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 확산으로 해외여행 수요가 감소하고 한국을 찾는 중국인관광객도 줄면서 관련 업종 기업들의 피해가 불가피해졌다. 우한 폐렴 확산의 직격탄을 맞은 업종은 여행, 숙박, 음식점 등으로 해당 기업들은 매출 감소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한·KB국민·KEB하나·우리은행 등 국내 시중은행이 우한 폐렴 확산으로 피해를 겪고 있는 중소기업을 위해 금융지원을 실시해 눈길을 끈다.
신한은행은 해당 업종 기업들 중 자금 운용에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업체당 5억 원 이내로 총 1000억 원 규모의 신규 대출을 지원한다. 피해규모를 감안해 필요 시 총 지원한도를 증액할 예정이다.
해당 기업들의 기존 대출에 대해 분할상환 기일이 도래하는 경우 상환 일정을 유예하고 신규 및 연기 여신에 대해 최고 1.0%까지 금리를 감면한다.
KB국민은행도 관광, 여행, 숙박, 공연, 외식 등의 업종을 영위하는 중소기업 중 해외여행 수요 감소 또는 단체 예약 취소 등의 사유로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을 지원한다.
긴급 운전자금이 필요한 기업에게는 피해규모 이내에서 업체당 최대 5억 원 한도로 신규 대출을 지원하며 최고 1.0%포인트의 금리우대 혜택를 제공한다.
피해기업 중 만기가 도래하는 대출금을 보유한 경우에는 추가적인 원금 상환 없이 최고 1.0%포인트 이내에서 우대금리를 적용해 기한연장이 가능하다.
하나은행은 여행업, 숙박업, 음식점 등 업종의 중소기업, 개인사업자 등 기업 손님에 대해 총 3000억 원 한도로 업체당 5억 원 이내의 긴급경영안정자금을 신규 지원한다.
또 해당업종 영위 중소기업의 기존대출 만기도래 시 원금 상환 없이 최장 1년 이내로 대출 만기 연장을 지원하고 분할 상환금의 경우 최장 6개월 이내로 상환을 유예한다. 아울러 최대 1.3% 이내의 금리 감면을 지원한다.
우리은행도 신종 우한 폐렴 확산으로 피해가 예상되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위해 1000억 원 규모의 특별자금을 지원한다.
우리은행은 중국 관련 수출입 중소기업과 음식, 숙박, 관광업 등을 영위하는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경영안정을 위한 대출신규와 무상환 대출연장을 각 500억 원 규모로 돕는다. 대출금리는 최고 1.3%포인트까지 우대하며 외환수수료 등을 우대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우한 폐렴 사태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을 적극적으로 금융 지원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경제 전반으로 위험이 전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며 “피해 기업의 유동성 확보, 금융비용 절감 등을 도와 지속적으로 따뜻한 금융을 실천하겠다”고 말했다.
해마다 6월이 되면 우리 가족은 60년 전 납북된 시아버지를 떠올리며 착잡한 마음에 휩싸이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 뒤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는 북으로 납치됐다. 여태껏 한 번도 시아버지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살아 계셨다면 지금 아마 100세는 넘기셨을 텐데. 살아계실 거라는 기대를 뒤로하고 5년 전 향년 95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시어머니 기일에 맞춰 시아버지 제사도 지내고 있다.
시부모님은 일제 강점기 동경에서 유학하던 중에 만났다. 당시로써 보기 드물게 자유연애하고 결혼한 신식 커플이었다. 시어머니는 조선말 높은 벼슬에 재력까지 겸비한 외할아버지 덕분에 일본 음악대학에서 공부하셨다. 많은 여성이 한글 한 자 못 깨우치고 까막눈으로 살던 시절, 만석꾼의 막내 외손녀였던 시어머니는 몸종 하나 데리고 오빠가 유학 중인 동경으로 쫓아간 것이다. 그리고 일본 어느 전철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시아버지, 그리고 떠들썩한(?) 연애! 결국 자살 소동까지 벌이며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한 당찬 개화기 신여성이었다. 소문난 잉꼬부부로 서로 다른 부분을 인정하며 현명한 사랑을 하셨다. 외출해 나갔다가도 식성이 다른 탓에 서로 좋아하는 식당에서 각자 먹고 다시 만났다는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두 분 다 개성 강하고 깨어있던 연인이자 부부였다.
이쯤해서 시아버지의 외모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봐도 보기 드물다 싶을 정도로 미남이기 때문이다. 내 경우 시아버지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을 못 하지만, 시어머니 친구들 증언에 의하면 유명한 꽃미남이란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신혼 초 이화여자대학교 근처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는데 미남 사는 집으로 소문이 났었단다. 지나가던 이대생들이 열린 대문 사이로 빠끔히 들여다보았다는 등의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3남 1녀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가 싶었더니 한국전쟁이 터졌다. 처음에는 원래 시아버지가 아닌 시어머니가 인민군에게 잡혀 당시 서울 국립도서관에 갇혔다. 이 소식을 듣고 시아버지가 찾아가셨다가 그 자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셨다고 했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공무원 계급 납치 작전으로 시아버지가 인민군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시아버님은 당시 통계청에서 일하시고 계셨다.
당시 시어머니 나이 서른여섯. 부잣집 딸로 태어나 이 땅의 전형적인 양반가 부인이었던 시어머니는 젊은 나이 남편을 빼앗겨 혼자되시고 말았다. 요즘 같았으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 나이에 4남매를 혼자 키우고 교육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살아생전 말씀하셨다. 그렇게 힘든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시어머니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은 아버지를 닮아 인물 좋고 똑똑한 자식들이었다. 언젠가 통일이 돼서 시아버지를 만나면 ‘당신 없어도 내가 이렇게 애들을 잘 키웠어’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도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납북자 가족은 심적인 고통 이외에도 또 다른 것이 있었다.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신원조회를 당해야 했다. 특히 1970년대 언론계에서 직장 생활을 했던 남편은 해외 출장 때마다 출국 절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혹시라도 외국 출장에서 납북된 아버지와 연락을 할까 봐서 정부 당국에서 의심을 했다. 우리나라의 해외여행 자유화되기 전이라 일반인의 해외 방문 힘든 마당에 납북자 가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머님은 “납북된 것도 억울한데 나라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의심까지 해야 하냐?”며 무척 억울해하셨던 기억이 난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이후 속속 낭보가 전해진다. 815 이산가족 상봉이 추진되고 있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 전사자 유해 송환 절차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국내외적인 훈풍과 함께 납북 피해 가족에 대한 정부로부터 합당한 위로나 배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은근히 기대해 본다.
3년 전, 공기업 지방 지점장을 할 때 일이다. 서른 살 후반인 사무실 여직원 K양이 나에게 자동차 구매에 대한 자문을 구해왔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나와 근검절약하며 어렵게 살아온 K양이었다. 집도 회사에서 가까웠기에 자동을 왜 사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 물어봤다. 자동차를 사면 주로 어디에 쓸 거냐고 말이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저 아니고요. 남동생이 쓸 자동차예요.”
동생은 결혼도 했고 자동차도 가지고 있는데 차를 바꿀 계획이라고 했다. 이미 자동차를 사 본 경험이 있는 동생이 굳이 누나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일까? 나로서는 황당했다. 결혼도 했다면서 아내가 아닌 누나와 상의 하냐고 물었다.
“지점장님! 다 아시면서요. 동생 속마음은 누나에게 돈 보태달라는 거지요.”
결혼하지 않은 누나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간접적으로 한 것이란다. 사실 누나가 정해주는 자동차는 참고만 하고 동생 부부가 상의해서 살 거라고 했다. 지금까지 아버지 기일이 다가오면 제사 장보기부터 제사상 차리기까지 도맡아온 그 집안 장녀 K양. 딸이지만 맏이로서 집안일을 챙기고 결혼까지 한 동생까지 돌보고 있었다. 아름다워 보이는가? 나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생이 마냥 마마보이로 미숙아로 보여 K 양이 안쓰러웠다. 누나가 동생을 도와주는 행동이 형제간 우애라기보다 독립과 자립심을 갉아먹는 일처럼 느껴졌다. K양에게 말했다. 동생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게 하라고 말이다. 앞으로 K양도 결혼해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독립 못 한 동생이 자꾸 눈앞에 얼씬거리면 인생이 점점 비참해진다고 조언했다. 누나에게 의지하지 못하게 따끔하게 말하라고 했다. 그 말을 직접 하기 어려우면 내가 대신 말해줄 테니 데리고 오라고도 했다. 며칠 후 K양에게 물어봤다. 차종 고르는 것을 비롯해 동생 집안일에 관해서 상의하지 않기로 얘기했단다. 대신 이번에 5백만 원을 도와줬다고 했다.
몇 해 전, 방송에서 자식이 게임중독에 빠져 울고불고하는 부모의 일화를 본 적이 있다. 일이 바빠 어린 자식을 잘 돌보지 못하는 대신 돈만 열심히 손에 쥐여준 것이다. 부모로서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게임 중독자가 돼 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 자식은 부모 주머니가 화수분인 줄 알고 크기 마련이다. 성장을 하다가 독립심을 길러야 하는 시점을 놓쳐버린다면? 다 큰 자식이건 어린 자이건 부모 등에 빨대 꼽고 계속 부양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K양처럼 형제간에 돈을 잘못 다루면 원수가 되거나 더 불행해질지도 모른다. 나이에 걸맞는 독립심을 가져야 제대로 된 성인으로 살 수 있다. 그저 도와만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의 인생 경험이다.
빨리 늙어가고 있는 우리나라가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지난 2000년 ‘고령화사회’로 진입한 지 불과 17년 만의 일이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민등록인구는 약 5175만 명으로 이 중 65세 이상 어르신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의 14.02%인 725만 명으로 기록됐다. UN에서는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사회’, 14% 이상은 ‘고령사회’, 20%를 넘으면 ‘초고령사회’로 구분하고 있다. 이처럼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늘어나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상속 문제’다. 고도성장기 때 젊은 층은 자산을 축적할 기회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유산을 가지고 친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자매끼리 벌이는 분쟁이 해마다 늘어가고 있다. 또한 자식들에게 자산을 효과적으로 이전해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특히 초고령 국가 일본에서는 ‘老老상속’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는 노인이 된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더라도 자신을 부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일본 노인들이 죽을 때까지 자산을 자식에게 증여하지 않으면서 생겨난 신조어라는 점에서 씁쓸하기만 하다. 상속 시 발생하는 큰 문제는 ‘세금 줄이기’와 ‘상속인들 간 분쟁 방지’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5070세대가 앞으로 다가올 유산 분배와 관련해 자녀분쟁을 방지하고 효과적으로 세금을 줄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상속인들 분쟁 방지를 최소화하는 방법
상속권 문제
상속이나 증여 관련 문제는 자신과 상관없는 문제로 인식하고 관심 없어 하는 경우가 많다. “가진 재산도 별로 없는데 무슨 상속, 증여?”라며 반문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속과 증여는 평생에 한두 번 정도 발생하고, 증여의 경우는 당장 세금 문제가 생기다 보니 무관심하거나 준비 소홀로 이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 소홀은 가족 간의 분쟁은 물론이거니와 평생 일궈온 사업체가 없어지는 경우(가업상속) 또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재산이 분배됨으로써 분쟁 방지와 절세(節稅)의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속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은 ‘상속권’ 문제다. 상속인은 누가 되고 상속재산을 얼마를 분배받을 수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 민법은 상속의 방법을 ‘유언상속⇒협의상속⇒법정상속’의 순서로 정하고 있다. 피상속인의 유언이 있는 경우 유언대로 상속재산을 집행하면 된다. 하지만 유언이 없는 경우라면 상속인들끼리 협의를 하게 되고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법정지분대로 상속받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유언, 협의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법정상속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속순위는 어떻게 될까? 배우자와 자녀(직계비속)가 1순위로 상속재산을 균등분할하되 배우자에게는 50%를 가산하게 된다. 가령 배우자와 아들, 딸을 두고 있는 홍길동씨가 10억원의 재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고 가정하자. 남겨진 아내는 4억2000만원(10억원×1.5/3.5), 아들과 딸은 각각 2억8000만원(10억원×1/3.5)을 분배받게 된다. 다만 배우자가 없는 경우는 자녀가 동일하게(각각 5억원씩) 분배받게 된다. 2순위는 배우자와 직계존속, 3순위는 형제자매, 4순위는 4촌 이내 방계혈족으로 순위가 순차적으로 정해진다. 다만 상속순위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배우자는 1순위와 2순위 상속인이 있을 경우엔 단독이 아니라 공동 상속인이 되고, 직계비속과 존속이 없을 경우에만 단독 상속인이 된다는 점이다.
상속인의 ‘유류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유언의 자유가 존재하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피상속인은 자신의 뜻에 따라 재산을 특정인에게 증여하거나 처분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남은 유가족은 재산을 상속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때 유류분을 잘 챙겨야 하는데, 유류분은 상속재산 중 상속인에게 돌아가야 하는 최소한의 법정비율의 몫을 말한다.
유류분은 법정지분을 기준으로 배우자/직계비속의 경우는 1/2, 직계존속과 형제자매는 1/3이다. 그럼 간단하게 유류분을 계산해보자.
예를 들어 배우자가 없는 홍길동씨가 자신의 재산 6억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고 가정해보자. 유가족으로는 아들1, 2와 딸이 있다. 그런데 홍길동은 아들1, 2에게는 각각 3억원을 남겨주고 딸은 출가외인이라며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이런 경우 유류분은 어떻게 계산하고 딸은 누구에게 유류분을 청구할 수 있을까?
① 먼저 6억원이 상속재산인 경우 아들1, 아들2, 딸의 법정상속지분은 2억원이다.
② 유류분은 법정상속지분의 1/2이기 때문에 1억원
③ 따라서 딸은 아들1, 2에게 ‘1억원×3억원/6억원=5000만원’을 각각 유류분 반환청구할 수 있다. 참고로 유류분 반환청구는 만법상 상속개시일로부터 10년 이내, 상속개시 사실 및 증여나 유증 사실을 안 때로부터 1년 안에 청구하면 된다(민법 제1117조 소멸시효).
위의 사례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유류분 계산 방법을 제시했지만, 실제의 유류분 계산은 복잡하다. 유류분 부족액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피상속인의 재산이 상속인과 그 외의 사람에게 어떻게 분배(증여, 유증)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또한 유류분 반환청구 소송은 경우에 따라서 복잡한 재산관계가 얽히거나 부수적인 쟁점사항(세금 등)들이 많기 때문에 반드시 변호사와 세무사의 도움을 받아 충분한 검토를 거쳐야 한다.
현명하게 유언장 작성하는 방법
유언을 통해 유가족의 ‘유류분’을 고려만 한다면 피상속인의 의사대로 재산을 분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유언은 민법에서 정하고 있는 5가지 방식(유언의 방식 참조)에 의해서만 유효하기 때문에 작성 시 신중을 기해야 한다.
특히 자필증서의 경우 유언서 전문, 연월일, 주소, 성명을 자서, 날인하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
과거 사회복지사업을 했던 A씨의 경우다. 2003년 11월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 A씨의 금고에서 자필로 작성된 유언장이 발견되었다. 유언장에는 ‘유고 시 본인 명의의 부동산 및 금전신탁, 예금 전부를 B대학에 기부한다’고 적혀 있었다. A씨의 유족들은 유언장에 날인이 없으니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B대학은 자필로 작성된 만큼 날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고인의 의사를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례에서 120억원은 누구에게 귀속되었을까? 법원은 고인의 자필증서가 분명하지만 자필증서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유언장은 무효이고, 학교가 아닌 유족들이 상속재산 전부에 대해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는 유언장은 엄격한 형식에 따라 작성되어야 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자필증서에서 날인의 경우는 유언자의 인감도장뿐만 아니라 막도장도 무방하지만 사인은 안 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처럼 유언의 까다로운 요건 때문에 최근에는 유언대용신탁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유언대용신탁은 가입자가 살아 있을 때는 자산을 운용해 수익을 돌려주고, 사후에는 상속인에게 재산을 이전하는 신탁상품이다. 그리고 살아생전에 재산을 분할함으로써 상속재산의 원만한 분배로 사망 후 재산분할에 관한 분쟁을 방지하고, 미성년자나 장애를 가진 상속인의 상속재산도 보존이 가능하며, 유언서 작성 및 복잡한 법적상속 절차를 생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 폭이 점점 커지고 있다.
상속·증여세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
2017년 국세통계 1차 공개자료에 따르면, 2016년 상속세 신고세액은 2조3000억원, 상속세 신고 건수는 6217건으로 상속인 1인당 평균 신고세액은 3억7000만원으로 나타났다. 상속세는 6개월 안에 신고하고 납부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 부담스러운 금액일 수밖에 없다. 상속세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상속세 기일(6개월)을 넘기지 마라
상속이 발생하면 고인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재산분할이 원활하지 않아 상속분쟁이 장기화되는 경우 상속세 납부기일을 넘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하지만 재산분배 등이 확정되지 않더라도 신고기한 내에 상속세를 신고해야 가산세 불이익(무신고 가산세 20%)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신고기한 내에 상속세를 납부할 경우 세금의 7%를 공제해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기한(6개월)을 넘길 경우 세금을 27% 이상 더 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기한 내 미신고 시 불이익 (상속 개시월의 말일로부터 6개월 이내)
-세액공제 불가 : 6개월 내 신고 시 산출세액의 7% 공제
-미신고 가산세 : 기한 내 미신고 시 산출세액의 20% 가산세
-납부 불성실 가산세 : 고지기한 내 납부 못할 경우 매년 10.95% 가산세
결국 1년만 늦어도 추가적인 부담이 약 37.95% 늘어나는 것이다.
줄 거면 빨리 줘라
상속세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평소에 피상속인의 재산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10년 단위로 자녀, 배우자에게 증여하는 방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배우자에게는 6억원, 성인 자녀에게는 5000만원까지 증여세가 부과되지 않는다. 특히 소득이 없는 자녀에게 사전증여를 한다면 향후 자금출처를 만들어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피상속인이 사망하면 최소 10억원은 상속공제(배우자공제 5억원, 일괄공제 5억원)가 되기 때문에 그 이하의 금액은 상속세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세대생략 이전(移轉)’ 고려해볼 만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정상적으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할아버지나 증조부가 세대를 건너뛰어 손자나 증손자에게 재산을 증여 또는 이전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아들에게 물려준 증여재산의 과세표준이 1억원이면, 증여세의 세율은 10%가 적용되어 증여세 산출세액은 1000만원이 된다. 반면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증여한 경우에는 증여세의 세율이 13%(30%가산)가 되어 산출세액은 1300만원이 되기 때문에 아버지가 증여하는 경우보다 세금이 많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증여하고, 아버지가 다시 아들에게 증여하는 경우에는 증여세 산출세액이 2000만원이 되지만, 할아버지가 직접 손자에게 증여할 때는 1300만원이 되어 총액으로 볼 때는 세대생략 이전의 경우가 세금이 더 적다. 또한 피상속인(조부모)의 사망으로 상속세를 계산해야 할 경우에도 상속인(부모)에게 증여한 재산을 상속개시일 전 10년 내에 증여한 재산 모두 포함하지만 비상속인(손주)에게 증여한 재산은 5년 내에 증여한 재산만 포함하기 때문에 상속세 계산 시에도 유리하다.
생명보험을 활용하라
강남의 부자들이 거액의 상속세 납부재원을 준비하기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생명(종신)보험이다. 생명보험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상속세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활용 폭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계약구조(표 참조)에 따라 생명보험금이 상속재산에 포함되는 경우와 포함되지 않은 경우로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병원비는 고인의 계좌에서 인출하라
고인의 병원비나 공과금, 장례비용, 채무 등은 상속세 계산 시 총 상속재산에서 빼도록 돼 있다. 장례비용의 경우 증빙이 없더라도 500만원을 공제해주며, 500만원을 초과하면 증빙에 의해 지출 사실이 확인되는 경우 공제해준다. 다만 장례비용이 1000만원을 초과하는 경우에는 1000만원까지만 공제해준다.
◇exhibition
王이 사랑한 보물: 독일 드레스덴박물관연합 명품전
일정 11월 26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독일 드레스덴을 18세기 유럽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로 이끌었던 폴란드의 ‘강건왕’ 아우구스투스. 그가 수집한 예술품 중 130점을 총 3부로 구성해 전시한다. 제1부에선 아우구스투스의 군복과 태양 가면, 사냥 도구 등 그의 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이 소개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수집한 예술품을 공개하기 위해 만든 보물의 방 ‘그린볼트’를 소개하는 제2부에선 당대 최고의 장인을 동원해 제작한 공예품을 선보인다. 각종 보물이 사용된 작품을 통해 화려한 바로크 예술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제3부에선 18세기 중국과 일본의 수출 도자기와 초기 마이센 자기를 한눈에 비교해볼 수 있다. 전시장 내부를 확대사진 기술을 사용해 드레스덴 궁전 내부와 비슷하게 연출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도그 in 강남
일정 11월 19일까지 장소 강남미술관
반려동물 인구 1000만 시대를 맞이해 동양화작가 곽수연, 사진작가 김현욱, 입체작가 빅터조, 업사이클링작가 엄아롱, 일러스트레이터 이연경, 도예작가 틸다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가 모였다. 반려동물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회화, 설치, 사진, 조형 등으로 표현된 총 5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강남미술관이 무료로 제공하는 애견기저귀를 착용할 경우 반려동물도 입장이 가능하다. 반려동물이 있다면 함께 관람해도 좋다. 다양한 작품 외에도 유기견을 입양한 견주들이 보내준 사연을 읽어볼 수 있다. 또 반려동물 관련 서적을 비치하는 등 반려동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전시장 건물 옥상에는 반려동물과 함께 쉴 수 있는 ‘반려동물 놀이터’가 마련되어 있다.
◇book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저·민음사)
15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다 세상을 떠난 장남 준페이. 작품 속의 ‘오늘’인 그의 기일을 맞아 온 가족이 모인 하루를 담아낸 이야기다. 가족 간의 쉽지 않은 소통과 그럼에도 연결하고자 하는 욕구를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여정으로 그려내며 아스라한 동경과 영원한 그리움의 상대는 가족임을 들려준다.
향기 탐색 (셀리아 리틀런 저·뮤진트리)
고고학자인 어머니를 따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성장한 저자 셀리아 리틀턴의 향기 탐색서다. 냄새로 기억되는 곳들을 추억하며 향의 발자취를 답사하고 회고한다. 각 나라 특유의 향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향의 기초적인 원료와 재배법, 향수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movie
유리정원
칸,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신수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국내에선 보기 드문 소재와 독창적인 스토리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끌었다. 은 베스트셀러 소설에 얽힌 미스터리한 사건을 중심으로 그 속에 감춰진 슬픈 비밀을 그린 작품이다. 10월 22일에 열린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몽환적이면서도 독특하다”, “신수원 감독의 남다른 상상력을 실감하게 만든다”는 호평을 받았다. 또 숲속의 유리정원에서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을 연구하며 초록 피가 흐르는 ‘재연’ 역을 맡은 문근영이 2년 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한 작품으로 기대를 모았다.
개봉 10월 25일 장르 미스터리, 드라마 감독 신수원 출연 문근영, 김태훈, 서태화, 임정운 등
리빙보이 인 뉴욕
이후 , 시리즈를 연출한 마크 웹 감독이 다시 한 번 로맨스 영화로 돌아왔다. 은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젊은 남녀 간의 로맨스를 통해 도시 뉴욕의 풍경을 스크린에 담았다. 마크 웹 감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도시인 뉴욕의 가장 현실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다”며 뉴욕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을 드러냈다. 맨해튼의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을 배경으로 촬영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국내에선 로 얼굴을 알린 칼럼 터너가 남자 주인공 ‘토마스 웹’ 역을 맡았다.
개봉 11월 9일 장르 드라마, 로맨스 감독 마크 웹 출연 칼럼 터너, 케이트 베킨세일 등
◇stage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드라마와 영화로도 제작된 이 뮤지컬로 재탄생했다. 항상 사랑받기를 꿈꾸며 살았던 여인 마츠코의 기구한 삶을 감성적인 연출과 음악으로 그려내며 진정 그녀의 인생이 혐오스러운 삶이었는지 되묻는다.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일정 10월 27일~2018년 1월 7일 연출 김민정 출연 박혜나, 아이비, 강정우 등
도둑맞은 책
인간의 행동은 의지인가 욕망인가. 영화대상 시상식 날 납치된 시나리오 작가 서동윤, 그리고 그를 납치한 보조작가 조영락. 두 사람을 통해 연극 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 몰려 사람다움을 포기할 때 얼마만큼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장소 충무아트센터 소극장 블루 일정 10월 13일~12월 3일 연출 변정주 출연 이현철, 이갑선 등
에어포트 베이비
미국으로 입양된 조쉬가 친부모를 찾아 한국을 방문하면서 겪는 이야기다. ‘입양’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담백하고 재치 있는 대사로 풀어내면서 감동을 선사한다. 8년 동안 수정과 보완작업을 거친 작품으로 현실적 소재를 잘 소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장소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1관 일정 10월 17일~12월 31일 연출 박칼린 출연 최재림, 유제윤, 강윤석 등
오펀스
새로운 시도와 도전으로 공연계의 독보적인 연출가로 불리는 김태형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 그리고 중년의 부유한 갱스터 해롤드. 아픔과 상처를 지닌 세 인물을 통해 따뜻한 격려와 위로를 전한다.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일정 9월 19일~11월 26일 연출 김태형 출연 박지일, 손병호, 장우진 등
며칠 지나면 크리스마스이고 다음 날은 아버님 기일이다. 형제자매와 조카들에게 "아버님 기일 오후 4시에 메모리얼 파크에서 모이자“고 ‘가족밴드’에 올렸다. 형제자매들은 가족들의 소통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가족밴드를 이용한다.
의사소통의 변천사
통신수단이 발달하기 전에는 직접 대면하여 소통하였다. 어른이나 상사를 찾아뵙고 말씀을 나누고 지인을 직접 만나서 의사소통하는 방법이다. 지금도 이 방법이 최고의 예절로 자리하고 있다. 우편제도가 발달하면서 편지를 애용하였다. 정성이 제일 많이 들어가는 이 방법은 중장년이면 꼬박 밤을 새운 경험이 있을 것이다. 글재주 좋은 사람은 ‘편지대필’로 친구의 연애를 돕기도 하였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거의 사라졌지만 비싼 요금에도 불구하고 빠른 전보가 이용되었던 시대도 있었다. “만원속히송금요불효자" 10자 기본요금이 적용되던 50여 년 전 도시에 유학하던 친구가 시골 부모님께 학자금을 이중으로 보내달라는 전보내용이다. ”직접 찾아가서 설명하는 것은 거짓말이 되어서 싫고, 편지는 한 장을 다 채우기 귀찮다.“고 너스레를 떨던 친구가 생각났다.
통신수단과 의사소통의 발달
80년대 전화사용이 보편화 되면서 세상이 전화기 속으로 다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시골 이장 집에서 전화를 기다리던 일이 추억으로 남고, 공중전화, 삐삐를 거치면서 주요 통신수단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난 세월 풍미했던 전보처럼 휴대폰의 발달에 따라 메시지문자도 많이 이용되고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SNS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족밴드’가 가족들과 서로 소통하면서 정보를 하나의 장에서 공유할 수 있어서 매우 편리하고 효율적이다. 밴드의 소식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어서 좋다. 자유토론을 하고 합의 결과를 착오 없이 실행할 수 있다. ‘아버님 기일 공지’를 마치고 올해를 회상했다. 여름에 어머님이 소천하셔서 내년에는 두 차례 ‘추모모임’이 예정되었다.
부모님 덕분에 건강하게 살고 있는 나이 든 형제자매 세대보다 아들ㆍ딸ㆍ조카와 손주들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다음세대 아이들은 서울에서 나서 자라고 학교도 마쳤지만 전문 직업인이 되어 세종ㆍ대전에 멀리 울산까지 사는 곳은 전국구다.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매우 슬펐지만, 막내 동생의 딸의 교사 취임 등 좋은 소식이 많아 ‘40년 가족모임’ 중에서 제일 기분 좋은 날이 될 것 같다.
문명의 이기를 활용한 가족밴드
요즘은 길거리에서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누구든지 기쁘거나 급한 소식을 전하고 축하와 격려를 한다. 밴드가족이 소식을 공유하여 언제나 쌍방소통이 가능하다. 댓글로 참석가능 여부까지 다 알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형제자매와 온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부모님의 기일을 가다린다. 가족밴드를 기다린다.
어렸을 적 제사는 꽤 부산했다. 필자 집이 장손으로 친척들이 다 모였었기 때문이다. 제사는 하필이면 한밤중에 지냈으므로 그냥 안 자고 기다리거나 자다가 깨우면 일어나서 제사에 참여해야 했다. 대부분 잠들었다가 한 밤중에 일어났다. 온수도 없을 때였으므로 찬 물에 세수하는 것이 싫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쇠고기 산적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쇠고기 산적은 먹기만 하면 한 보름은 위에서 신물이 올라와 고생해야 했다. 고기도 안 먹다가 먹으면 몸에서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셨을 때는 아들 역할을 자청하던 목사 주관으로 추도식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상을 가득 채우던 음식도 없이 간단히 추도식을 한다는 것이 보기에 안 좋다는 반응이 나왔다. 사업을 하는 둘째는 전통방식으로 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그래서 한 동안 제사를 종교별로 1부 추도식, 2부 전통식으로 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다시 전통식으로 돌아 왔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우리 형제들이 주관하여 집안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고조부까지 제사를 지냈으므로 설과 추석까지 하면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제사가 꽤 자주 있었다. 어머니 혼자 제사 음식을 준비하다가 점차 나이가 들자 며느리들이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나 첫째 형님은 돌아가시고 나서 형수님이 혼자 오려고 하지 않았다. 무릎 수술까지 해서 거동도 불편하니 도움도 되지 않았다. 둘째 며느리는 아이들 교육 차 늘 캐나다에 가 있고 셋째인 내 아내는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적어도 일박을 해야 하는 제사 음식 준비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넷째 며느리에게까지 차례가 간 것이다.
어머님이 8순이 되자 더 이상 힘들어서 집에서 제사를 모시기 곤란하다고 했다. 장자 역할을 하는 둘째가 모셔가야 하는데 시내 절에서 제사를 치르자는 제안을 했다. 남부터미널 근처의 절인데 회비만 내면 절에서 제사를 집행해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각 형제마다 종교가 달라 불교식 염불에 맞춰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불편했다. 둘째 형님은 사업 상 조상을 잘 모셔야 한다며 굳이 고조부 제사까지 모셔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렇게 몇 년을 하다 보니 2세들이 평일 제사에는 직장 퇴근이 늦어 참석이 어려웠다. 청년 취업난시대에 제사지낸다고 일찍 퇴근하다가 밉보이면 안 되니 오지 말라고까지 했다. 어머니도 무릎이 안 좋아서 더 이상 참석이 어렵다고 했다. 우리 형제들만 모이다 보니 제사의 원뜻인 돌아가신 분을 추념하고 그 때문에 모인 산 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하려는 취지가 무색해졌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면 제사를 지내는 중간에 서로 대화도 한다. 그러나 절에서는 2시간 동안 제사를 주관하는 스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며 숨소리마저 조심해야 한다.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기도 어려운 불경을 따라 읽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이럴 바에는 절에서 지내는 제사를 재고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차라리 제사를 우리 형제들 집에서 돌아가며 단출하게 직계 부모만 지내자고 했다. 형식적인 제사상을 차리지 말고 참석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상을 차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2세들이 모일 수 있게 주말을 택해서 모이자고 했다. 어버이날이나 생일도 그렇게 한다. 당일이 평일이면 모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세대는 우리가 죽고 나서도 2세들에게 제사를 강요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산소도 없고 유골을 산이나 강물에 뿌리기도 한다. 시대가 바뀌어 버린 것이다. 기일에 꽃다발 들고 유골함 모신 곳에라도 와주면 고마울 정도이다.
조국의 역사가 안겨다 준 수많은 비극이 있다. 그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독립 투사와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애절한 감동으로 다가와 그 여인이 옥중에서 쓴 수기 내용을 우선 써 내려가본다.
“박열을 처음 사랑하던 그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박열의 식민지 조선 독립운동에 휘말리게 될지 모른다고…. 아무리 독립운동이 나의 사상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나는 박열을 사랑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사랑하는 타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즉, 그것은 자아의 확대라 할 수 있다. 나는 박열을 사랑했고 박열은 조선을 사랑했다. 그래서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 독립을 위해 나섰다. 박열의 동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우리를 비웃어 달라고. 다음 재판관들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모든 것은 권력이 만들어낸 허위이고 가식이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달라! 나는 박과 함께 죽을 것이다. 박열과 함께라면 죽음도 오히려 만족스럽게 여길 수 있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해 두고자 한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 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박열, 그는 1902년부터 1974년의 생애로 마감을 한 독립투사로 본명은 박준식이다. 경상북도 문경군에서 태어나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하여 재학 중에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퇴학당한다. 1919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일본에서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고, 조선 최초 아나키즘 사상단체를 만들어 일본제국 왕을 폭탄으로 제거하려는 등 온몸으로 반제국주의 항일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1920년 1월에는 일본에 있는 조선인 고학생들과 동경 조선고학생동우회를 결성해 조직활동을 시작했다. 박 열은 불령사(不逞社)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그 해 관동 대지진 이후 일본인 연인인 가네코후미코( 金子文子)와 함께 1923년 10월에 일본 왕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죄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박 열과 가네코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두 사람은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박 열은 젊은 청년시절 22년 2개월간의 기나긴 옥살이를 마치고 1945년 10월 아키다 감옥에서 미군에 의해 석방되었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에서 우익 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1947년 10월 민단 정기대회에서 이승만 계열의 남한단독정부수립 노선을 지지했고,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납북되었다. 북한에서도 군대 축소 및 국제 중립국화 등에 노력을 기울였고 1974년 서거하여 그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 능에 묻혀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 장이 추서되었다고 한다.
1926년 박 열과 옥중부부가 된 가네코 후미코, 그녀는 조선을 사랑한 일본여인이다. 요코하마에서 사생아로 출생한 그녀는 가난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불우하게 살아왔다.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군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자유여성으로 23살의 짧은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약7년 동안 조선 부강 땅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아왔고 1919년 에는 부강에서 횃불 만세운동을 목격한 바가 있다. 그녀는 도쿄시내의 작은 오뎅 집에서 일하면서 조선유학생들과 교류하였고, 우연히 한 조선잡지에 실린 박 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곧 사상공감에 이르렀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뜻을 같이하고 항일활동을 함께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히로히토 암살을 기도한 후 체포되었고 서로 다른 감옥에 수감되었다. 옥중 부부가 된1926년 불과 몇 달 후 그녀는 결국 감옥에서 목을 메어 자살인지 타살인지 미스테리한 의문사로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 죽은 후에는 일본 내에 그녀의 시신을 거둬줄 사람이 없어서 옥중에서 결혼서류를 작성하고 박씨 집안의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박 열의 형은 그녀의 유골을 인수하여 남편의 고향인 문경, 박 열 의사 기념관의 옆에 안장시켜 놓았다고 했다.
우리 조국의 사랑뿐만 아니라 투철했던 한 독립투사와 일본인 가네코의 끈질긴 사랑이 잔잔하게 가슴에 울려온다. 서로가 원수의 국적이었지만 남녀의 사랑으로 함께한 굳은 의지가 죽음도 불사했다. 한 독립투사는 조국을 위해서 앞장섰지만 일본인 여성을 사랑하게 되고 아내로 두었던 것이 오히려 해가 된 것이었을까? 무서운 권력 앞에 처절히 죽어가며 한 남성을 사랑하는 어느 여인의 절규가 애절하기만 하다. 박 열의 업적과 가네코의 항일운동의 업적은 현재 남 북한 양쪽뿐만이 아니라 고향인 문경에서 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두 남녀의 시신은 남과 북으로 서로 떨어져 있어 더욱 깊은 아픔 으로 남는다. 필자에게는 지금도 의사 박 열은 가네코의 기일이 되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하는 말이 애달프게 다가온다. 가네코 후미코 그녀의 자서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도 구입해 봐야 할 것만 같다.
[출처] “한 독립투사의 사랑이야기”|작성자 로즈와이
퇴직 후 양재천을 자주 걷는다. 아내와 함께 걷기도 하고 때로는 혼자서 걷기도 한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산책할 수 있어 좋다. 양재천은 철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6월이면 화사하던 봄 꽃 들은 자취를 감추고 연초록 나뭇잎은 싱싱한 푸르름을 더해간다.
6월에는 우리 가족에게는 큰 행사가 두 개있다. 어머니의 기일이 있고 둘째 동생이 회갑을 맞이한다.
어머니는 당뇨와 암으로 16년 전 6월에 68세로 돌아가셨다. 요즘 같은 장수 시대에 칠십도 넘기지 못하신 어머님은 우리 가족에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꽤 시간이 지났건만 우리 형제끼리 모여 술 한 잔 할 때면 막냇동생을 울리는 것은 간단하다. 동생이 취할 때쯤 어머니 이야기만 꺼내면 보고 싶다며 큰소리로 운다. 오십이 넘고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건만.
세브란스 암센터, 원자력 병원 검진 결과 너무 늦었다는 결론이 내려져 항암치료를 포기하시고 어머님이 고향집으로 내려가시기로 결정하시던 그날 ‘그만 내려가자’ 고 아버님이 하시던 그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후 어머니는 5년을 더 사셨다. 고향집에서 고통의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 지내시면서 생을 마감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2년이 지나지 않아 아버님도 어머님 곁으로 가셨다.
이제 세월이 흘러 동생이 회갑을 맞이해 잔치를 한다고 한다.
호텔에서 가족들을 초대해서 음악회를 열 계획이다. 노래방 반주기에 맞춰 동생은 색소폰을 연주하고 우리 형제들은 부부 단위로 노래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 부를 노래 곡목을 미리 제출하라고 한다. 색소폰 반주를 해주기 위해서다. 동생은 퇴직 후 색소폰을 배운다고 아파트에 방음시설을 갖추고 몇 년을 연습하더니 이제 프로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그날 댄스를 하려고 한다. 지난해 내가 라틴 댄스 차차차를 배워 몇 달을 집에서 아내와 함께 연습한 적이 있어 이번에 그 실력을 뽐내보려 한다.
사실 나도 4년 전 회갑을 지냈지만 잔치를 하긴 쑥스러웠다. 그래서 아내와 유럽 여행을 하고 형제들과 간단히 식사를 했다. 팔순을 넘긴 삼촌도 계시는 데 거창하게 잔치를 한다는 것이 좀 어색했기 때문이다.
동생은 나와 성격이 달라 잔치를 제법 제대로 할 모양이다. 아무리 장수시대라 해도 회갑이란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날이긴 하다. 아이들은 다 자라 품을 떠나가고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제대로 홀가분하게 제2의 인생을 설계할 시점이다. 회갑을 지나니 인생이 뭔지 좀 알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도 안다.
내 나이도 어느덧 60중반이 되어 며느리도 보고 손녀가 생겨 할아버지가 되었다. 인생은 다 때가 되어야 깨닫게 되나 보다. 손녀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보자기에 싸여 태어나 업치고, 일어서고, 걷고, 말을 배우는 과정을 자세히 보면서 너무 신기하고 귀엽다. 아들과 딸을 다 키웠건만 그때는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다. 생명의 신비와 핏줄에 대한 애정이 이렇게 소중하게 다가올지 몰랐다.
가끔 아들과 며느리, 딸 우리 가족이 다 모여 식사하는 날이 더없이 행복하다. 작은 일이지만 이러한 일상생활 속의 소박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이것이 치열하게 살던 젊은 날과 달라진 점이다.
유월에는 아내와 제주도 서귀포 여행을 간다. 제주도를 몇 번 다녀오긴 했지만 이번 여행은 별다른 의미가 있다. 제주도 공무원 연금공단 강의가 있어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일과 여행을 동시에 하는 의미 있는 일이다. 내가 강사가 되어 내가 먼저 경험한 소중한 것들을 후배 시니어들과 나눌 수 있어 기쁘다.
직장생활의 오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 이 막을 준비하는 데 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려놓고 가벼이 해야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새로 준비하고 끊임없이 학습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유월을 맞이하며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110년 전 1905년 1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보호국으로 만들자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1861.7.2~1905.11.30) 등 많은 지사들이 이에 항의하여 순국한 사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6개월 앞선 이 해 5월 국은(菊隱) 이한응(李漢應·1874.9.21.~1905.5.12)이 만리타향 영국 런던에서 혼자 힘으로 다가올 파국적 운명을 막아보려고 발버둥 치다 순국한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는 구한말 국권상실과 관련한 순국 1호이다.
그의 순국에서는 제갈량이 후출사표에서 북벌의 대의를 저버릴 수 없어 온몸을 바쳐 힘쓸지니 죽은 뒤에나 그만둘 뿐이라는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 死而後已)’와 같은 고귀한 정신이 느껴진다. 영국 외무성 문서에는 이란 제목으로 2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그가 오늘날 국제정치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당시의 세계정세와 동아시아의 정세를 꿰뚫고 있었으며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비록 현실성은 희박했지만 탁월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한 국은은 좁게는 한국외교사에, 넓게는 한국근대사에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라 할 것이다.
이한응은 유학은 물론 영어를 포함한 신학문을 공부하고 1901년 첫 영국 상주공사로 임명된 민영돈(閔泳敦)을 수행하여 3등 참찬관(오늘날 서기관)으로 임지에 부임한다. 그러나 민씨 일가였던 민영돈이 1904년 초 귀국함에 따라 그는 서리공사(charge d’affaires)로서 혼자 공관을 지키며 이후 약 1년 5개월 동안 구국외교를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1901년 중국의 의화단 사건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함으로써 ‘극동위기’가 야기되며 결국 1904년 초 러일전쟁으로 발전한다. 이한응은 1월 13일 영국 외무성을 방문하여 한반도 정세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긴 메모(memorandum)와 각서(note)를 전달한다. 그리고 1주일 후 이 내용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다면서 메모 두 개를 다시 보낸다. 그 내용은 간단히 말해 일본과 러시아 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영국은 다른 열강들과 ‘양해(understanding)’를 통해 어느 쪽이 전쟁에 승리하든 대한제국의 독립과 주권 및 영토 보존을 위한 ‘새로운 보장(fresh guarantee)’을 해달라고 요망한 것이다.
6장의 도표를 곁들인 국은의 메모는 세계정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분석, 그리고 세계적 차원(global level)의 동맹체제를 동아시아 지역 차원(regional level)에서 전개되는 분쟁에 적용하여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려는 아이디어 등으로 신선하기 짝이 없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한국의 독립은 동아시아와 세계평화를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서쪽(유럽)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력균형의 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최근 들어 협력하고 있다. (3개월 뒤 ‘영불협력’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으나 이들 양국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경쟁하고 있어 균형상태가 건전하지 못하다. 일-러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과 한국이 압력을 받게 될 것이며 영국과 프랑스도 이 분쟁에 휩싸여 범세계적 균형체제가 파괴될 것이며 이들의 이권은 침해받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 같은 재난을 피하기 위해서 러-일 양국과 함께 4개국조약(a quadruple treaty)을 체결하여 러-일 간의 불안정한 체제에 ‘못’을 박고 심판관의 자격으로 동아시아 분쟁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고도의 분석적인 구상은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실현 가능성이 없었다. 영국 외무성은 수일간 그의 메모를 철저히 검토한 끝에 이한응의 메모는 결국 영국이 러시아와 일본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해 달라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후 그는 1년 이상 본국과의 연락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서 1902년 영일동맹에 의거한 조선의 독립보장 요구, 경의선 철도 건설 제안 등을 통해 영국정부를 집요하게 설득하지만 영일동맹으로 동아시아 문제를 이미 일본에 일임한 영국으로부터 외면당한다.
동아시아 정세는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과 일본의 잇단 승리로 다음해 11월 17일 을사늑약까지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된다. 일본은 이에 힘입어 ‘내정개혁’이란 명목으로 조선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는데, 이 중 해외주재 공관을 축소하고 외교관들을 철수시킨 조치는 이한응의 장래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1905년 3월 중순 이한응은 영국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만리타향에서 1인 공관, 말 그대로 ‘고립무원’이었다. 당연히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었을 것이다. 4월 12일 하이드 파크에 있는 서펜틴(Serpentine)이라는 긴 연못가 벤치에 앉아 있는데 일본인 같은 두 동양인이 위협적인 자세를 보였다면서 영국 정부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외무성은 이를 두고 ‘우스꽝스러운(ridiculous) 짓’이라는 논평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1905년 4월 말 병으로 눕는데 5월 10일 랜스다운(Lansdowne) 외상으로부터 빠른 회복을 바란다는 서신을 받는다. 이에 용기를 얻은 듯 외상과의 면담을 신청하며, 외무성이 이를 호의적으로 검토하는데, 국은은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5월 12일 음독, 순국한다.
순국에 즈음하여 이한응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오호라, 나라의 주권이 없어지고 사람이 평등을 잃으니 무릇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진실로 핏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어찌 견디어 참으리오?’
영국 외무성은 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논평을 남기지 않았다. 1900년 4월 명예 한국총영사에 임명되어 있던 부유한 영국인 프리처드 모건(Pritchard Morgan)은 국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감회를 피력했다. “이 가련한 젊은이는 극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결과에 크게 실망했으며 외교관으로서 그의 경력이 끝날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했음이 틀림없다.” 국은의 죽음을 애국심과 경력 단절이라는 개인적 요소가 복합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을사늑약 후 고종은 이제 외세에 의존한 독립이란 불가능해졌으며 의병과 같은 국민적 봉기만이 일본에 대항하는 길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이에 반일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안으로 순국열사들에게 시호와 관직을 추서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국은은 이에 포함된다.
을사늑약 체결 9일 후인 11월 27일 고종은 용인 군수를 국은의 향리로 보내 종2품 가선대부 내부협판(내무부차관)으로 추서하면서 그의 고귀한 희생을 기렸다. 국은의 묘소는 오늘날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에 있다.(2015.5.5. 그의 110주기 기일을 앞두고)
구대열 (具汏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