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신중년들은 인생 2막 설계에 관한 관심이 높다. 그런 요구에 맞춰 각 대학은 발 빠르게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해 새로운 삶을 꿈꾸는 신중년세대를 불러 모으고 있다. 전 국민의 고등교육화를 꿈꿨던 한국방송통신대학교는 프라임칼리지를 개설해 신중년들의 미래 인생설계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젊은 은퇴로 고민에 빠진 신중년들에게 한국폴리텍대학은 펜 대신 드라이버와 망치를 손에 쥐어 주며 실전 학습을 가르치기에 나섰다. 인터넷 발달과 함께 방송대 대항마로 떠오른 사이버대학교는 이상 실현과 재교육을 토대로 시니어들의 배움 욕구를 충족시키는 중이다. 미래 설계가 아직 좀 미흡한 신중년들이 있다면 주목하라. 더욱 나은 제2의 인생으로 인도할지니.
국립한국방송통신대학교의
40·50세대를 위한 제2 인생설계·준비과정
원격대학의 원조,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이하 방송대) 안에는 또 하나의 대학이 있다. 바로 프라임칼리지다. 1997년부터 운영돼 온 방송대의 평생교육원이 2012년 프라임칼리지로 개명한 것.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다. 기존 평생교육원의 틀을 깨고 전 세대를 아우를 만한 다양하고 특색 있는 학습 프로그램으로 무장했다.
프라임 칼리지는 평생학습시대, 국민의 생애주기와 학습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만들어진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이다.
특히 40·50대 신중년들을 위한 제2 인생 설계·준비과정 등을 시행하고 있다. 제2 인생 설계·준비과정은 중·장년층의 자립 의지에 힘을 실어주고, 더 나아가 사회공헌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 꾸준히 수요가 늘고 있다. 2012년 제2 인생설계과정 32개 신규 교과목으로 총 2660명 수강에 이어, 2014년에는 총 1만284명이 프라임칼리지를 이용할 정도 관심이 뜨겁다.
프라임칼리지 교육과정은 제2 인생대학, 인문교양·시민문해, 귀농·귀촌, 창업, 사회적 경제, 국제개발협력 사회봉사, 전문자격, 명장교수, 평생교육 등 10가지 대분류 아래 각각에 부합한 과목을 배치했다. 영미영작 단편선, 문해 교육 이론 등은 물론, 집짓기, 창업, 다양한 국가의 어학학습 등 프라임칼리지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 과목들을 개설해 놓았다. 방송대 학생은 프라임칼리지에서 강의를 들으면 졸업학점으로 최대 12학점까지 인정받을 수 있어 굳이 다른 곳에서 배울 강좌가 아니라면 꼭 한번쯤 프라임칼리지 강의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외에 20·30세대를 위한 선취업·후진학 학위과정과 재직자 기초과정도 주목받고 있다.
인터뷰Ⅰ 박찬영 블루베리-연금나무, 게으름의 농장 수강 (서울, 방송대 농학과 15학번, 54)
귀농·귀촌을 꿈꾸는 신중년들에게 좋은 길라잡이
귀농·귀촌을 준비하면서 인터넷 강좌를 기웃거리다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마음에 작년 방송대 농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전공 교수이신 문원 교수님이 블루베리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셔서 조금 더 알려 달라고 했더니 프라임칼리지 강좌를 한번 들어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사실 귀농·귀촌할 생각만 있었지 어디로 갈지 또 어떤 작물을 키울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블루베리에 관한 관심이 한창일 때 들었던 프라임칼리지 강좌는 꽤 도움이 되더군요. 적어도 블루베리가 농사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접근하기 쉽고 수익성 좋은 작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농업에 관련한 일을 알아 가는 데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해요.
프라임칼리지뿐만 아니라 학교 자체가 귀농·귀촌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주변에 농사짓는 사람도 없어요. 귀농·귀촌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방송대에 들어왔습니다. 만약 프라임칼리지를 먼저 알았더라면 이쪽 강의를 먼저 들었겠죠. 프라임칼리지에 귀농·귀촌 프로그램이 많다는 것을 학교 입학하고 난 후에 알았거든요(웃음). 프라임칼리지도 새로운 인생 2막의 길을 찾는 방법의 하나입니다. 우선 농학과 공부에 집중한 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프라임칼리지를 좀 더 이용할 계획입니다.
인터뷰Ⅱ 양봉선 제2 인생대학 마스터클래스- 마음 외 5과목 수강 (전주, 방송대 국문학과, 58)
프라임칼리지는 마력이다
동화를 쓰고 창작을 하면서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아져 방송대에 편입학해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몸에 고장이 단단히 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동화 작가. 직장인, 주부, 엄마, 방송대 학생으로 숨 쉴 틈 없이 살아온 탓일까요. 1~2년 전 9개월 동안 병원과 집을 오가며 지냈어요. 그런데 병원을 오가다 우연히 프라임칼리지의 제2 인생설계 광고를 보게 됐어요.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클릭해 보았는데 평소 관심 있던 과목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내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다스리는 삶을 하고 싶었는데 그런 과목도 있고요. 두 과목만 수강할까 하다 프라임칼리지에서 수업을 들으면 방송대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기에 욕심을 좀 더 냈죠(웃음). 강좌를 선택하다 보니 6개가 되더라고요. 제2 인생 설계과정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중년의 삶,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삶 등을 공부했습니다.
내 이름을 단 아동문학관을 짓는 게 꿈이라 ‘작은집-싸게 짓고 행복하게 살기’를 즐겁게 들었습니다. ‘안전, 웰빙, 스마트 여행을 위한 건강관리’ 강의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던 다른 나라 예절, 선물로 현지인들에게 주면 좋을 것 등을 배웠습니다. 듣다 보니 3개월 단위로 끊어지는 강좌를 6개월이나 들었더라고요. 지금도 듣고 싶은 과목은 한없이 많아요. 프라임칼리지 너무 좋습니다. 글을 쓰면서 부족했던 것들, 살면서 배우지 못한 처세술도 배울 수 있었어요. 고령화시대에 남다른 감각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행복했어요.
펜 놓고 손에 기름 묻히길 원하는 자
한국폴리텍대학으로 가라!
한국폴리텍대학(이하 폴리텍대학)은 말 그대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을 추구한다. 이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실질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고 학습한다. 1968년 국립중앙직업훈련원으로 시작해 2006년 24개의 기능대학과 19개의 직업전문학교가 합쳐져 지금의 폴리텍대학이 됐다. 폴리텍대학은 해마다 80% 이상의 높은 취업률을 보인다. 땀의 결실을 보게 해주는 알찬 대학으로 세대와 학벌 위주 사회에서도 주목받는 대학으로 성장했다. 국민 누구나 나이와 학력에 상관없이 입학할 수 있다. 학비 걱정 없이 기술을 배우고 취업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평생직업교육대학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특히 베이비부머를 대상으로 한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이 시니어들의 재취업과 제2 인생 설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폴리텍대학은 학사과정 외 시니어들을 위한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을 2012년부터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은 3개월 단기과정으로 만 45세 이상 만 62세 이하의 실업자, 전직 예정자, 영세자영업자를 대상으로 체계적인 기업 맞춤형 과정으로 진행된다. 장년층의 재취업을 돕는 이 과정은 올해 전국 31개 캠퍼스에서 실시할 계획이다.
2012년 333명의 수료자를 시작으로 지난해 1868명이 베이비부머 훈련교육을 수료했다. 놀라운 사실! 3개월 교육과정이 전액 무료로 이뤄지며 수료생에게는 별도의 지원금도 지급된다.
인터뷰 송재구 (청주, 베이비부머 전기제어과정 2015년 8월 수료, 59)
노래하는 만학도에게 새 삶을 준 베이비부머 훈련과정
지난해 8월 베이비부머 전기제어과정을 수료했습니다. 30년 이상 의류업과 요식업을 하면서 살았 습니다. 아이들 다 키우고 성장했을 무렵 늦바람이 불었는지 48세에 대학수학시험을 봐서 2013년 새내기 대학생이 됐습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다 2014년 말에 음식점 문을 닫았어요. 예전부터 전기 관련된 공부를 해보고 싶었는데 충주지역 폴리텍대학 광고를 보고 베이비부머 훈련과정을 알게 돼 훈련과정에 들어왔습니다. 기초부터 전기 에너지, 설비, 이론 등 다 가르쳐주더라고요. 일단 배우고 있었던 것, 모르고 있었던 것을 배워서 자신감도 생기고 삶에 활력이 됐습니다. 과정 수료하고 바로 아파트의 시설관리기사로 취업했습니다. 아무래도 폴리텍대학에서 훈련과정을 수료한 것이 합격에 도움이 됐습니다. 내 나이에도 그런 훈련과정을 수료하고 이력서를 내니 업체에서도 좋아하더군요. 전기 설비에 관한 한 내 손으로 다 고치고 만질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제 나이에 기술 없으면 딱히 취업할 곳이 없어요. 미래를 위해 정말 중요한 기회를 저는 얻은 거죠.
지금 학교를 나온 이후에도 전기기능사 시험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자격증은 꼭 하나 더 따고 싶어요. 앞으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도 목표지만 나보다 힘들고 직업 없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노하우로 그분들을 도와가면서 사는 게 목표 중 하나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80세, 그 이후까지도 사회에서 일하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명함은 역사다. 현재의 명함을 갖기까지, 많은 명함이 내 호주머니를 떠나갔다. 여기 누구보다 깊이 있는 명함을 가진 사람이 있다. 어렸을 때 절도로 소년원도 갔다왔다. 지금 하는 일은 노무사.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이 사람 인생, 롤러코스터다. 소년원에서 나와 ‘여전’한 인생을 살 수 있었지만, 그것을 ‘역전’으로 바꾼 사나이. 노무사라는 명함을 가진 구건서의 ‘He Story’다.
글 양용비 기자 dragonfl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부드러운 인상이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는 매너가 넘쳤고, 사람에게 풍기는 미소에서는 푸근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악수를 할 때 내미는 손은 예사롭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서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두껍고 다부졌다. ‘반전이 있는 사람이구나!’ 솥뚜껑만한 큰 손을 보고 기자는 직감했다.
40년 전 소년원에서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던 소년. 그 소년의 2015년 명함에는 노무법인 더 휴먼의 회장이자 공인 노무사라는 직함이 자랑스럽게 새겨 있다. 무일푼 인생에 처절함과 절박함이 더해지자 노력이라는 동아줄이 내려왔다. 그 동아줄을 붙잡고 오로지 성공이라는 한 곳만 보며 올라왔다. 공부의 절대 시간이 부족한 것은 그에게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의 명함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그를 만난 곳은 신사동의 한 갤러리. 사진전이 열리는 곳이었다. 이제는 사진에 관심을 가져보고 싶어 친구가 회장을 맡은 동아리가 연 사진전에서 당번을 하는 날이었다. 노무사 구건서.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기자에게 내민 하얀 명함 속에서 깊게 팬 주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참 고생이 많았다.
◇ 첫 번째 명함, 건달과 택시 기사
“세상에 대한 분노뿐이었어요. 중학생 때 지나가던 아줌마 가방을 훔쳐 소년원에 갔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못사는 집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힘든가’ 하면서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었죠.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줄 모르고 남 탓, 환경 탓하기 바빴던 거죠.”
그렇게 꼬박 1년을 소년원에서 지냈다. 복역 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밑천이 들지 않고, 육신을 쓰는 일뿐. 가방끈은 턱없이 짧았고, 어떤 일을 펼치기엔 땡전 한 푼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막노동, 노점상, 포장마차, 엿장수나 고물장수 같은 것이었다. 일을 어느 한곳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학연, 지연, 혈연이 전무한 상태에서 세상은 그에게 투쟁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그 당시의 자신에 대해 “그때는 건달이었죠. 뭐”라고 표현하며 웃어넘기지만 말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구씨가 마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아내 유명자(60) 씨의 역할이 컸다. 1981년부터 약 9년간 택시 기사를 하면서 노무사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도 어디로 튈지 몰랐던 구 씨를 끝까지 믿어 준 아내 덕분이었다.
“이런 나를 믿어주는 아내와 아들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누라랑 자식새끼는 굶기지 말아야겠다’고 말이죠.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운전수로 세상을 마치는 것을 너무 억울할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
◇ 두 번째 명함,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노무사 구건서
“택시 기사를 하던 중 존 네이스비츠의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을 보니 블루칼라는 멸종하고, 화이트칼라 같은 지식 노동자들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때 결심했습니다. 노무사에 도전해 보기로. 인생을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었죠.”
24시간 격일제 운전.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운전수로 평생 살기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삶의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더 이상은 몸으로 때우며 살기는 싫었다.
소년원 시절에도 놓지 않았던 독서와 택시 회사 노조활동을 하며 틈틈이 배워 둔 노동법. 이것을 바탕으로 노무사에 대한 도전의 칼을 갈았다. 독서광이었던 그에게 공부는 오히려 체질이었다. 하지만 택시 운전을 하면서 공부의 절대 시간을 확보하기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래서 구 씨는 자투리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자동차 핸들에 법전이나 노무사 관련 책을 오려 붙여 달달 외웠다. 차량 정체 시간이나 신호 대기 시간이 그의 공부 시간이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손님을 태우면 노무사 관련 테이프를 틀어 눈이 아닌 귀로 공부를 했다. “아, 칙칙하게 이런 거 틀지 말고 음악 좀 틀어주세요.” 손님들의 볼멘소리가 나올 만했다.
그만의 택시 독서실(?)은 그렇게 꼬박 3년을 쉬지 않고 달렸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명문대 졸업생도 합격하기 어렵다는 노무사 시험을 전국 4등이라는 성적으로 합격했다. 하루살이처럼 살던 구 씨의 노무사 합격은 ‘인생 여전’이 아닌 ‘인생 역전’의 시작이었다. 구 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술회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본 문구가 있습니다. ‘하루는 8만 6400초다. 이것을 돈으로 바꿔라’라는 것이었죠. 저에게 깊은 영감을 준 이 문구를 전 이렇게 바꿨습니다. ‘조물주가 매일 8만 6400초를 무통장으로 입금해준다고 생각하자. 대신 12시가 되면 못 쓴 것에 대한 값은 다시 빼간다’라고요. 저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값지게 쓰고 이것이 쌓이니 재산이 되더군요.”
◇ 세 번째 명함, Keep Looking, Don’t Settle!
“저는 이제 나이 60을 기점으로 제3의 인생을 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첫 번째 인생이 나를 위한 처절한 투쟁의 역사였다면, 두 번째 인생은 노무사로 활동하면서 사회와 소통하는 과정이었죠. 이제 세 번째 인생은 남과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진 것을 사회에 보태고 나누고 싶어요. 그래서 내비게이터십과 인생학교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그의 명함은 이제 새로움이 더해지고 있다. 그가 쓴 책 의 표지에 쓰여 있는 ‘Keep Looking, Don’t Settle!(안주하지 말고, 계속 찾아라)’이라는 말에 걸맞게 명함도 미래를 지향한다. 그의 명함 오른쪽 상단에 쓰여 있는 횡성군 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신선마을 촌장 겸 인생학교 교장, 내비게이터십코칭 대표 등의 직책은 구 씨가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명함 중앙에 ‘공인노무사’이라는 이름이 크고 위엄 있게 박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직책들을 소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구 씨다. 이제는 노무사에 대한 것은 많이 내려놓은 듯했다.
“고생한 것이 있으니 지금 명함이 더 빛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되죠. 명함도 마찬가지로 매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뀌지 않는 명함은 정체하는 인생과 다름없기 때문이죠. 직책이 있든 없든 말이에요. 직책이 있든 없든 미래는 그려볼 수 있으니까요.”
◇ 명함 오른쪽 상단, 그의 새로운 역할
횡성군 발전위원회 자문위원
구 씨가 횡성군에 인생학교를 차리고, 자리를 잡을 예정이라서 횡성군에 직접 요청했다. 횡성 발전에 기여를 하면서 상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횡성에 기업 유치를 하고 귀농·귀촌인을 유치하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신선마을 촌장 겸 인생학교 교장
횡성의 신선봉이라는 곳 앞에 세워지는 인생학교. 아직 학교는 없다. 하지만 곧 생길 학교에 책임감을 부여하기 위해 교장이라고 기재했다. 이곳은 아이를 키우는 30~40대 부모들이 자유롭게 놀고,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구 씨가 여기서 하는 역할은 마을의 어른이자 할아버지로서 젊은 부모들과 아이들에게 인생 조언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내비게이터십코칭 대표
자신의 강점과 단점을 찾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가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인생 설계도를 그려주는 일이다. 사실 시니어들은 은퇴 이후 미래 설계도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인생 설계도를 제대로 그려보는 것도 중요하다.
피플스그룹(現) 부이사장
HR의 노동조합 형태인 피플스그룹이다.
제주는 2009년까지 취업, 대학진학 등의 이유로 인구유출 현상이 심각했었다고. 그런데 2010년부터 인구 증가세로 전환되었다. 2010년에는 순유입자 수가 437명, 2011년 2342명, 2012년 4873명, 2013년 7824명 등 가파른 속도로 늘고 있다. 2014년에도 역시 제주 유입 인구는 고공행진 중이다. 일례로 서귀포시에서 주최하는 귀농 귀촌 교육의 경우 단 2시간 만에 마감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서귀포시에서는 이례적으로 주말반까지 만들었지만 수요에 비하면 부족한 반 편성이었다.
도대체 제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제주의 매력과 신비가 갑자기 커진 이유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벼락을 맞은 듯이 제주에 끌렸을까? 제주로 이주한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사연을 갖고 있다. 이미 여러 권의 책으로 나오기도 했지만 아직도 그들의 사연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제주도 안에서도 이런 현상에 대해 기대와 우려의 시선 두 가지를 갖고 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인생 2모작’을 꿈꾸는 이들이 제주로 몰려들면서 제주도에 귀농 귀촌 바람이 부는 것은 제주도의 1차 산업 부흥을 의미한다. 농어촌 사회에서는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고 도시 이주자들이 몰고 오는 문화 이민의 바람도 상당하다. 하지만 이들이 제주도에 뿌리를 못 내리면서 일어나는 갈등도 있고 은퇴자금을 앞세워서 부동산을 사는 바람에 제주도 땅 값이 들썩이는 역효과도 일으키고 있다.
#올레길 벤치에서 터져 나온 아내의 소원, “여보, 부탁이 있어.”
‘달파란’(게스트하우스 & 카페)은 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에 있다. '파란달’보다 ‘달파란’이 느낌이 있지 않은가? 달파란 게스트하우스 주인장 김태환(52)씨는 전직 국어 교사다. 지금은 교사직을 명예퇴직하고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다. 달파란 게스트하우스는 2012년 12월에 오픈한 곳으로, 3층짜리 게스트하우스 과 별채 카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주인에게 게스트하우스 이름이 특이한 이유를 물었더니, “처음 위미리에 위치한 세천포구 바다를 봤을 때 그 느낌이 파란 달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고 설명한다. 게스트하우스 이름도 시적이고 제주 정착기 역시 운명처럼 시적으로 시작된다.
“올레길 10코스를 걸으면서 송악산 중턱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을 때였어요. 참 좋다는 느낌을 갖고 한참 앉아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이렇게 말했어요.”
-여보, 내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 줄래?
-뭔데?
-우리, 여기서 살면 안 될까? 제주에 살고 싶어
“그 순간 제 입에서 너무 쉽게 그래. 라는 대답이 나왔어요. 제가 살면서 몇 가지 잘한 일들이 있는데, 이 순간이 바로 그 잘한 일이에요.”
정말 지금의 생활에 만족한지 궁금했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도 궁금했고.
“처음엔 그저 먹고 사는 정도만 수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시작했는데, 다행히 먹고 살면서 대학교 다니는 애들 등록금 댈 정도는 버는 것 같습니다. 제주에서 앞으로의 꿈이요? 시간이 지나면 규모를 줄여서 제 개성에 맞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싶어요. 저만의 시간적 여유를 갖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더 많이 하면서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선량하게 웃는 주인 부부의 얼굴을 보면 ‘제주의 마법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장사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제주에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심지어는 대학생 자녀들을 서울에 두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그 것. 우리는 이것을 ‘제주홀릭’이라 부른다.
“지금도 저처럼 중년 분들이 많이 여행하러 내려와요. 우리 숙소에서 머물다 가는 분들 중에 진지하게 제주살이를 고민하는 분들도 많구요. 그분들에게 농담처럼 말해요. 올레길 자꾸 걷다 보면 저처럼 제주에 주저앉게 됩니다. 하구요.”
#가수 장필순이 추천한 그 곳의 그 남자, “대기업에 다닐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합니다.”
‘요리하는 남자’는 애월읍 하귀리에 위치한 작은 요리 주점이다. 멋진 미소의 이영태(52) 씨는 ‘요리하는 남자’의 주인공이다. 생전 요리할 것처럼 생기지 않은 외모지만 의외로 요리하는 모습이 편안하게 잘 어울린다. 평소에도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그는 현재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고 했다. 평촌에 살다가 제주에 온 것은 2011년 2월.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부장 직까지 하고 나면 그 이후엔 설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숨막히는 일상생활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귀농을 꿈 꿨고 그렇게 귀농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말했단다.
“꼭 그렇게 깡촌으로 가야 해? 촌도 있고 도시 같은 분위기도 있는 제주는 어때?”
친구가 그냥 툭 던진 말이었는데 정말로 제주에 집을 구해서 내려오게 되었다. 늦둥이 딸이 중학교 입학할 때, 서둘러 떠나왔고 시내권 중학교보다는 시골지역에 위치한 학교로 보냈다. 딸은 제주 생활에 잘 적응했고 순박한 친구들과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행복한 중학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딸은 올해 제주외고에 수석으로 입학했단다. 온 가족이 제주에서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래는 농사일을 해보려고 땅을 알아봤지만 희한하게도 지금의 가게 자리가 나왔을 때, 끌리듯이 그 날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50년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피 속에 요리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보시다시피 작은 가게잖아요? 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규모죠. 만약에 돈 벌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장사를 했다면 지금처럼 즐겁게 살지는 못했을 거예요. 딱 지금이 좋아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요.” 그러면서 그는 어떤 요리를 파는지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했다.
“초임 직장 시절에 일본에 파견근무를 나가서 5년 정도 있었는데, 그때 먹었었던 일본요리들을 제 손으로 만들어서 판매하곤 해요. 제가 맛있게 먹은 음식들은 흉내 내려고 노력하면 비슷한 맛이 나오더라구요.”
메뉴판에 있는 ‘간장새우’도 얼마 전 강남에 갔다가 맛있게 먹은 메뉴인데 제주에 내려오자마자 바
로 만들어 봤단다. 반응이 썩 괜찮다며 씩 웃는 모습이 참 해맑게 느껴졌다. 얼마 전, 모 잡지에서 가수 장필순씨가 자신이 자주 다니는 명소들을 하나씩 나열하면서 소개했는데 그곳에 요리하는 남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물었더니 장필순씨가 처음 가게에 왔을 때는 장필순씨인지 몰랐다고 한다. 여러 명이 와서 음악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시고 갔는데 얼마 뒤에 한사람이 찾아와서
-장필순씨, 안 왔어요? 하고 물었단다.
-장필순씨가 여길 왜 와요? 하자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지난번에 같이 왔잖아요. 했다는 거다.
그때부터 장필순씨는 후배들과 자주 이곳을 찾았고 4,5개월 전부터는 이효리씨 부부도 데리고 왔단다. 아마도 행복한 주인장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술이 잘 들어가게 되는 것 아닐까?
‘달파란’의 주인장 김태환씨, ‘요리하는 남자’의 주인장 이영태씨 모두 공통점은 예전 직장보다 지금 제주에서 하는 일이 훨씬 만족스럽다는 거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충고 또한 같다. 여행지에서 봤던 제주는 잊으라고. 바다를 감상하고 잔디를 다듬고 하는 로망은 일상생활이 되는 순간 또 하나의 삶이 된다고. 조선시대 윤선도의 는 실제 어부들의 삶과 비교하면 얼마나 황당한가? 실제 어부의 삶은 관념 속 어부의 삶과는 다르다. 한없이 한가롭고 유유자적할 수는 없다. 제주의 삶도 그렇다면 적절한 비유가 될까?
이투데이PNC가 운영하는 시니어 전문 미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 (www.bravo-mylife.co.kr)는 회원수 16만명인 귀농사모와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오는 7월 18일부터 8월 17일까지 강원도 고성군 삼포2리 해변에서 열리는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 행사를 공식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또 장기적으로 귀농사모 회원들의 유기농산물 직거래사업도 공동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 행사 개요
1. 개최일시 : 2014년 07월 18일(토) ∼ 08월 17(일)
2. 장 소 : 삼포2리해변
3. 주 최 : 귀농사모/한국귀농인협회/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조직위원회
4. 후 원 : 강원도/고성군/속초경실연/양양귀농지원센터/고성군번영회/삼포2리해변어촌계/설악헬스케어귀농귀어타운/영농법인한백/국립한경대학교 평생교육원/강원관광대학/강원귀농인협회
5. 주 제 :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삼포2리해변 오토캠핑 귀농귀촌창업학교
6. 강 사 : 첨부서류 참조
7. 참가 예상 인원 : 연 6만명
◇ 행사 소개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운영 계획
1. 목 적
◦ 귀농사모회원 16만명에게 귀농귀어체험 기회 제공.
◦ 강원출신 출향인인 지역 공동체로서의 연착륙 할 수 있게 일체감과 자긍심을 고취.
◦ 강원도와 고성의 문화를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귀농 귀어 창업체험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귀농인구 유치 및 지역경제 활성화.
2. 방 침
◦ 전국 및 도내 예비 귀농 귀촌 귀어인 및 도민을 대상으로 16만 회원의 Daum우수카페 귀농사모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받아 선정.
◦ 30일간의 가족이 동행하는 귀농 귀촌 귀어 체험 워크숍활동 중심 프로그램 운영.
◦ 건강하고 화목한 귀농과 지역민과 융화하는 행복한 귀농 만들기 프로그램 운영.
3. 세부 운영계획
◦ 일시 : 2014. 7. 19.(토) ∼ 8. 17.(일) 30일간.
◦ 장소 : 삼포2리해변
◦ 대상 : 귀농사모 회원 및 전국민
◦ 인원 : 30일간 연 6만명
◦ 숙식 : 오토캠핑 및 삼포2리해변 주변 팬션/민박/식당
◦ 프로그램 : 속초고성양양지역귀농체험워크숍/수산물 이용 치유식품개발 워크숍/힐링쿠킹쉐프전문과정/어린이귀농학교/애견해수욕리조트/소상공인해수욕장/여성귀농인워크숍/싱글귀농인워크숍/귀농귀촌아이디어클럽워크숍/귀농복덕방워크숍/지붕개량워크숍/DIY CCTV/귀농인의3D프린터워크숍/경원대학교총동문회워크숍/한경대학교귀농귀촌특화과정동문회워크숍/귀농귀촌인무료오토캠핑장/황토건축워크숍/목조주택워크숍/조입식주택워크숍/농막워크숍/원두막워크숍/원목구워크숍/용접워크숍/비닐하우스워크숍/칡소사육자워크숍/MBC예비귀농인워크숍/한국일보귀농동호회워크숍/KBS귀농동호회워크숍/한국노총귀농동호회워크숍/국방부귀농동호회워크숍/농협중앙회귀농동호회워크숍
◦ 숙박은 자부담 입장료 및 사용료는 유료
4. 운영 일정표
운영 일정표는 참가농가들 일정 조율 중으로 6월 30일 확정.
*프로그램은 기상변화 또는 일정에 따라 다소 변경될 수 있음
5. 준비사항
가. 행사장확보(삼포2리해변 일대)
나. 행사 사무국: 강원귀농귀촌학교내
사무총장 : 조재근(박사)
고문 : 최진규(약초전문가)
자문 : 정성근(한경대학교 교수)
다. 착안사항
• 안전중심의 안락 한 캠프
• 귀농사모+고성군민+전국민+지역경제 상생 프로그램
• 이 문건과 관련 문의사항은 010-7345-3344(정성근교수)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순환형 은퇴문화가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리나라 중년들은 퇴직을 하면 쉴틈없이 계속 일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일에서 손을 떼고 휴식을 하려는 경향도 강합니다. 여행을 가고 싶거나, 전원생활이나 귀농·귀촌을 하고 싶다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은퇴를 휴식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이해하는 움직임이 강합니다.
우리나라의 은퇴문화는‘직선형’입니다. 일하다가 은퇴하고 나면 끝이라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즉, 현역 시절 한 방향으로만 쭉 달리다가 정년퇴직 후 사회에서 물러나 등산이나 가벼운 취미·여가로 소일한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말합니다. 하지만 선진국은 우리와 달리 ‘순환형’ 은퇴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장년이 되어 은퇴하면, 직업학교나 대학교를 1∼2년 다니면서 재충전을 하고, 이후 일터로 다시 복귀하여 일하고, 또 휴식과 근로를 반복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순환형 은퇴문화가 대두된 것은 기대수명이 90세를 넘어서면서 은퇴생활 기간이 무려 30년 이상으로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제 순환형 은퇴문화가 활성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행복한 은퇴생활을 위해서는 순환형 은퇴문화가 필요합니다.
서울은퇴자협동조합 이사장 우재룡
나는 면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던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선택한 도시생활이었지만 50이 넘으면서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농촌의 현실은 아직도 어려웠다. 직장 생활과 농사를 병행하며 시골 살이를 시작했다. 이제 표고재배 등 새로운 희망을 품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 겪으면서 귀향 결심
‘인간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농촌의 중농가정에서 나서 성장하는 동안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동화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요즘이야 논농사, 밭농사 모두 기계화되고 일손이 많이 가는 농사는 기피하면서 단위 노동력당 경영하는 면적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60~70년대에는 논농사만 하더라도 두엄내기, 논갈이, 써레질 등을 전부 수작업으로 하거나 일부 축력에 의존했다. 간혹 기계를 사용했지만 아주 초보적인 기계에 의존하는 정도였다.
농촌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퇴비장, 토끼사육장 같은 시설에서 토마토 같은 밭농사나 토끼사육 등 농사 체험을 배우고 익혔다. 이후 가까운 지역의 지명도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공무원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들의 소망에 따라 농업관련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때 체계적이고 학문화된 각 부문의 농업이론을 배우고 실습을 하는 등 과정을 이수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부모님은 중등교사 자격증을 이용해 면 소재 중학교 교사가 되길 바라셨지만 농촌생활의 갖가지 어려움, 각종 편의시설의 부족, 2세 교육을 위한 교육환경의 열악함 등을 이유로 대도시의 대기업에 입사했다. 부모님이 보유한 농지는 두 분이 충분하게 경작 가능하리라는 생각이었다.
80년대 말 변환기에 나와 중소기업에 몸담게 됐다. 그러면서 값싼 노동력을 찾아 회사가 중국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10여년 간의 중국생활을 했다. 한 때 거침없는 성장으로 코스닥에 상장했던 회사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영업이익이 공장손실을 메꾸지 못하는 등 경영 악화로 이어졌다. 공장을 통폐합하고 조직을 축소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이젠 떠날 때가 됐다고 판단돼 사직했지만 퇴직금도 못 받고, 회사주식에 투자했던 여유자금마저 상장 폐지되는 바람에 허공에 날리고 실업자가 됐다.
실업급여를 받는 6개월 동안 ‘취업이야 되겠지’하는 기대 속에서 인크루트를 비롯한 취업포털을 통해 수많은 회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취업에 실패했다. 50을 넘긴 나이가 핸디캡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작은 아이가 대학졸업을 3년이나 남겨두고 있어 하루라도 소득이 없어서는 안 되는 중차대한 시기였다. 가정주부라는 틀을 벗어난 적이 없던 안식구가 참다못해 월 100만 원 정도 급여를 주는 직장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팔순이 넘은 어머님 농사를 도우며 작은 농가 소득이라도 올리고자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계산해 본 예상농업소득만으로는 아이 대학 교육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됐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며 부업으로 직장에 다니는 동네 친구를 따라 월 130만원 정도의 보수를 받으며 출근을 시작했다. 출근해서 8시간 내내 예초기를 메고 도로 가장자리에 늘어지고 제멋대로 우거진 잡초와 작은 나무를 베는 일을 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제설작업을 하면서 고된 2년여의 시간이 지나갔다.
고용노동부 취업포털인 워크넷(worknet)에 올린 내 이력서를 보고 주유소 소장을 제의해 온 주유소가 있어 일을 시작했지만 전 소장은 퇴사하지 않고 모든 일을 알아야 한다며 계산원, 주유원 등으로 월 130만원의 보수를 주고 일만 시켰다.
회사에 불만이 많은 가운데 계속적인 취업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한 지역 중소기업으로부터 입사제의를 받고 연 3300만원의 보수로 출하관리 업무로 출근하면서 농사일을 병행해 나갔다. 농사를 지으며 모르는 부분은 경험 많은 어머님이나 친구한테 자문을 구하며 또 남들이 하는 상황을 보거나 과거에 봐왔던 기억을 살려 해나가고 있다.
논에는 벼농사를, 밭에는 고추농사는 단모작, 감자농사는 후작으로 무를, 마늘 심은 후작으로 메주콩을 심고 논둑이나 유휴지에는 검은 콩, 들깨, 호박, 가지, 상추, 고구마, 쪽파, 시금치, 오이, 참외, 토마토 등 채소나 잡곡을 심어 자급하고 있다. 요즘엔 고라니가 많아져서 콩, 옥수수 등은 수확을 못 할 정도로 피해가 많고 논에도 수확기에는 적지 않은 피해를 준다. 하지만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다 지인의 표고농장을 보고 온 뒤 기대를 가지고 실험적으로 시작한 농사가 표고재배다. 매년 11월부터 1월 사이에 엔진 톱을 구해 산에 있는 참나무나 밤나무를 베어 1m 전후의 길이로 토막을 내고, 표고종균을 넣을 수 있는 가는 나무는 나무보일러에 들어갈 정도의 길이로 잘라두었다가 화목으로 쓴다.
1월말에 군 산림조합에 표고종균을 신청하고 3월말 종균이 도착하면 모아 놓은 참나무에 5cm 폭에, 길이 10cm 전후의 간격으로 천공기로 구멍을 뚫고 성형종균을 넣고 물 주기 좋게 쌓아두고 15일 간격으로 물을 주고 차양 막을 설치해 주는 등의 관리를 한다.
◇바쁜 일 없는 시기 수입 짭짤한 표고농사
관리를 잘 하면 종균을 넣은 당년 가을에 표고를 수확할 수 있다고 교재에 나와있지만 내 경우에는 다음해 가을에 표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확된 생표고는 거래처가 없어 저장성을 높이기 위해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다듬어서 햇볕에 말려 저장했다가 구매자가 나타나면 시중가인 1kg에 5만 원에 팔고 있다.
표고재배는 중장비 도움 없이 하려면 통나무를 자르고 나르고 세우고 하는 일련의 일들이 중노동이지만 표고수확이나 물주기 등이 비교적 수월한 일이다. 어느 곳에서나 중국산 표고가 넘쳐나기 때문에 가격이 낮아 일이 힘든 것에 비해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온성 표고를 선택하면 3~4, 10~11월에 수확되기 때문에 일이 없을 때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부족한 지식을 메우고자 산림조합에서 출간한 ‘표고재배기술’이라는 책자로 공부하고 의심나는 부분은 찾아 읽으며 다른 고수익 버섯품종도 찾아보았다. 표고 전업농이 되기 위해서는 3만본 정도 규모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정도의 원목을 살 수 있는 거래처를 확보하고 급수 설비 등 시설에 대한 투자를 위해서는 토지 비용 제외하고 연 5000만원 정도 자금이 필요하다.
현재 실험적으로 재배하는 표고는 한 해에 200본씩 확보하여 5년 정도 지나면 1000본정도 되고 그 중 800본 정도가 수확된다. 연차적으로 농사에 필요한 40m×8m 규모의 못자리용 비닐하우스를 보조금 제외한 420만 원에 설치하고 백미 및 현미가공이 가능한 가정용정미기를 140만 원에, 비닐 피복 및 소규모 로터리 및 두둑 만들기가 가능한 아세아 관리기를 120만 원에 구입하는 등 최소 규모의 투자도 진행 중이다.
◇직장과 농사를 병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나이 들어 남의 밑에 가서 거슬리는 말 참아가며 직장 다니지 말고 농사에 올인 하면서 편히 살라고. 그러나 나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직장생활과 농사를 병행할 생각이다. 또 관심 있는 금송, 장뇌삼, 블루베리, 복숭아 등을 시험적으로 심고 가꾸면서 가능성도 따져보고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낙원이라는데 직장을 정년퇴직하면 젖 짜는 산양도 두세 마리 키워서 산양유를 짜서 마시고 남으면 치즈 등 제품 개발도 해보고 싶다. 또는 벌통을 두세 통 사서 남향 따뜻한 곳에 놓고 주위의 아카시아나 밤꽃 등의 꿀도 따고 작물의 수분도 좋게 하는 일들도 좋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여러 곳에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도 정리하고 내가 흙으로 돌아갈 준비도 착실하게 해 놔서 후세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조상을 숭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작은 바램이다.
* 귀농 전 거주 지역: 중국 대련에서 10년 거주
* 귀농 전 직업: 생산관리
* 귀농 결심동기: 노후준비
* 귀농 선택작목: 벼, 무, 배추, 감자, 표고버섯
* 귀농귀촌 교육이수 실적: 없음
* 귀농연도: 2008년
* 귀농 시 나이: 52세
* 귀농지 선택사유: 고향마을
* 귀농시 영농기반: 논 4000평, 밭 1000평
* 귀농 초기자금: 없음
* 재 영농규모 : 귀농시와 동일
* 연간 수익: 논 농사 800만원, 밭 농사 450만원(감자 100만원, 무·배추 100만원, 고추 100만원, 표고버섯 150만원)합 1250만원
사관학교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전투적이고 의욕적인 인상을 주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윤경숙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 이사장이 젊은 날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전공 선택 기준을 오직‘여자가 거의 없는 학과로 가자’라고 생각했다는 건 나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80학번인 윤 이사장은 ‘여자라면 가정학과’란 도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건 축산학과였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녀가 이끄는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는 국내 최초로 특급호텔 인턴십 프로그램을 가진 최고의 조리 특성화 학교로 자리 잡았다.
정부의 일자리 창출과 국민의 건강한 먹거리 제공에 기여하는 전문 직종으로서 유기농관련 인재 양성이 국가적으로 시급한 실정이다.
한국조리사관 직업전문학교는 최근 도시 공간 텃밭이나 영농기술을 사전에 충분히 익힌 후 신중히 판단하여 귀농 귀촌하는 것을 돕고자 한다. 최근 성지 융복합 교육원을 훈련원으로 하여 사전 교육 제안서를 관할 정부기관에 냈으나 결국 채택이 되지 않았다.
한국조리사관 직업전문학교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크게 ‘농식품 종합전문가 과정’과 ‘유기농식품 지도사 과정’ 이었다.
윤경숙 이사장은 “농식품 종합전문가 훈련과정은 6차 산업 모델의 융복합 과정으로 농·식품의 생산, 가공, 유통, 관광을 통합하는 관련 공인자격증은 없는 상태입니다. 농업의 6차 산업화 쪽으로 가야 단순 지역 농산물이나 특산물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개념을 뛰어넘어 외래 관광객을 끌어들여 먹거리를 만들어 보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아는 것이 힘이고,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에 귀농·귀촌을 결행하기 전에 관련 교육을 받는 것이 리스크를 줄이는 좋은 방법이죠.” 무작정 막연한 기대만으로 귀농 귀촌하다보니 실패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시농업 6차 산업화를 위한 사전 교육을 받고 가게 해야 한다.
사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되고 전원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귀농귀촌 열풍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지만 농사를 지으려는 귀농인들의 정착 기반은 여전히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윤경숙 이사장 또한 중장년 일자리 창출과 건강한 식품 먹거리를 제공한다는 뜻으로 ‘농식품 종합전문가 훈련과정’은 진심이 통할 날이 올 때까지 추진할 생각이다.
윤경숙 한국조리사관 직업전문학교(이하 한조사) 이사장은 강인한 추진력으로 식문화 전문가 육성의 최전선에 서서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84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공을 살려 정부 산하단체에 취직한 그녀는 결혼식과 출산 전날까지 야근했고 출산 뒤 보름 만에 복직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일은 녹록치 않았고 결국 1989년에 퇴직서를 제출하고 전업주부가 됐다.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맞춤형 교육 시작
그런데 그 시점에서부터 그녀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전업주부로서도 철저하게 살고자 했던 그녀는 요리학원에 등록하여 요리기술조차 일하듯 익혔고, 2년간 한식, 일식, 중식, 제과·제빵, 복어조리, 칵테일 수업을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같은 반 학생들이 강사 대신 그녀에게 질문하는 상황까지 되자, 요리학원을 직접 해보자고 결심하게 됐다. 요리를 가르치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는 확신이 들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40세였던 1992년, 한 가전기업의 요리학원 원장으로 재취업한 그녀는 2년간 해당 기업에 속한 전국의 요리학원들 중 가장 많은 수강생을 모았다. 하지만 조리 매뉴얼에 맞춘 요리 지도에 제약을 느낀 윤 이사장은 1999년 경기도 수원에 현재 한조사의 전신인 ‘동양요리학원’을 차렸다.
학원을 열자 비행청소년들이 적잖게 찾아왔다. ‘공부 대신 요리에서 살길을 찾으라’며 부모나 교사에게 등 떠밀려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윤 이사장에게 있어선 첫 제자들이고 성공시켜야 할 제자들이었다. 그녀는 가정과 학교에서 천덕꾸러기 취급 받는 아이들이 꿈을 찾을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지도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 아이들도 해낼 수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각종 요리대회와 자격증 시험 대비에 집중하여 교육을 진행했다. 수상 실적을 관리해 아이들의 대입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위기 때마다 기회가 찾아 와
교육 지도의 효율성을 위해 혁신을 도입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윤 이사장은 기존 사업을 확장할 계획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전혀 예측치 못한 시련이 찾아왔다. 임차해 있던 수원의 학원 건물이 경매에 넘어간 것이었다. 갑작스럽고도 불가항력적인 사고에 울며 겨자 먹기로 부지를 찾던 윤 이사장은 2006년 서울 금천구의 한 아파트형 공장을 소개받았다. 300평 규모의 건물은 그녀가 가진 자산에 비해 턱없이 비쌌다. 그런데 포기하려는 차에 계약 담당자는 윤 이사장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을 제시했다. 이렇듯 한조사가 서울에 정착하게 된 일은 하늘의 도움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는 아이들 교육에 대한 문제가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실기로 대학교 입시에 성공했다고 하여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대학생 제자들은 대학에서의 공부를 따라가기 버거워했기 때문이다. 이론 수업 위주인 대학에서 공부하다 실무능력이 녹슬어 졸업 후에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것 또한 문제였다. 그래서 재능이 탁월한 아이들의 ‘손’을 썩히지 않기 위해서 윤 이사장은 기술과 학력을 동시에 완성하는 학점은행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학점은행제 도입 후 학생 수의 급속한 증가가 이뤄졌고 이내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해졌다. 이번에도 비용이 꽤 많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새로운 건물의 주인은 그녀와 계약했다. 위기 속에서 매번 도움과 구원을 얻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느꼈다는 윤 이사장은 새로이 들어가게 된 건물 앞 머릿돌에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겼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
귀농 인구를 위한 체계적 교육 시스템 구축 꿈꾼다
지금 윤 이사장은 보다 큰 그림을 꿈꾸고 있다. 식문화의 근본, 바로 농업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농업인구는 1970년대는 50%였던 것이 지금은 7%대에 머물고 있다. 수출은 세계 12위권에 진입하였고,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지만 농업은 상대적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베이비부머 세대를 중심으로 전원생활을 통해 삶의 가치를 새로이 추구하려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귀농과 귀촌이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보자면, 시설 운영을 통해 소득을 조달하는 ‘귀촌’은 활발한 편이지만 영농을 통해 소득을 조달하는 ‘귀농’은 실패 사례가 워낙 많고 관련하여 제대로 된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이다.
농업 인프라가 허약하기에 제대로 된 귀농이 이뤄지지 않고, 이는 농업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 것이며, 농업의 미래가 암울해지면 한국 식문화의 미래 또한 암울해진다. 윤 이사장은 그래서 농식품 종합전문가 과정과 유기농식품 지도사 과정을 구축하여 농업전문가를 육성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음식으로 시작하여 보다 깊은 근본으로 들어가는 윤 이사장의 결단이 어떤 미래를 만들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가는 인구가 늘고 있다. 지난달 통계청과 농림축산식품부가 밝힌 귀농·귀촌인 통계를 보면,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는 3만2424가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12년에 비해 20% 정도 늘어난 것이다.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앞으로 귀농·귀촌인구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도시의 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시골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시골 생활은 결코 낙원이 아니다. 낙후된 의료시설과 허술한 치안 속에서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도시에 있을 때보다 경제적으로 덜 풍족한 생활은 필연적이다. 원주민의 텃세도 결코 우습게 넘길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도시보다 더욱 힘겨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시골인지도 모른다. 시니어 전문 미디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전국의 귀농귀촌 현장을 돌아보며 성공적인 귀농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 그 방안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본다.
“장흥은 기후가 온화하고 산이 좋고 강이 흐르는 등 자연환경이 좋습니다. 해산물과 표고버섯 등 먹거리도 풍부합니다. 인구보다 사육하는 소가 더 많지요. 토요시장에는 주말이면 8000명의 관광객이 다녀갑니다. 다른 농촌지역에서는 인구가 감소하고 있지만 장흥은 살기가 좋아 인구가 4년 연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김영윤 장흥군청 계장은 장흥이 귀농지역으로 선호받는 이유를 묻자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이같이 답했다. 장흥에 내려가 보면 김 계장의 발언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 ‘정남진’으로도 불리는 장흥이 귀농의 중심으로 각광받고 있다.
전남도가 지난해 발표한 귀농가구 현황 분석 결과에 따르면 귀농통계가 잡히기 시작한 1990년부터 2012년 10월까지 756가구가 귀농해 장흥이 전남도 22개 시·군 가운데 가장 선호하는 지역으로 집계됐다.
장흥의 저렴한 땅값과 따뜻한 기후조건이 장점으로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여기에 산과 들, 바다와 호수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자연환경과 장흥군의 적극적인 귀농지원 정책도 많은 도시민을 끌어들인 요인이다.
◆귀농어업인 창업자금 및 주택수리비 지원
장흥군은 귀농어업 희망자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창업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이것은 농림축산식품부가 각 지자체와 공통으로 진행하고 있는 융자방식의 귀농어업 창업 및 주택구입 지원사업과는 다르다.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가구별 최대 1000만원의 한도 내에서 귀농어업인(이하 귀농자)과 장흥군이 반반씩 부담하는 방식이다.
지원자격은 도시지역에서 1년 이상 농어업 이외의 다른 산업에 종사하다가 2011년 1월1일 이후 장흥군으로 이주해 농어업에 종사하는 65세 이하의 귀농자이다. 농식품부, 농촌진흥청 및 지자체 주관의 귀농교육을 3주 이상(또는 100시간 이상) 이수해야한다. 귀농자 중 영농종사 기간이 3월 이상인 자, 농업계 학교 출신자, 후계농업인으로 선정되었던 자, 농산업인턴 이수자(3월 이상)는 귀농교육을 이수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세대주가 가족과 함께 이주해 농어업에 종사해야 하며 장흥군에서 직장, 자녀교육 등을 위해 일시적으로 도시로 이주헀다가 3년 이내 다시 장흥군으로 전입한 경우는 지원받을 수 없다. 보조금을 지급받고 5년 이내 타 지역 전출 및 영농에 종사하지 않을 경우 즉시 보조금은 회수 조치된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장흥군은 귀농자의 주택수리비도 지원하고 있다. 귀농자가 주택 내외부 수리, 보일러, 화장실, 부속시설 개보수를 한 경우 가구당 500만원 이내에서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상속, 증여를 포함해 주택을 구입하거나 5년 이상 임차한 귀농자가 해당된다. 또 장흥군에서는 귀농자이 귀농학교 수료 시 1인당 30만원 한도에서 수강료를 지원하고 있다.
물론 농식품부와 공통으로 진행하는 귀농자 창업 및 주택구입 지원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농지구입이나 비닐하우스 설치, 축사 신축, 농기계 구입 등 농어업 창업자금은 가구당 2억원까지 지원한다. 이자는 연 3%이며 5년 거치 10년 분할상환 조건이다.
장흥이 귀농지로 인기를 끌면서 귀농 성공 사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블루베리로 연간 2억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는 이승화 귀농인 연합회장이 있다. 서울에서 나름대로 잘나가던 건축업을 접고 귀농한 이씨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농업을 고집하면서 블루베리로 성공적인 인생 2막을 써내려가고 있다. 이씨는 장흥을 전국 최고의 블루베리 고장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다.
장흥군은 전국 첫 ‘은퇴자 도시’ 조성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랜드러버스코리아, 대우산업개발 등이 지난해 9월 3600억원 규모의 투자협약을 체결하면서 장흥 정남진 로하스 타운 개발이 본격 진행 중에 있다. 계획에 따르면 오는 2019년까지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비동리 일대 233만㎡가 1500가구 규모의 주택과 골프, 승마 등 체육시설, 의료‧교육 등의 시설이 갖춰진 복합 주거단지로 조성된다. 현재 1차로 43가구에 대한 분양이 시작됐다.
로하스타운이 조성되면 은퇴자를 비롯한 귀농자의 유입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해당리 일원에 조성되는 장흥 바이오식품산업단지도 2014년 최종 준공을 목표로 조성공사가 진행 중이다. 장흥읍 억불산 일원에는 100여만㎡의 편백숲에 전통 한옥, 편백 노천탕, 목재문화체험관 등을 갖춘 휴양시설인 장흥 우드랜드가 2009년 개장됐다.
장흥군청 관계자는 “대도시인 광주광역시의 인접도시도 아니면서 전남도에서 장흥이 귀농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며 “산, 바다, 강을 모두 즐길 수 있는 귀농지라는 것이 매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가는 인구가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통계청과 농림축산식품부가 밝힌 귀농·귀촌인 통계를 보면,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는 3만2424가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12년에 비해 20% 정도 늘어난 것이다.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앞으로 귀농·귀촌인구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도시의 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시골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시골 생활은 결코 낙원이 아니다. 낙후된 의료시설과 허술한 치안 속에서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도시에 있을 때보다 경제적으로 덜 풍족한 생활은 필연적이다. 원주민의 텃세도 결코 우습게 넘길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도시보다 더욱 힘겨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시골인지도 모른다. 시니어 전문 미디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전국의 귀농귀촌 현장을 돌아보며 성공적인 귀농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 그 방안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본다.
한 집 걸러 한 집 꼴로 거리마다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즐비한 서울. 이에 반해 지방의 경우 이같은 커피전문점들은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지방하면 다방이나 옛날식 커피숍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이러한 인식을 기분 좋게 깨부순 이들이 있다. 바로 전남 장흥에 위치한 카페 ‘원앤식스’의 이영중(32) 바리스타(Mr.One)와 이정원(40) 쇼콜라이티에다.
2009년 장흥군 건산리에 문을 연 ‘원앤식스’는 5년여 만에 장흥군 주민들을 감미로운 커피 향으로 매료시켰다. 직접 볶은 원두를 사용하고 초콜릿과 와플 등을 손수 만들어 판매하는 등 일반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과 풍미가 이곳만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처음엔 생소하게 느꼈던 주민들도 점차 커피를 알아가고 즐기기 시작하면서 ‘원앤식스’는 장흥군에 없어서는 안 될 커피문화의 사랑방이 됐다.
‘원앤식스’의 성공은 비단 커피문화의 전파뿐만 아닌, 귀농·귀촌에 대한 새로운 사례를 만들었다.
은퇴 이후 지방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것만이 귀농·귀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에게 이들 젊은이의 새로운 시도는 귀농·귀촌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커피에 대한 열정과 남다른 전략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원앤식스’의 의미가 남다르다고 들었다. ‘원앤식스’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부탁한다.
A. 이영중
"요즘은 대부분 손님들이 입소문으로 먼저 듣고 확인 차 물으시죠. '원앤식스가 무슨 뜻이에요?' 매번 듣는 질문이지만, 항상 웃음이 먼저 납니다. 저희 형제가 1남(ONE) 6녀(SIX)거든요. 그래서 원앤식스라고 이름을 짓기도 했지만, 가용 로스팅 포인트(시나몬 로스팅~프렌치 로스팅)에 따라 다양한 커피 향미가 느껴지듯 다채로운 카페의 형태를 지향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단 먼저 말씀드린 내용을 대부분 기억하고 이제는 단골손님들이 홍보해 주시죠. 원앤식스는 2009년 장흥을 시작으로 서울 성수동, 전남 강진군·영암군에도 포진하고 있습니다. 2년여 간 직영으로 운영하던 서울 성수동 매장을 제외한 강진점과 영암점은 커피 추출 테크닉과 다양한 메뉴 개발을 공동으로 진행·운영하고 있습니다.“
Q. 카페나 커피 문화가 생소할 수 있는 장흥에 내려오게 된 이유와 당시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A. 이영중
"2009년 당시만 해도 장흥군의 커피문화라는 것은 다방이라는 곳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해에만 해도 15곳 이상 되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커피전문점을 연다는 것은 '저 집 언제 문 닫나 내기할래?',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 마시지 누가 3000~4000원 주고 커피를 마셔?'라며 비웃음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절대 망하진 않을 거야!'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전에 서울 강남권의 대형 프랜차이즈에서 매니저를 했던 경력과 개인 카페와 레스토랑에서도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로스팅분야나 라떼아트, 핸드드립까지 다방면으로 이름난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수학했고, 장흥군에 처음부터 로스터리 카페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2009년 말 수제 와플까지 시작하면 강진군·보성군 등 인근 지역에까지 입소문이 돌았고, 우격다짐 식이었던 저희들을 좋게 봐주시고 찾아주신 손님들께 5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 감사해 하며 지냅니다. 커피에 대해서는 새하얀 백지상태였던 이곳에 커피로 한 방울 한 방울 물들이다 보니 이 작은 동네에 이젠 커피집이 10여 곳이 넘습니다.”
Q. 귀농·귀촌하면 나이 드신 분들이 지방에 내려가 농사짓는 모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원앤식스’의 경우엔 귀농귀촌에 대한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다. 귀농·귀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A. 이정원
"장흥에서 그런 게 될까? 라고들 하면서 시도조차 하지도 않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수요가 도시만큼은 많지는 않지만 꾸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귀농했으니 난 농사를 지어야지’만 생각하지 마시고, 대도시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곳에서 구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Q. 원두를 볶는 일부터 초콜릿·아이스크림·브라우니 등을 손수 만든다고 들었다. 메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개발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한 노력은?
A. 이영중
"‘학교 다닐 때 카페의 열정을 쏟았다면 아마 서울대학교에 가지 않았을까?‘하며 웃곤 합니다. 커피나 초콜릿 등 카페의 식음료는 생각보다 트렌디 합니다. 그래서 Cafe Show나 Salond de Chocolat 같은 커피나 초콜릿 관련 박람회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그때마다 서울과 지방간의 문화 차이를 고려해 접목할 아이템을 취사선택하기도 하거나 조금 비틀어 적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수제 초콜릿은 국내에서 이제 시작 단계인 아이템입니다. 운 좋게도 작년 말 스위스 펠클린사의 세미나에 초청돼 스위기 현지에서도 초콜릿을 공부하고, 전국의 쇼콜라티에들과 교류도 활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보면 만 5년을 카페에만 불태웠는데도 아직도 저희의 열정은 들끓고 있나 봅니다."
Q. ‘원앤식스는 OOO이다’라고 표현했을 때,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가? 또, 원앤식스가 추구하는 방향과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가?
A. 이정원
"‘원앤식스는 가족이다’라고 하고 싶네요. 나도 마시고, 우리 가족도 마신다는 생각으로 좋은 식재료 사용을 기본이자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원앤식스는 ‘가족이다’가 가장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저희가 5년간 카페 관련 내공을 꽤 많이 쌓았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이제는 그 내공을 표출해보려고 합니다. 조만간 장흥 매장 확장 계획에 있고, 그 이후에는 대도시를 섭렵하고 나가야겠죠? 아직은 100% 논의 중이기만 합니다."
Q. 요즘 100세 시대라는 말이 있다. 아직 젊지만 카페 이외에 인생2막에 대한 계획이 있다면?
A. 이영중
"저는 개인적으로 건축을 공부하다 커피에 빠져 건축을 그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성수점이나 강진점·영암점 모두 제가 손수 작업했습니다. 현재 제가 꿈꾸는 미래는 카페 사업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 관련 일을 하는 것입니다. 카페 컨설팅부터 인테리어까지 하는 그런 일을 꿈꾸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A. 이정원
"‘무언가에 미치면 결국엔 미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열정으로 카페 일과 초콜릿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도시에서도 저희의 노력이 쌓여 커피 분야에서도 초콜릿 분야에서도 장인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조금은 어색한 듯 쭈뼛쭈뼛 강의실로 들어서는 중년남성들. 새하얀 요리사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르니 제법 초보 요리사 태가 난다. 초반의 어색함도 잠시, 레시피가 적힌 종이를 받아 꼼꼼히 순서를 확인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준비된 재료도 만져보며 실습 준비가 한창이다. 이근재 강사가 수업을 시작하자 각자 외투 안주머니에서 볼펜 한 자루씩을 꺼내 들고는 칠판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요리를 배우기 위해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에 모인 그들은 ‘쿠킹 마이 라이프’의 수강생들이다. ‘쿠킹 마이 라이프’는 영등포 시니어 행복발전센터가 은퇴 후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베이비붐 세대를 위해 마련한 시니어 남성 요리교실이다. 요리의 매력에 흠뻑 취해 맛있는 인생 2막을 달리고 있는 초보요리사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젊은 노인·웃는 노인·멋쟁이 노인’ 이 세 가지가 내 남은 인생의 모토야.”
이제는 반 요리사가 다 됐다며 너스레를 떠는 이남칠(68)씨. 요즘은 매일 아내와 함께 식사준비를 하다 보니 부부 사이도 더 돈독해졌다. 강의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이씨. 그가 처음 요리를 배우고 부엌에 들어서자 부인의 첫 마디가 ‘당신 미쳤어?’였다고. 이씨가 맨 처음 만든 돼지목살찌개를 맛본 아내는 크게 만족하며 이제는 왜 부엌에 안 들어오나 하고 기다릴 정도라고 한다.
“‘아버지의 부엌’이라는 책을 읽고 요리를 시작하게 됐지. 딸이 어머니가 죽고 혼자 남은 아버지를 위해 요리도 가르치고 하면서 홀로서기 훈련을 시키는 내용인데, 그거 읽으니까 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더라고. 내가 우리 와이프랑 동시에 하늘나라 못 가면 내가 스스로 나를 지켜내야겠다 싶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에 집사람 밥하는 거 도와주고 살면 또 좋겠다 싶더라고”라며 연신 정성스레 멸치를 다듬었다. 멸치 한 마리를 다듬어도 정성을 다해야 맛있는 음식이 나온다는 말하는 그다. 이씨에게 인생 2막 계획에 대해 묻자 그는 ‘젊은 노인·웃는 노인·멋쟁이 노인’ 이 세 단어가 어울리는 노인으로 늙어가고 싶다며 요리를 통한 봉사활동도 해 보고 싶다고 전했다.
“삼식이 소리 듣고 살 수 있나. 내 손으로 밥 차려 먹으려면 배워야 해.”
2기부터 시작해 어느덧 4기째 ‘쿠킹 마이 라이프’에 참여하게 된 조용휘(65)씨. 작년 은퇴 이전까지는 라면밖에 끓여 본 적이 없던 그였다. 조씨는 “내가 필요해서 시작했지.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언젠가는 또 혼자 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고”라며 은퇴 후 하나둘 노후 준비를 해가던 중 가장 먼저 삼식이(은퇴 후 바깥에 나가지도 않고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는 남편을 가리키는 신조어) 신세만큼은 면해야겠다 생각했다고. 이제는 아내 없이도 소박한 한 끼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을 겸비했다.
조씨와 함께 2기부터 수업에 참여해온 박우만(64)씨는 이제 자신만의 요리 세계를 구축해 나가겠다는 포부를 다진다. 투박한 손으로 버섯을 조물조물 무쳐내는 모습이 제법 요리가 능숙해 보였다. 평소에는 작은 사무실을 운영하며 취미 활동 삼아 요리를 시작했다는 그는 가끔 손주와 며느리에게 직접 저녁 식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고. “얼마 전에는 손주한테 카레 덮밥도 해주고 그랬지. 아직 배우는 단계지만 나만의 방법을 찾고 나면 훨씬 요리가 재밌고 좋아질 것 같아.”라며 다음 5기 수업에도 참여해 더 많은 요리를 배워가고 싶다고 말했다.
“상남자가 되기 위해 앞치마를 둘렀지.”
요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상남자’가 되기 위해서라고 답한 유연봉(65)씨. 그가 설명하는 상남자의 의미는 남달랐다. “상남자가 무엇이냐. 내가 생각하는 상남자는 스스로 자신을 돌볼 줄 알고, 건강 유지하면서 나이 먹었다고 처자식에게 기대지 말고 오히려 가족을 돕고 힘이 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 3년 전 아내와 사별한 유씨는 이제는 정말 스스로 밥을 해먹어야 하는데 혼자 먹더라도 더 건강하고 맛있게 해먹고 싶다고 말했다. 유씨는 “일주일에 세 번은 소년원에 봉사활동 가서 아이들 한자도 가르치고 하면서 선생님으로 지내지. 젊은 애들이랑 지내다 보니 나도 젊어지는 기분이랄까. 이제는 애들이 ‘형님, 형님’ 할 정도라니까. 하하하.”라며 아이들도 가르치고 요리도 배우며 취미생활을 즐기니 외로움을 느끼는 날은 거의 없다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유씨와 한 조리대에서 마주하고 서서 묵묵히 요리를 해나가던 이환수(56)씨. 얼굴의 절반을 가린 마스크를 쓰고 있던 터라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육수 간을 보기 위해 마스크를 벗자 멋을 낸 턱수염과 주름살 없는 동안 외모가 눈길을 끌었다. 나이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56살입니다. 이제 막 턱걸이 한 거죠 뭐. 은퇴까지는 한 3년 정도 남았는데 작년에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2년 동안 휴직상태인데 그동안 노후대비도 할 겸해서 요리도 시작한 겁니다.”라고 답했다. 그가 계획하는 노후대비에 대해 묻자 “은퇴하고 나면 귀농하려고요. 내려가서 농사도 짓고 좋은 공기 마시면서 건강하게 살고 싶어요. 우선 아내보다 먼저 내려가서 이것저것 준비하려 하는데 그럼 혼자 밥을 해먹어야 할 거 아녜요. 그러려니 요리도 노후 준비에 빠질 수 없죠.”라고 설명했다.
요리실습 시간이 끝나자 강의실에는 따끈한 흰 쌀밥과 김치가 마련됐다. 각자 만들어낸 요리를 삼삼오오 모여 함께 맛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기자도 함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어르신들이 손수 끓여내신 버섯들깨탕을 맛보았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현재 우리나라에 남성들을 위한, 특히 중장년 남성들을 위한 요리교실을 찾아볼 수 없다는 시니어들의 고충을 들을 수 있었다.
오직 요리를 배우기 위해 2008년 직장을 은퇴하고 지역 곳곳의 요리교실을 돌아다녔다는 A씨는 목에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요리 배우겠다고 학원이고 센터고 다 돌아다녀 봤는데 가보면 다 30~40대 여자들이야. 요리 배우러 왔다고 하면 ‘남성분 혼자이신데 그 연세에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물어봐. 언뜻 보면 배려해주는 거 같아도 그게 거절 아닌 거절인 거지. 수강생들도 불편해하고 하니까 받아 줄 수 없다는 거야. 어디 요리뿐이야. 나이 먹은 남자가 어디 가서 뭘 배우는 게 요즘 세상에 쉬운 일이 아니야. 내 돈 주고 배우려는데 뜻대로 안 되니 원.”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는 현재 존재하는 남성시니어 요리교실은 ‘쿠킹 마이 라이프’가 유일하기 때문에 수업이 계속되는 한 끝까지 배워나가겠다며 열의를 다지기도 했다.
영등포 시니어 행복발전센터는 2012년 12월 1기를 시작으로 현재 4기째 ‘쿠킹 마이 라이프’를 운영하고 있다. 수업은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영등포에 위치한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에서 진행된다. 이번 4기 수업은 버섯들깨탕·버섯강된장찌개·양배추찜·깻잎전·닭찜·두부조림·뚝배기불고기 등 한국 가정식뿐만 아니라 생선초밥·크림스파게티 등 별미도 배워볼 수 있어 시니어들의 기대도 매우 크다. 첫 수업에서 대다수의 시니어는 상당히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5기 때도 참여해 더욱 다양한 요리에 도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쿠밍 마이 라이프’ 5기 수업은 5월 말부터 진행될 예정이며 자세한 사항은 영등포 시니어 행복발전센터 블로그(http://blog.naver.com/ydphappy1)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