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흐린 겨울 한낮. 집 앞 황토 구릉지 쪽에서 불어온 맵찬 바람이 나무들의 몸을 흔든다. 이미 누드로 늘어선 초목들은 더 벗을 것도 떨굴 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삭풍을 견딘다. 좌정처럼 묵연하다. 봄이 오기까지, 화려한 꽃들을 피우기까지 나무들이 어떻게 침잠하는지를 알게 하는 겨울 정원. 봄이면 화들짝 깨어날 테지.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꽃들이 제전을 펼친다지. 6년여를 공들인 정원이다.
정원의 임자는 이경주(61) 씨. 그녀는 귀촌 이후 거의 모든 날들을 정원 가꾸기에 매달렸다. 애초 근사한 정원을 만들고 싶어 귀촌했다. 나무를, 꽃을, 자연을 가꾸고 배우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꿈은 그녀의 오래된 숙원이었다. 하지만 자꾸 미루어야 했다. 도시를 벗어나기 쉽지 않아서였다. 박인환의 시구였던가. ‘인생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것.’ 일과 관계의 고리에 코 꿰어 진부한 일상에 안주하기 십상인 게 삶이다. 그러나 꿈꾸지 않고서도 숨 쉴 수 있는 방법이 있던가. 저마다 오아시스 하나를 내심에 담고 사는 게 아니던가. 이 씨는 시골에 살며 정원을 맘껏 가꾸는 일로 티끌세상을 사뿐하게 넘어서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녀에겐 롤 모델이 있다. 미국의 동화작가 타샤 튜더. ‘타샤의 정원’이라는 책으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 타샤는 100여 권의 동화책을 낸 작가이자 지상 낙원과도 같은 정원을 창조한 원예가다. 텃밭을 일궈 거둔 채소와 과일로 특별한 밥상을 차린 요리의 대가이며, 어지간한 생필품은 손수 만들어 조달한 자연주의자였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 즈음, 내가 나의 삶을 진정 사랑하며 살아왔던가 하는 회의가 몰려들 즈음, 이 씨는 타샤의 삶과 책에 함빡 필이 꽂혔다. 해서, 타샤의 삶을 닮기로 했다. 타샤가 그랬듯이, 50대 중반에 이르러 시골로 이주했다. 전남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한 그녀는 서양화가로, 미술교사로 살아왔었다. 귀촌을 통해 정원 가꾸기에 일단 신명을 바친 뒤 그림에도 치열하게 몰두하겠다는 게 그녀의 스케줄.
“지난 30대부터 50대까지의 인생이 어쩌면 허송세월이었을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밀려들었어요. 물론 제가 맡았던 일엔 늘 최선을 다했죠. 리더로 뛰기도 했어요. 찬사도 자주 들었어요. 하지만 한 분야를 깊이 파 이름을 날린다거나 부를 누릴 인물은 아니었죠. 나는 도대체 뭘 했지? 이게 진정 나를 위한 삶이었나? 이젠 바꾸자, 육십이 다 됐지만 뭐 늦은 건 아니잖아? 이제라도 한바탕 근사하게 살아보는 거야! 그런 생각, 그런 작심으로 귀촌했어요.”
옳다구나! 내 삶의 행보에 회의가 있고서야 어찌 행복하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늙고 병들어 죽음이라는 놈과 턱 조우하기 이전에 정말 내가 바랐던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어중간하게 늙은 이제라도 가슴 쿵덕거리는 일에 나를 거침없이 쏟아 붓는 일은 가상한 미담에 속한다.
그녀는 복스럽게도 귀촌 장소를 물색하는 수고는 면제받았다. 유년기에 병아리처럼 뛰놀던 기억이 서린 외갓집에 자리를 잡았으니까. 전북 김제시 백구면의 농촌이다. 이 씨의 외할아버지는 근현대 불교미술의 거장 일섭 스님(1900~1975). 일섭은 자신의 고향인 이곳 백구면에 태고종 사찰 부용사를 창건했다. 현재 부용사의 주지는 이경주 씨 남편인 지관 스님이다. 전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직을 그만두고 돌연 삭발 출가, 아내의 외가 쪽 개인사찰 주지 소임을 맡은 거다. 기혼자가 어이 스님을? 의아해할 수 있지만, 태고종은 승려의 혼인을 허용한다.
남편은 태고종 승려
교수에서 승려로 신분이 바뀐 남편의 뒤를 따라 이경주 씨가 부용사에 딸린 외갓집으로 귀촌한 것은 지난 2012년의 일.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부부가 차례로 오랜 삶터였던 광주를 벗어났다. 주야로 도 닦는 남편과 사는 일은 수월할까?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라지? 남편에게 부처님 대접을 받아 날마다 평강하신가?
“남편이나 저나 서로 원했던 삶을 산다는 데에 아무런 불만이나 불편이 없어요. 선(禪)을 추구하는 남편, 자연과의 교감을 원하는 나. 서로 다른 길이지만 각자가 바랐던 길을 간다는 게 만족스러워요. 소소한 언쟁은 가끔 벌어지지만 피차 적당한 침묵으로 충돌을 피하죠. 새로운 무기랄까, 그런 건 생겼어요. 아니, 스님이라는 사람이 그래서야 되겠어요? 그리 밀어붙이면 꼼짝 못하니까.(웃음)”
“선에 마음을 둔 스님은 속세의 뜻을 이미 접었을 테고, 자연으로 쏠린 이 선생의 마음도 비슷한 풍경일 것 같고, 그렇다면 부부가 공히 수행자처럼 사는 거예요? 부군을 따라 덩달아 출가할 생각을 하진 않았나요?”
“살아가는 자체가 수행이라는 게 남편의 생각입니다. 사실 자주 참아야 하고, 자주 져줘야 하는 결혼생활만 하더라도 치열한 수행일 수 있겠죠. 그런 기본 인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남편과 저의 길은 달라요. 각자의 개인적인 삶이니까. 출가?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하질 않았어요. 그럴 만한 인재가 되질 못해서.”
“인재? 경 읽고, 우렁차게 목탁 치고, 얌전히 좌선할 힘만 있으면 되는 거 아녜요? 발심(發心)이 선행한다면.”
“반듯한 생활에 자신이 없어서죠. 제가 원래 너그럽고 원만하고 순한 천성의 소유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분방한 성향이에요. 매우 온순해 보이지만 삐딱한 기질도 다분해요. 하지 말라는 건 오히려 더 나서서 해보고서야, 아 그렇구나, 그렇게 직접 느끼고 깨닫는 걸 좋아해요. 그림만 하더라도 대담하고 열정적인 작풍을 좋아하고, 뭔가 격한 기복과 강약 리듬이 있는 생활을 선호했어요.”
“교직 역시 적성에 맞질 않았겠어요. 범생이들을 길러내자면 교사 자신부터 범생이 시늉을 해야 할 테니까.”
“교직을 일찍 그만뒀죠. 저와 어울리질 않아서. 교사란 보편적이고 모범적이고 규칙적인 생활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데 저는 그런 틀에 갇히는 게 싫었어요. 내 개성과 성질을 죽여야 하는 공기가 싫었던 거죠.”
미술교사직에서 물러난 그녀는 요상하게도 정당 활동에 뛰어들었다. 처신도 운신도 교묘하게, 머리도 여우처럼 굴려야 할 정치판. 그 북새판에 가담해 실력을 발휘, 모 정당의 여성부장까지 맡았더란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뒷전에서 구경만 하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제 와 날카롭게 돌아보면 그마저 자신의 진정한 일은 아니었다는 것. 실수나 실패의 기록은 드물고 일련의 성취가 뚜렷했지만, 내가 나를 정말 기쁘게 하는 종목은 아니었다는 것.
“마음은 점점 자연으로 흘러갔어요. 원래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성향의 여자라는 걸 깨달았던 거예요. 사람들 속에서보다 자연 속에서 나 자신의 본성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사람과의 대화보다 자연과의 대화가 더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거죠. 사소한 풀 한 포기를 바라보며 풀꽃아, 너는 왜 그렇게 예쁘니? 이렇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감성, 맑은 정서, 그런 게 제 본성에 더 가깝다는 걸 알았던 거예요. 이와 같은 자신에 대한 재발견이 귀촌을 추동했죠. 시골에서 정원을 가꾸며 스스로 정직하게 사는 게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길이라 판단했어요. 그게 교직에 있었던 사람의 도리라는 생각도 했고.”
수굿하고 정겨운 정원의 꽃 잔치
이경주 씨의 정원엔 이제 알아주는 눈들, 일부러 찾아와 감상하는 객들이 많단다. 6년여 동안 땀 흘린 덕이다. 애면글면, 그녀는 온몸을 써 노동을 했다지. 온갖 꽃씨를 뿌리고, 갖가지 나무를 심고, 제초를 하고, 거름을 주고, 전지를 하고,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너른 마당을 초목으로 채워나갔다. 정원 전면엔 백련 방죽을 조성했고, 장미나무 터널을 거쳐 연지를 한 바퀴 휘돌 수 있는 산책로를 마련해뒀다.
담장이라는 게 일체 없으니 저편 황토 구릉지와 한달음에 이어지는 조망이 시원하다. 그녀는 인위적 조경을 극도로 배격했다. 최대치의 자연미를 구현한다는 미학을 염두에 두었다. 인위가 만들어내는 허영과 허식에서 벗어나 무위로 돌아가고자 하는 내심을 담았을 수도 있겠지.
“어릴 때 보았던 시골의 꽃 풍경을 재현하고 싶었어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그 곱고 애틋한 경치를 말이죠. 사실 인위적 치장을 할 돈도 없었어요. 비싼 조경수나 조경석을 사들일 형편이 아니었죠. 억척스럽게 모든 걸 자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어요. 손수 정원용 도예 작품들을 만들어 슬쩍슬쩍 꽃밭에 배치했고, 무너진 폐가에 뒹구는 돌이나 기왓장, 인삼밭가에 버려진 폐목을 수시로 손수레로 날라 조경 소재로 재활용했어요.”
자로 잰 듯 치밀하게 꾸민 인공 정원이나, 규모로 압도하는 수목원과 달리 이 씨의 정원은 스산한 이 겨울에 보더라도 각별히 아기자기하고 수굿하고 정겹다. 꽃들이 연달아 피어나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방문자들이 즐비하단다. 그녀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꽃 잔치에 불러들일 작정이다. 내친 김에 꽃과 자연, 문화와 예술이 남실거리는 공간으로 진급시킬 계획이다. ‘야가(野歌)문화예술촌’이라는 이름도 이미 지어두었다. 뜻을 같이 하는 도시의 지인들을 인근에 귀촌시켜 함께 거사를 도모할 작정이다. 생활도 낭만도 꿈도 도시에서보다 자연의 원초적 숨결이 뜨거운 시골에서 그 성취 가능성이 한층 높다는 게 이 씨의 지론. 그녀는 자연의 그 무엇에 매료를 느낄까?
“자연 안에 사는 생명들의 자유스러움이랄까, 태연한 생태와 순환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무상의 혜택이죠. 사람을 순하게 만들고, 안심을 부여해요. 말없는 초목들과의 대화는 얼마나 값진지요. 그건 사람들과의 영혼 없는 대화보다 진실하고 절실해요. 결국은 자기 성찰에 이르게 되죠.”
“나름의 파란만장을 겪으며 반백 년 이상을 산 사람들의 배후엔 저마다의 상처가 아른거리죠. 자기성찰이 치유의 길일까?”
“일테면, 불가에선 남들에게 미소를 건네는 것만으로도 보시를 했다 보는데요, 그러나 그게 쉽지가 않아요. 자연 속에 살다 보면 어느 정도는 그게 자연스럽게 됩니다. 귀촌의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녜요.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다질 수 있고, 생활비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고, 영감이 솟구치고, 성숙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으니까. 도시에서 부대끼며 허겁지겁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뭐람.”
도시라고 악조건의 수렁일 리가. 그러나 자연에 삶의 한 자락을 슬며시 걸치고 살아가는 귀촌생활이란 자주 마음을 돌보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겠지. 삶의 고통을 다루는 기술엔 늘 초심자에 불과한 우리에게, 자연은 성찰의 눈을 달아주기도 하니까.
올해 주목해야 할 사회 현상 중 하나는 은퇴 세대의 폭발이다. 우리 사회에서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 전쟁이 끝난 이후 1955년생부터 정부의 출산억제정책이 본격화한 1963년까지 9년간 태어난 이들이다. 정부의 인구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의 숫자는 약 711만 명으로 전체 인구수의 14.3%에 달한다. 이들이 한꺼번에 은퇴자 인력시장으로 몰리면서 평생 겪었던 경쟁 속으로 다시 뛰어들게 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니어에게 제2, 제3의 직업을 찾는 것 역시 시급한 과제가 됐다. 새롭게 떠오른 무술년 새해 우리는 새로운 직업을 위해 어떤 분야를 주목해야 할까.
‘세대융합창업’ 안 되면 함께하라
최근 정부가 내놓은 창업지원정책의 핵심을 요약하면 ‘세대융합창업’으로 귀결된다. 세대융합창업은 경험이나 자본력은 있지만 창업의 핵심인 아이디어가 부족하고 첨단기술에 취약한 시니어와 새로운 기술 분야에 능숙하고 여러 가지 영감이나 발상은 많지만 맨몸뿐인 청년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시너지를 얻는 창업 형태를 의미한다.
정부 입장에선 은퇴한 시니어의 일자리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고, 창업으로 몰고 가기엔 창업 성공률이 높지 않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중소기업청이 2003년부터 2009년까지의 자료를 조사한 결과 종업원 5인 미만의 영세사업 창업의 생존율은 6년 차에 32%까지 떨어졌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세대융합창업.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젊은 창업자들에게 마케팅이나 재무관리 등 취약 부문에 대한 은퇴자들의 멘토링이 이미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이를 위한 정부의 태도는 적극적이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지난해 11월 중·장년과 청년의 매칭창업을 지원하는 세대융합창업 캠퍼스를 전국 6개 권역에 신설했다. 이를 통해 선정된 창업 팀에게는 총사업비의 70% 이내에서 최대 1억 원까지 마케팅 등의 사업비와 창업 공간이 무상 제공된다.
경험자들은 젊은 세대를 수평적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것이 창업 성공률에 많은 영향을 준다고 조언한다. 지난 12월 리스타트 콘퍼런스에서 발표한 인코어드테크놀로지스 최종웅 대표는 “글로벌 스타트업을 시작하면서 공동 창업한 젊은 파트너의 조력이 컸다”며 “구성원을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실력”이라고 강조했다.
성장동력 여전한 ‘4차 산업혁명’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한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분야는 올해도 여전한 인기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 특히 3D 프린터나 드론의 경우 올 한 해 대중화를 통해 폭발적 성장세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4차산업 분야는 주요 기술을 중심으로 성장하다 보니 시니어들에게 다소 어려운 것이 사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직접 기술개발에 참여하지 않아도, 본인이 평생 해온 분야를 바탕으로 대중화한 솔루션을 이용한다면 4차산업 분야에서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를 들어 패션디자인이나 봉제업에 종사하던 은퇴자가 3D 프린터를 통해 액세서리를 만들거나, 은퇴 건설업자가 드론으로 건축물 균열 검사 등을 하는 식이다.
공유경제 역시 마찬가지. 부동산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시간적 여유가 필요한 공유 경제는 시니어에게 안성맞춤인 분야다. 숙박 공유 대표 기업 에어비앤비 조재은 팀장은 “기존 숙박공유에 참여하는 시니어 호스트의 증가는 지속되고 있는 상태”라 설명하면서 “가이드의 경험과 생활을 공유하는 ‘트립’ 서비스에도 그 특성상 시니어 가이드의 참여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령화 사회 위한 ‘건강과 음식’
고령화와 관련한 건강, 음식에 관한 시장은 고령화 시대에 가장 유망한 분야 중 하나다. 고령자를 위한 건강음식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틈새를 공략할 여지는 충분하다.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슬로푸드에 대한 요구와 기능성 식품의 대중화도 이에 한몫하고 있다.
실제로 액티브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이러한 경향이 잘 타나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한국리서치와 2016년 액티브 시니어 70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액티브 시니어들은 비싸더라도 유기농·친환경 제품을 사 먹고(26.9%), 몸에 안 좋은 음식은 먹지 않으며(39.0%), 음식 성분을 따지며 가려 먹는다(42.3%)고 답했다. 비싸더라도 분위기 있는 음식점을 선호한다는 응답률도 31.3%나 됐다.
특히 유가공이나 농산물의 가공제품 상품화는 ‘귀촌’에 맞물려 은퇴자들의 블루오션으로 손꼽힌다. 수원시 창업지원센터 최봉욱 센터장은 “올해 시니어들에게 유망한 분야는 4차산업과 함께 건강이나 바이오 관련 분야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고령화로 인한 사회 변화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인식이 바뀌면 시장이 열린다 ‘웰다잉’
우리 사회의 죽음에 관한 인식도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수동적으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후 벌어질 일들을 미리 준비하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달 시범사업이 끝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관련한 부분. 일반인은 관여하기 어려운 의료 부분에까지 고인의 의지가 반영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죽음학 혹은 죽음준비학의 대중화 역시 우리 사회의 ‘죽음 준비’를 시기적으로 앞당기고 방식도 다양화하는 초석이 됐다.
웰다잉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소비시장을 만들어냈다. 수의나 봉안당의 사전 준비와 같은 전통적인 분야 외에 엔딩노트 작성, 유품 정리, 디지털 유산의 상속과 관리, 애완동물 신탁과 같은 새로운 서비스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으로 손꼽히는 노령화 속도에 비해, 국내 웰다잉 관련 시장의 다양성이나 규모는 아직 부족한 형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국내 웰다잉 관련 산업이 종활(終活)로 대표되는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성장 잠재력이 풍부하다고 전망한다.
인구절벽 속 귀촌, ‘6차산업’ 노려라
귀농과 귀산촌, 귀어촌을 포함한 귀촌은 ‘편의점·커피숍·통닭집 창업’만큼이나 시니어에게 노후를 보내는 가장 흔한 선택지 중 하나였다. 새로운 직업을 찾기보다는 휴양이나 도피의 개념이 컸기 때문에 여러 부작용이 나타났다.
가장 큰 문제는 귀촌 지역 원주민들과의 갈등. 전문가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귀촌인은 조력자나 협력자이기보다는 ‘투자 여력 충분한 동일 업종의 경쟁자’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마을 일이나 지역 산업에 보탬이 되지 못하면,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으로 자리 잡게 돼 귀촌 생활을 지속하기 어려워진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귀촌을 할 때는 지역 특산품이나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상품화를 진행하는 ‘6차산업’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지역 산림조합중앙회 관계자는 “6차산업은 농작물을 경작하는 1차산업과 이를 가공하는 2차산업, 서비스업이 중심이 되는 3차산업을 결합한 형태의 산업을 의미한다”면서 “지역민들에게 귀촌인이 환영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어려운 점을 해결하고, 사업화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또 일각에서는 인구절벽으로 고민하고 있는 지자체를 귀촌 지역으로 노리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한다. 인구절벽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자체의 경우 작목반이나 어촌계 가입비 무료, 거주지 지원 등 여러 혜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시골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시골에 거처를 마련할 실력이 여의치 않은가? 빈손인가? 걱정 마시라. 찾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긴다. 일테면, 재각(齋閣)지기로 들어앉으면 된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재실, 재각, 고택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임대료도 의무적 노역도 거의 없는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다. 물론 소정의 면접은 치러야겠지만 당신이 남파된 간첩이 아닌 한 딱지맞을 일은 없다. 폐교를 빌려 쓰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서양화가 원덕식(46)씨는 산골 폐교를 빌려 살고 있다. 귀촌한 지 어언 6년이 지났다. 그녀 곁엔 동화작가 노정옥(49)씨가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이들은 서울에서 뜨거운 연애를 하다 부부 사이로 발전했다. 결혼식은 이곳 폐교 운동장에서 치렀다지. 귀촌의 첫 장을 혼례로 기록한 셈이다.
원씨 내외는 별반 손에 쥔 것이 없는 채로 산골에 들어왔다. 맨몸으로 신접을 차렸다. 온몸을 다해 귀촌 초기를 개척했다. 수천 평 부지에 들어앉은 낡은 폐교를 부부 단둘이 덤벼들어 단장을 하길 날마다 반복했다. 첫해 엄동엔 난방이 안 돼 냉장고보다 찬 사택에서 덜덜 떨며 밤잠을 자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를 덜기 위해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선잠을 잤다는 게 아닌가. 도깨비 나올 듯 뒤숭숭한 교사를 고치고 때우고 꾸미고 칠하는 일도 고스란히 부부의 몫이었다. 강철 같은 기세로 운동장을 뒤덮고 우르르 들솟는 풀들을 뽑는 일은 신역이 자심한 반면 좀체 표가 나질 않더란다. 이래저래 고역에 고난에 고심이 첩첩 겹쳤겠지. 신혼의 달콤한 훈김이 시련을 덜어줬을 법하지만,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추사도 아닌 것을, 어쩌자고 으스스한 폐교에 둥지를 틀었단 말인가? 원씨의 얘길 들어볼까.
“시골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처음엔 많이 염려했어요. 과연 잘 살 수 있을지, 견뎌낼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그런 근심에 사로잡힐 겨를조차 없이 온갖 일에 매달려야 했어요.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시설을 고치거나 운동장의 풀을 뽑아내는 일들이 화급했으니까. 몸으로 부닥쳐야만 하는 그런 일들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그러나 잘 견디며 지내왔어요.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거나 철없는 귀촌일 수 있겠지만 저희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폐교의 너른 교실 공간을 손질해 미술 작업실로 쓰자, 그것으로 작품에만 매진할 여건을 조성하자는 게 귀촌 동기였거든요.”
글쟁이에겐 골방에 컴퓨터 하나면 그만이지만, 화업(畫業)엔 널찍한 공간 확보가 필수다. 서울의 임대료는 비싸다. 화가들이 그래서 흔히들 교외나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폐교를 임대해 활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수년 안짝에 철수하는 사례도 흔하다. 원씨 내외도 초기 한때엔 서울로 되돌아가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했더란다. 주거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고, 덩치 큰 폐교의 안팎을 보수하는 일이 버거워서였다. 그러나 서서히 자리가 잡혀 이젠 정착에 이르렀다.
부부는 미친 듯이 창작에 진력할 작정이었다.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치열하게 하자는 게 귀촌의 목적이자 초야에 건 약속이었던 것. 그러나 다소 길이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을 끌어들인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을 펼쳤다. 관이 행하는 마을 사업 공모전에 응모,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부부는 마을 안길에 미술 조형물을 설치했다. 교사 안에 소규모의 농업박물관도 개설했다. 주력 사업은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기나 시 쓰기, 도자기 만들기 같은 걸 가르쳐 전시회를 여는 일이다. 반응도 성과도 좋았다지.
소외된 촌로들을 공방으로 끌어들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노인들. 평생을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살아온 농부들. 그들에게 글과 그림이란 생판 생소한 딴 세상의 물건이기 십상이다. 실상이 그렇지만 노인들은 손수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까지 여러 차례 흐뭇하게 치렀다. 도시에 번성한 문화 예술은 좀체 시골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원씨 부부의 행장은 이 점에서 가상하다. 소외된 촌로들의 고즈넉한 삶을, 파묻힌 기층문화를 수면 위로 돋우는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눈여길 건 노인들을 모아들인 원씨 부부의 출중한 사교 능력. 그들은 배타적이거나 고독한 노인들을 폐교의 공방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시골 어머니들의 삶은 참 고달파요. 겨울 한철을 빼곤 늘 농사일에 매여 살죠. 새벽에 들에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귀가하는 일상을 지켜보면 안쓰러워요. 얼굴엔 주름투성이이고, 손발은 갈퀴처럼 거칠고, 벌레에 물린 자국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그러면서도 강인하고 씩씩하고요, 가슴 찡해지는 모습이죠. 그런 어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주 접촉하고 수시로 스킨십을 하고 그랬어요.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 옥희씨! 순자씨! 그렇게 이름도 불러드렸고요. 스스럼없이 다가가 다정한 관계를 맺었어요.”
“예술을 한다고 외돌아 앉아 오불관언식 처세를 했다면 미운털이 박혀도 야무지게 박혔겠죠?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만 참하게 잘해도 기특하다는 평이 돌아오는 게 시골이죠. 툭하면 벌어지는 마을 술판에서의 호출에도 가급적 득달같이 달려가는 게 현명한 처신이고 말이죠.”
“술자리 참석은 남편의 전공 분야입니다(웃음). 마을의 갖가지 경조사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녔어요. 내 부모 대하듯 어르신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버릇도 남편의 처신에 배었죠. 괜한 참견이나 잔소리에도 토를 달기는커녕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덕분에 소통이 쉬웠던 것 같아요. 음, 복된 관계랄까, 일찌감치 저희는 자식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이런 정황 하에 마을공동체사업을 원활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골의 부당한 텃세를 운운하지만 저희는 그런 조짐조차 느끼질 못하고 지냈어요. 텃세란 귀촌자의 처신 여하에 달린 문제이지 않겠어요?”
“세태란 야박해서 내 안의 이기적 유전자를 발동하지 않고선 남에게 당하거나 밀리기 십상이죠. 날이면 날마나 피 튀기는 복싱이 벌어지는 게 서울이라는 사각 링일 뿐일까? 시골의 풍정은 안도해도 좋을 만큼 평온한 거예요?”
“도시의 인간관계란 대체로 메마른 계산 중심으로 흘러요. 시골은 좀 달랐어요. 그 머릿속에 계산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태도엔 순응이랄까, 순수랄까, 그런 기본 정서가 농후하게 서려 있어요. 그러나 내면엔 아픔, 슬픔, 상처가 가득 고여 있죠. 개인의 꿈은 접고, 고단한 시골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억지로 살아온 한평생에 관한 한(恨)! 할머니들의 이 억압된 꿈과 깊은 한을 주제로 한 그림 작업, 요즘 저는 거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원씨는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화가는 아니다.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여자도 아니렷다. 그림을 평생의 본분사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 남김없이 열정과 깡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일이겠지만, 미술을 위해 귀촌을 결행했으니 그녀 내부엔 나름 큼직한 사이즈의 포부가 들어 있을 테지. 최근엔 해외 아트페어에서 할머니들의 고달픈 노년에 서럽게 잔존하는 여성성을 주제로 한 작품 몇 점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의미심장한 신호로 읽는다. 비로소 작풍의 방향을 찾았다는 안도감에서다. 아울러 이를 귀촌의 선물로 간주한다. 마을 할머니들과의 애정에 찬 교제의 산물로 여긴다.
상처에서도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자연으로부터도 많은 걸 얻었다. 다채로운 걸 느끼고 배우고 담았다. 자연이란 흔연한 사랑을 닮아 조건 없이 준다.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강좌를 펼치며 음성을 내지 않고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수 있으며, 물길을 만나면 그 맑음을 배울 수 있다. 소나무에서는 그 푸름을, 달에서는 그 밝음을 배울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삶에도 남모를 부침이 있고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법. 갈등과 괴로움 없이 삶을 건널 수 있던가. 마음이 쑥대밭처럼 뒤엉킬 때면 원씨는 자연 풍경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귀촌 생활자의 특권이라는 것.
“사람을 보듬어주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도시에선 좀체 만나기 어려운 새소리, 물소리, 달과 별, 숲과 적막, 이런 것들이 들끓던 고민들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는 거예요. 작업이나 일로 힘들었던 하루가 저문 깜깜한 밤에 운동장에 나가면 허공에 모인 별들이 빛을 뿜어요. 초롱초롱 빛나는 그 별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피로가 가시고 근심이 달아나요. 남편과 다투고 난 뒤의 상심도 씻겨나가죠.”
“자주 다투세요? 이는 우문이리. 밑바닥까지 드러난 감정 충돌이 잦은 게 부부 사이라서. 결혼 자체가 짐이나 멍에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왜들 결혼을 할까(웃음).”
“소소한 다툼이 생기곤 해요. 이건 어쩌면 긍정할 만한 기회이기도 해요. 서로 간에 미처 몰랐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오해에서 벗어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고요.”
고적한 시골에서 날마다 24시간 부부가 붙어 사는 삶엔 창작만큼이나 각별한 재능이나 내공이 요구될 수도 있겠지. 사람이란 천성적으로 ‘삐딱이’가 아니던가. 본능의 밑뿌리인 에고이즘과 ‘귀차니즘’이 불러들이는 불협화음으로 소소한 상처를 주고받는 게 부부 사이 아니던가. 그러나 상처도 인간 내부의 자연이다. 상처에서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허황한 욕망과 소비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살았다면 부부 관계가 한결 단조로웠을 것 같아요. 귀촌 덕분에 남편의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또는 성숙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죠.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해요. 욱하는 성질은 좀 있지만 독한 게 없어요. 요리도 잘하고, 늘 내 편이라는 게 고맙고 좋아요. 자연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걸 남편에게서 느낍니다.”
“두 분, 가진 것 없이 귀촌을 해 온몸을 쓰는 노역으로 폐교를 가꿔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소박하고 간소한 살림, 수굿한 태도, 긍정심, 이런 것들이 보기에 좋아요. 소유에 대한 예찬과 경쟁이 극에 달한 이 세속에서 그렇게 순하게 살기란 쉬운 게 아니라서.”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삶,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걸 귀촌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요. 점점 더 미니멀한 삶으로 가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고 있어요. 훗날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여러모로 여전히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이 많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이 과정엔 회의가 없습니다.”
원씨의 언어는 정밀하거나 기민한 맛을 결여한 대신 유연하고 온순해 평화롭다. 아둔한 나의 머리엔 잡념이 술렁인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할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로 농촌의 하루는 일의 연속이다, 논일로는 벼를 베고 말려야하고 수매에 대비해야한다. 밭일로는 들깨나 참깨를 털어야 하고 말려야 한다. 고추와 고춧잎을 마지막 수확하고 고추 대를 뽑아 묶고 말린다. 콩을 뽑아 말린 후 도리깨질로 때려서 콩깍지에서 콩을 뽑아내야 한다. 마늘 심을 준비를 위해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 결혼식은 봄가을에 밀집해 있다 보니 이웃이나 친척 결혼식 참석도 해야 한다. 결혼식은 모두가 대도시에서 이루어지니 하루가 몽땅 소비된다. 얼마나 바쁘면 '가을의 농촌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가을의 농촌사정을 말해준다.
칠순의 중턱을 넘어서는 처남과 처남댁이 농사일을 도와달라고 SOS를 보내왔다. 특히 5백 평에 심은 고들빼기 수확에 힘을 보태달라는 전화다. 마음속으로 귀농을 꿈꾸고 있는 입장이니 체험삼아 일을 해주기로 했다.
고들빼기는 잎과 뿌리 전체를 먹는 채소다. 뿌리를 다치지 않게 수확하기위해서는 쇠스랑( 땅을 파헤쳐 고르거나 두엄, 풀 무덤 따위를 쳐내는 데 쓰는 갈퀴 모양의 농기구. 쇠로 서너 개의 발을 만들고 자루를 박아 만든다.)으로 고들빼기 전체를 떠서 힘을 가해 떨어트리면 흙과 고들빼기 뿌리가 분리된다. 이후 고들빼기 잔뿌리에 묻어 있는 흙을 털고 누렇게 변색된 떡잎을 떼어내면서 다듬는데 모두가 사람손이다. 4kg 들이 종이 박스에 차곡차곡 잘 담아서 농산물 경매시장에 내어 놓기 위해 자동차에 실어주면 그다음부터는 경매를 거쳐 팔려나가고 돈은 통장으로 입금되는 구조다.
쇠스랑을 이용하여 삽질 같은 작업을 하기 때문에 오래하면 허리가 아프다. 쪼그리고 앉아서 고들빼기를 다듬다보면 허벅지 근육이 욱신거리고 아프다. 오랜만에 농사일을 하면 안 쓰던 근육을 쓰기 때문에 고통이 더 심하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못한다. 칠순의 중턱을 넘긴 분들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해 나가는데 하루 일하면서 엄살 부리는 것 같아 참고 일한다.
게으른 농부 밭고랑만 세고 있다고 줄지 않는 고들빼기 밭만 눈으로 가늠하고 셈하고 있다. 일당 일군을 사면 새참을 줘야하지만 식구들끼리 하면 시간절약을 위해 빵이나 물만 새참으로 먹으며 일한다. 오후 5시경 야간 경매장으로 가는 차량이 떠나야하기에 4시 반에 일을 마쳤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일한 고들빼기 상자를 모두 들어서 길 밖으로 옮겨서 차에 올려 줘야 한다. 오늘만 120박스를 수확했다.
저녁은 고생들 했다고 삼겹살 파티를 했다. 금방 뜯어온 상추에 살짝 데쳐 무친 고들빼기가 밥상에 올라왔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밥맛이 좋다. 저녁을 먹고 이웃집에 선물할 고들빼기 두 박스를 얻어 차에 싣고 돌아왔다. 농산물 선물이 돈으로 따지면 1~2만원에 불과하지만 서로 부담이 없어서 좋다.
몸이 참 피곤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다 아프다. 여기저기가 쑤시고 걸음 걷는 것이 어기적거린다. 삭신이 다 아픈 것 이 이삼일은 걸려야 완전히 몸이 회복할 것 같다. 이런 일은 농촌에서는 일상사다. 매일을 이렇게 힘들게 농사짓는 농촌사람들이 있어서 우리는 먹을거리를 얻는다. 단 하루지만 바쁜 농촌 일손 돕기를 했다고 생각하니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뿌듯하다. 하지만 귀농해서 이런 일을 계속할 수 있을는지 걱정이 태산이다.
나무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재 중 하나. 특히 산으로 둘러싸여 살아온 한국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일까. 시니어가 은퇴 후 원하는 새로운 직업이나 취미를 꼽을 때 단골로 선택되는 분야가 바로 목공예다. 뚝딱뚝딱 제품을 만들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고, 완성된 제품을 보며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배우자나 가족이 만들어진 가구를 반겨준다면 이보다 즐거울 순 없을 것. 또 솜씨가 좋다면 팔아 생활비에 보태는 것까지 기대할 수 있다.
목수는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 긴 역사로 인해 현대에 들어와서 목수가 담당하는 영역은 방대해지고 기능도 세분화됐다. 국내에는 건설현장에서 콘크리트 형틀을 담당하는 형틀목수와 목조주택을 짓는 목골조목수, 한국의 전통가옥을 만드는 한옥목수 등으로 구분하고, 인테리어를 담당하는 내장목수와 선박목수, 가구목수 등도 있다.
목공 혹은 목공예는 정의에 따라 나무로 공예품을 만드는 작업에서 건축까지 그 분야가 방대하다. 하지만 나무로 가구나 소품을 제작하는 분야나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교육기관, 시간, 비용 천차만별
목공예가 시니어에게 각광받는 이유는 다양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자연이나 귀농, 귀촌의 대체제 역할도 한다. 나무를 직접 만들고 다듬으며 자연을 손으로 느끼기도 하고, 현실적으로는 귀촌 시 반드시 알아야 할 기술로도 꼽힌다.
당장 생활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매력 중 하나. 간단한 식기에서 쟁반, 식탁에 이르기까지 만들지 못하는 것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다.
상품을 만들 수 있을 정도까지 숙련이 되면 직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실제로 목공예 교육기관을 살펴보면 수업에 참여하는 시니어가 의외로 많다.
한 교육기관 관계자는 “시니어의 경우 당장 직업으로 연결짓기보다 노후생활을 위한 준비나 취미활동을 겸한 경우가 많다”고 설명하며 “절박함 대신 느긋함을 갖추고 있어, 오히려 젊은 수강생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솜씨도 좋은 편”이라고 말한다.
목공예를 배울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목공예 학원부터, 지자체, 목공방, 기술교육원, 프랜차이즈까지 활동 중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집 근처 목공방을 찾는 것. 상당수 목공방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자체 교육과정을 운영 중에 있다. 또 일부 협회나 단체에 가입되어 있는 목공방의 경우 자격증반을 운영하기도 한다.
별도의 교육과정 없이 운영되는 목공방에서도 배울 수 있다. 상품 제작을 겸한 목공방에선 수업료 겸 시설 이용료를 합한 금액을 지불하면 간단한 가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고, 일정 기간 동안 목공방 장비 등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기술교육원 교육과정은 일반 학원 프로그램과 동일하다. 교육시간은 기관에 따라 제각각이다. 간단한 소품이나 책꽂이를 만드는 과정은 하루나 이틀 안에 끝나기도 하지만 자격증 취득과정은 최소 이수 교육시간이 40시간정도다. 기간에 따른 교육비용도 천차만별이다. 하루짜리 체험학습은 1만원 내외이지만 창업반이나 자격증 과정은 수백만원 이상인 경우도 있다.
목공예 관련 자격증은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운영하는 국가자격증인 목공예기능사가 있고, 민간자격증으로는 목공지도사, 목공DIY교육사 등이 있다. 업계 관계자는 목공소나 판매용 제품을 제작하는 목공방에 취업하려면 자격증 취득이 필수적이지만, 취미나 여가생활이 목적이라면 자격증이 큰 역할을 하진 않는다고 귀띔한다.
창업 쉽지만 제품 판로가 문제
목공예는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분야이다 보니 진입장벽이 매우 낮은 편. 그래서 목공예 시장에서는 구인보다는 구직 인력이 훨씬 많은 편이다. 한때는 목공방을 통해 좋은 디자인의 저렴한 가구를 구매하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저가의 중국산 가구들이 밀려들어오면서 시장이 위축되어버렸다. 여기에 이케아 같은 다국적 기업까지 가구시장에 참여하면서 목공방들이 설 자리는 더욱 줄어들었다는 것이 업계의 평가다.
이런 분위기에서 당장 취업을 목적으로 목공예를 배우는 것은 무리가 될 수 있다. 특히 체력적으로 힘든 시니어의 경우 목공소나 목공방들이 채용을 기피하는 대상이다. 급여도 적은 편. 그래서 아예 목공방을 차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시니어는 사업의 의미보다는 작업실 개념으로 목공방을 만들기도 하고 몇몇 사람이 뭉쳐 공방을 내는 경우도 있다. 메리우드협동조합이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 이곳은 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목공예를 배운 동기 6명이 의기투합해 설립한 목공방으로 경력 단절 여성이나 시니어를 대상으로 목공예를 지도하고 있다. 나무사랑협동조합도 이와 비슷한 사례. 송파구 시니어복합문화공간 실벗뜨락에서 목공예 수업을 함께 들었던 수강생들이 모여 공방을 만들었다.
목공방 창업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장비다. 목공용 장비를 기본적으로 갖추려면 2000만원 내외로도 충분하지만, 제대로 가구를 만들려면 7000만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하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이 창업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는 것은 예산이 아닌 영업력이다. 만들어진 제품의 판로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창업의 성공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장 위축으로 한때 난립했던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최근 확 줄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목공방 프랜차이즈는 헤펠레목공방이 대표적이다. 전국에 70여 개 목공방을 가맹점으로 두고 있다.
요즘 목공예 분야에서 주목하는 분야는 업사이클링(up-cycling). 폐품을 재활용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과 업그레이드(upgrade)가 합쳐진 용어다. 재활용할 재료에 가치를 더해 더욱 쓸모 있는 제품으로 재탄생시킨다는 의미다.
목공 분야의 경우 상품적재용 깔판인 파렛트나 와인상자와 같은 폐목재를 생활용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 많다. 폐목재는 단가가 낮아 수익성이 좋은 편이다. 최근 많은 목공방들이 폐목 리사이클링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다. 자연친화적 나무라는 소재에 스토리와 공익성이 더해지면서 소비자 반응도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목공예를 하는 시니어들 사이에선 방과 후 학습이나 목공예 체험교육 강사활동도 인기가 높다. 제품 제작보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덜하고, 보람까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산시 광덕산 자락으로 귀촌한 이웅기(66)씨는 시골을 홍보한다. ‘도시에 사는 시니어여, 시골로 가시라!’ 삭막한 회색 건물 숲에서 탈출하라는 얘기. 시골 자연 속에서 인생 후반을 흡족하게 누리라는 전갈. 도시라고 매력이 없으랴. 건강한 삶이 도시에선들 불가하랴. 그렇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씨의 생각은 다르다. 도시보다 수준 높은 게 시골의 여건이란다.
이웅기씨는 죽 도시에서 살았다. 도시에서 남들보다 밀리거나 뒤진 게 없었다. 그는 천안시에 있는 선문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다. 누릴 거 대충 다 누렸을 게다. 응분의 실력으로 도회의 풍속을 기민하게 섭렵했을 게다. 그러나 미련 없이 시골행 열차를 탔다. 행선지를 바꾼 여행자처럼 인생행로를 변경했다.
“은퇴 이후에도 흔히들 은퇴하지 않은 것처럼 부대끼며 삽니다. 도시에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왜 굳이 답답하게 서울에 눌러 살까. 서울의 그 비싼 아파트를 팔아치우면 얼마든지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을. 집 짓고도 여윳돈이 남아도는 것을. 귀촌처럼 안전한 노후대책이 드물다는 생각이에요.”
시골에 구미가 당기면 과감하게 털고 내려오라는 얘기다. 자연을 애호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귀촌이 자연스럽다는 판단이다. 이웅기씨의 귀촌에 각별한 결단은 필요치 않았다. 시골살이는 오랜 꿈이었기에. 마음은 진즉 앞장서 산골에 가 있었기에. 아내(안경희씨·62) 역시 귀촌 지망생이었기에. 사직을 하고, 아파트를 팔고, 주변인들과 쾌히 작별인사를 하고,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했다. 아하, 땅을 사는 과정엔 지체와 곡절이 있었더란다.
살터를 찾는 일은 시장에서 두부를 사는 일과 달라 신중을 기해야 하는 법. 기다렸다는 듯 맨발로 달려 나와 품에 안기는 땅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한동안 전국을 누볐다. 그는 풍수에 일가견이 있다. 그의 눈은 매섭게 보고 깐깐하게 따지는 눈이다. 발품을 판 만큼 일쑤 눈에 드는 게 있었다. 그러나 계약 단계에서 땅을 거둬들이거나 값을 올려 포기해야 했다지. 인연은 뜻밖에도 천안 인근, 수려한 산촌에서 맺어졌다. 소풍 삼아 찾아간 산골 물가에서였다. 물가의 밝은 둔덕, 초승달 모양새의 땅덩이 1000평을, 그는 쾌재를 부르며 사들였다. 거기에 서둘러 집을 짓고 벽송재(碧松齋)라 당호를 붙였다. 푸른 솔숲에 에둘린 집이구나.
풍광을 보는 눈들은 엇비슷한 모양이다. 산수의 미모를 기차게 추구하는 이들이 이 골짝에 일찌감치 입장했다. 원주민보다 외지인 숫자가 많다. 삼삼한 터 여기저기에 멀끔한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펜션도 많으니 휴가철엔 꽤나 버글거릴 게다. 덩달아 땅값도 뛰었다지. 산촌치고는 화려한(?) 현주소! 그래도 대자연이 압도해 시간조차 나른히 흐르는 것만 같다. 적막으로 채워진 공간은 고즈넉해 참신하다. 사방에서 일어서는 멧부리에선 우뚝한 맛이 난다. 골짜기는 깊숙한 멋을 풍긴다. 지겨운 세속의 난리블루스를 잊기에 족하다.
시골 살더라도 일은 놓지 말아야지
이씨의 집 곳곳엔 장항아리들이 즐비하다. 왜? 그는 된장을 담가 판다. 간장, 고추장, 청국장도 품목으로 삼았다. 산중에서 그저 노닐거나 빈둥거리기란 그의 적성에 맞질 않다. 일이 그의 본분사! 또는 일에서 낙을 찾고, 일로 만족을 구가하는 게 그의 본분사! 그는 날마다 고속도로처럼 분주한 눈치다. 된장 사업은 성업 중이고.
“시골에 살더라도 일을 가지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생동하니까.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며 세월을 흘려버릴 순 없는 일 아니겠어요? 70세까진 뭐든 직업 활동을 하자는 작심으로 일을 찾았어요. 된장 사업이 적격이라 본 건 아내의 손맛을 믿어서였죠. 이게 무모한 판단일 수 있었지만 귀촌 초기에 즉시 일에 뛰어들었고, 열심히 매달렸고, 덕분에 썩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결이 뭐죠?”
“운도 따랐겠지만, 최상의 전통 장류를 생산하겠다는 초심을 견지했어요. 이 산골의 자연 환경, 즉 깨끗한 공기, 맑은 물, 풍부한 일조량도 장류 숙성에 호조건입니다. 순수한 천일염과 죽염을 재료로 장을 만든다는 점도 특장이에요. 방부제, 발효억제제, 조미료 등을 철저히 배제, 최상품 장류 생산에 주력했어요.”
“귀촌을 해 장을 담가 파는 사람들이 드물진 않죠. 시골에 살며 택할 수 있는 일거리 중에 비교적 유망한 업종일까요?”
“장 담그는 사람들의 80% 정도는 실패합니다. 세상의 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소수만 성취한다는 것. 부지가 넓어야 하고, 공장 지어야 하고, 항아리 가격 비싸고, 초기 투자부터 부담되는 분야이지요. 그러나 유망한 측면도 있어요. 가령, 초중고 급식 재료로 안전한 전통 장류를 채택하는 추세가 확산될 텐데요, 고품질 장류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두세 배의 매출 확대를 꾀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장류가 아니더라도, 여하튼, 시골에서 오히려 더 나은 일, 더 좋은 찬스를 찾을 수도 있다는 건 분명해요.”
귀촌한 지 어언 10년. 이웅기씨는 이제 노련한 시골생활자. 소일거리 삼아 시작한 된장 사업의 규모는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연간 매출은 2억 원. 내년부터는 아산시에 소재한 모든 중고교에 된장을 공급한다. 그렇게 되면 매출은 두세 배 는다. 그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촌귀농인 대상의 각종 지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장류 관련 지원 사업 공모에 응모, 1억 원의 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다. 그걸 밑천 삼아 사업을 전개했던 것.
소소하게 시작한 일이 사업화되면서부터 그는 엄청 바빠졌다. 도시에서 우리는 흔히 숨 막히게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 탄식을 한다. 이씨는 그게 싫어서 귀촌을 했다. 그러나 시골에 와서도 다람쥐처럼 부산히 움직인다. 그러나 그는 기껍다. 삶에 자연이 붙어 있기 때문이겠지. 현실 도피처로 낭만적인 시골생활을 꿈꾸는 사람이 있지만, 어딜 가더라도, 시골에 살더라도, 삶의 끔찍한 증상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꾸역꾸역, 고독이나 권태가 밀려든다. 어쩌나? 이씨는 내 마음 안에, 내 몸 안에 자연을 담는 게 상책이라 본다. 그는 자연의학에 관한 한 전문가를 자처한다.
마음을 좋게 쓰는 게 좋은 삶
“귀촌 이후 저의 만족, 저의 행복의 대부분은 자연과 함께하는 데에서 비롯하고 있어요. 몸과 마음으로 자연이 들어오고, 그런 와중에서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이게 행복이라 봐요. 그렇게 되면, 비로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게 됩니다.”
“병이 나기 전까진 몸을 기계처럼 부리는 게 사람이죠. 아무거나 맛있는 음식이면 뱃속에 잔뜩 집어넣죠. 자연의학의 요체는 뭐죠?”
“몸이 원하는 걸 알아채는 거. 바로 그겁니다. 건강하지 않고선 행복이고 성공이고 다 소용없어요. 건강하긴 위해선 몸이 원하는 걸 섭취해야 해요. 일례로, 입에서 쉰내가 나면 신 음식을, 단내가 나면 단 음식을 먹어줘야 해요. 그 무엇보다 사람의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걸 알아야겠지요. 건강 문제는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예요.”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겠죠. 그러나 마음은 날뛰는 망둥이를 닮았어요.”
“예컨대, 아파트 위층에서 애들이 뛰는 소리에 분개해 살인까지 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마음을 잘 써 위층 애들이 내 손자라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노력을 해야죠. 마음을 좋은 쪽으로 쓰는 게 좋은 삶의 길이니까.”
“천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젊은 사람이 중병에 걸려 사경에 처하기도 해요. 신기하게도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산골에서 풀을 주로 뜯어먹고 건강을 회복하기도 하죠.”
“의학적,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병도 자연의학은 고칩니다. 자연식을 통해 기적적 회생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공기 좋은 산골에서 오염되지 않은 산야초를 먹게 되면 건강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몸 아픈 사람들에겐 귀촌귀농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놈들은 명물이다. 힘이 세다. 산야초 또는 잡초 말이다. 잡초는 그 강한 생명력으로 사람에게 이치를 가르친다. 뛰어난 약성으로 사람을 돕는다. 보잘것없는 잡초야말로 미래 식량의 대안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실은 보잘 것 많은 잡초. 잡초 밟기를 극구 삼가는 사람이 있다. 남의 얼굴을 구둣발로 밟고 지나는 건 결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잡초를 극진히 대접하긴 사실 힘들다. 그러나 자연 안에서 모든 생명들은 동등하고 존엄하다는 인식은 갸륵하다. 귀촌 생활은 자연과 생태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와의 조우이기도 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관을 활짝 열 수 있다면 쓸쓸한 삶을 더 잘 견딜 수 있겠지.
아름다운 건 자연만이 아니다. 여자도 아름답다. 아내도 아름다운 존재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이나 귀농을 싫어합니다. 불편이 많아서죠. 제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어요. 딱히 서로 정서가 비슷해서는 아니고, 묵묵히 남편을 따라준 거죠.”
“혹시 독재를 일삼는 남편? 마초?(웃음)”
“제가 여성 예찬론잡니다. 남자는 하염없이 나약한 동물이지만 여자는 강해요. 정글에서도 암컷들이 훨씬 강해요. 여자들에겐 별다른 단점이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남자보다 여러모로 나아요. 지구력, 지속력, 생명력 등등에서 더 우월하니까. 아내를 통해 그걸 실감해요. 수굿하고 진득한 이 사람은 평생 불만이라는 걸 내비치질 않았어요. 아, 팁 하나! 귀촌은 반드시 아내와 대동해야 합니다. 남편이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은 뒤 합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간 필경엔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시골생활엔 여자가 할 몫이 너무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 특히나 원주민들과의 융화엔 안식구의 역할이 절대적이지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부부가 서둘러 된장 작업장으로 들어간다. 교수에서 장류업체 사장으로 변신한 이씨의 어깻죽지에 의기양양이 비친다. 상상력이란 창작의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귀촌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이 창의를 가져오고, 마침내 만족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내게 한다. 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에의 도전은 어쩜 최상의 회춘 전략!
지금의 중장년층에게 커다란 생채기를 남긴 IMF. 도시농부 김재영(金宰永·58)씨 역시 나라가 휘청거릴 만한 큰 위기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원래는 인쇄기계를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었죠. 인쇄업이 사양산업이기도 했지만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더 이상 회사를 유지할 수 없었죠. 그래서 결국 사업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아봤어요.”
원래 생각했던 것은 귀농이었다. 부모가 이미 가평에서 텃밭을 가꾸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기댈 곳은 그곳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당장 서울을 떠날 수 없었다. 아이 교육이나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결국 미루고 미루다가 2010년에 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했어요. 기왕 귀농을 하려면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2014년에 졸업하고 나서는 좀 더 실무적인 교육과정을 찾았어요. 이론과 현실은 다르니까요.”
인연이 닿은 것은 서울시 농업기술센터 도시농업전문가양성과정이었다. 그는 이 교육을 통해 현장에서만 할 수 있는 교육을 배웠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재미있는 스토리 중 하나는 그의 아내 이광희씨의 존재다. 이광희씨는 김씨와는 부부 이상의 상호보완적 관계로 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도 함께 졸업하고 도시농업전문가양성과정도 함께 다녔다. 부부가 된 이후에 캠퍼스 커플이 된 셈이다.
도시농부가 된 뒤에는 사단법인 도시농업포럼이나 서울특별시도시농업전문가회, 서울특별시시민정원사회 등의 단체를 통해 주로 강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은 올해 초의 일이다.
“아내도 도시농부다 보니 여러 가지 작물을 키워요. 주로 음식이나 차에 쓰이는 허브 종류가 많은데 습한 곳에서 자라는 작물은 옥상정원이나 텃밭에서 키우기 어렵다며 제게 이런저런 주문을 했어요. 그런 아이디어를 모아 부분적으로 작물을 키우는 데 적용하고 있었죠. 그런데 주변에서 서울시에서 하는 도시농업경진대회에 한번 출품해보지 않겠냐고 권유를 하더라고요.”
출품자가 너무 적으면 관련 기관에서 애를 먹을 수도 있어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가 출품한 것은 다양한 장치를 활용한 아이디어 텃밭. 2층 구조로 설계해 아래쪽에는 햇볕이 직접 닿으면 안 되는 음지식물을 심고 위에는 양지식물을 심는 구조였다. 타이머와 빗물받이를 이용해 우수가 저장되면 식물의 생육에 활용할 수 있게 했다. 한쪽에는 태양전지판을 설치해 보조 조명을 밝히는 전원으로 썼다. 해충기피 식물의 배치도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얻었다. 그의 아이디어 텃밭은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깜짝 놀랐어요. 아내와 주변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한 것뿐인데. 예전에 기계 관련 사업을 했던 것이 제작에 많은 도움이 됐죠.”
그의 텃밭은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최하는 생활원예 중앙경진대회에서도 최우수상에 뽑혔다. 전국의 농촌 출신의 진짜 농부들을 제치고 얻은 도시농부의 쾌거였다.
“도시농업은 저처럼 쉽게 농촌으로 떠나기 힘든 은퇴자들에게 딱 맞는 직종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어요. 교육을 다니다 보면 어디서 어떻게 교육을 받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주변에 살펴보면 교육받을 수 있는 기관은 생각보다 많아요. 거기서 한 걸음씩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