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도 지금처럼 아직 쌀쌀한 바람이 제법 부는 날이었습니다. 필자는 엄마 손을 잡고 학교 운동장으로 갔습니다. 엄마 손은 따뜻했고 필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이었습니다. 영등포구에 자리 잡고 있는 우신초등학교. 당시엔 우신국민학교라 했죠. 그때 이미 5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니 지금은 100년이 훌쩍 넘은 서울에서 몇 안 되는 학교이기도 합니다.
학교는 필자의 작은 눈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넓었지만 학생 수도 엄청나게 많아 그 큰 운동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신입생만 한 반에 70명 정도씩 20개 반 정도나 됐으니 대략 1400명은 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신입생 아이들은 모두 엄마나 아빠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함께 왔으니 그야말로 학교운동장은 도떼기시장이나 다름없었고요. 선생님이 아무리 조용히 하라고 외쳐도 운동장은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등에 새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가방 안에는 스케치북과 색연필 또는 색색의 크레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가벼운 비닐가방이었지만 체구가 작은 아이들에겐 그나마도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가방은 크고 덜렁거렸습니다.
학생들의 오른쪽 가슴엔 명찰이 그리고 왼쪽 가슴엔 손수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손수건은 멋진 장식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코를 닦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의 아이들은 잘 먹지 못하고 영양이 부족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코를 흘렸습니다. 닦아도 닦아도 푸른색을 띤 콧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영양도 영양이지만 잘 입지 못하고 밖에서만 뛰어놀아 늘 감기에 걸려 있었고 그래서 콧물을 그리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한 여 선생님을 따라 우리는 노래와 춤을 배웠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다른 모습이었지만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춤동작과 노래를 모두 잘 따라했습니다. 이때 배운 노래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군요. 지금도 초등학교 신입생들이 이 노래를 배우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책상 위에 오뚜기 우습구나야
검은 눈을 쏙 내어 뒤뚱거리며
배만 불쑥 내민 꼴 우습구나야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고 노래가 끝나도 우린 교실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실이 턱없이 부족했으니까요. 우린 먼지가 풀풀 날리는 운동장 한쪽 구석에 사열 종대로 길게 늘어서서 담임선생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내일은 몇 시까지 이제는 엄마 손 잡지 말고 혼자서 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입학한 후 한 2주일 정도를 계속 아침 10시까지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매일 춤과 노래를 배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춤과 노래를 배우는 일정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턱없이 부족했던 교실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전반, 오후반도 부족해서 오후 늦은 시간에도 반을 편성했거든요. 그리고 어떤 학급은 80명이 훨씬 넘는 학생들이 우글거리기도 했습니다. 책상을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우리 세대를 일컬어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합니다. 아마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은퇴를 걱정하는 것도 이처럼 엄청난 수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입학식이 끝나고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부잣집 아이들은 중국집으로 가서 자장면을 먹기도 했는데 필자는 가난해서 그냥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집에 돌아와서 엄마는 자장면을 못 사줘 서운했는지 필자 눈치를 보더니 밖에서 꽁치 한 마리를 사다가 구어 점심을 차려주셨습니다.
나는 꽁치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고기나 생선이 귀한 시절이었으니 꽁치 한 마리 구우면 가시까지 씹어 먹을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필자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마치 필자가 막내인 양 어리광과 떼를 써서라도 먹고 싶은 것은 먹어야 하는 아주 이기적인 꼬마였습니다. 형들이나 동생이 보면 얼마나 미웠을까요. 지금도 생각나면 너무 부끄럽고 미안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필자는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가 동네 아이들과 뛰어놀면서도 가방을 메고 있었습니다. 왜 가방을 벗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아마 가방을 메고 있는 것이 멋있고 자랑스러워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한 살 많은 형들이 필자를 보더니 놀렸습니다.
1학년 꼴뚜기 말라빠진 꼴뚜기…
흔히 1학년 신입생들에게 놀리는 노래이지요. 괜스레 화가 났습니다. 얼마 전까지 함께 이름을 부르고 뛰어놀던 사이였는데 이제 그들은 2학년 선배가 되고 필자는 1학년 꼴뚜기가 되었으니 은근히 부아가 났던 것이지요. 놀리지 말라며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다음 날이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어울려 놀았으니까요.
봄이 올 때마다 아름다운 기억이 떠오릅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지만 어김없이 다시 돌아오는 봄 햇살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입학식 날,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서 불렀던 노래가 지금도 아련히 들려오는 듯합니다.
책상 위에 오뚜기 우습구나야…
조수경 ㈜글로벌아너스 대표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돈도 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직업이 또 있을까? 앙코르 커리어에서는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취미를 통한 창직이야말로 자기에게 제일 잘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필자가 운영했던 연세대, 이화여대, 항공대 중장년 아카데미에서도 취미를 통한 창직이 많이 이루어졌다. 그중 항공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에서는 드론(drone)을 취미로 좋아하는 시니어분들이 대거 참여했다. 교육 이후 드론과 연계해 창직을 하신 분들이 많았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로 일을 가져서 그런지 누구보다도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고 계신다. 하지만 무턱대고 취미를 직업으로 삼았다가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취미가 수익까지 가져다주는 성공적인 직업으로 연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취미와 재능은 별개임을 인식하라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타고난 재능을 혼동한다. 내가 춤을 좋아한다고 해서 댄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타고난 재능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야 돈까지 벌 수 있는 직업을 만들 수 있다.
2.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라
좋아하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것이 취미를 통한 창직의 핵심이다. 좋아하기만 하고 잘할 수 없다면 수익을 창출하기가 어렵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면서도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제대로 파악하라.
3.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라
취미를 열정적으로 하는 것과 그것을 성공적인 직업으로 바꾸는 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노래를 취미 삼아 열정적으로 한다고 해서 다 가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4. 작게 점진적으로 시작하라
창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나가는 것이기에 리스크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선 수익이 있는 다른 일을 하면서 작게 점진적으로 접근하기를 권한다. 필자가 아는 ‘아더’라는 정신과의사 선생님은 탱고를 너무 좋아해 의사로서 일을 하면서 댄스치유학회도 만들고 탱고 강사도 하면서 점진적으로 접근해 현재는 탱고업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5. 경력과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라
시니어의 최고 자산은 수십 년간의 경험과 경력이다. 취미를 통한 창직에서도 최대한 자신의 경험과 경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례로 항공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의 교육생이었던 드론활용연구회 유진철 대표는 대안학교 교장으로서의 경력을 활용해 자유학기제와 연계해 드론 교육 사업을 하고 있다. 교육시장을 잘 알기에 다른 분들보다 빠른 성공이 엿보인다.
6. 고객을 이해하라
비즈니스에 대한 기본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고객을 이해하는 것이다. 취미로 사진을 하던 은퇴자들이 설립한 장애인 전문 사진관 ‘바라봄 사진관’은 언론에 많이 보도되고 크라우드펀딩이 성공하는 등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장애인인 고객을 잘 이해하고 배려한 것이 성공의 핵심 키다.
7. 시장 공략은 창의적으로 하라
취미를 통해 창직을 하더라도 남들과 똑같이 시장에 접근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으로 틈새시장을 찾아 공략해야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필자가 진행한 중장년 아카데미 교육생이었던 ‘미벨의 감성 여행 스토리텔러’ 박미종 대표는 은행 지점장까지 지낸 분인데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스토리가 있는 ‘스페인 여행 이야기’를 만들어 사업을 시작,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다.
8. 반 박자만 앞서가라
취미를 통한 창직을 제대로 하려면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마음에 너무 앞서가면 시장이 형성되기 이전이라 때로는 고객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을 할 때도 한국은 드론시장이 형성되는 초기였기에 이 부분을 강조했다. 창직을 하려면 5년 정도만 앞서가라. 그렇게 반 박자 앞서갈 때 성공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9. 커뮤니티를 최대한 활용하라
취미를 통한 창직은 커뮤니티 활동을 열정적으로 하다가 직업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동호회는 취미 교류의 장인 동시에 정보 교류의 장이다. 활발히 교류하다 보면 정보도 얻고 그 커뮤니티 사람들이 고객이 되기도 한다. 종종 창직의 기반도 마련된다.
10. 인내하며 실패를 즐겨라
취미를 통한 창직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어떤 분은 재즈를 너무 좋아해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십 년간 투잡으로 공연을 뛰다가 은퇴 후 전업 재즈 가수가 되었다. 이렇게 취미를 통한 창직은 때로는 수십 년이 걸릴 정도로 시간이 많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즐기면서 할 수 있기에 실패해도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어느덧 창직의 길로 들어서 있을 것이다.
취미를 통한 창직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보자. Bravo Your Life!
3월 2일 새봄, 쌍둥이 손녀ㆍ손자는 2학년으로 진급하였다. “동생들이 생겨서 기분이 좋다”고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하였다. 초등학생이 되면 유치원생이 어려보이고, 중학생이 되면 초등학생보다 엄청 크다고 느낄 터이다. 상급학교 진학과 한 학년 진급을 되풀이 하면서 어린이는 무럭무럭 성장한다.
쌍둥이가 2학년이 되고 방과 후 관리가 문제다. 두 아이가 한 반으로 편성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방과 후 일정은 각각 다르다. 아침 등교를 보살피고 오후에는 집에서 대기하거나 학습장으로 데려가야 한다. 할아버지ㆍ할머니가 꼭 필요한 대목이다. 아들가족과 가까운데서 사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아내와 교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부터 오후까지 아이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
유치원을 졸업한 외손자는 작년의 사촌 쌍둥이 누나와 형처럼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에 차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보다. 엊그제의 유치원 친구들과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다시 만남을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넓고 깨끗한 체육관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엄숙한 분위기다. 6학년 형들이 사이사이에 앉아서 신입생에게 입학을 축하하면서 선물을 주었다. 교장선생님의 환영사가 있었다. 신입생 대표의 선서가 또렷하게 진행되었다. 형들과 교가를 같이 부르는 신입생들의 모습이 든든하게 보였다. 며칠 전 유치원생과는 완전히 다른, 엄청 큰 아이로 느껴졌다.
교감선생님의 안내말씀에 좋은 학교라는 인상을 받았다. “혁신학교로 지정된 학교입니다. 공부만을 강조하지 않고, 다양한 체험을 하도록 아이들 지도에 많은 노력을 할 터이니 지켜보고 격려해주십시오.” 학부형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담임선생님과 방과 후 선생님 두 분이 아이들을 지도한다. 교실과 선생님이 부족하여 몇 개 학년 합반수업을 하였던 수십 년 전, 외손자의 부모가 다녔던 대도시의 학교와도 비교되었다. 아이들이 좋은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는 입학선물로 이미 챙겼다.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를 좋아한다. 방과 후에는 뛰어놀면서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딸 가족과 함께 외손자의 귀여운 모습을 기념사진에 남기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오늘이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아버님ㆍ어머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은혜를 후세대에게 되돌리고 싶다.
‘50년의 무뎌진 칼날을 다시 세우는 시간’, ‘꼰대를 졸업하는 것이 목표였던 수업’, ‘남편을 후배로 만들고 싶은 학교’. 서울50플러스 재단이 운영하는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 인생학교 졸업생들의 반응이다. 겉치레로 끝나는 은퇴 수업이 아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교육의 현장, 그곳의 중심에 정광필(鄭光弼·60) 학장이 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닌 같이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정 학장의 인생 배움터를 찾아갔다.
2015년 SBS 다큐멘터리 에서 소위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길을 인도했던 그가 이번엔 베이비붐 세대의 인생 2모작을 위한 교육자로 나섰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르치는 학생들이 10대에서 50대 이상으로 바뀌었다는 것. 국내 최초의 도심형 대안학교인 ‘이우’의 초대·2대 교장으로도 지냈던 그는 여전히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참교육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 때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때 주안점을 둔 것이 ‘어떻게 아이들 스스로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였어요. 고민하던 끝에 희곡 을 가지고 교육연극을 해보기로 했죠. 연극교육이 아닌, 연극을 매개로 한 교육연극이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운명을 거역하고 여러 고난에 직면하는 내용인데, 결국 그 이야기를 통해서 ‘나’를 찾아가는 게 목적이었죠. 다행히 결과가 좋았는데, 그 과정을 지켜본 어른들이 ‘이거 우리도 한번 해보면 정말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사실 중·장년기야말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내 운명이 뭔가를 고민하는 때잖아요. 그들에게도 이러한 교육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판단했죠. 그때의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50플러스인생학교입니다.”
지난 인생에서 뺄 것, 앞으로 인생에서 더할 것
학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교육을 하지만 책상에 앉아 하는 수업은 극히 일부다. 그보다는 워크숍 형태의 활동이 주를 이룬다. 인생학교에 참여한 이들이 스스로 주인의식을 느끼고 변화해나가길 바라는 의미에서다.
“이들에겐 강의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그동안 살아온 삶 자체로도 이미 훌륭하죠. 새로운 걸 배우는 것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잘 끄집어내는 과정이 중요해요. 그동안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직장이나 가정을 위해 달려왔는데 이제 와 보니 막연해져버렸잖아요. 그렇지만 이미 오십 넘게 살았으면 사람이 잘 안 바뀌거든요. 속에서는 고민이 많지만 드러내기 어렵고, 그런 미묘한 차이를 뛰어넘는 게 강의 하나 듣는다고 해결되지는 않죠. 길게 호흡하면서 깊이 있는 교육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단기적인 자극보다는 내재해 있는 열정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교육은 총 10주 동안 이루어진다. 학교라는 틀 안에서 학장이라 하면 권위적인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는 이러한 인식부터 타파하고자 했다. 불필요한 구색 맞춤식 교육이나 의전을 없애고 알맹이 중심으로 가자는 게 그의 방침이다.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웠던 벽을 허물고 다가가니 학생들도 서서히 자신의 교육활동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강의를 들으러 온 수강생이 아니라 당사자 입장이 돼야 해요.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이끌음보다 자신이 중심이 돼서 수업에 참여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거든요. 수업이 내 것이 되고, 내 학교가 되고, 그러다 보면 정말 내가 뭔가를 풀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죠. 그 느낌을 가져야 즐거운 변화가 시작되는 거예요. 중·장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대부분 강의 중심이잖아요. 명강사가 와서 멋진 이야기를 하고 가요. 그러면 일단 느낌이 좋죠. 느낌은 좋은데 그래 그럼 그다음엔? 이런 문제가 남잖아요. 느낌만 주고 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삶을 바꿔 갈 수 있는 과정이 뒤따라야죠.”
인생학교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 ‘커뮤니티 활동’을 제안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이를 함께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구성함으로써 아이디어와 힘을 얻고, 이를 토대로 실질적인 활동이 이어지게끔 지원하고 있다. 그의 바람대로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 교육에 열정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입학 서류에 함께 제출했던 ‘마음 준비서’가 큰 역할을 했다.
“정원이 60명인데 선착순으로 뽑지 않아요. 그 대신 두 가지 질문을 하죠. 첫째, 지난 삶에서 뺄 것은 무엇인가. 둘째, 앞으로의 삶에서 더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각각 A4용지 반 페이지씩 쓰게 하는데 이 과정에 부담을 느껴서 포기하는 사람도 꽤 있어요. 덜컥하는 거죠. 그러나 이 질문은 입학할 때뿐만 아니라 졸업하면서도, 그 이후에도 인생에서 다시 묻게 되는 질문이기도 해요. 이걸 ‘마음 준비서’라고 하는데 이 한 장을 쓰고 나면 교육에 참여하는 결의가 달라집니다. 내가 이곳을 통해서 뭘 얻고자 한다는 게 더 분명해지는 거죠. 어떤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마치 소비자처럼 짜인 프로그램을 듣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게 아니라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발견해나가는 게 중요해요.”
우리가 달라져야 우리 사회가 달라진다
마음 준비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인생학교에서의 수업은 결코 시간 때우기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만큼 밀도 높은 수업으로 차곡차곡 배움의 보람을 채우는 학생들이다. 혹여나 새로운 교육 방식에 불만을 품거나 힘들어하는 이는 없을지 궁금했다.
“이러한 교육시설과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지원한 분들은 이미 어느 정도 준비가 된 분들이죠. 거기에 마음 준비서까지 쓴 덕에 의욕이 더 생겨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니 큰 어려움은 없어요. 오히려 이런 교육에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분들이 염려스러운 거죠. 그런 분들에게 말로는 설득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보다는 이곳을 거쳐 간 졸업생들이 자신의 변화된 삶을 보여줄 때, 그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넘어서 한 발을 내딛게 되겠죠. 이런 현상이 널리 퍼지면 좋겠지만, 처음 가는 길인 만큼 늘리는 데 연연해하기보다는 제대로 확실히 다져나가야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것 같아요. 그래야 진심이 전파되고 그렇게 스스로 변화하고자 인생학교에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겠죠.”
정 학장은 인생학교 졸업생들이 또래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에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를 비롯한 베이비붐 세대의 에너지가 아직 여실히 남아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실 베이비부머를 중심으로 한 우리 중·장년층은 많은 걸 가진 세대예요. 능력적으로도 그렇고, 그동안 살아온 경험도 풍부하고, 경제력도 있는 편이고, 건강도 좋고. 게다가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우리 사회를 여기까지 끌어왔고, 세상을 한번 바꿔본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도 가지고 있어요. 오히려 내 능력은 이만큼 있는데 세상은 날 알아주지 않는다는 울분을 느끼기도 하죠. 그런 분들이 뭔가를 다시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땐, 어느 세대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상으로부터 얻은 바가 많을 거 아녜요. 이제는 어깨에 힘을 좀 빼고 그동안 누린 혜택을 사회에 나누고 힘을 보태야죠.”
중·장년층의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형태의 활동으로 인생학교에서는 연극이나 독립영화를 만드는 청년을 돕는 커뮤니티가 생겨났다고 한다. 정 학장은 이러한 세대 간 교류를 통한 긍정적 영향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젊은 친구들은 아이디어는 풍부하지만 그것을 구체화하는 네트워크나 능력이 부족하잖아요. 중·장년 세대는 그런 부분을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란 말예요. 여기서 도와준다는 개념은 전적으로 책임지는 게 아니라 정말로 도와주는 위치에 서는 것인데 그게 참 어렵죠. 그러나 시간은 충분하잖아요. 호흡을 길게 가다듬고 뜻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서 젊은 친구들과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살다 보면 점점 보람이 쌓일 거예요. 인생학교도 그런 점에서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형성해내는 주체를 만들고, 그들의 역할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도울수록 덜어지는 상처, 더해지는 온기
그는 중·장년 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철저히 돕는 입장에 서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는 정 학장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충고다.
“인생학교를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여러분이 이 학교의 중심이고 주인이다. 당사자가 돼야 한다, 나는 그저 도울 뿐이다’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관점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도 여전히 늘 피할 수 없는 게 바로 ‘가르치려 드는 행동’이에요. 교육자로서 자꾸 뭔가 멋진 말을 하려고 하고, 당위를 내세우고…. 그걸 한마디로 꼰대라고 하죠. 나는 꼰대처럼 보이고 싶지 않고 그걸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늘 실천해왔지만 여전히 그런 행동이 남아 있어요. 그들이 그 누구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잘해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손을 보려고 한다는 거죠. 철저히 돕는 위치에 서려고 늘 신경을 쓰는 데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가르치는 것이 아닌 돕는다는 말을 자주 강조하는 정 학장은 인생학교의 학생들을 ‘학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보다는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인생의 ‘동료’라는 표현이 더 좋다고. 앞으로 한 10년 정도는 동료들을 돕고, 동료들과 함께 세상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그에게 ‘도움’이라는 행위가 주는 의미는 남달랐다.
“돕는다는 거는 내가 남을 돕는 건데 사실은 도움을 받는 상대보다 내가 더 큰 걸 얻어가는 것 같아요. 남을 도울 땐 뭐랄까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을 자극하는 듯해요. 우리 세대를 보면 세상이 불쾌하고 화가 치밀고 그러면서도 상처받고 자존감이 떨어져 있거든요. 그런 분들이 누군가를 돕다 보면 순수한 마음이 되살아나고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이 풀리면서 굉장히 여유로워져요. 그러면서 자존감도 올라가고 그윽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죠. 그런 변화를 느낄수록 이웃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사회도 점점 따뜻해져요. 그래야 좀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어요?”
△ 50플러스인생학교 신청 및 문의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 sb.50campus.or.kr 02-372-5050 서울시 은평구 통일로 684. 다가오는 3월 봄 학기를 개강한다(중부캠퍼스도 개강 예정). 신청하는 커리큘럼에 따라 수강료가 다르다.
아이들은 누구나! 뭐든지! 할 수 있다! 로 교육을 받는 거다. 못을 박는 건 남자가 해야 된다던지, 힘든 일들은 남자가 하도록 시킨다던지 하는 일이 없었다, 남녀 구분 없이 내게 맡겨진 건 누구나 다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여자라고 못하게 하는 일은 자존심 문제였다. 밥 하는 일, 바느질 하는 일을 여자들에게만 가르치는 게 아니었고, 급식하는 일도 돌아가면서 순번대로 밥을 푸거나 머리에 급식 장 모자를 쓰고 누구나 몇 번을 돌아가며 하게끔 해서 저절로 책임감을 몸에 익히도록 했고 여자니까 봐주는 일이란 절대 없었다. 자기의 몫은 자기가 꼭 해내는 어른수업을 제대로 하게 하는 교육이었다. 그런 모든 행동들을 요이 주시해 가며 관찰해 가는 것이 담임이 하는 일이었다. 어머니보다 더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해야 하는 선생님들이 어찌나 책임감이 강한지 어떤 때는 엄마인 나보다 더 우리 아이의 습관을 잘 알고 있는 것에 놀라곤 했었다. 둘째가 보기와는 딴판으로 약간의 덜렁 끼가 있다는 것도 선생님 말씀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운동은 무슨 종목이든지 어떤 아이도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며 수영을 시켜보지 않겠느냐는 제의까지 모두 선생님의 눈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은 굉장한 관찰력과 세심한 엄마를 대신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닌 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스럽게 아이들은 담임을 잘 만나 책임감이 강해지고 자기 일은 자기가 하는 힘을 저절로 잘 키워갔다. 어쨌든 모든 아이들을 남녀라는 걸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았고 모든 일을 누구나 다 할 수 있게 지도했고 그런 낌새를 절대 갖지 않도록 했다. 무슨 일이든지 남자도 여자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익히도록 지도했다. 여자라 못해 라는 포기는 용납되지 않았다. 정말 절대로 그런 마음은 어쩌다가 조금이라도 갖게 하는 기회는 없었다. 이 세상일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이었다. 또 편견도 용서하지 않았다. ‘저 애는 못해’ 가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너도 할 수 있다 이었고, 하도록 서로 도왔고 하고나면 칭찬을 해 주고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모두가 같이 해나갈 수 있도록 협심하는 힘을 키웠다. 같은 반이면 모두가 함께 해내서 편견 없이 서로 믿고 해낼 수 있다는 신념을 키워가는 교육이 좋았다. 뜻을 함께해서 협력하는 살아있는 교육이 좋았다. 생각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교육인 거 같았다. 한 사람이라도 해내지 못하면 다른 팀에게 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나 남자나 다 같이 힘을 합해야 하는 산교육이었다. 좋은 초등교육 과정이었다. 여긴 선물을 선생님께 가져오면 안 된다. 처음 전학할 때 교장 선생님께 우리나라 고유의 강강술래가 수 놓여 있는 작은 액자를 선물했더니 어찌할 바를 모르며 황송하게 받는데 내가 더 부끄러워졌었다. 남대문 시장에 가서 고른 건데... 담임한테는 거실용 덧신을 드렸다. 외국에서 온 분이라 받는 거라 했다. 거긴 그 옛날부터 ‘김영란 법’ 이 시행되고 있었나? 부다. ‘선물은 그 사람 마음의 정성이다!’ 라는 걸 진심으로 느끼게 해 주는 감사할 줄 아는 분들이었다. 고맙게 받아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이 맞았다.
◇학교 소개를 부탁하였다.
“학생 수는 800 명 정도이며 600여 명이 독서에 참여하고 있다. 도서는 2만 5000여 권을 보유하고 있는데 매월 1만 여 권의 책이 대출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서울미성초등학교는 ‘학교도서관 활성화상, 독서교육대상’ 등 서울시 교육감 단체상과 개인상을 수상하였다. 도서관 활동을 매우 잘하고 있다는 주위의 평가다.
◇특별히 독서권장 방법이 있는가?
“책 읽기가 즐거워야 한다. 책 일기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한 달에 몇 권에 해당하는 목표를 정하였다. 학년에 따라서 1년에 30~60권의 책 읽기를 권장한다. 목표를 달성하면 표창을 한다. 요즘처럼 표창받기 어려운 때 어린이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된다. 전체 학생의 4분의 3 이상이 참여하고 있다.”
60여 년 전 산골 조그만 교무실 한 귀퉁이에 꽂혀있던 몇 권의 책이 생각났다. 한국전쟁 종전 몇 년 밖에 되지 않는 그때에 책이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는다. 호롱불 밑에서 밤을 밝혔던 추억에 가슴이 아리다. “책은 영원한 마음의 양식이다. 재미있게 책을 읽어라. 어릴 때 독서는 일생을 좌우한다.” 쌍둥이 손주에게, 아이들에게 힘주어 강조하고 싶은 말이다.
◇교실 3개 크기의 도서실과 많은 장서를 관리하고, 개구쟁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인데?
“물론이다. 혼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교장·교감 선생님과 도사담당 교사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120여 명으로 구성된 어머니 명예교사가 날마다 2 명씩 교대로 도서관활동을 돕고 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기자와 대화중에도 개구쟁이들은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린이의 독서습관을 어떻게 기르면 좋다고 생각하는가?
“어린이의 독서습관은 부모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가정에서 독서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무리한 목표를 설정하면 아이들은 싫증을 느낀다. 독후감 토론 등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며, 아낌없는 격려와 칭찬도 큰 보탬이 된다.”
같은 책도 읽는 시기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소나기 한 방에 무더위는 쫓겨나고 책 읽기 좋은 계절이 다가왔다. 개구쟁이들은 책과 더 친할 것이다. 배인식 선생의 친절한 설명에 감사하면서 미성초교 도서실을 조용히
우리가 일본에 도착해서 전학서류를 전부 내서 학급배정을 받은 것은 3학기 때였다. 우리에게는 2학기 까지는 있었는데 3학기라니... 암튼 그렇다 하니 그대로 따르면 되는 일이라 특별히 힘든 일도 아니라 그러려니 했다.
큰 애는 4학년 2반이었고 작은 애는 2학년 1반이었다. 큰 애 담임은 부끄러움 반에 걱정 반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어쩔 줄 모르는 남자 총각 선생님이었다. 외국 학생이란 것에 언어도 전연 모른다는 사실에 근심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작은 아이 담임은 당돌하고도 똑부러지게 뭔가를 바로바로 알아채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마치고 나오자 방과 후라, 비어 있는 교실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내일 가져올 물건과 학교에서 생활하면서의 필요한 준비물들을 여자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었다. 4학년 담임은 한 곁에 앉아 수줍음으로 말은 한마디도 없이 여자선생님께서 설명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일어는 모르지만 그 표정이나 비슷비슷한 발음으로 된 단어들이 귀에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물론 젊은 아가씨 통역 자를 데리고 갔었지만 내가 전부 알아듣고 대답을 잘하자 사무실에 가 봐야겠다며 도중에 가 버렸다. 참고서, 노트, 교과서, 급식에 사용할 손수건, 연필, 연필통, 가방, 지진훈련용 모자, 교모... 정말 열심히 설명해 줬다. 나는 알아들은 것들은 우리말로 잘 모르는 것들은 그대로 일본어 발음대로 적었다. 내 눈치가 좀 모르겠다고 느껴지면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여 선생님은 친절했고 정확해서 마음에 딱 들었는데, 계속 ‘말도 못하고 쓸 줄도 모르니 어떡하나? 아이 불상도 해라’ 만 중얼거리고 있는 4학년 담임은 내겐 큰 걱정이 되었다.
학교에서 나오면서 선생님께서 준비해 오라는 물건들을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 급식용 손수건은 하루걸러 빨아 와야 하니까 한사람 앞에 세 개씩 만들어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각 손수건 정 가운데에 고무줄을 달아 오라 했다. 왜 그러느냐 했더니 손목에 손수건 고무줄을 끼우고 식사를 하면서 흘리면 입을 닦기 편하게 이름을 꼭 새겨서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정말 요령 있게 정확한 일본인들의 습관이 이렇게 몸에 배는 구나 싶었다. 모든 물건에는 이름을 꼭 써야 한다고 당부를 했다. 설명하는 선생님의 표정과 얘기가 아주 알아듣기 쉬웠고 재미있었다. 교과서나 손수건, 고무, 노트, 준비... 같은 말들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어쩌면 금방 일본어는 배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우리는 중간에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지만 둘째가 길을 찾아 모든 것들을 잘 사가지고 왔다. 외국에 가면 며칠을 집 주변을 길을 익혀야 하므로 걸을 수 있는 정도로 셋이 손잡고 돌아다닌다. 학교가 있는 방향은 가 본 적이 없어서 물건을 사느라 정신이 팔려 그만 가게만 돌아보면서 상가가 있는 길 끝까지 가버린 것이었다. 다 사고 집으로 가려 하자 여기가 어딜까? 가 된 것이었다. 자꾸만 같은 길을 몇 번을 돌았다. 긴장해서 한쪽으로만 가 보자고 정해서 걸어 내려갔다. 우리가 한 번 걸었던 곳이 드디어 나왔던 것이다. 꼬마가 내가 확인하고 올 테니 형이랑 엄마는 짐 들고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의견을 내 놓는다. 알았다 하자 뛰어 갔는데 안 온다. 약간 걱정 하고 있을 때 ‘맞아~’ 하며 신이 나서 다시 뛰어 오는 걸 보고 안심했었다. 우리 맨션 옆이 동해대학이 있는데 밤에 보니 빨간 안테나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 집은 이제 절대로 못 찾는 일이란 없어진 거였다. 저녁을 먹고 각자 자기 가방을 챙기는데 나는 준비물들을 확인하며 도왔다. 내일 부터는 학교에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80몀 정도의 아이들이 있는 콩나물 반이었는데 30명도 채 안 되는 교실에서 공부를 한다니... 아이들도 나도 약간 흥분되는 저녁이었다.
1915년 5월 27일생이신 아버지와 1922년 11월 1일생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1946년 1월 4일 8시께 1942년 8월 13일 누님에 이어 둘째로 태어났다. 2년 뒤 여동생, 4년 뒤 또 여동생이 태어났고 막내 남동생과는 9살 터울이다
어릴 적 기억은 4세 때 한국은행 돌계단을 오르면서 엄마 손 잡고 명동 가던 것뿐이다. 누나는 공부를 잘해 늘 전교 1등이었는데 그 동생은 말썽꾸러기라서 늘 창피하다며 야단을 쳤었다. 학교에서 누나에 거는 기대가 크면 클수록 필자는 야단을 적게 맞고 반대로 장난은 늘어만 갔다.
드디어 누나가 50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경기여중을 들어갔다. 누나 졸업과 동시에 필자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무엇 조금만 잘못해도 엄청 꾸중을 들었다. 아마도 그동안 적립해 놓은 야단을 한꺼번에 듣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학교 주변은 피난민이 많이 살았는데 대개 남대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자제였다. 학교 끝나고 오는 길에 그들 몇이 모여 한 아이를 끌고 가 여럿이 골목에서 때리는 것을 보았다. 말썽부리고 공부는 잘못 해도 남을 해치고 약자를 괴롭히지는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뛰어들었고 우릴 아는 애들이 뒤따라 들어와 패싸움이 되어 일이 엄청 커졌다.
다음날 부모가 들어왔는데 그악스런 이북말씨에 네 일도 아닌데 싸움판에 끼었다는 요즘 말로 하면 변호사법 위반으로 징계를 먹었다. 다행히 초등학교여서 퇴학이 없어 전학으로 결정됐다.
5학년 후반 남대문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그런데 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과를 끝내고 집에 오려는데 왠지 많은 아이가 빨리빨리 교실을 빠져나가고 열 두어 명이 남더니 뒤에서 양동이를 머리에 씌우고 몰매를 놓는 것이었다.
학교 근처에 서울역 양동이라는 사창가가 있었는데 그곳 아이들이 뭉친 게 한패, 남대문 시장 뒤 고아원 아이들이 한패로 그들만의 리그가 볼만했다. 전학생이 왔는데 패싸움 때문에 전학 왔다니까 기선을 잡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망치를 하나 들고 갔다. 노는 시간에 하면 여러 명에게 당할 것 같아 공부시간 중간에 뒤에서부터 한 명씩 깼다. 당연히 학교가 난리 났다. 결국 3개월 만에 멀고도 먼 교동초등학교로 전학 갔다. 이곳은 맹모삼천지교란 말이 실감 나는 곳이었다.
한반이 72명인데 왜 이렇게 조용히 공부만 하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필자도 할 일이 없어 공부하기 시작했다.
두 달 후 6학년이 되었다. 72명이 어깨 맞대고 촘촘히 앉아 시험을 봤다. 그래도 두 달 공부 열심히 했다고 아는 문제가 많아 정말 신나게 시험 봤다. 일요일이 주일 후 시험성적표가 성적순으로 나와 뒷벽에 붙었다. 그런데 나름대로 시험도 잘 봤는데 팔저 이름이 없는 것이었다.
“선생님 제 이름은 없는데요?” “그래? 번호는 몇 번까지 있니?” 72번이요.” “그럼 맞는데 어디 보자.” 갑자기 머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야 임마 여기 있잖아. 너는 네 이름도 못 읽냐.” 아차 필자 번호 67번에 필자 이름이 있는 것이다
필자 생전 그렇게 재미있게 시험 본 경험이 없을 정도로 재밌게 봤는데 이상했다. 시험지 확인을 해보니 평균 82점인데 67등이었다. 그렇다면 점수 18점 안에 66명이 있다는 것 아닌가. 6년 내내 최고 점수 평균 91점 받아봤지만 등수에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중학교 입학해 공부 좀 하려는데 집에 큰일 생겼으니 빨리 가보라는 담임교사 말에 어리둥절해 가보니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갔다. 5남매 장남으로 7식구 돌보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우선 먹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신문 배달뿐이었다. 대학도 안 가려는데 어머니가 앞으로는 대학 졸업장 없으면 행세를 못 하니 앞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나오더라도 졸업장은 반드시 가지라고 말했다.
공부 잘하는 누나 한 사람 대학 보내기도 쉽지 않은데 필자 덜컥 시험을 봐 경희대에 턱걸이로 합격하니 어머니는 얼마나 심란했을까. 그 시절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기도 했고 불안의 나날이기도 해다.
필자는 누나가 결혼한 뒤 군대에 갔다. 훈련을 마쳐 각자 본대로 가는데 그 많은 훈련병 다 호명해 갔으나 마지막까지 혼자 남았다. 알고 보니 육군본부였다. 군대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필자 복에 육군본부라니 말도 안 됐지만 사실이었다.
근무 중 월남파병 백마부대에 차출되어 강원 화천 오음리서 훈련받았다. 만기 제대를 하고 도저히 경희대 주간을 다닐 형편이 되질 않아 건국대 야간대학으로 옮겨 낯에는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녔다. 경희대 다니며 친구들과 만든 “포도원”이란 모임은 지금도 50년 넘게 만나고 있는데 이혼, 상처, 상부, 본인 사망한 친구가 없는 모임이다.
건국대 야간은 낙원동에 위치한 96%가 직장을 다니며 주경야독하는 백전용사들이다. 지금도 매월 첫 수요일 저녁은 그들과 함께하는데 시멘트에서도 싹 튼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는 지독한 독서광들인 친구들이다. 건국대 야간 경제과를 졸업하고 학사가 되었다. 어머니 말대로 앞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그해 10월 아내와 결혼했다. 그리고 1973, 75, 78년 생 딸 2, 아들 하나 아이 셋을 낳았다. 그리고 큰애가 아들과 딸, 작은애가 딸 둘을 낳았다.
1998년 소마라는 개인회사를 만들었다. 특수방식의 사료 첨가제였다. IMF가 왔지만 사료비를 아끼려는 농가가 많아져 오히려 매출이 늘었다. 크기를 키워 주식회사로 만들고 상호도 (주)지니 바이오로 변경했다.
이후 회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사옥도 사고 직원도 늘리고 거의 수직 상승곡선이 그려졌다. 하루 운행 거리가 최고 762km. 평균 500km가 넘을 정도로 영업하고 다녔다.
그리고 영업을 위해 삼성 SM5를 샀다. 이 차는 세상에 차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내게 알려준 최초의 차였다. 차 뺀 지 2년 만에 35만km를 달렸지만 잔 고장 하나 없이 잘도 달려주었다.
그런데 2000년 구제역이 왔다, 매출이 100%에서 3%로 떨어졌다. 1년 후 재기를 노려 농가를 다니길 약 20일. 그러나 다시 구제역이 왔다. 사옥도 팔아가며 버티고 버티며 2011년까지 왔지만 역부족 결국 남에게 넘겼다.
그러는 사이 나라에서 지하철 공짜카드가 나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이가 벌써? 대한노인회에 이모작 준비에 관해 문의했다, 그런데 답이 “집에서 가까운 경로당에 가서 봉사하라”라고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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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버들 경로당에 가서 한 달을 버텼다. 경로당은 구립이라 지원금이 일 년에 360만원이 전부였다. 그래서 근처 절, 성당, 교회, 기업체를 다니며 ‘한 달에 한 번 어르신들께 점심 기부를 해 달라’며 다녔다. 많은 사람 앞에서 직접적인 필자 일도 아닌 금전적인 것을 부탁하러 다니다 보니 얼굴만 벌게 지며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40여년을 오로지 스피치 교육만 하고 있다는 ’한국언어문화원’을 찾아갔다. “지금처럼 서로 마주 보고 일대일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낚시법이라 한다면 저희는 일대 다중을 설득하는 투망법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하는 원장 말에 뿅 가서 그날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발성 연습을 하며 우리말이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6개월 하고 나니 발성이 제대로 나오게 되었다. 얼마나 배웠는지, 남 앞에 제대로 설 수 있는지 알아보려 2012년 11월 3일 전남 광주시에서 열리는 제38회 박정희대통령기 쟁탈 전국웅변대회에 그 당시 한참 신문, 방송에 오르내리는 이태석 신부의 일대기를 웅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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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특등. 그 한 번의 경험으로 연단 공포증을 단숨에 없애버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쉬지 않고 매주 월요일이면 스피치 공부하러 다니고 있으며 현재는 한국언어문화원에서 교수진에 등록되어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특등으로는 성이 차질 않았다. 2015년 11월 7일 광주에서 열리는 제41회 박정희대통령기 쟁탈 전국웅변대회 주제는 그해 대단히 가물어 식수마저 끊기는 지역까지 있어 ‘환경은 생명이다’”라는 원고로 참가해 마침내 대상을 거머쥐게 되었다.
1년 후 조선에듀케이션과 유어스테이지(주) 시니어파트너즈에서 강사 과정이 있다기에 응시해 생애 재설계를 배웠다.건강, 인식, 관계, 경제, 직업, 주거, 여가, 계획과 실천, 교수법을 배웠다. 그렇게 죽을 만큼 공부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결과는 합격. 필자가 강사가 되다니 꿈만 같았고 그 길을 계속 가고 싶었다. 2013년 3월 11일 강사자격인증서를 받았고 3월 21일 드디어 강사위촉장을 받으며 강사생활이 시작됐다.
필자는 무엇이든 빠르지 않고, 재주부릴 줄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절대 뒤로 가지는 않는다. 필자는 강사 과정을 함께 공부했던 사람 중에 대단히 해박하고 아는 것이 많았다. 공부해 보니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회 각당복지재단에서 웰다잉을 공부하라 지도해 주셔 죽음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의 의미를 알아보는 로고테라피 강의는 그 중에도 백미였다.
다모작포럼협동조합에서 “한(정수) 이사”의 준말인 ‘하니’란 애칭으로 교장 선생 일도 보람 있게 하고 있다.
필자에게 강사라는 꿈이 있었을까? 연단에서 누굴 가르친다는 게 가능했을까?
필자는 돈만으로 격을 따지는 세상에서 인성의 사각지대에 있는 그들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동안 배운 모든 과정을 녹이고 녹여 재미있는 강의를 하다 보니 지금은 공무원연금공단 변화관리 전문강사로 활동하며 직접 겪은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전환 과정'을 중장년에게 전수해주려 하고 있다.
아울러 '다가치포럼 협동조합' 전무이사로 '중장년 미래전략 강사양성'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정부 지도자 과정도 다음 달에 개설할 예정이다. 교육이 대세라는 생각은 팔저를 생각하면 당연한 길이다.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가는 길이기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레옹 (Leon, Léon)
1994년에 만든 영화이다. ‘니키타’, ‘택시’. ‘테이큰’ 시리즈를 만든 유명한 뤽베송 감독 작품이며 킬러 레옹 역에 장 르노, 가족의 복수를 꿈꾸는 소녀 마틸다 역에 나탈리 포트만이 데뷔작으로 나온다. 프랑스 영화로는 드물게 개봉 당시 1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다. 아직도 평점이 10점 만점에 가깝게 매겨져 있고 18년 만에 재개봉되어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레옹의 옆집 소녀 마틸다가 심부름 갔다 왔는데 온 가족이 몰살 당한다. 12살 마틸다는 킬러 레옹에게 도움을 청한다. 가족을 죽인 원수는 부패 마약 경찰 스탠스인데 워낙 노련한 자라서 복수의 기회를 잡기가 만만치 않다. 최후의 결전에서 마틸다는 혼자 살아 돌아가고 레옹은 장렬하게 스탠스와 함께 자폭한다.
이 영화 이후로 비슷한 작품들이 많이 쏟아졌다. 그러나 레옹만큼 강렬하게 캐릭터를 남긴 작품은 많지 않다. 레옹의 작고 동그란 검은 안경, 그리고 검은 턱수염. 비니 모자는 레옹의 강렬한 아이콘이자 캐릭터이다. 물론 마틸다의 헤어스타일 및 역시 검은 안경 등이 요즘도 그런 안경을 쓰고 나오면 “레옹” “레옹”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왜 사람들이 “레옹” “레옹”, 하는지 모른다.
나탈리 포트만은 1981년생으로 12살 마틸다 역으로 나온다. 강렬한 복수심을 표정에 담은 당찬 역을 하는데 그 후 성인이 되어 ‘블랙 스완’에 주연으로 나오며 아카데미 주연상을 거머쥔다.
레옹 역의 장 르노는 1948년생으로 모로코 국적의 배우이다. 어찌 보면 교장 선생님 스타일인데 서늘한 킬러의 눈빛을 하면 그 만큼 잘 어울리는 배우도 흔치 않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는 늘 젊고 잘 생긴 사람들이 이런 역으로 나오는데 그러다 보면 레옹처럼 강렬한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데 무리가 있다. 표정연기가 강렬한 중견 배우에서 액션 배우를 찾아야한다.
둘의 나이 차는 아버지와 딸 관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당찬 마틸다는 레옹에게 남자를 느낀다. 그러나 레옹은 역시 그가 늘 지니고 다니던 화분처럼 그녀를 아낀다. 레옹이 죽고 난 후 마틸다가 학교 한 구석에 그 화분을 심으며 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2살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초등학생인데 나타리 포트만처럼 강렬한 눈빛 연기를 할 만한 배우를 찾기가 어려울 것 같다. 예쁜 배우 위주로 뽑기 때문이다.
레옹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그동안 청부살인으로 번 돈을 마틸다에게 주라는 말을 자신에게 청부업을 맡겼던 친구에게 남긴다. 엄청난 액수일 텐데 아직 나이가 어리니 매달 와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라며 우선 100불을 준다. 레옹이 죽었는데 그 돈을 고스란히 마틸다에게 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는 총기 소지가 금지되어있기 때문에 영화처럼 민간인들인데 권총이 흔하고 자동소총이 난무하는 장면은 만들기 어렵다. 치안이 좋은 나라인 것은 다행이다. 스트레스는 이런 영화를 보며 풀면 된다.
매일 매일 옷을 입고 살고 있지만 때마다 적절히 센스있게 옷을 매칭해서 입는다는 것은 어쩌면 의상을 디자인 하는 작업보다 크게 쉽지도 않은 것 같다. 자신이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어도 젊었을 때는 무난히 소화할수 있었지만 나이들어 체형도 변하고 이미지도 변하다 보니 좋아하는 옷이라고 무작정 선호할 수는 없다. 누구나 젊었을 때는 날렵한 투피스를 입고 자신의 여성스러움에 스스로 도취해본 경험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또는 가장 씸플한 선으로 보이쉬하게 표현된 자신에게 충실하여 자유로운 영혼의 흉내를 내어본 경험들도 있을 것이다.
어느날부터인가 투피스라는 정장을 입고 거울앞에 서면 40대의 아름답게 완숙했던 여인은 온데간데 없고 거울속에 서있는 완고한 교장선생님같은 딱딱한 이미지를 보고 말없이 벗어놓고 다시 최대한 부드럽게 보이는 케쥬얼의 의상을 선택하게 된다.
의상디자이너들은 색상, 질감, 트랜드 등의 조합이 한눈에 스쳐야만 전체 실루엣을 잡을수 있고 디테일의 기술이 따라주어야지 그려졌던 디자인이 성공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옷을 입는 사람들은 바느질같은 기술과 트랜드의 감각은 디자이너 만큼 없어도 되지만 색상과 질감의 선택만은 의상 코디의 기본사항이다. 옷입기에 대해서 그런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특히 요즘같은 더운 여름에는 거울앞에서 옷을 고르거나 외출준비도 점점 귀찮아 지려고 한다.
정부는 2021년까지 2.000억원을 투자해서 의류를 비롯한 다양한 패션, 소비재 아이템을 프랑스의 대표적인 브랜드 루이비통급의 프리미엄 브랜드로 육성하여 소비재분야 상품을 수출주력산업으로 재편하겠다고 밝히면서 디자인 고급화의 한방편으로 ‘시니어 자문단’을 운영하기로 했다고 하는 뉴스를 접하고 같은 시니어로 살면서 자문단까지는 못해도 나자신에게라도 충실하자는 자각심은 가져보았다.
필자는 자신을 표현하는 옷입기나 메이크업같은 장르도 미술의 한부분같은 예술행위라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이 포인트를 두는 부분이 품위나 성숙함 또는 명랑하거나 밝음등등의 이미지가 있겠지만 자신이 생각하고 살아왔던 이미지가 숨길수 없이 표현된다는 것이 시니어의 특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니어의 나이에는 모든 작은 움직임이나 선택에도 자신의 철학이 표현된다는 진리를 잊고 살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의 핵심이면서 최고의 거장인 파블로 피카소의 말을 잠깐 컨닝해야할 것 같다. 피카소는 “예술이라는 행위는 불필요한 것들을 최대한 없애는 작업”이라고 규정지었다. 이 이론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시키는가는 자신만의 몫이라고 생각하면서 비전문가의 생각을 이쯤에서 접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