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지난 9월 29일부터 4일간 큰 춤판이 벌어졌다. 8개국 70개 댄스팀이 참가한 덤보댄스축제다. 이 춤판은 맨해튼 다리 밑,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덤보(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역을 문화의 중심지로 변신시킨 일등공신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축제를 뉴욕 5대 무용축제로 선정했고, PBS 방송은 올해 뉴욕의 5대 행사로 꼽았다. 이 춤판을 벌여온 주인공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예술감독 겸임). 뉴요커의 자랑인 덤보댄스축제는 김 단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고난과 눈물의 결정체다.
김영순 단장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댄스스쿨로 유학을 온 것이 미국생활의 출발점이었다. 세계 현대무용계의 신데렐라를 꿈꾸며 시작한 유학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굳게 마음먹고 준비한 유학이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일여자중고등학교에서 무용교사로 재직하면서 월급의 70%를 저축해 모은 유학 자금을 장춘동 국립극장 소극장(현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다 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국내 사상 최연소 단독 현대무용 공연이었고 ‘잔잔한 호수 위로 퍼덕이며 뛰어오르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당초 계획에 없었던 공연이었다. 김 단장은 40년 전 그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던 입학허가를 받고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거부를 당했어요.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젊은 여성이 미국에 눌러 살까 우려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멋진 공연을 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비자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공연을 하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자가 나왔다. 그런데 체재비는 고사하고 항공료조차 부족했다. 철도공무원인 아버지 김철주씨의 5남 4녀 중 셋째인 김 단장은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께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아 두 명을 미국까지 데려다주면 항공료를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8개월과 11개월 된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22시간 넘게 비행을 했다.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의 자그마한 방 한 칸을 댄스스쿨에서 알선해줬지만 아침식사를 포함해 주당 25달러인 숙식비와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하루 12시간 이상 무용 연습을 하면서도 베이글 하나로 견딜 때가 많았다. 때로는 밤늦게 돌아오다 너무 힘들어 남의 집 계단에 앉아 달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김 단장은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딸이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현모양처로 살기를 원하셨지 유학 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았어요. 딱 1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춤꾼이 되고 싶었으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기대까지 짊어지고 있었어요. 김포공항을 떠날 때 외할머니께서는 부적을 한 장 주시면서 엄마의 꿈을 대신해서 이루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를 극심한 생활고에서 구해준 것은 루돌프 누레예보 장학금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30 대 1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뉴욕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출연료였지만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80년, 경쟁률 300 대 1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욕 10대 명문 무용단인 제니퍼 뮬러 현대무용단 전속 단원으로 발탁되면서 그는 프로페셔널 댄서로 우뚝 서게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 중남미, 캐나다 등 세계 곳곳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검정머리 휘날리며 춤추는 동양의 신비한 무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에 9개월간 해외 공연을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뉴욕에 머무는 3개월은 트론댄스시어터(Throne Dance Theater) 같은 소규모 무용단에서도 활약을 했다.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할 정도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많은 댄서들 가운데 눈을 뗄 수 없는 댄서”라고 극찬했다.
1988년, 드디어 그는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한다. 하얀 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의 ‘화이트웨이브(White Wave) 김영순 무용단’이다. 하얀 파도는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의 무용단 창단은 실력과 명성과 인간관계를 모두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단장은 그 해 88서울올림픽 현대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국내 팬들에게 현대무용의 진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홍콩에서 단독공연을 할 때는 홍콩스탠더드 신문이 ‘춤추기 위해 태어났다(Born To Do It)’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춤을 전면에 소개했다. 신문 제목처럼 그는 타고난 춤꾼이었다. 6세 때 인근 무용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구소리에 이끌려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7세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해 호남예술제에서 1등을 차지했다.
무용단 운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 등 60여 가지의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이 ‘댄스의 영역을 뛰어넘은 새로운 예술세계 창조’라고 논평하는 등 주요 언론들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무용단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소호(SOHO)에 있던 스튜디오를 임대료가 저렴한 이스트 할렘으로 옮겼으나 70평 남짓한 스튜디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해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는 맨해튼 스튜디오가 상가로 바뀌면서 새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다. 소호에서 밀려난 가난한 예술인들이 몰려든 덤보 지역은 앞이 캄캄했던 그에게 축복의 땅이었다. 기업인 존 라이언(John Ryan)씨가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면서 25만 달러를 지원받아 이스트 강변에 100석짜리 무용 전용극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덤보댄스축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미술·패션쇼·음악·필름스크린·댄스 등 5개 예술 분야로 나눠 열리는 덤보아트축제의 이사진과 댄스 부문 기획을 담당했던 친구의 권유로 2001년 제1회 덤보댄스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사실 덤보아트축제는 ‘예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사업이 번창한다’는 부동산개발업체의 경영전략에서 출범한 축제다. 덤보 지역이 번창하자 다른 분야의 축제는 사라지고 댄스축제만 남아 뉴요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김 단장은 신예 안무가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면서 뉴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신념으로 댄스축제를 지켰다.
그는 여세를 몰아 2004년부터 쿨뉴욕(Cool New York) 댄스축제를, 2006년부터는 웨이브라이징시리즈(Wave Rising Series) 무용축제를 잇따라 개최했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다운타운 현대무용계는 김영순 단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나도 하기 힘든 페스티벌을 세 개나 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때부터 그는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축제를 통해 총 2600여 무용단과 1만3500명의 안무가들은 7만여 관객 앞에서 기량을 발휘했다. 창무회 & 김매자, 김윤정 프로젝트댄스, 장유경 무용단, 길섭무용단, 박신애, 정석순, 김정환과 박봄, 박정윤, 최성옥 메타댄스 프로젝트 등 수많은 안무가들이 그들이었다.
그는 현재 뉴욕시가 매년 수여하는 댄스·연기대상(Bessie Award)과 예술지원기금 무용 부문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그의 무용단은 3년 연속 뉴욕시 지원 대상 문화예술단체로 선정되는 등 공로와 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마티 마코위츠(Marty Markowitz) 브루클린 구청장은 수년째 덤보댄스축제가 개막되는 날을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의 날’로 공표하고 있다. 그의 공로는 곤경에 처했을 때 더 빛이 났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이스트 강이 범람해 극장이 침수 피해를 입자 온라인 성금이 답지했다. 루도 셰퍼(Ludo Scheffer) 드렉셀대학 교수는 상속 재산 중 상당액을 기부했다.
김 단장은 수많은 무대에 올라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2014년 한국계 안무가로는 처음으로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rooklyn Academy of Music, BAM) 무대에서 새 작품 을 성공리에 공연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뉴욕에는 링컨센터 등 굴지의 공연장이 즐비하지만 공연 대상 선정이 가장 까다로운 BAM이 화이트웨이브무용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링컨센터의 뉴욕공공도서관은 그의 공연을 촬영해 DVD로 영구 보관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은 세상 사람들이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멈출 수 없다. 자신의 무용단을 통해 끊임없이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국제댄스페스티벌을 잇따라 열어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걸작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은 요즘 인류 화합을 주제로 한 이라는 대형 작품을 새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일부는 이번 덤보댄스축제에서 선보였다. 작품이 완성되면 내년쯤 한국 팬들에게도 소개할 계획이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은 전용 공연장이다. 덤보 지역도 이제는 예술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임대료가 뛰어 브루클린 내 다른 지역을 열심히 물색하고 있다. 김 단장은 새 공연장을 임대할 경제적 여력은 없지만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이제까지 그런 믿음으로 험난한 무용인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왔고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라는 독보적 위치에 걸맞은 활약을 오늘도 펼쳐나가고 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당신은 잘 자고 계십니까?
세상의 나이 든 모든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나이 들어서 너무 많이 자는 사람들이 있다. 100세 가까운 원로 철학자는 반농담으로 말하길 그런 사람들은 ‘웰다잉’ 연습을 하는 거라고 한다. 그리고 한 부류는 유난히 잠을 못 이루는 사람들이 있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아져서 잠자리에 들어도 이리저리 뒤척이게 되는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매일 수만 가지 감정에 휩싸여 살아간다. 그것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날 잠자리에 누워 후회를 많이 하기 마련이다. ‘내가 그때 왜그랬을까’ ‘조금만 참아 볼걸’ ‘다 생각해서 말한건데 왜 이해를 못했지’ 등등 자신의 행동을 뒤돌아보는 것이다. 감정관리에 미숙해 노여움이 시시때때로 드러나는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행복한 노후를 위한 것들, 자녀 결혼 문제, 세금을 줄이려면 상속을 해야 할지 증여를 해야 할지, 어디서 살 것인지,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건강 문제, 손주 돌보기, 은퇴 전과 은퇴 후의 삶 등등 고민거리로 밤을 새우기도 한다. 그러나 고민한다 한들 해결되지는 않는다. 물론 이 또한 지나가겠지만 노파심, 노여움이 잠재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신체에도 여러 가지 변화가 생기는데 이것이 수면에 영향을 미친다. 나이에 따라 잠이 드는 시각, 잠에서 깨는 시각, 잠의 깊이와 잠이 지속되는 시간, 또 수면의 질과 수면 패턴도 모두 변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잠은 정신과 신체에 회복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종합적인 변화를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 감정 변화의 내용과 그 이유를 이해한다면 정서적인 안정을 가질 수 있고 모를 때보다는 잠을 더 깊고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나이가 들면 잠이 줄어든다’고 알고 있지만 나이가 들면 수면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그만큼 수면의 질도 떨어지게 된다. 젊을 때는 깊은 수면이 많고, 잠들기 시작해서 깊은 수면으로 이행되는 시간도 짧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서서히 깊은 잠은 줄어들고, 얕은 수면 단계를 오가며 잠이 드는 깊이가 얕아진다.
특히 감정의 변화가 많은 날에는 깊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밤중에 몇 번이고 잠이 깨는 ‘중도 각성’과 이른 새벽에 눈이 떠지는 ‘새벽 각성’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러면 충분한 수면을 취했다는 느낌도 없고 몸의 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유형별로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대부분의 불면증 사람들은 강박적으로 잠 걱정을 많이 하며, 우울을 호소하기도 한다. 또 만성적인 불안이나 분노표출 장애도 있다.
사실 깊은 잠을 못 자는 현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정서가 안정되면 잠을 잘 자는 경우가 많다. 잠을 못 이루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이른 시간에 잠자리에 들거나 낮잠을 자서 발생하는 게 상당수다. 건강에 필수적인 수면시간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크게 감소하지 않으며, 시니어들도 젊은이들과 같은 양의 수면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달콤한 숙면을 위해 감정을 다스려야
내가 아는 지인은 잠을 잘 자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자는 편이다. 특히 낮잠을 잘 잔다. 아무 때나 피곤해지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드는 것이다. 그렇게 잠들면 한 10분에서 15분 정도 자곤 한다. 이러한 그의 습성은 나이 들어서 생긴 게 아니라 젊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는 젊었을 때도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안전벨트를 매는 즉시 잠에 빠져 들었다. 요즘도 버스를 타면 그런 일이 자주 벌어져서 잠든 사이에 내려야 할 정거장을 여럿 지나치는 바람에 곤란해진다고도 한다. 흔히 낮잠을 많이 자면 밤잠을 못 잔다고 하는데,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게 낮잠을 자도 밤 11시면 반드시 잠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잠은 직업적인 것과 다소 관련이 있다. 그에게 있어 잠은 글쓰기라는 정신노동이 주를 이루는 생활의 성격상 피로를 푸는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그래서 피로가 쌓이지 않게끔 시시때때로 잠이 드는 일이 필요하다.
억지로 자는 건 의사들도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잠을 못 이루는 것을 해소하기 위해선 넓은 범주에서의 균형관리를 필요로 한다. 90대의 지인은 “50대 즈음부터 자신의 건강의 문제를 발견하여 잘 관리하면 80대까지 문제없이 살 수 있으리라”고 밝혔다. “행복을 갖기 위해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정서, 심리적 안정이다. 정서관리만 잘해도 생활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어쩌면 불면은 그 무엇보다도 감정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정서가 메마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
그만큼 행복한 인생이 좋은 잠으로 시작되듯 잠은 정서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삶의 질을 좌우하는 숙면의 중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잠에서 오는 행복’을 위한 그 첫 번째는 감정관리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불면은 그 무엇보다도 감정관리가 잘 되지 않다 보니 미래에 대한 불안이 발생하고 거기서부터 만들어진 문제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결과가 아닐까?
감정을 관리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감정을 느끼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나친 두려움은 누그러뜨리고 걱정을 미래를 위해 긍정적으로 활용하여 불안을 극복하도록 대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나이에 이에 대한 관리를 잘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자신도 통제하지 못할 만큼 갑작스럽고 충동적으로 감정이 다가온다면 잠 못 드는 고통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시니어들에게 민감한 정서는 잠을 방해한다. 감정에 얽매이거나 치우치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을 잘 읽어 ‘별 헤는 밤’을 마주하지 않아야 한다.
숙면을 위한 첫 번째 조건, 감정을 잘 다스려 달콤한 빗장을 함께 열어 보자.
꿈은 인생에 장마가 지고, 눈이 올 때마다 점점 깊숙하게 땅속에 처박힌다. 하지만 실종된 꿈을 찾지 않으면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꿈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찬찬히 살펴보면 꿈이 보인다. 이렇게 자신을 후벼 파서 꿈을 찾다 보면 옵션이 생기고, 다채롭고 재미나는 삶을 살 수 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잘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 인생을 한 번 글로 서봤다.
◇꿈의 발원지
초등학교 때 신작로로 등ㆍ하교했다. 역고개를 넘어 역말다리를 건너 다시 올망졸망한 가게들이 즐비한 읍내를 지나 산 아래 있는 학교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당시 신작로 양옆으로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끔 트럭이 지나갈 땐 먼지가 풀풀 날리어 사람이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이 고향이다. 도서관은 교과서에서 나오는 그림에서 봤을 정도의 촌이다. 다행스럽게 학교와 집의 중간 정도에 살는 임명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명희 아버지는 필자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동화책과 위인전을 전집으로 사놓았다. 그 집은 여러 형제가 있지만 그 누구도 책을 즐겨 읽지 않았다. 하굣길이면 늘 친구 집에 들러 책을 팠다. 처음 ‘알프스 소녀’를 읽고 하이디에 빠진 후로 괴산의 하이디라고 생각했다. 책에 흠뻑 빠져 전집을 몇 번씩 읽었다.
그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이어서 행복했다. 명희는 깔깔거리고, 팔짝거리며 고무줄놀이를 하고 필자는 마루 끝 구석에 앉아 고개가 아프도록 책을 읽었다. 해가 저물고, 그 집 식구들 저녁상이 들어올 때까지도 죽치고 읽었다. 천국이었다. 명희 어머니가 “영희야, 이제 해가 저물었다. 집에 가야지”라고 해야 그제야 일어나 땅거미 내린 1.5㎞의 신작로를 마치 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듯 사뿐거리며 걸으면서 중얼거렸다. ‘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꿈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면서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발견, 다시 꿈꾸다
늘 필자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때는 역사가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모든 것이 다르게 흘러갔다. 매우 실망했고, 무기력해졌다. 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화가도 되고 싶었다. 그것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작가 꿈을 꾼 적도 있었으나 마찬가지였다. 몇 년 동안 아무 생각 없는 주부로 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작가로서 자서전 쓰기 전문가로 나서게 되었다. 작가라는 토대 위에 ‘자서전 쓰기 전문가’라는 건물을 올린 것이다. 또 그것은 재능이라는 골조로 지어졌고 취향이라는 마감재로 모양을 갖추었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담긴 자서전은 특별함을 준다. 삶 속에서 나온 이야기이기에 진솔하고, 진실한 만큼 자신을 대신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다. 또 세월의 경험이 축적돼야 쓰는 것이 아니라 더 채워야 할 게 많고 더 부족함을 느낄 때 쓰는 것이다. 이렇게 쓰다 보면 꿈이 구체화하게 된다. 많은 사람과 필자가 자서전을 쓰며 받았던 느낌을 공유하고 싶다.
필자의 어릴 적 꿈은 여장군이었다. 군인을 거느리고, 당당한 모습으로 살고 싶었다. 또 작가도 되고 싶었다. 군인이 되고 싶은 것이 겉 꿈이었다면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은 속 꿈이다. 첫 번째 꿈은 이미 사라졌고, 두 번째 꿈은 얼마든지 꿀 수 있다. 또 어릴 때 그림도 그리고 싶었는데 매주 수요일 밤이면 누드크로키를 한다. 그 시간은 행복하다. 지금은 글쓰기 강사와 집필, 그림에 열중한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꿈이 아니다. 그냥 별이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누구인지 조금씩 더 나가보자. “내 꿈은 말이야 ”라고 시작하는 화법으로 꿈을 찾아가는 중이다.
꿈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내 몸이 체득해서 토해 내는 것이다. 또한 찾는 것도, 쇼핑하는 것도 아닌 매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기와집 맏손녀
1956년 음력 섣달 보름, 밝게 비추는 달 아래서 저녁 먹고 한참 후에 필자는 태어났다. 오봉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바라다보이는 산 아래, 앞에는 동진천이 흐르고, 1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버지는 외아들이었기에 첫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쁨이었다.
조부모, 부모, 고모, 일하는 아재들, 부엌에 밥하는 언니, 애 보는 사람 등 대식구가 모여 살았다. 애보는 사람이 필요했던 이유는 필자의 형제가 칠 형제여서다. 필자 느낌으론 학교만 다녀오면 갓난아기의 울음이 들린 것 같았다. 가방을 마루에 던진 채 심통이 나서 뒤 곁으로 확 달려가곤 했다.
◇아버지 기억
색동저고리를 입고, 초등학교 입학식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추운 봄에 역고개를 넘어 학교에 가고 있자니 “주머니에 손 넣고 가지 마라” 하면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탄 채 쌩하고 눈길을 지났던 것도 생각난다. 필자는 발을 동동거리며 그냥 걸을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아침이면 학용품 살 돈을 달랬다. 아버지는 잔돈이 없으면 읍내까지 가서 바꿔다 주었다. 가계부는 아버지가 기록했다. 필자에게는 별말이 없었고 필자도 어려워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셔널라디오를 사왔다.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이 모여들었다. 필자는 라디오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있는 줄 알았다.
3학년 때는 아버지가 네모난 빨간 비닐 책가방과 쑥색의 슬리퍼를 사 왔다. 슬리퍼의 뒤축에 자갈이 수시로 박혀 그것을 빼내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밤색 코르덴 바지를 뜯어 타이트스커트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집에 싱거 미싱이 있었고, 아버지도 미싱 기술이 있었다.
6학년 때는 주름치마에 스트라이프 무늬의 봄 스웨터를 사 주기도 했다. 그걸 입고 서울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에 가서 수세식 변소를 처음 사용해 보았다. 사용 방법을 몰라 이곳저곳을 눌러 보고 물이 쏴 나오자 아이들과 함께 놀랐다.
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 후 양복 기술을 배웠다. 이태 정도 기술을 배우다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청주농고와 충북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산림청에 근무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쫓겨났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는 군대에 가면 대가 끊기게 되니 산속에 숨어 있었다. 할머니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6세 무렵, 무를 묻어 두었던 구덩이에 빠져 숨졌다. 하나 남은 아들을 애지중지하느라 쌀 두 가마니를 들여 군대에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아버지는 별 할 일이 없어서 책을 뒤적이거나 바깥마당 한쪽에 돼지를 길렀다. 누에와, 양봉도 했다. 잉크를 찍어 노트에 뭔가를 쓰는 것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필체가 좋았는데, 필자 보고 “글씨가 그게 무어냐”며 자주 타박하였다. 농사를 적극적으로 해 볼 생각은 없는 듯했다.
고향에서는 조부모가 중농, 아버지는 대학을 나오고,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울 게 없었다. 다만 가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한패가 되어 어머니를 나무라곤 했는데 그게 유일한 분란이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옆구리에 보따리를 끼고 나갔다가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필자는 처음에는 울고불고했는데 나중에는 외면해 버렸다.
◇그 오해와 진실
아들은 남이다. 고로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아들이 자기 아내 편을 든다고 필자는 당장에 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 필자 남편은 부모 편만 들고 효자이더니, 이제 아들은 마누라 편만 드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렇다고 ‘난 그래서 불행해’ 라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 진다. 그래서 남편이 부모편만 들었을 때 마음이 상했던 걸 떠올렸다. 그 속상함을 며느리가 가져야 하는 거는 더 안 될 일이다. 남편은 자기 부모에게 잘했으니 효자였고, 아들은 자기 부인에게 잘하니 괜찮다고 마음 다잡았다.
◇둘째 아들 1
필자는 둘째 아들은 스스로 자라게 키웠다. 그래서 이 아이는 매우 주체적이다. 유치원 때의 일이다. 봄에 심어 놓은 고구마를 캐 오는 날이다. 다른 아이들은 한두 개만 가지고 왔으나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비닐봉지가 터지도록 질질 끌고 왔다. 물론 주인아저씨가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갖고 가라고 했지만 가져올 수도 있고, 안 가져올 수도 있는 그 순간 아들은 이렇게 스스로 전자를 선택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는 모든 학용품도 스스로 선택해서 사도록 했다. “친구들은 어떤 회사 물건을 사 왔니”, “네가 보기에는 어떤 것이 괜찮아 보이니”라고 한 뒤 돈을 주었다. 그랬더니 물건을 잘 골라왔다.
학교에서 폐휴지를 가져오라고 하면 위층에 사는 외동아이는 그 엄마가 나서서 난리다. 학교까지 날라다 주고, 복도가 시끄럽게 한바탕 소동이다. 아들은 만약 집에 신문지가 없으면 경비아저씨한테 사정이라도 해서 지하에 갖다 둔 신문지를 바퀴 달린 가방에 넣고 혼자 끙끙대며 끌고 간다. 애처롭지만 그냥 두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이스카우트를 하려고 할 때도 “엄마, 보이스카우트 해보고 싶어”라며 “보이스카우트는 단복 입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배우는 첫걸음”이라며 필자한테 설명했다. 그래서 “그래 그럼 한번 해 봐”라고 했더니 아들은 3년 동안 스스로 열심히 했다. 운동장에서 1박 2일 야영훈련 때도 필요한 것 외에는 스스로 물건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랬더니 끝난 후 아이들이 버리고 간 물건 중 먹을 만한 것은 전부 집으로 한 보따리를 가져왔다. 대견했다.
5학년 때는 자전거를 사 달라고 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자전거를 요구하면서 시장조사 뒤 비교 분석해서 설명했다. 그래서 한술 더 떠 “네가 가서 사와라”라며 13만원을 주었다. 그랬더니 서비스품목까지 모두 챙겨왔다. 자기가 골라온 자전거라 그런지 애착을 가졌다.
6학년이 끝나고 초등학교 졸업식에 갔더니 스카우트활동을 잘했다고 교육감상을 받았다. 그런데 담임교사가 “진우 어머니세요. 어쩜 학교를 안 찾아오세요. 원래 진우가 단장감인데 할 수 없이 학교를 자주 오는 어머니 중의 아들을 단장으로 시켰어요”라고 했다. 하지만 필자는 “네 괜찮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란 대답만 했다.
중고생이 되면 학부모들은 학교 앞에까지 자가용을 끌고 가서 모두 픽업하느라 난리다. 그러나 필자는 가지 않았다. 버스 네 정거장 거리였다. 혼자서 해결하라고 했다. 왜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없었겠는가. 잘못하더라도 아이들과 다투더라도 혼자 해결하도록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렇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시는 하고 있었다.
아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학원에서 수업이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청소를 해 놓으면 학원비를 면제해 주겠다고 하니 그 일을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근면, 성실성까지 있는 아이다.
아들이 빠져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게임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얼마나 몰두하든지 ‘어주 구리, 이것 봐라’ 했다. 이때는 필자도 속이 좀 탔다. 전국게임회장이 되어 게임머니를 주무를 땐 특히 그랬다, 그러나 필자는 참았다, 되레 ‘어 이놈 봐라, 사업하면 잘하겠네’고 오히려 좋게 봐줬다. 더구나 대학 가서는 거의 안 했다. 안심됐다. 하지만 결혼하고 게임을 다시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며느리가 싫어하니 담배와 게임을 끊었다. 아마 지금은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가서도 후배와 선배, 교수들과의 관계를 잘 맺었다. 자기한테 자꾸 일을 맡긴다고 투덜댄다. 일을 맡기면 잘해낼 뿐 아니라 믿음이 가서 일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도 ‘완급을 조절해 보라’ 고 조언하는 게 전부다. 사실은 필자도 큰아들한테 보다는 작은아들한테 일을 맡기면 안심이 된다.
군대에 복무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럴 때만 대꾸를 했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신 어머니로서 아들을 향한 기도를 늘 했다. 어머니가 올리는 기도가 대단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운동을 시작한 지 15년 되었지만 도복을 입고 훈련에 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한국체대 체육관에 가 보았다, 열심히 군인으로 생활하고 이다음에 퇴직하면 운동을 보급하면서 살아갈 예정. 자기의 인생목표가 뚜렷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스스로 잘 헤쳐 나가고 있다. 마찬가지다. 상의하거나 어떤 사안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 진지한 의견을 교환한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될 수 있으면 간섭을 하지 않으려 매사 애를 쓴다.
◇밤새워 할 부부이야기
찰칵찰칵 엿장수 가위 소리에 골목이 떠들썩했다. 남루한 차림의 어른과 아이들이 그 옆에서 뭔가 호기심에 찬 눈을 굴리고 있다. 엿판을 실은 손수례 아래에는 구멍 뚫린 솥단지, 고무신짝, 철사 토막까지 구경거리가 많았다. 단조로운 시골 마을에 엿장수의 등장은 일종의 문화행사였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기웃기웃. 무쇠 가위를 엿에 대고 치는 모습은 예술이었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에 놀러 갔는데 엿장수 가위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엿가위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이웃집 여인은 대뜸 "그 가위 마음에 들면 줄까" 한다. 말이 바뀔까 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가위를 받아들고 서둘러 집으로 왔다. 어떤 선물보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퇴근 후 남편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그 가위 어디서 가져 왔나. 당장 버리라”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닌가. . '엿장수 한 조상이 있나 봐, 왜 그래'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은 그냥 “구질구질해서 싫다”는 것이었다. 개포주공아파트 4층, 지금은 분리수거를 하지만 그 당시는 쓰레기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그냥 투하했다. '쨍그랑'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오메, 아까운 엿가위, 지금도 가위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필자 집에는 골동품과 민속품이 즐비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편안하고 좋으니까 모든 것이다. 심란한 마음이 들 때 먼지를 닦으면서 만지작거리면 얼마나 행복한지. 며칠 전 일이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 보더니 "이사를 하게 되면 저런 것들도 가져갈 거야"라고 민속품을 삿대질하면서 다그쳐 묻는다. 필자는 이에 “물론이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남편은 더는 대꾸를 하지 않고 방으로 슬슬 가더니 잠자리에 들었다. 필자 부부는 잘해 보려고 하거나, 좀 더 친하게 지내보려 노력하면 할수록 결국은 티격태격 싸운다. 의지와 사고방식이 참 많이 다르다.
어느 날, 무릎을 탁 쳤다. ‘본처가 아닌 첩처럼 살자’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필자는 달라졌다. 이야기 중에 이상한 기류가 감지되면 ‘아니 여보, 왜 이리 졸리지’ 핑계를 대며 안방으로 들어가 거기서 불을 켜 놓고, 할 일을 하든가 잠을 청하게 되었다.
필자는 남편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한다. ‘그랬군, 이제 고생 끝났네, 대단해요’ 하는 추임새까지 넣어주면서 말이다. ‘미주알고주알’ 해봐야 누더기가 되기에 십상임을 몸의 체득을 통해 알고 있다.
◇인수봉 정상에 오르다
인수봉을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북한산 바위를 오르는 연습을 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동호회에 참가해 원효길, 우정1ㆍ2길. 인수AㆍB길에서 바위에 손을 짚어 기어올랐다. 한 발자국만 헛디디면 그대로 가는 거다. 의도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걸어 본 사람만이 그 맛을 뭐라고 말할 수 있다.
주요 봉우리인 인수봉, 백운봉, 만경대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불렸다. 인수봉은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고양시에 걸쳐 있는 삼각산 세 봉우리 가운데 하나. 세 봉우리 모두 산 정상에 바위 암반이 그대로 노출된 모양이라 산 아래서 올려다보아도 ,직접 올라도 그 위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산이다. 특히 인수봉은 81m가 매끄러운 화강암 봉우리다.
필자가 이 봉우리에 도전한 그 날은 눈발이 스산하게 날리며 찬바람이 제법 불었다.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었으나 그냥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등반을 시작하면 물러날 곳은 없다. 그냥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른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 윽박질렀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정상에 올랐다. 이미 많은 사람이 올라와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필자 팀은 산봉우리의 기쁨을 느끼며, 줄에 의지하여 모두 하산했다. 그때 로프 줄에 엉킨 젊은 두 남녀가 줄을 풀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죽음과 삶은 한 끗발 차이다. 사람들은 사고를 보고도 또 올랐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인수봉에 이르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을 감내하고 훈련했다. 이 세상에서 줄을 타고 인수봉에 오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에 잊지 못할 한 편의 드라마였다.
한국에 유행하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안 주면 맞아서 죽고, 돈을 다 주면 굶어서 죽는다’는 것이다. 듣는 순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지만, 시간이 갈수록 되돌려 생각을 해보니 대단한 풍자적 명언이다. 부모와 자식이란 무얼까?
아침 새벽 5시 자명종 소리가 곤한 잠을 깨운다. 어젯밤 12시, 잠자리에 들던 큰딸아이가 꼭 깨워줘야 한다며 간곡히 부탁을 했다. 올여름휴가 여행은 독일, 이탈리아로 떠난다고 했다. 필자가 사용 후 적립된 비행기 마일리지를 최대한 자기가 이용하여 성수기 가격으로 간다고 한다. 가족 합산 마일리지는 언제나 간단한 질문 하나로 단번에 그저 딸의 몫이 되고 만다. 부모는 자식이 덤으로 얻은 것을 쓰겠다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다. 큰딸은 매년 휴가 때가 되면 해외여행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라며 전 세계를 누비며 여유를 만끽했다.
며칠 전, 큰딸이 여행가방을 사고 싶다며 필자의 생각을 물었다. 그것도 하얀색으로 사겠다는 것이다. 필자에게는 여러 종류의 가방 세트가 있어 당연히 반대를 했다. 그러나 결국 딸은 일을 저질렀다. 어느 날 홈쇼핑에서 택배가 왔다. 다름 아닌 가방이었고 황당했지만 받아두었다. 필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큰 딸에게 조심스럽게 ‘왜 또 샀느냐’고 했다. 더구나 하얀색을 샀으니 때가 타서 어찌 감당하려고 하느냐고 했다. 딸은 미안했는지 색깔을 바꾸겠다고 하더니, 생각 해봐서 반품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필자는 돌려보내기 만을 눈치만 보며 기다렸다. 딸은 결국 그 하얀 가방 안에 짐을 하나 가득 챙겨놓았고 필자는 그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35년 세월, 이날까지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까지 배웅과 마중은 당연한 가족행사였다. 출국할 때도 입국할 때도 언제나 부모는 당연하게 기사 노릇을 해야만 했다. 오늘은 큰 맘먹고 이제부터는 안되겠다 싶어 공항 리무진을 이용하라고 설득을 했다. 정거장이 집 앞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있었고, 딸아이는 어쩐 일 인지 쉽게 수긍을 했다. 큰딸도 어느덧 성인이 되었고 엄마의 충고가 합리적이며 경제적이라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필자도 웬일인가는 싶었지만 잘 된 일이라 생각하며 동네 리무진 정거장 앞까지만 배웅을 하기로 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난리를 쳤지만 어쩌다 보니 훌쩍 시간이 흘렀다. 정해진 아침 시간은 아주 빨리 지나갔다. 딸은 늦을 것 같다며 안달을 했다. 그때, 남편이 옆으로 살짝 오더니 공항까지 데려다 주자고 했고, 필자는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자식들도 자기들이 돈을 벌면서부터 자기 돈에 대한 애착이 상당했고 마음대로 자기 돈을 써댔다. 부모가 쓰는 부모 돈은 당연한 것이고 자기들 돈은 엄청 아까워하는 것도 같았다. 필자도 올해부터는 생각을 달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냉정하게 안 된다고 했다. 남편은 필자의 한마디에 아무 말없이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필자도 마음이 조금 불편하기는 했다. 부모가 늘 하던 일들을 중단하려니 어딘가 모르게 편치가 않았다. 그때 남편이 다시 들어왔다. ‘그냥 보내? 안 데려다 줄 꺼야?’ 다시 한번 눈치를 보며 물어왔다. 필자도 잠시 생각을 하다가 ‘여보 돈 내라고 해요. 치사하지만 기름값 3만 원, 2만 원 왕복 통행료까지 5만 원만 내라고 해요.’ 그러면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준다고 했다.
큰딸이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냐고 묘한 웃음을 보내더니 싫다고 했다. 엄마 아빠가 어떻게 된 것 아니냐며 그냥 리무진을 타겠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필자는 그러라고 했고 오히려 잘 됐다고 위안을 했다. 공항까지는 왕복 3시간, 그것도 토요일 아침이고 또 이래저래 6~7만 원이 훌쩍 들어간다. 자식들은 자기들 돈은 아깝고 부모 돈은 언제나 공짜라는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부모는 자식을 죽기 살기로 키우건만, 자식들은 성공해서 돈 좀 벌기 시작하니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 가는 것 같았다. 어릴 적 끔찍하게 약속하던 효도라는 말도 옛말이 된지 오래인듯했다. 그저 부모는 언제까지나 베풀어 주기만 해도 되고 자식들은 이따금씩 하는 명품 선물이 대단한 것으로만 착각을 하는 것이었다. 부모가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 최고로 키워 놓으니 가끔씩은 부모 마음을 후벼 파 놓기도 한다. 그리고도 자식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다. 부모는 마음 아프고 속상해 죽을 것 같아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것만 같았다.
전생에 무슨 업보로 인연을 맺었기에 부모는 자식에게 한없이 주어도 차지 않는 것이고, 자식들은 화가 나면 대책 없이 뿜어내기만 한다. 속상해서 울 때면 엄마 아빠가 뭐 해준 게 있냐며 부모 가슴을 있는 대로 후벼 파 슬프게 만든다. 자식들이 제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서 나 알게 될 것인가 싶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영원한 미련으로 남아 쓸쓸해진다. 한국에 와서 들려온 웃지 못할 이상한 이야기가 실감이 나는 듯해서 필자도 어느 날부터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아침부터 쏟아지는 더위 속에 리무진을 태우기 위해 10여 분을 길거리에 서 있었다. 보내고 돌아오는 내내 필자 부부는 잘한 짓인가 싶어 영 찜찜했다. 긴 시간이 지난 후 잘 도착했다는 카톡 문자를 받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부모라는 자리는 왜 이리도 무겁고 힘든 것일 까. 다 큰 자식을 여행 보내면서도 마음은 편치가 않았다. 필자 부부는 자식들 짝사랑에서 냉정하게 해방되고, 부부의 앞날이나 생각하자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자식과 정 떼기를 하는 불안한 첫걸음 날이었다.
제주의 자연은 아름답다. 문 열면 멀리 눈 덮인 한라산이 보이고 집앞 텃밭에는 노란 유채꽃이 물감을 뿌려 놓은 듯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마음만 먹으면 조금만 나가도 바닷물에 발 담글 수 있고 좋아하는 낚시도 원 없이 할 수 있는 섬, 제주.
그런데 남자는 제주살이를 끝까지 찬성하고 여자는 반대하고 있다. 남자는 자기가 평생 꿈꾸던 일이라 하고 여자는 답답해서 섬에서 못 살겠다고 한다.
필자가 알고 있는 구본홍(63·남·정년퇴직·광명시)씨는 작년부터 제주살이 하고 있다. 그는 모 중소기업의 이사 직함을 끝으로 꽃중년이라 불리는 61세에 정년퇴직했다. 퇴직하자마자 오라는 회사가 있었지만, 과감하게 거절하고 아내와 함께 제주행을 선택했다. 그곳에 가기까지 아내와의 견해차가 많아 쉽지 않았다.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온 자신에 대한 보상으로 현재는 놀멍쉬멍 느린 삶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아내 김옥녀(60·여·주부) 씨는 아직도 낯선 곳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제주 이주를 찬성하는 남자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생을 마칠 것인가? 어느 정도의 여력이 된다면
남은 생을 갈무리하며 건강하고 즐겁게 사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구본홍 씨의 퇴직 후 남은 재산은 중형 아파트 1채와 퇴직금. 그리고 다달이 나오는 연금이 있다. 지금껏 성실히 살아온 결과다. 욕심을 버리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한다. 들어보니 앞으로 20년 후까지의 계획도 구체적으로 세워놓았다.
제주에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텃밭이 있는 시골집을 보증금 2천만 원에 1년 치 집세를 선납으로 200만 원을 주고 얻었다. 살아보니 자신의 적성에 딱 맞는다고 한다. 가능하면 제주에서 오래 살고 싶단다. 전입신고도 마쳤다. 제주도민이 되면 비행기요금 할인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진다. 온 지 일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과 형님 아우하며 잘 지내고 있다. 비록 외지인이지만, 현재 그 마을에서 제일 어리기 때문에 어른들이 막내라고 챙겨주고 있다. 섬이란, 원래 타지사람을 ‘육지 것’이라 배척하는 경우가 있는데 성품 좋은 60대 젊은 부부가 마을에 들어와 나이 든 이웃을 잘 도와준다고 칭찬이 자자하다고 한다.
남자가 제주이주를 찬성하는 이유는 드디어 사람 사는 것 같다고 한다. 친구들도 모두 부러워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낯선 타지에서 살아가는 비결은 잘난 체 있는체하지 않고 다가가 도움을 받을 생각보다 내가 먼저 도울 것이 없는지 찾아보는 것이라고 한다. 마을 어른들한테 잘하다 보니 이 집은 채소와 과일 생선 등을 이웃 사람들이 건네주는 것만으로도 넘치고 있으니 생활비도 서울살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적게 든다고 한다. 다만 남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석 달에 한 번 여자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답답함을 풀기 위해 1달에 한두 번 서울에 다녀온다고 한다. 앞으로는 두어 해는 유유자적 지내다 원하면 일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제주도는 일손이 부족해 부지런하면 남녀노소 수입을 낼 수 있는 일거리가 많다. 부인의 말로는 남편이 요즘은 갯바위 낚시에 재미 들려 시도 때도 없이 고기를 잡아 오기 때문에 가끔은 손질하기 귀찮을 때도 있다고 행복한 푸념을 한다.
제주 이주를 반대하는 여자
현재 사는 집의 위치는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올레길 20코스 중간쯤이다. 15K 이내에 성산리 일출봉과 함덕 해수욕장이 있다. 공기 좋고 조용한 건 좋지만, 제주살이를 불편해한다. 이유는, 물론 제주에도 문화공간이 있긴 하지만 도심처럼 가까운 곳에 있지 않고 지인들과의 잦은 만남을 가질 수 없어서이다. 그 가운데 제일 불편했던 경우는 꼭 참석해야 할 일이 있어 김포행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기상악화로 결항이나 출발시각이 지연될 경우다. 김포에서 제주까지 비행시간만은 1시간 정도 걸리지만, 출발부터 도착지까지는 총 4시간 정도 소요되니 힘들다. 그 외에 금융기관과 대형마트, 편의시설이 적고 멀리 있어서 도심 같으면 5분 거리인 것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게 힘들다고 한다.
여자는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만약 남편이 끝까지 우긴다면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니 양보할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아무튼, 둘만의 시간이 많다 보니 부부간의 정은 더 깊어지는 거 같다고 한다.
남자는 제주도가 좋다고 무작정 내려와서 대문 굳게 닫고 자기만의 성안에서만 살면 이웃의 곱지 않은 시선과 외로움 때문에 몇 달도 버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생긴다고 한다.
제주의 슬픈 역사인 4·3사태를 보면 그들이 왜 외지사람들한테 ‘육지 것’이라 하는지 이해된다. 제주에서 태어났어도 본적이 육지이거나 아버지 대에 제주에 이주했다면 수십 년을 살아도 제주도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타지에 살면서 부딪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름다운 자연풍광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견딜 만한 가치가 있는 땅이다.
1998년 8월 남편은 왕복 비행기 표 1장과 이민 가방에 달랑 옷가지 몇 벌을 담아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했다. 6개월에 걸쳐 필자가 설득시키고 단행한 1차 이민이었다. 온 나라에 경제 위기와 그 도미노 현상으로 가정이 휘청거려 별다른 대책이 없어 무조건 단행한 모험이었다.
온 살림에 빨간 딱지가 붙고 집은 경매로 날아갔다. 게다가 여기저기 쏟아지는 빨간 독촉장들,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정신적 싸움에서 오는 고달픔은 차라리 휴식이 필요했다.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낯선 곳이지만 먼저 가서 여기저기 살펴보기 위한 작전이었다. 큰딸은 미국 고등학교 기숙사로 보내고 초등학교 작은딸만 데리고 가느라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무너져가는 가정을 직접 나서서 수습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떠나고 1년 후, 남편의 미국 생활은 그럭저럭 안정을 취해가는 것 같았다. 코리아타운에서 세탁소 일자리를 찾았고 얼마 안 되는 주급(주말마다 정산해줌)이었지만 혼자 생활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수시로 국제전화로 연락하며 아이들 걱정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남편이 떠나고 난 그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살림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태연하게 입술을 깨물며 다 살게 마련이라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나갔다. 막내로 태어났으나 큰아들 같은 남편은 힘든 것 다 견딜 수 있는 데 너무 외롭다고 전해 왔다. 서둘러서 작은아이 미국 비자를 만들어 이듬해 8월 이민 가방을 챙겼다. 작은 아이마저 보낸 그해 9월의 계절은 그림자들로 가득한 기나긴 방황의 몸서리치는 고독한 시간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자 극적인 상봉을 위해 기숙사에 있는 큰딸과 서둘러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빠와 작은딸, 큰딸과 엄마, 눈물의 오작교 시간이었다. 남편은 캘리포니아의 태양에 까맣게 탄 노동자 얼굴로 덜덜대는 중고차를 끌고 나와 포옹하며 가족을 맞이했다.
온 가족은 만나자마자 코리아타운 한복판에 있는 북창동순두부 집으로 달려갔다. 값싸고 한국 정서가 담겨 있어 누구나 좋아하는 소박한 음식이었다. LA에서는 한 번씩 거쳐 가는 꽤나 이름난 곳이었다. 얼마나 맛나게 먹어대는지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남편은 부자 동네 아고라힐의 커다란 성 같은 집(방 5개짜리)에서 작은 방 하나를 한 달에 550달러에 렌트해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아이를 맞이하며 씨미벨리라는 시골 동네로 옮겨야 했다. 중학교 입학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한국 아이들이 없는 곳, 코리아타운에서 먼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왜냐하면 한국 아이들이 많은 코리아타운은 영어가 늘지 않기 때문이었다.
씨미벨리 집은 남편이 나가던 교회의 도움으로 한국 목사님 집의 방 두 개를 900달러에 얻어 마련했다. 남편은 불교 가정 출신이나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갔다. 교회만이 유일한 한국 사람들과 교류의 장소라며 주보 만드는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미국은 딸과 한방을 쓰는 것은 불법이어서 방 두 개짜리를 장만했다. 부엌은 없었으나 마당이 딸린 자그마한 예쁜 주택이었다. 가족은 큰방 옆에 붙어 있는 그라지(차량을 넣어두는 창고)에 조그마한 부엌을 만들었다. 온 가족이 함께하니 짧은 시간 안에 대충 그럴듯하게 아기자기한 부엌이 탄생했다. 누구나 처음 이민 오면 그렇듯이 이 사람 저 사람 살림을 가져다주었다. 짝 잃은 총천연색 그릇들이 부엌 풍경을 장관으로 만들어 주었다.
가족은 이사를 마친 후 코리아타운으로 달려가 삼겹살과 상추 등 각종 채소를 사와 파티를 벌였다. 미국 백인 동네에서 모처럼 만에 조우한 한국 이산가족은 한국 사람 사는 냄새와 삼겹살 내음이 넘실거리는 행복에 취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6월의 중순, 아직 태양열이 그렇게 극성을 부리기에는 이른 초여름이다. 잎들이 겨우 연록에서 초록으로 바뀌려는 시간인데 그 하루 내가 김포공항을 통하여 한국을 떠나는 날에는 이미 그 전날의 극성스런 열기로 대지도 덥혀져있었고 당일의 새 기운으로 기습작전이라도 하는 양 쏟아 내리는 햇빛으로 모든 고형의 물질들은 졸아들고 녹여날 것 같은 무더위였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도 없는데 날씨는 그렇게 식물의 삼투압처럼 오히려 내게서 떠나는 사람의 지극히 작은 여분의 에너지 움직여 보려하고 활동해 보려 안간힘 쓰는 에너지를 빼앗아버리는 열기다.
70년대 말부터 아니면 그보다는 좀 빠르게 한국의 산업화가 그 용트림을 하기 시작하였을거다. 그 분위기에서 시대의 흐름을 탄답시고 시도하였던 작은 규모의 자영업은 경험부족과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실패를 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누군들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하는 성숙함이 있을까. 누군가 째째하다면 가까운 사람을 원망하고 조금이라도 책임을 안다면 그 사회 그 시대 그 역사를 원망하지 않겠는가, 나는 사회를 조금 원망할 만큼의 덜 됨과 섭섭함과 앙금이 있었다.
빈 손, 빈 손도 아니고 후불 비행기티킷을 사서 두 아이와 함께 우리 네 가족이 김포국제공항을 떠난 날이 육중한, 특수합금으로 만든 비행기라도 녹여낼 듯한 무더위의 1980년 6월이었다. 동과 서로 멀다는 것 문화가 다르다는 것 인종이 다르고 그 곳은 이미 디벨로프드(developed) 발전을 이룬 곳이라고, 생활방법등등으로 다름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밤낮의 시차가 있지만 계절은 동위선상이라 알았다 한국이 삼복더위에 맞먹는 열기였기에 우리는 반팔소매의 체온을 낮게 지켜줄 수 있는 가벼운 옷을 입고 떠났다. 학력을 경력을 한국에서의 모든 기득권들을 비행기 안에서 태평양바다에 던져버리라는 선배이민들의 충고가 있을 만큼 이미 미국의 한인이민사회도 작은 공동체를 이룰 만한 크기로 자라있었다.
나는 버릴 건 버렸고 마음 각오가 단단하여 새 출발에는 완벽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새 출발에 대한 설렘보다는 불안을 안고 김포공항에서 나에게 던진 질문을 비행 중 내내 생각했다 대답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 한국사회가 나를 밀어내었나? 내가 한국을 떠나는 것인가?’
비행기가 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들려오기 전부터 억수로 퍼붇는 장대비는 이미 내 옷과 몸은 물론 내 마음까지 물난리를 만난 고통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비행기도 꾸물거리며 착륙하였고 겁먹어 착륙한 후에도 살그머니 까치발걸음으로 타맥(tarmac)을 향하여 움직인다. 춥고 서글픈대로 입국절차를 마치고 공항로비의 의자에서 한숨을 돌리는데 추움이 뼈속을 파고드는 눈 폭풍 속의 겨울 냉기다. 추위 속에 가벼운 여름 옷차림은 누추하고 서러워 내 손이 빈 손이라는 것을 더욱 강조하면서 두려움을 준다. 창밖으로 보이는 비 내리는 모양은 폭포수같기도하고 강이 하늘로부터 버티칼 흐름을 하는 집중 폭우다. 공항의 광활한 활주로가 하늘로부터 내리는 물과 지상의 물이 합하여 작은 강을 이룬다. 얼마나 오래 동안 비가 내리려는지 검은 구름이 공항건물을 완전히 보쌈하였고 모든 자연의 빛은 달아나버렸다 . 버티칼로 흐르는 물, 그 물을 걷어내려는 자동차와이퍼의 요란한 움직임 뿐 공항을 떠나 친구집으로 가는 동안 내게 보여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겨우 반년 전에 공부하러 온 친구의 아파트 동네 길은 종이 깡통 플라스틱용기들이 어지러이 빗물을 타고 옮겨다니는 한심하고 을씨년스러운 공포감마져드는 삭막한 풍경이다. 풍요한 미국이라는 정보도 꿈도 신천지를 찾는 필그림의 각오도 너무 허무하게 무너지려는 순간 비는 강풍을 동반하여 표효하며 먹이를 찾아 헤메는 산짐승 울음을 운다.
어련할까 친구가 말한다
“이건 아직 미국이 아니다. 니가 살 미국이 아니니까 미리 결론내리지마라”
그 날 김포공항의 날씨와 케네디공항의 날씨가 내 속의 조국과 고향을 점지한 건 아닐까?
1960년대 서울운동장(뒷날 동대문운동장) 야구장에 드나들던 중·장년 야구 팬들은 3루수와 유격수 등 내야수들의 송구를 코끼리가 비스킷을 넙죽넙죽 받아 먹듯 하던 한일은행(우리은행 전신) 1루수를 생생히 기억할 것이다. 그때도 몸무게가 ‘0.1t’을 넘었던, 덩치 큰 이 선수가 뒷날 한국 프로 야구에서 당분간 깨지기 힘든 ‘한국시리즈 V10’을 거두는 지도자가 되리라고 내다본 야구 팬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김응룡(金應龍)은 20세기 초 이 땅에 야구가 들어온 이후 배출된 수많은 야구인 가운데 가장 명예로운 이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마추어 때는 선수로서 아시아선수권대회 정상에 올랐고 지도자로는 세계 규모 대회에서 한국을 처음으로 정상에 올려놓았다. 1960년대에 벌어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한국이 출전하는, 타이틀이 걸린 유일한 국제 대회였기에 스포츠 팬들에게는 지난해 11월 한국이 초대 챔피언이 된 프리미어 12나 2006년 4강, 2009년 준우승에 빛나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 그리고 올림픽(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에 못지않은 관심을 모았다.
프로에서는 해태 타이거즈(9차례)와 삼성 라이온즈(1차례) 사령탑을 맡아 한국시리즈 10차례 우승의 놀라운 기록을 세웠으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프로와 아마추어 혼성 대표팀을 이끌고 출전해 동메달을 차지했다. 그라운드에서 물러난 뒤 경기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로 야구단 사장에 올랐다. 야구인 김응룡은 지난날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나오기 힘든 영광스러운 길을 걸었다.
김응룡은 1939년 음력 3월 1일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대부분의 프로필에는 1941년 9월 15일로 돼 있다. 지난해 음력 3월 1일은 양력 4월 19일, 일요일이었다. 평생 야구에 파묻혀 살아온 그는 자신의 생일조차 챙겨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런데 지난해 생일은 달랐다. 감격할 만한 일이 있었다.
생일 하루 뒤인 4월 20일 낮 12시께,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 선동열 전 KIA 타이거즈 감독을 비롯한 ‘해태 왕조’의 주역들이 스승인 김응룡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는 김응룡을 행정적으로 보좌해 V9 신화를 이룬 이상국 전 해태 단장(전 KBO 사무총장)도 함께했다. 자리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선동열 등 제자들에겐 ‘영원한 우리들의 감독’일 수밖에 없는 스승 김응룡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김응룡은 이 자리에서 “이런 생일 자리를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다. 해마다 (4월이면) 시즌에 들어가 있어 (생일이) 며칠 지난 뒤 집으로 가 식구들과 늦은 생일 밥상을 받은 게 고작이었다”면서 제자들의 성의에 거듭 고마워했다.
김응룡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발발한 한국전쟁 여파로 아버지 손에 끌려 남쪽으로 왔다. 북한에 있을 때는 축구를 했다. 실업 야구 시절 이후 그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축구 선수’ 김응룡은 왠지 어색하다. 부산 개성중학교에서도 축구를 했으나 야구부 주장이 “넌 이제부터 야구 선수다”라는 한마디에 졸지에 야구인의 길을 걷게 됐다. 반세기 전 그때도 야구 도시였던 부산에서는 이런 일이 흔히 있었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그 무렵 사실상 프로인 실업 야구 강호 농업은행(오늘날의 농협) 야구단 입단이 불발된 건 김응룡의 야구 인생에 거의 유일한 좌절이었다. 이후 한국운수 야구단에 연습생으로 입단했고 한일은행에서 선수 생활의 절정기를 이뤘다.
호적상으로 22세 때인 1963년, 김응룡은 야구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해 9월 한국은 서울운동장에서 제 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재일동포 출신 투수 신용균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을 1차 리그에서 5-2, 2차 리그에서 3-0으로 꺾는 등 1, 2차 리그 합계 5승1패로 1954년 대회 창설 이후 처음으로 우승했다.
신용균 외에 역시 재일동포인 서정리와 배수찬, ‘아시아의 철인’으로 불린 박현식, 박영길, 최관수, 김청옥, 성기영, 박정일, 하일 등 이 대회 우승 멤버는 야구 올드 팬들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마운드에 신용균이 있었다면 타격에서는 김응룡이 발군이었다. 김응룡은 23타수 9안타, 타율 3할9푼1리로 타격상을 받았고 사실상의 결승전이었던 2차 리그 마지막 경기인 일본 전에서 1회 선제 타점과 8회 승리에 쐐기를 박는 2점 홈런 등 혼자서 모든 점수를 뽑았다. 2000년대 ‘국민 타자’가 이승엽이면 1960년대 ‘국민 타자’는 김응룡이었다.
1960년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제 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 이어 국내에서 벌어진 아시아 지역 구기 종목 선수권대회에서 거둔 두 번째 우승에 온 나라는 기쁨에 들썩였다. 이 대회 우승과 함께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특별 지시로 1966년 9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 야간 경기를 할 수 있는 조명 시설이 설치됐다.
1966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한일은행 선수 겸 코치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김응룡은 1977년 국가 대표팀 감독에 선임된 첫 번째 국제 대회에서 지도자로서 ‘대박’을 터뜨렸다. 거의 모든 야구 팬들이 알고 있는 슈퍼월드컵 우승이다. 한국 야구가 세계 규모 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상에 오른 이 대회에 김응룡은 코칭스태프로 유백만(한국화장품 감독)과 이재환(연세대학교 감독)을 거느리고 출전했다. 유남호(아마추어 롯데 자이언츠) 이선희 이해창(이상 육군) 최동원 김봉연(이상 연세대) 임호균(동아대) 심재원(한국화장품) 김재박(영남대) 배대웅(기업은행) 윤동균(기업은행) 장효조 김시진(이상 한양대/ 이상 당시 소속팀) 등 신세대 야구 팬들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선수들이 주전이었다.
제 3회 슈퍼월드컵 세계야구대회는 1977년 11월 니카라과에서 열렸다. 한국은 9개국이 출전한 대회 예선 리그에서 숙적 일본에 0-1로 졌으나 개최국 니카라과를 8-1로 크게 물리치는 등 5승3패를 기록해 8전 전승의 미국에 이어 2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 첫 경기에서 미국에 0-2로 졌으나 니카라과를 13-3, 7회 콜드게임으로 물리친 데 이어 콜롬비아를 4-1로 제치고 상승세를 타더니 푸에르토리코와 연장 12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4-2로 이겨 3승1패로 최소한 3위를 확보했다.
한국은 5차전에서 일본과 다시 만나 이선희가 완투하며 3-2로 승리해 미국과 4승1패로 공동 1위가 됐다. 왼손잡이 이선희의 이 대회 호투는 이후 각종 국제 대회에서 일본이 한국의 왼손잡이 투수만 만나면 고전하는 시발점이 됐다. 애초 대회 규정은 승률로 순위를 가리게 돼 있었다. 규정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의 공동 우승이었다. 그러나 대회 주최 측이 갑자기 우승 결정전을 갖는다고 발표해 한국과 미국은 이 대회에서만 3번째 경기를 갖게 됐다. 한국은 예선 리그에서는 미국에 4-5로 졌다.
미국은 대학 선발팀이었다. 한국은 프로가 출범하기 전이었으니 두 나라 아마추어 야구 최고 선수들이 기량을 겨룬 것이다. 한국은 2-3으로 뒤진 6회 초 김봉연의 솔로 홈런으로 3-3 동점을 만든 데 이어 2사 2, 3루에서 이해창이 2타점 중전 결승타를 터뜨려 5-4로 이겼다. 12월 2일 귀국한 선수단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치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지도자 김응룡의 금의환향이었다.
그리고 1983년, 1년 여의 미국 야구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해태 지휘봉을 잡은 김응룡은 그해 곧바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면서 화려한 프로 시대의 막을 열었다.
선수 김응룡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1971년 제 9회 대회였다. 한국은 1963년 제 5회 대회에 이어 이 대회에서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이 대회는 야구 올드 팬들에게는 ‘애국 판정’으로 특별히 기억된다. 호주가 처음으로 참가한 이 대회 1차 리그에서 한국은 고전을 거듭했다. 첫 경기에서는 필리핀을 2-0으로 잡았으나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과 0-0으로 비긴 데 이어 일본에 2-3으로 역전패했다. 이어 호주에도 4-5로 져 1승1무2패로 5개국 가운데 4위로 처졌다. 일본은 4전 전승으로 1차 리그 1위에 올랐다. 이 와중에 김영조 감독이 저조한 성적에 충격을 받고 입원하고 김영덕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은 2차 리그 첫 경기에서 필리핀을 5-1로 완파한 데 이어 자유중국을 9-1로 크게 이겼다. 한국은 순항하고 있었지만 2차 리그는 이변의 연속이었다. 일본은 첫 경기에서 필리핀을 7-2로 꺾었지만 이후 호주에 0-2, 자유중국에 2-3으로 연패했다. 주심으로 들어간 ‘빨간 장갑의 사나이’ 김동엽 등 한국 심판들의 스트라이크, 볼 판정에 일본 선수단이 아시아야구연맹에 항의하는 소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국은 호주를 4-0으로 눌러 4승1무2패를 기록하며 5승2패의 일본에 반 경기 차로 따라붙었다. 한국은 대회 마지막 날 일본을 8-3으로 대파하고 우승했다. 한국 심판들의 ‘애국 판정’ 논란이 있었지만 극적인 역전 우승에 야구 팬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열광했다. 이 대회에서 김응룡은 30타수 9안타(0.300)로 타율 5위에 올랐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중·장년 스포츠 팬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스포츠의 매력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동대문운동장(축구장·야구장·테니스장·수영장)이나 효창운동장 그리고 리모델링을 하기 전 장충체육관 등에 가면서 스포츠의 세계로 들어섰을 수도 있고 국제대회에 출전한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상을 라디오 중계방송을 통해 듣게 되면서 스포츠의 매력에 끌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다니는 학교에 운동부가 있어 응원에 동원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포츠에 익숙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글쓴이는 두 번째 사례에 든다.
1960년대 중반, 강원도 신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신철원국민학교에 다니던 아이는 라디오 중계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복싱 정신조와 사쿠라이(뒷날 스포츠 기자가 된 뒤 당시 자료를 살펴보고 사쿠라이 다카오라는 ‘풀 네임’을 확인했다)의 밴텀급 결승전 경기, 그리고 1964년과 1965년 캐시어스 클레이(뒷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와 소니 리스턴의 프로복싱 세계 헤비급 타이틀매치 등을 들었다. 그 아이는 물론 글쓴이다.
그런데 중학교 때 이 아이는 이번 호의 주인공인 김영기(金英基) 때문에 또 다른 스포츠의 매력에 빠졌다.
현직 프로농구연맹(KBL) 총재인 김영기는 배재고~고려대를 거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국가대표를 지냈다. 김 총재는 화려한 드리블로 대표되는 뛰어난 개인기로 농구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김 총재는 1965년 은퇴한 뒤 직장 생활 틈틈이 박정희장군배 동남아시아여자농구대회, 미국프로농구(NBA) 등 각종 경기의 해설을 맡아 선수 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밀워키 벅스와 같은 NBA 구단 이름이나 오스카 로버트슨, 빌 러셀 등 1960년대 NBA 스타플레이어의 이름을 김 총재의 해설로 알게 됐다.
김 총재는 각종 기록을 근거로 특정 팀 간 승패는 물론 예상 스코어까지 내놓아 농구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요즘 같으면 스포츠 통계 회사에서 컴퓨터로 할 일을 거의 반세기 전에 수작업으로 한 것이다. 특히 1967년 서울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때는 이 같은 예상이 족집게처럼 들어맞아 농구 팬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김 총재의 해설은 그의 선수 시절 경기력만큼이나 뛰어났다. 어린 시절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 일화를 스포츠 기자가 된 뒤 김 총재에게 이야기했더니 김 총재는 “우연히 맞혔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제는 폐간된, 2000년대 초반 스포츠 팬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스포츠 2.0’은 배재고등학교 시절 김영기를 “179㎝의 키, 가냘픈 체구였지만 리드미컬한 드리블, 요즘 더블 클러치라고 하는 이중 모션과 아마도 한국 농구 사상 처음일, 한 손 슛을 던지는 선수”라고 설명했다.
한국 남자 농구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이어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 1936년생인 약관의 김영기가 출전했다. 한국 농구의 경기력이 세계 수준에 크게 못 미쳐 출전 15개 나라 가운데 14위에 그쳤지만 우승국 미국의 빌 러셀 같은 뛰어난 선수들의 플레이와 선진적인 전술을 본 것은 뒷날 지도자 김영기에게 큰 공부가 됐다.
김영기는 1964년 도쿄 대회에 두 번째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로는 노장인, 우리나라 나이 29세 때였다. 1960년대 후반, 지도자와 선수로 힘을 모아 한국 남자 농구의 1차 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신동파가 20세로 대표팀의 막내였다. 이 대회에서도 한국은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 출전 16개국 가운데 꼴찌에 그쳤다. 개최국 일본은 10위에 올랐다. 이 무렵 한국 남자 농구는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필리핀과 일본에 이어 3위를 하는 등 아시아권에서도 3위 안팎의 실력이었다.
농구인 김영기의 진가는 은퇴 이후 더 빛났다.
김영기는 33세 때인 1969년 11월,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코칭스태프에 합류했다. 보직은 코치였으나 실질적인 사령탑이었고 대표 선수들 가운데 김영일, 김인건, 신동파 등은 선수 생활을 함께한 직계 후배들이었다. 9개 나라가 출전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개최국 태국에만 93-92로 아슬아슬하게 이겼을 뿐 일본과 자유중국(오늘날의 대만) 등을 가볍게 물리친 뒤 실질적 결승전인 필리핀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95-86으로 이겨 대회 사상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신동파가 기록한 50점은 신세대 농구 팬들에게도 화젯거리가 되고 있다.
김영기는 신동파를 슈터로 활용하면서도 그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공격 전술과 다양한 수비 전술로 한국 남자 농구를 아시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 무렵 다른 종목들도 그랬지만 아시아 정상에 오른 대표팀은 김포국제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등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년여 뒤인 1970년 12월, 역시 방콕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김영기가 이끄는 남자 농구 대표팀은 조별 리그에서 이란을 110-77, 홍콩을 116-51로 연파한 데 이어 필리핀을 79-77로 따돌리고 조 1위로 6개국이 겨루는 결승 리그에 올랐다. 한국은 결승 리그에서 필리핀에 65-70으로 잡혔으나 강호 이스라엘을 81-67로 물리쳐 물고 물리는 혼전 속에 금메달의 영광을 안았다. 서울에서 열기로 돼 있다가 재정 문제로 반납한 이 대회에서는 농구와 축구가 동반 우승하는 쾌거를 이뤄 온 나라가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두 대회 사이에 한국 농구사에 오래도록 남을 또 하나의 기록이 수립됐다. 한국은 1970년 5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제6회 세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해 11위를 기록했는데 이 성적은 2015년 현재 최고 순위다. 이 세 차례 대회에 출전한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의 지휘관이 김영기다.
김영기는 농구인의 범주에만 머물지 않았다. 1982년 대한체육회 이사와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1983년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지내며 체육 행정가로서 활동했고 40대 후반의 나이였던 1984년에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한국 선수단 총감독을 맡았다. 이 대회에서 고려대학교 후배인 조승연 감독이 이끄는 여자 농구가 중국을 제치고 은메달을 차지했다.
1985년부터 12년 동안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한 김영기는 1997년 KBL 전무이사를 맡아 프로농구 출범에 큰 힘을 보탰다. 이후 KBL 부총재를 거쳐 2002년 11월 KBL 제3대 총재로 추대돼 1년 5개월 동안 프로농구를 이끌었다. 2003년 12월 국내 프로농구 사상 첫 몰수 경기 파문으로 2003~2004년 시즌 뒤인 2004년 4월 사퇴해 10년간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지난해 5월 제8대 KBL 총재로 선임되면서 일선으로 돌아왔다. 이는 오랜 기간 농구계 원로로서 쌓아온 신망의 결과다.
그의 또 다른 이력이 있다. 기업은행 지점장과 신용보증기금 전무이사, 신보투자 사장 등 금융인으로서의 경력이다. 선수 시절 그는 미국의 유명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를 탐독했다. 요즘 스포츠계의 화두인 ‘공부하는 운동선수, 운동하는 학생’의 본보기다.
농구에도 ‘거스 히딩크’가 있었다
농구 올드 팬 가운데 남자 농구 대표팀이 서울 용산에 있는 미 제8군 체육관에서 미군과 친선경기를 하는 장면을 TV로 본 적이 있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참패 이후 한국 남자 농구에 축구의 거스 히딩크 같은 인물이 나타났다. 1965년 국가대표팀 코치를 맡은 미 제8군 소속 찰스 마콘 소위다. 미 제8군 사령부가 대한농구협회에 코치로 추천한 마콘 소위는 미국 대학 농구의 명문 데이비슨 칼리지의 주전 가드 출신이었다. 데이비슨 칼리지는 1964~1965년 시즌을 앞두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가 전미 대학 랭킹 1위로 꼽을 만큼 1960년대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농구 본고장의 명문대 출신인 젊은 장교는 열과 성을 다해 한국 남자 농구 대표 선수들의 훈련을 도왔다. 마콘 소위가 1967년 임기를 마치고 한국을 떠나자 그의 자리를 제프 거스플 중위가 이어받았다. 거스플 중위는 페어레이디킨슨대학교에서 선수 생활을 한 농구인이었다.
이들의 노력과 함께 미 제8군은 1968년 1월 남자 농구 대표팀의 미국, 캐나다 원정을 지원했다. 이인표, 신동파, 김무현, 김인건, 유희형, 박한, 최종규, 신현수, 곽현채, 김정훈은 미군이 제공한 군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 본고장 농구를 익혔다. 북미 원정에 코치로 참가한 거스플 중위는 이후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 한국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마콘 소위와 거스플 중위가 떠난 이후 한국은 19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