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막바지인 지난 주말 새봄을 기다리며 '따뜻한 콘서트'가 열렸다.
경제신문 '이투데이'가 2013년 이후 5년째 개최하고 있는 음악회라고 한다.
오전부터 하루 종일 눈보라가 흩날려 저녁 나들이가 좀 걱정스러웠지만 출연하는 어떤 가수 때문에 필자는 꼭 참석하기로 했다.
시간에 맞춰 KBS 콘서트홀에 가니 오랜만에 보는 동년 기자님들이 많이 계셨다.
글로만 대하던 동년 기자님들과의 반가운 인사가 이어졌는데 부부가 동행하신 기자님도 여러분이셔서 보기에 참 좋았다.
우리 동년 기자의 좌석은 2층으로 자리에 앉으니 벌써 무대는 화려한 조명으로 예쁘게 반짝여 신나는 공연을 기대하는 설렘으로 마음이 들떴다.
출연 가수를 보니 어린 걸그룹 '모모랜드'의 귀여운 아이들과 중견 여가수 '린' 그리고 독보적 존재를 자랑하는 '전인권' 씨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 '김장훈' 씨가 있다.
김장훈 씨가 출연한다고 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고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는데 김장훈 씨와는 몇 년 전 작은 에피소드가 있는 사이이다.
노래도 잘하지만, 기부도 많이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는 멋진 사람이라 필자는 그의 왕 팬이 되었다.
오늘 약간 실망스러운 건 좌석이 2층이라 가수와의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김장훈 씨는 공연 중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하는 유명한 가수이다.
앞자리였다면 언젠가처럼 좀 더 즐거운 관람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몇 년 전 강남 모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김장훈 콘서트가 있었다. 제법 큰 무대를 춤과 노래로 종횡무진 휘저으며 신나는 공연을 펼치던 중 갑자기 김장훈 씨가 어시스턴트가 필요한데 누가 도와주겠느냐고 물었다.
같이 간 친구 삼총사가 내게 손들라고 부추겼고 나는 용감하게 조용한 침묵을 깨고 “저요!”하고 소리를 치고 말았다.
누가 나오시겠느냐고 했지만 점잖은 관객들이 잠시 생각하는 동안 아줌마 기질을 발휘한 필자가 큰 소리로 답을 한 것이다.
좀 더 젊었을 때라면 부끄러워서 상상도 못 했겠지만 나이가 들으니 너무 용감해지는 것 같아서 우습기도 했다.
용감하게 소리친 덕분에 무대에 올라가 김장훈씨 옆에 서게 되었다.
가까이에서 본 김장훈 씨는 매스컴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잘생기고 훤칠했다.
잠시 자기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고 필자가 도와야 하는 일을 말해 주었다.
무슨 큰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고 김장훈 씨가 하모니카를 불 때 필자는 마이크를 그 앞에 잘 대어주는 일을 맡았다.
별일이 아니었으므로 관객석에서 폭소가 터졌고 무대도 매우 화기애애해졌다.
하모니카 연주가 끝난 후 감사하다며 불었던 하모니카를 선물로 주었는데 꽤 값이 나간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필자는 그 작고 앙증맞은 하모니카를 가보로 간직하겠다고 생각하며 기분 좋고 신나는 공연을 즐겼다.
그렇게 김장훈 씨는 공연 도중 관객과의 소통을 꼭 하는 사람이었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래층의 어떤 여성관객이 전의 나처럼 큰소리로 답을 해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만약 필자의 좌석이 가까웠다면 필자가 소리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난다.
어린 아이돌의 무대도 깜찍했고 ‘린’의 노래도 좋았지만, 김장훈 씨와 전인권 씨의 영혼을 울리는 듯한 노래에 감동적이었다.
신나는 콘서트의 여운으로 돌아오는 길의 차가운 바람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이투데이에서 매년 주최한다니 다음에도 초대되어 꼭 콘서트를 보러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뉴욕이나 도쿄 등 선진국 대도시에 가면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다.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과 술은 물론 오페라와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문화를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각 나라 방문 비용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싼 값으로 먼 나라의 문화를 맛보고 즐길 수 있다. 이때 제시할 수 있는 단어가 ‘문화력(文化力·Cultural power)’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문화력을 국가와 국민이 갖는 매력이면서 한 국가의 브랜드 파워로 풀이하고 있다. ‘경제력(經濟力·Economic power)’이 경제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처럼 문화력도 문화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문화력은 그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또는 문화적 매력 정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 도시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의 정도를 문화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만약 ‘문화력지수(Cultural power index)’를 만들어 주요 도시들을 비교한다면 우리나라의 서울은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음식과 술의 종류가 다양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뮤지컬, 연극 등도 수시로 무대에 오른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각설이처럼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와서 오리지널 공연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요즘엔 일부 대형 영화관에서 해외 유명 오페라 또는 콘서트를 녹화해서 방영하거나 생중계하기도 한다. 이태원이나 홍대 앞 거리에는 각 나라의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요르단,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다 비슷해 보이는 음식 같아도 조금씩 다르다. 중남미는 물론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아프리카 음식점도 있다.
필자는 운 좋게도 뮤지컬 , 오페라 를 워싱턴과 뉴욕 그리고 서울에서 여러 번 봤다. 그래서 가끔 무대와 의상, 주연배우 등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프랑스 3대 뮤지컬인 , , 도 외국과 서울에서 번갈아 가며 관람했다. 는 하도 많이 봐서 주인공 이름은 물론 대사를 듣지 않아도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대강 알 수 있다.
무슨 큰 자랑처럼 필자의 경험담을 늘어놓는 이유는 문화력지수가 높은 서울을 잘 활용해 개인별 문화력지수를 키우자고 제안하기 위해서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과 대구 같은 대도시만 활용해도 문화적 욕구를 상당히 해소할 수 있다. 가끔 1박 2일 코스로 서울을 방문해 다양한 문화 체험과 함께 음식점 등을 순례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최근에는 주말마다 광화문 근처 호텔 방들이 만석이라고 한다. 지방에 사는 가족들이 촛불 집회 참가 겸 서울 나들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영화 에서 주인공 태식(원빈 분)이 하는 말이다.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오늘 놀고 쓰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고 해석하고 싶다. 열심히 일해서 모았든, 투자와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든,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든 늙어 죽을 때까지 쓸 돈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가장 먼저 고민할 일은 ‘돈을 어떻게 쓰다가 죽을 것인가?’ 아닐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일 또 내일 하며 미루다 보면 어느새 다리에 힘이 빠져 돌아다닐 기력마저 없어진 뒤일 수도 있다. “여행은 다리 떨릴 때 하는 게 아니라 가슴 떨릴 때 해야 한다.” 이 말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돈을 쓸 때도 다 때가 있다. 나이 들면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다. 물론 자녀나 친인척들에게 주거나 사회에 기부하겠다면 말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엔 강의하러 가면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보라고 자주 청중들을 부추긴다. 버킷리스트의 사전적 의미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다. 대단한 일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 별거 아니다. 이렇게 한번 짜보자. ‘올해에는 오페라를 두 개 보고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영화를 보자.’ 오페라나 영화를 보러 갈 때 괜찮은 음식점에 들러 식사까지 할 수 있다면금상첨화. 이처럼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목록으로 정리해서 실천해보자.
오페라와 영화에는 취미가 없고 여행을 더 선호한다면 목록을 바꾸면 된다. 문화력지수가 꼭 오페라와 영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역사 유적지를 탐방할 수도 있고 박물관이나 유배지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섬이나 폐사지(廢寺地), 전적지(戰跡地), 이름난 고택(古宅), 습지(濕地), 유명 사찰, 교회(성당) 등도 좋은 선택지다. 술과 음식을 좋아한다면 지역 양조장이나 맛있는 음식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근교의 산들을 섭렵하는 것도 좋은 버킷리스트가 될 수 있다. 서울만 해도 가까운 산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먹거리, 볼거리도 많다.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오페라 이름 하나, 산 이름 하나, 음식점과 양조장 이름 하나를 지울 때마다 느끼는 뿌듯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버킷리스트는 문화력지수를 키우기 위한 일종의 계획서 역할을 해준다. 되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것도 좋지만 전국 지도를 놓고 여기저기 갈 만한 곳들을 기웃거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페라와 뮤지컬도 익숙한 작품에서부터 좀 낯선 작품들까지 죽 적어보라. 다 못 보고 죽을 만큼의 목록이 나올 수도 있지만 욕심 많다고 누구에게 야단맞을 일도 아니지 않는가. 할 수 있는 것까지 하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쉬고 싶으면 쉬는 것이 인생이다.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보겠다는 다짐도 좋지만 중간에 다른 게 더 재밌어지면 지우고 새로운 리스트를 만들면 된다.
중요한 것은 유인(誘引)과 동력(動力)이다. 이것에 시동이 걸려야 하고 싶은 일과 목표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고 노력한다. 은퇴 후 나이 탓이나 하면서 넋 놓고 앉아 있다가는 뒷방 노인네 취급받기 십상이다. 당장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계획대로 움직여보자. 적절한 스트레스와 긴장감은 ‘필요악(必要惡·Necessary evil)’이라는 말이 있다. 버킷리스트는 필요악을 넘어 ‘필요선(必要善·Necessary virtue)’이다. 비가 올 때 필요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우산이다. 우산처럼 버킷(양동이)도 기왕이면 여러 개가 더 좋지 않을까.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지난 주말 서울 하늘은 푸른 바다 빛이었다. SBA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 (박주순 소장) 산악회원 (전창대 산악대장) 12명은 아침 10시 동대문역에 모였다. 흥인지문에서 낙산공원을 오르고 와룡공원을 지나서 말바위 안내소까지 걸었다. 잘 다니지 않는 길이지만 꼭 걷고 싶은 성곽길이다.
올겨울 제일 추운 날씨에 모두가 에스키모처럼 중무장이다. 낙산은 북악ㆍ인왕ㆍ남산과 함께 내사산을 이룬다. 서울의 내사산을 잇는 서울 성곽길은 서울의 4대문(숙정문ㆍ흥인지문ㆍ숭례문ㆍ돈의문터)과 4소문(창의문ㆍ혜화문ㆍ광희문ㆍ소의문터) 및 성곽길 18.2Km를 따라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체험하는 탐방로다.
낙산은 해발 125m의 낮은 산으로 산모양이 낙타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 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에 걸쳐 자리한 산으로 서울 도성의 동산(東山)에 해당 된다. 낙산은 풍수지리상 서쪽 우백호인 인왕산에 대치되는 동쪽 좌청룡에 해당된다.
낙산 정상에 낙산공원이 조성되어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대학로, 벽화로 유명한 이화마을 등과 연계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오를 수 있는 곳으로 성곽 안팎으로 서울 시가지를 조망하기에도 좋다. 성곽길이 예쁘게 조성 되어있어 누구나 탐방하기에 편하다. 낙산공원에서 혜화문을 가려면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한양도성은 북악산(342m), 낙산(126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길이 약18.2Km, 높이는 약12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축조되었다. 한양도성은 태조4년(1395)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 축조 계획에 따라1396년 농한기인 1,2월의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8천명을 동원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다.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동쪽 흥인지문, 서쪽 돈의문, 남쪽 숭례문, 북쪽 숙청문(숙정문으로 개칭)-과 4소문-동북 홍화문(혜화문으로 개칭), 동남 광희문, 서북 창의문, 서남 소덕문(소의문으로 개칭)을 준공 하였다.
성곽길을 따라 오르면 와룡공원이 나왔다. 날씨는 몹시 추웠지만 바다처럼 푸르른 하늘을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양지바른 쉼터에 풍성한 뷔페식당이 차려졌다.
정상주잔을 높이 들고 “위하여!”를 소리 높여 외쳤다. 나이를 잊고 재능기부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건강을 다지는 회원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말바위 안내소에 삼청공원으로 하산하였다. 칼국수와 막걸리 한 사발에 추위도 사르르 녹고 말았다. 잘 다니지 않지만 꼭 한번쯤 걷고 싶었던 도성길을 완주한 기쁨은 무엇으로 바꿀 수 없었다.
이상욱(李相旭·53) 대표가 운영 중인 한양길라잡이는 말 그대로 한양(서울)을 소개하는 단체로, 도심권 50플러스센터 인큐베이팅 지원사업에 참여하는 기업 중 한 곳이다. 서울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유적이나 유물, 지역을 소개하고 역사적 의의를 해설해주는 일을 한다. 쉽게 설명하면 문화재 해설사나 도슨트(박물관 해설사), 역사 교사, 역사 마니아들의 모임이라고 이상욱 대표는 말한다.
“제가 워낙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도심의 궁궐을 자주 찾아다녔는데 어느 날 자원봉사 해설사로 재능기부를 하는 ‘궁궐길라잡이’ 한 분을 만났어요. 취지가 너무 좋아 저도 참여했죠. 하지만 좀 하다 보니 궁궐에만 한정되는 것 같아 범위를 넓힐 수 있는 모임을 만들어야겠다고 맘먹었죠. 그래서 이름도 서울 전체를 소개할 수 있는 ‘한양길라잡이’라고 지었어요.”
그 전까지는 혼자만의 기록 창고였던 인터넷 카페를 2014년 공개하고, 그해 회원을 모아 청계천에서 처음 문화해설 자원봉사를 했다. 결과는 완전 실패. 무료로 설명해주겠다고 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 시민은 없었다. 그래도 기죽지 않았다. 그는 이 참사(?)를 함께 겪었던 회원을 중심으로, 카페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해설 행사를 진행했다. 그의 활동은 점차 입소문을 타고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고, 도심권50플러스센터 커뮤니티 활동을 거쳐 이제는 스타트업 기업으로 성장했다.
“네이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양길라잡이 카페 회원은 2600명밖에 안 되지만, 역사 관련 카페 중 6위로 꼽힐 만큼 활동이 왕성해요. 회원관리를 엄격하게 하거든요(웃음). 현재 온라인을 바탕으로 회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제 목표는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 먹고, 놀고, 용돈 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한양길라잡이의 프로그램은 크게 역사 스터디와 둘레길 투어, 도보 투어, 버스 투어로 구분된다. 그리고 매년 한 차례씩 바다 건너 역사의 현장을 찾는다.
기업 한양길라잡이로서의 수익 사업은 별개 프로그램으로 운영한다. 백화점 문화센터나 여행 액티비티 서비스, 소셜커머스 업체를 통한 20~30대 대상 문화재 관광 프로그램 등이다. 고객 모집은 각 기업들이 하지만 현장에서의 해설은 한양길라잡이가 맡는 구조다. 한양길라잡이는 문화해설과 관련해 이름이 알려지면서 강의와 해설 의뢰가 줄을 잇고 있다. 지난해에는 7월부터 10월까지 도심권50플러스센터와 연계해 세종마을(서촌) 해설 활동을 해 사회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한양길라잡이를 비영리 민간단체로 만들어보려고 방법을 찾았는데, 자본금 같은 당장의 회사 외형이 작으니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개인사업자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수익을 좇는 기업으로 성장하기보다는, 우리 문화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많은 문화해설사를 양성할 수 있는 기관이 되길 기대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창업까지 하게 됐어요. 관심 있는 것을 찾아 재미있게 논다는 생각으로 일을 한다면 창업은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뮤지컬 하면 관객들은 기본적으로 신나는 음악에 짜릿한 사랑이야기, 그리고 완벽한 해피엔딩을 생각한다. 창작 뮤지컬 은 뮤지컬 상식을 깨고 실질적으로 관객의 의식 속으로 다가가고자 노력했다. 길에 버려지고, 이용당하고 또 주인이 잃어버린 유기견의 처절한 생활, 뮤지컬 속 노래와 대사를 통해 그들의 피할 수 없는 슬픈 삶의 끝을 조명해본다.
잔뜩 녹이 슬은 철창 안으로 꾸며진 무대. 이곳은 유기견 보호소다. 버려진 개의 종류도 다양하다. 여행가방 속에 버려졌던 푸들, 투견장 진돗개 ‘진’, 폐기 처분된 군견 셰퍼드 ‘중사’, 그리고 강아지공장 모견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임신과 출산을 반복했던 말티즈 ‘마티’까지. 다양한 학대와 이유로 들어온 유기견의 일상과 아픔이 공연 속에 펼쳐진다. 어두운 밤. 한 마리의 새 유기견이 들어오면 보호소에 있던 유기견 중 한 마리는 입양 보내진다. 유기견들은 보호소에 후원된 다양한 사료를 먹고 더욱더 예쁘게 돼 새 주인 만날 날을 기다린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그 문이 도대체 어디로 통하는지는 오직 셰퍼드‘중사’만 알고 있다.
뮤지컬 은 SBS 프로그램 속 코너 ‘더 언더독: 개를 버리는 사람들’을 모티브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반향이 컸던 인기 프로그램이 소재였기에 계획 단계에서부터 큰 관심을 받았던 작품이다. 유기견의 안락사라는 충격적인 소재로 흥행 양극화가 분명한 뮤지컬 무대에 오르는 것은 말 그대로 모험. 절대 즐겁게 웃고 손뼉 칠 뮤지컬이 아니다. 극 초반 멋진 군무와 주연 배우의 솔로곡 열창으로 박수가 터지지만 극에 몰입하면서 손보다는 눈이 무대에 집중하게 된다. 모견으로 강아지공장에서 숱한 학대를 받아온 강아지가 노래를 부르는데 박수 치기가 미안할 정도. 뮤지컬이라는 매개로 극을 만들었지만 떠들썩하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게 사실에 근접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새끼 잃은 만신창이 엄마 말티즈 ‘마티’
말티즈의 실제 끔직한 모습은 TV 프로그램과 각종 포털사이트에 보도된 사진을 통해서 접했을 것이다. 동그란 슬픈 눈의 말티즈 배는 수십 번의 강제 임신·출산으로 해지고 뜯겨 있었다. 에서 하얀색 털 가운을 입고 힘없이 등장한 말티즈 ‘마티’가 바로 강아지공장에서 구조된 모견이다. 무대 뒤 영상은 강제적인 임신과 출산으로 최악의 삶을 사는 모견 ‘마티’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티는 살아갈 힘을 잃은 생명처럼 죽기를 바라고 아파하고 힘들어 신음한다. 실제로 불법 유통되는 강아지공장의 새끼는 어미와 35~40일도 같이 못 있고 경매장으로 팔려 나간다고. 공연 속 모견 ‘마티’는 강아지로 보이는 인형을 안고 다니며 애착을 보이고 분리불안증에 시달린다. 맹인견 늙은 골든리트리버는 눈이 멀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극 후반에 안락사되는 골든리트리버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도 주인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주인을 위해 평생을 바친 맹인견은 다시 하늘로 가 주인과 만날 날을 꿈꾼다.
사설 보호소가 아니면 차갑고 딱딱한 그곳에 누워야 한다
유기견이 보호센터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은 10일에서 많게는 20일 전후다. 이들이 그곳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입양 혹은 안락사다. 극 초반, 신이 나서 한 유기견이 사람을 따라 보호소 밖으로 달려나간다. 다다르게 되는 곳은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차가운 스테인리스 탁자 위. 너무 기쁘게 유기견 보호소를 뛰어나왔지만 주인이 아닌 주삿 바늘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 5분 뒤 신나게 달리던 몸은 생명을 잃는다. 몸이 늘어진 채 커다래진 동공 속으로 자신이 살았던 세상의 마지막 장면을 담아낼 뿐이다.
뮤지컬 은 유기견과 학대 받는 동물들의 이야기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처럼 박수갈채를 연발하고 신나서 소리 지르는 공연을 생각하고 공연장에 들어간다면 적잖이 당황할 수 있다. 대형 뮤지컬에 현실 상황을 적극 반영했다는 것만으로도 은 신선한 도전이다. 무엇보다 은 착한 공연으로 불리며 공연 외 유기견을 위한 다양한 봉사와 사회 계몽운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공연장 로비에는 반려견을 맡겨놓고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반려견 돌봄 서비스를 운영한다. 또한, 유료 티켓 1매당 사료 100g이 자동으로 기부되는 ‘유기견 후원 프로젝트’ 등 다채로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웃고 즐기는 뮤지컬을 넘어 사회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볼 수 있는 공연의 등장이 반가울 따름이다. 물론 시니어에게도 뮤지컬 을 권할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유기견이 되는 순간 벌어질 끔찍한 일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공연은 2월 26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에서 한다.
시니어타운 하면 우리가 흔히 갖는 선입견이 있다. 바로 ‘돈이 많이 든다’, ‘나이든 사람들만 있어서 지루하다’는 것이다. 1947년생 윤규성 전 조흥은행 상무와 그의 아내인 1950년생 장진 도자기 작가는 삼성노블카운티에 입주해 살고 있다. 시니어타운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던 이들 부부가 시니어타운으로 들어가 살면서 느낀 감정은 ‘매우 만족한다’였다. 무엇이 이들의 생각을 바꾸게 한 걸까?
금융계에 청춘을 바쳤던 윤규성 전 조흥은행 상무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시니어타운에 대해 무조건 긍정적인 생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그가 시니어타운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하게 된 궁극적 이유는 무엇일까?
“집사람 친구가 먼저 와서 좋다, 한번 와보라고 추천했어요. 움직이기 전에 정서적인 면, 생활 반경, 재정상태 확인 등을 했죠. 아내가 좋다는데 못할 게 무어냐 싶어 결정하게 됐어요. 그런 후에 직접 와보니 생각을 바꾸게 만들더군요.”
삼성노블카운티가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자연 속에 있으면서 내부에 스포츠센터, 문화센터 등이 부족함 없이 다 갖춰져 있다는 점이었다.
“비로소 삶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 거죠. 뭐든 배우고 싶은 걸 맘대로 배울 수 있고 운동도 맘대로 할 수 있고. 이런 곳이 대한민국에 또 있을까 싶어요.”
다양한 친구를 사귀기 좋은 곳
윤규성씨는 인터뷰 내내 굉장히 만족한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그의 호의적인 반응에는 시설적인 면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에서의 만족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동안의 만남이 직장 친구, 학교 친구 등 폭이 좁았어요. 여기 오니 다양한 전문직에 종사해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한 분야에서 뚜렷한 획을 그은 사람, 일가를 이뤄 성공한 분, 300억 기부자 등 자기 인생을 열심히 산 사람들이죠. 대학교수, 공직자, 변호사, 기업인 등등. 그렇다 보니 새로운 관계 속에서 대화의 폭이 넓어질 수밖에 없어요.”
봉사활동의 기회도 발견할 수 있었다.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는데 여기 오니 그런 기회가 많았어요. 파파합창단이 있는데, 외부 발렌티어가 와서 지도와 지휘를 합니다. 그리고 소년원, 노인대학 등에 위문을 가고 있죠.”
그는 시니어타운에서의 행복한 삶이란 바쁘고 화려한 삶이 아니라 사소한 자유를 맘껏 누리는 조용한 삶이라고 설명했다.
운동, 취미,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들
이들 부부는 서초동에서 10년, 방배동에서 30년을 살았다. 그가 오랫동안 누린 주거문화와 시니어타운의 문화는 전혀 다르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생활 속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각종 기반 프로그램과 시설 그리고 기회가 있다는 점이다.
“봉사 기회도 많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나이를 먹을수록 운동과 취미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어요. 시설과 시간, 여건 모두가 제공되는 셈입니다.”
그는 삼성노블카운티에 입주하면서 골프를 끊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로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골프를 다 끊고 있다고 해요. 운동한 만큼 효과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이사 온 뒤 배드민턴을 배웠습니다. 외부 전문가들이 가르쳐주고 파트너가 돼주고 있어요.”
윤규성씨는 시니어타운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그러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들이 너무 많다, 양로원이다. 그렇게들 말하죠. 그런데 그건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그 사람들을 보며 나의 10년 후 20년 후를 준비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죠. 그래서 저는 60대 후반쯤, 좀 더 젊을 때 입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여유
아내 장진씨는 덜 늙어가도록 꼼꼼하게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점과 오페라 강좌 등 문화생활이 가능하다는 점을 우선 생각나는 장점으로 들었다. 부부는 아침을 먹고 나면 각자의 생활에 집중한다. 특히 도자기 작가인 장씨는 곤지암 작업실로 가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이곳에서는 부부가 각자 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도 제공되는 것이다. 윤씨의 말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이 사람(장진씨)이 나가면 내가 알아서 점심도 사먹고 극장도 가고 그러면서 지내요. 하루가 자유로워요. 영통역 근처에도 오가고. 이런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즐거움이죠. 서로의 독립적인 면을 인정하며 살아야죠. 보금자리는 하나여도 각자의 생활을 누리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장씨는 자신이 하고 싶을 때 작품전을 열 생각이라고 밝혔다. 젊었을 때 열심히 살았으므로 이제는 건강을 챙기며 여유롭게 살고 싶은 게 그녀의 목표다. 그래서인지 두 사람은 함께 운동도 열심히 한다.
“아침 6시부터 8시까지는 항상 운동을 합니다. 아내는 필라테스를 해요. 점심을 먹은 후에는 문화 강좌를 듣고 저녁식사 후에는 같이 걸어요. 하루에 세 시간 정도는 기본적으로 운동을 하는 셈이죠.”
“이곳으로 부인을 데려온 남편들은 참 착한 사람들이에요”
인터뷰를 하는데 부부의 얼굴이 둘 다 굉장히 밝다.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궁금해졌다.
“건강이죠. 그리고 행복은 현실 속에서 자기 마음으로 만들어야지, 여건으로 만들려고 하면 안 돼요. 올라가면 또 언덕이 있을 테니까.”
부부가 서로 의리를 지키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물었다. 우선 장씨의 대답.
“신뢰, 믿음.”
그리고 윤씨의 대답.
“난 없어(웃음). 흘러가는 대로 살아요.”
대답처럼, 윤씨의 기질은 꾸미는 것을 싫어해 자연 그대로를 추구하며 사는 듯 보였다. 그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마음도 털어놨다.
“아내가 젊었을 때 가족 때문에 빼앗겼던 시간을 더 늦기 전에 되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동안 아이들 챙기는 것은 물론 가족들 수발 다 들며 살았죠. 그만큼 자기완성의 길이 멀어졌어요. 이제 자손들과 헤어지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거예요.”
윤씨의 말에 장씨는 “(시니어타운에) 부인을 데려온 남편들은 참 착한 사람들이에요”라는 말로 맞장구를 쳤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오세요”
시니어타운 추천에 대해 장씨는 윤씨와 비슷한 말을 한다.
“실제로 살아보니 들어와서 사는 게 생활비가 더 절약돼요. 그래서 며느리 둘에게 육십 지나면 여기 와서 살라고 추천했죠. 그랬더니 첫째 며느리가 자기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고 대답하더라고요.”
입주를 고민했을 때와 입주 후의 자식들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다들 좋아해요. 상의해서 오게 된 건 아닌데 걔네들은 마음이 편안해졌겠죠. 부담을 덜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보완했으면 하는 점은 없냐고 물었다. 우선 장씨의 대답.
“셔틀버스가 있는데 지금보다 운행을 좀 더 자주 하면 좋겠어요.”
윤씨는 사업적인 부분과 연결시켜 신선한 제안을 했다.
“해외 시니어타운과 체인이 이뤄지면 좋겠어요. 태국, 하와이, 일본에 가면 노블카운티와 자매 계약을 맺은 곳이 있어 갈 수 있으면 좋겠고, 그 나라에서도 올 수 있는 그런 연결망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 나라의 문화센터를 이용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익힐 수도 있겠죠.”
윤씨와 장씨는 시니어타운 입주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오래 망설이지 말라고 한다.
“더 늦기 전에 빨리 오세요. 건강할 때 와야 합니다. 건강할 때 와야 여기 있는 서비스들을 마음껏 즐기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서 오면 그 좋은 시설들, 문화 관련 프로그램, 운동센터 등이 무용지물이에요. 이 좋은 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면 건강해야 합니다.”
2017년 붉은 닭의 해 정유년이 밝았다. 어수선하고 복잡했던 일들이 올해는 꼭 정리되고 치유됐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렇다면 우리 시니어 세대의 마음은 어떨까? 새해를 여는 시니어들의 마음도 한번 열어보았다.
취재협조 강남시니어플라자
은막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서임철(서대문구 홍은동·76)
저는 시니어 배우입니다. 서울노인영화제에 제가 출연한 작품이 출품된 적도 있어요. 연극부에서 회장을 맡고 있는데 활동이 좀 더 활기찼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단원이 열일곱 명인데 올해는 좀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각 지역 노인대학이나 단체를 방문해 공연 봉사를 하고 싶어요. 노인 연기자를 위해 정부 차원의 문화 관련 분야 지원이 늘었으면 해요. 제가 노후에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봐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는데 연기생활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느낌입니다. 개인적인 소망은 영화 주인공을 꼭 한번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디션도 열심히 보고 있어요.
난타 여왕을 꿈꾼다! 윤상민(강남구 개포동·66)
작년 8월부터 난타를 시작했어요. 10월에는 재능기부 공연도 했고요. 아직 미흡하지만 열심히 배워서 전문 공연자만큼 난타를 잘하고 싶어요. 왕성하게 더 열심히 하고 싶어요. 일어 공부도 시작했어요. 완벽하게 잘하고 싶어서 올해는 더 열중해서 공부를 해볼 생각입니다.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길 바랍니다.
2017년 나는 댄싱퀸 문혜경(강남구 청담동·69)
젊을 때는 운동도 많이 했는데 10년 정도 안 했어요. 그래서 그런지 한 4~5년 전부터 많이 아팠어요. 혈압, 신장, 부정맥 이런 걸로요. 아프면서 버킷리스트를 한번 써야겠다 생각했죠. 그중에 무용을 좀 배우고 싶었습니다. 우선 라인댄스를 배웠어요. 시작한 지는 1년 정도 됐는데 너무 좋아요. 올해는 차밍댄스도 하고 고전무용에도 도전할 겁니다. 줌바댄스도 할 거예요. 신나는 음악에 다양한 스텝과 세련된 춤 동작이 멋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춤을 추면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 대상에 도전한다! 남궁유선 (강남구 방배동·69)
즐겁고 재밌게 사는 것이 소망 아닐까요? 더 늙기 전에 예쁜 모습을 남기고 싶어서 시니어 워킹을 배우고 있어요. 어렸을 때 못했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어요. 사는 것에 급급했고 아이들 키우느라 나를 돌볼 시간이 없었어요.
다 끝났으니까 이제 열심히 나를 위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요. 제 꿈은 시니어 모델 콘테스트에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입상하면 좋겠어요. 올해 도전하려고 합니다.
딸? 결혼하면 안 되겠니? 구신자(관악구 삼성동·70)
제가 허리가 많이 아픈데 치료 꾸준히 받고 더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 딸이 올드미스예요. 마흔셋인데 시집을 안 가요. 시집 좀 갔으면 해요. 그런데 딸은 이대로가 좋다고 하네요. 굳이 등 떠밀고 싶지는 않아요. 혼자 사는 게 행복하다면 말입니다. 제가 강남 시니어 모델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2014년부터 TV, 신문, 잡지에 많이 나왔어요.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데 욕심이라면 일인자는 아니더라도 내 이름 석 자가 알려지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부드러운 글 쓰는 남자 기대해요! 송영섭 (경기도 용인시 영덕동·72)
우선 풍전등화 같은 우리나라가 빨리 안정을 되찾고 바람직한 지도자도 뽑고 평화통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통일의 여건을 만드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외교통일 분야에서 공직생활을 30여 년 했어요. 국제정치나 남북통일에 관한 책도 내고 논문도 많이 썼습니다. 올해는 수필 같은 부드러운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동안 유머와 관련한 책을 두어 번 낸 적은 있어요. 또 제가 한국검도협회 고문으로 있는데, 기 수련에 관련한 책도 출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거 다 떠나서 순수한 삶의 철학이 담긴 수필을 쓰고 싶습니다.
화려한 외출은 이제부터다! 한명희(강남구 역삼동·62)
연극을 시작한 지는 몇 개월 안 됐어요. 그래도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연기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전에는 주부였어요. 그러다가 환갑이 지나 나를 위해 산 적이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울해하고 있을 때 친구가 연극을 권하더군요. 연극이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어요. 완전 초보자인데 주연이셨던 분이 안 나오시면서 얼떨결에 주인공이 됐습니다. 지금 연기에 푹 빠져 있어요. 바람이 있다면 시인으로 등단을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비전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가족들이 제가 하는 활동을 인정해줬으면 해요. 우선 가족한테 칭찬을 듣고 싶어요. 제2인생에서 다시 청춘인데 제가 집에만 있으면 되겠어요? 어느 날 외출을 하고 보니 화려한 외출이었어요.첫 공연 때 가족을 초대할 겁니다. 장한 나를 보여주고 잘했다는 소리를 꼭 들을 거예요.
발길 닫는 대로 떠나는 해가 됐으면… 이주현(중랑구 중화동·72)
남편 병간호를 14년 동안 하면서 저도 허리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운동을 할 수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의사 선생님이 소리 지르고 두들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춤이랑 사물놀이를 배우고 있어요. 힐링도 되고 자세 교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사실 제가 자세가 좀 엉거주춤하거든요. 불량한 자세로 앉아 있다가도 무용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해주신 말씀이 생각나면 자세를 다시 잡아요. 올해는 혼자 여행을 가고 싶어요. 남편을 챙겨야 했고 저도 아팠기 때문에 여행을 많이 못 다녔어요. 국내 여행도 많이 못해봤는데, 더 늦기 전에 제주 올레길을 걸어볼까 합니다. 혹시 여유가 생기면 유럽 여행도 꿈꿔 보려고요. 그러나 꿈으로 끝날 거 같아요. 허리가 아파서 비행기를 오래 못 타거든요.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유흥업소에 안 간다. 2006년 이후로는 한 번도 안 갔다. 왜냐하면, 4만5000원씩 아이들을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돈이면 쓰레기더미 안에 있는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 파리가 눈에 알을 낳아도 쫓을 힘이 없는 아이들이다. 그 아이를 살리면 그 아이가 변해서 사회를 살린다. 내가 번 돈이 이렇게 소중한 일에 쓰인단 걸 목격했기 때문에 큰돈을 그렇게 쓸 수 없게 됐다.” 구호단체 컴패션 홍보대사에서부터 북한 어린이 돕기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부인 신애라와 함께 사랑나눔 실천을 하는 스타 차인표씨의 말이 큰 울림을 준다.
자살률 1위, 노인빈곤율 1위, 사회적 관계 최하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10월 발간한 보고서 이 적시한 한국의 상황이다. 취업난, 양극화 등으로 인해 가족 해체가 급속히 진행되고 부모에게 버려지는 아이들도 급증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사랑나눔이 절실할 때다. 하지만 후원, 기부, 봉사 등 사랑나눔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 스타들이 선행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사람을 사랑나눔 실천에 참여시키는 아름다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연예인 스타들이 사랑나눔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81년부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후원회장을 맡아 불우한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3년 전부터는 제로캠프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의 이사장직을 맡아 문화 예술을 통한 비행 청소년의 교화에 나서는 등 다양한 사랑나눔 실천을 펼치고 있는 최불암씨와 백혈병 어린이, 위안부 할머니, 네팔과 중국 지진 피해자 등에게 거금을 쾌척하는 등 전방위적 선행을 펼치고 있는 송중기씨 등 많은 연예인 스타가 사랑나눔 실천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연예인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양태가 진화하며 선행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 그동안 불우이웃이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성금 기부나 자선단체의 홍보대사, 방송사의 자선 프로그램 출연 등이 스타 선행의 주류를 이뤘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김혜자·한지민·유재석의 재능기부, 김정은·이영애·문근영·한혜진·박해진의 국내외 빈민지역에 학교, 병원, 도서관, 우물 등 시설 기부, 최불암·정애리·고두심·김제동의 재단을 통한 불우 청소년 지원, 이효리·송혜교·송중기의 위안부 할머니 지원 등 스타들의 사랑나눔의 스펙트럼이 크게 확장됐다.
기부 형태도 불우이웃과 시설에 대한 후원, 청소년과 학교의 장학금 쾌척,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성금기탁 위주에서 벗어나 한지민·송혜교 등 스타들의 책 인세 기부, 이승기·박해진 등 쌀 화환 기부, 최강희의 골수 및 장기기증, 차인표-신애라·정혜영-션 부부의 제3세계 어린이 후원금 지원, 김장훈·하춘화의 행사와 캠프를 통한 기부 등 매우 다양해졌다.
일회성 이벤트에 그쳤던 연예인의 사랑나눔과 선행은 수십 년 동안 지속해서 전개해나가는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혜자·최불암·고두심·하춘화·안성기·정애리·차인표·김장훈·최수종·유재석·션·장나라 등은 10~40년에 이르는 장기적 선행을 펼치고 있다.
사랑나눔을 시스템화하거나 조직화하는 스타들도 많다. 공연 등 수입원이 생기는 이벤트 수입의 일부를 계속 기부하는 김장훈을 비롯해 적지 않은 스타들이 자신의 연예활동 수입의 일정 부분을 떼어 소년 소녀 가장이나 독거노인, 장애인들을 지속해서 돕는 것을 체계화했다. 김원희·김정은 등은 ‘따뜻한 사람들의 모임’을, 최수종·오윤아·김수로 등은 ‘좋은 사회를 위한 100인 이사회’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봉사활동과 기부사업을 펼치고 있다.
국내의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주로 이뤄지던 스타들의 사랑나눔은 아프리카, 동남아 등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안성기·김혜자·정애리·박해진·이영애·송혜교·문근영 등 많은 스타가 세계 각국의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나누고 있다. 이민호·장동건·이승기·장근석처럼 스타와 팬클럽이 함께 자선활동이나 선행활동에 나서는 행태도 이제는 일상적 풍경이 됐다.
스타들은 왜 사랑나눔에 나서는 걸까. “조그마한 도움이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아이가 커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참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다.”오랫동안 청소년들에게 장학금 기부를 하고 장애인단체 홍보대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랑나눔을 실천하는 고두심씨의 말이다.
40여 년 동안 불우 아동과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온 최불암씨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투자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 더욱이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면 아이가, 사회가, 국가가 긍정적으로 변한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국내에 있는 고아는 물론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의 아이들까지 몸과 마음으로 포근히 감싸 안는 김혜자씨는 2019년까지 후원금을 미리 내고 이렇게 말했다. “광고를 찍거나 돈이 생기면 후원하는 아이들 것을 떼어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늘 불안하다. 내가 돈이 없어 안 주면 걔네들은 굶으니까. 나야 돈이 없으면 우리 아들이 밥이라도 먹여주겠지만, 그 아이들은 안 되지 않나. 당연한 일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오랫동안 9억 원에 가까운 돈을 익명으로 기부하고 시골 지역에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등을 지원한 문근영씨는 “제가 기부 등을 하면서 더 행복하고 매우 기쁩니다. 이런저런 상황들, 사연들, 사정들이 있지만 기부할 때 ‘우리 같이 그래도 열심히 살아봐요’라는 그런 메시지 정도는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요”라고 기부 이유를 밝혔다.
루게릭병 환자 돕기에서부터 어린이 재활병원건립 후원까지 다양한 자선사업과 캠페인을 왕성하게 펼쳐 ‘선행천사’라는 별칭을 얻은 션. 그는 사랑나눔 실천 공개에 대해 “일부 사람들이 (사랑 나눔을) 조용히 할 수 있는데 왜 공개하냐고 말한다. 연예인이기에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을 알려서 그걸 공유하면 더 빨리 이룰 수 있다.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연탄이 300만 장인데, 혼자서 기부할 수 없는 양이기 때문에 많은 분에게 알리면 300만 장의 기적을 쉽게 이룰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청·장년은 취·창업 ‘장벽’을 넘어 ‘절벽’에 갇혔다. 한 줄기 빛처럼 청·장년 창업을 지원하는 비영리 임의단체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 손문규 사무국장(60)을 만나 활동상과 장래의 계획을 살폈다.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는?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박주순 소장)는 2013년도 11월에 설립하여, 현재 회원 130여 명이 재능기부 활동을 한다. 회원들은 SBA 서울산업진흥원에서 교육을 수료한, 경영지도·마케팅·재무회계·IC 등 다양한 소양과 풍부한 경험을 겸비한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 주요 활동실적은?
지난 4년 동안 많은 활동을 하였다. 서울시 청년창업기업역량강화 프로그램, 서울시 100인의 서울 창업포럼, 강남구청 청년사업지원센터 면접심사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프로보노 활동은 행정자치부와 MOU를 맺고, 한국자원봉사문화와 함께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14년도부터 현재까지 희망설계 재능기부 창업지원 멘토단을 꾸준히 운영하고 있다.
특히 올 6월에 제주지부를 설립하여 활동영역을 확장하는 성과도 있었다.
삼성·장지동과 강남구 창업지원센터에서 매일 당직을 정하여 창업 상담을 하고 있다. 좋은 아이디어를 가졌으나 경험과 자금이 부족하여 창업을 구체화하지 못하는 청년이 대부분이다. 창업에서 성공하려면 자금·마케팅과 기술력 3박자를 두루 갖추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수익모델 개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청·장년 창업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로 돈이 되는 창업을 하여야 한다. 계산으로는 남는 것 같지만 손에 남는 것이 없는 흑자도산이나 불황형 흑자로 지칭되는 껍데기 창업은 말짱 헛것이다. 외부·내부 환경평가는 기본이요, 자기역량평가를 냉정하게 하여야 한다. 창업은 이상이지만 사업은 현실이다. 궁극적으로 자기 사업은 자신의 책임이다. 꼼꼼히 살피는 주의가 필요하다.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는 회원들의 귀중한 체험을 후세대에 되돌리는 재능기부 자원봉사 단체다. 자원봉사 활동에는 즐거움과 보람이 있어야 한다. 매달 토요등산·당구모임으로 건강을 다지면서 친목을 도모한다.
회원들이 전문분야 매월 월요강좌를 한다. 정보교류 및 새로운 지식습득과 교류의 장을 더욱 넓히도록 하고 있다.
-올해 추진한 일과 내년 계획은?
가장 큰 과제는 올해 안으로 임의단체 등록이다.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프로보노 활동과 컨설팅 업무를 제주 지부와 함께 서울과 제주에서 재능기부 사업과 청·장년 스타트업 및 소상공인에 관한 컨설팅 업무를 활발히 진행할 예정이다. 회원들의 역량을 상향 평균화 시킬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에는 청·장년의 일거리창출 활동을 열심히 하려고 한다.
※필자는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 회원으로 재능기부 활동을 하고 있다. 상담하면서 만났던 창업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메일과 SNS로 정보를 교환하는데 즐거움을 느낀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굽히지 말고 창업이 꼭 성공하기 바란다.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지난 9월 29일부터 4일간 큰 춤판이 벌어졌다. 8개국 70개 댄스팀이 참가한 덤보댄스축제다. 이 춤판은 맨해튼 다리 밑,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덤보(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역을 문화의 중심지로 변신시킨 일등공신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축제를 뉴욕 5대 무용축제로 선정했고, PBS 방송은 올해 뉴욕의 5대 행사로 꼽았다. 이 춤판을 벌여온 주인공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예술감독 겸임). 뉴요커의 자랑인 덤보댄스축제는 김 단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고난과 눈물의 결정체다.
김영순 단장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댄스스쿨로 유학을 온 것이 미국생활의 출발점이었다. 세계 현대무용계의 신데렐라를 꿈꾸며 시작한 유학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굳게 마음먹고 준비한 유학이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일여자중고등학교에서 무용교사로 재직하면서 월급의 70%를 저축해 모은 유학 자금을 장춘동 국립극장 소극장(현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다 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국내 사상 최연소 단독 현대무용 공연이었고 ‘잔잔한 호수 위로 퍼덕이며 뛰어오르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당초 계획에 없었던 공연이었다. 김 단장은 40년 전 그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던 입학허가를 받고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거부를 당했어요.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젊은 여성이 미국에 눌러 살까 우려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멋진 공연을 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비자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공연을 하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자가 나왔다. 그런데 체재비는 고사하고 항공료조차 부족했다. 철도공무원인 아버지 김철주씨의 5남 4녀 중 셋째인 김 단장은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께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아 두 명을 미국까지 데려다주면 항공료를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8개월과 11개월 된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22시간 넘게 비행을 했다.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의 자그마한 방 한 칸을 댄스스쿨에서 알선해줬지만 아침식사를 포함해 주당 25달러인 숙식비와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하루 12시간 이상 무용 연습을 하면서도 베이글 하나로 견딜 때가 많았다. 때로는 밤늦게 돌아오다 너무 힘들어 남의 집 계단에 앉아 달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김 단장은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딸이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현모양처로 살기를 원하셨지 유학 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았어요. 딱 1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춤꾼이 되고 싶었으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기대까지 짊어지고 있었어요. 김포공항을 떠날 때 외할머니께서는 부적을 한 장 주시면서 엄마의 꿈을 대신해서 이루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를 극심한 생활고에서 구해준 것은 루돌프 누레예보 장학금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30 대 1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뉴욕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출연료였지만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80년, 경쟁률 300 대 1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욕 10대 명문 무용단인 제니퍼 뮬러 현대무용단 전속 단원으로 발탁되면서 그는 프로페셔널 댄서로 우뚝 서게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 중남미, 캐나다 등 세계 곳곳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검정머리 휘날리며 춤추는 동양의 신비한 무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에 9개월간 해외 공연을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뉴욕에 머무는 3개월은 트론댄스시어터(Throne Dance Theater) 같은 소규모 무용단에서도 활약을 했다.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할 정도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많은 댄서들 가운데 눈을 뗄 수 없는 댄서”라고 극찬했다.
1988년, 드디어 그는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한다. 하얀 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의 ‘화이트웨이브(White Wave) 김영순 무용단’이다. 하얀 파도는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의 무용단 창단은 실력과 명성과 인간관계를 모두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단장은 그 해 88서울올림픽 현대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국내 팬들에게 현대무용의 진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홍콩에서 단독공연을 할 때는 홍콩스탠더드 신문이 ‘춤추기 위해 태어났다(Born To Do It)’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춤을 전면에 소개했다. 신문 제목처럼 그는 타고난 춤꾼이었다. 6세 때 인근 무용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구소리에 이끌려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7세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해 호남예술제에서 1등을 차지했다.
무용단 운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 등 60여 가지의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이 ‘댄스의 영역을 뛰어넘은 새로운 예술세계 창조’라고 논평하는 등 주요 언론들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무용단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소호(SOHO)에 있던 스튜디오를 임대료가 저렴한 이스트 할렘으로 옮겼으나 70평 남짓한 스튜디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해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는 맨해튼 스튜디오가 상가로 바뀌면서 새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다. 소호에서 밀려난 가난한 예술인들이 몰려든 덤보 지역은 앞이 캄캄했던 그에게 축복의 땅이었다. 기업인 존 라이언(John Ryan)씨가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면서 25만 달러를 지원받아 이스트 강변에 100석짜리 무용 전용극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덤보댄스축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미술·패션쇼·음악·필름스크린·댄스 등 5개 예술 분야로 나눠 열리는 덤보아트축제의 이사진과 댄스 부문 기획을 담당했던 친구의 권유로 2001년 제1회 덤보댄스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사실 덤보아트축제는 ‘예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사업이 번창한다’는 부동산개발업체의 경영전략에서 출범한 축제다. 덤보 지역이 번창하자 다른 분야의 축제는 사라지고 댄스축제만 남아 뉴요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김 단장은 신예 안무가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면서 뉴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신념으로 댄스축제를 지켰다.
그는 여세를 몰아 2004년부터 쿨뉴욕(Cool New York) 댄스축제를, 2006년부터는 웨이브라이징시리즈(Wave Rising Series) 무용축제를 잇따라 개최했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다운타운 현대무용계는 김영순 단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나도 하기 힘든 페스티벌을 세 개나 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때부터 그는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축제를 통해 총 2600여 무용단과 1만3500명의 안무가들은 7만여 관객 앞에서 기량을 발휘했다. 창무회 & 김매자, 김윤정 프로젝트댄스, 장유경 무용단, 길섭무용단, 박신애, 정석순, 김정환과 박봄, 박정윤, 최성옥 메타댄스 프로젝트 등 수많은 안무가들이 그들이었다.
그는 현재 뉴욕시가 매년 수여하는 댄스·연기대상(Bessie Award)과 예술지원기금 무용 부문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그의 무용단은 3년 연속 뉴욕시 지원 대상 문화예술단체로 선정되는 등 공로와 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마티 마코위츠(Marty Markowitz) 브루클린 구청장은 수년째 덤보댄스축제가 개막되는 날을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의 날’로 공표하고 있다. 그의 공로는 곤경에 처했을 때 더 빛이 났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이스트 강이 범람해 극장이 침수 피해를 입자 온라인 성금이 답지했다. 루도 셰퍼(Ludo Scheffer) 드렉셀대학 교수는 상속 재산 중 상당액을 기부했다.
김 단장은 수많은 무대에 올라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2014년 한국계 안무가로는 처음으로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rooklyn Academy of Music, BAM) 무대에서 새 작품 을 성공리에 공연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뉴욕에는 링컨센터 등 굴지의 공연장이 즐비하지만 공연 대상 선정이 가장 까다로운 BAM이 화이트웨이브무용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링컨센터의 뉴욕공공도서관은 그의 공연을 촬영해 DVD로 영구 보관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은 세상 사람들이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멈출 수 없다. 자신의 무용단을 통해 끊임없이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국제댄스페스티벌을 잇따라 열어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걸작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은 요즘 인류 화합을 주제로 한 이라는 대형 작품을 새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일부는 이번 덤보댄스축제에서 선보였다. 작품이 완성되면 내년쯤 한국 팬들에게도 소개할 계획이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은 전용 공연장이다. 덤보 지역도 이제는 예술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임대료가 뛰어 브루클린 내 다른 지역을 열심히 물색하고 있다. 김 단장은 새 공연장을 임대할 경제적 여력은 없지만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이제까지 그런 믿음으로 험난한 무용인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왔고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라는 독보적 위치에 걸맞은 활약을 오늘도 펼쳐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