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에 걸린 남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남편이 밥을 먹는데 아내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 밥을 먹던 남편이 휴지에 밥을 싸기 시작한다. 누굴 주려고 밥을 휴지에 싸냐고 묻자 남편은 “너 먹어” 하며 휴지에 싼 밥을 아내에게 내민다. 아내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껄껄 웃고 만다.
TV에서 보았던 다큐의 한 장면이다. 아내 사랑이 지극했던 남편이 치매 때문에 기억을 하나씩 지워가고 있는 걸 지켜보는데 코끝이 찡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겪는 치매는 다큐처럼 찡하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그저 힘겹고 혹독한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시아버지는 대문에서부터 손녀딸을 큰 소리로 부르며 들어왔다. 예쁜 손녀를 위해 매일 스펀지케이크를 사왔다. 이걸 누가 먹는다고 매일 사오냐고 시어머니는 현관에서부터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크를 다른 빵으로 바꾸어 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환불해 달라는 미안한 부탁을 하러 제과점으로 뛰어다니긴 했어도 시아버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우리는 몰랐다.
가끔씩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올 때도 있었다. 길을 잃어 힘들었다며 히쭉 웃었다. 아버님이 좀 이상하다고 하니 어머니는 “얘는 별말을 다 한다”며 서운해했다. 그때 아버님은 60대 중반을 막 넘긴 나이여서 가족들은 아버님에게 다가오는 치매 증상을 얼른 알아채지 못했다.
왜 이렇게 늦게 찾아왔냐는 의사의 말에 반성할 새도 없이 아버님은 무섭게 나빠졌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모르고, 사랑했던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해 가족 모두를 고통에 빠뜨렸다. 가끔씩 정신이 돌아올 때면 수줍게 웃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아내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해댔다. 과묵하고 점잖던 집안의 가장이 심술쟁이 욕쟁이 할아버지로 변해갔다.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욕설은 정확히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그것이 아내의 의무라 생각했는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뽀얗던 어머니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가는 걸 보고 그 고생을 짐작해볼 뿐이었다.
치매에 걸려 고생하다가 돌아가신 아버님을 본 후 치매가 암보다도 더 무서운 병이라는 걸 알았다. 가족들은 말은 안 하지만 치매에 대한 불안증을 안고 산다. 만일 치매에 걸린다면 본인에게는 물론, 가족들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준다는 걸 생생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치매는 노화의 일부이고 누구든 걸릴 수 있는 병이지만 건강한 생활습관만 길러도 발병률이 50%나 감소된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생활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다. 삼성서울병원 나덕렬 교수는 헬스장에서 근육을 키우듯 뇌도 열심히 훈련하면 건강해지고 근육이 생긴다며 술, 담배를 끊고 바른 식습관으로 체중을 조절하고 운동을 하는 등 바른 생활을 할 것을 권했다. 그러면서 독서나 글쓰기, 악기와 외국어 배우기 등 앞쪽 뇌를 자극하는 활동이 치매 예방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그가 권한 것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실천하기 어렵지 않은 항목들이다. 치매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질환이 아니고 발병 후 증상이 나타날 때까지 20년 이상 긴 잠복기를 거친다. 60대에 온 치매는 이미 40대에 내 몸속에 잠복해 있던 것이다. 그러니 치매가 걱정된다면 40대부터 미리미리 치매 예방습관을 들여야 한다. 이것이 치매로 아버님을 떠나보낸 나와 우리 가족이 얻은 가슴 아픈 교훈이다.
5070세대 대부분은 보릿고개가 있을 정도로 먹고살기 힘들던 지난날이 있었다. 청년들에게 나의 어린 시절 경험을 들려주면 마치 임진왜란 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현재의 청년들이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으면서 개개인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어른들이 굶주리며 일할 때 지금의 시니어들은 가사를 도와가며 열심히 공부했고 달려왔다. 책도 부족하고 TV나 라디오도 흔치 않았던 시대, 아이들의 정서 함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친구와 싸웠을 때 어떻게 풀어야 할지,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야 할지, 부모님께 꾸중 들으면 화가 나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사람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 때 아이들 옆에는 만화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세상을 알려준 만화에 대한 기억들을 꺼내보자.
최초의 단행본 만화 작가 ‘코주부’ 김용환
코가 뭉뚝하고 키는 작달막하지만 다부진 모습의 ‘코주부’는 김용환 작가의 대표 캐릭터다. 때론 모자를 쓰고 점잖은 어른으로 나와 신문에서 당대의 사회문제를 다루는 시사만화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코주부’가 알려진 것은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2년, 잡지에 연재된 를 통해서였다. 청소년 교양지였던 은 10만 부 가깝게 판매되었다는 증언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잡지였다. 책이 부족했던 시절, 읽을거리가 풍부했던 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곳에 빼어난 이야깃거리인 를 그림으로 만날 수 있었으니 당시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에 연재된 ‘코주부 삼국지’는 1955년 만화책 로 발행되면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렸다.
김용환의 만화는 세련된 그림, 재미있는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갔다. 그는 를 발표하기 이전부터 이미 아동만화를 많이 발표한 작가였다. 최초의 단행본 만화를 발표한 작가도 김용환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발표된 만화는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만평이라고 소개하지만, 어린이에게 친숙한 만화책이 처음 나온 것은 해방 후였다. 바로 동화작가 마해송의 작품인 를 김용환이 만화로 각색해 1946년에 발표한 다. 이 작품은 해방 후 아동문화를 만들기 위해 을유문화사에서 만든 아협만화문고 시리즈 중 하나다. 한국 최초의 단행본 만화로 기록되었고 2013년, 등록문화재 제537호로 등록되었다.
김용환은 만화 발표 외에도 만화신문과 만화잡지를 직접 발행하고 기획하기도 했다. 1948년, 최초의 만화신문인 의 기획자, 작가로서 참여했고 도 직접 발행했다. 또 한국전쟁 후인 1956년엔 성인시사만화잡지인 를 통해 시사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기도 했다. 물론 각종 신문에도 시사만화를 발표했다. 이렇듯 김용환은 한국 만화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방송인 만화가 신동우
가정에 TV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한 만화가가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슥슥슥 그림으로 그려냈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충격적이었다. 바로 신동우 작가였다. 그가 유명 방송인이 된 것은 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1967년 1월 7일 서울 대한극장을 비롯해 많은 극장에서 상영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만화영화)이 전국을 강타했다. 이 작품의 탄생은 신동우 작품 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은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에 연재된 후 단행본으로 출판된 작품인데, 이 연재만화를 대본으로 신동우 작가의 형인 신동헌 감독이 우리나라 최초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든 것이다. 홍길동에 관한 만화는 이전에도 많았고 이후에도 많은 작품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신동우 작가의 은 홍길동에 대한 이미지를 고착화시킬 정도였다. 이 작품은 허균의 에 대한 가슴 벅찬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홍길동’ 외의 주변 인물인 ‘호피’와 ‘차돌바위’, ‘곱단이’ 등의 캐릭터도 개성 있게 묘사되어 있어 매력적이다.
신동우는 1970년대에 유행했던 잡지의 만화 광고로도 유명하다. 오랫동안 진주햄소시지 제품을 일상 만화로 풀어냈는데, 광고임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다.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 웹툰의 시조격이라 할 수 있다.
슬픔의 미학으로 전쟁의 상흔을 위로한 김종래
휘영청 밝은 달은 금준의 마음을 알듯 구름을 머금고 내려다본다. 나쁜 사또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일하러 간 엄마가 돌아오지 않자 엄마를 찾아 나선 금준은 괴나리봇짐을 지고 풍천노숙을 하며 전국을 떠돌다 지쳐 장승에 기대어 엄마를 불러본다. 김종래의 중 한 장면이다. 김종래는 한국전쟁 이후 많은 사람이 파괴된 삶과 가족과의 이별로 고통스러워할 때 슬픔을 어루만져주는 감동 만화로 인기를 누린 작가다.
1956년에 발표한 은 한국전쟁 당시 충남 예산의 한 가족사를 다룬 만화다. 주인공 김일, 최도천, 향순이가 전쟁을 겪으면서 비극적인 운명에 처하게 되는 내용으로, 전쟁 후유증을 겪던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김종래라는 이름을 독자들에게 알렸다. 특히 1958년 에 연재했던 는 당시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엄마를 찾아 길을 떠난 금준이 전국을 떠돌며 온갖 위기에 맞서 나가는 사이, 두만강 건너로 팔려간 엄마는 모진 수모를 겪으며 아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틴다. 이렇게 아들과 엄마가 만날 듯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아슬아슬한 이야기 구조는 독자들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버렸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독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청소년은 물론 어른들까지 그의 만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1962년에 발표된 은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피란을 가던 한 가족이 엄마와 헤어져 무일푼으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며 겪는 이야기다. 엄마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영진이네 가족 이야기이지만 전쟁 이후 사람들의 사나운 인심, 영진이 선생님 같은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을 감동적이면서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김종래의 만화는 치밀한 구성과 감성적인 문장으로 이산가족의 아픔을 애잔하게 보여주며 사람들의 힘든 마음을 위로했다. 또한 길가의 돌부리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섬세한 필체가 특징이다. 25년간 40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으며, 그중 시리즈는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소녀들의 판타지를 보여준 엄희자
1960년대 초반에는 예쁜 공주들이 만화책 속에 등장했다. 이전에도 소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만화가 다수 있었지만 엄희자 작가의 등장으로 순정만화의 신세계가 펼쳐졌다. 큰 눈 속에 들어가 있는 빛나는 별, 머리를 장식한 예쁜 리본,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주인공은 순식간에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주로 영화나 영미소설의 스토리를 각색한 작품이 많았는데, 현대적인 패션들을 한껏 뽐내며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최고 인기였다.
소설 을 만화로 만든 , 소설 을 각색한 등 서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화려한 패션이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만화방에서 빌려온 엄희자의 만화책을 보면 찢긴 페이지가 많았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걸친 주인공의 모습이 소녀들의 소유욕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만화 주제는 권선징악이었고 순정만화는 그러한 교훈이 더 강했다. 만화 속에 나오는 악당은 착한 주인공을 질투, 음해하고 모함하지만 결국은 주인공의 선행으로 회개하고 반성하며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엄희자의 작품에 그려진 아름답고 순수하고 맑은 감성도 이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소년·소녀들의 명랑사회를 보여준 길창덕
1970년대는 ‘꺼벙이’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만화 속의 주인공들은 모범생이나 천재나 능력자가 많았다.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어린이상이 그러했던 것이다. 비록 아이일지라도 어른들의 몫을 나눠서 해냈어야 했다. 그러나 조금씩 먹고사는 것이 안정이 되던 1970년대엔 아이들에게 더 이상 어른의 몫을 나누지 않아도 되었다.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광고카피가 등장할 정도로 아이들의 철부지 같은 모습이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런 시대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길창덕의 다. 1970년에 에서 연재를 시작해 으로 옮겨 1977년에 완결된 작품으로 잡지뿐 아니라 단행본으로도 만들어져 1970년대를 풍미했다.
머리의 기계충 자국과 졸린 눈에 약간 모자란 듯하지만 착하고 여린 심성의 꺼벙이는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많이 해서 항상 부모님과 선생님들을 기절초풍하게 만드는 명랑 어린이다. 시골에서 할아버지와 살다 상경한 여동생 꺼실이가 후에 등장하면서 그 재미는 한층 더 배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 , , 등 그의 작품 속 어린이들은 하나같이 말썽을 부리고 엉뚱했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 속에는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가족들과 친구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잘 살자는 마음이 숨어 있었다.
가족의 희로애락 그려낸 이상무
가난하지만 명랑한 아이인 독고탁은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면 항상 대문에서 주저한다. 대문을 열면 집에서 키우는 개가 아직 어린아이인 독고탁의 키만큼 달려들기 때문이다. 개는 독고탁이 좋다고 달려들지만 그는 자기 몸집만큼 큰 개에 겁을 먹는다. 무서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항상 머리를 굴리며 대문을 들어서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구사한다. 이상무의 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귀여운 모습과는 달리 희귀 성인 ‘독고’와 강한 이름인 ‘탁’이라 불리는 이 아이는 6남매의 막내로 식구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그러나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엄마의 자리를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어서 슬프다. 아버지의 실직과 교통사고, 일찍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권투 유망주였던 형은 돈을 받고 경기를 하게 된다. 독고탁의 가족에게 벌어진 시련은 1970년대 여느 가정에서 겪었을 법한 일들이다. 독고탁은 누나들의 살뜰한 보살핌이 필요할 정도로 어렸지만 집 안의 어두운 분위기를 재빨리 눈치 채는 섬세한 아이였다. 또, 그런 독고탁을 통해 가족 드라마의 희로애락을 만화 속에 진하게 담아낸 작가가 이상무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족과 스포츠가 등장한다. 특히 같이 야구를 소재로 한 만화는 끝없는 경쟁을 해야 하는 스포츠 세계의 현실을 만화 속에서 시련을 극복하는 자기훈련과 노력들로 보여준다. 좌절의 순간에는 가족들의 응원이 있었고 무한 경쟁이 아닌 사람 간의 교류가 있었다. 이상무 작품의 인물들은 악인이라도 사람 냄새가 난다.
흔히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고 한다. 멀뚱멀뚱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이기도 하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려보지만 세상은 아직 단잠에 코골이 중이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일찍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다정한 목소리가 있다. “안녕하세요. 박영주입니다.” KBS 1라디오 의 박영주(朴英珠·57) KBS 아나운서가 그 주인공이다. 매일 아침 97.3MHz의 라디오 주파수를 타고 들려오는 그녀의 모닝콜은 전국 방방곡곡 시니어 애청자들에게 비타민주스처럼 신선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새벽 4시, 평범한 사람이라면 침대에 누워 여전히 어제의 꼬리를 붙잡고 있을 법한 시간이다. 그러나 이토록 이른 시각에도 활기찬 하루의 포문을 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의 애청자들이다. 상냥하고 은은한 박영주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덩그러니 놓인 새벽의 허전함을 사뿐히 채운다. 이미 애청자들과 끈끈한 교감을 이루고 있지만, 방송을 놓치고 있을 이들을 위해 박 아나운서에게 직접 소개를 부탁했다.
“새벽 4시부터 4시 40분까지, 시니어를 위한 종합 매거진 프로그램입니다. 새벽잠은 없고 그 외로움과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일찍 일어나는 분들이 이 프로그램을 듣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라는 이름으로 방송했어요. 청취자 층을 50대까지 확장하려는데, 그들을 실버라 부르긴 어울리지 않아 ‘시니어’를 사용하면서 가 됐죠. 이름이 바뀌고 얼마 뒤에 제가 진행을 맡아 3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건강, 추억의 음악, 영화 그리고 한시까지
새벽 프로그램인지라 다소 밋밋하게 흘러가리라 예상했다가 코너 편성표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9988 치매완전정복’, ‘행복밥상’, ‘낭독으로 읽는 고전소설’, ‘유성기로 듣는 우리 음악’, ‘그 시절 그 노래’, ‘추억의 영화’, ‘꿈꾸는 책방’ 등 건강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대한 14가지의 콘텐츠가 한 주를 가득 채운다. 그녀가 소개한 ‘종합 매거진 프로그램’이라는 문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매일 리포트와 더불어 두 가지의 주제를 40분 동안 꾹꾹 눌러 담아 들려주니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다. 거기에 친근한 박영주 아나운서의 목소리까지, 그야말로 빈틈이 없다. 그중 청취자들의 반응이 가장 좋은 코너는 무엇일까?
“치매에 관한 정보 제공과 상담까지 해드리는 ‘9988 치매완전정복’이 반응이 좋아요. 또 ‘한시 산책’을 선호하는 분들도 많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한자를 잘 모르지만, 시니어 세대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 한자를 다 배웠잖아요. 다들 그런 향수가 있는데, 일반 방송에서는 잘 안 다루죠. 그런 주제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아하는 것 같아요.”
각양각색 코너를 마련하는 데 제작진을 비롯한 진행자의 노고도 상당할 터. 여느 교양 프로그램 못지않은 탄탄한 구성은 시니어 청취자를 향한 그들의 깊은 고민에서 비롯됐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 제작진과 함께 논의해요. 우리 작가는 20여 년 문화 쪽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는데, 나와 또래도 비슷하고 취향도 잘 맞아요. 그래서 문화에 관해서는 속속들이 다 다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책, 음악, 영화, 시, 소설 등 미술이 빠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라디오라서 미술이 지닌 시각적 요소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
평소 일주일에 두 번은 영화를 보고, 한 달에 두세 번, 많게는 대여섯 번 음악회, 발레, 오페라 등을 즐긴다는 박 아나운서다. 그녀의 폭넓은 문화적 소양과 더불어 어린 시절 추억은 다채로운 코너 구성에 힘을 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학급 배정을 받아 교실에 가보니 담임선생님께서 커다란 전지에 윤동주의 ‘서시’를 써서 붙여놓으셨어요. 매일 조회, 종례시간이면 ‘차렷, 경례’를 하고 그 시를 다 함께 낭송하곤 했죠. 한 달 동안 매일 하나의 시를 외우다시피 읊다가, 다음 달이 되면 또 다른 시를 그렇게 써놓으셨어요. 그 순간이 굉장히 좋았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죠.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사회에 시가 넘쳐나면 보다 더 좋은, 행복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시’ 코너를 넣게 됐어요. 그건 제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코너라 남다른 애착이 있죠.”
사연 속 사연이 담긴 ‘부모님 전 상서’
요일별 달라지는 코너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토요일 방송분인 ‘부모님 전 상서’다. 청취자가 부모님께 띄우는 편지를 성우가 낭송하는 시간인데, 매주 애잔하고 감동 어린 이야기로 많은 이의 가슴을 적신다.
“부러웠던 사연이 있어요. 주인공이 어린 시절 동네에 전염병이 퍼졌는데 아무도 그 시신을 거두지 않아 아버지께서 홀로 수습하시다가 결국 전염병에 걸려 돌아가셨대요. 비록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자녀들의 우애가 대단했죠. ‘의좋은 삼 형제’라고 불렀는데, 큰형이 나무를 하면 꼭 두 동생의 집에 몇 단씩 놓고 가고, 작은 형이 시장에서 뭘 사면 그것을 셋으로 나눠 형과 아우의 집에 주고…. 결혼해서도 윗집 아랫집 다 같이 살았죠. 그러고도 아쉬워서 나란히 묻힐 곳을 마련하고 묘비명도 미리 써두었다는 거예요. ‘우리 삼 형제는 한평생 함께 살면서 우애를 나눴는데 그 정을 두고 가기 아쉬워, 밤하늘의 별을 보고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이야기를 나누고자 여기 나란히 묻힌다. 후세들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억하며 잘 지내라.’ 그런 이야기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들으신다면 얼마나 뿌듯하실까요. 참 부러운 마음으로 사연을 소개했어요.”
이 코너는 편지의 내용에서 오는 감동뿐만 아니라, 편지 그 자체에서도 특별한 정을 느낄 수 있다. 스마트기기의 발달로 휴대폰 문자로도 라디오 사연을 받는 요즘, 의 청취자들은 젊은 시절 라디오 사연을 보냈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정성 어린 손편지를 보내온다. 한평생 일하던 회사에서 쓰던 누런 갱지, 신문지 사이에 들어 있는 광고지 뒷면, 아들의 회사 로고가 찍힌 기안용지 등 빳빳하고 깨끗한 종이가 아닌 저마다의 알뜰함이 묻어나는 편지지가 인상적이다. 또 한글을 잘 몰라 구술을 해서 아들이 대신 적어 보낸 편지부터, 할아버지가 늘 하는 이야기를 타이핑해서 사연으로 보낸 손주, 손에 힘이 풀려 삐뚤빼뚤 쓰인 필체 등 그들이 보낸 사연에는 또 다른 사연이 담겨 있다.
청취자를 위하여, 그리고 청취자로부터
온기 어린 사연들만 보아도 어딘가 모르게 시니어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듯, 청취자의 특징이 드러나는 몇 가지 귀여운(?) 오해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부분을 가볍게 넘기기보다는 청취자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개선하고자 노력한다는 박 아나운서다.
“우리 방송 이름이 ‘행복한 시니어’인데, 어떤 청취자께서 사연을 보내면서 ‘행복한 신녀’라고 써서 보내셨더라고요. 아마 ‘선녀’처럼, ‘신나는 여(女)’ 이런 식으로 의미를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우리는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모를 수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려 해요. 또 제 이름을 ‘백영주’라고도 하고, ‘박영희’라고도 하고, 청력이 약해지셔서 그런 건데 더 또박또박 말씀드리려고 신경 쓰고 있죠. 가끔 리포터가 현장에 나가 청취자를 만나면 (코너가 많다 보니) ‘박영주 아나운서가 참 똑똑하다, 어떻게 그 많은 것을 아느냐’고 칭찬하신대요(웃음). 그러면 작가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해드리곤 하죠.”
그 외에 대표적으로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새벽 4시 생방송 진행으로 안다는 것이다. 대체로 라디오는 생방송이지만, 새벽 시간대 방송의 경우 사전 녹화로 만들어진다. 박 아나운서가 실제 방송을 녹음하는 시각은 오전 9시 출근시간 이후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벌써 33년째 KBS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몇 년 후면 은퇴를 맞이하게 될 박 아나운서에게 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1985년에 입사해서 초창기에는 TV 프로그램을 많이 했죠. 15~20년쯤 지나면 TV 프로그램은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시니어 아나운서들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주력하게 돼요. 이제 퇴직이 4년이 채 안 남았는데, 선배들도 그랬고 아마 이 프로그램을 하다가 떠나지 않을까 생각해요. 젊어서 한참 아이 키우고 할 때는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거든요. ‘음미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있죠. 이제는 상당 부분이 온전히 나의 시간이거든요. 일상의 성찰도 있지만, 지난날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참 많아요. 아주 느린 호흡으로 참되게 나를 위해 집중해서 살 수 있는 시간을 복되게 가꿔나가 보려고요.”
현재도 시간을 내서 사단법인 ‘공감인’에서 진행하는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의 집단 치유 프로그램 치유활동가로 활약하는 그녀는 은퇴 이후에도 이를 유지하며 시각장애인 녹음 봉사자 교육 등에도 힘쓰고 싶다고 했다. 또 한 가지, 곁에 계시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늘릴 계획이다. 이러한 다짐에는 ‘부모님 전 상서’ 코너가 교훈이 됐다.
“부모님은 늘 거기 계시고, 당연히 뒷바라지해주는 분들로 여겨왔는데, 이 코너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여러 사연 속 공통 메시지는 ‘살아 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뵀더라면, 식사 한 끼 함께할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거예요. 저는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그걸 할 수 있는 처지거든요. 원래는 냉랭한 딸이었는데, 가능하면 더 자주 찾아뵙고, 더 살갑게 하려고 노력하죠.”
행복한 시니어, Just Do it!
는 청취자들의 노후뿐만 아니라 다가올 박 아나운서의 노후까지 행복으로 이끌어가는 듯했다.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한 시니어’는 어떤 모습일까?
“글쎄요, 사람들은 행복을 어떤 특별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여행할 때, 친구와 대화할 때, 좋아하는 활동을 할 때 행복을 느끼죠. 그런데 진짜 그럴까요? 춤출 때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가 춤을 출 때는 단지 춤추고 있고, 춤에 몰입해 있을 뿐이에요. 그럼 정확하게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요? 춤을 추고 나서 아닐까요? 그건 이미 춤을 추는 행복에서 벗어난 상태죠. 궤변 같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요. 삶은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고, 아마 삶이 끝나는 순간에는 ‘아! 그래도 행복했구나’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 지금 ‘살아 있다면’ 행복한 시니어가 아닐까 해요.”
끝으로, 의 청취자와 독자를 위한 응원의 한마디를 부탁했다. 영화 마니아답게 노아의 방주를 모티브로 한 영화 의 대사를 언급했다.
“영화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네가 신에게 이 난국을 헤쳐갈 용기를 달라,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을 달라고 기도했을 때, 신이 과연 어떤 형태로 용기와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용기? 사랑? 그게 뭔데? 네가 행동을 하면 거기에 용기가 얹어진다. 또 네가 작은 호의를 베풀었을 때 거기에 사랑이 얹어지는 거다. 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언가를 했을 때 생겨나는 것이 용기이고 사랑이다.’ 나이 들면 뭔가를 하려다가도 못할 이유와 핑계를 찾거든요. 그럴 땐 그냥 무엇이든 일단 해보셨으면 해요. 무언가를 했을 때 거기 길이 있고 답이 얹어질 거예요. 자신을 믿고 저질러보세요. 저스트 두 잇(Just do it)!”
>박영주 아나운서
KBS 11기 아나운서로 입사이후, KBS 제3라디오 , , KBS 1TV 등 다수의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현재는 를 진행하며 KBS 편성본부 KBS한국어팀 팀장을 맡고 있다.
나이 들어 꼭 필요한 것이 ‘친구’라고들 한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나이 많은 분들이 한 말은 아니다. ‘그럴 것이다.’ 라고 미루어 짐작하는 세칭 젊은 노년 전문가들이 하는 말이다. 이런 불편한 진실은 당장 80세 이상의 고령자 분들에게 직접 물어보고 대답을 해야 한다.
주위에 80세가 넘으신 분들과 직접 대화를 해보면 친구가 없다고 한다. 아니 자연히 없어지더라고 말씀하신다. 살아 있지만 거동이 불편하고 약주 한 잔 함께 나누지 못할 정도 건강이 뒷받침 되지 않는 친구는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이들은 자연히 멀어지더라고 한다. 게다가 친구 몇몇은 경제적 사정으로 만 원 한장도 수중에 없는 노인들이여서 만나기를 피하고 이런 사람들과 억지로 만나서 뭔 말을 하겠느냐고 한다. 농촌 마을도 별반 차이가 없다. 마을 경로당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모이지만 농사일도 해야 하고 누군가 새로운 소식을 공급해 주지 않는 한 만날 이유는 점점 희박해진다. 텔레비전으로 사람들이 모여 화기애애한 경로당의 모습보다 텅텅 비어있는 농촌 경로당을 자주 보면서 안타깝다. 친구는 힘 있을 때 돈 있을 때 친구가 필요하다.
올해 98세의 김형석 교수님의 ‘인생백년을 살아보니’ 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교수님의 강의 중 친한 친구 세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가 유명한 철학교수다. 이중 한분이 이제 살날도 많지 않은데 우리 자주만나 친하게 지내자고 제의를 했다. 그런데 다른 한분이 말씀하시길 맞는 말이지만 친하게 지내다가 먼저 저세상으로 가면 남아있는 사람의 슬픔을 생각해 봤느냐며 그냥 이정도 친분으로 지내자고 했다고 한다. 인생의 저승길은 누구라도 동행인이 없다. 혼자 가야 한다.
불교경전에 인생이란 원래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는 의미의 독생독사(獨生獨死)가 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한역(漢譯)된 말이다. 카필라성의 왕자 싯다르타는 출가하는 날 자기와 함께 왕궁을 나온 마부 ‘찬나’에게 ‘카필라 성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찬나는 ‘무서운 짐승이 우글거리고 길도 험한데 왕자님을 혼자 내버려두고 왕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 말을 했다. 싯다르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찬나야 인생이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것이다. 어찌 동반자가 있겠느냐? 고 대답을 했다. 독생독사란 말이 여기서 나온다. 필연적으로 인생길은 혼자다. 마음에 맞지 않는 친구와 마음을 맞추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자신과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자. 나는 나와 제일 잘 맞는다.
나이 들어 애완동물을 키우는 분들을 보면서 반려동물에게 너무 깊은 정을 주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앞선다. 애완동물은 사람보다 수명이 짧다. 자칫 정이 깊어지면 마음의 상처를 받고 슬픔에 복 받혀 거액을 들여 거창한 반려동물 장례절차를 치루지만 마음만 더 공허 해진다.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의 죽음은 특별한 감정의 동요가 없다. 하지만 배우자의 죽음처럼 친밀도가 깊으면 깊을수록 슬픔이 배가될 것이라는 점은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짐작은 된다.
나이 들수록 혼자 노는 방법에 익숙해야 한다. 먹은 나이만큼 함께 살아온 자신이 가장 좋은 친구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먹고 혼자 산에 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고독력 키우기다. 나를 알고 나와 친해지고 ‘나는 나하고 제일 잘 맞아!’ 라는 말을 연습하는 것이 노년을 잘 보낸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주사(酒邪)는 ‘술을 마신 뒤에 나쁜 버릇으로 하는 언행’을 말한다. 생전의 아버지는 주사가 심했다. 언행에 더해 고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그 당시는 필자가 사춘기라서 그런 주사를 참지 못하고 욱하곤 했다. 그 결과는 가출이었다. 한창 감정이 예민했던 고등학생 때 무려 4차례나 가출을 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맨손으로 상경해 서울에서 장사를 하며 자리를 잡았다. 한때는 우리가 살던 용산 지역의 돈은 우리가 다 쓸어 담는다는 소리도 들었다. 복잡한 재래시장에서 주류 대리점을 열고 주류 배달 화물차를 무려 58대나 운행했으니 어지간한 기업이었다. 그렇게 집안을 부유하게 일으키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었을 것이다. 전쟁 후의 사정이 어디든 그랬듯 먹고사는 것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경쟁에서 지면 문 닫는 것이고 이겨야만 살아남았다. 돈이 모이는 곳이 조용할 리 없다. 동네 폭력배부터 경찰, 경쟁업체, 상인조합, 거래처 등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세상은 전쟁터이고 그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자는 강해야 한다며 복싱, 유도, 태권도, 합기도 등 격투기를 배워 반드시 초단 이상까지 따라고 가르쳤다.
아버지는 무서운 것이 없었다. 나름대로 맨땅에 헤딩해서 성공했다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쭐하고 으스대는 면이 강했다. 경찰 출신으로 당시로서는 큰 키인 185cm 장신에 힘도 세서 당할 사람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말릴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면도 있었다. 특히 술에 취해 주사를 부리면 동네 사람들이 다 불안해했다. 집에 있는 우리 어린 형제들은 더 공포스러웠다. 아버지가 만취한 날은 밖에서의 주사 소문이 먼저 들려왔다. 집에 들어오셨을 때는 우리 형제들을 이유 없이 나무라셨다. 우리는 자는 척하기도 했고 장롱 속에 숨어 아버지의 주사가 어서 잦아들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집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잘못이 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지만, 술이 올라 벌게진 얼굴로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들에게 큰 소리로 마구 호통을 치니 그런 주사를 점점 참기 어려웠다. 기껏 하는 반발이 가출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잘 참는데 필자는 아버지의 주사를 볼 때마다 분노 조절이 안 되었다. 욱하는 마음으로 가출했으니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당장 하루 세끼 먹는 것이 문제라 배를 곯아야 했다. 어쩌다 친구들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그 집 부모님들이 눈치 채면 더 이상 신세를 질 수도 없었다. 하루에 호떡 하나로 허기를 달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여러 자식 중 하나가 가출했다고 생각했는지 크게 상심하지도 않았다. 어떤 때는 가출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필자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판 시끄럽게 하고 나면 아버지는 숙취로 만사 제쳐두고 고생하셨다. 그러니 집 나간 자식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결혼을 일찍 한 것도 일단 집에서 나와야겠다는 생각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 아버지의 주사를 더 이상 안 봐도 될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도 아버지의 주사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아버지의 주사는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았다. 술로 벌게진 얼굴과 되지도 않는 논조의 큰 목소리가 바로 트라우마다. 그래서 지금도 술집에 갔을 때 옆자리 사람들 목소리가 커지면 당시의 생각이 나서 나와버린다. 당구장에 갔을 때 취객들이 들어와 당구를 치면서 너무 시끄럽게 굴면 게임을 하다가도 나온다. 주인에게 자제시키라는 주문을 해보기도 했지만, 손님 떨어질까봐 대답만 하고 모른 체한다. 늦은 시각 전철 안에서도 취객이 너무 떠들면 다른 칸으로 이동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주사를 봐온 필자는 술을 마시면 곧바로 조용히 잔다. 술김에 자녀들이 귀엽다며 무슨 얘기를 해봐야 주사가 되기 쉽다. 평소에 맨정신으로 할 말을 왜 술에 취해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물론 술이 오르면 기분이 좋고 흥도 오른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한다. 어느 날 술이 취해 귀가하면서 전철을 타고 오다가 스마트폰 SNS를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술이 취한 상태에서는 실수하기 쉽다. 그 기분에 SNS를 하는 것은 주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손주를 보러 갈 때마다 아들 집 근처에서 한잔하고 갔다. 손주가 아직 어려서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좀 더 크면 기억할 테니 자제해야 할 일이다.
우리 형제 중 동생이 바로 아버지의 주사를 닮았다. 평소에는 말도 없고 얌전하다가도 술만 취하면 알 수 없는 넋두리에 목소리가 커진다. 더 큰 문제는 술에 취해서 한 행동이 그다음 날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라면 “술은 취하려고 마신다”며 큰일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필자가 “술은 즐기기 위해서 마시는 것이고, 어느 정도 취하면 술 마시는 속도를 조절하든지 그만 마셔야 한다”고 말해주면 그런 사람과는 술 마실 맛이 안 난다는 한다. 자기는 술김에 속마음 풀기 위해 술을 마시는데 안 취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계산적인 것 같아 같이 마시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는 것이다.
한번은 둘이 술을 마시다가 형님에게로 갔다. 이미 많이 취했지만 좀 더 마시겠다며 간 술집에서 동생이 마구 큰 소리로 욕설을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깨져버렸다. 마침 민감한 문제로 어색해하던 형제들 사이가 그날 일로 인해 아예 끊어져버렸다. 동생에게 실수에 대해 형님에게 사과하라고 하자 사과는 했다. 그러나 정작 형님은 사무적으로 사과를 받아들였을 뿐 섭섭한 마음을 풀지 않았다. 술 취해서 한 행동에 대해 너그러운 사회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히 있다.
술 좋아하는 우리 집안에 술은 필요악이다. 술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아버지도 돌아가실 때까지 술을 드셨다. 그러니 필자도 술을 오래오래 즐길 것이다. 그러나 필자로 인해 다른 사람이 트라우마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한다.
과거에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사회생활을 하다가 7년 만에 스스로 학비를 벌어 대학을 가려고 하자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대학 교수가 얼마나 너를 가르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네가 크게 배울 것이 없을 것 같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지나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했다. 할머니는 당시 필자가 5남매의 장남으로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기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할머니의 말씀은 학문보다는 인격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필자가 뒤늦게라도 대학의 문으로 들어선 것은 참된 지식을 깨우쳐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학문이란 무엇이며 왜 대학이라는 과정을 이수해야 하는지도 궁금했다. 필자의 선택은 훌륭했다. 학문의 세계는 깊고 넓었다. 필자는 곧 국내외 경제의 흐름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어려서는 법대에 진학해 법관이 되고 싶었지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공직자들의 고충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상대를 나와 사업자의 삶을 살겠다는 생각으로 전공을 바꿨다.
할머니는 만석꾼의 딸로 태어나 세 살이나 연하인 할아버지와 결혼하셔서 일가를 이루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분이었다. 호남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딸을 아내로 맞은 할아버지는 일제 치하에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훗날 독일 백림대학을 나온 친구 김준연씨와 함께 학교에 갔다가 증조부님에게 매를 맞고 집에서 쫓겨나 한동안 처가에서 지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필자는 아름다운 미모에 고매한 인격의 할머니를 두게 된 것이 어릴 때도 여간 자랑스럽지 않았다. 어릴 때 방학이 되어 시골에 가면 일꾼들을 두고 농사를 짓고 생활하시던 생각이 난다. 시골에 왔다고 특별히 달걀 하나를 뜨거운 밥 속에 넣어주시던 기억도 난다.
할머니는 누구를 크게 호통치는 법이 없었다.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대하니 할머니가 싫다는 친․인척들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말씀이 별로 없는 과묵하신 분으로 기억된다. 그래도 손자가 방학이라고 시골집에 인사를 가면 혹시 집안 내력도 모르는 상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염려되어서인지 족보를 내어놓고 집안 내력을 이야기해주셨다. 그래서 필자가 족보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거창 신가 집안의 32대 손이고, 고려시대 대장군으로 몽고군과 끝까지 항쟁하신 집자 평자 조부님은 물론 조선시대까지 문무 고관대작의 집안이 되었던 내력을 소상하게 이야기해주셨다. 필자는 당시 할아버지에게서 배울 학(學)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확실하게 배웠다. 만일 필자가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다면 한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나의 한자만 가르쳐주셨을까? 살면서 항상 배우면서 살라는 깊은 뜻이 있었을 것 같다. 할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필자는 지금도 학문이 좋고 즐겁다. 어쩌면 학자를 많이 배출해낸 집안 내력 때문일 수도 있다.
작고하신 부산의 숙모님은 결혼 전에 선도 보지 않고 할머니만 보고 결혼했다고 이야기하실 정도로 할머니는 기품이 있고 위엄이 있는, 그러면서도 친절함이 넘치는 그런 분이었다. 이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부모라는 사실은 항상 필자를 기쁘게 했고 긍지를 갖게 해주었다.
95세까지 장수하신 조부모님의 영정을 필자의 집에 모시고 싶다. 그리하여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해 양반 가문의 전통을 이어온 집안의 자랑스러운 이야기를 우리 손자들에게도 들려주고 더욱 빛나는 가문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 또 후손들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봉사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사라져가는 서울의 풍경, 우리가 보존해야 할 서울의 사대문 안의 마지막 달동네가 몇 군데 있다. 우리의 역사문화지구로 과거의 시간을 떠올려볼 수 있는 곳을 찾아가보려고 한다. 이름하여 ‘Remember seoul’이다. 허름하고 빛바랜 동네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북정마을, 김광섭 시인이 노래한 ‘성북동 비둘기’에 나오는 바로 그 마을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廣場)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祝福)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중 첫 연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6번 출구로 나와 초록색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북정마을 노인정 앞에서 내리면 눈앞으로 아주 오래된 마을이 펼쳐진다. 복잡하게 뒤엉킨 전봇대 위의 전깃줄이 먼저 이 마을의 인상을 알려주는 듯하다. 그리고 낡은 집들과 좁은 골목이 세월을 이야기하고 마을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전한다.
건너편으로는 성곽이 길게 보인다. 일단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서 꼭대기부터 내려오기로 한다. 가파른 계단과 좁은 골목길을 따라 숨차게 성곽까지 올라갔다. 성벽에 서서 내려다보니 오래된 북정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더 멀리 바라보니 서울 시내도 보인다. 흔히들 부자마을로 일컫는 성북구 동네가 옆에 있다. 성문 너머로는 아파트들이 빼곡하다. 마치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린 듯한 옛 동네 북정마을과 개발된 빌딩과 아파트들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돌려 눈에 담은 북정마을에는 따뜻한 옛정이 느껴지는 아늑함이 있다. 한양 성곽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어서 든든하기까지 하다.
마을의 가장 높은 성곽에 올라 마을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바람에 땀을 식혔다. 성곽 바깥쪽 길을 잠깐 걸어보았다. 이 길을 따라 한양 안쪽 또는 바깥쪽으로 오갔던 조상들을 잠시 상상하면서…. 현재 이 길은 이 지역 사람들의 걷기 코스로 잘 이용되고 있는 듯했다. 산책길이고 운동코스인 멋진 길이다. 성벽을 통해 북정마을을 들여다본다. 저 안에서 성북동 비둘기가 날았을 테고, 만해 한용운이 나라 걱정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제 천천히 북정마을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군데군데 방치된 폐가가 보였다. 집을 비우고 이사 나간 사람들이 남긴 살림살이와 돌담 벽에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길 옆 텃밭들에서는 채소가 자라고 자그마한 안마당엔 정갈한 장독들이 있었고 꽃을 피우는 나무가 우뚝 서 있기도 했다. 녹슨 대문 안에선 빨래가 뽀송뽀송 마르고 있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삶의 현장이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문명 속에서 어서 빨리 변하자며 등 떠미는 세상과는 상관없이 무심한 시간을 살고 있는 마을이 의연해 보인다. 시간은 그렇게 간다.
마을 아래로 내려와 심우장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섰다. 만해 한용운의 거처였던 곳. 집의 방향이 돌아앉은 모습이다. 이를테면 북향인 것이다. 조선총독부를 등지기 위해서 남향으로 짓지 않고 북향 터를 잡았다고 한다. 투철한 저항정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한용운은 “조선 전체가 감옥인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가”라며 볕이 들지 않는 이곳 북향 집에서 불도 때지 않고 겨울을 견뎠다고 한다.
심우장은 북정마을을 갈 때 빠트릴 수 없는 주요 장소다. 그러다보니 마루에 앉아 있거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에는 만해 선생의 ’님의 침묵‘을 비롯한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다. 방이나 부엌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만해 한용운은 아쉽게도 해방되기 1년 전에 생을 마감했다.
심우장을 나와 주변의 조붓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길고양이들을 자주 본다. 이 동네에는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고 가끔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가게 앞에 나와 앉아 있다.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마을처럼 보인다. 저녁 무렵이 되니 시장을 다녀오는 어머니들이 힘들게 비탈길을 올라간다. 그 발걸음의 무게가 느껴진다.
한양 도성과 성곽이 인접해 있어 멋과 품위가 느껴지는 오래된 동네, 이런 성곽과 옛 향기가 스며 있는 문화재 보존을 위해 다행히도 재개발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마을 아래쪽에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공방이 생겨나고 연극 포스터가 바람에 날린다. 이런 새 바람들이 다채로운 볼거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새로운 변신에 기대가 된다. 서울의 옛 모습 속에서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북정마을이 변모하고 있다. 그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들이 현대 사회와 잘 어우러지면서도 푸근한 옛 모습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다.
이제 내려와야 할 시간.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변화하며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동네. 그곳을 거닐면 유년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따스해진다. 좁은 골목을 걸으며 지친 가끔 하늘도 올려다본다. 변화해가는 마을 아래도 내려다본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디쯤에 필자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며칠 전 세 명의 60대 남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막걸리를 곁들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100세 시대로 화제가 넘어갔다.
“지겨운 배우자와 100세를 함께 사는 것은 고통이야.”
“100세까지 살려면 세 번은 배우자를 바꿔야 살 만하지.”
“그것도 모자란다.”
“난 먹을 것 충분히 주고 혼자 떠나고 싶어. 나를 찾아서.”
“그래서 졸혼(卒婚)이 유행이야.”
첫사랑, 첫 키스, 첫 남자. 처음처럼 신선하고 설레는 말이 또 있을까. 그런데 그 첫이 낡아서 헌것이 되어도 쓸모없어진 물건처럼 버릴 수 없는 게 문제다. 사람들은 싫증을 빨리도 낸다. 그래서 유행이 생기고 그 유행은 떠돌다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유행이 유행을 싫증내는 것이다. 사랑도 싫어졌다가 핑계 대며 탕아처럼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부부가 의견이 안 맞고 화가 나도 선뜻 헤어질 수 없는 이유는 그 순수했던 첫사랑의 감정을 아직도 가슴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절절히 그리며 보고 싶어 했던 마음과 그 황홀했던 순간의 두근거림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녀는 처음 만났던 시기의 모습을 호호백발이 되어서도 연상시키며 현재의 모습과 같이 *오버랩시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구십 먹은 할아버지에게 팔십 먹은 할머니는 처음 만났던 20세 처녀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단다.
남자들은 대부분 결혼 3년 차가 되면 신선함이 사라지면서 여성이 싫증이 나기 시작한다고 한다. 이 무렵은 출산과 육아로 여자가 자신을 가꾸는 것을 놓아버리기 쉬운 시기다. 김태희 같은 아내를 두고도 3년이 지나면 전원주 같은 여성과 바람을 피운다는 항간의 농담 같은 얘기도 있다. 신선함 뒤엔 편안함도 있고, 세련됨도 있고 느긋함도 따라오는데 그건 고려 대상이 아니고 성적 신선도에만 무게를 두는 것 같다.
남자도 여자도 자유를 꿈꾸기는 마찬가지다. 따스한 사랑을 꿈꾸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을 외롭게 살 가능성이 많다. 사랑받고 싶으면 먼저 가슴을 열고 상대에게 사랑을 줘야 한다. 경험자의 충고다.
요즘 졸혼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 졸혼이란 서류상의 결혼은 유지한 채 실제의 결혼생활은 졸업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졸혼을 꿈꾸는 남자의 심리가 궁금했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잔소리 듣고 싶지 않다.
남자로서 인정받고 싶다.
가부장제에 익숙한 남자들의 반란일 수도 있다. 집안의 기둥이며 중심이었고 최고 경배의 대상에서 제외된 소외감일 수도 있다. 책임은 고스란히 남아 있으나 대접에서는 배제된 가장은 서열이 강아지 다음이라는 서글픈 풍자도 있다. 그래서 허무감과 급속한 추락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을 꿈꾸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러 피터팬처럼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질문하고 찾아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졸혼이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서글픈 것 같다. 그러니 일탈을 계획하는 남자들에게는 미리 줘버리자.
먹고 싶어 할 때 먹인다.
재운다.
자유를 준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일정한 거리 이상의 접근을 삼가자. 왜 나와 틀리냐고 잔소리하고 묻지 말자. 다른 색깔도 함께 어울리면 훌륭한 조화를 이루지 않는가.
혈당 관리 때문에 억지로라도 운동을 해야 하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 뒤편에 마침 운동에 딱 좋은 왕복 한 시간 거리의 산책로가 생겼다.
몇 해 전에 그렇게나 시끄러운 굉음으로 필자를 괴롭혔던 공사가, 끝나고 보니 이렇게 멋진 운동 코스가 되었다.
참기 힘든 소음 때문에 일부러 외출하는 등 불편을 겪었지만, 결과로 이런 혜택을 받게 되어 짜증을 냈던 게 슬그머니 미안 해 지기도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에서부터 시작되어 2km 되는 정릉 입구까지 큰길 뒤편으로 바닥에 초록색의 폭신한 산책길이 만들어졌는데 담당 의사선생님으로부터 왕복 4km면 하루 운동량에 알맞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라 매우 기쁜 마음으로 걷기 운동을 하게 되었다.
개천을 따라 걷는 내내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경치와 자연 생태를 볼 수 있어 주민이나 운동하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은 곳이다.
오늘은 기온이 많이 내려갔지만 단단히 차려입고 걸으러 나갔다.
쨍한 차가움이 콧마루를 시큰하게 한다. 그러나 일단 나와 보니 의외로 상쾌하다.
옆쪽의 개천이 한여름엔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폭포처럼 요란한 물줄기를 보이지만 지금은 얼음이 꽁꽁 얼어있다.
개울에 솟아 있는 대로 바위나 작은 돌멩이가 삐쭉 나온 곳을 빼고는 모두 하얀 얼음투성이인데 어느 한 곳을 보니 반반한 얼음판이 보인다.
겨울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을 위해 누군가 일부러 물을 채워서 썰매장을 만들어 주신듯하다.
며칠 전엔 그곳에서 몇몇 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닐봉지를 깔고 앉아 언니가 끌어주는 대로 신 난다고 꺅꺅대던 아이도 있었고 제법 반듯한 나무로 썰매의 모습을 갖추고 씽씽 얼음 지치는 아이도 있었다.
필자도 어릴 적 대전에 살 때 삼촌이 만들어주신 네모난 나무에 쇠붙이를 바닥에 붙인 썰매를 타 본 적이 있다.
친할아버지댁 포도밭 근처에는 겨울에 빈 들판이 많았다. 잘라 낸 볏짚 밑동이 삐죽 솟은 바닥에 물을 대고 차가운 날씨를 기다리면 널따란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졌었다.
간혹 스케이트를 타는 어른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방학을 맞은 동네 아이들이 썰매를 타는 신 나는 놀이터가 되었다.
삼촌은 긴 꼬챙이의 끝에 뾰족한 못을 박은 썰매 손잡이도 만들어 주었지만 필자는 그걸 사용하지는 않았고 삼촌이 줄을 매어 끌어주는 썰매 타기를 좋아했다.
나무 썰매에 앉아 삼촌이 마구 달리며 끌어주면 스르르 밀려나가던 그 짜릿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이 잊히지 않으며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오늘은 너무 추워서인지 아무도 나와 놀지 않는 빈 얼음 터를 보니 쓸쓸하다.
역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는 모습이 보여야 누군가 만들어 주신 썰매장의 진가가 보일 것 같다.
그래도 몇 명의 아이들이 얼음 덮인 개울에 앉아 노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추운 날 얼음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해서 “애들아, 거기서 뭐하니?”하고 물었다.
“얼음 속에 물고기 있나 보려고요.” 날씨도 추운데 자연 속에서 노는 아이들이 귀엽기도 하고 필자 오지랖에 미소가 떠오른다. 개천이 깨끗해지면서 물속에 작은 고기떼가 많이 생겼다. 그래도 이렇게 추운데 물고기들이 그대로 있는지 필자도 궁금하긴 하다.
이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개울에서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놀고 있는 사이좋은 청둥오리 한 쌍을 볼 수 있다. 꼭 청둥오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록색과 여러 색이 섞여서 반짝거리는 털을 가졌으니 아마 청둥오리일 것이다.
지난번에 보였던 이 오리 부부도 오늘은 너무 추워서 나오지 않았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은 도심 속 산책로에서 그림 같은 멋진 풍경을 볼 수도 있는데 무리 지어 있는 갈색의 억새풀 숲이다.
이곳을 보면 어디 아주 먼 곳에 여행 와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빠른 걸음으로 산책로를 왕복하니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다음번엔 얼음판에서 신 나게 노는 썰매 타는 아이들도 보고 싶고 개울물 속에서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노는 청둥오리도 보고 싶다.
필자 어린 날 삼촌이 끌어주던 나무썰매를 씽씽타며 즐거워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어 본다. 차가운 겨울날의 하루이다.
‘걷기’는 격한 운동이 부담스러운 중·장년에게 알맞은 운동 방법 중 하나다. 걷기를 생활화하는 이들을 보면 지하철이나 버스 두세 정거장 정도 거리를 걸으며 건강을 챙긴다. 대중교통 노선을 따라가면 대개 평지를 걷게 되지만, ‘서리풀공원’ 산책로를 이용하면 맑은 공기를 쐬며 서초구의 중심을 가로지를 수 있다.
서초동(瑞草洞)은 과거 서리풀(벼)이 무성했다 하여 붙여진 동명(洞名)이다. ‘서리풀공원’은 2호선 방배역에서 서울고속터미널(강남)까지 서초구 중심을 가로지르는 산지형 공원으로 걷기에 부담 없고 볼거리가 많아 남녀노소에게 두루 권할 만하다. 방배역 4번 출구로 나와 청권사 돌담길을 따라 돌면 입구를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서 시작해 청권사쉼터, 서리풀다리, 몽마르뜨공원, 누에다리를 거치면 1시간 30분 내외로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다(약 3km 거리). 시간이 넉넉하다면 꽃과 나무를 구경하거나 할머니·할아버지 쉼터, 맨발로 걷는 길(황톳길) 등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1. 청권사(淸權祠, 효령대군 이보 묘역)
조선 제3대 태종의 둘째 아들이며 제4대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과 그의 부인인 예성부부인 해주 정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묘소가 있다. 입구(외삼문)로 들어서면 마당 왼편의 작은 연못이 눈에 띈다. 조금 더 걸어가면 1902년에 제작한 효령대군의 신도비를 찾을 수 있다. 입구 오른편으로 난 작은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묘소를 기점으로 한 바퀴 돌면 짧게나마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평일 10~16시 무료 개방)
2. 서리풀공원·서리풀다리
서리풀공원 내의 서리풀다리는 도로로 단절된 산책로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북쪽으로는 한강을, 남쪽으로는 우면산을 이어주는 짧은 다리다. 서리풀다리를 기점으로 방배역 방향으로는 공기가 맑은 서리풀공원 산책로를 즐길 수 있고, 고속터미널 방향으로는 몽마르뜨공원과 누에다리를 만날 수 있다. 경사가 높지 않은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 점이 이곳만의 특징이다. 길이 넓고, 쉴 수 있는 의자와 쉼터가 곳곳에 있어 어린 손주와 함께 걷기에도 무리 없다.
3. 몽마르뜨공원
프랑스인이 많이 거주하는 서래마을 진입로를 ‘몽마르뜨길’이라 부르는데, 그 인근에 자리 잡게 되면서 ‘몽마르뜨공원’이 됐다. 원래는 아카시아나무가 우거진 야산이었는데, 지난 2000년 지역 배수지 공사를 시행하면서 주민들을 위한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넓은 잔디밭을 둘러보다 보면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토끼를 발견할 수 있다. 귀여운 토끼를 보기 위해 아이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4. 누에다리
누에다리는 낮보다는 해가 진 이후에 찾아갈 것을 권한다. 다리에서 바라보는 야경이 꽤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몽마르뜨공원에서 나와 누에다리 왼쪽을 바라보면 조명으로 반짝이는 남산서울타워가 보인다. 같은 위치에서 왼쪽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이, 오른쪽으로는 서울성모병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다리 아래 도로로 시선을 옮기면 자동차 전조등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