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젊은 시절부터 문학적 사유를 함께했던 오랜 벗을 그리워하며 서종택 고려대 명예교수이자 소설가께서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서종택 소설가ㆍ고려대 명예교수
한형,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써보려니 자네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줄을 서누만. 나의 기억력은 참으로 한심한 편인데도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60여 년 전의 자네 주소가 그대로 떠올랐네.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본정리 산 12번지. 내가 자네에게 처음 쓴 편지의 지번이지. 우린 그때 중2였고 당시의 학생잡지 지에 다투어가며 소설(콩트)들을 발표했지. 그때 나는 자네의 인가 하는 작품을 읽고 긴 편지를 보냈고. 자네는 그보다 더 긴 장문의 답장을 보내왔고. 우리는 그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무엇을 그리거나 끄적거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외롭고 허기에 찬 소년 시절을 보내고 있었지.
한형,
나는 지금도 자네가 나에게 처음 소개해주었던 모차르트를 잊을 수 없네. 우리가 처음 만난 겨울이었지 아마. 나는 천안에서 내려오는 자네를 마중하기 위해 옆구리에 이보 안드리치의 (아마 그즈음 노벨상 수상작이었을 거야)를 끼고 광주역 플랫폼에 서 있었지. 최인훈의 에 흥분하고 방 한 칸을 찾아 밤길 헤매는 마렉 플라스코의 의 젊은 애인들을 가슴 아파하고, 그러나 이제는 이 아닌 이나 을 옆구리에 낀 채 담배를 넣고 다니던 오만방자한 고2의 겨울이었지. 진눈깨비 어지럽게 흩날리던 그해 겨울 역 광장에서 우리는 처음 수줍게 악수했고 악수가 끝나자마자 자네는 굵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광주엔 클래식 감상실이 있느냐고 물었어. 그리고 충장로의 그 지하다방에서 자네가 리퀘스트 곡으로 써낸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5번’을 그때 처음 알았지. 대학생이 되어 종로의 ‘르네상스’를 들락거리면서부터 나도 덩달아 고전음악을 듣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문득 모차르트와 하이든이 대책 없이 감미롭고 경쾌해지기 시작했고 베토벤이나 브람스가 대책 없이 무겁고 둔중하게 가슴을 울리기 시작했다네. 평생 이어폰을 끼고 지낸 나의 음악 사부인 한형의 후광이었지.
한형,
그리고 그즈음 나와 함께 아파준 한형께 감사하네. 청파동의 어느 대학에 우리들의 ‘그녀’들이 있기도 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도 다른 누구와도 함께 기숙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하숙집을 함께 옮겨 다녔지. 한쪽이 각혈을 시작하자 의사의 휴학과 별거 권유를 무시한 채 우리는 국 따로 반찬 따로 먹기를 맹세했지만 이내 3개월 간격으로 결핵 감염을 확인했고 주사와 투약으로 병원을 함께 들락거렸지. 떨어져 지내는 것보다는 함께 지내는 게 편했노라고 자네는 훗날 그때를 회고했고, 문단 데뷔도 못한 주제에 식민지 시대 작가의 폐결핵 동기들 흉내만 냈노라고 우리는 함께 웃었지. 우리가 앓았던 결핵은 그대로 60년대의 절망과 우울의 상징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어. 억압과 감시, 수배와 투옥, 휴교와 계엄령으로 이어진 이 시기의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혼란의 시기를 지나는 동안 문과대학의 실속 없는 문학청년의 꿈은 서서히 마모되고 스러지기 시작했지. 문청 시절의 자존심이 대학에서 구겨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문학은 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고 문학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차리고 말았지.
한형,
창작을 접어두고 대학의 연구실이나 강단에서 우리가 보낸 세월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1970년을 전후해서 문단에 함께 데뷔했고 1980년을 전후해 함께 대학의 교수 자리는 얻을 수 있었지만, 그리고 논문에 각주를 달고 이론서를 꾸려내고 학생들에게 문학론을 강의했지만, 막을 수 없는 허허로움을 어떻게 삭이고 있었는지는 서로가 다 짐작하는 비밀이었지. 화려한 문청 시절은 추억으로 끝나고 동년배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들이 서점가의 중심 코너를 차지하고 있을 때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 안타까움은 엉뚱하게도 강의실에서의 폭언으로 표출되기도 했어. 사실 어느 해 자네가 대학원 강의실에서 퍼부었다는 당시의 어떤 대하소설에 대한 폄하는 좀 심했었네. 자네는 그때 그 소설을 김승옥의 에 빗대면서 그 작품의 반만큼의 감동도 없는 지루한 다큐멘터리에 불과하다고 당시의 소설을 비난했다지.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열등감을 학생들에게 들키고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네. 가령 어느 소설에 대한 평가를 질문받고는 나는 짐짓 ‘너무 길어서’ 읽지 못했노라고, 한 권으로 마칠 이야기를 열 권으로 써내는 일은 창작가들이 저주를 퍼부어야 마땅하다고, 언어의 감각이나 경제성이야말로 서사미학의 종점이라고 갈파(!)했지. 창작보다는 비평에 몰두해버린 우리들의 파행(?)은 그러나 상실감이나 공허감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었네. 자네가 펴낸 은 서사학계의 쾌거이자 성과였어. 이 책은 서사에 관련한 용어를 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개념이 형성된 배경과 이론의 전개 과정을 소논문 형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서사의 개념들과 그 쟁점들을 아울러 익히게 한 획기적인 책이었지. 이혼하지 못한 부부처럼 창작과 비평의 어색한 동거를 계속하면서 우리는 정년을 맞았고, 문학은 써내는 즐거움 못지않게 향유하는 즐거움도 있다고 우리는 서로를 위로했었지.
한형,
자네가 보여준 그동안의 편식과 편애와 편파를 나는 존중하네. 그리고 자네의 폭력마저도. 그것은 자네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이념이었어. 도선불여악(徒善不如惡), 어쭙잖은 선은 차라리 악함만도 못하다 했던가. 자네는 기름기 있는 음식을 기피했고 과시하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으며 위선을 경멸했었지. 호불호가 분명했고 어떤 제자에 대한 편파적인 애정은 징그러웠고 그 반대 또한 무서울 정도였다니. 그래서 사람들은 자네를 성질 더러운 인간이라 했고 60년 지기인 또 하나의 우리의 친구 오탁번은 그러한 자네를 대책 없는 놈이라 말하곤 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단연코 ‘개성’으로 결론지었다네. 이 편파적인 판정을 비난할 사람은 없을 거네. 왜냐면 우리보다 자네를 더 잘 아는 친구들은 없다고 자부하기 때문이지. 자네는 편식했지만 그 음식은 순정했고 편견은 심했지만 결백했으며 사람을 편애했지만 그들을 감식하지는 않았지. 폭력 교수로 몰아세우는 학생 대표를 폭력으로 제압했던 자네의 80년대식 무용담은 지금 들으면 자네는 운도 많이 따랐었지.
한형,
자네가 중환자실로 옮겨가기 하루 전, 자네는 나에게 “당분간은 죽을 기미가 안 보인다”고 껄껄 웃었고 나는 “그래, 우린 아직 갚아야 할 것이 있다” 어쩌고 지껄였지. 그것이 자네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였네. 자네는 그날 담당 간호사에게 생뚱맞게도 멘델스존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지. 잠깐 당황하던 간호사가 이내 그의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봄노래를 좋아하노라고 대답해 자네를 감동시켰고, 자네는 이런 병원이라면 편하게 입원할 수 있겠노라고 기뻐했다지.
한형,
아버지께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후유증만을 허락해달라는 아들 근이 녀석의 기도도 헛되이 자네는 의식을 잃은 지 2주일 만에 먼 길 떠나고 말았지. 삼우제를 준비하면서 근이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어. 짧은 묘비명이 필요하다고 했네. 나는 주저 없이 자네의 짧은 소설의 긴 제목을 그대로 옮겨 보냈네.
“이다음 우리는 누구의 가슴에 따뜻한 별빛으로 남을 수 있으랴.”
>>서종택
1944년 전남 강진 출생, 광주 사레지오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1969년 , 에 첫 소설을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 , , , , 등의 창작집과 , , 등의 논저가 있다.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1970년대 강남 부흥의 상징 같던 한 아파트는 2014년 재건축되면서 기억 속에서 잊혔다. 적은 돈으로 푸짐한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친구들과 술잔 기울이던 피맛골 또한 개발이란 이름으로 영영 사라졌다. 도시의 지도가 바뀌고 변화한 거리. 뭐든 새것이 좋다지만 우리네 따뜻했던 옛 시절도 아름답지 않던가. 혹시 그때가 그립다면 서울역사박물관(서울 종로구 새문안로)에 가보시라. 정겨웠던 이웃, 친구들과 술잔 부딪히던 그때 정취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
판자촌 위에 쌓아 올린 시민 아파트
전시실에 들어서서 1950년대 생활상을 지나 1960년대 ‘서울은 공사중’ 전시실로 들어서면 ‘돌격건설’이라고 크게 써 붙인 포클레인 삽이 건설현장을 연상하게 하는 모래 속에 처박혀 있다. 이 설치물 뒤쪽으로 1960~70년대 세워졌던 시민아파트 내부 모습을 클레이 아트로 꾸몄다. 아파트 속을 재현한 클레이 아트를 살펴보면 마루에 누워 TV 보는 남편, 아파트 상가의 레코드 가게, 금은방, 지금은 거의 사라진 곤로 파는 가게, 다방 등 시대상을 재미있게 표현해 놓았다. 1960~70년대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도심 주변으로 판자촌, 즉 무허가 불량주택이 급격하게 불어나자 도시 경관 개선을 이유로 1968년부터 시민아파트 건설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1969년에만 32개 지구에 406동 1만5840 가구의 아파트가 판자촌 위에 세워졌다. 시민아파트 건설은 1970년 4월 8일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중단됐으나 판자촌 마을에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서울의 모습이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
피맛골이 그립다!
안국역과 광화문역 일대에는 굽이굽이 작은 골목 사이로 정(情)을 한가득 담아내던 오래되고 허름한 음식점들이 모여 있었다. 피맛골이라 불리던 이곳은 도시 재개발로 사라지기 전까지 고단한 하루를 풀어주던 우리의 이웃이자 친구였다. 그중 광복 직후부터 2010년 2월까지 가장 오랜 기간 그 자리에서 영업을 했던 ‘청일집’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그대로 옮겨져 전시 중이다. 손님들이 끼적인 낙서부터 사용하던 의자, 국자, 전을 굽던 철판, 주전자 등 옛 청일집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청일집 단골이었다면 향수에 젖기 딱 좋은 장소. 기억 속 친구와 술 한잔이 떠오르는 독자라면 부디 가보길 바란다.
우리가 살던 집이네
실제 아파트도 재현해 놓았다. 1978년 입주가 시작된 강남구 지금은 서초구 서초삼호아파트 9동에 살던 한 가족이 쓰던 가구, 생활용품, 집 내장재 등 기증품으로 꾸민 집이 전시실 마지막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1939년생, 1943년생 부부와 아들과 딸, 네 가족이 살던 아파트다. 주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1981년 입주 초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식탁 의자에는 호돌이가 새겨진 강남구청 수건이 걸려 있다. 골드스타가 선명하게 쓰인 냉장고, TV, 믹서기, 밥통 등도 낯익다. 아이들이 쓰던 방 책꽂이 앞에 놓인 가방은 옛 추억을 방울방울 샘솟게 해 준다. 취재 당시 어린 아들과 함께 온 한 엄마는 “여기 엄마가 살던 집이랑 정말 똑같다”고 말하면서 즐거워했다.
관람시간 3~10월 평일 09:00~20:00 토·일·공휴일 09:00~19:00 / 11~2월 평일 09:00~20:00 토·일·공휴일 09:00~18:00 휴관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1층 학습실, 서울역사자료실, 로비전시관, 강당, 식당, 카페테리아 개방) 관람료 무료 전화 02-724-0274~6
홈페이지 museum.seoul.kr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1966년 12월 초 어느 날이었다. 교양학부 도서관의 세미나 룸에서 송년다과회가 열렸다. 대학에 입학한 뒤, 매월 책 한 권을 정해 읽고 토론회를 열어온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함께 마지막 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그 모임을 지도해온 철학과 S 교수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S 교수가 말을 마치더니, 학생들에게 새해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포부를 말해보라고 했다. 여러 명이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이, 2학년에 올라가면 전공 공부를 하면서 교양도서도 열심히 읽겠다고 말했다. 기대한 반응이었는지, S 교수는 줄곧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J 차례가 되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남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많은 학생이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시절에 여학생이 공개된 장소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파격이었다. J는 언행을 절제하는 모범생이지만, 어쩌다 가끔은 그렇게 당돌함을 보이기도 했다.
차례가 오자 나는 J를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빤히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저는 1년 계획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새해 첫날 계획은 있어요. 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 둔 여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나는 ‘남학생’을 ‘여학생’으로 바꾼 것 말고는 J의 말에 한 자도 보태지도, 덜지도 않았다. 학생들이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웃었다. J도, S 교수도 웃었다.
내가 J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학기 초 독서토론회 이후였다. 지정도서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이었다. 토론회에 참여한 학생들은 입을 모아 두 연인의 순수성을 예찬했다. 순수한 사랑이야말로 그 희곡의 주제이자, 대학 새내기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몇 학생이 두 연인의 무모함이나 맹목성을 지적했다. 어떤 학생은 우연한 사건이 중첩되고 있다며 작품의 플롯을 비판했다. 그러나 누구도 분위기를 뒤엎지는 못했다. 입을 다물고 있던 나를 보며 S 교수가 말했다.
“김 군. 작품을 읽었을 텐데, 독후감을 말해보게.”
기다리던 바였다. 1학기 말의 토론회에서 S 교수로부터 칭찬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교수가 나에게 반드시 발언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저는 이 희곡의 작품성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녀 주인공의 사랑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행위도 사회적 상황을 덮어두고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에 대해 평가를 달리하고 싶습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 보면, 스토리가 전개되는 16세기 후반에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시작됩니다. 무역을 바탕으로 한 새 세력이 대두하고, 토지를 바탕으로 한 구세력은 뒤로 밀립니다. 사회적 기반을 뿌리째 뒤흔든 엄청난 혁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구세력 지배층인 귀족 자녀들이 사랑에 탐닉해 있다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에게는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사회변화의 변곡점에서 볼 수 있는 말기적 현상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역사성이나 사회성이 배제된 그런 사랑을 지고지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나는 목적을 달성했음을 직감했다. 이제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했다.
“제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제 곁에 줄리엣 같은 여인이 있었다면, 물론 저 역시 앞뒤 살피지 않고 사랑에 빠졌을 겁니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학생들이 와, 하고 웃었다. 누구보다도 S 교수의 웃음소리가 컸다. 토론회가 끝나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J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가지고 놀아도 되나요?”
“가지고 놀다니?”
“학생들 뒤통수를 쳐놓고, 마무리로 앞이마까지 쳤잖아요?”
J는 고개를 돌려 상긋 웃고는 버스에 올랐다. 바로 그 미소가 화살이었다. 그러니까 그 찰나에 J는 말 위에서 등을 돌리고 화살을 쏜 고구려 궁사였다.
1967년 1월 1일 자정이 되자 나는 5분 동안 나와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종교가 없는 내가 손을 모아 기도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철필에 검은 잉크를 찍었다. 편지를 다 쓴 뒤에 날짜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땐 0시 5분이 훨씬 지난 뒤일 것이었다. 나는 편지지 맨 위에 ‘1968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쏟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J에게 보낼 편지였다. 마을 앞에도 우체통이 있지만, 나는 이튿날 이른 아침에 십리를 걸어 우체국으로 가서 편지를 부쳤다.
드디어 1월 4일이 왔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으로 나갔다. 바람도 없는데 울안에 서 있는 동백나무에서 붉은 동백꽃 한 송이가 뚝 떨어졌다. 이건 길조일까, 흉조일까? 나는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오후 4시가 조금 지나 집배원이 우편물을 가져왔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J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 봉투를 뜯었다. 그 편지지 맨 위에도 ‘1967년 1월 1일 0시 5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J의 편지를 손에 쥐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쭉 뻗었다. 그야말로 천하가 내 손 안에 있었다.
편지 내용에, 보고 싶다든가 좋아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하는 구절은 없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음으로써 상대를 마음에 담고 있음을 서로 확인한 셈이었다.
우리는 그 후 2월 20일까지 5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편지를 받고 그 답을 쓰는 식이 아니었다. 답장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편지를 썼다. 나도 그도 몇 번인가는 하루에 두 통을 써서 부치기도 했다. 평생 쓸 편지의 반쯤을 50여 일 동안에 쓴 셈이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안개처럼 말없이 다가와 나를 휘감는 그리움일까? 그리움이 사랑이라면 나의 J에 대한 사랑은 안개보다 짙었다. 사랑이란 내 곁에 그가 없어도 그를 내 마음에 담는 것일까? 담는 것이 사랑이라면 내 마음에서 사랑은 흘러넘쳤다.
그래서 나는 편지에다 사랑한다는 말을 쓸까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아끼고 싶었다. 그래. 그 말은 직접 만나서 할 거야. 그것도 여러 번 만난 뒤에 해야 해. 나는 그런 절제가 사랑의 품격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2월 20일에 상경할 예정이라며 21일에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 J는 하루 뒤에 보자고 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숫자를 맞추어 2월 22일 오후 두시에 둘이 만나자는 것이었다. 장소도 J가 정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근사한 곳을 찾으려고 여러 군데를 돌아봤다고 했다. 그가 결론을 내린 곳이 바로 신설동 로터리의 어느 다방이었다.
둘이 만나 나눌 이야깃거리는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J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의 삶의 지표 셋을 밝혔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게 그것이었다.
J는 처음에는 가난이야말로 극복의 대상일 뿐이라고 했다. J가 강조한 것은 전문성이었다. 언젠가 나라가 전문인을 요구할 것이고, 그 준비를 하는 것이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편지를 서른 통쯤 주고받은 무렵부터, J도 가난의 의미를 재음미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기 강조하는 것이 서로 대립하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공감했다. 둘이 만나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접점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 터였다.
21일 상경한 나는 절친인 P의 집으로 갔다. P는 나에게 깜짝 놀랄 사실을 털어놓았다. 겨울방학 동안에 다른 사람이 아닌 J에게 집요하게 접근한 모양이었다. 편지도 보내고, 집으로 찾아가기도 하고, 골목길에서 기다리다가 만나보기도 했지만, J가 끄덕도 하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P가 말했다.
“나는 부모 없이 자랐어. 피난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 잃었어. 내 꿈은 출세하는 것이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내 꿈이야. 난 여자를 찾았어. J야. 내가 걔하고 결혼한다면 내 인생은 성공이야. 그렇지 못하면 난 살 이유가 없어.”
사랑에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었다. P의 표정은 진지함을 넘어 결연했다.
그날 저녁 나는 P의 집을 나와 제기천 천변의 어느 판잣집 주막에 들어가 혼자서 막걸리를 마셨다. 주막을 나온 나는 무심결에 J의 집을 찾아 나섰다. 주소는 기억에 생생했다. 골목 입구에 들어섰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일본식 2층 저택이 골목 양 쪽에 죽 늘어서 있었다. J의 집은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부티가 났다.
문득 희곡 이 생각났다. J는 줄리엣이지만, 안타깝게도 로미오와 나의 처지는 하늘과 땅이었다. 오래전부터 심하게 해소를 앓는 아버지와 그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더욱 불행한 것은, 독서토론회에서 내가 한 말,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는데 그럴만한 기회가 오면 당연히 바보가 되어야 한다고 한 내 말이 J의 집 앞에서는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친구도 친구려니와, 이런 부잣집 딸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나는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결국 나는 2월 22일 오후 두 시에 J와 만나기로 한 다방에 가지 않았다.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는 것이 젊은 시절의 내 삶의 지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삶의 지표를 쓰레기통에 버린 지 오래다. 나는 내 뜻과는 무관하게 아직 가난하게 살고는 있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내 주변에는 부유한 사람이 많다. 반대로 서울의 부잣집에서 나고 자란 J는 빈민운동을 하는 가난한 목사와 결혼해 평생을 가난한 사람 가운데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가난하게 살고 있다. 이미 손자를 거느린 할머니가 되어 있을 J가 그리울 때가 있다.
돌아가신 제 어머니는 밑으로 두 여동생을 뒀습니다. 부안에 사시던 어머니가 금산(錦山)으로 시집오자 두 이모도 언니 따라 금산으로 혼처를 정했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되는 첫째 이모는 금산 읍내에서 삼십 리 떨어진 ‘장둥이’에 사는 시골마을의 갑부한테 시집갔습니다.
글 김승웅 언론인
그 이모네 집 마당 대문 곁엔 높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었습니다. ‘가죽나무‘로 불리던 기분 나쁠 정도의 큰 거목으로, 집 전체가 노상 그 그늘에 덮여, 6·25 나던 해 여름 한 철을 그 집 머슴방을 빌려 피난살이를 하던 우리 식구들 눈에도 왠지 흉가 같다는 인상을 짙게 드리우던 나무였습니다.
이 인상은 그대로 들어맞아, 석 달 후 집주인 이모부가 9·28 직후 북으로 도망치던 동네 빨갱이들의 기습을 받아 피살된 곳이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이모부가 변을 당하기 직전 우리 식구는 그 집에서 피난살이를 끝내고 금산 읍내의 우리 집으로 돌아와 살던 때였지만. 반대로 동네 소작인들에게 쫓기던 이모부한테는 그때부터 피난살이가 시작돼, 장둥이 소작인들의 눈을 피해 열흘 남짓 읍내 우리 집에 숨어 지냈습니다.
이모부는 장둥이의 소문난 지주의 아들로 일본에 유학까지 했던 인텔리였습니다. 귀국 후 그는 선친의 뒤를 이어 장둥이 대지주가 됐고, 아침 산보 길에 동네 소작인 김 아무개를 논길에서 만나 간밤에 논물을 대라 지시했거늘 왜 지시를 따르지 않았는지를 추궁하다 평소 불복해온 김 아무개의 말대꾸에 격분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발길질을 퍼부어 그를 논두렁 구석에 처박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25가 터져 하루아침에 소작인들 세상으로 바뀌면서 김 아무개로부터 당할 보복이 두려워 석 달 동안 장둥이를 떠나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다 9·28이 되자 일단 안심하고 읍내 우리 집으로 거처를 정해 열흘 남짓 숨어 살던 중이었습니다.
쫓겨 새우잠을 자는 이모부를 볼 때마다 어린 제게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25 같은 변고가 생기면 제일 먼저 피해를 입는 사람이 바로 이모부처럼 남한테 원한을 지고 사는 사람이구나 여겼습니다. 인간이 인간한테 겪는 변고란 그러고 보면 으레 화산 같은 것이어서, 원한이라는 제일 여린 지층을 뚫고 분출되기 마련 아닙니까.
장둥이 가죽나무의 저주
이모부는 참변당하기 하루 전 날 “오늘 밤만은 오랜만에 다리 좀 뻗고 자겠다”며 장둥이로 귀가하더니 말이 씨가 된 듯 그대로 다리 뻗고 영면한 것입니다. 이모부의 귀가 소문은 당일로 장둥이 모두에게 퍼졌고 퇴각 중이던 김 아무개의 귀에까지 닿았던 것 같습니다. 퇴각을 멈춘 김 아무개가 그날 밤 장둥이로 돌아와 다른 소작인들과 작당하여 이모부 집을 덮친 것입니다.
이모가 내지르는 비명에 놀라 깬 이모부가 문을 박차고 담을 넘었습니다만, 김 아무개가 쏜 총이 더 빨랐습니다. 담을 채 넘지도 못한 채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담벼락 밑에 휴지처럼 구겨져 숨을 거둔 것입니다.
장례식 날 어머니를 따라 이모 집에 갔다가, 이모부가 담을 넘으려 움켜잡다 놓친 지푸라기 더미가 담 밑에 수북이 흩어져 있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이모는 장례식 날까지도 실신상태에 놓여 “날 샜네, 날 샜네!”만을 되뇌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남편의 참변에 놀란 나머지 부엌 아궁이에 머릴 박고 날이 어서 새기만을 기다렸다는 이야기지요.
더위가 한풀 가신 지금 같은 초가을 날씨였는데도 상갓집 구석구석에 흥건히 밴 피 냄새가 왜 그리 독하고 역겨웠는지 지금껏 제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미식거리고 토할 것 같던 그 냄새는 아무래도 마당 한구석 대문 옆에 선 가죽나무가 뿜어대는 냄새려니 여겼습니다. 그 가죽나무가 제 뇌리에 아직껏 저주의 나무로 남아 있는 건, 죽음이 뭔지를 그 나무가 풍기던 피 냄새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설까, 지금 이 나이에도 거목 곁에 서기가 싫습니다.
이번 글 제목을 ‘무나죽가이둥장’이라 단 이유도 그 가죽나무의 저주를 말하기 위해섭니다. ‘장둥이 가죽나무’를 거꾸로 뒤집은 글자 조립으로, 이모부의 참변 후 그 집 가죽나무 이야기만 나오면 파랗게 질려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이 겁보 아들을 놀려먹으려, 제 선친이 툭하면 꺼내던 악의의 말장난이었습니다. 겁보 아들을 다독이기는커녕 평생을 이처럼 철 안 든 아이로 살다 가신 아버지였습니다.
이모의 비운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루아침에 과부로 바뀐 이모는 두 아들을 금산 장둥이 시가 댁에 맡기고 언니 되는 우리 어머니가 살고 있던 전주로 이사 왔습니다. 과부 이모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 동란 직후 잘나가던 군복차림의 노 대위였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김종필과 동기 되는 육사8기 장교로, 수송 병과였습니다.
그 노 대위가 술이 취해 전주 이모네 집 담 옆에 차를 주차한 것이 인연이 되어 여자 집주인과 인사를 트다보니 여주인이 30대 초반의 과부라는 것, 더구나 일본에 유학까지 했던 인텔리 과부라는 걸 알자 노 대위 쪽에서 노골적으로 달라붙어 첩으로 삼은 것입니다.
당시 저는 전주에서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닐 때였는데, 이모 집에 놀러갔다가 대낮임에도 잠옷차림에 흐트러진 머리로 이모 방에서 나오는 노 대위를 여러 번 목격했고, 그때마다 심한 배신감에 떨었습니다. 국졸에 불과했던 우리 어머니와는 달리 일제 때 경성사범을 거쳐 일본에 유학까지 했던 인텔리 이모가 아니던가. 서예에 뛰어나고 평소 다감하기 이를 데 없던 그 인텔리 이모가 어찌 저리 쉬 무너진단 말인가… 전쟁을 치르면, 또 과부가 되면 다 저리 되는 건가, 도시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버려진 이모, 잊혀진 친정동생
그 이모가 어느 날 밤 군복차림의 노 대위와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둘의 동거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언니 되는 제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내려는 눈치였습니다. 내가 놀란 건 호되게 나무랄 줄 알았던 나의 어머니 아버지가 둘의 동거를 너무도 순순히 승낙하고 말더라는 것, 더욱 놀란 건 당시 노 대위가 허리에 차고 왔던 권총이었습니다.
제 어린 소견으로도 결코 권총 차고 나타날 자리가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차치하더라도 경우 밝고 매사 똑 소리 나게 다부지던 어머니마저 그 권총의 위력 앞에 저토록 꼼짝달싹 못 하다니… 어린 제 생각에도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그때의 억울함은 지나놓고 생각해 보니 정확히 10년 후 5·16이 터지면서 이 나라에 덮친 ‘권총문화’의 도래를 알리는 예고였습니다.
5·16이 나던 해 대학에 입학한 저와 동급생들은 두어 달 후 강의실을 박차고 진입한 무장계엄군들한테 밀려 교문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면전에서 쾅하고 닫히던 교문 밖에 우두망철 선 채 캠퍼스 안쪽을 들여다보던 바로 그때, 푸드득 머릿속을 스쳐가던 한 컷의 환영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뜬금없게도, 10년 전 그날 밤 저희 집을 찾아와 어머니를 침묵시켰던 노 대위의 성난 표정, 그리고 그의 허리에 달린 예의 권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저더러 5·16을 한마디로 정의해보라면 저는 지금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권총이라고. 모든 걸 침묵케 만들던 권총문화의 도래였노라고, 또 그 결말이 18년 후 궁정동 시해(弑害)로 입증되지 않더냐고.
계엄이 풀린 후 노 대위를 수소문한즉 5·16주역들의 동기답게 그 사이 대령으로 진급했고, 얼마 뒤 예편되더니 전주 병무청장으로 금의환향했다는 소식을 풍편에 접했습니다.
이모의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노 대령과 계속 동거 중인지 아니면 헤어졌는지, 이도저도 아니면 떳떳하게 그의 후처 자리를 차지해 안방에 들어앉았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로부터 서대문 로터리 근처의 ‘별’다방이라는 곳에서 마담으로 일하는 걸 봤다는 이야기를 풍편에 들었지만 어머니를 포함한 저의 집 식구 누구도 이를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식구 모두에게 그녀는 이미 버려진 이모, 잊혀진 친정동생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친정언니 손을 잡고 저세상 동행한 이모
그러던 이모가 우리들 앞에 모습을 내민 것은 5·16이 나고 근 30여 년이 지나섭니다. 그것도 하필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발인을 하루 앞둔 몹시 흐린 날 하오였습니다. 언니의 죽음을 누구로부터 듣고 왔는지, 하얀 상복 차림으로 들어선 이모는 몰라볼 정도의 노인으로 바뀌어 있더이다. 조카들의 인사에 아랑곳없이 곧바로 언니의 주검 앞에 다가서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는데, “언니는 좋겠네!”만을 되풀이하던 그 곡소리가 지금껏 생생합니다. 무엇이 그리 좋다는 말인지 문상객 모두가 궁금히 여겼습니다만 이따금 “이제 내 죽으면 누가 초상을 치러줄꼬?”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걸로 미뤄 이모부 사후 장둥이 시가 댁에 버리고 떠난 두 아들을 목 타게 그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입술이 점차 검푸르게 타들어 가던 이모가 언니의 주검 앞에서 혼절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상주였던 가형과 제가 안 되겠다 싶어 병원 응급실로 옮기려 했으나 구급차가 채 도착하기도 전에 그만 숨을 거두는 것 아닙니까? 아니, 도대체 이럴 수가… 말로만 듣던 줄초상이 난 것입니다. 절로 개탄이 터져 나오더이다. ‘아, 끝마무리까지 이토록 변고를 동반하시는 분이로구나!’ 억지로 짜 맞춰도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이모의 기막힌 팔자였습니다.
미뤄 짐작컨대 이모는 자신의 명이 다 한 걸 이미 감지하고 언니의 상가를 찾아왔던 성싶습니다. 마지막 여행길에나마 어려서 그토록 따르고 그리워했다던 친정언니의 손을 잡고 동행하고 싶어서였겠지요. 이모의 눈을 감겨드리며,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제 생각이 미치지 않던 어머니의 소녀시절이, 곁들여 두 자매가 나누던 동기간의 우애가 엄존했음을 그때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수년 전 우연히 고향 금산에 갈 일이 생겨 내친 김에 30~40리를 걸어 ‘장둥이’에까지 갔습니다만 가죽나무는 고사하고 그 집 그 동네마저 깡그리 사라져 버린 데 놀랐습니다.
60여 년의 세월은 그토록 무섭습니다. 집터만이라도 찾을까 싶어 동네 몇몇 노인한테 이모부 존함과, 혹시나 싶어 소작인 김 아무개와의 사연까지 설명하자 노인 모두가 아예 손사래까지 쳐가며 “왜 그런 걸 알려고 하느냐?”며 나무라는 데 더 놀랐습니다. 노인 두세 분은 저를 혹시 북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닌지 대놓고 의심하는 눈치까지 보이기에 안 되겠다 싶어 부랴부랴 동네를 빠져나왔습니다.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는 장래 인생의 목표를 세웠다. 어머니나 담임선생님도 같이 소망했다. 그리고 그 장래 목표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내 생활기록부란을 쓰시는 선생님은 편했을 것이다. 위칸 하나만 쓰면 나머지는 점 두 개로 같다는 표시를 하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 졸업 즈음 담임선생님은 중학교 진학 문제로 보호자를 모셔오라고 했다. 내가 중학교에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고 선생님은 내 앞에서 어머니에게 강권을 했다. “형철이는 옆에 있는 남중, 상고를 졸업하면 틀림없이 은행원이 될 테니 6년만 어머니가 고생하시면 됩니다”라고.
그 말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내 중학교 진학을 결정했고, 나는 고마움에 답하기 위해 은행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나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군산남중과 군산상고를 졸업했고 내 장래 목표를 완성했다. 1973년에 중소기업은행 행원이 되어 세종로 지점에 발령받았기 때문이다.
지점에 발령받아 일하던 그해 11월 지점장이 정년 퇴직을 했다. 송별식을 위해 지점장석과 차장석을 이어붙이고 그 위에 모조지를 깐 뒤 중국음식을 주문하여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나는 막내였으므로 섭섭한 마음을 담아 노래를 하라는 말을 듣고 노래를 불렀다. 여운의 ‘과거는 흘러갔다’였다.
송별식이 끝나고 소격동의 하숙집으로 가기 위해 경복궁 길을 걸었다. 오동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쓸쓸했고 뭔가 자꾸 떠올랐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바쳐 일하고 떠나는 송별회인데 탕수육이니 잡채니 몇 개 음식을 시켜놓고 몇 마디 한 뒤 그만 인사하고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 초라하고 궁색하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30 여 년 후의 내 모습이라 생각하니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날 일기장을 펼치고 1973년부터 2000년까지 연도별로 적고 그 옆에 내 나이를 적었다. 동시에 옆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나이를 적고 동생들의 나이를 죽 적었다. 그리고 은행에서 대리로 승진하는 해와 차장이 될 수 있는 나이에 선을 그어보았다. 대리가 되고 차장이 되면서 내가 차지할 집안 전체의 역할도 가늠해보았다. 2000년도쯤 되면 슬슬 배나오고 영락없는 한 명의 가장이 되어 살겠고 얼마 후에는 낮에 보았던 퇴임식이 나의 미래가 될 것이다. 아하, 그러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 약간 쓸쓸해져 밖으로 나와 달을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내 인생이 뭔가 달라질 것도 없었고 그게 그리 나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래서 세운 계획은 그 다음 해에는 반드시 야간대학에 가서 열심히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3때 영어공부를 많이 했는데, 좋고 아름다운 말이 많았고 그런 책들을 제대로 전체적으로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 해에 나는 국제대학(현 서경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대학에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자주 늦었고 빠져야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설령 학교에 간다 해도 낮에 일하던 피로가 몰려와 강의 시간은 잠자기 좋은 시간이 되는 때가 너무 많았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더구나 여학생이 꽤 많았기에 너무 행복했다. 게다가 은행원식 언어에 익숙한 내게 “얘, 건넙시다가 뭐니. 건너자고 말하면 되지”라며 길 가운데에서 물끄러미 쳐다보며 꼰대풍의 나를 젊게 교정해준 또래의 여자애가 있었으니….
실컷 졸다가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깨고 보면 수업이 다 끝나 은행의 합숙소로 가는 버스를 탈 시간 쯤에는 더없는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수업은 재미없어도 야간대학의 수업 분위기가 좋아 행복했던 1학기 중간고사 즈음 우연히 참가한 백일장에서 시를 쓴 것이 가작에 선정되어 채플 시간에 상패까지 받았으니 나는 정녕 신세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나를 뽑아주신 양명문 시인이 나를 불러 “강군은 시적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열심히 써보게” 해주신 말은 나를 들뜨게 했고, 고등학교 때까지 백일장에 나가는 동안 수상 한 번 못해본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감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과 예비역 형에게서 “네가 시 쓴다고 하던데 써놓은 것 있으면 한번 보자”는 말을 듣고 며칠간 고심참담하며 몇 편의 시를 선뵈게 되었다. 나름 밤을 새우며 노트에 써간 시를 그 형은 손가락에 침을 발라 노트 매수를 살피듯 넘겨보고 나서 나에게 “야, 너는 고등학교 때 문예반도 안 했느냐”고 묻는 통에 얼굴이 붉어졌던 기억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형은 신춘문예 평론부문 최종심에서 떨어진 이력을 가진 문학의 고수였다. 그의 눈에 내 시는 초보의 수준도 못됐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날 이래 나는 그 형의 제자가 되었다. 그에게서 현대문학이란 잡지도 알게 되었고 문학은 많은 공부를 통해서 숙성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엔 그 형을 따라 다방에도 갔고 산에 올라 해 질 녘까지 이런 저런 문학얘기를 들으면서 훌륭한 시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져가게 되었다. 삼립빵 몇 개와 우유를 마시며 다닌 길이었지만 너무나 행복했다. 그러면서 내게 제대로 문학을 하려면 철학을 공부해야 하고 그러려면 이렇게 야간대학에서 공부할 것이 아니라 아예 주간대학에 편입해서 공부하고 졸업 후에 다시 직장에 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처럼 시골의 부모님께 일정한 돈을 보내주어야 하고 동생들의 학비도 생각해야 하는 처지에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런 꿈같은 일을 이행하는 대신 서점에서 철학책을 사서 공부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책을 사서 읽곤 하였다.
그런 내게 2학기 수업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 읽어보려 했지만 어려웠던 철학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최명관 교수를 철학개론 시간에 만난 것이다. 첫 시간에 영어도 아닌 희랍어로 철학이란 말을 쓰셨고 학문이란 메타 호도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라며 수업시간에 본인이 쓴 ‘철학개론’이란 책으로 공부할 테니 미리 읽어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그날 저녁부터 철학개론을 읽기 시작했고 3일만에 다 읽었다. 다 이해는 못했지만 너무나 뿌듯했으며 이제 그토록 바라던 한 세상을 만난 것처럼 행복했다. 그리고 철학개론 시간에 듣는 이야기는 내 눈의 허물을 벗겨주는 것 같았다. 철학자들의 삶이 너무 아름다웠고, 그 공부는 내게 새로운 세계로 가는 문이 되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감히 생각도 못한 주간대학으로의 편입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러기 위해서 철학 교수님을 뵙고 조언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작정 주소를 들고 찾아뵌 교수님은 날 알아보실 일이 없었기에 내 상황을 설명하고 교수님께 배울 길이 없겠느냐고 여쭈었다.
지금 다니는 은행이 좋은 곳인데 뭐하러 고생을 자처하느냐고 하면서 한 시간 가량 만류하시던 교수님이 내가 공부해서 시를 쓰고 싶다는 말에 기특하다고 여기셨는지 편입하면 좋은 선생님들이 있으니 그리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미리 공부할 책을 몇 권 소개해주셨고 시와 철학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말씀을 해주셨다.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틈틈이 철학공부를 한 뒤 주간대학 편입시험을 치렀다. 당시 내 계획은 편입시험에 합격하면 휴학한 뒤 군대에 가고 가 있는 동안 나오는 돈으로 집에 보태면 집에 대한 어느 정도 의무를 다하게 된다는 생각이었다. 제대 후에 열심히 공부해서 적당한 회사에 취직하면 그때 남은 도리도 하고 시를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렵게 숭실대 철학과 편입시험에 합격하고 등록금을 낸 뒤 며칠 있다가 휴학을 하러 학교에 갔을 때 확인한 것은 편입생은 바로 휴학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 경우 복학할 때는 다시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말에 난감해졌다. 더욱이 당시 은행에는 제대 후 이직이 잦자 군대있는 동안 받은 돈을 갚지 않을 경우 퇴직도 안 되는 특별규정이 있었다. 궁리 끝에 어려워도 은행을 그만 두고 그냥 학교에 다닌 뒤에 곧바로 취업하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골의 어머니에게 허락을 받자고 생각했다.
겨우 생활이 안정되어가는 판국에 욕심 많은 장남이 은행을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면서 제대로 대학을 안 나오면 출세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어머니는 기꺼이 동의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들을지 모르겠다며 밤새 아버지를 설득하셨다. 다음 날 어머니는 아버지 허락을 얻었다며 네 생각대로 하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이튿날 은행에 사직서를 냈다. 3년 만이었다. 동생들 학비도 대야 하고 집안도 살려야 할 장남이 그리 욕심 많은 짓을 했어도 너를 믿는다는 한마디 말로 넘어가신 어머니! 아 우리들의 어머니.
열심히 공부해보려 했지만 장학금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시를 열심히 써서 대학의 문학상도 받았고 그 상금으로 아버지에게 시계도 사드렸다. 퇴직금으로 2학기 등록금을 내고 나니 앞이 막막하여 1년 다닌 뒤 해군에 입대했다. 출동을 나가거나 정박기간에도 나는 열심히 시를 썼고. 제대 무렵에는 쓴 시가 제법 되었다.
1980년 복학 전에 쓴 시를 조태일 시인에게 드렸을 때 그 자리에서 읽은 후 창작과비평에 투고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드디어 내가 지녀왔던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투고했으나 가을호나 그 다음에 보자는 말을 듣고 좀 더 노력하고 있을 즈음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투고했던 잡지는 1980년 7월경에 폐간되면서 시인이 되는 일은 미루어지게 되었는데, 그 기간은 오히려 내 시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깨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정녕 공부하지 않은 역사나 민족의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투옥되고 존경하던 교수님들이 학교를 떠나는 일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민중들의 죽음을 듣고 알게 되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참된 민족 구성원이 되는 것이 더욱 더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느낌과 생각이 내 것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들의 것이 되지 못하면,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의 그 느낌과 열망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시가 아니라는 것, 강제로 분단된 조국이 통일을 이루기까지는 반쪽짜리 문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역사와 민족 혹은 민중의 자유와 평등이란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내 시가 그런 큰 주제를 제대로 용해시켜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많은 책들을 읽고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후 1985년에 민중시란 제목의 무크지에 시를 발표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되었고 그동안 해망동 일기, 야트막한 사랑,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환생 등 네 권의 시집과 시인의 길 사람의 길, 발효의 시학 등 두 권의 평론집을 냈다.
그동안 문인단체의 사무차장, 사무국장, 상임이사, 부이사장의 직책을 맡아 내나름 열심히 일했다. 어려서 해본 3년 동안의 은행업무와 대학 졸업 후 일했던 신용금고(현 저축은행) 3년의 실무경험이 유용했다. 또한 2003년에는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현기영 원장을 모시고 2년 6개월 동안 사무총장으로 일하기도 했고, 1996년에 숭의여대 교수로 임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막연하게 은행원이 되어야 앞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인생이 많은 곡절을 거쳐 전혀 다른 분야의 인생을 사는 모습으로 변모되었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크게 변한 것도 없는 것 같다. 겉모양은 달라도 내게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살고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보다 좋고 바른 삶이 보이면 서슴없이 그 길을 선택하여 성심을 다한다는 것, 그런 것의 연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아래 어디쯤에는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시던 어머님의 잔잔한 가르침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2007년 내 어린 시절 꿈을 꺾지 않으시고 존중해주셨던 어머니가 치매를 얻으셨다. 그동안 못한 도리를 하려고 2010년부터 고향 군산으로 이주했다. 역설적인 사실은 어머니와 살면서 내가 어머니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생생한 인생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어머니는 2014년에 돌아가셨지만 나는 또 안다.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계셔서 내가 아직 공부가 덜 되었고. 또한 미숙한 시를 숙성시켜 당대 사람들의 아름답고 숭고한 삶을 훌륭하게 형상화해야 한다는 것을 준절하게 깨우쳐주고 계시다는 것을.
초등학교 시절, 이탈리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라고 담임선생님에게서 배운 기억이 난다. 같은 반도국가이고 두 나라 국민들이 노래를 즐겨 부른다는 등. 그래서 이탈리아는 왠지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런데 1960년대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코리아’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을 연달아 경험하게 된다.
한국의 김기수는 19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지오반니 벤베누티(국내 스포츠 팬들에게는 애칭인 니노로 알려져 있다)에게 도전했다. 벤베누티는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금메달리스트로, 복싱 실력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당시 세계 동급 최강이었고 외모 또한 준수해 지금으로 치면 ‘꽃미남’이었다. 이탈리아 스포츠 팬, 특히 여성 팬의 우상이었다. 그런 벤베누티가 동양 여행 삼아 나선 타이틀전에서 무명의 복서에게 챔피언벨트를 내줬다. 이탈리아는 경악했다. 벤베누티의 아마추어 전적은 120승 1패이고 김기수에게 진 뒤에는 미들급으로 체급을 올려 세계 프로 복싱 양대 기구인 WBA와 WBC(세계복싱평의회) 챔피언을 지내는 등 이탈리아인들의 사랑을 계속 받기는 했다.
얼마 뒤인 그해 7월 19일 북한은 영국 미들스보로에서 1만8727명의 유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잉글랜드 월드컵 4조 마지막 경기에서 1934년, 1938년 대회 우승국이자 세계적인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이변을 일으켰다. 월드컵 역사는 이 경기와 1950년 브라질 대회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1-0으로 제친 경기를 깜짝 놀랄 경기 가운데 첫 손가락으로 꼽고 있다. 1라운드 탈락의 수모를 당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귀국길에 자국 팬들로부터 토마토 케첩과 잼 세례를 받았다.
한국인 이상으로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탈리아인들에게 충격을 안긴 김기수를 ‘스포츠 인물 열전’ 첫 번째로 꼽은 까닭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이겨 내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나아가려고 몸부림치던 1960년대 중반,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스포츠 팬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한국도 세계 최고(챔피언)’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첫 올림픽 챔피언(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은 이때로부터 10년 뒤에 나온다. 1960년대 후반, 김기수가 뻗는 주먹은 모든 이들에게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잊게 했다.
김기수는 1939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2세 때인 1·4 후퇴 때 남녘으로 와 전라남도 여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형에게 자극을 받아 복싱에 입문해 1957년 전국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 주니어 웰터급에서 우승했고 곧 이어 서울 성북고로 전학해 을지로 3가에 있는 한국체육관에서 복싱에 전념했다.
그 무렵 성북고는 복싱과 레슬링 등 격투기 종목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김기수는 아마추어 시절에도 뛰어난 복서였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열린 각종 국내 대회에서 연전연승했다. 그 사이 1958년 도쿄 아시아경기대회 웰터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했고 1962년 프로로 전향하기 전까지 88전 87승 1패의 놀라운 기록을 남겼다. 유일한 1패가 1960년 로마 올림픽 웰터급 2회전(16강)에서 벤베누티에게 당한 판정패였다. 비록 올림픽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 김기수는 아마추어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의 경기력을 발휘했고 1964년 도쿄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정신조,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 은메달리스트 지용주 등으로 이어지는 올림픽 복싱 메달리스트들의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프로에서도 연승 행진을 이어간 김기수는 1962년 12월 일본 원정 두 경기를 포함해 프로 데뷔 네 번째 경기에서 강세철을 판정으로 물리치고 국내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1965년 1월 일본의 가이즈 후미오(海津文雄)를 6회 KO로 누르고 동양 미들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김기수는 여세를 몰아 이듬해 벤베누티와 6년 만에 다시 만나 2-1 판정승을 거두고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이 됐다. 이 경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관중석에서 지켜볼 정도로 전 국민적인 관심사였다.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5만 달러가 넘는 벤베누티의 개런티를 줄 수 있었기에 한국인 첫 세계 챔피언이 나올 수 있었다. 1950년대에는 외환 사정이 더 나빠 축구 대표 선수들이 외상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제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김기수가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던 날 사진을 보면 챔피언벨트를 허리에 감은 김기수 옆에 있는 이방인이 눈에 띈다. 미국인 트레이너 보비 리처드다. 리처드는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도전이 확정되자 트레이너로 영입된 인물이다. 일본 프로 복싱계에서 활동하던 리처드는 뒷날의 거스 히딩크 같은 족집게 과외 선생이었다.
김기수는 리처드의 지도를 받으며 타이틀 매치를 준비했고 15라운드 내내 왼손잡이 이점을 살리면서 포인트 위주의 작전을 펼쳐 챔피언이 됐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히트 앤드 클린치(Hit and Clinch)’라고 표현했다. 짧은 기간이라도 외국인 지도자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66년 12월 스탠리 해링턴(미국), 1967년 10월 프레디 리틀(미국)을 상대로 타이틀을 방어한 김기수는 1968년 5월 3차 방어전에서 산드라 마징기(이탈리아)에게 판정으로 져 타이틀을 빼앗긴 뒤 그해 11월에는 미나미 히사오(南久雄)에게 판정으로 져 동양 미들급 타이틀도 내놓았다. 1969년 3월 리턴매치에서 미나미에게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을 되찾았으나 그해 9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식을 갖고 글러브를 벗었다. 프로 복싱 전적은 49전 45승 2무승부 2패다.
김기수는 은퇴한 뒤 사업가로 활동했다. 그가 서울 충무로에 개업한 챔피언다방은 복싱 올드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명소다. 행복한 은퇴 생활을 하던 김기수는 안타깝게도 한창 나이 58세 때인 1997년 세상을 떠났다. 김기수는 프로 데뷔 초기 일본에서 활동하며 귀화 제의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가 있다.
한국은 김기수의 세계 타이틀 획득이 기폭제가 돼 1970년대 홍수환과 유제두, 1980년대 유명우와 장정구 등 수많은 챔피언을 배출했고 WBA와 WBC에 동시에 세 명의 챔피언을 보유하기도 하는 등 세계적인 프로 복싱 강국으로 성장했다.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태어나기 훨씬 전,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프로 복싱 세계 랭커가 있었다면 쉽게 믿기 어려울 터. 프로 복싱 한국 최초의 세계 랭커 서정권은 전남 순천 갑부 집안의 4남 3녀 가운데 셋째로 1912년 태어났다. 플라이급과 밴텀급 선수로 일본 무대에서 활약하다 1932년 미국으로 건너가 WBC 밴텀급 6위까지 오르는 등 활약했으나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1936년 귀국해 세계 랭커였다는 긍지로 평생을 살다 1984년 타계했다.
서정권은 16세 때 동향의 마라톤 선수 남승룡(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과 함께 도쿄로 건너가 한국 최초의 올림픽 출전(1932년 로스앤젤레스 대회) 복서인 황을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때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서정권의 큰형은 두 소년이 복싱 선수가 되겠다는 것을 우려해 자신이 후원하던 황을수에게 “복싱에 대한 의욕을 단념하도록 혼내 주라”고 부탁했다. 황을수의 강펀치에 이가 흔들거리자 남승룡은 글러브를 놓았으나 서정권은 오기로 버티면서 형과 황을수가 놀랄 만한 투지와 기량을 보였다. 재능이 뛰어나다고 여긴 황을수의 지도를 받으며 복싱에 매진한 서정권은 일본을 석권하고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다.
글 신명철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그때 1974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에 사는 이모가 졸업 겸 입학선물로 독일제 만년필 로텍스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내 생애 처음으로 Made in Germany 제품을 손에 쥐었던 짜릿함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만년필은 잉크통이 고무 튜브가 아니라 빙빙 돌려서 쓰는 나사식이라는 사실이었다. 파랑 잉크가 환히 들여다보이는 풍경은 가히 시골 소년에게 신세계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아버지의 차지가 되었다.
글 소설가 김호경
일러스트 윤민철 작가
“중학교 1학년이 만년필을 쓰기에는 너무 어리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는 그 대신 ‘빠이롯트 파랑 잉크’ 한 병과 작은 조개가 박힌 ‘빨간 플라스틱 펜대’ 그리고 ‘10개들이 펜촉’을 사다주셨다. 그 필기구들을 책가방에 담아 학교에 가니 만년필이 없다 하여 꿀릴 일은 조금도 없었다. 한 반 60명의 아이들 중 빠이롯트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두세 명, 그보다 좋은 미제 파카 만년필을 가진 아이는 한두 명에 불과했다.
수업이 시작되면 초록색 걸상 위에 책을 펴고, 노트를 펴고, 오른쪽 위에 파란 잉크병을 놓고 그 옆에는 펜대를 놓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펜촉에 잉크를 찍어 필기를 했는데 문제는, 부산스러운 사내아이들인지라 잉크병을 쏟는 사단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잉크병이 쏟아지면 책상은 난장판이 되었는데, 가장 좋은 해결책은 선생님이 던져주는 백묵이었다. 쏟아진 잉크 위로 백묵을 굴리면 순식간에 잉크를 빨아들여 비록 책과 노트에 온통 얼룩이 남기는 해도 짝꿍이나 앞 친구의 교복에 잉크를 묻힐 일은 없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용돈을 모으고 모아 중앙전파사(그때는 전파사에서도 만년필을 팔았다)에 가서 로텍스 만년필을 샀는데 800원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버스요금이 30원 하던 시절이었으나 800원짜리 만년필은 그다지 비싼 것이 아니었다. 국산 빠이롯트 만년필은 최소 2000원이었다.
한때 만년필은 필수품이었으나 이제 시대의 소명을 다한 물건이 되었다. 또 사용하는 주체와 용도도 달라졌다. 학생에서 어른으로 이동했고 ‘필기’에서 ‘부의 과시’로 변한 것이다. 1천만원이 넘는 만년필이 심심치 않게 팔린다는 뉴스를 들으면 그 옛날 펜촉에 잉크를 찍어 공부했던 60년대생의 가난한 자화상이 떠오른다. 그래도 그 시절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지 않았던가?
김일은 아버지, 조용필은 형
아름다운 시절에 대해 논하자면 어느 세대가 가장 아름다웠는지 단순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50년대생은 너무 고달프고, 70년대생은 격변이 사라진 세대였고, 80년대생은 오늘날 88만원 세대가 된 현실에 비추어보면 60년대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격동적이고, 추억이 많은 세대다. 하지만 추억이 많다 해서 어찌 암울함이 없었겠는가?
10집 건너 한 집의 담벼락에 ‘반공방첩(反共防諜)’이 붙어 있고, 10월 유신과 긴급조치가 사람들의 삶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지 못하면 집에 가지 못하고, 오후 6시가 되면 국기하강식에 걸려 모든 동작을 멈추고 길에 허수아비마냥 우뚝 서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태극기에 경의를 표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독재와 압제도 강했지만 일상에서의 흥분도 강했다. 1년에 두어 번 세계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는데 전 국민을 흑백TV 앞에 불러모은 주인공은 그 위대한 김일이었다. 레슬링 경기는 이틀에 걸쳐 열렸는데 첫날은 B급 선수들이 싱글매치와 태그매치로 경기를 했다. 우리의 영웅 김일은 반드시 두 번째 날, 마지막 경기의 태그매치에 출전했다. 상대 선수는 대부분 일본, 아니면 미국에서 온 레슬러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흉측하고 반칙만 일삼는 괴기한 ‘놈’들뿐이었다. 복면을 쓰고,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고, 심판을 패대기치고, 팬티 속에 흉기(주로 포크)를 감추는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었다.
위기에 몰리면 심판이 안 보는 틈을 이용해 괴춤에서 포크를 꺼내 우리 선수를 마구 찔렀다. 국민의 분노가 극에 달할 무렵 김일이 등장한다. 그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국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니들은 다 죽었어!”
그러나 적들은 여전히 악랄하다. 김일은 코브라 트위스트에 걸리고, 매트에 쓰러지고, 심지어 피를 흘리기도 한다. 모든 국민이 탄식을 내지를 때 김일은 불사조처럼 일어나 비장의 무기를 꺼낸다. 상대 선수의 머리를 잡고 한방, 꽝! 박치기를 날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온 나라가 환호성으로 끓어올랐다. 그 이후 2002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그런 환호성은 우리나라엔 없었다.
그 통쾌함을 간직한 60년대생은 1979년 10·26 이후 길고긴 민주화 투쟁에 들어갔다. 민주화운동은 1950년대 생이 주축이 되어 시작했으나 그것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세대는 60년대생이었다. 지금은 그 이름마저 희미하게 잊힌 박종철(1964년생)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 민주항쟁이 절정에 달했고 6·29선언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은 갑작스레 끝났다. 사실 60년대생의 역사적 소명은 1987년 6월 29일에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쾌함과 더불어 즐거움도 많은 시절이었다. 매우 일요일 저녁 , , 으로 이어지는 골든 트리오 프로그램은 서민들에게 웃음과 격정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후반까지 학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단체영화 관람을 했다. 수요일 5교시 수업이 끝나면 운동장에 모여 학생주임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3열종대로 줄줄이 극장으로 향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면 가난한 집 아이들은 1년 내내 영화 한 번 못 볼 처지였다. 50원을 내고 , , , , 등을 보았는데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이소룡 영화였다. 를 보고 온 다음 날이면 막대기 2개를 잘라 쌍절곤이랍시고 만들어서 어설픈 무술을 선보이는 아이들이 꼭 있었다.
1977년 이 대 히트를 치면서 국민가수로 등극한 조용필은 이후 연예인 전성시대를 열었다. 사상 최초로 제주도 사투리를 넣어 을 부른 혜은이는 최초의 여자 국민가수였는데 두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대중문화는 오늘날처럼 활짝 꽃을 피우지 못했을 것이며, 30년 후쯤 등장하는 아이돌 가수들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김추자, 이은하, 최백호, 정태춘·박은옥 등이 있었고 맹인가수 이용복도 잊을 수 없는 명가수다. 60년대 생이 가장 잊을 수 없는 가수는 를 부른 샌드페블즈, 를 부른 활주로, 어느 날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을 열풍으로 몰아넣은 산울림이지 않을까?
‘교련’, 그리고 ‘약속다방’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은 흑 아니면 백이었다. 겨울에는 검정 교모에 검정 교복을 입고 검정 운동화를 신었으며, 여름에는 흰색 상의에 회색 바지를 입고 흰색 운동화를 신었다. 교련이 있어서 그나마 옷이 두 벌이었다. 1주일에 두 번 교련 수업을 받고 1년에 한 번 교련검열을 받았다. 대학 2학년까지 교련수업을 했는데 다행인 것은 군대를 3개월 면제해주었다는 점이었다. 그때는 군대가 30개월이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다방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다방!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단어다. 그곳에는 모나리자를 닮은 후덕한 마담이 있었고 엉덩이를 촐싹거리며 테이블 사이를 누볐던 허벅지 굵은 레지가 있었다. 또 푹신한 안락의자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뿌연 담배연기가 있었고 매캐한 유황냄새가 있었고 따뜻한 커피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청춘이 고스란히 있었다. 우리는 다방에서 친구를 만났고, 미팅을 했고, 데이트를 했고, 역적모의를 했다.
모든 역사는 다방에서 시작돼 다방에서 끝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육각 성냥통에서 성냥을 꺼내 수수께끼를 풀다가 간혹 호기를 부려 레지에게 커피를 사주곤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마담은 우리가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 어른이었다. 대한민국 모든 곳에 있었던 약속다방, 양지다방, 별다방, 난초다방, 호수다방, 궁전다방, 아리랑다방, 아네모네다방... 당신은 분명 이 다방 중 한 곳에서 시간을 때웠을 것이다.
이제 다방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우리세대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것이 바로 다방이다. 잃어버린 것은 또 많다. 위문엽서, 채변검사, 도시락검사, 대중가요의 양대 산맥이었던 남진과 나훈아, 오라잇~ 소리를 경쾌하게 외쳤던 버스 안내양, 명랑노래로 전국을 석권했던 듀엣 콤비 서수남과 하청일, 아나운서의 대명사였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원맨쇼의 왕 남보원과 백남봉, 전 세계 시청률 1위였던 , 20년 넘게 치열한 대결을 펼친 미원과 미풍, 자유를 구가했던 구수한 싱어송라이터 송창식, 유치찬란한 대중통속 잡지의 대명사 , 꿈과 희망을 키워주었던 소년잡지 , 느끼한 목소리로 레코드판을 돌렸던 유리상자 안의 그 남자 DJ(일명 판돌이), 독서의 갈증을 풀어준 마음의 양식 삼중당문고, 70년대 영화계를 이끈 미남과 추남 배우 알랭 들롱과 찰스 브론슨... 이 모든 것들이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들 모두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비록 ‘판타레이’ 일지언정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판타레이(panta rhei)’라고 말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뜻이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김종필)는 김영삼(YS), 김대중(DJ)과 더불어 1980~2000년대를 지배한 이른바 3김 중 1명이었다. 386세대와 떼려야 뗄 수 없었던 JP는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싫든 좋든 세상은 변한다.”
그 변화의 중심에 60년대생이 오롯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름다운 영광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김호경(金虎卿) 작가
37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인 1997년 제21회 오늘의작가상에 장편 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희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장편 , , 여행에세이 , , 스크린셀러 , 등을 펴냈다.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가는 인구가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통계청과 농림축산식품부가 밝힌 귀농·귀촌인 통계를 보면,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는 3만2424가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12년에 비해 20% 정도 늘어난 것이다.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화되면서 앞으로 귀농·귀촌인구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도시의 경쟁에 지친 사람들은 시골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꿈꾼다. 그러나 시골 생활은 결코 낙원이 아니다. 낙후된 의료시설과 허술한 치안 속에서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도시에 있을 때보다 경제적으로 덜 풍족한 생활은 필연적이다. 원주민의 텃세도 결코 우습게 넘길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도시보다 더욱 힘겨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시골인지도 모른다. 시니어 전문 미디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전국의 귀농귀촌 현장을 돌아보며 성공적인 귀농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지 그 방안을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본다.
한 집 걸러 한 집 꼴로 거리마다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이 즐비한 서울. 이에 반해 지방의 경우 이같은 커피전문점들은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지방하면 다방이나 옛날식 커피숍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이러한 인식을 기분 좋게 깨부순 이들이 있다. 바로 전남 장흥에 위치한 카페 ‘원앤식스’의 이영중(32) 바리스타(Mr.One)와 이정원(40) 쇼콜라이티에다.
2009년 장흥군 건산리에 문을 연 ‘원앤식스’는 5년여 만에 장흥군 주민들을 감미로운 커피 향으로 매료시켰다. 직접 볶은 원두를 사용하고 초콜릿과 와플 등을 손수 만들어 판매하는 등 일반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과 풍미가 이곳만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처음엔 생소하게 느꼈던 주민들도 점차 커피를 알아가고 즐기기 시작하면서 ‘원앤식스’는 장흥군에 없어서는 안 될 커피문화의 사랑방이 됐다.
‘원앤식스’의 성공은 비단 커피문화의 전파뿐만 아닌, 귀농·귀촌에 대한 새로운 사례를 만들었다.
은퇴 이후 지방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것만이 귀농·귀촌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이들에게 이들 젊은이의 새로운 시도는 귀농·귀촌에 대한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커피에 대한 열정과 남다른 전략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원앤식스’의 의미가 남다르다고 들었다. ‘원앤식스’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를 부탁한다.
A. 이영중
"요즘은 대부분 손님들이 입소문으로 먼저 듣고 확인 차 물으시죠. '원앤식스가 무슨 뜻이에요?' 매번 듣는 질문이지만, 항상 웃음이 먼저 납니다. 저희 형제가 1남(ONE) 6녀(SIX)거든요. 그래서 원앤식스라고 이름을 짓기도 했지만, 가용 로스팅 포인트(시나몬 로스팅~프렌치 로스팅)에 따라 다양한 커피 향미가 느껴지듯 다채로운 카페의 형태를 지향한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단 먼저 말씀드린 내용을 대부분 기억하고 이제는 단골손님들이 홍보해 주시죠. 원앤식스는 2009년 장흥을 시작으로 서울 성수동, 전남 강진군·영암군에도 포진하고 있습니다. 2년여 간 직영으로 운영하던 서울 성수동 매장을 제외한 강진점과 영암점은 커피 추출 테크닉과 다양한 메뉴 개발을 공동으로 진행·운영하고 있습니다.“
Q. 카페나 커피 문화가 생소할 수 있는 장흥에 내려오게 된 이유와 당시의 전략은 무엇이었나?
A. 이영중
"2009년 당시만 해도 장흥군의 커피문화라는 것은 다방이라는 곳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해에만 해도 15곳 이상 되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커피전문점을 연다는 것은 '저 집 언제 문 닫나 내기할래?',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 마시지 누가 3000~4000원 주고 커피를 마셔?'라며 비웃음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절대 망하진 않을 거야!'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전에 서울 강남권의 대형 프랜차이즈에서 매니저를 했던 경력과 개인 카페와 레스토랑에서도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로스팅분야나 라떼아트, 핸드드립까지 다방면으로 이름난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수학했고, 장흥군에 처음부터 로스터리 카페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2009년 말 수제 와플까지 시작하면 강진군·보성군 등 인근 지역에까지 입소문이 돌았고, 우격다짐 식이었던 저희들을 좋게 봐주시고 찾아주신 손님들께 5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 감사해 하며 지냅니다. 커피에 대해서는 새하얀 백지상태였던 이곳에 커피로 한 방울 한 방울 물들이다 보니 이 작은 동네에 이젠 커피집이 10여 곳이 넘습니다.”
Q. 귀농·귀촌하면 나이 드신 분들이 지방에 내려가 농사짓는 모습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원앤식스’의 경우엔 귀농귀촌에 대한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다. 귀농·귀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A. 이정원
"장흥에서 그런 게 될까? 라고들 하면서 시도조차 하지도 않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수요가 도시만큼은 많지는 않지만 꾸준한 욕구가 있습니다. ‘귀농했으니 난 농사를 지어야지’만 생각하지 마시고, 대도시의 다양한 콘텐츠를 이곳에서 구현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Q. 원두를 볶는 일부터 초콜릿·아이스크림·브라우니 등을 손수 만든다고 들었다. 메뉴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개발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한 노력은?
A. 이영중
"‘학교 다닐 때 카페의 열정을 쏟았다면 아마 서울대학교에 가지 않았을까?‘하며 웃곤 합니다. 커피나 초콜릿 등 카페의 식음료는 생각보다 트렌디 합니다. 그래서 Cafe Show나 Salond de Chocolat 같은 커피나 초콜릿 관련 박람회는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그때마다 서울과 지방간의 문화 차이를 고려해 접목할 아이템을 취사선택하기도 하거나 조금 비틀어 적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수제 초콜릿은 국내에서 이제 시작 단계인 아이템입니다. 운 좋게도 작년 말 스위스 펠클린사의 세미나에 초청돼 스위기 현지에서도 초콜릿을 공부하고, 전국의 쇼콜라티에들과 교류도 활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보면 만 5년을 카페에만 불태웠는데도 아직도 저희의 열정은 들끓고 있나 봅니다."
Q. ‘원앤식스는 OOO이다’라고 표현했을 때, 무엇으로 불리고 싶은가? 또, 원앤식스가 추구하는 방향과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한가?
A. 이정원
"‘원앤식스는 가족이다’라고 하고 싶네요. 나도 마시고, 우리 가족도 마신다는 생각으로 좋은 식재료 사용을 기본이자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때문에 원앤식스는 ‘가족이다’가 가장 어울릴 것 같습니다. 저희가 5년간 카페 관련 내공을 꽤 많이 쌓았습니다. (하하하) 그래서 이제는 그 내공을 표출해보려고 합니다. 조만간 장흥 매장 확장 계획에 있고, 그 이후에는 대도시를 섭렵하고 나가야겠죠? 아직은 100% 논의 중이기만 합니다."
Q. 요즘 100세 시대라는 말이 있다. 아직 젊지만 카페 이외에 인생2막에 대한 계획이 있다면?
A. 이영중
"저는 개인적으로 건축을 공부하다 커피에 빠져 건축을 그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성수점이나 강진점·영암점 모두 제가 손수 작업했습니다. 현재 제가 꿈꾸는 미래는 카페 사업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 관련 일을 하는 것입니다. 카페 컨설팅부터 인테리어까지 하는 그런 일을 꿈꾸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A. 이정원
"‘무언가에 미치면 결국엔 미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열정으로 카페 일과 초콜릿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도시에서도 저희의 노력이 쌓여 커피 분야에서도 초콜릿 분야에서도 장인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난해 M.net ‘슈퍼스타K 시즌 5’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가 있었다. 김대성 스테파노(60)다. 당시 20년 전 아내와 사별한 그의 삶과 그가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노랫말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많은 시청자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아내와 사별하고 어느덧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다. ‘슈퍼스타K 시즌5’ 출연 당시 털어놓지 못했던 그와 아내의 만남과 결혼 그리고 사별의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당초 무거운 분위기의 인터뷰가 될 것 같다는 예상과는 달리 매우 담담한 어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Q. 첫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요?
A. 군대 전역 후였어요. 당시 친구들과 조선 호텔 건너편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셨어요. 아마 술집이름이 4시즌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가 81년이었죠. 친구들과 거나하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찰나에 빨간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유난히 눈에 띄는 거예요. 첫눈에 반한거죠. 무작정 같은 버스에 올라타서 대뜸 말했죠. “만납시다”라고요. 그러더니 아내가 저를 “당신 미쳤어요?”라며 미친놈 취급을 하더라고요.
Q. 그러면 거기에서 만남이 끝난 거예요?
A. 아니요. 끈질기게 집 앞까지 쫒아갔어요.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으니 저희 집 전화번호를 주었죠. 왠지 전화가 오지 않을 것 같아서 3월 1일 1시에 명동에 있는 서울 다방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나와 달라고 부탁했었어요.
Q. 결국 다방에서 만남이 성사 됐나요?
A. 아니요. 공교롭게도 2월 27일에 급성 맹장수술로 다방에 나가지 못하게 됐어요. 맹장 수술을 하고 나서도 계속 다방 생각만 나더라고요.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친구를 보냈어요. 아내가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확인하라고 말이죠. 조마조마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2시쯤 전화가 오더라고요. 떨리는 가슴 부여잡고 전화를 받았죠. 안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하하. 그래서 친구에게 왔다 갔다는 쪽지나 남겨놓고 돌아오라고 부탁했어요.
Q. 어떻게 보면 첫눈에 반해 강렬하게 대시했는데, 실패로 돌아간 거네요?
A. 그렇죠. 그런데 이상하게 잠깐 스쳤을 뿐인데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첫 만남 당시 ‘망원동에 사는 조씨’라는 정보를 알게 됐는데, 그 정보만 가지고 무작정 망원동으로 갔어요. 당시 망원동에서 모든 버스가 지나다니던 정류장이 ‘홀트아동복지회’였는데 그녀가 그곳에 올 것 같아서 열흘간 무작정 기다렸어요. 근데 보이지 않더라고요.
Q. 대단한 열정이네요. 그렇게 기다렸는데도 보이지 않았다면, 그냥 한번 보고 지나친 인연 아니었을까요?
A. 그렇죠. 그렇게 잊혀져갔죠. 오랜 기간 본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금방 잊혀져갔어요. 그런데 그해 가을 선배가 운영하던 명동 구둣가게에 갔는데 우연히 ‘망원동 조씨’와 비슷한 여자를 마주쳤어요. 구둣방에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던 거에요. 긴가민가해서 선배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봤죠. 혹시 “‘조씨’냐”고 하니까 맞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망원동’ 사느냐”고 물어보니까 맞다고 하길래 확신이 들었죠. ‘아! 이게 인연인가보다’라고요. 그 이후 아내에게 많은 것을 물어봤었죠.
Q. 그러면 첫 만남 당시 왜 다방에 안 나왔다고 하던가요?
A. 당시에 불량해 보여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맹장 수술이후 망원동에서 기다렸던 열흘 있잖아요? 그 때 망원동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고 하더라고요. 결국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하하
Q. 그 이후 연인 단계로 발전한 건가요?
A. 그렇게 만난 이후에 제가 엄청나게 대시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저를 믿지 못하더라고요. 저를 집안의 재력만 믿고 ‘놀고먹는 놈’처럼 생각돼서 미래가 불투명해 보였던 거죠. 당시에는 정말 그랬어요. 음악에 미쳤었죠. 음악도 지금과는 달리 메탈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불량해 보였을 거예요. 아내는 포크음악을 좋아했거든요. 아내가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놀기만 좋아하는 ‘베짱이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고. 그런데 이후 만남이 지속되면서 연인단계로 발전하는데 성공했어요.
Q. 연애를 하면서 데이트는 주로 어디서 했나요?
A. 사실 데이트는 별 것 없었어요. 당시 제가 하던 출판사에 아내가 많이 놀러 와서 출판사에서 데이트를 많이 했어요. 아내의 고향이 경기도 여주인데 여주 남한강에서 데이트를 즐겼던 것도 많이 기억에 남네요.
Q. 그렇군요. 그렇다면 결혼까지 순조롭게 진행된 건가요?
A. 사귀면서까지 아내는 절 많이 믿지 못했어요. 음악이라는 것이 사실 소득이 불안정적이잖아요. 그런 것에 대한 불안감에서부터 제 모습까지 믿기지가 않았나봐요.
Q. 그런데 결혼은 성공했잖아요. 결혼을 설득하는데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었나요?
A. 아내의 친구들을 포섭했어요. 아내의 친구들에게 최대한 괜찮은 남자로 보이려고 노력했죠. 그렇게 하니 아내의 친구들이 도와주더라고요. 아내를 설득도 해주고 말이죠. 괜찮은 남자인 것 같으니 결혼하라고 말이에요. 그렇게 아내의 친구들이 도와준 결과 그 이듬해 결혼에 골인하게 됐어요.
Q. 결혼 생활은 어땠나요?
A. 결혼 후에 지적인 수준 차이를 많이 느꼈어요. 문학소녀였던 아내와 나 사이에 많은 갭(차이)가 존재했죠. 아내는 결혼을 할 때도 혼수대신 제가 생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책 1000권을 가지고 들어왔어요. 문학적으로 많은 공부를 했던 집사람이었기 때문에 제가 작곡이나 작사하는 데에도 많은 영감을 줬어요.
Q. 음악적으로 어떤 영감을 받았나요?
A. 사실 젊은 시절에는 딥퍼플(Deep Purple)과 레드제플린(Led Zeppelin)이 하는 하드락 장르를 좋아했어요. 록커의 길을 걸으려 했던 제 삶을 180도로 바꿔준거죠. 아내가 알려준 레오나르도 코헨(Leonard Cohen)의 ‘버드 온 더 와이어(Bird On The Wire)’를 듣고 충격에 빠졌어요. 정말 새로운 음악에 눈을 뜬 계기였습니다. 이후 포크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Q. 그런데 젊은 시절 음악의 길을 포기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입사했습니다. 아내가 음악하기를 반대한 것인가요?
A. 아니에요. 아내는 제가 음악 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응원을 해줬지요. 그런데 아내가 항상 이야기한 것이 음악하는 것도 좋지만 가장으로서 집안은 먹여살려야한다고 말이죠. 당시 수입이 변변치 않았거든요. 그래서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입사하게 된 겁니다.
Q. 무난한 결혼생활을 하시다가 아내가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때 심정을 말해주실 수 있나요?
A. 아내가 30대 초반이던 그 당시 위암 선고를 받았었죠. 굉장히 두렵고 무서웠어요. 저도 함께 죽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요. 정말 힘들어하고 있을 때 아내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 말을 듣고 더 담담히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는 이곳에서 멋있게 죽을 준비를 하고, 당신은 이곳에서 아이들과 잘 살 준비를 합시다.”
Q. 아내를 떠나보내고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외로움이 엄습할 때 새출발을 생각해 본 적도 있나요?
A. 사실 다른 여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년에 서너번 저를 찾아와요. 꿈속에서 말이죠. 잊혀질만하면 찾아옵니다. 꿈에 한번 나타나면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서 그 여파가 남아있어요. 서너달에 한번씩 그러니 못 잊는거죠 뭐. 어느 날은 미니쿠퍼를 끌고 와서는 “드라이브 가자”고 하더라고요. 정말 생생했어요. 제 모습은 이제 60대 아저씨가 됐지만, 꿈속에 아내의 모습은 아직도 20년전 그대로에요. 그런데 그렇게 한번 나타나면 힘이 되더라고요. 꼭 어렵거나 힘든 시기에 나타나서 힘을 불어 넣어주고 가요.
Q. 하늘에 있는 아내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A. 한마디로요? 한마디로는 안되죠. 할 수 있는 모든 미사여구를 다 붙여주고 싶어요. 글도 많이 쓰고 문학적 조예도 깊어 제 삶을 바꿔놓았으니 말이죠. 또 이제는 저에게 빼놓을 수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새로움을 알려주었습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여자입니다. 한마디로는 힘들어요.
Q.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할 말이 있다면?
A. 결혼기간동안 잘 못해준 것이 너무 후회돼요. 아내의 정신 세계를 못 따라 갔던 것 같아요. 사실 30대, 40대 때보다 요즘이 더 보고싶어요. 살아 생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못했던 것 같아요. 이제야 말해주고 싶어요. “사랑해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