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동안 108억 원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기부한 기업인이 있다. 1994년 8월에 창립해 국가유공자들의 복지 증진과 한미 우호 증진을 기업 목표로 삼고 유통, 서비스, 판매 사업을 하고 있는 상훈유통의 이현옥(李鉉玉·77) 회장이 주인공이다. 알게 모르게 꾸준하게 이뤄진 그의 기부는 정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2014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보훈 관련 단체에서는 ‘기부천사’라고 불리는 이 회장의 삶과 실천을 통해 돈 쓰는 철학을 짚어본다.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눈다는 것은 사회에 대한 배려 그 자체다. 돈이 있는 사람만이 나누는 건 아니다. 각자 자신만의 ‘달란트(재능)’를 필요로 하는 타인이나 단체에 선물하는 ‘재능기부’도 확산되고 있다. 일회성 봉사나 한시적인 거창한 후원보다는 소박한 실천적 나눔으로 사회 곳곳에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기부이다. 나눔과 기부가 ‘있는 사람들’만의 문화가 아님을 알려주는 일이다.
연매출 300억~400억 원의 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이현옥 회장은 첫 대면에서 겸손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따뜻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곧 자신의 따뜻함을 남과 함께 나누고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또한 어느 순간부터 나눔의 기쁨을 알게 되어 기부에 ‘중독된’ 대표적인 경영자다. 보훈처 퇴직 후 상훈유통을 설립한 다음 해인 1995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국가유공자와 보훈단체에 성금을 기탁한 이 회장이 낸 돈의 액수는 108억 원. 10억 원이 부(富)의 대표적 기준이 된 사회에서 이 회장은 그 열 배가 넘는 돈을 자신의 주머니 속이 아니라 남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러나 그 막대한 기부금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25년이 된 30평짜리 작은 빌라에 살고 있다.
국가 은혜 갚으려고 국민으로서 기부한다
이 회장은 베트남전에 하사로 참전했던 국가유공자이기도 하다. 격렬한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잔혹함과 죽어나가는 전우들, 그리고 국가가 없는 삶의 비참함을 깨달은 이 회장은 국가 보훈을 위한 기부를 반드시 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베트남전에서 복귀한 이후 20여 년간 보훈단체에서 공직 생활을 한 그는 상훈유통을 세울 때 국가 보훈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일을 진행했다. 상훈유통은 SOFA 면세품 양도 양수 사업,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홍삼 제품 및 홍삼 음료 판매 사업 등을 갖고 있으며 1사 1촌 농촌사랑운동의 일환으로 자회사인 상훈영농조합법인을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다.
그의 기부 대상은 당연하다는 듯 보훈 단체들이었다. 국가유공자단체와 보훈병원에서부터 광복회, 전몰군경 유족회, 미망인회, 월남전참전자회, 상이군경 복지회관, 안중근의사기념관, 천안함 관련 단체 등등 그는 보훈을 위해 만들어진 곳을 향해 아낌없이 돈을 냈다. 국가유공자들의 자녀들에게 지급하는 나라사랑 큰나무 장학금도 운영하고 있다. “부국의 원천은 강병이요, 강병의 뿌리는 보훈에 있다”라고 누누이 말하는 그다운 일이다. 그는 보훈이야말로 국민의 도리요, 의무이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힘닿는 데까지 동참하자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거창한 기부가 아닌 작은 배려와 실천의 기부로 행복을 누리자”
“덕을 베풀고 나누다 보니까 행복해지더군요. 복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고요.”
이 회장은 “좋은 생각, 좋은 마음, 좋은 일을 실천하며 살자”고 말했다. 지금까지 인터뷰했던 전형적인 기부중독자들과 똑같은 말이다. ‘남에게 베푸는 것이야말로 곧 행복’이며 ‘그래서 자신은 기부를 멈출 수가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기부라는 행복을 깨달은 사람이라지만 25년 동안 검소한 빌라에 살면서 100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낸 건, 정말 그게 가능할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회장은 그게 가능한 사람이었다. 돈을 기부에 쓸 수 있었던 것은 회사를 세운 후 21년 동안 매년 수익금의 50%를 기부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부분을 들으면 웬만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수익금의 50%를 기부금으로 낸다니, 가족들이 가만히 있었을까?’
그러나 이 회장은 그러한 아버지를 자식들이 이해해주고 욕심을 내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자식들에게 가업을 이어주지 않고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했다.
“억지로 시킬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가업 승계 문제는 전적으로 자식들 본인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한다고 하더라도 능력이 없으면 넘겨 줄 수 없습니다. 회사에는 좋은 경영 성과를 내는 직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회사를 넘기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소유하느냐보다 누가 기업을 존속할 수 있게 하느냐가 훨씬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죠.”
자신에게 맞는 작은 실천이 큰 힘
인터뷰 내내 말을 아꼈던 이 회장은 기부의 보람과 아름다움에 대해서만큼은 수다쟁이가 됐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작은 것들이라도 모이면 큰 힘을 낸다는 말인데, 제 기부 철학을 그대로 표현한 문구인 것 같습니다.”
이 회장은 많은 이가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작은 나눔에 동참한다면,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 회장이 기부를 통해 꿈꾸는 미래기도 했다.
베푸는 일은 자기의 위치에서 적당한 규모로 하는 것이 좋다. ‘쓸 수 있는 돈을 가진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바르게 쓰는 법까지 알고 있으면 더욱 좋다’는 유태인의 속담이 떠오르는 부분이었다.
“아름다움은 내면에서 풍겨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은 보기만 해도 행복한 에너지를 선물 받게 되죠. 우리는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남들과 행복을 나누는 사람이 되자고 늘 다짐해요. 나누지 않는 사람은 이 기쁨을 모를 겁니다. 직접 기부를 해보고 기부가 어려운 게 아니라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창하게 하는 것이 아닌 작은 배려와 실천이 얼마나 소중한가를요.”
불교에는 인생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인생이 덧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깨닫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남과 나누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빈손으로 가는 삶일까? 다른 사람을 위해 돈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 이들은 결국 온 누리에 이름을 남긴다.
◇ 백선행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돈 쓰기
조선 말기 평양에 16세에 과부가 된 여인이 있었다.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이 죽자, ‘남편 잡아먹는 년’이라고 친정으로 쫓겨나는 설움 속에 ‘백과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녀의 나이 7세에 아버지를, 16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 결국 ‘쌍과부’ 상태로 어머니와 지내게 됐지만, 26세 되던 해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홀로 남은 딸이 걱정돼 현금 1000여 냥과 150냥짜리 집을 남겨놨는데, 그마저도 사촌오빠에게 빼앗겼다. 빈털터리가 된 백과부는 주위 이웃들에게 닥치는 대로 일감을 달라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삯바느질에 길쌈은 물론이고 남들이 먹다 버린 복숭아씨를 파는 일까지 그야말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다. 이러니 사람들이 ‘악바리 백과부, 지독한 백과부’라 부를 만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열심히 일하고, 남의 궂은일까지 먼저 달려가 일손을 돕는 백과부를 좋아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모두 도와줄 정도. 한 번은 그녀가 꽤나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을 들은 탐관오리 평양부윤이 재산을 바칠 것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상소를 올려 감옥에서 풀려난 적도 있다.
그렇게 그녀는 모은 돈으로 땅을 사고 그 땅을 소작농에게 대여해 소작료를 받아 다른 땅을 사들이는 것을 반복하면서 재산을 크게 늘렸다.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뛰어나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돌산을 헐값에 사들여 일본인 시멘트 업자에게 100배가 넘는 가격에 되팔기도 했다. 이는 당시 32만원으로, 현재 320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렇게 부자가 된 백과부는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쓰기 시작했다. 환갑을 맞아 고향인 대동군 고평면에 커다란 다리를 놓자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크게 칭송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기대했는데 딸을 낳자 실망하여 이름조차 없었던 ‘백과부’는 그때부터 ‘백선행(白善行)’이라 불렸다.
이후 백선행은 ‘선행’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사재를 털어 교회를 짓고, 어머니와 자신의 한풀이를 위해 학교를 세우고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당시 평양에 있는 모든 학교가 그녀의 기부금으로 운영될 정도였다.
1933년 5월, 그녀가 86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평양이 울었다 할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백선행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300개가 넘는 화환과 만장 등이 늘어선 장례행렬은 2km나 이어졌고, 장례식에는 1만여 인파가 운집해 애도했다.
과부라는 외로운 삶과 사회의 편견 속에서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에 기부한 여인 백선행은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돈 쓰기를 실천한 여인이었다.
◇ 이종순(94)씨 사랑과 이름을 남긴 10억
지난 5월, 구순을 넘긴 여인이 휠체어를 타고 서울 노원구의 삼육대학교 교정에 들어선다. 장학금을 기부하기 위해서다. 액수는 무려 9억원. 2012년 1억원을 기부한 것까지 더하면 합이 10억원이다.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의 이종순씨였다. 평생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며 벌어온 돈을 선뜻 내놓는 90대 여인의 목소리는 환희로 가득찼다.
“평생 꿈꿨던 소원을 이제야 이뤘습니다. 이 나라를 발전시킬 인재를 위해 써 주세요.”
그녀는 굳은 땅에 물이 고인다는 생각으로 아끼고 아껴 재산을 모았다. 6·25 중에도 화장품, 군복 장사 등 안 해 본 장사가 없을 정도였다. 평생 고생하며 모은 돈으로 사들였던 오피스텔을 처분해 기부한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삼육대는 그녀의 뜻을 기려 기존의 보건복지교육관을 ‘이종순기념홀’로 명명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에 ‘이종순’이라는 이름을 묘비 아닌 다른 곳에 남긴 셈이다.
◇ 故 정석규 신양문화재단 명예 이사장 검소한 회장님이 남긴 450억
짜장면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해 남긴 남성이 플라스틱 통을 꺼낸다.
“주인양반, 짜장면 남긴 것 좀 싸가겠소.”
주변에서 음식을 먹던 사람들은 혀를 차며 안타깝게 쳐다본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나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여겼을 게 뻔하다. 음식을 싸가는 남성도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 듯 플라스틱 통에 담는 손길이 능숙하다.
그 남성은 ‘도와줘야 할 대상’도, ‘형편이 어려운 사람’도 아니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만 그는 ‘회장님’이다. 태성고무화학의 전 회장이자 신양문화재단의 명예 이사장 고 정석규의 이야기다. 그는 1967년 태성고무화학을 설립해 회사를 업계 최고로 키운 거부임에도 평소 검소한 생활로 주위에 귀감이 돼 왔다.
지난 5월 21일 향년 86세로 별세한 정석규 명예이사장은 생전에 모교인 서울대에 450억원을 기부했다. 1987년에 시작한 그의 기부활동으로 장학금 혜택을 받은 서울대 학생만 해도 820명. 그 액수도 25억 6200만원이나 된다. 여기에 인문대와 사회대, 공대 등 3곳에 그의 아호인 ‘신양’을 딴 신양학술정보관도 지어져 후배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정 이사장의 기부활동에 대해 그의 일상생활이다. 이우일 서울대 연구부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돈은 분뇨와 같아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밭에 풍성하게 뿌리면 고루 수확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평생 신조로 사신 분입니다.”
서울대 학생들은 그를 다 낡아 떨어진 구두를 신고 다니는 이사장으로 알고 있을 정도니 그가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서울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추모와 감사가 계속됐다. ‘당신께서 만들어주신 계단 덕분에 현재 꿈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사장님의 삶처럼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등의 내용이다. 정 명예 이사장이 베푼 것은 돈이지만, 남은 것은 그의 삶의 철학과 품격이었다.
◇ 故 김경수씨 못 배운 한, 한풀이 1억원을 남기다
지난 1월, 그 추웠던 겨울의 한가운데, 꽁꽁 언 마음까지 녹이는 훈훈한 이야기가 제주대학교에서 들렸다.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의 고 김경수(81·여)씨가 평생 농사일을 하며 모은 1억 원을 불우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기탁한 것이다.
김씨는 어린 시절 제주 4·3 사건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마저 어머니 따라 떠난 뒤 그는 어린 여동생과 힘겹게 살았다. 불우한 환경은 그녀에게 배움을 허락하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한은 평생 그녀를 괴롭게 했다.
배움에 대한 한을 그녀는 봉사를 통해 풀 수 있었다. 자신과 같이 불우한 환경에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생 모은 돈을 기탁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선행이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주변 정리를 하는 가운데 자녀들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었던 것. 결국 그녀는 대학발전기금 기탁식 11일 후인 1월 16일 세상을 떠나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평생을 6남매 뒷바라지해오면서 언젠가는 당신께서 겪으신 인생의 한과 설움을 사회봉사로 풀어보려는 생각을 가지시고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오랫동안 준비해오셨습니다. 이 돈은 평생 한여름 뙤약볕에서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하면서 몸이 죽어가는 줄 모르고 일해 모은 쌈짓돈입니다. 의연하신 의지로 단호한 결정을 내려주신 어머니께 당신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 행복하고 자랑스럽다고 말씀드립니다.”
그녀의 자녀들이 대학발전기금을 기탁하면서 낭독한 ‘장학금 기부자 자녀들이 드리는 글’은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격동의 세월을 살며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것이 한이었지만, 그녀는 돈과 함께 희망을 남겼다. 한은 스스로 거두어 갔다.
라는 유명한 희곡을 쓴 테네시 윌리엄스는 “돈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낼 수는 있지만 돈 없이 노후를 보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 대부분은 인생 전반부에 부지런히 돈을 모은다. 돈을 갖고 있는 것은 일종의 재량권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돈에는 힘이 있다. 다름 아닌 물건을 살 수 있는 구매력이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은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 받을 권리를 갖는다. 말하자면 돈은 상대방의 행동을 일으킨다. 돈을 갖고 있는 사람 쪽에 주도권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돈이란 부정적인 측면보다는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다. 그러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죽을 때 가져가지는 못한다. 어떻게든 써야 한다. 어떻게 해야 돈을 잘 쓰는 것일까? 지금까지 사람들은 열심히 번 돈을 고스란히 자식에게 물려주곤 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돈 잘 쓰는 방법’의 전부는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머리가 필요하고 돈을 잘 쓰기 위해서는 가슴이 필요하다고 했다.나이가 든 뒤에야말로 바로 그 가슴이 필요하다.
때는 이때, 집집마다 증여 붐
자산은 남겨도 되고 남기지 않아도 된다. 장·단점이 각각 있어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식과 손주에게 자신의 의사를 일찌감치 밝혀 제대로 준비하거나 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왕에 상속한 재산이라면 후손들이 자산을 불려주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 그러나 자녀 모두가 사업 수완이 뛰어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 최근 20년 사이 국내 재계 서열 30위 내 그룹들의 부침은 컸다. 30위 안에 이름을 올렸던 그룹의 절반 이상이 경영 승계 후 법정관리 등으로 순위에서 자취를 감췄다.
최근에는 세법을 비롯해 다양한 규제법이 강화돼 부와 경영권 모두를 온전히 대물림하기는 힘들어졌다. 가업 상속의 측면에서 “소유와 경영 모두를 지배하기는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미래에셋 은퇴연구소 이상건 상무도 “향후 기업의 지배구조는 유럽의 ‘소유와 경영의 분리’ 방식을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KB 2015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부자의 경우 ‘보유 자산을 누구에게 상속 또는 증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녀’라고 응답한 비율이 98.4%로 가장 높았다. 이어 배우자 72.7%, 손자녀 15.5%, 형제자매 2.6% 순이었다. 주목할 점은 손자녀의 비중이 지난해 조사의 29.4%에서 크게 하락했다는 사실.
상속 및 증여 방법에 대해서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본 부자 중 71.4%가 ‘자산 일부는 사전 증여하고 일부는 사후 상속하겠다’고 응답해 대다수가 상속과 증여를 함께 고려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전부 사후 상속하겠다’(20.7%)와 ‘전부 사전 증여하겠다’(6.9%)는 응답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2014년과 비교해서는 ‘전부 사후 상속’의 비율이 8.1%포인트 감소한 반면 ‘자산의 일부 증여, 일부 상속’ 비중은 10.9%포인트 증가하여, 사후가 아닌 자녀가 필요로 하는 시점에 일정 부분의 재산을 나누어주려는 인식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더 현명하게 자식과 손주들에게 돈을 남기는 방법’에 관한 고민 역시 최근 급격히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프라이빗뱅커(PB)가 상속·증여와 관련해 상담해주는 ‘노블 아카데미’가 입소문을 타면서 지방에서도 상담 요청이 크게 늘었다. 4대 시중은행에만 상속·증여 관련 상담 문의가 올 들어 5월까지 2000건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국민·우리·신한은행 등은 증여 상담 등을 제공하는 이른바 ‘가문 관리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증여와 상속에 대해 고민하는 자산가들의 공통 질문은 ‘어떤 재산을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물려줘야 할까’다. 정답은 무엇일까?
역삼동에 사는 박영희(가명·63·여) 씨의 지론은 그 문제에 관한 정답의 하나가 될 듯하다. 펀드와 주식과 임대업이 주 수입원으로 50억 원대 자산가인 박씨는 스물세 살 된 외동아들에게 어차피 물려줄 거면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아파트와 건물을 증여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말한다. “증여세를 줄이는 기본 원칙은 ‘현재 평가액이 가장 낮은 재산’이나 ‘향후 가치 상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재산’부터 증여하는 것”이라며 “현금 증여보다 부동산을 직접 증여하는 것이 절세 효과가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아생전에 돈을 쓴다
“돈 아니면 물려줄 게 없다는 생각에 답답하다.”
“65세까지는 모으고 그 후에는 다 쓸 생각이다.”
“내일이 아닌 ‘지금’을 위해 쓰고 싶다.”
“자산의 50%는 자녀를 위해 남겨두고 싶다.”
“남은 인생 좀 즐기겠다는데 자식 눈치 볼 필요 있나?”
“기부하고 싶다. 마지막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싶다. 사회 환원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자식 결혼할 때 집 문제까지는 해결해주고 싶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겠다. 해외 봉사 활동을 가장 하고 싶다.”
“필요한 곳에 쓰도록 살아 있을 때 물려주고 싶다.”
돈을 남기느냐, 다 쓸 것이냐 하는 질문에 자산가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내놓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전에 비해 ‘살아생전에 모은 돈을 다 쓰겠다’는 생각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쓰죽회’라는 모임이 있다. 70대 이상 부자 어르신들이 ‘재산을 자식이 아닌 자신을 위하여 다 쓰고 죽자!’라는 취지로 만들었다. 그 모임이 최근에 해체했다고 한다. 지갑을 여는 사람만 여는 모임의 관행 때문에 서로 불편해지자 하나 둘 모임에서 빠지기 시작해 결국 해체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유형적 재산뿐 아니라 삶에서 터득한 경험과 지혜라는 무형적 재산까지 남김없이 쓰고 인생을 마무리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닌 게 아니라 요즘 부모들은 자신만의 여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 취미나 문화 활동 등으로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노후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노후를 자식에게 기대는 이전 세대들과는 다르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도 상대적으로 적다. 자산가들도 장수위험(Longevity Risk)이나 연금 고갈 등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지갑을 잘 열지 않는 추세다.
3대째 서울 영등포 로터리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장수원(69·가명) 원장은 그런 현상을 대변하는 좋은 예. 장 원장은 “자식들이 재산 상속을 바라지 않고 가진 돈으로 즐겁게 살라고 한다”며 “쓰다가 남으면 아들 형제에게 상속하겠다”고 말한다. 더불어 “금쪽같은 손주 네 명에게 적금이나 보험을 들어주고 있다”고 자식보다 손주 사랑에 더 각별하다.
유산기부자 늘어… 상속보다 기부를 선택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 기부를 선택하는 자산가도 없지 않다. 모 건설업체의 A 대표는 얼마 전 두 명의 자식에게 “재산의 20%만 상속하겠다”고 천명했다. 스스로 돈 버는 재미를 느끼고 성공을 체험하는 데 일정 금액 이상의 유산은 오히려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려준 재산이 오히려 자식을 망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나눔국민운동본부 정경희 사무국장은 “2011년부터 시스템이 갖추지 않은 상태에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을 시작해 지금은 회원이 1000여 명 이상”이라며 “재산의 3분의 1만 가족에게 남기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혔다.
“2013년부터 시작한 ‘참행복나눔운동’이라는 사단법인에는 유산기부 서약식을 쓰거나 이미 기부하신 분들만이 커뮤니티가 이뤄지고 있어 유산기부자의 사회적 현상으로 봅니다. 자식을 결혼시키고 보니까 돈은 탐내면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하지 않거든요. 연금제도가 생기면서 재산을 좀 더 가치 있게 쓰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유산기부자가 늘게 된 요인인 듯 합니다. 전직 장관 출신, 종교인, 교수, 고위 공직자, 과학기술 분야에 계신 박사들도 있고 대기업 회장을 지낸 분들이 있습니다.”
기부는 돈이 많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금액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유산기부의 모범적 행동이 기부문화와 사회발전에 바람직한 변화를 일으키는 사회적 유산이 되고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전 재산 약 36조 원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해 지구촌의 화제가 되고 있다. 알 왈리드 왕자는 세계 34위의 부자로 30여 년 전부터 자선사업을 해왔으며 이미 3조9000억 원을 기부했다.
기부에 관하여는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를 빼놓을 수 없다. 사회적 비난을 무릅쓰고 세계적 갑부가 된 그는 55세 때 불치병으로 1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투병 중에 록펠러는 선행의 길로 들어서며 기적적으로 건강을 되찾아, 장학사업과 자선사업에 정열을 쏟으면서 98세까지 장수했다. 그는 “인생 전반기 55년은 쫓기며 살았지만, 후반 43년은 참된 행복과 기쁨 속에서 살았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록펠러 이후에도 카네기, 헨리 포드, 워런 버핏 등의 거액 기부자가 이어지면서 자선과 기부는 미국 사회의 전통이 되고 있다. 카네기는 베푸는 삶의 기쁨을 알고부터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재산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빌 게이츠 역시 재단을 만들어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어떤 부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남겨주는 데 자신의 돈을 활용하기도 한다. 뉴욕의 프릭 컬렉션(Frick Collection)은 개인의 재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좋은 예다. 프릭 컬렉션은 실업가 헨리 클레이 프릭의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맨해튼 주택가 속의 저택이 그대로 미술관이 돼 있다.
유태인들은 ‘쓸 수 있는 돈을 가진 것은 좋다. 바르게 쓰는 법까지 알고 있으면 더욱 좋다’는 진리를 속담을 통해 남기고 있다. 어떻게 써야 바르게 쓰는 것일까?
인생의 끝자락이 아름다운 사람이 최후의 승자다. 일출보다 일몰이 더 멋있게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다. 최후의 승자가 되려면, 일몰이 더 멋있어지려면, 자신의 자산을 어떻게 써야 할까에 관한 고민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잘 쓰며, 잘 늙어가는 것은 잘 죽기 위한 작은 힌트가 아닐는지 열대야 잠 못이루는 한 여름 밤 문득 깨닫게 된다.
*돈을 남긴 사람들
마이클 잭슨 2221억 6080만 원
로빈 윌리엄스 55억 5000만 원
파블로 피카소 6조 8499억 5800만 원
야나세 다카시(柳?嵩) 3702억 6800만 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 2조 2696억 650만 원
*돈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
앤드루 카네기가 도서관 건립에 쓴 금액 3872억 2266만 원
알프레드 노벨이 스웨덴과학아카데미에 기부해 노벨상을
제정하게 한 금액 46억 3185만 원
성룡이 자선기관에 기부한 금액 3566억 5245만 원.
사후에 아들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고 모든 걸 기부하겠다고 선언.
‘누군가 사랑할 사람(Someone to love), 무엇인가 할 일(Something to do), 뭔가 바라는 것(Something to hope for)’
영어권의 현인들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꼽는 3가지(3S)이다. 여기서 필자의 의문은 “과연 우리가 이 3S만으로 진정 행복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3S가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지려면 그보다 더 기본적으로 필요한 2가지가 있다. 바로 ‘돈’과 ‘건강’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니, 그걸 누가 모르냐?”고 반문할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당연한 것이니까 기본 중의 기본이 아닐까. 그래서 ‘3S + 2(돈과 건강) = 5F’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진정한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 ‘F’로 시작하는 영어단어, 즉 ‘Finance, Friend, Field, Fun, Fitness’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 번째 F는 뭐니 뭐니 해도 돈이다. 해서 Finance. 우리가 열심히 살면서 돈을 버는 것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키우는 한편 나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어느 정도 돈의 여유가 있어야 나름 설계도 하고 그에 따라 집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다. 건강하기만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지만 건강할 때 돈을 벌어놓아야 건강도 지킬 수 있고, 또 건강에 탈이 나도 고칠 수 있다.
두 번째 F는 누군가 사랑할 사람(Someone to love), 즉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놀 친구(Friend)를 의미한다. 친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친구는 배우자를 포함한 내 가족이다. 평소에 배우자와 자녀는 물론 부모·형제 등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노력이 중요하다. 지금은 바쁘니까 이 담에 하지 뭐 하다보면 살가운 정은 다 떨어지고 난 다음일 수도 있다.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FAMILY’는 ‘Father and mother, I love you!’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소설가 최인호 선생처럼 부인과 딸을 곁에 두고 사랑한다면서 눈을 감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을까. 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척 외에도 이 그룹, 저 그룹의 친구들과 사귀면서 등산이나 사진 찍기, 여행, 식도락 등을 함께 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세 번째 F는 뭔가 할 수 있는(Something to do) Field를 말한다. 이때 필드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직장이 될 수도 있고 여가로 사진이나 글쓰기, 춤 배우기, 문화예술 관람, 요리, 여행 등과 같은 취미활동을 즐기는 것일 수도 있다. 자원봉사와 기부활동도 평소나 은퇴 후에나 좋은 필드이다. 꼭 돈만이 아니더라도 내 체력과 재능과 시간 등을 얼마든지 기부하면서 자존감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미리미리 준비해놓으면 귀농귀촌 또한 훌륭한 필드가 될 수 있다.
요즘 뜨는 필드가 또 하나 있다. 방송통신대 또는 학점은행제 대학 등에 다니면서 그간 못 다했거나 하고 싶었던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퍼져 있는 도서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친구들도 사귈 수 있다. 필자가 아는 분은 80이 넘은 나이에 방송통신대 일문과, 중문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불문과에 다니고 있다. 일본어 찍고 중국어 거쳐 불어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는 그에게서 청년의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다. 학점은행제 대학 등록자 중 60세 이상의 수를 보면 2008년만 해도 4500여명이던 것이 2013년 현재 2만 3000명으로 급증하고 있다. 결국 소득을 얻기 위한 일자리뿐 아니라 내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소일거리가 곧 좋은 필드가 되는 것이다.
네 번째 F는 재미를 의미하는 Fun이다. 지난 번 기고에서 말한 것처럼 즐겁고 재미있어야 인생이다. 뭔가 바라는 것, 기대하는 것(Something to hope for)이 없는 인생보다 더 지겹고 재미없는 삶도 없을 것이다. 영국계 글로벌 은행 HSBC가 몇 년 전 22개국 2만여명의 사람들에게 ‘은퇴’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대다수 선진국 사람들은 ‘자유, 만족, 행복’이라고 대답한 반면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첫 번째로 꼽았다. ‘외로움, 지루함, 두려움’이 그 뒤를 이었다. 돈과 할 일이 어느 정도 있고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이들과 함께 나만의 재미, 그 무엇을 찾아 떠나봄직 하지 않은가. 영화 ‘국제시장’에서 주인공 덕수는 아들과 딸 부부들이 여행갈 수 있도록 어린 손자와 손녀들을 봐 주고 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부인 영자와 손잡고 여행을 떠날 사람은 바로 덕수란 말이다.
다섯 번째는 앞선 4가지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강(Fitness)이다. 필자의 영어가 짧아서인지 건강하면 Health만 떠오르는 바람에 ‘4F 1H’하려다가 다행히 Fitness가 생각나서 5F로 완성할 수 있었다. 군말이 필요 없다. 건강이 없다면 돈과 친구, 일거리, 재미도 다 나의 것이 아니다.
얼마 전 한 TV의 장수 관련 프로그램에서 104세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73세 따님의 이야기가 나왔다. 무남독녀인 이 따님이 자녀들을 다 출가시킨 후 노모를 모시기 위해 시골로 내려온 것이다. 어느 날 잠시 외출했다 돌아오니 치매 기운이 약간 있는 어머니가 마당에 나와 계셨다. “쌀쌀한데 왜 나와 계시냐?”고 했더니 그냥 기분이 좋다면서 노래를 한 자락 하시는 거라. “술 잘 먹고 돈 잘 쓰니 금수강산이더니, 술 못 먹고 돈 못 쓰니 적막강산이로세.” 정선아리랑의 한 자락이었다.
술 잘 먹고 돈 잘 쓴다는 것은 5F, 즉 돈과 할 일, 친구, 재미, 건강의 5박자가 잘 갖춰져 있는 금수강산이다. 반대로 술 못 먹고 돈 못 쓴다는 것은 5박자 중 대다수가 잘 갖춰져 있지 못하니까 적막강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5F가 얼추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하면 내가 바로 공자도 부러워할 5자(놀자, 쓰자, 주자, 웃자, 걷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5F가 5자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5F 중 Finance는 은퇴설계 중에서도 재무적 설계에 해당하고, 나머지 4F는 비재무적 설계라고 말한다. 재무적 설계를 넘어 비재무적 설계도 잘 생각하고 준비해 놓아야 행복한 노후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말은 쉬워도 갖추기는 어려운 게 5F이다. 로또 당첨과는 달리 조금씩 조금씩 오랫동안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5F를 하나씩 따져보면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 채워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자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 누가 말했나.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보험연구소장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월례 조찬 모임 백강포럼(회장 윤은기)에서 만난 조석준(趙錫俊) 전 기상청장은 포럼 진행뿐만 아니라 리스타트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백강포럼은 이른 아침에 하는 조찬 모임인데 200여 명씩 몰리며 문전성시를 이루는 등 학구열이 어느 모임 보다도 뜨거운 모습이다. 조 전 청장도 자기가 선택한 것을 자기만의 속도로 해나가는 ‘프리스타일’이라는 점에서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공부를 한다. 그는 아침 조찬회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공부나 지식으로서의 공부가 아니라 삶의 변화를 동반하는 상생의 지표를 찾고 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최근 조 전 청장은 1년 동안 참석한 백강포럼 조찬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사업의 그림을 그리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중이다. SNS 소셜미디어 시장에서 ‘메가시너지 아카데미’를 열어 보겠다는 야심찬 생각으로 기획하고 있다.
백강포럼은 일반 포럼이나 조찬회처럼 일방적인 지식 전달이나 단순한 성공담을 전하는 차원의 강의 콘텐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진행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몸담아 왔던 디지털과 방송 미디어 그리고 강연 콘텐츠를 융합하기에 충분했다.
조 전 청장이 기획하고 있는 ‘메가시너지 아카데미’는 개인이 갖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체계화시켜 독창적인 콘텐츠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며, 아울러 융·복합과 협업적 방식으로 개인과 조직의 핵심역량과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지속적 네트워킹을 지원한다는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메가시너지 프로강사 과정은 자신의 독창적인 콘텐츠(지식, 경험)을 다듬고 연마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또한 신개념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전수하여 자신의 콘텐츠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킬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고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을 지향하고 있다.
프리스타일 공부로 얻은 ‘메가시너지 아카데미’
조 전 기상청장이 백강포럼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013년 발기인대회에서부터였다. 그때부터 백강포럼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조 전 청장은 2014년 말까지 10여 회의 조찬 모임을 진행했다. 어느 강의나 마찬가지겠지만 양질의 강사를 확보하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저희도 노력했죠. 사실 예전에는 이런 포럼이라고 하면 주로 지식 전달, 그때그때 유행하는 리더십으로 대개 콘텐츠가 이뤄졌어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50년이 넘는 성장의 배경에는 분야별로 많은 발전이 있었던 거죠. 그 내용을 살리는 게 백강포럼의 취지와도 부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우리 사회 각 분야별로 존재하는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보여주는 거죠. 물론 어두운 측면도 강연을 통해 알려 계층 간 소통을 원활히 하자는 겁니다. 상생과 협력으로 가자는 거죠.”
조 전 청장은 강의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함께 있어야 하며 그 둘이 함께 만나 콘텐츠 질을 높여야 한다고 밝혔다. 작년 말에 진행했던 손욱 행복나눔25 운동본부 이사장의 감사 나눔이 실제적인 혁신으로 이어져 성공했던 것도 그런 바탕이 있었다는 설명.
이제 강의는 공급자와 수요자가 상생해야
“과거 지식인 사회에서 주류를 이뤘던 건 호흡이 긴 콘텐츠였는데, 이제는 짧고 핵심적인 정보를 다루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체질이 스피드와 핵심 축약을 선호해요. 사실 그런 기질이 한국의 압축적 발전의 원동력이지 않았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분을 보다 구체화하여 정리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게 메가시너지 아카데미의 목적입니다.”
세상의 빠른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개인이 갖고 있는 경험과 지식을 더 단순명료화하여 브리핑하게 하는 것, 그리고 좋은 내용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과거에는 세상의 커뮤니케이션 주도가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변화가 빨라서 TV, SNS 등이 더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이제는 CEO가 ‘잘라내는(편집하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CEO 밑의 사람들이 신문 스크랩 등을 해서 CEO에게 교육용으로 전달해줬는데 그건 이제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어떤 소식이 퍼지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대미지(피해)도 오래 걸렸지만 요새는 두 시간만이면 전세계에 모두 퍼지고 데미지도 그만큼 빨리 영향을 주기 때문이죠. 이젠 어떤 조직이든 끊임없는 소통이 중요해진 세상입니다. 뭔가 잘못된 정보가 나왔을 때 ‘그건 아니다’라고 바로 말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는 거죠.”
손 안의 방송사,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 필요
강연들을 보면 대개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동안 이뤄지곤 했다. 그런데 요새는 나 처럼 15분짜리 강연이 나와서 호응을 얻고 있다.
“의미가 있다고 봐요. 그렇게 강연이 짧아지는 추세가 점점 심플해지는 미디어의 발달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죠. 앞으로는 30, 40분 강의를 두 개쯤 배치하는 것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짧으면서도 임팩트 있는 구성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거죠.”
조 전 청장은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이 공유되어 사람들이 일정 수준 이상은 아는 시대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신선한 강연 콘텐츠가 많지 않다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조 전 청장이 내용을 함축적으로 전달해주고자 하는 것도 강연만이 아닌 강연 후 토론을 통해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어지게끔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방송사에는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조찬회도 방송과 똑같이 그런 군더더기 없는 시나리오가 필요합니다. 일정한 수준의 편집 및 가공이 필요하다는 거죠.”
조 전 청장은 스마트폰이야말로 손 안의 방송사와 똑같다고 분석했다. 지금 시대는 촬영에서부터 송출까지 가능한 기기가 손 안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다. 조 전 청장은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예로 들었다. 루게릭병 치료 홍보를 위해 시작된 아이스버킷 챌린지 캠페인은 일 년에 20억 원 정도이던 모금액을 한두 달만에 그 열 배인 100억 원 가까이 모으게끔 만들었다. 이는 전통적인 미디어가 못해내는 일을 SNS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1980년대 초였다면 KBS와 MBC만 있었어도 통치가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SNS 채널이나 스마트폰이 있어 방송사를 갖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콘텐츠를 어떻게 정리하여 활용하느냐에서 판가름날 것입니다.”
그는 “은퇴를 앞두고 있는 신중년들은 스스로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쥐고 있는 한 줌을 지키려 애쓴다. 공부는 이런 통념을 깨고 자신을 바꾸는 과정”이라며 “강의 콘텐츠에 새로운 메커니즘을 구축해보겠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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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백강포럼
좋은 강의가 좋은 세상을 만든다
대한민국 백강포럼(회장 윤은기)은 좋은 강의를 통해 계층·세대·이념 간 갈등을 치유하고 우리나라가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보탬이 되고 있어 타 지식포럼의 귀감이 되고 있다.백강포럼은 사회
각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온 100명의 명사들이 강의를 통한 사회 공헌을 실천하기 위해 모였다.백강포럼(100인 강사 포럼)의 구성원은 윤은기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을 비롯해 관료, 학자, 문화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다.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100명의 강사는 좋은 강의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이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치 아래 강의를 통해 사회공헌을 하고자 한데 뭉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백강포럼은 봉사정신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회원 간 지식 공유하는 지적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다.
회원으로 박재갑 전 국립암센터 원장, 김신배 SK그룹 부회장, 홍석우 전 지식경제부 장관, 최광식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손욱 행복나눔125운동본부 이사장, 이희범 전 산자부 장관, 김은기 전 공군참모총장, 서규용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안종배 한세대 교수, 권대욱 아코르 앰배서더 호텔 대표, 김혜정 경희대혜정박물관 관장, 김동수 전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신각수 전 주일 대사, 김재우 한국치협회 회장, 성영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이영하 전 레바논 대사, 조현정 비트컴퓨터 회장, 명동성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한미영 세계여성 발명기업인협회장 등 정치·산업·교육·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다양하게 참여하고 있다.
백강포럼은 봉사 정신을 바탕으로 국가 발전에 기여하고 회원간 지식을 공유하는 지적 커뮤니티를 지향하고 있다. 재능기부 강의 등 다양한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특히 상업적 모임이 아닌 공익을 추구하는 모임으로 정치적 중립, 극단의 배제,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가치 창출, 융·복합적 소통 등이 백강포럼의 원칙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서울 컨벤션 도심공항 3층에서 한달에 1회, 오전 7시부터 조찬포럼을 진행하고 있다.
최신원(崔信源·62) SKC 그룹 회장은 글로벌 경제 위기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꾸준하게 실천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2000년대 초반에는 ‘을지로 최신원’이라는 이름으로 기부 활동을 펼쳤으며 사랑의 열매에서 운영하는 고액기부자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기도 하다. 그가 속해 있는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그가 낸 기부금으로 ‘Choi´s happy fund’를 조성하여 저소득 가정에게 연탄을 배달했고 세월호 피해 지원 사업을 전개했으며, 세계화에 따라 부각 중인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다문화가정,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다양한 지원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노인이 되길 거부하는 어른, 최신원 SKC 회장의 철학에서 발견해 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2014년 12월 3일, 인터뷰 및 사진 촬영을 위해 SK텔레시스에서 만난 최신원 회장에게선 특유의 소탈함과 다정다감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최 회장에게 기부에 대한 남다른 이유가 있는지를 물어 봤을 때 나온 대답에서, 그 자연스러움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의 기부와 나눔 습관은 언제나 말했듯이 저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에게서 자연스레 배워 온 것으로 저희 집안은 나눔과 기부의 DNA가 가족력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삶의 덕목이 사회적 가치 향해야
자신의 행동을 ‘태생적’인 것이라고 밝히는 최 회장은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대표 기업인으로서 삶의 덕목이 사회적 가치에 닿아 있음을 밝혔다. 그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책임감과 그를 바탕으로 한 나눔 정신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말한다.
“기업이라는 곳도 사람들이 모여서 일하는 곳이고, 그곳에서 얻어진 자원을 나누는 대상도 사람입니다. 물론 나눔의 대상이 자연과 환경, 동물과 식물이 될 수도 있지만, 여전히 그것도 사람과 연관이 있습니다. 더불어 애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연령과 성별, 장애와 비장애, 인종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사람을 존중하는 정신과 삶의 태도야말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지닐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며 추구해야 하는 삶의 덕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 회장은 또한 사람들의 사회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삶의 덕목으로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그렇기에 늘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과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낮은 곳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결과를 이루었을 때 오히려 우리 자신들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해 주는 좋은 영향이 된다고 생각하구요.”
받는 이의 입장을 고민하는 기부자의 진정성
최 회장은 수년째 회사 임직원들과 함께 기업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는 여주나 파주 등으로 김장이나 연탄 배달 봉사를 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임직원들과 함께 활동을 시작하고 종료하는데 그래서 직원들이 본의 아니게 힘들어 할 때도 있다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그가 ‘요식행위’로서의 기부를 분명히 거부한다는 뜻도 된다.
“제가 이번에 여주에서 연탄 배달 봉사를 하면서 허물어져 가는 집안 내부, 쓰레기가 나뒹구는 마당 등 연탄 지원 외에도 우리가 나눔을 실천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연탄 나르기와 더불어 수혜 가정들의 주거 환경 개선활동도 함께 진행할 예정입니다. 사실 김장 담그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경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기업들이 단순히 단가를 낮춰 양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내산 좋은 재료들로 만들어진 김장을 나누는 것이 진짜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에 가격이 많이 올라가도 수량을 오히려 매년 늘리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가족들이 먹을 음식이란 생각을 가지고 재료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서는 그저 돈이나 물건만을 주는 게 아니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는 기부자로서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작더라도 그 안에 얼마만큼 사랑과 정성이 깃들어 있는가가 중요하듯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는 것이 중요한 법이라는 걸 최 회장은 실천해 보이고 있었다.
나눔을 통해 미래 공동체 지도자로 거듭날 베이비붐 세대
“인간은 모두 태어날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양손엔 아무것도 쥐지 않고 두 주먹만을 쥐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 주먹 속에 많은 것을 담으려 하고 또 마치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처럼 물질적인 것들을 따라가곤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의 몸 외에 그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없듯이 동시에 우리 주변의 것들은 항상 나눠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최 회장은 기부가 자신에게 있어 큰 의미의 취미라고 설명했다. 나눔과 봉사는 그에게 언제나 소중한 스승이 되어 왔고 자신을 나태하지 않도록 도와주었으며, 생각의 결핍증에 걸리지 않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주변인들과의 나눔은 자신에게 행복 그 자체라는 최 회장은 그러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베이비붐 세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의견을 내놓았다.
나눔과 봉사는 많은 가치를 일깨워 줘
베이비붐 세대에 대한 최 회장의 고언은 베이비붐 세대가 노인으로 머무르지 말고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최 회장에게 ‘자신이 진짜 어른이 되었구나’라고 느낀 순간은 언제였을까?
“해병대를 제대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집안에 우환이 생겼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슬픔과 비탄에 잠겨 있었고 그때 제가 했던 생각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내가 보살펴야 한다는 것 이다.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감정적으로 닥친 시련 앞에 지지 않으려는 저의 근성과 동시에 주변인들을 따뜻이 감싸줘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최 회장에게 자신의 어른다움의 발견은 책임감에 대한 각성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감은 사회적 의미로도 확대됐다.
“제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줄 알고 주변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는 정신적 성숙을 의미했던 것 같습니다. 나눔과 봉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눔과 봉사는 우리가 사회 속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세금을 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책임이고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최 회장은 매일 나눔과 봉사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큰 의미이며 행복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나눔과 봉사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만족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다.
“나눔과 봉사가 있는 제 인생 설계 속에는 그것을 통해 얻은 사람들과의 인연, 가족들을 향한 사랑, 그리고 한 그룹의 맏이로서의 리더십의 중요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습니다. 제게 나눔과 봉사는 많은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매개체인 동시에 제가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까지 더욱 크고 넓게 그려 나가야 하는 그림입니다.”
스스로 얻은 용기가 삶의 희망이 되는 법
“사람들이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종종 현인들이 그들에게 해 주는 조언으로는 ‘작은 일이라도 남을 행복하게 하라’, ‘남을 위한 일을 찾아서 하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왜 지금 당장 내가 힘이 들고 괴로운데 남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라고 할까요? 그것은 나눔과 봉사를 한 후 정작 그 보답을 받는 사람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자신들에게 행복과 알 수 없는 기분 좋음을 선사해 주는 것이 바로 남을 위한 나눔과 봉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최 회장은 그간 경기모금회와 선경최종건장학재단 등을 통해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것 못지않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일에 노력해 왔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과정을 솔직하게 얘기하고,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깨달음을 나눔으로써 젊은 학생들과 패기만만한 청년들이 자신의 삶을 더 진지하게 돌아보고, 그를 통해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최 회장의 삶 또한 모든 시대의 수많은 젊은이들처럼 젊은 시절의 상처가 있었다. 그는 본래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소심한 성격이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아버지와 형을 먼저 떠나보내면서 일찍이 SKC그룹이라는 큰 나무를 책임져야 했던 데서 오는 중압감이 어땠을지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나눔을 이야기하고 한 그룹의 최고 경영자로서 여러분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나누고 봉사하는 제 자신으로부터 용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나눔과 기부는 더 이상 특권층만의 소유적인 행위가 아닌 우리 모두가 쉽게 실천할 수 있고 가장 빨리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강을 따라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강변을 가로막고 선 철책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을. 그렇게 분단의 아픔으로 이어진 그 길 끝에 임진각이 있다. 슬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 임진각, 그 속살을 들여다보자.
글ㆍ사진 김대성 여행작가
◇전쟁의 아픔이 아로새겨진 임진각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7km 지점에 있는 임진각. 참혹했던 전쟁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다. 65년의 세월을 품은 전쟁의 상처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쓴 채 여전히 아물지 않고 있다.
임진각 마당에는 망배단이 조성되어 실향민의 마음을 위로한다. 망배단은 북녘땅을 향해 제를 올리는 공간으로 이산가족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다. 망배탑을 둘러싼 7개의 화강석에는 북한 지역의 문화와 경관을 새겨 넣어 망향의 근심을 달래주고 있다. 망배단 뒤편에 놓인 ‘자유의 다리’는 전쟁포로의 교환을 위해 가설한 임시교량이다. 1953년 휴전협정 후 12,773명이 자유를 찾아 이 다리를 건너왔다. ‘자유로의 귀환’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한국전쟁을 대표하는 유산이기도 하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연못가를 천천히 거닐어 보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다. 다리 앞에 전시된 증기기관차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 검붉게 녹슨 몸체와 1,000개가 넘는 총탄 자국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 다. 이 열차는 연합군의 군수물자를 운반하던 중 폭격을 받 았다. 그 후 반세기가 넘도록 비무장 지대에 방치돼 있다가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비록 흉물스런 몰골이 돼 버 렸지만, 남북분단의 상징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임진각에는 특별한 공간이 숨어 있다. 바로 BEAT 131. 이곳 은 전쟁 당시부터 사용해온 실제 지하벙커다. 지하로 내려 가는 입구에 M15 대전차지뢰가 놓여 있어 지뢰 밟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터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왠지 움찔하 게 된다. 벙커 내부는 상황실과 영상체험실로 꾸며졌다. 통 신시설과 군용물품이 전시돼 있고 DMZ와 북한 선전마을을 실시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모니터에 메시지를 적으면 모 스 부호와 함께 저장되는 미디어아트도 흥미를 끈다. 어둡 고 좁은 공간이라서 한 번에 20명까지만 입장이 가능하다.
임진각 본관 건물에는 다양한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다. 지 하 1층에는 북한 술, 토산품, 액세서리 등을 판매하는 기념 품점이 있으며, 지상 1층과 2층에는 DMZ 홍보관, 한정식 식 당, 커피숍, 패스트푸드점 등이 들어서 있어 방문객들의 쉼 터 역할을 한다. 3층은 망원경을 통해 북한 지역을 직접 볼 수 있는 옥상 전망대다. 이와 함께 임진각관광지에는 평화 의 종, 장단콩 전시장, 망향의 노래비, 6·25전쟁 참전기념비, 평화랜드 등의 시설이 있다.
매년 수백만 명의 내·외국인이 임진각을 찾아온다. 분단국 가에서만 만날 수 있는 풍경 때문일까. 꼭 그 때문만은 아니 다. 분단의 상징으로만 여겼던 이곳에 불어오는 변화의 바 람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임진각은 아픈 역사가 관광 상품이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 상처를 치유하며 조용 히 변화하고 있다.
◇바람도 쉬어가는 평화의 쉼터
임진각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자연과 예술 그리고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 바로 평화누 리 공원이다. 개성 넘치는 예술 작품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 들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구릉을 따라 수놓아진 3,000여 개의 바람개비는 한반도를 오가는 자유로운 바람을 표현한다. 또한, 북녘 하늘을 바라보고 서있는 거대한 인물 상은 ‘통일부르기’라는 작품이다.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4개 의 대나무 인간을 통해 통일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그 외 에도 소망나무, 솟대집 등 곳곳에 설치된 다양한 작품이 발 길을 이끈다. ‘음악의 언덕’으로 불리는 광활한 잔디광장의 중심에는 ‘어울터’가 있다. 어울터는 2만 5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공연장으로 계절별로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는 곳이다.
평화누리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전시와 공연 그리 고 기부프로그램 등 다양한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다소 무거운 기운이 흐르던 임진각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평화누리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단 하나의 특별한 땅, 비무장지대
DMZ 투어를 다녀오는 것도 특별한 추억이 된다. 임진각 주 차장 옆 DMZ 매표소에서 출입신청 절차를 거쳐 이용할 수 있다. 셔틀버스를 타고 통일대교를 건너 제3땅굴, 도라전망 대, 도라산역 등을 돌아보는 코스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오 전 9시 20분부터 오후 3시까지 평일에는 9회, 주말에는 14회 운행한다. 제3땅굴 관람방법은 도보와 셔틀승강기 두 가지 로 나뉘는데, 셔틀승강기 표를 사는 것이 좋다. 도보관람을 선택하면 땅굴관람 시 후회하기에 십상이다. 또한, 비무장 지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필요하니 참고하자.
도라산역은 경의선 남측 최북단 역이자 북쪽으로 가는 첫 번 째 역이다. 이곳은 서울역에서 56km, 개성역에서 17km 떨어 진 곳에 있다. 철도가 중단된 지 52년만인 2002년 건설되었으 며 남북교류의 관문이기도 하다. 도라전망대는 남측의 최북 단 전망대로 개성시와 김일성 동상, 송악산, 기정동 마을 등 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포토라인이 정해져 있어 함부로 촬영 은 할 수 없다. 제3땅굴 역시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가방과 카 메라를 보관함에 맡기고 들어가야 한다. 탈북자의 제보에 의 해 발견된 이 땅굴은 한 시간에 3만 명의 병력이 이동할 수 있 는 규모로 지금까지 발견된 땅굴 중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DMZ는 정전협정으로 출입이 통제되면서 놀라운 변화를 겪 었다.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여겨질 만큼 귀중한 생태자원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생태계적 가 치뿐만 아니라 안보적 가치와 역사의 산 교육장 등 다양한 요소로 인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쓰라린 역사의 현장 이 기회의 땅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처절했던 그날의 흔적들이 조용히 잠들어 있는 비무장지대. 이곳에도 따스한 희망의 바람이 불어와 하루빨리 과거의 상처를 털어내고 새로 운 땅으로 거듭나길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인생이 계획대로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 오전’을 거쳐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 존 쿠퍼 포우어스는 노년에 어느 정도의 품위와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철학이 절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인생 오후’에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냐를 찾는 것이 아니고 바람직한 모습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전반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삶이었다면 후반의 삶은 거기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서 하는 삶이 되기 때문이다.
인생 후반전을 사는 어른들은 후배에게 삶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며 조언을 한다. 그들은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일에 후반전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그분들의 삶은 그분들 자신뿐 아니라 젊은이들과 우리 사회에 영향과 축복이 되고 있다. 후배들에게 하는 보배로운(?) 행동이 힘이 되고 후배들은 근사하고 당당하게 여생(餘生)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마중물을 찾게 된다. 은퇴한 고등학교 교장이 정년퇴직한 다음 날부터 학교 청소원으로 나타난 경우가 있었다. 하루에 2시간씩 복도 청소, 쓰레기 줍기 등 청소를 해주는 봉사로 아이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며 행복을 전해주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자기 일을 할 때, 열심히 할 때 그 일을 사회의 나눔과 봉사에 접목을 하면 더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을 알기에 남은 삶을 학생들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 교장선생은 오래 사는 것보다 멋있게 늙어가는 것이 간절했기에 그리고 나눔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이기에 청소원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배울 것이 남아 있다
후반전, 이제는 그냥 오래 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오래 살면서 무언가 배우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배울 것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나누고 베풀면 배우게 됨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인생은 무위자연, 스스럼없이 살아가며 마음의 풍요로움을 얻는 것이 인생 후반부의 길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우리는 나눔과 비움의 지혜를 배우며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보낼 수 있는 ‘인생의 오후’를 맞이하고 싶어 한다.
“나눔에는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 웃음, 지식, 말, 손길 등 다양합니다. 나를 위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내가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즉 이기심을 버리고 이타심을 가진다면 나누는 길이 열릴 것이고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감사와 나눔이 습관이 되면 행복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손욱 회장은 노후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자신이 알고 쌓아 온 것들을 나누고 기부하면 기쁨이 저절로 따라온다고 강조했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점은 많습니다. 우선 나이가 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걸 확인하고 무리한 욕심을 안 부리고 만족할 줄을 알게 되죠.”
만족할 줄 알게 된다는 것, 백만기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은 나이 듦에 대해 그렇게 명쾌한 정의를 내렸다.
‘놀 줄 아는’ 멋진 어른이다? ,
“나이 든 분들이 기껏 한다는 게 모여서 골프 가거나 등산하거나, 고스톱 친다든가 하는 정도면…. 사실 우리나라의 현재 은퇴자 문화에는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하는 놀이가 별로 없어요. 경제적인 발전에 비추어 문화적인 면이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백 교장은 은퇴 후 분당FM방송에서 동호인 클럽과 문화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을 4년 동안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경력에서 알 수 있듯 백 교장은 음악애호가로 시작하여 드럼, 피아노, 클라리넷, 콘트라베이스 등 직접 악기를 배우고 밴드를 만드는 것까지 시도한 적이 있었다. 적어도 놀지 못한다는 말은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을 성싶다. 악기는 ‘놀 줄 아는 멋있는 어른’,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어른’을 만들 수 있는 하나의 예다. 은퇴자들이 제대로 노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백 교장은 설명했다. 그리고 제대로 노는 법은 ‘어른다움’을 배우는 일환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의미 있는 일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은퇴를 하고 나면 어른의 길을 가느냐 노인의 길을 가느냐의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이게 됩니다. 사실 지금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다고 하잖아요?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 이후 사회적 어른이 부재하는 듯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그리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줄 아는 어른의 부재라고 표현할 수 있겠죠.”
의미 있는 일로 ‘인생의 오후’를 만끽하고 싶다
백 교장은 19세기 폴란드 시인 노르비트가 밝힌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한 세 가지 필요한 것들’의 균형에 대해 설명했다. 첫 번째는 먹고 살기 위한 수입, 두 번째는 재미있는 일, 세 번째는 의미 있는 일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가 부족하면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되는 것이고 두 가지가 부족하면 비극이 된다는 것이다. 어른이 없다는 것은 먹고 사는 일과 재미있는 일은 어느 정도 충족되고 있지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부족하다는 걸 가르쳐주고 있다고 백 교장은 지적했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가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손 회장은 “노인은 자기만 아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죠. 반면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어른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주위에 모으게 되죠”라고 최고의 노년을 보내기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신이 좋아하는 건 뭔지를 물어 보세요. CNN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62%가 여가 시간에 TV만 본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게 뭔지를 모르기에 TV를 보게 되는 거예요. 우리나라라고 해서 다르지 않죠.”
악기를 배우는 것도, 저작물을 하나 남기는 것도 모두 일정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노인이 되지 않고 어른이 되는 길, 거기에는 그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부단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라고 백 교장은 덧붙였다.
노인은 노력하지 않아도 시간만 지나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히 가꾸고 노력해야 한다. 오래 사는 것과 제대로 사는 것,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눈부신 삶의 변곡점에 서ek
태어나 관계 맺고 살다 죽는 인간의 삶의 경로는 변치 않고 우리는 대체로 엇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살다 간다. 그래서 인지 생의 새로운 국면, 삶의 이정표 앞에서도 우리는 흔한 일상으로 당연시하며 무심히 넘기기 일쑤다.
성공적인 제2인생은 보다 평화롭고 안전하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기를 추구한다.
그러다가 눈부신 삶의 변곡점에 가다보면 보람, 나눔, 행복, 소통, 활동, 일, 공부, 참여, 관계, 건강, 취미, 문화, 배려, 승계, 후배교육, 인생 마무리 준비 등 지극히 평범했던 생의 순간들이 어느 새 ‘의미’있는 삶으로 변환되며 인생이 새로운 가치로 다가오게 된다.
이러한 제2인생을 맞이하려거든 보람, 열정, 관리, 여유, 준비라는 5대 키워드로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신중년의 행복은 건강과 취미에 달려 있다 해도 무방하다. 거기다 성찰과 관리를 잘하는 친구와 어울려야 활동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즉, 철저한 자기관리와 열정적인 마인드가 있으면 세상만사를 지긋이 바라보는 여유가 비움의 미학을 문화로 채우는 가치 있는 삶으로 발효되기 때문이다.
제2인생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소신이나 긍지를 갖는 것이다. 학생 때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좋은 학생이고, 직장에 다닐 때는 회사의 결정이 옳다는 생각으로 일을 하면 베스트 사원이었다. 그러나 정년 후에는 주위의 시선이나 평판보다 본인이 생각하는 방향이 올바른 방향이라는 소신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오후’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인생후반전이 낙원이라면 가치 있는 삶을 좇을 필요도, 성찰을 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미래는 너무나도 불확실하고 혼란스럽다. 이러한 혼돈의 시기일수록 자기를 낮추고 공감하고 배려를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공적인 제2인생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와 믿음을 원점으로 돌려놓고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행복하고 멋진 제2인생이 찾아올 것이다.
“평생 공무원으로 살았지요.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사진도 정형화된 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젠 공무원이 찍은 사진 같다는 말은 듣지 않으려고요. 제가 셔터를 누르던 찰나의 느낌을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진을 찍고싶어요.”
그렇다. 그는 한평생 공무원이었다. 1972년 3월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초급 공무원부터 시작해 2007년 4월 행정도시건설청기반시설본부장(국장급)으로 퇴직하기까지 35년간 국토정책 전문가로 나라의 녹을 받고 국가에 봉사했다. 퇴직 이후 2012년 4월까지 몸담은 건설공제조합(전무이사)까지 감안하면 40년 이상 사실상 공직생활을 한 셈이다. 그런 그가 퇴직 후 사진 찍기 삼매경에 빠져 있다. 그의 사진 얘기가 궁금했다.
현역시절엔 신문 스크랩으로 아쉬움 달래
공무원은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특히 국토부 공무원은 주택이라는 국민과 가장 근접한 이슈를 다루면서 일을 한다. 기본적은 정책 업무뿐만 아니라 언론 기사 대응까지 24시간이 모자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주말을 편안하게 보내 본 기억이 없다. 공직에 발을 들여 놓고선 긴장의 끈을 놓고 살아본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런 그의 유일한 취미가 사진찍기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멋진 풍경을 찍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그래서 일단 모으기 시작한 것이 일간지 신문에서 주말판으로 제공하는 투어나 여행 관련 섹션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다니며 그림 같은 풍경을 찍겠노라고 모은 여행 섹션지가 큰 사과박스로 2개가 넘는다. 어느 순간엔 퇴직하고 나면 반드시 가겠노라며 차곡차곡 모아 놓은 것이다. 공직 퇴직 후 7년이 넘은 지금. 그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 들어보셨지요? 진짜 (현역때보다) 더 바쁘더라구요. 동창회를 비롯해 업무상 지인들, 가족 모임까지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어요. 아직 스크랩한 지역들을 다니지 못한 것이지요. 게다가 투어 섹션은 여전히 매주 발행되고, 또 새로운 여행지가 쏟아져 나와 이젠 감당이 힘들 정도예요.”
“예술사진반서 공부… 달력사진 안 찍어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곳이 계원예술대학교 예술사진반이었다. 전문가에게 사진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달에 두 번 전국에서 사진 찍기 좋기로 유명한 곳들을 좋은 분들과 함께 다닐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사진을 전문적으로 배우기 시작하다보니 지금까지 찍었던 사진들은 한낮 풍경만 담은 달력사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같은 사진반 회원들이 찍은 작품을 살펴보다 풍경만 있고 감성은 없는 무미건조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를 스트레스라고까지 말했다.
“공무원이 찍은 사진 같다는 얘기가 그렇게 듣기 싫더라고요. 틀에 박힌 사진이란 얘기지요. 여백을 담아내기도 하고 감성을 이끌어 내는 다른 분들의 사진과 비교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게되더라고요. ‘난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라는 고민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은 무조건 멋진 풍경을 담기보다 풍경을 차분히 보고 제가 보고 느낀 감정을 같이 표현할 수 있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고 있어요. 점점 고민하고 진지하게 사진을 대하고 있는 셈이지요.”
몽골·미얀마 사진전 열어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 최근 결실을 맺기도 했다. 계원예술대학교 전문사진반이라야 갈 수 있는 몽골과 미얀마 투어에 참가하게 된 것. 이를 계기로 올해 2월과 8월 각각 몽골 사진전과 미얀마 사진전에 준 프로급 전문가들과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영광을 얻게 됐다. 실력으로 보면 몽골과 미얀마 동행은 물론 사진전도 동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의 열정과 함께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는 몽골과 미얀마가 각기 다른 매력을 품고 있다고 했다. 먼저몽골의 키워드는 ‘광활함’이었다. 그리고 메마르고, 거칠었다. 한반도 넓이의 7배에 달하는 드넓은 땅이었지만 춥고 척박했다. 그런 땅에서도 가족단위로 소·말·양·염소 등의 가축을 키우며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때 대제국을 건설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초라한 변방국가가 돼버린 그들에게서 ‘우리가 사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을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가’라는 잔상이 남기도 했다고.
반면 미얀마의 매력은 ‘사람’이었다. 한없이 맑고 순박한 표정과 평화로운 사람들이 그를 매료시켰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독실한 불교국가라는 점에서 그연유를 찾고 있었다. 특히 사원이 많다보니 거의 맨발로 돌아다니며 유적지에서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전 작품들은 지인을 비롯해 자식들에게 선물했어요. 그 전에 몸담았던 건설공제조합에도 기부했고요. 이제 사진은 제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매개체 역할도 하고 있지요.”
문화해설가로 재능기부 하고파
사실 그의 인생에서 사진을 빼고 얘기하기도 어렵다. 이는 국토부 공무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부 과장 시절 국토부 내 처음으로 사진 동호회를 운영하게 된 것이다. 청사의 사계 등 사진전도 열고 사진을 팔아 어려운 이웃을 돕기도 했다.
이후 행복도시 건설청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사진반을 만들어 직원들이 함께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건설공제조합 시절에는 찍었던 사진들을 조합에 건네 조합달력을 만들기도 했다. 은퇴 이후에도 국토부 퇴직 공무원 모임인 건설진흥회에서 사진반 총무를 맡는 등 사진 전도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앞으로는 사진으로 재능기부를 하고 싶어요. 관광 가이드가 찍어 주는 사진이 맘에 들지 않을 때 많으셨지요? 제가 문화해설가 역할도 하면서 사진도 찍어드리는 가이드를 하게 되면 ‘더 의미 있는 취미 생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은 평생 찍은 사진을 분류하는 작업도 하고 있어요. 정말 움직이기도 힘들 때가 되면 아내와 둘이서 지난 세월을 음미하면서 사진을 즐기고 싶어서요.”(웃음)
청계천으로 떠내려간 지식들…
1938년 출간된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서 칠성네 아주머니가 방망이를 두들기며 빨래하던 청계천은 나에게는 헌책방과 고물상이 즐비한 기억으로 새겨져 있다.
고등학교 때 조금이라도 싸게 참고서를 구입하기 위해 기웃거리던 거리를 국문과 진학 후 전공 관련 자료를 찾느라 다시 뒤졌을 때 캐캐한 책 냄새는 은은한 향기로 다가왔고, 수많은 책들이 자꾸 속삭이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책벌레보다는 수집광에 가깝다고 할까.
도쿄살이 18년에 책이 그립고 자료가 땡기면 곧잘 도쿄 진보초(神保町) 일대의 ‘간다(神田) 고서점가’를 찾는다.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서 도쿄대학 근처의 헌책방을 기웃거리도 한다.
지금은 매주 화요일이 되면 대학 강의를 마치고 일부러 고서점 거리를 지나 다른 대학으로 걸어간다. 약 180개의 서점들은 이곳을 찾을 때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처럼 늘 듬직한 미소로 반겨준다.
‘책의 거리’ 간다 진보초의 공식 사이트(http://jimbou.info)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서점 거리임을 자랑하면서 176개의 고서점을 소개하고 있으며, 52군데 고서점과 6군데 신간서점의 재고를 검색할 수 있는 데이터 베이스도 공개해 이용자의 편의를 돕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역사가 제일 오래됐고 규모도 가장 큰 전국고서적상업협회(JADOB)가 운영하는 ‘일본의 고서점’ 공식 사이트(http://www.kosho.or.jp)를 통해서는 전국 2200여 개의 고서점이 등록한 약 600만 권의 고서를 검색하고 구입할 수 있으며, 고서점의 소개 및 이벤트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나 역시 진보초와 도쿄대 일대의 고서점에서 구할 수 없던 백화점, 박람회, 운동회 등 한국 근대사의 자료를 먼지방의 고서점으로부터 직접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사이트 덕분이었다.
반면에 우리 사회가 청계천을 통해 배운 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옛것을 없애고 부수는 것은 쉽지만 이를 다시 복원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사실. 어쩌면 헌책방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그 속에 담긴 지식도 함께 떠내려간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료, 활용하면 가치
‘헌책방’보다는 ‘고서점’이 연구자들의 귀중한 자료라는 인상 덕분에 좀 세련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훈훈한 정겨움은 역시 전자가 더 진할지 싶다. 하긴 이 거리의 출발도 가난한 학도들의 얄팍한 주머니와 뗄래야 뗄 수 없었다.
100여년 전 메이지유신 이후 이 지역에는 도쿄대학의 전신인 도쿄카이세(開成)학교를 비롯해 메이지(明治)대학, 주오(中央)대학, 니혼(日本)대학의 전신인 각종 학교들이 연이어 설립돼 많은 학생들과 연구자가 모이는 거리로 자리 잡았다.
1913년 이 일대에 큰 화재가 발생해 잿더미로 변한 뒤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이와나미 시게오(岩波茂雄)가 고서점을 열었고 이듬해인 1914년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대표작 ‘마음’을 간행하면서 출판업에도 진출해 문학 작품과 철학서 등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것이 일본을 대표하는 출판사 이와나미서점의 시작이자 간다 고서점 거리의 출발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1984년부터 2004년까지 일본 화폐 1000엔권에 초상이 실릴 정도로 존경을 받는 일본의 국민작가로 이와나미의 간판도 그가 쓴 것이라고 하며, 이런 인연으로 1916년 향년 49세의 나이로 그가 세상을 떠난뒤 '나쓰메 소세키 전집'도 이와나미서점에서 발행돼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 1920년 도쿄고서적상업협회(TADOB)가 설립됐으며, 1921년 문화학원이 개교되면서 음악, 미술, 무용 등 예술 관계서를 다루는 서점까지 등장해 고서점 거리는 전국적으로 알려져 유명해졌다.
지난 2001년 일본 환경성은 독특한 향기가 풍기는 이 거리를 ‘향기로운 풍경 100선’으로 뽑기도 했는데, 현재는 서점 이외에도 각종 사업시설과 수많은 식당, 멋진 분위기의 레스토랑까지 등장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고서점 탐방을 즐기고 있다.
매년 벚꽃이 피는 봄이 오면 3월말 진보초 벚꽃거리 페스티벌로 ‘봄 헌책 축제’가 열리며, 10월 26일부터 11월 4일까지 약100군데 서점이 참가하는 ‘도쿄 명물 간다 헌책 축제’가 성대하게 개최된다.
올해로 55회째를 맞이하는 간다의 헌책 축제는 특별 전시 및 판매, 자선 경매, 각종 강연회와 좌담, 관련 영화 상영 및 토크쇼, 그리고 다양한 체험교실 등 풍성한 프로그램으로 애호가는 물론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룬다.
이 시기에 맞춰 ‘진보초 북페스티벌’도 사흘간 거리와 광장에서 총 매장 면적 5000 평의 규모로 함께 열려 300만 점의 각종 서적(총 재고수는 무려 1000만 권)이 넘쳐난다.
올해로 24회째이며 헌책 판매뿐만 아니라 낭독회, 문학상 수상, 공개 방송, 다양한 검정시험 도전, 그리고 연주회 등 각종 공연도 마련돼 찾는 이들의 눈과 귀도 즐겁게 만든다.
이처럼 이 거리의 서점 주인들은 틈만 나면 먼지를 털고 표지를 닦으면서 누구보다도 ‘헌책’의 새로운 가치를 신뢰한다. 버리면 그냥 1kg 당 60 원 선에서 거래되는 폐지에 지나지 않는 헌책. 이런 헌책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 내용에 따라 분류돼 새 주인과 만나 값진 가치를 발한다.
따라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을 실천하는 거리가 바로 이곳이며, 시니어 세대의 향수 어린 추억을 떠올리는 무대가 아니라 지금도 젊은이들이 옛것의 소중함을 느끼고 새로운 가치를 캐어내는 산 교육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이다.
헌책 시장의 규모는 가치 창조의 시금석
일본의 출판과학연구소가 지난해 출판물의 판매액을 1조7000억 엔으로 추정했으며, 인프레스 종합연구소가 간행한 ‘전자서적 비즈니스 조사보고서 2014’에 따르면 지난해 전자 출판물도 1013억 엔을 기록해 처음으로 1000억 엔대를 넘어서 2018년에는 3000억 엔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헌책 시장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시장 점유율 60% 이상을 자랑하는 일본 최대의 헌책 체인망인 '북오프(Book-off)'가 2011년에 보고한 자료를 보면 중고서적의 시장은 873억 3300만 엔 규모로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이다.
또 다른 업체가 조사한 헌책 구입 방법에서는 점포를 찾아가 직접 구입한 적이 있는 사람이 81%, 반면에 인터넷을 통해 구입한 적이 있는 사람은 49%(중복응답)였다. 그 이유로 “책 상태를 알 수 없는 게 불안”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에서는 국회도서관을 비롯해 국공립도서관과 대학도서관 등 대규모 도서관을 제외한 작은 규모의 공공도서관의 경우 책을 구매한 지 5년 정도 지나면 정리해 폐기하게 되는데,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도 하지만 보통 많은 책들이 헌책방으로 유입된다.
또한 개인들도 나이가 들어 신변을 정리하면서 재산과 함께 골동품, 미술품, 서적 등을 상속하거나 팔며, 혹은 기부한다. 여기에 각 출판사들의 재고서적까지 가세하면 헌책방을 통해 새로운 주인을 만나길 기다리는 책들이 끊임없이 넘쳐난다고 하겠다.
‘간다 고서점가’의 산책은 서점마다 인문, 자연, 과학, 기술, 미술, 공연, 사진, 대중문화, 아동도서, 외국잡지 등 특화된 전문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잘 분류된 서가를 걷는 기분이 든다. 책의 향기 속에 흠뻑 빠져 지식의 바다를 항해하는 환상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에는 시니어 세대의 인기를 모았던 절판 서적들이 다시 복각돼 출판되는 예도 크게 늘고 있다. 수요와 공급의 시장 원리가 아니더라도 ‘잘 익은 된장맛’ 같은 헌책의 가치를 알고 아끼는 사람들이 있는 한 이 거리에서 수많은 ‘온고지신’의 향기는 계속 퍼져나갈 게 분명하다.
근현대사의 풍파 속에 복개와 복원 끝에 떠내려간 청계천의 헌책방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가슴 아프며 부럽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