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
예순도 안 된 나이에 자신의 삶에 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몹시 부담스러운 일이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경험한 분들이 가득 계신 이러한 공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교사로서 보낸 지난 30여 년을 돌이켜 보는 것은 지금의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가늠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의미를 둘 만하리라. 더구나 최근과 같이 교사라는 직업을 단지 안정성의 측면에서만 평가하는 세태에서는 교직의 진정한 의미를 한 번쯤 돌아보게 하는 의의도 있으리라 싶어 이렇게 글을 쓴다.
그러고 보면 아주 희한하게도 교육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나름대로 최선의 길을 찾다 보니 어느새 교사가 되었고 교사로서 30여 년을 자연스럽게 살아왔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유명인이 되었더라 식과는 달리, 어느 순간 문득 돌아보니 교육자가 되어 있더라가 정확한 말이라 하겠다.
원래의 내 꿈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다. 조국을 지키다가 하늘에서 장렬히 산화하겠다는 꿈은 유치한 꼬맹이 시절부터 품어온 오랜 소망이었다. 38선 이남의 경기도 개성이 친가와 외가의 고향이었던 터라 그 꿈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쁜 시력 때문에 비록 그 꿈은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그 대신에 국가를 수호하는 항공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수학을 그리 잘하지 못했지만 항공공학 관련 대학 교재들도 어렵게 구해 공부하며 고교 시절을 보냈다. 고3 늦가을에 놀랍게도 대통령이 부하에 의해 죽었다. 국가가 위기에 빠진 것 같아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1980년 ‘서울의 봄’은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국가를 지켜야 하는 군인들이 국민을 향해 으르렁대며 총칼을 들이댔고 멀리 남쪽에서는 이미 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했다는 말까지 들려 왔다. 그때까지 품고 있던 의식과 사고가 모두 붕괴되는 시기였다. 국가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애써 공부해서 항공공학자가 되어 봐야 불의를 도울 뿐이었다. 결코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과감히 포기하고 이 땅을 빨리 뜨고 싶었다. 유학을 빙자해서 도피하고 싶었고, 외국에 눌러 앉아서 결코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종로학원에서 재수를 하며 서강대학교가 가장 유학가기 좋다는 친구 아버님(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은 갑자기 어려워졌다. 유학 가기란 점점 더 불가능해지는 것 같아 너무나 화가 났다.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었다. 완강한 폭력 앞에서 돌멩이 몇 개쯤 던져 봐야 무기력하고 초라하기만 했다. 견딜 수 없었다. 현실을 슬그머니 외면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고, 세상에 용감하게 직면하려 해도 그 또한 도대체 쉽지 않았다. 가장 희망에 차 있어야 할 대학 시절은 끝나지 않을 악몽의 시대에 불과했다.
우연히 시작한 야학교사, 국문학 품에서 행복 느껴
우연히 서강대 교내에 있던 이냐시오 야학에서 교사를 찾는다는 공고를 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기력하고 어설픈 청춘에게 안성맞춤의 일이었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다가 와서 꾸벅거리는 어린 소년과 소녀들, 못 배운 설움을 뒤늦게 풀겠다고 나선 개인택시 할아버지 등, 살아 숨쉬는 생생한 삶의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
최루탄이 자욱한 밤에 눈물 콧물을 흘리며 얇은 널빤지 가건물에서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하였다. 야학 수업을 끝내고 신촌으로 가는 길목의 허름한 떡볶이 집에서 늦은 저녁을 함께 먹던 추억들은 아직도 즐겁다. “산다는 것은 싼다는 것이다!” 같은 조악한 낙서가 가득한 야외 화장실의 모습도 너무나 또렷이 떠오르곤 한다. 그때마다 빙그레 웃게 된다.
엉망진창 같았던 대학 시절에 국문학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시간이 남아 여유 과목으로 선택했던 국문학개론이었지만 강의를 들을수록 새로운 진경을 보여 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닥치는 대로 많이 읽었고 이과 학생이면서도 국어 과목에 관한 한 전교는 물론 전국에서 손꼽히던 성적을 받았기에 나름대로 품었던 오만함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창피함보다 즐거움이 훨씬 컸다. 세상에 새로 태어나는 기분까지 들었다.
불의의 시대에 절망하는 청춘에게 문학은 영원한 저항, 아름다운 힘으로서 다가왔다. 참여 문학과 순수 문학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문학의 바람직한 길을 끝까지 추구해 보고 싶었다. 현대시에 대한 관심은 특별히 더 컸다. 어느새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고 대학 신문의 현상공모에 당선이 되었다. 동인 활동을 하며 시화전도 열었다.
우리 문학의 웅숭깊은 품은 상처투성이의 젊은 영혼을 부드럽고도 따뜻하고 넉넉하게 품어주었다. 너무나 감사한 축복이었다. 외국 유학을 가겠다던 마음은 어느새 수그러들었다. 나중에 비교문학을 공부하면 된다는 수준까지 잦아졌다. 대학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부조교를 하며 교양영어조교, 심지어 배구부 학업 조교까지 하면서도 4년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 힘들었던 대학 시절이었다.
어느새 교사가 되고 모교로 왔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한 학기를 지낸 뒤에 군복무를 마쳤다. 여전히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아무래도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같이 교직이 인기 있던 때가 아니라 교사 지원서를 내고 이내 교사가 되었다. 학교에는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이 많이 있었고 꼼꼼하게 학생들을 챙기면서 정신없이 생활을 보냈다. 대학원 공부도 병행하고 마침 결혼까지 하였기에 너무나 힘들어 집에만 오면 푹 고꾸라져서 식은땀을 흘리며 자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사립학교도 공채 시험을 보던 때라 수험 준비 또한 열심히 해야 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우습게도 그 다음 해에 이 시험은 없어졌다.
3년 차가 되자, 학교에서 담임을 맡겼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학생들의 이름을 즉시 외웠다. 하지만 첫날 일방적으로 부여된 지시는 학부모 10명에게서 학교 발전 기금을 걷으라는 부당한 명령이었다. 미련 없이 사표를 냈다. 더없이 마음이 편했다. 신혼 2년 차였지만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제 진짜 이 나라를 뜰 때가 된 거야” 되뇌었을 뿐이다. 어딘들 살지 못하랴. 조금이지만 모아 놓았던 봉급도 있었다.
사표를 내고 인계 준비를 하는데 모교인 숭문고에서 연락이 왔다.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셨다.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라는 것이었다. 사표를 낸 것은 어찌 아셨냐고 묻자, 당신은 몰랐으며 그저 오라는 말씀만 되풀이 하셨다. 운명 같았다. 모교에 가서 다시 한 번 교사의 길을 걸어 보자, 그때 유학을 가도 되지 뭐,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기는 이미 사라진 때였다.
막상 모교에 부임하자 모든 것이 힘들었다. 친정에서 시집살이 하는 것 같았다. 선생님들 앞에 끌려 온 것 같았고 동문 선배교사들은 무서운 손윗 동서나 억센 시누이 같았다. 교무실 밖을 겉돌다가 창고처럼 방치된 학교도서관 서고를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학교도서관을 운영하니까 정말 정신이 없었다. 먼지를 닦고 책을 털며 시작한 도서관 일은 이후 18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 푼의 수당이나 보수가 없는 자원봉사 형식이었다. 직접 도서반을 만들고 도서반원으로 학생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훌륭한 동반자다. 학교도서관에 푹 빠져들며 학교를 떠나겠다는 생각, 이 땅을 등지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잊게 되었다. 학교도서관은 환상적인 공간이었고 학생들과 나는 성장하였다. 시인으로 정식 등단했지만 시는 몇 편 쓰지 않았고, 대신에 당장 학생들에게 필요한 ,, 같은 책들을 썼다. 지금까지 쓴 , , , , 등등의 저서들은 모두 학교도서관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들이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하라고요?
어느날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문민정부 시절이라 교육개혁위원회의 위상은 대단했다. 교육개혁위원회가 정책을 입안하면 교육부는 그대로 수행해야 했다. 고민한 끝에 수락하였다.
나는 전체 위원들 가운데 두 번째 막내였고, 교원은 그나마 달랑 4명에 불과했다. 한국교육을 움직여온, 또한 이후에 움직이는 중요한 분들을 이때 많이 만났다. 무수히 많은 회의에 참석하면서 교육에 대해 좀더 장기적이고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각 시·도 교육청을 평가하는 활동까지 맡으면서 교육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었다. 나는 학교도서관의 멀티미디어화 정책을 입안했고 이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학교도서관에 3천억 원의 예산이 투자되는 근거가 되었다. 이제 학교도서관이 없는 학교들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다.
2년간의 교육개혁위원 활동을 마쳤지만 그 후에도 여러가지 역할을 많이도 맡았다. 교육부 쪽으로는 교육정보화위원, 독서교육발전자문위원, 과외교습대책위원 등, 문화부 쪽으로는 독서진흥위원, 공유저작물활성화포럼위원 등, 서울시교육청으로는 독서교육활성화 위원 등등...헤아리기 쉽지 않다. 현재도 교육부 학교도서관진흥위원을 맡고 있으며 마포구청의 마포중앙도서관 건립에 힘을 보태고 있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났지만 이후에도 교사로서 살아가면서 만나는 제자, 그리고 쉽게 변하지 못하는 학교 현장과 맞닥뜨리며 어떻게 해서든지 올곧고 가치 있는 변화를 시도하고자 노력해 왔다. 교육에서 미래란 곧 학생들에게 다가올 현재였기에 이러한 노력은 너무도 당연했다.
학교도서관을 교실 규모 8개 크기에 인터넷 PC 30여 대가 있는 학교도서관 멀티미디어 센터로 키우고 교육청의 도움을 받아 정식 사서를 초빙하였다. 모교로 돌아와 꼬박 18년이 넘어 거둔 성과였다. 이어서 2010년도부터는 국가와 지자체, 시민단체와 동네 청년 등 학교밖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학교로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봉사활동학습을 고안했다.
일명 ‘따봉(따뜻한 봉사활동)’이라 부른다. 이를 ‘숭문 따봉’에만 그치지 않고 어느 학교든지 ‘따봉’을 붙여서 쓸 수 있도록 모델화하고 관련 자료 일체 또한 아무 대가 없이 제공하고 있다. 유니세프 같은 세계적 구호기관도 처음부터 꾸준히 참여해 오고 있는데 이렇듯 모든 자료를 공유하겠다는 약속과 실천 덕분이다. 2015년 현재에는 31개 따봉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이 가운데 11개는 학생 스스로 리더가 되어 활동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경문고와 풍문여고가 따봉 모델을 받아들여 각각 ‘경문 따봉’과 ‘풍문 따봉’을 펼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서울과 지방의 몇몇 학교가 받아들이려 꼼꼼하게 준비하고 있다.
교직은 안정된 직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은 과거와 미래를 제대로 이어달라고 보장하는 사회적 뒷받침이다. 그래서 교육은 전통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고, 미래를 현재로 만들어야 하는 점에서 진보적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중요한 가치들은 모두 존중해야 하기에 언제나 든든하게 과거를 이어야 하고, 쉽게 파악하기 힘든 잠재적 인재들을 빠짐없이 챙겨야 하기에 언제나 미래를 새롭게 헤아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전력투구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교사이어야 한다.
‘책따세’ 눈부신 성장 가장 보람
교사로서 지난날을 돌아볼 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바로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이하, 책따세로 줄임)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교육개혁위원 임기가 끝난 1998년에 만든 ‘책따세’는 2007년에 청소년을 위한 비영리 독서문화 시민단체로서 확대되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독서의 자율성과 다양성, 공익성을 가장 기본으로 추구하는 대표적인 청소년 독서문화 단체로 훌쩍 성장했다.
2013년에는 영국문화원에서 개최한 국제 세미나에서 대한민국의 청소년 독서교육을 ‘책따세’ 중심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책따세’ 활동은 다양하다. 청소년 대상 추천도서목록 작업과 발표,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 독서교육 교사연수, 독서방송, 월례 기부강좌, 청소년봉사학교, 독서교육서 출판, 독서문화 관련행사 개최 등등. 나는 ‘책따세’ 대표로서 꾸준히 ‘책따세’의 최전선을 지켜 왔다. 이제는 ‘책따세’ 이사장으로서 법인 업무를 맡으면서도 특히 책쓰기 교육과 저작권 기부운동을 우리나라 공교육에서 시작한 세계적 교육문화 운동으로 자리 잡게 하고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감사하게도 ‘책따세’는 2015년에 청소년을 위한 바람직한 활동을 했다고 인정받아 제11회 청소년성장대상(여성가족부)을 수상하였다. 상금 1천만 원은 오로지 청소년을 위한 독서문화 구축을 위하여 사용할 예정이다.
‘책따세’의 전통은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준다!”에 맞춰져 있다. 이사장인 나를 포함해서 이사진과 운영진 누구도 일절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않는다. 오직 실무 간사만이 유급 활동을 한다. ‘책따세’는 지금까지 자신의 시간을 쏟으며 청소년 푸른도서관 건립을 위하여 기금을 출연하면서 활동해 왔다는 점에서 언제나 스스로 자부한다.
요즘 새롭게 추진하는 중요 프로젝트도 소개하겠다. 책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 공모전이다. 이는 책을 읽으며 가상의 여행기를 쓰는 활동이다.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과 해냄출판사와 신촌 홍익문고 서점 등이 함께 힘을 모으며 진행하는 행사다.
이 공모전에는 푸짐한 상품들이 걸려 있는데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읽기 쓰기 문화를 시도라 할 만하다.
특히, 이 공모전에 참여하는 글들의 대부분을 모아서 공유저작물 형태의 전자책으로 묶고 선정된 참가자들은 전자책의 저자 대우를 받게 한다.
이는 이야기를 들은 수용자가 다시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창조자가 되는 구비문학의 본질과 맞닿으면서 디지털 차원에서 문학의 본질을 새롭게 새기고 지평을 넓히는 활동이다. 교사들은 푸른 영혼들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이러한 활동은 특별히 의미 깊다. 그저 책을 읽고 의미를 파악하려고 전전긍긍대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단지 책을 사는 소비자에서 벗어나 자신이 읽고 쓰는 모든 것들이 남을 위해 더하고 나누는 의미 있는 활동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순간, 교육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순간, 누구든지 교사가 된다.
진정한 교사란 나눠주며 세상을 따뜻하게 만든다
그렇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지만, 선생은 제자로 말한다. 제자들이 자랑스러운 일을 하면 교사로서 내 삶이 한없이 보람 가득하고, 반대로 부끄러운 일을 한다면 무한히 부끄러워진다. 물론 제자의 재물이 많고 적음이나 지위가 높고 낮다는 점이 교사의 자랑과 부끄러움을 판단하는 기준은 결코 아니다. 그저 자신이 배운 것을 아낌 없이 누군가에 나눠주는 제자라면 충분히 자랑스럽다.
최근에는 우리들의 제자들이 ‘책따세’ 모임에 속속 가세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신촌 전철역 근처의 공익 카페 ‘더나더나’에 모인다. 더함과 나눔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을 만든 이 카페에 가면 남을 돕는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가 깨닫게 하고, 다시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들고자 머리를 맞대는 청춘들이 있다.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제자가 며칠 전 오랜만에 연락해 왔다. 제자가 곧 나다.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의 오랜 꿈을 비로소 이루었다. 항공공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꿈을 펼치는 제자도 기억난다.
그렇다. 나는 조국을 수호하고 국민을 사랑하는 진정한 과학자다. 피아노는 물론 모든 악기를 잘 다루는 제자도 있다. 그렇다. 이제 나는 언제나 즐거운 악기 연주자다.
제자들은 나의 분신인 듯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날아간다. 그리고 어느새 벌써 수많은 분신이 되어 이 세상 곳곳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나는 교사다. 앞으로 교단을 떠나도 나와 내 제자들은 이미 교사다.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서 남에게 나눠주는 사람, 우리가 바로 교사다. 그래야 이 세상을 비로소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 허병두 숭문고 국어 교사(책따세 이사장)
서강대 국문학과와 같은 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처음 교단에 섰고, 1989년 모교인 숭문고로 돌아왔다. ‘학생과 함께하는 읽기 쓰기 문화’를 지향하며 지금까지 학교도서관 살리기 운동과 NIE(신문활용교육) 전개, 책쓰기교육과 저작권기부운동 창안 등으로 교육과 현실, 삶을 아울러 왔다. 1998년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책따세(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드는 교사들)’를 만들고 비영리 청소년 독서문화 시민단체로 확장하여 현재까지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때는 꿈이 있었지/가슴에 묻어 왔던 꿈이/사랑은 영원하다고/철없이 믿어 왔던 날들/하지만 그 꿈은 잠시/한순간 사라져 버렸네” ( 삽입곡 ‘I dreamed a dream’)
아내 윤이남(尹二男·70)씨가 첫 소절을 부르자 남편 권영국(權寧國·75)씨가 부드러운 화음을 넣는다. 그들이 부른 노래처럼 부부에게도 한때는 꿈이 있었다. 가수를 꿈꾸었던 소년과 간호사를 꿈꾸었던 소녀, 잠시 사라진 듯했던 그들의 꿈은 ‘뮤지컬 배우’라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가수를 꿈꾸었던 권씨와는 다르게 음악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윤씨. 그녀가 음악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은 남편 덕분이었다. 신혼 시절, 어느 날 가야금을 사들고 온 남편은 “당신 가야금 연주하면 정말 아름답겠다. 어머니 환갑 때 연주하면 좋겠다”고 엉뚱한 제안을 했다. 가야금은커녕 악기는 배워볼 생각도 없던 아내는 그 말을 웃어넘겼고, 가야금은 집 한편에 장식품처럼 놓여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윤씨는 ‘한번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년간 연습한 끝에 시어머니의 환갑잔치 날 ‘아리랑’과 ‘도라지’를 연주해냈다.
남편이 그랬듯 아내는 “당신, 내 가야금 연주에 판소리를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함께 음악의 즐거움을 공유하기 시작해 색소폰, 플루트, 하모니카 등 악기뿐만 아니라 스포츠댄스, 합창, 사물놀이 등 다양한 음악활동을 해오던 그들은 2007년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당시 예순을 넘긴 부부였지만 ‘아무리 고되어도 인생의 두 번째 문은 열린다’는 의지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2008년, 노년의 사랑을 그린 뮤지컬 의 오디션에 부부가 동시에 합격하게 된다. 20명 남짓 뽑는 오디션에 14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한 덕에 그들은 꿈의 무대에 오를 수 있게 됐다.
그들의 꿈을 펼친 뮤지컬 (2008)의 공연이 열렸던 세종문화회관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장소다. 1967년 12월, 당시 시민회관이었던 그곳에서 결혼식을 했고, 결혼 40주년이 되던 해에 그곳에서 뮤지컬 배우로 서게 된 것이다. 꿈을 이룬 이후에도 그들의 일상은 분주하다. 연기활동 외에도 함께 구연동화 자격증을 따서 봉사활동도 다니고, 노인 상담, 인문학 강의, 악기 연주 재능기부도 하는 등 다정히 손을 잡고 행복한 제2인생을 만끽하고 있다.
늘 대화가 끊이지 않는 부부는 잠자리에 들어서도 지난 추억들을 되새기고 노래를 부르느라 새벽을 훌쩍 넘길 때가 많다고 한다. 잦은 대화는 행복했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한 그들만의 노력이다. 그런 추억을 모아 2014년에는 이라는 부부 자서전도 만들었다. 이후 각자의 자서전을 준비하고 있는 그들은 늘 그렇듯 함께 펴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과 꿈을 담아가고 있다.
Q & A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남편) 학창시절부터 노래의 즐거움을 알았고, 무대를 동경해왔죠. 음악은 취미로만 여겼을 뿐, 직업이 되기는 어려웠어요. 직장생활하고 연년생인 삼남매를 정신없이 키우느라 ‘꿈’은 정말 꿈도 못 꾸고 살았죠.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남편) 50세가 되던 해, 무엇이든 아내와 같이하자고 마음먹었죠. 그러던 어느 날 ‘충무아트홀 연극 교실’이라는 문구를 발견했죠. 아직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더라고요. 그 길로 아내와 연극 교실에 등록했고, 그때부터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한 기초를 다지고, 꿈의 무대에 도전하게 됐어요.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아내) 어릴 땐 나이팅게일처럼 간호사가 꿈이었어요. 늘 ‘멘소래담’ 같은 연고를 들고 다니며 다친 아이들에게 발라주곤 했죠. 결혼을 하고 꿈이라는 것은 딱히 없이 지냈는데, 남편과 이런저런 활동을 하며 잠재된 재능을 발견했어요. 그러면서 꿈과 목표가 생겼죠. 중년 이후의 꿈은 남편이 찾아준 것과 마찬가지예요.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아내) 뮤지컬 배우는 노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노래, 연기, 춤, 그리고 다른 배우들과의 호흡까지 신경 써야 하니까요. 대사 암기가 난관 중 하나였어요. ‘연습만이 최선이다’라는 생각으로 언제 어디서든 남편과 대사를 맞추고 안무를 익혔죠.
당신의 꿈은 무슨 색?
(남편) 어떤 꿈이냐에 따라 색깔이 달라지죠. 젊어서 꾸던 진취적인 꿈, 중년에 꾸던 삶의 돌파구 같던 꿈 등. 지금 떠올려보면, 행복했던 꿈도 있고 서글픈 꿈도 있고 그래요. 지금은 무엇보다 건강한 삶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건강한 빛을 띤 색이라 하고 싶어요.
(아내) 저는 아직도 무지갯빛 꿈을 꿔요. 모든 일이 재밌고, 신나고, 행복하고, 그만큼 알록달록하고 다양한 색깔의 삶을 살고 있죠.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남편) 커튼콜. 그 순간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무대 위에서 관객의 환호와 박수를 받는 그 광경은 잊지 못해요.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 꿈을 이뤘다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요. 뮤지컬 배우 부부도 많이 없지만, 우리처럼 노년에 뮤지컬 배우가 된 부부는 거의 없잖아요.
(아내)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건 노년의 삶이 준 선물이죠. 그동안 아이들 키우고 어르신 모시느라 제 삶이 없었잖아요. 그런 시기가 지나고 나니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제 삶을 사는 시간도 많아졌죠.
나의 작은 관심과 노력으로 아픈 아이들의소원이 이뤄질 수 있다면 멋지지 않을까.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부를 하면 그것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바로 ‘기부의 마법’이다.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은 이처럼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찾아 그에 맞는 재능기부자를 연결하는 곳이다. 재단의 도움을 받아 소원을 이룬 아이들의 따뜻한 사연을 모아 봤다.
도움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www.wish.or.kr
◇돌고래를 좋아하는 혜서의 소원은…
“저는 커서 돌고래 사육사가 될 거예요.” 유달리 동물을 좋아하는 여덟살 강혜서양은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껏 힘을 준 목소리로 대답한다. 또래보다 어휘력이 풍부하고 자기표현이 확실한 아이다.
혜서의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유치원 입학 후부터였다. 병원에서는 뇌종양의 일종인 ‘수모세포종’이라고 했다. 100만 명 중에 5명 정도에게 생기는 병인데 원인조차 알 수 없다고 했다. 작년에만 서른 한 번의 방사선 치료를 했고 올해부터는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동물을 직접 보러 가보고 싶지만 밖에 나갈 수 없었다.
TV에서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혜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혜서는 특히 돌고래를 좋아했다. 돌고래를 보면 기분이 밝아졌다. 조련사의 말을 알아듣고 재주를 부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돌고래를 돌보는 사람은 매일 돌고래와 같이 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혜서에게는 돌고래 사육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이뤄 주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에 혜서의 소원이 전해졌다.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비영리단체와 기부 참여자들이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인터넷기업 ‘11번가’가 후원을 약속했고 약 1만1000명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주도에 위치한 한 아쿠아리움에서 혜서를 돕겠다고 나섰다. 소속 사육사가 재능기부에 나섰다.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실내는 웅성거렸다. 다소 낯가림을 하는 혜서는 굳어 있었다. 하지만 돌고래 ‘세나’를 만나자 이내 긴장감이 사라졌다. “돌고래도 충치가 생기나요?”, “돌고래도 감기가 걸려요?” 아프지 않길 바라는 혜서의 아이다운 질문이었다.
혜서는 직접 돌고래를 지휘했다. 많은 이들의 바람이 돌고래 세나에게도 전해진 것일까. 세나를 매일 돌보던 사육사는 평소보다 더 활발한 세나의 모습이 놀랍다고 했다. 그토록 좋아했던 돌고래를 만난 혜서가 까르르 웃었다. 혜서의 웃음소리가 공연장 곳곳을 채웠다. 많은 이들의 따뜻한 ‘관심’이 모여 동물을 좋아하던 한 아이의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퍼레이드
지난 9월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서 진행된 퍼레이드는 아주 특별했다. “예쁜 공주가 돼서 멋진 왕자님과 퍼레이드를 하고 싶다”던 여섯살 김연우양의 소원이 이뤄지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연우가 세살이었던 2012년, 연우의 아랫배에 뭔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병원에서 ‘난소종양’ 진단을 받았다. 활발하지만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6번의 항암치료를 거치며 참 많이도 울었다. 만화 속에 나오는 공주처럼 항상 예쁘고, 항상 행복하게 웃고 싶었다.
삼성전자 부품사업부(DS)가 후원하는 대학 봉사팀 ‘위시 엔젤(Wish Angel)’이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 연우를 만났다. 연우는 금발에 분홍 드레스를 입고 왕자님과 퍼레이드를 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나눠 주는 착한 공주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삼성전자 임직원과 에버랜드가 연우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나섰다. 연우의 소원이 이뤄지는 날의 기억을 사진으로 남겨 주기 위해 황영철 사진작가가 재능기부에 나서기로 했다.
“공주님, 이제 백성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왕자님과 함께 퍼레이드에 오르실 시간입니다.” 원하던 대로 공주가 된 연우가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달리던 차가 잠시 멈추자 연우는 차에서 내려 가방 속에 담아 온 과자와 사탕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연우가 자라는 동안 큰 용기와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모아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낸 어머니 박윤서(가명)씨가 딸의 손을 꼭 잡았다. 박씨는 “이 정도까지 우리 아이의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공주가 되고 싶다던 소원을 이뤘으니 이제 앞으로 연우가 커서 무엇을 하든지 다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드론으로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요
김규현(15)군은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처럼 활발한 소년이었다. 2013년 1월, 스키캠프에서 다리가 부러져 병원을 다닐 때까지도 뼈가 붙기만 하면 다시 두 발로 뛸 거라고 생각했다.
치료 3개월째가 되던 때였다. 갑자기 고열이 생기고 염증수치가 높아졌다. 황급히 찾아간 큰 병원에서 뼈에 악성 종양(골육종)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뒤로 세 번의 큰 수술과 여섯 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전처럼 걷거나 뛸 수 없었지만 규현이는 장애진단을 원치 않았다.
규현이는 차분한 성격에 말수가 적은 성격이지만 ‘레고’ 이야기가 나오면 눈망울을 빛냈다. 자유롭게 날고 싶은 규현이의 방에는 레고로 만든 비행기가 많았다. 규현이는 ‘드론(무인비행기)을 갖고 싶다고 했다. “다리를 다쳐서 산에도 못 올라가고 움직이는 게 불편하니까 저 대신 드론을 높이 띄워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보고 싶어요.”
9월 어느 날, 한 식당에서 규현이를 위한 깜짝 이벤트가 열렸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간 규현이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저거 새야?”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낯선 물체는 규현이에게 선물하기 위해 준비한 드론이었다. 규현이의 사연을 들은 한 드론교육 전문가가 재능기부로 조종법을 알려 주기 위해 경기도에서 청주까지 달려왔다. 드론 조종기를 손에 쥔 규현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소원이요? 이제 이뤘는데요.” 규현이는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드론을 조종하는 동안 자신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기부자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 10가지
기부 문화는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잣대다. 빌 게이츠는 사회로부터 얻은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기부운동에 참여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기부자들은 의미있는 일, 관계하는 일, 확실한 목적에 쓰여지는 일에 기부를 원한다. 기부자들의 동기부터 따져보자.
1. 기부의 종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기부에는 먼저 기부자가 특별한 용도를 지정하지 않는 ‘순수 기부’가 있습니다. 반면 기부자가 특정한 사업을 후원할 목적으로 지정해서 기부하는 ‘조건부 기부’도 있고요. 또 개발사업 등을 진행할 때 시행자들이 국가나 지자체에 제공하는 ‘채납형 기부’,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예술작품을 제공하는 ‘기증형 기부’도 있습니다.
2. 우리나라 기부 현황이 궁금해요
아름다운재단 ‘기빙코리아’의 기부금 집계를 보면 2011년 한국인의 연평균 기부금액은 21만9000원으로 직전 조사년도인 2009년의 18만2000원에 비해 20% 이상 늘었습니다. 기업의 경우 상장기업(1700개사)의 한 해 평균 기부금은 8억3700만원, 비상장기업(1만5651개사)의 평균 기부금은 4500만원 수준입니다.
3. 개인들은 어떤 동기에서 기부를 하나요
아름다운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기부 동기로 ‘동정심’이 62.1%로 가장 높게 나타나 ‘불쌍하다’는 감정이 여전히 기부 동기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감’의 비중이 2009년 54.8%에서 59.4%로 상승하여 기부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우리나라에서 기부액이 많은 기업은 어디인가요
기업의 기부금(2012년 재무제표 기준) 지출 1위는 삼성전자입니다. 삼성전자는 2353억4900만원을 기부했습니다. 2위는 현대중공업(1329억2700만원), 3위는 삼성중공업(1115억2430만원) 등입니다. 이밖에 케이티, SK텔레콤, 포스코, 현대자동차, 삼성디스플레이, CJ제일제당, 한국전력공사 순으로 10위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5. 정부에도 기부할 수 있나요
우리 법률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모금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개인과 기업에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어 이들 기관이 모금활동을 한다면 암묵적인 강요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기부금에 대한 세제혜택은 어느 정도입니까
먼저 기부하고자 하는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기부금대상 민간단체와 지정기부금단체로 지정된 곳에 개인이 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000만원 이하인 경우 소득금액의 30% 이내에서 15%의 세액공제, 3000만원이 넘는 기부금에 대해서는 30%의 세액공제를 합니다. 법정기부금 단체의 경우 기부자의 소득금액 100% 한도에서 15%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7. 기부금 영수증만 있으면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나요
영수증을 발급한 기관이 ‘지정기부단체’나 ‘기부금대상민간단체’로 등록돼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단체를 세제적격단체라고 부릅니다. 당국에 기부금품 모집등록을 한 단체라고 해도 세제적격단체 선정을 받으려면 별개의 자격과 등록이 필요합니다. 모집단체가 세제적격단체가 아니라면 기부금과 후원금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이 없습니다.
8. 현물기부의 경우 기부금액을 어떻게 산정하나요
기부금 단체에서도 현물의 기부금품 가액의 기준을 얼마로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현물의 기부금은 ‘현재 시장에서 유통되는 정당한 매매가격’으로 계산합니다. 아울러 세월호 참사 당시의 진도군과 안산시, 태안기름유출사고 등에서의 태안군처럼 법률상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은 그 곳에서의 자원봉사도 기부금으로 산정될 수 있습니다.
9. 기부금을 받은 단체가 돈을 손에 쥐고 있지는 않나요
기부금은 2년 내에 반드시 사용하도록 법률에 명시돼 있습니다. 만약 정해진 기한 내에 기부금을 사용하지 않으면 모금단체는 기부금을 기부자에게 반환해야 합니다. 등록관청에서도 기부금품을 어떻게 모금하는지, 어디에 사용하는지를 검사할 수 있습니다.
10. 기부금을 받은 단체의 활동을 상세하게 확인하고 싶어요
원칙적으로 기부금을 받은 모든 단체는 기부자에게 기부한 내용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보고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기부자를 일일이 접촉할 수 없어 대부분 ‘연차보고서’를 공개·제공합니다. 또한 모금기관은 모금액의 사용결과 ‘나눔포털’과 단체의 홈페이지 등을 통해 기부금 모집결과 및 사용결과를 게시 공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자료제공 서울시 기부 길라잡이
우리말 가운데 ‘이웃사촌’은 잘 보존된 전통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전해줄 살아 있는 미풍양속, 즉 미덕(美德)이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이상, 사회 속에서 그 가치를 발휘하며, 특히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이는 기쁨과 슬픔도 함께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웃을 돕는 행위는 크게 모금과 기부, 그리고 봉사로 나눌 수 있겠는데 최근에는 재능 기부의 형태로 크고 작은봉사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금전적인 제공의 모금과 다르게 기부의 범위가 단순한 물품의 제공을 넘어서 점차 확산되고 있다.
모금은 재해로 인한 생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지역과 재해민에게 전달되는 의연금과 현지에서 지원 활동을 벌이는 단체들에 제공되는 활동지원금으로 분류되는데, 후자는 대개 ‘기금’이라고도 한다.
2011년, 그해 6월 일본 적십자사는 일본 코카콜라 주식회사와 손을 잡고 모금 기능이 딸린 자동판매기를 실현시켰다. 일본 적십자사는 그동안 자동판매기의 판매액 일부가 적십자사로 기부되는 ‘지원형자동판매기’를 설치하여 운영해 왔는데, 거기에 판매기 본체에 10엔과 100엔 전용의 모금 스위치가 설치되어 ‘이용자가 직접 모금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자동판매기를 추가한 것이다.
이런 시도는 2011년 9월에 활동을 시작한 특정 비영리활동법인 기부형자동판매기보급협회(kjf.or.jp)를 중심으로 현재 일반재단법인 일본 국제기아 대책기구, 특정비영리 활동법인 아시아 식림 우호협회와 국경 없는 의사단, 일본 국제자원봉사센터, 인정 NPO 법인 굿네이버스재팬과 난민지원협회 등 수많은 단체가 이용 중이다.
또한 아이치(愛知) 현 등 일본 전국의 지역자치단체에서 광역별로 지역 공동기금 조성에 기부형 자동판매기를 이용하고 있다.
온라인 기부 사이트
기부 행위에 따르는 번거로움과 기부의 투명성을 해결하기 위한 온라인 기부 사이트 기브원(www.giveone.net)이 운영 중이다. 기부 라이프의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이 사이트는 NPO프로젝트 단위로 기부할 수 있는데, 각 프로젝트의 내용 검색은 물론 각종 리포트를 통한 비교 검토도 가능하다.
사용자는 자신의 관심에 일치하는 기부를 골라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신용카드 기부를 할 수 있는 일본 최초의 온라인 모금 사이트이다. 또한 단체 지정을 하지 않더라도 같은 테마로 활동 중인 여러 단체에 기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테마 기부도 가능하다.
기부를 마친 사용자는 활동 리포트를 통해 자신이 기부한 프로젝트의 ‘자금’을 수시로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현재 환경, 마치즈쿠리(거리 만들기), 긴급재해, 문화 예술 스포츠, 국제협력, 고용 취로 지원, 인권평화, 어린이 청소년, 여성, 장애우 등 10개 분야에 235개 프로젝트가 운영 중이다.
불용품이 소중한 지원품으로
국제사회지원 추진회가 운영하는 월드 기프트(world--gift.com) 사이트를 살펴보면 일본 전국의 사용하지 않는 물품과 기증품을 받아 개발도상국에서 활동 중인 여러 NGO와 기금에 기부하고 모금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쓰이고 있다.
지원물자는 헌옷, 인형, 잡화, 식기, 장난감 등 다양하며, 재사용 및 재활용으로 발생하는 이익금도 국경 없는 의사단, 세계자연보호기금, 유엔 식량지원기관인 WFP 등에 기부금의 형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한 유치원과 보육원에는 문방구 등을 기부하고 있다.
한 이용자는 “인형과 의복, 그리고 문방구를 포장했는데, 모두 오래되고 그중에는 더럽혀진 물건도 있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활동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다시 기회가 있다면 또 이용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철도회사의 자연사랑 실천
일본의 철도회사 오다큐( 小田急) 전철은 올해 5월 후지산이 보이는 도쿄 근교의 온천지역으로 유명한 하코네초( 箱根町) 마을사무소를 찾아 하코네초 자원보전기금 142만3896엔을 기부했다. 이는 오다큐 전철이 하코네초의 천연수를 사용해 2009년 4월 선보인 미네랄워터 ‘하코네의 숲에서’와 2012년 12월부터 발매된 ‘하코네 숲 녹차’가 판매될 때 한 병당 1엔을 기금으로 모은 돈이다. 2009년 4월부터 기부 총액은 1890만 엔에 달한다. 1년에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 기부가 이뤄진다. 이들 두 음료수는 오다큐 전철이 달리는 노선의 각 역 매점과 자동판매기, 지역 슈퍼마켓과 편의점, 오다큐 그룹의 각 점포와 하코네초 사무소 등 관련 시설과 식당 내 자동판매기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는 지역자치단체와 철도회사의 상호 시너지 효과를 높인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지역의 특산물과 관광명소를 살려 그 혜택과 이익금을 지역에 환원하는 예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지역 홍보 마스코트를 이용한 각종 상품에서도 볼 수 있다.
21세기형 고향 사랑의 실천
일본은 2008년부터 ‘후루사토(고향) 납세’ 제도를 실시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후루사토 납세는 본인이 태어난 고향이 아니더라도 특정 지방자치단체에 개인적으로 내는 기부금을 뜻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개인이 2000엔 이상의 기부금을 원하는 지방자치단체에 기부할 경우 본인이 현재 거주하는 지역에서의 세금이 환급 공제된다.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된 현재 구조로는 지방자치단체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루사토 납세’는 거주지에 내던 세금의 일부를 본인이 원하는 임의의 지방자치단체로 분산해 대도시 중심의 세금 집중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루사토 납세를 통해 기부하는 이용자들에게는 기부하는 지역의 특산품을 제공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다양한 수산물과 농산물, 상품 등의 선물에서 지역온천의 숙박권, 그리고 인기 관광명소와 다양한 시설 이용권을 보내준다.
따라서 자신이 선택한 지방자치단체를 응원하면서 기부금의 사용 용도를 정확히 알고 납부할 수 있는 장점에 선물과 소득세 혹은 주민세의 공제 혜택까지 받을 수 있어 해마다 이용자들이 크게 늘고 있다. 도입 첫해인 2008년 기부자는 총 3만 명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2014년에는 총 15만 명이 참가했다.
사이타마(埼玉) 현에 거주하는 요시다 씨(32세)의 경우 맞벌이 부부로 세살짜리 딸이 있는데, 연간 세대 수입은 650만엔으로 ‘후루사토 납세’ 공제 한도는 약 12만4000엔에 실제로는 군마 현과 나가사키 현의 두 군데에 총 10만 엔을 기부하고 있다. 세금 환급으로 결국 자기부담 2000엔에 불고기와 스키야키 세트 1.1kg×5세트, 고시히카리 쌀 10kg×3세트, 양식 참치 400g×2세트 등을 선물로 받았다.
한편 ‘후루사토 납세’는 장기적으로는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 태어난 사람을 비롯해 해외 귀국 자녀, 그리고 일본 거주의 외국인들에게도 제2의 고향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 간다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로서는 그 지역의 특산물을 일본 전국에 홍보하는 한편 각종 숙박권과 시설권으로 관광객 유치의 효과도 노릴 수 있어 2, 3차적인 경제적 연쇄효과가 기대된다.
일본 전국의 ‘후루사토 납세’ 특산품과 혜택, 그리고 기부금의 사용 용도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관련 사이트 운영도 점차 늘어나고 있어 새로운 비즈니스의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본 경시청 보고서는 2011년 당시 1만5878명 사망, 6126명 부상, 2713명 실종을 확인했다. 또한, 25만4204동이 반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 12만9225동이 붕괴되었고 69만1766동은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음을 확인하였다.
기부금은 ‘마을자원보전기금’에 적립돼 자연환경 보전활동 등에 쓰인다.
매년 일본 전국의 대표 지역 홍보 마스코트를 대상으로 인기투표가 실시되고 있다. 2015년 그랑프리 투표 사이트 는 다음과 같다. www.yurugp.jp/vote/ 예를 들어 5만 엔까지 공제가 가능한 사람의 경우 ‘후루사토 납세’로 5만 엔을 지방자치단체에 보낼 경우 2000엔을 제외한 4만8000엔의 세금이 되돌아오며, 거기에 1만 엔당 3000~5000엔 상당의 그 지역 선물까지 받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결국 ‘1만 엔을 기부하면 답례로 쌀 10㎏을 받을 수 있다’는 지방자치단체 5군데에 ‘후루사토 납세’를 하면 자기 부담 2000엔에 50㎏(10㎏×5)의 쌀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재능기부’는 돈이 아닌 경험과 전문성을 사회에 내놓는 새로운 형태의 기부다.
김종욱(金鍾郁·70) CEO지식나눔 공동대표는 그러한 기부의 힘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는 기부가 그 무엇보다도 생활 속에서 굳게 자리 잡혀야 한다고 믿는다. 그가 말하는 삶을 가꾸는 재능기부의 힘이란 무엇인지 들어보자.
슬쩍 지나간 그의 노트에 적힌 글이 인상적이었다.
‘남자는 다 애 아니면 개다.’
주변에서 그를 가리켜 ‘유머와 재치가 많은 어른’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을, 촌철살인으로 다가오는 문장이었다. ‘경이로움에 대한 매혹, 어린아이와 같은 탐구심, 삶에 대한 환희만 있으면 늙지 않는다’는 새뮈얼 울먼의 시구를 평생 실천해 왔다고 말하는 김종욱 CEO지식나눔 공동대표가 그 사람이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한일은행 외국부를 시작으로 도쿄, 런던,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며 한빛은행 부행장, 우리은행 수석부행장, 우리금융지주회사 부회장, 우리투자증권 회장을 거친 대표적인 금융전문가다. 2007년에 은퇴한 후 한미글로벌 기업에 경영 자문을 하고 있는 그는 기부의 기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 CEO지식나눔을 운영하면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지혜를 젊은이에게 전수하자는 의도로 모였습니다. 모임을 열자 한국장학재단에서 멘토링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우리 사회가 핵가족화로 가족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안타까웠고,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좋은 마음과 긍정적인 태도를 후대에 계속 전달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전수하고 싶어서 CEO지식나눔을 열었다는 김 대표는 나이 든 사람의 지식과 지혜로 건전한 젊은이로 거듭날 청년의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것이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며 기부라는 것이다. 돈이 아닌 삶을 전달하여 더 좋은 삶을 살게끔 만들고 싶다는 그의 말은 아직도 거부감이 있는 국내의 기부 문화에 대한 하나의 돌파구처럼 들려왔다.
기부는 저축처럼 미리 떼어놓고 해야 하는 것
“제가 처음 은행에 들어갔을 때, 선배가 ‘너희들은 저축을 해야 한다. 저축할 돈을 미리 떼어놓으면 저축이 된다’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제가 기부를 해보니까 기부라는 것도 저축처럼 먼저 떼어놓고 해야 기부가 되지, 남는 걸로 기부한다고 하면 안 됩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기부는 미리 떼어놓고 하는 것. 그것은 기부란 생활 속에 배어 있어야 가능함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말이기도 했다. 김 대표는 ‘완전하게 증명하지 못할 세 가지’라고 전제하며 기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설명했다.
“첫째, 누구나 살다 보면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일 조금씩 아프지만 참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운동이 되고 큰 아픔을 분산시켜 줘요. 저는 아침마다 108배를 하는 것으로 그 고통을 나눠서 체감합니다. 둘째, 살다 보면 크게 피 흘릴 일이 생겨요. 수술을 해서 피를 흘리거나 단순히 피를 흘리거나, 어떻든 피를 흘릴 일이 생깁니다. 그렇게 흘린 피는 못 쓰니 다 버려야 해요. 그런데 일종의 기부인 헌혈을 해서 다른 삶을 살려 보세요. 신이 그걸 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했구나. 내가 더 피 안 흘리게 해야지’ 합니다. 그래서 헌혈을 많이 한 사람은 자기 가족의 피 흘림도 신이 막아준다고 봐요. 셋째, 살다 보면 큰돈을 쓸 일이 있어요.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조그맣게 각 사회단체에 자동이체로 한 달에 만 원, 삼만 원 정도 소액으로 보내면 신이 보면서 ‘돈 좀 썼네. 억울하게 돈 쓸 일 막아줘야지’ 하면서 막아줄 거예요. 증명은 못하겠어(웃음). 하지만 제 믿음입니다.”
기부는 조금씩 피를 흘리는 일과 같다
기부란 ‘조금씩 피를 흘리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기부를 경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자 기부를 당연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그런데 기부를 하면 언젠가는 도움을 받는다는 김 대표의 신념은 그저 무턱대고 생긴 긍정적인 생각일 뿐일까? 아니다. 김 대표의 삶이 그러한 자신을 만들어냈다. 김 대표는 서울대학교 상대를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혜택을 너무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온 고마움을 기억하는 힘이야말로 김 대표가 가진 기부 신념의 기반이기도 했다.
“회사는 날 해외에 보내줬으니까 그게 너무 고마워서,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후배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기부란 거기서부터 시작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1980년대에 영국에 가서 본 기부의 생활화가 무척 부러웠어요. 우리나라는 기부라고 하면 반짝하고 어떤 기간에만 할 뿐인데, 영국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죠. 거기에 우리가 가야 할 기부의 방향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금씩 기부를 위해 쓰는 걸 생활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사실 기부라고 표현할 것도 없이, 나누는 것이 바로 그거예요.”
지혜의 자산 사회에 환원
김 대표는 손주에게도 나눔의 교육을 하기 위해 여행을 하다가 지체부자유자나 어려운 사람을 보면 손주에게 돈을 줘서 그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고 한다. 받기만 하면 쓸 줄 모르기에, 주는 걸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주는 걸 안 가르치면 어른이 돼서도 받으려고만 합니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원리예요. 그래서 기부가 세상을 사는 원리의 기본일 수가 있는 거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타인에게 뭔가를 줘서 뿌듯한 마음을 알게끔 해야 합니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요. 자식들에게는 사랑하는 연습, 베푸는 연습, 소통하는 연습을 많이 시켜야 한다고 믿어요.”
기부를 세상을 사는 원리라고 말하는 김 대표의 사고의 기반에는 세상에 대한 고마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당연한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 당연함은 심지어 물리법칙으로서의 중력에 대한 고마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살고 있는 중인데 만유인력의 법칙, 그러니까 중력을 고마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봐요. 모든 것의 기본이 이 중력에서부터 비롯되거든요. 중력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다들 붕 떠서 지내야 하죠. 중력만 봐도 우리는 기적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당연시해요. 아인슈타인이 말했습니다. ‘사람은 기적을 믿는 사람과 기적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믿는 사람이다. 나는 매 순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매 순간 세상을 살아가는 게 기적 같다
자신이 노력한 것보다 세상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마음. 김 대표의 강점은 그곳에서부터 나오고 있었다.
“저는 전생도 있다고 믿어요. 사람은 다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죠.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50미터 앞에서 뛸 수 있는 사람과 50미터 뒤에서 뛸 수 있는 사람이 나뉘거든요.”
김 대표는 그래서 면접을 볼 때, ‘자신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가, 나빴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나빴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채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좋았다고 생각해야 나중에 더 좋아집니다. 그런 사람이 되도록 후배들을 가르치고자 했고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무조건 달콤한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 그들은 다 사기꾼들이에요. 조심해야지. 가끔씩 저에게도 뭔가 당첨됐다는 전화가 와요. 그러면 저는 그 사람에게 ‘그거 당신이 다 가지세요’, 그러지(웃음).”
‘냉정한 긍정주의자’로서의 김 대표가 꿈꾸는 CEO지식나눔의 미래는 모양이 차차 갖춰지고 있다. 우선 새터민 교육이 있으며, 오너의 2세 교육도 준비하고 있다. 특히 비즈니스 컨설팅은 계속 추진 중이며 최근에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재능기부는 특히 자존감이 저절로 높아진다
김 대표에게 은퇴 후의 멋진 삶에 대해 물어봤다. 생활화된 기부가 주는 저축된 힘 외에 그의 은퇴 후에 활력을 주는 힘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가 ‘자기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나이는 74살이었다’라고 말한 게 있어요. 저는 ‘가장 행복한 나이’보다 조금 모자란 나이죠. 그런데 이제는 의무가 없고 손자는 귀여워만 하면 되니, 저도 행복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가끔씩 내게 젊어지고 싶지 않으냐고 묻는데, ‘지금 행복한데 왜 젊어져?’라고 대답하죠. 행복의 첫째는 자유예요. 를 쓴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묘비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바라는 게 없다. 두려운 게 없다. 나는 자유다.’ 과거에는 역할에만 충실하느라 어려웠던 일이지만, 나이가 든 이제는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게 있는 법이에요.”
은퇴하면 많은 게 사라진다. 그 대신 얻는 것은 자유다. 나이가 만들어낸 자유와 생활 속의 기부로 축적된 힘을 김 대표는 고마운 마음으로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혼처럼, 이렇게 늙으면 안 된다는 그의 말에도 당당한 자유가 배어 있었다.
“나이를 먹는 것이 훈장 받는 일은 아닙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젊은이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건 기본적으로 안 돼요. 19살을 넘어 성인이 되면 100살과 똑같은 성인입니다. 그러니 나이로 누르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돈을 벌었다고 거만하게 행동한다든지 행동이 바뀌는 일부 사람들은 꼴불견이에요. 좋은 사람하고 함께할 시간도 부족합니다. 돈을 쓰는 자유보다 기부하는 자유를 가져보세요.”
김 대표는 CEO 멘토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한 성숙한 생각을 나누고, 취업과 창업 지도를 통해 사회진출의 장애를 슬기롭게 넘어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 작은 일을 왜 ‘기부’라는 표현을 쓰는 것인지 몹시 미안하고 쑥스러워했다.
그는 돈이 아닌 다른 자원(resource)도 자원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돈이 아닌 서로의 전문성을 모두 돈과 똑같은 가치로 여기는 그에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면서 헌신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CEO지식나눔에 대하여…
2010년 30명으로 출범한 (사)CEO지식나눔의 회원은 전·현직 국내 기업 임원 및 대표급 인사들이 강연을 통해 지식나눔 활동을 전개한다. 2015년 현재 75명으로 지난 5년간 대학생과 사회인 멘티를 1500여 명 지도했고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630여 회 CEO 특강을 통해 연인원 6만여 명을 교육했다. 아울러 회원들이 강의 등 활동으로 모아진 기부금과 후원금으로 대학생과 유학생 8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노인복지시설과 장애인보조기구 구입에 기부했다.
회원들은 500만 원의 입회비를 내고 CEO지식나눔 모임에 가입해 모든 활동을 무상으로 하고 있다. 각종 사업으로 벌어들인 수익 전액은 법인 운영금으로 사용하며, 남으면 사회복지재단 등에 다시 기부한다. LG화학 사장을 역임한 노기호 상임대표를 필두로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민경조 前 코오롱그룹 부회장, 김수근 차병원그룹 고문, 김기용 前 카길한국대표 회장, 강정호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금융전문대학원 원장, 박문화 前 LG전자 사장, 박종식 前 삼성엔지니어링 부사장, 이방주 ㈜JR투자운용 회장, 허남석 포스코ICT 상임고문 등이 나눔 활동에 참여한다.
이 외에도 박주철 前 SK글로벌 사장, 신원기 前 르노삼성자동차 부사장, 윤봉태 GS칼텍스 상임고문, 이명우 동원산업 대표이사 사장, 최동수 한화그룹 고문, 최길선 현대중공업 총괄 회장 등이 주요 회원이다.
김종욱 대표는 은퇴 후 재능 기부를 하게 된 궁극적 이유에 대하여 “작게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게 되는 것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사진 이태인 기자
민주화를 위해 독재정권에 각을 세웠던 그다. 그의 아버지도 그랬고, 그의 아들도 그랬다. ‘3대가 시위 투쟁 집안’이라는 기사까지 났다. 그랬던 그가 20년 넘게 모은 토기 1582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이후 모았던 토기들도 다섯 차례 더 기부했다. 토기가 부업이라면 청동 수저 수집은 취미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마저 모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최영도(崔永道·77) 변호사를 수식하는 단어는 다양하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하지만, 1971년 사법파동의 주역으로 찍혀 1973년 유신 때 재임명 탈락 전까지는 법복을 입고 판사로 활동했다. 또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젊은이들을 위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다 민변의 창립발기인이자 회장을 맡았고, 참여연대의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까지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해 왔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는 클래식 음악에 관한 에세이를 엮은 와 유럽 미술관들을 다룬 등 여러 저서를 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된 사건 중 하나는 2001년 평생 모아온 토기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일이다. 모두 6차례에 걸쳐 토기 1668점과 청동 수저 51점 등 도합 1719점의 유물을 기증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이름으로 된 기증실에 약 60여 점의 토기가 전시되어 있다. 수집 과정과 기증 후의 이야기까지 엮어 이라는 책도 냈다.
토기 박물관 만들자 결심해 수집 시작
그가 유물 수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3년 해직판사가 돼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엔 백자 연적이나 유병(油甁)과 같은 도자기 소품을 모으다 고미술 시장에서 만난 후배의 권유로 토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가치 있는 토기들을 모아 박물관을 건립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그즈음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투박한 토기는 청자, 백자 등 다른 유물들에 비해 박물관이나 학계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외국인들이 사들여 해외로 유출하고 있었죠. 그래서 토기들을 수집해 박물관을 차리고 싶었습니다. 판사복을 벗었으니 평범한 법률가로 남겠다 싶었는데 인생의 목표가 생겼던 것이죠. 아내가 대찬성을 해줘 즐겁게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토기는 멀게는 신석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오랜 기간 우리의 삶과 함께했다. 현재는 장례 때 많은 토기를 부장품으로 넣는 것이 유행했던 가야 때 것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장묘제도의 변천으로 부장품을 적게 넣어 출토가 적은 고려, 조선 시대 토기가 가장 보기 힘들단다. 그가 기증하기 전까지 국립중앙박물관도 고려, 조선 시대의 토기는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 거의 없었을 정도. 수집가들의 기증문화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물론 이러한 수집은 쉽지 않았다. 포기해야 할 것도 있었다. 라운딩 한 번 나갈 돈이면 저렴한 토기 1~2점은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골프도 끊고, 술도 줄였다. 인사동과 장안평을 샅샅이 뒤지느라 1000원짜리 감자탕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았고, 차에서 전투식량으로 요기를 하기도 했다.
유물의 해외 유출을 막기도 했다. 1983년 인사동에서 백제토기 ‘쇠뿔잡이항아리’를 만나 반했지만, 200만 원이라는 비싼 가격에 망설였다. 그러다 평소 눈독을 들이던 프랑스 외교관이 곧 사갈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돈을 마련해 갈 테니 항아리를 숨겨 두라고 부탁해 겨우 확보하기도 했다.
감정방법부터 관리방법까지 이론 익혀
초창기부터 박물관 건립을 고려했기 때문에 수집 형태도 남달랐다. 개인적 기호와는 무관하게 시대, 지역, 기형, 문양 등 4가지 기준을 놓고 학술적 가치까지 고려해 수집했다. 학술적 가치가 있다면 싼 것도 모았고, 상품가치가 없을 수 있는 파편도 사들였다.
수집을 위한 연구와 노력 덕분에 토기와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도 얻었다. 토기를 감정하는 나름의 7가지 방법을 터득해 진위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분류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예를 들어 토기를 보면 살짝 혀끝을 그릇에 대보는데, 진품인 경우 토기 내부에 다공층이 있어 혀가 잠깐 달라붙는다고. 그때 나는 기분 좋은 곰삭은 냄새는 즐거운 덤이다. 토기를 구입하면 경질토기와 연질토기를 구분해 각각의 특성에 맞게 세척하거나 건조하는 방법도 익혀야 했다.
실제로 그가 기증한 유물 1719점에 대한 초록을 제작할 때, 박물관 측과 유물 분석에 대한 수십 건의 이견이 있었지만 몇 건을 제외하곤 대부분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2010년 발간된 이 은 그가 제안한 분류법대로 편집됐다.
그렇게 20년 이상 수집이 진행돼 고미술 시장에서 더 이상 사고 싶은 토기를 보기 어렵게 되자, 본격적인 박물관 건립을 추진했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서울 인근에 소박하게 아이들이 와서 보고 갈 수 있는 규모의 박물관이 되려면 300억 원 이상 필요하겠더라고요. 제 돈으로는 어림도 없어 대기업이나 정부에 모아놓은 것을 모두 무상 기증할 테니 토기 박물관을 지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퇴짜 맞기 일쑤였습니다. 그렇게 끌어안고 고민만 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 여러 차례 요청이 와 기증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기증을 결심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모아놓은 토기들에 대한 걱정이 너무나 컸던 것도 있다. 혹시 사고라도 당하게 되면 그 토기들이 어떻게 될까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해외를 나갈 때, ‘내게 문제가 생기면 토기들을 국·공립 박물관이나 대학 박물관에 무상기증을 하라’는 내용의 유서를 반드시 남겨놨다고 했다. 여행을 할 때마다 유서를 쓰고 찢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횡단보도에서 이러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토기들은 어떡하나 하고 똑같은 걱정을 반복하다, 아끼는 것일수록 박물관에서 오래도록 전시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증 결심이 섰다고.
오래 관리되고 기억되길 원해 기증 선택
기증처가 국립중앙박물관이 된 것은 그전부터 이어오던 인연 때문이다. 1997년 국립중앙박물관 토기 전시회에 44점을 찬조 출품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위치인 용산으로 이전을 계획할 때, 기증관 구성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최영도 변호사 측에 제안해 기증이 이뤄졌다. 물론 다른 박물관에 비해 뛰어난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관리, 전시 능력도 매력적이었다. 그는 이 과정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부터 “선택받았다”라고 표현했다.
2001년 기증 후에도 그의 토기 수집에 대한 습벽은 쉽게 멎지 않았다. 그만해야지 싶다가도 좋은 유물이 나타났다는 전화에 흔들리기도 했고, 궁금해서 일단 보면 지갑 열기를 멈추지 못했다. 아예 눈을 닫으려고 하면, 상인들이 토기를 들고 사무실로 들이닥쳐 외상으로 맡기고 갔다. 이렇게 토기들이 더 모여 몇 차례 계속 기증하길 반복했다.
한눈에 반한 토기를 만나면 며칠이고 침대에 두고 끌어안고 잘 정도로 사랑이 남달랐던 그다. 때문에 시집보낸 딸처럼 토기들이 눈에 아른거릴 법도 한데, 기증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잘했다 싶단다.
“평생을 바쳐 모은 수집품들이 주인을 잃고 나서 허망하게 시장에서 뿔뿔이 팔려 나가거나, 풍비박산이 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사설 박물관도 후대로 넘어가면 초심이나 전문성을 잃는 사례가 있습니다. 때문에 기증문화의 발전은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중요합니다. 유물은 국가와 국민의 소유이고, 수집가들은 그것을 잠시 맡아 두는 창고지기일 뿐입니다.”
모든 토기를 기증하고 나서는 기쁨과 해방감을 함께 맛봤다고 말했다.
“무거운 관리 책임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에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수집은 명예인 동시에 속박이라는 것을 느꼈고, 모두 다 기증하고 나니 마음이 가볍고 자유로워졌습니다. 박물관에게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쉽게 기증 결정할 수 있게 제도 개선돼야
해외 미술관을 돌며 관찰해 이를 엮어 책까지 발간한 그이기에 기증문화에 대한 의견은 현실적이다. 특히 기증을 하는 것만큼이나 기증을 받는 쪽의 태도 변화도 절실하다고 이야기한다.
“학계나 관련 기관에서는 수집가나 고미술 상인을 낮춰보거나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수집은 단순히 돈을 주고 가져오는 것 이상으로 복잡하고 신중한 과정을 거치는데, 직접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친 만큼 수집품에 대한 지식과 애정 또한 상상 이상입니다. 그런 ‘귀한 자식’을 받아주는 일인 만큼 받는 쪽에서도 애정을 갖고 기증품을 다뤄줬으면 합니다. 전시 과정에서도 기증자에 대한 부각이나 배려가 고려된다면 보람도 느낄 수 있고, 기증에 대한 동기유발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증자들이 스스로를 박물관의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해외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경우 기증자의 이름이 잘 보이도록 크게 써 놓거나, 아예 액자에 새겨 넣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최영도 변호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기증자 대표로 기증 후 몇 년간 추대 받아 활동하기도 했고,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기증과 관련한 강연 등의 요청이 와 이런 의견들을 밝힌 적도 있다고 했다.
최영도 변호사는 문화 발전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고 조언했다.
“수집가라고 모두 다 엄청난 재산가는 아닙니다. 수집을 위해 평생의 재산을 바치는 경우도 허다한데, 이런 경우 기증 후에는 생계를 걱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우려가 기증에 장애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때문에 수집가들을 위한 세제 혜택이나 연금제도의 도입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세제 혜택 제도는 기증품에 대한 평가가 어려워 법까지 만들어 놓고 시행하지 못한다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특히 세제 혜택 마련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기증품에 대한 가치평가와 관련해선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면 될 일이라고 강조했다.
“관과 학계, 업계, 수집가들로 구성된 공동평가기구를 만들어 기증품의 가치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게 된다면 세제 혜택뿐만 아니라 기증을 후원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것이 기부라지만, 주는 것이 있는데 받는 것까지 있다면 훨씬 더 좋은 법이다. 이제는 기부도 그렇게 변하고 있다.
100점 만점에 35점. 전 세계 145개 조사 대상국 중 64위.
11월 영국 자선지원재단(CAF)이 발표한 ‘세계 기부 지수 2015’에 드러난 대한민국의 기부활동 성적표다. 기부 액수가 아닌 기부활동에 중점을 둔 이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기부에 참여했다’는 응답 비율이 15만 명 중 34%인 것으로 조사됐다. 빼어난 성적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2010년 동일한 조사에서 ‘기부에 참여했다’는 응답 비율이 27%로, 153개국 중 81위를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7%포인트 오른 수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꾸준히 기부활동이 늘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미국과 영국 같은 선진국에서 기부는 소외된 사람을 위해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자연스러운 문화로 자리 잡았다. 아직 우리나라의 움직임은 그에 비해 미미하다고 할 수 있지만, 기부활동에 대한 욕구가 조금씩 사회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매스 미디어와 통신의 발달은 기부의 문화도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돈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기부가 이제는 통신의 발달과 함께 일상생활로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기부는 ‘특별함’이 아닌 ‘일상 또는 습관’으로 다가오고 있다.
과거에 누군가가 좋은 마음으로 기부를 하더라도 ‘이미지 관리를 위해’, ‘미래의 비즈니스를 위해’라는 시선으로 기부를 인식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남’이 아닌 ‘내’가, ‘돈’이 아닌 ‘실천’으로 손쉽게 기부를 하고 있다. 2015년, 기부는 어떻게 변화하고 있을까.
‘기부&테이크(Take)’로 진화하는 기부 문화기부 문화에도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기부의 형태와 방법이 다양해지고 있는 것. 스마트한 시대답게 소셜 기부와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을 이용한 기부가 늘고 있다. 또한 기부를 한 만큼 원하는 물품을 받을 수 있는 이른바 ‘기부&테이크(Take)’ 형태의 기부가 늘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기부자의 경제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가 지난해 10월 제14회 기부문화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이 기부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경제적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36.4%·2013년 기준)’였다. 또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연구소 연구센터가 올해 발표한 도 이를 뒷받침한다. 자료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개인 기부 참여는 전반적으로 30%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경제 여파로 인해 여전히 높지 않은 수준이며, 심지어 감소하는 추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이유로 소셜 기부는 경제적인 부담이 덜하고, 참여하기 쉬운 형태의 기부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소셜 기부는 SNS상에서 댓글을 달거나 공유를 하면 기부에 참여하게 되는 간단한 방식부터, 특별한 플랫폼이나 애플리케이션(이하 앱) 등을 이용하는 방식까지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다. 이러한 소셜 기부는 다양한 캠페인을 홍보하는 데 용이하고, 1원부터 100원까지 소액으로 시작할 수 있어 적은 돈으로도 기부를 실천할 수 있다는 인식을 심는 데 한몫했다.
크라우드 펀딩을 이용한 기부는 대부분 어떠한 물품을 구매했을 때, 그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구매자인 동시에 기부자가 되는 셈. 기부에 대한 합당한 보상품을 받고 선행도 할 수 있는 1석 2조의 효과를 누리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비프렌드, 마리몬드 등이 이러한 방식으로 온정을 전하고 있다.
앱을 이용한 방식도 있다. 앱만 설치하고 실행만 해도, 기부자는 자신의 돈을 전혀 쓰지 않고 기부에 참여할 수 있다. ‘빅워크’라는 앱은 자신이 걸어 다닌 만큼 기부가 된다. 앱을 설치하면 GPS를 이용해 사용자의 걸음 거리 10미터당 1원이 기부된다.
이런 소셜 기부와 크라우드 펀딩을 이용한 기부가 사랑을 받는 것은 경제적인 부담이 덜하다는 이유뿐만이 아니다. 기부금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떠한 상황에 놓인 수혜자에게 돌아가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이러한 방식의 기부가 증가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2014년 위키트리 설문조사 결과, ‘기부를 했을 때 자신이 낸 기부금의 사용 경로와 과정을 알고 싶다’고 말한 응답자는 68%에 달했다.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의 기부는 후원단체에 기부를 하면 그뿐, 기부를 한 금액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몰라 기부에 대한 보람을 느끼기 힘들었다. 그러나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기부금이 쓰이는 ‘마리몬드’와 하반신 장애 아동을 위해 기부를 하는 ‘빅워크’와 같은 방식은 그 쓰임이 분명해 기부자로 하여금 그 결과물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미국의 크라우드 펀딩은 2008년부터 시작돼 공익적 모금에 성공하고 있는데, 필요한 자금을 모아주는 대신 3~5%의 수수료를 받는다. 이후에도 세계적으로 200여 개 소셜 펀딩 업체가 나타나 성공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디고고’와 ‘킥 스타터’가 있다. ‘인디고고’는 2008년 세워진 회사로 전 세계 누구나 모든 분야에 대해 제안을 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2만7000여 개의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바 있다. 2009년 설립된 킥스타터는 7만5000달러의 모금을 해 많은 이들의 꿈을 이뤄주기도 했다. 이들은 매년 모금액이 4배 이상 성장하며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
심영훈 서울시복지재단 자원개발팀장은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와 결합한 소셜 기부가 발전의 궤적을 그려 나간다면 새로운 기부문화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의 의견”이라며 “쌍방향 소통과 실시간 정보 공유 등 소셜 미디어의 특징과 한국 네티즌들의 적극성, 보상을 통한 참여유도 측면 등을 고려할 때, 소셜 기부는 향후 우리 사회의 새로운 기부 문화 트렌드로 주목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기부 문화 변화의 중심에 신중년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문화적 욕구가 충만한 신중년들이 기부 문화의 중심에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나눔연구소 연구센터가 올해 발표한 에 따르면, 2011년에 비해 2013년에 전반적으로 기부 참여 비율이 감소했지만, 유일하게 60세 이상의 참여율이 24%에서 25.4%로 약 1.4%포인트 상승한 것으로 조사됐다.
기부나 봉사의 현장에 신중년들의 발길이 늘고 있는 것을 실감하는 곳이 있다. 사람들의 기증품을 팔아 수익의 일부를 기부하는 ‘아름다운가게’다. ‘아름다운가게’의 전승희 간사는 “시간기부나 재능기부의 형태로 자원 활동을 하시는 신중년이 늘어나고 있다”며 “이분들은 장기적이고 정기적으로 참여와 기부를 한다”고 말했다. 신중년의 기부 참여가 늘고 있는 이유에 대해 전 간사는 “사회 참여에 대한 순수한 욕구가 있고, 기증·기부 문화 등의 공익 문화와 가치를 전파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아름다운가게의 정기 활동자 중 45%가 40~60대 이상으로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다. 젊은 층에 비해 삶의 변동이 적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신중년이 기부 문화 선도에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선 셈이다. 전 간사는 “신중년층은 재능기부나 참여의 형태로 지역에서 나눔을 실천하고, 지역 커뮤니티 발전에 대한 의견을 참여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기부나 봉사활동을 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달갑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다.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이미지를 좋게 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수억 원의 금액을 기부하고, 장기를 기증하고, 머나먼 아프리카에 봉사활동을 가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쉽지 않은 선택이다. 최근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봉사활동을 하거나, 목소리 재능기부, 온라인 도네이션을 통해 네티즌과 함께 기부금액을 모으는 등 대중과 함께하는 형태의 선행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다.
처음에는 재단이나 기관의 홍보대사, 친선대사 등으로 나눔을 시작했지만 세월이 지나 더욱 성숙한 자세로 선행을 이어오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1980년대부터 유니세프에서 봉사활동을 해온 배우 안성기(63), 1986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과 인연을 맺고 있는 개그맨 이홍렬(61), 그리고 1991년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임명된 후 전 세계 아이들을 돕고 있는 배우 김혜자(74) 등. 그들은 이미지 차원을 넘어서 삶의 철학이 담긴 진중한 나눔 활동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웃과 사회에 보답하며 훈훈한 에너지를 선순환하고 있는 스타들을 살펴봤다.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가수 이문세(56)는 젊은 일러스트레이터, 캘리그래퍼들과 함께 ‘이문세X프렌즈 아트 컬래버레이션’ 재능기부 프로젝트에 참여해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제작했다. 수익금은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으로 전달돼 할머니들의 생활, 복지, 증언 활동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카드는 10월 30일 ‘네이버 해피빈’과 ‘2015 씨어터 이문세’ 수원 공연장에서 시작해, 강남 교보타워 내 하임, 서울역 디트랙스 등에서 판매하고 있다. 네이버 해피빈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3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11월 11일 기준) 685만여 원을 넘기며 목표액의 2배가 넘는 수익을 냈다.
이문세는 2009년 MBC FM 라디오 의 청취자 461명의 사연을 담아 만든 노래 ‘이 겨울 날 지나간다’의 저작권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캐럴 느낌이 나는 발라드 곡으로, 청취자의 참여로 만들어진 곡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저작권법에 따라 이문세 사후 50년까지 노래에 대한 저작권과 음원수익금은 서울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갖게 되며, 모두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로 많은 이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한 가수 인순이(59).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 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 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인순이는 각종 봉사활동은 물론 대학생 오케스트라 팀과 재능기부 형태의 ‘지하철 게릴라 콘서트’를 하는 등 다양한 자선 공연도 꾸준히 하고 있다. 대중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고자 선행을 한다는 그녀는 오랜 고민 끝에 2013년 4월 강원도 홍천의 작은 마을 명동리에 다문화 대안학교 ‘해밀학교’를 설립했다. 2011년부터 3년여간의 준비과정을 통해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위한 배움터를 완성했다. 내년부터는 그동안 시행해온 수업료 면제에 이어 입학금, 급식비, 기숙사비까지 학교에서 부담하는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해밀학교의 이사장 인순이는 “학교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고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할 수 있는 꿈의 터전을 만들고 싶다. 내가 대한민국에서 겪었던 어려움, 외로움, 고통뿐만 아니라 사랑, 격려, 위로를 나와 같은 다문화 아이들이 알아갔으면 좋겠다”며 많은 아이들이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재능기부, 해외봉사, 장기기증까지… 국민엄마 고두심의 선행 릴레이
1983년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후원자로 나선 고두심(64)은 2006년 이후부터는 재단 내의 스타서포터즈에서 나눔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배우 채시라와 함께 재단이 진행한 ‘어른이날(성년의 날)’ 캠페인 CF에 목소리 재능기부에 참여했다. 그녀는 “어린이를 돕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닌 필수”라며 “어른들이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들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자”고 말한 바 있다.
자신의 모교인 제주여자고등학교에 2억 원의 장학금을 기부하고, 2008년 에티오피아 우간다에 봉사활동을 다녀오는 등 다양한 선행을 펼쳐온 그녀는 1999년 장기기증 캠페인에 참여하며 장기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다. 고두심은 한 인터뷰를 통해 “장기기증 서약 이후 건강을 더 생각하며 좋은 마음을 갖고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나이가 드니까 세월이 인생을 가르쳐 주더라.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 썩을 육신인데 다른 사람에게 주고 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주위 동료 연예인들에게 기증하라고 자주 권하는데 아직은 무서워서 못하겠다는 사람이 많다”며 장기기증 문화를 알리고 동참하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1호 공익신탁자 유동근
올해 7월 배우 유동근(59)은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 김현웅 법무부 장관, 한비야 국제구호전문가와 함께 국내 첫 공익신탁자가 됐다. 공익신탁은 기부자가 은행이나 단체에 재산을 맡기고 이를 운용해 나온 수익금을 장학, 구호 등 자신이 지정한 공익사업에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다. 법무부와 외부 감시인 감독 아래 기부자가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쓰이고, 적은 금액이라도 사용처가 투명하게 공개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간단한 절차로 ‘나만의 재단’을 만드는 셈이다(법무부 상사법무과에 문의 후 참여).
유동근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의 생계 및 교육 지원을 위해 ‘나라사랑 공익신탁’을 만들었다. (이철희 원장은 ‘난치성 질환 어린이 치료를 위한 공익신탁’, 김현웅 장관은 아동학대 피해자를 지원하는 ‘파랑새 공익신탁’, 한비야씨는 인류애를 키우는 사업에 쓰일 ‘세계시민학교 공익신탁’에 참여) 그는 2008년 숭례문 화재 당시 복원 성금으로 1억 원을 기부한 바 있다.
연예계 선행 바이러스 정애리의 ‘하래의 집’
연예계 기부천사 정애리(55)는 아프리카 구호활동, 몽골 기아체험, 동남아 쓰나미 피해 지역 방문, 도시락 캠페인, 생명의 전화, 연탄은행 홍보대사, 월드비전 친선대사 활동 등 다양하고 끊임없는 선행을 펼치고 있다.
그녀는 2004년부터 SBS 사회공헌 프로젝트 프로그램 에 참여하며 매년 후배 연기자들과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009년에 함께 아프리카에 다녀온 배우 장서희는 “연탄 나르기 봉사활동을 끝내고 드라마 촬영장에 온 정애리 선배의 모습을 보고 나도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애리의 선행이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2005년에는 17년간의 봉사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에세이 를 펴내며 인세 수익금 1억 원 전액을 정읍의 ‘사랑의 나눔의 집’에 기부했다. 책에는 그녀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 고아시설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지상에서 굶는 아이들이 없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할 것”이라며 책을 펴낸 소감을 전한 그녀는 책을 통해 ‘하래의 집’에 대한 이야기와 나눔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
지난해 11월 안타깝게 우리 곁을 떠난 배우 김자옥을 추모하고 평소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했던 그녀의 뜻을 기리는 ‘김자옥 재단’이 내년 1월 설립된다. 기아대책 홍보대사활동, 사랑 나눔 한복 패션쇼 참여 등을 비롯해 2007년에는 배우 주현, 전무송, 나문희 등과 함께 출연료 전액을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 도네이션 드라마 (KBS 2TV)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나눔을 실천했던 그녀다.
고 김자옥의 남편인 가수 오승근은 “생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선행을 많이 한 아내의 뜻을 이어가고 싶다”고 재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김자옥 재단’은 배우 강부자를 비롯한 동료 연기자들이 동참해 장애인 시설 등을 찾아 봉사활동과 재능기부 등을 할 계획이다. 김자옥 재단은 적극적인 사회 참여를 원하는 40~60대 여성들이 불우한 청소년들의 멘토로 활동할 수 있는 ‘공주는 즐거워’ 프로젝트를 첫 공식 활동으로 기획하고 있다.
글 권택명(한국펄벅재단 이사, 시인)
애송시 을 쓴 故 청마 유치환 시인은 그의 시 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쓰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그 행복을 넘어서는 것이 사랑하는 것, 즉 사랑을 주는 것이라는 시인의 표현은 시적 수사(修辭)이고 역설적 표현이지만 한 차원 높은 행복론이다. 근원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받기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켜서는 것이기에 그런 만큼 성숙함의 증표라 할 수 있다.
시혜(施惠)를 자랑하거나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아름답다. 이는 주위를 여유롭게 하고 선순환하게 한다. 물론 줄 수 있는 ‘여건’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는 대상물보다 주는 마음이고, 태도이며, 습관이다. 가진 것의 크기나 양보다 이를 나누려는 마음과 이웃과 세계의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惻隱之心: compassion/sympathy]이 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기부는 단순히 ‘GIVE’ 하는 것만이 아니다. 마음을 담은 자선 행위는 더 높은 차원의 행복을 누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여러 조사에 따르면, 자신보다 남을 위해 쓸 때 한 차원 높은 행복감을 느끼게 되며,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행위가 뇌에서 사회적 유대감과 관련된 부분을 활성화시킨다고 한다. 남을 돕는 사람들이 혈압과 스트레스 정도가 낮아 더 건강하고 장수한다는 조사 자료도 있다.
기부가 바꾸는 세상
‘부자의 기부는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 지난 8월, 2000억 원의 전 재산을 통일나눔펀드에 기부한,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 관련 언론의 기사 제목이다. 세계 기부 역사를 새로 쓴 철강왕 카네기나 석유재벌 록펠러, 기업인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 등의 거액 기부자들, 삼성·현대·LG 등 한국 대기업들의 기부, 그리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1억 원 이상 기부자 모임인 ‘Honors Club’ 등. 이들 고액의 기부 단체나 기부자가 복지 제고 차원에서 사회와 세계를 바꾸는 역할을 한 것은 자명하지만, 반드시 고액 기부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커피 2잔(1만 원)이면 아프리카 영양실조 아동 1명의 1주일 치 영양치료식, 치킨 1마리(2만 원)면 빈곤국가 6인 가족 한 달 치 식량, 회식 1회(3만 원)면 빈곤국가 6인 가족 1개월 치 식량 제공이 가능하다’는 어느 국내 비영리자선단체의 모금 광고처럼, 소액이라도 얼마든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낫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복지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지만, 국가만으로 사회 전반의 복지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양식 있는 시민사회의 기부와 나눔 활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때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생활고로 인한 송파동 세 모녀 자살 사건 등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돌봐야 할 벼랑 끝에 선 이웃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부문화의 현주소
2013년도 기준 총 기부금액 약 11조8000억 원(종교기부 포함) 중 개인이 7조7000억 원으로 65% 정도를 점하고 있다. 현금을 기부한 개인 비율 약 33%, 1인당 평균 기부금액 약 16만 원으로, 2011년도 기준 미국의 82%, 1000달러 수준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수치이다. 또한 고소득층의 기부 참여율이 중·저소득층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고액 기부자들을 중심으로 기부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국제기부문화선진화컨퍼런스 주제 강연 차 방한한 영국 자선사업감독위원회의 케네스 디블 법률서비스국장이 국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영국에서 기부는 경제의 필수 요소다. 영국인의 삶 속에 기부는 관습(ethos)처럼 스며들어 있다”라고 말한 것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기부금 수준은 국민들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한 좋은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기부금에 대한 세제 혜택 축소 후 기부금이 많이 줄었다는 뉴스가 있다. 다행히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개정 법안들이 기부금의 세금공제 혜택을 늘리는 쪽으로 추진되고 있다 하므로, 경주 최 부자나 제주 거상 김만덕, 개성상인의 나눔정신, 두레나 품앗이 등으로 이어져온, 우리의 나눔과 기부 전통이 더욱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한다.
손쉬운 기부의 실천
IT 기술과 SNS의 발달 등으로 기부의 방법도 다양화하고 있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다. 또 그동안 모금을 하는 비영리자선단체들의 재정 투명성 문제로 기부를 꺼리게 되는 경우도 많았으나, 지금은 많은 모금단체들이 국세청 자료나 홈페이지 등을 통해 재정 상태를 상세히 공개하고 있어서 신뢰성 확인도 쉬워졌다.
기부의 사전적 뜻은, ‘자선 사업이나 공공사업을 돕기 위해 돈이나 물건 따위를 대가 없이 내놓는 것’(네이버 국어사전)으로 되어 있다. 필자는 즐겁게 낸다는 ‘희사(喜捨)’ 쪽을 더 선호하지만, 기부는 꼭 물질만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요즘은 사회 지도층이나 문화·예술인, 연예인들의 재능기부를 비롯하여, 이·미용 기술, IT 등 각종 재능기부에서 장기기증까지 다양한 기부들이 실행되고 있다.
흔히 재산이 많은 부자를 ‘잘 산다’라고 표현하는데, ‘부자는 그저 재산이 많아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은 자신과 가족을 넘어 그 부를 사회 전반에 유익하게 사용하며 사는 훌륭한 품격을 갖춘 사람이다’라고 늘 주장하시던 필자의 친척 한 분이 생각난다. 이제 자선활동의 피크인 연말이 다가온다. 사회복지시설에 대한 기부든, 국내외 불우아동에 대한 1:1 후원이든, 고액이든 소액이든, 한 해가 가기 전에 일단 기부를 하여 차원 높은 행복감을 맛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유한한 이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개그맨 유재석이 연일 화제다. 한동안 주춤하다 싶더니 종편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호사가들을 분주하게 만든 데 이어 가요제라는 형식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공중파 방송사들이 자료 영상을 종편 채널에 제공 또는 판매하지 않는 것은 유재석을 빼앗긴 데 대한 복수’라는 다소 선정적인 내용의 기사가 눈에 띈다. 유재석이 대단한 능력자임은 익히 알았지만 거대 방송사들이 치졸한 복수극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영향력이 큰 줄은 미처 몰랐다. 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일본에서는 아리요시 히로이키(有吉弘行)라는 코미디언이 득세하고 있다. 어떤 이는 연수입이 5억 엔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10억 엔이 넘는다고 할 만큼 채널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 중이다. 개그 스타일은 유재석과 정반대다. 독설이 거침없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수갑을 찰 만한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미국의 코미디언이며 방송 진행자인 코넌 오브라이언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높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작가 출신으로 현상을 비트는 지적 유머가 장기로 알려져 있다.
유재석과 아리요시 히로이키, 그리고 코넌 오브라이언. 코미디 스타일은 제각각이지만 세 명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첫 번째는, 세 명 모두 한때 코미디언으로서 몹시 힘겨운 시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 역경을 너끈히 뛰어넘었다.
유재석은 10년 넘게 무명이었다. 이따금씩 정보 프로그램에 출연할 기회를 잡았을 때는 선천적 방송 ‘울렁증’ 때문에 더듬거리기만 하다가 속절없이 마이크를 내려놓아야 했다. 라는 옛날 프로그램에서 에피소드들을 과장을 섞어가며 재미나게 풀어내지 못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리요시 히로이키는 데뷔와 거의 동시에 스타덤에 올랐다. 여느 일본 코미디언들이 으레 그렇듯 데뷔 초창기에는 고생이 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루간세키(猿岩石)’라는 이름으로 코믹 듀오를 이루고는 1996년부터 히치하이크로 세계 여행하는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해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때의 이야기를 쓴 책이 250만 부, 음반이 120만 매 판매됐다. 나중에 아리요시는 방송에 출연해 “믿거나 말거나 경제 효과 1조 엔”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후로는 지독한 내리막길이었다. 인기가 한 번 추락한 이후 7년 가깝게 섭외가 없었다. 아리요시는 “사루간세키 시절에 번 돈을 모두 까먹은 시점이 되고서야 슬슬 출연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았다. 다시 찾아온 기회를 아리요시라는 똑똑한 코미디언은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았다.
나라별 다른 코미디 스타일
코넌 오브라이언은 뒤늦게 위기를 맞이했다. 출발은 거짓말처럼 순조로웠다. 유명 코미디 프로그램 과 인기 애니메이션 등에서 방송작가로 활약하다가 소질을 인정받고 방송 진행자로 데뷔한 이후,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하면 으레 떠오르는 늦은 밤의 토크 프로그램( )을 잇따라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키워준 방송사 NBC로부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또 다른 코미디언인 제이 레노의 프로그램을 신설하며 의 방송 시간대를 맡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NBC가 의 방송시각을 60년 만에 변경한 까닭은 단 하나, 시청률 때문이었다. 쇼를 맡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그와 같은 모욕을 당하고 오브라이언은 방송 하차를 결심했다. 계약 조건 때문에 한동안 방송 활동을 할 수 없었음에도 자존심을 꺾지 않았다.
오브라이언은 쇼를 그만두고 방송 대신 전국 투어를 선택했다. 성공적일 것 같지 않던 코미디 여행은 결국 대성공을 거뒀다. 트위터 같은 SNS가 홍보에 큰 몫을 담당해준 덕분이었다. 현재 오브라이언은 케이블 방송사 TBS에서 를 진행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두 번째 공통점은 그들이 현재 한미일 세 나라를 각각 대표하는 코미디언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세 번째는 그들이 현재 한미일 세 나라의 코미디 스타일을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의 진짜 주제는 바로 이 세 번째 공통점에 관한 짧은 생각이다.
유재석은 점잖다. 코미디언이라면 한 번쯤 겪을 법한 스캔들을 단 한 번도 거치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에 미담만 가득하다. 최근에만 해도, MBC의 에 방영돼 화제가 된 일본의 우토로 마을에 10년 전부터 몰래 기부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방송 진행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동료 선·후배 코미디언들은 그가 “게스트들을 놀랍도록 배려한다”고 입을 모은다. 오랫 세월 동안 ‘질 안 좋은 친구’처럼 코미디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던 주먹질이나 성적 비하 발언은, 그의 프로그램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여타 코미디언과 다르게 유재석은 우격다짐이나 욕설 한마디 없이 우리들을 웃긴다. 유재석은 보기 좋은 일만 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도 얼마든지 방송을 재미있게 이끌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희귀한 모범답안이다.
남자들에 관한 은밀한 주제를 거침없이 드러낸 같은 프로그램이 실패한 것은, 유재석의 그런 이미지와 동떨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스튜디오 안에서의 얌전한 방송이 강호동에게 맞지 않는 것처럼, 음담패설을 늘어놓으며 패널이나 방청객의 치부를 드러내는 방송은 유재석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오랫 동안 인기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는 아마도 그가 만들어내는 ‘지저분하지 않은 웃음’이야말로 제대로 된 웃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거침없는 입담, 그러나 점잖다
일본인들은 딴판이다. 아리요시 히로이키가 그의 표현대로 ‘지옥에 떨어졌다가’ 다시금 인기를 얻게 된 계기는 ‘별명’이다. 동료 선·후배들에게 별명을 붙여주면서 인기가 급상승한 것이다.
코미디언이 지어낸 별명이 얌전해서야 인기를 끌기 어려울 터. 그의 입에서 작렬하는 별명은 상대의 얼굴이 벌게질 만큼 공격적이었고, 그래서 웃겼다. 심지어 아리요시는 일본 방송계의 원로 여성 진행자 구로야나기 데쓰코(黑柳徹子)에게 ‘똥할매’라는 놀라운 별명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이라는 토크 프로그램을 40년 가까이 진행해온 전설적 진행자의 면전에서 원초적인 욕지거리를 퍼부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배꼽을 잡는 가운데 80세가 넘는 할머니만 웃지 못했다. 그렇다고 방송에서 대놓고 화낼 수도 없는 노릇. 할머니는 다만 “별명이 아니라 그냥 욕일 뿐”이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다시 스타덤에 오른 뒤 아리요시의 거침없는 입담은 더욱 불을 뿜었다. 함께 진행하는 여성 아나운서에게 통통하다는 이유로 “돼지새끼”라고 욕을 퍼부었으며, 미모가 좀 떨어지는 아나운서에게 “얼굴은 못생겼는데 가슴은 크다”고 놀려댔다. 남자 연예들에게는 더 매서웠다. ‘쓰레기’ ‘똥’ ‘바보’ 같은 욕지거리가 입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본 시청자들은 그를 사랑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코미디를 유심히 살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리요시는 무척 재미있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폭언을 일삼지만 웃음을 선사하는 코미디언으로서의 임무도 잊지 않는다. 폭언을 들은 상대는 그냥 웃고 만다. 스스로의 설명처럼 아리요시는 영리하게도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계와 우리의 그것은 판이하다. 아리요시가 일본에서의 잣대를 그대로 유지했다가는 우리나라 프로그램에서 입도 벙끗하지 못할 것이다. ‘구구이 비점이고 자자이 관주’라는 의 표현을 빌려 쓰면, 아리요시의 멘트는 ‘구구이 폭언이고 자자이 성희롱’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쨌든 웃긴다. 그래서 일본에서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 시청자들이 ‘웃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일본 시청자들은 ‘어쨌든 웃기면 된다’고, ‘웃기지 못하는 얌전한 코미디보다는 웃기는 욕지거리 코미디가 더 낫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를테면 웃음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랄까.
코미디는 언제나 사회현상이 주제
코넌 오브라이언이 선사하는 웃음은 한국과 일본의 코미디와 성격이 좀 다르다. 그의 코미디는 언제나 사회 현상이 주제다. 그것도 남녀 사이의 자잘한 연애나 동료 연예인들의 잡다한 경험담 따위가 아니라 제법 굵직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화제가 코미디의 소재가 된다.
그러므로 그의 코미디가 유재석이나 아리요시의 코미디보다 수준 높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지 않을까 싶다. 일상의 사소한 웃음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코미디의 핵심인 풍자가 부족하다고 단정 짓기도 어렵고, 신문 앞면에 날 법한 사회현상을 다룬다고 해서 풍자가 넘치리라 지레짐작하는 것도 성급하다.
분명한 것은 정치적, 사회적인 이유와 관습으로 우리와 일본 사람들에게 풍자가 제법 부족하다는 것, 그에 비해 미국인들은 ‘지적인 피해의식이 있는지’ 의심될 만큼 풍자에 집착한다는 것, 그리고 코넌 오브라이언이 사회현상을 꼬집고 비트는 풍자에 재능이 넘친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던 다트머스 대학 졸업식 연설은 그 진수라 할 만하다. 하버드 대학 출신인 오브라이언은 그 연설에서 자신의 지적 유머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현실을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로 진출하는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고무했다. 그러면서 웃음을 선사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인들이 추구하는 유머의 최고봉이었다.
우리에게는 웃음이 필요하다. 그 웃음을 선물하는 작업은 대우받아 마땅하다. 유재석과 아리요시와 오브라이언은 각자의 스타일대로 그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우리에게 웃음을 주고 있다. 한미일의 웃음 코드는 세 코미디언의 차이점만큼 크게 벌어져 있지만, 모두가 웃음을 원한다는 사실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어떤 코미디가 더 수준 높은지 따지는 것은 나중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