인 ‘간도’에 대한 활발한 논의도 이뤄졌다. 인하대학교 복기대 교수는 ‘간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논문을 통해 1900년대 초 간도의 상황과 역사적 연원에 대한 설명을 진행했다.
2부에서는 한국 전통문화와 민족의학에 대한 논문 발표가 이어졌다. 인하대학교 정다원 연구원은 ‘대일 항쟁기 독립군의 전통의학 이용에 관한 고찰’ 논문을 통해 한의학이 독립군 활동에 미친 영향에 대해 소개했다. 정 연구원은 “주변에서 쉽게 약재를 구할 수 있었고 한약방을 거점으로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독립군은 자연스럽게 한의학에 기대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후 마지막 강연에서는 인하대학교 이상화 연구원이 ‘한국독립군 창설 배경 및 대전자령 전투’를 주제로 논문 발표를 진행했다.
모든 강연이 끝난 후 폐회사는 자생의료재단 박병모 이사장이 맡았다. 박병모 이사장은 “이번 학술 세미나는 한의사의 독립운동사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학술의 장으로서 그 의미가 컸다”며 “앞으로도 매년 학술 세미나를 개최해 꾸준히 한의계 관련 논문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hibition
◇아스테카,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
일정 8월 28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아스테카, 태양을 움직인 사람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이 한-멕시코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국내 최초의 아스테카 특별전이다. 아스테카는 마야, 잉카와 함께 아메리카 대륙 3대 문명으로 꼽힌다.
전시에서는 멕시코 국립인류학박물관을 비롯해 독일 린덴박물관, 네덜란드 국립세계문화박물관 등 멕시코와 유럽의 11개 박물관이 소장한 아스테카 문화재 208점을 만날 수 있다. 총 5부로 구성됐으며, 1521년 스페인 정복자들의 침략 전까지 아스테카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1부와 2부에서는 아스테카의 문화와 종교 등 그들의 독특하고 복잡한 세계관과 신화를 설명하고, 자연환경과 생활 모습 및 정치, 경제 체제를 소개한다. 3~5부에서는 수도였던 테노치티틀란의 모습과 그 가운데 핵심적인 건축물인 대신전 템플로 마요르에 대해 알 수 있다.
특히 지하세계의 신 ‘믹틀란테쿠틀리’ 소조상이 전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13~16세기 아스테카인은 인간이 지하세계에서 나온 거인의 뼈로 창조됐다고 믿었다. 높이 176㎝, 무게 128㎏의 소조상은 기괴한 모양새가 인상적이다.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인신공양과 활발한 정복전쟁에서 비롯된 잔혹한 이미지, 스페인 정복자를 신으로 오해했다는 이야기와 달리 아스테카 문명의 예술과 지식은 매우 발달했다”라면서 “멕시코에서 이뤄진 최신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정복자가 왜곡하고 과장하기 이전 아스테카의 본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라고 설명했다.
◇나의 하루 이야기-헝가리에서 온 사진
일정 9월 12일까지 장소 서울역사박물관
헝가리 민족학박물관과 공동으로 여는 이번 전시에서는 세 아이의 사진을 통해 1936년과 2021년 헝가리 어린이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약 70km 떨어진 작은 마을 볼독(Boldog)에 사는 두 소녀의 사진은 지난 80여 년 동안 헝가리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보여준다. 또 헝가리 남서쪽에 위치한 퇴코파니(To¨ro¨kkoppa´ny)에 살고 있는 피테르 코바치는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오던 전통 놀이 ‘파프리카’(Paprika) 게임을 친구들과 즐겨 한다. 이번 사진전에서는 피테르와 친구들이 파프리카 게임을 현대화해 즐기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Book
◇오늘 한 끼 어떠셨나요?(이우석·꿈의지도)
저자 이우석 소장은 스포츠서울에서 20여 년 여행기자로 활동하면서 주로 밥과 여행에 관한 글을 썼다. 퇴사 후 그는 ‘놀고먹기연구소’라는 회사를 차리고 미식과 여행에 관련된 일을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오늘 한 끼 어떠셨나요?’는 문화일보에 연재 중인 ‘이우석의 푸드로지’를 엮은 것이다.
이우석 소장은 한국인이 사랑하는 식재료와 음식을 네 가지 주제 ‘따뜻한 밥 한 끼’(국밥·솥밥·꽃게·덮밥·볶음밥·달걀·순대·불고기·닭곰탕·배추), ‘제철에 먹는 별미’(도다리쑥국·봄나물·조개·보리·막국수·민물고기·새우·추어탕·버섯·굴·냉면·대구), ‘한잔 술 부르는 일품요리’(곱창·양고기·복어·소고기·갈비·전·오징어·족발·육회), ‘정식 부럽지 않은 분식’(떡볶이·오뎅·만두·라면·국수·돈가스·햄버거)으로 나눠 소개했다.
특히 저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음식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순대는 몽골 기병의 행동식이며, 대구 떼를 쫓다가 뉴펀들랜드를 발견한 사실, 공깃밥이 1960년대 분식장려운동에서 탄생한 배경, 어묵이 아니라 ‘오뎅’이라 불러야 하는 이유 등을 알려준다. 이우석 소장은 음식과 함께 맛집 230곳도 소개했다. 이 소장이 20여 년간 직접 맛보고 검증한 곳이다. 일 년에 360일은 맛집 순례를 하는 저자가 적어도 몇 번씩은 방문한 집들이다.
◇셜록 홈즈 다시 읽기(안병억·열대림)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인 저자는 셜록 홈즈 시리즈를 관통하는 12가지 핵심어로 명탐정 홈즈를 새롭게 바라본다. 컨설팅 탐정, 과학수사, 천재성, 네트워크, 전쟁 등을 주제로 홈즈와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의 가치관, 그리고 동시대의 사회상을 들여다본다.
◇사우디 집사(배영준·델피노)
저자 배영준은 현대중공업에 근무하고 있다. 사우디에서 근무한 적 있는 그는 당시의 경험을 녹여 소설을 썼다. 소설은 프랑스 국립 집사학교를 졸업하고 사우디 왕가의 집사가 된 한국인
피터의 모험기를 그린다.
◇잠자는 죽음을 깨워 길을 물었다(닐 올리버·윌북)
저자 닐 올리버는 BBC 다큐멘터리 진행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활동해온 고고학자다. 그는 지구 위의 특별한 유물과 유적 36개를 엄선해 거기에 담긴 인류의 깊은 사연을 들려준다. 역사, 예술, 문화, 지리, 인류학을 아우르는 인문 교양서라고 할 수 있다.
●Stage
◇레 미제라블
일정 8월 5일 ~ 15일
장소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
연출 유준기
출연 윤여성, 김명수, 정욱, 박웅, 임동진, 문영수, 최종원, 강희영 등
연극 ‘레 미제라블’은 한국 연극 역사와 함께한 배우들이 2011년부터 만들어온 공연으로 매번 전회 매진을 기록한 작품이다. 2020년 코로나19를 뚫고 공연이 올라 화제를 모았으며, 2년 만의 귀환이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걸작을 원작으로 한다. 19세기 프랑스대혁명 전후 혼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며,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의 이야기를 그린다.
진정한 휴머니즘과 인간의 존엄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시공간을 초월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윤여성, 김명수, 정욱, 박웅, 임동진 등 원로 배우와 문영수, 최종원, 강희영 등 중견 배우들이 이번에도 명품 연기를 펼친다. 더불어 400여 명의 오디션 지원자 가운데 발탁된 젊은 배우들이 화합의 무대를 펼칠 예정으로 기대를 더한다.
◇두 교황
일정 8월 30일 ~ 10월 23일
장소 한전아트센터
연출 김민영
출연 신구, 정동환, 서인석, 서상원, 남명렬, 정재은, 조휘 등
원로 배우 신구와 정동환이 연극 ‘두 교황’으로 만난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우정을 다룬 연극 ‘두 교황’이 영국 초연 이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라이선스 공연을 펼친다.
신구는 서인석, 서상원과 함께 베네딕토 16세 역에 캐스팅됐다. 정동환은 남명렬과 프란치스코 역을 소화한다. 영국 극작가 앤서니 매카튼이 극본을 썼다.
규율과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 성향 베네딕토 16세와 자유로운 진보 성향의 개혁파 프란치스코의 대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019년 6월 연극으로 초연됐고, 같은 해 12월에는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공개돼 화제를 모았다.
◇엘리자벳
일정 8월 25일 ~ 11월 13일
장소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연출 로버트 요한슨
출연 옥주현, 이지혜, 신성록, 김준수, 노민우, 이해준, 이지훈, 강태을, 박은태 등
뮤지컬 ‘엘리자벳’이 10주년을 맞았다. 2012년 초연 당시 15만 관객을 동원하고 각종 뮤지컬 어워즈 상을 석권한 스테디셀러 대작이다.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벳의 드라마틱한 인생에 판타지적 요소를 결합한 서사와 음악, 무대예술, 3박자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호평받고 있다.
이번 10주년 공연에는 ‘엘리자벳’의 독보적 흥행을 이끌어낸 옥주현·신성록·김준수·이지훈·박은태·민영기 등의 배우들이 귀환한다. 또 이지혜·노민우·이해준·강태을 등의 뉴캐스트들이 합류, 역대급 무대를 예고한다.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고즈넉한 정취로 포근한 골목길, 시간의 퇴적으로 빛바랜 집들, 저 너머가 궁금해지는 언덕…. 서울에서 이제는 쉬 만나기 어려운 풍경이다. 딱딱한 고층 건물은 찾아보기 어려우니 희한하다. 그래 부암동은 매혹적이다. 음미할 만한 옛날 맛이 남은 동네다. 아파트촌보다 한결 따사로웠던 옛날 동네에 관한 추억이 금빛을 머금고 살아난다. 향수겠지. 이럴 때 마음은 물살처럼 번져 과거의 기슭으로 흘러간다. 자하미술관은 길의 끄트머리에 있다. 길의 이름은 무계정사길. 부암동주민센터에서 인왕산 서북부 자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자하미술관은 높고 외진 산기슭에 있다. 서울에 있는 미술관들 중 가장 고지대에 자리 잡은 미술관이다. 인근엔 석파정 서울미술관과 환기미술관이 있다. 둘 다 내로라하는 미술관이다. 저만치엔 윤동주문학관이 있다. 이상적인 도시란 어떤 걸까. 내 생각엔 크고 작은 문화공간들이 우후죽순처럼 즐비한 도시다.
싱싱하고 유쾌한 콘텐츠를 장전한 문화시설이 편의점처럼 숱하다면? 아마도 풍속은 덜 야박해 매정한 도시를 견디기가 용이하리라. 삶의 비루함과 지루함을 잠깐이나마 날려버릴 수 있는 문화예술의 폭약이 생필품 목록에 오르는 세상. 나는 그런 도시가 그립다. 이 점에서도 부암동은 사람을 매혹한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 많으니까.
레트로 바람일까. 해묵어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처럼, 곰삭은 시간의 흔적이 서린 이 동네를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색다른 운치를 돋운 카페들도 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또는 갈피 없이 마음이 들썩일 때 커피 한잔 즐기기에 좋은. 자하미술관에 이르는 무계정사길 풍경이 이렇게 다채롭다. 서정과 시정을 누릴 만하다. 그렇다면 이건 미술관에 차려진 예술의 성찬을 예감케 하는 애피타이저?
좁은 길을 따라 차를 몰면 잠깐 사이에 자하미술관에 닿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럴 일 아니다. 두 발로 뚜벅뚜벅 거닐며 풍경을 즐기라. 그러라고 골목길들이 무언의 환영사를 읊조리는 게 아닌가? 삶의 과속과 과욕은, 직진을 관습으로 삼은 넓고 개방적인 큰길들이 암암리에 인간들에게 퍼뜨린 병증일지도 모른다. 넥타이처럼 좁고 골방처럼 안온한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길의 주류를 이루었던 시절은 이미 사라졌으나, 부암동에 듬성듬성 남아 있다. 도시개발의 캐터필러에 깔려 이마저 머잖아 시들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다면 간신히 생존한 저 골목의 일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그저 고만고만한 골목길이지만 애틋하다. 옛 친구를 만난 양 반갑다. “그래, 또 만나!” 기약 없는 석별을 하고 몇 십 년 전에 헤어진 친구가 문득 골목 모롱이에서 전설처럼 등장할 듯 괜히 설렌다.
과거에는 많은 일들이 골목길에서 벌어졌다. 일상의 인간관계가 맺어졌다. 벌게진 얼굴로 단발머리 여학생에게 수줍은 연애편지를 전해주고 냅다 달아나기 좋은 곳도 골목길이었다. 정든 주점 하나쯤 골목에 있게 마련이었다. 피로가 극에 달할 때, 숨듯이 대피할 수 있는 곳이 골목이었다. 세사의 긴장과 소음에서 놓여날 수 있는 곳이 골목길이었다. 그러니 못내 그리운 게 골목길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자하미술관에 가려거든 골목을 걸어 예열할 일이다. 자글자글 들끓는 향수에 취해볼 일이다.
산경(山景)도 영락없는 예술
자하미술관으로 가는 길엔 웅숭깊은 역사 한 자락이 깔려 있어 상상력을 자극한다. 세종의 아들로 서예의 달인이었던 안평대군의 무계정사가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무계정사 옛터에 지금은 한옥 문화공간 무계원이 들어섰지만, 고명한 옛사람의 별장이 있었던 자리니 깃든 뜻이 예사로우랴. 안평대군은 어느 날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봤다. 당최 잊히지 않는 꿈을 붙잡아두기 위해서였을까. 그는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에게 꿈속의 지상낙원을 들려주고 그림으로 그려주길 청했다. 그렇게 태어난 그림이 천하 걸작 ‘몽유도원도’다. 안평대군은 더 나아가 몽유도원의 현실적 지형을 찾아냈다. 여기 부암동 산간을. 그러곤 무계정사를 지었다. 무계란 무릉계곡이다. 즉 이곳은 안평대군의 무릉계곡이자 무릉도원이었다. 무계정사 일원이 통째 옛사람의 원림이었다. 자하미술관 역시 원림 구역이었다. 순전히 안평대군의 행장에 이끌려 부암동 길을 거닐다가 자하미술관에 이르는 이도 드물지 않을 테다.
자하미술관은 언덕길이 끝나는 고샅에 있다. 인왕산이 늘어뜨린 치마 한 자락을 부여잡은 미술관이다. 그저 살포시, 산 그림자 드리워진 미술관의 형상도 담박하다. 꾸밈과 치레를 자제해 얼룩이 없는 둘레의 자연경관과 잘 어울린다. 건물은 노출콘크리트 벽체로 골격을 삼았다. 개성을 돋우기보다 기능성을 살려 지은 집이다. 전시실은 1층과 2층에 있다. 외부의 자연광을 끌어들이기 위해 천장 한쪽엔 유리판을 설치했다.
미술관 외부에 가득한 건 초록을 내뿜는 산이다.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이다. 인간사의 광기와 탐욕은 인간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양 무심히 흐르는 구름이다. 상상력을 광폭으로 키울 경우 모든 게 미술이다. ‘본디부터 그냥 그런’ 저 자연을 모방하는 게 예술이지 않던가. 이런 자연을 예술로 관조할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열어주는 게 자하미술관이기도 하다. 불가에서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라 했으나, 미술관에서 바라보이는 산경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락없는 예술이다. 조물주의 붓질이 스친 자리다. 신이 구현한 설치 작품이다.
산중 고요에 폭 파묻힌 자하미술관은 작은 미술관이다. 하나 허투루 봤다간 큰코다친다. 수준 높은 기획전을 빈번히 펼치는 미술관으로 나름 이름났다. “어쩌면 그렇게 좋은 전시회들을 기획해요?” 그런 얘기 매번 들었다며, 설립자 강종권 관장이 홍소를 터뜨린다. 그는 미술관 건물을 손수 구상해 지었다. 2008년 개관 이래 독특한 기획전들을 펼쳐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는 오랫동안 안평대군에 꽂혀 헤어나지 못했다. 6년을 내리 안평대군을 테마로 한 갖가지 전시회들을 열었다. 몰입도 이런 뜨거운 몰입이 없다. 그럼에도 양에 차지 않았던가. 2017년엔 ‘안평대군의 비밀정원’이라는 타이틀의 대형 전시회를 펼쳐 갈 데까지 가봤다. 이 전시회에 한창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 22명이 참여해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2018년 주재환과 성능경의 2인전 ‘도르래미타불’전 역시 성황리에 펼쳐졌다. 방문 당시에는 김상표의 개인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물감을 손가락으로 찍어 화폭에 난사한 액션 페인팅으로 아나키즘을 표출했다.
자하미술관에서 시선이 머무는 건 그림만이 아니다. 외려 산 풍경에 쏠린다. 북한산 비봉능선에, 북악산의 옹골찬 품새에 넋을 잃는다. 후미져 제 발로 찾아오기 쉽지 않은 미술관이지만 웬걸, 와서 보고선 흥취에 반색한다. 그림과 풍광, 둘을 잡았으니 남은 허기가 없다. 종내 마음으로 들이치는 건 안평대군의 꿈이다. 그의 몽유도원 한 자락을 훔쳐본 기분이라니.
귀촌(歸村), 촌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오는 것. 보통은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귀촌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역에 살지 않고도 귀촌한 것처럼 그 지역에 참여하는 새로운 인구가 나타났다.
◆마을 만드는 디렉터형 관계인구
1. 루치아의 뜰
석미경 대표는 서울에서 출판사 편집자로 11년을 일하다가, 남편이 공주에 있는 대학 교수가 되면서 1995년 공주로 귀촌했다. 차에 관심이 많았던 석 대표는 차 문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2012년 버려진 한옥을 발견하고 뼈대를 살려 지금의 ‘루치아의 뜰’을 열었다. 공주에 살며 동네 산책을 하다 보니 골목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14년에는 주민참여 프로젝트로 ‘잠자리가 놀다 간 골목’이라는 도시재생 활동을 제안해 선정됐다. 현재는 공주풀꽃문학관 운영위원, 공주문화도시 정책위원 활동도 하면서 청년들의 공주 정착을 돕고 있다. 먼저 귀촌한 사람으로서 누군가 공주로 와 무언가를 도전할 때, 묵묵히 지켜보며 그의 시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다.
2. 사회문화예술연구소 오늘
여러 지역에서 도시재생이나 문화기획 일을 하던 임재일 소장은 유독 공주에서 일할 기회가 많았다. 10년 가까이 공주에서 공공미술을 하던 그는 2018년 자연스레 공주로 귀촌했다. 30년 동안 하숙집으로 사용되다 버려진 3층짜리 폐가를 사들여 연구소를 옮겼다. 공주의 과거와 현재를 잇고, 공주 사람과 이웃 사람을 잇는 장소를 만들고 싶어 ‘대안카페 잇다’도 열었다. 그는 공주 근대문화거리, 하숙테마거리, 제일감리교회 기독교박물관 조성, 국고개 문화예술거리 조성사업 등 공주 원도심 도시재생 사업을 기획·실행했다. “주민 300여 명을 인터뷰하고 기록한 내용으로 ‘하숙집의 세 딸’이라는 연극도 기획하고, 문화의 날도 만들었어요. 연구소 내에 ‘공주 정보 자료관’을 만들어 도시재생 과정에서 기록하고 모은 공주의 모든 자료를 전시하고 있죠. 공주로 귀촌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공주에 대해 알기 위해 조사차 우리 연구실을 한 번은 들러요. 저는 그들에게 공주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죠.” 문화를 통해 공주의 관계인구로 지내다 귀촌한 그는 이제 다른 관계인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ㆍ임재일 소장과의 인터뷰
Q 공주에 유독 귀촌 하는 사람이 많은 듯 하다.
A 충청남도에서 대학이 가장 먼저 생긴 곳이 공주다.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이 있다 보니 선생님이나 전문 분야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많다. 교직에 있었거나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은퇴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꽤 있는 듯 하다. 그저 공주가 살기 좋아 오는 사람도 있고. 공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꽤 다양하다.
Q 고향은 세종시(구 연기군)인데, 공주에 자리 잡은 이유가 있나?
A 거리를 조성하거나 환경을 개선하는 공공미술 일을 오래 했다. 특히 지역의 역사 문화를 활용한 프로젝트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자원이 많은 공주에 우연히 초대를 많이 받았다. 공주대학교에서 9~10년 정도 겸임교수 생활도 했고. 지역을 살리는 프로젝트를 하면 건축, 인문학, 미술, 행정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모인다. 자연스럽게 문화 기획을 하게 됐는데, 이제 나이가 어느 정도 드니까 마지막으로 정착할 곳을 찾게 됐다. 연기군이 고향이긴 하지만 학창시절을 공주에서 보냈기에 친구들도 다 이곳에 있다.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지금은 문화 소프트웨어,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젊은 친구들과 공주를 연결하는 일을 한다.
Q 공주에 이주하려는 이라면 이곳 연구소를 한 번은 꼭 들른다는 데, 그들을 돕는 이유가 있나?
A 재미있으니까.(웃음) 그동안 공주에서 했던 모든 작업물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다. 공주 문화 투어를 하면 가이드가 가장 마지막으로 연구소에 들른다. 그럼 나는 작업 기록집들을 펼쳐 공주의 지난 시간을 보여준다. 이주를 하려면 집이 가장 중요한데, 빈집 조사도 했어서 어디에 가면 빈집이 많은지도 알려준다.(웃음) 하던 일이 그렇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많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게 됐다. 나도 공주가 발전되어가는 걸 기대하고 지켜본 것처럼,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도 그들의 기대만큼 성취를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Q 기록을 통해 공주와 사람들이 이어지는 듯 하다.
A 과거를 상기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다.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 하고 싶은 거다. 지금은 현재만 남아있으니 과거 그 자리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 않나. 노인 한 사람이 박물관이라고 하는 것처럼,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산다. 공주는 백제시대 수도였다 보니 그만큼 이야기가 더 많은 셈이고. 일종의 오픈 뮤지엄처럼.
3. 이미정갤러리
이미정 관장은 공주 토박이다. 귀촌을 한 건 아니지만, 그를 통해 공주와 관계 맺는 사람이 늘었다. 이 관장은 2016년 3월, 그림이 팔리기는커녕 그림 보러 오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여겨지던 공주 원도심에 갤러리를 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지역을 떠나 있던 작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윤상원, 정영진 등 원로 작가들이 이미정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고 그림이 팔리면서 작가로 입지를 다졌다. 정영진 작가는 U턴 했고, 윤상원 작가는 이주를 준비 중이다. 이 관장은 이들을 ‘1986년도 공주의 미래였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최근에는 ‘월전 귀향’이라는 주제로 공주가 직장이거나, 공주가 고향이지만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작가들을 모았다. “공주의 인구는 줄고 있지만, 공주로 유입되는 인구는 늘고 있어요. 화가일 수도, 감상자일 수도, 소장자일 수도 있겠죠. 열 명이 오면 여덟 명은 공주를 돌아보고 가요. 공주와의 관계가 생기는 거죠. 이전에는 공주 출신 작가들하고만 교감했다면, 이제는 공주에서 일하거나 공주에서 유학하거나 고향이 공주지만 다른 지역에 살거나 공주에 인접한 지역에 있는 작가들까지 연결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타지로 나가는 작가들조차 공주에 반드시 작업실을 두고 두 지역을 오가고자 노력한다. 이미정갤러리를 통해 공주에 살든 살지 않든 생활권을 공주에 두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난 셈이다.
ㆍ이미정 관장과의 인터뷰
Q 갤러리를 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A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갤러리를 여는 건 로망이다. 미술 작가로 활동하면서 30여 년 미술 학원을 운영하고, 대학 강의도 나갔다. 일을 그만 두면서, 전업 화가로 살 것인가 전업 주부로 살 것인가 고민을 했는데 둘 다 어렵더라.(웃음) 갤러리가 수익 사업은 아니지만, 작업실의 연장으로 해볼까 싶었다. 7년째 자리를 지키다 보니 작가들도 모이고, 이 주변으로 작년에 두 개, 올해 두 개 갤러리가 개관하기도 했다.
Q 갤러리 운영뿐 아니라 작가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만든다고 들었다.
A 한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갤러리스트는 대중과 예술가의 중간 역할자다." 원로 작가들이 공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획전을 열거나, 그림을 판매할 수 있는 판로를 만들고 있다. 이 감영길을 '공주의 인사동'으로 만들어 보자고 행정기관에 제안했다. 작가 한 명에게 행정기관이 지원하는 금액을, 그림을 사는 사람에게 지원금 형태로 주자고 했다.
그래서 공주문화재단에서 '그림 상점로'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을 때 갤러리로 참여했다. 그림 상점로는 그림 구매자에게 일정 금액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지난해에는 예술가 약 7명을 단순 지원할 금액으로, 1억 4000만 원의 예술품 거래를 만들어냈다. 7~80명 화가의 작품들이 팔린 거다. 올해는 참여 작가도, 작품 수도 더 늘었고 상반기에만 지난해만큼의 거래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공주를 오고가는 사람들은 이 주변을 둘러보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게 된다.
Q 젊은 작가들과 활발하게 소통한다고 하던데..
A 각자의 이유로 언젠가는 공주를 떠날 수도 있지만, 공주와의 관계성을 잃지 않도록 젊은 작가들과 자주 소통한다. '영영 아티스트'라는 20대 화가들의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작가들이 공주에서 개인전을 안 한다. 대전이나 서울처럼 큰 곳으로 간다. 공주를 떠나고 싶어 그런 게 아니다.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림을 놓치지 않도록 도움을 주다 보니, 젊은 작가들이 학업이나 생계로 어쩔 수 없이 공주를 떠나더라도 작업실만큼은 공주에 두려고 하게 되더라. 이곳 감영길에서 누군가 그림을 전시하고, 누군가는 감상하고, 누군가는 소장한다. 그렇다면 예술 생태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Q 이미정갤러리를 중심으로 작가, 관객, 공주가 모두 연결되는 느낌이다.
A 어린 학생들이 갤러리를 자주 온다. 한 학생이 “저도 대학을 졸업하고 예술을 하려면 공주로 와야겠네요”라고 했는데, 무척 기특했다. 아이한테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며 아이 손잡고 오는 엄마도 있다. 공주에 갤러리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찾아오는 작가들도 꽤 있다. 사람들이 건강하게 그림을 즐기고, 여러 이유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던 작가들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중간 역할자인 갤러리스트로서 역할을 다 하고 싶다. 앞으로는 공주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 공주에서 태어난 사람, 공주에서 일하는 사람 등 공주와 관계 있는 작가들도 연결하려 한다.
◆지역 오가는 더블로컬형 관계인구
1. 퍼즐랩
권오상 대표는 경기관광공사에서 15년 동안 해외 마케팅 일을 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공주에 매력을 느꼈다. 어느 날 마음에 드는 한옥을 발견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귀촌했다. 그는 근교인 세종시에 거주하면서 공주 원도심을 살리는 일을 한다. ‘봉황재’를 찾는 사람들에게 원도심의 맛집과 볼거리를 안내하다 보니 ‘마을스테이’를 꿈꾸게 됐고, 2019년 퍼즐랩을 창업했다. 2021년도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만들기 공모사업에 이어 올해도 청년들의 지역 탐구와 정착을 지원하는 ‘자유도’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한 청년들이 다음 기수에서는 프로그램 스태프로 참여했다가 결국 공주로 귀촌하는 사례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부 사업을 하기 전에도, 사업이 끝난 후에도 그는 공주를 느슨하게 연결하는 일을 이어갈 계획이다.
2. 다이얼팩토리
이병성 대표는 서울에서 권오상 대표와 독서 모임을 하던 사이로, ‘봉황재’에 놀러 왔다가 공주에 매료됐다. 그는 12년 동안 플랜트 설계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교육’을 주제로 독서 모임을 했다. 느슨하게 연결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아 ‘공동체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공주 원도심은 그 꿈을 구체화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서울에 살면서 공주에 코러닝스페이스 ‘와플학당’을 만들고, 청년마을 ‘자유도’를 통해 여러 프로그램과 워크숍을 기획했다. 커뮤니티가 마음에 든 청년들이 공주를 찾아 머무르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올해 와플학당을 운영하는 기업 ‘에듀커넥트’를 다이얼팩토리로 리브랜딩하고, 커뮤니티 디자인과 대화 워크숍을 더욱 구체화했다.
“이 사람들, 제정신이 아니군!”
흔히 그런 말을 했단다. 손화순 관장이 부군 김민석(작고) 선생과 삼탄아트마인 설립에 나섰을 때의 얘기다. 지금은 문화재생 프로젝트가 유행처럼 성행하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분위기가 달랐다. 용도를 잃고 스러진 폐탄광을 뮤지엄으로 재생한다? 반신반의도 무리는 아니었겠다. 그러나 손 관장 부부는 확신으로 밀어붙였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쌓은 문화예술에 관한 경륜과 식견을 믿어서였다. 2013년에 개관한 삼탄아트마인은 결국 손 관장 부부의 지향대로 질주했다. 독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뮤지엄을 만들어냈다.
“부부가 함께 다양한 형태의 문화기획 일을 수십 년간 해왔다. 나이가 들면서는 그간 축적한 경험을 뭐 하나에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싶어지더라. 그러던 중 우연히 정선에 왔다가 폐탄광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폐광을 문화예술복합공간으로 재생하는 일의 가치를 또렷이 인식해서였다.”
롤모델로 삼은 뮤지엄이 있었나?
“재생 공간의 세계적 사례인 독일의 졸페라인에서 느끼고 배운 게 많았다. 폐광에서 복합문화단지로 변신한 졸페라인에 몰려드는 관광객이 연간 200여만 명이나 된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이걸 보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벤치마킹했다.”
삼탄아트마인의 스케일이 대단하다. 공공기관이나 기업이 아니라 개인이 주관하는 공간이라는 게 놀랍다.
“부지 면적이 1만 3000평이나 된다. 버거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단기간에 뮤지엄을 완성할 욕심은 가당치도 않았다. 최소 10년, 20년, 길게 보고 가자는 기본계획을 가지고 매달렸다. 전략적으로, 단계적으로 일을 완수하자는 방침을 세웠던 거다.”
아직 미완성 상태라는 얘기?
“개관 이후 지난 10년간 주로 하드웨어를 채웠다. 현재의 완성도는 약 70%에 불과하다. 향후 소프트웨어 부문의 콘텐츠를 보강할 참이다.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이 아직 많이 남은 셈이다.”
위치상 접근성은 떨어지지만 관람객이 많을 것 같다. 이색적인 뮤지엄이니까. 게다가 주변 자연경관도 아름답다.
“여행자들과 관광객들의 관람이 잦다. 이 오지를 찾아오는 관람객이 한 해에 10만 명을 넘기도 했다. 그러나 운영이 쉽지 않더라. 특히 불행했던 세월호 사고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뮤지엄 내부의 문제는 보완하면 되지만, 사회적 환경에서 오는 악재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내게 뮤지엄 일은 신이 주신 선물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한 신의 선물이라는 뜻인가?
“가고 싶은 길을 간다는 건 얼마나 좋은가? 말할 수 없는 고난이 많았지만 ‘희망’을 중심에 두자 늘 빛이 보였다. 바라는 건 하나다. 삼탄아트마인이 대중의 ‘예술놀이터’로 쓰이기를 원한다는 것. 남편 생시에 공감하며 자주 나눈 얘기가 있다. 문화예술공간을 비즈니스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보시 차원의 대승적 행보를 해야 한다…. 이 다짐들을 힘으로 삼고 있다.”
부부가 함께 나누었던 짐을 이제 혼자 지고 간다. 무거운 게 한둘이랴. 그러나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질주가 답일 뿐이다. 이런 그가 말하는 남편 김민석은 ‘늘 한 걸음 앞서갔던 사람’이다.
현자가 말했다. 헌것에서 새것을 보라 했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으라 했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삼탄아트마인은 폐허를 딛고 일어선 뮤지엄이다. 쓸모를 잃고 퇴기처럼 버려진 폐탄광(구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을 볼 것 많고, 놀 것 많고, 느낄 것 많은 곳으로 리뉴얼한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폐탄광의 주인은 누구인가? 오가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잡초와 이끼와 뒤엉긴 거미줄이 주인일 따름이다. 그러나 낡고 시든 사물에서도 쓸모를 발견하는 눈을 가진 이가 있게 마련이다. 이 뮤지엄의 설립자 김민석(작고)은 폐탄광을 깊숙이 바라봐 역사를 건져 올리고 예술을 새겨 넣었다. 공간이 통째 관점의 이동으로 길어 올린 창의의 산물이다.
요즘 말로 하면 삼탄아트마인은 재생 공간이다. 즉 다시 살려낸 공간이다. 그러나 폐허인들 죽어 나자빠진 무생물일 리 있으랴. 폐탄광은 그것대로의 마지막 숨을 지니고 여전히 살아 있는 게 아닐까. 유형무형의 자취로 웅얼웅얼 과거를 두런거리고, 손을 뻗어 흥망성쇠의 허무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이런 폐탄광의 고즈넉한 은유를 예술로 북돋운 게 삼탄아트마인이다. 유별나게 외진 곳을, 세속 도시를 저 아래로 밀어내는 고원을, 첩첩이 겹친 산과 물을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곳을 찾아가는 여정부터 구미에 맞아 즐거울 테지. 함백산 자락의 고지대에 있으니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단층 건물이 보인다. 실은 경사지에 세운 4층짜리 본관 건물의 맨 위층이다. 입구에서 표를 끊은 뒤 중앙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차례로 관람할 수 있게 돼 있다. ‘삼탄아트센터’라 이름 붙은 본관 건물은 낡았다. 하지만 탄광 시절의 골격과 구조를 그대로 고이 간직했다. 부분적으로 모던한 장식을 살짝 양념처럼 뿌렸을 뿐, 원형을 흩뜨리는 변형만큼은 자제했다. 모든 사물과 풍경을 가급적 그대로 살려 예술의 범주 안에 폐탄광을 수렴한 셈이다.
로비, 카페, 아트 레지던시룸 등이 있는 4층에서 눈에 띄는 건 광원(鑛員)을 그린 대형 초상화다. 석탄가루로 뒤범벅된 얼굴은 밤처럼 어둡다. 눈빛만 퍼렇게 살아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노역의 피로와 신산이 서린 눈이다. 풍요 따위와는 거리를 두고 살 수밖에 없었던 광원 인생의 애환을 드러낸 작품이다. 어쩌면 삼탄아트마인의 반쯤은 여전히 탄광이다. 광부들의 실상과 동향을 실감나게 유추할 수 있는 구조물과 유물이 가득하니까. 오늘날 석탄 산업은 거의 숨이 넘어간 채 미미하게 잔존할 뿐이다. 만약 탄광과 광원들에 관한 썩 괜찮은 보고서를 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의 리서치를 통해 눈부신 성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다시 말하자면 삼탄아트마인을 관람하는 재미의 하나는 머잖아 전설 정도로만 남을 과거의 탄광 시대로 회귀한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스케일과 디테일 함께 살려
3층엔 ‘삼탄역사박물관’이 있다. 광원들이 사용했던 채탄 장비는 물론 방대한 분량의 갖가지 서류와 책자들까지 충실하게 보존해 전시했다. 회화,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등을 볼 수 있는 ‘현대미술관 캠’도 3층에 있다. 2층에는 광원들에게 요긴하게 쓰였던 필수 시설들을 재생한 ‘마인갤러리’가 있다. 광원들이 하루의 작업을 마친 뒤 몸을 씻었던 공동 샤워장엔 나신 조각상을 전시해 볼거리를 제공했다.
화장실이었던 공간엔 중세 서양의 기사들이 착용했던 갑옷을 설치해 눈길을 끈다. 웬 갑옷? 뜻이 있다. 갑옷이 감옥인 것은 갑옷이 몸을 가두기 때문이다. 행군을 하거나 전투를 할 때 기사들은 용변을 그대로 갑옷 안에다 봐야만 했다. 화급한 용무마저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인데, 광원들에게 주어진 조건 역시 열악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지하 갱도에서의 채탄 작업 중에 용변인들 자유로웠으랴. 그렇다면 광원들에게 지상의 화장실은 갑옷에서 벗어나 비로소 후련하게 용무를 볼 수 있는 일종의 구제소. 이렇게 전시 공간 곳곳에 탄광 시절을 되돌아볼 수 있는 설치 작품과 스토리텔링을 실어 디테일을 살렸다.
스케일은 또 어떻고? 일단 폐탄광의 규모부터 웅장하다. 이에 조응하며 채워 넣은 전시물들의 규모 역시 거대하다. 2층에 있는 수장고가 그 하나의 예다. 이 수장고에는 지구를 종횡으로 누비길 무른 메주 밟듯이 한 설립자가 반평생에 걸쳐 수집한 오만 가지 미술품과 공예품이 보관돼 있다. 컬렉션에 대한 설립자의 놀랄 만한 집념 이상의 광적인 몰입이 느껴지는 공간이다. 손화순 삼탄아트마인 관장에 따르면, 이 수장고는 국내 최초로 등장한 ‘보이는 수장고’다. 미술관 수장고는 원래 직원들조차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하게 통제된다. 그러나 이 뮤지엄은 관람객들이 유리벽 너머로 컬렉션을 감상할 수 있게끔 개방적인 구조를 조성한 것이다.
1층에도 전시실이 있다. 광원들이 장화를 씻었던 세화장을 재활용한 공간이다. ‘예술, 그거 어렵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걸까? 누구나 소소한 예술적 행위를 만만하게 즐길 수 있는 ‘예술놀이터’ 역시 1층에 있다. 여기에서 긴 통로를 따라 본관 건물을 벗어나 이제 삼탄아트마인의 노른자와 만난다. 바로 ‘레일바이뮤지엄’이다. 광장처럼 널찍한 공간이다. 바닥에는 광차가 움직였던 레일이 호흡을 멈춘 긴 꼬리 짐승들처럼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다. 시커먼 탄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컨베이어 벨트 역시 한편에 누워 영원한 잠에 들었다. 이곳은 조차장이다. 광원들을 지하 채탄막장까지 실어 나르기 위한 플랫폼이었다. 마치 번지점프대처럼 허공으로 우람하게 치솟은 권양기(捲揚機, 무거운 짐을 움직이거나 끌어올리는 데 쓰는 기계)의 기능이 집약적으로 작동한 센터였다. 즉 탄광의 심장부였다.
폐탄광이 폐탄광인 건 심장이 꺼져서다. 모든 것은 흘러 마침내 심장을 잃고 어둠 속에 깃든다는 걸 웅변하나? 삼탄아트마인을 휘어감은 바탕색은 석탄가루가 착색한 검정이다. 그래서 뮤지엄의 어느 공간이든 검은빛으로 어둡다. 독일 프롤레타리아 판화의 선구자 케테 콜비츠가 말하길, ‘고통의 빛깔은 아주 어둡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삼탄아트마인이 도입한 오브제의 하나는 ‘고통’이기도? 예술을 보기 위해 뮤지엄에 왔지만, 예술 못지않게 가슴을 치는 건 광원들의 족적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막장에 삶을 걸었던 광부보다 더 절박한 고통은 흔치 않을 테다. 그들이 캔 무연탄은 제 몸을 불살라 세상을 도왔다. 광부도 석탄도, 인신공양에 맞먹을 행장을 남겼다.
전통주란 전통적인 양조법을 계승 및 보존해 빚는 술을 말한다. 흔히 전통주 하면 막걸리를 떠올리고, 그 외의 전통주는 쉽게 접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전통주의 종류는 다양하고 즐기는 방법도 천차만별이다. 전통주 시음회, 전통주 직접 만들기 등 전통주를 재미있게 즐기는 법을 알아봤다.
전통주는 ①주류 부문의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제조한 술, ②대한민국 식품명인이 제조한 술, ③농어업 경영체 또는 생산자단체가 지역 농산물을 주원료로 제조한 술(지역 특산주)을 말한다. 종류로는 막걸리(탁주), 약주, 소주, 과실주, 일반 증류주, 리큐어 등이 있다.
3월 농림축산식품부가 발표한 ‘2021년 주류 시장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60.3%가 최근 음용한 전통주는 막걸리였다. 모든 연령층이 막걸리를 제일 많이 마셨는데, 그중에서도 50대 남성의 68.8%, 50대 여성의 67.6%가 막걸리를 마셨다고 답했다. 50대가 마시는 전통주는 막걸리에 편중된 경향이 있다.
더불어 전통주 하면 떠오르는 것에 대해서 25~34세 여성은 ‘요즘의 주류 트렌드’, ‘정성 들여 만드는 이미지’ 등의 의견을 내놓았다. 35~44세 남성은 예전에는 ‘저렴한 술 이미지’였다면 요새는 ‘고급 술’이라고 답했다. 즉 전통주는 트렌디하면서도 귀한 술로 평가된다고 할 수 있다.
STEP 1. 전통주와 쉽게 친해지기
맛 보며 체험하는 방법
전통주 입문 첫 단계로 전통주갤러리부터 찾아가는 것을 추천한다. 한국 전통주의 맛과 멋,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설립한 전통주 홍보 공간이다. 지난 4월 강남에서 북촌으로 이전했다.
전통주갤러리는 방문객이 연간 10만여 명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다섯 주종(탁주, 약주, 증류주, 과실주, 기타 주류)의 500여 가지 전통주를 상설 전시한다. 우리술품평회 수상작, 찾아가는 양조장 제품, 대한민국 식품명인 술 제품, 품질인증 제품, 새롭게 소개되는 전통주 등이 포함된다. 더불어 월별 추천주, 계절별 우리술 등 다양한 특별기획전과 특별시음회를 운영한다.
전통주 시음회 중장년에게 ‘인기’
특히 전통주갤러리에서는 매일 상설시음회를 개최한다. 전문가가 선정한 이달의 술 5종을 무료로 시음할 수 있다. 매일 7차례 상설시음회가 진행되는데(2회는 영어로 운영), 한 회당 최대 6명이 함께한다. 소요 시간은 20~30분이다. 네이버 예약을 통해 신청 가능하다.
전통주 소믈리에가 시음회를 진행하며, 전통주 5종을 친절하게 소개한다. 각 전통주의 맛과 향, 특징은 물론 탄생 배경이나 얽힌 이야기도 들려준다. 전통주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어도 설명을 재밌게 들을 수 있다.
또 참석자 모두는 태블릿PC를 지원받아 각 술의 당도, 산미, 향, 색 농도 등을 평가하는 시음 노트를 작성한다. 시음하면서 ‘당도가 높다’, ‘산미가 강하다’ 등을 음미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집중도가 높아진다.
남선희 전통주갤러리 관장은 “코로나19 여파로 잠시 중단됐다가 4월부터 다시 시음회를 열고 있다”고 밝혔다. 더불어 “참여하시는 분들의 연령층은 다양하다. 사실 온라인 예약이 어르신들께는 어려운 일 같지만 생각보다 어르신의 참여율도 높다. 비율로 따지면 50대 이상 참여율은 15%에 이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중장년층이 선호하는 전통주는 무엇일까. 남 관장은 “아무래도 막걸리에 익숙한 세대이기 때문에 탁주를 즐기시는 것 같다. 요즘 나오는 탁주는 도수가 6%에서 12%로 맛도 도수도 다양하다. 그래도 역시 어르신은 전통적인 막걸리의 맛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진짜 술맛을 선호하는 분들은 고도주의 증류주를 찾기도 한다”고 말했다.
남선희 관장은 “예전에 비해 전통주의 종류와 맛, 그리고 개성이 다양해졌다”면서 우리술에 변화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2000종이 넘는 우리술이 유통된다고. 그러면서 “우리술은 알고 마시면 더욱 맛있다”며 양조장 투어나 와이너리 방문 등의 여행을 추천했다.
전통주는 현재 국내외로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러한 역사는 2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2006년 MBC 드라마 ‘환상의 커플’ 속 여주인공 한예슬이 막걸리를 많이 마신 것이 계기가 돼 해외에서 관심도가 높아졌다고.
남 관장은 “저는 우리술의 장점이자 단점이 로컬화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땅도 넓고 쌀도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막걸리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충분히 조성됐다. 10년 후에는 미국 현지에서 만든 막걸리를 먹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면서 전통주의 세계화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STEP 2. 전통주 직접 만들어 먹자!
전통주를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엄두가 안 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전통주는 쌀, 누룩, 물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술이다. 전통주의 출발점 역시 ‘가양주’(家釀酒, 집에서 빚어 만드는 술)다.
일가일주, 즉 집집마다 빚던 독특한 술 문화의 다양성이 일제강점기 수탈과 주세법 등의 영향을 받아 사라졌으나, 이를 계승·발전시키려는 국가적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전통주갤러리뿐만 아니라 전통주 교육기관이 늘고 있다.
전통주 교육기관
전통주 교육과 관련된 사업은 2012년부터 시작됐다. 농림축산식품부는 현재 ‘우리술 전문인력 양성기관’ 6곳과 ‘우리술 교육훈련기관’ 16곳을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 교육생에게는 국비 지원을 해준다.
우리술 전문인력 양성기관은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12조에 따라 우리술 산업을 선도해갈 전문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6개월 이상)하기 위한 곳이다. 양조 관련 학과나 과정이 설치된 대학 또는 전문 연구소가 지정 대상이다.
우리술 교육훈련기관은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우리술 산업의 저변 확대와 건전한 술 문화 조성을 위한 교육훈련(6개월 미만)을 실시하는 곳으로, 적절한 시설 및 인력을 갖춘 기관 또는 단체가 대상이다.
‘한국가양주연구소’는 두 조건에 모두 속한다. 한국가양주연구소는 대표적인 우리술 교육기관으로 꼽히며, 수도권 지하철 2호선 방배역에서 5분 거리다. 전통주 만드는 법을 배우는 ‘우리술 빚기’ 교육을 하고, 전문가로 거듭나는 ‘전통주 소믈리에’, ‘한국술 최고지도자’ 과정 등이 있다.
삼해소주 만들어볼까?
서울의 전통주 아카데미로 삼해소주 공방도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한 교육기관은 아니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명인의 전통주를 만들어볼 수 있다.
삼해소주의 故 김택상 명인은 2017년 전통식품명인 제69호로 지정됐다. 고려시대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등장하는 ‘삼해(三亥)소주’ 제조 방식을 계승해온 것을 인정받았다.
삼해소주는 조선시대 사대부 사이에서 널리 음용되던 서울의 대표적인 소주다. 음력 정월 첫 돼지일(亥日) 해시(亥時)에 첫 술을 담근 다음, 36일 후 돼지일에 2차 덧술을 한다. 또 36일이 지난 후 3차 덧술을 한다. 이처럼 세 번 덧술을 쳐 술을 빚기 때문에 삼해주라는 이름이 생겼다. 술을 마시기까지 대략 100일이 걸려 백일주라고도 한다.
故 김택상 명인은 삼해소주 공방을 운영하면서 전통주를 알리고 제자 양성에 힘썼다. 고인이 떠난 후 김현종 대표가 삼해소주의 명맥을 잇고 있다. 김현종 대표 역시 아카데미 수업을 들으면서 삼해소주와 인연을 맺었다. 삼해소주 공방은 지난해 북촌에서 마포로 이전했다.
삼해소주 아카데미는 술을 만들기까지 약 5개월의 과정이 걸린다. 첫 번째 날은 밑술을 한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 와서 밑술에다 1차 덧술을 한다. 덧술은 멥쌀로 고두밥을 지어서 밑술과 같이 섞는 과정이다. 덧술을 해야 발효가 되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36일이 지나면 술이 익는데 바로 마시지 않고 2차 덧술을 한다. 2차 때는 누룩과 물, 그리고 1차 때와 다르게 찹쌀이 들어간다. 3차 덧술은 2차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한다”면서 “36일이 또 지나 숙성한다. 발효가 모두 끝난 이후에도 맑은 약주만 건져내 증류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삼해소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약 반년의 시간이 걸리는 것. 수강생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지정된 날에 참석하면 된다. 김현종 대표는 반년의 시간 동안 계속해서 술이 잘 익는지 확인하고 보살펴준다.
김 대표는 “삼해소주는 굉장히 복합적인 맛이 난다”면서 “수강생들이 자신이 담근 술이 잘 익었다면서 만족할 때 뿌듯함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동안 수업을 거쳐간 사람만 5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김현종 대표는 “전통주 관련 종사자가 아니라 현업이 있고 취미 생활로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많다”고 밝혔다. 요즘은 중장년층보다 20~30대 젊은이들이 수업을 많이 듣는 추세라고. 전통주 관련 사업을 계획하는 이들도 물론 있다.
김 대표는 “사실 저는 아카데미에 와서 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들 관심 분야가 같기 때문에 금세 친해진다. 수강생끼리 모여서 술도 마시곤 한다”고 말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에너지를 얻어 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직접 삼해소주 아카데미 수업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강생들, 그리고 공방 사람들한테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전통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 반죽을 빚고 술을 담그는 과정에 힘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고,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술을 즐기면서 만든다는 생각이다.
전통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나이가 많다고 겁내지 말고 전통주 교육기관의 문을 두드려보자.
막걸리 키트도 있지
아직 코로나19의 여파도 있고, 많은 사람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여유를 즐기면서 전통주를 만들어보고 싶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는 집에서 간편하게 전통주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막걸리 키트를 추천한다.
대표적으로 배상면주가의 느린마을 막걸리 키트가 있다. 키트에는 쌀가루, 누룩, 효모가 들어 있다. 1일 차에 술을 담그고, 2~4일 차에 술 익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탄산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하루에 한두 번씩 잘 섞어주면 된다. 5일 차에 술 거르는 과정까지 거치면 완성된다. 더불어 기호에 따라 재료를 추가해 자신만의 특별한 막걸리를 만들 수 있다.
막걸리 담다의 키트도 유명하다. 기본형부터 딸기, 바나나, 멜론까지 맛이 다양해서 취향에 따라 선택 가능하다. 해오름의 통곡물 현미 하우스 막걸리 키트는 물만 부어서 하루만 숙성하면 완성된다. 우리술방 막걸리 DIY도 물만 섞어주면 막걸리가 만들어진다. 막걸리 병이 고급스러워서 선물용으로 제격이다.
길고도 길었던 팬데믹의 뒤편을 바라보는 요즘이다. 갑갑한 마스크를 벗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고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을 막아서는 불청객이 있으니, 이른바 ‘롱 코비드’(long COVID)라 불리는 코로나19 후유증이다. 증상과 정도, 지속 기간까지 제각기 다르니, 일상생활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수준이면 다행이라고 가슴 쓸어내릴 판이다. 브라보 독자들은 어떤 코로나19 후유증을 겪었을까?
장미영 65세
목이 칼칼하고 가끔 숨이 찼어요.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고 피로감도 심했습니다. 목은 양성 판정 후 2주일 정도 지나니 괜찮아졌어요.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더군요. 한 달 동안 목소리가 안 나왔다는 사람도 있었거든요.
이용열 57세
약간의 미열과 나른함이 있었어요. 목이 부은 듯이 불편하기도 했고요. 두통은 아닌데 멍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몸 전체에 에너지가 잘 돌지 않아 기력이 없었어요. 무리하지 않고 일주일 정도 잘 먹고 쉬고 나니 다행히 점차 나아졌습니다.
송은경 59세
약간의 잔기침이 있었어요. 몸살 기운도 오래갔고요. 열은 안 나는데 뭔가 몸이 쉽게 피곤하고 지치는 기분이랄까요? 목이 쉽게 건조해져서 가습기를 계속 틀고 있어야 했죠. 지금도 밤에 잘 땐 가습기를 꼭 틀고 자요. 조금만 무리해도 몸살이 난 것처럼 기운이 쭉 빠지고요. 목소리가 제대로 돌아오는 데만 한 달이 걸렸어요. 어머니도 확진 판정을 받으셨는데, 잔기침이 오래가네요.
함영미 56세
확진 판정 후 2주 정도는 가래가 많이 생겼어요. 그런 탓에 목소리도 안 좋았고요. 두통도 계속 있었는데, 한 달 정도 갔던 것 같네요.
열 명 중 둘은 겪는 후유증, 관리가 우선
코로나19 확진자 중 상당수가 완치 판정 후에도 기억력 감퇴, 피로감, 집중력 저하 등의 증상을 보인다. WHO는 후유증을 겪은 완치자 비율을 10~20%로 본다. 국립보건연구원이 국립중앙의료원, 경북대학교병원, 연세대학교의료원 등 국내 의료기관과 협력해 실시한 후유증 조사 결과에 따르면 피로감, 호흡곤란, 건망증, 수면장애, 기분장애 등의 증상이 가장 흔했다. 김윤나 경희대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는 “병원을 방문한 확진자 대다수가 머리가 멍하고, 온몸에 힘이 없으며, 이유 없이 울적하고 초조하다는 증상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진자에게만 후유증이 남은 것은 아니다. 책 ‘팬데믹 브레인’의 저자 정수근 충북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팬데믹으로 사회적 고립을 경험한 사람의 뇌는 지하 벙커에 오래 갇혀 있다 풀려난 사람의 뇌와 닮았다”고 적었다. 독일 남극기지에 파견돼 14개월간 고립된 채 지냈던 탐험가들의 뇌를 조사해보니 기억력을 관장하는 해마의 크기가 약 7%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코로나19 후유증에 대한 특이적인 치료법은 5월 기준,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이 방역당국의 공식 입장이다. 단, 증상 완화를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며, 코로나19 감염 후 새로 나타나거나 지속되는 증상에 대해서는 의료기관을 방문해 증상에 따른 대증치료(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에 대응해 일시적으로 처치하는 치료)를 받을 것을 권하고 있다.
코로나19 격리해제 후 불안, 우울증 및 스트레스 등으로 정신건강 악화가 우려된다면 국가심리지원센터를 방문할 수 있다. 서울시 전 자치구에서 확대 운영될 예정인 ‘코로나19 후유증 상담센터’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서울시는 “완치 후 최소 2개월 이상 후유증이 지속되는 시민을 대상으로, 증상 관리와 더불어 심리상담 의료기관을 연계할 수 있도록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를 향연처럼 즐길 수 있는 명소다. 물론 일부 다른 미술관들도 백남준의 작품을 여러 점, 또는 한두 점 소장하고 있다. 백남준 애호가들이 꽤 많은 것을 아는 미술관 운영자들은 백남준 특별관을 만드는 식으로 그의 작품을 예우한다. 김성은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이 생각하는 백남준은 어떤 인물일까?
“흔히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아버지’라 부른다. 이는 어쩌면 좁은 범위의 관점이다. 그는 비디오아트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를 탐구했던 작가다. 예술가이자 엔지니어에 그치지 않았다. 이미 생시에 철학자이자 사상가라는 평을 들었으니까. 그의 모토는 ‘예술가는 미래를 사유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신념으로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결국 광활한 다재와 박학다식으로 미래를 읽어 비디오아트를 선구적으로 창작, 시대의 전위에 섰던 셈이다.”
백남준의 작품을 한결 옹골차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만약 백남준이 아직 살아 있다면 오늘날의 미디어, 가령 유튜브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는 아무래도 더 재미있게, 더 기발하게 매체를 운영했을 테니까.”
1974년에 그는 ‘전자 초고속도로’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일찌감치 인터넷 세상이 도래할 걸 예견했던 걸까? 그렇다면 놀라운 예지력이다.
“이미 1960년대 말에 ‘모두가 아마추어 방송국을 할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오늘날의 유튜브를 미리 예상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백남준의 인간적인 면모는 어땠나?
“세상과 사람을 무척 사랑했다. 특히 사람들에게 다정한 면모를 수시로 드러냈다. 그의 작업 특성상 협업이 필요했는데, 협업자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전시 작품 가운데 단 한 점을 꼽아 관람을 권유한다면?
“굳이 꼽자면 ‘TV정원’이다. 자연에 예술을 접목한 이 작품을 통해 백남준이 지구의 생태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인공정원에 배치된 비디오아트로 인해 식물들은 더 생기를 띤다. 나무들의 초록 입자들이 비디오아트와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은 느낌마저 주는 게 아닌가. 이 작품을 외국에서는 화분 위에 배치했다. 정원 형태의 화단을 조성한 건 우리 미술관이 유일하다.”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무슨 의미였을까?
“액면 그대로 예술이 사기라고 생각했을 리가. 예술의 힘에 대한 믿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촌철살인의 발언으로 해석하고 싶다. 백남준이 기상천외한 유머를 즐겨 구사했음을 고려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예술은 사기다’라는 발언을 두고 해석이 실로 분분했다. 그런데 그 발언 15년 뒤 백남준은 이렇게 밝혔다. “나를 포함한 예술가들이 눈속임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말한 사기라는 건 에고의 예술을 말한다. 나는 폼 잡는 예술은 하고 싶지 않다.” 결국 ‘예술은 사기’라는 극언은 치열한 자기검열의 언어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