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77) 씨는 2000년경 계열사 사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이후 협력업체를 세워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회사생활이나 사업은 큰 어려움 없이 잘해왔지만 가정사는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고 아내가 2000년 초 일찍 세상을 떠났다. 큰아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그곳에서 결혼해 살고 있고, 큰딸은 사업가와 결혼 후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다. 큰아들에게는 유학 자금과 함께 사업 관련 명목으로 100억 원 가까운 거금을 주었지만, 한국에 들어온 것은 어머니(A 씨 부인)가 사망했을 때, 그리고 사업이 잘 안 돼 시가 50억 원가량의 청담동 빌딩을 증여해 달라는 부탁을 하러 왔을 때뿐이었다. 사업 자금을 더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A 씨가 거절한 이후에는 소식조차 없다. 큰딸도 부모가 결혼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크게 싸우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버렸다. 20년 가까이 왕래는 물론 전화 한 통 온 적 없고, 심지어 어머니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A 씨 곁에 남아 있는 가족이라고는 아직 미혼인 작은딸밖에 없다. 작은딸을 결혼시키려 A 씨와 지인들이 여러 번 남자를 소개해줬지만 소용없었다. A 씨가 보기에 요즘 들어 부쩍 기력과 기억력이 떨어지고 외로움을 타는 자신을 돌보기 위해 그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A 씨는 자신의 전 재산과 기업을 작은딸에게 모두 물려주고 싶다. 어떻게 하면 될까?
먼저 A 씨는 생전에 모든 재산을 작은딸 명의로 이전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작은딸이 다른 형제들로부터 유류분 반환청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방법으로는 유언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언은 그 내용이 불법이 아닌 한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유언의 효력이 발생하는 사망 시까지 언제든 유언을 철회하거나 변경할 수 있고, 그 재산을 사용, 수익, 처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유언에는 중대한 제한이 있다. 자필증서, 비밀증서, 공정증서, 구수증서, 녹음 등 민법이 정한 5가지 방식을 엄격히 준수해야 효력이 발생한다. 법에 의해 보장되는 최소한의 상속 재산인 유류분도 제한으로 작용한다. 유류분제도는 개인의 유산 처분에 대한 자유와 재산의 공평한 분배라는 대립되는 요청을 법으로 조정하는 제도다. 역사적으로는 남녀차별 해소와 가족의 생활보호, 상속인 간의 불공평 해소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유류분은, 직계비속(사망자의 자녀와 손자녀)과 배우자는 법정상속분의 2분의 1이고, 직계존속(사망자의 부모 등)과 형제자매는 법정상속분의 3분의 1이다. 법정상속분이란 민법에서 정해둔 상속분으로서 상속재산분할의 기준이 되는 비율을 말한다. 법정상속분은 공동상속인들 사이에서는 균등한데, 사망한 사람의 배우자 법정상속분은 사망한 사람의 자식이나 부모의 상속분에 50%를 가산한다. 예를 들어 사망한 사람에게 딸 2명과 아들 1명, 그리고 아내와 부모가 있으면 직계비속인 딸들과 아들(1순위 상속인)과 아내(배우자)만 상속인이 되고 그 비율은 1:1:1:1.5가 되기 때문에, 법정상속분은 딸들과 아들은 9분의 2씩, 아내는 9분의 3이 된다. 따라서 유류분은 딸들과 아들의 경우 18분의 2, 아내는 18분의 3이 된다. 이런 유류분제도에 대해, 유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약할 뿐 아니라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외국의 입법례에 비해 그 비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비판도 있다.
유류분제도 때문에 A 씨가 자신의 전 재산을 작은딸에게 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해두더라도, 큰아들과 큰딸은 A 씨의 유언이 없었을 경우 자신의 받을 수 있는 법정상속분의 반씩을 작은딸에게 청구할 수 있다. 다만 유류분제도 역시 상속인들 간의 유산 분할의 공평을 꾀하기 위한 제도라서, 유류분 부족액을 계산할 때 상속인들 중에 이미 피상속인(사망자)으로부터 생전에 증여받은 재산이 많은 사람이 있다면, 그 금액(이를 특별수익이라고 한다)만큼 반환받을 금액에서 공제한다. 따라서 생전에 특별수익액이 많은 큰아들은 특별수익액이 거의 없는 큰딸에 비해 유류분으로 받을 금액이 훨씬 적거나 없을 수도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신탁계약을 체결해두는 것이다. 두 번째 칼럼에서 필자가 소개한 것처럼, A 씨는 생전에 신탁회사 등에 전 재산의 명의(소유권)를 이전하고, 생전에는 그로부터 나오는 이익(임대료, 이자, 배당소득 등)을 갖되, 사후에는 A 씨가 상속인으로 지정한 작은딸만이 그 수익권을 갖도록 정해둘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유언을 대체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신탁계약을 할 때 수익권 발생 또는 분배, 지급 방법, 신탁 재산의 처분 조건 등에 관해 자세히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사후에도 재산이 신탁자의 뜻대로 사용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다만 신탁제도를 이용해도, 현행법상 상속세와 증여세 감면 혜택이 없고, 수익권을 받지 못한 다른 상속인의 유류분청구를 막을 수 없다는 면에서는 장점이 제한적이다.
사람들은 유산 상속, 분배와 관련한 법률과 제도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말들을 하지만 가족법, 세법 같은 법률이나 제도가 아무리 잘 마련돼 있고 현실에 맞게 개정된다 해도 가족끼리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 자신이 노력해서 벌지 않은 것에 대해 ‘공평’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는 이상, 유산을 둘러싼 가족 간의 진흙탕 싸움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재산 때문에 자손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지내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생전에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아낌없이 쓰다가 깨끗이 기부를 하고 떠나는 ‘웰다잉’을 계획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호를 끝으로 김성우 변호사의 ‘상속과 증여 톺아보기’ 연재를 마칩니다.
김성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2002년부터 판사로 활동. 2015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한정후견개시사건을 담당했고, 2018년부터 2019년 2월까지는 상속재산분할사건, 이혼과 재산분할 등에 관한 가사항소사건을 담당하는 합의부 재판장을 역임했다. 2019년부터 법무법인 율촌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상속, 후견, 가사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 중 한 명이다.
연탄 한두 장의 온기로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는 이웃들이 있다. 대부분 오래된 주택가로 연탄배달 차량이 들어갈 수 없는 구석진 곳이다. 독지가들의 기부로 마을 입구까지 배달돼온 연탄을 집 안까지 한 장 한 장 손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 한두 장은 몰라도 서너 달 쓸 양은 만만치 않아 옮겨주는 사람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그 손길을 보탠다. 연탄배달 봉사활동이다.
나도 3년 전부터 같은 취지의 봉사단원으로 초겨울이 오면 연탄배달 봉사를 한다. 좁은 골목길이나 언덕을 오르내리며 2~3시간, 길게는 4시간 정도 손으로 나르는 일이어서 나이 든 사람에게는 힘에 부친다. 지난 11월 29일 아내의 걱정을 뒤로 하고,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상계종합사회복지관(서울시 노원구)을 통하여 선정된 당고개 지역에 사는 불우 노인 다섯 집에 연탄을 옮겨 쌓아주었다. 한국산업은행이 후원하는 KDB사회공헌아카데미 수료생 남녀 20여 명과 함께 가수 소녀시대 수영 씨 등이 기부한 연탄 1,040장을 옮겼다.
네 집엔 200장씩 그리고 한 집은 240장을 배달했다. 겨울을 나기에 다소 부족해 보이는 양을 옮겨주었으나 이미 들여놓은 연탄이 남아있어 이번 겨울은 그럭저럭 버틸 듯하다.
천 사십장을 봉사자들이 연탄을 쌓아놓은 곳에서 배달할 집까지 컨베이어벨트형으로 일렬로 서서 2시간에 걸친 작업을 했다. 손으로 한 장 한 장 옮기는 일이 꽤 힘들었지만, 통장 아주머니가 끓여온 대추차가 우리 봉사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줬다.
연탄 한 장으로 6시간 정도 걸려야 방 구들이 조금 따뜻하게 덥혀진다고 한다. 하루에 4장이 들어가는 셈이다. 연탄 한 장의 값이 780원이니 하루에 4장 때면 하루 연탄값이 3120원. 커피숍의 커피 한 잔 값도 채 안 된다. 칼바람 이는 겨울, 노인들이 연탄이라도 마음껏 피우며 따뜻하게 몸을 덥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중장년 부부나 연인의 안정적인 관계 유지를 위한 생활 방식으로 ‘LAT’(따로 함께 살기)를 꼽았다. 최근 중국의 시니어는 하루 170원 정도의 이용료로 원격진료와 식사배달 등 다양한 서비스를 누리는 ‘스마트 홈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한편, 한 70대 노부부가 의료비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미국 중산층을 둘러싼 ‘메디-메디’ 혜택에 대한 쟁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미국 ‘LAT’ 시니어 부부, 독립성과 자유성 매력적
월스트리트저널은 결혼하지 않은 중장년 연인이, 젊은 연인들보다 더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 비결 중 하나로 ‘LAT(Living Apart Together)’ 방식을 꼽았다. ‘따로 함께 산다’는 의미를 지닌 LAT는, 결혼해서 한집에 동거하거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각자 독립된 생활을 하면서 일정기간만 상대의 집에서 사는 관계를 말한다.
미국의 새로운 가족 형태로 떠오르고 있다. 가령 일주일에 나흘은 한집에서 지내고, 나머지 사흘은 각자의 집에서 생활하는 식이다. 특히 주거공간을 소유한 중장년층 중에 LAT족이 많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이 꼽은 LAT족의 가장 큰 장점은 ‘독립성과 자유성’이다. 간헐적으로 함께 생활하며 즐거움을 누리되, 독립된 개인의 공간이 있어 사생활을 모두 공유하거나 일상 패턴을 맞춰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한층 자유롭다는 것. 최근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른 ‘졸혼’도 이러한 점에서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중국 시니어 돌보미로 거듭나는 스마트 홈 기술
중국에서 시니어를 위한 스마트홈 서비스가 출시됐다. 하루에 1위안, 원화로 170원 정도의 이용료를 지불하면 원격 진료는 물론 긴급 병원 호출, 주택 보안, 식사배달 등 다양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중국 시니어 간호 분야의 선두주자인 란창 네트워크 테크놀로지(Lanchuang Network Technology)가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중국 시니어 세대를 위해 개발한 스마트 홈 서비스다.
TV와 페어링된 웹캠에 아이폰의 ‘시리(Siri)’와 유사한 음성 도우미 ‘샤오이(Xiaoyi)’를 불러 다양한 유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4개월 전에 시작한 란창의 스마트 홈 서비스에는 16개 도시에서 22만 명이 가입했다. 특히 중국 내에서도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산동 지역에서 절반 이상 등록했다. 란창은 지금까지 ‘차이나 모바일’과 협력해 시니어 스마트폰 서비스를 실시해온 회사다. 지난 4월 중국 정부는 스마트 기술과 재정 지원을 포함해 해당 부문을 위해 개발될 서비스에 대한 상세한 정책 문서를 발표했다. 란창의 스마트 플랫폼에 대한 보조금으로 약 2200만 위안(266억 원)을 제공했으며, 산동성 정부도 300만 위안(36억 원)을 기부했다. .
미국‘메디-메디’ 혜택 못 받는 중산층, 의료비 부담에 자살까지
지난 8월 미국 워싱턴 주 와콤카운티에서 70대 노부부가 의료비 부담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911에 전화를 걸어 자신들의 자살을 예고했고, 유서에는 “더 이상 의료비를 갚아나갈 수 없어 극단적 선택을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미국 노인들의 경우 정부 의료보험인 ‘메디케어’와 저소득층 의료보조 제도인 ‘메디케이드’, 이른바 ‘메디-메디’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메디케이드를 받기엔 재산이 많지만, 의료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인 중산층 노인. 그들에게 남은 메디케어는 자기 부담률도 적지 않을 뿐더러, 양로병원과 자택간병 등 장기케어는 해당하지 않아 실질적으로 큰 도움을 받기 어렵다. 이번 사건의 노부부 역시 이러한 고충으로 유명을 달리해 안타까움을 샀다. 그러나 미국의 중산층 인구는 점차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는 데 반해, 이와 관련한 정부의 대응은 미흡한 상황이다.
한편 우리 정부는 2017년 8월 환자가 비용을 부담하는 비급여를 건강보험에 적용하고, 노인,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의 의료비를 낮추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이른바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제도다. 비급여 진료 문제가 있어 보험 적용을 받은 후에도 본인 부담금이 많고, 상한선이 없는 고액 진료비에 고충을 겪는 중산층을 위한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시행 3년 차, 소득 1~5분위 계층의 의료비는 42만~55만 원이 절감됐지만, 보다 면밀한 검토와 효율적 운용이 필요한 시점이다.
검단농협 오왕지점에 머물러 있으면 은행을 찾는 손님들 외에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2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의 발길을 따라가면 빼어날 수(秀)에 많을 다(多), 집 원(院) 자가 새겨진 한자 팻말이 눈에 띈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지? 궁금증을 안은 채 철문을 여니 햇살에 부서지듯 와르르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세요, 수다원입니다.” 정체불명의 공간을 책임지는 나영자(66) 수다원 원장의 목소리가 낯선 이를 반긴다.
“이름을 짓는 데 신중했어요. 이 동네가 자연부락이 재개발되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이라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과 새로 유입된 사람들 사이 괴리감이 있거든요. 원래 거주하던 분들을 ‘토백이’, 새로 유입된 분들을 ‘아파트 사람들’이라 구분지어 부를 정도로 거리감이 확연했는데, 전 그게 참 안타깝더라고요. 다 한동네 사람들인데 서로 즐겁게 지낼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수다원이란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거죠. 함께 모여 수다떨면서 융합하고, 정보도 교환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 이름을 지었어요.”
나영자 원장이 수다원을 만들게 된 계기는 담백하고도 의미가 깊다. 이웃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네’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던 것. 그렇기에 수다원의 활동은 거창하진 않아도 따스하고 잔정이 깊다. 바쁘게 살다 보면 잊고 지나치기 일쑤인 생일을 챙겨주고, 봄가을이면 그 옛날처럼 설렘을 안은 채 근교로 소풍을 떠나고, 때로는 곱디고운 꽃도 그려보고 사군자도 친다. 영화감상이나 네일아트, 도자기와 승마체험 등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특강은 문화시설이 부족한 이 동네에서 큰 호응을 받는 프로그램. 새해를 맞으면 동네별로 재료를 준비해 큰 양푼 두어 개에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을 먹는 특별한 시무식을 열고, 연말이면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증정하는 송년회를 열기도 한다.
단절된 동네의 융화를 위한 사랑방
한마디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복하게 융화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활동이든 제약이 없다. 재미난 건 나 원장이 ‘토백이’와 ‘아파트 사람들’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 1980년대에 수다원 인근에 위치한 단봉초등학교에 재직한 적은 있지만 이 동네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퇴직 직전이다. ‘토백이’ 중에는 재직 당시의 학부모들이 남아 있어 친근하고, 나 원장은 ‘아파트 사람들’에 속하기도 하니 중간자적 입장에서 이런 공간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캐치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장 큰 목표는 남녀노소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가을부터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꽃꽂이 강의를 열고, 젊은 엄마들의 기존 독서모임이 있는데 동화구연도 더할 생각이에요. 퇴직하신 어른들을 초빙해 초등학생들에게 천자문과 바둑, 장기 등을 가르칠 계획도 있고요. 중요한 건 실용성을 뛰어넘는 감정의 확산에 있어요. 시골 할머니들이 꽃꽂이 배운다고 플로리스트가 될 건 아니잖아요? 다만 꽃꽂이를 하고 그걸 집에서도 응용함으로써 평생 안 해본 경험을 하고, 그 경험과 감정을 가정에서도 공유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한자 몇 자 알게 하고, 바둑과 장기의 스킬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 그걸 매개체 삼아 인성 지도를 받게 해 사람 됨됨이가 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에요.”
여성 회원이 많다 보니 남성들은 궁금해서 슬쩍 들렀다가도 쑥스러움에 발길을 돌리곤 한다. 수다원은 남성 회원 역시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수다원에 흔쾌히 공간을 빌려준 농협의 운영시간에 맞추다 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밖에 문을 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초등학생들은 물론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나영자 원장의 계획이다.
도서관도, 문화센터도 없는 문화 불모지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는 수다원은 2017년 5월 10일 개원 직후부터 빠르게 성장해왔다. 개원 당월에 봄소풍을 다녀온 이래 꾸준히 배우고 경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최근에는 비영리단체로 등록까지 마쳤다. 그간 무료로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이 단체 등록을 계기로 1365 자원봉사포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나 원장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여실히 묻어난다.
함께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삶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하는 능력은 사실 쉽지 않다. 수다원을 이끄는 나영자 원장의 리더십은 그녀가 평생 쌓아온 시간에서 기인한다.
나 원장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2015년 교감으로 퇴직할 때까지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하며 보냈다. 남편과는 주말마다 양로원에 가고, 세 자녀 또한 고아원으로 봉사를 보낸다. 모범공무원 선정, 신일스승상 선정, 녹조근정훈장 수여 같은 명예로운 수상은 봉사의 삶을 살면서 따라온 부상들. 퇴직하고 난 뒤에도 자신의 역량을 활용해 남을 돕는 삶을 살아왔다.
“정년 10년 전부터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동미술을 전공한 데다 미술교사 동아리 활동도 했고 개인 작업을 거쳐 전시회도 몇 차례 하며 국전에도 입선한 경험이 있어서 그림을 가르치며 봉사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 특유의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느껴서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된 거고요. 여기서도 다양한 미술활동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으니 더 외연이 넓어진 셈이네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행복 추구로 귀결된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수다원은 치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수다원 회원 중에는 수십일 동안 집 안에 칩거해 있을 만큼 감정적으로 고립됐던 사람도 있고, 아픈 손자 때문에 홀로 마음앓이를 했던 사람도 있다. 전문가의 치료로도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만큼 우울 증상이 깊었는데 수다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사실 제가 상담사와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도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에게 필요했던 사람은 자격증을 지닌 전문가보다는 눈을 맞추고 꾸준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였다고 봐요. 요즘은 오전 9시 땡 하면 수다원 문을 열고 오실 만큼 열성적인 회원이 되셨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사람들과의 교류 때문에 행복해지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퇴직하고 나서도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이곳으로 오거든요. 사람들과 함께하니 외로울 일도 없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사비를 털어 수다원을 개원할 당시 ‘과연 사람들이 모일까?’ 했던 기우는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이 행복해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필요한 지원금을 확보하려 동분서주할 때도 초반에는 수다원의 존재를 몰라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인근에서 모두 아는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수다원이 위치한 인천 오류왕길동은 물론 검암지구, 멀리 김포에서도 수다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진작 이런 곳을 알았으면 여기로 이사 올걸” 하며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만큼 사람들 간 교류가 이뤄지는 공간이 적다는 방증이리라.
“이 공간의 장점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끼리 정보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한동네 사람들이 애들 데리고 가볼 만한 곳은 어디인지, 어느 곳에서 질 좋고 저렴한 물건을 살 수 있는지 실용적인 정보교환이 이뤄지니 건설적이죠. 이런 공간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며 시간을 보내거나 몇몇이 몰려다니며 쇼핑이나 가십에 열중하게 되지 않겠어요?”
은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말
나영자 원장의 말에 따르면, 교직생활을 마치고 은퇴자의 삶을 사는 이들도 다른 은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형으로 나뉜다. 여러 명이 모여 등산이나 나들이 갔다가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가는, 흔히 남성들에게서 보이는 삶. 손자손녀들을 맡아 돌보거나 자식들 살림을 도와주는 삶.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는 삶 등등. 그녀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맡아준 적도 있고, 자신이 직접 육아를 해보기도 했지만 길러보니 자식은 부모가 키울 때 더 보람차고 행복했다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손자손녀를 돌보는 은퇴 후의 삶은 마다했다. 퇴직 후 남을 돕고 사는 삶을 살기로 했지만 수다원을 만들기 이전에도 서구역사문화연구회를 꾸려 회장을 맡는 등 봉사에 임하는 모습이 수동적이지 않다. 아니, 마치 개척자의 용기를 보는 것 같다.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내 것을 먼저 내어준다’는 마음가짐이에요. 봉사를 한다 해도, 퇴직 후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아요. 돈이든, 시간이든, 열정이든 내 것을 먼저 내어놓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요. 저도 수다원을 만들었지만 수익이 난다거나 경제적인 이득을 보는 건 없어요. 감자철이면 감자를 한두 박스씩 사다가 쪄서 나누는 등 오히려 퍼다 나르는 게 많지요.(웃음)”
4년 전 퇴직해 성실히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는 만큼 나영자 원장의 조언은 디테일하다. 과거의 영화를 잊어야 하는 건 물론 앞으로 소속되어 살아갈 커뮤니티에 맞춰 말투와 행동거지, 옷차림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최악은 ‘내가 왕년에 이랬는데’ 하는 생각입니다.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이었다고 은퇴하고 나서도 교장선생님 대접받길 바라면 곤란하죠. 특히 전문직에 종사했던 분들이 은퇴 후 이사하거나 귀농귀촌한 동네에서 은연중 우월의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거기다 초점을 맞춰, 편하게 말해도 될 이야기를 영어까지 섞어 말하면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튀어 보일 수밖에 없죠. 손주들도 할머니가 자기들 수준에 맞춰 놀아줘야 좋아합니다. 은퇴 후에는 왕년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함께 살아갈 동지를 만들어야 해요.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답니다.”
100세 시대인 만큼 예순여섯 살 나영자 원장은 아직 살아갈 날이 한참 남았다. 그녀가 꿈꾸는 성공한 삶, 더 많은 사람과 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삶을 위해 내일도 나 원장은 더 많은 사람과 신명나게 수다를 떨고 웃을 예정이다. 나눌수록 행복하다는 믿음을 안고서.
52년 전통 ‘양산집’
부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돼지국밥’. 그중에서도 양산집은 깡통시장 거리에서 처음으로 돼지국밥을 팔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래된 돼지국밥집을 생각하면 연세 지긋한 할머니가 연상되지만, 이곳 주인장은 갓 서른을 넘긴 청년 노치권(31) 씨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인 만큼, 젊은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은 덕을 보리라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노 씨의 사정은 좀 달랐다. 군 제대 후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준비하던 무렵,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병마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속에서 남은 것은 양산집, 그리고 20대 청년의 열정뿐이었다. 주인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당장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직장생활보다는 가게의 맥을 잇는 게 좋겠더라고요. 보통 가업을 이으려면 이전 세대에게 음식 만드는 법부터 가게 운영까지 노하우를 전수받게 마련인데, 저는 그럴 겨를이 없었죠. 어린 시절 어깨너머로 보던 것에 친척이나 주변 지인들 조언을 더해 나름 맛을 구현했는데, 처음엔 정말 형편없었어요. ‘아들이 하더니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죠. 그땐 차마 ‘3대째’라는 타이틀을 걸 수가 없더라고요.”
칼질도 배우지 못한 채 뛰어든 장사였다. 얼마간은 가게 일을 마치고 인근 일식집에서 일손을 도우며 칼질을 익혔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쓰던 재료 안에서 국밥을 연구해가며 차츰 본래의 맛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렇게 주변 상인들과 단골들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2014년 드디어 ‘3대째’라는 타이틀을 자신 있게 내걸었다.
“손맛을 살리는 데도 노력했지만, 더불어 염두에 뒀던 건 ‘가게의 정신을 잇자’는 거였어요. 두 분께서는 고된 장사를 하시면서도 늘 주변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 하셨죠. 3대에 걸쳐 내려오면서 물질만 물려받는 게 아닌, 이전 세대의 이념까지 이어가면 좋겠더라고요. 원래는 지역명을 딴 가게 이름인데, ‘기를 양(養)’, ‘물 흐를 산(汕)’이라는 한자를 써서 ‘끊임없이 베풀겠다’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실제 양산집은 오래전부터 수익금 일부를 어려운 이웃과 기관에 기부해왔다. “모두를 배부르게 하라”던 할머니의 말씀처럼, 그는 윗세대에게 물려받은 ‘큰 그릇’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데우고 있었다.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언 몸과 마음을 녹이는 것처럼, 국밥을 통해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싶어요. 내가 열심히 장사해서 번 돈으로 다른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긍심도 생기죠. 국밥처럼 따뜻한 세상을 위해 베풀 줄 아는 ‘큰 그릇’이 되고 싶습니다.”
부산1호선 자갈치역 3번 출구 도보 9분 거리
주소 부산시 중구 중구로47번길 30
영업시간 매일 10:00~20:00 (브레이크타임 15:00~17:00)
대표메뉴 돼지국밥, 수육·편육, 수육백반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2015년 6월, 이유진(65) 씨는 그동안 운영했던 어린이집을 정리했다. 그러곤 자신의 또래들과 어울릴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을 찾기 위해 서울시어르신취업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종이접기지도사로도 활동했던 만큼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실버 패션이나 모델 쪽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결국 바리스타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그렇게 2016년 봄 커피의 세계에 입문해, 그해 겨울 바리스타 1·2급을 섭렵했다. 2급 취득 후 1급 준비 과정에서 18:1의 경쟁률을 뚫고 서울노인복지센터 내 카페에 취업하는 기회도 얻었다.
“한때는 자녀들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종이접기를 했고, 그다음엔 손주들 생각하면서 어린이집을 운영했어요. 환갑이 지나고 나니 이제는 나를 위한 일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바리스타를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참 만족스러워요. 체력 소모도 적고, 카페라는 공간이 쾌적하기 때문에 일하면서도 상쾌하고 즐겁습니다.”
자격증 취득 후 관련 경력이 없는데도 바로 취업에 성공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유진 씨 특유의 환한 미소와 친절한 말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역시 기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고객 응대라고 설명했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능숙하게 다루고 커피를 잘 제조하는 기술도 필요하지만, 고객과의 유대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커피 박람회를 갔는데 이제는 탬핑(tamping, 분쇄된 커피를 다지는 과정)까지 자동으로 되는 기계가 있더군요. 기기에 따라, 원두에 따라, 사소하게는 그날의 날씨에 따라서도 커피 맛은 미세하게 다를 수 있지만, 진실한 마음만큼은 늘 최상으로 담아내려고 노력해요. 그 정성을 아시는 건지 특별히 제게 커피를 부탁하는 고객도 계십니다.”
자격증 따고도 연습 안 하면 ‘장롱면허’되기 일쑤
최근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바리스타 과정과 커리큘럼이 늘어나고 있다. 바리스타는 중장년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도 인기가 높은 종목. 그는 아무래도 전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는 수업의 경우 시니어가 듣기엔 다소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 교육기관이나 사설 학원 등은 젊은 수강생이 많고 그들 위주로 수업이 진행돼 시니어가 따라가기에 버거울 수 있어요. 지자체 기관이나 노인복지센터 등에서 운영하는 시니어 대상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진도도 알맞고 비용도 적게 들어 좋죠.”
바리스타 자격을 취득하려면 필기와 실기를 모두 치러야한다. 필기 준비의 경우 학원이나 집 등에서 개인의 스케줄에 맞게 노력껏 공부하면 되겠지만, 실기는 상황이 좀 다르다. 실습에 꼭 필요한 에스프레소 머신의 유무 때문이다. 아마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용하는 가정은 극히 드물 것이다. 때문에 학원이나 기관의 실습시간을 제외하면 연습할 기회가 딱히 없는 셈. 때문에 이유진 씨 역시 실습 이외의 시간에는 유튜브 동영상 등을 보며 과정을 익혔다.
“자격증 취득 후에도 마찬가지예요. 운전면허를 따고 운전하지 않으면 장롱면허기 되듯 자격증을 땄더라도 커피를 만들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리고 말아요. 교회 내 카페 등에서 봉사활동이나 재능기부를 하면서라도 손기술을 익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커피를 내리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바리스타로 일하다 보면 그밖에 카페 업무에도 능숙해져야 한다. 이유진 씨도 바리스타로서 커피를 내리고 고객을 맞이하는 일 외에 재고 파악, 설거지, 테이블 정리 등 다양한 카페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제는 일이 제법 손에 익었지만, 새로운 도전 기회도 엿보고 있다.
“지금 일하는 곳은 센터 내에 있어서 북적이지는 않아요. 일반 카페에서도 한번 일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젊은 바리스타가 많아 시니어 바리스타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또 여기서 일하는 것보다 힘들겠지요. 그래도 시니어의 한계라고 여기는 것들을 뛰어넘어보고 싶습니다.”
아내가 자매들과 함께 여행하고 싶다고 해 이번 여행은 캠퍼밴 여행으로 결정했다. 두 처형과 처제 그리고 아내와 나 다섯 명이 25일 동안 뉴질랜드의 구석구석을 다녔다. ‘마음 가는 대로 걸으며, 자신을 보채거나 강요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청정 국가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연의 보고를 다니면서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을 배웠다. 뉴질랜드는 나를 격려하는 모든 조건을 갖춘 여행지였다. ※ 본 기사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성수기 여행 차량 예약은 미리미리
캠퍼밴 여행은 소파와 침대는 물론 주방, 식탁, 화장실, 냉장고, 에어컨, 가스, 샤워 시설까지 갖춘 개조 차량을 타고 다니며 즐기는 여행 방법이다. 뉴질랜드에서 캠퍼밴(camper van, 캠프용 밴)을 빌리려면 ‘2종 보통 이상’의 국제운전면허증을 소지한 21세 이상 75세 미만의 운전자가 있어야 한다. 캠핑과 익스트림 스포츠의 천국인 뉴질랜드에는 ‘마우이(Maui)’, ‘주시(Jucy)’ 등의 렌탈 회사가 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회사는 마우이다. 디젤 엔진을 장착한 차량은 수용 인원에 따라 2·4·6인승으로 나뉜다. 빌리는 가격은 차량 연식과 임차 시기(계절별)에 따라 달라진다. 마우이에서는 연식에 따라 ‘마우이’, ‘브리츠(Britz)’, ‘마이티(Mighty)’로 구분해 관리한다.
캠퍼밴 예약은 마우이의 한국 에이전시 사인 INL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에이전시 역할도 해주고 추가로 발생하는 비용은 없다. 여행기간 중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INL에 여행기간과 인원을 알려주면 견적 및 예약사항, 여행 표준일정 등을 보내준다. 여름철 성수기(우리나라의 경우 12~1월)에는 6개월 전에 예약해야 원하는 차량을 빌릴 수 있다.
베이스 캠프 ‘홀리데이 파크’
캠퍼밴의 기능들을 정상적으로 작동시키려면 물도 채워 넣어야 하고 전기 충전도 해야 한다. 여행 중 발생한 생활 오수와 분뇨는 반드시 지정된 장소인 ‘덤프 스테이션(dump station)’에서만 버릴 수 있다. 이렇게 캠퍼밴에 필요한 것들을 보충하면서 쉴 수 있는 곳이 ‘홀리데이 파크(Holiday Park)’다. 이곳은 뉴질랜드 사람들이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숙박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 캠핑장이다. 샤워시설, 공동식당, 조리시설, 세탁실, 바비큐장도 있다. 대부분의 홀리데이 파크는 국립공원 가까운 곳에 있으며 뉴질랜드 캠핑 여행의 핵심 역할을 한다. 이용료는 기본요금이 있고 인원수에 따라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홀리데이 파크는 ‘톱10 홀리데이 파크’, ‘키위 홀리데이 파크’, ‘HAPNZ 홀리데이 파크 그룹’ 등 몇 개의 체인 그룹으로 나뉘어 있다. 각 그룹은 회원에게 10~15%의 할인 혜택을 준다.
별 헤는 밤의 야영장 ‘DOC’
홀리데이 파크 외에 정부기관 ‘자연보호부(Department of Conservation)’에서 관리하는 캠핑장 ‘DOC’도 있다. 뉴질랜드 전역에 준비되어 있는 500개의 DOC는 사설 캠핑장인 홀리데이 파크에 비해 시설이 열악하다. 전기와 물 공급이 안 되고 생활 오수와 폐수를 버릴 수도 없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양심 박스에 기부하는 형태로 이용료를 받는다)과 자연 친화적인 위치가 장점이다.
캠핑을 할 수 없는 곳도 있으므로 거의 모든 마을에 있는 ‘여행자 정보센터 i-center’에서 홀리데이 파크와 DOC 위치에 대한 안내를 받으면 된다.
뉴질랜드에서의 운전 요령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 운전방향이 반대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좌회전, 우회전 상관없이 운전자의 오른쪽 겨드랑이에 중앙선을 두고 운전한다는 생각만 하면 된다. 회전 교차로에서는 시계 방향으로 돌면 된다. 운전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제한 속도다. 과속을 하면 벌금 액수가 크다. 카메라에 찍히면 귀국 후에도 벌금 통지가 온다. 행복한 여행을 하려면 제한 속도는 반드시 지키는 게 좋다. 고속도로에서 일반 차량의 제한속도는 100km이지만 캠퍼밴의 경우는 90km다. 가능하면 80km로 천천히 다니는 게 좋다.
‘톨로드(toll road, 유료도로)’는 세 곳 있다. 이 도로는 전자감응식 장치로 통행 체크가 되며 비용 납부는 인터넷에서 해야 한다. 사전에 인터넷에서 차량 등록을 한 후 도로를 이용하거나 도로를 이용한 후 5일 이내에 인터넷에서 납부를 하면 된다. 납부시기를 놓치면 한 달 정도 지난 뒤에 3만~4만 원 정도 추가된 금액을 결제해야 한다.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
오스트레일리아 동남쪽 남반구의 남북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 계절이 반대이며, 시차는 4시간 빠르다.
뉴질랜드의 북섬은 태평양판 지각이 인도-호주판 밑으로 들어가 화산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형성된 섬이다. 특히 ‘통가리로 국립공원’에서부터 동쪽 태평양 연안까지는 화산 활동이 가장 많은 ‘타우포 화산대’에 속하는 지역으로 지금도 진행 중이다. 그래서 북섬을 ‘불의 섬’이라고도 부른다.
반면 남섬은 두 판이 맞물리면서 지각이 올라와 형성된 섬이다. 지각 판이 서로 밀면서 남섬에서 가장 높은 지형 ‘서던 알프스 산맥’도 만들었다. 이 산맥에는 3000m가 넘는 봉우리가 23개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편서풍을 타고 뉴질랜드로 불어오는 바람이 태즈먼 해를 통과하면서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서던 알프스 산맥’을 만나면 많은 비를 뿌린다. 이렇게 내린 비는 높은 산 위에 만년설과 빙하를 만든다. 남섬을 ‘얼음의 섬’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남섬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오르드 랜드 국립공원’을 비롯해 빙하가 만든 계곡과 호수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산맥을 넘은 바람은 건조하고 따뜻한 바람으로 바뀌어 캔터베리 평야의 초원을 형성하는 기후가 된다. 이곳은 양들의 천국이다.
원주민 문화 영향받은 뉴질랜드 역사
뉴질랜드는 인간의 손길이 닿기 전까지 각종 동식물이 살아 있는 태고의 땅이었다. 이러한 땅에 AD 1000년경부터 폴리네시아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연도 서서히 파괴되었다. 대표적 사례로 ‘모아새’의 경우 이때부터 인간에게 식용 자원이 되면서 멸종했다. 뉴질랜드에 들어온 마오리족은 석기문화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후 18세기에 유럽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몇 차례 충돌이 일어났다. 그 후 양측은 공존하기 위해 1840년 ‘와이탕이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마오리족과 유럽인들은 같은 땅에서 함께 살기로 뜻을 모았고 뉴질랜드가 건국되었다. ‘뉴질랜드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알면 도움이 되는 정보
•뉴질랜드로 여행할 때 이용하는 항공편이 경유할 경우 가능한 한 상하이 푸둥 공항은 피하는 게 좋다. ‘수화물 자동 연결’이 되지 않아 짐을 찾은 후 다시 부쳐야 할 뿐만 아니라 입국, 출국 신고와 검사를 또 받아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뉴질랜드는 농업 국가라서 입국할 때 식품에 대한 검사가 매우 엄격하다. 통관할 수 없는 식품류는 아예 가져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통과되는 식품들은 겉면에 라벨을 일일이 붙이고 리스트를 준비해 세관 검사를 받을 때 제출하면 좀 더 편리하다.
•여행 중 뉴질랜드 내 북섬과 남섬을 오가는 ‘인터아일랜더(Interislander) 페리 크루즈선’을 이용할 때 ‘톱10 홀리데이 파크’ 회원은 15% 할인받을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인터아일랜더 크루즈선 홈페이지: www.interislander.co.nz
㈜INL 메일주소: inltours@campervan.co.kr
톱10 홀리데이 파크 홈페이지: top10.co.nz
키위 홀리데이 파크 홈페이지: www.kiwiholidayparks.com
톨로드 비용 납부 사이트: www.tollroad.govt.nz
흰색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 선글라스로 반쯤 가린 무표정한 얼굴, 근육질의 몸. 경호원 하면 떠오르는 클리셰다. 게다가 이 세계는 한동안 ‘금녀(禁女)의 영역’이었다. 꽤나 케케묵은 이 통념을 깨트린 이가 있다. 2002년 국내 보안 업체에 ‘첫’ 여성 경호원으로 입사해 톰 크루즈, 빌 게이츠, 히딩크, 고르바초프, 박세리 등 국내외 유명 인사들의 경호 업무를 수행해온 이용주(李庸朱·39) ADT캡스 경호팀장. 화려한 경력에 놀라고 단아한 외모에 또 한 번 놀라면서 28세의 나이에 팀 수장이 되어 맹활약해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녀에게는 ‘첫’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따라 붙는다. 경호학과를 졸업한 1호 여성 경호원으로도 주목받았지만 국내 여성으로서 경호학 석·박사 학위도 최초로 취득했다. 입사 5년 만에 경호팀장 자리에 오른 사실도 입지전적인 이력이다. 남자도 쉽지 않은 분야에서 도전을 거듭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근성과 유연성을 자랑하는 파이터가 연상됐다.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환경에서 홀로 견뎌왔을 고독한 시간들도 느껴졌다.
“입사했을 때 여자 경호원이 저밖에 없었어요. 남자 경호원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죠. 현장에 나가면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하니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그 심정이 이해는 됐지만 제 입장에서는 그런 눈치까지 봐야 했으니 더 힘들었죠. 멘토도 없어서 많이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더 채찍질했는지도 몰라요.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매일 고민했죠.”
여성 경호원 생명은 짧다는 얘기도 자주 들려왔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선택한 길의 결말도 함부로 상상하지 않았다. 당장 극복해야 할 문제들에 집중하며 몸과 마음의 탄력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후배들에게는 등대 같은 존재였기에, 선도자로서의 역할도 중요했다.
“결혼과 출산은 경력 단절로 이어져 여자들에게 큰 부담이었어요. 저도 지인들에게 ‘결혼하면 보직 변경을 해야 할 텐데 어느 부서를 선택할 거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경호 업무를 더 이상 못 하게 되는 건가 고민이 됐죠. 부서 내에서는 상의할 사람이 없어 인사팀에 상담을 요청했더니 왜 그런 고민을 하냐고 하더군요. 걱정 안 해도 되겠구나 했죠. 그런데 아이를 낳았을 때 또 자격지심이 밀려오더라고요. 출산 과정의 공백기를 과연 이해해줄까 염려스러웠어요. 선례가 없어 속앓이를 했던 것 같아요. 경호학과 나온 여성들이 경찰공무원 시험을 보거나 법원 경비대 등 안정적인 곳에서 일자리를 찾는 건 그 때문이에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회사의 배려를 많이 받았거든요. 후배들은 선배들이 만들어놓은 토대 위에서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됐죠.”
서비스 마인드 없으면 고독한 직업
그녀는 일의 핵심을 재빨리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었다. 남성 중심의 체력과 무술 실력이 주로 요구되어왔던 경호 업무야말로 시대에 맞게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고, 여성의 강점인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차별화를 꾀해 신뢰를 얻었다. 이를테면 의뢰인이 일정을 마치고 차량에 오르면 편히 쉴 수 있도록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고 최적의 컨디션을 위한 각종 음료도 구비해놓는다거나 식사가 늦어지면 시장기를 달래줄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식이다. 그녀가 경호를 ‘토털 서비스’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경호원이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에게 조언할 때 서비스 마인드를 강조해요. 의뢰인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경호를 하라는 거죠. 음료수 하나를 살 때도 고민을 해야 합니다. 의뢰인에게 어떤 음료가 더 필요할지 헤아려보는 마음, 그것이 바로 서비스 마인드입니다. 체력 좋고, 오랫동안 잘 서 있는 것이 경호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필 편지를 손에 쥐어준 고르바초프
태권도 4단, 유도 3단, 합기도 2단의 무술 실력을 갖춘 그녀는 슬럼프에 빠지기 전까지는 음대를 지망하며 플루트를 배우던 학생이었다. 플루티스트의 꿈을 접은 건 고등학교 3학년 때. TV에서 우연히 경호원을 꿈꾸는 학생 인터뷰를 보게 되면서부터였다. 평소 운동에도 소질을 보였던 그녀는 어머니의 권유로 용인대학교 경호학과로 진로를 바꾼다. 망설임은 없었다. 악기 연주에 투자한 시간이 아쉽기는 했지만 새로운 선택에 적응하는 데 부지런했다. 당시 TV에 나왔던 학생은 같은 학교 선배로 만나 결혼까지 했다.
“남편은 경호원 꿈을 접었지만 제 얘기를 많이 들어주고 조언도 해줍니다. 9년 연애하고 결혼했으니까 어느새 제 인생 절반을 함께했네요. 둘째 낳았을 때 육아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을 했는데 그때 남편이 ‘네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좋겠다, 대신 내가 부모 역할 더 많이 하겠다’라고 말했어요. 남편 응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국내외 명사들의 수행 경호를 도맡아 해온 그녀는 2008년도에 방한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일주일을 꼬박 함께 다녔다. 당시 팔십에 가까운 고령이어서 지병 유무, 복용약 등을 체크하고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 바로 갈 수 있도록 이동 경로에 따른 병원들도 미리 알아봤다.
“돌발 상황도 있었죠.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사진을 찍으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많았어요. 제가 여자라 약해 보였는지 팔을 꺾으며 밀어붙이는 통에 진땀을 흘렸습니다. 하루는 계단에서 넘어지실 뻔해서 신속하게 부축을 했는데 남자 손길이 아니어서 불편하셨나봐요. 괜찮다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러나 차차 제 마음을 알아주셨어요. 마지막 날 호텔에서 나오면서 ‘한국에서 좋은 친구를 알게 돼서 너무 고맙고 좋다’는 내용의 자필 편지를 손에 쥐어주셔서 감동했습니다. 헤어질 때는 할아버지처럼 저를 꼭 안아주셨지요.”
외빈 경호를 하게 되면 팀을 구성해 예행연습을 한다. 묵게 될 호텔에 가서 도면을 받아 내부 구조를 살피고 지방으로 이동할 때는 식당 등의 비상구까지 꼼꼼하게 체크한다. 2011년 필리핀 장관들이 우리나라의 환승문화를 도입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체험을 해야 했기에 바짝 긴장했다. 각 노선표는 물론 지하철 어느 칸을 타야 바로 계단을 이용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현장에 들어갈 때는 위험 상황에 대비해 시·분·초 단위로 사전 점검을 해요.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해도 갑자기 일정이 바뀌어 당황스러운 경우도 있죠. 대부분 개인적인 업무를 보거나 자녀들하고 올 때는 아이들 관련 일을 보기도 합니다. 그럴 때가 제일 난감하지만 의뢰인들과의 감정 갈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고 싶다
그녀는 사회가 흉흉할수록 경호 문의가 많다고 했다. 특히 학교 폭력, 데이트 폭력 때문에 경호를 의뢰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아이 경호는 학교와 학부모 동의를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문의가 오면 저도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상담을 해드립니다. 금전적인 부담 때문에 경호를 맡기지 못하는 분에게는 자존심을 지켜드리려고 하지요. 아이를 경호하면 당장의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친구들과의 관계, 아이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인식에 문제가 생겨 최선의 방법은 아닐 수 있다고 말씀드려요.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요. 협박 전화 때문에 친구들도 다 떠나고 부모도 힘들어 전화선을 뽑고 사는 의뢰인이 있었는데 상대를 멀리서 봐도 몸을 벌벌 떨 정도로 정신적 충격이 심했습니다. 신변 보호가 우선이지만 이럴 때는 의뢰인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카운슬러 역할도 합니다.”
현재 여성 경호원 비율은 10% 정도에 머물고 있지만 여성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선호하는 의뢰인이 많아져 더 큰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그녀 나이 올해 마흔. 경호원은 나이 제한이 없는지 궁금했다.
“그런 건 없어요. 경력이 쌓일수록 경호는 몸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해요. 몸과 마음, 두뇌가 동시에 가동돼야 하지요. 물론 현장에서 일할 때는 무전기와 3㎏에 달하는 삼단봉, 가스총, 전기충격기 등 기본 무기를 지녀야 합니다. 체력관리는 필수입니다. 저는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까지 운동도 하고 독서도 합니다.”
2011년도부터 시작한 호신술 재능기부에 이어 최근에는 심폐소생술 강의까지 하고 다니느라 더 바빠진 그녀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봉사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또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최초라는 타이틀도 의미 있고 감사하지만 앞으로는 ‘최선을 다하는 최고’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독려하겠다고 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무엇을 더 얹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삶의 매순간이 도전과 열정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음은 분명히 알 것 같다.
도심의 오래된 상가나 공장, 창고 건물을 리노베이션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드는 ‘구도심 재생 사업’이 성공한 사례가 여럿 있다.
국내의 경우 인천시의 아트 플랫폼이 대표적이다. 구한말 쌀, 소금 등을 보관하는 해운사의 창고로 사용되다가 이후 줄곧 폐허로 남아있던 이 곳이 2009년에 복합 문화예술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일본 홋카이도의 경우에는 오타루, 하코다테에 있는 창고 건물들을 상업 시설로 변화시켜 ‘오타루 운하’ ‘베이 에어리어’라는 이름을 붙이고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조지아 트빌리시의 경우에는 시내에 있는 봉제 공장을 호스텔 숙소로 개조해 관광객들이 묵고 싶어 하는 명소로 만들었다.
위 사례들처럼 고유의 상징을 잃지 않은 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 변화를 시도 중인 서울의 낙원상가에 갔다.
낙원 악기 상가 4층 ‘아트라운지’에서 열리는 ‘서울시 교육청’과 ‘우리들의 낙원상가’, ‘아름다운 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악기 나눔 행사’. 올해 2년째인 이 행사는 각 가정에서 안 쓰거나 고장 난 악기를 기증 받아 낙원상가 악기 상인들이 수리해 어려운 가정의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업이다.
학생들에게 1인 1악기 교육을 하기 위한 방법일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는 기부 경험 자체가 좋은 교육의 기회다. 행사 첫해인 2018년에는 900여 점의 악기가 기증되었다. 지난 4월 15일부터 6월 15일까지 진행되고 있는 올해의 경우 기타, 드럼, 피아노, 플루트, 클라리넷 등의 악기가 6월 1일 기준 600여 점 기증되었다.1000여 명의 인원이 참가한 행사는 악기 기증 외에도 악기 관련 퀴즈 풀이, 미션 수행, 악기수사대 이벤트와 초청 가수 공연 등 다채롭게 진행된다.
남은 행사 기간에 악기 기증을 하려면 ‘아름다운 가게’, ‘우리들의 낙원상가’를 방문하여 직접 기증하거나 온라인 신청 후 택배 배송으로 하면 된다.
이날 아이들과 함께 행사에 참여해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베푸는 가정들의 모습에서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진정한 행복을 보았다.
아울러 미래의 낙원상가는 악기, 음악이라는 주제 아래 복합문화의 명소로 재탄생될 것이라는 희망도 보았다. 실버 문화 공간과 ‘아트라운지 멋진 하늘’의 공존에서 구분과 단절이 아닌 통합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문화 공간 낙원상가가 그려졌다.
낙원상가를 나와 오른쪽 옆으로 가니 요즘 핫 플레이스라는 ‘익선동 한옥마을’로 들어가는 골목길이 보였다.
관악산 위로 먼동이 터오면 나는 창문을 열고 아침을 맞는다. 그리고 공기가 맑은지 살핀다. 해가 늦게 뜨는 동절기에는 ‘반딧불 손전등’을 손목에 차고 나만의 아침 산책을 위해 ‘미성 오솔길’로 나선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사회생활을 할 때부터 시작됐다. 젊을 때는 더러 늦잠이 달콤했지만 중년이 되면서부터 ‘5시 기상’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실천이 문제였다. 그 시간에 일어나는 ‘재미’가 있어야 했다. 다행히 그 무렵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 35년 전에 숲속에 지어진 아파트에 입주하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미성 오솔길은 아파트 정문에서 바로 이어진다. 여느 산책로와 달리, 인공이 거의 가해지지 않은 ‘흙길’이다. 체력과 시간에 맞춰 운동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산책로다.
좁다란 오솔길로 들어서면 산책객들과 만난다. 애완견에게 헉헉거리며 끌려가는 사람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솟는다. 서너 명의 한 무리는 운동기구 앞에서 이야기꽃을 피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일장 연설을 하면 나머지는 고개를 끄덕인다. 산책을 할 때마다 자주 보는 얼굴들이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건강하세요!” 하며 즐겁게 인사를 나눈다.
좀 더 걸으면 체육공원에 이른다. 경쾌한 음악소리에 맞춰 에어로빅을 하고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만수천은 물맛이 좋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특급 약수터다. 길은 곧 선우공원으로 연결된다. 조그만 계곡에 생태연못이 꾸며져 있다. 어린아이들과 가족놀이하기 좋은 곳이다. 부채꼴 모양의 능선은 마치 하얀 실타래를 풀어놓은 모양새를 한 채 ‘원시 오솔길’로 길게 이어진다. 서울 시내에 이런 길이 또 있을까? 여기까지가 왕복 한 시간여 거리다. 아침 산책 시간으로 적당하다.
시간 여유가 있어 더 걷고 싶으면 왕복 두어 시간 걸리는 호암산 자락길까지 가면 된다.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이 호암사 뒤편으로 있다. 여름철에는 하루살이, 모기 등 해충이 없어 휴식하기에 편하고, 그늘이 커서 자리 깔고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잣나무 잎이 두툼하게 쌓이는 이곳은 눈이 오는 겨울에도 따뜻해 추위를 느낄 수 없다.
관악구 ‘미성 오솔길’에 정들어 산 지 35년이 넘었다. 하루 만보걷기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침 산책을 마친 후에는 샤워를 한다. 나머지 시간에는 손주도 돌보고, 재능기부 자원봉사도 한다. 창작활동도 빼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